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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성경강해)5강. 부르심과 순종 (히 11:8-10)

by coroa 2022. 2. 22.

 

하늘빛사랑 https://blog.daum.net/day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5강. 부르심과 순종 (히 11:8-10)

-.정낙원 목사

 

히 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함은 민족과 혈통을 초월하여 믿음을 받은 자들의 조상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속에는 두 족보(族譜)가 담겨 있습니다.

육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조상이면서 영적으로는 믿음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두 민족의 조상이 되는 셈입니다.

아브라함을 구약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은 것은 육적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영적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를 계시(啓示)하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표면적 이스라엘”과 “이면적 이스라엘”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롬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표면적(表面的) 이스라엘은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혈통적 이스라엘을 말하고,

이면적(裏面的)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처럼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라면 믿음이 아브라함과 동일하여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동질의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혈통으로만 생각하여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고 예수님 앞에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민의 증표와 같아요.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대단한 자긍심으로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너희들은 저주 받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이스라엘 입장에선 엄청난 망언입니다.

 

마 3:7-9=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세례요한의 눈에 비친 유대인들은 독사의 새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침없이 저주를 받는다고 독설을 퍼 부었던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신앙이 아브라함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껍데기만 아브라함 후손이었지 그들의 신앙 속에는 전혀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돌을 가지고도 아브라함 후손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선 혈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해서 아브라함 후손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져야 아브라함 후손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설적으로 찬물을 끼얹는 소리를 합니다.

아브라함이 너희 아비가 아니라고 합니다.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합니다.

 

너희가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과 같은 행사를 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말로는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과 같은 정신이 없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 증거를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알아보았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몰라본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과 같이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조상이라고 자랑하는 아브라함은 나에게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듣기에는 너무도 기가차고 황당한 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아니 나이가 오십도 안 된 놈이 2천 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을 어떻게 보았단 말이냐? 라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들의 말이 백번 맞고 예수님의 말이 틀렸습니다.

시간이라는 것을 가지고 말하면 예수님과 아브라함은 약 2천 년 정도의 시간이라는 간극(間隙)이 벌어져 있습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시간관으로서는 2천 년 전과 지금은 엄연히 다른 시대입니다.

 

아브라함과 예수님은 시간상으로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어요.

그래서 한 줄로 쭉 늘어져 있는 겁니다.

일렬로 쭉 펼쳐진 시간관으로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도무지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묵시적인 사건으로 보면 아브라함 시대나 예수님 시대나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서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도 내 때를 보고 즐거워 하셨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묵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수평적이지만 묵시는 수직적이에요.

역사는 순서적으로 진행이 되어지지만 묵시는 사건적으로 일어나요.

 

역사라는 것은 묵시 속으로 들어가면 항상 현재입니다.

그러니 시간상으로 창세전도 묵시 안에선 현재이고 장차도 현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전에도 계시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현재로 계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현재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현재 살아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미래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고 항상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묵시 안에서는 아브라함 시대나 예수님이 오셨던 시대나 동일한 영역 안이라서 항상 현재로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 즐거워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시대와 시간상으로 4천 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나 지금 이 시대 성도는 믿음이라는 측면에선 동일한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어느 시대나 약속이라는 틀 속에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4천 년 전에 있었던 아브라함의 사건을 지금 이 시대 성경 속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현재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나의 이야기로 보라는 말입니다.

그럴 때 성경은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성경 속의 예수님이 나의 예수님이 됩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예수가 나의 예수가 되어야지 남의 예수가 되어선 안 됩니다.

남이 만난 예수는 그 사람의 예수이지 나의 예수 일수는 없습니다.

나의 대속주가 되셔야지 남의 대속주가 되어서는 나에겐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은 내가 받아야 하는 것이지 남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밥을 먹어야 배가 부릅니다.

남이 아무리 내 대신 밥을 먹어 주어도 난 여전히 배가 고픕니다.

배가 부르려면 내가 밥을 먹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만난 그 예수를 내가 만나야 하는 겁니다.

내가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를 만나지 않고서는 성경은 영원히 남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은 목사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난 이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라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성령을 마신 성도는 목사님 맞습니다!

