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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창세기 강해)1강. 창세전 언약 (엡 1:3-10 / 창 1:1)

by coroa 2022. 6. 30.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강. 창세전 언약 (엡 1:3-10 / 창 1:1)

-.정낙원 목사

 

창 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엡 1:3-10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창세기를 강해하기 전에 이 창세기는 어디에서 기인이 된 것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본문을 강해하기 전에 창세기를 있게 한 그 원인인 창세전 언약부터 먼저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있기 전에 창세전 언약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창세기를 알기 전에 먼저 창세전 언약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창세기 1,2,3장의 구조와 내용들을 올바르게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은 모든 성경을 여는 키와 같습니다.

 

창세전 언약은 집을 짓기 위한 설계도와도 같습니다.

창세전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면 소경이 코끼리 다리 더듬기처럼 되고 맙니다.

그럼 성경은 통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보지 못하고 각각 단편적 해석을 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은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자신의 이야기로 자세히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눅 24:27절.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요 5: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럼 성경 어디를 펴도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이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기록이 된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간섭하고 계신지를 말해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놀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창세전 언약을 이루고자 오셨습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 해석을 창세전 언약으로부터 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펴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 물어야 합니다.

천지를 왜 창조하셨습니까? 라고,,,

 

성경 속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 답을 찾아야 나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나도 만물 속에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왜 창조 하셨을까요?

어떤 목적이 있어서입니다.

아무런 이유와 목적 없이 창조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럼 인간들 속에도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창의성입니다.

 

인간의 창의성은 하나님의 창조성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성이 피조물을 만들었듯이,

인간들도 창의성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성과 인간들의 창의성의 차이는 창조의 모습 속에서 다르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로 창조하시지만,

인간들은 유(有)에서 유(有)로 만들어내는 일을 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과학이라고 합니다.

과학은 인간들의 창의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과학으로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만들어서 문명을 발달시켜왔습니다.

물건이 만들어진 바탕에는 원인과 목적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물건을 만든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무런 이유 없이 물건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 필요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들이 이러 할진데,,,

하물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야 더욱 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창조(創造)라는 말 자체가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천지창조를 말하기 전에 그 원인을 추적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존재하게 된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드셨습니다.

그럼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왜 만들었나요?

 

나는 누구인가요?

나는 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가요?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가요? 를 물어야 합니다.

 

내 존재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나를 존재케 하는 원인으로부터 나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럼 나라는 존재의 이유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감사하게도 성경은 이러한 이유를 소상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분명한 목적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2:8절.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 43: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만물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만물 밖에 계심이 됩니다.

만물 밖을 태초 또는 창세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름이 없습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분은 이름이 필요가 없습니다.

 

이름이란? 피조물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지어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지어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고 하십니다.

여호와는 천지창조를 하시고 역사 속에서 일을 하실 때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호와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이 없는 하나님 나라에 계시던 하나님이 이름이 있는 피조 세계에 오신 것입니다.

왜 오셨을까요?

뭔가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구원이란? 

어디에서 건져낸다는 뜻입니다.

그릇된 것을 올바로 잡는다는 것과,

원래의 상태로 회복을 시킨다는 뜻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죄에서 건짐 받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그리스도로 나타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져주실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일을 하셨고 신약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일을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시는 모든 일들이 구원하는 일들입니다.

 

구원 속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 백성들은 죄에서 건져지는 일을 당하지만,

자기 백성들을 사로잡고 있던 죄의 세력들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구원주이면서 심판주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주와 심판주가 되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이 백성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내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

 

여호와라고 이름 하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사람을 창조 하셨다고 합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떤 자들이 하나님께 돌아갈 찬송을 도적질을 하고 있고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가로채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돌이키는 일을 하신다고 합니다.

원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원래의 자리가 어디인가요?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죄가 그 자리에서 이탈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자기백성들을 본래의 자리로 들이키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 되려면 먼저 이탈됨이 있어야 합니다.

이탈 되었다는 것은 목적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조 목적에서 이탈 된 것을 죄라고 합니다.

