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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성경강해)2강. 아벨의 제사와 믿음 (히 11:4)

by coroa 2022. 2. 21.

 

하늘빛사랑 https://blog.daum.net/day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강. 아벨의 제사와 믿음 (히 11:4)

-.정낙원 목사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지난 시간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서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바라는 것들이 있긴 있는데 그게 지금은 안보여요.

그래서 보게 하려고 믿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분명하게 있는데 안 보이는게 뭐가 있을까요?

하나님이라든가, 천국이라든가, 지옥이라든가 하는 것들이겠지요.

즉 이 땅에 없고 하늘에 있는 것들입니다.

분명히 있는데 인간들이 볼 수가 없어요.

 

우리 인간들의 이성으로 감지 할 수도 없고 감지되지도 않는 세계가 있어요.

그 세계가 바로 영의 세계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만 믿음을 주어서 보게 한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하시려고 믿음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받으면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참 재미있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유(有)에서 유(有)로 일하시지 않고, 무(無)에서 유(有)로 일하시는 분이라고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이 오면 미래에 것을 현재화 시키고, 현재를 미래화 시키게 됩니다.

믿음을 받으면 장차 가야할 천국이 현재화 되고, 지금 현재를 장차 가야할 천국처럼 살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장소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영역 안으로 상황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즉 천국의 법칙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준 성도를 천국에 법칙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받게 되면 창세전에 있었던 일들이 지금 현재화 되어서 우리에게 적용이 되어 살아지게 되는 겁니다.

지금 성도들은 창세전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렵습니까?

 

그럼 쉽게 말할게요.

하나님이 약속이라는 두루마리를 확 풀어 버렸다가 다시 감는 것과 같단 말입니다.

약속이라는 두루마리를 확 풀으니 그 속에서 우리가 툭 튀어 나왔어요.

성도는 약속의 자녀이잖아요.

 

그러니 약속이라는 두루마리를 펴니까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낚싯줄을 던졌다가 다시 감듯이 약속이라는 두루마리를 감으니 우리가 다시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성도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되기로 작정이 되었다고 하지요.

그럼 창세전에 우리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아직 나타나진 않았지만 말입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니 나타난 것입니다.

 

어려운가요?

이해가 안 되는 얼굴들인걸 보니,,,,

이러면 안 되는데 시작하자마자.

오늘 갈 길이 먼데,,,,.

자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쉽게 설명합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립니다.

화가는 자기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빈 도화지에 그려내잖아요.

머릿속을 창세전이라고 하고 빈 도화지는 세상이라고 합시다.

그럼 빈 도화지에 그려진 그림은 언제 있는 것입니까?

 

이미 화가의 머릿속(창세전)에 있던 것이지요.

다만 지금 그려냈을 뿐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화가의 머릿속엔 지금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요.

그것을 지금 그려 냈을 뿐이라고요.

이해되지요.

 

성도의 존재가 이와 같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였던 일들을 지금 역사라는 도화지에 그려낸 것뿐입니다.

그럼 지금 그려진 그 그림은 지금 것입니까?

창세전에 이미 있던 것입니까?

창세전에 있던 것이지요.

 

이런 세상을 영이라고 하고 묵시라고 해요.

하늘나라를 묵시 세계라 합니다.

묵시 세계는 시간 개념이 없어요.

이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비유적으로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 합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조금은 도발적으로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 계실 때 어른이었겠어요?

어린아이였겠어요?

묵시 세계는 시작도 없고 끝이 없다고 했으니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이 필요가 없겠지요.

 

자란다는 것은 시작과 끝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자람이라는 것이 필요가 없는 완전한 모습으로 계셨겠지요.

생소한 물음이니 대답을 못하겠지요.

그럼 다시 묻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창조 될 때 어른으로 창조가 되었습니까?

어린아이로 창조가 되었습니까?

어른이지요.

그러니 창조가 되자 말자 혼인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어디서 창조가 되었습니까?

에덴동산이지요.

 

그럼 에덴동산은 묵시 세계입니까?

역사세계입니까?

묵시 세계이지요.

자람이 필요 없는 완전한 자로 있었으니까요.

 

그럼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 쫓겨난 에덴동산 밖은 역사세계가 되겠지요.

그럼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어른이었겠어요?

어린애이었겠어요?

어른이겠지요.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 하였다는 것은 어른이라는 말이지요.

 

오해하지 말라고 다시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어른이냐 어린아이냐 라고 말하는 것은 어린아이는 미숙하고 어른은 완전하다는 의미에서 완전과 불완전을 표현하기 위한 비유일 뿐입니다.

완전한 나라가 천국이고, 이처럼 완전한 세계를 묵시 세계라 합니다.

천국을 일컬어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고 아픔이나 사망이 없다고 하는 것은 완전한 곳이란 뜻입니다.

 

묵시 세계는 완전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묵시 세계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하는 겁니다.

시작이 있다고 하면 점진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남아 있음이 되지요.

시작이란 말은 끝을 염두에 두고서 하는 말이잖아요.

그럼 끝이 없으면 시작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늘나라를 영원한 세계라고 하는 겁니다.

영원이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입니다.

시작도 있고 끝이 있다면 영원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영원을 원으로 표현하는 것도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묵시 세계가 역사 세계로 뛰어 들면 시작과 끝이 있어요.

이는 보이는 역사 세계는 보이지 않는 묵시 세계를 잠시 동안 보여주기 위하여 모델하우스와 같이 온전한 것이 지어지면 철거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한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란? 역사 세계를 말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는 묵시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보이는 역사 세계는 보이지 않는 묵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잠간 동안 존재하다가 사라져야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역사 세계는 시작과 끝이 있는 겁니다.

역사 세계엔 태어남과 죽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역사 세계란 피조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니 피조 세계는 창조와 종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가요?

 

그래서 묵시 세계에 계신 예수님이 역사 세계로 오실 때에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잉태하는 과정을 밟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역시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역사 세계로 떨어지니 자식을 낳는데 엄마 뱃속에서 잉태하는 과정을 거쳐서 가인과 아벨을 낳은 겁니다.

이처럼 인간이 살아가는 역사 세계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들이 천국에 가면 어린아이겠어요?

어른이겠어요?

어른이겠지요.

왜냐하면! 천국은 묵시 세계이므로 시작도 없고 끝이 없는 자람이 없는 완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장 좋은 상태 즉 가장 완전한 완성 된 몸으로 있다는 말입니다.

어른이라 함은 완전하다는 뜻에서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묵시 세계는 불완전한 요소가 없는 완벽하고 완전하고 완성된 세상입니다.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끝이 없는 생명이란 말이지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생명이란 말입니다.

 

반대로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시작과 끝이 있는 생명이란 말이지요.

불완전한 생명이란 말입니다.

시작과 끝이란? 뭔가 진화 한다는 말입니다.

점점 나아진다거나 점점 후패한다거나 좌우지간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란 말입니다.

 

하늘나라를 영생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곳이란 말입니다.

점점 나아지고자 후패하는 것이 없는 완전한 상태로 영원토록 보존되는 나라란 말입니다.

그러니 묵시의 나라는 시간 개념이 없는 항상 현재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일렬로 쭉 늘어져 있어요.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이렇게 펼쳐지면서 흘러가요.

즉 1년, 100년, 1000년, 1500년, 2000년, 2008년 이렇게 쭉 늘어져 있어요.

숫자가 붙여졌다는 것은 쭉 늘어지고 펼쳐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역사 세계는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역사 세계라 함은 반드시 끝이 난다는 말입니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은 한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무엇인가 필요에 의해서 존재하였다가 사라질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은 멸망의 날까지 잠시 보존해 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장차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에 불로 타 버릴 것이라고 하지요.

