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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29강. 두 가지 옷 (창 3:6-21)

by coroa 2021. 2. 16.

 

마가 13: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29강. 두 가지 옷 (창 3:6-21).-

-.정낙원 목사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그 자체로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입장에서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창조 하신 것이므로 피조물인 인간이 손을 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의란? 옳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상태를 말합니다.

처음 창조가 된 아담과 하와도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에 자신들의 생각을 가미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에는 발가벗고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발가벗음이 부끄러움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악과가 부끄러움을 몰고 온 것입니다.

 

발가벗음이 부끄러움으로 보이자 자기들 방식으로 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옷입니다.

선악과가 옷을 해 입게 만든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발가벗음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이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결국 선악과가 다른 눈을 몰고 온 것입니다.

 

창 3: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이 여자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되어서 선악을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고유 권한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게 되면 그 권한을 인간들도 행사 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도 신이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도 심판주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죄라고 합니다.

 

선악을 아는 일이란? 심판하는 권세를 말합니다.

 

심판은 창조주만이 행사 할 수가 있습니다.

창조주만이 옳고 그름을 판단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토기를 만든 토기장이만이 그 토기의 상태를 올 바르게 구분 할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피조물은 판단을 받아야 할 존재이지 판단할 존재가 아닙니다.

피조 세계에서 일어나는 선악의 판단은 오직 피조물의 주인이신 창조주만이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선악을 판단한다는 것은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선악과가 마치 훈장님이 혼자서 몰래 먹는 꿀단지와도 같은 것이라서가 아닙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판하는 일은 피조물이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건 어린아이가 폭탄을 가지고 노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선악과도 피조물에게는 치명적인 독(毒)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선악과는 그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과와 선악과를 짝으로 두신 것입니다.

서로를 드러내는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런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한다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금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입장에 서게 되면 선악과조차도 유익하게 사용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의사가 마약을 생명을 살리는데 유익하게 사용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약 자체는 독도 아니고 약도 아닙니다.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생명을 죽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마약을 사용하면 죽이는 독이 되지만 의사가 마약을 사용하면 살리는 약이 됩니다.

의사에게 있어 마약은 환자를 살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약(藥)일 뿐입니다.

 

독(毒)과 약(藥)은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독도 약이 될 수가 있고,

어떤 이에게는 약도 독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과가 다 선일 수 없고,

선악과가 다 악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선악과도 선이 되지만,

범죄한 인간에게는 생명과도 악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주가 되기도 하시지만 심판주가 되시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얻지만,

어떤 이는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를 떡을 얻기 위하여 따르고,

어떤 이는 예수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따릅니다.

 

어떤 이는 예수를 이용해서 이 세상에서의 입신양명을 이루고자 따르고,

어떤 이는 예수를 통해서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나라로 나아가고자 따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결과는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예수님은 선악과가 되기도 하고 생명과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따라서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예수님은 선악과처럼 죽이는 독일 수가 있고,

어떤 이에게는 예수님은 생명과처럼 영생을 얻는 약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알고 예수그리스도는 어떤 이에게는 멸망의 빙거로서 사망의 향기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구원의 빙거로서 생명의 향기가 되기도 한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속성이 전혀 다른 두 과실을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생명과는 먹으면 영생하는 속성을 가졌고,

선악과는 먹으면 죽게 되는 속성을 가졌습니다.

 

에덴동산의 두 과실은 두 예수와도 같습니다.

 

죽이는 예수가 있고,

살리는 예수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 때문에 죽고,

어떤 이는 예수 때문에 살게 됩니다.

 

두 과실은 두 언약과도 같습니다.

 

죄 아래 가두는 언약이 있고,

죄에서 건져내는 언약이 있습니다.

 

죄 아래 가두어서 죽이는 언약을 율법이라고 하고,

죄에서 건져내어 살리는 언약을 은혜라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에는 죽이는 언약과 살리는 언약 두 언약이 있습니다.

