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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 강해)23강. 히브리서가 뭐죠 (히 1:1-2)

by coroa 2022. 5. 6.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3강. 히브리서가 뭐죠 (히 1:1-2)

-.정낙원 목사

 

히 1:1-3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오늘부터 히브리서 1장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히브리서의 주제가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아들이야기’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도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중심 주제는 구약의 율법이 어떻게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완성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옛적에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 하셨는데 이젠 아들로 말씀하시겠다고 운을 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라 함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들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옛적에 수많은 선지자들로부터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던 것들이 모두가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다 성취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구약에 모든 것들은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하실 일들을 한 부분 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흩어진 퍼즐들을 하나하나 맞추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 되는 것같이 구약의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을 하나로 맞추면 예수님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옛적에 것들은 실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두가 아들을 보여주기 위한 모형인 셈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통해서 믿음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11장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이 믿음으로 행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들의 모습들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한 그 실상은 바로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적에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했다는 것은 아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시청각교제로 사용한 것입니다.

 

믿음이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을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하여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옛적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을 했지만, 이제는 아들을 통해서 말씀을 하시겠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적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했지만 이젠 아들로 말씀하신다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을 드러내는 계시의 통로가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는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만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들 이외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을 통해서만 증거되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모두가 가짜 하나님이 됩니다.

예수님도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4: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 속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 14: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만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이고,

예수님의 생명만이 진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만 참이고 나머진 몽땅 가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만 변하지 않고 나머진 모두 변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라 함은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 난 이래로 굳게 닫혔던 에덴동산의 문이 예수님에 의하여서 열려졌다는 뜻입니다.

 

히 10:19-2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의 피로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다고 하잖아요.

이것은 에덴동산의 문이 열렸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며 흘리신 피가 보혈이고 십자가 사건이 복음인 것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 침실과 같은 곳입니다.

침실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과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신 후에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심으로 침실이 마련이 된 것입니다.

 

이는 장차 천국에서 경험하게 될 것을 영적으로 미리 맛보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함으로 우리 안에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천국이 임한 사람은 장차 들어갈 천국을 사모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 안에서 천국의 가치인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맛을 누리라고 히브리서가 구약을 가지고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어떻게 예수로 성취가 되었는지 하나 하나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율법 속에 담겨진 예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연애편지인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 감동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그럼 히브리서를 쓰게 된 배경부터 알아봅시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었습니다.

로마가 인구분산 정책을 쓰면서 유대인들을 각 지역으로 흩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온 세상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비록 흩어져 살고 있었지만 조상들로부터 지켜오던 유대교 신앙은 그대로 지켜왔습니다.

 

유대인들은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일 년에 삼차 봄 절기인 유월절과 여름 절기는 오순절과 가을 절기인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을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유대교 지도자들은 돈으로 로마 군인들을 매수하여서 입막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천하각국에서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이 성령이 사도들과 그 외 성도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행 2:5-11절.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오순절 날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합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이상한 광경이 일어났습니다.

방언이 터지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동반됩니다.

자연히 군중들의 시선은 제자들에게 쏠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함을 입고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삼았다고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천하각국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이 집결된 장소에서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함을 입고 유대인들에게는 금기시 되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죽으려고 환장한 것과 같은 짓입니다.

아니 예수를 죽인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그 예수 이야기를 하느냐 말입니다.

유대사회에 예수 신드롬이 이제 좀 사그라지는가 싶었는데 다시 불을 지피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자 여기저기서 어찌할꼬! 하면서 탄식하는 소리가 울려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인하여 너도 나도 예수를 믿겠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우려하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증거대로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가 한번 외칠 때 삼천 명씩 회개 하였다는 것은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염병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런 일을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간 유대교가 뿌리째 흔들리게 될 것이므로 그대로 방치 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 유대교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게 됩니다.

백성들 간에 반목과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 유대교에서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이건 교파를 초월하여서 대처하지 않으면 유대교 전체가 공멸하는 큰 문제인 것입니다.

모든 교단들이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끝에 어떻게 하든지 예수의 부활에 도(道)를 전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해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드디어 로마 권력을 힘입어 예수쟁이들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합법적으로 예수쟁이들은 민란을 일으키는 반역자로 몰아서 잡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동자 급인 사도들을 옥에 가두고 매질을 했습니다.

예수쟁이들은 누구든지 걸리면 가산을 적몰하고 옥에 가두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스데반집사가 공개 처형당한 것은 다 이 때문입니다.

그러자 성도들은 도망하거나 아니면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습니다.

이 때 생겨난 것이 카타콤 신앙입니다.

지하 무덤인 동굴을 파서 그 속에서 믿음을 지키면서 수백 년을 살아온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하여 달아나던 성도들은 도망을 다니면서도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인들 중에서 기독교로 개종(改宗)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개종(改宗)이란?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신앙은 율법지킴이라는 것이 삶처럼 녹아져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난 후로는 지금까지 관습화 되었던 율법 지킴을 하나 둘씩 버리게 되었습니다.

 

절기를 지켜 오던 것도 폐하고!

할례를 받던 것도 폐하고!

안식일을 지켜 오던 것도 폐하고!

성전 제사도 폐하고!

이젠 전혀 새로운 모습의 신앙생활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기존의 유대인들이 그대로 둘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시대이고 개종(改宗)을 하게 되면 원수가 됩니다.

