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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성경강해)6강. 사라의 불신과 약속의 아들 (히 11:11-12)

by coroa 2022. 2. 23.

 

하늘빛사랑 https://blog.daum.net/day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6강. 사라의 불신과 약속의 아들 (히 11:11-12)

-.정낙원 목사

 

히 11:11-12=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오늘 설교는 참 어려운 내용입니다.

처음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야 해요.

왜냐하면! 인간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고정 관념이 있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무엇이든지 이해를 합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이라야 고작해서 자기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입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경험을 학문화 한 것을 과학이라고 합니다.

과학은 생각하고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도출해낸 결과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선 과학적 근거가 하나의 진리처럼 통용이 됩니다.

인간들이 과학을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이성과 맞아떨어지고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돌고 돌아서 자기 머리로 이해되는 것을 믿는다! 라고 내어 놓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믿는다는 말은 경험되어진 것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열면 인간의 합리적 사고가 죄라고 고발을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합리적 사고를 깨트리면서 다가와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록한 성경은 인간의 이성으로 보면 전혀 합리적이지도 않고 황당한 말들로 가득 차 있어요.

 

성경이 이처럼 반(反)이성적인 일들로 기록이 되어져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간들에게 감추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기를 원치 않아요.

오로지 자기백성들만 알도록 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비밀(秘密)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에 관한 일을 영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것은 육에게는 모두 비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비밀이고,

예수님도 비밀이고,

교회도 비밀이고,

성령도 비밀이고,

십자가도 비밀입니다.

 

믿음도 비밀이고 온통 비밀 투성이에요.

하나님께로 온 영(靈)을 받지 않고서는 전혀 알 수 없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봅시다.

 

고전 2:11-14=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도리어 미련하게 보여요.

미련하다는 것은 상식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라는 식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나름대로 똑똑하다고 했어요.

어떤 학자들은 바울의 지혜가 지금 식으로 말하면 박사 학위를 7개쯤 받을 정도라고 합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했으니 굉장히 똑똑한 사람입니다.

거의 인간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란 말입니다.

 

자연히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죽였어요.

다른 하나님을 말한다는 이름으로 말이에요.

바울은 예수님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아무리 봐도 자기가 아는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전혀 다른 하나님인 겁니다.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은 상식적 하나님으로 밖에 이해가 안 돼요.

바울이 유대교에 있을 땐 성령을 받지 않았으니 자연히 상식적인 하나님만 알고 있었어요.

조상의 유전과 전통으로 알아진 하나님이에요.

 

유대교는 율법을 지켰어요.

그렇다면 율법으로 아는 하나님은 상식적인 하나님이란 말이 되지요.

맞아요.

 

율법으로 아는 하나님은 상식적인 하나님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주고 불순종하면 벌을 주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알고 있는 신관이에요.

결국 율법으로 알아진 하나님은 이방인들과 동일한 상선벌악 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나 그를 따르는 예수쟁이들은 전혀 다른 하나님을 이야기해요.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의로워진다고 합니다.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서 의로워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율법 신앙으로서는 도무지 용납 할 수 없는 이단사설입니다.

그래서 예수쟁이들을 만나는 대로 죽였어요.

예수쟁이들은 한마디로 이설(異說)로 혹세무민(惑世誣民) 한다고 본 겁니다.

 

인간이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면 없애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하고 다른게 있으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남겨두고 채우고자 합니다.

 

자녀들 방에 가면 부모가 좋아하는 것으로 치장해 놓습니까?

아니지요.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치장해 놓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들 사진들로 도배를 해 놓잖아요.

 

만약 엄마가 좋다고 한 것을 갖다 놓아 보세요.

치워 버려요.

심지어 자기가 좋아하는 않는 옷은 아무리 명품이라도 입지 않아요.

이게 모두 인간들 머릿속에는 자기 것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속에 자기만의 하나님을 두고 있는 겁니다.

자기하고 통하는 자기가 편한 하나님을 모시고 싶어 해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도 한 고집을 하시거든요.

인간 못지않게 고집이 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도 자기 것 아니면 용납을 하지 않는 분이세요.

 

그래서 자기 백성들 머릿속엔 온통 하나님 것으로 채우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바꿔치기 하세요.

하나님이 찾아오면 내가 가진 것은 전부 쓰레기 통으로 쳐 넣어요.

모두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새로운 정보를 입력시킵니다.

 

성도를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새로운 하나님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선 성령으로 알게 된 새 언약을 새 포도주라고 했어요.

새 포도주(믿음)는 헌 부대(법)에 담을 수 없다고 합니다.

즉 율법 아래 있는 옛 사람은 새 언약을 담아 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새 언약은 새사람만이 담을 수가 있어요.

전혀 다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법은 믿음을 감당하지를 못해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기 때문에 포도주처럼 부풀어서 폭발해 버려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이 그런 겁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상고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체의 능력으로 일을 하십니다.

이를 이름하여 믿음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모든 사람들 앞에 “믿음으로” 라는 말이 나오지요.

 

이것은 모든 일을 하신 주체가 “믿음” 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로봇처럼 믿음이 끌고 가는대로 끌려 다닌 것뿐입니다.

그 속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어요.

 

믿음이 독자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믿어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건 믿지 않건 상관하지 않고 믿음이 독자적으로 일을 해 나가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일이 성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믿음으로 밀어붙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행한 어떤 결과엔 반드시 하나님이 일하신 흔적이 남게 됩니다.

