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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 강해)21강. 믿음이 남기고 간 흔적들 (히 11:33-38)

by coroa 2022. 5. 3.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1강. 믿음이 남기고 간 흔적들 (히 11:33-38)

-.정낙원 목사

 

히 11:33-38=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오래 만에 봄비가 흠뻑 왔습니다.

그동안 희뿌옇던 하늘이 청명해서 시계(視界)가 넓어져 눈도 시원합니다.

수변 공원을 산책하면서 모처럼 비온 뒤의 흙 냄새와 풀 냄새를 맡아 보았습니다.

 

공기가 맑으니 기분도 상쾌합니다.

미간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도 맛이 있습니다.

바람이 맛이 잇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조금 전에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어!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자기가 지나갔다는 흔적을 곳곳에 남겨 두고 있습니다.

마치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저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 보았니!

너를 흔들고 간 바람을!

 

바람이 흔적을 남기고 가듯이 하나님도 우리에게 흔적을 남기시고 있습니다.

믿음에 흔적들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흔적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말씀이 믿음이 남기고 간 흔적들입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흔적이 남듯이 믿음이 간섭한 자리엔 흔적들이 남습니다.

어떤 사람은 산들바람이 지나간 것처럼 작은 흔적을 남기고, 어떤 사람은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커다란 흔적을 남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에 선진들은 큰 태풍이 지나고 나면 가로수가 뿌리째 뽑혀 아픈 상흔(傷痕)을 남기듯이 터지고 빼앗기고 맞은 아픈 믿음에 생채기들이 남았습니다.

성경은 이런 흔적들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를 살았던 성도들은 모두가 성령이 미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케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봅시다.

 

벧전 1:10-11=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약 5: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영광을 증거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고난을 본(本)을 삼으라고 합니다.

잘 기억해 두라는 말입니다.

이로 보건데 구약이든 신약이든 믿음은 어느 시대나 동일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고난을 은혜라고 합니다.

참으로 고약한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라고 하면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은혜를 주십니다.

너희들에게도 반드시 이런 일들이 닥치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고난 받을 것을 축복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을 봅시다.

 

마 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되거든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엄청난 축복이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 전에 계셨던 선지자들도 다 그런 고난을 지나왔다고 합니다.

 

결국 구약의 수많은 믿음에 사람들이 걸어 왔던 그 길은 곧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따라 오라는 발자취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고난을 당하셨고, 우리 역시 당하여야 할 것들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라도 예외 일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시대마다 다르지만 성도들을 각각의 모습으로 믿음이 그리스도의 고난 속으로 밀어 넣었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어저께 기드온의 믿음이라는 블로그의 글에 목사님 한 분이 사모님과 초등학교 2학년 아들과의 대화 내용을 짧게 댓글을 달아 주셨습니다.

사모님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더니 아이가 묻기를 가인이 그토록 정성을 쏟아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받아 주시지 않아서 가인이 너무 불쌍하다고 하더랍니다.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하나님은 너무도 인정머리가 없는 분입니다.

왜? 정성스럽게 드린 가인의 제사를 외면하시느냐 입니다.

가인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 입니다.

 

맞습니다.

가인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굳이 잘못이라고 한다면 아담의 아들로 태어난 것뿐입니다.

비록 죄인인 아담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나요?

 

아니! 열심히 땀 흘려 농사를 지어서 그 중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그게 뭐가 잘못입니까?

도리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아니한 하나님이 나쁜 하나님이지요.

그래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린 아이가 보아도 나쁜 하나님이십니다.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인간의 정성이나 열심은 전혀 고려해 주시지 않고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참 나쁜 하나님이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그렇다면 어느 입장에서 성경을 보느냐에 따라서 좋으신 하나님이 되기도 하고 나쁜 하나님이 되기도 하십니다.

결국 내가 어떤 눈으로 성경을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지 않으면 신앙은 허구로 흐르게 됩니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좋으신 하나님이 각인 되어 있습니다.

막연하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이 지극정성으로 섬기면 하늘에서 그 정성을 보시고 인간의 소원을 들어 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도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열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 정 반대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한 것도 자기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들은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알고 있을까요?

 

이는 마귀가 인간들 속에 거짓의 하나님 상(像)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제일 먼저 너희들이 섬기고 있는 하나님은 거짓 신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너희들 속에 다른 신(神)을 뽑아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면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지금 자신들과 동행하는 하나님은 너무도 달라서 늘 충돌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평생 싸워야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어그러진 하나님 관을 빼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직까지 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비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복음으로 와 닿게 됩니다.

지옥을 모르고서 천국을 알 수가 없듯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왜? 복음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일평생 하나님을 깊이 많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망을 이루고자 하나님을 찾습니다.

살아가면서 욕망도 달라져요.

그러므로 사람은 나이에 따라서 아는 하나님도 달라져요.

 

10대에 아는 하나님이 다르고,

20대에 아는 하나님이 다르고,

50대에 아는 하나님이 다르고,

80대에 아는 하나님이 다릅니다.

 

죄가 욕망을 줍니다.

인간의 욕망은 변해요.

그럼 인간의 시절을 따라서 죄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젊었을 때 욕망과 늙었을 때 욕망이 다르듯이 죄의 성향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인간은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자기 인생과 같이 하나님도 더 많이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가인처럼 왜? 내 것을 안 받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죽입니다.

 

하나님이 뭔데!

왜? 날 무시하느냐!

내 딴엔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느냐! 고 원망하게 됩니다.

 

이 시대 교인들의 신앙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 줄은 모르고 자기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는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힘써 알자!” 라고 했습니다.

 

호 6:1-3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찢으시고 낫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라”고 합니다.

“치시고 싸매어 주시는 하나님을 알자”고 합니다.

“죽이시고 살리셔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알자”고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지금 하나님이라고 하면 손 금 보듯이 다 안다고 자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제발 좀 알라고 합니다.

이 무슨 망발입니까?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온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을 알라고 하십니다.

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입니까?

호세아가 제 정신이 아닙니다.

맞아요.

 

베드로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영이 호세아에게 뒤집어 씌어져서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미친 소리로 듣고 뒤지게 매를 맞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어디 건방지게 하나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을 알라고 하느냐?

시건방지게?

 

호세아의 이런 소리는 지금으로 말하면 평신도가 목사에게 가서 예수를 제대로 알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목사님에게 가서 목사님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마도 욕 실컷 먹고 쫓겨 날 것입니다.

