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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성경강해)9강. 야곱의 지팡이와 믿음 (히브리서 11:21)

by coroa 2021. 12. 5.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9강. 야곱의 지팡이와 믿음 (히브리서 11:21)

-.정낙원 목사

 

히 11:21절.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지난 시간에는 이삭이 자식을 축복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야곱이 자식들을 축복하는 이야기를 살펴볼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한 사건과,
지난 시간에 살펴본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비슷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모습으로 행하여졌음을 보게 됩니다.
이삭이 눈이 어두워서 야곱을 축복한 것이나,
야곱이 눈이 어두워서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한 것이나 흡사합니다.
겉보기에는 둘 다 눈이 어두운 상태에서 축복하였다는 것에는 동일합니다.
 
이삭은 장자와 차자를 몰라보았지만,
야곱은 장자와 차자를 분명하게 알아보았어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는 속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한 것은 의도적으로 하였어요.
 
이삭은 장자인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중간에 리브가가 개입하여서 차자인 야곱이 축복을 받았어요.
하지만 야곱은 요셉이 장자와 차자가 뒤바뀌었다고 알려 주어도 다 안다고 하면서 의도적으로 요셉의 뜻을 거부하고 차자에게 축복을 했어요.
 
이삭은 자기 뜻대로 못하였고,
야곱은 자기 뜻대로 하였어요.
둘 다 믿음으로 축복을 하였어요.
이삭에게는 믿음이 이삭의 뜻대로 하지 못하도록 간섭을 하였지만,
야곱에게는 믿음이 요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대로 하게 하였어요.
 
어째서 믿음이 이삭과 야곱을 다르게 간섭을 하셨을까요?
이는 이삭과 야곱의 사건은 서로 다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차자인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야곱은 장자와 차자를 뒤바꾸어서 축복하여야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차자인 야곱은 반드시 장자의 복을 받아야지만 하였으며,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장자와 차자가 뒤바뀌어야만 했어요.
 
왜 그랬을까?
그 원인을 추적해 봅시다.
야곱은 엄마 태중에서 이미 복을 받아야 할 자로 약속이 되어 있었어요.
그러므로 이삭이 축복하기 싫어하였음에도 믿음이 간섭해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도록 일을 진행한 것입니다.
 
세상 이치로 본다면 므낫세가 장자이므로 장자의 복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믿음이 야곱으로 하여금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축복을 하게 하였어요.
이는 하나님은 인간의 방식대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야곱을 간섭해서 장자와 차자를 뒤바뀌어서 축복하게 한 것입니다.
 
야곱이 지팡이를 의지하여 장자와 차자를 뒤바꿔서 축복한 것은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이 뒤바뀌어질 것을 보여주는 계시사적 사건이에요.
구약의 장자권은 신약의 구원과 같아요.
장자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받을 자에요.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과 같아요.
창세전에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로 낳아진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로 작정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로 낳아진 자들이 장자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지팡이로 장자와 차자가 바뀌었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이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성경이 어려운 것은 많은 부분이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사건의 내용이라 할지라도 그 의미를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늠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어떤 일이든지 고정화하려고 해요.
이것이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우상성이란? 신의 일하심을 인간들이 정해 놓은 틀 속에 고정화 시키는 것입니다.
 
인간들을 불확실한 것은 두려워해요.
즉 본인이 경험하지 못한 것은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무슨 일이든지 과학적이냐를 내세우는 것은 그것이 검증된 것이냐?
검증되지 않은 것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결 신앙을 낳게 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복 받는 비결이나 은혜받는 비결을 알려 달라고 합니다.
비결 신앙이란? 방법론을 말해요.
정해 놓은 법칙 안에 들어오면 반드시 들어주어야 해요.
그래서 인간들의 정성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것을 신앙의 교리로 하여서 가르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말은 인간들이 지극정성으로 땅에서 빌면 신은 그 정성을 보아서 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
또는 교회에 충성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하는 신앙은 인간이 신을 부리는 것이에요.
인간이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어요.
인간이 복 받을 짓을 하면 하나님은 복을 주어야 하고,
인간이 저주받아야 할 짓을 하면 하나님은 저주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신이 인간의 손에 조정 당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겁니다.
 
세상 종교는 인간들이 신을 만들었어요.
인간들이 신이라고 칭하면 신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어요.
이걸 신의 개념화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나무가 벼락을 맞고서 뒤 틀린채로 살아 있어요.
그럼 인간들은 그 나무를 영험하다고 여겨요.
왜냐하면 벼락을 맞고도 살아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인간들은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신목이라 여기고 그 아래서 복을 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신을 만들고 자기가 만든 신을 섬겨요.
인간들이 신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걸 역리라고 해요.
세상 종교는 역리에요.
역리를 인간들은 정설로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죄인의 어리석음이에요.
 
두 정신세계가 있어요.
 
세상의 정신세계를 헬레니즘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정신세계를 히브리즘이라고 합니다.
헬레니즘은 인간들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고,
히브리즘은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을 법이라고 하고,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세상 종교는 법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에요.
법은 인간이 주체이고, 은혜는 하나님이 주체에요.
세상 종교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일을 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서 일을 해요.
세상 종교는 피조물이 신을 만들었지만, 기독교는 신이 피조물을 만들었어요.
 
세상 종교는 역리이고 기독교는 진리에요.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다스리지 피조물이 창조주를 이래라저래라 할 수가 없어요.
피조물이 창조주를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역리에요.
이를 일컬어 죄라고 합니다.
 
죄가 주객을 전도시켜 놓은 겁니다.
그래서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은 신을 인간들이 부리는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 모습이 알라딘의 요술램프라는 동화에 잘 나타나고 있어요.
인간들이 램프 속에 거인을 가두고서 필요할 때만 주문을 외워서 램프에서 깨내서 자기 소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거인은 주인의 소원을 이루어 주고 난 후에는 다시 램프 속에 들어가서 주인의 부르심이 있을 때까지 있어야 해요.
이 모습이 바로 세상 종교에요.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우상성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 있는 우상성을 깨트리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을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었어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후손이에요.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말은 언약을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세상으로 보내심을 입은 성도들을 예표하고 있어요.
비록 언약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서 자랐어요.
 
애굽의 신앙이 지성이면 감천하는 우상 신앙이에요.
이러한 우상 신앙을 가지고 출애굽을 하여서 광야로 나왔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그 첫 계명은 너희가 섬기는 신은 다른 신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다른 신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애굽의 신처럼 섬기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건 깨트려 주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자기 소원이나 들어주는 우상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광야로 빼내시고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싸우는 하나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 속에 있는 우상을 깨트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뜻이 신과 싸우는 자라는 뜻이에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의 새 이름이에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우상성으로 다가가다가 하나님에 의하여 야곱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우상을 깨트림을 받고서 받은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자기 안에 있는 우상과 싸우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 있는 우상을 죽이는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게 여호와의 전쟁이에요.
 