나도 그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린 한 성령을 마신 한 형제임을 고백하게 되고 예수님의 피 안에서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이 만났던 그 여호와를 만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구원을 내가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간 천국에 내가 가야 합니다.

 

4천 년 전에 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4천 년 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어떻게 응답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 이야기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고 어떤 모습으로 반응을 하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여호와가 찜 했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선택 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본질이 나옵니다.

믿음 속에는 우리 것이 없고 여호와께서 하신 일만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습니다! 라고 할 때는 여호와께서 나에게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를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아! 그렇지 내가 너에게 그런 일을 했지!

맞아!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지!

그래 내가 너 대신 십자가에 죽었어!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나에게 약속 했잖아요!

예수님이 피와 살을 주시면서 구원해 주신다고 약속 했잖아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으니 우리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으로 된 것입니다.

부르심으로 구원이 된 원리 속에는 두 가지 변할 수 없는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요모조모 따져 보고 부르시지 않고 무조건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당시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죄인들입니다.

 

죄인이 더 좋은 죄인이 있고 더 나쁜 죄인이 없습니다.

다 동일한 죄인입니다.

더 나쁜 죄인이 있고 덜 나쁜 죄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악당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서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마치 여러 사람들이 있는 중에 “어이! 아브람 이리로 와!” 라고 부른 것입니다.

아브람은 얼떨결에 불려 나간 것입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여호와가 불렀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 백성이 되는 길이 차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되는 길은 여호와께서 불러 주셔야만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의 신앙에 허구성이 백일하에 다 드러납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자연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하나님 백성의 근거로 붙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혈통이 하나의 조건이 됩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꼴값을 떤 것도 모두가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조건을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방인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유대인이라는 민족의 신(神)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구원해 주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았다면 유대인들은 혈통으로 나와선 안 됩니다.

아브라함처럼 부르심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았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들고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불러서 하나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것만 자랑 할 줄 알았지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아브라함 후손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너희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 후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아니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누가 아브라함 후손인데? 라고 묻는 말 속에는 누가 너희를 불렀는데! 이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르지 않았는데 너희가 어떻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느냐?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아브라함이 아니고 마귀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시지 않으면 모두가 마귀의 자녀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중에서 12 제자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들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입니다.

나머진 모두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물론 나중에 성령이 임하고 난 후로는 12제자를 통해서 유대인 중에서도 부르심을 입은 사람도 있습니다.

 

사도바울 같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아니냐? 라는 논쟁 중 일 때만 해도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지 못하였을 때이므로 마귀의 자녀였었습니다.

여기서 마귀의 자녀라 함은 잠시 마귀의 권세 아래 놓여 있었다는 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마귀에게 종노릇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갈라디아서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5=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까지 율법 아래 있다가 속량하셨다고 합니다.

율법 아래 있다 함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마귀 아래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잠시 잠간 동안 마귀에게 종노릇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서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사단의 권세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찾아 내셨다고 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후손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바로의 종으로 있던 것은 모세를 보내서 끄집어 낸 것처럼 끄집어냈습니다.

우린 모두가 예수님께서 끄집어 내 주어서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자들입니다.

그리니 우리의 자유 속에는 항상 끄집어 내 주신 분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항상 감사로 남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끄집어내 주신 분을 사랑하며 끄집어 내 주심에 대한 감사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속에는 우리 자랑이 하나도 없고 오직 예수님 자랑으로만 가득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의 상황을 한번 살펴봅시다.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아브라함을 부르심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여호와 하나님” 이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불렀다고 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불렀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바울이 성도를 죄에서 속량하는 일을 “하나님” 께서 “그 아들” 을 보내서 하셨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과 “그 아들” 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버지” 를 말하고, “그 아들은 예수님” 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엘로힘 하나님” 과, “여호와 하나님” 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고 아들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아들을 믿는 것이지 아버지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말입니다.

신앙의 근본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인간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인간들이 만날 수 없도록 차단해 놓았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만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을 대신 내세워서 인간을 만나 주십니다.

아들을 내 세웠다 함은 하나님은 아버지란 뜻입니다.

죄인은 아들을 통해서만 아버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죄인은 아들은 만날 수가 있어도 아버지는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반칙이고 불법입니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의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아브라함에게 엘로힘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찾아 간 것이 아니고, 아들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찾아 간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장을 보면 창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때 나타난 하나님은 “엘로힘” 하나님이십니다.