인간이란 묘해서 금방 자기편에 있다가 상대편으로 가면 원수가 됩니다.

그러다 다시 자기편으로 오면 언제 그랬느냐 하면서 호형호제(呼兄呼弟) 합니다.

 

이런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집단이 정치집단입니다.

정치인들의 세계는 인간들의 본성을 보여주는 축소판과 같아요.

정치인들을 철새라고 하잖아요.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념이나 철학도 개의치 않아요.

 

정치판에선 무조건 살아남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자기 유익에 따라서 철새처럼 금방 이 쪽 당(黨)에서 저쪽 당(黨)으로 옮겨 다니면서 변신하고 옷을 갈아입을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정치판에는 영원한 원수도 영원한 친구도 없어요.

 

정치판만 그런 게 아닙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사 모두가 같습니다.

 

인간들은 철저하게 ‘나’와, ‘너’로 이분법(二分法) 적으로 구분합니다.

‘나’ 아니면 ‘너’ 이고, ‘너’ 아니면 ‘나’ 입니다.

‘나’ 는 ‘선(善)’이고, ‘너’ 는 ‘악(惡)’입니다.

 

내편은 좋은 편이고, 상대편은 나쁜 편입니다.

내게 유익을 주면 아군(我軍)이고, 내게 해를 끼치면 적(敵)입니다.

적은 철저하게 응징 당하여야 할 존재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이러한 것은 종교 세계에선 더 잔인하고 치열하게 나타납니다.

만약 기독교 신자가 불교로 개종(改宗)하거나, 불교 신자가 기독교로 개종(改宗)하면 더 미움을 받게 됩니다.

애당초 남에 편이면 그러려니 하지만 자기편에 있다가 다른 편으로 옮겨가면 배신당하였다는 생각에 적개심이 배나 더 생기게 되는 법입니다.

 

이건 교회라고 다르지 않아요.

목사들도 성도가 자기 교회에 다니다가 다른 교회로 가면 섭섭한 생각이 들고 미워져요.

교인들끼리도 그래요.

분명히 복음적으로는 이러면 안 돼요.

하지만 마음은 그래도 미움이 앙금처럼 남아요.

이건 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다가 다른 교회로 옮기면 이질감을 느끼고 교제가 소원해지고 웬지 미워지는 것도 인간의 본성 중에서 항상 자기편과 상대편으로 나누고자 하는 습성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선과 악이라는 법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적인 현상들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그랬어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바리새파다, 사두개파다, 열심당원이다. 엣세네파다, 쿰란공동체다 라는 교파들이 있어서 서로 간에 자기들만이 정통이라고 하면서 선명경쟁을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유대인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되었어요.

이젠 예수님에게 속하였느냐! 아니냐! 로 갈라졌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일 때에는 교파를 초월하여서 모두가 세상과도 한 편이 되었어요.

 

이건 마치 한국교회 안에 수많은 교단과 교파가 있는 것과 같아요.

평상시에는 서로가 서로의 교인들을 빼 가려고 난리들입니다.

서로가 자기 교단이나 교파가 더 우월하고 좋은 정통이라고 싸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서 한국교회의 이단성이 고발되어지면 교파를 초월하여서 달려듭니다.

이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중심으로 두 편으로 나누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 교회와 다른 교회로 나누입니다.

지금이 꼭 그래요.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다가 보면 자연히 교회중심주의나 개혁이라든가 성화론과 같은 것은 비 성경적인 것이라고 지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교파를 초월하여서 이단이라고 달려들어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피 이외는 모두가 다른 복음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 예수님의 피 안에 있지 않는 교회들이 한패가 되어서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하는 자들을 공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피를 전하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하여서 교단에서 축출하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의 정체가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과거에 유대교가 예수님을 죽였듯이 이 시대도 교회들이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자들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느 시대이고 항상 예수 편과, 예수 반대편으로 나누어졌어요.

이런 이유에서 초대교회 당시 유대교 신자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자, 유대교인들이 개종한 신자들을 핍박하게 된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가 곧 유대교 집단입니다.

유대인은 정치와 종교가 같아요.

정교(政敎) 분리가 아니라 하나에요.

모든 결정을 산헤드린이라는 공의회에서 하였어요.

예수님도 이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고 십자가에 죽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유대교로부터 이단이라고 낙인이 찍히면 사망선고를 받는 것과 같아요.

왜냐하면! 유대교 신자가 아니면 이스라엘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유대교 신자가 아니면 유대인 집단에서 생활 할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유대인과 비 유대인으로 구분을 하였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로 구분했어요.

율법을 지키면 유대인으로서 거룩한 자이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부정한 자로 구분했어요.

그래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성도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이방인처럼 개 같은 자로 취급을 해서 핍박을 가하였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난 후 12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하자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붙잡아서 매를 때리고 옥에 가두고 한 것은 유대교 법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어요.

율법으로는 예수 믿는 자들을 얼마든지 물리적으로도 핍박을 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신자들이 핍박이 두려워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키는 경계인(境界人)로서 살기도 했습니다.

 

율법 신앙을 고수하는 유대인들에게선 예수쟁이들이 로마 군인들 보다 더 미운 존재였습니다.

로마는 유대교를 공격하지 않았지만 예수쟁이들은 유대교 신앙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로마보다 예수쟁이들을 공공의 적으로 삼고 핍박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쟁이들을 붕괴할까 연구한 끝에!