 

죄를 “하마르티아” 라고 하는데,

이는 “과녁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과녁에서 벗어난 상태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원래의 자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 돌리는 자리입니다.

이탈된 자리는 자기를 찬송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고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된 자들이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나를 위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위한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궤적이 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 받은 자들이 살아가는 천국을 이야기할 때 만물이 세세토록 하나님에게 찬송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 아래 놓였습니다.

죄 아래 놓였다는 것은 창조 목적에서 이탈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고 있고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를 바로 잡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죄 아래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나의 찬송을 불렀고,

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무엇을 하든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 찾아진바가 되었습니다.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나니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고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노래를 부르고 내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인생을 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6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 되었다고 합니다.

그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사야가 말한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예수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주인으로 와 계신 것입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구원 받기 전에는 내가 나의 주인이었는데,

구원을 받고 난 후에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는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원인이 바로 창세전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펼쳐가는 창조의 그림은 창세전 언약이라는 그림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드라마의 시나리오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언약을 펼쳐가는 것을 드라마로 비유하는 것은 드라마가 우연히 즉흥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사전에 검증이 된 시나리오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 질서 속에서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으로 일어나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창세전에 다 계획이 된 것입니다.

 

한 편의 드라마는 사전에 준비가 된 시나리오로 만들어집니다.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 하나 하나에서부터 환경과 세트까지 시나리오에 적힌 대로 합니다.

배우들은 철저히 시나리오대로 연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배우는 대사 하나에서 행동 하나 하나까지 표정과 감정까지 시나리오에 적힌 대로 하게 됩니다.

드라마 속에서 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짐에서부터 심지어 먹고 마시고 잠자고 옷 입은 것까지 시나리오대로 합니다.

 

감독은 드라마 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자기의 뜻으로 연출을 해 가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될 때 오케이를 합니다.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 반복을 하게 됩니다.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는 자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배우는 철저하게 감독의 생각을 가지고 연기를 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감독이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를 찍고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서 펼쳐가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대하드라마를 찍어 가는데 캐스팅된 배우들입니다.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는 다 각자 맡은 역할들이 있습니다.

역할이 없는 배우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드라마의 내용을 풀어 가는데 필요해서 출연을 시킨 것입니다.

 

이 세상 역사도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감독이 되어서 다스려 가십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든 것들 속에는 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간섭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유기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버려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난 인간들은 각자의 드라마를 써 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드라마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선악의 구도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 안에 새겨진 선악의 법으로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만든 드라마도 선악의 구도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선악 구도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구분이 되어 집니다.

 

죄 아래서 난 인간은 선악의 법 아래서 출생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내편 네편으로 나누는 일을 합니다.

나를 지지하는 사람은 내 편으로 여기고 이들은 선하다고 하고,

나를 지지 하지 않는 상대편은 악이라는 구도로 만들어서 배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항상 대립합니다.

선악의 법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세상에서는 항상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념과 사상으로도 나타나고 종교와 신앙으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곳에는 항상 내 편이냐! 네 편이냐! 로 갈라지는 편 가름의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써내려가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는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선악 구도가 짜여 있습니다.

예수에게 속한 자들은 선이고,

예수의 반대편에 속한 자는 악입니다.

 

세상에는 두 민족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와 속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걸 예수님은 너희와 저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자는 너희이고,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는 저희입니다.

 

아담이라는 한 아버지 속에서 성질이 다른 두 민족이 태어납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성질이 다르다는 것은 서로 하나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두 민족 간에는 항상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 하였습니다.

 

롬 9:21절.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토기장이는 용도에 따라 그릇을 만듭니다.

어떤 그릇은 귀히 쓸 것으로 만들고 어떤 그릇은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만들어진 그릇에다 필요한 것을 담습니다.

 

토기장이가 만든 물건은 토기장이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그릇이 다 귀한 것입니다.

토기장이 입장에서는 귀하고 천함이 없습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난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다 귀한 것입니다.