“엘로힘” 하나님이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강하신 경외하여야 할 최고의 신” 이란 뜻인데 이는 곧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구원하는 하나님” 이란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엘로힘은 성부 하나님 즉 아버지” 을 말하고!

“여호와는 성자 하나님 즉 그 아들 예수님” 을 말한다고 보면 됩니다.

죄인들의 세상에서 죄인들과 부대끼면서 일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참고로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 라는 사이비 교회가 있는데 이곳에선 엘로힘은 복수로서 신들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두 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도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엘로힘이라는 말은 통칭 신(神)을 말하는데 신(神)은 곧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아버지 하나님을 뜻한다고 보면 됩니다.

아버지도 신(神)이고,

아들도 신(神)이고,

성령도 신(神)입니다.

 

이건 인간의 지혜로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못돼요.

괜히 원어를 가지고 아는 척 장난치는 사람들이 많으니 현혹당하지 마세요.

누가 이런 것 가지고 따지거든 그냥 흘러 보내세요.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하여 기록하였다고 하셨으니 예수님 이야기로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안상홍 증인회 같은데선 봐라 엘로힘 하나님이 복수로 되어있으니 하나님이 둘이다.

둘이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고 했는데 알다시피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만들지 않았느냐 이는 곧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것을 이 땅에 그대로 만드셨는데 이 땅에도 아버지 하나님이 있고, 어머니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은 바로 안상홍이고 어머니 하나님은 안상홍의 아내인 장길자 라고 합니다.

 

안상홍이가 죽을 때 장길자가 하나님이라고 했대요.

참 웃기지요.

코메디 같지요.

그런데 이런 코메디 같은 말에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가고 있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영적 세계란 인간의 이성과 지혜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똑똑 하다고 생각하는 많이 배우고 똑똑하다고 하는 대학교수들도 넘어가는 겁니다.

안상홍 집단이나 통일교 같은 집단을 보면 그 속엔 사회적으로 많이 배우고 똑똑한 엘리트들이 엄청 많아요.

 

이는 모든 인간은 사단의 권세 아래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인이라고 하는 교수들이 왜? 점치러 가고 무당을 찾아가 부적을 써가지고 다니는지 아세요.

세상 신(神)이 그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하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일인 줄 아세요.

이것도 모른 채 예수 믿는다고 깝쭉되면 안돼요.

기적 중에서도 최고의 기적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걸 알고나 하고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손에 최고의 보화(寶貨)를 잡고서도 이게 뭔가? 라고 하면 안돼요.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절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담긴 비밀을 알 수가 없어요.

 

암튼 머리 복잡하니 쉽게 쉽게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은 곧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 왔다는 것은 구원하러 왔다는 뜻입니다.

 

구원이란? 건져 낸다는 뜻입니다.

그럼 지금 아브라함이 어디엔가 붙잡혀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정작 아브라함 본인은 몰라요.

태어날 때부터 죄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겁니다.

 

만약에 태어 날 때는 자유자로 태어났다가, 한 20년 자유자로 살다가 죄에게 붙잡히면 과거 자유를 맛 본 것이 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탈출을 시도 하겠지만, 애초부터 자유가 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태어나서 죄에게 종노릇 하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여러분 모세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해 주겠다고 하니 뭐라고 했습니까?

오히려 불평하지요.

가만히 두라고 합니다.

괜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 괴롭히지 말라고 해요.

 

아니 애굽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할 이유를 모르는 겁니다.

사람마다 팔자가 있는데 내 팔지는 이런가 보다 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서 끄집어 오라고 합니다.

너희들은 원래 바로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고 빼내 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서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 오라고 한 것처럼 인간이 타락하고 난 뒤부터는 “엘로힘 하나님” 은 숨어 버리시고, “여호와 하나님” 이 전면에 등장하셔서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구원하는 일을 맡기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가 곧 신약의 예수님이 되겠지요.

맞아요.

그렇게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니 구약성경을 읽을 때 여호와라는 이름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바꿔서 보시면 됩니다.