 

율법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은혜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선악과는 율법과 같고,

생명과는 은혜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두 언약으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율법도 복음이고 은혜도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는 천국의 서기관들처럼 옛 것과 새 것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유용하게 사용하면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복음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선악과와 생명과를 선으로 사용을 하십니다.

그러나 갓 지어진 아담에게는 선악과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선악과를 먹게 되면 피조물 입장에서 선악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 입장에서 보면 창조주가 하는 일이 틀려 보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발가벗음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로 나타난 것입니다.

 

왜 동일한 것이 전혀 다름으로 나타났을까요?

이는 서로의 생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이고 아담은 죽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것을 가지고도 전혀 다른 판단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발가벗음을 좋게 보고 계시는데,

선악과를 먹고 난 아담의 눈에는 수치로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본인이 수치라고 여겨지면 가려야 합니다.

그래서 아담은 발가벗음 그대로를 두지 않고 자기들 방식으로 가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화가가 그려 놓은 그림에 관람객이 덧칠을 해 놓은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발가벗게 그렸는데 아담은 치마를 입혀 놓은 것입니다.

 

아담은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이자 옷을 만들어 입고 맙니다.

옷으로 수치를 가리기에 급급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아담의 생각입니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합시다.

과연 수치가 가려진 것일까요?

그건 어디까지나 아담의 생각일 뿐입니다.

 

아담은 자신들이 치마를 해 입으면 수치가 가려지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밀려오는 두려움은 인간들의 행위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아담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속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심령 골수를 다 아시는 분입니다.

 

이건 마치 바리새인들이 겉으로 드러난 율법 몇 자락을 지킨 것을 가지고 의롭다고 거드름을 피우자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인간들 속에 들어 있는 죄의 근본들을 지적하면서 너희는 근본 자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신 것과도 같습니다.

 

아담은 우리가 이렇게 수치를 가렸으니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방식으로는 어림없다고 하시면서 치마를 확 찢어버리십니다.

그리고 흠 없는 짐승을 잡아서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십니다.

최초로 하나님이 죄인에게 입혀주는 옷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성경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옷을 입혀주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는 인류의 시작을 알리는 책이고,

요한계시록은 인류의 끝을 알리는 책입니다.

그런데 옷 입는 것으로 시작을 하여서 옷 입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창 3: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계 19:8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인류의 시작을 여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리고 인류를 마감하는 예수님이 재림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는 신부들에게도 빛나고 흰 세마포 옷을 입혀주십니다.

이렇게 되면 인류 역사는 옷을 입는 역사로 시작해서 옷을 입는 역사로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옷은 죄의 수치를 가리는 것입니다.

이를 의(義)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죄의 수치를 가리움을 입는 것을 일컬어 예수 그리스도로 의(義)의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입혀준 가죽 옷은 흠 없는 짐승의 희생으로 얻어진 옷입니다.

흠 없는 짐승이 아담의 죄를 가리기 위하여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구속사 속에는 두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첫째는, 죄인들의 수치는 하나님이 가려주시는 것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들 쪽에서는 죄를 가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가린다고 한 것이 기껏해야 죄인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가리움은 죄를 규정하시는 하나님 입장에서 되었다고 인정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께서 가려 줄 때만 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해자이고 인간은 가해자입니다.

합의가 되려면 피해자가 만족하여서 되었다고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럼 당연히 피해자가 원하는 합당한 방법으로의 합의가 도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해자인 인간 쪽에서 아무리 좋은 방법을 제시하여도 피해자인 하나님이 싫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아무리 비단 옷으로 가려도 하나님이 싫다고 하면 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해 주어야지만 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수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리움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흠 없는 짐승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어린 양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를 알고 예수님을 일컬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유대인들에게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요 1: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의 외침은 율법 지킴으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된다고 하는데,,

아니야,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어린 양을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 주시는 것이라” 고 알려 준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죽어야 할 아담을 살리기 위해서 대신 흠 없는 짐승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 아들을 어린 양으로 보내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에 수치를 가려주는 옷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갈 3:2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세례는 죽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그리스도가 죽었다는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옛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살았지만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갑니다.

