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아가서 강해

♣(성경강해)22강. 마하나임의 춤 (아가 6:10-14)

by coroa 2022. 2. 25.

하늘빛사랑 https://blog.daum.net/day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2강. 마하나임의 춤 (아가 6:10-14)

-.정낙원 목사

 

아 6:10-14절.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11.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12.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14.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술로몬이 술람미를 모든 여자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러자 술람미가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이를 마하나님의 춤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마하나임의 춤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모든 여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한 것은 술람미에게 어떤 아름다움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솔로몬의 일방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어요.

나는 미워 할 자는 미워하고,

사랑 할 자는 사랑한다고 합니다.

 

이걸 토기장이 비유로 말했습니다.

토기장이가 자기 필요에 의해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모세는 긍휼을 담는 그릇으로 만들었고,

바로는 진노를 담는 그릇으로 만들었어요.

 

토기가 왜 난 이렇게 만들었느냐 라고 따질 순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없던 자였으니까요.

존재 한다는 것 자체가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진노의 그릇들은 이걸 몰라요.

자기존재로부터 이해하니까 토기장이가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에요.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역사 속에서 풀어 가는데 있어서 두 부류의 인간이 필요해요.

이건 마치 드라마를 찍는데 주인공과 그 반대편에 있는 악역을 할 사람이 필요한 것과 같아요.

감독은 이 둘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풀어가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그래요.

창세전 언약 안에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와 녹명되지 않은 자가 있어요.

이를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분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녹명 되지 않은 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아요.

그리스도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하나님이 믿게 해서 믿는 것이고,

예수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이 믿지 못하게 하여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인 것입니다.

 

애초부터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자와 미움 받는 자 두 부류로 태어납니다.

두 부류로 창조를 한 것은 예수님이 만유의 주(主)가 되는 일에 필요하여서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심판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사랑 받는 자와 미움 받는 자로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너희와 저희 두 부류의 사람들로 갈라지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으로 갈라짐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건 마치 창조와 같이 참 빛이 천지 속으로 들어옴으로서 빛과 어둠이 갈라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걸 심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받기로 작정이 된 자들을 구원합니다.

이것을 창세전 언약에 의한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심이라고 합니다.

 

예정이란? 미리 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롬 8:29-30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이를 영화롭게 한다고 합니다.

 

미리 아심은 창세전이고,

부르심은 역사 안에서이고,

영화로움은 재림 이후입니다.

 

미리아심과 부르심과 영화로움은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이라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도 3 시제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구원을 받았다,

현재에 구원을 이루라,

장차 구원을 이룰 것이다,

 

이러한 구원이 우리의 원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로 다가와요.

구원이 은혜로 다가온다 함은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방식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죄당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에요.

죄인은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랑이란 자기 비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에요.

그래서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라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죽음으로 주어졌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롬 8:33-39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구원이 우리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조건에 의하여 구원이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걸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으로 보여주고 있어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과 같아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가 없으니까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술람미의 사랑은 솔로몬이 지켜주세요.

술람미는 솔로몬의 지켜주심으로 인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죄인은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죄인은 자기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사랑을 받고자 하지 사랑하고자 하지 않아요.

인간들이 사랑한다는 말 속에는 ‘난 사랑 받고 싶어요’가 담겨져 있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해 줄께요’가 없어요.

 

죄인이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이 아무리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여도 그건 소귀에 경 읽기에요.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안 되어요.

 

마음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싶어요.

그러나 내 몸뚱이가 그렇게 하지 않아요.

내 몸뚱이는 먼저 내가 살고 남을 돌아보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역설적으로 너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어쭙잖게 이웃을 사랑한다고 덤비지 마세요.

 

하나님 명령이라고 해서 무작정 지키겠다고 덤비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에게서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런 사랑은 나오지 않아요.

설령 한다 하여도 자기 의를 축척하기 위한 것이에요.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사랑은 하나님만이 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만이 자신을 버려서 자기 백성을 살리는 일을 하실 수가 있어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보냈어요.

여기서 세상이란? 자기 백성을 말해요.

 

중요한 것은 “이처럼”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이란? 놋 뱀을 장대에 달아서 불 뱀에 물린 자들을 살려내는 사건을 말해요.

불 뱀은 마귀의 상징입니다.

 

마귀에게 물린 자는 죄인을 말해요.