이것을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합니다.

일명 “믿음으로” 에요.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게 그겁니다.

“믿음이 이들을 이런 삶을 살도록 하였다”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죽은 자와 방불한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죽은 나무에 꽃이 핀 것과 같습니다.

사라는 90세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의학적으로 보면 여자의 몸은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한정되어 있어요.

여자는 한 달에 아이를 생산할 난자(卵子)를 하나씩 생산을 한다고 합니다.

남자가 수만 개의 정자(精子)를 쏘아대면 여자의 난자(卵子)는 그 중에 한 놈만 받아들여요.

이 난자(卵子)가 남자의 정자(精子)를 만나면 핵반응을 일으켜서 아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난자가 남자의 정자를 만나지 못하면 스스로 죽어 피를 토하고 말아요.

이것을 경수(經水) 또는 월경(月經)이라고 합니다.

여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달거리입니다.

 

의학적으로는 여자가 아이를 생산 할 수 있는 능력은 경수가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경수가 끊어졌다는 것은 곧 난자가 생산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자가 젊어서 경수가 있을 땐 여성 호르몬이 왕성하게 활동을 하여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의 몸으로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경수가 끊어지면 호르몬 체계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 여성 호르몬은 급격히 떨어지고 남성 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가 되어 남성화 되어 간다고 합니다.

여자가 늙으면 남성스럽게 변하는 이유가 이 호르몬 체계에 변화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자가 경수가 끊어지면 아이를 생산하는 여자로서의 일생은 마감하고 그냥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이는 남자들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남자가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될 때는 몸이 남성 호르몬을 다량으로 분비하여서 강한 몸으로 만들어 준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늙게 되면 어느 순간 호르몬 체계가 깨어져서 남성 호르몬은 줄어들고 여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남성에서 여성화 되어 간다고 해요.

남자가 늙으면 마누라 꽁무니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다 호르몬에 변화 때문에 여성화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남자가 늙으면 정자(精子)의 활동도 약해져서 생식 능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암튼 남자나 여자나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무한정 하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가 되면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죽게 됩니다.

이를 통상적으로 말할 때 늙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선 사라가 나이가 늙어서 단산하였다고 합니다.

 

단산(斷産)이란? 생산능력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물학적으로 여자가 경수가 있으면 임신 능력이 있고, 경수가 끊어지면 임신 능력이 상실 된다고 합니다.

제가 의사가 아니라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대충 그렇다는 것만 말씀드립니다.

복음이 아니니까 혹 틀렸으면 여러분이 아는 지식으로 수정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라” 라는 여인의 몸에서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도 기절초풍할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죽은 여자가 아이를 낳은 겁니다.

이는 마치 처녀인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것과 같은 기적적인 일입니다.

 

본문에서 증거하는 바에 의하면 사라는 나이가 늙어서 단산 하였다고 했어요.

조금 전에 단산하였다는 말은 죽었다고 말했지요.

생식 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죽은 사람의 몸에 믿음이 아이를 낳게 하였습니다.

그럼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길래 죽었던 여자를 아이를 낳게 하느냐 입니다.

도대체 사라가 주는 사건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추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해서 일을 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을 이성적으로 살펴보면 제 정신으로 산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없어요.

하나 같이 뭔가에 홀려서 산 사람들입니다.

성도들 입장에선 믿음이라고 하지만 불신자들 입장에서 보면 귀신에 쒼 사람들이에요.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삶들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믿음이 나를 믿는 것으로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무슨 말인지 어렵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난 믿지 않았는데, 믿음이 나를 믿는 자로 만들어 간다는 뜻입니다.

어려우니 잘 들으세요.

 

본문은 사라가 믿음으로 이삭을 낳았다고 합니다.

본문만 가지고 보면 아~ 사라가 믿음이 대단하였나 보다!

그러니 할머니임에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자식을 낳았구나! 라고 생각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은 이 본문으로 성도들에게 그 어떤 환경도 굴하지 말고 믿음으로 버텨내라고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기 때문에 열심히 기도하고 기도하면 반드시 사라처럼 불가능한 일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지금 이 시대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해요.

이게 얼마나 엉터리인지 오늘 말씀을 들어 보면 알게 됩니다.

결국 목사님들이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믿음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요.

 

창세기에서 사라의 행동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즘 목사님들의 말대로 믿는 것이 아니고 아예 안 믿었어요.

그것도 하나님을 면전에 대 놓고 비웃고 조롱했어요.

그럼 하나님이 사라에게 찾아와 아들을 준다고 했을 때 상황을 창세기 본문으로 살펴봅시다.

 

창세기 18장입니다.

 

창 18:10-11=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서 능치못할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을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 승인치 아니하여 기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자 보세요.

여호와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찾아와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시대 교인들 같으면 주여 고맙습니다!

드디어 응답을 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라고 했을 겁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나님 말씀 잘 듣겠습니다! 라고 각오를 다지고 작심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전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 얼굴 쳐다보면서 피식하고 비웃었어요.

비웃었다는 말은 안 믿었다는 말입니다.

속으로 웃기고 있네! 그 뜻이에요.

한마디로 웃기지 말라는 소리예요.

 

여호와가 아들을 준다고 할 때 아브라함과 사라가 비웃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비웃음을 자아 낼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을 못 믿도록 했어요.