존재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삶의 의미가 나에게서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12제자들이고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생겨난 초대교회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인 것입니다.

 

성도의 소속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합니다.

 

골 3:1-10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이것은 성도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땅의 기운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자와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자는 서로가 입을 옷이 다릅니다.

의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땅에 속한 자는 인간의 의로 살아가고, 하늘에 속한 자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갑니다.

의가 옷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수치를 가려주는 옷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죄인의 수치를 가려주는 옷이 되기 위해 오셨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죄인임을 모르면 허사인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옷의 필요성을 알게 하려면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들추어내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 일을 하나님의 말씀이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롬 7:7-9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너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조문이 담고 있는 죄를 네 안에 품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도적질이 죄라는 규정이 없으면 도적질을 죄로 단죄 할 수가 없습니다.

도적질을 죄로 물으려면 먼저 도적질은 죄라는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바울은 율법이 가입하기 전에는 죄를 죄로 규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규정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죄가 죽었다는 말은 죄로 단죄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양심적으로 보면 분명히 죄가 맞지만 법이 없으니까 죄로 단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것을 죄로 단죄 하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이 오고 나니까 모든 것이 죄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율법이 없었으니까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나와서는 달리 대우하십니다.

율법을 주고 난 이후에는 일거수일투족을 죄로 규정하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왜 애굽에서는 괜찮았는데 여기서는 닦달을 하느냐고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불평을 하니까 왜 불평 하느냐고 죽입니다.

애굽에서는 안 그랬는데 왜 광야에서는 그러느냐고 따지니까

너희는 어린 양의 피로 태어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애굽에서 나온 1 세대들을 다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그 자리에서 새로운 2 세대들을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들을 데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한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광야는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곳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교회로 오기 전에 세상에서 세상 방식으로 살 때 하나님은 간과해 두었습니다.

그 때도 이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일정 기간 유기를 시켜 놓은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애굽에 400년 동안 유기시켜 놓은 것과도 같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의 실존을 낱낱이 까발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옛날에는 술먹고 개구신 짖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런 짖을 하면 마음이 찜찜한 것입니다.

마치 화장실에서 큰 볼 일을 보고 난 후 비데를 안 한 것과 같이 불쾌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그 일들을 멀리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를 일컬어 무덤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은 30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가룟 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서 은 30을 성전에 바칩니다.

 

그러자 대 제사장이 이 돈은 더러운 돈이니까 성전에 둘 수 없다고 하면서 밭을 하나 삽니다.

그 밭 이름을 ‘아겔다마’ 라고 하는데 이는 ‘피 밭’이라는 뜻입니다.

피 값으로 산 밭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그 밭을 나그네들의 무덤을 삼은 것입니다.

 

예수님 피 값으로 산 밭이 나그네들의 무덤이 된 것입니다.

그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곳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자들이구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자들을 교회로 부르십니다.

그리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죄라고 고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히 4:12-16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수술하는 예리한 칼처럼 우리의 안과 밖 모든 생각과 뜻과 행동까지 다 죄라고 고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완전히 발가벗겨서 입을 닫고 죽음의 자리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 눈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저 예수가 왜 죽었는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바로 너의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 예수의 죽음 때문에 네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이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너의 몸은 죄 아래서 낫기 때문에 죄로부터 자유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린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용서 받고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네 눈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사라지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라고 합니다.

 

왜 율법으로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하실까요?

이는 옷을 입혀주기 위함입니다.

율법으로 죄의 수치를 드러내게 하여서 옷의 필요성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성막의 제사 제도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막의 제사는 죄 사함을 위한 것입니다.