자기 백성이 마귀에게 물려서 죽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장대에 놋 뱀을 달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놋 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 놋 뱀처럼 달리겠다고 합니다.

이건 십자가에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여서 자기백성을 살려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아들을 죽여서 죄인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은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남을 이용하는 자이지 남을 위해 희생하는 자가 아니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앞에 인간의 사랑은 거짓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절망해야 해요.

하나님 말씀을 지키겠다고 설치는 자는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우리의 사랑이 거짓이고 위선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어요.

 

우린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면 죄인임이 드러나요.

베드로처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이사야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주님을 바로 만난 사람은 이러한 고백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수로보니게 여인의 고백처럼 자신은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사는 개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이럴 때 죄인이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개라는 것을 알면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져요.

 

과거에는 내가 하나님께 뭘 갖다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줄 알았어요.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보니 하나님이 주는 것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 된다는 것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영생도 받고!

은혜도 받고!

죄사함도 받고!

사랑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셨어요.

이는 우리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피 흘리심으로 죄사함을 받았어요.

 

우린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어요.

우리가 죄를 씻으려고 하면 안 되어요.

죄는 우리가 씻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씻겨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깨끗하게 씻겨 주시도록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가만히 있으려면 자기가 죽은 자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해요.

살았다고 생각하면 가만있지를 못해요.

자꾸만 바둥거린단 말입니다.

자기 주체가 살았기 때문에 자꾸만 자기가 뭔가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죄라고 해요.

 

죄란? 하나님이 주는 것을 안 받는 것입니다.

자기의 착함으로 의로워지겠다고 하는 거에요.

자기 의로 구원을 따내겠다는 것입니다.

 

구원도 자기가 따 내고!

축복도 자기가 따 내고!

은혜도 가지가 따 내고!

사랑도 자기가 따 내고!

믿음도 자기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도, 믿음도, 은혜도, 축복도, 사랑도 다 하나님이 거저 주는 것이에요.

우리 노력과 상관없이 공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기 노력으로 얻어 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과 떨어져 있어서 그래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과 떨어져 있으니 자기가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자기가 만들어 내려고 하고!

구원도 자기가 지켜내려고 하고!

은혜도 받아 내려고 하고!사랑도 받아 내려고 하고!

축복도 받아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 초림 때는 바리새인으로 나타났고 이 시대는 인본주의 성화주의로 나타나고 있어요.

 

인간들의 의는 꼭 아이들이 설거지 하는 것과 같아요.

그릇이 물에 젖었을 땐 깨끗하게 씻긴 것 같지만 물기가 말라 보세요.

하나도 씻기지 않고 그냥 구정물에 풍덩 담갔다 건져냈다는 것이 드러나요.

 

아이들에게 방을 닦으라고 해 보세요.

걸레 하나로 온 집안을 다 닦잖아요.

하나도 닦이지 않고 먼지만 이리저리 끌고 다닌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잖아요.

우리가 한다는 것들이 다 이러해요.

 

물 묻은 걸레로 유리창을 닦아 보세요.

물기 있을 땐 닦아진 것 같아도 마르면 도리어 안 닦은 것만 못해요.

하나도 닦아 내지 못하고 온 사방에 칠갑을 해 놓아요.

죄인이 하는 짓거리들이 다 이래요.

 

죄인은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요.

그런데 우린 가만있지를 못하잖아요.

자기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설칠 때마다 자기 자랑이 풀썩거려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랑이라는 냄새가 코를 찔러요.

 

죄인이 성화를 하면 얼마나 하겠으며!

죄인이 사랑을 하면 얼마나 하겠으며!

죄인이 충성을 하면 얼마나 하겠어요.

그런데도 우린 이런 것들을 신앙이라고 붙잡고 있어요.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순종을 원해요.

성경은 하나님 앞에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합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봅시다.

 

삼상 15:22-23절.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순종”과 “제사”가 있어요.

“순종”과 “제사”를 상대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눈여겨보세요.

순종과 제사를 서로 대조하는 것은 순종과 제사가 두 가지 신앙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가만히 있는 것이고!

“제사”는 내가 뭔가 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제사”는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순종은 믿음”이고,

“제사는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두 언약으로 봅시다.

 

옛 언약은 내가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새 언약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는 것은 제사가 되고,

예수를 믿는 것은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제사가 되고,

새 언약은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합니다.