신앙은 자기 안에 다른 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고 세상에서 잘 살고자 하는 우상과 싸우는 것이에요.
이것이 성령이 성도들 안에서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을 박는 일을 하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신관을 바꿔치기 당하는 것이에요.
죄 아래서 알게 된 나를 위한 우상의 하나님을 버리고 창세전에 언약하시고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를 운행하시는 참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계시를 해 주셨어요.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언약을 주시고 나중에 그 언약을 하나님이 성취해 가시는 분이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을 하세요.
먼저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언약은 정한 때가 있어요.
언약의 후손들을 정한 때까지는 죄 아래 가두어두셨어요.
때가 되면 빼내 주세요.
아브라함 언약과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430년 후에 이루어졌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시고 430년 후에 성취를 하였어요.
비록 언약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430년 동안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야 해요.
정한 때까지는 죄가 알려준 가짜 하나님인 우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어요.
때가 차면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자기 백성들 속에 있는 가짜 신을 몰아내는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광야 40년 동안 이루어졌어요.
 
하나님은 인간의 우상성을 깨트리면서 일을 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를 비껴가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고정화된 틀 속에서 일을 해 주시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일부러 인간들이 장해 놓은 틀을 깨트리고 인간들의 생각을 비껴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한 것이나 야곱이 장자와 차자를 축복한 비슷한 사건 속에 다른 의미를 담아 놓은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고정화하여서 속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축복과 야곱의 축복을 같은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록 동일한 사건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에는 비슷한 사건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그 의미는 다른 것이 많이 있어요.
또한 비슷한 사건일지라도 하나님이 하신 일과 마귀가 한 일이 있어요.
 
병 고침을 예로 든다면,
어떤 병은 하나님이 고쳐주셨지만,
어떤 병은 마귀가 고쳐준 것일 수가 있어요.
그러니 병 고침을 가지고 모두가 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지 말란 말입니다.
 
하나님도 기적을 일으키지만,
마귀도 기적을 일으켜요.
모세가 기적을 일으키자 애굽의 술사들도 기적을 일으켰어요.
 
어떤 일은 하나님이 일하셨고,
어떤 일은 마귀가 한 일일 수도 있어요.
예수님은 종말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거짓 종들이 기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어떤 기적을 보고서 그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속단하지 말란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을 어린 양이라고 하고 적그리스도를 새끼 양이라고 합니다.
어린 양이나 새끼 양이나 뭐가 다릅니까?
어리다는 말과 새끼라는 말은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어요.
이는 마귀가 하나님을 모방한다는 뜻입니다.
 
어린 양도 능력을 행사하고 새끼 양도 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니 능력이 나타났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지 말란 말입니다.
마귀가 한 일을 가지고 하나님이 한 일로 붙잡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겉보기에는 비슷해도 속은 전혀 달라요.
그러니 육에 속한 사람은 속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자만이 알아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과 마귀가 한 일이라는 것을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 판단 기준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건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의지적 믿음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믿는다고 고백하게 하신 은혜로 주신 믿음을 말합니다.
두 가지 믿음이 있어요.
 
로마서 1장을 봅시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어요.
알다시피 복음은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피로 죄사함을 주신 것이에요.
자기 백성들은 이 사실을 알아요.
이걸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 사실을 우리 인간들의 능력으로는 믿을 수가 없어요.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에 반하고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믿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고 하였어요.
 
무엇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하나요?
복음이에요.
한마디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에요.
복음을 믿게 하려고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에베소서 2장을 먼저 잠간 살펴보고 믿음에 대하여 상고합시다.
 
엡 2:4-9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났어요.
이걸 허물로 죽었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죽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살리셨어요.
즉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걸 복음이라고 해요.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까 자랑치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지게 하여서 구원을 하신 것입니다.
 
믿어지게 해서 믿은 것입니다.
이걸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고 합니다.
잘 보세요.
“믿음으로” ~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고 하지요.
앞에 있는 “믿음으로” 가 뒤에 있는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편의상 앞에 있는 “믿음으로”를 객차를 끌고 가는 “기관차”라고 한다면,
뒤에 있는 “믿음에 이르게”는 기관차에 끌려가는 “객차”와 같아요.
 
객차는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못해요.
기관차가 앞에서 끌어 주어야 움직여요.
기관차를 하나님이라고 하고 객차를 우리라고 합시다.
기관차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라고 한다면,
객차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해요.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이 이들이에요.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을 믿음이라는 기관차가 끌고 다니면서 이런저런 일을 하게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살게 하였고,
믿음이 어떤 사람은 저렇게 살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 주어(主語)가 되어서 사람들로 이런저런 일을 하게 하는 동사(動詞)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추상 명사예요.
분명히 존재하는데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사역동사로 사용해요.
사역동사란? 일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믿음을 전부 사역(事役) 동사(動詞)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믿음이 움직이는 생명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가만있지 않고 운동을 해요.
믿음이 생명처럼 뭔가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오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다.
어떤 반응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반응을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반드시 어떤 일을 하게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마치 살아 있으니 움직이는 것과 같아요.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고 이걸 귀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살아 있는 것이에요.
믿음이 살아서 기관차와 같이 우리들을 객차와 같이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믿음은 움직이는 기관차와 같아요.
서 있는 기관차가 아니고 레일 위로 달리는 기관차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은 반드시 어떤 행함들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전기로 예를 들어서 말합니다.
전기를 생명이라고 합시다.
전기가 살아서 들어온다는 것은 선풍기가 돌아가든지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전기 스위치를 올렸는데도 선풍기가 돌아가지 않고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전기는 죽은 것이에요.
 
전기란? 살아 있는 것이에요.
힘이 공급될 때만 전기이지 힘이 공급되지 않는 것은 전기가 아니에요.
믿음도 마찬가지로 행함을 유발시키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죽은 믿음이에요.
이걸 귀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그 믿음이 추구하고 지향하는 어떤 행함을 유발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복음을 믿게 한다고 하였으니 참 믿음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예수그리스도가 행한 일을 자랑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을 믿음이 토해내는 행함이에요.
 
믿음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성경이 누구를 믿으라고 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요.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기관차가 레일을 따라서 움직이듯이 믿음도 그 노정대로 성도들은 인도하세요.
정한 코스대로 인도 하세요.
그 정한 코스가 바로 십자가의 길이에요.
믿음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고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되어지고 예수그리스도만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반드시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의 흔적들을 남기게 되어 있어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신자와 불신자를 갈라내세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하면 그는 신자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 다른 것을 증거하면 불신자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성도됨의 정체성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어야지 자신이 행한 어떤 일에 있어서는 안 되어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이 행한 일을 신앙으로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제가 집사님에게 시계를 선물을 주었어요.
그럼 집사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시계를 자랑 할 것이 아니라 시계를 준 저를 자랑해야 해요.
“나 이 시계 목사님에게 선물로 받았다” 라고 자랑을 해야 해요.
그렇지 않고 ‘난 이런 시계 차고 다닌다’고 자랑을 하게 되면 시계만 남고 시계를 준 나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불법이라고 해요.
 
마태복음 7장을 봅시다.
 
마 7:21-23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심판의 기준을 말합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서서 심판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이 행한 일을 자랑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난 이런 일을 했고 넌 저런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하면서 난 너희를 모른다고 합니다.
 
왜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할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은 바로 양의 탈을 쓰고 양을 잡아먹고 있는 이리들인 거짓 선지자들을 두고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 이름을 팔아서 양을 잡아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예수 이름을 말하는 것은 양들을 통해서 자기 배를 불리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쁜 나무이니까 예수 이름을 팔아서 자기 영광을 챙기는 일을 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말끝 마다 주의 이름으로 했다고 하는 것은 예수 이름을 팔아먹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법을 행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왜 불법인지를 집 짓는 비유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두 가지 집이 있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고 반석 위에 지은 집이 있습니다.
참 선지자나 거짓 선지자나 둘 다 집을 지었습니다.
참 선지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고 거짓 선지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겉으로는 어느 집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홍수를 보내서 집을 시험합니다.
홍수가 나자 반석위에 지은 집은 멀쩡한데 모래위에 지은 집은 다 떠내려가고 맙니다.
 
