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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성경강해)65강. 양의 큰 목자와 언약의 피 (히 13:20-25)

by coroa 2021. 10. 8.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65강. 양의 큰 목자와 언약의 피 (히 13:20-25)

-.정낙원 목사

 

 

 

성경은 이 세상을 일컬어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합니다.

발등상이란 쉬운 말로 하나님의 앞마당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앞마당에서 뭔가 일을 하세요.

무슨 일을 하시는가 하면 그 아들을 만유의 주(主)가 되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양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의 영원한 언약의 피가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피로 자기 백성들을 죽음에서 이끌어내신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죽어주심으로서 죽어 있는 자기 백성들을 살려 낸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미 창세전에 계획된 일입니다.

이렇게 창세전에 계획된 일을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언약의 피를 뿌리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 피를 뿌려주기 위함입니다.

자기 피를 뿌려서 죽음에서 살려내기 위함입니다.

 

자기 백성들은 지금 죄로 인하여 죽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인들은 몰라요.

마치 잃은 양이 자신이 잃어버려진 줄도 모르고 태평하게 살고 있는 것과 같아요.

죄 아래 신음하면서도 그게 얼마나 저주스러운 일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실존을 알려 주십니다.

야! 임마 넌 지금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

죽음이 널 지배하고 있단 말이야!

너희가 죽는 것은 모두가 죄 때문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러면서 내가 죽음에 종노릇하는 너희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왔다고 하십니다.

물론 불신자들에겐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오셨나요?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의 하늘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어요.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지려고 피를 가지고 이 세상에 방문을 하신 겁니다.

그럼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이 주신 생명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우린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받으면 됩니다.

 

신앙생활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거에요.

피조물로서 창조주가 주는 것을 받는 겁니다.

창조주에게 기쁨은 피조물이 창조주가 주는 생명으로 건강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어저께 아내가 김장을 하면서 김치 맛을 좀 봐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배추 한 쌈에 양념을 돌돌 말아서 주길래 먹으면서 맛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아내의 얼굴이 화색이 돌면서 흐뭇해합니다.

그러더니 또 한 쌈 더 줍니다.

역시 맛있다고 했어요.

라면에다 먹으면 끝내 주겠다고 했어요.

자신이 한 김장 김치가 맛이 있다고 하니 기분이 좋은 겁니다.

아내의 기뻐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반응해 주시면 기분 좋아 하십니다.

신앙생활이란? 세세한 일에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얻어먹고 산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고선 하나님 고맙습니다!

잘 먹을 게요! 하면 되는데 우린 그러지 못하고 살고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기 보단 갖다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안 받아서 화를 내시는데 우린 도리어 우리가 하나님께 안 바쳐서 화를 낸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신앙생활의 핀트가 늘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받으라고 하는데 우린 안 받고 바치겠다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은 감사가 안 되고 늘 부담스럽고 짐스러운 겁니다.

이게 죄가 주는 하나님의 섬김이에요.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하나님이 바라는 신앙에 대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신앙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성경을 열면 초지일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걸 못 보아서 탈이에요.

 

하나님이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게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 속에는 죽음에서 살아나게 하는 생명이 들어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피는 그냥 우리들의 피와 같지 않고 그 속에 우리 죄를 사해주고 죽음에서 살려내는 생명이 있어요.

이게 비밀(秘密)이에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에요.

애들아! 내 아들이 주는 생명을 받으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어요.

예수님이 죽은 자를 어떻게 살려내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성경이 인간을 죽은 자로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는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말입니다.

죽은 놈이 뭘 하려고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거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주제도 모르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설치고 있어요.

얼마나 꼴불견입니까?

이름하여 악(惡)이에요.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아덴이라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당시 아덴은 종교와 문화와 예술과 정치와 과학이 모여 있는 세상의 중심과 같은 곳입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신(神)이라는 신들도 다 모여 있는 곳이었어요.

도시 전체가 하나의 신전(神殿)과 같았어요.

세상의 신이란 신을 다 모셔놓고 섬기는 신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신전(神殿)이 있었다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다 모인 곳이란 뜻입니다.

 

아덴은 지금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를 말합니다.

지난번 아테네에서 올림픽을 했지요.

그 때 방송에서 뭘 보여주던가요.

거대한 신전들이지요.

그래서 아테네를 신들의 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神話) 이야기도 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는 것은 세상 중심에서 모든 인간들 앞에서 복음을 전한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왜냐하면! 온 세상의 신이란 신은 다 모여 있는 곳에서 복음을 전했으니까요.

아덴 사람들은 스스로 신에 대하여 다 안다고 생각했어요.

당대 내로라 하는 철학자들과 지식층들이 다 모여서 신에 대하여 논하였으니까요.

그런데 바울이 그런 곳에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하여 증거를 하였어요.

 

이건 마치 박사들 앞에서 학생이 강의 하는 것과 같아요.

그것도 당대 최고라고 하는 박사들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그 신에 대하여 강의하고 있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웃기겠어요.

철학자들의 눈에는 바울의 이런 행동은 한마디로 가소로운 겁니다.

하지만 바울은 기죽지 않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하여 말해주겠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그러면서 대뜸 너희들은 신을 모른다고 해 버립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신은 다 가짜 신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은 지금까지 가짜 신을 섬겨 왔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건방진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신에 대하여 박사라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망발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참 신이신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바울이 소개하는 하나님은 세상의 신들과 다른 신입니다.

세상의 신들은 인간의 손으로 섬김을 받는 신이에요.

그런데 바울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생명을 주고 호흡을 주시는 분이에요.

인간에게 섬김을 받는 신이 아니고 도리어 인간을 섬기는 신입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이건 인간들이 아는 신이 아니에요.

인간들의 신관은 인간이 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의 특징은 신께 대한 정성을 신앙의 근본과 핵심에 두고 있습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한다는 사상이 여기서 유래가 되었어요.

사람들은 땅에서 정성으로 빌면 하늘도 감동을 받아서 땅에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믿고 있어요.

 

이런 사고가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도 한 밤 중에 꼭 찬물로 머리를 감고 정성을 쏟아서 드렸어요.

그래야 조상의 음덕(蔭德)을 입는다고 했어요.

제사상에 올려지는 음식도 최고로 좋은 것들로만 드렸어요.

이는 신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고 가르쳐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저함 없이 신에겐 당연히 정성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사고는 우리 몸에 습관처럼 배여 있습니다.

우린 이 습관으로 교회에 오고 예수를 믿는다고 해요.

교회에 오니 목사님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충성해서 복 받으라고 합니다.

이건 세상에서 신을 섬기던 그 방식 그대로에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이 습관 그대로 믿고 있어요.

 

목사님들은 하나님께는 항상 최상의 것으로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정성껏 섬겨야 복을 준다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아부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행여 집 안에 무슨 일을 당하면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더 분발을 합니다.

액땜씩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일종의 거래에요.

 

이는 우리 모두가 인간들의 타고난 종교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목사님들이 하나님도 인간의 정성에 감읍(感泣)한다고 가르치고 교인들은 그 가르침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수용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인간의 상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른다는 뜻입니다.

아덴 사람들과 같아요.

 

이러한 것은 우리 삶 속에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인간들에겐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진리처럼 통하고 있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가만히 따지고 보면 거래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신에게 지성으로 섬기면 신으로부터 그 보답을 돌려받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복을 받고 싶으면 복 받을 짓을 하라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것은 철저히 신과 거래하는 법적인 사고에서 나온 신앙관이에요.