집안에는 쓰레기통도 있고 찬장도 있습니다.

찬장에는 아름다운 그릇들을 진열을 하고, 쓰레기통에는 버릴 것들을 담아 놓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도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천국은 예쁜 그릇들과 같은 성도들이 가고,

지옥은 쓰레기와 같은 자들이 갑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천국도 지옥도 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릇 입장에서 보면 차별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하고 다름의 그릇을 보면 시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릇들은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으로 구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바울이 토기장이 비유를 하는 것은 따지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나는 저들과 다르냐고 항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기장이가 두 가지 그릇을 만들어서 사용할 권리가 없느냐고 일갈하는 것입니다.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릇은 모든 인간들을 말합니다.

이를 모세와 바로를 들어서 이야기 합니다.

모세는 귀히 쓸 그릇이고 바로는 천히 쓸 그릇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백성을 말하고 바로는 마귀의 백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는 긍휼을 담고 바로에게는 진노를 담았습니다.

긍휼을 담은 모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토를 달지 않는데,

진노를 담은 바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토를 답니다.

 

긍휼이 담긴 백성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아멘’으로 화답을 하는데,

진노가 담긴 백성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아니요’ 라고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그릇을 토기장이가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두 그릇을 가지고 일을 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릇은 인간들을 말합니다.

그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인이나 선인이나 모두 하나님이 사용하는 그릇들인 것입니다.

악인이나 선인이나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필요한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펼쳐가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에는 마귀도 필요하고 무당도 필요하고 불신자도 필요하고 거짓 선지자도 필요한 것입니다.

 

드라마를 찍는 감독은 주인공과 악당을 필요 적절하게 사용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선한 역할로 캐스팅이 되었고,

어떤 사람은 악한 역할로 캐스팅이 되었습니다.

감독은 선한 자와 악당을 가지고 시나리오의 내용들을 드라마로 풀어가는 것입니다.

드라마를 확대하면 이 세상 역사가 됩니다.

 

드라마는 반드시 선악의 구도로 전개가 됩니다.

주인공이 있으면 조연도 있고 엑스트라도 있습니다.

주인공을 드러내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악당도 필요합니다.

악당이 악당 노릇을 잘해주어야 드라마가 살아납니다.

 

악당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드라마를 찍는 감독들은 주인공에 걸 맞는 비중으로 악당을 캐스팅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마귀다워야지 마귀가 말랑말랑하면 안 됩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나요?

아니면 엑스트라가 되고 싶나요?

우린 모두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럼 묻습니다.

드라마 속에 주인공이 편하던가요?

숱한 고난과 역경을 겪어가던가요?

 

엄청난 아픔들을 겪어갑니다.

편안한 주인공은 없습니다.

수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욕도 많이 먹고,

모함도 많이 받고,

배신도 많이 당하고,

죽을 고비도 엄청 넘기게 됩니다.

 

그런데 그 끝이 어떤가요?

해피엔딩이지요.

주인공은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나들어도 끝까지 살아남아서 웃게 되어 있습니다.

 

중간에 주인공이 죽는 드라마는 없습니다.

주인공은 칠전팔기(七顚八起)를 합니다.

마지막에는 웃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들이 만드는 드라마이고, 하나님이 만드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입니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대리하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주인공들인 것입니다.

 

주인공이기 때문에 예수 믿고 사는 게 힘이 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웃게 되어 있으니까 힘들고 어렵더라도 끝까지 견디고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열면 첫 마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는 피조물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피조물이 없으면 창조주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하심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서로를 드러내는 짝이 되는 셈입니다.

마치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듯이 창조주에게서 피조물이 나온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어서 살아가야 하듯이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나가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의 완성지점입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창조가 나중입니다.

 

성경 속에 계시 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은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창세전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먼저 하시고 그 언약의 내용들은 나중에 이루어 가십니다.

이걸 우리의 구원으로 말하면 언약이 먼저이고 우리의 구원은 나중인 것입니다.

