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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강해)20강. 기드온과 믿음 (히 11:32)

by coroa 2022. 4. 18.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0강. 기드온과 믿음 (히 11:32)

-.정낙원 목사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이 세상에 믿음이 없는 종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믿음을 강조합니다.

TV 다큐멘터리 채널에 나오는 아프리카의 토속 부족들이 행하는 우상숭배적 신앙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미개하게 보여도 그들에겐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무당들도 그들만이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절간에게 부처에게 비는 사람도 믿음으로 빕니다.

하다못해 시골에 할머니가 새벽마다 정화수(井華水) 떠다 놓고 치성(致誠)을 드리는 것도 믿음으로 드리는 겁니다.

 

집에 부적을 붙이는 것도 믿음으로 하고!

개업식 날 입구에 소금 가마니를 밟고 드나들게 하는 것도 믿음으로 하고!

새 차를 구입하고 고사를 지내는 것도 믿음으로 드립니다.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교적 의식에 믿음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도 믿음을 강조하고!

천주교도 믿음을 강조하고!

안식교도 믿음을 강조하고!

자칭 정통교회라고 하는 장로교에서도 믿음을 강조합니다.

토속 종교에서부터 불교나 천주교나 힌두교나 이슬람교나 기독교나 모두가 믿음을 말합니다.

 

이러면 문제는 복잡해집니다.

모두가 믿음이라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 믿음이냐 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두 다 믿음이라고 인정해 주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단 말이죠.

 

그렇다면 자기 믿음을 정통이라고 내 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이 어느 것인가를 아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도 않는 믿음을 가지고 싸울 일이 아닙니다.

 

예전에 감리교 신학대학장을 지낸 변선환이라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기독교만이 유일한 길이 아니라고 했어요.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산 정상에 올라가는 것으로 비유하면서 자기 논리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는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여러 가지 길이 있다고 했어요.

 

불교를 통해서도 갈 수가 있고,

이슬람교를 통하여서도 갈 수가 있고,

기독교로도 갈수가 있다는 겁니다.

 

모두가 하나의 길 일 뿐이라는 거에요.

그러니 타 종교를 배타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서로 인정하여서 평화롭게 살자고 합니다.

이걸 종교 다원주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석가탄신일에 연등을 달고 축하해주고!

성탄절에는 절간에서 예수 탄생을 축하해 주고 있어요.

목사가 승가대학에서 스님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스님들이 교회에서 설법을 하고 있어요.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다 같기 때문에 타 종교를 배타적으로 대하지 말고 한 형제라고 생각하고 수용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한 하나님의 자녀이고 한 지붕 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한 형제라는 겁니다.

참으로 좋은 말이지요.

세상 적으로 들으면 이보다 더 좋은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펴면 이 세상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은 아담 안과, 예수 안으로 갈라놓고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아담이라는 땅 사람의 조상과, 예수라는 하늘 사람의 조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둘은 하나로 평화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밀어내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는 빛과 어둠처럼 하나가 하나를 소멸시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아담 안도 믿음을 말하고 예수 안도 믿음을 말하지만 본질이 다른 믿음입니다.

모두가 믿음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오직 한 믿음만을 믿음이라고 인정하십니다.

그럼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지요.

 

성경이 인간의 죄를 이야기하고 그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해결한다는 것을 중심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인류평화로 접근해서는 안 되어요.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는 겁니다.

 

여기에 일말의 타협이나 양보가 없어요.

타협하는 것이나 양보하는 것은 물과 포도주가 섞이는 것과 같아요.

이걸 타락이라고 해요.

마치 창세기 1장에서 빛과 어둠이 섞여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중에 있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예수님 중심으로 이 세상을 다스려 가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사가 오직 아들에게만 있어요.

얼마나 아들을 사랑하였으면 천국도 아들의 나라로 만들어 놓았겠어요.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은 아들에게 맞추어져 있어야 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은 정해져 있어요.

 

하나님은 단 한 분 예수님만을 사랑합니다.

이는 마치 아브라함에게 여러 아내를 통하여서 얻은 자식들이 있었지만 오직 이삭만 아들로 인정하고 유업을 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삭을 아브라함 자식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인정하는 자식이 있습니다.

그 아들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에 감동으로 보니 아브라함의 자식은 이삭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어요.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의 여러 아들 중에서 오직 하나만 아들이라고 하지요.

그 하나가 누구인가요?바로 약속으로 낳아진 이삭이에요.

 

이삭은 예수그리스를 보여주는 예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이외는 모두가 저주 받을 자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 사랑을 입고 사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목숨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여도 소용이 없어요.

오직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죄인이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건 불가능해요.

 

왜? 죄인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죄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순수성이 없어요.

 

이건 옆집 아주머니가 떡 사들고 와서 알랑방귀 뀌는 것과 같아요.

왜? 떡 사들고 왔을까요?

돈 빌리려고 왔지요.

어른들은 대번에 알아보지만 아이들은 떡에 정신 줄을 놓고 몰라요.

 

사람은 자기가 아쉽지 않으면 남에게 머리 조아리지 않아요.

이처럼 죄인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그 속에 무슨 꼼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 꼼수가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이처럼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여러분의 마음은 가상합니다.

그걸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진 않습니다.

진심인 걸 알아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사랑을 받지 않아요.

 

인간이란 이기주의자라서 자기가 한 사랑이 거절당하면 금새 적개심으로 돌변해 버립니다.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 뒤엔 항상 질투가 있어요.

내 사랑이 거절당하면 그 순간부터 미움이 불타오릅니다.

 

마치 가인이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자 분노가 치민 것과 같습니다.

왜? 나를 무시하느냐?

그래서 아벨을 쳐 죽인 겁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죽인 겁니다.

 

그러므로 교인들도 주여 제가 믿습니다! 라고 주님을 쫓아다니다가도 주께서 난 네가 싫다! 라고하면 죽여라! 죽여라! 합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죽었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자기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할 때 왕이 되어 주었으면 안 죽었을 텐데 예수님은 어리석게도? 왕 됨을 거절하셨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생각 같으면 일단 왕이 되어서 얘들아! 그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가르치면 될 것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것이 틀렸으면 천천히 가르치면 될 것 아니에요?

우리 생각엔 그렇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여서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교화(敎化)시키려 하지 않고 거절하였습니까?

이는 죄인은 교화(敎化)시켜서 될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죽여서 다른 인간으로 만드시지 고쳐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사랑하지 마세요.

아내도 남편도 서로 사랑하지 마세요.

사랑하다간 큰 코 다칩니다.

자식도 사랑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바라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원수가 됩니다.

 

그러니 그냥 사이좋게 지내십시오.

우리 서로 기분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살자고 하세요.

괜히 사랑할 수도 없는 것을 사랑하다고 애쓰지 마시고!

안 되는 건 아무리 노력해도 안돼요.

 

그러니 서로 간에 노골적으로 난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하십시오.

난 당신이 이렇게 해주면 좋고 저렇게 하면 싫다고 하십시오.

서로가 정치적으로 타협을 하고 사세요.