어디에 집을 지었느냐?
어느 터 위에 지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터가 있습니다.
반석과 모래입니다.
반석은 예수그리스도의 의이고 모래는 인간의 이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거하는 사람은 든든하게 서 있고,
인간의 의에 거하는 자들은 모두가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이 행한 일들을 자랑하는 자들을 불법을 행한 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이들은 자기 의를 자랑한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수 이름을 팔아서 자기 의를 축척한 것입니다.
 
집 짓는 비유는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시금석이에요.
예수 자랑하면 참 신앙이고 자기 행한 것 자랑하면 거짓 신아이에요.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 고백으로 가늠해야지 그 외 어떤 일을 한 것이나 어떤 행동으로 가늠해서는 안 되어요.
인간의 윤리도덕은 신앙의 판단 기준이 아니에요.
 
착하게 산다든가,
술 담배를 끊었다든가,
봉사와 충성을 많이 했다든가,
인류평화를 위해서 공헌했다든가 라는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이러한 것들은 믿음을 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 것들이에요.
 
그러나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해요.
그러므로 신앙의 판단 기준은 오로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라는 고백으로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라는 고백도 학습으로 배워서 립싱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믿는 것이어야 해요.
인간은 믿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라는 고백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나올 수 없어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어야지만 가능해요.
그러므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라는 고백은 하나님께서 해 주어야만 할 수 있어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행하게 하신 신앙 고백을 한 성도는 반드시 그 신앙 고백이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가치관의 변화와 삶의 지향성이 바뀌게 되어 있어요.
즉 세상의 가치로 살지 않으려는 구습을 버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의 믿음이 예수를 믿어지게 해 주신다는 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에수를 믿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믿음이 격발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인 거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신앙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고백게 해 주시는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해 주시지 않으면 그 어떤 인간도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자 그 고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게 해 주신 고백이라고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제자들보고 너희들이 나를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안다고 잘난 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건 제자들의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여기 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도록 해 주시면 믿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시면 예수 믿는 게 전혀 어렵지가 않아요.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면서 천국 복음을 전해도 오직 제자들만 알아먹었어요.
왜 수많은 사람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말씀을 들었는데도 제자들은 알아듣고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들었을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는 알아듣도록 해 주셨고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듣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예수 믿을 사람과 안 믿을 사람으로 구분해 놓았어요.
창세전에 너희와 저희로 구분해 놓았어요.
이걸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라고 합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는 자기 백성으로서 너희가 되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지 않은 자는 자기 백성이 아닌 자로서 저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도록 작정 된 사람은 하나님이 믿음을 줘서 믿는다고 고백하게 될 것이고,
믿지 않도록 작정이 된 사람은 예수를 뻔히 보고서도 믿어지지 않도록 해 놓았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와 저희를 구분하시고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고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듣고 보아서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았기 때문에 듣고 부는 것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므로 전혀 자랑할 것이 못 되어요.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 하는 모든 것이 주께로 나왔고 주로 살다가 주께로 돌아가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다 하셨어요.
 
그러므로 모든 신앙은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24 장로가 자기들이 받은 면류관을 전부 어린 양에게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왜 면류관을 어린양에게 돌려 드립니까?
자기들이 한 것이 아니고 어린 양이 다 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이 다 하셨다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이고 구원받은 자이고 믿음을 받은 자에요.
 
우리는 하나님 “저 사람은 왜 예수 안 믿습니까?” 라고 하면 안 되어요.
도리어 “난 어째서 예수를 믿게 해 주셨습니까?” 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 왜 우리 부모는, 우리 자식은, 우리 형제는 예수 안 믿습니까? 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은 어찌하여 나 같은 놈에게 믿음을 주셨나이까? 라고 하여야 해요.
 
관심을 내가 했다는 것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에 관심을 두세요.
그래야 신앙생활이 감사가 되어요.
아무도 믿지 않는 예수를 믿게 해 주었다는 것을 안다면 어찌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살아도 감사요 죽어도 감사가 나와야지요.
 
아까 하나님이 하는 일과 마귀가 하는 일을 분별하여야 한다고 했지요.
해답이 나왔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은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그리스도가 증거되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믿음이 이끈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가 증거되지 않는 일은 마귀가 한 일이에요.
 
그러니 누가 어떤 기적을 행하였다고 무조건 따르지 말란 말입니다.
마귀도 얼마든지 기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기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에게서 빼앗아요.
 
요한계시록 13장을 봅시다.
 
계 13:1-15절.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 된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 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 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두 짐승이 나옵니다.
바다에서 올라오고 땅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소속이 이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즉 세상 신인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상징하는 용이 이들에게 권세를 주는 것입니다.
 
용은 마귀이고,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적그리스도이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거짓 선지자 즉 이 시대 거짓 목사들이에요.
그런데 이들이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아서 일을 합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 신자인 가라지들을 추수하기 위함입니다.
 
이 시대 거짓 목사들이 창궐하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일어나는 일이에요.
거짓 목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거짓 신자가 많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짜를 추수하려고 거짓 종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일곱 머리 열 뿔을 달고 있는데 하나님과 싸우다가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었다가 다시 살아납니다.
이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모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예수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갖가지 기적으로 땅에 속한 자들을 미혹하여서 처음 짐승 곧 바다에서 올라온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게 만들어요.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거짓 선지자들이에요.
땅에서 올라온다는 말은 뱀의 후손이란 말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기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쫓게 만들어요.
거짓 선지자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로 하여금 적그리스도를 경배하도록 해요.
 
어떤 사람은 기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경배하게 하고,
어떤 사람은 기적으로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게 만들어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기적으로 예수를 만나게 하지만,
마귀에게 속한 사람은 기적으로 자기를 추종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거짓 선지자들에게 능력을 주어서 유혹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봅시다.
 
살후 2:9-12절.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단을 가지고 유혹을 멸망하는 자들을 미혹케 하지요.
유혹하는 이유는 진리의 사랑을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즉 가짜들을 심판하기 위함이에요.
여기에 거짓 종들이 기적을 동원하여서 가짜 신자들을 추수하는 것입니다.
 
진리란? 복음이에요.
복음은 예수에요.
신앙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은 예수그리스도 피로 맺었어요.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대신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내 대신 예수님이 죽은 겁니다.
이걸 대속이라고 합니다.
우리 대신 예수님이 죄값을 치루었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세요.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내가 사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속이라는 말은 대신이라는 말과 같아요.
우리 대신 예수님이 죽었어요.
우리는 예수님 대신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 대신 언약이에요.
우리 대신 예수님이 죽어서 맺은 언약이에요.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이 하나님의 참 아들이 죽어서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에요.
이걸 양자라고 합니다.
양자는 예수님 대신에 아들이 된 것을 말해요.
 
