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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성경강해)24강. 합환채가 있는 들로 나아가자 (아가 7:11-13)

by coroa 2022. 2. 28.

 

하늘빛사랑 https://blog.daum.net/day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4강. 합환채가 있는 들로 나아가자 (아가 7:11-13)

-.정낙원 목사

 

아 7:11-13절.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12.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13.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 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 말씀을 좇아서 가나안 땅에 이릅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고 나니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보여주시고는 네가 거할 곳은 이 세상에 있는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다고 알려주십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장막 생활을 합니다.

장막 생활은 나그네 생활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아갑니다.

 

가나안은 하늘에 있는 본향을 표상으로 주어진 땅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막벨라 굴이라는 무덤 하나를 사 놓고 죽은 것입니다.

무덤은 죽어서 들어가는 곳입니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한 성은 죽어서 가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천국은 흙에서 난 죄의 몸을 벗고 새로운 몸으로 가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유랑 생활은 성도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삶이기도 합니다.

광야는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으면서 늘 떠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처럼 땅에 정착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싶어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떠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어깨엔 창세전 언약이 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후손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약이 담고 있는 삶에 모습으로 이끌림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무엇인가 하면 부르시고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부르시고 빼내심을 입는다는 것은 정착한 곳에서 떠남을 강요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떠남을 종말이라고 하고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기존의 세계로부터 떠나야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은 가짜입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 세상은 가짜이고 하늘이 실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언약의 후손들은 이 세상에서 빼내심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들에게는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히 11:8-16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구약의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들은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로 낳아진 자들을 예표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낳아진 성도가 언약의 후손입니다.

그럼 성도들도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약의 언약의 후손들은 구름기둥 불기둥이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 하였듯이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로 낳아진 언약의 후손들은 성령이 인도하십니다.

 

언약은 우리가 생기기 전에 창세전에 이미 세워졌습니다.

성도를 존재케 하는 것은 창세전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시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것은 언약 속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여서 이 세상에 나온 성도들은 역사라는 세계에서 창세전이라는 세계로 시간을 역(逆)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첫 열매입니다.

 

요 17:6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인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그 영화를 다시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서 원래 계셨던 곳인 창세전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는 일을 기쁘고 영화로운 일이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속에는 성도의 죽음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떠나심 속에는 성도의 떠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에 출생과 동시에 창세전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운명은 이미 창세전에 왼료로 예정이 되었습니다.

완료된 상태로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 속에서 이미와 아직이라는 수순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넌 세상에서 이렇게 살다가 오라고 운명이 정해졌어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정해준 대로 살다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을 들어 보세요.

 

렘 1:4-5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찾아옵니다.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았고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였다고 합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열방의 선지자로 세움을 입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창세전에 선지자라는 배역을 받고 태어난 것입니다.

때가 되어서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창세전에 열방의 선지자라는 배역을 맡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어진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이는 비단 예레미야뿐만 아니고 모든 성도가 동일합니다.

우리 모두가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로서 각자 배역들을 맡고서 이 세상에 보내심을 입은 것입니다.

마치 야곱과 에서처럼 사랑 받는 자와 미움 받는 자로 또한 모세와 바로처럼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으로 각자 맡겨진 배역이 있어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 같은 사람은 거지 배역을 맡았고!

부자는 이 세상에서 연락하다가 지옥으로 가기로 된 배역을 맡았어요.

 

교회 안에는 양도 있고 염소도 있습니다.

곡식도 있고 가라지도 있습니다.

양과 염소, 곡식과 가라지는 종자가 다릅니다.

 

염소가 양이 되고 가라지가 곡식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반대로 양이 염소가 되는 법도 없고 곡식이 가라지가 되는 법도 없습니다.

양은 양으로 살고 염소는 염소로 살 뿐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그 본성들이 잘 드러나지 않다가 자라가면서 각자의 본성들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어떤 이는 예수 편에 서 있고 어떤 이는 그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둘 다 동일한 말씀을 들어도 각자 토해내는 것이 다릅니다.

예수 편에 있는 성도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토해내고, 반대편에 있는 자는 마귀의 모습을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참 성도로 배역을 맡았고!

어떤 사람은 가짜 성도로 배역을 맡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삯꾼 목사로 배역을 맡아서 일하다가 지옥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복음전하는 목사로 배역을 맡아서 고난 받다가 천국으로 갑니다.

 

이걸 속된 말로 팔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각자 맡은 배역대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각자 맡겨진 배역에 따라서 사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인생은 이미 완성이 되어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창세전에 주어진 삶을 역으로 거슬러 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멸망당할 것을 창조하였다고 합니다.

 

히 1:10-12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나님은 멸망 할 것을 창조 하셨습니다.

세상은 종말을 향하여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이 창조를 앞선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조 속에 이미 종말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일생도 이미 창세전에 결정이 난 종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 속 생명은 휴대폰의 밧데리처럼 정해진 시간으로 소진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는 캔버스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창세전에 기 기쁘신 뜻대로 예정을 하신 언약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예정한 것을 역순으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인생의 끝이 천국이라는 창세전이라는 그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꺼꾸러 살아가는 삶으로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꺼꾸러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이 세상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는 운명 속으로 휘말려가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정착하지 못하는 삶이 바로 떠나는 삶입니다.

떠나는 곳이 이 세상에서는 예표적으로 이 세상과 격리된 세계인 광야로 나타난 것입니다.

광야는 이 세상 밖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애굽은 보이는 이 세상을 상징하고 광야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애굽에서 광야란? 묵시의 세계입니다.

묵시의 세계란 하늘을 의미합니다.

언약의 후손들에게 창세전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광야로 나타난 것입니다.

 

광야는 천국과 같습니다.

그래서 광야에 나가서 하나님의 집인 성막을 중심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광야의 성막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장소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광야로 나아가는 삶으로 이끌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성막을 지었습니다.

예수님이 성막의 실체가 되셔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집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 할 때 백성들이 일제히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광야의 성막과 같은 곳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 주십니다.

광야에 나아가야 하늘 문이 열립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 이라는 광야로 나아가니까 천국이 열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라비아 라는 광야로 나아가니까 삼층천이 보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광야 이야기입니다.

 

11.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들(광야)로 나아가자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살 곳이 못 되니 떠나자고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사랑을 주겠다고 합니다.

광야에 합환채가 있고 각종 먹을 것이 있다고 합니다.

 

에덴동산을 떠나온 인간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흩어짐을 면하기 위하여 터를 구축하고 성(城)을 쌓는 일을 하였습니다.

성과 대를 쌓고 집을 짓고 부락을 만들고 국가를 만든 것입니다.

그 속에서 보호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벨탑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온 인간들은 바벨탑을 쌓고서 그 울타리 안에서 흩어짐을 면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흩어버립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를 보호하고자 합니다.

자기 보호본능이 자기 주변을 보호막으로 둘러 진을 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보호막이 가정이고 친척이고 부족이고 부락이고 국가입니다.

 

가정은 최소 단위의 보호막입니다.

나를 지켜주는 그늘이 형제이고 부모이고 친척들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가문이라는 씨족 사회를 만들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 가문이 자기를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은 힘이고 버팀목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는 것은 죽음으로 간주하고 슬퍼하였던 것입니다.

옛 시절의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고개를 넘어가면 죽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개마다 한(恨)이 서린 설화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여자가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떠나 낯선 곳으로 시집을 간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슬픈 마음을 쓸어내리면서

태어나고 자라온 친정을 떠나 낯선 세계로 넘어 가는 고개가 바로 아리랑 고개인 것입니다.

가족을 떠나는 아픔과 슬픔과 두려움을 노래로 부른 것입니다.

민족마다 이런 류의 노래들이 다 있습니다.

 

아리랑은 한국 민족에게는 한(恨)의 노래입니다.

사람들은 한이 쌓일 때 자기도 모르게 아리랑과 같은 한 맺힌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힘들고 지치면 자기도 모르게 안에서부터 한이 소리로 토해지는 것입니다.

소리에 한을 담아서 보내는 것입니다.

 

아리랑과 같은 노래를 들으면 슬퍼지고 눈시울이 붉어지지요.

마음이 짠하고 코끝이 찡하지요.

이는 한(恨)을 바탕으로 한 노래의 음률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후벼 파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랑과 같이 세상에 대한 한(恨)이 맺힌 노래를 들으면 슬퍼지는 것입니다.

 

땅의 노래가 있고 하늘이 노래가 있어요.

땅의 노래는 슬프고 하늘의 노래는 기뻐요.

아리랑은 땅의 노래이고 찬송가는 하늘이 노래에요.

 

아리랑은 한(恨)의 노래이지만, 찬송가는 기쁨의 노래에요.

아리랑은 죽음이 노래이지만, 찬송가는 생명의 노래에요.

영적으로 보면 그렇단 말입니다.