대번에 이단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디 돌아다니면서 이상한 것을 듣고 와서 헛소리 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초림 당시엔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으로 제사장과 율법사들 앞에서 구약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 이야기로 강론 한 것과 같습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너 어디서 배웠어!

어느 신학교 출신이야!

이건 정통신앙과 달라!

그건 이단이야! 이단!

 

어디서 쓸데없는 말을 듣고 복음이 어떻고 십자가 피가 어떻고 하느냐! 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을 바로 만난 사람은 미친 소리를 듣게 되어 있습니다.

이단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보다 하나님을 알기를 바랍니다.

제사보다 긍휼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상하고 찢고 징계하실 수밖에 없는 그 하나님을 배우라고 합니다.

복(福) 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저주(詛呪)하는 하나님을 알라고 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자기 백성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참으로 잔인하십니다.

성도들을 예수를 믿게 하자 말자 곧장 천국으로 데려 가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고 아프디 아픈 상처들을 몸에 아로새겨서 데리고 가십니다.

 

성경은 이런 아픔이 하나님의 깊디깊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懲戒)하신다고 합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신다고 합니다.

 

기어코 자기 백성 속에 그리스도가 받았던 고난(苦難)이라는 그 불도장을 찍어내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속 깊은 사랑을 우리는 언제쯤 헤아릴 수가 있을까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시면서 이건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증거라고 하시는 그 사랑을 깨달을 즈음엔 우리 앞엔 주님의 나라가 가까이 임할 때가 되겠지요.

요단강 너머 가나안이 어렴풋이 보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선진들을 살펴오면서 우리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겐 너무도 큰 아픔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아픔 하나 하나가 몸에 보석처럼 알알이 새겨져 성도의 일생을 수놓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이래서 하늘 예루살렘은 12가지 보석으로 지어졌구나! 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봅시다.

 

계 21:2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10-23=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째는 청옥이요 열 둘째는 자정이라 21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사도요한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그 성을 일컬어 어린양의 신부 같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 문에는 12지파의 이름과 12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문패가 적혀 있다는 것은 그들의 집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 성은 온통 보석으로 꾸며졌다고 합니다.

형형색색의 12가지 보석들은 12사도들의 신앙고백위에 세워진 교회를 말합니다.

우리가 보석입니다.

 

욥은 그 엄청난 시련을 지나고 나면 정금같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정금도 보석입니다.

결국 욥은 고난을 통해서 보석이 된 것입니다.

아니~ 원래 보석이었는데 이물질이 끼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고난이라는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서 그 이물질들을 떨어낸 것입니다.

 

이로보건데 그리스도의 고난은 흙에 불과한 우리로 하여금 정금으로 거듭나게 하는 불가마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가마 속에 집어넣고 불순물을 다 빼내고 보석으로 만들어서 하늘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보석으로 지어진 그 성 안에 어린 양이 등이 되셔서 온 성(城) 안을 밝히신다고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전 보석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갖가지 색깔의 보석들이 어우러져 있는 곳에 불을 비췬다고 해 보세요.

얼마나 화려하겠습니까?

 

물론 천국의 영광스러움을 보석으로 상징하고 있지만 그만큼 황홀한 곳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화려한 천국에 엑스트라가 아니라 어린 양의 신부(新婦)로서 참예케 하시려고 이 땅에서 그 모진 고난 속으로 밀어 넣고 게십니다.

신랑(新郞)이 당한 아픔 속으로 집어넣어서 신랑과 동등하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전 에덴동산에 흐르는 네 강(江)을 상고하다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보석 그러면 요한계시록 21장의 보석으로 지어진 하늘 예루살렘 성이 생각이 난답니다.

힘들고 아플 때마다 이런 말씀이 나를 위로하고 세상을 이기게 하십니다.

 

아! 장차 내가 가야할 곳이 저 곳이지!

우리 주님도 이 땅에서 온갖 수모와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다가 저 곳이 가 계시지!

아브라함도 저기 있고!

모세도 저기 있고!

바울도 저기 있고!

스데반 집사도 저기에 있지!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관념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성경의 약속을 실상으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 속의 이야기가 남의 야기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남이 가는 천국이 아니라 내가 가는 천국이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예수님의 신부(新婦)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라고 생각하니 온 몸에 전율이 오지 않나요!

예수님 이야기가 기쁘지 않으면 당신은 가짜입니다.

신부가 되어서 신랑이 기쁘지 않으면 필시 다른 놈과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천국이 기쁘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세상이 주는 쾌락의 천국으로 사는 사람은 천국이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같이 고난 속에 있는 성도라면 천국은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이 기쁘지 않다면 그 예수는 동화 속에 예수입니다.

동화 속에 예수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주지 못합니다.

동화 속의 예수는 우리와 남남이에요.

타자(他者) 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와 타인이고자 합니다.

예수는 말하나 예수의 아픔은 공유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머릿속으로만 믿음을 남겨 두고자 합니다.

 

믿음이란? 관념이 아니고 실제 삶입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현실입니다.

예수님이 실제이고,

천국도 실제이듯이,

신앙생활도 실제여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음도 실제이고,

내가 영생을 얻은 것도 실제이고,

내가 천국에 가는 것도 실제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고,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고,

예수님의 승천하심이 나의 승천이고,

 

예수님의 천국이 나의 천국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준 연애편지여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볼수록 연인의 냄새가 묻어나고 연인의 사랑이 그리워져야 합니다.

성경이 이스라엘이라는 역사로 기록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성도들 삶 속에서 살과 살이 부대끼면서 아파하고 기뻐하는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는 자리에 내가 울고,

예수님이 속상해 하는 자리에 나도 속상해 하고,

예수님이 아파하는 것에 나도 아파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우리는 한 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도 관념으로 두고자 합니다.

믿음도 신앙도 내 몸에 고통을 주지 않는 동화 속 남의 이야기로 두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해 온 삶에는 반드시 살아온 삶에 흔적이 남게 되어 있습니다.

군인들이라면 전쟁터에서 얻은 상흔들이 있고, 정글에서 살아왔다면 온 몸에 가시에 찔리고 긁힌 아픔의 생채기가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감상주의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영적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합니다.

군사(軍士)란? 전쟁하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전쟁엔 반드시 적(敵)이 있게 마련이고 그 적과 싸움이 있습니다.

또한 싸움엔 반드시 이김(勝)과, 짐(敗)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긴 자는 이긴 자로서 누리는 영광이 있고, 진 자는 진 자로서의 수치가 주어집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기를 이기는 자에게 갖가지 상급을 주시겠다고 약속 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고 (2:7),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으며 (계 2:11),

이기는 자는 감추었던 만나를 받고 새 이름을 얻게 되며 (계 2:17),

이기는 자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으며 (계 2:26),

이기는 자는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며 (계 3:5),

이기는 자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고 (계 3:12),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고 (계 3:21),

 

위 모든 것은 천국에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보세요.