마치 진짜 아파트를 보여주기 위해서 잠간동안 지었던 모델하우스와 같이 철거할 세상이란 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획 한 언약이라는 그림을 그려내기 위하여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 언약이 완성되면 용도폐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보이지 않는 것이란? 하늘에 있는 묵시의 나라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런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나라에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잠시 오셨다가 다시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성도들도 그곳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이미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그 곳에 가 있습니다.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바울이나 베드로나 나사로가 가 있는 곳이 묵시의 나라입니다.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고 사망이나 곡하는 것이 없는 그런 나라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창세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도 계신 겁니다.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항상 현재로 계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전에도 현재였고, 장차도 현재이고, 이제도 현재라는 말입니다.

과거도 현재고, 미래도 현재고, 현재도 현재입니다.

이걸 묵시성이라고하고 또는 영원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히 7:1-3=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전쟁에서 구해 오잖아요.

 

그런데 멜기세덱이라는 이상한 양반이 나타나서 아브라함 앞을 떡하니 막아서곤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축복을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나! 살렘 왕 멜기세덱!

아브라함은 처음 들어보는 나라이고 이름입니다.

 

당시엔 소 부족 국가 형태이니 주변에 나라들은 다 알 것입니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 천하에 아브라함을 축복으로 하고 있어요.

건방지게!

축복을 한다는 것은 높은 자란 뜻입니다.

그러니 지금 멜기세덱이 난 너에게 복을 주는 임금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당황해서 예~에 그런 나라도 있습니까?

그럼 있지!

어디에 있는데요?

하늘에!

 

그러자 아브라함은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드리잖아요.

아이고 그러면 그렇지!

세상에 있었으면 내가 알 텐데!

몰라 봐서 죄송합니다.

 

전리품을 드린다는 것은 이 전쟁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멜기세덱이 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멜기세덱은 누굽니까?

그 분의 특징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이 분은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고 합니다.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다는 말은 피조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지요.

아브라함이 지금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 때도 계셨고, 아브라함 때도 계셨고, 세례요한 때도 계셨고, 지금도 계십니다.

오늘이고 내일이고 모래고 항상 있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걸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항상 현재로 계시는 분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되지요.

이걸 세상 사람보고 믿으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하지!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고 천국 이야기 한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줄 아세요.

 

그래서 믿음을 못 받으면 이해가 안가는 겁니다.

천국을 이야기 하고 예수님을 이야기 하는 것은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런 나라가 있다고 말해 주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이 세상 말고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다고 알려 주라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들더러 이해시키고 믿게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이걸 어떻게 믿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살 성도에게만 믿음을 주어서 믿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야!~ 너희들 중에서 천국이 믿어지는 자들 나와 봐!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믿어지는 사람은 저요! 하고 손들고 나올 것이고!

안 믿어지는 사람들은 미친 놈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릴 하네! 라고 할 것입니다.

 

이게 믿어지는 사람은 믿음을 받은 사람이고, 안 믿어지는 사람은 믿음을 못 받은 사람이지요.

예수님이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설명해서 이해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냥 믿음이 오면 통째로 믿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창세전에 이미 구원되었고, 지금도 구원되었고, 장차도 구원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제도 구원된 자이고, 오늘도 구원된 자이고, 내일도 구원된 자입니다.

구원이란? 영원한 것이지 시절을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말했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 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자 보세요.

미리 정하신 자들이 있고,

부르신 자들이 있고,

영화롭게 하는 자가 있다고 하지요.

 

그럼 미리 정하신 것은 언제 입니까?

과거이지요.

즉 창세 전이지요.

 

그럼 부르신 것은 언제입니까?

지금 현재이지요.

 

그리고 영화롭게 하는 것은 언제입니까?

이건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을 말하지요.

그럼 영화롭게 되는 것은 언제가 됩니까?

장차 즉 미래 일이잖아요.

 

그럼 성도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이미 창세전이잖아요.

믿어지십니까?

 

성도의 구원이 무엇과 같은가 하면 예수님이 보석주머니를 확 쏟았다가 다시 그 보석들을 찾아서 보석주머니 속으로 집어넣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보석 주머니를 탁 터뜨리니까 그 속에 있던 성도가 확 쏟아져 나온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그 쏟아졌던 성도들을 다시 예수 안으로 집어넣는 일을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예수라는 보석 속에 창세전에 이미 있다가 다시 찾김 받아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보석이 땅에 떨어졌다고 해서 보석이라는 본질이 바뀌지 않습니다.

다만 잃어버려져 있을 뿐입니다.

잃어버려져 있어도 보석이고, 찾김 받아도 보석이고, 천국에 가도 보석입니다.

 

예수님이 신자와 불신자를 곡식과 가라지로 표현했지요.

곡식과 가라지는 종자(種子)가 달라요.

곡식이 가라지가 되고, 가라지가 곡식 되는 일은 없어요.

가라지는 백년을 두어도 가라지이고, 곡식은 천년을 두어도 곡식입니다.

그러니 천국백성과 지옥 백성은 이미 다른 종자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백성을 구원하러 왔다고 하는 겁니다.

이미 보석상자 속에 있던 것들을 찾으러 왔다는 말입니다.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고 이미 있었던 것들입니다.

이미 있던 것들이니 예수를 알아보는 겁니다.

이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낯설지가 않아요.

 

이렇게 낯설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믿음입니다.

믿음이 오니 예수님이 낯설지가 않아요.

그래서 믿음은 이미 창세전에 예수라는 보석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제 지혜로는 이렇게 밖에 설명이 안 돼요.

각자의 믿음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설명해도 모르는 것은 제 책임이 아닙니다.

 

믿음이 오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무엇이고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요.

전혀 어렵지가 않습니다.

믿음을 받으면 예수를 믿는게 어렵지가 않아요.

아주 쉬워요.

 

무(無)에서 유(有)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낯설지가 않아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지고 무(無)에서 유(有)로 일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준 것은 죽은 나무에 싹이 난 것과 같습니다.

사라는 이미 경수가 끊어져 아이를 생산할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자 말자 이삭을 주지 않고 오랜 세월 기다린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능력으로 자식을 생산할 수 없을 때까지를 기다린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조금이라도 자식을 생산할 능력이 있을 때 이삭을 주었으면 자기들이 낳았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부러 인간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 사라의 월경이 끊어져 여자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 하였을 때 찾아와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아들을 준다고 할 때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비웃었지요.

왜? 비웃었겠어요.

말 같지 않으니까 비웃지요.

아브라함과 사라는 왜? 말 같지 않다고 생각했을까요?

자기들 꼬라지를 보니 그렇지요.

 

이는 자신들은 이미 자식을 생산 할 수없는 죽은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증거로 아들에 이름을 비웃음이라는 이삭이라고 짓게 한 것입니다.

 

죄가 뭔 줄 아세요?

자기 꼬라지 보고 판단하는 겁니다.

이걸 요즘식으로 말하면 자기 행함이라는 겁니다.

왜? 자기 꼬라지를 봅니까?

 

신자는 역사의 영역에 있는 자가 아니고 묵시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입니다.

아까 묵시는 시작이나 끝이 없다고 했지요.

그럼 신자에게 과거라는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없지요.

과거는 이미 죽었잖아요.

 

그럼 과거가 없으면 자기 꼬라지 가지고 한탄 할까요?

안할까요?

안해야지요.

왜? 역사와 단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항상 오늘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걸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 꼬라지가 안 보이는 겁니다.

뚝 떨어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이걸 옛 사람은 죽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안 믿어지면 맨 날 자기 꼬라지를 보고 후회하는 겁니다.

이걸 한국교회에서는 회개한다고 해요.

웃기는 짬뽕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안 믿어지기 때문에 이런 짓거리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한 것은 아브라함 속에 죄를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겁니다.

그러니 자기 꼬라지를 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으면 안돼요.

아브라함에게 있어 죄란? 하나님의 약속을 안 믿고 자기 꼬라지를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하나님이 어떤 분 인줄 몰라요.