신과 주고받는 거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아쉬운 일이 없으면 신을 찾지 않는 겁니다.

아쉽지 않아 보세요.

신을 찾지 않아요.

그러니 거래이지요.

 

법(法)이란? 거래에요.

법은 법을 지킨 자에겐 복(福)을 주고 어긴 자에겐 벌(罰)을 주는 원칙을 말해요.

그러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은 신에게 지극정성으로 바치면 그 화답으로 복을 준다는 법칙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복을 받고 싶으면 복 받을 짓을 하라는 겁니다.

복 받을 짓을 하라는 말은 복 받을 짓이 따로 있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되면 인간이 복 받을 짓을 하면 신은 꼼짝없이 복을 주어야 합니다.

이러면 신은 인간의 손에 조정당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복 받을 짓을 하면 복을 주어야 하고 벌 받을 짓을 하면 벌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은 인간의 손에 놀아나는 꼬붕인 셈입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호리병 속에 가두어진 마왕처럼 주인이 부르면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라고 항상 대기하고 있어요.

이게 죄인들의 신에 대한 사고에요.

 

이런 사고가 교회 안에서 목사들에게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그래서 목사들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복이든 저주이든 내 행함의 결과로 주어진다고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교인들은 복 받기 위해서 열심히 하고 화(禍)를 면하기 위해서 충성을 다하잖아요.

이 얼마나 공정하고도 이해가 팡팡 되는 신 섬김입니까!?

이런 하나님은 성령을 안 받아도 충분히 섬길 수가 있어요.

 

과거에 인디언들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왔어요.

이는 인디언들이 지내는 기우제에 무슨 신령한 비법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그건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입니다.

비가 와야 끝냈어요.

그러니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비가 올 때까지 지내니까 기우제를 지냈다 하면 반드시 응답을 받는 셈입니다.

 

이게 타 민족들에게 소문으로 퍼질 때는 신에게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반드시 내린다는 것으로 퍼져나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가 안 오면 기우제를 지내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신에게 빌면 비를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종교성과도 맞아 떨어지니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옛날 “용의 눈물” 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태종 이방원이가 나라에 가뭄이 심하자 자신이 정적(政敵)들을 너무 많이 죽여서 하늘이 노(怒)해서 비를 안 준다고 생각하고 기우제를 지냅니다.

어떻게 기우제를 지내는가 하면 모든 죄는 자신이 지고 갈 테니 비를 달라고 합니다.

죽어 가면서 비가 올 때까지 빌었어요.

근데 비가 오면서 태종이 죽었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태종이 비를 뿌려 주었다고 해서 태종우(太宗雨)라고 했어요.

이게 조선 시대에 하나의 법이 되어 고착화 되었어요.

그러니 지금도 비가 안 오면 기우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이 하는 일을 인간 쪽에서 예측이 가능해져요.

왜냐하면! 인간 쪽에서 원인을 제공하면 신은 반드시 반응을 한다는 것으로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아쉬운 것이 있어야지만 신을 찾아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쉬운 것이 없으면 신을 찾지 않아요.

우리 모두가 그래요.

 

우리도 어려움이 없으면 기도 안 하잖아요.

기도가 소원을 이루는 수단이 되고 말았어요.

목사들은 그냥 기도하지 말고 꼭 정성을 드리고 기도하라고 하잖아요.

이는 예물을 드리라는 겁니다.

왜? 그럽니까?

이는 복 받을 짓을 하고 복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교인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요.

다 그런 줄 알아요.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목사 자신들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철야를 하든지 금식을 하든지 하면서 기도원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잖아요.

이게 한국교회가 걸어온 길이에요.

이걸 그대로 교인들이 보고 배운 겁니다.

 

저도 과거에 이런 짓을 참 많이 했어요.

툭 하면 기도원에 갔으니까요.

복음을 모르면 타고난 종교성이 발휘를 하게 되어 있어요.

타고난 종교성은 인간의 열심과 정성이에요.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이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가 그대로 교회 안에 교인들 속에 녹아져 있어요.

그러니 기도해서 응답받으라는 것이 교회 안에 그대로 진리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절간과 같아요.

교인들이 하는 신앙을 들여다보면 세상 신을 섬기는 것과 똑 같아요.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면 복을 받는 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잖아요.

목사나 교인이나 할 것 없이 서로 서로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집안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새벽기도에서부터 철야기도나 금식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함이에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기도하게 하세요.

우리를 우겨쌈을 당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요.

사건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뜻을 깨닫게 하시려고 사건을 만드시는 겁니다.

그리고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얼마나 다른지 깨닫게 하려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 사정만 알아요.

하나님의 뜻엔 신경 쓰지 않아요.

알 필요도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꾸만 복잡한 문제를 일으켜서 기도하게 만듭니다.

그럼 우린 타고난 본성으로 기도하게 되어요.

문제 해결해 달라고 빌어요.

그럼 하나님께선 그 일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하여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게 만들어요.

 

호세아 2장을 보면 하나님을 잊고 살아요.

자신들이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에도 모르고 살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시와 담을 막아서 고통을 안겨 줍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죽겠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지옥 같은 환경에서 하늘을 바라보게 만들어요.

이를 일컬어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았다고 합니다.

아골 골짜기란? 지옥 같은 환경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소망의 문이란? 하나님을 찾고 하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땅에 문제를 일으켜서 하늘에 것을 바라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왜? 내 은혜를 입고 살면서도 모르느냐!

왜? 땅 강아지같이 흙만 퍼 먹고자 하느냐!

너희가 살 곳은 땅이 아니고 하늘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우린 평생 이 싸움을 해요.

그러니 우린 평생 기도하지 않고는 못 살아요.

결국 기도는 하나님과 싸우는 겁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신의 재산과 처자식을 에서의 손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러자 하나님은 야곱을 병신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왜? 병신을 만들겠어요.

이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곤 이름을 바꿔줍니다.

 

왜? 이름을 바꿔 줍니까?

넌 이제 다른 인간이란 뜻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이란 인간은 죽었고 이제는 이스라엘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뭡니까?자기 안에 신과 싸우는 자에요.

 

우리 안에는 우상이 들어 있어요.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에요.

인간의 몸은 다른 하나님을 원해요.

늘 자기 몸뚱이를 챙겨 달라고 기도해요.

그러니 기도하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에요.

성도는 기도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깨달아가게 되어 있어요.

자기 자신이 곧 죄를 생산하는 공장인 줄 알아요.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악당이라는 것을 알아가요.

성령이 그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깊어지면 뭘 달라고 하지 못하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이처럼 신앙생활은 갈수록 자기 죄를 깊이 알아가고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되어가는 것이에요.

할 말이 없어진단 말입니다.

할 말이 없어지려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알려면 하나님과 많이 부대껴야 해요.

 

성도는 하나님과 많이 부대낄수록 그 은혜와 사랑을 많이 알아가게 되어 있어요.

싸우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살이도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많이 겪어 보아야 세상을 알고 사람도 알게 되어요.

목사나 교인들도 서로 많이 싸워보아야 야! 인간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우리 신앙도 하나님과 많이 싸우다 보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낄 수가 있어져요.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와 부대끼려고 수시로 사건 사고를 일으켜요.

우리 인생살이를 간섭하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와 상관치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밀어붙여요.

그러니 우리 인생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간섭하심으로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하세요.

물론 우리는 미련하고 둔감하여서 잘 몰라요.

많은 세월을 지나야 아! 그때 하나님이 간섭했다는 것을 뒷북치듯이 쬐금 알아져요.

