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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강해)18강. 믿음으로 무너진 여리고 (히 11:30)

by coroa 2022. 4. 15.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8강. 믿음으로 무너진 여리고 (히 11:30)

-.정낙원 목사

 

히 11: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역사는 아벨로 시작하여서 라합의 사건으로 종결을 짓습니다.

물론 라합 이후에 사사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사사들은 한 묶음으로 거론한 것이라서 실제적으로는 라합에게서 끝을 맺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다른 성경은 없고 쪽 복음서처럼 히브리서 11장만 달랑 있다고 한다면 아벨로 시작해서 라합으로 끝이 납니다.

 

이렇게 되면 아벨을 최초로 믿음이 간섭한 사람이 되고, 라합을 맨 마지막으로 믿음이 간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벨로 시작하여서 라합으로 끝난다는 말입니다.

물론 다른 성경은 없고 오직 히브리서 11장만 있다는 가상 하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라합 이후에도 수많은 믿음에 선진들이 있습니다.

다윗도 있고, 엘리야나 엘리사도 있고,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다니엘과 에스겔 같은 대 선지자도 있고, 호세아로부터 시작하여 말라기까지 12 소 선지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과 같이 믿음에 이끌려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히브리서 11장에선 이들을 언급하지 않고 라합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은 믿음으로 살아간 모습이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라합의 신앙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알다시피 라합은 여리고 성에서 유일하게 정탐꾼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리고가 무너질 때 유일하게 살아났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여리고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지옥 갔는데 혼자만 천국에 갔다는 말입니다.

 

흔히들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으로 이야기 합니다.

맞습니다.

계시(啓示)사적 의미로 보면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종말의 예표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신약에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라합은 세상 종말에 살아난 성도의 모형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벨은 믿음의 시작이 되고 라합은 믿음의 종결이 됩니다.

 

아벨과 라합 속에 성경 속의 모든 인물들이 들어 있습니다.

아벨로부터 시작하여서 노아나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세도 다윗도 엘리야도 12제자들과 바울이나 우리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벨과 라합은 마치 햄버거의 내용물을 감싸고 있는 빵과 같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히브리서 11장만 가지고 믿음이라는 그림을 그린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가운데서 살아난 라합은 장차 세상 종말이 일어나는 가운데서도 살아나는 성도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 수천 년 전에 일어난 일일지라도 영적인 의미에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서 어느 시대나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사건을 현재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화 되어야 합니다.

과거 믿음에 선진들과 동행하셨던 그 하나님이 현재의 나와 동행하고 계셔야 합니다.

 

믿음이란? 과거 이야기가 아니고 현재이야기입니다.

이걸 묵시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현재의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머물거나 미래에 계시면 신화가 되고 관념이 되어 버립니다.

 

아벨의 신앙이 현재 나의 신앙이어야 하고,

노아의 신앙이 현재 나의 신앙이어야 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와 라합의 신앙이 지금 나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현재 내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강해 해 오면서 시간 시간마다 해온 말이지만 또다시 말합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말하고자 기록한 것이 아니고,

믿음이 성도를 이런 저런 일들 속에서 간섭해 오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노아를 간섭해서 방주를 짓게 하여 홍수 속에서 구원을 받게 하셨고,

믿음이 불임 여성인 사라에게 아들을 낳게 해 주셨고,

믿음이 홍해바다를 건너게 해 주셨습니다.

 

인간이 한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을 믿음이 다 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에 한 사람이 구원을 받고 멸망을 당하는 일을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나고 한 사람이 죽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섭리로 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고 살아가면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짐도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계신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영웅담을 기록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초지일관 믿음으로 누가 무슨 일을 하고, 믿음으로 어떤 사건 속에서도 살아났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믿음으로 간섭해 왔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건들이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지금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성도들을 이렇게 저렇게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각오나 의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자체적으로 역사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따라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앉고 일어섬을 아십니다.

인간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모두가 하나님이 간섭하십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 밖에 있는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는 줄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절간에 중들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고,

귀신과 접신하는 무당들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십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고,

무당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고,

목사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절간도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속에 있고,

무당도 만물 속에 있고,

목사도 세상 속에 있습니다.

 

바로왕도 하나님이 다스렸고,

모세도 하나님이 다스렸습니다.

다윗 왕도 하나님이 다스렸고,

사울왕도 하나님이 다스렸습니다.

참 선지자인 엘리야도 하나님이 다스렸고,

거짓 선지자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도 하나님이 다스렸습니다.

 

이 시대 무당 같은 목사가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 뜻이고,

복음 전하는 참 목사가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 뜻입니다.

악한 자는 악한 일을 위해서 쓰임 받고 있고, 선인은 선한 일을 위해 쓰임 받고 있을 뿐입니다.

