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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창세기 강해)2강. 태초에,, (창 1:1절)

by coroa 2022. 7. 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강. 태초에,, (창 1:1절)

-.정낙원 목사

 

창 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성경을 보면 두 태초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가 있습니다.

 

이 둘은 태초라는 말은 같은데,

그 의미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릅니다.

오늘은 두 태초에 관해서 상고하고자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역사 속에서 창세전에 언약 하신 일을 펼쳐가는 이야기입니다.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주체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정의 할 때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라고 합니다.

 

구속사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모든 성경은 이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성경에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나, 갖가지 기적과 천재지변이나, 죽고 죽이는 전쟁이나,,, 그 외 등등 모든 것들 속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 하나만 달랑 떼어서 그것에 의미를 두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병 고치는 사건이 있으니까 병을 고치는 것이 마치 성경이 말하는 것의 전부인 냥 말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있으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신양의 본질인 냥 호도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여타의 사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객을 전도 시키면 안 됩니다.

이 시대 교회의 타락은 기독교가 마치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같은 것들을 신앙의 근본인 것처럼 본말을 전도 시켜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고 잘살아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간과치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예수” 라는 이름으로 보내신 것은 예수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뭔가요?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려고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 라는 이름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백성입니다.

 

이 말은 자기 백성만 예수님과 관련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구원주가 되십니다.

그래서 천국의 비밀은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비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너희와 저희로 구분 하여서 대하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인 너희에게는 구주이지만,

자기 백성이 아닌 저희에게는 선생이었습니다.

 

둘째는,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 백성들이 지금 죄 아래 가두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독자적으로 죄에서 나올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내서 구원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부모와 자식 간에 싸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간섭하는 것이고,

자식은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서 살고자 반항을 합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싸움이 일어납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왜 날 간섭하느냐,

날 좀 내 버려두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내가 너를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둘 수 있느냐고 하면서 간섭을 합니다.

 

자식은 틈만 나면 부모 그늘을 벗어나려고 하고,

부모는 시작부터 끝까지 자식을 부모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둘은 악악대면서 선한 싸움을 하게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 관계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 자식 관계를 천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아무나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만 알게 되어 있습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습니다.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은 하나님 백성들에게만 들려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비록 인간의 언어로 기록을 하였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을 숨겨 두었습니다.

땅의 이야기 속에 하늘의 이야기를 담아 놓았습니다.

그 뜻은 오직 성령께서만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땅의 이야기 속에서 하늘 이야기로 듣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땅의 이야기로만 듣게 됩니다.

그래서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서도 다른 신앙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로 구분하는 것도 다 이러한 연유 때문입니다.

땅에 속한 자를 육에 속한 자라고 하고 하늘에 속한 자를 영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도 육에 속한 자는 육적으로 해석하고, 영에 속한 자는 영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2:14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는 성령이라는 안경을 주어서 성경을 보게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일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 속의 이야기가 들려진다는 것은 하나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배워서 구원을 얻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이렇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이렇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경을 통해서 아, 우리가 이렇게 구원을 받았구나!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이런 계획을 세우시고, 때를 따라서 나를 이렇게 간섭해 오셨구나! 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들은 성경을 가지고 방법론으로 접근을 하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을 찾아온 청년처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방법론을 알려 달라고 합니다.

 

방법론을 찾는 것은 자기 가능성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불의라고 합니다.

성경의 증거는 인간들에게는 구원 얻는 방법을 알려주어도 안 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들은 정답을 알려 주어도 정답대로 살 수 없는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우리 쪽에서 무슨 일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낳아 주셔야만 합니다.

이것을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합니다.

구원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힘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따 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종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종교의 신앙의 바탕에는 지성이면 감천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열심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의 그 바탕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것이지만,

세상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것을 은혜라고 하고,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의 바탕에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신앙이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성경을 가지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가지고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우리를 보게 하는 거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들을 신약의 성도들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간섭하고 다루어가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구원해 주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구원 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신앙이 감사와 찬송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창세전 언약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럼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도대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무슨 언약을 하셨기에 내가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만물은 언약에 의하여 지은바 되었습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만물의 창조가 나중입니다.

이러면 만물을 존재케 하는 근원이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살면서 그들을 존재케 하는 근원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후에 그들의 근원을 알려주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모세를 시내산 위로 올라오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건 하나의 시청각 교제입니다.

 

시내산 위는 하늘나라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부르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속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너희들은 하늘나라 백성이라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서 모세를 시내 산으로 올라오게 하여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언약입니다.