 

구약 시대 솔로몬은 백성들에게 보리밭에 깜부기 하나만 피어도 하나님의 징조임을 알고 밭에 메뚜기 한 마리가 뛰어도 하나님의 징조로 보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선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아신다는 것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간섭하시고 계신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자식들이 속을 썩이는 것에서부터 남편이나 아내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까지 성도에겐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게 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온역이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싸우고 민족이 민족을 해하고 하는 것들을 여러 가지 징조라고 했어요.

징조란? 싸인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표시란 말입니다.

 

그럼 북한이 연평도에 폭탄을 쏘아대는 것도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이에요.

예수님이 민족이 민족을 해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인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사건을 통해서 뭔가 깨닫는 것이 있어요.

 

예를 들어 연평도에 사는 정 집사가 있다고 합시다.

정 집사는 하나님은 잊고 눈만 뜨면 고기를 잡아 살 궁리를 합니다.

땅에 코를 박고 살 생각으로 옆에 큰 집을 짓고 재산도 늘려가는 재미로 살고 있었어요.

내일이면 새 집으로 이사를 합니다.

마치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일이면 입주할 그 집에다 폭탄을 떨어지게 해 폭삭 무너지게 한 겁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사는 정 집사를 정신 차리게 하려고 사울에게 악신을 들게 해서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처럼 북한군을 이용해서 폭탄을 정 집사님 집에 떨어지게 만든 겁니다.

하나님이 정 집사에게 너희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사라질 안개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벌린 사건인 겁니다.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이 세대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어요.

노아의 때에 모습이 어떤가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면서 살았어요.

이건 인간들이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사에요.

노아 시대 사람들은 그저 평범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홍수로 심판을 하겠다고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했어요.

홍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잠시 후에 홍수가 일어날 것이니 조심하라고 했다니까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평화롭게 잘사는 연평도에 하나님이 북한의 김정일이 정신을 헤까닥 돌게 만들어서 폭탄을 쏟아 붓게 만든 겁니다.

 

그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사건을 보면서 정 집사 개인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자기 사건으로 보게 되어요.

땅만 바라보고 살다가 어이쿠!~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책망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겠지요.

하나님 도대체 이게 무슨 사건입니까!? 라고,,,,,

그럼 하나님이 야! 이 어리석은 놈아 내가 널 깨우려고 그랬다고 깨닫도록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 집사를 정신 차리게 하려고 애꿎은 해병대 군인 두 명을 죽게 한 것입니다.

이건 연평도에 있는 정 집사뿐만 아니라 울산에 있는 저에게도 경고하는 내용이에요.

우린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폭탄이 여기에 떨어 질수도 있다니까요.

폭탄이 안 떨어지면 지진이 일어날 수도 있고 쓰나미가 덮칠 수도 있어요.

곁에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가 아파 죽을 수도 있고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어요.

멀쩡히 공부 잘하던 자식이 어느 날 날라리가 되어 사고를 치고 속을 썩일 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제국을 일으키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세요.

그런 하나님이 왜? 우리 머리 꼭대기에 북한이라는 깡패 같은 집단을 두게 하였겠어요.

이건 한국교회의 복이에요.

깡패는 깡패다워야 해요.

그래야 조심하고 정신을 차려요.

 

제가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은 삶이 고달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을수록 세상살이가 고달파요.

하나님이 늘 간섭하니 되는게 없는 겁니다.

야곱처럼 참 더러운 인생을 살았다는 고백이 나와요.

12제자들을 보세요.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세요.

이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개 같은 고생을 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어요.

 

이들의 삶을 성경에 기록해 둔 것은 우리를 고발키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과 반대로 살고 싶어 해요.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면서 고난 없이 만사형통하게 살고자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건 사고를 통해서 깨우는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배은망덕하고 호전적인 북한을 우리 곁에 둔 것도 다 복이에요.

한국교회 안에 이단도 많고 사이비가 많은 것도 다 복이에요.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두신 겁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럼 자기 백성들은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요.

주여! 이게 무슨 일입니까!? 라고 따지게 만들어요.

그럼 하나님이 너 정신 차리라고 그랬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시겠어요.

 

왜? 기도하라고 하는지 알겠습니까!?

그러니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세요.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기도하지는 마세요.

물론 이렇게 말해도 안 듣지만,,,,,

여러분이 기도를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은 하나님 뜻대로 일을 하시니까요.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안 들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우린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대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신다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 왜? 탄식하겠습니까?

우리가 말을 안 들어 먹으니 탄식하는 겁니다.

아이가 말 안 들으면 부모 속이 터지듯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부모처럼 속이 터지는 겁니다.

우린 지독히도 말을 안 들어 쳐 먹는 종자들이에요.

아주 독사처럼 대가리 꼿꼿이 세우고 말을 안 들어요.

 

전 제가 만약 하나님이라고 하여도 저 같은 인간은 용서 못할 것 같아요.

내가 나를 보아도 지독히도 말을 안 듣거든요.

전 한 번도 하나님 마음에 들게 살아본 적이 없어요.

예전에 율법 아래 있을 땐 그래도 이 정도면 하나님 앞에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은혜를 받고 보니 내가 괜찮다고 한 그것도 죄라는 것이 보여지는 겁니다.

은혜를 받으니 나에겐 괜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가 위선자임이 보이더라고요.

 

힘들면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나오고 미움이 나와요.

그것도 아주 교묘하게 해요.

속으로는 온갖 불평을 하면서도 겉으론 안 그런 척 한단 말이에요.

이 웬수가!

아주 하나님까지 속이려고 해요.

 

내 속에 선(善)이 없음을 알고 나니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안다고 해서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에요.

범사에 주여 감사합니다!

그러지 않는단 말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여전히 원망하고 투덜거려요.

할 말이 없다고 하면서도 또 궁시렁거리는 이 본성은 버려지지 않아요.

 

그러니 맨 날 기도한다고 하는게 본성적으로 육을 위하여 기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욥처럼 왜? 날 타깃으로 삼아서 달달 볶느냐고 항의하는 겁니다.

본성적으로 육을 위하여 기도하니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줄 리가 만무하지요.

그래도 노느니 염불한다고 내 뜻대로 안 되면 또 습관적으로 주여! 이럴 겁니까! 라고 기도해요.

하나님은 한 번도 제 기도를 들어준 적이 없어요.

도리어 제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틀렸다고 알려 주세요.

꼭 지나고 난 후에 깨닫게 되더라고요.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요.

그런데 거짓 종들은 기도를 만병통치약으로 둔갑을 시켜 놓았어요.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라고 가르친다구요.

그것도 열심과 정성을 쏟아서 하라고 합니다.

사방팔방을 돌아보세요.

다 그런 목사들로 진을 치고 있어요.

 

그러니 교인들은 신앙의 근본을 열심과 정성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거짓 종들은 종교 전문가들이에요.

인간들의 심리를 너무도 잘 알아요.

어떻게 하면 돈을 내고 어떻게 하면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지를 잘 알아요.

 

인간의 종교성은 자기가 행한 열심과 정성을 신앙으로 붙잡고자 해요.

금욕과 고행으로 신에게 나아가 자기 소원을 따내고자 해요.

어런 종교성을 목사들이 놓칠 리가 있나요.

그래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열심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건 마치 자식들이 게임기 사달라고 굶으면서 땡깡 부리는 것과 같아요.

이 놈들이 부모에게 땡깡을 부리면 엄마가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본성적으로 아는 겁니다.

뭘 사달라고 해도 꼭 손님이 오면 그러잖아요.