악인이나 선인이나 모두가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지금 북한에서 발사한 미사일 문제로 온 세계가 난리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사건도 사건자체로 보면 자기 유익에 따라서 옳다 그르다 판단 할 수가 있지만,

믿음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이고 하나님이 일으킨 일입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로 보일 때 불평할 수가 없고 원망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사는 것도 주의 뜻이고, 죽는 것도 주의 뜻입니다.

 

산불이 나는 것도 주의 뜻이고,

태풍이 부는 것도 주의 뜻이고,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일어나 수천 명이 죽는 것도 주의 뜻입니다.

 

강도를 만나는 것도 주의 뜻이고,

교통사고가 나서 죽는 것도 주의 뜻이고,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것도 주의 뜻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한낱 미물에 불과한 물고기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고,

당나귀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고,

무화과나무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고,

별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고,

해가 빛을 잃는 것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고,

바다 물도 바람도,

들에 풀도 하늘을 나는 새 도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세상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십시오.

그러면 다 신앙적인 일들입니다.

아픈 것도 신앙이고 웃는 것도 신앙입니다.

일어서는 것도 주님이 일으킨 일이고,

넘어지는 것도 주님이 일으킨 일입니다.

 

예수 안에서 이 세상을 보시면 요동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미사일을 쏘든 핵무기를 개발하든 그건 어디까지나 이 세상에 속한 일일 뿐입니다.

성도는 핵무기로 죽어도 천국에 가고,

바다에 빠져 죽어도 천국에 갑니다.

그러니 사나 죽으나 염려할 것이 없지요.

 

예수 안에서 보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왈가왈부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이 주로부터 나왔고,

주로 말미암고 살다가,

주께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행사 내용입니다.

중국의 역사를 자랑하기 위해서 두루마리에 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그림을 그려서 그들이 자랑하고픈 찬란한 오천년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두루마리가 펼쳐지면서 오천년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펼쳐졌던 그 두루마리를 감으니까 오천년 역사는 사라집니다.

 

전 그 광경을 보고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계 6:12-17=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장차 이 세상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처럼 말려서 다 떠나간다고 했습니다.

마치 두루마리가 말리듯이 말려서 불 구덩이 속에 다 태워진다는 말입니다.

두루마리를 펴면 세상 역사가 나타나고, 두루마리를 감으면 세상 역사는 사라집니다.

우리 모두 세상 역사라는 두루마리 속에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일곱 째 나팔과 함께 오시면 이 세상은 두루마리가 말리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일곱 나팔 소리에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린 것과 같이 이 세상도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팔 소리 앞에서 인류의 과학도 문화도 예술도 정치도 경제도 스포츠도 다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안에서 이 세상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에 일들은 작아 보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스려져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의 식민지가 된 것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해방을 하느냐 마느냐 절대 절명의 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이 로마 식민지에서 해방하든 식민지로 있든 상관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고 세상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걸 우리의 삶으로 적용하면 우리가 사네! 못사네! 하는 것도 하나님 나라 입장에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들입니다.

물론 우리에겐 생사(生死)가 걸린 문제입니다.

 

사업에 실패를 했다고!

아이가 대학에 떨어 졌다고!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다고!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고부간에 갈등이 심하다고!

좋은 신랑감 신부감을 주세요 라고 기도해 보세요.

 

그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실 것 같습니까?

설령 여러분이 바라고 소망하는 이런 것을 다 응답해 주셨다고 합시다.

그래 보아야 모두가 불타버릴 세상에 일들입니다.

 

이런 것을 다 이루어 부족함이 없다고 하여도 세상에 속한 일이고,

이런 것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세상에 일입니다.

이런 것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구원받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있으면 있는 대로 감사하고 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조금 불편하게 살면 됩니다.

 

바울이 풍부에 처할 때도 있고 비천에 처할 때도 있다고 한 것은 예수 안에서 자기 인생을 보았기 때문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즉 예수 안에서는 어떤 환경이든지 다 감당 할 수가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가 세상 일로 인하여 희비한다는 것은 믿음의 문제로 남게 됩니다.

믿음으로 살면 전혀 문제없이 살지만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문제가 됩니다.

울고불고 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일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 대하여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원칙적으로 성도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세상 밖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일로 일희일비(一喜一悲)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 육신이 눈만 뜨면 세상 것에 휘둘리면서 살아갑니다.

육신은 세상과 분리 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살아야 함에도 실상은 그와 반대로 세상에 영향 받고 삽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면서도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짝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세상과 짝하고 삽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주의 뜻을 외치지만 몸은 주의 뜻과 반하는 것으로 삽니다.

