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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 강해)2강. 빛으로 오신 하나님 <요 1:1-5>

by coroa 2022. 6. 26.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강. 빛으로 오신 하나님 <요 1:1-5>

-.정낙원 목사

 

요 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성령에 감동을 입고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이 창조 되었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시작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운을 떼는 것을 보면 성경의 목적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성경을 대하는 자세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누구이며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이는 이미 완성되고 종결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2절에선 창조된 세계가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혼돈과 공허한 무질서의 세계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3절에선 이러한 세계에 말씀이 등장하여 혼돈과 무질서한 세계를 질서의 세계로 회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미 창조된 세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의 증거대로 라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망가져 있습니다.

그 망가진 세계를 말씀으로 회복하고 계시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회복의 사건을 창세기에서는 창조라고 말씀합니다.

혼돈을 죄라고 한다면 죄에서 구원하는 것을 창조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약에 와서는 천지창조의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고 죄인을 구속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중심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구약에선 혼돈에 빠진 세상을 회복하는 것을 창조라고 하는데 신약에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을 창조로 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이신 하나님인 예수그리스도가 타락한 인간을 구원시키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보충하여 설명한다면 구약에선 죄인을 구원하는 것을 천지창조를 통해서 표상적으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타락한 죄인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되는 사건은 신약적 천지창조 사건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모든 성경 해석의 중심은 예수그리스도가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 맞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를 사도바울은 아들에 형상을 본 받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그리스도가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회복이 아니라 새로 창조한다고 보는게 옳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창세기에서 혼돈된 세상을 빛이 비취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빛으로 오셨다는 말은 세상은 어둠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에서 빛과 같은 일을 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빛으로 일하신다는 말은 옳고, 그름을 갈라내는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즉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를 갈라내시는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것을 성경은 심판이라고 합니다.

이를 두고 만물이 그리스도 앞에서는 벌거벗은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참 빛이라고 함으로서, 인간들이 생각하던 기존의 빛은 거짓이라고 폭로하는 있는 것입니다.

 

빛을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를 참 빛이고 예수그리스도만이 참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 밖은 모두가 가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죽은 세상에 참 생명이 오신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참 생명(빛)과, 거짓생명(어두움)이 갈라집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이 선(善)이라고 생각하고 진리라고 생각하던 것이, 모두가 거짓 선이고 거짓 진리라고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행함으로 선(빛)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 선한(착한) 삶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선(생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반발을 하게 되고 급기야는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를 로마서 9:33절에서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라고 하였고,

이사야 28:16절에서는 “이스라엘을 시험할 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유대인들에게 거치는 반석과 부딪치는 돌로 보내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넘어지는 돌로 보내셨을까요?

이는 유대인들이 신앙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신앙은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의(義)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이 말씀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옳은 신앙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부딪치는 돌로 왔다는 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잘 달리고 있는데 그냥 놔두면 골인을 할 것 같아서 넘어져서 실격시키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로 예수그리스도를 유대인들에게 보내서 그들이 선한 삶이라고 주장하는 율법지킴을 선(善)이 아니라고 고발하여 넘어지게 한 것입니다.

 

잘못된 유대인을 넘어지게 한 것은 유대인에겐 한 없은 은혜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대로 방치 해 두셨다면 유대인들은 돌이켜 회개할 기회가 없어지니깐 말입니다.

잘못된 신앙은 빨리 넘어지는게 좋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틀렸다고 하는 예수님이 미워서 죽여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바른 말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이로보건데 세상은 바른 말을 틀린 말로 듣는 아주 이상한 곳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진짜 하나님은 섬기지 않고 가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미움과 배척을 당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것을 고발하고자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선악의 법에 매여 있는 모든 인간들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유대인을 대표로 하여 모든 인간을 고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를 성도에게 적용한다면 예수그리스도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사는 자들은 유대인과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미움을 당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선(생명)이란?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선(생명)을 만들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4절에서 예수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는데 이 생명은 사람들에 빛이라고 합니다.

빛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어둠에 다니지 않습니다.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가짜에게 속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누가 진짜 생명을 가진 자이고 누가 가짜 생명을 가진 자인지 분별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영(靈) 분별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참 생명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만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착한 삶도 참 생명도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떠난 모든 것은 어두움이고 죽음입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산 자와 죽은 자가 갈라지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자는 생명을 가진 자이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은 죽은 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자들은 빛에 속한 자들이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은 어두움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일컬어 빛에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두운 세상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빛에 아들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그 속에 이미 빛을 알아보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빛)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빛이 어두움을 비추는데도 어두움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 속에 빛을 알아 볼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성경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자신들이 어두움에 속해 있다는 것을 고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이고 인류에게 생명을 주실 구원자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소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소경의 기준은 눈을 떴느냐 감았느냐 로 판단하지 않고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이심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판단합니다.