우리는 언약에 종속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언약이 없었으면 우리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존재하는 근원은 창세전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난 후에 너희가 어떻게 이 세상에 왔으며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이게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여 생겨난 민족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먼저이고 이스라엘 민족이 나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브라함 언약을 근거로 다스려가셨습니다.

이 사실을 출애굽 한 후 광야를 통해서 배워간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전 언약에서 나온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먼저이고 아브라함 언약이 나중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원본이고 아브라함 언약은 복사본인 것입니다.

 

그럼 원본인 창세전 언약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10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에베소서를 씁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에다가 만세로부터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비밀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그 비밀이 뭔고 하니 창세전에 하신 언약입니다.

그 언약을 교회를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내용은 성경 전체를 축약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창세전 언약을 말하고,

2장에서는 성도의 구원을 말하고,

3장에서는 하나님이 만세로부터 감추었던 비밀을 교회를 통해서 알려주신다고 하고,

4장 이후에서는 구원 받은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1장에서 창세전 언약을 보았습니다.

너무도 황홀한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합니다.

 

엡 1: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찬송하리로다!

바울은 먼저 찬송을 하고 시작합니다.

찬송의 내용이 뭔고 하니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하늘에 신령(神靈)한 복입니다.

하늘에 신령한 복은 누구에게 필요한 것이냐 하면 하늘에 속한 자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늘에 속한 자들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땅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어서 하늘로 데리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언제 계획 하셨는가 하면 창세전입니다.

그래서 4절에 “곧 창세전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전이란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을 말합니다.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을 말합니다.

 

그럼 창세전에 어떤 계획을 세우셨는지를 봅시다.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진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사함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그의 나라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됩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간단한 구조로 말하면 이러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자기 백성들의 죄 값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사함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해 주십니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은 자들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을 합니다.

다섯째, 이 모든 것은 그 기쁘신 뜻대로 창세전에 예정을 하셨습니다.

 

창세전 언약은,

자기 백성들이 먼저 죄 아래서 태어나고,

나중에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고,

구원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그의 나라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수순이 타락에서 예수그리스도로 회복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죄는 우리가 짓고,

그 죄 값은 예수그리스도가 갚으십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는 그 은혜를 감사하게 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을 저질러 놓은 것들을 하나님의 희생으로 되돌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면 우리는 가해자가 되고 하나님은 피해자가 됩니다.

그런데 피해자이신 하나님의 희생에 의해서 가해자가 혜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창세전 언약은 은혜 언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만물의 창조 자체가 은혜의 산물인 것입니다.

만물은 원래 없었습니다.

창세전 언약 때문에 존재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만물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여야 합니다.

그게 만물의 합당한 본분입니다.

없던 자를 있게 하셨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귀한 그릇이든지 천한 그릇이든지 간에 말입니다.

 

이건 마치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고 놀던 사람을 드라마에 출연시켜준 것과도 같습니다.

놀던 사람을 드라마에 캐스팅 한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악역을 맡았든 선한 역을 맡았던 간에 드라마에 출연한 것 자체가 영광이고 감사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라고 했습니다.

토기장이는 자기 필요에 의하여 토기를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그 필요에 따라 사용 되어지는 것 자체가 토기장이에게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각양의 그릇을 만들어서 사용합니다.

밥그릇을 만들어서 밥을 담고,

국그릇을 만들어서는 국을 담고,

간장 그릇을 만들어서는 간장을 담습니다.

 

간장 그릇에 밥을 담지 않고,

밥그릇에 간장을 담지 않습니다.

그럼 간장 그릇에 간장을 담는다고 해서 간장 그릇이 나는 왜 밥을 담지 않고 간장을 담느냐고 따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진다는 것은 주인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틀렸고 자신은 옳다는 것입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으신 분을 틀렸다고 한다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죄가 뭐냐?

자기 지위를 벗어난 것입니다.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나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을 포도원 품꾼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천국은 장터에 놀고 있던 자들을 포도원으로 부르신 것과 같다고 합니다.