기껏 안다고 하여도 자기 지식으로 안 하나님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묵시의 세계에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리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개인 과외를 시키는 겁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안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을 벗어나서 일하지 않아요.

인간들과 통하는 그런 하나님입니다.

착한 자에게 상(賞)주고 악한 자에게 벌(罰)주는 그런 하나님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 이성으로 안 인간적인 하나님이지요.

마귀이지요.

마귀는 보이는 것으로 인간들을 사로잡아요.

그러니 인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인 마귀는 유(有)에서 유(有)로 일하는 하나님인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로 창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 이란 말입니다.

역사 세계의 방법으로 일하지 않고 묵시 세계의 창조의 방법으로 일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묵시 세계의 방법이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려 주기 위해서 사라의 월경이 끊어지고 태가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즉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죽으니 찾아가서 살려낸 겁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으로 세웠다는 것은 곧 믿음을 받으면 무(無)에서 유(有)로 보게 되고 또한 역으로 유(有)를 가지고 무(無)에 세계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받으면 창세전에 계시고, 미래에 계신 그 하나님을 보면서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 속에는 장차 도래할 천국에 대한 소망이 담겨져 있고, 그 천국에 대한 소망을 주신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어찌 인간의 지혜로 이해 할 수가 있겠습니까?

믿음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고 특혜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 보따리를 풀면 그 속엔 천국도 들어 있고, 지옥도 들어 있고, 부활도 들어 있고 영생도 들어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을 받으면 이런 것들이 다 믿어집니다.

물론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겐 황당한 소리이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믿음을 받으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보게 되요.

천국과 지옥이 분명하게 있는 것임에도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는 죽어 봐야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제께 어떤 분이 절 찾아 왔어요.

자신은 어느 특정한 교회를 정해 놓고 다니지 않는다는 해요.

그 이유는 목사들이 간섭을 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면서 말끝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해요.

 

그래서 제가 무엇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라고 물으니 착하게 사니 하나님께서 보답을 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사업이 힘들고 하여도 정직하게 살았더니 지금은 조금 살만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한 동안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렸대요.

그렇게 자기 마음에 와 닿는다고 해요.

 

설교 중에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여자 분들은 예배 마치고 교회 있을 생각하지 말고 빨리 집에 가서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라고 했다나요.

자기는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어서 자기 마누라에게 신앙생활은 저렇게 하는 거라고 하면서 자기 마누라를 교회에 가지 말라고 했대요.

자기 마누라는 교회 전도사이고 자신은 평신도인데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서로 공평해 지자고 하여 자기는 한 단계 올라가고 자기 마누라는 한 단계 낮추어서 동등해지자고 했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물으니, 마누라는 전도사 집어치우고 집사로 내려앉고 자신은 집사로 올라가겠대요.

그러면 계급이 똑 같아 진다나요.

마누라가 다니던 교회도 그만 두고 이제는 울산에 있는 큰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예배를 드린대요.

 

큰 교회를 가야 숨을 수 있다는 겁니다.

작은 교회를 가면 꼬치꼬치 캐묻기 때문에 싫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간섭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큰 교회 목사들은 다 도적놈이라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교인들 한데 뭐 빼 먹을 것이 없나 살핀다는 겁니다.

 

시0교회에 갔더니 목사가 설교 시간에 어떤 분이 이름도 밝히지 않고 헌금 144만원을 강대상에 올려놓고 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편지 하나를 써 놓았는데 자신은 서울에서 울산에 온지 6개월이 되었는데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문전걸식 하다시피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용케 일자리를 구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첫 월급 몽땅 드리는 것이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인들에게 이런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더래요.

그 사람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울컥해서 속으로 저 개새끼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하느냐고 욕을 했답니다.

저 놈은 목사가 아니란 겁니다.

 

아니 6개월 동안 힘겹게 살았으면 그 돈으로 한 30만원만 헌금하고 나머지로는 밀린 방세도 내고 해야 할 것 아니냐 라는 말입니다.

돈을 낸 새끼도 미쳤지만 그걸 교인들에게 자랑하는 목사 새끼도 미쳤다는 겁니다.

저렇게 교인들에게 가르치니 여편네들이 신랑 몰래 전세 돈 3천만 원을 빼내서 교회다 헌금하고 신랑한데 걸려서 죽도록 얻어터지고 결국 쫓겨나고 이혼당하는 것 아니냐 라고 해요.

 

그런 교인이 그 교회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무당 같은 목사를 불러다 부흥회를 하고 은혜 받았다 하곤 교회다 헌금한 모양입니다.

말하는 것을 보니 그 교회의 모습이 어떤지 알 것 같아요.

 

아니 하나님이 먹고 살라고 직장도 주고 월급도 주었는데 그러면 하나님 고맙습니다! 라고 써야지 그걸 몽땅 헌금하고 자기는 또 한 달 동안 거지생활을 해야 하느냐! 라는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 뜻이겠느냐! 라는 말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생각 안한데요.

그래서 제가 그건 당신 말이 맞다고 했어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예수를 안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대장이고 그 밑에 예수도 있고 부처도 있고 마호메트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절에 가서도 헌금 만원하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하고 온다고 해요.

왜냐하면! 부처나 예수나 동급이기 때문이래요.

그래서 자신은 제일 높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만날 수가 없기 때문에 아들을 중보자로 보내서 그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 하십니다.

성경은 그 아들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안 믿으면 지옥에 갑니다! 라고 하니,,,

 

목사님 그건 그때 가 봐야 아는 것 아닙니까?

그 때 가 보아야 예수가 하나님인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제가 봤을 때 당신은 믿음을 받지 못하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하자.

목사님 길고 짧은 건 그 때 가봐야 알지요.

지금 어떻게 압니까? 라고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당신 같은 사람이 성경에 있는데 거지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입니다.

부자는 죽고 나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믿음을 안 받으면 부자처럼 죽어봐야 알지라고 합니다.

당신이 꼭 부자 같다고 했지요.

 

그나저나 무슨 일로 왔습니까? 물으니

그 동안 교회를 안 갔기 때문에 헌금을 하지 못하고 조금씩 모아두었대요.

연말이고 해서 불우이웃을 돕기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모아둔 헌금을 여러 개 쪼개서 그 일부분을 목사님한데 드리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봉투 하나는 내어 놓는데 25만원이 들었어요.

이렇게 하여야 하나님이 또 복을 준다나요.

그리곤 유자차 잘 마셨다고 하곤 갔어요.

 

제 아내가 그 사람이 떠나가는 뒤통수에다 대고 작은 소리로 웃으면서 요새도 저런 까마귀가 있나 보네!

당신 아르바이트 짤렸다고 하나님이 저런 까마귀를 보냈대요?

그런가 보다?

 

그 사람을 보내고 나서 참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 줄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도 믿음을 안 받았으면 저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어요.

저런 사람들은 믿음이 없으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가 없지요.

안 믿어지니 나중에 죽어 봐야 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 속에 천국이니 부활이니 하는 말들은 공허한 동화 이야기처럼 들리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자기 상식으로 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양심대로 살면 복을 준다고 생각해서 양심껏 산다고 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믿음을 받아야만 보입니다.

믿음을 받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입니다.

눈으로 본다는 말이 아니고 본 것처럼 의심이 가지 않고 믿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자 하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자 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은사와 은사주의에 잘못을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뭔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신앙을 판단하는 은사주의자들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믿음을 받으면 천국도 믿어지고, 부활도 믿어지고, 영생도 믿어지고, 예수님도 믿어지고,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도 믿어집니다.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도 믿어지고, 예수 죽음이 내 죽음이고,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이고, 예수 천국이 내 천국이라는 것이 믿어집니다.

이처럼 믿음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고 이성으로는 믿을 수 없는 것들이 보여지고 믿어지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 땅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 없다는 것은 결국 하늘에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땅을 육이라 하고 하늘을 영이라 합니다.