육적으로 소경이라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면 생명에 눈이 뜬 자이고 반대로 눈을 뜨고서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는 영적인 소경인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진짜 생명과 가짜 생명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죄관과, 의관과, 심판관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그리스도가 가는 곳마다 새로운 기준에서 일어나는 충돌사건을 중점으로 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빛이라 함으로서 예수님과 반대 되는 것은 자연히 어둠이 되고, 예수님이 영이면 예수님 이외는 모두가 육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일부러 율법에 반하는 행동을 함으로서 율법주의자들과 충돌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모두가 율법지킴으로 선을 만들 수 있다고 여기는 사상이 죄이며 악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선과 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예수님이 정한 선과 악의 개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정의된 선악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의 증거는 예수그리스도에게 붙어있으면 누구든지 선한 자이고, 떨어져 있으면 악한 자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이 정한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앙을 열심히 말하지 않고 예수 안에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즉 너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느냐! 라고 묻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사람의 말에 속지 않습니다.

 

성도는 빛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에 다니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 빛이 있으므로 밤에 다니지 않게 됩니다.

 

성도는 참 빛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고 살기 때문에 세상에 빛으로 있는 것입니다.

 

빛을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빛으로 사시면 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증거로 사시면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빛이 있습니까?

그럼 한번 내어 놓아 보십시오.

증거하십시오.

 

예수그리스도만 참 빛이고 생명이라고,,,,

이 세상엔 참 빛이 없다고,,,,,

이 세상은 어둠이고 죽었다고,,,,

 

예수그리스도가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빛으로 오셨다고 증거하시며 사십시오.

인간의 것은 몽땅 어둠이고 오직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것만 빛이고 생명이라고 증거하시면서 사십시오.

 

그러면 아마도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고 혼이 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란? 유대인들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을 말합니다.

즉 인간의 행위도 선한 것이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유대인들과 같은 행위주의자들이 핍박을 합니다.

행위주의자들이 복음에 반기를 드는 것은 자기들의 영광이 침해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왜? 내 정성을 무시하느냐? 라고 덤빕니다.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뭐가 잘못 되었느냐고 항변합니다.

누가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을 나무랍니까?

다만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니까 태클을 거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신앙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용서받고 예수님께서 대신 지켜 주신 것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이지 자기가 행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면 행위 주의자들은 누가 인간의 행위를 의롭다고 하나요?

다만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이 보기에 좋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보기 좋은 것하고 옳은 것은 다릅니다.

행위를 공격하면 발끈하는 것이 곧 행위에 의미를 두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신앙은 어떤 일을 많이 했느냐 라는 능력에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를 앞세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참 빛이고 생명이라고 말하다가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혼을 당하거든

아! 나는 빛에 속하였나보다 생각하고 감사하십시오.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당한 고난들을 자랑스럽게 간증하였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망한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아마도 바울의 이런 고백을 복음 속에 담긴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또라이 라고 할 것입니다. 미친 놈 지랄하고 있네! 라고 욕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이런 욕을 먹으면 기뻐하고 춤을 추라고 합니다.

옛날부터 진짜 성도들은 모두가 이런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깜깜함 밤중에 띄엄띄엄 홀로 불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 말입니다.

가로등은 한꺼번에 모아 놓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도를 일컬어 빛이라고 합니다.

즉 가로등이라고 합니다.

성도를 빛이라고 하면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전부 어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둠에 속한 이 세상에는 복음을 알아먹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성도들은 밤중에 불을 밝히는 가로등처럼 가뭄에 콩 나듯이 띄엄띄엄 있답니다.

육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외롭고 고독한 일입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입니다.

 

그냥 고독하면 지낼 만한데 하나님은 그것도 호사스럽다고 이단으로 몰리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참으로 인간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야속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는 잘 곳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신세가 처량해 보였던지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니 예수님께서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늘 함께 있기 때문에 외롭지가 않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혼자서 노세요.

어린 아이가 혼자 장난감 가지고 뚜^뚜^뚜^뚜 하며 상대가 있듯이 전쟁놀이 하듯이,

성도들도 예수님이 눈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노십시오.

 

그 재미가 보통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놀아보지 않은 사람은 말을 하지 마십시오.^^

엄청 재미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세상은 어둠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진짜들은 예수님과 같이 혼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복음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혼난 흔적이 없다면 당신은 가짜일 확률이 높습니다.

 

신앙은 장난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하나님도 실제이고,

예수님도 실제이고,

천국도 실제이고,

지옥도 실제이고,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실제입니다.

 

실제로 이런 일들이 닥치면 놀래지 말고 아 주님께서 미리 말씀해 주셨지!

그 일이 지금 나에게 닥치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감사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이 믿는 그 신앙이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사방천지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빛으로 고독한 삶을 만끽하시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빛으로 오신 예수 안에서 빛으로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참 빛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일이 삶이고 기쁨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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