모두가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부르십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 일찍 부르고,

어떤 사람은 점심 때 부르고,

어떤 사람은 저녁 늦게 부릅니다.

 

그리고는 각자에게 계약한대로 삯을 줍니다.

늦게 온 자로부터해서 삯을 줍니다.

약속대로 모두가 동일하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온 자들이 주인에게 항의합니다.

아침 일찍 온 자 하고 저녁에 온 자 하고 동일한 삯을 준다는 것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이 자신은 계약대로 해주었는데 왜 따지냐고 합니다.

계약대로 한 것이 무엇이 틀렸느냐고 합니다.

 

주인에게 부당하다고 따지는 자는 무엇을 근거로 따집니까?

자기의 노동력입니다.

일찍 일한 자신의 노동력과 저녁에 온 사람의 노동력은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일을 많이 했고 저 사람은 일을 적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일당이 똑 같으냐고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처사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따지는 자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르심입니다.

놀던 자를 불러 주었다는 주인의 은혜성입니다.

 

주인은 노동력을 위하여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침 일찍 온 자나 저녁에 온 자를 동등하게 대하는 것으로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노동력에 따라 삯을 준다고 한다면 아침 일찍 온 자에게는 많이 주고 저녁 늦게 온 자에게는 적게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아침 일찍 온 자나 저녁 늦게 온 자나 동등하게 줍니다.

이것은 그들의 수고에 대한 삯이 아닌 것입니다.

노동력에 대한 값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놀고 있던 자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그런데 저녁에 온 자는 그 은혜를 알고 있는데 아침 일찍 온 자는 은혜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악이고 죄입니다.

 

인간들이 불평하는 것이 이러한 것들 때문입니다.

왜 저 사람은 잘 사는데 나는 못 사느냐 입니다.

왜 저 사람하고 나는 다르냐 입니다.

누구는 무를 먹고 누구는 인삼을 먹느냐 입니다.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 모양이냐 입니다.

저 놈은 빈둥거리고 노는데 왜 잘 살아야 하느냐 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노동의 댓가로 따집니다.

 

이러한 사고가 힘으로 자기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사회주의를 낳았습니다.

노동은 우리가 하는데 왜 사장이 돈을 다 갖느냐 입니다.

그건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의 권리를 찾아야 하겠다고 하면서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찍 포도원에 들어간 자들이 주인에게 따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바로 죄인의 사상이고 마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불평하는 것은 자기 의 때문입니다.

잘난 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따지는 것입니다.

탕자 비유에서 큰 아들처럼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일을 하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하는 처사를 못 마땅히 여기고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이 비유를 누구에게 합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살았다고 하는 자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신앙생활 잘한다고 하는 자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아침 일찍 들어가서 일한 자들은 바리새인들을 상징하고,

저녁 늦게 들어간 자들은 세리와 창기들을 뜻합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화가 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말씀대로 산 바리새인이나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산 세리와 창기들을 동일하게 대우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봅시다.

 

눅 18:9-14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 비유는 자기를 의롭다고 하는 자들을 책망하는 비유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당당합니다.

 

기도를 들어보세요.

첫 마디가 하나님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행한 일들을 열거합니다.

손을 들고 당당하게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리와 창기들을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나는 죄인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일함을 들고 나왔고, 세리는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는 듣지 않고 세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리새인은 자기의 노동력으로 나아왔고,

세리는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긍휼의 마음으로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단 하나입니다.

왜 자기들의 의(노동력)를 인정해 주지 않느냐 입니다.

왜 열심히 일한 자기들을 인정해 주지 않느냐 입니다.

예수님은 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세리와 창기들과 놀고 있느냐 입니다.

 

세리와 창기들과 자기들을 동등하게 취급을 하니까 싫은 것입니다.

뿔따구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는 틀렸고 자기는 옳다고 하여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이건 이 시대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오래 된 분과 금방 등록하신 분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금방 오신 분들과 어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오래 된 사람들이 서운함을 느끼고 이러 저리한 핑계로 각을 세우는 것입니다.