그래야 나중에 여러분이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인간은 누구를 사랑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살다가 서로 이용가치가 없다고 하면 미련두지 말고 갈라서세요.

서로 싫으면서 악악거리고 살아보아야 온갖 스트레스로 화병만 쌓여 갑니다.

이건 이혼하라는 말이 아니고 적당히 타협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느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 마십시오.

그 믿음이 거절당하면 여러분은 예수를 죽입니다.

솔직하게 좀 도와주세요! 라고 하세요.

괜히 옆집 아주머니와 같이 마음에도 없는 떡 사들고 와서 아양 떨지 마세요.

하나님께 무슨 조건을 바라고 하는 것만큼 손해를 보는 겁니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할 만큼 관대하고 여유로운 사람들이 아니에요.

눈만 뜨면 살아갈 일에 좇기는 사람들입니다.

알아서 척척 신앙생활 할 만큼 괜찮은 인간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 앞에 바라바리 사들고 갖다 바칠 그런 위인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도, 예수를 믿을 수도 없어요.

애석하지만 이게 인간의 실존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을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선물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걸 알고 있어야 믿는다고 하는 그것이 여러분의 자랑으로 남지 않습니다.

믿음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란 사실을 간과하지 마십시오.

 

많은 교인들이 생각하기를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이 믿음인 줄 압니다.

그러나 내가 믿는 것과, 하나님이 믿게 해주는 믿음은 다릅니다.

내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내 경험과 내 지식으로 나온 것이지만, 믿음은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 합니다.

 

목사님들은 이 성경구절을 근거로 교인들에게 전도하라고 요구합니다.

교인들은 이 가르침으로 밖에 나가서 여러분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를 영접하여서 천국에 가십시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시인 할 수 없다고 하는데도 믿을 것을 강요합니다.

왜? 이 좋은 예수를 안 믿느냐고 닦달을 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안에는 스스로 예수를 믿겠다고 찾아온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습니다.

모두가 예수를 자신들이 영접하고 믿어서 와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으니 자신은 당연히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곤 밖에 나가서 외칩니다.

어깨에 띠를 두르고 여러분! 주 예수를 믿고 나처럼 구원을 받으십시오! 라고 외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좋은 보험 하나 나왔으니 들라고 판촉 하는 사람들처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그리곤 하나님 일을 했다고 뿌듯해 합니다.

한국기독교 역사는 이런 악순환(惡循環)으로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성경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말씀은 우리더러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따 내라는 말이 아닌 것을!

이를 어찌해야 하나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말씀은 우리더러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따 내라는 말이 아니에요.

반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시키지 않고 주 예수를 믿음으로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는 방법이 예수를 믿음으로 하신다는 말이지,

우리더러 동의해서 예수를 믿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고, 믿기 싫다고 해서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면 믿을 수밖에 없고, 믿음을 안 주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어요.

누구든지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시면 예수님을 주(主)라고 시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처만 기다릴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데에 있어서 인간이 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줄 알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지 않으면 절대로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 우리가 믿는다는 것과 믿음이라는 말은 언어적으로 비슷하지만 전혀 다릅니다.

내가 믿는다고 하는 믿음은 내가 동의하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믿음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우리의 동의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 자기는 자기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인간 쪽에서 취사선택 할 수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실 필요가 없잖아요.

우리가 그냥 믿으면 되니까요?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은 예수를 우리 능력으로는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주신 겁니다.

 

말로는 믿음은 선물입니다! 라고 하면서,

믿으세요! 믿으세요!

그러면 앞뒤가 안 맞지요.

 

오늘 미장원에 머리 다듬으러 갔다가 극동 방송을 듣게 되었습니다.

미장원 집사님이 즐겨 듣는 것이라 내 원함과 상관없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어떤 목사님이 느헤미야를 설교하는데 “새로운 인생을 열자” 라는 제목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느헤미야를 본받고 결단을 하라고 합니다.

 

글쎄요?

느헤미야가 새로운 인생을 열어 주려고 귀환을 하였는지는 몰라도 이건 영 아닌 겁니다.

마치 윤리 선생님이 도덕 강의하는 것 같아요.

설교의 주제가 인간의 행복에 맞추어져 있어요.

믿음이니 은혜니 라는 말을 양념으로 상투적으로 사용하면서 지금 결단 하지 않으면 영원히 결단 할 수가 없을 수도 있으니 결단하라는 겁니다.

 

남 욕하지 않고, 성질 내지 않는 걸 결단하고!

교회에 충성 봉사 하는 걸 결단하고!

새벽기도 하는 걸 결단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걸 결단하고!

 

무슨 놈에 결단 할 것이 그리도 많은지 온통 결단하라는 소리만 초지일관 외치는 겁니다.

개과천선(改過遷善) 하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그 교회는 결단 교회인가 봐요?

 

왜? 아직도 술 담배를 끊지 못합니까?

왜? 주일을 지키지 못합니까?

왜? 교회에 충성 봉사를 하지 않습니까?

왜? 기도를 안 하십니까?

그 중에 압권은 옥합을 깨트릴 수 있는 결단을 요구하는 겁니다.

마리아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누군 마리아 같은 믿음을 갖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줄 아세요?

우리 모두 옥합을 깨고 싶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않고 오직 그에 나라와 그에 의만 구하면서 살고 싶어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싶고,

내 모든 것을 다 내 던지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싶어요.

남을 미워하지 않고,

이웃과 화평하고,

오른 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도 기분 좋게 돌려대 주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안 된단 말입니다.

마음은 굴뚝같은데 안 되니 문제인 겁니다.

그러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서 탄식 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데로 살아 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단을 하라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고 그냥 대중들 앞에서 윤리 강론을 하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이 아니고 도덕 시간이에요.

 

설교란? 하나님의 뜻을 강설(講說)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설교는 인간의 죄가 나오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나와야 해요.

하나님 말씀 앞에 우리는 죄인일 수밖에 없고, 그 죄에서 구원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 뿐이라고 증거해 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 어떤 설교라도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고 결단을 요구하는 것은 마귀 설교입니다.

마귀는 맨 날 순간순간마다 늘 반성하게 하고 결단하라고 합니다.

인간 좀 되라고 해요.

왜? 아직도 그 모양이냐? 라고 제발 좀 분발하라고 해요.

언제까지 그 모양 그 꼴로 살거냐! 고 반성 좀 하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반성은 신앙이 아니에요.

신앙은 예수를 믿는 것이지 내 행실을 돌이키고 뜯어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결단하라고 설교하는 목사는 마귀의 대변자가 되어서 교인들 앞에서 강론하는 겁니다.

그 목사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몰라요.

인간은 결단한다고 해서 결단 한 것처럼 살아지지가 않아요.

아니 살 수가 없어요.

 

인간들이 의지가 약해서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죄를 이기지 못해서 죄를 짓는 겁니다.

이걸 성경은 “죄의 권세 아래 있다” 혹은 “죄 아래 팔렸다” 고 합니다.