야곱과 에브라임도 양자와 같아요.
둘 다 차자인데 장자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에서 대신에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았고,
므낫세 대신에 에브라임이 장자의 복을 받았기 때문인 겁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들도 예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어요.
이러면 야곱의 이야기나 에브라임의 이야기는 모두가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이삭은 야곱을 장자의 축복을 하였고, 믿음으로 야곱은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이 차자가 장자를 대신하여서 장자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가 된 것이나 에브라임이 장자가 된 것이나 우리가 장자가 된 것이나 동일해요.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이루어진 구원 사건인 겁니다.
모든 언약은 예수그리스도를 겨냥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일하신다는 말씀은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일하신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삭이 속아서 차자를 장자인 줄 알고 축복한 것이나,
야곱이 일부러 차자를 장자로 축복한 것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하여서 벌어진 계시사적인 일들인 것입니다.
이를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 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동일한 방법으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는 같으나 일에 방식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이삭과 야곱이 아들을 축복하는 것은 영적 의미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그 일의 진행하는 과정은 전혀 다릅니다.
이는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정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지난번에 하나님이 이렇게 일을 하셨으니까 이번에도 저번과 같이 일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시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창조의 방식입니다.
창조는 정해진 틀이 없어요.
그 때 그 때마다 달라요.
날마다 새로워요.
인간이 흉내를 낼 수가 없어요.
 
모든 피조물은 같은 것 같으나 다 달라요.
다 다른데 다 같아요.
이게 비밀이에요.
인간은 다 같아요.
그런데 다 달라요.
같은 인간은 하나도 없어요.
쌍둥이도 모양은 같아도 그 내용은 달라요.
마치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이 모든 인간은 다 달라요.
그러나 인간이라는 입장에서는 모두가 같아요.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와 같아요.
같은 것 같으나 다르고 다른 것 같으나 같아요.
믿음이 일으킨 일들은 영적인 의미는 같아요.
하지만 나타난 현상들은 다 달라요.
그러므로 피조물이 창조주가 하는 일을 고정화 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하여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여서 내일도 그렇게 한다고 은혜가 임하지 않아요.
내일은 내일의 방식으로 은혜가 임해요.
그러니 이 시대 목사들이 은혜 받는 비결이니 축복 받는 비결이니 하면서 가르치는 것들은 모두가 비성경적이고 마귀적인 것입니다.
마귀는 지난번에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셨으니 이번에도 지난번과 같이 일할 것이라고 사람들을 미혹해요.
 
마귀의 미혹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고정화하여 믿고자 해요.
지난번에 이렇게 응답했으니 이번에도 저번처럼 하면 응답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난번에 철야기도 했더니 응답을 해 주셨어!
그러니 이번에도 철야기도하면 응답해 주실 것이야!
이렇게 고정화해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을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십계명에 보면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고 하지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바다에 있는 것이나 그 무엇으로도 형상화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형상화하지 말라는 것은 고정화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들이 만든 종교적인 틀에 따라서 움직이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법칙에 따라서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은 예측이 가능한 신을 원해요.
신이 자기들의 방법에 따라서 움직여주길 바래요.
그래야 편해요.
예측이 가능하지 않으면 불안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예측이 가능해지면 인간 쪽에서 방법을 강구하게 됩니다.
 
점쟁이들이 길흉화복을 점치면서 비법을 알려 주지요.
자기들이 알려주는 부적을 가지고 있으면 복은 불러들이고 화는 막을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돈을 주고 부적을 삽니다.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왠지 심리적으로 안심이 되어요.
이는 예측이 가능한 우상성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창궐해요.
각종 비결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 받는 비결이라든가,
은혜 받는 비결이라든가,
은사 받는 비결이라든가,
목사들이 각종 방법론을 가르치고 있어요.
교인들도 방법론을 가르쳐 달라고 해요.
부창부수인 겁니다.
 
거짓 목사들은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복도 받고 은혜도 받는다고 해요.
그래서 무슨 설교를 하든지 모두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방법론으로 귀결이 되어요.
설교의 논지가 이건 하고 저건 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술 먹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착하게 살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교인들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걸 순종이라고 합니다.
목사가 40일 특별 새벽기도 합시다! 라고 하면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부르짖잖아요.
이번에 40일 철야 합시다! 라고 하면 밤잠 자지 않고 우르르 몰려 나와서 하잖아요.
복을 불러오든지, 아니면 오는 재앙을 피하려고 하든지 하잖아요.
 
자식 수능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사업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좋은 신랑감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좋은 직장 달라고 기도하고,
병 고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목사가 그렇게 하면 복 받는다고 했으니까 하는 겁니다.
이 모두가 인간들의 우상성으로 알아진 종교성으로 행하여지는 것들이에요.
 
성경은 비결 신앙이 없어요.
인간 쪽에서 복을 따내거나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가르쳐 준 적이 없어요.
흔히들 목사님들이 구약 성경 신명기 28장을 들어서 복과 저주를 말하는데 그것은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지 복을 따내고 저주를 피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에요.
 
죄인은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지켜낼 수가 없어요.
모든 말씀은 인간의 실존을 알려주기 위하여 주신 것이에요.
인간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려 주려고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거짓 목사들이 인간의 상식을 동원하여 아전인수식으로 해석을 해서 공교하게 지어낸 말로서 교인들이 열심과 충성과 돈을 뜯어내려고 미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교인들도 무식하기는 매일반이니까 무당 목사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이걸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쪽에서 복 받을 짓과 저주받을 짓을 통해서 복과 저주가 오고 가도록 해 놓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복을 명하시면 복이 거부하지 못하고 예! 하고 가게 되어 있고, 저주를 명하면 예! 하고 가게 되어 있어요.
야곱과 에서를 가지고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는 복을 명하셨고, 에서에게는 저주를 명하셨어요.
그러니까 복은 야곱을 찾아갔고, 저주는 에서를 찾아간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성이 있어요.
창조성이란 말씀 하시면 그대로 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신약에서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비유하면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떡을 주면서 빨리 날 팔라고 하니까 즉시로 마귀가 유다의 마음속에 쏙 들어가서 예수를 팔도록 하였어요.
 
가룟 유다가 거부하지 못해요.
하나님이 그렇게 명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보세요.
예수님이 베드로가 장담하자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했어요.
이에 베드로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물끄러미 쳐다보는데도 저주하고 욕을 했어요.
 
하나님이 복을 야곱에게 명하면 야곱은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 있어요.
야곱이 언제 복 받을 짓을 했습니까?
안 했어요.
솔직히 인간적으로 보면 에서가 복 받을 짓을 했어요.
야곱은 수십 년 동안 저 하나 살 거라고 집 떠나갔어요.
 
자식을 집 떠나보내 놓고 살아가는 부모의 심정을 한번 헤아려 봤습니까?
속으로 피눈물이 납니다.
비가 오면 이놈이 비를 맞지나 않나.
바람 불면 이놈이 바람에 추워하지나 않나!
밥 먹을 때만 되면 이놈이 끼니나 제때 챙겨 먹나!
나오는 게 한숨이고 밀려드는 게 집 나간 자식에 대한 근심 걱정이에요.
 
하지만 에서는 부모님을 하루도 빠짐없이 봉양하고 섬겼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착하디 착한 에서에게는 저주를 명하였기 때문에 저주가 군소리 못 하고 에서에게 가 버린 겁니다.
반대로 못된 놈인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명하니까 복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야곱에게 간 것입니다.
에서가 저주를 막아낼 방법이 없고,
야곱이 복을 거부할 방법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복과 저주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어미 태로부터 이미 결정이 되었어요.
어미 태로부터 각자 정해진 운명을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운명대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버리고 팥죽을 위해 살았고,
야곱은 팥죽을 버리고 장자권을 위하여 살게 된 것입니다.
 