인간들 세상을 육이라 하고, 하나님 세상을 영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영이고 인간은 육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속한 분이고 인간은 땅에 속한 자입니다.

그러니 땅에 속한 자가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요.

 

믿음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하늘에 있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즉 영에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믿음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영적 세계란? 하나님의 세계란 뜻입니다.

 

정리하면 성도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알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알다시피 죄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하나님은 숨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을 없습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나타나 주시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담 이후로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 곧 자기백성들에게만 나타내 주셨습니다.

노아가 그랬고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그 시대 이단아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 전혀 다른 신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나타난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의 말을 이방인들이 들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조상대대로 알고 있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이스라엘 속에 이방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심고자 합니다.

이런 마귀의 술책은 너무도 잘 먹혀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하나님을 잘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대로 일하시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 뜻대로만 일하십니다.

 

그러니 불편하고 낯설고 싫습니다.

불편하고 낯선 하나님과 살아간다는 것은 고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낯선 하나님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누구든지 낯선 하나님을 말하는 자들은 이단으로 간주하여 죽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스라엘 속에 나타 낫습니다.

이름하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에 선지자들과 똑 같이 낯선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너도 이단이라고 십자가에 달아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우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모두가 하나님을 알아보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든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보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이단이라고 죽입니다.

과거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여지없이 이단이라고 죽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가 예루살렘 성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성(城)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이 죽었어요.

그것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인간들 손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城)이라고 하는 거기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피가 소리를 지른대요.

세상에 이런 참람함이 어디 있습니까?

그 예루살렘 성(城)이 지금의 교회들입니다.

 

참 하나님은 교회가 죽이지 교회 밖 세상은 하나님 안 죽여요.

이 비밀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적(敵)은 교회이지 세상이 아니에요.

구약 이스라엘을 보세요.

하나님이 맨 날 이스라엘하고만 싸웁니다.

왜? 이스라엘과 싸우느냐 하면 그 속에 마귀를 뽑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라서 눈만 뜨면 죄인이 좋아하는 신을 섬기고자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비를 걸면 그 속에 진짜 마귀 새끼들이 넌 뭐야 하고 죽이는 겁니다.

하나님 대신에 죽어간 사람들이 선지자들입니다.

신약에선 성도이고,,,

지금도 십자가 피를 전하면 교회 안에 가짜들이 넌 뭐야 라고 죽여요.

이단이라고 해요.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다 이런 맥락으로 점철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 마지막에 하나님이 직접 오신 겁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라고 보내 주셨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육적인 안목으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서 자기백성들에게만 믿음을 주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자기백성들은 믿음을 받고 보니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럼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이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한 그 실상은 곧 예수님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믿음이 왜? 필요하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기 위함입니다.

믿음을 받으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됩니다.

믿음을 받으면 성경 전체를 통하여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을 받으면 성경 전체가 예수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사람은 오직 예수 이야기만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란? 십자가에 피 흘려 죽은 이야기입니다.

믿음을 받으면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는가를 알게 됩니다.

왜? 예수 안에서만 구원이 주어지는지를 알게 됩니다.

결국 믿음의 끝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피 이야기로 풀어지는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습니다.

피 뿌림이 없으면 용서가 없습니다.

오직 피 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피 때문에 살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피 때문에 죽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피가 뭐길래? 죽고 사느냐 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피에 달렸다고 한다면 그 피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죽고 사는 이야기가 성경이야기입니다.

 

성경이 이스라엘의 역사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에 능력이 어떻게 인간 속에서 나타나는가! 를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추상이 아니라 실제라는 뜻입니다.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란 말입니다.

묵시의 나라 이야기를 알려 주기 위해서 역사라는 세상을 잠깐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피를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분이 아닙니다.

반드시 믿어야 하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 안은 구원이지만, 예수그리스도 밖은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인간들이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 갈수가 있기 때문에 나는 길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법칙은 하나님의 정한 법칙이므로 만고불변의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법칙 안에 있으면 살기 때문에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인 믿고는 자유이지만,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인간을 심판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구약엔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보여 주셨고, 신약에선 교회를 통하여서 보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이스라엘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사건은 신약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신약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미리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역사로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속에는 구원받은 자와, 멸망 받은 자들의 삶에 역사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을 통해 어떤 자들이 구원을 받았고, 어떤 자들이 멸망을 받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해하기 쉬우니 정정합니다.

어떤 자들이 구원을 받았고, 어떤 자들이 멸망을 받았느냐 라고 하면 언뜻 들으면 아! 인간의 행동에 따라서 구원 받기도 하고 멸망 받기도 하는구나? 라고 생각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선악이라는 사고방식으로 말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 자체를 죄인이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에게선 구원 받을 만한 의로운 행실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을 만한 행동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 성경적이고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정정하느냐 하면!

구원 받은 자는 이렇게 살게 되어 있고, 저주 받은 자는 이렇게 살게 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사무엘서를 보면 엘리 라는 제사장이 나옵니다.

그 엘리 라는 제사장에겐 홉니와 비느하스 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을 자기가 먼저 취하고 성전에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일들을 자행합니다.

이런 모습을 본 엘리가 자식들에게 훈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비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불량자라고 하고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사람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나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존중히 여기고 나를 경멸히 여기는 자는 경멸히 여긴다”고 합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들으면 아! 내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면 하나님도 나를 존중히 여겨 주시고, 내가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면 하나님도 나를 경멸히 여기시는구나! 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육적인 목사들은 이 본문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그 목사의 말대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이렇게 되면 복과 저주는 인간 쪽에서 불러들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는 형국이 됩니다.

이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과 저주는 인간의 행동에 따라 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저주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주 받은 자들에게서 복 받을 행동을 하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고 어불성설입니다.

 

저주 받은 자에게선 복 받을 행동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선 그 무엇을 하여도 저주받은 행동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의 두 아들들은 그들이 불량한 행동을 하여서 저주 받은 것이 아니고, 저주 받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지, 열매가 나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만 좋은 나무이고, 인간은 나쁜 나무입니다.

그럼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고, 예수 밖에 있는 자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 로 좋고 나쁨을 결정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지만, 그 누구라도 예수 밖에선 무조건 정죄함을 받게 됩니다.

예수 안에 있고 예수 밖에 있고는 인간이 들어가고 나갈 것을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선 어떤 사람은 예수 안에 넣어 주시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두십니다.

누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고, 누가 예수 밖에 잇는 사람인가는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압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의 행동을 하고,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저주 받을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에게 말한 식으로 이야기하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존중히 여기고,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우습게 여깁니다.

예수님을 존중히 여기고 우습게 여긴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가치 있게 여기고 무가치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생명처럼 여기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우습게 여깁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사람이란 자기 안에 가치성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곧 그 사람의 가치입니다.

돈을 귀하게 여기면 그 사람의 가치는 돈입니다.

교회를 귀하게 여기면 그 사람의 가치는 교회입니다.

자기 업적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 업적이 가치입니다.

 

십자가를 귀하게 여기면 그 사람의 가치는 십자가입니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는 그것이 곧 그 사람의 믿음이고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자랑하는 사람은 교회가 신앙의 대상이고, 목사를 자랑하는 자는 목사가 신앙의 대상입니다.

 

자기 업적을 자랑하면 그 업적이 믿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속에 교회가 있으면 교회를 내어 놓고, 예수님이 있으면 예수님을 내어 놓는단 말입니다.

사람은 다른 것이 다 날아간다고 하여도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붙잡고자 합니다.

 

옛날에 어떤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돈을 은행에다 예치하지 않고 집에서 보관을 합니다.

그래서 늘 도적들의 표적이 되곤 하였습니다.

집안에 늘 도적들이 들끓었습니다.

하지만 도적들이 돈을 찾아 내지 못하고 매번 허탕을 칩니다.

 

그래서 마지막 수단을 택하였습니다.