이젠 적극적으로 예수를 믿는 무리들 속에 거짓교사들을 위장하여서 침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 거짓 선지자들을 심어서 율법신앙을 회복시키고자 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1,2,3서나 유다서나 바울 서신서를 보면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무리들이 있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런 사상이 팽배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이러다 보니 자연히 유대교에서 개종한 신자들 사이에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키는 이상한 신앙들이 횡행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도 지켜야 된다는 식의 신앙입니다.

이를 일컬어 갈라디안식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갈라디안식 신앙을 일컬어 다른 복음이라고 단호하게 정죄하였습니다.

왜 이런 신앙을 다른 복음이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미흡한 것으로 남겨 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 하신 것으로 보지 않고 미흡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통일교 교주 문선명이가 예수님은 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어서 실패했기 때문에 자기가 재림 예수가 되어서 완성한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만 믿어서는 안 되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너희들 생각해 봐라!

예수를 믿는 것은 말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성경 말씀은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아니!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게 말이 되겠느냐?

신자라면 신자다운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 라는 식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편만해 있는 다른 복음은 예수도 믿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정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라든가,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거나,

성전에 모이는 것이라든가,

십일조와 같은 각종 헌금을 의무적으로 하여야 한다거나,

교회를 위하여 봉사와 충성을 하고,

목사님의 말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잠깐,

옳음과 좋음 다릅니다.

옮음은 정답의 문제이지만 좋음은 가치의 문제입니다.

 

성도가 교회에 모이고 각종 헌신과 봉사와 연보를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당연하게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것은 좋은 것이지 장답은 아닌 것입니다.

신앙의 정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하였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지 각종 봉사와 헌신에 있지 않습니다.

각종 봉사와 헌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나타나는 현상들이지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강요할 것이 아닙니다.

참 신앙을 가진 자라고 한다면 당연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주어진 새 언약이지 인간들의 어떤 행위들이 아닌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의문에 쓴 증서를 다 도말하시기 위함입니다.

의문에 쓴 증서란? 율법을 말합니다.

의문에 쓴 증서를 십자가에서 도말을 했다는 말은 십자가 속에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이 다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믿으면 율법을 다 지킨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신앙이란? 새 언약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새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언약입니다.

율법 지킴이라는 옛 언약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 언약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담보로 언약을 맺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새로운 계약을 맺었습니다.

어떤 계약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다는 계약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그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엔 하나님의 백성도 예외 일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은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다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율법의 요구로부터 살려내는 일을 단행하셨습니다.

어떻게 살려 내는가 하면 자기백성들이 받아야 할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는 것으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에게 율법의 요구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자기 백성 모두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기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의 요구를 일괄 처리하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들이 죄인이 되었듯이, 이젠 예수 안에서 모든 인간을 의인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것은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겐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에겐 인간의 조건으로 죄다 아니다 판단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뭔가 하여야 믿음이 온전해 진다고 가르치는 것은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증거하여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인들에게 예수 믿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는 것이 마치 신앙의 본질처럼 가르치고 강요하는 것은 믿음에다 율법지킴이라는 행함을 섞는 갈라디안식 신앙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속성상 예수님의 다 이루심에 눈을 두지 않고 자신들이 행하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믿어야 할 것을 사라지고 행하여야 할 것들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갈 1:6-8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바울은 자기를 포함하여서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예외 일 수 없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단호할 수밖에 없는 것은 율법으로서는 의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건 타협이나 양보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복음은 일말의 양보나 타협을 허용하지를 않습니다.

정답의 문제는 타협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면 자기가 지금까지 전해 온 것은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갈 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갈 4: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지금까지 바울이 싸워온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 때문에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당하고, 동족으로부터도 버림당하고, 친구로부터도 버림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지역에 이상한 복음이 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를 어찌 두고 본단 말입니까?

그래서 죽기로 각오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핍박을 모면하려고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키는 어정쩡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는 율법의 실상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증거하는 그 실체가 왔는데 왜 다시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고 하려느냐!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갈 4:9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히브리서의 중심 내용도 이러한 배경을 깔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율법이 어떻게 예수 안에서 완성이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역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율법을 완성 하였는지를 변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이 틀렸다 아니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가 무엇이고,

그 율법의 요구를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어떻게 이루셨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로서는 예수님의 오심은 위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유대교의 율법지킴을 의로 여기는 신앙을 정면으로 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서 많이 돌아서자 유대교로서는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을 핍박한 사람들이 유대교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게 하려고 조폭을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그만큼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도는 유대교 신앙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서를 통하여서 간증하는 것을 보면 복음으로 인하여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당하게 된 것은 모두가 유대인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바울을 핍박하지 않았어요.

 

이건 참으로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 시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전하면 누가 반대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가치를 우선에 두고 있는 교회들이에요.

교회를 밥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교권주의 목사들이 싫어해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마귀는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서 죄사함을 받고 예수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래서 마귀는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증거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방해하는 방법이 거짓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거짓 교회를 세워서 다른 복음이 증거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불경을 가르칠 순 없잖아요.

그러면 누구든지 교회가 아니라고 하면서 떠나갈 것 아닙니까?

그러니 겉으로는 기독교 냄새가 나면서 기독교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 교인들이 눈치를 채지 못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복음에다 인간의 열심과 충성을 희석시킨 교리를 만든 것입니다.

