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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레위기 강해

♣(성경강해)52강. 동해복수법에 담긴 의미 (레 24:10-23)

by coroa 2022. 1. 4.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52강. 동해복수법에 담긴 의미 (레 24:10-23)

-.정낙원 목사

 

레위 24:10-23절.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요 그 아비는 애굽 사람 된 자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 중에서 싸우다가 11.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 어미의 이름은 슬로밋이요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었더라 12. 그들이 그를 가두고 여호와의 명령을 기다리더니 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4.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한 사람을 진 밖에 끌어내어 그 말을 들은 모든 자로 그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 15.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요 16.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17.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18. 짐승을 쳐 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며 19.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20.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21.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 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지니 22. 외국인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히 할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23.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니 그들이 저주한 자를 진 밖에 끌어내어 돌로 쳤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이스라엘은 언약 공동체입니다.

언약 공동체는 언약에 의하여 다스려집니다.

그 언약은 다름 아닌 은혜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존재의 의미가 자신들의 생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순종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순종의 반대는 불순종입니다.

순종은 자기 생각이 없을 때 나타나고,

불순종은 자기 생각을 가질 때 나타납니다.

 

자기 생각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반기(反旗)를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을 비껴가는 방식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을 불순종의 역사로 말하고 있습니다.

 

왜 불순종의 삶을 살았을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인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편하고 좋은 길로 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바람과는 정반대인 길로 인도 하셨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속에 있던 죄성이 폭발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모세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한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그 말을 들은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한 그 사람의 머리에 안수를 하고 난 후에 그들로 하여금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하도록 하였을까요?

이는 돌로 쳐서 죽이는 자들로 하여금 경계심을 두고자 하심입니다.

너희도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를 하면 이렇게 돌로 쳐 죽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의 몸에 새기게 하신 것입니다.

 

범죄한 자를 가지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너희가 죄인을 돌로 쳐 죽이는 모습이 바로 너희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돌에 맞아 죽을 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동해복수법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동해복수법은 행한 대로 갚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였으면 반드시 나도 죽어야 하고,

짐승을 쳐 죽였으면 짐승으로 배상을 해 주어야 하고,

이웃을 상하게 하였으면 본인도 상함을 입게 되고,

남의 눈을 다치게 하였으면 내 눈을 뽑아야 하고,

남의 이를 부러지게 했으면 내 이도 부러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해복수법은 남에게 행한 대로 나도 그대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돌로 쳐 죽였으면 나도 남에게 돌에 맞아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돌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럼 내가 남에게 행한 것을 하나님께서 되갚아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동해복수법에 의하면 살아남을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간섭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원함대로 인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전능자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 원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급하면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가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우리 인생 전부를 축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광야 40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광야 길을 그 노정대로 간섭하셨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출 17:1-7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한 사건이 르비딤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모세에게 대적을 합니다.

왜 우리를 이러한 곳으로 인도 하느냐고 아우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노정대로 인도 하셨다고 합니다.

그 노정대로 라는 말은 정해진 코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 할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왜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 하셨을까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죄를 끄집어내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왜 광야 길을 시작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하는 길로 인도 하셨을까요?

 

이는 죄 아래서 난 자들을 죽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난 자들을 죽이기 위하여 광야로 뽑아낸 것입니다.

그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은 은 삼십에 팔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서 예수님을 팔고 받은 은 삼십을 성전에 바칩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그 돈은 부정한 돈이라고 하면서 밭을 하나 삽니다.

그 밭 이름을 아겔다마 피밭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밭은 나그네들의 무덤으로 삼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곳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몸값으로 이 세상에 무덤 하나 남겨두고 가신 것입니다.

교회는 나그네들의 무덤인 것입니다.

 

그 나그네 1호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고 초대교회 성도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나그네들입니다.

 

나그네들이 교회에 와서 세상의 것을 장사 지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서 교회로 부르시고 세상의 것을 장사지내도록 하십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묻어버리게 하십니다.

 

교회가 광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사건은 지금 우리가 겪게 되는 사건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그 노정대로 인도하셔서 그들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서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셨듯이 지금도 성도들을 교회로 끄집어내서 하나님이 정한 코스대로 간섭을 하면서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한 첫 코스가 죽이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막을 완성한 후 40년 광야 길을 시작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이 온 회중들을 회막 가까이 불러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하다가 돌로 쳐 죽임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광야길 시작부터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하다가 돌로 쳐 죽임을 당한 사람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이스라엘 전체에 확대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한 그 사람의 머리에 안수를 하게 한 후 돌로 쳐 죽이도록 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이 여호와를 저주한 자를 돌로 쳐 죽인 것은 자기 자신들을 죽인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출애굽 한 1 세대들이 다 죽임 당하였습니다.

그것은 동해복수법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불만한 소리들을 다 들으시고 그 귀에 들린 대로 그들을 다 응징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나안을 천국이라고 한다면 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무도 갈 수가 없는 천국이라고 한다면 그림의 떡인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동해복수법을 그대로 적용을 한다면 지금 우리들도 모두가 다 죽임을 당하여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도 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죽임당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언약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르게 대우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사람은 동일합니다.

어느 시대나 인간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서 다르게 대우를 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과 예수그리스도가 오시고 난 후에 대하심이 다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과 십자가를 지시고 난 후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과 성령이 오신 후를 다르게 대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기준으로 다르게 대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와 예수그리스도 밖에 거하는 자를 달리 대하십니다.

