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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강해)22강. 약속과 증거 (히 11:39-40)

by coroa 2022. 5. 4.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2강. 약속과 증거 (히 11:39-40)

-.정낙원 목사

 

히 11:39-40=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본문을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11장 강해가 끝을 맺게 되겠네요.

순서상으로 본다면 1장부터 차례로 강해를 해야 하지만 변칙적으로 11장부터 강해를 하게 된 것은 오늘 본문이 주는 의미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에서 신약을 내다보면서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구약의 엔딩 부분이라고 보시면 좋겠네요.

또 하나 히브리서 11장을 먼저 살펴 본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과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먼저 상고한 후에 히브리서 1장에서 세상 마지막에 아들로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살펴볼까 합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 11장을 22번을 강해 해오면서 알게 된 것은 믿음이란 우리가 생각하던 믿음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우고 알아온 믿음은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에 우리가 반응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믿음은 인간의 반응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반응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데 믿음으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像)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證據)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뭐냐?

바라는 것의 실상(實像)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뭔가 있기는 있는데 지금은 안 보여요.

그래서 믿음이 지금은 눈에는 안 보이지만 뭔가 있는 그것을 보여주시려고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럼 지금 눈에 안 보이는 뭔가 있기는 있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에요.

다른 말로 영이라고도 하고 하늘나라 라고도 해요.

 

하늘나라 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인 것 같으니 하늘나라라고 하지 말고 하늘나라의 주인이 예수님이니까 그냥 한마디로 예수님이라고 합시다.

이러면 믿음이 구약의 성도들로 하여금 장차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실 예수님을 보여 주려고 어떤 사건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에 간섭당한 사람들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행하실 사건을 미리 선취(先取)적으로 행하게 되는 겁니다.

믿음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사건을 일으켜요.

 

정확하게 말해서 믿음이 장차 예수님이 당할 사건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삶을 미리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의 사건 속으로 밀어 넣는 주체가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말이 어렵지요.

 

사건은 우리가 의도해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으켜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신약에서는 “때” 라고 합니다.

여기서 때란?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때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때를 따라서 우발적으로 어떤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 사건을 일으키는 주체가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믿음이 바로 그런 겁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믿음은 우리의 뜻이나 계획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일으키는데 우리에도 동의를 구하고 그러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그 일을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상관이 없이 일어나게 되어요.

 

노아 시대 예를 들어 봅시다.

하나님이 야! 노아야! 내가 지금 방주를 지어야 하거든!

그러니 네가 날 좀 도와 줄래! 라고 하지 않고 그냥 믿음이 방주를 짓게 하신단 말입니다.

 

믿음이 일방적으로 야! 노아 너~ 이리와 봐!

너! 지금부터 방주를 지어!

그러면 노아는 꼼짝없이 방주는 짓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믿음이 모세를 소고삐처럼 이끌고 애굽에 가서 하나님의 백성을 출애굽 시키는 사건 속으로 밀어 넣어요.

그럼 모세는 꼼짝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에 사로 잡혀서 출애굽 시키는 일을 하게 되어요.

말씀 자체가 능력이 되어서 밀어 붙입니다.

믿음이 말씀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출애굽 사건 속으로 휘말려 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 자체가 창조의 능력이므로 믿음이 그 일을 해 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저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야! 사라야!

내가 지금 네 배를 좀 빌려서 아들을 하나 낳아야 하겠거든!

그러니 네 자궁을 좀 빌려 주렴!

그러지 않는단 말입니다.

 

야! 사라!

너! 명년 이맘 때가 되면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러면 사라는 늙었든 젊었든 상관치 않고 믿음이 죽은 나무와 같은 사라의 몸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기어코 낳고 만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사라가 아니 ! 하나님! 하나님의 그 마음은 알겠지만요.

아무리 그래도 내 꼬라지를 좀 보고 말하세요.

내가 월경이 끊어진지가 언제인지나 알고나 말을 하십니까?

저기 저 옆집에 젊은 꽃순이 한데 가서 부탁하세요.

꽃순이는 지금 한창 젊었으니 아들을 순풍 순풍 잘 낳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 그렇구나!

나는 사라 네 몸이 그런 줄 몰랐구나!

미안하다!

그러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냥 내년 이맘 때가 되면 아들을 낳을 것이야!

이게 믿음이에요.

이해가 되시는가요?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지 않고 “믿음으로” 사라는 잉태 할 수 없는 몸인데도 아들을 낳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잉태 할 수 없는 몸이면 아들을 낳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잉태할 수 없는 몸인데도 믿음이 덮치니까 사라의 몸에 형편과 상관없이 아들을 낳더란 말입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고, 믿음이 아들을 낳은 겁니다.

그러니 이삭은 사라가 낳은 자식이 아니고, 믿음이 낳은 자식인 겁니다.

 

이처럼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 인간을 간섭하신 능력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을 신약적으로 말하면 성령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성령이 성도를 거듭나게 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언제 하나님 절 좀 거듭나게 해 주세요! 라고 한 적이 없잖아요.

어느 날 보니 거듭나 있는 겁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믿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신약에선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해 가시니 구약의 믿음과 같다고 볼 수가 있어요.

성령이 언제 우리를 찾아 와서!

야! 정 낙원이! 내가 지금 너를 거듭나게 해야겠거든!

동의를 구하고 거듭나게 해 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어느 순간 무작정 밀고 들어와서 우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다 처리해 버렸어요.

 

우리가 언제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은 줄 아세요.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믿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는 예수를 믿은 적이 없어요.

믿어진 것이지요.

이게 참 중요한 말인데!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성령이 쑥 들어와서 예수가 믿어지게 만든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인 겁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도 알고 보면 내 믿음이 아니고 성령의 믿음인 셈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믿게 해준 성도의 구원은 취소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관리하시는 분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식언치 않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하지요.

이 말씀은 하나님은 변덕을 부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야! 정낙원이 너! 천국에 가!

그러면 저는 꼼짝없이 천국에 가게 되어 있어요.

 

정낙원이를 천국에 보내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맹세한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정낙원이의 행함과 상관없이 천국에 갈 수밖에 없어지는 것입니다.

정낙원이가 천국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여러분이 예수 믿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죄인은 예수를 믿어 줄 수 있는 그런 종자들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니 믿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감사 밖에 할 것이 없어요.

성도는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천국에 가는 겁니다.

이건 마치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광야로 빼낸 것과 같아요.

 

출애굽기 19장을 봅니다.

 

출 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인도하였다고 하잖아요.

물론 이스라엘은 독수리 날개에 업혀서 오지 않았어요.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면서 아슬아슬하게 쫓기듯 입에 단내가 나고 도망치고 걸어서 왔어요.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면서도 죽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라고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여기까지 온 것도 아슬아슬하게 왔어요.