천국은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유업(遺業)이라고 하잖아요.

천국은 이긴 자를 위한 유업으로 준비가 되어 있고, 지옥은 진 자를 위하여 유업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걸 어떤 이들은 오해하여서 가르칩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지면 끝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싸워서 이기라고 독려합니다.

영원토록 지옥 불구덩이에서 고통당하지 않으려면 죽도록 충성하라고 합니다.

 

교회마다 목사들이 그 따위로 신앙생활을 해서 천국에 가겠느냐고 분발을 촉구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천국은 우리가 싸워서 쟁취하는 것으로 보여요.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했잖아요.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천국은 빼앗는 자가 얻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러니 목사들은 싸워서 이기라고 하잖아요.

자기는 성경대로 가르친다고 하면서 천국을 침노하여 들어가라고 하잖아요.

문자적으로 보면 할 말이 없어요.

다 맞으니까요.

 

그래서 교인들은 목사님에게 무엇과 싸워야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아니! 싸워서 이긴 자라야 천국에 간다고 했으니!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알려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싸울 것이 아닙니까?

 

그럼 목사들은 마귀와 싸워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면 할 말이 없지요?

어디 마귀가 보여야지요?

눈에 보이면 어찌 좀 해 보겠는데!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막연해 집니다.

 

그래서 또 묻습니다.

목사님 마귀하고 싸우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그거야 죄 짓지 않고 사는 것이지요.

마귀는 죄를 짓게 하니까요?

 

그럼 죄는 어떤 것입니까?

그야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해서 그랬잖아요.

에덴동산이 천국의 모형인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불 순종해서 쫓겨났으니 이젠 성도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서 들어가야지요.

그러니 성도는 하나님 말씀에 열심히 순종하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 열심히 보고 말씀에 순종하며 사세요.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에 봉사하고!

주일 성수 철저히 하고!

십일조 빼 먹지 말고!

세상 사람들처럼 죄 짓지 말고 착하게 살고!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교회 생활 충실히 하면 됩니다.

 

이런 것이 이 시대 교회에서 목사들이 가르치는 내용들입니다.

이런 것을 하면 신앙생활 잘 한다고 합니다.

기독교 TV에 나오는 목사들이 하는 말입니다.

교회마다 목사마다 가르치는 내용이 모두가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목사가 제시한 것들을 열심히 지키기에 바쁩니다.

다 맞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말이죠.

성경을 펴면 아무리 보아도 이런 가르침은 마귀와 싸우는 전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2제자들이나 사도 바울은 이런 것과 싸운 것이 아니거든요.

 

바울이 만약 이런 것들과 싸웠다고 한다면 가는 곳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고, 주일 성수 잘하고, 십일조 때 먹지 말고, 목사님 말에 순종하고, 교회에 충성하라고 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의 증거를 보면 이런 것과 싸우지 않았어요.

바울은 도리어 이런 것들을 해야 한다는 신앙과 싸웠어요.

 

지금 목사들이 가르치는 것이 바울이 가르치는 것과 달라요.

완전히 반대에요.

바울은 오직 십자가 이외는 전하지 않기로 작정을 하였다고 했어요.

 

고린도전서 2장입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왜?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기로 작정을 하였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서만 구원의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게 하는 구원의 능력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에 특심했어요.

 

교회 열심히 다녔고,

주일 성수 열심히 했고,

전도 열심히 했고,

충성 봉사 열심히 했고,

기도생활과 금식생활을 열심히 했고,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이런 것이 예수를 죽이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난후 울법 신앙을 다 배설물로 버렸어요.

바울은 율법신앙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오직 십자가만 증거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율법신앙이 하나님 앞에 원수라고 하였어요.

율법 신앙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라고 했어요.

 

알다시피 이 시대 목사들이 가르치는 것은 모두가 바울이 배설물처럼 버린 것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붙잡지 못하도록 싸웠습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우리가 싸울 것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에베소서 6장을 봅시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우는 것이라면 위에서 말한 교회에 충성하고, 십일조 철저히 하고, 주일 성수 잘하고, 착하게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지요?

이런 것은 인간의 의지나 각오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들이니까요?

혈과 육이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신앙생활 하다가 전부 지옥에 갔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독사 새끼라고 하시면서 지옥으로 가라고 했어요.

율법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던 자들은 몽땅 유황불 속에 들어갔어요.

 

이러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유대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시대 목사들이 가르치는 신앙의 내용이 유대인들과 똑 같기 때문입니다.

 

경건주의를 외치고,

성화를 부르짖고,

청교도 운동을 벌려도 유대교를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바울이 버렸던 것들입니다.

바울이 버렸던 것을 지금 이 시대 교회들은 신앙이라고 붙잡고 있어요.

아무리 겉으로 다르게 포장을 하여도 그 내용은 동일합니다.

인간의 행함이라는 본질은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어요.

그래 보아야 모두가 인간들의 경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경건을 경건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의(義)를 인정하지 않았거든요.

인간 중에서 최고의 의(義)를 가진 자라고 칭찬은 하였지만, 하나님 앞에선 의(義)로 인정받지 못하고 모두가 지옥에 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지옥에 갔다는 것은 진(敗) 자들이란 말입니다.

실패한 자란 말입니다.

아까 이긴 자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고, 진 자는 지옥을 유업으로 받는다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처럼 신앙생활을 하여서는 안 되겠지요.

 

적(敵)과 싸우려면 적(敵)을 알아야지요.

그럼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적(敵)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싸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적(敵)도 모르고 싸운다는 것은 권투 선수가 허공에다 주먹질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향방(向方) 없는 싸움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을 봅시다.

 

고전 9:26-27=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사도바울은 성도가 싸워야 할 것은 자기 몸(肉身)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왜? 자기 몸을 쳐서 복종을 시킨다고 할까요?

바울의 이 고백으로 보건데 적(敵)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싸워야 할 상대는 마귀입니다.

그런데 그 마귀는 항상 우리의 육신을 볼모로 역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몸을 쳐서 복종 시킨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술 담배를 끊었다는 말일까요?

남에게 사기 치지 않았다는 말일까요?

금욕생활을 하면서 간음하거나 방탕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말일까요?

그도 아니면 절간이나 무당들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테레사 수녀나 김수환 추기경처럼 빈민을 돌보거나 민주화를 위해 독재 정권과 싸웠다는 말입니까?