급기야 파당을 지어서 교회를 어지럽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자기 공로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교회를 위하여 투자한 것이 얼마인데,

내 수고가 얼마인데,

피와 땀과 돈을 바친 것이 얼마인데 금방 온 것들과 동급으로 취급하느냐 입니다.

 

교회는 은혜로 세워져야 하는데 이들은 법으로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 차별을 두고 우열과 서열을 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건 부르심에 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들입니다.

 

천국의 비유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천국은 은혜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나라입니다.

 

그럼 포도원 품꾼 중에서 누가 더 감사할까요?

아침 일찍 온 자입니까?

저녁 늦게 온 자입니까?  

저녁 늦게 온 자입니다.  

 

왜 저녁 늦게 온 자가 감사할까요?

저녁 늦게 온 자는 자기가 받은 삯은 노동력의 댓가로 여기지 않습니다.

주인의 은혜로 여깁니다.

그래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놀던 자였습니다.

없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

그것이 악한 역이든 선한 역이든,

그것이 일찍 부름을 입었든지 늦게 부름을 입었든지,,

 

우린 없던 자였습니다.

우린 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만드시고 부르시고 캐스팅 해 주었습니다.

그럼 감사하여야 합니다.

내 배역이 왜 이러느냐고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따진다는 것은 주인이 틀렸다고 지적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따지고 지적질 하는 그 놈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자는 큰 걸 주어도 감사치 않고 적은 걸 주어도 감사치 못합니다.

이런 자는 천국에 넣어 주어도 감사치 못합니다.

거기서도 불평을 합니다.

 

반면에 감사를 아는 자는 지옥에 넣어도 감사를 합니다.

이 모습이 이 세상 속에서 고난과 환란 속에서도 감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것은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들은 고난 속에서도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지하 감옥에서 애매히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당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새기는 일들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고난은 모두가 주께서 자기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새기는 일을 하셨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있어도 감사하고 없어도 감사합니다.

많아도 감사하고 적어도 감사를 합니다.

크고 작음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높고 낮음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구원해 주신 그 은혜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게 됩니다.

 

신자는 범사 속에 감사하는 자이고,

불신자는 범사 속에 불평하는 자입니다.

동일한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는 자와 불평하는 자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자는 감사하고, 법으로 사는 자는 불평합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입니다.

같은 놈끼리 있어야 편합니다.

조폭들을 조폭들끼리 있어야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들은 감사하는 자들끼리 살게 하시고,

불평하는 자들은 불평하는 자들끼리 살게 하십니다.

감사하는 자들이 살아가는 곳을 천국이라고 하고,

불평하는 자들이 살아가는 곳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감사하는 자들은 감사하는 자들끼리 살기 때문에 천국이고,

불평하는 자들은 불평하는 자들끼리 살기 때문에 그곳 또한 그들에게는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 있어야 하는 자가 천국에 있으면 그곳이 지옥입니다.

지옥에 있어야 하는 자는 지옥에 있어야 편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자기에게 맞는 곳으로 판단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추위를 좋아하는 사람을 더운 곳에 두면 그곳은 지옥이라고 하고,

반대로 더위를 좋아하는 사람을 추운 곳에 두면 그곳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추위를 좋아하는 사람은 추운 곳이 천국이고,

더위를 좋아하는 사람은 더운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합당한 곳으로 들여보내시는 것입니다.

 

지옥이 좋은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고,

천국이 좋은 사람은 천국으로 보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에 사는 자들에게나 지옥에 사는 자들에게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보십시오.

지옥에 있는 부자에게도 자비로운 하나님이고,

천국에 있는 거지 나사로에게도 자비로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자비로운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고 오로지 감사 할 것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받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것 뿐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환경과 나쁜 환경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좋은 환경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속에 탐심으로 가득한 사람은 좋은 환경을 주어도 불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돈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고, 돈이 없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과 불행은 외부의 조건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본성의 의한 것입니다.

 

긍휼의 그릇으로 지음을 받은 성도는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진노의 그릇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좋은 환경에서도 불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쌓은 선에서 감사를 토해내고,

쌓은 악에서 불평을 토해내게 되어 있습니다.