솔직히 말해서 자진해서 예수 믿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하나님이 이리저리 간섭을 해서 여기에 와 있는 것이에요.

 

저도 마지못해서 목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목사가 싫다는 것이 아니고 목사가 된 것이 저의 바램에서 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독수리 날개로 업혀서 와 있는 것이 맞지요.

 

이걸 모르고 조00 목사는 요한계시록 12장을 설교 하면서 광야에 있는 예비처를 인도 하실 때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간다고 하니까 그것을 지금은 헬리콥터로 이동시켜 준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코메디 같은 말입니까?

 

여러분 성경을 인간의 상식으로 보면 안돼요.

인간의 상식은 이미 죄로 오염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선 틀린 상식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이성으로 보면 조 목사와 같은 설교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성경을 오해(誤解)하는 것도 인간들의 사고방식으로 이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믿음도 인간들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그 믿음을 이해를 하려고 해요.

그래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 믿음을 풀이하고 내어 놓는 겁니다.

 

인간은 선악(善惡)의 법(法) 아래서 태어납니다.

선악(善惡)의 법은 항상 인간으로 하여금 결정을 하게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선악의 법이 너! 오늘 선(善)으로 살래!

악(惡)으로 살래! 늘 결정을 하라고 해요.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선과 악의 기준으로 선하게 살았다 악하게 살았다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님 앞에선 악(惡)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악의 법 자체를 악(惡)으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선악(善惡) 자체가 손등과 손바닥처럼 한 덩어리예요.

인간의 행동에서 선과 악이 따로 따로가 아니에요.

선이 있는 곳에 악도 있고 악이 있는 곳엔 선도 있어요.

그러므로 선악의 법아래서 태어나는 인간에게선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죄인의 행함에서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악이다!

판단하는 그 자체가 죄인 겁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가 뭔데 판단합니까?

죄로 물든 피조물이 판단 한다는 것 자체가 건방진 겁니다.

 

인간에게선 하나님이 원하는 선(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들이 지금 선악의 법아래 선을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선악의 법에 갇혀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자기가 행하여야 하는 쪽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가 믿음도 내가 가지고 행사하여야 하는 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주 예수를 믿으라!” 고 하십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하나님 “어떻게 믿을까요?” 라고 묻습니다.

이건 마치 자기가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 제가 믿겠습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으라” 라는 말은 우리가 결정해서 동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결정하고 동의를 한다고 하여도 그건 선과 악이 주는 정보(情報)로 결정하고 동의하는 것이라서 이미 틀린 것입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이성(理性)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이성 밖에서 일어난 일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너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를 문자적인 의미를 그대로 풀이하면 주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선악의 법이 작동을 하기 때문에 자기가 판단하고 결정하고자 해요.

인간의 본능은 자기가 배제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요.

그래서 인간에겐 주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면 자기가 믿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남지 않고 자기 행위로 남게 되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으세요! 라고 하면 예! 알았습니다!

내가 믿지요.

내가 믿어 드리지요! 라고 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믿는 것이 인간의 것이 되지요.

그러면 인간들은 난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다!

넌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다! 라는 식으로 구원을 챙기게 됩니다.

이게 지금 한국교회 교인들이 갖고 있는 믿음 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에베소서 2장을 봅시다.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만 선물이 아니고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도 선물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것도 선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음으로 살게 해 주시지 않으면 믿음으로 살 수가 없어요.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정면으로 거스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육신의 소욕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연관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인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도 선물이고,

그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것도 선물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도 선물이고,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선물입니다.

예수님과 연관된 모든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자랑하지 말란 말입니다.

 

난 교회 나왔다.

난 헌금 했다.

난 전도 했다.

난 교회 봉사와 충성을 했다.

난 복음을 안다.

난 이웃을 사랑한다.

이러지 말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행하는 것들입니다.

진짜 믿음을 받은 성도는 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 진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사람을 의식하거나 남에게 자랑하고자 하지 않는 겁니다.

누가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자기 안에 믿음이 이런 일들을 하게 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하고 나서도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독자적으로 남을 사랑하고 베풀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에요.

무슨 일이든지 다 반대급부(反對給付)를 바라고 하게 되어 있어요.

반대급부(反對給付)란 자기 유익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꿈적하지 않아요.

그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교인들은 자기가 교회 다니는 것을 자랑하는 겁니다.

자기가 일한 것을 자랑하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으면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누가 알아주면 하고 안 알아주면 안하고 한다면 그걸 어찌 은혜라고 하며 신앙이라고 하겠어요.

그건 믿음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오늘은 엄청나게 중요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어쩌면 오늘 공부할 내용이 지금까지 살펴왔던 그 어떤 것보다 제일 어려운 내용일 수 있어요.

아무리 바빠도 지금까지 살펴 본 것을 다시 정리하고 넘어 갑시다.

 

믿음 그러면 아! 그건 하나님의 일!

하나님 홀로 일하신 것!

우리와 상관없는 일!

그렇게 생각하세요.

 

우리가 할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요.

성도가 구원받고 신앙생활 하는 것까지 하나님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십니다.

우리더러 방관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주체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괜히 오해 해 가지고 야! 정 목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더라.

그러지 마세요.

자기가 말 귀를 못 알아먹어서 그렇게 해석한 것이지 전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어요.

제 말을 제대로 알아먹었으면 가만있지를 못해요.

제가 아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가만 두지 않아요.

뭔가 자꾸 사건을 일으키고 달달 볶아요.

 

교인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충성을 이끌어 냅니다.

자발적으로 행하도록 합니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면 종교이고 감사해서 하면 믿음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것을 억지로 하면 그건 자기가 한 것이고, 자발적으로 하면 믿음이 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주체가 나이면 종교이고 하나님이면 신앙이에요.

 

내가 하는 것이면 종교생활이고, 하나님이 하게 하시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 남이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아세요.

인간은 말이죠.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하려고 해요.

남이 하는 것을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납니다.

 

야! 이렇게 하면 되잖아!

왜? 그렇게 하느냐!

훈수를 두게 되어요.

 

축구 경기를 보면 관중들이 소리치지요.

소리치는 것은 훈수 둔다는 말이에요.

 

왜? 그렇게 하느냐!

그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땐 저렇게 해야지!

아휴! 저 놈!

 

야! 이 등신아! 그것도 못하냐!

어떻게 그러고도 선수가 됐느냐!

그 따위로 하려면 차라리 나가 죽어라!

급기야는 술병 집어 던지고 욕! 욕을 해 댑니다.

 

이걸 입장 바꿔 놓고 이번엔 선수가 관중이 되고, 관중이 선수가 되 보세요.

똑 같아요.