율법으로 죄가 고발당하면 짐승의 제사로 그 허물을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짐승의 죽음으로 죄가 가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주어진 의의 옷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 있던 백성들을 광야로 끄집어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으로 이스라엘의 죄(수치)를 드러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하여 어린 양의 피로서 수치를 가려주신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기보다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에 바빴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라고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인의 자리에서 자기 영광을 챙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짐승의 제사는 너의 죄 때문에 흠없는 제물이 죽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 지내라고 해서 제사를 지냈잖아요.

제사 지냈으면 된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사 지낸 것이 무슨 장원급제라도 한 것처럼 말이에요.

 

이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정으로 대노하면서 이 따위 제사는 다시 지내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언제 제사를 원했느냐,

제사를 왜 지내는지 그 의미를 알라고 했지,

제사의 의미도 모르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상숭배 하는 것과 똑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초림 때도 동일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 지킨 것을 가지고 의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을 쓸어버린 것입니다.

이건 성전이 아니고 강도의 굴혈이라고 합니다.

물건을 사고 파는 매매하는 장 터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성전을 헐어 버리라고 합니다.

내가 사흘만에 다른 성전을 짓겠다고 하십니다.

그 성전이 바로 우리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일컬어 성령이 거하는 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거하는 전이니까 너희 몸에 세상 것을 담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을 구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의 의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옷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먹고 살 생각을 하지 말고 예수만 잘 믿으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일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 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영생 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로부터 오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일이고,

예수 믿는 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고,

예수 믿는 것이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본질을 흐리는 일을 합니다.

주객을 전도 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열심과 정성을 하나님의 일로 둔갑을 시켜서 예수 믿는 것을 가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는 먹으라고 한 생명과는 먹지 않고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게 하여서 불순종케 하였습니다.

 

마귀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는 일을 합니다.

어떻게 왜곡하는가 하면 너희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서 죄인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의인이 되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게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라고 미혹 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담은 불순종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니까,

너희는 율법을 지켜서 약속의 땅(에덴동산)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돌 판이 있습니다.

 

불순종으로 깨어진 돌 판과,

은혜로 주신 돌 판이 있습니다.

 

첫 번째 돌 판은 불순종으로 깨어졌고,

두 번째 돌 판은 은혜로 성막에 보관이 되어 있습니다.

 

성막에 보관이 된 율법은 두 번째 주신 돌 판입니다.

두 번째 돌 판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주어진 은혜의 돌 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한 백성들이 시내 산에 당도하자 모세를 시내 산 위로 불러 올려서 율법을 줄 테니까 백성들이 지킬 수 있겠느냐 물어 보라고 합니다.

지키면 복을 받고 못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에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서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일제히 지키겠다고 합니다.

이에 모세가 짐승을 잡고 그 피를 양푼이에 담아서 백성들에게 뿌립니다.

피로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계약을 어기면 짐승처럼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쌍무 언약인 것입니다.

 

모세는 다시 시내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백성들의 뜻을 알리자 하나님께서 계약의 내용들을 돌 판에 새겨서 주십니다.

사십일 만에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오자 산 아래 백성들은 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세는 기겁을 하면서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트려버립니다.

이는 계약 파기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계약대로 이스라엘을 죽이기 시작을 합니다.

순식간에 삼천 명이 죽었습니다.

 

이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이들을 죽이려면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죽임을 멈추시고 모세의 말대로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시내 산으로 올라오게 합니다.

그리곤 처음 내용과 동일한 것을 돌 판에 새겨주십니다.

이 돌 판은 쌍무 언약이 아니고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주어진 은혜 언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 언약의 돌 판과 함께 성막을 주십니다.