 

여기서 ‘낫다’는 말은 ‘옳다’는 뜻입니다.

상품의 품질이 좋고 나쁨의 낫다는 말이 아니고 옳고 그름의 낫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순종은 정답(正答)이고, 제사는 오답(誤答)인 것입니다.

 

순종 속에는 예수님이 하신 일이 담겨져 있지만,

제사 속에는 내가 한 일이 담겨져 있어요.

 

순종 속에는 예수님의 의가 담겨져 있고,

제사 속에는 죄인의 의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인이고,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인이에요.

 

죄인의 의는 의가 아니고 불의에요.

그러므로 인간의 제사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제사를 좋아하지 순종을 좋아하지 않아요.

왜 그런가 하면 제사 속에 자기 자랑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 속에는 내 피와 땀과 노력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자기가 한 일이 부정당하면 적개심이 생겨요.

왜 내 성의를 무시하느냐고 화를 내요.

 

가인을 통하여서 이걸 보여주셨어요.

가인은 자기 제사가 부정 당하자 분노를 합니다.

급기야 적개심이 자기를 부정한 하나님을 죽이는 데까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을 죽인 것이나 같아요.

 

가인은 모든 인간들을 대표하고 있어요.

죄 아래 놓여 있는 자들의 샘플이에요.

그러니 모든 인간들은 자기 의가 기각당하면 화를 내고 덤비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리가 뭔가 하려고 하는 불순종을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죄인이 자기 행위에 의로움을 두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순종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우리 생각을 섞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내렸다고 합시다.

즉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였어요.

그럼 예! 하고 안 먹으면 되어요.

이게 순종이에요.

 

그런데 왜 먹지 말라고 합니까?

따지면 안 되어요.

따진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나님 명령에 반기를 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알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순종이라고 합니다.

 

순종은 내 생각을 버리고 명령하는 분의 생각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선 명령자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왕과 신하의 관계나 주인과 종의 관계 안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종이나 신하는 주인의 명령에 따를 뿐이지 자기 생각이 개입 되면 안 되어요.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어요.

 

순종 속에는 내 생각이 없어요.

내 생각 내 뜻이 없어요.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면 제일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넌 죽은 자라고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넌 없는 자란 말이에요.

너는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봅시다.

 

갈 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사는 것은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이러한 삶을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어요.

그런데 지금 버젓이 살고 있어요.

버젓이 살고 있는 자기는 자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것으로서의 자기인 것입니다.

이를 자기 안에 예수님이 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미 죽었어야 할 몸인데 그럼에도 아직 살고 있는 것은 이 몸의 임자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죽었고 나는 예수님 목숨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나” 라는 주체는 버리고 예수에게 종속 시키는 것입니다.

이걸 나는 죽고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이걸 다른 말로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순종은 동의어입니다.

 

순종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에요.

우리가 흔히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잖아요.

말을 들어 준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랑과 순종은 하나에요.

그러므로 사랑은 순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야고보서에선 믿음과 행함으로 말하고 있어요.

 

믿음은 추상명사에요.

실체가 없어요.

그런데 그 믿음이 사역동사로 나타나요.

이는 믿음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걸 행함이라고 합니다.

 

사랑이나 믿음이나 실체는 없지만 반드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삶으로 나타남이 순종이고 행함이에요.

사랑 속에는 순종이 있고, 믿음 속에는 행함이 있어요.

행함이 없는 믿음이 가짜이듯이 순종하지 않는 사랑은 가짜에요.

 

사랑 속에는 순종이 들어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하라고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하면 저렇게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을 보면 이게 잘 드러나 있어요.

 

술람미는 아무 것도 없어요.

왕이 노예를 사랑한 것은 노예에게 무엇을 얻고자 함이 아니에요.

노예에게 왕의 은혜를 담아 놓고자 함이에요.

그러므로 왕과 노예의 사랑은 왕이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노예는 가만히 있으면 되어요.

왕께 받은 사랑을 보답하고자 해서도 안 되어요.

그건 왕의 사랑을 모욕하는 것이에요.

왕은 모든 것을 가진 자이고 노예는 아무 것도 없는 자에요.

 

왕은 창조주 위치에 있고, 노예는 피조물 위치에 있어요.

피조물은 창조주가 주는 것으로 살아가요.

피조물은 독자적으로 스스로 살지 못해요.

 

세상이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어요.