 

물론 바울은 방탕하게 살지 않았어요.

그건 신앙과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선을 지키고 산 것을 뿐입니다.

바울이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우리도 몸을 쳐서 복종 시킬 것이 아닙니까?

 

바울이 다메섹 이후에 무엇과 싸웠는지를 알면 정답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바울의 다메섹 이전과 이후는 무엇인 다릅니까?

살펴봅시다.

 

바울은 다메섹 이전에는 율법 아래 있었고, 다메섹 이후엔 예수님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안이란?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으로 의로워지려고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엔 율법으로는 의로워 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하나님 앞 의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이후엔 율법적 의를 버리는 싸움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젠 적극적으로 과거에 신앙을 버리는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버린다 함은 율법으로 의로워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는 일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된다고 가는 곳마다 외치고 다녔어요.

율법은 항상 인간의 몸을 주장합니다.

율법을 가장 잘 지켰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들의 신앙을 알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봅시다.

 

눅 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몸으로 만들 수 있는 착함은 다 만들어 냈습니다.

인간의 착함이란 착함은 다 만들어 내고 살았습니다.

불의, 토색, 간음하지 않았다는 것은 윤리 도덕적으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는 말입니다.

거기다가 금식하고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하였다는 것은 말씀대로 살았단 말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이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삶을 살지 않으면 탄핵하고 옥에 가두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난 후 도리어 이런 것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는 것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를 죽이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라고 외친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자기 몸을 쳐서 복종 시킨다는 말은 자기 몸에서 율법적 신앙이 자리 잡지 않는 싸움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 육신을 의뢰하지 않는 싸움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행여라도 자기가 행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지나 않을까 염려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긴 이김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긴 것은 바로 율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塗抹)하셨습니다.

 

골로새서 2장을 봅시다.

 

골 2:14-16=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의문에 쓴 증서란 율법을 말합니다.

의문에 쓴 증서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죽음으로서 다 처리 했다는 말입니다.

왜? 의문에 쓴 증서를 죽음으로서 처리해야만 했습니까?

이는 죄인은 율법의 요구대로 살아 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었을 것 같았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지 않았습니다.

자기백성들이 율법을 지켜내지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백성들의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8장입니다.

 

롬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이 육신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육신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가 없는 것을 하셨느냐 하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육신에 죄를 정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즉 인간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죽는다는 겁니다.

단 한 말씀이라도 어길 시에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 율법의 요구입니다.

 

하나님은 온 율법을 지키다가도 단 하나만 어겨도 몽땅 어긴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하십니다.

봐 주는게 없습니다.

율법은 사정을 봐 주거나 이해해 주는 것이 없어요.

 

야고보서 2장에서 무어라 하는지 봅시다.

 

약 2:10-11=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온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것이 된다고 하지요.

이건 최선을 다해서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완벽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완벽한 자란 처음 창조된 그 모습으로 있으란 말입니다.

처음 창조된 인간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같이 거룩하고 온전하라는 말입니다.

이건 죄인에겐 불가능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육신의 죄를 정하게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죄를 정하셨다는 말은 죄 값을 담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죽으심으로 다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의문에 쓴 증서가 다 도말이 된 것입니다.

이젠 율법이 예수 안에 잇는 성도들에겐 채무를 갚으라고 말할 수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갚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턴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율법의 요구대로 살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뭡니까?

그건 예수님께서 의문에 쓴 증서 속에 있는 것을 보면 압니다.

의문에 쓴 증서에 적힌 것을 봅시다.

 

골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의문에 쓴 증서에 있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신앙을 총망라 한 말씀입니다.

율법 속에는 각종 지킴이 있어요.

 

제사장도 있고,

성전도 있고,

안식일도 있고,

십일조도 있고,

제사도 있고,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마셔야 할 것과 마시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도말시켰습니다.

이제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율법이 금하는 돼지고기를 먹든 술을 먹든 폄론(貶論)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걸 지금 식으로 말하면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 가지고 따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행실을 가지고 신앙의 여부를 가늠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네가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고 따지지 않겠다고 합니다.

네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 로 따지지 않겠답니다.

 

성전에 나갔든지 안 나갔든지 묻지 않겠다고 합니다.

안식일을 지켰던지 안 지켰던지 따지지 않겠다고 합니다.

십일조를 냈든지 안 냈든지 따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 따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성전이 없으니 교회 짓는다고 돈을 낼 이유도 없습니다.

안식일이 없으니 주일 성수라는 것도 없습니다.

제사장이 없으니 목사의 말에 순종할 이유도 없습니다.

십일조도 없으니 강제로 징수 당할 이유도 없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없으니 먹고 마시는 것 가지고 신앙과 결부시킬 이유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다 해결하셨다는 것만 있습니다.

이젠 예수님의 피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것을 요구하면 예수님의 피를 내어 놓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율법으로 너! 이런 것 다 지켰어! 라고 물으면 예수님께서 다 도말하셨는데요! 라고 해야 합니다.

마귀가 율법을 가지고 너! 율법대로 안 살면 죽는다! 라고 하면 예수님이 내 대신 죽었잖아! 라고 해야 합니다.

 

야! 이 마귀야!

우리 주님이 내 대신 다 담당해 줬거든!

그래야 합니다.

이게 신앙의 싸움입니다.

 

새 언약 하에선 오직 싸워야 할 싸움은 이것뿐입니다.

아주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마귀는 항상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와서 순종 할 것을 요구합니다.

 

마귀가 들고 오는 하나님 말씀이란? 율법입니다.

 

주일성수하는 것이나,

십일조 하는 것이나,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나,

교회에 충성 봉사 하는 것이나,

착하게 사는 것이나,

무당이나 절간에 가지 않는 것이나 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인간 쪽에서 행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마귀는 충성하라고 하지 충성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지 도적질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간음하지 말라고 하지 간음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라고 하지 불순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착하게 살라고 하지 술 쳐 먹고 개차반 같이 살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이런 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그것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고자 함입니다.

마귀는 율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가립니다.

 

이런 것을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운다고 합니다.

 

갈 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이런 것을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는다고 합니다.

 

벧후 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이런 것은 버린 여자에게 다시 장가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눅 16:18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마귀는 마치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의 눈길을 선악과로 생명과를 보지 못하게 하였듯이 교인들의 눈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에서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쪽으로 돌려버립니다.

 

쉽게 설명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훼손합니다.