 

이 세상을 떠남이 슬픈 사람은 아리랑과 같은 땅의 노래를 부를 것이지만,

이 세상을 떠남이 기쁜 사람은 찬송가와 같이 하늘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동일한 떠남이지만 절망으로 가는 떠남이 있고, 소망으로 가는 떠남이 있어요.

 

죽음으로의 떠남이 있고, 생명으로의 떠남이 있어요.

지옥으로 가는 죽음이 있고, 천국으로 가는 죽음이 있어요.

동일한 죽음이지만 하나는 저주 받은 슬픈 죽음이고, 하나는 축복받은 기쁨의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음은 소망이지만, 예수 밖에서의 죽음은 절망인 것입니다.

 

그럼 광야로 떠나는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왕궁을 떠나 들로 나아가자고 합니다.

솔로몬이 나라 살림을 한다고 심신이 지쳤는지는 사랑하는 여인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 둘이서만 세상 모든 근심 걱정 다 잊고 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골치 아픈 일상을 다 벗어 던지고 사랑하는 여인과 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궁궐을 벗어나 아무도 없는 들로 나아가자고 합니다.

무작정 떠나는 것이 아니고 들에 어떤 동네가 있다고 합니다.

그 동네로 가서 유숙하자고 합니다.

 

들에 있는 동네는 세상과 격리된 다른 세상입니다.

세상과 격리된 동네!

과연 그 동네는 어떤 동네일까요?

분명한 것은 들에 있는 동네는 예루살렘과 다른 동네이겠지요.

 

솔로몬이 나아가자고 하는 들에 있는 동네는 예루살렘과 대비되는 동네입니다.

예루살렘은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면서 죽이는 동네라고 한다면, 들에 있는 동네는 평화로운 동네입니다.

 

솔로몬이 나아가자고 하는 들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을 말합니다.

그곳은 쉼이 있는 곳입니다.

신랑과 신부의 사랑이 나누어지는 곳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천국을 묘사하기를 어린양과 사자가 함께 뛰놀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물리지 않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알다시피 사자와 어린 양은 원수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둘이 함께 놀아요.

천국은 원수가 없는 평화로운 곳이지요.

 

그래서 천국의 임금인 예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칠 때 천사들이 알려 줍니다.

다윗의 동네에 이스라엘의 왕이 나셨다고 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라고 합니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란 창세전에 예정된 자기 백성들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평화의 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평화의 소식을 들에 있는 목자들에게 알려 줍니다.

 

솔로몬은 그 들로 나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소식이 전해지는 그곳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들로 나아가자고 하는 것은 곧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자는 말과 같습니다.

 

사랑은 쉼입니다.

서로가 먹고 마시면서 쉼을 얻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근심 걱정을 다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각종 암투가 벌어지는 예루살렘 구중궁궐에서는 근심 걱정을 벗을 수가 없어요.

근심걱정을 안고 사랑을 나눌 순 없습니다.

그러니 들로 나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믿음에 조상인 아브람은 떠나는 삶을 살았어요.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찾아와서 정착해서 잘 살고 있는 곳을 떠나라고 합니다.

본토친척 아비 집에서 여호와를 섬길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왜 잘 살고 있는 고향에서 떠나라고 하는 걸까요?

떠남을 통하여서 가르쳐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아 7:11-13절.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12.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13.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 것과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나아가자고 합니다.

들에 있는 동네에서 유숙을 하자고 합니다.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너에게 준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양의 귀한 실과들이 있는데 묵은 것도 있고 새 것도 있다고 합니다.

마치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두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들은 신랑이 신부에게 줄 보물이 가득 있는 보물 창고인 것입니다.

신부가 먹어야 할 것들로 가득합니다.

사랑이나 합환채나 각양의 귀한 실과들은 모두가 먹고 마시는 생명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이 들에서 주어진다고 합니다.

이게 비밀(秘密)입니다.

 

들이란? 예루살렘을 상대적으로 말하는 장소라고 했습니다.

그럼 예루살렘에는 귀한 보물들이 없다는 말이 되겠지요.

신부가 먹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예루살렘과 광야를 대조하여서 말을 할 때는 예루살렘을 타락의 도시라고 말하고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에서 세례를 베푼 것도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전도를 하려면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해야 하잖아요.

그러나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고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광야로 나아간단 말입니다.

들로 나아가서 세례를 받더란 말이에요.

 

이게 중요해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광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광야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고 광야에서 천국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잖아요.

너희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광야에 나아 왔느냐!

아니면 옷 잘 입은 사람을 보려고 나아 왔느냐!

그게 아니잖으냐!

너희가 광야에 나간 것은 선지자를 보려고 나아가지 않았느냐!

봐라! 하나님의 선지지가 광야에 있지 않느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광야에서 선지자를 만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과 자기백성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경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여지없이 광야로 몰아냈어요.

이게 하나님의 일하심이에요.

 

아브람도 광야로 몰아냈고!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광야를 몰아냈어요.

모세도 애굽의 왕자 자리에서 광야로 몰아냈고!

야곱도 장자권의 축복을 받자 광야로 몰아냈어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에스겔 선지자도 광야에 나가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어요.

바울도 아리비아 광야에서 계시를 받았어요.

사도 요한도 밧모섬에서 천국을 보았어요.

예수님도 광야에서 천국 복음을 전했어요.

 

이러면 뭔가 감(感)이 잡히지요.

성경에서 광야는 세상과 다른 곳을 의미해요.

세상을 타락한 죄악의 도시라고 한다면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광야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광야는 장소적인 것도 있지만 환경적인 것도 있어요.

 

장소적으로는 교회를 말하고 환경적으로는 고난을 말해요.

하나님은 고난 속에 몰아넣고 은혜를 주세요.

광야 같은 환경으로 몰아넣고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요.

세상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만들어 놓고 하늘을 쳐다보게 한단 말입니다.

 

호세아 2장을 봅시다.

 

호 2:6절.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호 2:14-15절.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자꾸만 다른 신을 쫓아가니 가시와 담으로 막았다고 합니다.

가시와 담이란? 아픔과 고난을 말해요.

인생살이를 고달프게 한단 말입니다.

고달픈 인생살이를 광야라고 합니다.

 

그런데 광야 같은 환경으로 몰아넣고 하나님이 거기서 하늘 문을 열어준다고 합니다.

아골 골짜기에서 소망의 문을 열어준다고 하잖아요.

아골 골짜기는 저주받은 곳이에요.

 

저주 같은 환경에 몰아넣고 하나님을 찾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 가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광야로 몰아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광야에 나오니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어요.

만나는 애굽에서는 구경 하지도 못한 양식이에요.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광야란? 별세(別世)의 세계인 것입니다.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에요.

이 세상을 죽은 세상이라 한다면, 광야는 산 세상이에요.

이 세상은 저주 받은 곳이라고 한다면, 광야는 축복의 땅입니다.

이 세상을 지옥이라고 한다면, 광야는 천국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본토 친척 아비집이라고 한다면, 광야는 하나님이 지시한 가나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세상에서 떠남을 요구합니다.

세속적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너희가 그리스도와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거기에 그리스도가 계시니까 땅에 지체를 죽이라고 했어요.

땅에 지체를 죽이라는 것은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못 박으란 말입니다.

 

세상 가치관을 버리란 말이에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버리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전부 세상 것이고 마귀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 것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아서 롯의 처처럼 우리의 발걸음을 뒤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버리라고 하여도 우린 못 버립니다.

롯의 처처럼 우린 돌아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빼앗아가는 일을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뜻하지 않는 사건과 사고를 일으켜서 빼앗아 가시고 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 어려운 일이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참 아들이기 때문에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광야는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은 자들이 사는 곳이에요.

광야는 문둥병자들이 사는 곳이에요.

예수님도 이단이라는 염병 걸린 자로 취급당하고 영문 밖으로 버림을 당하셨어요.

 

참 재미있는 것은 세상에서 문둥이고 염병이라고 버림당하는 자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고 자칭 문둥병이 안 들고 의롭다고 하는 자들은 죄인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저주 받은 자라고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하나님은 의인이라고 인정하고 자칭 의인이라고 하여 예수를 죽인 자들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이 비밀을 알아야 해요.

 

예수님은 문둥병자로 영문 밖 십자가에서 죽임 당했어요.

그럼 예수님이 쫓겨난 영문 밖 십자가가 광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 광야란? 십자가 안을 말해요.

십자가 안이 광야이고 솔로몬이 나아가자고 하는 들에 있는 동네에요.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십자가 너머의 세상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너머의 세상으로 나아가려면 기존의 세상과 작별을 하여야지요.

세상에 대하여 죽임 당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십자가 안에 신랑이 신부를 위하여 준비한 각종 선물들이 들어 있어요.

하늘에 신령한 복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십자가 안으로 밀어 넣어요.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기존의 세상으로부터 떠나라고 하는 것도 다 이 때문이에요.

 

구원이란? 떠나는 것입니다.