하나님이 있으라고 명령하시니까 생겨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지요.

허락이 뭡니까?

명령이잖아요.

참새도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이 다 그러해요.

 

하나님 말씀은 곧 생명이에요.

우린 하나님 말씀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조물은 창조주가 살게 해 주심으로만 살아 갈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피조물에게 유일한 소망은 창조주가 주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받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사랑과 피조물의 사랑은 달라요.

 

창조주의 사랑은 내리사랑이고,

피조물의 사랑은 치사랑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창조주의 사랑은 주는 것으로 나타나고,

피조물의 사랑은 하나님이 주는 것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사랑은 피조물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는 것으로 나타나요.

피조물은 창조주가 주면 고맙습니다! 라고 살아가는 것이 창조주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창조주의 사랑은 마치 엄마가 자식을 위해서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어서 먹이는 것과 같아요.

자식은 엄마가 해 준 밥을 맛나게 먹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엄마에 대한 사랑이에요.

엄마는 창조주이고 자식은 피조물이에요.

 

창조주는 주는 사랑이고 피조물은 받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주는 것을 받는 것이 창조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거절 하면 이건 악이에요.

엄마가 새벽에 일어나서 해 놓은 밥을 먹지 않고 학교에 가는 것은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효이고 악한 것이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하나님이 주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거부 한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산다는 것이에요.

이건 교만이에요.

 

그러므로 죄는 항상 하나님 없이도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지옥으로 가라고 저주를 퍼 부은 것은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하는 생명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의 생명을 거부하였습니까?.

자기들도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주신다는 의를 거부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이 바리새인들과 같이 자의 것으로 치장하고 살았어요.

하지만 술람미는 왕이 준 것으로 치장을 하였어요.

술람미는 솔로몬이 하라는 대로 하였어요.

 

솔로몬이 흰 옷을 입으라고 하면 흰 옷을 입었고 노란 색을 입으라고 하면 노란색을 입었어요.

왜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어요.

이게 순종이고 사랑이에요.

술람미의 이러한 순종의 모습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의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사도바울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빌 2:5-11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어요.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 했어요.

예수님은 순종이 뭔지 복종이 뭔지를 삶으로 보여주셨어요.

 

이걸 자기 비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을 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일컬어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삶이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만물을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여서 주라 시인토록 하셨습니다.

 

이건 마치 술람미가 솔로몬이 시키는 대로 하니까 모든 여자들보다 더 높여서 넌 모든 여자들 중에서도 최고의 여자라고 칭송한 것과 같아요.

그래서 성경은 여자에게 있어 최고의 아름다움은 순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이건 성도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이런 예표적인 사건을 부부라는 관계로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잘나서가 아니라 남편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너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을 여인으로서의 최고의 미덕으로 인정 해 주었던 것입니다.

 

암튼 솔로몬은 술람미를 여자 중에 여자라고 칭찬을 합니다.

그리하여 다른 여자들에게 주지 않은 사랑을 한량없이 베풀어 줍니다.

여자는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예뻐져요.

 

인체 과학적으로도 사람이 사랑을 받으면 좋은 에너지인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이 왕성해져서 온 몸에 신진대사가 활발하게 일어나서 몸에 윤기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뻐지게 되는 것입니다.

 

술람미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아 6:10-14절.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11.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12.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14.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술로몬이 술람미를 칭찬을 합니다.

 

아침빛같이 눈부시도록 화사하고!

달덩이 같이 고고하고 아름답고!

해같이 힘 있고!

군인들처럼 활기가 넘치고 늠름하고 역동적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생기발랄한 것입니다.

 

신부에게 있어서는 신랑의 사랑이 곧 생명입니다.

신랑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여자는 활기가 넘쳐요.

건강해요.

빛이 나요.

 

건강하면 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운동도 하고 맛난 음식도 먹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받을수록 더욱 더 사랑을 받고자 합니다.

 

사랑이 더욱 더 신랑의 품으로 파고 들게 하는 것입니다.

신랑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술람미는 신랑과 떨어지기 싫어했어요.

늘 가까이 있고 싶었어요.

 

그래서 급기야는 신랑의 동산으로 가서 왕족들이 타는 수레에 오르게 됩니다.

왕족의 수레에 오른다는 말은 왕비가 되어서 왕과 함께 동행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대통령이 외국을 순방 할 때 영부인이 함께 동반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는 한 몸이에요.