성막을 주신 것은 율법으로 죄가 고발당한 자들에게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용서 받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처음 돌 판은 쌍무 언약으로 백성들이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두 번째 돌 판은 은혜 언약으로 흠 없는 제물의 희생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 돌 판 앞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순종이지만,

두 번째 돌 판 앞에서는 은혜를 살고 있음을 모르고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불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보관하고 있는 율법은 너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 지킴을 의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를 고발하려고 주신 율법을 가지고 도리어 율법으로 의를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을 가지고 자신들은 의로운 자들이라고 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면서 자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 지킴을 의라고 여긴 자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면서 지옥에 가라고 저주를 하신 것입니다.

이는 마귀가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라고 미혹을 하였던 것입니다.

 

처음 돌 판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의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돌 판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불의가 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 돌 판은 너희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숭배로 깨어져 버렸습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자라는 것을 폭로당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이걸 목적으로 율법을 주시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자신들이 율법을 지켜서 복을 얻어 내겠다고 하자 그럼 지켜보라고 제물의 피로 언약을 맺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래 그럼 한번 지켜 봐’ 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것 봐라 내가 뭐라고 하더냐’

‘너희들은 내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죄인들이야’ 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 것과 똑같은 돌 판을 다시 주십니다.

주시면서 하는 말씀이 ‘너희들 이 돌 판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어긴 자로서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들이야’ 라고 하면서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라고 은혜를 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너희가 율법을 어길 때마다 흠 없는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라고 합니다.

법대로 하면 너희가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너희 대신에 흠 없는 짐승을 잡아서 대속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흠 없는 짐승의 희생으로 죄를 용서 받은 것입니다.

흠 없는 짐승의 죽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와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입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구약의 짐승 제사가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짐승 제사는 그림자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실상인 것입니다.

 

히 10:1-10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율법은 장차 오는 일의 그림자이고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율법 아래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는 그림자이고,

한 몸으로 드려지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사가 참형상입니다.

 

그림자인 짐승의 제사로는 온전함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짐승의 제사는 도리어 죄를 깨닫도록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한 몸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를 ‘여호와 이레의 제물’ 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 예수가 바로 율법 아래서 드려지는 흠 없는 제물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왔는데도 짐승 제사를 드리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왔음에도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은 불의가 되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죄 아래 가두어지고 말았습니다.

죽은 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없는 자입니다.

순종하고 싶어도 죄의 종으로 팔린 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범죄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있는 것처럼 미혹을 합니다.

마귀는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 있다고 미혹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죄란? 가죽 옷을 벗는 것입니다.

가죽 옷을 벗는다는 것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흠 없는 제물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구속사 적으로 보면 아담과 하와도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죽 옷을 입고 산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산 것과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입었던 가죽 옷이 출애굽 하여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에게는 흠 없는 짐승의 제사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실상이 되어서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 수치를 가리기 위해 죽임 당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가죽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 옷을 벗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을 잊게 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잊게 하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 하라는 것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행위가 옷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행위도 옷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행위가 가죽 옷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행위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완성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입혀 주신 가죽 옷을 입은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옷을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입고 나가는 것이지 인간들이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는 인간의 의로 나아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은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두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입혀준 옷을 입고 있느냐 자기의 옷을 입고 있느냐 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왕의 아들에 혼인 잔치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왕의 아들에 혼인 잔치에는 예복을 입고 들어가야 합니다.

예복은 왕이 준비해 두었습니다.

누구라도 예외 없이 왕이 준비한 옷을 입고 들어가야만 합니다.

왕이 준비한 예복을 입지 않으면 문지기가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왕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그 아들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럼 신부는 누굴까요?

바로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신부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은 신부들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입니다.

 

계 19:7-8절.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어린 양의 신부는 어린 양의 피 묻은 옷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왕이 준비한 옷은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대속의 가죽 옷인 것입니다.

천국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자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빛나고 흰 세마포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입혀주는 흰 옷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옷인 것입니다.

 

흰 옷은 어린 양의 피로 씻은 의의 옷입니다.