이런 복음이 바로 갈라디안식 복음이에요.

 

갈라디안식 복음이란? 다른 복음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마다 돌아다니면서 예수 믿는 것으로는 온전치 못하니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예수 믿기 + 율법지킴 = 온전한 신앙” 이라는 식으로 가르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믿음 + 성화 = 온전한 신앙” 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으로 종결하지 않고 여지를 남겨 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도 신앙이라고 끼워 넣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면 되는데 이게 안 믿어지니까

인간 쪽에서 뭔가 해야 안심을 하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내가 예수를 믿어 주었다는 것을 갖고 있어야 안심이 됩니다.

 

사람은 믿어지지 않으면 반드시 종교적 행함을 믿음으로 대체를 하게 되어 있어요.

종교적인 행함을 함으로서 난 이렇게 믿었다고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함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말은 행함의 반대말입니다.

행함은 내 쪽에서 발생한 사건이고,

믿음은 믿어야 할 대상이 발생시킨 사건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발생 시킨 사건을 믿는 것입니다.

내 행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굳이 말한다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내 행함으로 믿는다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불가능해요.

이건 믿음이 와야 믿어져요.

믿음을 받은 성도는 이게 전혀 어렵지가 않은데,

믿음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이게 믿고 싶어도 안 믿어져요.

그래서 자기가 말씀을 지켜내는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을 통하여서 살펴본 믿음은 인간의 반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자기백성들을 구원해 내신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여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이루어내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면 이 사실이 깨달아집니다.

그러니 진짜 성도는 성령이 깨닫게 해주는 것을 믿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깨닫게 해 주지 않으면 내 쪽에서 뭔가 구원의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안심을 합니다.

내 쪽에서 가지고 있는 구원의 증거는 다름 아닌 자기가 말씀을 지키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말은 하면서도 자기 행위를 쌓아가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해야 안심이 되고,

성경을 보아야 안심이 되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나야 안심이 되고,

죽도록 충성을 하여야 안심이 되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여야 안심이 되어요.

 

이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다 하셨습니다! 라고 해도 불안한 것입니다.

안 믿어지니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오면 이런 것을 하든 하지 않든 개의치 않고 안심이 되어요.

 

이런 것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구원은 이런 것과 상관이 없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예수 믿으면 아무 것도 안하는 줄로 착각을 해요.

 

교회 안 다녀도 되고,

기도 안 해도 되고,

성경 안 보아도 되고,

연보 안 해도 되고,

충성 안 하여도 되는 줄 알아요.

 

아니 성도가 되어서 이런 것 안하면 뭐하고 삽니까?

맨 날 술 퍼 먹고 놀러 다니고 삽니까?

주님의 주신 은혜가 너무도 크고 감격스러우니 더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그 사람은 은혜를 바로 받은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도 받으면 어떤 행함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기쁘면 기쁘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나타난단 말입니다.

은혜를 받아도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신자가 아니든지 아니면 가짜 은혜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행함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으킨 사건이에요.

믿음 속에는 예수님께서 일으키는 사건이 있어요.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일을 하세요.

이게 사도 서신서에서 말하는 하라 하지 말라는 것들이에요.

주께서 간섭하시면 이러한 것들이 툭툭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두 법이 서로 싸워요.

바울도 이 두 법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하다고 아우성쳤어요.

바울이 아우성 친 것은 자기 몸이 하나님의 요구를 담아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완벽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 개인적으로 교회 생활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신자로 안 보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오면 자기 부인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지요.

 

종이란? 독자적인 삶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종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이 바라는 것으로 살아야 해요.

산상보훈이나 사도서신서들은 예수님이 바라는 삶이예요.

 

사도 바울의 서신서 대로 사세요.

서신서 대로 살다보면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어요.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잘 안 살아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요.

아! 이래서 내가 죄인이구나! 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로 구원치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구원을 하셨구나! 를 알게 되어요.

 

처음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갈수록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요.

이건 우리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간은 하나님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종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한계를 알면 애통함이 일어나고 상한 심령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예수님 피 밖에 없구나!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이 사람은 자기 행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예수님의 피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더 귀하고, 결국 예수님의 피 밖에 없다는 쪽으로 인도해 줍니다.

성도가 성경을 보는 이유가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하여서 자기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너무너무 귀하다는 것을 알아가기 위함이에요.

 

말씀을 지키려고 덤비면 수고와 짐이 되지만,

말씀 앞에서 자기실존을 고발당하고 나서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용서받고 사는구나! 를 알게 되면 감사가 됩니다.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께 감사가 나와야 성경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갈라디안 식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갈라디안식 신앙은 구원이 미완료로 남아 있어요.

항상 불안 불안해요.

 

우리가 받은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지 불완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이미 완료된 구원이지 미완료로 주어진 구원이 아니에요.

구원은 단번에 주어진 것이지 차차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착각하기를 구원을 점차적으로 이루어간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에 보면 구원의 시제가 과거, 현재, 미래로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도 하고,

구원을 이루라고도 하고,

구원을 얻으라고도 하는 말씀들이 있어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미 이룬 구원도 있고,

지금 이루는 구원도 있고,

장차 얻을 구원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이 구원을 과거 현재 미래 시제로 말하는 것은 그것이 미완료이기 때문이 아니에요.