그럼 예수님이 노아 시대도 계셨고, 아브라함 시대도 계셨다는 것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을 여호와가 부르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불렀다는 뜻이 되지요.

이러면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도 나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하는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니지요.

 

이렇게 되면 자연히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은 신약의 죄인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이 지금 아브라함을 구원하시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럼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하는 것도 알 수 있어집니다.

 

죄인이 구원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고 불러 주셔야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구원자 되신 예수님이 찾아 오셔야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니시면서 12제자를 너! 너! 너! 하고 부르신 겁니다.

 

아까 여호와께서 부르심에 두 가지 원리가 있다고 했지요.

첫째는, 인간의 조건보고 부르시지 않았다고 했지요.

둘째는, 인간의 조건에 의해서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인간의 조건에 의해서 구원이 취소 될 수가 없습니까?

이는 부르심이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으로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조건으로 탈락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듭니다.

하나님과 성도를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럼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의 상태를 보고 호적(戶籍)에 올립니까?

보지 않고 올립니까?

보지 않고 올리지요.

 

아니 어느 부모가 어린 핏덩어리를 낳고 아이에게 야! 앞으로 널 십년 정도 키워보고 아들이 될 것 같으면 내 호적에 올리고 그렇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 라고 하진 않잖아요.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는 어떤 조건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흐르는 피로 되요.

피가 같으면 그 어떤 것으로도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 관계는 끊어지지 않아요.

설사 호적에서 파 냈다 할지라도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 관계는 영속(永續)됩니다.

 

성도의 구원을 아버지와 아들로 말하는 것은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자식도 자신이 잘못하면 부모님 호적에서 빼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식이 잘못하면 매는 맞아요.

그러나 호적에서 빼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성도에게 있어 죄란? 자기 꼬라지로 구원을 뗐다 붙였다 하는 것입니다.

자기 꼬라지 보면 천국과 지옥은 마치 청룡열치 타듯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게 됩니다.

아침에는 천국이고 저녁엔 지옥이 됩니다.

자기 꼬라지를 보고 구원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 이러면 끝입니다.

이미 종결되었어요.

이게 믿어져야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면전에 두고 자주하고 부인한 베드로 같은 인간도 넉넉히 천국에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꼬라지 보고 후회하여 자살한 가룟유다는 지옥에 가 있는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자살한 이유는 예수님을 팔았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입니다.

이게 가룟유다가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성도가 양심에 가책으로 번민하는 것은 죄이고 사치입니다.

 

죄인이 무슨 가책을 해요.

죄인은 가책할 자격이 없어요.

후회하고 가책한다는 것은 “나도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자기 의(義)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건 죄 짓고도 뻔뻔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알라는 말입니다.

자기 한계를 알라는 뜻입니다.

 

죄인은 잘 할 수 있을 텐데! 가 아니라 무얼 해도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죄인에겐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가 없어요.

그러니 무슨 잘못을 했다고 교회에 오네! 안 오네! 꼴값 떨지 마세요.

잘 할 수 있으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게 무슨 흠 잡힐 일을 저지르고 교회 안 오는 인간들입니다.

흠 잡힐 수 밖에 없으니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지,

흠 잡힐 일이 없으면 예수님이 필요가 없어요.

교회는 난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오는 곳입니다.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 오면 안 되고 절에 가야 해요.

절에는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항상 반성하게 하고 착해지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인간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죽이는 곳입니다.

그러니 착한 사람 되려고 하지 말고 예수를 믿으세요.

무슨 밀인지 잘 새겨서 들으세요?

 

암튼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여호와의 부르심으로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아브라함처럼 여호와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반응이 나타나는지 아브라함을 가지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여호와로부터 부르심을 입을 때 모습으로 돌아가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창 12:1-5=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여호와께서 어느 날 아브람에게 찾아 갔습니다.

그리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이에 아브람은 말씀에 순종하여 여호와께서 지시하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창세기에서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가야할 땅을 분명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히브리서에서는 전혀 다르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동일한 성경인데 창세기의 증거와 히브리서의 증거가 달라요.

 

그러니 성경은 문자 풀이하는 식으로 읽으면 안돼요.

성경이 그래서 어려워요.

그래서 베드로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을 살펴봅시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은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 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고 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은 모른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식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 나선 것입니다.