아니면 시장 통에 가서 지랄을 떨잖아요.

이 놈들이 귀신이에요.

이건 본능적으로 알아요.

 

인간은 자기만 아는 본성으로 태어나요.

그러니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자 말자 배고프면 밤이고 낮이고 울어 제끼는 겁니다.

갓난아기는 부모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지 않아요.

오로지 자기 몸뚱이 따라 행동해요.

배고프면 부모가 피곤해서 자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고 젓 달라고 우는 겁니다.

줄 때까지 울어요.

그럼 엄마가 젓을 주잖아요.

이러한 본성이 자라가면서 부모와 거래하고 흥정하는 데까지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 안에 신앙으로까지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빌고 또 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전혀 불편함이 없어요.

오로지 내가 하는 행함만 있으면 되어요.

목사가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고 하는데 누가 말리겠어요.

그러니 예수를 안 믿고 교회만 열심히 다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왜? 예수를 믿는지를 몰라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죽으셨는지를 몰라요.

거기엔 관심이 없어요.

예수를 몰라도 교회 다니는 데에는 전혀 불편하지가 않아요.

예수를 몰라도 교회만 열심히 다니면 얼마든지 목사도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니까요.

교회만 열심히 다니면 구원을 받는 줄 알아요.

 

누가 예수 믿느냐고 물으면 기가 죽기 싫어서 다 믿는다고 해요.

예수를 믿는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믿는데요.

십자가에 대해서 물으면 다 안다고는 해요.

진지하게 캐물으면 뭘 그리 복잡하게 따지고 믿느냐고 역정을 내요.

너무 깊이 파고 들면 이단이 된다고 해요.

 

예수나 십자가는 신학교를 나온 목사들이나 알면 되는 것으로 간주해요.

자신들은 그저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목사가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목사의 말을 믿는 겁니다.

 

교인들은 열심히 하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목사들이 마귀인줄 몰라요.

인간의 행함으로 뭔가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목사들이 광명의 천사인줄 모른다구요.

그러니 목사가 무슨 신의 대리자라도 되는 줄 알고 목사의 말에 순종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한 것은 받아들이는데!

십자가 피를 전하지 않는 목사들을 마귀라고 하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러니 교인들의 신앙이 절간에서 비는 불자들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불자는 부처님에게 빌고!

교인들은 예수님에게 비는 것만 달라요.

그 안에 열심히 빌면 복을 받는다는 내용은 둘 다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낮에 기독교 방송을 보았는데 영상선교사 100만 명을 모으자고 선교헌금을 마치 수재민 의연금 모금을 하듯이 전화 ARS로 모금을 하는 것입니다.

구좌 당 금액을 책정을 해 놓았는데 100만 원짜리가 구좌가 있어요.

100만 원짜리 구좌에 헌금을 하면 동판에다가 그 사람의 이름을 적어서 사옥의 벽돌에 새겨서 기념을 해 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마치 절간을 지을 때 불자들이 시주를 하면 기왓장에 이름을 적어서 기념을 해 주는 것과 같은 것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나운서가 이런 영광을 차지하라고 벽돌 헌금을 하라고 독려를 하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동참을 하는지 약 20여명의 전화를 받는 분들이 분주하게 전화를 받고 있어요.

그런데 한 채널을 들리니 불교방송이 나오는데 거기에선 이 땅에 불국정토를 위해서 시주를 해 달라고 ABS 번호를 쭈욱 내 보내고 있는 겁니다.

이 정도가 되면 교회나 절간이나 다를 바가 없어요.

 

지금은 기독교나 불교나 같아요.

그러니 지금은 구태여 교회나 절간이나 구분할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같은 신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데서나 가까운 곳에서 빌면 되어요.

빌고 복만 받으면 되어요.

 

초록은 동색이라고 하잖아요.

어차피 인간 쪽에서 복을 얻어내고자 하는 몸짓은 동일한데 뭐가 문제입니까?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신을 찾는 것은 다 같은데 어떻습니까?

부처에게 빌어서 복을 받으나!

예수에게 빌어서 복을 받으나 차별이 없잖아요.

 

복을 돈이고 성공이고 출세라고 합시다.

그럼 부처에게 빌든지 예수에게 빌든지 돈만 많이 벌면 되는 것이잖아요.

부처에게 빌어서 번 돈의 가치가 다르고 예수에게 기도해서 번 돈의 가치가 다르지 않잖아요.

교회 가서 새벽기도 하든지!

절간에 가서 치성을 드리든지 내 자식이 좋은 대학만 가면 되잖아요.

예수에게 빌어서 수능점수 잘나오는 것이나 부처에게 빌어서 수능점수 잘나오는 것이나 같아요.

 

중요한 건 내 자식의 수능점수에요.

내 목구멍에 밥 넘어 가는 겁니다.

내 사업이 잘 되고!

내 가장의 행복이고!

내가 건강하게 오래 살면 되어요.

예수나 부처는 중요치 않아요.

누구를 통해서라도 내 행복만 얻으면 그것으로 땡이에요.

이게 이 시대 신자(信者)나 불자(佛子)나 세상 사람들이나 신을 찾는 목적이에요.

 

2천 년 전에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인간들의 신관이 이러했어요.

그런데 그 2천 년 전 모습이 지금 이 시대 교회와 절간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어요.

목사와 교인들은 교회라는 공간에서 주여 주시옵소서!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고!

스님들과 불자들은 절간이라는 공간에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모두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한다고 열심과 충성으로 신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인디언들의 기우제처럼 응답이 올 때까지 식음을 전폐하면서 기도하고 있잖아요.

서로 서로 누구 정성이 더 쎈가 경쟁하고 있어요.

여기에 바울처럼 아니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합니다.

니가 뭔데!

남이 하는 일에 맞다 틀렸다 초를 치느냐고 지랄을 떨어요.

왜? 남의 환상을 깨느냐고 난리를 쳐요.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야~ 이 사람들아! 만유를 지으신 신이 무엇이 부족하여서 인간들이 바치는 것을 받겠느냐!

만유를 지으신 신은 지금도 만유에게 생명을 주시고 호흡을 주시고 계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의 소생이고 그 은혜로 지금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인간의 것을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뭘 바치라고 하는 신은 가짜라는 거에요.

 

바울이 하나님은 인간의 것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움직일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장단에 춤추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이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분명하게 보여 주셨어요.

가인은 자신의 정성으로 하나님을 감동 시킬 수 있다고 믿었어요.

정성스럽게 제사상을 차렸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받지 않았어요.

하나님이라고 하여도 자신을 부정하면 적개심이 생기는 겁니다.

왜? 자기 정성을 외면하느냐 에요.

왜? 날 무시하느냐 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무시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안색이 변한 겁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거부당하자 분노가 치밀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은 곧 하나님을 쳐 죽인 겁니다.

가인은 그 분풀이를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자를 죽이는 것으로 토해낸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가인을 일컬어 악(惡)에 속한 자의 표상이라고 합니다.

죄가 그 속에서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악에 속한 자들의 모습은 모두가 가인의 모습을 담고 활동하게 되어 있어요.

그 모습이 하나님께 속한 자를 공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가인과 같은 자들에게 핍박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세상에 예수님의 것으로 있어요.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뱀이 예수님하고 전쟁을 하다가 져서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나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땅에 있는 성도들을 괴롭힌다고 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께 속한 성도는 아벨처럼 피를 흘리게 되어 있는 겁니다.

 

가인의 이러한 행동은 인간들의 신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정성이 부정당하면 하나님도 죽여요.

죄인에겐 자기 밖에 없어요.