복과 저주는 인간 쪽에서 오라 가라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이 시대 거짓 목사들은 복을 받고 저주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어요.
육에 속한 교인들은 거짓 목사들의 밀을 들어요.
교인들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 복은 불러들이고 저주는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액땜신앙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막 말로 인간이 막을 수 있고 붙잡을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무엇 하려고 믿습니까?
자기가 하면 되지!
복 받을 짓을 해서 복을 따내면 되잖아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목사가 복과 저주를 마음대로 움직인다면 자기는 왜 복을 못 받습니까?
당연히 복 받는 방법을 알면 자기 자식들이 복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만약 목사가 복을 따낼 수가 있을 것 같으면 전 이렇게 안 삽니다.
아마도 세계 최고가 되어 있을 겁니다.
모든 목사가 교회 부흥되는 걸 꿈꾸잖아요.
 
며칠 전에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황당한지!
자기 교회 목사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사경을 헤매고 있답니다.
아마 뇌출혈로 쓰러진 것 같아요.
나이가 많은데다가 병으로 왔다 갔다 한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병상을 지키면서 기도를 한답니다.
기도하면 조금 살아났다가 기도를 안 하면 다시 죽어간답니다.
그래서 온 교회가 목사님을 위해서 릴레이 기도를 한 대요.
각 구역끼리 시간을 정해 놓고 마치 육상 계주하듯이 시간마다 바통터치 하면서 기도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교인들 중에 혹시 친척이나 가족들 중에 목사님들이 계시면 기도를 좀 해 달라고 부탁을 하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조카가 외삼촌이 목사라는 걸 알고 마치 능력 있는 목사라도 되는 줄 알고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 소릴 듣고 얼마나 화가 나던지 욕을 하면서 소리를 쳤어요.
야! 이 사람아!
왜 때가 되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하느냐!
하나님이 데리고 가겠다는데 왜 인간들이 설치느냐!
사는 게 하나님이 뜻이면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 것을 왜 모르느냐고!
 
제가 큰 소리로 나무라니까 외삼촌 왜 나한테 화를 내느냐고 따집니다.
그래서 지금 니가 무슨 짓 하는 줄 아느냐?
내가 무당인 줄 아느냐?
그러면서 왜 네가 나서서 그러느냐고 물었어요.
그러니 대답이 그 목사가 자기 가정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 줬대요.
한마디로 그 목사가 죽으면 자기 가정을 위해서 기도를 못 하니까 살려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네가 아주 무당을 믿는구나!
너도 무당이고!
자기보고 무당이라고 했다고 다시는 전화 안 한대요.
저도 그래 다시는 전화 하지 말라고 하고 끊었어요.
이 아이(집사)가 교회 다닌 지가 수십 년입니다.
그런데 이 모양입니다.
 
이게 어디 제 조카만 그럽니까?
이 시대 교인들의 자화상이에요.
부끄러움도 몰라요.
얼굴이 화끈거리지도 않아요?
속된 말로 무대뽀에요.
하나님의 뜻은 모르겠고 자기 생각대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이 모두가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서 그래요.
교회에서 이렇게 가르치잖아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정화해서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괴상한 논리를 가지고 밤마다 새벽마다 산마다 기도원마다 악다구니를 쓰면서 땡깡을 부리잖아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죽을병이 걸려서 금식기도를 하였더니 병이 나았다고 합시다.
그래서 누가 병이 걸렸다고 한다면 자기가 경험한 일을 제시합니다.
나도 지난번에 그런 병에 걸렸는데 금식기도 해서 낳았으니까 당신도 그렇게 해 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병을 고치는 것은 금식기도라는 하나의 법칙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신앙대로라면 다음에 병이 걸리면 또 금식기도를 할 것입니다.
금식기도 해서 병 고침을 받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말려도 안 돼요.
자기가 경험했는데!
 
그러면 앞서서 병을 고침 받은 것처럼 고쳐주어야 하나님이 함께한 증거라고 합니다.
만약 병을 고치지 못하면 하나님에게 따집니다.
왜 지난번에 금식기도를 하니 들어주고 이젠 안 들어 주느냐고 항의할 것입니다.
이게 예측이고 고정성이에요.
성경은 이런 사고를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대로 일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 속에 가두어지시기를 거부하세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은 알 수가 없어요.
때로는 죽이시면서 일을 하시고 때로는 살리시면서 일을 하세요.
때로는 이삭처럼 자기 뜻에 반하도록 축복하게 하시고,
때로는 야곱처럼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해 상식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도 하십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자기 생각과 다르게 축복을 하였고,
야곱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서서 인간의 생각과 다르게 자기 뜻대로 축복하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고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주체가 되어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믿음이 이렇게 일을 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방법론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해주고 있어요.
 
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지 인간의 열심을 증거하고자 기록된 것이 아니에요.
믿음으로 산 인물들을 기록한 것은 그 사람을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믿음에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믿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무슨 배짱으로 요셉의 두 아들에게 법도에 어긋난 축복을 하였는지를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은 믿음이 야곱으로 하여금 지팡이를 의지하여서 요셉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봅시다.
 
히 11:21절.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이 죽을 때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 장자인 므낫세에게는 왼손을 얹고 차자인 에브라임에게는 오른 손을 얹어서 축복을 했어요.
통상적으로 오른 손은 장자에게 얹고 왼 손은 차자에게 얹고 기도를 해요.
그런데 야곱은 상식을 넘어서 장자와 차자에게 손을 어긋 맞겨서 축복을 하였어요.
요셉이 이 광경을 보고서 아버지가 정신이 혼미해서 그러는 줄 알고 아버지에게 손이 서로 바뀌었다고 알려주었어요.
그런데 야곱이 나도 안다고 하면서 그대로 하였어요.
이걸 믿음으로 했다고 합니다.
믿음이 장자와 차자를 바꿔서 축복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삭과 야곱 둘 다 믿음으로 장자의 축복을 했어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는 이삭의 의도와 반대로 이루어졌어요.
이삭은 장자인 에서를 축복하고 싶었으나 리브가가 야곱에 축복을 받도록 하였어요.
그런데 야곱이 손주들을 축복한 사건은 의도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이 장자와 차자가 뒤바뀌었다고 알려 주고 만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다 알고 하였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럼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 현장으로 가 봅시다.
 
창세기 48장을 봅시다.
 
창 48:8-20절.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가로되 이들은 누구냐 9. 요셉이 그 아비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비가 가로되 그들을 이끌어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11.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뜻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소생까지 보이셨도다 12. 요셉이 아비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13.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 이스라엘이 우수를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 맞겨 얹었더라 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17.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19.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야곱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요셉이 두 아들을 할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리려고 데리고 갔어요.
야곱이 손주들이 왔다는 말을 듣고 가까이 오라고 합니다.
이 때 야곱은 눈이 어두웠어요.
마치 아버지 이삭이 눈이 어두워서 자신을 축복할 때와 같이 야곱도 손주들을 축복을 할 때에 눈이 어두웠던 겁니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눈이 어둡다는 것은 독자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주변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는 리브가가 일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축복은 요셉이 곁에서 도와주었지만, 야곱은 요셉의 도움을 거절하고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해 버립니다.
이는 야곱이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노망이 들어서 한 행동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로 인하여 한 행동임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야곱이 지팡이 머리를 의지하고 경배하였다는 말은 지팡이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팡이가 무슨 머리가 있습니까?
이는 지팡이가 주는 계시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팡이가 담고 있는 의미로 축복하였다는 뜻입니다.
 