기존에 있던 곳에서 빼내심을 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있어 본토친척 아비집이란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토친척 아비 집이란? 아담 안을 말합니다.

아담은 죄의 조상이에요.

죄의 삯은 사망이에요.

그럼 아담 안은 죽은 곳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에게 있어 본토친척 아비 집이란 송장들이 사는 곳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산 자에요.

산 자들이 죽은 송장과는 살 수가 없어요.

격리 시켜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빼내는 것입니다.

마치 썩은 귤 박스에서 썩지 않은 것을 골라내는 것과 같아요.

 

이 세상은 저주 받은 곳이에요.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땅을 저주했어요.

이 땅은 죽음이라는 저주를 뿜어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죽음이 뿜어져 나오는 곳에서 빼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을 뿜어내는 곳을 일컬어 상징적으로 아담 안이라고 하고 아담 안을 부모친척 아비 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어요.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빼내 주신 것입니다.

 

구원이란? 여자가 시집가는 것과 같아요.

친정에서 전혀 낯선 신랑의 집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여자에게 결혼은 자기를 낳아준 친정집에서 호적을 파내고 신랑의 집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시집과 동시에 여자는 친정에선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친정집은 아담 안이고 신랑 집은 예수 안인 것입니다.

결혼과 동시에 친정집에선 죽은 자가 되는 것이고 신랑 집에선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자에게 결혼은 신랑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결혼을 시집을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언약적 관점에서 보면 본토 친척 아비 집은 율법을 말해요.

 

옛 언약을 말해요.

우린 모두가 율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본토친척 아비 집은 율법인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율법으로 정죄 받고 죽었어요.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살았어요.

 

율법 아래선 쉼이 없어요.

율법은 지켜도 지켜도 끝이 없어요.

마치 종처럼 일을 해도 해도 끝이 없듯이 율법 아래서는 수고와 슬픔뿐이에요.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죽음의 권세가 넘나들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 아래서 빼내 주셨어요.

종이 아니라 아들로 만들어 주셨어요.

율법아래서 해방시켜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율법으로 정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이 지배하는 죽음의 땅에 예수님이 오셨어요.

자기 백성을 율법아래서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이라는 친정집에서 빼내 주신 것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고 죽음이 없는 그런 생명의 세계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십자가 안이라는 광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광야에서 사랑을 준다고 하지요.

 

이는 광야에 나아가야 신랑의 사랑을 받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 안에는 정죄와 심판과 죽음만 있어요.

율법 안에는 사랑이 없어요.

 

하나님은 율법 아래서 사랑을 주지 않아요.

율법 아래서는 사랑을 할 수가 없어요.

율법은 죽음의 동네이고, 광야는 생명의 동네에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어도 법으로 토해내요.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과는 사랑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동네에서 생명의 동네로 빼내는 것입니다.

죽음의 동네에서 생명의 동네로 빼내서 사랑을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들에서 사랑을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정죄와 비판과 심판이 없는 들에서만 나눌 수가 있어요.

 

사랑은 안식하는 행위이므로 모든 일을 그치고서야 나눌 수가 있어요.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부부간에 은밀하게 침실에서 나누는 것이 사랑이에요.

그래서 사랑은 기쁨이고 쉼인 것입니다.

 

죄악이 난무하는 이 세상은 일하는 곳이에요.

하지만 세상과 격리가 된 광야는 일하는 곳이 아니고 쉬는 곳이에요.

거긴 각종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달마다 12가지 과실이 열리는 곳이에요.

먹고 마시면서 안식하는 곳이에요.

 

광야에는 각종 과실들이 있어요.

 

광야에는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있고!

각양의 귀한 실과들이 있는데 옛 것도 있고 새 것도 있어요.

그런데 이 모두는 솔로몬이 술람미를 위하여 쌓아 둔 것입니다.

신랑이 사랑하는 신부에게 주려고 준비해 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광야에 숨겨둔 합환채와 각양의 실과들이 무엇인가요?

합환채는 무엇이고,

옛 실과는 무엇이고, 새 실과는 무엇일까요?

뭔가 뜻이 있겠지요?

그 의미를 추적해 봅시다.

 

먼저 합환채부터 살펴보기로 합시다.

 

합환채를 말하기 전에 당부 드릴 것이 있는데 제가 아가서를 해석하는 것이 절대 진리일 수는 없어요.

전 다만 이렇게 은혜를 받고 있어요.

성령이 저에게 깨닫게 해 주신 은혜대로 풀어내는 것일 뿐입니다.

제 주장에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다만 저에게 왜 이렇게 해석하느냐고 따지지 마세요.

여러분의 생각에 이건 아니라고 생각이 들면 안 받으면 됩니다.

입맛에 안 맞다고 집에 불은 지르지 마세요.

왜냐하면!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해석이 절대 적인가?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 누구도 절대적 해석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각자 받은 은혜의 분량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다르게 해석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해석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해석이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은혜로 받아야 해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성경을 예수 이야기로 풀이 할 땐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 생각하고 받으시기 바랍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제가 합환채를 해석하는 것을 알레고리 라고 시비 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이야기로 풀 때는 알레고리가 될 수 없어요.

원래 알레고리는 성경 해석의 한 방법이었어요.

바울도 알레고리 해석을 했는데 예수이야기로 풀었어요.

 

그런데 후대에 인간들이 이걸 악용해서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으로 해석해서 사람을 추종하게 하거나 자기 조직을 따르게 하는 이단사설을 낳게 하였어요.

그래서 알레고리 라고 하면 본능적으로 틀린 해석이라고 반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쁜 알레고리란? 성경을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해요.

예수그리스도 이야기로 풀지 않고 세상 이야기로 푼다거나 개인 이야기로 푼다면 자기 조직이야기로 푼다고 하면 그건 성경을 주신 목적에 위배되기 때문에 나쁜 알레고리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신천지의 교주처럼 구름타고 오신 여호와가 자기라고 하면 나쁜 알레고리인 것입니다.

자기가 다른 보혜사라고 하면 나쁜 알레고리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은 보혜사라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에서 동방의 한 나라를 한국으로 풀면 알레고리에요.

왜냐하면! 성경은 한국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혜사가 예수님이다!

보혜사가 성령님이다! 라고 하면 시비 걸 이유가 없어요.

예수님이냐!

성령이냐!

따질 이유가 없어요.

어차피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예수님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를 만나고 이해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합환채를 예수그리스도 이야기로 풀어 보자는 것입니다.

성령 이야기로 풀어가 보자는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라고 합니다.

이는 바울의 이야기에요.

구약을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이에요.

그런데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율법은 장차 오는 일의 그림자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바울 자신도 구약의 모든 사건이나 인물이나 율법을 전부 그리스도로 해석을 했어요.

 

합환채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한다면 구약에 뭔가 씨눈처럼 있을 것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을 구약 속에선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으로 심어 두셨거든요.

그러므로 구약 속에 숨은 그림과 같은 그 씨눈을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 보자는 것입니다.

성령 이야기로 풀어 보자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합환채 이야기가 딱 한번 나와요.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요셉을 낳은 사건이에요.

 

창세기 30장으로 가 봅시다.

 

창 30:14-24절. “맥추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15.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니라 16.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23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본문은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요셉을 낳은 이야기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죽은 여인이 합환채를 먹고 야곱의 족보에 오른 언약의 자손을 낳았어요.

그러니 합환채는 그냥 아이를 낳게 하는 풀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를 언약의 자손인 성도들을 낳게 하는 성령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깊이 생각하고 읽으면서 잘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에게 두 아내가 있어요.

레아와 라헬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은 라헬이에요.

레아는 그 동네의 법도에 의해서 덤으로 주어진 여인입니다.

덤으로 주어졌다는 것은 종이란 뜻입니다.

 

야곱에게 있어 정실부인은 라헬인 것입니다.

정실부인이란? 법적으로 호적에 올라갈 진짜 부인이란 뜻입니다.

그럼 레아는 가짜 부인이 되는 것입니다.

일종의 첩인 것입니다.

 

호적(戶籍)이란? 생명책이에요.

가문대대로 이어져 가는 족보에요.

그러므로 조상의 계보를 있는 호적에는 정실부인의 자식만 올라가고 첩이나 종의 자식은 올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많은 아내를 통하여 낳은 자식들이 있었어요.

하갈로부터 그두라에게서 낳은 자식이 있었어요.

그러나 성경은 사라의 몸에서 난 이삭만 아들로 인정을 했어요.

이는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정실부인이기 때문입니다.

정실부인에게서 낳은 자식이 언약의 후손이에요.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사라와 하갈을 두 언약이라고 했어요.

 

갈 4:22-31절.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사라는 하늘 예루살렘이라고 하였고,

하갈은 시내 산(땅 예루살렘)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들에게서 난 자식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들과 종으로 말했어요.

 

사라가 낳은 이삭은 아들이고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은 종이에요.