죄인은 자기가 곧 신이에요.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해서 신을 죽이는 것이 죄인이에요.

마귀가 죄인의 뒤에서 하나님을 죽이도록 조정을 해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라는 말씀이 얼마나 부당한 말씀인지 알 수가 있을 겁니다.

이건 예수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그 어떤 방법과 능력으로도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와야만 해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야지만 가능해요.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 쪽에선 믿음이나 구원을 위해서 할 것은 아무 것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에요.

신경 쓴다고 해서 할 수도 없어요.

우린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어요.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면 믿어지고!

구원을 주시면 구원을 받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받을 뿐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거부할 수도 없어요.

그냥 주면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복(福)을 주면 복을 받고 벌(罰)을 주면 벌을 받을 뿐이에요.

오는 복을 막을 수도 없고 퍼부은 저주를 막을 수가 없어요.

복과 저주는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에이!~ 하고 가요.

 

아브라함을 통하여서 이를 잘 보여 주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명하면 아브라함은 반드시 무조건 복을 받아야만 했어요.

아브라함은 그저 하나님이 하는 대로 지켜 볼 뿐이에요.

 

하나님이 늙은 사라에게 찾아와서 사라야! 내년 이맘 때 아들을 줄께!

그러자 사라가 손 사래질을 하면서 주여! 아닙니다!

소첩의 몸을 보시옵소서!

소첩은 경수가 끊어진지가 이미 오래되어 아이를 생산 할 수 없는 죽은 여자입니다!

소첩을 놀리지 마옵시고 청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라고 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이 가시나가 무슨 말을 하느냐 라고 하면서 기어코 아들을 낳게 하고 말았어요.

 

아브라함을 찾아온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인간의 상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들 꼬라지를 보고 안 된다고 비웃은 겁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온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에요.

창조주 하나님 앞에선 늙은 여자나 젊은 여자란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의 조건은 필요 없어요.

창조 자체가 피조물의 조건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약속의 아들을 낳는 것은 사라가 늙었든지 경수가 끊어졌든지 상관없어요.

하나님이 아이를 낳으라고 하면 그 말씀이 반드시 아이를 생산해 내고야 말아요.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 곧 창조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이 세상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일하심이에요.

하나님이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어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을 명하면 떠나야 하고!

38년 된 환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면 걸아가야 하고!

죽어서 냄새 나는 나사로에게 일어나 나오라고 하면 살아서 나오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 앞에선 인간의 원칙이나 상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성경이 말하기를 이 세상은 죽은 곳이라고 해요.

인간을 죽은 자로 보아요.

일찍이 에스겔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골짜기에 해골이 가득한 것을 보았어요.

오래 전에 죽어서 이미 살점은 다 썩고 해골만 가득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해골들이 가득한 골짜기로 심방을 오신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해골들에게 명합니다.

그러자 생기가 돌아다니면서 야! 이놈들아 일어나라고 합니다.

 

생기가 소리치자 뼈들이 부스스 일어나 이리저리 자기 자리로 찾아들어가서 척척 맞아집니다.

그러더니 살점이 생기고 힘줄이 생기고 피가 돌기 시작하더니 한 놈 두 놈 일어나기 시작을 하더니 급기야는 큰 군대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아난 자들을 일컬어 이는 내 백성이라고 합니다.

 

산 하나님이 죽은 세상에 오셨어요.

왜? 오셨겠어요.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겁니다.

어떻게 생명을 주십니까?

 

어떻게 생명을 주시는가 하면 오늘 본문에서 영원한 언약의 피로서 주신다고 합니다.

 

큰 목자이신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성도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가올 때는 반드시 뭔가를 주시려고 오십니다.

인간들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오세요.

또한 인간들이 만들 수도 없는 것을 가지고 오십니다.

 

이걸 하늘에 속한 신령(神靈)한 복이라고 합니다.

신령한 복은 하늘에 복입니다.

곧 하나님의 생명이에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신령한 복은 이 땅에서는 구경도 할 수가 없는 복이에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복이에요.

 

그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에베소서 1장을 통하여서 살펴봅시다.

 

엡 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탄성을 자아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여!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땅에 복이 아니고 하늘에 복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땅에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필요한 거에요.

그러니 땅에 것을 받고 복 받았다고 하면 안 되어요.

 

그럼 하늘에 복을 살펴봅시다.

그 복이 뭔가 보니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여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걸 흔히 창세전(創世前) 언약(言約)이라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는 여러 가지 복이 담겨져 있어요.

중요한 것이니 하나씩 살펴보기로 합시다.

 

제일 먼저 “창세 전” 이라는 말입니다.

 

창세전이란? 역사가 있기 전이란 말입니다.

즉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이란 뜻입니다.

창세전 세상은 쉬운 말로 신(神)들의 세상입니다.

신들이라 함은 삼위(三位) 하나님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가 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있었어요.

그러니 창세전 언약은 하나님 나라에서 맺은 언약인 것입니다.

그럼 창세전 언약은 우리하고 한 약속이 아닌 겁니다.

그건 하나님들끼리 한 약속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간에 약속이에요.

인류 역사는 창세전 언약에 따라서 다스려져 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선 창세전에 이미 성도의 구원을 약속했어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된 것입니다.

구원하기로 하고 창조를 했어요.

그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예수를 믿더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녹명 된 자는 다 에수를 믿게 되어 있어요.

쉬운 말로 예수를 믿도록 창조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작정한 대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는 자신은 이미 복중에 짓기 전에 선지자로 세움을 입었다고 고백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닌 겁니다.

예수 믿기로 작정이 된 자는 반드시 에수를 믿게 되어 있으니까요.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서 예수를 믿게 만들어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성령이 믿게 해 주셔서 믿는 것이에요.

그래서 구원을 일컬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선물로 주어지는 구원도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일을 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이란? 예수님 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독자적인 인생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머리라고 하고 성도는 지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연합이라고 합니다.

하나로 묶여져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천국으로 가면 성도도 함께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운명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죽으면 성도도 죽고 예수님이 부활하시면 우리도 부활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계시면 우리도 천국에 가는 겁니다.

 

예수님과 성도는 한 몸이에요.

하나님 앞에선 우리란 없어요.

그러니 우리가 우리를 책임질 인생이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독자적으로 대하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예수 안에서 보세요.

개별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판단하세요.

예수 안에서 본다는 것은 우리의 행동으로 대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즉 우리의 행동을 가지고 잘했다 잘못했다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독자적인 인생이면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우리는 독자적인 인생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머리 되신 예수님의 행동으로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 꼬라지를 가꾸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예수님은 한 몸이니 예수님이 하신 일이 곧 우리가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눈을 늘 고정시키고 있어요.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물어요.

 

이건 자기 주체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성도에겐 이런 질문이 성립 되지 않아요.

설령 그 질문에 반응해서 이렇게 사십시오! 라고 하여도 못 살아요.

우린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낼 능력이 없어요.

그럼에도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물어요.

이건 예수가 안 믿어지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흔히들 신자답게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하는데!

신자답게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한 몸이라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되지 않으니 자꾸만 어떤 행동수칙을 만들러 달라고 하는 겁니다.

행동수칙이라고 하여야 기껏해서 윤리도덕이에요.

술 담배 끊고 착하게 사는 거에요.

 

아주 쉽게 말할게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다가 보면 수없이 마귀의 참소를 받아요.

마귀는 항상 우리 육신의 행함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로 참소해요.

왜냐하면! 마귀는 율법을 가지고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만 통해요.