 

권세 아래 있다는 말은 거역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스림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죄가 시키면 거역할 수가 없어요.

싫어요! 난 죄 안 지을래요! 가 안 되어요.

그저 예! 뿐입니다.

 

이건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죽음 앞에서 인간의 의지력으로 이기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아니 인간이 죽는 게 의지가 약해서 죽습니까?

아무리 살고자 의지를 다지고 각오를 해도 죽음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이걸 금지 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해요.

막을 수 없는 법칙이란 말입니다.

죽음 앞에선 의지나 각오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죄도 이와 같아요.

 

바울이 의지가 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해서 하나님 말씀 앞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탄식한 줄 아세요.

죄를 인간이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탄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쓴 성경을 가지고 결단하라고 하면 이건 영 아니지요.

 

인간을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죄인인 겁니다.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으면 의인이지 그게 어디 죄인입니까?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죄인이잖아요.

이걸 “죄의 종”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디 결단을 못해서 이 모양 이 꼴로 신앙생활을 합니까?

야! 올해는 진짜 예수 잘 믿을 꺼야 라고!

해가 바뀌는 연말연시(年末年始)가 되면 수 없이 결단을 했잖아요.

앞으로 잘해야지!

 

올해는 진짜 신앙생활 잘 해야지!

어디 한 두 번 결단했습니까?

수십 년을 그렇게 반복하면서 연례행사(年例行事) 하듯이 결단하면서 살아 왔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각오하고 다짐한 모습으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새해 첫날에 다짐한 것이 몇 일이나 갑디까?

한 주간을 못가요.

 

교인들마다 다 예수 잘 믿고 싶어 해요.

교인들 치고 예수 잘 믿고 싶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다 바울처럼 12제자들처럼 잘 믿고 싶어 해요.

다 모가지 내어 놓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면서 살고 싶어요.

하지만 안돼요.

우리 뜻대로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예수가 잘 안 믿어진다는 것은 믿음을 우리가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의 게으름을 합리화 시켜 주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으름하고 불가능하고는 달라요.

불가능은 알아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게으름은 의도적으로 안하는 겁니다.

 

교인들이 신앙에 열정이 없는 것은 게으른 겁니다.

복음을 이용해서 자기 육신을 편하게 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을 빙자해서 세상적 안락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복음을 알면 복음에 대한 뜨거움이 나타나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오히려 퇴보했지 한 걸음도 전진하지 않아요.

제가 놀라는 것은 교인들에게 그렇게 복음을 전했는데도 나아지지가 않고 퇴보 한다는 겁니다.

 

옛날엔 주일이 되면 결석은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젠 결석하는 것은 다반사입니다.

피곤하면 자야지요.

손님 오면 놀러가야지요!

결혼식 가야지요!

봄에는 벚꽃 구경 가고, 가을엔 단풍놀이 가야지요!

 

이래 빠지고 저래 빠지고 교회 오는 것보다 안 오는 것이 배나 많아요.

그러면서 복음을 안 다고 해요.

사람들이 주일날 놀러가고 볼 일 보는 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이상하게 주일날 빠지지 않고 교회 오는게 바보 같고 믿음 없는 것으로 되어 버렸어요.

전 도무지 모르겠어요.

 

저 사람이 지금 복음을 알기나 하고 안다고 하는지?

분명히 성경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니 사람의 가치관이 달라지던데!

날마다 모이고 세상을 초월하고 육신을 초월하던데!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전혀 상반된 현상들이 나타날까?

 

그래서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게 있어요.

아! 저 사람은 복음을 이용하는 사람이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구나!

저 사람들에게 예수는 관념이지! 실제가 아니구나!

예수가 죽었거나! 아니면 저 사람이 죽었거나! 둘 중에 하나구나!

 

내가 지금까지 십 수 년을 죽은 나무에 물만 줬구나!

산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물을 주고 밥을 줬으면 달라져야 할 것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뭔가 반응이 나타나야 할 것 아닙니까?

개과천선(改過遷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쓰면 쓰다! 달면 달다! 하라는 겁니다.

 

복음을 들으면 영혼에 기쁨이 일어나고 뭔가 예수님의 생명에 꿈틀거림이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의 생명의 냄새는 나타나지 않고 육신의 썩은 냄새만 풍기니!

이건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입니다.

죽은 나무에 물을 주면 더 썩듯이 죽었기 때문에 전보다 더 나빠지는 겁니다.

 

이건 마치 집을 깨끗하게 청소 해 비워두니 전에 있던 귀신이 자기 친구 일곱을 데리고 와서 전보다 더 나쁘게 된 것과 같습니다.

농땡이만 늘었어요.

율법 아래 있을 때 보다 하나님과 더 멀어져 있어요.

예수님과 멀찍이 떨어져 있어요.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듯이 자기 부인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부인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죽은 예수가 아닌 다음에야 산 예수라면 반드시 자기 부인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아니 산 놈이 움직여야 정상이지!

살았다고 하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으면 그건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겁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예수님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장사(葬事) 놀이를 해도 곡을 하지 않아요.

예수! 너야 피리를 불든 말든 나는 내 볼일 보겠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배 째라는 겁니다.

 

이런 똥배짱은 교만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풍성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받은 자라면 반드시 예수님의 생명에 현상들이 나타나야 해요.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일어나고, 은혜를 사모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인 겁니다.

 

아니 조금 전에 우리 마음 먹은 대로 살 수가 없다고 해 놓고선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느냐고 따질 수 있겠지요.

결국 목사님도 행함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라고 반문 할 수 있겠지요.

 

제가 여러분의 행함을 요구할 이유가 없어요.

제가 미쳤다고 여러분에게 행함을 요구합니까?

믿음이 있으면 자연히 그 믿는 것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나게 되어 있는데!

왜? 이래라 저래라 합니까?

 

난로에 불이 피워졌으면 가까이 가면 따뜻해지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으면 당연히 믿는 것에 대한 행함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무엇하러 행함을 강요합니까?

 

예수님이 주신 믿음을 보여 보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하지 말고 믿음이 우리 속에서 행한 사건을 보이라는 겁니다.

입으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지 말고!

그런 믿음은 야고보서에서는 죽은 믿음이라고 했잖아요.

 

밥 차려 놓으면 배고픈 사람은 찾아와서 먹게 되어 있어요.

죽은 놈은 아무리 쳐 먹으라 해도 소 닭 쳐다보듯 합니다.

말씀이 듣기 싫고 교회 오기가 싫은데 그걸 제가 어찌 하겠습니다.

그러니 틈만 나고 핑계거리만 생기면 교회에 안 오는 겁니다.

 

배고픔을 아는 사람은 밥시간이 기다려져요.

성도가 되어서 말씀 듣는 것이 기쁘지 않으면 그건 성도라고 할 수가 없지요.

교회 오는 날이 기다려져야 정상입니다.

무엇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왜? 복음에 대한 반응들이 없느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그렇게 시시합니까?

교회는 시간 나고 심심할 때 한 번씩 오는 놀이터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도 하나님처럼 여러분이 믿습니다! 라는 말을 안 믿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습니다! 라고 해도 안 믿어요.