신랑의 것이 전부 신부의 것이에요.

왕의 동산이 자기 동산인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신랑의 동산에도 마음껏 드나듭니다.

 

왕에게 호도 동산이 있었어요.

그 호도는 아무나 먹을 수가 없어요.

오직 왕만 먹을 수 있어요.

술람미는 왕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고 마신 것입니다.

 

배부르면 행복해집니다.

행복해지면 흥얼거려지고 몸이 덩실거립니다.

몸이 행복함을 표현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나비가 꽃을 보고 날개 짓을 하듯이 술람미도 솔로몬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춤으로 화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을 춤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그 춤을 자기들에게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술람미야! 술람미야!

넌 어쩜 그리도 행복하느냐! 고 묻습니다.

이에 술람미는 친구들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초대합니다.

애들아! 우리 함께 춤을 추자고 합니다.

 

춤은 기쁨의 표현이에요.

춤은 자기 안에 기쁨이 있으면 저절로 추어지는 것입니다.

왕의 사랑을 받으면 춤이 추어집니다.

친구들이 춤을 추지 못하는 것은 왕에게 받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춤은 오직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만이 출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술람미의 춤을 “마하나임의 춤” 이라고 합니다.

본문을 직역하면 “마하나임의 춤 마당에서 춤을 춘다”는 말입니다.

 

“마하나임”이란? “천사의 무리”란 뜻입니다.

“마하나임의 춤 마당”이란 천사들이 춤추는 곳이란 말입니다.

천사들이 춤을 추면서 천국에 오는 성도들을 맞이한다는 뜻이에요.

 

창세기 32장 1-2절을 보면 야곱이 이방의 객이 되어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하나님의 군대들인 천사들을 만납니다.

천사들이 야곱을 마중 나온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했어요.

 

귀향이란? 천국 가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귀향하는 야곱을 천사들을 보내서 환영행사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하나임의 춤을 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에요.

우리가 가야할 곳은 천국이에요.

그러므로 야곱이 귀향한다는 것은 곧 성도가 천국 가는 것의 모형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야곱에게 있어 벧엘로 귀향하는 것은 언약의 장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서 광야에 유숙할 때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사다리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였어요.

그래서 벧엘을 일컬어서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하였어요.

 

야곱이 귀향을 하게 된 배경을 살펴봅시다.

 

창 31:41-42절.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42.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 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20년 전에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하나님이 찾아와서 약속을 하셨어요.

20년이 지난 지금 그 약속을 기억하고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야곱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거부가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함께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겠다는 약속은 야곱이 집을 떠나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하신 약속입니다.

 

지금 야곱은 벧엘의 그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동행한다고 했거든요.

야곱은 20년 동안 라반에게 속아 살면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재산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언약 안으로 불러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라반에게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떠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타향살이를 끝내고 돌아오는 야곱을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서 맞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서 맞이한다는 것은 그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야곱을 이끌어 내심을 보고 춤을 추는 것입니다.

이게 마하나임의 춤이에요.

 

마하나임의 춤은 천사들의 춤이에요.

이걸 아가서에서는 신랑의 사랑을 받은 신부가 기뻐서 추는 춤으로 말하고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술람미가 추는 춤을 일컬어 마하나임의 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랑에게 받은 사랑이 기뻤으면 춤을 덩실 덩실 추었겠어요.

 

성화주의자들은 야곱의 귀향을 회개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회개는 어원적 의미로 보면 잘못된 길에서 개과천선하여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뉘우치고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회개는 잃어버려졌다가 주인에게 찾김 받는 것을 말해요.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눅 15:1-10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왜 이런 비유를 하셨는지를 놓치지 마세요.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세리와 죄인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여서 음식을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탄핵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세 가지 비유로 응수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잃어버려진 양을 찾는 목자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듯이 자기 신부를 찾으러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죄인이 회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목자가 잃어버려진 양을 찾은 것과 여인이 잃어버려진 드라크마를 찾는 것을 일컬어 회개하였다고 말하고 있다고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는 흔히 회개하라고 하면 자신이 잘못된 길에서 반성하고 돌이키는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예를 들어서 술을 먹던 사람이 술을 끊는다거나!

교회에 잘 안 나오던 사람이 잘 나온다거나!

나쁜 짓을 하던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이 시대 인본주의 목사들이 이렇게 가르치잖아요.