그럼 간략하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은 간섭해온 배경을 추적해 봅시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비웃는 이유를 알게 될 겁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셔서 뜬금없이 복에 조상으로 삼아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이때가 아브라함이 75세였고 사라가 65세였습니다.

당시 인간들의 수명(壽命)으로 비교하면 아직 젊었을 때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제나 저제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을 낳을까 마음 조리며 기다렸어요.

그런데 영 소식이 없는 겁니다.

그러기를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마음은 단 일 년이라도 젊었을 때 자식 낳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은 십년이 지나서도 자식 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겁니다.

기다리다 지친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들 방법으로 자식을 생산하기에 이릅니다.

 

아무리 봐도 사라는 자기 몸으로 자식을 낳을 것 같지 않아서 몸종인 애굽여자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내서 씨받이로 대리 출산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안주면 우리 방법으로 낳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낳은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두 사람은 이스마엘을 집안의 대(代)를 이을 자식이라고 잘 키우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와 아들을 주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혹시나 하고 기다립니다.

나이는 들어가고 몸은 늙어 가는데 또 영 소식이 없는 겁니다.

기다리다 지친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제는 하나님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상태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또 세월이 지나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에 이릅니다.

사라의 나이도 89세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사라는 이제 자식을 생산 할 수가 없는 몸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경수가 끊어져 이미 태(胎)의 문(門)이 닫혀 버렸어요.

 

여자에게 경수가 없다는 것은 자식을 생산할 능력이 상실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 농락당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이젠 자식을 주어도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용하다고 해도 사라의 몸 상태를 보면 자식을 낳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가 찾아와서 내년 이맘때 아들을 낳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아니 24년을 속았는데 이걸 믿겠습니까?

그래서 여호와가 하는 말을 아브라함과 사라가 듣고 냉소적으로 비웃었던 겁니다.

됐거든요!~

그만 됐습니다!

 

대 놓고 말할 순 없지만 아마도 서로 얼굴 쳐다보면서 속으로 그랬을 겁니다.

아들 좋아하네!

야! 웃기지 마라!

우리가 어디 하루 이틀 속았냐?

어디 한 두 번 속아야지 그 말을 믿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밥이나 먹고 가던 길이나 가소! 그만~

이젠 여호와가 우습게 보입니다.

그래서 비웃으면서 조롱한 겁니다.

 

이런 생각을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아마 속으로 욕을 했을 겁니다.

저 같으면 그랬을 것 같아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가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히브리서가 그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무언가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사라를 본받으라는 말이 아닌 것 같지요.

맞아요.

 

사라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책망하고 있는 겁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 긴 세월 동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지 않았을까 고민해 보지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므로 식언(헛소리)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식언치 않는다는 것은 한번 약속 한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긴 세월동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식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긴긴 세월동안 약속을 해 놓고선 자식을 안 주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를 히브리서가 “믿음으로” 라는 단 한 단어로 대답해주고 있는 겁니다.

상당히 어렵지요.

 

이제 그 이유를 살펴봅시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였습니다.

기껏 안다고 하여도 조상들에게 들어온 하나님입니다.

이는 모든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런 하나님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에 가두어져 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상식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고 곧 마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선택한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자식이 아니라 자신들을 불러낸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신가를 먼저 아는 일입니다.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을 모르고서야 어찌 따르고 섬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는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난 이런 하나님이다” 라고 가르치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기다린 겁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을 선택한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는 하나님이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직까지 이런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기껏 하여야 자기들 상식으로 안 하나님일 뿐입니다.

자기들 상식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은 자신들이 자식을 생산 할 수 있을 때 곁에서 조금만 도와주어서 낳게 해주는 그런 신(神)입니다.

마치 아기를 가져야 하는데 자궁에 착상이 잘 안되어서 용한 의사가 옆에서 조금 도와주어 인공 수정 시켜주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도 몰라요.

인간들은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어요.

신(神)과도 맞짱 뜰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을 해요.

인간들로 열심히 득도(得道)하면 신(神)같이 된다고 믿고 있어요.

이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관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섬기는 신은 인간과 신이 합력해서 무슨 일이든가 처리해 내는 신들입니다.

신이 독자적으로 일하지 못하고 반드시 인간의 동의를 구하고 일하는 신으로 알고 있어요.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섬긴다면 하나님은 조력자에 불과해집니다.

이런 생각이 아브라함이나 사라를 사로잡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들이 하루라도 더 젊었을 때 아들을 낳기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가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고, 사라의 나이가 65세였으니까 인간적으로 자식을 생산 할 가능성이 있는 나이입니다.

당시 인간의 수명으로 따져 본다면 전혀 불가능한 나이는 아니에요.

그래서 처음에 하나님이 찾아와서 아들을 주겠다고 할 때는 믿었습니다.

아직까지 자기들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후에는 자신들이 신체적 상태를 보았을 때는 이미 자식을 생산 할 수 있는 나이는 훌쩍 지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라의 몸이 자식을 낳기 틀린 화석과 같이 굳은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몸에서 경수가 끊어졌다는 것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불쑥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이제 아들을 낳는다고 하니 비웃음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비웃도록 만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비웃었다고 욕할 수가 없어요.

인간의 상식으로 그들의 생각이 맞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상식 밖에 하나님입니다.

그러려면 인간의 상식을 깨트려야 합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상식을 깨트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부러 아브라함과 사라가 죽은 자 같이 될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인간의 몸이 망가져 있어야 합니다.