속에 선이 쌓여 있으면 감사가 나오고,

속에 악이 쌓여 있으면 불평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이 감사이고 찬송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이 불평이고 원망입니다.

이것은 온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성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교회 안에서 동일한 말씀을 듣고서도 다르게 해석을 하고,

동일한 조건 속에서도 감사하는 사람과 불평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께 감사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죽은 세상에서 산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하십니다.

 

이걸 천지 창조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장에서 천지가 창조 된 세상의 모습이 흑암과 혼돈과 공허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타락을 말합니다.

죄로 인하여 죽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처음 창조된 세상은 죽은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왜 죽은 세상을 만드셨을까요?

능력이 없어서인가요?

이는 창세전 언약이 죽은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풀어가는 드라마의 첫 장면이 죽음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창조주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을 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서의 창조 속의 구원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희생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 창조의 첫 장면을 죽음이라는 바다 위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는 것으로 그려진 것입니다.

 

죽은 세상 속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는 것은 그 속에 자기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아서 영생받기로 작정이 된 자들입니다.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하나님의 신이 역사 속에서 일을 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성령으로 잉태케 하여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찾으십니다.

이것을 목자가 잃은 양을 찾는 것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잃은 양은 원래 주인의 것이었는데 잠시 동안 잃어버려진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자기 양을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자기 양은 주인의 음성을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목자가 양 앞에서 각각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르면 자기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나서게 됩니다.

이렇게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는 자들을 일컬어 이는 육정으로나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믿습니다.

누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인가요?

이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라도 예수를 주라 시인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 홀로 하시는 은혜 덩어리입니다.

 

창세전 언약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세우셨고,

그 언약을 우리 가운데 심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때가 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 안에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물론 장차 그 나라로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믿기 싫으니 가라고 해서 떠나가시는 분도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십시오.

교인들이 다 예수님을 문 밖으로 쫓아냈지만 우리 예수님은 떠나가시지 않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 답니다.

자존심도 없이,,,

 

우린 예수를 떠날 수 있어도 예수님은 절대로 우릴 떠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당신께서 이루신 구원을 지켜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실패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오늘도 우리를 지켜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9-34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고 하십니다.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미리 아심은 창세전이고,

부르심은 역사 세계이고,

의롭다 하심은 현재이고,

영화롭게 하심은 장차입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자들을 부르시고 예수가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간섭해 가시고 있습니다.

이는 마귀의 시험이 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시험에서 반드시 이기게 하여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만유를 지으신 분이 가장 크시므로 누구든지 그 손에서 자기 백성들을 빼앗을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일을 행하는 여호와이시고 그 일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어떤 것으로도 성도의 구원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부터 치밀한 계획 속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집니다.

 

천부께서 심은 것은 하나라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들은 다 뽑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대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보십시오.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람을 찾아 가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복의 조상으로 삼아 주겠다고 언약을 하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복의 민족으로 삼겠다는 뜻입니다.

 

이 언약이 바로 창세전 언약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을 삼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그 내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십니다.

네 후손이 이방에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은 하늘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시곤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곤 저기가 너와 네 후손이 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그 아들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 생활을 하면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땅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맺은 창세전 언약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을 맺습니다.

죄 아래 있는 자들을 그 아들이 가서 구원을 해서 하나님 나라로 데리고 온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이방나라로 내려가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언약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언약에 따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모세를 보내어서 그들을 출애굽을 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하는 자들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어린 양의 피를 바릅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습니다.

 

출애굽 하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아브라함 언약에 따라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린 양의 피를 바름으로서 인간의 혈통을 끊어버리시고 어린 양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방식으로 구원을 해 내셨습니다.

 

너희는 죽었다가 살아난 민족이라는 의미로 죽음을 상징하는 홍해바다를 건너게 합니다.

홍해를 건너면서 아브라함의 혈통을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어린 양 안에서 태어난 새로운 민족이 되었습니다.