관중이 된 선수가, 선수가 된 관중에게 더 심하게 욕을 해 댑니다.

왜? 그러는 줄 아세요.

 

이게 모두가 모든 일에 중심엔 자기가 있어야 만족해하는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제외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요.

뭐든지 자기가 중심이 되어야 흡족해 해요.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자기가 믿어야지 흡족하지!

누가 믿어지게 해 줘서 믿는다고 하면 떨떠름하게 생각해요.

나도 얼마든지 잘 믿을 수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그건 어디까지나 네 생각이라고 해요.

 

하나님도 한 고집을 하세요.

하나님은 우리 보다 더 합니다.

하나님은 남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것을 참지 못해요.

 

사 42: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보세요.

하나님은 하나님 영광을 다른 놈에게 주지 않는다고 하지요.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곳이지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세세토록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는 곳입니다.

 

이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아니 우리는 로봇이냐!

그럼 우린 뭐냐 라고 항의가 들지 않나요?

우린 항의가 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천국엔 자아가 살아 있는 놈은 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아(自我)가 살아 있어 보세요.

고라 일당과 같이 모세 너만 제사장이냐! 나도 제사장이다! 라고 모세에게 덤빈 것과 같이 하나님께도 대 들어요.

 

하나님이면 다냐!

그럼 우리는 뭐냐!

우린 뭐 시다바리 하려고 천국에 온 줄 아느냐! 라고 촛불 시위를 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받는(천당 가는) 일에는 인간이 아예 개입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배제시키는 겁니다.

너희는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이 또 누굽니까?

또 한 성깔 하잖아요.

성깔 피우다가 얻어터지는 겁니다.

 

이게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 성경이 주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한다는 말은 인간의 방법으로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인간에게 허용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기억해 두세요.

 

이 말은 너희는 예수를 믿으라고 해도 믿을 수가 없어!

이 말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인간의 본성이 누구를 믿는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 준다고 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싫어한단 말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광야에서 아침마다 만나를 주면 고맙습니다! 라고 쳐 먹으면 되잖아요.

떡이 필요하면 떡을 주고,

목이 마르면 물을 주고,

고기 먹고 싶으면 고기를 주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 많은지!

 

맨 날 불평과 원망을 하잖아요.

꼭 자식들이 엄마가 해 놓은 밥 쳐 먹으라고 하면 짜증내는 것과 같아요.

하여간 인간은 못 말려요.

그래서 죄인인 겁니다.

 

믿음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알아서 이렇게 저렇게 행사하셔서 하나님이 뜻한바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히 11:39-40=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글개역)

 

히 11:39-40= “이 모든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좋은 증언(인정)을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40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없이는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표준 새 번역)

 

본문을 여러 가지 버전으로 비교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쉽게 이해하시라고 비교하는 겁니다.

 

39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다고 하지요.

 

증거(證據)를 받았다는 말은 곧 인정(認定) 받았다는 말입니다.

인정을 받았다는 말은 합격했다는 말입니다.

그래! 너 하나님 백성 맞다!

그래! 너 신앙 인정해 줄게!

그런 말입니다.

 

그럼 ‘이 사람들’ 이란 누구들입니까?

 

히브리서 11장에서 쭉 이야기 해 왔던 사람들이겠지요.

아벨로부터 기드온까지겠지요.

더 광의적으로는 구약의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이들은 모두가 증거는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증거가 있고, 약속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럼 증거는 무엇이고, 약속은 무엇인지 알아야겠지요.

조금 어려우니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세요.

 

증거란?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라고 했지요.

그럼 약속은 무엇입니까?

약속(約束)이란? 장래에 주어지는 것을 말하지요.

지금 바로 일어나는 일은 약속이라고 하지 않고 현실이라고 합니다.

 

야! 내가 너 용돈 줄께!

그러면 지금 준다는 말이 아니고 나중에 준다는 말이지요.

지금 줄 것 같으면 준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이 그냥 주면 되어요.

그러니 뭔가 말로 약속을 한다는 것은 장차 주어질 일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받은 약속도 나중에 성취가 되어 질 장차 일어날 일이란 말입니다.

야? 내가 널 천당 보내 줄께!

이 말은 장차 천당에 넣어 준다는 말이에요.

이해가 되지요.

 

히브리서 11장을 시작 할 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지요.

 

믿음이 뭐라고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럼 바라는 것이 뭔 줄 알아야 그 믿음의 성격도 알 수가 있어지겠지요.

그렇다면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라는 것이 뭡니까?

예수그리스도이지요.

 

히브리서의 주제가 구약의 율법에 성취자가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는 그 실상도 예수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려고 쓰여진 것입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봅시다.

 

눅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께서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성경 어디를 펴도 예수님과 연관된 이야기가 되어야합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지게 되어 있으며, 반드시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져야 해요.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경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그건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

 

성경을 가지고 인류 평화를 말하거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거나,

복 받고 잘 사는 이야기를 하거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좇아내는 이야기를 하거나,

 

교회 부흥시키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뭘 한다거나 라는 식으로 설교를 하면 전부 반칙입니다.

그건 성경이 의도하는 진의(眞意)가 아니에요.

성경을 억지로 푸는 것이 되어요.

 

성경은 오직 예수님과 죄에 대하여서만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과 죄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서 인간사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세상 이야기는 예수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도입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 히브리서도 누구를 말하려고 쓰인 것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이지요.

그렇다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는 말도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 말입니까?

예수님이지요.

 

자! 정리합시다.

믿음의 실상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럼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마다 믿음으로 누구는 어떻게 하고, 믿음으로 누구는 저떻게 하였다고 하는 것은 곧 다 예수님을 위하여 그런 일들을 하였다는 말이 되겠지요.

 

노아가 방주를 지은 이야기도 예수님 이야기가 되고,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도 예수님 이야기가 되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 한 것도 예수님 이야기가 되고,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 무너뜨린 것도 예수님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럼 이 사람들은 다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증거란? 인정받았다는 말이라고 했지요.

그래 내가 인정해 줄께!

그런 뜻입니다.

 

그럼 이들이 인정을 받은 것은 무엇을 위한 인정을 받은 겁니까?

약속을 위한 인정이지요.

아니 조금 전에 인정은 받았지만 약속은 받지 못하였다고 했잖아요.

그럼 약속이 무엇인줄 알면 해석이 됩니다.

 

성경의 약속은 모두가 누구에 대한 약속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약속이지요.

그럼 자연히 이들이 받지 못한 약속이란?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자! 서서히 풀립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언제 오셨어요.

구약의 마지막 때에 오셨지요.

이를 신약이라고 하잖아요.

 

그럼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언제 사람들입니까?

구약 사람이지요.