즉 옛 언약 안에 있는 사람에게 적용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 안에 있어요.

새 언약 안에 있단 말입니다.

새 언약에 있는 자는 옛 언약으로 참소하지 못해요.

이미 옛 언약으로 정죄 받아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옛 언약으로 참소 당하셔서 우리 대신 죽으셨어요.

 

예수님이 죽을 때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도 같이 죽었어요.

그리곤 예수님은 부활했어요.

물론 예수 안에 있던 성도들도 함께 부활했어요.

그럼 예수와 함께 부활한 성도는 율법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인 겁니다.

이미 율법의 참소로 정죄당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난 자는 율법과 상관이 없는 자에요.

이 모든 것을 예수님 혼자서 일괄 처리했어요.

우린 구경만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서 예수님이 하신 일 속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게 믿어져요.

믿어진다는 것은 마귀가 율법으로 우리 행함을 가지고 참소한다고 하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내어 놓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하세요.

난 이제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난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라고 믿으세요.

그러므로 나는 율법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이 되어요.

마치 미국 법은 미국 사람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과 같아요.

한국 사람은 미국 법에 적용받지 않아요.

우린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어요.

그러니 율법이 더 이상 우리더러 율법 가지고 죄다 아니다 참소치 못한단 말입니다.

 

새 언약 안에서 죄는 예수님과 따로 사는 거에요.

 

예수를 안 믿는 겁니다.

예수를 인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우리가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묻게 되는 겁니다.

이건 자기가 독자적으로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그냥 믿음으로 사세요.

 

그럼 또 믿음으로 사는 게 뭡니까?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설명해 줄 필요가 없어요.

믿음이 있으면 믿음으로 사세요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먹어요.

믿음이 없으면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러니 인간의 생각으로 믿음으로 사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꾸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비법이 없어요.

그건 하나님이 한 몸으로 만들어 주셔야지만 가능해요.

예수와 한 몸이 된 사람은 예수를 믿겟다고 하지 않아요.

그냥 믿음으로 살아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헷갈리니 잘 음미하세요.

 

예수가 믿어지십니까!

그럼 예수님과 한 몸이 된 성도입니다.

예수를 믿고자 하십니까!

그럼 예수 밖에 있는 불신자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믿고자 한다고 해서 믿어지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면 자연히 믿어지게 되어 있어요.

예수가 믿어지니 마귀가 율법으로 참소해도 미친놈 지랄하네! 라고 웃는 겁니다.

 

이건 아무렇게나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성도의 실존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대답은 네가 어떻게 살든지 관심두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예수의 피로 모든 죄에서 깨끗케 되었다는 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이게 새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해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네가 어떻게 사느냐로 약속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서 했어요.

그 두 분이서 한 약속이 우리에게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성령이 오면 이게 믿어져요.

예수님의 피가 어떤 능력으로 내게 생명으로 역사하는지 믿어져요.

 

그러니 자기 자신의 어떠함을 보지 말고 예수님의 새 언약이 내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건 믿음을 받은 사람은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아먹는데 믿음을 안 받은 사람은 또 물어요.

모르는 건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몰라요.

그래서 복음은 설득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받아야지만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작정 된 자들에게 주셨어요.

 

그러니 성도가 자기 행동으로 인하여 희비하는 것은 불신앙인 겁니다.

자기 꼬라지로 희비 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끊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 안 있고 예수 밖에서 혼자 돌아다닌다는 말입니다.

예수 밖에 있으니 자기를 독자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 보이고 자기가 보이니 자기 꼬라지로 희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택하셨다” 고 하는 것입니다.

 

“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셨다는 말입니다.

 

선택은 우리 조건과 상관없이 부르신 겁니다.

선택이란? 마치 바닷가에 가면 수많은 몽돌(자갈)이 있는데 제가 일방적으로 몇 개를 주워온 것과 같아요.

선택이란 말 뒤엔 유기된 자도 있다는 말입니다.

선택을 위해서 유기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 자체가 그래요.

우린 원래 없었어요.

그런데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을 하신 겁니다.

그 언약을 위하여 필요한 자들을 만드신 겁니다.

 

이렇게 창조가 된 것을 선택이라고 하고 부르심이라고도 합니다.

선택이란 말 속에는 우린 그냥 가만히 있었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일하지도 않은 자에게 선물을 주신 것이라고 했어요.

우린 그냥 가만히 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와 의논하지도 않고 부르신 겁니다.

그래서 믿음을 말할 때 반드시 아브라함을 인용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선택을 입은 자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너는 내 것이라고 찜하신 것과 같아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에게만 찾아와서 야~ 너 이리 나와!

그리곤 너! 이제부터 복의 조상 해! 그러셨어요.

아브람은 얼떨결에 부름을 입은 겁니다.

 

그리곤 할례를 행하게 합니다.

할례란? 죽음을 상징해요.

그러니 아브람은 죽은 겁니다.

이제부터 새롭게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이름도 바꿔주신 것입니다.

 

이름이란? 자식이 태어나면 부모가 지어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것은 하나님이 낳은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거에요.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어요.

 

그럼에도 굳이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넌 이제 하나님 자식이라는 의미에서 육신의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신 겁니다.

이젠 육신의 아비가 아비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진정한 아비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다른 인간이에요.

아담의 후손인 육으로 난 아브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 속엔 이제 하나님의 약속이 흐릅니다.

하나님은 이제부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으로 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선택을 입은 것은 창세전 언약의 다른 모습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출애굽 시키면서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시키신 것입니다.

가나안엔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자들이 들어갑니다.

출애굽은 곧 애굽에 사람이 죽은 것이고 어린 양의 피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겐 항상 그들의 죄를 위하여 대신 희생당한 어린 양의 피에 제사가 드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선택으로 하나님 자녀가 된 겁니다.

자기 노력과 상관없이 거저 주어진 것이므로 복인 겁니다.

복이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란 뜻이에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구원을 복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노력과 상관없이 거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최초로 하늘로부터 내려주는 것을 받은 자에요.

그러니 아브라함은 복에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복에 조상이 되었어요.

 

이건 취소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거저 주었기 때문이에요.

거저 주었으니 아브라함의 행동과 상관없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이름을 걸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그 어떤 짓을 해도 취소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성도의 구원을 말해주고 있어요.

성도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에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조건으로 취소될 수가 없어요.

애당초 우리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만들어지기 전인 창세전에 선택을 했어요.

그러니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확고부동합니까!

예수님은 그 어떤 것으로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자기 꼬라지로 지옥가면 어떨까 고민하지 마세요.

 

성령을 받은 성도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요.

만약에 자기 행위로 고민을 한다면 그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지 않은 자입니다.

구원을 자기 노력으로 받고자 하니 불안한 겁니다.

구원이 불안하다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받은 자는 두려움이 없어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입은 사람은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일방적인 겁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쪽에서 행하는 일방적인 행위에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해요.

자기가 좋아하기 때문에 무조건 예뻐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조건과 상관없이 그냥 예뻐하는 겁니다.

 

이건 마치 솔로몬 왕이 술람미를 사랑한 것과 같아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한 것은 술람미에게 어떤 예쁜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그냥 솔로몬이 일방적으로 예뻐한 겁니다.

그러니 그 어떤 반대에도 취소되지가 않은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이러한 거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늘에 신령한 복을 받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라는 말은 미움이라는 반의어(反意語)에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미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속성 속에는 사랑과 미움이 있어요.

구원이 있으면 심판도 있어요.

구원 받는 자가 있으면 저주 받는 자도 있어요.