너희들은 언약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언약이 너희를 존재케 하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잘나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고 너희가 언약의 후손이기 때문에 구원이 주어진 것이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시내 산 위에서 언약이 주어졌다는 것은 언약의 출처가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언약이 나왔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은 언약을 앞세우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는 언약이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순서적으로 말하면,

 

1). 하늘나라에서 창세전 언약이 세워졌고,

2).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만물이 창조가 되었고,

3). 하나님은 만물 속에 있는 언약의 백성들을 구원하라고 그 아들을 보내시고,

4). 그 아들은 창세전 언약 안에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들을 찾아가서 언약의 말씀을 주고,

5). 언약의 말씀을 받은 자들은 그 언약을 앞세우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으로 보내실 때 그 속에 언약을 심어 놓았습니다.

언약은 마치 칩처럼 자기 백성들 속에 내장 되어 있습니다.

이 언약의 칩은 언약의 후손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아들을 따라서 하늘나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의인화 하여서 만물이 주께로 나와서 주로 인하다가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주님 품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내 근원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나로 존재케 하신 그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태초” 이야기도 근원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근원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출발해 봅시다.

 

성경을 열면 첫 마디가 “태초에” 라고 합니다.

 

창 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태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던진 첫 마디입니다.

이것은 마치 잔잔한 연못에 돌 하나를 던진 것과도 같습니다.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지면 그 파장이 온 연못에 펴져나가듯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라는 연못에 “태초에” 라는 돌을 하나 던진 것입니다.

 

그럼 세상이라는 연못은 연못을 출렁케 한 그 “태초” 라는 말씀을 추적해 가야합니다.

추적하여서 왜 잔잔한 연못에 태초라는 돌을 던졌습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이라는 연못에 태초라는 돌을 던진 것은 추적해서 찾아오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는 말은 천지를 창조 하였다는 의미보다 하나님이 천지 에게 묻고 있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얘들아! 너희들 태초를 아니”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창조 기사가 무엇을 만들었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세상을 갈라내고 채우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을 갈라내고,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을 갈라내고,

바다에서 뭍을 갈라내고,

그리고 만물을 채우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을 누구에게 하고 있나요?

애굽에서 갈라져 나온 자들에게 하십니다.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한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인 것입니다.

 

모세 오경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모세 오경은 인류의 시작과 언약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세 오경은 언약의 후손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 시작부터 끝까지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창세기는, 기원의 시작을 말하면서 이를 아브라함 언약으로 설명해주 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에서 나온 자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전 언약 안에 있던 백성들이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언약의 후손들이 애굽이라는 이방 나라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서 구출을 해내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보호하시고 건져내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구원 받은 백성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교회를 세워가고 하나님을 섬기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교회로 빼내심을 입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광야를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민수기는, 출애굽 한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지나면서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과 이들이 광야 길을 걸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면에 하나님은 거역하는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교회 생활을 통해서 옛 사람이 죽어지고 새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에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너희들을 애굽에서 빼내서 가나안 땅에 들여보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언약에 의한 것이므로 그 땅에 들어가서도 언약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장차 우리가 천국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속사 적으로 보면 모세 오경은 구원사 전체를 축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누구이며 하나님은 나를 왜 구원 하셨는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 오경은 언약 후손들의 근원을 말해주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여 생겨난 민족입니다.

언약이 그들을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 언약을 봅시다.

 

창세기 15장입니다.

 

창 15:13-2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언약을 맺는 장소가 가나안입니다.

언약의 내용을 보면 언약의 후손들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언약에 의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언약에 의해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모세 오경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출애굽 하여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백성들에게 모세 오경을 주어서 그들의 근원을 찾아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도 동일한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교회에 오니까 성경을 가지고 내가 어디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근원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태어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을 하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애굽은 이 세상을 말하고,

광야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광야 교회에 나온 자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밖에 모르고 살았습니다.

나만 알고 나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니까 하나님의 첫 물음이 “너희들 태초를 아니” 라고 묻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인지 아느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광야에 나온 자들에게 창세기를 주시면서 너희들 태초에 대하여 들어 보았니 라고 묻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태초에 대하여 물으시는 것은 태초에 대하여 알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떤 자인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초에 관심이 없습니다.

태초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오로지 이 세상뿐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잘 살까에 만 관심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니까 태초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태초에 속한 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관한 소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애굽의 음식을 달라고 하는 자들에게 하늘에 만나를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사를 땅에서 하늘로 환원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을 증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만대로부터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만대로 감추인 비밀이 바로 창세전 언약입니다.