무작정 따라 나설 때는 반드시 따라 오라는 분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서 야! 아브라함아 날 따라와! 그랬어요.

생면부지 처음 보는 분인데 아브라함이 예! 하고 따라 갔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생면부지 처음 보는 여호와를 믿는 믿음이 없으면 행동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걸 히브리서는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으로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간 것입니다.

아브람이 따라 간 것이 아니고 믿음이 끌고 간 것이에요.

 

그러니 히브리서에서는 항상 누가 어떤 일을 하여도 그 앞에 믿음으로 누가 뭘 했다! 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을 끌고 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주어서 여호와의 말에 순종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따라간 것이 아니고 믿음이 소 고삐 끌듯이 끌고 간 것입니다.

믿음이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따라 나서게 한 것입니다.

 

창세기는 분명하게 가나안 땅이라고 말해 주었는데 히브리서에서는 모른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모든 사건을 믿음의 눈으로 탐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보니 모든 것이 이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니 이런 일들이 가능해 지더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이 하나님은 양고기 좋아 하는 것을 알았고,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것을 알았고,

믿음으로 노아는 또라이 소리 들어가면서 방주를 지었고,

믿음으로 아브라함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무작정 하나님 명령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훌쩍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는 이 사람들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들을 본받으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이렇게 불가능한 일들을 하게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처음 시작 할 때 한 말을 기억해 봅시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먼저 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뭔가 있기는 있는데 인간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믿음이 오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아벨에게 믿음이 오니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게 되고,

에녹에게 믿음이 오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알게 해 주고,

노아에게 믿음이 오니 방주를 짓게 되었고,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오니 하나님 약속이 눈에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고 합니다.

이는 보이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에게 적용해 봅시다.

창세기에선 아브람에게 분명하게 가나안 땅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합니다.

 

그럼 이렇게 해석이 되겠지요.

창세기에서 말하는 가나안 땅은 보이는 땅이고,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땅은 보이지 않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 세상의 땅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고 합니다.

 

히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城)을 바랐음이니라”

 

하나님이 지으실 성(城)이란 다름 아닌 천국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선 애초부터 가나안 땅을 주려는 것이 아니고 천국을 주려고 하였다는 것이 됩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의 예표적인 땅입니다.

 

갈대아 우르나 애굽에서 보면 가나안은 보이지 않는 땅이에요.

천국과 같아요.

그러니 하나님은 가나안을 가지고 천국을 알려 주는 시청각 교제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어도 정착하지 못하고 자식들과 함께 장막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히 11:9-10=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 장막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가나안 땅이 목적지가 아니란 말입니다.

장막에 거하였다 함은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았단 뜻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어도 늘 떠날 준비로 살게 한 것이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으로 하여금 보이는 땅에 정착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고 한 약속에 땅이 이 세상에 있는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천국이구나! 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땅에 정착하지 않고 언제라도 떠날 자세로 텐트를 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을 떠나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믿음에 성질을 알 수가 있습니다.

믿음은 어느 시대나 동일하기 때문에 항상 동일한 성질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였으니 지금도 믿음을 받은 성도는 아브라함과 같은 정신 자세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장막 생활을 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받았던 그 믿음을 받은 성도라고 한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보이는 세상을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요! 라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법칙 하나를 보게 됩니다.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세상 것을 보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붙잡도록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복음 속에는 땅에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면서 육신에 복을 달라거나 세상에 복을 추구한다면 그 복음은 다른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탈출시키기 위함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버리게 하려고 죽으셨습니다.

십자가 속에는 육신에 행복과 세상에 쾌락이 없습니다.

십자가 속에는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들어가 있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 들어가 있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것으로 희비(喜悲)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십자가를 안다면 궁핍에 처하여도 풍부에 처하여도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고 취하시는 자도 여호와시오 라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불행해하는 것은 보이는 세상 것을 움켜잡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몸 뚱아리를 움켜잡고,

자식을 움켜잡고,

자존심을 움켜잡고,

자기 체면을 움켜잡고,

특히 목사들은 교회를 움켜잡고자 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물은 항상 목마르게 하지만 자신이 주는 물은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게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세상을 바다라고 합니다.