 

사라의 몸에서 자식을 생산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단 1퍼센트도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인간들은 단 1퍼센트의 가능성만 있어도 그 1퍼센트가 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가 포기 할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야! 라는 말을 하게끔 기다린 겁니다.

자식을 낳아도 이건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야! 라는 말을 하게끔 기다린 것입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도무지 인간의 상식으로 믿어지지가 않는 것을 믿는 겁니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가능성을 전제로 한 믿음입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믿음이 아니고 확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불가능을 전제로 하는 믿음입니다.

 

인간의 믿음은 상식선에서 믿는 것이고, 하나님의 믿음은 비상식 선에서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은 젊었을 때 자식을 낳아야 된다는 믿음이었고. 하나님의 믿음은 자식을 생산할 수 없이 늙어야 발휘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스스로를 포기하고 지칠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과 사라가 힘이 있을 때 자식을 낳았으면 자기들이 낳았다고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 아니고 자기 아들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아브라함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스스로가 희망이 있다고 여길 때는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절망 상태가 될 때 비로서 개입하셔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십니다.

창조주로서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그 일이 인간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고 하나님은 죽은 자를 가지고 생명을 낳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이를 “없는데서 있게 하신다” 라고 합니다.

인간의 믿음은 산 사람이라야 자식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믿음은 죽은 자라야 하나님의 자녀가 생산된다고 하십니다.



성전에 안치된 법궤 속에 담겨져 있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잘 대변해 주시고 있는 증거물입니다.

지팡이에 싹이 났다는 것은 죽은 나무에 싹이 난 겁니다.

이는 부활을 상징합니다.

이건 인간 상식 밖의 일입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상식 밖의 하나님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그런 하나님입니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법궤 속에 보관하고 있다는 것은 부활의 하나님이 자신들과 동행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자신의 가능성으로 국가를 지키려고 했어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군이라고 여기던 다윗이 말년에 인구조사 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된통 혼이 난 것도 모두가 보이는 힘을 의지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항상 보이는 힘을 의지하고자 하는 유혹을 늘 받습니다.

 

이스라엘이 힘을 의지하면 여지없이 하나님의 징벌이 임합니다.

이스라엘은 힘을 가지면 안돼요.

왜? 그런가 하면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동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에게 있는 겁니다.

항상 보이는 힘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적입니다.

 

이스라엘 속에는 항상 하나님이 일하심만 남아야 되요.

그게 이스라엘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불가능성의 역사로 써내려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세상에 참 하나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방나라와 같은 흉내를 내면 안 됩니다.

항상 불완전함 속에서 기적으로 살아남는 모습으로 남겨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방 사람들이 저 인간들은 도대체 무슨 신을 섬기기에 망하지도 않고 저렇게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가? 라는 의구심을 불어 넣어 주어야 해요.

그럴 때 이스라엘은 우리가 섬기는 신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구약 이스라엘은 항상 가능성을 쫓아갔습니다.

왕들이 인간의 힘을 의지하고 인간의 상식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결국엔 멸망을 당합니다. 

지금도 성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힘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믿음이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을 해도 믿음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해 줬는데도 자기가 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인간이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고 하면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망할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스스로 포기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탕자가 수중에 돈이 남아 있을 때는 아버지와 아버지 집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의지할 것이 없어야 비로서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됩니다.

탕자가 다름 아닌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아직까지 덜 급해서 그래요.

아직까지 비빌 언덕이 있기 때문에 빤질거리면서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미적지근하게 하는 겁니다.

건강이 있고, 돈이 있고, 직장이 있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탕자처럼 완전힌 절망 상태가 될 때 비로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럴 때 만난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거짓하나님일 확률이 농후해요.

진짜 하나님은 여러분을 서서히 조여들어가는 하나님입니다.

 

건강도 날아가고, 사업도 망하고, 직장도 쫓겨나고, 돈줄이 막히고, 믿었던 남편이나 처 자식도 제 갈 길로 가서 내 처지가 끈 떨어진 연처럼 가련해 질 때 비로서 탕자처럼 하나님을 그리게 됩니다.

여러분이 진짜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라고 한다면 조만간 그런 날들이 찾아 올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내 능력을 붙잡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슈퍼맨을 길러내는 곳이 아닙니다.

반대로 철저하게 자기가 부인되는 자를 길러내는 곳입니다.

성도는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강함은 곧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힘을 빼앗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의지하는 것을 허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야곱을 통하여서 잘 보여 주셨어요.

야곱은 거부가 되어서 힘을 앞세우고 고향을 돌아가려고 온갖 술수를 다 동원하여 끝내 소원하던 바를 이룹니다.

이제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거부가 되어서 금의환향(錦衣還鄕) 합니다.

고향에 가면 자기 힘을 앞세우고 자랑 할 일만 남았습니다.

 

일찍이 야곱이 아비 집을 떠나 벧엘 광야에서 유숙 할 때 하나님이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인생 속에는 하나님이 일하심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므로 야곱이 힘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밤잠 설쳐가면서 23년 동안 모아온 힘을 빼앗은 일을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바로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야곱이 씨름하는 싸움입니다.

더 이상 자신을 믿지 말라는 뜻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허리)를 분질러 병신을 만들어 버립니다.

 

지팡이로만 의지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리곤 이젠 넌 “야곱(약탈자)” 이 아니라 “이스라엘(우상과 싸우는 자)” 이라고 이름을 바꿔 주십니다.