하나님의 유업은 이삭만 받고 이스마엘은 쫓겨났어요.

그럼 사라와 같은 여자에게서 난 자만이 하늘 족보에 올라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자들 이야기는 전부 언약과 관계있는 이야기들입니다.

라헬과 레아도 두 언약에 관한 이야기에요.

라헬의 아들과 레아의 아들들도 아들과 종에 관한 이야기에요.

이게 신약으로 오면 두 교회 이야기와 두 부류의 신자 이야기로 풀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자를 교회로 표상하고 있어요.

최초에 여자가 생겨난 배경을 보면 여자가 왜 교회의 표상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여자가 생겨난 배경을 살펴봅시다.

 

창세기 2장을 봅시다.

 

창 2:21-25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하나님이 여섯째(금요일) 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었어요.

여자는 아담 안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자는 아담과 한 몸인 것입니다.

한 몸이었다가 잠시 떨어져 있다가 다시 합하게 되어요.

이걸 결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약에선 결혼이야기를 구원이야기로 말해요.

 

구원이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해요.

내가 본래 있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나왔어요.

그러므로 예수 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서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랑과 구원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나요?

그럼 주를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이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하지요.

이는 구원은 반드시 주를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가짜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받은 성도는 반드시 주를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나 구원 받았다고 자랑하지 말고 주를 사랑하세요.

그럼 주를 어떻게 사랑합니까?주님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면 사랑하겠는데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주를 사랑한단 말입니까?

 

주님은 이 세상에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그럼 어느 것이 진짜 교회입니까? 라는 질문이 생기겠지요.

예수님은 교회의 정의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건물이 아니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성도가 교회에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해 주신 것이라고 했지요.

바울은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했어요.

교회란 일차적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이라고 해요.

지체란 몸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그럼 이 땅에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모이는 모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 말이에요.

이게 교회에요.

 

이 사람들은 모두가 한 성령을 마셨어요.

한 성령을 마셨다는 것은 한 피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핏줄은 뭔가 끌어당겨요.

그러니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에요.

 

마태복음 25장에 양과 영소를 심판 하실 때 예수님께서 여기 지극히 작은 내 형제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어요.

양들은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섬기고 돌보고 사랑했어요.

여기서 지극히 작은 형제란 그 당시 복음 전도자들을 말해요.

양들은 그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복음을 보고서 주님의 사랑으로 보고 돌보고 섬겼어요.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대로 섬기고 베풀었어요.

 

한 성령을 마시고 한 피를 받은 성도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아요.

그래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첫 눈에 아! 저 여자는 내 뼈 중에 뼈이고 내 살 중에 살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고백을 한 것처럼 뭔가 끌림이 있어요.

한 몸은 본능적으로 서로 끌어당김이 있어요.

 

우리가 복음을 증거해 보면 이상하게 끌리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입만 열면 복음! 복음 하고!

십자가! 십자가 하고!

피! 피 하는데 이상하게 싫어요.

왠지 말하기 싫어요.

가까이 하기 싫어요.

말로는 분명히 복음은 맞는데 그 속에 생명의 흐름이 없어요.

이런 사람은 나에게 잘 해 주어도 이상하게 거부감이 생겨요.

그냥 싫어요.

 

반면에 처음 대하였는데도 왠지 낯설지 않고 끌리는 사람이 있어요.

왠지 그 사람하고는 말을 하고 싶어요.

관심이 들고 교제하고 싶어요.

사랑이 가요.

이건 한 성령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주께서 그렇게 간섭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끌리는 성도가 있고 끌리지 않는 성도가 있어요.

어떤 성도는 남과 같이 서먹 서먹하고 어떤 성도는 가족과 같이 편해요.

뭔가 정의 할 순 없지만 이상하게 분류가 되어요.

 

글이나 설교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글이나 설교를 보아도 문체가 화려하고 엄청난 비밀을 말하는 것 같아도 이상하게 생명의 기운이 감돌지 않고 냉랭한 것이 있어요.

뭔가 죽은 말씀처럼 느껴지고 거부감이 들어요.

설교가 성령의 은사로 뱉어낸 것인지 아니면 자기 지식으로 전하는 것인지 느껴져요.

 

성령의 은사로 쓰여진 어떤 글이나 설교는 화려하거나 달변이 아니더라도 이상하게 보거나 들으면 감동이 되고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동질감을 느껴요.

왠지 어디서 본 것 같고 낯설지가 않아요.

이게 예수 안에서 한 피 받은 한 형제라서 그런 것입니다.

이런 사람과 사귐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과는 흉허물이 없어요.

이상하게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도 나눌 수가 있어요.

마치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듯이 수치가 느껴지지 않아요.

이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갖는 사귐이에요.

 

아담과 하와는 예수님과 성도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와는 교회의 표상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를 알고 아담을 일컬어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어요.

여기서 오실 자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럼 아담이 겪은 일은 곧 예수님이 겪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여섯째 날 깊이 잠들게 하고 그 속에서 여자를 만들었지요.

성경은 잠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아담을 여섯째 날에 죽였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아담을 죽이고 그 죽음의 바탕에서 여자를 만든 것입니다.

 

여자는 아담의 죽음으로 나아진 자에요.

여자 속에는 아담의 죽음 즉 아담의 희생이 담겨져 있어요.

이걸 신약에서 예수님의 희생이라고 합니다.

 

그럼 아담의 이 사건을 그대로 예수님 사건으로 조명을 해 봅시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었어요.

금요일은 여섯 째 날이에요.

 

하나님은 여섯째 날인 금요일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옆구리에 창에 찔러 물과 피를 쏟으시고 죽이셨어요.

그리고 그 피 값으로 자기 백성들을 죽음에서 건져 내셨어요.

예수님의 피로 죄와 사망에서 건짐 받은 자들을 일컬어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졌어요.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야곱과 라헬 이야기로 풀어 봅시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을 하였어요.

그렇다면 야곱과 라헬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교회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언약의 후손이에요.

예수님도 언약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에요.

그럼 야곱은 예수님의 표상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야곱의 아내는 교회가 되는 것이에요.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니 잘 이해하세요.

 

야곱에게 두 아내가 있어요.

레아와 라헬이에요.

세상 적으로 보면 레아는 먼저 출생한 장녀(長女)이고, 라헬은 나중에 출생한 차녀(次女)에요.

 

장녀와 차녀를 영적인 이야기로 말합니다.

 

두 사람 다 야곱의 아내이지요.

야곱의 아내라는 입장에서 볼 때 우리 이야기일수가 있어요.

우리 개인이야기로 볼 수 있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신랑이고 우린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레아와 라헬을 우리 개인 이야기로 풀어봅니다.

 

레아와 라헬을 두 사람으로 보지 말고 내 속에 두 사람으로 보세요.

그럼 나 라는 사람도 두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레아와 같이 먼저 나온 옛 사람이 있고, 라헬과 같이 나중에 나온 새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구속사적으로 보면 레아와 라헬은 두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이에요.

레아는 아담 안에서 먼저 출생한 나의 옛 사람을 말하고,

라헬은 예수 안에서 거듭난 새 사람을 말해요.

레아는 육으로 난 자이고, 라헬은 성령으로 난 자의 표상이에요.

그럼 레아와 라헬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모형이 되겠지요.

 

옛 사람은 육(肉)을 말하고, 새 사람은 영(靈)을 말해요.

옛 사람은 종이고, 새 사람은 아들이에요.

옛 사람은 쫓겨나고, 새 사람은 유업을 받아요.

옛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 죽고 새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옛 사람은 갈수록 후패해져 가고 새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번엔 레아와 라헬을 교회이야기로 말해봅시다.

 

성경은 예수님과 교회 이야기를 남편과 아내로 이야기 하고 있으니 야곱과 두 아내를 예수님과 교회로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에베소서에서 예수님과 교회를 남편과 아내 이야기로 말했어요.

 

레아와 라헬은 야곱의 두 아내에요.

 

레아는 언니인데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내이고,

라헬은 동생으로 남편의 사랑받는 아내에요.

 

레아는 표면적인 이스라엘을 말하고,

라헬은 이면적인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표면적 이스라엘은 육적으로 난 자들이고,

이면적 이스라엘은 성령으로 난 자들이에요.

 

이스라엘은 교회에요.

그럼 두 여자는 두 교회를 말하고 있어요.

레아는 육으로 이어져온 구약 교회를 말하고,

라헬은 성령으로 생겨난 신약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언약적으로 보면 레아는 옛 언약에 속한 교회를 말하고, 라헬은 새 언약에 속한 교회를 말해요.

 

이 둘은 항상 싸워요.

그 자식들도 싸워요.

이건 영과 육의 싸움이에요.

육에 속한 자들이 영에 속한 자들을 핍박을 해요.

 

여기서 일어난 사건이 요셉의 죽음 사건이에요.

요셉이 형제들에게 죽임 당하는 사건이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나요.