구원이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로 표현을 할 뿐입니다.

 

우린 이미 구원을 받았어요.

그런데 현재 이루어가고 있고 장차 이루게 되어요.

일을 시작 하신 이가 이루시고 이루어 내십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예수님께서 이루어 내세요.

 

이걸 육에 속한 인본주의 목사들은 문자적으로 보아서 구원이 미완료이니까 인간들의 노력으로 이루어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게 되면 아침 설교가 다르고 저녁 설교가 달라요.

 

어떤 땐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갔다고 하고,

어떤 땐 그 따위로 믿어서 천국에 가겠느냐 라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설교에 일관성이 없고 갈 지(之) 자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갈라디안식 설교가 횡행하는 것은 모두가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우리가 지켜야 하는 식으로 설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지켜 낼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루어 가신다는 것은 부르심에 목적에 합당하게 만들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서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없어요.

나는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일 뿐입니다.

 

독자적인 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자라간다는 것은 변화되고 성숙한다는 말이 아니고 알아간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철이 드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지 불완전한 것이 아니에요.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예수님의 생명이 성도들 안에서 생명의 운동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간다고 합니다.

 

갓난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의 생명은 완전합니까?

불완전 합니까?

완전하지요.

 

갓난아기의 몸이나 어른의 몸이나 똑 같아요.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상태로 출생을 합니다.

몸집만 다를 뿐입니다.

 

갓난아기의 몸에도 오장육부가 있어요,

간이 있고, 쓸개가 있고, 허파가 있고, 창자가 있고 모든 장기가 다 있어요.

자라가면서 오장육부가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자라가면서 창자가 생기고, 허파가 생기고, 간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자람이라는 것은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장성해지는 것입니다.

더 풍성한 모습으로 자라간다는 말입니다.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을 먹고 자라고, 밥을 먹고 자라고, 자라가면서 단단함 음식물도 소화하고 하면서 강건해져 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도 이와 같아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는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고 우주보다 넓어요.

그런데 우리가 깨닫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 들어가면 자기 자신을 산화(山火)시켜도 부족할 정도로 영광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에 매여서 질질 끌려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바라는 예수님과 같이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순종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란다는 것은 내 인생을 예수그리스도에게 차압당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가려면 내 목숨을 하나님을 위하여서 버려진다고 하여도 아까울 것이 없는 그 은혜와 사랑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난 지옥에도 갈 수 있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그 길이를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온 인류가 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알기를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기도는 곧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에베소서 3장을 봅시다.

 

엡 3:14-19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보세요.

바울의 기도 내용을!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서 속사람이 강건해져서 그리스도의 사랑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에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아서 하나님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충만하게 알기를 바란다고 하잖아요.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에 가난해지지 말고 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담아 낼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오른 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돌려 댈 수가 있어지고,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그를 축복할 수가 있어지고,

스데반처럼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해서 용서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것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을 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탕감해 줄 수가 있어져요.

이걸 관대함이라고 합니다.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해요.

 

하나님은 엄청난 것을 부어주셨는데 그것을 많이 깨닫는 사람은 많이 감사할 것이고 적게 깨닫는 사람은 적게 감사할 것입니다.

어린아이 때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하고 시집가서 아이 낳고 키우면서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은 달라요.

 

바울은 지금 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깊이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은 예수쟁이들을 죽이던 자였어요.

그런 자가 용서 받았어요.

그러니 죽도록 충성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생색내기 위함이 아니고 감사해서 하였어요.

 

성도가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고 힘들어 하는 것도 모두가 이 은혜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에 그 의미를 안다면 불평불만을 할 수가 없어요.

은혜가 풍성하게 깨달아져 보세요.

교회에 충성해라. 봉사해라, 기도해라, 헌금해라, 전도해라 할 이유가 없어요.

자기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폭발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도록 몰아가요.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것이 확실하게 믿어진다면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사도 바울과 같이 삼층천을 보았으면 뭐가 아깝겠어요.

목숨인들 아깝겠습니까?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는 것은 전부 지식으로 복음을 이해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관념으로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십자가 삽자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도 기쁘지 않는데,

무슨 교회 오는 것이 기쁘겠으며,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이 기쁘겠어요.

그러니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고 미꾸라지 빠져 나가듯이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 와서 행동하는 것 보면 다 나타나요.

마지못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억지로 시키면 짜증을 냅니다.

그냥 내 버려두어야 해요.

교회 빠지지 말라고 하면 잔소리로 듣고 짜증을 냅니다.

 

본인의 마음속에 예수님에 대한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는데 기뻐하라고 하면 안 되지요.

이런 상태를 가난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스스로 하지 못해요.

항상 누가 시켜야 합니다.

 

성경이 무라고 합니까?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하지요.

 

고전 16:13절.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말이 뭡니까?

뭐든지 다 감당 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고 강건해지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잘 먹는 것 밖에 없어요.

생명은 먹어야 강건해 집니다.

그 어떤 생명도 먹지 않고서는 강건해 질 수가 없어요.

그러니 구원을 이루라, 또는 구원을 얻으라는 말은 생명을 강건하게 자라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강건해지는 것을 구원을 이룬다 혹은 얻는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강건한 생명으로 자라가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먹는 것 밖에 없어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자라갑니다.

말씀을 먹음으로서만 강건해 진단 말입니다.