아무리 주의 뜻이 이렇다 하여도 그 뜻대로 다 살아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성도를 간섭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 뜻에 반하는 모습으로 끌고 가십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아픈 겁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온실에 화초처럼 지켜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오해를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세상에서 평안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와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이 아주 평안하게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들은 모두가 한숨과 눈물로 살았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천국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간섭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이들로 하여금 원망과 불평을 하여도 천국으로 끌고 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과 우리는 동일합니다.

 

야고보서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다고 했습니다.

 

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성정(性情)이 같다는 말은 우리와 같은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엘리야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동일합니다.

아벨도, 에녹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바울도, 베드로도 우리와 똑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심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와 똑 같은 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셨다면 우리도 천국으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동일합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을 믿음이 끌고 갔다면 우리도 믿음이 끌고 가십니다.

믿음이 끌고 왔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원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의 원대로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우리 원대로 두었으면 지금 여기에 있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부터 여기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의 원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원대로 우리를 간섭하셨기에 우리의 인생은 실패 할 수가 없고 반드시 천국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인도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믿음이 홍해를 건너게도 하였고,

믿음이 여리고를 무너지게도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믿음으로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기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건 마치 베드로가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모습을 본 것과 같습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의 눈엔 산 아래 모습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물론 그 당시뿐이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은 왜? 베드로를 변화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예수님의 재림을 보여 주었을까요?

이는 세상에 살면서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고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을 보지 말고 장차 오는 주님의 세상을 보고 살라고 보여 주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삶은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일이 고생스럽더라도 소망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세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재림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늙은이가 꿈을 꾸고 젊은이가 환상을 본다고 한 것입니다.

꿈과 환상의 실체는 천국입니다.

늙은이가 죽음 이후에 갈 천국을 보면 죽음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젊은이가 환상을 보면 현재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높은 산 정상에서 도시를 내려다보십시오.

그러면 도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개미와 같습니다.

내가 저런 곳에서 아등바등하게 살고 있구나?

한 뼘도 안 되는 땅 따먹기 하면서 아귀다툼하면서 살았구나?

인생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예수 안에서 세상을 보십시오.

높은 산 정상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듯이 믿음으로 세상을 보십시오.

높은 산과 도시는 다른 세계입니다.

높은 산 정상에서 보면 도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마치 남의 일처럼 보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남의 일처럼 보입니다.

물론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얼마만큼 믿음을 실제화 하는 것이냐의 싸움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실제화하면서 살아갈 것이고 어떤 사람은 믿음을 관념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믿음을 실제화 하고 사는 사람은 비록 아픔은 있지만 천국을 소망하고 이겨 냅니다.

그러나 믿음을 관념으로 사는 사람은 모든 문제에 휩싸여 근심걱정 하며 살아 갈 것입니다.

똑 같은 일을 가지고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과 관념으로 사는 사람에겐 천지차이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은 모두가 믿음을 실제화 하여 산 사람들입니다.

믿음에 이끌려 살다보니 세상사람 아닌 것처럼 살게 되더란 말입니다.

이건 오직 믿음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정면으로 거스리기 때문에 육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만큼이라도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은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건과 못지않은 기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내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이 믿음이 간섭하고 있다는 최고의 증거입니다.

아니 분명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고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심으로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어지게 해 주시지 않으면 인간들 스스로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예수를 믿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지금도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각 사람들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시대와 같이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11장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사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믿음이 간섭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만약 성경이 지금도 계속하여서 기록이 되어진다면 저와 여러분의 이름도 성경 속에 기록이 될 것입니다.

후세의 성도들이 아마도 사도행전 후서나 아니면 요한계시록 1,2,3서 정도에 가서 대한민국 울산 땅에 믿음으로 살다간 정낙원 목사가 있었느니라 는 식의 기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 증거하다가 교회는 문을 닫고 주변에 있는 교회와 목사들로부터 이단 소리를 듣다가 쓸쓸히 죽었느니라 고 기록되어질 것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에 선진들을 보고 부러워하듯이 후대의 성도들도 우리를 부러워하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설레이지요.

야!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것인가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전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생각하면서 현실에 아픔들을 이겨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단이라고 하여도 우리 주님께서 알아주시면 되니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지금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을 최고의 기적으로 생각하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런 기적은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이 믿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니까요.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 관점에서 여리고 성의 함락 사건도 이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리고성은 철옹성입니다.

철옹성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성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팔 소리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여리고 성의 무너짐은 이 시대 어떤 영적의미가 있을까요?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뜨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무너뜨렸습니다.

믿음으로 무너졌습니다.