지금은 영적 성도가 육적 성도에게 핍박 받는 구조로 나타나고 있어요.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어요.

라헬을 위하여 20년을 희생합니다.

야곱의 희생을 피 흘림이라고 생각합시다.

 

라헬은 야곱의 피 값으로 얻은 아내가 되지만, 레아는 피 값이 없는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라헬에겐 야곱의 피가 발라졌지만, 레아에겐 야곱의 피가 발라져 있지 않아요.

라헬은 야곱의 희생이라는 죽음으로 얻었지만, 레아는 희생이라는 죽음 없이 얻었어요.

왜냐하면!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서 20년을 희생하였지 레아를 위하여 희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을 예수님이라고 본다면 예수님은 피로 얻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피가 없는 교회는 사랑하지 않아요.

 

레아는 구약 교회라고 했지요.

구약 교회는 옛 언약에 속하였어요.

옛 언약은 율법 아래 있는 교회이므로 예수님의 피가 없어요.

그래서 구약 교회는 멸망당하는 것을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나타났어요.

 

예수님의 피는 새 언약 교회에만 있어요.

예수님은 새 언약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어요.

새 언약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졌어요.

그러므로 새 언약 교회가 예수님의 정실(貞實) 부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 교회라야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한 몸이고 그런 한 몸을 예수님은 사랑하세요.

마치 아담이 자기 몸에서 나온 하와를 사랑하였듯이 말이에요.

 

옛 언약 교회는 예수의 몸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짜에요.

새 언약 교회만이 진짜 교회에요.

옛 언약 교회는 혈과 육으로 낳아진 교회이고,

새 언약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성령으로 낳아진 교회에요.

옛 언약 교회는 인간들이 세우지만, 새 언약 교회는 성령이 세워요.

옛 언약 교회는 보이는 교회이지만, 새 언약 교회는 보이지 않아요.

 

교회 안에 또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울산목양교회 안에 진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라는 교회가 있어요.

육적 신자는 그냥 교인으로 등록하여 나오지만 성령으로 난 성도는 예수님 피로 나아와요.

이 둘은 이상하게 한 교회 안에서도 나누어져요.

이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를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핏 줄이 당기는 것처럼 한 성령 안에 있는 성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끌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지요.

끼리끼리 모여요.

성령으로 난 자와 육으로 난자는 물과 기름처럼 쫙 갈라져요.

 

제가 깜짝 깜짝 놀라는 것이 교회 안에서나 어떤 조직 안에서나 어쩌면 그렇게 끼리끼리 모이는지 몰라요.

자기들끼리 모이고 놀아요.

양은 양끼리 모이고 염소는 염소끼리 모여요.

 

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이고!

남을 헐뜯고 비판 잘하는 인간들은 비판 잘하는 인간들끼리 모이고!

싸우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싸우기 싫어하는 사람들 끼리 모여요.

 

서로 그렇게 죽이 척척 맞아가요.

금방 친해져요.

서로가 영(靈)이 같기 때문에 그래요.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기 때문에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갈 놈은 지옥에 갈 놈끼리 모여야 편하고,

천국에 갈 사람은 천국에 갈 사람끼리 모여야 편해요.

입으로 예수 믿는 자들은 말쟁이들끼리 모이고,

성령으로 난 자들은 서로 섬기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요.

 

육적으로 세움을 입은 목사에게는 육적 신자가 모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목사에게는 거듭난 성도가 모여요.

육적 신자는 육적 목사의 말을 듣고,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거듭난 목사의 말을 들어요.

 

이건 서로가 서로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양은 이리에게 잡아먹힘으로서 양으로 드러내고, 이리는 양을 죽임으로서 이리 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양을 이리에게 죽임 당하게 함으로서 이리를 드러나게 만드는 미끼로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다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드러나게 하는 미끼에요.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같이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죽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르다고 해서 싸울 필요는 없어요.

서로 본질을 알면 되니까요.

자기와 맞지 않으면 교제하지 않으면 되어요.

그냥 종용히 피하세요.

중요한 원리를 말했으니 잘 이해하세요.

 

다시 족보 이야기를 해봅시다.

 

야곱의 족보에 라헬의 자식이 올라간다고 했지요.

라헬은 새 언약 교회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새 언약으로 세워진 교회만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갈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만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야곱의 족보에 올라갈 자식은 라헬의 몸에서 나온 자라야 합니다.

그럼 라헬의 아들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것이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요셉을 낳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7장을 보면 야곱의 족보 이야기를 하면서 라헬이 낳은 자식인 요셉을 야곱의 약전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창 37:2-4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약전(略傳)이란? 계속하여 이어진 족보란 뜻이에요.

야곱의 인생을 요셉이 이어서 간다는 말이에요.

요셉이 야곱의 제 2기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얍복 강에서 죽고 이스라엘로 거듭났어요.

야곱의 거듭난 제 2의 인생인 이스라엘의 인생을 요셉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옛 사람이라고 한다면 요셉은 야곱의 새 사람이에요.

그래서 야곱과 요셉을 같은 인생유전으로 연결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다른 형제들보다 요셉을 더 깊이 사랑하였어요.

이는 요셉은 자기의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한 것과 같아요.

그래서 야곱은 라헬이 낳은 요셉을 다른 형제들보다 특별히 사랑을 한 것입니다.

 

특별히 사랑했다는 말은 야곱은 요셉만 자식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요셉에게만 왕자가 입는 색동옷인 채색 옷을 입혀 주었던 것입니다.

채색 옷이란? 무지개 빛깔 나는 옷이에요.

무지개는 언약을 상징해요.

그러므로 채색 옷은 언약의 옷인 것입니다.

 

이러면 요셉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어갈 언약의 자손이라는 뜻이 됩니다.

요셉이 입은 채색 옷은 영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성도에게 주신 의(義)에 옷을 말해요.

우린 예수님이 주신 의(義)에 옷을 입고 있어요.

언약의 옷을 입고 있어요.

 

의에 옷을 입은 사람의 특징이 뭔 줄 아세요.

형제들의 잘못을 고발하는 것이에요.

잘못을 고발한다는 것은 그들의 죄를 고발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왜 형제들에게 죽임 당하였는지 아세요.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잘못을 고발했어요.

그러니 형제들이 적개심이 드는 것입니다.

 

형제들 입장에선 요셉이 아버지의 편애(偏愛)를 받고 있는데다가 자기들의 잘못을 고발해서 아버지에게 혼이 나게 하니까 미운 것입니다.

그래서 죽인 것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리고 옷을 찢어 버렸다는 것은 죽인 것과 마찬가지에요.

 

이걸 신약의 교회 이야기로 이해해 봅시다.

라헬이 낳은 요셉은 새 언약으로 낳아진 성도와 같아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에요.

이렇게 되면 레아나 다른 종들의 소생들은 옛 언약으로 낳아진 교인과 같아요.

 

그럼 성령 안에서 새 언약으로 낳아진 성도는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을 고발해요.

율법 신앙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고발해요.

마치 제가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서 성화주의와 개혁주의 신앙은 율법신앙이라고 고발하는 것과 같아요.

이건 마치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고발하는 것과 같아요.

 

여기서 분명하게 집고 넘어 갈 것이 있어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했어요.

더하거나 빼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어요.

그럼 인간의 행함을 의로운 것이라고 가르치는 성화주의도 예수의 피에 인간의 의(義)를 더하는 것이므로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성도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부정하는 것도 빼는 것이므로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엄청 중요한 이야기를 했으니 귀 담아 두세요.

 

성경을 가감(加減)하지 마세요.

사람의 말을 듣지 마시고 성경을 보세요.

제 이야기라고 무조건 듣지 마시고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서 과연 그러한가 상고해 보세요.

누구의 말도 성경 이상일 순 없어요.

 

우린 성경으로 해석을 당할 자이지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자들이 아니에요.

이는 우리의 논리가 성경을 앞설 순 없다는 말이에요.

그럼에도 사람들이 자기 논리로 성경을 해석하고자 해요.

자기 지식으로 바울은 논하고 예수를 논해요.

 

자기가 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하면 성경은 그 사람에겐 참고서가 되어요.

성경은 교과서이지 참고서가 아니에요.

그러니 그 누구라도 성경 위에 자기 논리를 두는 자들을 경계하세요.

그건 자기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고 지적유희를 즐기는 것이지 복음 증거가 아니에요.

자기가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자기 행동을 합리화 시키게 되어요.

 

열매로 나무를 구별하세요.

 

성도에겐 분명히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야 할 삶이 있어요.

바울은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어요.

구습이 뭡니까?

옛 사람이 즐겨하는 것들이에요.

이는 사람을 죽이는 각종 더러운 행위들이에요.

 

바울은 이걸 예전에 예수 밖에 있을 때 하던 것으로 족했으니 이젠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새 사람으로서 성령이 인도하는 삶이 있어요.

이름하여 성령의 열매들이에요.