 

이름을 바꿔 주신다는 것은 다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자란 말입니다.

야곱은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자이지만,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자기 힘으로 살고자하는 옛사람과 싸우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신과 싸우는 자라고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살고자 하는 우상성을 지닌 옛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야곱 자신이 하나님의 공격대상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눈만 뜨면 자기를 신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야곱은 하나님께 얻어맞은 흔적인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았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 지팡이는 십자가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덤벼든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도(道)는 인간을 죽이는 것입니다.

 

정과 욕심에 사로잡혀서 살고자 하는 인간을 죽이는 곳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핏 값으로 산 곳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돈을 성전에 던지니 그 돈으로 아겔다마 라는 “피 밭” 을 하나 사서 “나그네들의 묘지” 로 삼았습니다.

 

교회를 일컬어 예수님의 핏 값으로 산 곳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나그네들의 무덤인 것입니다.

나그네란 성도를 말합니다.

그럼 성도는 교회에 와서 옛 사람을 죽여서 묻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움켜잡아 힘을 모으고자 하는 육신의 소욕을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옛 사람은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새 사람은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불가능한 인간을 가지고 일을 해 나가십니다.

믿음이 불가능한 인간에게 덮쳐서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십니다.

믿음이 불가능한 사라에게 덮쳐서 기어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냅니다.

믿음이 하나님께서 비웃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에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이삭을 약속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만들어 낸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지 않았다는 증거물입니다.

동의하지 않은 사라의 몸에 믿음이 일을 한 결과로 태어난 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죽은 나무와 같은 사라에게 자식을 낳게 하는 꽃을 피었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사라는 믿지 않았지만 믿음이 독자적으로 사라와 의논하지 않고 일을 해 나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동의하여야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와 상관없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는 항상 우리의 불신을 책망하면서 일하십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믿음이 덮쳐 오면 넌 믿지 않았다고 해요.

순종이 아니라 불 순종이 튀어 나와요.

 

우리는 항상 믿었다고 생각하지만 돌아보면 우리가 믿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가 믿지 않은 가운데서 일해 왔음을 깨달을 수가 있을 겁니다.

지금도 우리는 입술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안 믿고 있어요.

육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불순종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은 안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집요하게 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고집은 꺾이지 않고 그대로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고집을 꺾을 만한 인간이 못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사십년 동안 해 왔던 일들을 그대로 반복하며 살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도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일을 해 오셨듯이 불순종하는 성도를 통해서 일을 해 나가십니다.

 

불순종 속에서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남기실 것입니다.

마치 사라가 믿지도 않았지만 아들을 준 것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사라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라가 믿지 않았음에도 아들을 준 것은 그 아들이 곧 사라의 믿음 없음을 책망키 위함입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이 이를 잘 입증해 주고 있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하나님을 조롱한 불신앙적 요소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삭은 짜하크(qh'x;)라는 동사로부터 유래한 말입니다.

짜하크는 “터놓고 웃다(흥겹게 떠들며 또는 경멸하며) 희롱하다, 비웃다, 놀다, 조롱하다” 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삭은 “하나님을 조롱했다” 라는 뜻입니다.

 

결국 사라와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이라는 존재는 그들의 믿음 없음을 고발하고 책망하는 존재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삭이 그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웃은 자들이다” 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믿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함이 이런 일을 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가 믿음으로 사라는 아들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사라는 믿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사람의 불신과 상관없이 일을 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라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라에게 약속을 이루어가는 주체는 믿음이지 사라의 반응이 아닙니다.

사라의 반응과 상관없이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삭을 낳게 하였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믿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들이 믿지 않았음에도 생겼습니다.

 

이는 이삭이 인간의 요구로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에 대하여서 말하면서 아브라함의 씨는 한 사람인데 바로 예수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바울은 지금 이삭을 예수님과 동질로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우리가 원해서 오신 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내가 죽은 것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라고 죽었다고 합니다.

이제 내 백성은 내가 지켜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제 그 약속이 자기백성들 속에서 일을 해 나가십니다.

마치 사라가 믿지 않았음에도 믿음이 독자적으로 사라를 통해서 기어이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해냈듯이 이젠 성도들 속에서 실현해 낼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내용도 성도가 동의하건 하지 않건 상관하지 않고 사라처럼 선택이 되어진 자들에게 적용이 되어집니다.

믿음이 성도들에게 적용시켜 나가십니다.

즉 믿어지게 하신단 말입니다.

 

결국 성도를 지켜내는 것은 성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음이 성도를 약속 안에 거하도록 지켜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가 불신 하였음에도 기어이 약속대로 이삭을 낳았듯이 성도 또한 성도들의 행함과 상관없이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약속 때문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인간이 싫다고 해도 약속 속에 담긴 내용들을 반드시 성취해 내십니다.

이걸 성도가 천국 가는 것에 비유하면 난 천국 안 갈 꺼야! 라고 해도 약속이 모가지 끌고 데려가는 것과 같아요.

왜냐하면! 약속 속에 천국 가기로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이 꽂히면 작살처럼 안 빠져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빠져요.

그래서 하나님께 선택된 성도는 천국에 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안 간다고 발버둥 쳐 보세요.

자기 몸만 아파요.

 

하나님 약속은 마치 미사일 같이 조준된 목표물을 따라다니면서 반드시 명중시킵니다.

하나님 약속은 그 어떤 이유나 환경에서도 취소되지 않아요.