 

출애굽 때 아브라함 후손을 살리기 위하여 희생당한 그 어린 양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그리스도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던 자들도 창세전 언약인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하던 자들을 놓아 주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2장을 봅시다.

 

히 2:14-16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모두를 놓아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아브라함의 후손만 놓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창세전 언약대로 예수그리스도의 언약 안에 있는 자들만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는 두 언약이 있습니다.

 

죄 아래 가두어지는 언약과 죄에서 건져지는 언약이 있습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두 과실로 나타났습니다.

먹으면 죽는 과실과 먹으면 영생하는 과실입니다.

 

두 과실은 두 언약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율법으로서 죄 아래 가두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은혜로서 죄에서 건짐 받는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이지만,

새 언약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옛 언약 아래서 드려지는 짐승의 피는 장차 예수그리스도께서 흘리실 피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짐승의 제사로는 온전케 하지 못하고 다만 죄를 기억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1-7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입니다.

참 형상이 아닙니다.

그럼 율법 아래서 드려지는 제사는 참 제사가 아니고 참을 보여주는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로는 온전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온전케 되는 제사는 한 몸으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아버지에게 두루마리 책에 기록이 된 한 몸이 왔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창세전에 약속하신 그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의 피를 힘입고 나아오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두 언약 속에는 두 의가 있습니다.

 

옛 언약 속에는 율법으로 난 의가 있고,

새 언약 속에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가 있습니다.

 

율법으로 난 의를 붙잡으면 죽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난 의를 붙잡으면 삽니다.

 

율법으로 난 의는 짐승의 제사로 난 의이고,

믿음으로 난 의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난 의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이전에는 율법으로 난 의를 붙잡고 살았습니다.

율법으로 난 의로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율법으로 난 의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로 살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로는 살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다고 가는 곳마다 외칩니다.

자기 동족들에게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한 의를 주셨는데 예수그리스도로 난 의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난 의만이 살 길이라고 합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 후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습니다.

그동안 바울의 눈에는 율법의 비늘이 씌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의로 남을 판단하고 죽이는 일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까,

율법 아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율법 아래 있을 때는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합니다.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까, 비로소 창세전 언약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 동안 짐승의 피로 가려졌던 눈에 비늘이 떨어지니까,

짐승의 피 뒤에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있는 것이 보여진 것입니다.

짐승의 피는 가짜이고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진짜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의는 그림자이지 실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실상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구원하시기로 약속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창세전 언약인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으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애끓는 심정으로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회개하라고 합니다.

회개란? 돌이키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럼 율법이 죄냐?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길잡이입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붙잡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누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느냐?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가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먼저 율법 아래 가두십니다.

 

가둔 것은 빼내기 위함입니다.

 

갈 4:1-7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유업을 이을 자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한 때까지 종으로 두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한 때 까지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였던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이를 정한 때까지 겪게 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서 율법 아래서 속량케 해 주십니다.

 

이게 바울의 다메섹 사건입니다.

모든 성도에게는 이 다메섹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아들들에게 그 아들의 영을 보내서 종애서 아들의 자리로 옮겨 주십니다.

이를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짐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종이고,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아들입니다.

종은 유업이 없습니다.

유업은 오직 아들에게만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법으로 대하시고 은혜 아래 있는 자에게는 은혜로 대하십니다.

율법에서 은혜 아래로 옮겨진 자는 더 이상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하고 살아갑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자들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십니다.

그 나라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지금은 교회에서 미리 맛보기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창세전 언약의 끝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서 예수그리스도 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창세전 언약의 마지막 수순인 하나님 나라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날이 눈앞으로 한발자국씩 성큼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소망하면서 잘 이겨내십시오.

이기는 자들은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아무나 이기지 못합니다.

오직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여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아멘.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오직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창세전에 감추었던 그 비밀들을 깨닫게 해 주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 수 있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창세전 언약이 믿어지고 그 언약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 미암을 빼앗기지 말게 하시고 날마다 그 나라를 소망하면서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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