 

계 7:13-14절.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 19:11-14절.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 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천년왕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흰 옷을 입혀주심을 입은 자들만이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 백마를 타고 피 뿌린 옷을 입고 오시는데 이 때 앞서간 성도들을 함께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그들도 모두가 흰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오는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하나님이 옷을 입혀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옷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떤 옷을 입었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었으면 예수그리스도의 사람이고,

인간들의 의의 옷을 입고 있으면 마귀의 자녀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

내가 만든 옷인가?

하나님이 입혀 주신 옷인가?

 

인류 역사는 옷의 역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였을 때에는 옷이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에는 옷을 입지 않고 발가벗음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그 때는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 2:25절.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니라”

 

인간이 옷을 입게 된 것은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부터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벌거벗음이 부끄러움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옷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죄가 옷을 필요로 하게 만든 것입니다.

 

죄를 알게 되면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옷을 입는 것은 수치를 가리는 것이고,

옷을 벗는 것은 수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납니다.

어린아이 때는 옷을 입지 않아도 수치로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발가벗음이 수치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 때는 남자와 여자로 살지 않고 그냥 사람으로 삽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남자와 여자라는 성(性)의 구분이 없이 발가벗고 있어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고 수치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발가벗음이 수치라는 것을 아는 것은 남자와 여자라는 성에 대한 눈을 뜨고부터입니다.

이때를 성의 정체성을 아는 때라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 간의 서로의 성의 정체성의 차이를 알고 나면서부터 발가벗음으로 있는 것을 수치로 알고 옷을 입고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보면 학교에 입학할 정도인 일곱 살 정도가 되면 성에 대한 자아가 확립이 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남녀는 7세 정도가 되면 분리하여 생활 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곱 살 이전까지는 남자와 여자의 구분 없이 함께 놀았지만 일곱 살이 되면서부터 남자와 여자로 구분을 하고 다름으로 놀게 된다는 뜻입니다.

 

처음 지음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발가벗고도 수치를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남자와 여자가 아닌 그냥 사람으로서 ‘우리’가 되어서 살았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남자와 여자가 다름으로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에서 ‘너’와 ‘나’가 된 것입니다.

‘너’와 ‘나’의 다름이 되자 발가벗음이 수치가 되었고 급기야 옷을 입고 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악과는 ‘우리’라는 하나의 사람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性)으로서 둘로 나누어 버렸습니다.

‘너와 나는 다른 존재야’ 라고 분리시켜 버린 것입니다.

한 몸에서 두 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죄라고 합니다.

죄가 ‘우리’라는 한 몸을 ‘너’와 ‘나’라는 두 몸으로 나누어 버린 것입니다.

‘너’와 ‘나’는 다름으로 분리시켜 버린 것입니다.

다름이 되면서 발가벗음이 수치가 되었고 급기야 옷을 필요로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발가벗음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발가벗은 대로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가 발가벗음을 수치라고 여기는 눈을 준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갖게 만든 것입니다.

눈이 다르다는 것은 서로의 생각과 가치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서로의 생각과 가치가 다르면 판단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졌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다른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선악과 속에는 하나님과 다른 생명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생명으로서는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분입니다.

영생하는 하나님과 다른 생명은 유한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영생에서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죽은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영생하는 자만이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산 자들만이 살 수가 있는 에덴동산에서 죽은 자가 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 밖으로 내어 보낸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생명의 세계이고,

에덴동산 밖은 죽음의 세계입니다.

 

생명의 세계에서 선과 악과,

죽음의 세계에서 선과 악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는 선과 악과,

인간들이 판단하는 선과 악이 다릅니다.

 

동일한 것이라도 서로 다른 눈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이견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도 죄인이 보기에는 좋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이 죄인에게는 악으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의 악이 죄인에게는 선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러면 매사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생명의 가치로 운행을 하십니다.

그 생명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에덴동산의 영생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선악을 판단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선으로 규정하고 인간은 악으로 규정합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만 선으로 인정하고 인간이 한 일을 악으로 규정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내어 놓는 선을 선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만 선으로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의롭다 여기시고,

예수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를 죄인이라고 정의 하십니다.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 로 판단하십니다.