이건 의를 만드는 삶이 아니고 의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제가 이러한 것을 강조하지 못하는 것은 이건 정형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나탄 날수도 잇고 안 나타날 수도 있어요.

그러니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법으로 가지고 있으면 안 되어요.

그럼 그것이 의에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의에 기준은 예수님의 피이지 인간의 행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린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다는 사실만 복음이기 때문에 강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건 성령이 성도 안에서 맺게 하실 열매들이기 때문이에요.

이건 간섭해서 될 일이 아니에요.

그 안에 성령이 알아서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신 성도는 각양의 성령에 열매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 봅시다.

 

골 3:1-14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땅에 지체를 죽이라고 합니다.

땅에 지체가 뭔고 하니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분과 악의와 훼방과 부끄러운 말과 같이 사람을 해치는 것들이에요.

이런 것은 모두가 죄가 주는 것들이에요.

 

이런 것은 예전에 예수를 모를 때 하던 것들이니 이젠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짓을 안 한다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것들을 멀리하고자 하는 성향이 그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싸워서 이긴다는 것이 아니고 이건 우리가 싸워서 이길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요.

우리 몸은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이런 삶을 온전히 살아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도 안에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희가 구원을 받았으면 새사람답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을 입으라고 하잖아요.

누가 잘못한 것이 있거든 너도 용서받은 자이니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옷이란 행실이에요.

나타나게 된다는 말이에요.

이걸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했어요.

 

이건 온전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삶에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가치관을 말해요.

 

죄인은 이런 말씀대로 살아낼 수가 없는 몸을 가지고 있어요.

소 귀에 경 읽기에요.

그러나 이런 말씀 앞에서 왜 우린 이런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없는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 속에는 인간의 그릇된 삶을 지적하는 요소들이 담겨져 있어요.

복음이 은혜로 드러나기 위해서 복음은 반드시 죄를 지적하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복음을 잘못 이해하는 자들은 이걸 지적하면 발끈하고 화를 내요.

 

죄인이 죄짓고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라고 하면서 따져요.

그럼 전 그럽니다.

당신 안에 주님이 안 계십니까?

당신 안에 계신 주님이 너 마음대로 죄짓고 살라곤 하지 않을 것이잖아요.

그러니 어떻게 내 마음대로 살거야! 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고 한다면 절대로 그럴 순 없어요.

 

다시 족보 이야기를 해 봅시다.

 

예수님의 족보엔 누가 올라가는가 하면 언약의 후손들이 올라가요.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족보란 말입니다.

거기에 올라간 사람들은 모두가 언약의 후손들이에요.

어떤 언약인가 하면 새 언약의 맥을 따라서 낳아진 자들이에요.

 

예수님의 족보에는 새 언약으로 낳아진 성도만 올라가요.

옛 언약으로 낳아진 자는 올라가지 못해요.

이건 마치 야곱의 족보에 라헬이 낳은 요셉만 올라가고 레아나 종들이 낳은 자식은 올라가지 않은 것과 같은 거예요.

그럼 야곱의 족보에 올라갈 자식을 라헬이 어떻게 생산을 하는지 봅시다.

 

요셉이 어떻게 낳아졌는지 살펴봅시다.

 

레아와 라헬은 자식 낳기 경쟁을 했어요.

야곱이 낳은 자식들은 모두가 레아와 라헬이 싸워서 낳은 자식들이에요.

그래서 자식들의 이름도 다 투쟁의 흔적들을 담고 있어요.

자식은 신약에서 성도의 모형이에요.

 

이제 두 여인의 자식 낳기 싸움을 살펴봅시다.

두 여인은 두 교회를 상징한다고 했으니 먼저 교회로 살펴봅시다.

레아는 육적 교회를 상징하고 라헬은 영적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럼 육적 교회와 영적 교회의 성도들이 어떻게 생산이 되는지 살펴봅시다.

 

여자에게 자식은 생명과 같아요.

레아는 야곱과 자기만 하면 아이를 순풍순풍 생산합니다.

그러나 라헬은 아무리 하여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라헬이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이건 옛 언약으로 세워진 육적 교회는 교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새 언약으로 세워진 교회는 성도들이 없는 것과 같아요.

율법으로 목회를 하면 교회가 금방 부흥이 되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겨 주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행함을 신앙으로 인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성화주의 교회들이 금방 부흥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피를 증거하면 안 와요.

찾는 이가 없어요.

새 언약으로 목회하는 목사들을 라헬처럼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이니 잘 이해하세요.

 

암튼 라헬은 아들을 낳지 못하자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합환채를 먹고 아들을 덜렁 낳은 것입니다.

그 아들이 바로 온 세상을 기근으로부터 구할 요셉이에요

 

그럼 합환채 사건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창 30:14-24절. “맥추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15.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니라 16.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23.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시절은 어느 덧 맥추 때입니다.

맥추 때란 봄 농사 절기에요.

신약으로 말하면 오순절이에요.

 

레아의 소생인 르우벤이 들에 나아갔다가 합환채를 뜯어 온 것입니다.

그걸 자기 어미인 레아에게 주었어요.

합환채란 임신 촉진제에요.

이걸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르우벤이 자기 엄마에게 자기 형제를 더 많이 낳아 달라고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라헬이 보았어요.

라헬의 눈에 합환채가 확 띠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아에게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빼앗아 갔으면 되었지 이젠 합환채까지 빼앗아 가려고 하느냐고 신경질을 내면서 못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라헬이 그럼 오늘 밤에 야곱을 언니에게 줄 테니 합환채를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야곱과 합환채를 바꾼 것입니다.

그러자 레아가 화색이 만연하면서 그럼 그러자고 하면서 바꿔버립니다.

레아의 생각은 합환채를 먹지 않아도 아들을 순풍 순풍 잘 낳으니 자기는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을 준다고 하니 얼른 바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라헬은 신랑을 합환채와 바꾼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야곱을 주고 대신 합환채를 받았으니까요.

라헬이 신랑을 주었다는 것은 신랑이 없는 것과 같아요.

즉 신랑이 죽은 것입니다.

이게 무척 중요해요.

이건 예수님이 죽고 성령으로 오시는 것과 같아요.

중요하니 다시 설명합니다.

 

라헬은 합환채로 아들을 낳았지요.

그럼 합환채는 신랑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합환채가 아들을 낳게 해 주었으니까요.

 

그럼 야곱과 합환채는 라헬에게 두 신랑이 되지요.

야곱은 아들을 낳지 못한 신랑이고,

합환채는 아들을 낳게 한 신랑과 같지요.

 

이러면 라헬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야곱이라는 신랑을 합환채로 바꾸었으니 야곱이라는 신랑은 죽고 합환채란 신랑을 새로 맞이한 것이 되겠지요.

이걸 편의상 야곱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예수님이라고 하고, 합환채는 부활 후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봅시다.

 

성도가 거듭나는 것을 라헬이 아들을 낳는 것으로 비유하면 십자가 지시기 전에 예수님은 성도를 거듭나게 해 줍니까?

못해줍니까?

못해주지요.

그럼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님은 야곱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라헬과 그렇게 많이 잤는데도 아들을 낳지 못한 것입니다.

 

성도가 거듭나는 것은 성령이 오셔서 거듭나게 해주세요.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들을 낳는 것과 같으니 성령이 성도를 거듭나게 해 주시는 것이니까 성령이 신랑이 되는 것입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은 것은 합환채를 먹고 나았잖아요.

 

그럼 합환채는 누굴 상징합니까?

성령을 상징하지요.

그렇잖아요.

 

야! 설명하는 게 왜? 이러 살얼음판 걷는 것과 같은지 모르겠네요.

잘 이해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딴 소리해요.

 

다시 설명합니다.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아들을 낳았잖아요.

이렇게 되면 라헬이 낳은 요셉은 야곱이 낳은 자식이 아니고 합환채가 낳은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라헬은 수차례 야곱과 잠자리를 같이 했어요.

그런데도 자식을 낳지 못했어요.

 

그런데 합환채를 먹고선 덜커덩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그러니 라헬이 낳은 요셉은 합환채가 낳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하다가 여호와의 천사가 찾아오고 난 후 이삭을 낳은 것과 같아요.

 

이삭을 일컬어 약속의 지손이라고 하잖아요.

그럼 요셉도 약속의 자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언약의 후손인 야곱의 족보에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문헌엔 여호와의 사자가 사라를 찾아와서 아들을 주겠다고 한 그 때가 맥추 때라고 하는 말도 있어요.

그냥 유추하는 것이겠지만 일면 일리는 있다고 보여져요.

 

그럼 신약에서 언약의 후손이 어떻게 나아지는지 보고 그걸 구약으로 역(逆)으로 추적하면 합환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있어지겠지요.

그럼 신약에서 언약의 후손이 어떻게 낳아집니까?

성령으로 거듭나지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라야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잖아요.

그럼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언약의 후손이에요.