 

롬 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보세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지요.

그리고 그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지요.

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 때 사도 바울과 같이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을 부를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찬송을 부를 수 잇다는 것은 그 감옥에 갇힘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임을 알 때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게 사도 바울에게만 나타나는 일들이 아닙니다.

지금도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아는 사람은 이런 일들이 나타납니다.

물론 늘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는 않아요.

하지만 간헐적이지만 이런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가능해 집니다.

 

제가 과거에는 감사의 조건을 찾았어요.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게 감사해요.

과거에는 십자가가 추상이고 관념이었어요.

예수님이 나 대신 죽었다는 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어요.

 

그 때는 예수님과 나는 남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과 저는 한 몸이라는 것이 믿어져요.

그러니 예수님의 고난도 내 고난이고 예수님의 부활도 내 부활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믿어지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믿어진다는 것이 신기해요.

 

그럼 예전에 믿어지지 않던 것이 지금은 믿어지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말씀을 통하여서입니다.

말씀을 늘 가까이 하다고보니 깨달아지고 희미하던 것들이 점점 확실해진 것입니다.

 

성도는 처음 예수 믿을 때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씨앗처럼 작은 것이 심겨져요.

이 씨앗이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 자라가요

 

우리가 흔히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하지요.

한번 봅시다.

 

고전 13:11-13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자 보세요.

우리가 어렸을 땐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지요.

무엇에 어린 아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에 대하여 어린 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점차적으로 그 사랑에 대하여 자라가지요.

알아간다는 말입니다.

희미하던 것이 점차적으로 확실해 진다고 하지요.

저 역시도 전에는 십자가가 막연하고 희미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확실해요.

 

이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믿음과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은 사랑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믿음과 소망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예수님에 대한 소망으로 인도하고 그 소망은 예수님을 만나면 성취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려면 믿음과 소망으로 자라가야지요.

그런데 이 믿음과 소망을 자라게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성도에게 말씀은 양식입니다.

 

예수 잘 믿어야지!

예수 잘 믿어야지!

입술로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예수 잘 믿으려면 말씀을 늘 먹어야 해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먹지 않고 건강해야지 말만 하는 것은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말씀을 듣지 않으면서 신앙이 좋아져야지 하는 것도 다 거짓입니다.

말씀 듣기 싫어하는 사람치고 믿음 좋은 사람이 없어요.

이는 말씀이 믿음에 화합을 이루지 않아서입니다.

 

히 4:2절.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말씀이 지식이 되면 믿음이 점점 퇴보해 가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애통해 하지 않아요.

뭔가 찌르면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반응이 없어요.

그런 사람은 믿음에 화합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자람이 없는 것입니다.

 

열심(熱心) 이라는 말이 뭡니까?

심장이 뜨겁다는 말이잖아요.

마음이 벌렁 벌렁한다는 말입니다.

희노애락이 넘실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울고 웃으라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지요.

이는 지금은 사랑이 식어 있다는 말입니다.

식어 있다는 것은 활동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식물인간처럼 움직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처음사랑이란 뭡니까?

구원의 은혜이지요.

마치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일어난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때는 복음 전하다 죽는 것이 두렵지가 않았어요.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도 기뻤어요.

 

그런데 지금은 냉랭해요.

냉랭한 마음을 뜨겁게 해 주는 것은 말씀 밖에 없어요.

말씀을 듣다 보면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조금씩 가슴이 뜨거워져요.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하지요.

그래서 내려가던 발걸음이 다시 올라가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행하던 발걸음이 하늘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발걸음을 돌리게 하였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그러므로 그 어디에도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믿음이 좋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말씀을 듣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달라짐을 보게 됩니다.

 

시편 1편에서 뭐라고 합니까?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복 받은 사람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복을 받았기 때문에 말씀을 가까이 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살아 있기 때문에 말씀을 풍성히 먹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주야로 말씀듣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니 복을 받은 사람이구나!

살아 있는 사람이네!

 

그런데 저 사람은 맨 날 교회도 안 나오고 놀러 다는 것을 보니 저주 받은 사람이구나! 라는 말과 같아요.

죽은 사람이구나!

 

복음에 대하여 산 사람은 산 행동을 하고, 죽은 사람은 죽은 행동을 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야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게 되고,

그런 괴수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산다는 것이 감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행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따른 행함은 가르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살아 있으면 자연히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격발한 행함은 가르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받은 사람은 늘 말씀에 화합을 이루어서 그 받은 은혜를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보리밥 먹었으면 방귀가 나오고,

물을 많이 마시면 오줌이 마려운 것과 같아요.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은혜로운 향기를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이건 생명에게 있어서 반드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생리현상이라고 하잖아요.

생리(生理)가 뭡니까?

생명의 도리라는 말이잖아요.

법칙이라는 말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다는 원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갈 5: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자 보세요.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하지요.

금지할 법이 없다는 말은 막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역사를 하면 자연히 이런 현상들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면 아! 저 사람은 성령께서 주장을 하고 계시구나! 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육신의 소욕도 동일해요.

 

갈 5:19-21절.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보세요.

이런 것들은 새삼스럽게 창조해 내는 것들이 아닙니다.

죄인에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일들입니다.

이건 막을 수가 없어요.

막는다고 막아지지도 않아요.

이걸 법이라고 해요.