 

엡 3:9-11절.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골 1:25-27절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교회는 하늘에 비밀을 전해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만세로부터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곳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늘에 이야기로 그들의 관심사를 하늘로 돌리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광야에 나온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부르십니다.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시내산 위에 강림하십니다.

그리곤 모세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시내 산 중간에 구름이 가리워서 땅에서는 산 위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음성은 들립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소리로는 들립니다.

 

이건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말씀으로는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볼 수는 없지만 말씀을 통해서 천국에 소식은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백성들은 모세가 들고 온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나라 소식을 들었듯이 교회에 온 성도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늘나라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모세가 전하는 말씀의 출처가 산 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말고 모세가 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만나 주십니다.

창조가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나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제쳐놓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은 전부가 불법이고 반칙인 것입니다.

 

시내산 위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이렇게 되면 광야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부르신 것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 소식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백성들은 시내산 위에 하나님이 사는 동네가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세상이 전부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나와서 보니까 하늘에 동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동네를 알려준 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살아가야하는 곳이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성경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여니까 첫 마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애굽에서 광야에 나온 자들에게 시내산 위에 있는 하늘나라를 알려주시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편지를 읽으면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 내용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럼 하나님께서 친절하게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당하고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만난 적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다고 해 보아야 조상으로부터 들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한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있은 후 400년이 지나서 모세가 와서 하나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로부터 하나님 이야기를 듣는 백성들은 조상들로부터 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알려준 조상들 역시도 애굽에서 태어나서 그 아버지로부터 들은 하나님 밖에 모릅니다.

그 아버지 역시 애굽에서 태어난 아버지로부터 들은 하나님입니다.

 

1대를 100년이라고 합시다.

그럼 400년은 4대를 지나 온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출애굽 한 사람들은 400년 전에 할아버지가 만난 그 하나님을 구전(口傳)으로 구전으로 내려오면서 전해들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듣고,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듣고,

할아버지는 증조 할아버지로부터 듣고,

증조 할아버지는 고조 할아버지로부터 들었어요.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말하고,

이삭은 야곱에게 말하고,

야곱은 요셉에게 말하고,

요셉의 그 자식들에게 말하고,

이렇게 400년을 흘러왔습니다.

 

흘러오면서 처음 하나님도 왜곡되어 전해져 왔습니다.

400년 후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는 애굽의 하나님으로 전락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광야에 나와서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금송아지로 왜곡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애굽식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올 바른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원래 구전으로 전해 내려져 오는 이야기들은 갈수록 본질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입니다.

끝에 가면 전혀 다른 이야기로 전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출애굽 한 백성들이 올바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곡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와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알려 줍니다.

모세의 첫 마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합니다.

하루 하루 먹고 살아가기 바쁜 사람들에게 먹고 사는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목구멍에 풀칠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태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백성들은 물어야 합니다.

모세님, 모세님,

왜 우리에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모세가 상관이 있다고 합니다.

너희들과 상관이 있으니까 성경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 편지를 주시면서 너희들에게 알려 주라고 해서 알려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아온 편지의 첫마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입니다.

 

태초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근원과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근원은 장소적인 의미이고,

시작은 시간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근원의 태초와 시작의 태초가 있는 것입니다.

 

근원이 먼저이고 시작은 나중입니다.

시작의 태초가 있기 전에 근원의 태초가 있었습니다.

근원의 태초에서 시작의 태초가 나온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입니다.

역사를 시작하는 태초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역사의 시작을 말하는 태초를 알기 전에 먼저 역사의 시작을 있게 하는 근원인 태초를 알아야 합니다.

 

역사의 문을 여는 시작의 태초가 근원의 태초로부터 나왔으니까,

근원의 태초는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태초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그럼 이 세상 바깥에 있는 근원인 하나님 나라인 태초를 살펴보십시다.

 

요한복음 1장을 봅니다.

 

요 1:1-3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십니다.

계신다는 말은 인격에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인격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도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인격을 가지신 말씀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근원인 태초라는 하나님 나라에 말씀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이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이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태초의 관한 사실들을 증거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근원인 태초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이를 우리는 신학적 용어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는 말씀이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창조는 삼위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그 창조를 누구를 위하여 하셨는가 하면 말씀이신 하나님을 위하여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물의 창조 목적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5-17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 세상 밖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창세전 천국이라고 합니다.

창세전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신 하나님과 말씀이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를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증거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이신 하나님인 성자 하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예수님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뜻을 그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전달을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6장을 봅시다.