집에 불을 지르면 돈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이니 분명히 돈을 먼저 챙길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집에 불을 지르자 담 너머로 뭔가 툭 던져집니다.

도적들이 달려가 보니 큰 대나무들입니다.

 

그래서 도둑들이 집에 불이 났으면 돈 보따리를 던져야지,,

왜? 대나무는 던지고 지랄이냐! 라고 이 영감이 집에 불이 난걸 보고 아마도 미쳤다고 생각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에이! 돈 가지고 있다는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구나!

우리가 속았어!

집 밖으로 나간 영감님은 대나무들을 주웠습니다.

영감님은 그 대나무 속에 돈을 꼬깃 꼬깃 채워 놓았던 것입니다.

도둑은 대나무만 보았지 그 속에 돈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나무를 보고도 줍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보물로 보이고 어떤 사람 눈에는 가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어떻게 대접하느냐를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십자가 속에 생명을 본 사람은 십자가만 자랑할 것이고, 십자가 속에서 생명을 보지 못한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말이 그 사람의 믿음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는 겁니다.

이건 얼굴 붉히며 언성 높이고 싸울 문제가 아니예요.

사실이 이렇다! 라는 것만 말하고 마세요.

싸워서 십자가를 믿을 수 있다면 죽기 살기로 싸워야겠지요.

 

그러나 십자가를 믿는 것은 싸워서 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서 십자가 속에 영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셔야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보여지고 들려지고 믿어지는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동일한 십자가임에도 어떤 사람에겐 구원의 능력이 되고, 어떤 사람에겐 멸망의 증거가 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십자가를 생명처럼 여기지만, 저주 받은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결국 복 받은 사람은 복 받을 짓을 하고, 저주 받은 사람은 저주 받을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속에 구원받은 자와 멸망 받은 자를 담아 놓은 것은 보라는 것입니다.

 

자 봐라!

하나님께 속한 자는 이렇게 살았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자는 이렇게 살았다 라고,,,,

그래서 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속에 구원 받은 자와 저주 받은 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곧 한 민족이 아니고 두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분명히 육적으로는 한 민족인데도 영적으로 두 민족이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혈통적으로 일하시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일하시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 다른 방법이 곧 선택입니다.

 

선택이란? 하나님의 일방적인 결정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면 천국 가는 것이고, 선택하지 않으면 그대로 지옥에 가는 겁니다.

다시 말합시다.

오해 할 수 있으니,,,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인이라 함은 다 지옥에 가는 자란 뜻입니다.

 

선택이란? 무엇과 같은고 하니 마치 지옥으로 가는 컨베어 벨트에 모든 인간들이 올려져 가고 있는데 그 중에서 얼마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끄집어 낸 것과 같습니다.

죄인은 이미 저주 받은 자이기에 하나님이 건져 주지 않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다 그 길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끄집어냄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그대로 가면 됩니다.

아쉬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게 죄인이 당연히 가야하는 길이고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끄집어냄을 당한 사람은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놀라고! 놀라고! 또 놀라야합니다.

우째! 이런 일이 일어 날 수가 있단 말인가!

놀라야 합니다.

 

세상에 나 같은 놈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단 말이냐! 라고 놀라야 합니다.

구원 받음에 대하여 놀라지 않는 자는 신자가 아닙니다.

그 놀람이 감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십시오! 라고 하는 말은 틀린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라는 말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의 두 아들과 비교되는 한 사람을 주셨는데 그가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난 자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모습이 늘 피가 뿌려지는 언약궤 곁에 있는 것입니다.

언약궤란?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져 있는 궤란 말입니다.

그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한 증거물들이 들어 있어요.

그 증거물은 곧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위에 흠 없는 양의 피를 뿌립니다.

이는 흠 없는 양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이 용서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흠 없는 양의 죽음 때문에 산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양 속에 복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양이 이스라엘의 생명을 지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무엘이 언약궤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믿음인 것입니다.

사무엘이 선택이 되었기 때문에 이걸 안 것입니다.

그러니 언약궤를 떠날 수가 없지요.

사무엘이 다르게 살아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구원 받았기 때문에 다르게 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으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자기의 행동으로 신앙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판단합니다.

인간의 조건으로 복과 저주를 가늠하는 자는 신자가 아닙니다.

인간의 행실을 가지고 믿음을 판가름 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온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아 천국에서 살 자와, 멸망 받아 지옥에서 살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법에 따라 결정되어집니다.

천국으로 갈 사람은 성경 속에 천국에 간 사람들의 길을 따라 갈 것이고,

지옥으로 갈 사람은 성경 속에 지옥에 간 사람들의 길을 따라 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부류 다 하나님을 찾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도 신앙생활을 하고, 천국에 가는 사람도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지옥 갈 사람도 예수 이야기를 하고, 천국 갈 사람도 예수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암까마귀이고 누가 숫까마귀인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오늘 본문 속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인간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는 두 사람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은 지옥에 갔고 한 사람은 천국에 갔습니다.

지옥 갈 사람은 이렇게 살았고 천국 갈 사람은 저렇게 살구나 를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의 자식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만들었지만,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가 만들었어요.

그러니 인간이 낳은 자 중에선 처음 인간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만들었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만들지 않아요.

죄인은 죄인이 만든 겁니다.

 

그러니 이 땅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고 아담이 만든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태어납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고 죄인인 아담과 하와의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고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가인과 아벨이 실질적으로 최초의 인간이 되는 셈입니다.

인간의 조상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그런데 얄궂게도 두 사람은 제사를 통하여서 두 사람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달라집니다.

한 사람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고 한 사람은 인류 최초의 죽임당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제사는 열납하셨고, 한 사람의 제사는 거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둘 다 받았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두 사람을 다르게 대우하셨습니다.

제사 하나 때문에 한 사람은 살인하였고, 한 사람은 죽임 당하였어요.

아니 하나님은 무슨 심보로 두 사람의 제사를 다 받지 않고 차별했느냐 입니다.

외관상으로 보면 살인의 단초는 하나님이 제공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평하게 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인데 괜히 갈라놓아서 살인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인간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받고 안 받고는 하나님 마음인데 인간이 왜? 항의를 하느냐!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안 받으면 아! 안 받는구나! 라고 돌아가면 됩니다.

그럼에도 안 받는다고 사람을 죽이느냐! 이 말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아벨이 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최초에 하나님을 죽인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신약시대 하나님을 죽인 사건과 비교해 보세요.

신약 시대 하나님이 죽었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니까요.

즉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시켜 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누가 죽였습니까?

유대인들이지요.

 

예수님이 유대인들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을 죽인 놈은 누굽니까?

마귀지요.

 

그럼 가인과 유대인은 똑 같이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지요.

맞지요.

마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하나님을 죽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을 죽여요.

그게 그들의 본색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인을 악한 자에게 속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에게 속했으니 악한 행동을 하는 겁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는 마귀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속한 자는 등신같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임 당해요.

 

그런데 이런 살인 사건이 제사 사건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제사 속에 죽고 사는 문제가 담겨져 있으니 성경은 이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제사를 따져 보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렸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 시대엔 제사로 죽고 사는 문제가 결정 되었습니다.

 

그럼 신약에선 무엇으로 죽고 사는 문제가 결정 됩니까?

예수님이지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느냐? 안 믿느냐? 로 갈라지지요.

 

이러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가 아주 중요해 집니다.

제사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그냥 제사가 아니라 예수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제사 속에 예수님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제 술술 풀어지지요.

 

그럼 이제부터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를 예수님 이야기로 추적해 보기로 합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하고 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 를 드려서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더 나은” 것이란? 더 좋고 덜 좋은 질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옳은 것이란 말이다

우열(優劣)이 아니라 “바른 것” 이란 말입니다.

이건 질적으로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고 근본인 “정답이냐” “오답이냐” 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면 “가인은 틀린 답”을 적은 것이고,

“아벨은 옳은 답”을 적은 것이 됩니다.