하지만 이건 비성경적이에요.

이러한 회개는 옛 언약식 회개관이에요.

옛 언약식 회개는 내가 행동을 고치는 것입니다.

 

옛 언약에선 “나” 라는 주체가 살아 있어요.

옛 언약에선 자기가 살았으니 자기 가능성이 전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자기 행동으로 선이다 악이다 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 하에선 내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다고 믿어요.

이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 가능성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성화론자들의 신앙이에요.

 

새 언약에서는 우린 죽은 자에요.

죽은 자에게 죽은 것만 나와요.

그러니 죽은 자가 회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에요.

 

바울은 날마다 자기는 죽는다고 했어요.

그 이유는 예수의 생명이 자기에게 나타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 드러나기 위해서 자신은 죽은 자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로 드러나게 된다는 뜻이에요.

 

새 언약 안에서 인간에게는 선이 없다고 말해요.

선이 없으니 돌이키고 자시고 할 것이 없지요.

돌이키나 안 돌이키나 죄이기 때문입니다.

 

술을 먹어도 죄이고 안 먹어도 죄에요.

교회 나와도 죄이고 안 나와도 죄에요.

살인해도 죄이고 안 해도 죄에요.

새 언약 안에서는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무용수의 모든 행동이 춤이듯이 죄인의 모든 것이 죄인 것입니다.

 

그러니 새 언약에선 우리의 돌이킴을 회개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백날 이렇게 뜯어 고치고 저렇게 뜯어 고쳐도 안 되어요.

왜냐하면! 그건 어디까지나 죄인의 몸뚱이로 행하는 죄인의 몸짓거리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뚱이에서는 의가 나오지 않아요.

그러므로 새 언약에선 내 몸뚱이에 의미를 두는 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잃은 양이나!

잃어버려진 드라크마나 주인이 찾아주지 않으면 영원히 잃어버려진 대로 살아야 해요.

자기 스스로 찾아갈 수가 없어요.

이게 죄인의 현주소에요.

 

그런데 주인이 찾아 온 것입니다.

주인에게 찾김을 받았어요.

그러니 주인이 기쁜 것입니다.

 

주인이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아서 너무 기뻐 잔치를 벌였어요.

우리의 기쁨이 아니고 주인의 기쁨이에요.

주인이 잃어버려졌다가 다시 찾았으니 기쁜 것입니다.

 

찾김 받은 양이나 드라크마에겐 자기 의가 전혀 없어요.

온통 자기를 찾아 주신 주인의 공로만 가득해요.

그러므로 회개는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일인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를 믿는 것도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신 하나님의 행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에게 예수를 영접하도록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예수님에게로 이끌어서 살려 내신 것입니다.

 

요 6: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예수는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걸 아는 성도는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하지 않아요.

감사해요.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 믿는 것이 회개에요.

우리 행위를 버리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붙잡는 것이 회개에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우리 꼬라지를 보지 않고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이 회개에요.

나를 보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날마다 회개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꼬라지를 보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보라고 해요.

 

우리 속에는 온통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은 것만 채워져 있어야 해요.

이렇게 주인의 공로만 가득히 담긴 것을 탕자 비유를 통해서 맏아들과 탕자를 대조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탕자에게 자기 의는 파리똥만큼도 없어요.

오로지 아버지의 은혜뿐이에요.

탕자는 아버지 것으로 둘둘 감겨져 있어요.

 

옷도 아버지가 준 것이고!

신발도 아버지가 준 것이고!

가락지도 아버지기 끼워준 것이고!

밥도 아버지가 준 것이에요.

목숨조차도 아버지 것이에요.

 

지금 술람미가 그래요.

술람미는 자기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옷도 솔로몬이 준 것이고!

목걸이도 솔로몬이 준 것이고!

귀거리도 솔로몬이 준 것이고!

몸에 치장한 장신구들 하나하나가 모두 솔로몬이 준 것이에요.

왕비로 간택을 입은 것도 솔로몬이 허락한 것이에요.

 

술람미는 노예처럼 살다가 죽어야 할 자였어요.

잃어버려진 양이었어요.

동전처럼 장롱 아래 깊숙이 먼지 속에 버려졌던 드라크마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왕이 찾아와서 왕비로 삼아 준 것입니다.

그러니 마하나임의 천사들처럼 춤을 추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의 춤을 추는 것입니다.