 

요 6:38-40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5:17-25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함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한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이 일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위임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통해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를 대신하여서 일을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역사 세계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역사 세계에는 그 아들을 보내서 아버지의 일을 대신 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여서 아버지의 일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그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창세기 1장 1절의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라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역사 세계에 오셔서 이루어가는 창세전 언약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를 봅니다.

 

창 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입니다.

즉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인 것입니다.

이를 시간적 태초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옛날 옛날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계시던 하나님이 천지라는 이 세상에 방문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라는 말은 무엇을 만들었다는 의미보다 하나님이 천지 속에 오신 것에 강세가 있는 것입니다.

 

왜 하늘나라에 계시던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방문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계획한 어떤 일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걸 지난 시간에 창세전 언약이라는 것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는 천국에서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일컬어 천국이 왔다고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와 구원은 같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보이는 나라를 역사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나라를 묵시라고 합니다.

창세전 하나님 나라를 묵시라고 하고,

창세전에서 나온 이 세상 나라를 역사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묵시에 계시던 하나님이 시간 속에 들어오심으로서 역사의 시작 된 것입니다.

이것을 창조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는 감추어진 세계입니다.

인간들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를 묵시적 태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가 바로 묵시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창세기의 시간적 태초는 묵시적 태초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묵시적 태초에서 계획한 창세전 언약을 시간적 태초에서 그려내는 것입니다.

시간적 창조는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는 도화지와 같은 것입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시간적 태초 안으로 들어오신 것은 묵시적 태초인 하나님 나라에서 계획하셨던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시기 위함입니다.

 

시간적 태초는 묵시적 태초에 종속이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적 태초를 있게 한 것이 묵시적 태초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시간적 태초인 이 세상은 묵시적 태초인 하나님 나라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음이 됩니다.

 

이 세상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묵시라는 하나님 나라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은 곧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피조 세계는 창조 세계에 종속이 되어 있습니다.

피조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창조 세계입니다.

창조 세계가 원본이고, 피조 세계는 복사본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이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말미암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봅시다.

 

히 11:1-3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는 묵시적 태초이고, 보이는 세계는 시간적 태초입니다.

묵시적 태초가 원본이고, 시간적 태초가 복사본인 것입니다.

원본이 복사본을 잉태케 한 것입니다.

 

피조 세상에서는 창조의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말합니다.

쉬운 말로 창세전이라는 태초에 계신 성부 하나님은 원본이고, 역사 속에 오신 성자 예수님은 복사본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부 하나님은 창조 세계에 거하시고,

성자 하나님이신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존재양식인 육신을 입고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창세전 언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하신 언약을 이 세상에서 펼치시려고 묵시적 태초에 계시던 하나님이 시간적 태초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시간적 태초 안에서 묵시적 태초에서 예정하신 창세전 언약을 다 펼치시고 나면 다시 묵시적 태초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아버지께 기도 하실 때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그 영화를 가지게 해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 17:5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지면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원래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계시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화로움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창세전에 이미 계획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입니다.

그러니 기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봅시다.

 

벧전 1:18-20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말세에 나타나기로 한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세에 일어날 십자가 사건은 이미 창세전부터 알리신바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언약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발생이 된 말세에 일어난 사건인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 창세전 언약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입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가 속량을 받는 구속사가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이제 성령이 오시면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십니다.

 

성령은 이 사실을 자기 백성들 속에서 적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죄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믿어지게 하십니다.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이 다 이루어지면 철거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만들어진 한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시적인 것은 용도가 다하면 폐기 처분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을 봅시다.

 

히 1:10-12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태초에 하나님이 멸망할 것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이게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의 창조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은 용도가 다하면 폐기처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신 이 세상은 옷과 같이 다 낡아지고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간적 태초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만물도 사라지고 인간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흙에서 난 우리 몸도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을 덧입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있어 죽음은 하늘에 신령한 몸으로 갈아입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봅시다.

 

고후 5:1-8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바울은 삼층천에 다녀왔습니다.

삼층천에서 보니까 이 땅에 있는 몸은 실상이 아니고 허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땅에 장막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하늘에 장막으로 바꿔치기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몸은 씨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씨가 죽으면 나무를 내듯이 이 땅에 속한 몸도 죽으면 하늘에 몸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원함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 하시면 우리의 몸은 홀연히 변화가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사본의 몸으로는 원본 세상에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원본 세상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흙에서 난 유한한 생명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는 하늘로서 난 영생하는 몸이라야 살아 갈수가 있습니다.