그럼 히브리서 11장에 사람들이 살던 시대에 예수님이 계셨어요?

안 계셨어요?

안 계셨지요.

 

아니 물론 예수님은 어느 시대고 계신 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신약이잖아요.

그럼 구약시대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안 계신 시대이지요.

맞지요.

 

지금 히브리서 11장에서 이 사람들이 전부 뭘 받았다고 합니까?

고난이잖아요.

지난 시간 살펴보았잖아요.

모두가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그런 고난들을 받았잖아요.

 

그럼 이들이 받은 고난은 누가 받을 고난입니까?

장차 육신으로 오실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이지요.

이해되는가요?

 

여러분 고난 받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자기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지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시기 전에는 고난을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안 받았지요.

 

고난은 육신을 입고 오셔야만 받는 것입니다.

그럼 히브리서 11장에 사람들이 누구의 고난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까?

육신으로 오실 예수님의 고난이지요.

 

히브리서 11장에 사람들이 살던 시대에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아직 안 오셨지요.

그럼 이 사람들에게 있어 장차 육신으로 오실 예수님은 약속의 예수님이 되겠지요.

그렇잖아요.

하지만 이들은 지금 고난당하는 것은 누구의 고난입니까?

장차 오실 예수님의 고난이잖아요.

 

그러니 이 사람들은 지금 장차 육신을 입고 오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받아야 할 고난을 미리 당겨서 보여준 것입니다.

이를 선취적(先取的) 고난이라고 합니다.

선취적이라는 말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일어난 것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봅시다.

 

벧전 1:10-11=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자 보세요.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靈)에 의하여서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을 영광을 미리 증거하게 하였다고 하지요.

 

잘 보세요.

누가 누구를 그리스도의 고난 속으로 밀어 넣습니까?

그리스도의 영(靈)이지요.

 

그리스도의 영(靈)으로 고난을 당하였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고난을 당하였단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靈)을 히브리서 11장에선 믿음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으로” 라는 말은 “성령으로” 또는 “예수님” 이라고 해석을 하여도 무방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 사람들은 장차 약속으로 오실 예수님은 직접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성령께서 예수님이 오셔서 받아야 할 고난에 미리 동참하게 함으로서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고난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흔적(痕迹)이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이 지나가고 간 흔적(痕迹)이라고 한 겁니다.

너는 내꺼! 라고 불도장을 콱 찍어 놓았단 말입니다.

 

다 까먹었지요?

그래서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모르면 안 돼요.

바울은 이 고난을 위해서 좇아간다고 했어요.

 

빌립보서 3장입니다.

 

빌 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자 보세요.

바울은 그리스도의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기 위해서 그의 죽으심을 본받고자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하잖아요.

 

바울의 이런 열심을 믿음이 간섭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겁니다.

이런 마음은 바울만 가지는 마음이 아니에요.

믿음이 간섭하시면 모든 성도에게 나타나는 마음입니다.

 

아주 생소하게 들리지요?

이런 말씀이 생소하게 들린다는 것은 그만큼 여러분들이 복음을 못 들었다는 말입니다.

구약에 성도들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빨려 들어갔듯이 신약의 성도들도 믿음이 그리스도의 고난 속으로 밀어 넣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성도가 맞는다면 조만간 그런 날이 올 것입니다.

기대 하세요.

물론 엄청 아플 겁니다.

죽을 지경일 겁니다.

 

쪽팔리고 창피하고 환장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닥치거든 아! 기어코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저도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하루 속히 그런 날이 오기를 기도할게요!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까불지 마라!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痕迹)을 가졌다고 하지요.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건 자랑하는 겁니다.

마치 6.25 전쟁 때 받은 훈장처럼 자랑하고 있는 거예요.

이 흔적이 없으면 안 돼요.

 

구약에 사람들도 다 이런 흔적들을 가지고 있어요.

천국엔 다 이 흔적이 있는 사람들만 살아요.

이 흔적이 없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세상에서 이단 소리 들었으면 예수님께 속한 사람도 이단 소리 듣게 되어 있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이단이라고 해서 그 당시 교권으로부터 축출당하고 죽였어요.

그럼 성도도 고난당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럼에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단 소리 안 듣고 인정받고 살라고 하면 안 되지요.

 

예수님이 누구로부터 이단 소리 들었습니까?

당시 가장 정통(正統)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로부터 이단 소리 들었어요.

그럼 지금 정통(正統)이 누굽니까?

이 시대 교회들이지요.

 

이방인이 예수님을 핍박하거나 죽이지 않아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핍박하고 죽였어요.

사도바울도 유대인으로부터 핍박 받았어요.

이러한 맥(脈)은 지금도 그대로 전수(傳授)가 되어 흐르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정통이라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전하면 지랄을 떠는 겁니다.

왜? 지랄을 떱니까?

자기들의 정체가 폭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어 갔어요.

어느 시대이고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지극히 미미한 사람들이었어요.

 

엘리야와 거짓 선지자들을 기억해 보세요.

850 : 1 이었어요.

 

예수님 당시 제사장만 2만 명이었어요.

2만 : 1 입니다.

 

마태복음 24장으로 보면 종말에 대한 예언을 하시면서 시대상을 언급하셨어요.

 

마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했지요.

여기서 많다는 말은 우굴 우굴 하다는 뜻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우굴 우굴 하다는 것은 거짓 신자들도 우굴 우굴 하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가짜 신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 놈들 추수를 하려고 일 년에 신학생들이 수천 명씩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그들이 신학교를 나와서 뭐하겠어요?

목회 할 것 아닙니까?

 

교회를 개척하면 손님들이 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손님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시장 조사를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이젠 목회도 비즈니스에요.

교회도 회사처럼 경영하여야 해요.

 

회사를 경영 하려면 손님들 취향을 알아야 하잖아요.

교회에 오는 손님들을 가만히 시장 조사를 해보니 손님들이 복을 좋아 하는 겁니다.

그럼 복(福) 주는 목회를 해야지요.

그래서 사도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종말에 교회를 보았는데 귀신의 처소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을 봅시다.

 

계 16:13-14=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계 18: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이 시대 교회는 절간과 똑 같아요.

기독교 TV를 틀어보세요.

거기 나오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다가 바로 아래 한 채널만 돌려 보세요.

불교 TV 나옵니다.

 

비교해 보세요.

앞에 “기독교” 자와, “불교” 자만 빼고 보세요.

똑 같아요.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세요.

뭐가 다른가?

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복 받고 잘 사느냐 뿐이에요.

전부 땅 이야기만 하잖아요.

 

이 사람들과 사도 바울과 비교해 보세요.

사도 바울은 어찌 하든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하려고 좇아간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기독교 TV에 나오는 목사님들은 어떻게 하면 고난 없는 삶을 살 수가 있을까를 가르치잖아요.