볼펜으로 적었느냐? 연필로 적었느냐? 가 아니고 정답을 적었느냐 안 적었느냐의 싸움입니다.

시험관은 정답으로 판단하지 연필로 적었느냐 볼펜으로 적었느냐로 판단하지 않아요.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되지요.

이건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따져 보고 또 따져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럼 타임머신을 타고 인류 최초에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지낸 그 현장으로 가 봅시다.

 

창 4:2-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 하지 아니하신지라”

 

본문을 보니 가인과 아벨이 사는 방식이 다름을 보게 됩니다.

잘 들으세요.

중요한 말이니,,,

 

가인은 땅에 농사를 짓는 사람이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입니다.

농사는 악하고 양치는 것은 선하다고 하면 안 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술집은 악하고 기독교 서점은 선한 것이 아닙니다.

술집을 해도 예수 피를 믿으면 천당 가고, 기독교 서점을 해도 예수 피 안 믿으면 지옥가요.

중요한 것은 예수의 피를 믿느냐 안 믿느냐 입니다.

그러니 직업가지고 따지지 마세요.

 

직업은 그 사람의 취향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지 직업 자체로 옳으냐 그르냐를 따질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서 땅은 이미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곡식도 저주 받은 것이고, 양도 저주 받은 것입니다.

모두가 땅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땅에 속한 인간도 저주 받은 자이기에 좋은 인간 나쁜 인간이 없습니다.

1등 국민, 2등 국민, 3등 국민이 없어요.

 

암튼 가인과 아벨은 자기가 얻은 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제사를 지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셨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습니다.

 

여러분 제사를 왜? 지냅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지내는 거지요.

그럼 가인과 아벨 둘 다 제사를 지냈으니 죄인이란 말이지요.

가인과 아벨 간에 차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둘 다 죄인이라고 제사를 지냈으니까요?

그럼 인간 쪽에서 구원을 받고 저주를 받고 하는 조건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당연히 없지요.

그렇다면 구원과 저주는 어디에서 결정 됩니까?

제사이지요.

 

가인과 아벨을 보았을 때,,,,

그렇잖아요.

둘 다 죄인이라서 제사를 지냈어요.

그런데 하나는 하나님이 받았고, 하나는 안 받았어요.

 

그럼 하나님이 무얼 보고 결정 했을까요?

인간 보고 결정했나요?

아니면 제사보고 결정했나요?

제사보고 했지요.

 

자 묻습니다.

제사를 누구에게 지내는 겁니까?

하나님께 지내는 것이지요.

그럼 가인이나 아벨의 제사는 누가 결정 합니까?

하나님이 하지요.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느냐의 문제가 남겠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편의상 제사를 음식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뷔페 집에 갑니다.

그러면 각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릅니다.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 회를 좋아하는 사람, 튀김을 좋아하는 사람,,,각각 달라요.

 

여러 가지 음식들 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담아 오겠지요.

싫은 음식을 담아 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제일 좋아하는 순번대로 담아 와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야 기분이 좋고 잘 먹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금 가인이 차려 놓은 제사상과 아벨이 차려 놓은 제사상을 봅니다.

가인에 상엔 푸성귀만 가득합니다.

아벨의 상엔 고기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양고기를 그렇게 좋아하세요.

 

그러니 자연히 아벨의 상에 손이 갈 수 밖에요,,,

가인의 제사상이 정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하는 음식이 없었기 때문에 안 받은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했지요.

더 나은 것이란? 질적으로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고 옳고 그름의 정답의 문제라고,,,

 

2+2= 4입니다.

5+10= 15입니다.

이건 정답입니다.

동네 슈퍼에 가서 700원짜리 콜라를 한 병 샀습니다.

가게 주인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드렸어요.

 

거스름돈을 얼마를 받아야 합니까?

300원이지요.

그런데 가게 주인이 200원만 줍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100원 더 달라고 해야지요.

그래야 셈이 맞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주인이 에이 그 까짓것 100원 가지고 쩨쩨하게 그러냐고 하면 욕을 한 바가지 끌어 부어야 해요.

대판 싸워서 장사를 못하게 해야 해요.

이건 쩨쩨한 문제가 아니고 정답에 관한 문제에요.

그런 사람을 그대로 장사하게 해 뒀다간 어린아이나 힘없고 어수룩한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요.

그러니 그런 인간은 장사를 하지 못하도록 동네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지금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그래요.

하나님이 좋아하느냐? 안하느냐? 의 문제에요.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을 잔뜩 차려놓고 먹으라고 하면 욕하는 겁니다.

 

여러분 “올드보이” 란 영화 보았지요.

거기에 최민식이라는 배우가 감옥에서 15년 동안이나 만두만 먹고 살았어요.

만두라면 지긋 지긋해요

만두 만 자만 들어도 자다가 경끼 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 분을 초대해서 만두만 잔뜩 차려 놓고 많이 잡수세요!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이건 그 사람을 대접하는게 아니고 모욕하고 엿 먹이는 겁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취향에 문제가 있는 것이 되지요.

그럼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기 전에 먼저 무엇부터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뭘 좋아하는지를 먼저 아는게 급선무겠지요.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초대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최민식이 앞에 만두 내어 놓는 것과 같아요.

 

이런 것은 우리 삶 속에서도 알아 두어야 할 내용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초대한다고 하면 분명하게 콜을 해 주세요.

난 회를 좋아 합니다.

아니면 난 갈비를 좋아 합니다.

아니면 난 쌈을 좋아 합니다! 라고,,,

 

그러지 않고 알아서 하세요! 라고 하면 음식 만드는 사람 좋아하는 것만 해요.

왠줄 아세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제일 잘하기 때문입니다.

십중팔구 자기가 잘하는 음식을 뽐내려고 그 음식을 하게 되요.

 

그러면 초대한 사람을 위한 상차림이 안 되고 자기를 위한 상차림이 되고 말아요.

그러면 자기는 배터지게 실컷 먹어도 정작 초대 받아 간 사람은 수저 옮기는 훈련만 한 시간 동안 하다고 와요.

집에 돌아오다가 배고파서 짜장면 사 먹고 와요.

 

그러니 여러분이 누구를 초대하거들랑 꼭 물어 보세요.

혹시나 목사님을 초대하거든 목사님이 뭘 좋아하는지 사모님에게 물어 보세요.

이건 상식입니다.

체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앎입니다.

 

그럼 아벨은 어떻게 하나님이 양고기를 좋아하는지 알았는지가 궁금해지지요.

아벨은 하나님이 양고기를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 답이 본문 속에 나와 있어요.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하잖아요.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양고기 좋아하는지 알았대요.

그러면 지금도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이 뭘 좋아하는지 알 수가 있겠지요.

믿음을 받고 보니 하나님은 예수님만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하나님은 예수님 것만 받아요.

인간 것은 안 받아요.

왜? 그런가요?

인간은 죄인이고, 예수님은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땅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하늘에 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했지요.

땅은 하나님의 저주를 머금고 있는 곳이라고,,

그래서 땅에 것엔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없다고,,,,

 

그럼 잘 보세요.

 

영적으로 말합니다.

아벨이 드린 양이라는 제물이 땅에 겁니까?

하늘에 겁니까?

하늘에 것이지요.

 

예수님과 비교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이 받았으니까요.

그럼 양은 누구를 상징 합니까?

예수님을 상징하지요.

아벨은 예수님 앞세우고 나간 겁니다.

이해되세요.

 

그럼 가인은 무얼 앞세우고 나간 겁니까?

자기를 앞 세우고 나간 것이지요.

저주 받은 인간의 것을 앞세우고 나간 것입니다.

이걸 지금식으로 말하면 믿음으로 나가지 않고 행함으로 나간 겁니다.

행함 신앙은 인간의 것이기 때문에 땅에 것입니다.