그리니 신약 성경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우리가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믿음이 구원을 해 낸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약속이 구원을 해 낸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약속이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의 반응과 상관없이 자기 백성들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 낸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 구원을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서 이삭을 낳았다는 말과 같아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음에도 이삭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이삭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지 아니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태어 낳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반응과 상관없이 주어진 자식입니다.

 

그러니 이삭 속에는 사라의 신앙에 흔적은 하나도 없는 겁니다.

도리어 이삭 속엔 사라의 불신앙만 가득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받아들이건 그렇지 아니하건 구원의 결과에는 하등의 영향이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내 행위와 상관없이 약속이라는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예수님이 야! 너! 천국 가! 그랬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보내준 믿음이 나를 천국으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에 떠 밀려서 천국에 갑니다.

천당에 가면 전부 얼떨리우스들만 있어요.

야! 너 어떻게 여기 왔어! 라고 하면 우리는 몰라요.

어떤 분이 밀어서 왔어요! 라고 해야 돼요.

그러니 천국에 간 것 속에는 우리 공로는 0.00000001%로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사라의 믿음 없음을 고발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도의 믿음 없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제자가 십자가를 볼 때 마다 무얼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친 것만 생각 날 것이 아닙니까?

 

그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도를 구원한다는 말은 십자가 자체가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마다 난 안 믿었다! 라는 고백이 토설되어져야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난 믿었다!

그러면 안돼요.

 

이걸 이해해야해요.

이게 이해가 안 되면 사라가 아니고 하갈이 되어요.

 

사라가 주여 난 안 믿습니다! 하고 이삭을 낳았어요.

반대로 하갈은 주여 믿습니다! 하고 이스마엘을 낳았어요.

그러므로 이삭 속엔 하나님 공로가 들어가 있고, 이스마엘 속엔 인간 공로가 들어가 있어요.

이삭은 사라가 싫다고 했는데도 하나님이 밀어붙여서 낳았으니 하나님 자식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하갈이 예! 제가 낳겠습니다! 라고 해서 낳았기 때문에 하갈 자식이에요.

하나님이 낳은 자식은 천국에 가고,

인간이 낳은 자식은 지옥에 가요.

이건 조금 있다가 보충설명을 할게요.

 

다시 말합니다.

중요한 말이니까.

 

십자가가 뭐라고요?

너희는 예수를 믿지 않는 놈이야! 라고 고발한다고 했지요.

그럼 이 고발을 받아들인 성도는 맞습니다!

하나님 난! 예수를 죽인 놈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겠지요.

그럴 때 자기 백성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은혜덩어리가 되겠지요.

 

이해가 됩니까?

새 언약 속에는 우리의 순종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불순종이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새 언약 속에는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만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은 것입니다.

 

그러면 새 언약이 성도에게 덮쳐오면 성도의 입에서 뭐가 나오겠어요?

주님! 난 예수님을 죽인 자인데요! 라고 하겠지요.

그러면 주님이 그래 내가 너 때문에 죽었어!

 

그러니 네가 구원받은 것은 순전히 내가 용서해서 된 것이야! 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 입에서는 주여! 감사합니다! 가 나오겠지요.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언약이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이 대신 다 담당해 주셨다는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 새 언약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해도 천당에 가는 겁니다.

새 언약이 베드로의 행함과 상관없이 베드로를 천국으로 밀어 붙인 것입니다.

 

만약에 난 새 언약을 믿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을 믿어서 이삭을 얻었다! 라는 것이 되어요.

하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안 믿었어요.

도리어 조롱했지!

 

그러니 여러분이 난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다! 라고 하면 안돼요.

그럼 어떻게 고백해야 합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우린 믿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언약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라고 하여야 해요.

물론 언어 구조상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는 그 속엔 내 행위는 털끝만치도 없고 모두 예수님의 공로만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말 속에 담겨진 진정한 의미는 난 안 믿었는데,

하나님의 약속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 구원을 받았다! 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식으로 말하면 난 믿었다! 하지 말고 믿음이 나를 끌고 가서 구원을 이루어 주셨다! 라고 하란 말입니다.

믿음이 사라를 기어이 이삭을 낳게 하였다! 라고 하듯이 말해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내 행함으로 남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 없는데 믿음이 와서 믿게 해 준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나를 구원한 것이지요.

이해되는가요?

 

야! 어렵다! 어려워!

한국말로 하는데도 이렇게 어려우냐!

 

제가 말을 잘못하는가요?

아니면 다 알아 먹는데 제 혼자 어려워하는가요?

여러분은 다 알아 먹는데 내가 어려워야 하겠지요?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이 알아먹어야 해요.

그래야 어디 가서 속지 않아요.

 

요즈음은 십자가를 말하면서 십자가가 행위로 전락한 것이 엄청 많아요.

어떤 설교를 보면 십자가를 말하면서 자기가 믿었다는 행위가 튀어나와요.

이 사람은 십자가가 뭔 줄을 모르고 십자가라는 단어만 알고 설교를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도 십자가를 외치니 그냥 이해를 하고 맙니다.

 

엄밀히 따지면 아니에요.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여러분의 것으로 남으면 안돼요.

그럼 이 시대 교인들의 신앙과 사라의 신앙을 비교하여서 말 할 테니 잘 들어보세요.

 

어떤 사람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목사님이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아이를 주실 것이라고 가르쳤어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라고 하면서 기도하라고 했어요.