 

이걸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 야곱 사건에서 찾아보세요.

그럼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언약의 후손을 낳았으니 그 합환채는 신약적인 의미에선 성령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언약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합환채는 성령을 상징하고 있음이 되겠지요.

이건 알레고리도 아니고 억지 해석이 아니에요,

 

그럼 더 확실하게 살펴봅시다.

합환채를 얻은 때가 맥추 때라고 했지요.

맥추 때는 신약에서 오순절이라고 했어요.

그럼 신약의 오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성령이 강림한 날이지요.

 

사도행전 2장을 가 봅시다.

 

행 2:1-4절.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성령이 강림을 하지요.

이는 성령이 오순절 날에 임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아무 때나 오지 않고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시기로 작정이 되어 있었어요.

이건 모두가 구약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오순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 부활하고 50일째 되는 날이에요.

이 날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고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던 날이기도 해요.

구약에선 율법을 받고 3000명이 죽었어요.

그런데 신약에선 성령이 임하고 난 후 3000명이 살아났어요.

이건 옛 언약으로 죽은 자를 예수님이 오셔서 새 언약으로 살려 낸다는 의미에요.

 

그러니 오순절은 새 생명이 살아나는 날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거듭난 날이에요.

제자들도 이 때 거듭났어요.

예수님이 계실 땐 약속만 받았어요.

오순절 날 성령이 오시고 나서야 그 약속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12제자들을 성령을 받기 전과 받고 난 후를 살펴보세요.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

성령받기 전에는 죽음에 벌벌 떨었는데 성령 받고 난 후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이는 성령이 죄와 사망을 이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였기 때문이에요.

12제자들은 오순절 날 즉 맥추 때에 성령이라는 합환채를 먹고 거듭난 것입니다.

 

이렇게 거듭난 성도가 언약의 후손인 것입니다.

그러니 라헬이 맥추 때에 합환채를 먹고 낳은 요셉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라헬은 새 언약 교회라고 했지요.

그럼 새 언약에 속한 교회라야 성도들을 거듭나게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 언약 교회만 사랑하고 거기에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을 하세요.

예수님의 피가 증거되는 교회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성도가 생긴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합환채가 광야에 있다고 하지요.

 

그럼 솔로몬이 술람미를 광야로 데리고 나가는 이유를 알겠지요.

거기서 합환채를 먹이기 위함입니다.

합환채 속에 생명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에게만 주고 싶은 것입니다.

예루살렘 궁궐에 있는 수많은 여자들에게는 감추어 버리고 오직 술람미에게만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술람미가 솔로몬의 정실 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야! 들로 나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 가면 당신이 먹어야 할 합환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묵시의 세계라고 했어요.

묵시의 세계는 곧 언약의 세계에요.

묵시의 세계이기 때문에 광야에만 성령으로 상징하는 합환채가 있는 것입니다.

합환채를 먹어야 언약의 자손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의 후손들이 먹어야 할 음식이 광야에 있어요.

그게 바로 옛 것과 새 것인 실과들인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어려운 공부를 해 봅시다.

 

묵은 실과와 새 실과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13절.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 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실과란? 양식이에요.

양식은 말씀이에요.

그런데 묵은 실과와 새 실과가 있다고 하지요.

 

묵은 실과와 새 실과란 합환채를 먹고 거듭난 성도가 먹어야 할 양식입니다.

즉 하나님 말씀이란 말입니다.

 

그럼 옛 말씀과 새 말씀이 있다는 뜻이 되겠지요.

옛 말씀은 옛 언약에서 나온 말씀을 말하고,

새 말씀은 새 언약에서 나온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들을 곡간에서 옛 것과 새 것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자라고 하였어요.

 

마 13:5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옛 것이란 옛 언약을 말하고, 새 것이란 새 언약을 말합니다.

옛 언약은 법이고. 새 언약은 은혜에요.

법과 은혜는 항상 한 셋트로 움직여요.

법이 있는 곳에 은혜가 있고, 은혜가 있는 곳에 법이 있어요.

이는 광야에 묵은 실과와 새 실과가 같이 있는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는 율법을 통하여서 은혜를 더욱 더 은혜 됨을 알아가고 은혜를 통하여서 법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법 없는 은혜는 없어요.

새 언약을 오해하는 분들은 율법이 필요 없는 줄 알아요.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용서 되었으니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막 살라고 한 적이 없어요.

사도들이 어디에 막 살라고 했나요.

그건 사람의 말이에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절대로 막 살아지지가 않아요.

아니 막 살지를 못해요.

성령이 그렇게 막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아요.

막 살아진다면 그 사람은 성령이 없는 가짜 신자에요.

 

막 산다는 것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자기 욕망대로 살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준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자기 죄 씻어주는 면죄부가 되고 말아요.

이러면 자기를 위한 구원이 되어요.

하지만 우리를 구원한 것은 예수님을 위한 구원이지 우리를 위한 구원은 없어요.

 

거듭난 성도에게 옛 것인 율법은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알다시피 율법은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두고자 합니다.

율법으로 죄가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옛 실과와 새 실과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오로지 십자가 밖에 몰랐어요.

그런데 그들이 신약의 서신서를 썼어요.

 

사도들이 쓴 서신서를 보면 전부 “하라” “하지 말라” 는 식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명령을 하였어요.

서신서를 구약에 같다 부치면 여지없이 율법이 되어요.

문자적으로 보면 구약의 율법과 동일해요.

굉장히 중요한 말이니 잘 들으세요.

 

신약의 성경이 언제 주어졌나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에 써졌지요.

그럼 신약의 서신서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뱉어낸 말들이 되겠지요.

그렇잖아요.

성령이 십자가 이후에 오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였으니까요.

 

그럼 사도들이 서신서는 누구에게 주었습니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지요.

그렇다면 서신서는 구원과 상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서신서를 안 지킨다고 해서 구원에서 잘려나가지 않는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받은 구원은 말씀을 지킴과 상관없이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구약의 아브라함 후손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과 똑 같아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났어요.

아브라함 언약으로 구원을 받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었어요.

마치 신약의 구원받은 성도에게 서신서들을 준 것과 같아요.

그러니 구약의 율법이나 신약의 서신서는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왜 율법을 주었고 왜 서신서를 주셨을까요?

이는 이를 통하여서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건 인간의 죄를 고발하기 위함이에요.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자 함이에요.

 

제가 늘 하나님 말씀을 다이렉트로 받지 말라고 했어요.

이걸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신 율법을 가지고 말씀드렸어요.

중요하니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살펴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까?

은혜로 구원 받았지요.

 

아브라함이 선택 받을 때 율법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아브라함의 구원은 율법 지킴과 상관이 있나요? 없나요?

없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고 지옥가지 않아요.

실제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것보다 불순종한 것이 훨씬 많았어요.

그럼에도 믿음에 조상이라는 신분은 취소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아브라함에게 구원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다 동일해요.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이라고 했으니 믿음을 받은 성도도 동일해요.

성도는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와 상관없이 구원은 확정적이에요.

구원은 이미 완료되었어요.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구요.

 

만약에 자기 행함으로 인하여 불안해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사랑을 받은 성도는 절대로 불안해하지 않아요.

두렵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후손도 마찬가지에요.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두려워한다면 그는 언약의 자손이 아니에요.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율법 속에 제사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율법대로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제사를 지내라고 제사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어겼으면 제사를 지내면 되어요.

아!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인인데 이런 죄인이 살 수 있는 것은 나 대신 죽어준 희생 제물 때문이구나! 를 알고 감사하여야 해요.

 

이걸 깨닫게 하려고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라는 제사를 지내라고 한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번제를 지내라는 말은 하루 종일 죄만 짓는다는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죄 지을 줄을 훤히 아시고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내라고 하신 것이잖아요.

 

그럼 죄를 누가 고발해 줍니까?

구약엔 율법이고 신약에서는 서신서에요.

그럼 우리는 묵은 실과인 율법이든 새 실과인 서신서를 통해서 우리 죄를 고발당하여야 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이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셨구나! 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든 서신서이든 너희 죄는 희생제물이 대신 담당 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이에요.

이 희생 제물은 곧 예수님을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제사의 실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고 피에요.

그럼 우린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죄를 깨닫고 내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 했구나 를 알면 되어요.

 

이걸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담당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내가 말씀대로 살지 못할 것을 미리 아시고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하나님께 화목제물로 드렸잖아요.

 

그럼 설령 육신적으로 범죄하였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라고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오시면 됩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성령이 그렇게 인도하세요.

 

율법은 아브라함이 죽고 난 후 430년 후에 주어졌어요.

아브라함 후손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율법을 받았어요.

아브라함 후손이란? 아브라함과 한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누구하고 한 약속입니까?

아브라함하고 했어요.

 

그래서 출애굽 할 때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서 죽음에서 살려 주었잖아요.

이스라엘과 애굽의 차이가 뭡니까?