 

그러므로 은혜 받은 사람에겐 은혜가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안에서 믿어지는 것으로 하기 때문에 전혀 어렵지가 않아요.

자연스러워요.

복음 안에 있는 성도를 보면 신앙생활을 인위적으로 하려고 하지 않아요.

아주 자연스러워요.

 

그러나 믿는 척 하는 사람들은 뭔가 자꾸만 만들려고 해요.

남을 흉내 내려고 해요.

남을 닮으려고 해요.

그러나 신앙생활은 누구를 닮거나 흉내를 낼 이유가 없어요.

각자가 받은 은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닮을 이유도 없고, 바울을 닮을 이유도 없어요.

그저 주신 은혜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가요?

 

갈라디안식 신앙을 말하다가 여기까지 왔지요.

갈라디안식 신앙은 뭐라고 했지요.

예수님의 공로에다 자기 것을 섞는 것이라고 했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로는 미흡하다고 생각하니 율법 신앙을 첨가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가 미흡하다고 여겨질까요?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신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믿어져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쪽에서 뭔가를 하여야 한다고 하지 않아요.

도리어 이런 사람은 십자가에 다른 것이 섞일 까봐서 경계를 해요.

 

알다시피 구원 얻는 믿음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받는 성도는 그것으로 완벽해요.

더 이상 보태고 뺄 것이 없어요.

그냥 믿어져요.

믿어지기 때문에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안심하고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뭘 안하고 산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것과 상관없이 구원이 주어졌다는 것을 믿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믿음을 받은 성도들도 동일하게 신앙생활을 해요.

다만 다른 것은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봉사하고 충성하고 말씀대로 살아도 그건 어디까지나 구원해 주심에 대한 감사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했다고 기뻐하거나 하지 않고, 또 하지 않았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하지 않아요.

 

하지만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은 사람은 이런 일들을 안 하면 불안해서 못살아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 사람 속엔 법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기 때문에 그 율법이 말씀대로 살라고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강요하면 안하면 불안해져요.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음으로 완벽합니다! 라고 하면 그래도 뭔가 해야 하지 않느냐! 라고 해요.

자꾸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불안하니 그 불안을 뭔가를 행함으로서 해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안은 금새 또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법은 항상 지켜야 할 것을 몰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지키고 나면 또 다른 것을 가지고 와서 지킬 것을 요구해요.

이게 법이예요.

 

그래서 성경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항상 저주 아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갈 3:10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보세요.

율법은 책에 기록된 대로 살라고 몰아친다고 하잖아요.

율법은 한마디로 하나님처럼 완벽하라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해 지라는 것은 온전하고 거룩해지라는 데에 목적이 잇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이렇게 틀렸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니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처럼 온전해지고 거룩해 지느냐 말입니다.

이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법은 그래 넌 불가능 해!

이젠 추궁하지 않을께!

그러지 않아요.

 

법은 융통성이 없어요.

법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아요.

그래 넌 죄인이기 때문에 봐 준다 그러는 게 없단 말입니다.

법은 죄인인지 의인인지 따지지 않고 다만 하나님 뜻대로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만 따집니다.

 

그러니 법아래 있는 사람은 항상 법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어제까지 법대로 살다가도 오늘 법대로 살지 못하면 죽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법대로 살았으니 앞으로 봐준다!

그런 게 없어요.

 

대통령이 5년 임기 중에 4년 11개월을 청렴하게 살다가 퇴임 1개월 남겨두고 뇌물을 받으면 그것으로 뇌물 받은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법은 이처럼 냉엄해요.

나타난 결과만 가지고 따져요.

 

과거에 여전도회 회장하고,

남전도회 회장하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하여도 지금 안하면 소용없어요.

옛날에 믿음 좋은 것은 말짱 도루묵입니다.

 

율법은 형평성이니,

정상참작이니,

불가항력이니 라는 것이 없어요.

 

오로지 법대로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만 있어요.

법대로 살았으면 법대로 상을 받고,

법대로 못 살았으면 법대로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항상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신앙으로 갖고 있는 한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인들은 왜 율법 신앙으로 회귀하고자 할까요?

분명하게 예수님의 피로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들었음에도 율법 신앙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그만큼 율법 신앙이 인간을 잡아끄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매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왜 율법신앙이 매력이 있는가 하면 신앙을 자기가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신앙에는 자기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를 믿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안 됩니다.

예수는 성령님께서 믿게 해 주어야만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믿으세요.

그러면 믿음을 받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믿어지는데 믿음을 받지 않는 사람은 믿고 싶어도 안 믿어져요.

그런데 종교성으로 알아진 지식이 있으니 예수 믿고 천국엔 가고 싶어요.

 

믿음을 받지 못하면 예수가 안 믿어지기 때문에 자기 쪽에서 믿을 근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그 근거를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자기가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인 입장에선 확실한 것이지요.

자신이 지켰으니까요?

 

이건 마치 아내들이 남편 주머니에 있는 돈을 탐내는 것과 같아요.

아내가 잠자리에 들면서 남편에게 여보! 나 돈 좀 줘!

그러면 남편이 알았어!

내일 아침에 줄께!

그러면 남편의 말이 믿어지면 알았어! 하고 자면 되잖아요!

그런데 아내는 그러지 않지요.

 

당장 일어나서 남편의 지갑에서 자기 지갑으로 소유권을 이전해 두어야 안심이 되어요.