상황을 다시 한 번 그려 봅시다.
이때 야곱의 나이가 147세 때입니다.
야곱이 나이가 많아 늙고 병이 들어서 오늘 내일하면서 죽을 때가 가까웠어요.
이 소식을 들은 요셉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께 문안차 갑니다.
당시 요셉은 애굽의 총리이기 때문에 궁궐에서 살았고 야곱은 고센 땅에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요셉이 아버지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찾아간 것입니다.
 
창 48:1-5절. “이 일 후에 혹이 요셉에게 고하기를 네 부친이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2. 혹이 야곱에게 고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침상에 누워있던 야곱이 요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왔다는 말을 듣고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요셉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말해줍니다.
과거 가나안 땅 루스(벧엘)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하시기를 자기에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해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살지 않고 가나안 땅에서 살 것이라고 약속했다는 겁니다.
 
지금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번성한 것은 모두가 가나안 땅에 데리고 가기 위한 준비 기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서 야곱은 요셉에게 당부하기를 자신이 죽으면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하였어요.
 
이는 요셉으로 하여금 자신의 뿌리를 분명하게 알려준 것입니다.
네가 비록 애굽에 총리이지만 네가 살 곳은 애굽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한 가나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도 야곱의 후손이므로 애굽에서 살지 않고 가나안에서 살아야 할 아들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오자 자신의 자식으로 삼아 버립니다.
이는 곧 이 아이들은 애굽 사람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요셉의 아이가 아니고 자기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은 야곱의 위치에 서 있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아버지가 아들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창세기 37장에 보면 그 의미가 잘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37장을 봅시다.
 
창 37:1-9절.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야곱의 약전이라고 하면서 요셉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약전이란? 다른 말로 이력(履歷)이라고 합니다.
야곱의 이력서에 요셉의 이력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은 야곱의 인생을 산 자라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야곱은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벧엘 광야에서 돌 베게를 하고 잠을 자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야곱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 후 야곱은 엄마 리브가의 고향인 하란으로 가서 외삼촌 집에서 살게 됩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거부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만나 싸움을 하다가 허리가 분질러지는 사건을 당합니다.
성경은 환도뼈가 위골 되었다고 하는데 환도뼈가 정확히 어디인지를 몰라요.
저는 야곱이 일평생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았다는 말을 유추해서 허리라고 합니다.
허리냐 아니냐는 것은 중요치 않고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씨름을 한 후에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改名)을 시키시고 지팡이 하나를 주십니다.
지팡이 이전은 야곱이었지만, 지팡이 이후는 이스라엘인 겁니다.
얍복강 이 후로 야곱은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았어요.
 
알다시피 야곱에게는 4명의 부인이 있고 거기서 낳은 12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모든 자식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하는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을 사랑했어요.
왜냐하면! 요셉은 그냥 낳은 자식이 아니고 합환채를 먹고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합환채란? 문자적으로 보면 임신 촉진을 시키는 채소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게 영적으로 엄청난 비밀이 담겨 있어요.
야곱에게는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아내가 있습니다.
이는 두 언약을 상징하고 있어요.
레아는 언니로서 옛 언약을 상징하고 라헬은 동생으로 새 언약을 상징해요.
 
레아와 라헬은 자매이면서 한 남편을 두고 살았어요.
둘은 서로 남편을 차지하기 위하여 경쟁을 하였어요.
쉬운 말로 둘 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하였어요.
옛 언약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고자 하였고,
새 언약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고자 합니다.
 
야곱은 원래 라헬을 사랑했는데 그 동네 풍습 때문에 언니 레아는 덤으로 얻은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 덤으로 얻은 언니 레아가 자식을 순풍순풍 잘 낳고 라헬은 못 낳습니다.
라헬이 자기가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자 왜 내겐 자식을 안 주느냐고 야곱을 달달 볶습니다.
이에 야곱이 성질을 내면서 내가 하나님이냐!
내가 하나님도 아닌데 어떻게 자식을 준단 말이냐! 라고 면박을 줍니다.
자나 깨나 지식 낳기를 소원하던 라헬이 어느 날 레아의 소생 르우벤이 들에 나가서 합환채를 얻어서 자기 엄마 레아에게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라헬은 그 합환채가 어떤 것인 줄 알았기에 언니에게 오늘 밤은 야곱이 자기하고 잠자는 날인데 언니가 합환채를 주면 양보하겠다고 남편과 합환채를 바꿔 버립니다.
언니 레아는 합환채를 동생에게 주고 대신 야곱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라헬은 그토록 임신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여도 허사였는데 합환채를 먹고 난 후에 임신하게 됩니다.
라헬이 합환채 덕분으로 임신을 하여서 낳은 자식이 바로 요셉인 겁니다.
그러니 요셉은 야곱이 낳은 자식이 아니고 합환채가 낳은 자식인 셈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합환채를 얻을 때가 바로 맥추 때라는 겁니다.
맥추 때가 나중에 모세 언약 속에 있는 7대 절기 중에 맥추절이 됩니다.
이 맥추절이 바로 신약에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절인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으로 보면 요셉은 성령으로 낳은 자식인 셈입니다.
 
야곱은 이 요셉의 비밀을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싸우고 병신이 되어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면서 알게 되었어요.
그것도 그럴 것이 요셉은 형제들과 다르게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들이 양을 잘못 치고 있다는 과실을 지적하고 아버지에게 알려주고 또한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요셉을 보고 꿈꾸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형제들의 과실을 지적한다는 것은 죄를 고발한다는 뜻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죄를 고발한 것과 같아요.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했지요.
그러니 요셉이 형들의 죄를 지적한다는 것은 요셉이 성령에 사람이라는 뜻이 되는 겁니다.
 
꿈꾸는 자란?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신약에 보면 하나님의 계시는 성령으로 난 성도들에게만 있어요.
그러니 지금 야곱의 12 아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은 오직 요셉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알고 야곱은 요셉이 자기의 후계자라는 것을 알고 채색옷을 지어서 입혀 줍니다.
 
채색옷이란? 무지갯빛 옷인데 이는 곧 언약의 옷과도 같습니다.
이는 곧 요셉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셉이 12형제들의 주가 되는 꿈을 꾸게 하신 겁니다.
레아의 소생들이 요셉이 아버지로부터 총애를 받고 자신들의 주가 된다는 소리에 화가 나서 시기하여 급기야는 죽이기로 작당을 하고 결국 애굽으로 팔아버립니다.
그리곤 아버지에게는 요셉은 죽었다고 말해줍니다.
이렇게 되면 야곱에게는 요셉은 죽은 자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었던 자식이 자기들을 살려내고 온 세상의 주가 되었습니다.
형제들이 죽였던 자가 살아나서 도리어 자기를 죽인 형제들을 살려내는 것은 예수님을 계시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려내서 유대인들을 구원하는 주가 되게 하신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위골이 되어 절름발이가 되고 난 후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서의 제 2의 인생을 사는데 그게 바로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 야곱의 2기 인생을 누가 사느냐 하면 요셉이 대신하여 산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꿈을 요셉이 대신 이루어 줄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요셉을 자기 약전(역사) 속으로 끌어넣은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제 2기 인생인 이스라엘로서의 인생을 산 것입니다.
이러면 요셉의 아들들은 곧 야곱의 아들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은 죽기 전에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약속을 말하면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알다시피 아들을 축복하는 것은 아비의 몫입니다.
육적으로 본다면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이 축복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야곱이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약전에 기록되었어요.
이는 야곱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영적으로 보면 야곱이에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죽고 이스라엘로 살아났어요.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살아난 삶을 요셉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종과 같아요.
종은 자기 것이 없어요.
모두가 주인의 것이 되어요.
그러므로 요셉이 낳은 자식들도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영적 아버지로서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야곱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주도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자기 아비 이삭과 같이 나이 들고 눈이 어두웠지만 지팡이를 의지하고 영적으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인정하여서 축복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의 이러한 일들을 믿음이 하게 하였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겁니다.
 