 

지난번에 신천지인가 뭔가 하는 이단 집단에서 잠실 운동장에서 홍해바다 가르기 작전과, 여리고성 무너뜨리기 작전을 하는 것을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코메디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통교회라고 하는 대형교회들이 홍해 작전이니, 여리고 작전이니 하면서 이벤트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수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들이 하고 있으니 이걸 어찌하여야 합니까?

성경에 일어난 사건들을 흉내 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리고가 무너진 것은 분명히 기적입니다.

그러나 기적을 보이고자 여리고를 무너지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서두(序頭)에서 여리고의 멸망은 장차 이 세상의 멸망을 보여주는 계시사적인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계시사적 사건입니다.

 

구약은 신약에서 이루어질 것을 전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성의 멸망사건은 장차 이 세상이 멸망할 것을 예표 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리고 성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사십년 동안 애굽에서 나온 1 세대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1 세대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살아나고 홍해를 건너 광야에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 백성들을 이 산으로 인도하여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출 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출 3: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8절에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다고 하고!

12절에선 이 산에서 나를 섬기게 한다고 합니다.

이는 가나안이나 호렙산 즉 시내산은 동일한 의미입니다.

어떤 장소가 중요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 산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럼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한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내 산에 당도한 이스라엘과 새로운 약속을 맺습니다.

율법을 주십니다.

이걸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불러올려서 율법에 대하여서 말해 줍니다.

그리곤 이스라엘에게 가서 지킬 수 있는지 물어보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이 율법을 지키면 세상 열국에서 으뜸이 되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한마디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겠다는 겁니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율법이란 한마디로 너희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 들어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는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0장에서 23장까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해주고 지킬 수 있느냐? 라고 묻습니다.

 

출 24: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듣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뜻 그리하겠노라고 약속을 합니다.

 

이에 모세가 계약의식을 행합니다.

제단을 쌓고 열두 기둥을 세우고 소를 잡아 제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그 제물의 피를 이스라엘의 머리 위에 뿌립니다.

피를 뿌리면서 이 피는 그냥 피가 아니고 “언약의 피”라고 하면서 약속을 맺었습니다.

 

출 24:4-8=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 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피로 약속했다는 것은 누구든지 약속을 어기면 제물처럼 죽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약속대로 복을 주어야 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약속대로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쌍방간 약속이 이루어 졌습니다.

이를 쌍무(雙務) 언약이라고 합니다.

계약서만 쓰면 됩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 산으로 하나님께 올라가서 사십일 동안 율법을 받습니다.

 

출 24: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께서 두 돌 판에다가 계약서를 써 주셨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시내 산에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것이 출애굽기 24장입니다.

율법을 받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는 때가 32장입니다.

그럼 24장에서부터 31장까지 율법을 받는 시간입니다.

 

이 때의 시간이 사십일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사십일 동안 율법을 받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십일 동안 율법을 받는 것은 앞서 약속한 내용이어야 합니다.

즉 20장에서 23장까지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20장에서 23장까지의 내용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킬 수 있느냐! 라고 물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모세가 사십일 동안 받은 25장에서 31장까지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물론 20장에서 23장까지의 내용을 십계명으로 축약해서 두 돌 판에 새긴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계명을 두 돌 판에 새겨줌과 동시에 성막에 관하여 알려주셨습니다.

 

25장에서부터 31장까지는 전부 성막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성막제도는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과 약속을 맺을 땐 즉 20장에서 23장까지의 내용 속에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성막제도는 모세가 이스라엘과 언약의 피로 약속을 맺고 난 후에 추가로 주어진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거하실 처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은 죄인을 흠 없는 제물의 희생에 피로서 만나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성막에서 이루어질 갖가지 제사 제도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제사란? 죄인이 제물의 희생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약서를 쓰는 두 돌 판을 주실 때 제사가 이루어질 성막을 주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전제로 주어진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애당초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율법은 계약 자체가 성립 될 수 없는 계약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죄 가운데 가두어 두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 없는 죄인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을 은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은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킬 수도 없는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완전히 율법 아래 가두어서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곤 흠 없는 희생제물의 피로 인하여 산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계약에도 없던 성막을 주신 것입니다.

 

성막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율법을 받아 오기 전에 이미 애굽에 신인 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약속을 어겨버립니다.

 

출 32:1-4=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일찍 내려 보내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만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 속에 다른 신을 끄집어내고자 함입니다.

 

그러니 백성이 모세가 더딤을 보고서 금 송아지를 만들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속에 다른 신을 섬기는 죄를 끄집어내기 위하여 모세를 시내 산에서 사십일 동안 붙잡아 둔 것입니다.

 

이로보건데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안 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도록 일을 하시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 아닌 척 하니 너는 죄인이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는 일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만든 사건입니다.