 

두 가지 춤이 있어요.

 

하나님의 춤이 있고,

죄인들이 춤이 있어요.

 

하나님의 춤은 구원의 춤이고,

죄인들의 춤은 우상숭배의 춤입니다.

 

구원이 우리에게 다가 올 땐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는 구원의 기쁨이 몸으로 표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홍해 바다를 건너고 나서 소고로 춤을 추었어요.

이는 구원의 기쁨을 표현한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창세전 언약의 성취에요.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주인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희노애락에 따라 살아가는 자에요.

주인이 기쁘면 함께 기쁘고 주인이 슬프면 함께 슬퍼해요.

 

주인이 잃어버렸던 양을 찾고 기뻐하면 종도 기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들이 죄에서 건짐 받는 것을 기뻐하시면,

성도들도 당연히 예수님의 피가 증거되는 일에 기뻐하여야 합니다.

 

다윗도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옳기면서 춤을 추었어요.

법궤는 당연히 예루살렘에 있어야 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빼앗기고 떠돌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자기 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과 같아요.

그러니 기쁜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과 같아요.

이 때도 백성들이 기쁨의 춤을 추었어요.

 

예루살렘은 왕도에요.

왕이 거할 곳입니다.

만왕의 왕은 예수님이 거할 곳이에요.

 

지금까지 예루살렘은 가짜 왕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진짜 왕이 되셔서 입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하나님께서 다윗 언약의 성취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감동케 하여서 예수님이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환호하고 춤을 추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는 곧 다윗의 춤과 같은 것입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보고 너무도 기쁜 나머지 천사들처럼 마하나임의 춤을 추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영적으로 장차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본 것이었어요.

그러니 기쁜 것입니다.

기쁨을 주체 할 수가 없으니 바지춤이 다 내려가도 모를 정도로 춤을 춘 것입니다.

 

그러나 미갈은 인간적으로 보고 춤추는 다윗을 힐난합니다.

왕이 남사스럽게 체통 없이 춤을 춘다고 조롱했어요.

미갈에게는 사람들의 눈이 중요하지 언약궤가 돌아오는 것이 중요치 않았어요.

미갈은 언약궤의 다시 찾음에 대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기 체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약궤의 돌아옴이 더 기쁜 것입니다.

언약궤 앞에서 왕이라는 체통과 위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언약궤를 예수님의 피라고 합시다.

그럼 예수님의 피 앞에서는 인간의 자존심과 체면은 소용없어요.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존심이나 세상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때 비로소 마하나임의 춤이 추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미갈은 다윗의 춤을 인간의 체면으로 이해했어요.

남편의 체통 없음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비난했어요.

미갈은 하나님의 눈으로 다윗의 춤을 보지 못하고 사람의 눈으로 보았어요.

그러니 창피스러운 것입니다.

 

이건 마치 이 시대 예수님의 피를 말하면 시대에 뒤 떨어진 것처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성화주의자들과 같아요.

성화주의자들은 죄 이야기를 하고 피 이야기를 하면 불편하게 생각해요.

이런 말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전도하려면 기분 나쁘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서 사람들의 관심사를 이야기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선악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으로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윤리 도덕을 신앙의 본질처럼 가르치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 만들기라든가!

부부 십계명이라든가!

아버지 학교라든가!

순결 지키기이든가!

 

지역사회와 연합하는 것들과 같이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일들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신자다움을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해요.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지 말고 욕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런 것 백날해도 구원의 능력이 나오지 않아요.

 

구원의 능력은 오직 예수님의 피에서만 나와요.

애굽에 장자가 죽어나가 자빠질 때 어린 양의 피가 없어서 죽었어요.

그들이 나쁜 짓을 해서 죽은 것이 아니에요.

피가 없어서 죽었어요.

 

하나님은 오로지 어린 양의 피를 보세요.

모든 인간은 다 썩은 송장이에요.

썩은 송장이 내어 놓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면 안 되어요.

 

사람의 체면이 중요하지 않아요.

세상의 평가가 중요치 않아요.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평가만 중요해요.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졌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를 전하지 않으면 다 가짜에요.

교회가 아니고 놀이터에요.

처음도 예수님의 피이고 끝도 예수님의 피에요.

예수님의 피가 햄버거 빵처럼 아래 위로 감싸고 있어야 해요.