교인들의 눈을 십자가 말고 율법에 고정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마귀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예수님의 어떤 것을 훼손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도말 시킨 일을 복원(復原)하도록 하겠지요.

 

십자가에서 도말 시킨 율법신앙을 복원(復原)시키겠지요.

왜냐하면! 율법 신앙을 복원(復原)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무력화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헛것으로 돌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9-11=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의문에 쓴 증서 속에 담겨 있는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악한 일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에게 율법 신앙을 행하게 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헛 죽은 것으로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율법 신앙만 복원(復原) 되면 예수 믿을 이유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가 지키면 되는 것이니까요?

율법은 행하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니잖아요.

 

율법 아래선 믿을 것이 없어요.

오로지 행하고 복종 할 것만이 있어요.

그래서 율법을 천한 초등학문이라고 하고 종노릇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과 유대인의 싸움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잘 나와 있어요.

유대인들은 어찌하든지 율법 신앙을 복원(復原)하려고 하였고,

바울은 율법신앙을 폐기(廢棄)하려고 했어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라고 했고,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서 만 의롭게 된다고 했어요.

이 둘은 서로가 양보 할 수 없는 겁니다.

서로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으로부터 고난을 당한 것은 모두가 율법 신앙을 악(惡)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고자 한 것은 인간의 의(義)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신앙이 인간의 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싫은 겁니다.

 

인간의 의가 부정 당한다는 것은 인간 자체를 부정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인간이 자기가 부정 당하는데 기뻐하겠습니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하는 일이 틀렸다고 하면 화가 납니다.

이게 죄의 본성입니다.

 

가인이 그랬지요.

아니 제사를 받고 안 받고는 하나님 마음이잖아요.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이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죽여 버린 겁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곧 하나님을 죽인 겁니다.

 

여러분 누구에게 무시당해 보세요.

화가 나지요.

만약 예수님께서 유대인 신앙을 인정했으면 죽지 않았어요.

그 거룩하고 자비롭고 착한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겠어요.

하지만 예수님이 그들의 신앙을 거부해 버리니 거룩이고 자비고 착함이고 없어요.

나를 반대하는 자는 죽여야 해요.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들을 공격하는 사람들도 다 이런 부류입니다.

우리는 사실이 이것이다! 라고 말하는데, 저쪽에선 꼭 너희만 맞느냐! 라고 합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꼭 예수님의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요.

예수님 십자가뿐이라고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세요.

 

꼭 갈라디안 교회 같아요.

왜? 십자가 피만 말하느냐?

성화도 말하고!

성도의 행함도 말하고,

교회의 유지보존도 말해야 하지 않느냐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런 질문에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성화나! 행함이나! 교회의 충성이 죄사함을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뿐입니다.

 

여러분 성화한다고 영생이 주어지지 않아요.

바리새인들이 성화를 못해서 지옥에 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의 피가 없어서 지옥에 갔어요.

 

이렇게 말하면 예수의 피도 믿고 성화도 하면 안 되느냐고 따집니다.

아니 예수의 피가 성화인데 무슨 성화가 필요합니까?

예수님 피가 거룩하잖아요.

예수님의 피 이외는 거룩한 것이 없지요.

그러면 다른 것엔 의미를 두지 말아야지요.

예수님의 피에 우리 것을 덤으로 끼우려고 하면 안돼요.

 

여러분 성막의 지성소에 보면 법궤가 있습니다.

이 법궤 위에는 일 년에 한 번씩 대 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온 이스라엘의 죄를 속함 받는 속죄 제사를 지냅니다.

그런데 법궤를 덮고 있는 시은좌(뚜껑)에 두 천사가 눈을 부릅뜨고 딱 지키고 있어요.

왜? 지키고 있는가 하면 다른 피를 뿌릴까봐서입니다.

 

법궤 속에는 세 가지 증거물들이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어요.

곧 우리 모두입니다.

우리 위에 피가 뿌려지는데 그 피가 오직 예수님 피여야만 해요.

인간의 성화가 끼어들면 안돼요.

 

그러니 신앙생활의 싸움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의롭게 되는 것을 사수하는 겁니다.

바울은 이걸 위해 평생 진돗개처럼 싸웠어요.

최고의 성화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죄사함 얻는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최고의 성화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만이 거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이란?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인간에겐 하나님의 속성이 없어요.

 

바울과 유대인의 싸움은 곧 마귀와의 싸움인 겁니다.

마귀는 인간의 행함도 거룩의 한 부분으로 쓱 밀어 넣으려고 해요.

그러나 바울은 절대 이건 양보 할 수 없다고 한 겁니다.

 

거룩은 오직 예수님의 피 뿐이라는 겁니다.

바울은 다 양보하겠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은 양보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시대 성화론 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말하면 신경질을 내는 이유는 인간의 행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되어서 나쁜 짓하고 살면 되겠느냐! 라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느냐! 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신자들이 착하게 살아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큰 오해를 하고 있어요.

 

신자는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는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요.

내가 착해질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에게서 착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비 성경적입니다.

죄인에게선 의로움이 안 나와요.

선이 나올 수 없단 말입니다.

선이 나오면 죄인이 아니고 의인입니다.

의인이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의를 본받으라고 했지요.

그런데 바리새인의 의로는 천국이 갈 수가 없다고 했어요.

천국엔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있어야만 갈 수가 있다고 했어요.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예수님의 의입니다.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인간에겐 없어요.

그럼 인간에게선 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에겐 하나님이 인정하는 착함이나 선이나 의가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 교인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하면 안 돼요.

교인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하면 그 착함 속에 의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차라리 성질대로 사세요! 라고 하는게 나아요.

그런 말 안 해도 어차피 인간은 자기 성질대로 살게 되어 있어요.

 

당신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착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 피로서만 의로워진다고 해 주어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해 주어야 해요.

예수님의 피 이외는 그 어떤 것도 의가 되지 않는다고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화론 자들의 또 하나의 착각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악을 없애라고 하는 줄 알아요.

하나님께선 이 세상에 악을 없애라고 하시지 않아요.

 

어둠을 물리치라고 하지 않고 빛으로 있으라고 합니다.

빛으로 사는 것이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에요.

어둠을 어둠이라고 알리기 위해서 빛에 속한 자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무슨 뜻인 줄 알겠습니까?

 

이 세상은 선악 아래 있어요.

선악은 따로 분리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선과 악은 하나입니다.

마치 손바닥과 손등 같아요.

악이 없으면 선도 없어요.

선은 악이 있을 때 선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곡식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을 뽑지 말라고 했어요.

가라지가 있음으로 곡식이 드러나는 겁니다.