하필 밧세바가 목욕하는 시간에 다윗을 산책케 하였고, 다윗이 산책하는 시간에 밧세바를 목욕케 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다윗은 나단 선지자로부터 자기가 죄악 중에 출생한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자기는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다고 장담하자 죽음이라는 위협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리곤 예수님이 빤히 보는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폭로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나 베드로나 범죄하지 못하도록 막아 준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 안에 죄를 끄집어내어서 자신들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사는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산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자기가 저주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지 라면 한끼 먹는 것도 감사가 됩니다.

믿음으로 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현재의 삶에 감사치 못하는 것은 아직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평하고 원망하는 겁니다.

감사하느냐 원망하느냐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만약 지금의 삶에 감사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더 깊은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을 것입니다.

 

인생 막장으로 밀어 넣어서 난 살 가치가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이걸 히브리서 12장에서 아들에게 행하는 징계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면 그렇게 하십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것은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시 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성도는 멸망하는 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채찍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간섭하면 아프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당하는 아픔은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믿음이 깨닫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아는 자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있는 죄가 토해지자 모세를 내려 보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백성들이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율법이 기록된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트려버립니다.

이는 계약 파기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출 32: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돌 판이 깨어졌다는 것은 약속이 깨어졌다는 뜻입니다.

이젠 이스라엘은 피로 맺은 계약대로 몽땅 죽어야 할 목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 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 자기 목숨을 담보로 이스라엘을 살려 달라고 합니다.

 

출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이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이스라엘을 살려 줍니다.

그리곤 새로운 돌 판에다 율법을 적어서 주었습니다.

비록 율법의 내용은 첫째 돌 판에 기록한 것과 동일한 것이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겁니다.

 

두 번째 돌 판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운명은 모세의 수중으로 들어간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안 죽고 살고 있는 것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살려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일컬어 모세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두 번째 돌 판을 법궤에 담아서 성막에 안치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막은 결국 범죄한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 언약의 중심엔 율법이 있고, 그 율법을 성막 안에 안치시켰습니다.

모세 언약은 죄인을 대신하여 흠 없는 희생 제물이 죽는다는 언약입니다.

죄인은 흠 없는 제물의 피로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애굽에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출애굽 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부르신 언약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속엔 지킬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브라함 후손들은 애굽에서 건져 내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에게 고통당할 때 아브라함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권념하신 것입니다.

 

출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시내 산까지는 아브라함 언약으로 나온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대로 부르심으로 나온 자들에게 모세 언약을 준 것은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어준 분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너희는 죄인이고 죄인인 너희를 위하여 흠 없는 분이 대신 희생당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모세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선택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는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은 날마다 하나님 말씀으로 성도의 죄를 고발하십니다.

 

그리고 죄가 고발당한 성도를 십자가 앞으로 끌고 갑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 언약으로 부르심을 입었고 모세 언약으로 죄사함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도 죄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암튼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서 몽땅 죽게 되었습니다.

율법이라는 언약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으로 나온 자들이 시내 산에서 율법으로 몽땅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율법으로 죽인 것은 은혜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몽땅 죽게 된 자들이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온 이스라엘은 모세 언약 안으로 들어가 버린 셈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한 사람의 수중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모세에게 달렸습니다.

누구든지 모세의 말을 들으면 살고 거역하면 죽습니다.

 

이건 마치 신약에서 성도의 운명이 예수님 수중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죄인을 예수님의 희생으로 살아난 것과 같습니다.

죄인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서 사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모세 언약은 예수님이 세운 새 언약을 겨냥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모세 언약은 구약 마당에서 새 언약과 같은 모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구약에선 장차 주어질 새 언약의 모형일 뿐입니다.

 

암튼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모세 수중에 있는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지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은 전혀 다른 이스라엘인 겁니다.

자신이 사나 모세 안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자기들 생명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모세의 생명으로 사는 자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모세 언약 안으로 귀속되어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모세 언약 속에 담겨져 있는 겁니다.

이건 마치 옛 언약이 새 언약 속으로 흡수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젠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들어갈 이스라엘은 모세 언약으로 다스리십니다.

모세 언약의 핵심은 율법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지금 성막 안에 안치가 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적힌 두 돌 판을 법궤에 담아서 성막에 안치 한 것은 성막이 율법을 감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죽어야 할 이스라엘을 성막이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두 돌판(율법)은 이스라엘의 죄를 상징하고 있으므로 죽음을 담고 있잖아요.

그럼 약속대로라면 죽어야 할 이스라엘인데 지금 성막이 보호하고 있는 셈입니다.

모세가 아니라 성막이 보호하고 있습니다.

모세 역시도 성막 안으로 귀속이 된 것입니다.