그럼 주여 믿습니다! 하지요.

 

그럼 목사의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아이를 달라고 열심히 기도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기도하다가 천사가 나타나서 그래 내년 이맘 때 아이를 주겠다!

그러면 아멘!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라고 하겠지요.

여러분도 그러지 않겠어요.

 

그런데 사라는 그러지 않았어요.

여러분이 한번 대답해 보세요.

뭐라고 했습니까?

아이구! 하나님 웃기지 마세요?

나 안 믿습니다?

지금 농담 하십니까? 라고 했어요.

뭐가 달라도 한참 다르지요.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자식을 대하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안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식 내놔!

그러면 사라의 요구에 의해서 주어진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대로 하이소!

이 아이가 내 껍니까?

하나님꺼지!

소유권이 없어요.

 

그런데 자기가 죽도록 기도해서 응답받아서 낳았다고 하는 사람에게 가서 자식 내놔!

그러면 하나님을 죽이려고 덤벼 들 겁니다.

왜? 그러겠어요.

자기 기도로 얻은 자식이기 때문이에요.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어요.

 

그러니 자식을 포기 못해요.

하나님이 달라고 해도 안 줘요.

어떻게 얻은 자식인데 줘요.

절대로 못 줍니다.

결국 하나님 자식이 아니고 자기 자식인 겁니다.

 

그래서 열심과 충성으로 얻어진 것들을 교인들이 틀어쥐고 안 내 놓는 겁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기 피와 땀이 배여 있는 것은 자기 소유라고 생각해요.

돈도 땀 흘려서 번 돈은 아까워요.

그런데 공짜로 주은 돈은 아깝지가 않아요.

똑같은 가치인데도 애착심이 달라요.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이 믿음에 조상이니 매우 믿음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증거는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하나님의 믿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아멘하고 화답하였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에 조상이 될 수가 있는 겁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 라고 반문하시겠지요.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믿음을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가 믿음으로 라고 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들은 믿지 않았다는 것을 깔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들이 척 알아서 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팔 걷어 부치고 나서서 이리 끌고 저리 끌고 다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고 믿는 것은 우리가 일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물이지 아브라함과 사라가 일한 결과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도리어 하나님이 이삭을 준다고 하자 비웃었잖아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비웃음을 뒤로하고 아브라함과 사라 속에 믿음으로 일을 하셔서 이삭을 낳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지도 않았는데 믿음이 이삭을 낳게 했으니 믿음에 조상이 되는 겁니다.

이해가 되세요.

아브라함은 믿음에 조상이지 믿는 조상이 아닙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도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믿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고,

믿는다거나 믿어서 라는 말은 우리가 반응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천국에 가는 것은 너! 천국 가! 그러면 우리가 예! 하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너 천국 가! 그러면 싫어요! 하고 도망을 가는 자들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천국 가는 길은 좁은 길이고 협착해서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넒고 좋은 길을 다니려고 하지 좁고 협착한 길을 다니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몽땅 지옥으로 가지 천국에 가지 않아요.

그러면 지옥은 만원이고 천국은 텅텅비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질질끌고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상식으로 예수를 믿어요.

하나님이 천국에 가라고 하면 군말 없이 가는 줄 알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믿음이 필요가 없어요.

내가 믿어서 가면 되니까요.

 

그러나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곳입니다.

믿어서 가는 곳이 아니고!

믿음은 하나님이 일하는 것이고, 믿는 것은 우리가 일하는 것입니다.

뭔 말인지 아세요?

 

천국은 십자가를 통해서 가는데 십자가는 우리를 죽이는 곳이에요.

그러니 누가 자기가 알아서 나 죽겠습니다! 하고 자진해서 십자가에 가서 달리는 사람이 없어요.

십자가 갖다 대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삼십육계 출행랑치지!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12제자들이 보여 주었잖아요.

 

그렇다면 제자들이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자기 실력이 아니겠지요.

믿음이 믿게 해 주어서 믿는 것이지요.

그럼 제자들이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믿음이 구원해 준 것입니까?

믿음이 구원해 주었지요.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식으로 말하면 믿음이 사라의 몸에서 이삭을 낳게 했다! 라는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믿음이냐! 행함이냐!

율법이냐! 은혜냐! 라는 것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라와 하갈을 가지고 두 언약이라고 했어요.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22-31=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 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사라와 하갈을 가지고 두 언약 즉 두 계통을 말하고 있어요.

두 언약이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말합니다.

옛 언약은 율법이고, 새 언약은 믿음입니다.

율법은 행함이고, 믿음은 은혜입니다.

 

하갈은 율법이고, 사라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하갈은 행함이고, 사라는 은혜란 말입니다.

하갈은 자기 힘으로 자식을 낳았지만, 사라는 하나님 힘으로 낳았어요.

하갈이 낳은 자식은 쫓겨나는 종이라고 하고, 사라가 낳은 자식은 기업을 이을 아들이라고 해요.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하갈이 낳은 자식은 내어 좋으라고 하지요.

그리곤 사라가 낳은 자식에겐 기업을 준다고 하지요.

 

기업이란? 천국을 말합니다.

천국엔 누가 가느냐 하면 사라가 낳은 자식이 가요.

왜냐하면! 사라의 자식은 하나님이 낳은 것이기 때문이에요.

하갈의 자식은 자기 힘으로 낳았기 때문에 인간 자식인겁니다.