우리가 믿습니다! 라고 하는 믿음을 믿음으로 인정해 주지 않아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은 우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관리를 해요.

하나님이 관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우발적인 사건들이 삶 속에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우발적인 사건과 사고가 터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관리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사사기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어떤 사건과 사고를 터뜨리면서 관리해 가시는가의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 11장을 강해해 오면서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믿음과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믿음은 인간이 동의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일을 하시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의 믿음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갑시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는 능력(能力) 또는 동력(動力)입니다.

하나님이 심어준 약속을 이루어가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동의와 상관치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우리가 반응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흔히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신학이 이런 신앙입니다.

자유의지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시간 시간 결단을 강조합니다.

 

물론 이 시대 교파를 초월하여서 모든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입니다.

교회마다 교인들로 하여금 믿을 것을 강조합니다.

이는 교인들로 하여금 열심과 충성과 봉사를 끄집어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법에 속한 사람들은 이 소리가 복음으로 들려요.

자기 안에 잠자던 종교성을 일깨워 주기 때문에 그렇게 좋아해요.

그래 열심을 내야지!

맞아! 내가 지금까지 너무 게을렀어!

이제부터 새 사람이 되어야지! 라고 다짐을 합니다.

 

“나” 라는 존재의 의미를 각성시켜 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교인들이 열심과 충성을 강조하면 아멘! 이라고 화답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인간의 종교 심리를 이용하여 교회라는 신전(神殿)을 유지보수 하여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열심과 충성을 안 끌어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교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연중행사로 갖가지 행사를 벌리는 겁니다.

 

예배당을 매머드같이 지어 놓았으니 운영을 하여야 하잖아요.

교회라는 조직을 교인들이 헌금을 안 하고 봉사를 안 하면 어떻게 운영이 되겠어요.

그러니 교인들로 하여금 열심을 내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여야 하니 믿음에다 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믿으라는 겁니다.

시간 시간마다 믿으라고 강조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열심을 내라는 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헌금 좀 듬뿍듬뿍 내라는 겁니다.

왜? 옥합을 안 깨느냐? 입니다.

 

어차피 지금 이 시대 교회들은 세상 가치관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합니다.

자본주의(資本主義)에선 모든 것을 돈의 가치로 결정을 해요.

이 원리가 종교로 둔갑을 하면 행함이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엔 믿음이 아니고 행함이 지배하게 되는 겁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하여도 돈을 안내면 찬밥 취급당합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히브리서 11장에선 믿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인간들의 열심과 충성을 이끌어내지 않았어요.

오히려 인간들이 반발했어요.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달라요.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은 우리가 동의하고 동참하여야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즉 믿음을 내가 행하여야 하는 것으로 알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동의하고 동참하여야 하는 믿음은 내 믿음이지 하나님의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얼마든지 믿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를 통하여서 깨달은 것은 정 반대예요.

우리가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헷갈리지요.

 

한국교회에서 길들여진 믿음은 교회에서 목사들이 여러분 믿으십시오!

그렇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아멘! 할렐루야!

내가 믿습니다! 라고 하여야 믿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만약 교인들이 목사의 말에 장단을 맞추어주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래서 믿어지지 않지만 그렇게 될 줄 믿으라고 하니 믿는다고 아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은 전혀 인간의 반응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인간의 불신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셨다고 합니다.

믿음이 불도저처럼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에 상관치 않고 밀어 붙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자기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밀어 붙인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 능력을 말해요.

 

그런데 아주 의미심장하고 역설적(逆說的)인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밀어 붙이면 아멘! 할렐루야! 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싫어요! 난 안 할래요! 라는 죄가 튀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밀어 닥치니 인간의 순종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입니다.

감히 하나님께 반발을 하다니요.

이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사람들이 그런 반응들을 보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선진들이라고 본 받아야 한다고 하던 사람들이 그랬어요.

하나님 말에 예! 하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 싫어요! 안 할래요! 라고 했어요.

 

히브리서 11장을 이 시대 한국교회 식 믿음으로 본다면 모두가 믿음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건 한국교회 믿음 관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성경을 조상들의 유전(遺傳)으로 인간의 지식과 상식으로 보아왔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중심으로 성경을 보지 않고, 인간이 할 수 있다는 행함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보지 않고, 인간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너머에서 성경을 보지 않고 십자가 이쪽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인간이 행사하는 것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틀렸든지 히브리서가 틀렸든지 둘 중 하나는 틀린 겁니다.

감히 성경이 틀렸다고는 하지 못하니 결국 우리가 틀린 것입니다.

그럼 히브리서 11장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이 틀렸는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으로 간섭하면 불순종의 모습들이 튀어 나오는 겁니다.

우리는 그 어떤 성경을 대하더라도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순종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불순종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일이 진행되어져 간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간에 그 끝자락엔 항상 하나님의 은혜성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셨음만 남아야 합니다.

 

성도가 천국에 가는 것은 자발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끌고 가는 겁니다.

만약 천국에 자발적으로 가면 자랑들이 난무 할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에 간 사람들의 모습을 모면 자기 자랑은 없고 오직 어린양만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들의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힘으로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남기고자 합니다.

인간의 흔적들이 자라잡지 못하도록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인물들이 걸어온 여정 속에서 인간들이 자랑할 것들이 없습니다.

 

모두가 믿음이 그들을 붙잡아서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물들을 거명 할 때마다 “믿음으로” 누구는 무엇을 하고 “믿음으로” 누구는 또 무엇을 하였다는 식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이렉트로 받지 말라고 했지요.

하나님 말씀은 육에 속한 사람이 바로 받으면 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인은 하나님 말씀은 순종할 수 없도록 가두어 두셨기 때문입니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없도록 가두어 두신 것은 죄인을 죽이고자 하심입니다.

죽음 안에 가두고자 함입니다.

그리하여 긍휼을 베풀어서 구원코자 함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무가치해지고 말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신 지켜주심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예수님을 거쳐서 받아야 살아요.

이는 우리가 말씀을 지키고자 하면 죽고, 예수님이 지켜 주신 것으로 받아야 산다는 말입니다.

 

이걸 아브라함과 율법을 가지고 설명을 하였어요.

다 까먹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율법을 받으면 은혜가 튀어 나오는데, 아브라함 언약 밖에서 받으면 죽음이 터져 나와요.

왜냐하면! 죄인이 하나님 말씀을 받으면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죽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와 상관없이 부르심으로 구원이 된 사람에게는 율법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니 율법을 지켜야한다는 부담감이 없고 볼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 볼 사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본문을 보십시다.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본문을 보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라고 하지요.

 

이 말은 “내가 무슨 증거를 더 보여주어야 되겠느냐?” 라는 말입니다.

“이만큼 말해줘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이해가 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무슨 증거를 더 말해 주어야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이해하겠느냐?”

 

지금까지 아벨로 시작하여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까지 갖가지 사건들을 들어서 설명해 주었는데도 모르겠느냐?