세상이 주는 바닷물은 먹으면 먹을수록 갈증만 유발시킵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쉼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서 세상에 대하여 죽고, 죽으면 죽지! 라는 자세로 살면 의외로 마음에 평안이 넘칩니다.

 

마귀는 눈에 보이는 것을 붙잡도록 합니다.

세상 것으로 미혹합니다.

이 땅에 것으로 땅을 떠나지 못하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범죄하자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 라고 저주를 했습니다.

이는 마귀의 본질은 흙이란 말입니다.

흙이란? 육을 말하고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니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무엇을 해도 땅에 것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가지고도 땅에 것을 구합니다.

즉 십자가를 이용하여 육신의 유익을 도모 한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이 땅에서 장막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말뚝을 박고 건물을 지어 주소(住所)지를 땅에다 붙들어 매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땅에 주소(住所)지를 두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복이라고 붙잡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이는 것을 따라 갔다가 망한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같이 따라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갈라집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질 때 롯은 눈에 보기에 좋은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창 13:8-13=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 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먼서 선택권을 줍니다.

네가 좌(左)하면 내가 우(右)하고!

네가 우(右)하면 내가 좌(左)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롯은 눈에 좋게 보이는 땅을 선택합니다.

롯이 선택한 땅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평지 성읍입니다.

한마디로 살기 좋은 곳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땅은 여호와 앞에 악한 죄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물론 롯은 모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머무릅니다.

알다시피 가나안 땅은 평지가 아니고 산악 지대입니다.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의 차이는 농사짓고 사는 방법이 다릅니다.

 

신명기 11장을 봅시다.

 

신 11:10-12=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애굽에서는 자기 노력으로 농사를 지으면 됩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농사를 지어 주시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애굽은 내 힘으로 사는 곳이고 가나안은 하나님 도움으로 사는 곳입니다.

 

농사짓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애굽은 평지라서 물을 저축했다가 필요하면 퍼 다가 농사를 지으면 됩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산악지대이므로 물을 가둘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철을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야만 농사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가나안에선 인간의 계획과 인간의 재주가 전혀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풍년을 주시고 안 주시고는 하나님 뜻입니다.

흉년을 주면 배고픈 대로 살아야 하고, 풍년을 주시면 배부른 대로 살아야 합니다.

배가 고프나 배가 부르나 모두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노력으로 사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선 자기 생각은 탐심입니다.

주면 주는 대로 사는 것 밖에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선 하나님께서 먹고 살게 해 주실 것이란 믿음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 땅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일컬어 약속의 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약속을 믿지 못하면 살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잘 살고 못 살고 모두가 하나님의 분복(分福)이라고 믿고 살아야 합니다.

 

이 시대로 적용하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풍부에 처할 수도 있고 비천에 처할 수도 있다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이에서 벗어나는 것은 탐욕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롯의 신앙이 드러납니다.

롯은 애굽과 같은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는 땅을 택하였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되는 땅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을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롯은 보이는 세상을 따라 갔고,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따라갔습니다.

 

지금도 믿음이 없는 자는 보이는 세상을 지향하면서 화려함을 쫓아갑니다.

잠시 잠간 후면 불타 버릴 허상임을 모릅니다.

세상의 화려함이 멸망의 길임을 모릅니다.

 

잠 16:25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롯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좋은 곳을 쫓아가다가 망하였습니다.

이게 믿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안목이고 지혜입니다.

롯이 본 세상은 애굽이라고 했으니 곧 이 세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 세상의 화려함에 빠져들고 맙니다.

세상에 성공이 곧 하나님께 성공이 아니고 세상에 실패가 곧 하나님께 실패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세상은 우리가 정착할 곳이 아니고 우리가 정착할 곳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세상을 아브라함처럼 장막에 거하면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성공된 삶입니다.

 

성경은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상을 붙잡도록 하십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하여 잠시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것들은 신기루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믿음이 여기까지 이끌고 왔습니다.

믿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이끌고 왔습니다.

앞으로도 믿음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속으로 밀어 넣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정과 욕심을 죽이게 하는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안식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하여서 우리가 갈 곳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임을 알게 해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처럼 끌고 갈 때 감사함으로 따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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