혹시 자고나면 남편의 마음이 바뀔까봐서 불안한 것입니다.

남편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지갑에 들어 있어야 내 것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인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행함이라는 자기 몸에 흔적을 갖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흔적을 자기 몸에 새겨놓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몸에 흔적을 새기지 않고 마음에 흔적을 새겨요.

육신의 할례를 요구하지 않고 마음에 할례를 하라고 합니다.

 

이는 믿으라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믿으라는 말입니다.

육신의 할례는 내가 할 수 있지만 마음에 할례는 내가 할 수가 없어요.

마음에 할례는 하나님이 해 주셔야지만 할 수가 있어요.

 

그렇다면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주는 사람은 자기의 노력을 의지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자기 행함을 의지한다는 것은 곧 마음에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지 않은 사람은 육신의 할례와 같은 자기 행함을 붙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지는 사람은 다른 흔적을 남기고자 하지 않아요.

믿어지는데 무슨 흔적을 만들 이유가 있습니까?

흔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안 믿어지기 때문에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는 흔적을 자기 몸에 새겨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했지요.

믿음은 내 쪽에서 발생한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발생한 사건을 믿는 것이라고!

그러면 믿음을 우리가 소유할 수 없겠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발생 한 사건이니까요.

 

믿음은 하나님께서 수도관으로 물을 공급하듯이 계속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축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빼내서 행사하는 것이 아니에요.

항상 하나님이 공급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가지로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예요.

가지는 독단적으로 생명을 유지하지 못해요.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생명을 공급받아요.

 

이렇게 공급 받는 것을 성경은 은혜라고 합니다.

난 일하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데 나무가 가지에게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편합니까?

이 편안함을 아는 자는 절대로 나무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아요.

가지가 나무로부터 떨어지는 순간부터 수고와 슬픔이 따르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생명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축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창고를 늘리고 또 쌓고 또 쌓고자 하는 것입니다.

율법 식으로 말하면 지키고 또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아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이와 같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주신 것이 안 믿어지니 자기 쪽에서 이루어가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 믿음이 좋은 것 같은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쉼이 없어요.

 

옛날에 제가 율법 아래 있을 때 그랬다니까요.

열심은 엄청난데 마음은 늘 곤고했어요.

안식과 평강이 없어요.

항상 불안해요.

쫓겨요.

이는 모두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는 흔적들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 보세요.

성경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어요.

그러면 믿음을 받은 성도는 아! 예수님께서 내 대신 쉬지 않고 기도하고 계시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기도를 하여야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안 믿어지니 자기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너희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다 했느냐? 라고 물으면!

믿음을 받는 성도는 ‘예! 예수님이 다 하셨어요!’ 라고 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예! 제가 기도 했어요!’ 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성경을 펴면 이번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들 내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지!

너희들 내 말대로 원수를 사랑했어! 라고 물으면

성도는 ‘예!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원수를 사랑하셨어요!’ 라고 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예!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믿음을 받은 성도는 그 어떤 말씀 앞에서도 자기는 빠지고 예수님을 앞세웁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항상 자기가 지키겠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말씀을 다이렉트로 받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말씀을 다이렉트로 주시지 않았어요.

항상 예수님을 거쳐서 주세요.

 

앞선 시간에 이건 마치 아브라함 후손에게 율법을 준 것과 같다고 했지요.

아브라함 후손들에게 율법을 준 것은 지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아브라함 후손이란 구원 받은 성도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그 말씀을 지킴과 안 지킴과 상관없이 구원은 영향을 받지 않아요.

이미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와 상관없이 구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 어떤 말씀도 예수님을 거쳐서 받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을 거쳐서 받게 되면 모든 말씀을 예수님께서 다 지키신 것으로 받는 것입니다.

믿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부담스럽지가 않고 그 말씀으로 도리어 감사가 이끌어져 나오지요.

야!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다 지켜 주셨구나! 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밖에 사람들은 말씀을 다이렉트로 받아요.

말씀이 다이렉트로 오게 되면 그 말씀은 그 사람을 죽이고자 달려들어요.

법으로 오기 때문입니다.

법으로 다가오면 너 말씀대로 살았어! 라고 채근합니다.

 

그러면 자기를 돌아보게 되어요.

내가 말씀대로 살았나?

안 살았나?

살았으면 당당하고, 못 살았으면 음메 기죽어!

이건 믿는 게 아니고 미친 여자 널 뛰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몰라요.

 

이처럼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말씀이 은혜로 다가오지만,

예수 밖의 불신자에게는 말씀이 법으로 다가와요.

그러니 성도는 말씀으로 감사를 깨닫지만 불신자는 말씀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암튼 오늘은 왜 히브리서가 율법으로 예수그리스도 이야기로 풀어 가는지 그 개요에 대하여서만 살펴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율법을 예수그리스도가 완성 하였다는 것을 말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율법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유대교 신자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유대교 신자가 있기 때문에 히브리서는 지금도 강해가 되어져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히브리서를 하나 하나 살펴가면서 우리 안에 잔재로 남아 있는 유대교적 신앙들을 다 버리는 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만 여러분 가슴 속에 남아서 뜨거움으로 달음질 하기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 믿어지는 은혜를 주옵소서. 다시는 종에 멍에를 매지 않고 십자가 안에서 쉼을 얻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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