아직도 믿음이 뭔지 모르겠느냐?

이 밥통들아!

 

이건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못 믿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책망하는 말과 같습니다.

어이쿠! 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디 믿는 자들아! 라고 책망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이 책망에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역시 동일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안 믿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끌고 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도?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냉정하게 여러분을 돌아보세요.

과연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여기 이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끌려 온 건가?

우린 하나님의 손이 이끌려 왔어요.

우리는 믿고 싶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셨어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준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음에도 기어코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시고야 마는 이 하나님의 집요하심을 아셔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어서 하나님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건 믿지 않건 개의치 않고 그들 속에 약속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반드시 일을 하시고야 마는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야 믿음 안에 있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사사들을 한 번 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으면 사사들을 통해서 더 설명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여러 인물들과 같이 못난 부분들을 거론하고자 하는 겁니다.

 

사사기를 읽어 보아서 알겠지만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지독히도 말을 안 듣는 놈들의 역사가 사사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사사들을 믿음 장에서 언급하고 있어요.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지요.

 

지독히도 말을 안 들어 쳐 먹은 인간들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믿고 순종하였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란 것을 삼척동자도 알 것입니다.

반대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쳐 먹는 인간인데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끌고 오셨다는 것을 말씀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 꼴통들을 봐라!

저 꼴통들을 여기까지 끌고 오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파하셨는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꼴통을 보면 하나님의 인내와 용서와 낮아지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야! 나 같은 못난이를 이렇게 키운다고 부모님이 얼마나 속을 끓이셨을까? 를 알아야지!

그래 내가 이만큼 살아 준 것이 얼마나 대견하냐? 라고 하면 이걸 어째야 합니까?

 

지금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보시기에 그렇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맨 날 목사가 얼르고 달래야 겨우 교회에 오는 이 노릇을 어찌하여야 합니까?

 

그래 예수 믿은 지가 수년 또는 수십 년이 되어서 아직도 교회 찾아오는 길을 모르니 이걸 어찌하여야 좋겠습니까?

주일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니 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입니까?

창피 한 줄을 몰라요.

참으로 대단한 믿음들이에요?

 

전 때로는 여러분들이 부러울 때가 있어요?

저 분들은 어쩜 저렇게 믿음이 좋을까?

주일날 놀러가고 말씀을 안 먹는데도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걸 보니 때론 경외감마저 들어요?

내겐 왜? 저런 믿음이 없을까?

목사가 주일날 설교하지 않고 놀러 한 번 가 볼까?

아직까지 내 믿음으로는 불가능해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조금만 어려우면 나 교회 안가!

나 예수 안 믿을래!

그러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예수 믿는다고 하잖아요.

이 무슨 개 같은 신앙입니까?

 

이런 신앙을 보면 이런 말이 입안에서 뱅뱅 돌아요?

어떤 말이냐고요?

여러분 자식들이 30살 먹고 40살 먹었음에도 똥오줌 못 가리고 기저귀 차고 있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러면 아마도 아주 저주를 끌어 부어라! 라고 바락 바락 덤빌 겁니다.

아니! 여기 아니면 교회가 없나!

목사가 어디 니 혼자뿐인 줄 아느냐!

야! 교회 옮기자! 라고 하겠지요.

 

그래서 전 그나마 몇 명 있는 것 그것마저 떠날까봐서 그러지 못합니다.

속으로 입안에서만 뱅뱅 돈다고 하잖아요.

전 그럴 수가 없어요.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제 꼬라지가 여러분 보다 낳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러면 아마도 하나님이 저 보고 그럴 겁니다.

그럼 정 목사! 너는 어떤데!

저도 여러분과 도낀 개낀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러니 그런 말을 못하는 겁니다.

주여! 저 인간들을 그냥 콱 쓰나미 밀려오듯이 믿음으로 콱 밀어서 천당으로 데리고 가십시오! 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저도 덤으로 거기에 밀려서 천당 가게 해 주소서!

 

말씀 앞에서 내 꼬라지를 보면 제 모습이 여러분보다 더 형편이 없으니 비판하지 못하고 여러분 눈에 티를 빼라고 하지 못하겠어요.

여러분은 직장 생활한다고 바빠서 성경을 볼 시간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목사라는 놈은 남는 게 시간인데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니 여러분보다 제가 더 악질인 겁니다.

 

맞아요.

목사가 성도님들보다 더 악질입니다.

더 믿음이 없어요.

 

성도님들은 세상에서 전투하면서 벌어온 알토란 같은 돈을 연보로 내는데 목사라는 놈은 앉아서 받아 챙기고 있으니 성도님들이 목사보다 더 믿음이 좋은 거지요?

목사보다 믿음이 더 좋다는 말 들으니 기분이 좋지요?

“덤 앤 더머” 입니다.

 

암튼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하지 말고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그래야 요만큼 사는 것도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고 감사가 됩니다.

감사가 없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감사는 죄를 알 때 나옵니다.

 

죄를 알려면 말씀을 보아야 하고!

말씀을 봐도 이해가 안가니 목사님 설교를 들어야 하고!

설교를 듣자나 교회 와야 하고!

결국 교회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시 사시기 이야기합시다.

사사기의 핵심은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은 언약 백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사기를 통해서 인간의 열심과 순종을 끄집어내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사사기는 죄가 어떻게 인간들을 주장하고 있으며, 또한 죄가 주장하면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반응하고 나타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에 사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불순종하던 인간들을 믿음이 어떻게 그들을 간섭하셨는지를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잘난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못난 사람들을 들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본문에 언급된 여러 명의 사사 중에서 기드온을 대표로 살펴봅시다.

믿음이 기드온을 어떻게 하나님에 일을 하도록 붙잡고 다녔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사사기 6장입니다.

 

삿 6:1-6=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2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자기를 위하여 만들었으며 3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치러 올라와서 4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5 이는 그들이 그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서 메뚜기떼 같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약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6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기드온이 살 시대에는 미디안이 7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였습니다.

농사를 지어도 다 빼앗겨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하루하루 살아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얼마나 미디안의 횡포가 심하였으면 집을 버리고 산 속에 도망하여 들어가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상황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 손에 붙이시니” 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도 말을 안 들으니 그래 너희들 맛 좀 봐라!

그래서 미디안이라는 조폭들에게 혼 좀 나라고 넘겨준 것입니다.

참 재미있지요.

 

여러분들이 조폭에게 넘겨주어서 고생 시키는 하나님을 모르면 안 됩니다.

나를 평안하게 해 주는 하나님을 알면 안돼요.

평안하게 해 주는 하나님을 알고 있으면 실족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망한 것은 자기백성을 고생시키는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으신 하나님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출애굽하고 광야에 나와서 만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죽이겠다고 하는 하나님을 보았어요.

그러니 나 하나님 안 따라 갈래!

애굽으로 보내달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이예요.

좋으신 하나님!

나에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

만사형통케 해 주는 하나님을 알고 있어요.

그러니 광야의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으로 치닫고 있는 겁니다.