 

흙에서 난 몸은 유한한 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하늘에서 살 수 있는 영생하는 몸으로 바꿔주는 것입니다.

영생하는 몸으로서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삼층천에서 이 사실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의 소원은 육신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바라는 것의 실상이란? 구원의 완성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 사실을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증거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면 하늘에 장막을 덧입고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여서 그 나라를 소망하고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 사실들을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이게 믿어지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예수님처럼 창세전 하나님 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출장을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따라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의 몸은 반납을 하고 가셨습니다.

 

그럼 우리도 이 땅에서 난 몸은 반납을 하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이 겉 사람은 후패하여지고 점점 낡아지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겉 사람이 후패해지는 삶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인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낙망치 말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따지면 예수님처럼 망한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오른 손으로 높이셔서 승리자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성도들도 비록 이 세상 가치로 보면 실패한 인생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의 성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실패를 낙망치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봅시다.

 

고전 15:16-20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방식이 죽였다가 살려내는 방식으로 하십니다.

이게 창세전에 언약하신 내용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죄 아래서 죽었다가 건져지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만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예수님도 다시 살아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것은 하나님의 부활 프로그램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부활 프로그램이 없다고 한다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완전히 망한 인생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활 프로그램은 분명이 있기 때문에 안심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고전 15:35-44절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누가 성도의 실패를 조롱하거든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야 이 어리석은 사람아!

씨가 죽는 것은 그 속에 있는 나무를 끄집어내기 위함이 아니더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이 육의 몸으로 심고 영으로 몸으로 살아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 안에 예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의 생명은 우리의 육신이 깨어질 때 나타납니다.

마치 기드온의 300 용사의 항아리 속에 횃불처럼 항아리가 깨어지면 횃불이 밝혀지듯이 우리의 몸도 깨어지면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끄집어내시려고 죽음의 자리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하늘의 몸을 입고 하늘나라로 가셨듯이 우리도 육신의 장막에 무너지면 하늘의 장막을 입고서 하늘나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서로 위로 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봅시다.

 

살전 4:13-18절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 진데,

너희가 예수를 믿다가 죽임을 당한다고 하여서 어찌 슬퍼할 수가 있겠느냐,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남이 있으니까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강림하시면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고 합니다.

 

죽음을 잔다고 표현하는 것은 깨어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 천사들이 기상나팔을 울려 불 것입니다.

이건 자는 자들을 깨우는 소리입니다.

그럼 자는 자들은 하늘에 몸을 입고서 부활을 하여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나면 부활 하신 예수님의 몸처럼 부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합니다.

만약에 세상 사람들처럼 이생의 삶이 끝이라고 한다면 망한 인생이 되겠지만, 우리에게는 내생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실패해도 망한 것이 아니므로 낙심치 말라는 것입니다.

 

이생이 전반전이라고 한다면 내생은 후반전입니다.

이생의 전반전 인생은 흙에서 난 몸으로 죽음에 종노릇하였지만,

내생의 후반전 인생은 하늘로서 난 몸으로 천국에서 영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 될 수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요한복음의 태초에서 창세기의 태초로 파견을 나왔습니다.

파견 근무는 반드시 정한 기간이 있습니다.

그 기간이 다하면 귀국을 하게 됩니다.

이제 곧 그 때가 다가옵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가 이러한 때 딱 어울립니다.

 

*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 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우리의 고향은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소풍을 왔습니다.

돌아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겠다고 합니다.

 

시인은 이 땅에서의 삶을 소풍이라고 하였습니다.

소풍이 끝나고 이제 돌아 갈 때가 되었습니다.

돌아가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잘 놀다가 왔습니다 라고 해야 하겠지요.

그러자면 소풍 놀이를 잘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소풍 놀이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마음껏 누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결코 정죄함 없이 살아가는 것이고,

물직적 가치로 살지 않고 영적 가치로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디 시간 속 태초에 매여 살지 말고 묵시 속의 태초에서 소풍 나온 사람답게 예수 안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잘 살아가다가 소풍을 마치면 우리의 본래의 고향으로 잘 돌아가는 인생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우리의 실존을 알게 해 주셔서 참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고향은 창세전이라는 그 태초의 나라임을 알았으니 소풍을 나온 시간 속 태초 속에 머물지 말고 돌아갈 그 나라를 소망하면서 잘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소풍이 끝나는 그 날까지 주의 은혜와 긍휼로 잘 감싸 주셔서 무사히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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