 

광야 이스라엘이 성막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성막이 자신들의 죽음을 막아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자신들의 죄를 흠 없는 제물이 대신 죽어줌으로서 죄를 사함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사 때마다 죽어지는 제물을 볼 때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죽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 내가 죽어야 하는데 저 흠 없는 양이 죽는구나!

난 저 흠 없는 양 때문에 사는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막을 중심으로 산다는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 됩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중심엔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흘리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성막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성막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성막이 이동하면 이스라엘도 이동하고 성막이 멈추면 이스라엘도 멈추어야 했습니다.

성막은 구름 기둥 불기둥이 인도를 합니다.

 

이젠 모세도 죽었습니다.

모세 대신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입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당부합니다.

 

율법을 떠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합니다.

율법은 너희들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는 모세 언약이 율법을 담고 있는 성막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성막을 앞세우고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을 합니다.

이제 성막을 따라 요단강 앞에 다다랐습니다.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입니다.

 

이건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마치 홍해바다를 건너면 광야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홍해를 모르는 광야에서 난 자들을 출애굽 사건을 재현시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난 자들에겐 요단강은 홍해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1세대들은 홍해를 건널 땐 모세의 지팡이로 건넜습니다.

그런데 2세대들은 요단강은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 때문에 건넙니다.

 

모세의 지팡이나 언약궤는 모두가 불순종의 상징물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셔서 사명을 줄 때 모세가 거역을 하자 뱀이 되게 한 그 지팡이입니다.

모세에게 있어 지팡이는 하나님의 거역한 증거물입니다.

 

언약궤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궤란? 법궤를 말합니다.

법궤를 때로는 증거궤라고도 합니다.

증거궤라 함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증거물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두 돌판과”,

“만나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상징물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궤를 지금 제사장이 메고 요단강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자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요단강은 홍해바다의 재현입니다.

홍해바다는 애굽에 있던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이 건넜습니다.

요단강은 광야에서 난 모세언약 안에 있는 2세들이 건넜습니다.

 

앞서서 홍해바다에 대하여 살펴 볼 때 홍해바다는 신약적인 의미에서 세례라고 했습니다.

세례란? 예수 안에서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요단강은 홍해의 재현이라고 했으니 영적인 의미에선 동일합니다.

 

그런데 불순종의 증거물들이 담겨져 있는 언약궤를 제사장이 메고 요단강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는 제사장이 범죄한 이스라엘을 안고 대신 죽음으로 뛰어든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제사장의 죽음으로 요단강을 건넌 것이 됩니다.

 

이를 신약적 의미로 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자기 백성들을 몽땅 안고 죽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은 살아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법궤를 앞세우고 요단강은 건넌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합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길갈에서 집단적으로 할례를 행합니다.

 

수 5:1-9=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마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8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할례란?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죽음이라면 광야에서 난 자들이 죽음을 말합니다.

요단강을 건너와서 이제 가나안 사람이 된 입장에서 보면 광야에 사람은 옛 사람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한 것을 일컬어 애굽에 수치를 굴러가게 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여호수아를 통하여서 할례를 받은 자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애굽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애굽에 살았던 부모들은 다 죽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애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할례를 행하고 나서 애굽에 수치를 굴러가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애굽에 사고를 죽였다는 말입니다.

 

부모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열 번이나 반역한 것이 바로 애굽에 수치입니다.

애굽에 수치란?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몸뚱이 중심으로 살고자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만나를 준 것도 몸뚱이 중심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 약속을 믿고 살라는 뜻에서 준 것입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죽은 조상들은 애굽에 음식을 달라고 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다가 모두 진멸 당하였습니다.

 

이들은 조상들이 광야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선 애굽은 징벌 대상임을 알았습니다.

애굽에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가나안에 들어가는 2세들도 가나안에 들어가서 몸뚱이 중심으로 살면 망할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뚱이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옛사람을 죽인다는 의미에서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할례와 유월절을 연계시키고 있는 것은 옛사람이 죽었다는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고 나자 광야 사십년 동안 먹던 만나가 그쳤습니다.

 

수 5:10-12=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 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11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12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만나는 조상들이 광야 사십년 동안 먹던 것입니다.

만나를 먹던 조상들은 모두가 불순종으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오고 할례를 받은 자들에겐 조상들이 먹던 만나는 소용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광야에서 먹던 만나를 그치게 한 것입니다.

가나안에선 가나안에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요단강을 건넌 것은 출애굽의 재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먹던 만나는 1세대들이 애굽에서 먹던 음식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2세들에겐 광야는 애굽과 같은 곳이니까요.