바울은 이렇게 땅에 것을 생각하면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잖아요.

 

빌립보서 3장을 봅시다.

 

빌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보세요.

땅에 일을 생각하면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잖아요.

스님도 땅에 일 생각하고, 목사도 땅에 일 생각하면 그 놈이 그 놈 아닙니까?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입니다.

 

바울은 하늘에 것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목사들은 땅에 것만 생각하고 살아요.

왜? 그런가요?

간단해요.

바울은 하늘에 사람이고 목사들은 땅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늘에 영을 받았고, 목사들은 땅에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땅에 주인이 누굽니까?

뱀이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범죄하자 뱀에게 종신토록 흙만 먹도록 했어요.

뱀의 후손들은 땅에 코를 박고 땅 기운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들은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것만 생각하고 살던 바리새인들을 뱀 새끼들이라고 했지요.

바리새인만 독사 새끼가 아니고 기독교 TV에 나와서 땅에 것을 주겠다고 하는 목사들은 다 독사 새끼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는 것을 받아먹겠다고 하는 교인들도 뱀 새끼들입니다.

 

이 말에 반박해 보세요.

예수님의 말씀이나,

바울의 말이나,

제 말이나 뭐가 틀립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이나 바울의 말과 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다른 말이 안 나와요.

다른 말이 나오면 바울이 받은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니지요.

 

바울과 동일한 성령을 받았다면 자연적으로 바울과 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뭐가 이상합니까?

그런데 어느 시대나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사람들은 가루 서 말 속에 감추어진 누룩같이 적어요.

변변치 못해요.

다 비실비실해요.

세상 적으로 내 세울 것이 없어요.

 

반대로 가짜들은 전부 화려하게 장악하고 있어요.

이 영적 맥(脈)을 아셔야 해요.

예수님이 유대인들로부터 버림 당하셨듯이, 지금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저도 솔직히 말해서 교회가 컸다면 이렇게 무시당하고 살지 않아요.

저희 친척들 중에는 많은 분들이 예수를 믿어요.

그런데도 제 말을 안 들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교회가 작잖아요.

교회라도 크면 아! 교인들이 저렇게 많이 모이는 것을 보니 정통인가 보다! 라고 생각 할 텐데!

이건 세월이 갈수록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이 줄어들어요.

그러니 가짜라고 여기는 겁니다.

 

만약에 저희 교회가 조금만 커도 온다는 사람이 많아요.

목사님 말씀은 좋다고 해요.

그럼 와야지요.

와서 말씀을 들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안 와요.

핑계를 대고 안와요.

어떤 장로는 교인들 숫자가 너무 작다고 못 오겠다고 해요.

나중에 부흥 되면 온다고 해요.

 

이건 결국 밥하기는 싫고 밥상 차려 놓으면 숟가락 들고 밥 처 먹으로 오겠다는 심보에요.

이는 복음엔 관심이 없고 교회가 크면 거기서 자기 이름을 한번 떨쳐 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안 오는 겁니다.

 

말씀이 좋으면 다른 조건 보지 말고 와야지요.

와서 말씀을 들어야지요.

그런데 안 와요.

말씀을 들으라고 해도 안 들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라고 하신 겁니다.

구약에 선지자들도 다 이런 핍박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바울도 그랬지요.

하나님께서 사도를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만물의 찌끼같이 두셨다고!

성경은 성도가 고난을 받으면 기뻐하라고 하였지 슬퍼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고난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데 고난이 없다는 것은 그건 생각해 보아야 해요.

올바른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거나 가짜이기 때문에 고난이 없는 겁니다.

억지로 고난을 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반드시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세상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지적하고 악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십자가 피 안에는 고난이 옵션으로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십자가 피를 받으면 반드시 고난도 따라와요.

 

마귀가 먼저 압니다.

마귀가 그러지요.

스게아의 아들들이 바울의 흉내를 내고 있으니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는 어디서 굴러먹다가 온 개 뼉따귀들이냐 라고 흠씬 두들겨 패지요.

마귀는 예수쟁이를 정확하게 알아봐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지 안하는지 귀신같이 알아보아요.

십자가 피를 전하면 아! 저 놈은 진짜 예수쟁이구나!

그래서 세상 힘으로 핍박을 가하는 겁니다.

 

하지만 가짜들은 마귀가 고난이 없도록 막아 줍니다.

도리어 세상 것을 듬뿍 주어서 세상에 안주하게 만들어요.

이런 영적 맥(脈)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 피만 증거하다가 욕을 먹어도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이건 의지나 각오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두 번은 욕을 먹고 고난도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늘상 당하게 되면 가짜들은 다 본색을 드러내고 포기하게 됩니다.

처음엔 십자가! 십자가!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 보면 기성 교회 목사들과 똑 같은 행세를 하고 있어요.

 

무섭지요.

맞아요.

죽고 사는 일인데 왜? 안 무섭겠어요.

당연히 무섭지요.

 

영적 세계가 이렇게 무서운 곳입니다.

영적 세계엔 인정사정이 안 통해요.

오로지 예수 편이냐 아니냐만 있어요.

부모 자식이라 할지라도 예수 편이 아니면 원수입니다.

 

그럼 두 번째 중요한 것을 살펴봅시다.

 

두 번째는 뭔고 하니 40절입니다.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글개역)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두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란 지금 저와 여러분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와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를 말합니다.

그럼 “저희” 는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전부 구약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히브리서가 쓰이기 전에 있던 모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구약 시대 모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우리란? 이 시대 히브리서를 보는 독자들을 말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아까 증거와 약속을 살펴보았지요.

 

쉽게 말하면 증거(證據)는 약속어음이고, 약속(約束)은 현찰입니다.

 

구약의 믿음이 증거 한 것은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라고 했지요.

그럼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한 것이란 바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 성도들은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좋은 것인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약속이란? 실체(實體)를 말하고,

증거란 모형(模型)을 말합니다.

실체는 현금이고, 증거는 약속 어음입니다.

 

여러분은 현찰을 좋아합니까?

약속 어음을 좋아합니까?

당연히 현찰을 좋아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구약 시대 성도들인 저희는 더 좋은 것을 증거하는 약속 어음을 받은 것이고,

신약 시대 예수를 영접한 성도들인 우리는 더 좋은 것인 현찰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이걸 표준 새 번역에선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 두셨다고 합니다.

 

40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없이는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장차 이런 분이 오신다는 것을 미리 알려 주었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저 분이다 라고 증거를 하였는데!

신약의 성도들은 그 분을 직접 만난 겁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멀리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만 보았는데 신약의 성도들은 만난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아브라함은 내 때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하였지요.