가라지로 곡식의 다름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교회 안에 마귀가 없으면 안돼요.

마귀가 있어서 성도를 자꾸만 괴롭혀 주어야 해요.

그래야 성도로 드러나요.

 

다름을 놓치지 마세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신자와 불신자가 똑 같이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은 신자와 불신자를 다르게 대합니다.

왜냐하면!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신자는 긍휼의 그릇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긍휼로 죄를 묻지 않는 것입니다.

불신자에겐 너는 지옥에 갈 놈이라는 것을 알리면서 신자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 잇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다름으로 오신 겁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려고 오신 겁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은 지옥 백성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천국백성으로 있는 겁니다.

그리고 성화론 자들은 인간의 행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누가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충성하겠느냐! 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믿으면 되지 왜? 교회에 의미를 두고 관심을 둡니까?

교회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뭔가 교회를 통하여서 얻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충성 봉사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잘 새겨들으세요.

 

교회란? 성도들이 모여서 말씀을 배우고 교제하는 공간에 불과한 곳입니다..

특별하게 만들 이유가 없어요.

교회에 무관심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신전화 할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왜? 교회를 신전화 하여서 사람들을 붙잡아 두고자 하는 것은 교회에 의미를 두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의미를 두게 되면 우상의 전당이 되고 맙니다.

인간들 속에는 우상 성이 들어 있어요.

뭔가 의미를 두고자 하는 우상성이 눈에 보이는 것을 붙잡고자 해요.

 

그러므로 도리어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 의미를 갖지 못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화려하게 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그냥 모임의 장소로만 사용하면 되요.

교인들이 많아서 장소가 좁으면 지역별로 나누면 됩니다.

왜? 수만 명 수십만 명씩 모여야 합니까?

 

교인들은 수 천, 수 만 명씩 모으고자 하는 것은 목사와 교인들이 탐욕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모두가 큰 집단을 이루어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신종 바벨탑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이외 다른 것은 붙잡지 못하도록 허무는 일을 하시는데 목사들은 세우고자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감당이 안 되겠지요.

맞아요.

복음으로 사는 자와 종교성으로 사는 자와는 서로가 감당이 안 되어요.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믿음에 선진들을 한마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감당치 못하였다 함은 타협하지 않고 살았단 말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였다 함은 세상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 시대 가치관으로 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로 말하면 십자가 피만 고수하고 살았단 말입니다.

성화나 교회부흥이나 관심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들은 무엇을 위해서 세상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았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시대상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습니다.

노아의 때를 일컬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세상 살아가는 데에만 신경 쓰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의 약속에 신경 쓰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세상 살아가는 데에는 곤란을 당할 수밖에 없지요.

잘 살 수가 없지요.

 

오늘 본문에 거론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노아처럼 먹고 살기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세상 적으로 실패한 삶을 살았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35-38=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악형과,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힘과, 돌에 맞는 것과, 톱에 썰림과, 칼에 죽임당하는 것과, 궁핍과, 유리방황과, 학대와, 암혈과 토굴에서 살았다는 것은 인간들이 피하고자 하는 삶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오늘 본문은 자랑할 만한 삶이 아니고 부끄러운 삶에 모습들입니다.

모두가 힘없이 살다가 죽어간 자들의 모습들입니다.

마치 실패를 작정하고 살아간 자들처럼 고난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건 바울의 간증과 같아요.

 

고후 6:4-5=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고후 11:23-27=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전 4:9-13=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바울은 매 맞는 것은 다반사이고 굶고 자지 못하고 욕을 먹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거지같은 꼴을 당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런 고난을 당한 것은 오직 하나 복음 때문입니다.

십자가 피를 전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율법만 전했으면 이런 고난을 당하지 않았어요.

외곬수처럼 오로지 십자가 피만 전하다 보니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고 한 겁니다.

세상에 얼마나 십자기 피를 싫어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마귀는 예수님 피만 말하지 않으면 다 줘요.

교회부흥도 시켜주고, 세상에 부귀영화도 줘요.

하지만 예수님 십자가 피만 전하면 국물도 없어요.

철저하리만치 유린합니다.

일가친척으로부터도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하게 합니다.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피 속에 담겨 잇는 옵션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에서 버림당하고 죽어서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처럼 영문 밖에서 버림당하여서 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간섭하지 않으면 이런 삶을 살아낼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간섭하면 신구약을 막론하고 다 이렇게 밀어 내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 속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누구라도 이런 삶을 동경하는 사람은 없어요.

저 역시도 인간적으로는 싫어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이단이라 욕먹고 목회하기 싫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음이 이러한 삶으로 끌고 가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나의 원대로 하지 않고 십자가 속에 담겨진 옵션대로 하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너무도 야속합니다.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처럼 고난당하게 하여야 한단 말입니까?

그건 하나님께선 죄를 그만큼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이런 삶을 살도록 인도하였다는 말은 믿음의 주체자인 예수님의 고난 속으로 밀어 넣었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결국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좋으면 이 세상에서 고난 없이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본능이 신앙을 핑계 삼아 편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조그마한 시험이나 고난이 닥치면 낙망하고 실족하게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삶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이김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이김은 다릅니다.

어느 인간이 실패한 인생을 살고 싶어 하겠습니까?

모두가 세상에서 자기 이름 남기고 싶어 하고 영웅이 되기를 원하지요.

 

세상은 영웅이 되어 살아남아야 성공한 자라고 인정하잖아요.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녀들에게 성공하라고 가르치잖아요.

이는 모두가 힘에 논리로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세상의 기준 때문입니다.

 

이건 교회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에 미혹되면 신앙생활을 성공주의로 몰아가게 됩니다.

강한 자가 아름답고, 부요와 많음이 좋은 것이라는 관념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적고 낮은 자들은 실패한 자들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은 성공과 실패를 물량주의 사고로 정의합니다.

결국 이러한 세상 적인 가치 기준 때문에 거짓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 믿음이란? 히 11장의 증거와 반대로 세상에서 살아남게 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을 빙자하여 성도들의 삶을 영웅 신화로 만들어 가려는 것입니다.

 

마귀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를 피하게 하는 삶을 살게 만듭니다.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못 박아 버리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십자가를 이용하여 정과 욕심을 채우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세상 상식으로는 역설적인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역설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합니다.

 

성도로 하여금 세상에서 역설적인 삶을 살게 하려고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역설적인 삶을 일컬어 성경은 이긴 삶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믿음을 주신 것도 세상을 이기게 하려 하심입니다.