야곱이 지팡이를 의지하고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였다는 것은 지팡이가 주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 있어 지팡이는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든 증표입니다.
지팡이는 육적 탐욕에 사로잡혀 살고자 하던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깨어지고 난 후 영의 사람이 되어서 살아가도록 한 증거물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지팡이는 하나님의 분신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이 지팡이를 의지하여 장자와 차자가 뒤바뀌는 축복을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의지했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라는 말과 같아요.
이처럼 야곱의 지팡이 속에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비밀이 담겨 있는 것과 같아요.
 
알다시피 야곱은 처음부터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 자가 아니었어요.
야곱은 교활하고 계산이 빠른 간교한 사람이에요.
에서보다 힘이 없었을 뿐이지 잔 머리가 돌아가는 것은 에서보다 몇 수 위에 있었어요.
사냥하고 돌아와서 배고파하는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산 것은 아주 계산적인 사람이라 볼 수 있어요.
 
양을 칠 때도 살구나무와 버드나무와 신풍나무 껍질을 벗겨서 양들이 교미할 때 그 물을 마시게 한 것으로 보아 아주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사람임을 알 수가 있어요.
그리고 사랑하는 한 여인(라헬)을 얻기 위해서 14년을 투자하였다는 것은 보통 집념이 아니에요.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야곱의 뜻대로 인생사가 잘 풀려나갔어요.
야곱은 자기 뜻대로 일이 술술 잘 풀려 나가자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약속이 실현된다고 믿었어요.
 
자기가 꿈꾸는 바를 모두 이루었으니까요?
하나님이 자기편인 줄 알았어요.
야곱은 하나님을 자기를 위한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위하여서 야곱이 선택되었음에도 야곱은 역으로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유익을 주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신관이 바로 죄인이 가지고 있는 신관이에요.
이름하여 우상성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신관은 마귀적이고 이방인의 신관이에요.
하나님께서 얍복강에서 마귀적인 신관을 가지고 있는 옛 사람 야곱을 죽이고 우상과 싸우는 사람인 이스라엘로 새롭게 살려 내신 것입니다.
 
창세기 32장을 봅시다.
 
창 32:22-30절.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 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 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야곱은 얍복강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았어요.
너는 하나님의 징벌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시켜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신과 싸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신이란? 야곱이 알고 있던 가짜 하나님을 말합니다.
얍복강에서 야곱은 자기 안에 있는 가짜 하나님을 몰아내는 싸움을 하여야 하는 자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가짜 하나님(우상)과 싸우는 자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후손들인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세요.
그들 속에 있는 가짜 하나님을 죽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광야 40년 동안 잘 보여주었어요.
애굽에서 나온 자들은 모두가 애굽의 신관인 우상을 담고 있었어요.
그 우상을 담고 있는 자들을 광야에서 죽이는 일을 하신 겁니다.
이러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광야의 의미는 야곱의 얍복강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신약의 성도들도 동일한 코스를 걷게 되어 있어요.
세상에서 교회로 불러내서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교회는 영적 의미로서는 구약의 광야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영적 이스라엘이에요.
가짜 하나님과 싸우는 자들이에요.
 
바울은 탐심을 우상이라고 했어요.
성도는 늘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탐심과 싸우는 자에요.
탐심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 자기 이름을 내라고 해요.
그래서 성령은 날마다 우리 안에 발호하는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날마다 성도 안에서 우상을 죽이는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가나안 전쟁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이 자기 편을 둘어주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도리어 자기 안에 있는 탐욕을 죽이는 분임을 알았어요.
자기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여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죽임 당함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환도뼈가 위골되어 절름발이가 된 것입니다.
평생 지팡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 지팡이는 하나님의 실제와 같은 의미가 있어요.
지팡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심을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 지팡이 머리를 의지하고 경배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지팡이 머리라고 하나요?
지팡이에 무슨 머리가 있나요?
지팡이를 머리라고 하는 것은 지팡이로부터 지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팡이가 담고 있는 의미로 장자와 차자가 뒤바뀌는 축복을 하였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얍복강 사건 이후로부터 지팡이 없이는 못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어요.
야곱은 얍복강에서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살던 인생에서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인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얍복강 이전에 알던 하나님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었는데,
얍복강 이후에 알게 된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야곱을 다스리고 있다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젠 살아가는 삶에 자세가 달라진 것입니다.
 
야곱의 얍복강 사건은 신약적인 의미로 성도에게 적용한다면 성령이 임하기 전에 알았던 예수님과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 알게 된 예수님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아요.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다른 예수 즉 자기 유익을 위해서 예수를 믿었지만,
성령이 임하고 난 후로는 예수를 위해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과 같아요.
바울은 탐심(貪心)을 우상이라고 했어요.
탐심은 하나님을 이용하라고 해요.
성도는 탐심과 싸우는 자에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참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게 된 것은 성도가 성령이 임하고 난 뒤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사는 것과 같아요.
그렇다면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 지팡이를 의지하고 하였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으로 축복을 하였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역설적이에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는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시고,
자기가 의인이라고 믿는 자에게는 저주를 하세요.
 
세상의 지혜와 원리대로라면 장자인 므낫세가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 지혜의 어리석음을 고발하기 위해서 차자를 들어서 장자로 세우시고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장자는 차자로 만들어 버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의 생각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종들은 이걸 구호신앙을 만들어서 교인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여러분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하였으니까 여러분들은 죽어서 사는 삶을 사십시오 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이건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해주는 것이니 우리더러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살고자 죽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에요.
내가 주체가 되어서 살기 위해서 죽는 것은 그건 사는 것이지 죽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이 말하는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말은 우리더러 살고 싶으면 죽으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죽이고 살려내는 방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뜻이에요.
이건 우리 더러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건 우리가 의지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이 하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우리를 낮은 자리로 내려가게 하고 비움으로 살아가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실력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이에요.
이걸 히브리서 식으로 말하면 믿음으로 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흉내 내고자 하지 마세요.
흉내를 낸다는 것은 곧 자기 지킴이에요.
자아가 살아 있으니까 흉내를 내서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정된 틀에서 일하시지 않고 틀을 깨트리면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예측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에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열심과 상관없이 복을 주신다고 했으니까
그럼 난 이제부터 열심히 안하고 복을 받을 거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열심과 상관없이 복을 주신다는 것을 예측하는 그것을 죄로 규정하고 도리어 열심 없는 것을 책망하고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세요.
반대로 열심히 해서 복을 받고자 하면 열심히 해도 복을 주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이사야 55장을 봅시다.
 