아브라함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것을 보고 즐거워했는데 지금 우리는 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신약의 성도들이 더 큰 축복을 받은 것이지요.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마 13:16-17=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보세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구약에 사람들은 나를 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지만 보지 못하였지만 너희는 지금 나를 보고 있다고 복을 받은 자라고 하잖아요.

 

구약에선 성령 안에서 느꼈지만 신약에선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스킨십을 한다는 겁니다.

사진으로만 보던 분을 실제로 만났단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예수님을 본 겁니다.

이삭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진과 같아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았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아들은 그리스도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입니다.

 

갈 3:16절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어서 이삭은 장차 오실 약속의 자녀인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사람들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즐거워 한 사람들입니다.

사진만 보고 즐거워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사람들은 만났어요.

직접 만났단 말입니다.

직접 만나서 밥도 먹고 했단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감동이 안 되세요.

거참 이상하네!

 

구약에 사람들은 사진만 보고서도 그렇게 기뻐하였는데 이 시대 교인들은 손으로 만진바가 되고 눈으로 본 바가 되었음에도 즐거워하지를 않아요.

즐겁지 않다는 것은 만나지 못했다는 겁니다.

 

예수가 기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시대적으로만 신약이지 이런 사람들은 아직도 구약의 사람들입니다.

신약의 사람은 약속을 받은 사람이고,

구약의 사람은 증거를 받은 사람입니다.

 

지금도 구약의 사람과 신약의 사람이 있어요.

예수님을 만난 우리는 신약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저희는 구약사람입니다.

“우리”는 신약의 사람이고,

“저희”는 구약의 사람들입니다.

 

신약과 구약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과 이후로 구분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以前)은 옛 언약에 속한 구약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以後)는 새 언약에 속한 신약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다시 산다고 했어요.

 

갈라디아서 2장을 봅시다.

 

갈 2:19-20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율법 아래 있던 구약 사람은 죽었고 신약에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율법으로 살던 사울은 죽고, 은혜로 사는 바울로 거듭난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율법을 향하여 죽은 옛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키며 살았던 구약의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함께 죽었어요.

그리곤 이젠 예수님이 부활 하실 때 율법과 상관없는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울처럼 율법에 지시를 받는 사람이 아니고, 율법과 상관없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삽니다.

 

성도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이고, 저희는 십자가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와, “저희”로 구분하셨던 것입니다.

 

마 13:11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천국에 비밀은 너희에게는 허락 되었으니 저희에게는 비밀이라고 했지요.

제자들과 유대인들을 구분하지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저희라고 말한 상대는 율법신앙을 고수하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럼 율법 아래 있는 사람에겐 천국은 감추어진 비밀이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에겐 천국은 열려져 환히 보이는 것입니다.

 

이건 구약이다 신약이다 시대를 따지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도 율법 신앙을 하면 구약시대 사람과 동일합니다.

이런 사람에겐 예수님의 십자가 비밀이 깨달아지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율법이 아무리 찝쩍거려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지 않은 사람은 율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 율법에 영향을 받습니다.

 

중요하니 다시 반복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저희가 되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너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저희가 되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우리가 되는 겁니다.

 

율법을 일컬어 그림자라고 하지요.

 

히 10:1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자 보세요.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이고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지요.

장차 오는 좋은 일이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실상이신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율법신앙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구약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만났다고 한다면 빛바랜 사진과 같은 율법 신앙을 고수할 이유가 없어요.

 

알다시피 율법 신앙이란 날과 달과 절기와 장소를 지키는 것들입니다.

이 시대적 언어로 표현하면 주일 성수를 하여야 한다거나,

성전 신앙을 고수한다거나,

십일조나 갖가지 행함을 의무적으로 강조하는 신앙들입니다.

 

한마디로 행함 신앙입니다.

성화신앙도 여기에 속합니다.

암튼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두는 모든 신앙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가성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한 것을 보세요.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겠는데 자기는 이방여자이니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알려 달라고 하지요.

장소를 묻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이 쪽도 아니고 저 쪽도 아니라고 합니다.

 

너희는“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안다!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은 맞느냐! 틀렸느냐! 입니다.

다시 말해서 옛 언약이냐! 새 언약이냐! 라는 말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아직 어떤 장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라고 묻는 것은 아직도 예배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을 말해요.

하나님과의 만남을 예배라고 합니다.

 

구약에선 여호와의 이름이 잇는 성전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젠 여기다! 저기다! 라는 장소적 개념은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제는 신령(神靈)과 진정(眞理)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때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제부터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합니다.

 

신령과 진정이란? 성령과 진리란 말입니다.

진리란? 하나님 약속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약속으로 오신 분이므로 진리는 곧 예수님 자신입니다.

 

이는 곧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분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그럼 이젠 어떤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이젠 예수님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성전 개념은 사라졌지요.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는 것은 구약의 알지 못하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시대 교회를 성전 개념으로 두어서는 안 되겠지요.

교회는 모임의 장소 이외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교회에 어떤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의미를 둔다는 것은 아직도 구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가 마치 구약의 성전과 같이 되었어요.

목사들은 교인들을 교회에 가두려고 하지요.

교회가 마치 하나님의 집이라도 된다고 가르치지요.

결국 교회가 신전(神殿) 곧 우상의 전당이 되고 만 겁니다.

 

목사들도 성전 건축 한다고 헌금 하라고 하잖아요.

성전 건축 한다고 헌금 하라는 말은 나는 구약 사람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난 예수를 만나지 못한 목사입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그래서 교인들이 교회 와서 기도하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교회가 어떤 신성한 장소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 와서 기도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가 만약에 성전이라고 한다면 구약적 요소들이 채워져 있어야 해요.

 

제사장도 있어야 하고,

안식일도 있어야 하고,

제물 되는 양이나 소가 있어야 해요.

구약 식으로 드려야 해요.

 

그러나 어느 교회도 양이나 소를 잡아 드리지 않지요.

그러면서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면서 예수 믿는다고 하지요.

이건 절반은 구약이고, 절반은 신약입니다.

 

이상한 집단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교회와 교인들을 일컬어 괴물이라고 했어요.

이 시대 교인들은 반은 구약 사람이고, 반은 신약 사람입니다.

그러니 괴물이지요.

 

성경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럼 가짜들이라는 겁니다.

교회도 아니고, 신자도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만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만나 주세요.

예수 안에서 만난 다는 말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맺은 새 언약 안에서 만나 주신다는 말입니다.

 

새 언약이란? 옛 언약과 달라졌다는 말이지요.

옛 언약 하에선 양을 잡고 양의 피를 앞세우고 하나님을 만나러 갔어요.

그러나 새 언약 하에선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고 나아가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러한 것들이 믿어져요.