 

요한일서 5장을 봅시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음을 인간의 입장에서 이해하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세상방식으로 이기지만,

믿음이 옴으로부터는 하나님방식으로 이기게 합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에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버리는 삶으로 몰아가십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함이 아니라 욕심을 비우는 삶으로 몰아가십니다.

 

예수님의 삶이 세상을 이긴 삶의 표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찌하든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장을 봅시다.

 

빌 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사도 바울은 땅에 것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땅에 것은 배설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바울의 소망은 어찌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하려고 살아갔습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고자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과 같이 죽고 싶다는 겁니다.

 

이건 제정신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이 추구하는 삶은 인간의 본성과 거스리는 삶입니다.

인간은 일평생 자아 확장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남보다 더 높아지고, 남보다 더 갖고 싶고, 남보다 더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남이 가진 것은 다 갖고 싶어 하고, 남이 누리는 것은 다 누리고 싶어 하는 게 인간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낮아지고 버리고 싶어 하지를 않아요.

몸집이 불어나듯이 자기 세계를 점점 넓혀가려고 해요.

인간이란 묘해서 타인을 통해서 자기 이미지를 늘 각인해 갑니다.

 

지난번 김연아 선수가 고려대학교 입학식 때 입은 옷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품귀현상을 몰고 왔다고 합니다.

이는 김연아 선수가 입은 옷을 자기가 입음으로서 대리 만족을 느끼고자 함에서입니다.

김연아가 입은 옷을 입으면 자신이 마치 김연아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옷 장사하는 사람들이 유명 연예인들을 고액을 주어서라도 광고로 사용하는 겁니다.

 

김연아 선수를 광고로 쓴 제품마다 대박이 났다고 합니다.

에어컨이든, 자동차든, 우유든,,,

김연아에게 물어 보세요.

자기는 그 제품 안 써요.

 

화장품 광고를 예쁜 피부를 가진 배우들을 쓰는 것도 그 화장품을 쓰면 그렇게 되는 줄로 착각을 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나 그 배우는 그 화장품 안 써요.

그 화장품을 사용해서 피부가 깨끗한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겁니다.

 

사람이란? 타인의 시선을 먹고 사는 자들입니다.

늘 타인을 의식하고 살아요.

이걸 사회성이라고 하는데!

사회 속에서 자기는 남기고 싶어 하는 자아 확장 욕망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항상 있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소유이든, 명예이든, 권세이든, 인기이든,,,,,

그러나 하나님은 있음에서 없음으로 내 몹니다.

넌 없어져야 한다고 밀어 붙입니다.

넌 죽은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의 인생에 개입을 하셔서 하나 하나 차압해 나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를 때에는 모두가 내 것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보면 내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아 확장을 위해서 동분서주 하였습니다.

율법 아래서 열심을 낸 것도 다 자아를 넓히는 수단이었습니다.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자아를 버리는 쪽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땅에 있는 것을 하나 둘씩 버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진정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자유란? 자아로부터 해방 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율법은 자아를 확장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율법을 지켜보세요.

마치 마일리지 쌓듯이 얼마나 뿌듯한데요.

 

아! 오늘은 성경을 석장 보았다.

내일은 넉 장을 보아야지!

아! 오늘은 기도 한 시간 했다.

내일은 두 시간 해야지!

 

이처럼 인간은 날마다 법을 깨트리고 새로운 법을 만들어가요.

법을 만든다는 말은 점점 나아지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사람은 점점 더 나아져서 신의 경지에 까지 나아가라고 해요.

 

이게 불교잖아요.

불교에선 내가 곧 부처가 되는 겁니다.

부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부처가 되어 가는 겁니다.

부처란? 모든 것을 깨달은 신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선 부처를 죽여야 진정한 부처가 된다는 말을 합니다.

이게 기독교에서 예수를 죽여야 예수가 된다는 이상한 집단이 생겨나게 만든 겁니다.

 

어떤 집단은 자기가 곧 예수라고 해요.

예수를 믿을 것이 아니고 내가 곧 예수가 되라는 겁니다.

예수가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우리도 말씀대로 살면 예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요.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요.

왜? 그렇습니까?

자아를 확장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자아를 부인하고 내 속에 예수가 확장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죽이고 예수님이 나를 주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걸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덮쳐오면 자아에게 욕망을 주는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욕망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내 속에서 펴져 나갑니다.

그래서 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증거하게 합니다.

이걸 우리 삶에 적용하면 믿음을 받으면 땅에 대한 욕망은 죽어지고 하늘에 대한 욕망이 살아납니다.

 

골로새서 3장을 봅시다.

 

골 3:1-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보세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땅에 것은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지요.

버릴 것이 있고 취할 것이 있다고 하지요.

 

버릴 것은 뭡니까?

땅에 것이잖아요.

 

그러고 취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늘에 것이지요.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산다고 하였지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당하셨던 아픔들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해보면 듣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실망할 것이 아니라 아! 우리 주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니 미움을 받았지! 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아픔에 동참하게 되는 겁니다.

 

믿음이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서 봐라! 예수님도 너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이단 소리 듣고 핍박과 미움을 받았다고 가르쳐 줍니다.

이럴 때 비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관념이 아니라 실제화 되어서 우리 몸에 새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처럼 살아보세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고 미워합니다.

지금 펀드가 대박이 나고 주식이 대박이 나서 기뻐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해 줘보세요.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해 보세요.

하나님께 부요치 못하면 다 지옥에 간다고 해 보세요.

뭐 이런 재수 없는 놈이 있느냐! 라고 화를 낼 것입니다.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겁니다.

 

전 처음에 복음을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족들부터 싫어하는 겁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하지만???

처음엔 적잖아 당황했어요.

 

그러나 복음을 깨달아 가면서 믿음이 나를 주장하니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이젠 누군가에게 말하려고 해도 이거 말해 봐야 좋아하지 않을 텐데! 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그러다가 알아들으면 아니! 우째 이런 기적이 다 있나!

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감사할 일입니까?

 

저 역시도 처음엔 마음속으로 복음을 핑계로 교회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복음을 알아가면서 아! 내가 복음을 빙자하여서 나를 확장하고자 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목사에게 있어 교회는 자아확장을 이루는 욕망의 대상입니다.

항상 교회 부흥을 욕망하고 있어요.

복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아 확장을 위해서입니다.

교회 부흥을 외치는 목사들은 모두가 교회를 통하여서 자아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큰 교회를 만들어서 자기를 세상에 들어내고 싶어 하는 겁니다.

 

이건 목사라면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있어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사람이 하나라도 오면 기분이 좋아지고 한 사람이라도 나가면 기분이 상해지는 겁니다.