예수 안은 선이고, 예수 밖은 악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사람으로 보고,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짐승으로 보십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과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서로 다른 종(種)인 것입니다.

 

신자는 사람이고, 불신자는 짐승입니다.

신자는 하늘의 생명을 가졌고, 불신자는 땅의 생명을 가졌습니다.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갑니다.

 

신자와 불신자는 각자의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신자와 불신자 간에 수치를 가리는 것도 다릅니다.

신자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가리고 불신자는 자기 의로 가립니다.

 

죄란?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자기의 선을 하나님도 선으로 인정해 달라고 합니다.

불신자들은 자기들의 의도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로 인정을 해 달라고 합니다.

자기들의 의로 만든 옷을 입고 있어도 수치가 가려진 것으로 인정을 해 달라고 합니다.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어도 인정해 달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인본주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 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들이 한 일을 신앙으로 들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게 가인의 제사로 나타났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가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가 차린 제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십니다.

이에 가인이 왜 내 성의를 무시하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이 제사를 받은 아벨을 죽여 버립니다.

가인은 자신의 성의를 무시한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자들도 미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자들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사상이 곧 죄인인 모든 인간들의 사상입니다.

이를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행한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들이 한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하신 일에만 관심을 가지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으로 여기는 자들을 선한 자라고 구원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제사 보다 앎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지는 제사를 원하십니다.

 

죄란? 자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계 3:17-18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고 합니다.

하나님의 평가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들 식으로 부자이고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들 좋아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해야지 자기 좋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다고 하여서 그것을 하나님도 좋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죄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만족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생각과 정반대의 진단을 내리십니다.

너희들은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발가벗고 있다고 합니다.

이건 하늘과 땅만큼이나 전혀 다른 시각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맨 마지막 교회입니다.

이것은 교회사 적으로 보면 역사 마지막 때의 교회 모습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스스로의 생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내가 좋은 것이면 하나님도 좋아 하실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다스림을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생각은 중요치 않습니다.

자기 생각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이 정도면 되었지 라고 자긍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옳고 그름은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의냐 불의냐는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라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답이 있다고 합니다.

너희들 상식으로 믿지 말고 성경대로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단은 냉혹합니다.

너희들은 소경이고 발가벗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흰옷을 사서 입고서 발가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하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발가벗은 수치를 가리움을 입었는지를 알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죄의 수치는 하나님이 가려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류의 시작에도 하나님이 가려 주셨고,

인류의 마지막 때도 하나님이 가려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옷을 벗어 주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흰 옷을 사서 입으라는 말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의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종말은 발가벗는 시대입니다.

사회현상론으로 본 종말의 징후는 여자들이 옷을 벗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경쟁적으로 발가벗는 여자를 상품으로 내어 놓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온 세상이 옷을 벗는 시대입니다.

문화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벗는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발가벗음을 가려 주었는데 인간들은 벗으면서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성경적으로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들이 경쟁적으로 인본주의 신앙으로 발가벗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버리고 인간의 의를 쫓아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고 세상의 뜻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악을 고발해 주어야 하는데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합니다.

목사들이 복음을 버리고 돈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설교 속에는 예수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교인들이 하늘의 가치를 버리고 세상의 가치를 따르고 있습니다.

교회나 목사나 교인들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 지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의 소원만 들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죄관이 사라지고, 세상의 죄관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판단하시는 지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판단을 받을까만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의는 사라지고, 인간들의 의만 난무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발가벗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어야 할 때입니다.

 

스스로 돌아보세요.

 

나는 무슨 옷을 입고 있나요?

무엇을 의로 붙잡고 살아가고 있나요?

 

내 의인가?

예수그리스도의 의인가?

 

주님이 곧 오십니다.

어떤 옷을 입고 신랑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수치를 가리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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