사 55:8-9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가늠조차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상식과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자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 지팡이는 하나님의 축복에 상징이면서도 또한 징계의 상징이기도 해요.
지팡이를 볼 때마다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
지팡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죽기 전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지팡이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일하심의 비밀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자기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사는 야곱의 인생이 실패한 인생처럼 보일 수가 있어요.
세상적인 안목으로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 야곱을 보고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야곱은 실패처럼 보이는 그 지팡이를 자랑처럼 지니고 있었어요.
지팡이야말로 가짜 하나님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알게 해 준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세상에서 실패한 자 같으나 실상은 성공한 자에요.
 
이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씀 아닙니까?
맞습니다.
사도바울이 즐겨 사용하던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과 6장을 봅시다.
 
고후 4:7-11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6:9-10절.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은 자기를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화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질그릇에 보화를 담고 있으니까 핍박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마귀라는 놈이 보화를 꺼내려고 질그릇을 깨트리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겨쌈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꺼꾸러뜨림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 모두가 예수의 생명을 담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자기 인생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인간들 눈에는 무명한 자로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 앞에선 유명한 자이고 육적으론 거지 같이 불쌍해 보이지만 실상은 만유를 품은 부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실패한 모습으로 세상에 남겨 둔 것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자기 몸에 담아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당하게 하신 것은 도리어 자기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증거키 위해서 일부러 죽음에 넘기 운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온갖 핍박과 고난으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거꾸러지지 않고 자기 동족으로부터 이단이라고 우겨 쌈을 당하여도 좌절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말입니다.
이것은 너는 이미 천국 백성이니 지옥 생활을 좀 하라는 것과 같아요.
천국 사람이기 때문에 지옥에 잠시 몰아넣는다고 해서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미 천국 백성이니까 죽음에 밀어 넣는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의 생명이 죽음도 넉넉히 이길 수가 있으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 안에는 죽음을 이기게 하는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증거는 하나님은 일부러 성도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을 드러내려고 죽음에 넘기 우는 일을 하신다는 거에요.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내가 너를 창조하였고 조성한다고 합니다.
네가 물 가운데 지나도 물이 너를 엄몰치 못하고,
네가 불 가운데 지날지라도 불꽃이 너는 사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 것이라 해 놓고서는 물어도 집어 넣고 불에도 집어 넣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열탕과 냉탕으로 담금질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세상과 역설이에요.
 
야곱은 성도를 표상하고 있어요.
그럼 이 시대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야곱처럼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성도라고 한다면 야곱처럼 병신이 되어서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 게 저주가 아니라 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 안 믿는 사람은 하는 것마다 잘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하는 것마다 안 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성도는 아! 하나님께서 세상 것에 소망을 둘까 봐서 미리 치워버리시는구나! 라고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돈을 잘 벌고 부자로 사는데,
왜 예수 믿는 나는 가난하게 사는가! 라고 원망하지 말고,
아! 하나님께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기 때문에 내가 돈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미리 아시고 돈을 안 주시는구나! 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를 세상에서 실패케 하는 이유는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복은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에요.
마음에 땅의 것을 담고 있으면 하늘의 것을 담을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땅의 것을 쏟아버리게 하시고 하늘의 것을 채워 주시는 사건을 벌이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귀향은 성도가 천국 가는 것의 모형이라 할 수가 있어요.
야곱은 하란에서 자기 능력으로 얻은 재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가려고 하였어요.
하나님은 야곱이 믿음으로 귀향하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야곱은 자기가 일구어 놓은 재물을 앞세우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이 이방에서 모은 재물들을 다 버리게 하신 후 빈손으로 벧엘로 올라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기가 번 돈은 받지 않아요.
즉 세상과 짝하여서 얻은 것은 받지 않아요.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온갖 술수를 써서 모은 재물은 마치 창기가 번 돈과 같아요.
 
신명기 23장을 봅시다.
 
신 23:18절.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야곱이 모은 재물은 신약 식으로 말을 하면 세상과 간음하면서 모은 재물이에요.
하나님은 세상과 간음하여서 번 돈을 원치 않아요.
하나님은 돈을 앞세우고 나아오기를 바라지 않아요.
하나님은 예수님 십자가를 앞세우고 나아오기를 원하세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재물로 나아오지 말고 지팡이로 나아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야곱이 벧엘로 다시 올라갈 때는 빈손으로 지팡이 하나만 의지하고 올라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했어요.
재물을 하나님과 동등한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어요.
이는 재물이 의지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재물이 있을 때는 아버지 집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재물이 다 떨어지고 나니까 비로소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탕자에게 있어 돈이 떨어진 것이 복이에요.
 
우리 역시 마찬가지예요.
의지할 것이 있으면 하나님을 안 찾아요.
의지하는 것이 돈일 수도 있고,
명예와 권력일 수도 있고,
부모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일 수도 있고,
건강한 몸일 수도 있어요.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이는 돈이라는 의지할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체질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들에게는 의지할 것을 하나둘씩 빼앗아가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가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어요.
풍요로워지자 사람들이 여호와를 떠나는 겁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고멜이라는 창기로 비유하여서 고발을 하신 겁니다.
하나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을 아내로 묘사한 것이 호세아 선지자와 그 아내 고멜이야기에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이 달콤한 것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시와 담을 막아 버렸다고 합니다.
 
호세아 2장을 봅시다.
 
호 2:6-17절.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갈찌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 ~ 14.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고멜이 수중에 돈이 있으니까 외간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돈줄을 막아 버립니다.
돈줄이 막히자 고멜이 본 남편에게로 돌아갔어요.
이를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인들이 물질적으로 흥하니까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망하게 하신 겁니다.
망하고 나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았다고 합니다.
 
망한 상태를 아골 골짜기로 비유하고 있어요.
아골 골짜기는 하루 종일 쓰레기를 태우거나 시체를 태워서 연기가 났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아골 골짜기를 지옥이라고 했어요.
고멜이 돈이 떨어진 상태가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돈을 물 쓰듯이 펑펑 쓰던 사람이 돈이 떨어지면 미쳐요.
지옥이 되어요.
아골 골짜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망하게 해 놓고 하나님을 찾도록 하시겠다는 뜻이에요.
의지하던 것들을 모두 빼앗으시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건 마치 얍복강에서 야곱의 허리를 부러지게 하고서는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도록 하신 것과 같이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얍복강 이후에 하나님은 야곱의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빼앗아버리셨어요.
빈털터리가 되게 하시고는 처음 아비 집을 떠나와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그 모습으로 다시 벧엘로 돌아오도록 만드신 겁니다.
 
벧엘로 돌아갈 때 야곱이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식들과 지팡이 하나뿐이었어요.
야곱은 지금 그 지팡이 머리를 의지하고 축복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팡이 주인이세요.
야곱이 지팡이 머리를 의지하고 축복을 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축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야곱은 지팡이 머리를 의지하고 축복을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팡이가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만 있어요.
십자가의 비밀을 안다면 얍복강을 경험한 성도에요.
얍복강을 건너온 성도는 야곱처럼 지팡이(십자가)만 의지해요.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십자가에요.
 
바울은 자신은 오직 십자가 이외는 증거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백하였어요.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어야 해요.
오직 예수만 자랑하고 살아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야곱이 지팡이로 인하여 세상을 거꾸로 보게 하였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 너머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말고 십자가 너머의 가치관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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