 

믿음만이 하늘에 것입니다.

그럼 믿음 속에는 뭐가 담겨져 있습니까?

여러분 누구를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지요.

 

그럼 여러분의 믿음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어야 합니까?

예수님 것이지요.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담겨져 있어야 해요.

 

그러니 자기 안에 예수님이 하신 일이 담겨져 있는 사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예수님 것만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것이란? 십자가에서 흘린 피 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 하지 않는 놈들은 다 사기꾼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 이야기 하지 않고 밥 빌어 쳐 먹는 놈들이 어디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지요.

누굽니까?

목사들이지요.

 

목사가 아니고 밥사 입니다.

밥만 쳐 먹는 식충이들입니다.

00교회 목사 같이 인간들은 돈만 밝히는 돈 버러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들고 오는 그 예물을 가지고 증거 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벨이 정답을 썼다는 것을 그 예물을 가지고 증거해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아벨이 드린 예물이 무엇입니까?

양이지요.

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제물이지요.

 

하나님은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한다는 말을 명심하세요.

제사가 아니고 예물입니다.

아벨 때는 양이었지만 지금은 예수님이 예물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좋아하는 제물을 몰랐고, 아벨은 안 겁니다.

그래서 아벨은 제사상에 하나님이 바라는 제물을 드린 겁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상과 아벨의 제사상을 보니 아벨의 제사상에만 양고기가 올려져 있는 것을 보시곤 야! 아벨아! 너 어떻게 내가 양고기 좋아하는지 알았느냐! 고 기뻐하신 겁니다.

너 억수로 똑똑하네!

우째 알았지!

내가 양고기 좋아하는지를,,,,,

그걸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아벨에게 하나님은 양고기 좋아한다! 라고 알려 준 것입니다.

 

그럼 가인은 왜? 몰랐는데요.

그야 가인에겐 믿음이 안 주어졌으니 그렇지요.

그럼 가인 입장에서 하나님이 불공평하잖아요! 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맞아요.

하나님은 불공평해요.

즉 가인 입장에서 그렇단 말입니다.

 

아까 죄인의 운명을 지옥으로 가는 컨베어 벨트에 올려져 있는 신세라고 했지요.

그냥 가만 놔두면 다 지옥으로 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중에 얼마를 건져 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를 건져 낸 것은 누구를 위해서 건져 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건져 내 놓고 너희들은 나 때문에 살았다고 노래 부르라고 한 것입니다.

난 하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그러니 예수님 자랑하지 않는 자들은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는 자가 되는 겁니다.

가인처럼 믿음을 못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내어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하나님은 양이라는 제물을 좋아하는 것을 알았잖아요.

결국 믿음이 아벨에게 양이라는 제물을 바치게 해 준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아벨에게 있어 믿음이란? 양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잖아요.

아벨이 믿고 바란 것은 곧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이 되는 양입니다.

어렵지요.

맞아요.

어려워요.

 

들을 땐 아는 것 같다가도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그러니 한 번 들은 것으로 다 안다고 하지 말고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오늘 이렇게 듣고 집에 가서 또 블로그에 올려진 글을 보란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양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보고 또 보고 하여서 완전하게 소화를 시키세요.

살이 되고 피가 되도록 소화를 시키세요.

그래서 믿음에 어른이 되어야지 세상 것으로 인한 시험에 들지 않아요.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기쁘고 힘이 납니다.

 

자 그럼 여기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 하고 갑시다.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향하여서 가는 것이니 생각을 깊이 하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가인과 아벨이 사는 당시엔 인간들이 먹을 양식은 땅에 채소와 곡식이었습니다.

당시엔 고기를 먹지 않았어요.

 

고기는 노아 홍수 이후에 먹어도 좋다고 했거든요.

 

창 9:3-4=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그렇다면 여기서 아벨은 왜? 양을 쳤는지를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먹지도 못할 짐승을 왜? 길렀느냐 이 말입니다.

당시 짐승은 제사용으로만 길렀습니다.

가인은 먹고 살기 위하여 농사를 지었지만 아벨은 제사를 위하여 양을 길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인과 아벨을 아담과 하와의 아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을 천추의 한(恨)으로 여기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 좋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매불망 에덴동산만 그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만 생각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에덴동산 밖에서 이마에 땀을 흘리며 땅을 개간하고 살아가면서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그 날을 기리면서 하나님을 사모하며 살았을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입혀주신 가죽 옷을 입고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입니다.

다 늙은 하와를 보면서 여보! 할멈!

 

우리가 그 뱀 새끼한데 홀리지만 안했어도 지금쯤 하나님 하고 오순도순 이야기하고 있을 텐데,,

아이구! 우리가 등신이지!

하나님 말씀을 들었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면서 여보! 우리야 이미 죽을 날이 가까이 오니 희망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 새끼들 한데는 알려주어야 하지 않겠소!

 

그래서 시간 시간마다 가인과 아벨에게 에덴동산 이야기며,

하나님 이야기며,

선악과 이야기며,

생명과 이야기며,

자기들이 입고 있는 가죽옷 이야기를 이야기 해 주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자신들이 입고 있는 가죽 옷에 대해서는 더 잘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애들아! 이 옷은 말이야 하나님이 손 수 지어주신 옷이란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나서 두렵고 수치스러워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는데 하나님이 우리 꼬라지를 보고 이 가죽 옷을 입혀준 것이란다.

그러면서 너희들 절대로 이 옷을 벗으면 안 된다고 하셨단다.

이 옷을 입고 있어야 수치가 가려진다고 절대로 벗지 말아야 한다고,,,,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도 가죽 옷을 입혀 준 것이란다.

혹시라도 하나님이 너희들을 찾으면 이 가죽 옷을 입고 나아가야 하니까 절대로 벗으면 안 된다. 너희들은 이 가죽 옷을 입을 때마다 아! 내 수치는 이 가죽 옷이 가려주는구나! 생각해야 한다.

알았제!

예! 아부지,

 

가인과 아벨은 부모님의 이런 말들을 듣고 또 들으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인이 되어갔고 각자가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직업은 그 사람의 적성을 보여주는 시금석일 수가 있습니다.

농사가 좋은 사람은 농사일을 하고, 양치기가 좋은 사람은 양을 칠 것입니다.

가인은 농사가 좋아서 농사를 지은 것이고, 아벨은 양이 좋아서 양을 친 것입니다.

 

아벨은 양을 치면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양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알려주셨던 가죽 옷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애착을 가지고 돌보았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빌리면 가인은 믿음이 없어서 양의 비밀을 몰랐고, 아벨은 믿음이 있어서 양에 비밀을 안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농사 짓는 것을 포기하고 양을 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아벨의 삶에 모습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살았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믿음이 아벨로 하여금 양을 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옳은) 제사를 드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각자의 자기 믿음에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예물들을 통해서 각자의 신앙을 증거해 주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이 자신이 믿고 바라는 것의 실상이었고, 아벨은 양이 믿음에 실상이었습니다

가인은 먹고 사는 것이 사람에 의미였고, 아벨은 자신들의 수치를 가려줄 양을 치는 것이 삶에 의미였습니다.

 

이걸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 할 때로 해석하면 마귀는 떡을 먹고 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신약적인 의미로 보면 두 유형의 신앙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그 행위는 서로 같으나 그 목적은 전혀 다릅니다.

가인의 신앙은 먹고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고, 아벨의 신앙은 죄사함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신약적인 의미로 가인은 땅을 믿고 살아가는 자였고, 아벨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간 자입니다.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올인하고, 하늘이 전부인 사람은 예수님에게 올인합니다.

 

제사란? 자기 뜻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받으시는 분이 흡족하여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바라는 것으로 증명 될 일이지, 자기 열심과 정성으로 증명 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은 제사를 드려놓고 왜? 안 받아주느냐 고 항변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나타난 행위를 보지 않고 그 마음을 보십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에 왔고,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느냐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 교회 왜? 왔는데?