 

그러니 성령 받은 성도는 구약식 신앙생활을 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주일 성수니,

성전이니,

십일조니,

제사장이니 하는 것들을 고집하지 않아요.

 

이젠 예수님이 주일이고,

예수님 성전이고,

예수님이 십일조이고,

예수님이 제사장이예요.

 

목사가 제사장이 아닙니다.

속지 마세요.

목사는 다만 하나의 직분자일 뿐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자예요.

 

성도는 모두가 직분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청소하는 직분을 맡았고,

어떤 사람은 밥하는 직분을 맡았고,

어떤 사람은 운전하는 직분을 맡았고,

어떤 사람은 주일학교 교사 직분을 맡았어요.

 

직분엔 높고 낮음이 없어요.

다 예수님의 몸에 지체로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구약의 성막에 쓰임 받는 여러 가지 도구들과 같습니다.

 

성소 안에 보면 불집게나,

재를 담는 그릇이나,

향을 피우는 향로나,

떡 상이나,

촛대나 모두가 정금으로 만들었어요.

 

이는 모두가 차별이 없고 귀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성도는 다 귀해요.

모두가 예수의 생명이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聖徒)란? 거룩한 무리란 말입니다.

즉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 주일학교 어린이라고 깔보면 안돼요.

그 아이들 속에도 예수님의 피가 있어요.

 

그 예수님의 피 때문에 죽음도 피해가고 마귀도 까불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하나님을 수시로 만나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이 예수님 앞에 오는 것을 막으니 화를 내지요.

제자들이 애들을 가라고 하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저 아이들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다고 하잖아요.

저 아이들도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주일 학생은 다 왕자입니다.

왕자가 어리다고 깔보다간 임금한데 혼납니다.

그 속에 임금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겁니다.

 

머리가 허연 영의정 대감도 왕자 앞에선 머리를 조아리고“세자 저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라고 경대(敬待)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다고 야! 세자! 이리와 봐!

그러다간 언제 죽을지 몰라요.

 

여러분의 자식도 예수를 믿으면“세자 저하”입니다.

앞으로 잘 대하세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최고로 대해주어야 해요.

 

암튼 율법 신앙은 아직도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구약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계세요.

구약 사람은 율법 아래 있기 때문에 늘 저주 아래서 쫓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저주를 몰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갈 3:10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법의 특징은 지켜도 지켜도 끝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를 지키면 또 다른 것을 지켜야 합니다.

눈만 뜨면 지켜야 한다는 것 때문에 마음은 늘 불안하고 저주를 품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신학자들이 말하기를 율법 조항이 365개라고 합니다.

전 세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신학자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압니다.

 

365개든지 3600개든지 그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니 세어 볼 필요가 없어요.

암튼 신학자들이 365개라고 하니 그런 줄 아는데!

왜? 365개냐 하면 일 년 365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살아야 된다는 의미에서 365개가 아닌가 싶대요.

그렇다면 일 년 365일 저주 아래서 살아가는 겁니다.

참 재미있지요.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신약의 성도는 율법이 3만 개든 5만개든 상관치 않아요.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얼마나 배짱이 편합니까?

 

예수님께서 진리로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셨지요.

그럼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것으로도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자유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유자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보세요.

얼마나 자유합니까?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살아가는 방식에서나 거침없이 살았습니다.

때로는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서 법아래 자신을 가둘 때도 있었고, 때로는 법으로부터 초연하게 살았습니다.

 

유대인에겐 유대인처럼 대하고, 이방인에겐 이방인처럼 대하였어요.

이건 세상의 가치로부터 갇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바울은 세상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저촉 받던 율법에 사람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세상과 상관없는 하늘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이 두렵지 않게 산 것은 곧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특징을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지요.

왜? 세상이 감당치 못했습니까?

이는 세상 밖에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관념(觀念)이 아니고 실제(實際)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 매이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무슨 도(道)를 닦는 식으로 하지 말란 말입니다.

십자가는 도가 아니라 생명이고 삶입니다.

생명이 뭡니까?

날마다 사는 겁니다.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말고 영적 가치관으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는 자세로 살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어집니다.

 

이제 나머지 하나를 살펴봅시다.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글개역)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주셨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우리가 아니면 저희가 온전해 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말은 쉽게 하면 우리가 없으면 저희도 없다는 겁니다.

 

아까 우리란? 예수를 영접한 신약의 성도라고 했지요.

그럼 예수를 영접한 성도가 없으면 구약의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완전히 꽝이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어렵지요.

 

맞아요.

성경이 그래서 어려운 겁니다.

육적으로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예수 안에서 보면 어려울 것도 없어요.

 

자 봅시다.

 

우리가 아니면 저희들이 온전해지지 않는다고 했지요.

쉬운 말로 우리가 없으면 저희도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이것이 증거(證據)와, 약속(約束)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증거라는 말은 멀리서 내다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엄마가 자식에게 두부 한 모 사오라고 두부 사진을 주고서 보낸 것과 같아요.

 

사진을 주고 보낸 것은 진짜 두부를 사오라고 보낸 거잖아요.

그럼 아이가 가게에 가서 실제 두부를 사가지고 오면 엄마가 올커니 됐구나!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이처럼 약속이란? 아이가 엄마가 심부름 시킨 대로 사진을 가지고 실제 두부를 사온 것과 같아요.

 

더 쉽게 육상에서 1000M 계주하는 것으로 비유해 봅시다.

 

지금 아벨이 1번 계주예요.

준비 땅! 하고 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2번 주자인 아브라함에게 바통을 넘겨주었어요.

 

아브라함이 바통을 들고 또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3번 주자인 요셉에게 바통을 넘겼어요.

 

요셉이 바통을 들고 또 달립니다.

그리곤 4번 주자인 모세에게 줬어요.

 

모세가 바톤을 들고 또 달립니다.

그렇게 해서 구약의 마지막 주자인 세례요한에게 줬어요.

이제 세례요한이 뜁니다.

 

그러자 아벨서부터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모세가 숨을 조아리면서 보고 있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중간에 넘어지지 않고 무사하게 예수님에게 바통을 넘겨주어야 게임이 승리하는 겁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정확하게 골인 한 것입니다.

그러자 구약의 먼저 뛰었던 계주들이 모두가 야호! 이겼다! 이겼어! 라고 춤을 추는 것과 같아요.

 

이걸 본문에서 우리가 아니면 저희가 온전해 지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니 아벨서부터 구약의 마지막 말라기 선지자까지 그들이 달려온 게임이 성공 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보고서 여자가 나은 자 중에서 제일 크다고 한 겁니다.

키가 크다는 말이 아니고 아벨서부터 구약의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제일 크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 보다 더 크다고 했어요.