 

그래서 길갈에서 할례를 받고 애굽에 수치를 굴러가게 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가나안에서 살아야 할 2세들에게 있어 만나는 애굽에 음식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1세대들이 먹던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1세대들은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지만,

2세대들은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1세대들이 먹던 양식은 끊어버린 것입니다.

2세대들은 가나안에서 나는 소산물을 먹어야 합니다.

 

이해가 되시는가요.

오늘 말씀은 좀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만큼 이중 삼중 계시가 담겨져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어려운 겁니다.

구약의 사건을 신약의 십자가 사건으로 끌고 와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겁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왜? 여리고성이 무너진 이야기를 말 하면서 모세 언약을 말하는가 하면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제사장이 법궤를 앞세우고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법궤의 의미를 모르면 여리고성 멸망 사건을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출애굽한 1세대들은 다 죽이셨습니다,

그리곤 가나안엔 광야에서 출생한 2세대들을 데리고 들어갑니다.

1세대들은 모세를 따라 나왔다면, 2세대들은 법궤를 따라 들어갑니다.

 

그러니 2세대들이 요단강을 건너면서 법궤를 앞세우고 건넌 것은, 1세대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넌 것의 재현인 셈입니다.

1세대들의 인도자는 모세였지만,

2세대들의 인도자는 법궤입니다.

 

이제 법궤를 앞세운 2세대들이 가나안에 입성을 합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 입성에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바로 여리고 성입니다.

이제 가나안의 소산물을 먹은 이스라엘 앞에 여리고 라는 철옹성이 버티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으므로 여기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의 능력으로서는 무너뜨릴 수가 없는 철옹성입니다.

 

이때 여호수아 앞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납니다.

 

수 5:13-15=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수아가 묻기를 당신은 누구편입니까? 라고 묻자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편이 아니면 징벌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일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합니다.

신발을 벗으라는 말은 가나안은 너희가 걸어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업고 들어가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는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나왔다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가나안은 신약적 의미에서 천국입니다.

성도가 천국에 가는 것은 예수님이 업고 가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우리를 업고 오셨습니다.

이걸 히브리서 11장 식으로는 믿음으로 왔다고 합니다.

 

암튼 여호수아에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나서 여리고는 자기가 무너뜨린다고 하십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구경만 하면 됩니다.

홍해 앞에서도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구경만 하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여리고를 무너뜨리는가 구경을 하라고 합니다.

성도를 구원하는 일은 예수님이 하십니다.

성도는 구경만 하면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 것만 얻어먹으면 됩니다.

그래서 전혀 인간들이 전쟁 방법이 아닌 이상한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수 6:1-16=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7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지니라 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1 여호와의 궤로 성을 한번 돌게 하니라 무리가 진에 돌아와서 진에서 자니라 12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니라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13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니라 14 그 제 이일에도 성을 한번 돌고 진에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15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번 도니 성을 일곱번 돌기는 그날뿐이었더라 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일곱 제사장이 법궤를 메고 나팔을 불면서 앞서 행하면 백성들은 그 뒤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매일 여리고 성은 한 바퀴씩 일주일간 돌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엔 일곱 바퀴를 돌고 일곱 제사장은 일제히 나팔을 불고 백성들을 소리치라고 합니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 소꿉놀이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장난 같이 여겼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무기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의 나팔로 싸웁니다.

 

나팔은 하나님의 무기입니다.

무슨 이런 전쟁이 다 있습니까?

 

여리고 사람들은 아무도 여리고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나팔 소리에 무너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앞세우고 일주일이나 나팔 불면서 여리고를 뺑뺑 도는데도 구경만 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일곱 제사장의 나팔 소리에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걸 오늘 본문에선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이성적으로 어리석어 보입니다.

믿음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아이들 병정놀이 같은 일을 일주일이나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리고성이 제사장의 나팔 소리에 무너진 것은 장차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팔 소리에 무너질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여리고성의 멸망은 장차 이 세상의 멸망의 예표라고 했지요.

그럼 장차 이 세상도 제사장의 나팔 소리에 멸망당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장차 이 세상은 일곱째 나팔소리에 무너진다고 하였습니다.

 

계 11:15-18=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계 10: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일곱째 천사는 일곱 제사장과 같습니다.

복음은 나팔소리와 같습니다.

복음이 뭐냐!

이 세상이 망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망한다고 하면 웃습니다.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 듣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셔서 망하게 한다고 하면 조소합니다.

아니 어떻게 세상이 나팔소리에 무너질 수가 있는가? 라고 비웃습니다.

 

여리고에 사는 사람들이 나팔 소리에 무너질 것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팔 소리에 무너진다고 하는 사람의 말을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 들었습니다.

 

베드로도 세상의 종말을 말하면 우수갯 소리로 듣는다고 했습니다.