 

이건 복음 하고 상관없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다만 복음을 알기 때문에 욕망이라는 죄를 이길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고 회개할 뿐입니다.

주여! 제 꼬라지가 이렇습니다!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나부터 깨뜨려 가시더라고요.

복음을 깨닫고 나니 남이 은혜 받는 것은 둘째이고 내가 먼저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가 만난 예수도 없이 백날 십자가가 어떻고 말해봐야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전 솔직히 내가 은혜 받기 위해서 이런 글을 씁니다.

설교를 쓰는 것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쓰면서 미처 깨닫지 못하던 것들을 깨달아가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결국 제 은혜 받는 공부를 하는 겁니다.

 

저희들 교회엔 수요일 저녁 예배에 몇 사람 안 나와요.

그것도 잘 안 옵니다.

때로는 아내와 저 둘이서 드릴 때가 많아요.

어떨 땐 수요 예배를 없애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래요.

제발 빠지지 말라고!

그 이유는 단 한 사람이라도 나와야 내가 설교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안 나오면 설교준비 하지 않게 될까봐서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게을러져요.

사람은 타율에 의하여서 움직이지 스스로는 잘 안 돼요.

 

논리적으로는 목사가 교인이 나오든 안 나오든 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알아요.

하지만 안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란 스스로 척척 알아서 살아지지가 않는 종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도록 붙여 주실 때가 있어요.

사람을 붙여주어서 나를 철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감사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지금은 블로그가 나에게 말씀을 가까이 하게 동기부여를 해 주고 있어요.

세상에 히브리서 강해를 보면 어떤 글은 조회 수가 3만 명이 넘어요.

글 마다 조회수가 보통 5천명 이상이에요.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있는가 싶어요.

 

한 달 보름 사이에 약 십만 명이나 다녀갔어요.

요즈음엔 블로그에 하루에도 수천 명씩 들어오니 이젠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게 되었어요.

어제도 3500명이 다녀갔어요.

지난번에 5600명이 다녀갔더라고요.

 

밤새워 가면서 보시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자고나면 수백 명씩 다녀갔어요.

물론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놀라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그래서 새로운 고민이 하나 생겼는데 이젠 교회보다 블로그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어요.

이 얼마나 감사 할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제 게으름을 아시고 적절하게 조치를 해 놓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믿음 없는 이 사람이 땅에 것을 바라 볼까봐서 하늘에 것에 욕망을 더 품고 살라고 하신 것이라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암튼 사람들이 복음을 싫어하는 이유는 모두가 살고자 하는 존재의 기반을 허물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으로 기반을 쌓고자 하는데 그게 죄라고 하니 짜증나는 겁니다.

앞으로 이렇게 저렇게 살 것이라는 계획을 세워서 살고자 하는데 다 부질 없는 짓이라고 하니 화가 나는 겁니다.

 

인간은 눈만 뜨면 생각하는 것이 땅에 것입니다.

그래서 왜? 하늘에 대한 것에 욕망이 없느냐고 하면 반발을 하게 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에 대한 욕망이 없느냐?

땅에 것은 땅강아지처럼 코를 박고 살아가면서 왜?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면 벌레 씹은 얼굴을 하느냐! 라고 하면 얼굴을 찌푸립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늘에 대한 것은 인색하고 땅에 것에 풍요롭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에게 믿음으로 이렇게 저렇게 간섭하시는 겁니다.

믿음이 덮쳐 오면 잠시 잠간 하늘에 대한 욕망이 일어납니다.

아! 내가 잘못 살고 있구나! 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늘에 것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요.

신자라고 한다면 다 그렇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이건 우리 힘으로 되지 않아요.

이건 우리가 각오하고 힘쓴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그렇게 만들어 가야만 할 수가 있는 일들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육신의 소욕을 이겨낼 장사가 없어요.

육신의 소욕을 이겨낼 장사가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나 믿음은 소용치 않아요.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믿음이니 은혜를 주신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누가 희롱당하고 매 맞고 실패하며 살고 싶겠어요.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나 다 동일하게 이 세상에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인데 스스로는 그 고난에 참예하고픈 생각을 하겠습니까?

다 피하고 싶지!

 

그래서 믿음이 억지로 그리스도의 고난 속으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닥쳐오면 아프다고 한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오면 아파요.

그것도 많이 아파요.

 

자기가 부인되는 것만큼 아픈 것이 아디 있겠어요.

나로 살고 싶은데! 넌 없는 자야! 라고 하면 살맛이 나겠어요.

그래서 우리 육신의 소욕은 나 여기 있소! 라고 문방구 앞에 놓여 잇는 게임기의 두더쥐가 머리 내 밀 듯이 틈만 나면 내 밉니다.

 

두더쥐가 머리를 내밀면 얻어맞지요.

얻어맞으면 안 내 밀어야 하는데 그래도 또 내 밉니다.

전 문방구 앞을 지나다니면서 그 두더쥐 게임기를 보면서 바로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저 미련한 두더쥐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무거운 짐들을 지고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수고와 짐을 십자가에 다 못 박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진해서 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믿음을 보내서 하나 둘씩 차압해 가시는 겁니다.

세상 것을 빼앗음으로 자유케 하십니다.

 

자유란? 누르고 있는 것으로부터 죽으면 얻어집니다.

돈이 여러분을 짓누릅니까?

하나님은 돈을 주어서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빼앗음으로 자유케 하십니다.

명예와 권세가 짓누르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빼앗음으로 자유케 하십니다.

 

그래서 우발적으로 어떤 사건들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사건은 내가 원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발적으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일으켜서 우리의 눈을 위를 쳐다보도록 하십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아픈 것도 그 아픔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생각하라고 하신 사건입니다.

사업에 분주하던 사람에겐 갑자기 사업이 어려워지게 하여서 위를 보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사건들은 그 당시의 사건들이지만 지금은 이 시대에 맞는 사건들은 하나님이 믿음으로 일으키십니다.

지금은 예수 믿는다고 매를 맞거나 옥에 갇히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것과 같은 아픔을 당하게 하십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그 누구라도 자원하여서 일으킨 일들이 아닙니다.

모두가 믿음이 일으킨 사건들입니다.

 

그 믿음은 지금도 성도들을 간섭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어떤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거들랑 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나를 간섭하시는구나! 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간섭하심이 없으면 사생아입니다.

 

그러니 아픔이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부디 그리스도의 고난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깨달아지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생명이고 구원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남은 삶을 하늘에 것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세상을 이기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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