어린 양의 피가 있느냐 없느냐로 나누어지지요.

죽음에 천사가 애굽을 심판 할 때 비록 애굽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지면 죽음이 넘어갔고, 아무리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여도 어린 양의 피가 없으면 죽었어요.

죽음에 천사는 사람을 보고 심판하지 않고 피가 있느냐! 없느냐! 로 심판을 했어요.

 

출애굽한 사람들은 몽땅 이린 양의 피를 뒤집어쓰고 나왔어요.

피 안에 있는 거에요.

그런데 시내 산에서 피 안에 있는 자들에게 율법이 떨어집니다.

애굽 사람에게 주지 않고 어린 양의 피로 나온 자들에게 주어졌어요.

이게 중요해요.

 

율법이 뭡니까?

전부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법들이지요.

마치 신약의 서신서와 같지요.

율법이나 서신서나 같아요.

 

신약의 서신서도 십자가 이후에 주어졌지요.

이건 마치 홍해바다를 건너고 온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과 같아요.

새 언약 안에서 주어졌다는 것은 지키고 안 지키고와 상관없이 구원은 취소되지 않아요.

그러니 서신서대로 살지 못하였다고 해서 짤려 나가진 않는단 말입니다.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요.

 

다시 말합니다.

반복이지만 중요하니 또 합니다.

 

신약의 서신서들도 전부 하라! 하지 말라! 에요.

그러니 구약의 율법이나 신약의 서신서나 그 의미는 동일해요.

신약의 서신서도 율법적 기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은혜를 드러내려고 주어진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 서신서를 보든지 율법을 보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보아야 해요.

 

그럼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며 율법은 옛 실과이고 서신서는 새 실과가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율법을 주었습니까?

어린 양의 피로 나온 자들에게 줬지요.

어린 양의 피로 나왔다는 말은 구원 받은 자란 말입니다.

 

그럼 율법은 구원과 상관이 있나요? 없나요?

당연히 없지요.

그럼 율법은 지킴에 목적이 있지 않다는 뜻이 되지요.

너희들 율법 안 지키면 죽인다.

그런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율법을 왜 주었나요?

이는 죄를 깨닫게 하려고 주었어요.

왜 죄를 깨닫게 합니까?

이는 은혜를 드러내게 하기 위함이에요.

 

신 구약 모든 말씀을 대할 때마다 얼마나 감사하겠어요.

야! 내가 이런 엄청난 은혜를 입었구나!

감사가 절로 나오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율법을 보면서 죄를 깨닫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 안에 있다고 하여도 율법은 없으면 안 되는 거에요.

지켜서 의로워지라는 것이 아니고 의가 어떻게 주어졌는지 알기 위해서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서신서를 통해서 죄를 깨달아야 해요.

서신서의 명령들을 통해서 왜 내가 죄인인줄 알아야 해요.

죄를 알게 하려고 우리 본성과 반하는 명령들을 한 겁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려고 우리의 본성과 반대되는 것으로 하라! 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지키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왜 우린 안 되고 예수님이 죽으셨는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에요.

그러니 우린 말씀 앞에 서면 우리 가능성이 죄라고 고발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왜 발생 할 수밖에 없는지를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왜 내가 너희들 죄를 예수에게 대신 담당 시켜서 구원을 해 주었는지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린 말씀 앞에서 왜 인간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는지를 알아야 해요.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복음으로 드러나요.

성도는 서신서나 율법을 통해서 자기 죄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지는지 안 되는지를 알기 위해서 말씀대로 살아보라는 거예요.

살아보지도 않고 안 돼!

그건 지식이에요.

그러면 은혜를 몰라요.

 

은혜가 은혜 되려면 법이 반드시 정죄해 주어야 해요.

법이 강하면 강할수록 은혜는 더욱 더 드러나게 되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그래서 들에 나오니 율법이라는 옛 실과와 서신서라는 새 실과가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 나오니 율법과 서신서가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 나왔다는 말은 구원받았다는 말이에요.

구원받고 나니 율법을 주고 서신서를 준 것과 같아요.

그럼 합환채를 먹고 거듭난 성도는 율법이나 서신서나 그 모든 성경을 먹어야 해요.

먹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죄사함은 이론으로만 알면 안 되어요.

그럼 말쟁이가 되어요.

이론으로 알면 감사함이 없어요.

감사하는 척 하지 말고 감사가 나와야 해요.

 

사랑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사귐이에요.

성경 속에 나타난 사랑이야기도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 먹고 배부름을 얻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가 아무리 사랑하면 무얼 합니까?

그게 내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남의 사랑이야기라고 한다면 백번 성경을 보아도 소용없어요.

그림의 떡과 같아요.

남들이 사랑하는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내게 낯선 이야기일 뿐이에요.

 

성령은 이런 성경 속에 사랑이야기를 내 것으로 믿어지게 만들어 주어요.

성령이 개입하면 나와 예수님의 사랑이야기로 들려진단 말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가 예수님과 나의 사랑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스킨십입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오감(五感)을 통해서 느끼는 것입니다.

 

사랑은 눈과 눈의 마주침이고!

손과 손의 맞 다음이고!

몸과 몸의 대화이고!

숨과 숨의 교환인 것입니다.

 

사랑은 살아서 움직이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산 사람들만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추억하는 것이지만 사랑은 산 사람과는 희노애락을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는 생명의 교류이고 교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도 희노애락의 감정이 삶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은혜와 감사와 용서와 섬김과 봉사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합니다.

 

행함은 하나님께 받은 것을 되 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것이 있어요.

 

사랑도 주었고!

은혜도 주었고!

용서도 주었어요.

 

우린 주신 것을 반사(反射)하면 되어요.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잘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반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고!

사랑을 받았으면 사랑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고!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걸 영광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구원을 받았나요?

죄에서 건짐 받았잖아요.

그럼 죄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여야 해요.

 

새 언약 안에서 성경을 쓴 사도들이나 바울은 예수 안 믿는 것만 죄라고 하지 않았어요.

육신적으로 방탕하고 방임하는 것도 악이라고 하고 죄라고 하였어요.

그러므로 성도라고 한다면 자기 육신을 쳐서 복종하는 싸움을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다 용서 했으니 내 마음대로 살거야! 라는 것은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에요.

그건 복음을 자기 사욕을 위하여 도적질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지 당당해 지면 안 되어요.

그래 어쩔래! 나 죄인이다!

그럼 안 된단 말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죽었는데 그 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인간들이 어떻게 자기 정욕대로 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제 신앙관으로는 이런 구원은 없다고 생각해요.

 

바울이 심심해서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한 줄 아세요.

복음을 몰라서 모이기를 힘쓰라고 한 줄 아세요.

할 일이 없어서 서로 용서하고 참아주고 사랑하라고 한 줄 아세요.

 

그만큼 죄가 우리 몸을 볼모로 역사해서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몸을 우리 뜻대로 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소리치고 싸운 것입니다.

이 싸움을 게을리 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말씀대로 온전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살면서 왜 하나님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는지 깨달아야 해요.

그리고 그럼에도 용서 해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여야 해요.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더 깊이 깊이 알아야 하기 때문에 늘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발가벗긴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완전히 난도질당하여야 해요.

그리하여 그럼에도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그 감격이 삶으로 물결처럼 흘러넘쳐야 해요.

하루 하루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찬송하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야! 예수님의 피가 아니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예수님의 죽으심이 고맙고 감사함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합환채를 먹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삶에 모습들인 것입니다.

 

술람미가 옛 것과 새 실과들을 먹으면서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상상해 보세요.

그 기쁨과 희열을 느껴보세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느껴보세요.

맛을 보세요.

예수님과 사귐을 가지세요.

예수 믿는 것이 맛이 있어야 해요.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스님이 시주하러 와도 그냥 씨익 웃고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해요.

나 예수 믿는데요! 하면서 쪽박을 깨지 마세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심령들이 가난 합니까!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 양식이 아니고 지식이기 때문에 심령이 패역해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 받은 자답게 좀 넉넉함이 묻어나와야지요.

 

사랑받아 보세요.

넉넉해집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사랑 받는 여자들을 보세요.

 

목소리가 통통 튀고 눈이 초롱초롱하고 얼굴에 윤기가 나고 생글생글하잖아요.

은혜 받아 보세요.

이렇게 되어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지 못하니 가슴이 냉골이고 비판적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마세요.

사람을 의식하지 마세요.

제발 성경이 무어라 하는지 상고해 보세요.

 

하나님 앞에 솔직하세요.

사랑이 없으면 없다고 하시고!

주님께 구하세요.

주여 종에 마음이 너무 싸늘합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세요.

 

부디 광야에 나가 합환채를 먹고 거듭난 자가 되어서 옛 것과 새 것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강건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합환채를 먹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옛 것과 새 것을 마음 대로 사용하면서 주께 받은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관대하며 살아가는 여유로움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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