천국이 있으면 지옥도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사랑받는 자식과 미움 받는 자식을 주었어요.

이삭은 사랑의 자식이고 이스마엘은 미움의 자식이에요.

이삭은 무조건 사랑하고 이스마엘은 무조건 미워요.

이건 그들에게 무슨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만든 겁니다.

토기장이가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 하나는 긍휼의 그릇으로 만든 겁니다.

 

이삭의 자식 중에도 야곱은 사랑받기로 창조가 되었고 에서는 미움 받기로 창조가 되었어요.

야곱의 자식들 중에서도 요셉처럼 사랑받는 자식이 있고 미움 받는 자식들이 있어요.

사랑의 안경을 쓰고 보면 모든 게 사랑으로 보이고!

미움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모든 게 미워 보여요.

 

성도가 사랑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안경을 쓰고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건 내 자식은 무조건 예쁜 것과 같아요.

남의 자식은 나쁜 짓을 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러면서 법대로 하라고 하지만!

내 자식이 나쁜 짓을 하면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고 감싸고 덮어 주어요.

이건 일방적인 거에요.

 

하나님이 성도에 대한 사랑도 부모님처럼 일방적이에요.

하나님이 애당초 창세전에 성도는 사랑 안에서 선택을 했어요.

그러므로 성도는 무슨 짓을 해도 사랑을 받게 되어 있어요.

이런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도록 간섭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겐 모든 것이 사랑이에요.

평안도 사랑이고 재앙도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재앙도 사랑이 되고 평안도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취소가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어떤 환경이나 방해 공작에서도 취소가 되지 않아요.

예수님은 인간들처럼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이 하는 분이 아니에요.

그러니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찾아가서 용서해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식언치 않아요.

그러므로 한번 사랑한다는 약속을 하셨으면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영원히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방적으로 불러서 사랑을 해 준 성도들을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 고 하십니다.

그 앞이란? 하나님의 심판대 앞이란 말입니다.

장차 이 세상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였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 자체가 심판을 전제로 한 창조에요.

 

이는 모든 만물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그리스도를 주가 되게 하는 언약이므로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너희와 저희로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와 저희로 구분되는 것은 우리의 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함으로 되었습니다.

심판이란? 갈라지는 겁니다.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백성과 그리스도께 미움을 받은 백성으로 갈라지는 겁니다.

마치 야곱과 에서처럼 이삭과 이스마엘처럼 갈라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갈라내는가! 하면 예수님의 피로 갈라내세요.

예수님의 피가 뿌려져 있으면 거룩하고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흠 있는 자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조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예수님의 피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장차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피를 중심으로 갈라져요.

 

이렇게 예수의 피로 거룩함을 입은 자는 “그 아들들이 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을 두 부류로 구분합니다.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으로 구분을 해요.

이를 언약적인 관점에서는 종과 아들로 구분이 되어집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사라에게서 난 이삭은 아들이라고 하였고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라고 하고 이스마엘은 쫓겨날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유업이란 천국을 말하고 쫓겨난다는 것은 지옥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결국 아들은 천국에서 영생하고 종은 지옥에서 영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의 피” 로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창세전 언약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주신다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의 피를 중심으로 일을 해 나가십니다.

 

어떤 사람에겐 피가 발라지고 어떤 사람에겐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뿌려져 있으면 거룩한 자이고 없으면 부정한 자입니다.

거룩과 비거룩은 예수님의 피로 결정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으로 거룩과 비거룩을 구분하는 기준을 준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남 앞에서의 거룩은 인간의 됨됨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 아들의 피뿐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곧 영생과 영벌의 기준이라고 제시해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는 아브라함의 혈통이 하나님의 백성에 기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질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 인간의 조건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기준이에요.

 

그렇다면 신약이나 구약이나 자기 조건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느냐 안 되느냐 라는 식의 신앙관은 불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율법 지킴으로 선민의 조건으로 가지고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된 것이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에요.

이 아브라함 언약이 출애굽 시에는 어린 양의 피로 나타났어요.

 

애굽에 심판이 일어 날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기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으면 죽음에서 살아났고 피가 없으면 죽었어요.

죽음을 집행하는 천사는 이스라엘 민족이냐 애굽인이냐 따지지 않았어요.

오직 어린 양의 피가 뿌려져 있느냐 없느냐로만 판단했어요.

이건 창세전 언약이 실제로 인간들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기준으로 하여서 “새로운 기원(紀元)의 시작”을 명하신 것입니다.

기원의 시작이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말합니다.

즉 새로운 민족이 출현하였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과 동시에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새로운 민족이 출현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유월절을 새로운 날의 시작으로 삼으라고 하셨어요.

이는 유월절로 새로운 민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린 양의 피 안에서 생겨났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새로운 날의 시작으로 삼은 겁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여기엔 이방인도 포함되어 있어요.

유월절 속에는 이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개의치 않고 오직 어린양의 피로서 새로운 민족이 생겨날 것이 이미 담겨져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출애굽 당시에도 실제로 애굽인들 중에서도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뿌림으로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살아났습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만 믿고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자는 죽음의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구약의 유월절 사건은 신약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한 새로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십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한 자들에게 율법을 주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 됨의 유지는 율법 지킴과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신분을 유지하는 데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어요.

율법은 이미 구원 받은 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이에요.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준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 주어졌어요.

죄를 고발하는 것은 은혜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으로 죄가 고발 되어질 때마다 어린양의 피로 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이 된 자입니다.

만약 자기 행위로 구원의 근거를 가지고 있으면 이건 어린 양의 피를 모르는 자로서 진정으로 출애굽한 자가 아닙니다.

율법은 이런 자를 색출해 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을 죄인으로 드러내는 일을 합니다.

즉 예수님의 피 없이도 자기 행위로 거룩하고 흠이 없고자 하는 자를 색출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이런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들은 율법적 행위로 구원의 근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혈통족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나아오던 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어요.

예수님도 혈통적인 것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나아오는 자를 행하여 저주를 퍼부었어요.

혈통으로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하던 바리새인들은 출애굽을 하지 않은 자들이에요.

왜냐하면! 출애굽 한 자들은 어린 양의 피로서 출애굽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선 어린 양의 피에 의미를 모르는 자는 살 수가 없어요.

가나안에서의 구원의 근거는 어린 양의 피에 있지 율법지킴이라는 행위에 있지 않아요.

그러므로 자기 행함을 신앙의 근거로 가지고 있는 자는 성도가 아닌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지킴이라는 행위를 의로 가지고 나아왔어요.

그러니 예수님으로부터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으로 심판하지 않아요.

어떻게 살았느냐 를 묻지 않아요.

오로지 예수님의 피가 뿌려졌느냐 아니냐만 보아요.

피가 있으면 거룩한 자로 취급하고 피가 없으면 부정한 자로 취급합니다.

이러한 것을 구약의 유월절을 통하여서 보여주었던 겁니다.

유월절은 창세전 언약을 보여주는 사건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창세전 언약인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방문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히 13:20-21=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보세요.

하나님이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세상에 오셨잖아요.

오셔서 하나님이 영원한 언약의 피로 자기 백성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다고 합니다.

언약의 피란? 약속된 피란 말입니다.

이미 창세전에 약속한 그 피란 뜻입니다.

 

여기서 “그” 라는 것이 중요해요.

아무 피가 아니고 창세전에 이미 약속이 된 “그 피” 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해요.

 

왜? 그런가 하면 “창세전에 이미 약속된 피” 라는 말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이란 말입니다.

창세전이란?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을 말하잖아요.