사라가 낳은 자식에게 100% 하나님이 일하신 흔적이 담겨져 있어요.

반대로 하갈에겐 인간의 흔적이 담겨져 있어요.

 

천국엔 인간의 흔적이 있는 것은 못가요.

오직 하나님 것만 100%로 들어가 있어야지만 들어가요.

이삭과 같이 사라가 싫다고 했는데도 주어진 자와 같은 자라야 갑니다.

그게 누군가 하면 자기가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놈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난 예수를 죽인 놈인데! 그 피가 흘러와서 살아난 놈들만 들어가요.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한 자들은 천국에서 제외되고 하나님께 불순종한 놈들이 들어가는 겁니다.

이삭처럼 백 퍼센트 무결점 하나님의 약속(은혜)만 담겨 있는 자가 들어가는 겁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가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바울 식으로 말하면 죄인 중에 괴수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성도를 십자가 앞에 끌고 가서 너! 예수 죽인 놈이야! 라고 책망을 해요.

그러면 성도는 주여 맞습니다.

예수님을 내가 죽였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마치 사라가 이삭을 보면서 난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웃은 자인데요!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인이 천국에 간다는 말을 이해하겠어요.

아니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자가 천국에 간다고 해야 분명하게 맞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 때 모든 게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신앙생활에 감사가 안 되는 것은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얻고자 하기 때문에 감사가 안 되는 것입니다.

받은 것을 알면 감사가 나오는데, 얻고자 하면 불평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키우는 재미로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용서 받고 사는 것에 감사했어요.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랄까봐서 번번이 하나님을 불신하였습니다.

원칙대로 한다면 이 지구상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없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지금도 지구상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 속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약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12제자 모두가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배신자들을 통하여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12제자들이 세운 교회는 예수님을 배반한 불신의 바탕 위에 세워졌습니다.

도망 간 놈들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교회를 세운 것은 인간의 불신을 고발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교회를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버젓이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결과이고 은혜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약속이 우리에게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약속은 받는 순간 이미 구원은 확정이 된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자체로 능력이기 때문에 확정적입니다.

하나님 약속은 완료예요.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 찜 당하면 영락없이 천국에 갈 수 밖에 없는 팔자입니다.

히브리서 식으로 말하면 믿음이 우리를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은 성도 속에 약속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심겨져 있기 때문에 도망을 가도 붙잡아 오는 겁니다.

 

마치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인 고멜과 같이 우린 항상 세상과 간음하고 있습니다.

눈만 뜨면 세상이라는 신랑을 찾아 나섭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데려옵니다.

 

그러니 우리의 몸 속에는 항상 예수 죽음만 남기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산다는 것이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믿는다고 할수록 불신이 터져 나옵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신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가게 되는 겁니다.

역설적으로 신앙이 얕을수록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까불어요.

 

전 솔직히 과거엔 예수님을 엄청 사랑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진짜 십자가를 알고 난 후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허울뿐이고 도리어 주님을 빙자하여 내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죄인이라는 것이 뼈저리게 깨달아집니다.

물론 이런 생각도 잠시 뿐이고 돌아서면 여전히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잘나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이 깊은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이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강권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부도수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불신조차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행함과 상관치 않고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사랑의 약속을 우리 몸에 심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끊어질 수 없는 사랑에 놀라야 합니다.

그리고 감격하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엄청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못난 놈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인가를 깊이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고 있는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 깊디 깊은 사랑을 알아야 범사가 감사가 되요.

성도는 입만 열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철철 넘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쿡 찌르면 여기서도 감사 저기서도 감사가 쏟아져 나와야 해요.

 

이런 악하고 못난 죄인을 끝까지 용서해 주시는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그 길이를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감사가 너무 깊어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고 성도를 사랑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맺은 새 언약의 불변성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너도 나도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이곳에 있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사라가 믿지 않았음에도 떠나가지 않고 뿌려진 약속을 그 몸에 기어코 이루어 내는 하나님의 그 집요한 사랑을 후대에 신자들에게 알려주시려고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도 조롱하며 비웃었던 사라를 믿음에 영웅들이 열거된 히브리서 11장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일하심에 감동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는 사라입니다.

입술로는 주 예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지독히도 자기만 사랑하는 사기꾼들입니다.

실제 속에는 예수님에 사랑은 없고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위선자들입니다.

 

우리가 바로 바리새인이고 우리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군중들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면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를 아시고 하나님은 사라에게 믿지 않음을 고발하기 위하여 이삭을 주었듯이, 우리에겐 예수님의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지금도 십자가는 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넌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새벽마다 울어대는 닭소리가 베드로의 불신을 고발하듯이,

우리가 입만 열면 자랑하는 그 십자가가 지금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서서 내가 바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끝까지 용서해 주시는 그 주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고발하는 동시에 우리를 위로해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죽였다 살렸다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십자가의 비밀을 알았기에 자기는 오직 십자가만 증거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어찌 자랑하지 아니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십자가의 비밀을 바로 알면 자랑하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처럼 십자가 이외는 전하지 않기로 작정한 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의 불신앙 속에서도 믿음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하고 계심을 믿고 안심하고 사시길 바랍니다.

그 어떤 사단의 참소로부터도 흔들리지 말고 담대히 사십시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이 우리를 늘 간섭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늘 탕자처럼 살고 있음에도 믿음이 우리를 지키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환경을 탓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케 하시고 사나 죽으나 주님의 사랑만 증거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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