 

벧후 3:4-7=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러나 실제로 여리고성은 제사장의 나팔 소리에 무너졌습니다.

나팔소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세상은 핵무기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사라집니다.

이 무슨 황당한 소리냐구요?

아닙니다.

 

세상의 망함은 세상의 창조의 역순(逆順)으로 사라집니다.

 

알다시피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가 죄었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능력이기도 하지만 멸망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살리는 능력이기도 하지만 죽이는 능력이기도 하십니다.

 

복음은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가 되시기도 하고 저주의 주가 되시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성도에겐 생명의 능력이지만, 불신자에겐 저주의 능력이십니다.

 

믿음이 없으면 창조를 믿지 못하듯이 심판도 믿지를 못합니다.

반대로 믿음을 받으면 창조도 믿고 심판도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망한다는 것을 믿지를 않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습니다.

 

세상이 망한다는 것을 믿는 자는 삶에 자세가 다릅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나그네와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을 알려면 그 사람의 삶에 자세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왕의 혼인잔치에 초청에 응하는지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일이 우선인지 나타납니다.

왕이 심판 주라는 것을 알면 열일 다 제쳐두고 왕의 아들에 혼인 잔치에 참석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을 우습게 여기면 왕의 말을 농담으로 듣고 자기 일에 열중입니다.

 

예수가 주라는 것을 알면 예수 앞에 나올 것이고, 예수가 주라는 것을 모르면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일을 우선하고 살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오지 않고 놀러 다니는 것은 모두가 왕의 초청을 우습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꽃놀이 가고, 계모임을 가고, 운동하러 가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믿음으로 간섭 받는 자는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일보다 복음 듣는 일에 우선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간섭 받지 않는 자는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을 우선시 하고 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맨 제사장을 좇아서 여리고 성을 돌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주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난공불락과 같은 여리고 성도 제사장의 나팔소리에 무너졌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화려하게 보여도 복음 앞에선 무너져 내릴 여리고에 불과 합니다.

여리고의 무너짐을 신앙으로 이해한다면 율법 신앙의 무너져 내림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광야를 세상이라고 본다면 가나안은 천국입니다.

성도가 천국 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인간의 의(義)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입니다.

 

죄와 사망은 여리고 성입니다.

그런데 그 죄와 사망이라는 여리고성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무너집니다.

여리고 성이 나팔소리에 무너진 것은 인간의 의(義)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복음으로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믿음이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앞세우고 나아가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역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붙잡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붙잡는 성도가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자가 됩니다.

 

믿음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에 의(義)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義)라고 알려 주실 것입니다.

믿음이~ 예수의 의(義)를 붙잡고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지금까지 의(義)라고 여겨왔던 율법 신앙을 다 버렸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지금까지 철옹성과 같던 율법의 의(義)라는 여리고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율법 아래선 천국을 맛보지 못하였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앞에서 율법의 의(義)가 무너져 내리고 나니 천국을 맛 볼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 보니 인간이 자랑하는 의(義)라는 것은 배설물임을 알았습니다.

율법 아래 흠이 없었던 신앙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앞에선 배설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의 의(義)란? 배설물입니다.

예수님의 피 앞에선 다 무너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여리고를 다시 쌓으라고 합니다.

법궤를 앞세우지 말고 인간의 의(義)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고 합니다.

율법에 의(義)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리고를 다시 쌓는 자는 반드시 저주를 받게 됩니다.

 

수 6:26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여리고를 다시 쌓는다는 것은 예수의 피를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열심과 정성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성화주의는 여리고를 다시 쌓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義)는 무너져 내려야 할 것이지 세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義)가 세워지면 예수님의 의(義)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여리고를 쌓지 못하도록 역사를 하십니다.

의로운 자리에 앉히지 않고 죄인의 자리에 앉힙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아니면 얼굴을 들 수 없도록 하십니다.

 

성도가 마음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것은 다 믿음으로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간섭을 받는 성도는 자기 의(義)를 쌓지 않습니다.

늘 상한 심령과 애통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것과 비례하여서 감사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많이 탕감 받은 것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욱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적게 여겨질 것입니다.

 

좋은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많이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성도가 성경을 보는 것은 자기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만큼 우리의 인생은 감사로 넘쳐 날 것입니다.

이런 감사의 삶을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한다고 합니다.

또한 찬미의 제사라고 합니다.

 

부디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에 깊이를 많이 깨닫고 예수님의 피 흘려주심에 대한 감사가 깊어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여리고성의 멸망을 통하여서 이 세상의 운명을 알았습니다. 또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영영히 선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법궤를 앞세우고 여리고를 무너뜨렸듯이 우리 앞에 놓인 여리고도 예수님의 피로서 무너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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