 

이 시간 하나님 관을 바꾸어야 해요.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 하나님을 만나세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우상 숭배를 하게 되어요.

실족 하게 되어요.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자기 백성들의 죄가 싫었으면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셔서 없애게 하셨는지를 알아야 해요.

그럼에도 교인들은 자기가 어떤 종자인지도 모르면서 복을 안 준다고 아우성입니다.

왜? 나를 괴롭히느냐고 난리입니다.

하나님이 왜? 괴롭힙니까?

 

1절에 그러잖아요.

이스라엘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 고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말이 “또” 입니다.

 

“또” 라는 말이 뭡니까?

반복(反復)이지요.

계속한다는 말이지요.

 

너 “또” 오줌 쌌냐!

이 말은 늘 오줌을 싼다는 말이지요.

 

너 “또” 꼴등했느냐!

늘 꼴등하는 놈이란 말이지요.

 

너 “또” 악을 행하였느냐!

늘 악을 행하는 놈이란 말입니다.

 

“또” 교회 안 왔나!

툭하면 교회 안 온다는 말이지요.

 

“또” 술 쳐 먹었나!

늘 쳐 먹는다는 말이지요.

이 “또” “또” “또” 를 알아야 해요.

 

“또” 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안 되면 버려야 하는데 버릴 수가 없어요.

아니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면 버리면 되잖아요.

그런데 안 버려요.

왜냐하면! 그런 줄 알고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을 봅니다.

 

롬 5:6-10=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건 마치 사람이 강아지에게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이건 인간 취급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도 모르던 원수 되었을 때 예수님을 죽게 하시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 이제 예수 믿고 하나님도 아는데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버릴 수가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남에 새끼도 키우는데 자기 새끼야 오죽 잘 안 키우겠느냐 입니다.

 

지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그런 관계입니다.

곧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그런 관계입니다.

이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끊어지지 않는 인연입니다.

이름하여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 입니다.

 

전 이 대목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또” 라는 말이 얼마나 은혜를 주는지 몰라요.

너 “또” 그랬느냐?

이 “또” 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듬뿍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자식이 말 안 듣는다고 버릴 수가 있습니까?

없지요.

왜? 못 버립니까?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말 안 듣는 놈을 내 뱃속으로 낳았기 때문에 말 안 들어도 밥해 먹이고, 철따라 옷 사 입히고, 비싼 돈 들여서 학원에 보내고, 아프면 병원에 데리고 가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은 어떤 조건으로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이 못하는 것을 보면 다 부모 잘못인 것으로 여기잖아요.

자식에게 잔소리는 할 수 있어도 죽일 수는 없어요.

자식은 잔소리하고 두들겨 팰 수는 있어도 버릴 수는 없어요.

 

부모는 자식에게 다 해 주면서도 말을 안 들으면 두들겨 패요.

버릴 수 없는 자식이기 때문에 두들겨 패는 겁니다.

두들겨 패면서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라고 합니다.

그럼 매 맞는 놈은 제발 날 좀 버려두라고 하지요.

날 그냥 내 버려두는 게 사랑이라고 하면서 바락 바락 덤비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은 그래 이제 안 때릴게 그럽니까?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네!

어디 너 죽고 나죽자!

이러면 아이가 기겁을 합니다.

야! 질기다 질겨!

그래 내가 졌다!

내가 졌어!

내가 더러워서 항복한다! 항복해!

 

그래 엄마 소원이 뭔데!

내가 우째면 엄마가 좋아 하겠노!

공부해라!

알았다 공부할게!

하지만 그것도 작심삼일(作心三日)입니다.

 

여러분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죽고 싶어요.

자기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어요.

어디 공부가 각오한다고 됩니까?

하고 싶어야지!

공부하고 싶으면 엄마가 닦달하지 않아도 해요.

 

이게 지금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이 그런 겁니다.

지독히도 말을 안 들어 쳐 먹어요.

그래서 빨래 방망이로 두들겨 패서 부드럽게 만드는 겁니다.

 

이정도 되면 아! 미치고 환장하겠네! 라는 말 밖에 없어요.

우리는 제발 날 그냥 내 버려두세요!

나 지옥 가면 되잖아요!

제발 날 지옥으로 가게 내 버려두란 말입니다! 라고 신경질을 냅니다.

그 신경질 내는 것이 교회 안 나오고, 세상과 짝하는 방종하고 방탕으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냥 내 버려두면 얼마나 좋겠어요.

내 버려두지 않고 일일이 간섭하니 문제인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항복하는 게 상책입니다.

고집 피워 보아야 본인만 더 괴로워요.

 

공부하는 게 편하지!

공부 안하고 딴 짓하면 돌아오는 건 매질 밖에 없어요.

공부는 안하더라도 책상에 앉아면 있어도 엄마는 간식을 챙겨다 줍니다.

공부만 해 보세요.

핸드폰도 사주고, mp3도 사주고, 좋은 옷도 사주고 하잖아요.

내 필요한 것 모두가 사 주잖아요.

그런데 이 자식새끼들이 이걸 모르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래요.

이스라엘이 그래요.

말만 잘 들으면 모든 걸 다 해주는데 그 말을 못 들어요.

가장 쉬운 것 같은데도 가장 어려워요.

교회 하나 오는 것도 못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죄가 내 마음대로 살도록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살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인간도 부모의 말을 예! 하고 순종하는 인간이 없어요.

그 쉬운 공부만 하면 되는데 안한단 말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으로 말하면 믿음으로 살면 되는데 그게 안 돼요.

그래서 어깃장 놓는 겁니다.

나중에 삼수갑산(三水甲山) 가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내 하고 싶은 것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과 짝하다가 죽싸게 얻어터지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라고 합니다.

물론 얼마 안가서 또 집 나갑니다.

고멜처럼!

세상과 서방질하고 싶어서!

 

참 지독합니다.

누가!

저와 여러분이 그래요.

 

암튼 이스라엘은 미디안에게 너무 너무 고통당하니 산 속으로 도망가서 삽니다.

그러던 시절에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찾아옵니다.

그 때가 언제냐 하면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 몰래 밀을 타작하던 때입니다.

 

삿 6:12-13=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기드온이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였다는 것은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워서 숨어서 했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밀은 우리나라 추수하는 식으로 말하면 마당에서 도리깨로 두들겨 패서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부엌에 숨어서 하고 있는 겁니다.

왜요?

혹시나 미디안 놈들에게 들킬까봐서 입니다.

 

이 광경은 얼마나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한 마디로 죽지 못해서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기드온을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옵니다.

찾아와서 하는 말이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라고 합니다.

 

12절=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이건 마치 꼴등한 아이에게 너~ 어쩜 이렇게 공부를 잘하느냐?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마치 주일날 교회오지 않고 등산하거나 낚시하거나 컴퓨터 게임하고 있는 박 집사에게 하나님이 찾아가서 야! 너 어쩜 그렇게 날 사랑하니!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연보할 돈으로 술 쳐 먹고 있는 놈에게 하나님이 찾아가서 야! 정 집사 너 어쩌면 그렇게 믿음이 좋으냐?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이건 완전히 놀리는 겁니다.