왜? 천국에서는 제일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 보다 더 크다고 합니까?

그건 세례요한은 초림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지요.

가시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행전 1장을 봅시다.

 

행 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자 보세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구름을 타고 천국으로 가셨어요.

가시면서 뭐라고 합니까?

천사들이 예수님이 구름타고 승천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 예수님은 지금 너희들이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하지요.

 

그러니 12제자가 이제 신약 시대 1000m 계주하는 첫 번째 주자가 되어서 뛰는 겁니다.

어디로 향해서 뜁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서 뛰지요.

바울도 삼층천 가서 보았어요.

장차 우리가 가야할 곳이 천국이라는 것을!

 

그래서 바울도 열심히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을 위해서 좇아간다고 한 겁니다.

 

빌 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보세요.

바울은 부활의 권능을 위해서 좇아간다고 하잖아요.

바울은 이미 얻었다 하지도 않고 온전히 이루었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이 계신 그 곳을 향해서 좇아간다고 하잖아요.

이건 바울의 구원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니고 빨리 예수님 품으로 가고 싶다는 말입니다.

너무 너무 가고 싶으니 진심전력으로 좇아간다고 하는 겁니다.

 

그 바울의 바통을 지금 우리가 받았어요.

이제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하였어요.

12제자나 바울도 구약의 신진들이 신약의 성도들을 바라보았듯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겠지요.

 

요한 계시록에 6장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와요.

 

계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사도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천국을 보았어요.

천국을 보니 믿음에 선배들이 하나님께 빨리 세상을 끝장내라고 합니다.

이것은 빨리 믿음으로 시작된 마지막 계주가 천국으로 골인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경기를 마치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기다리라고 하지요.

너희들 같이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할 주자(走者)들이 남아 있다고 하지요.

베드로나 바울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하다가 이단 소리 듣고 죽어야 할 자들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12제자들과 같이 죽기로 남겨진 자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 시대 십자가 피만 증거하는 성도들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우리가 마지막 주자가 되어서 천국에 테이프를 끊는 것입니다.

 

마치 올림픽 폐회식 때 주(主) 경기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그 주(主) 경기장 안으로 마라톤 선수가 1등으로 골인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과거 바로셀로나 올림픽 때 황영조 선수가 손을 흔들면서 몬주익 경기장을 들어오는 모습이 생각나지요.

그 환호성과 영광을 한번 그려보세요.

 

하나님과 예수님과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와 다윗과 베드로와 바울과 스데반과 그 외 등등 믿음으로 살다간 성도들과 천군 천사들이 나팔을 불면서 환호해 주는 그 모습을 생각해 보시란 말입니다.

 

짜릿하지 않습니까?

황홀하지 않습니까?

아니 이런 말씀을 들어도 기쁘지 않으면 무슨 말을 들어야 놀랩니까?

 

전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요.

이런 생각이 들면 빨리 죽고 싶어요.

그냥 잠자다가 그대로 갔으면 좋겠어요.

 

재미있지요.

신나지요.

그래요.

 

예수를 믿는다는게 이렇게 재미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믿어지면 신이 나요.

겁 날 것이 없어요.

이건 같은 편이 아니면 그 감흥을 몰라요.

 

그 기쁨과 스릴을 몰라요.

전 복음을 깨닫고 나서 그 기쁨을 잊지 못해요.

처음 복음에 대하여 눈을 뜨고 난 후의 그 기쁨과 황홀함을 잊지를 못합니다.

 

한편으로는 율법 신앙에 찌들려 살았던 수십 년의 그 세월이 그렇게도 원망스럽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그 안도감에 엄청 울었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그 때 그 감흥을 주는 것과 같은 노래가 있어서 혹간 부르곤 해요.

 

최진희 라는 가수가 부른‘꼬마 인형’이라는 노래입니다.

가사가 그렇게 제 마음을 미어지게 해요.

제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마음을 담아 놓은 것 같아서 곧 잘 부르곤 합니다.

 

가사를 잘 음미해 보세요.

어떤 여인이 아주 멋진 남자를 만나서 첫 사랑을 나누었어요.

너무너무 황홀해서 그 밤을 못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시 온다고 하는 약속을 하고서 멀리 떠나가 버렸어요.

이 여인은 그날 밤을 잊을 수가 없어서 밤마다 꼬마 인형을 가슴에 안고 기다란다는 내용입니다.

 

전 황홀한 그 밤을 예수님을 만난 날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복음을 깨달은 것으로 생각하면서 불러요.

떠난 그 사람을 주님이라고 생각하고 불러요.

 

가사 내용이 마치 아가서의 술람미 여자가 솔로몬 왕의 약속 하나만을 간직하고 기다리고 사는 것 같아요.

꼬마 인형에서 먼 길 떠나면서 약속을 한 것은 주님이 주신 십자가의 피에 언약과 같아요.

우린 그걸 꼭 안고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서 전 십자가 피를 생각 할 때마다 주님의 그 사랑이 고마워서 감사의 눈물을 흘린 답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면서 부른 답니다.

 

너무 기뻐서 여기서 끝내야겠어요.

노래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생각하면서 불러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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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인형 (최진희)

 

1절

그날 밤 황홀한 시간을 난 잊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당신을 알고 말았죠

말없이 흐르던 눈물을 난 감출 수가 없었네

창문에 부딪치는 빗방울을 하나 둘 세고 있었죠

늦어도 그날까지 약속만을 남겨둔 채로

밤이 지나고 새벽 먼 길을 떠나갈 사람이여

부서지는 모래성을 쌓으며 또 쌓으며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2절

늦어도 그날까지 약속만을 남겨둔 채로

밤이 지나고 새벽 먼 길을 떠나갈 사람이여

부서지는 모래성을 쌓으며 또 쌓으며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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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뭉클하지 않습니까?

유행가 가사를 보면 복음 적인 것들이 참 많아요.

복음적으로 이해해서 부르면 복음 성가입니다.

 

노사연의‘만남’이라든가,

김종환의‘사랑을 위하여’라든가,

임수정의‘연인들 이야기’라든가,

조영남의‘그대 그리고 나’ 라든가

 

제가 즐겨 부르는 노래들입니다.

가사를 복음적으로 개사를 해서 부르면 훌륭한 찬송이 되요.

 

가사들이 솔직히 요즈음 복음 성가들보다 훨씬 더 복음 적이에요.

요즈음 복음 성가를 보면 거의가 다 세상 복을 추구하는 노랫말들이예요.

땅에 노래들이예요.

전 그래서 이런 노래들을 복음적으로 개사해서 많이 불러요.

 

암튼 제가 만난 그 예수님을 만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귀한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신 은혜를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주님 안에 품겨 있기에 세상에 그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임을 알고 기쁘게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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