너! 예수 왜 믿는데?

묻고 계십니다.

여기에 답을 해야 합니다.

 

가인같이 땅만 바라보고 살다가 주일날 와서 예배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줄도 모르면서 예수님! 예수님 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믿음 있다고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아벨처럼 양의 가치를 알고 양을 쳐야지 양의 가치도 모르면서 양을 쳐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했느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리 정성을 쏟아도 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관심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것도 종교행위에 불과합니다.

직장에 가든지 살림을 하든지 교회 일을 하든지 어떤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알고 살아가면 그 자체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럼 아벨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가 있었을까요?

이는 아벨은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믿음을 준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속한 줄 압니까? 라고 물으실 수가 있을 겁니다.

믿음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믿음을 받았기 때문에 양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이 죽었지만 예물이 아벨의 믿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지금도 아벨과 같은 제사를 드리는 자들은 죽더라도 그 예물이 믿음을 증거해 줍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뭘 보고 아벨의 제사를 받았다고요?

예물이지요.

그 예물이 아벨의 믿음이라고 했어요.

 

그럼 지금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물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충성입니까?

전도입니까?

예수님의 피 입니까?

 

예수님의 피 이지요.

하나님 앞엔 예수님 피를 앞세우고 나아가야 해요.

그래야 여러분이 죽으면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저기 저 정낙원이 내꺼 맞는데요! 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다가 죽으면 그 십자가 피가 그 사람의 믿음을 증거해 준다는 뜻입니다.

아벨이 드린 양은 아벨의 믿음에 흔적입니다.

양이 흔적이 되어서 아벨이 믿음이 있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다가 욕을 들어 먹고 이단소리 듣거든 감사하세요.

아!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나중에 심판대 앞에서 증명해 주려고 저 인간을 증인으로 세우려고 이런 소리를 듣게 하구나! 라고 생각하란 말입니다.

 

여러분을 이단이라고 한 그 놈이 나중에 증인석으로 불려 나올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놈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이 합당한 것이 되고,

여러분을 이단이라고 한 그놈은 여러분을 이단이라고 한 그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판단되어 지는 겁니다.

바울은 이걸 알았기 때문에 복음 때문에 죽도록 고생한 것들은 예수의 흔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전쟁하는 사람의 몰골이 깨끗하면 안 돼요.

찢기고 터진 모습이 전쟁을 하는 군인의 참 모습입니다.

복음 전하다가 굶어도 보고, 욕고 먹어 보고, 이단 소리도 듣고, 재수 없는 인간이라는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그런 것 안 들으려고 하면 안 돼요.

 

예수님께선 상하고 찢긴 흔적들뿐인데 신부라는 성도가 멀쩡해선 안 되지요.

 

계 19:11-13=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 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장차 예수님께서 피 묻은 옷을 입고 오시는데 양복 입고 마중 나갈래요?

그러면 큰 일 납니다.

예수님처럼 피가 범벅이 된 옷을 입고 나가야 해요.

 

신랑은 피 묻은 옷을 입고 오는데 신부가 될 사람이 피 한 방울 안 묻은 깨끗한 양복을 입고 나간다면 그는 신부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신부가 될 성도들을 아벨처럼 예수님 피 이야기 하다가 맞아 죽게 만드는 겁니다.

 

지금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죽이지 못하지만 교회에서 죽임당해요.

교회에서 이단소리 듣고 출교 당하는 것이 죽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간 같은 교회와 무당 같은 목사들에게 욕을 안 들으려고 해서는 안 돼요.

마귀가 먼저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을 알아보고 핍박을 합니다.

 

요 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게 속하여서 미움을 받는다고 미리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일이 당하면 당황하지 말라고,,,,

이를 예수님께서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나님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할 것이고 만약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하나님 앞에서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사람 앞에 시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면서 너희가 총독과 임금 앞에 붙잡혀 갈 텐데 그 때 무슨 말을 할지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총독과 임금이 지금은 교단이고 노회이고 큰 교회 목사들입니다.)

성령께서 다 말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시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총독과 임금이 뭐라고 하겠어요.

너 예수 십자가에 피 이야기 자꾸 말할래? 안 할래? 물을 것이 아닙니까?

예수를 증거한다고 붙잡혀 왔으니까요.

 

그럼 당연히 인간의 본성은 베드로처럼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여야 되요.

그런데 자기 죽는 줄도 모르고 난 예수를 부인하지 못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 말은 누가 한말이겠습니까?

성령이 하시는 말이지요.

 

그런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들이 나를 믿는다는 것조차 성령이 다 간섭을 할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앞으로 그런 일이 닥치면 어쩌지 미리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 것이 예물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피가 나중에 우리를 너 예수의 종이 맞다고 증거 해 줄 것입니다.

 

확인하는 차원에서 묻습니다.

예물이 누구라고요?

예수님입니다.

아벨은 양을 바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이처럼 제사에 있어서 예물이 중요한데도 가인은 왜? 몰랐을까?

이는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일 3;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악한 자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을 안 준 겁니다.

안 가르쳐 준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아는 예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가인이 만약 아벨처럼 알았으면 아벨에게 양을 빌려서라도 드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천국에 비밀은 너희에겐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겐 감추어 졌다고 했지요.

지옥 갈 놈들은 알아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지옥에 갈 놈들에겐 예수님은 비밀로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뻔히 보고도 몰랐어요.

하나님이 가인처럼 안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아벨을 가지고 장차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 세상에서 벌어질 일들을 미리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 성도들이 예수를 모르는 놈들에게 죽임 당할 것을 미리 말해 준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구약의 성도들을 통해서 자기가 갈 길을 미리 알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악에 속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할 것임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세상이 악한 자에게 속하여서 심판 받아야 할 곳이란 것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가인같이 육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 신이 그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벨 속에는 장차 하나님께 속한 분이 와서 당하여야 할 아픔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아벨은 그냥 아벨이 아니고 예수님을 보여주는 아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이미 선취적으로 예수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믿음이 그렇게 살게 한 것입니다.

아벨 속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담겨져 있는 동시에 성도들의 모습도 담겨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벨은 최초의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벨 속에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성도들의 삶에 모습을 정형화시켜 놓은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을 것인가 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운명은 곧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인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이 길을 걸었고, 예수님도 이 길을 걸었고, 12제자들이 이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을 일컬어 도살당할 양 같은 운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롬 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하나님은 의인들을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함으로서 세상이 악에 속한 것임을 고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살아가는 삶에 가치관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벨처럼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과 가인처럼 보이는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자의 삶이 그가 가야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하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벨 속에 예수님을 보시고, 아벨 속에 자신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만약 아벨처럼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빈틈없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벨과 같은 대접을 받도록 끌고 가실 것입니다.

 

믿음이 아벨을 끌고 갔듯이 말입니다.

이런 일도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늘에 로또에 당첨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성도들이 이런 복을 천사들로 부러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소원 하나만 전하고 마칩시다.

 

계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소원은 자기 백성들이 아벨처럼 죽임 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2천 년 전 사도요한에게 가서 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선배들이 천국에서 어서 잘 죽으라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저기 보세요.

아벨이 손을 흔드네요.

그 옆에서 모세도 손 흔들고 있어요.

그 옆에 아브라함도 있고, 엘리야도 있고, 다윗도 있고, 바울도 있고 베드로도 있고, 세상에 거지로 살았던 나사로도 손을 흔들고 있네요.

빨리 죽어서 제대하고 오라고 합니다.

 

부럽지 않으세요.

부럽지요.

하지만 현실은 아파요.

그래서 기도하라는 겁니다.

 

그럼 아벨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다가 교회로부터 이단이라고 목 베임 당하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벨과 같은 이 놀라운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짐을 감사합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막상 삶 속에서 이런 일이 닥치거든 흔들리지 말고 이겨낼 수 있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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