기드온도 알아요.

아니 용사가 아닌 자에게 용사라고 하면 그건 자기를 놀리는 말이란 것을 모르겠어요.

다 알아요.

 

그래서 비아냥거리지 말라고 합니다.

누군 이러고 싶어서 그럽니까?

모진 목숨 다 먹고 살아야 하니 이러는 것이지!

 

그리고 뭐라고요.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고요?

아니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게 이 모양입니까?

지금 누구 염장(鹽藏) 지르고 있습니까?

아니 그래 여호와가 함께 하시면 내가 지금 이 짓거리 하고 있겠어요?

 

여호와는 개뿔이 여호와입니까?

그래 여호와가 함께 하면 이럽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셔서 우리가 이렇게 미디안에게 종노릇하고 있습니까?

 

미디안 놈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야! 하나님 백성 이리와봐!

어서!

너 가진 거 있지!

그거 내놔!

다 빼앗아 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희 하나님 한데 가서 내가 너희 돈 빼앗았다고 일러!

그런 일을 당하고 그런 말을 들을 때 마다 얼마나 쪽 팔리는 줄 아세요!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창피스러운 줄이나 아세요.

 

차라리 하나님 백성이라는 말을 하지나 말든지!

창피해서 못 살겠어요.

이건 기드온이 얼마든지 뱉어 낼 수 있는 말들입니다.

어쩌면 기드온은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차 있을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밥 한 끼 먹으려고 숨어서 이 무슨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까?

 

인간이란? 본래 자기가 잘못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타박하는 사람만 원망합니다.

자신들이 여호와께 악을 행하여서 이런 수욕을 당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죄인에겐 백약이 무효입니다.

때려도 안 되고, 어르고 달래도 안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자기 백성들을 믿음으로 질질 끌고 가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때려도 안 된다.

얼려도 안 된다.

그러면 질질 끌고 가는 수밖에 없어요.

 

이게 어디 이스라엘 이야기 입니까?

우리 이야기이지!

우리도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 모양 이 꼴로 살게 하면 어찌합니까?

세상 사람들 보기에 남사스러워서 못 살겠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말을 못하겠습니다.

 

우리 막내가 그럽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겠대요.

왜? 복음을 전하는데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느냐 입니다.

먹고 사는 것조차 해결이 안 되게 하느냐 예요.

우리 자식들은 지네 엄마 고생시킨다고 불만이 많아요.

 

지금 기드온과 같이 말하는 겁니다.

기드온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동일해요.

그러니 우리도 기드온의 말이 공감이 가는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하나님이예요.

잘못해도 눈감아 주고!

아이고! 내 강아지! 하고!

그저 오냐! 오냐! 해 주는 그런 하나님입니다.

마치 손자를 대하는 할머니 같은 하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남의 아들은 죄지어도 눈감아 주는데, 자기 백성이 죄를 지으면 머리털 하나라도 눈감아주지 않고 탈탈 털어서 혼은 내는 하나님입니다.

죄인 입장에선 죄인이 하나님 손에 붙잡힌 것 자체가 저주입니다.

맞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성도는 재수가 더럽게 없는 사람들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서 들들 볶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거룩한 분하고 동행 한다는 것은 여간 거북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하나님이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니 거절하는 겁니다.

이건 꼭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비아냥거리면서 거부한 것과 같아요.

모세도 40년 동안 얼마나 약이 올라 있었습니까?

하나님이라면 이를 갈고 있었어요.

 

그런데 찾아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합니다.

애굽에 왕자 자리에서 쫓아낼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이스라엘을 구하라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이런 저런 핑계로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는 꼬라지를 보니 마음에 안 들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드온이나 모세나 동병상련(同病相憐)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버티는 겁니다.

이는 곧 자식들이 부모가 무슨 일을 시키면 주둥이 내밀고 팅팅 거리는 것과 같아요.

 

삿 6:14-15=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15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기드온이 퉁퉁거리면서 마지못해서 대답합니다.

나 같이 못난 놈이 무슨 재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 손에서 구원해 낸단 말입니까?

지금 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 할까요? 라는 말은 그만 됐습니다! 라는 말과 같아요.

 

그러니 다른 사람을 찾아서 시키세요.

나는 알다시피 집안도 변변치 못하고 내 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이스라엘 중에 잘난 사람을 찾아가서 그 사람을 용사로 세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냉소적(冷笑的)으로 말하는 것은 자신들이 당한 삶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면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가 있는지 이해가 안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을 이렇게 만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말을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이런 하나님 관(觀)은 모든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관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육신 중심으로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잘 해 주는 분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잘 해주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인간들 편을 들어주는 하나님은 마귀인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마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급기야 기드온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단계에까지 이릅니다.

이는 우리도 늘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진짜 하나님이 시키는 일이라면 징조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삿 6:17-21=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기드온이 징조(徵兆)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폼을 보세요.

나와 말씀하는 이가 주(主) 되는 표징(標徵)을 내게 보여 달라고 하잖아요.

 

이 말은 “당신이 하나님인지 당신 말을 어떻게 믿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겁니다.

아주 건방지지요.

기드온이 징조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섭섭함을 우회적(迂廻的)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꼭 아이들에게 무슨 일을 시키면 주둥이 내 밀고 퉁퉁 거리면서 하는 것과 같아요.

인간이란 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순종하는 법이 없습니다.

꼭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이는 범사에 자기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죄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성을 잘 아시기 때문에 기드온의 요구대로 징조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불을 내어 제물과 국을 모두 불살라서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

기드온이 자기가 드린 제사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하나님 얼굴을 보았다고 죽겠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이에 하나님이 살려 줄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거기에다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 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샬롬이란? 하나님의 평화란 말인데 이는 곧 죽을 놈이 살아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이 살아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고도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샬롬이란? 하나님이 참아주고 양보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평화가 된 것은 하나님이 양보한 결과이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기드온의 투정 섞인 시험에 하나님이 양보해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상종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죄인과 상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웠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비굴할 정도로 자기를 비우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하는 일이라면 온갖 수모도 감당합니다.

이는 생명을 주는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식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 준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양보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의 말에 순순히 응하지 않듯이 기드온도 하나님의 뜻에 순순히 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막상 미디안과 전쟁을 하려고 하니 불안한 겁니다.

자기 꼬라지를 보니 한심 한 겁니다.

그래서 다시 징조를 구합니다.

 

삿 6:36-40=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찌기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 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 이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이번엔 기드온이 문제를 냅니다.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면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털을 가지고 시험을 합니다.

 

밤에 양털을 마당에 둘 테니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마당엔 내리지 않게 시험합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의 요구대로 해 줍니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미덥지 못해서 이번엔 반대로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지 않고 마당에만 이슬이 내리는 시험을 합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이 응해 줍니다.

 

솔직히 말해서 기드온이 번번이 징조를 구하는 것은 하기 싫다는 말입니다.

하기 싫으니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는 겁니다.

마치 모세가 하나님에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던 것과 같습니다.