그러니 창세전에 이미 약속한 그 피라고 한다면 인간의 피가 아니고 “하나님의 피” 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자는 만물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자신의 죽으심을 통하여서 죽음에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건져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은 한 알의 밀알처럼 죽어서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죽으시러 오시는 하나님인 겁니다.

이 죽어 주신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이 신앙이에요.

그래서 오늘 설교 초두에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봅시다.

창세전에 약속한 “그 피” 가 뭡니까?

창세전부터 계신 분의 피이지요.

그럼 창세전부터 계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럼 “그 피”란 바로 “예수님의 피” 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그냥 피라고 하지 않고 “영원한 언약의 피” 라고 합니다.

영원한 언약의 피란? 바로 창세전에 언약한 언약의 대상자인 “그 피” 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미리 준비해 둔 “그 피” 란 뜻이에요.

언약의 피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당사자의 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양의 “큰 목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크다는 말은 모두를 감싸 안는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온 세상을 자기 품에 감싸 않는 목자에요.

자기 피로 자기 백성들을 다 살려 내시는 크신 분이세요.

그래서 큰 목자인 겁니다.

 

큰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피를 흘리는 분이에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은 스스로를 나는 선한 목자라고 했어요.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에요.

버림으로 끝이 아니고 그 피로 양들이 살아나야 해요.

양들을 죽음에서 이끌어 내지 못하는 목자는 가짜에요.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에서 끄집어 낸 자가 없어요.

석가도 공자도 마호메트도 못했어요.

그러므로 이들은 목자가 아니에요.

오직 예수님만이 자기 백성을 죽음에서 끄집어 내셨어요.

예수님만이 큰 목자이고 참 목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큰 목자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피로서 자기 백성들을 죽음에서 이끌어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큰 목자이신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성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다 주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은 복들을 다 주신 것입니다.

창세전에 언약한 큰 목자 되신 예수님의 피 안에는 천국에 것들이 다 들어 있어요.

 

양은 목자의 죽음으로 구원을 받았어요.

양 속에는 목자의 생명이 흐르고 있어요.

하나님은 양들을 통하여서 목자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언약의 피 안으로 초대 한 것은 언약의 피로 의롭게 된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입니다.

즉 양들을 통하여서 목자에게 받은 것들을 세상에 보여주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서에선 이를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엡 1:5-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성도를 구원한 것은 그 아들의 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세상에 자랑키 위함입니다.

목자의 죽음으로 양을 구원한 것은 결국 목자의 죽음으로 양이 살고 있음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사는 양들은 “나는 목자의 죽음으로 삽니다” 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를 고백케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마세요.

이걸 놓치면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고 예수 믿는 자신을 자랑하게 되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함정에 빠졌어요.

 

그래서 신앙생활을 자신이 뭔가를 하여야 하는 것으로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됨과 상관없이 나는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살고 있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난 예수 믿고 이렇게 반듯한 사람으로 성화하였습니다! 를 자랑하고 있어요.

이건 자기 자랑하는 것이지 예수님 피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니 예수님은 자기 피를 앞세우고 세상을 방문 했는데!

왜? 그 피로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를 자랑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건 불법이고 반칙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구원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구원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게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에요.

여러분의 꼬라지가 어떠하더라도 신경 쓰지 말고 예수님 피로 용서받고 살고 있음에 감사하세요.

 

하나님은 성도로 하여금 왜? 목자의 죽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할까요?

이는 인간들이 자기 의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서 그게 아니거든!

우리는 어린 양의 생명으로 살거든!

그럼 이리가 이 놈은 뭐야! 하고 잡아먹어요.

꼭 하나님이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에게 보내서 잡아먹히게 한 것과 같이 예수님도 자기 종들을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에게 보내서 잡아먹히게 만들어요.

 

이걸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고난에 동참시키려고 하나님은 성도를 인간의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자들 앞에 보내서 그게 아니라고 고발케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성화주의자들이 양을 잡아먹는 이리들이에요.

이들은 예수님 피를 말하면 짜증을 내고 잡아먹고자 덤벼요.

 

히브리서 기자가 왜? 마지막 결론을 영원한 언약의 피를 앞세우고 오신 큰 목자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대 단원의 막을 내리는지 아세요.

이것이 이 세상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의 존재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서 율법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완성이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어떤 식으로 성도를 인도하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아들의 피가 있는 자는 영생을 받았고 아들의 피가 없는 자는 영벌을 받은 것입니다.

아들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은 이 아들의 피 안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자는 아들의 피만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자기백성들을 창세전 언약의 피 안으로 끌어당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을 주어서 인도케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의 피를 증거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라고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 자가 믿음을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피를 증거치 않는 자는 믿음을 받지 않은 자들입니다.

 

신자 됨의 증거는 예수님의 피뿌림에 있습니다.

그 피가 나에게 어떤 능력으로 역사를 하는지 보십시오.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지 않은 자는 변화산 아래 귀신들린 자처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져요.

툭 하면 시험에 들어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 환란에도 넘어지고 시대의 풍조에 떠다니는 것입니다.

부평초처럼 바람 따라 물결 따라 떠다녀요.

그러니 맨 날 성화한다고 하고 개혁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 모두가 영혼의 닻이 예수그리스도에게 내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쥐꼬리 삼년 묻어두어도 쥐꼬리이듯이 죄인이 백날 성화해도 죄인이에요.

죄의 몸뚱이에서 의(義)가 나오지 않아요.

우리가 의(義)라고 생각하는 그것도 하나님 앞에선 배설물이에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율법으로 흠이 없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배설물이었다고 하잖아요.

예수님 피 만이 의(義)라고 했잖아요.

결국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배설물뿐이에요.

성화도 배설물이고!

개혁도 배설물입니다.

 

의(義)는 오직 예수님 피 뿐입니다.

예수님의 피에서만 구원의 능력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하나님이 창세전에 약속하신 그 피입니다.

그러니 피 안에 거하십시오.

 

하나님은 세상에 예수님의 피 이외는 구원 얻을 길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심판에서 이기게 하십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 붙잡아야 합니다.

믿음이 예수님의 피만 붙잡게 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시작을 하나님께서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셨다고 운을 떼시고서는 마지막은 큰 목자이신 예수님의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을 자를 이끌어내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으로 문을 닫습니다.

결국 히브리서 전체는 아들의 피 이야기를 마랗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들이 피를 말하기 위해서 율법도 주어졌고 믿음도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창세기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운을 때시던 하나님이 요한계시록 마지막에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문을 닫았습니다.

결국 모든 성경은 주 예수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화도 아닙니다.

교회의 개혁도 아닙니다.

오직 주 예수님 피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내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자신도 보지 말고 교회도 보지 마세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피뿐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창세전에 언약한 영원한 언약의 피를 뿌려서 우리를 죽음에서 이끌어 내신 구세주(救世主)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영광만 세세토록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서로 서로 예수님의 피 안에서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멘.

 

그동안 긴긴 글들을 읽느라고 고생 하셨습니다.

모쪼록 예수님의 피만 오롯이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아로새겨졌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피가 뿌려지는 은혜가 넘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히브리서를 통하여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읽을 땐 다 아는 것 같아도 돌아서고 나면 다 잊어버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성령의 지혜를 주셔서 들은 말씀들이 늘 기억나게 하셔서 천국에 서기관처럼 때를 따라 말씀을 꺼내서 먹고 마시게 하옵소서. 큰 목자장 되신 예수님께서 영원한 언약의 피를 앞 세우고 우리에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피 안에서 영원토록 안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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