교회는 사나 죽으나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식상해 해요.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십자가에 머물러 있느냐고 비아냥 거려요.

자신들은 엄청 도통한 신선들이나 된 듯이 자고하고 자긍하고 자만에 빠져 있어요.

 

이젠 성화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서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교회가 개혁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어 놓는 것이 고작해서 아름다운 교회 만들기에요.

 

착하게 살았다는 자기 변화에요.

예수의 피가 아니라 자기 변화된 것을 내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개혁을 하고 착하게 산 것이 무슨 의라도 되는냥 거드름을 피워요.

 

이들은 미갈과 같아요.

그러니 창세전 언약의 완성인 예수님의 피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갈을 저주하였어요.

태를 닫아 버렸어요.

태가 닫혔다는 것은 죽었다는 말이에요.

 

미갈처럼 인간들 눈치보고 체면을 생각하면 안 되어요.

그럼 언약궤를 보고 춤이 추어지지 않아요.

예수님의 피에 춤이 추어지지 않아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만 고려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 시대 미갈이 너무도 많아요.

다윗의 아내라고 한다면 다윗과 같은 사고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미갈은 다윗의 아내라고 하면서도 다윗의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저주 받은 사울의 딸이라서 그래요.

그 아비의 피가 그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에 다윗처럼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미갈은 다윗의 아내가 아니에요.

다윗의 영적 아내는 밧세바인 것입니다.

그래서 밧세바의 아들인 솔로몬이 왕통을 계승한 것입니다.

미갈과 같은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지 않아요.

하나님이 태를 닫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개혁을 외치고!

성화를 외치는 교회에선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지 않아요.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예수님의 피에서만 나와요.

오직 피에요.

피!

 

하나님의 기쁨은 오직 예수님의 피뿐이에요.

성도를 일컬어 예수님의 신부라고 합니다.

그럼 신랑의 기쁨에 동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피의 복음이 증거되면 기뻐 춤을 추어야 해요.

 

신랑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부부는 한 몸입니다.

한 몸은 같은 안목으로 같은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같기 때문에 함께 희노애락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춤에도 두 가지가 있어요.

 

자기가 기뻐서 추는 춤이 있고,

하나님이 기뻐서 추는 춤이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나와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춤을 추었어요.

이건 자기들을 위한 춤이에요.

이들은 왜 하나님이 출애굽을 시켰는지 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자신들이 출애굽 한 것이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한 것임을 몰랐어요.

그러니 광야에 나와서도 애굽에서 알던 그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애굽에서 알던 하나님은 자신들을 도와주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니 애굽의 신의 형상인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춤을 춘 것입니다.

이들은 오로지 자기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신만 원했어요.

이런 춤은 저주의 춤이에요.

 

발락은 이러한 저주의 춤으로 이스라엘을 초대 했어요.

모압 평야에서 먹고 마시는 쾌락의 춤을 추면서 이스라엘을 초대해서 행음케 하였어요.

지금도 수많은 교인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장단에 춤을 추고 있어요.

세상 것으로 춤을 추고 있어요.

 

돈 벌었다고 기뻐서 춤을 추고!

직장에서 승진했다고 춤을 추고!

사업이 번창한다고 춤을 추고!자식이 좋은 대학 들어갔다고 춤을 추고!

좋은 신랑감 만나서 결혼한다고 춤을 추고!

목사들은 교인들 숫자가 늘어난다고 춤을 추고 있어요.

 

이건 전부 이 세상 것들이에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에요.

이런 것들은 다 세상 것이고 마귀적인 것들이에요.

세상 것으로 인하여 춤을 춘다는 것은 마귀에게 속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성도가 추어야 할 춤은 구원의 기쁨을 찬송하면서 천사들의 춤을 추어야 해요.

오직 하나 예수님의 피 뿌림을 입은 것에 대한 감사의 춤을 추어야 합니다.

올바른 예수님의 피가 증거되면 춤을 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돌아보셔야 합니다.

나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는 근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세요.

나는 지금 무슨 춤을 추고 있나요?

 

술람미가 추는 마하나임의 춤인가요?

아니면 금송아지 춤인가요?

 

부디 여러분들 속에 새 언약이 주는 마하나임의 춤이 추어지시길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새 언약의 피 뿌림에 은혜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어린양의 피 안에서 애굽을 바라보게 하셔서 피가 주는 기쁨으로 마하나임의 춤을 추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