 

성경의 증거는 인간들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자원해서 한 인간은 아무도 없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마지 못해 이끌려서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엔 하나님을 순순히 믿는 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믿음을 주어서 믿게 해 주니까 믿는다고 하는 것뿐입니다.

믿는다는 그 믿음도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믿음을 거두어 가시면 우리는 예수를 떠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성도를 관리하는 것은 성도 속에 하나님의 약속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조선 시대 임금의 씨를 잉태한 여인과 같습니다.

여인 속에 용정(龍精)이 심겨져 있기 때문에 그 여인을 지켜주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이를 질그릇 속에 보배를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 속에 예수님의 생명을 위해서 믿음을 주셔서 천국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믿음이 마치 소에 코를 꿰어서 멍에를 씌워서 끌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소가 자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안가면 아프기 때문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고통을 동반하여서 오고 그 고통이 하나님을 찾도록 합니다.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일은 곧 소의 코가 꿴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만약 예수 안 믿어도 고통이 없다면 교회에 나올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솔직히 신앙생활 잘 안하면 어려운 일 당할까봐서 불안해서 나옵니다.

 

죄인에겐 징계란?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될 필요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체질을 잘 아시기 때문에 갖가지 아픔들을 주셔서 하나님을 찾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당근과 채찍을 가지고 다스려 가십니다.

 

전도서 7장을 봅시다.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형통과 곤고를 가지고 다스립니다.

우리는 형통한 것만 하나님이 간섭하신 것이라고 하는데, 성경은 곤고한 것도 하나님이 간섭한 증거라고 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곤고가 닥쳤습니까?

하나님께서 간섭하셨기 때문입니다.

당근도 하나님의 사랑이고 채찍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감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사를 조건으로 하는 것은 자기 몸에 유익 된 것만 감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속 썩이는 것도 감사이고!

사업이 망한 것도 감사이고!

직장에서 명퇴 당한 것도 감사이고!

심지어 교통사고 난 것도 감사이고!

집에 도둑이 든 것도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눈동자 같이 다스리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도리어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암튼 기드온은 마지못해서 전쟁에 임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하나님께서 기절초풍할 일을 벌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군사의 수(數)가 많으니 줄이라는 겁니다.

 

삿 7:2-8=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명이었더라 4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무릇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가 너와 함께 가리라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는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5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무릇 개의 핥는것 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하시더니 6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7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8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을 각각 그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명은 머물러 두니라 미디안 진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 있었더라”

 

기드온이 군사를 모집하니 3만 2천 명이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숫자가 많으니 돌려보내라고 해서 2만 2천명이 돌아가고 만 명만 남았습니다.

만 명도 많으니 또 추려 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은 인원이 300명입니다.

 

알다시피 미디안 군대는 메뚜기 때 같이 많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상식은 전쟁은 군사력으로 합니다.

그러려면 군사를 많이 모집하여야 하는데 하나님은 고작 300명 가지고 싸우라고 합니다.

이건 전쟁을 해 보나 마나입니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300명에게 핵무기를 주는게 아니고 나팔과 항아리에다 횃불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이건 어린 아이들 병정놀이 하자는 것이지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장난하고 있는 겁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과 미디안을 가지고 장난 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싸우는지 구경하라는 겁니다.

너희를 다스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드온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그만 되었습니다! 라고 돌아갈 법도 한데!

기드온과 남은 삼백 명은 멍청하게도 나팔과 항아리에 횃불을 담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드온이나 삼백 용사가 이렇게 코미디 같은 방법으로 치르는 전쟁에 임하게 한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런 전쟁에 동참케 하였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기드온과 그 군사들을 코미디 같은 하나님의 전쟁놀이에 참여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벌이시는 전쟁놀이에 참여되면 인간은 바보가 됩니다.

전혀 인간적인 방법으로 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우수꽝스러운 전쟁 이야기는 수없이 많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이 치른 모든 전쟁이 그러합니다.

 

모세의 광야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도 그랬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그러하였고,

사무엘이 블레셋과 싸울 때 그러하였고,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도 그러하였으며,

여호사밧이 모압과 암몬과의 전쟁에서 성가대를 앞세우고 싸운 것도 그러합니다.

 

이러한 전쟁은 모두가 성도가 마귀를 이기는 전쟁의 예표입니다.

마귀의 권세를 어떻게 이기느냐?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이깁니다.

우리 능력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이깁니다.

 

마귀는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성도를 위협하는데 성도는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나아갑니다.

마치 항아리에 횃불을 담고 나아가듯이 말입니다.

성도들 속에는 믿음이라는 횃불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어둠은 오직 진리의 빛으로서만 물리 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군사들이 항아리에 숨긴 횃불을 “여호와의 칼” 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킬이란? 여호와의 무기라는 겁니다.

아주 이상한 무기이지요.

 

횃불은 어둠을 물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어둠이란? 사단의 권세를 말합니다.

성도가 싸우는 것은 세상 전쟁이 아니고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에베소서 6장을 봅시다.

 

엡 6:12-17=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우리가 싸우는 것은 악한 영들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무엇으로 싸우는가 하면 성령의 검을 가지라고 하지요.

성령의 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 죄사함을 받는다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죄사함을 얻게 하는 피라고 했습니다.

새 언약입니다.

 

그럼 기드온의 군사들이 들고 있는 횃불은 사도바울 식으로 말하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지금 어둠의 세력과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안에 빛이 있으면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둠은 죄의 세력이고 빛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는 믿음입니다.

성도는 항아리에 감추어둔 횃불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항아리처럼 깨어져서 마귀의 참소를 이기게 하는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우린 그 믿음으로 마귀를 이겨요.

 

마귀를 이기는 것은 오로지 믿음뿐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충성으로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이길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는 기드온이 바보 같은 하나님의 전쟁놀이에 참여케 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바보의 길로 걸어가게 하십니다.

바보 같은 목회를 하게 하십니다.

우리더러 바보 같이 살라고 합니다.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세상 가치관을 초월케 하여, 낮아지게 하고, 버리게 하고, 섬기게 합니다.

 

믿음이 성도로 하여금 역설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순순하게 따르지 않습니다.

날마다 항명(抗命)하고 불순종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밀어 붙입니다.

 

성도가 세상 살아가는 것은 기드온의 전쟁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면 웃기는 짓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웃기는 광대놀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오면 상식으로 끌고 가지 않고 비상식으로 끌고 갑니다.

그 이유는 일의 끝에는 인간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은혜 성을 남기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 끝에는 하나님께서 인도해 오셨다는 것을 남기시려고 우리의 원대로 인도하시지 않고 우리의 원과 반대되는 것으로 인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 자랑스러움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끌고 오셨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앞으로도 믿음은 저와 여러분을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끌고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심어 놓으신 약속을 다 이루기까지 중단됨이 없이 진행되어 갈 것입니다.

비록 아픔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의 사랑임을 아시고 감사하며 사시기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원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로 여기까지 인도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남은 인생사가 내 뜻대로 안 된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낙망치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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