인간은 변함이 없는데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전히 다른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본 동해복수법과 예수그리스도 밖에서 바라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왜 출애굽한 자들에게 내가 남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임 당하여야 한다는 동해복수법을 주셨는지 그 의미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언약의 후손들에게 동해복수법을 주셨을까요?

 

첫째는, 죽음에 가두기 위함입니다.

너희는 다 죽어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은혜의 자리에 두고자 하심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 살고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율법은 동해복수법입니다.

율법은 행한 대로 받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우린 모두가 다 죽어야 합니다.

 

롬 3:19-20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죄를 고발하여서 너희는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합니다.

심판 아래 있다함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죽이기 위하여 주어진 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범법함으로 더하여 준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죄를 짓지 않았으면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은 죄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죄가 없으면 율법은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법은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은혜는 의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법으로 죽이고, 은혜로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먼저 법을 주십니다.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넌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저주 아래 가두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 아래 있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합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 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는 구원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로워질 수도 없는 율법을 왜 주셨을까요?

이는 의로워지는 법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롬 3:21-22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율법 외에 한 의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믿음의 의입니다.

이는 인간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은혜라고 합니다.

 

율법의 의는 인간의 행위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체가 죄인입니다.

죄인에게서는 하나님이 바라는 의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갈 2: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율법을 가지고 너희는 아무리 하여도 의로워질 수가 없다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된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율법은 왜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한 지를 알려주는 일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도 복음인 것입니다.

율법이 약속의 자손 앞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약속의 자손이 오기까지 필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갈 3:19-25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율법은 어디까지 유효 하는가 하면 예수그리스도가 오기까지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오면 율법은 용도를 다합니다.

율법이 할 일은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세례요한 식으로 말하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을 일컬어 율법과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율법이 할 일을 다 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온 후로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일컬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이라는 말은 아브라함 언약에 적용을 받고 살아가는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은혜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을 때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율법과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 후손도 동일하게 적용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 있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그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여 출애굽을 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여 출애굽을 한 자들에게 동해복수법이 담긴 율법을 주십니다.

 

동해복수법은 겉으로 보기에는 반 은혜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동해복수법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를 고발하고자 하심이고,

둘째는, 은혜 아래 거하게 하심입니다.

 

죄를 고발하는 것도 살리기 위한 것이므로 은혜입니다.

그래서 십계명 돌 판을 두 번 주신 것입니다.

두 번의 돌 판은 두 언약과 같습니다.

 

첫 번째 돌 판은 깨어졌고,

두 번째 돌 판은 성막에 보관케 하였습니다.

깨어진 돌 판은 율법을 상징하고, 보관이 된 돌 판은 은혜를 상징합니다.

 

첫 번째 돌 판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모두가 죽음 아래 가두어진 자들입니다.

계약대로 하면 이스라엘은 계약을 파기하였기 때문에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 계약대로 삼천 명을 죽였습니다.

이 때 모세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하여서 이스라엘을 살려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서 두 번째 돌 판을 주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돌 판을 성막에 보관케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두 번째 돌 판의 정신으로 다스리겠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돌 판에 의하면 모두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두 번째 돌 판으로 이스라엘을 살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돌 판은 죽이는 것이지만,

두 번째 돌 판은 살리는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첫 번째 돌 판의 정신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럼 반드시 죽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길은 두 번째 돌 판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동해복수법을 주신 것은 역설적으로 동해복수법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만약에 법으로 살면 반드시 그 법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은혜로 살고 있는 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해복수법을 가지고 은혜 아래로 몰아넣고자 하신 것입니다.

긍휼의 자리에 머물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 40년을 두 번째 돌 판을 앞세우고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광야 이스라엘을 새 언약으로 다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한 1 세대들은 광야에서 모두가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났습니다.

이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난 것과 같습니다.

 

첫 번째 돌 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고,

두 번째 돌 판의 의하여 살아남을 입은 것입니다.

 

첫 번째 돌 판은 원수를 죽이는 법이고,

두 번째 돌 판은 원수를 사랑하는 법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새 언약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두 번째 돌 판을 적용 받습니다.

그래서 새 언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동해복수법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우리가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갚는 것은 옛 언약 방식입니다.

 

새 언약 안에서는 원수 갚는 것이 없습니다.

새 언약 안에서는 원수를 하나님에게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 안에서는 용서를 받았으니 용서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골 3:13-14절.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엡 4: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누가 잘못을 하면 용서하라고 합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용서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용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 받고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을 통해서 알려 주었습니다.

어떤 종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을 졌습니다.

이는 평생토록 같아도 갚을 수 없는 큰 금액입니다.

 

그런데 왕이 일방적으로 탕감을 해 주었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탕감을 해 준 것입니다.

이를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종이 집으로 가다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만나서 갚으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갚을 수 없다고 하자 옥에 가두어버립니다.

이 사실을 본 왕의 신하들이 그 종이 하는 모습이 괘심해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자 왕이 옥졸들을 풀어서 일만 달란트 탕감을 해준 그 종을 잡아 오라고 합니다.

 

옥졸들이 가서 그 사람을 잡아서 왕에게 끌고 옵니다.

왕이 그에게 하는 말이 동해복수법을 적용합니다.

내가 너에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을 해 주었는데 너는 왜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지를 못하느냐,

이는 네가 나로부터 용서 받았음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너를 은혜로 용서를 해 주었는데,

너는 그 용서를 법으로 받았기 때문에 형제에게 은혜로 대하지 못하고 법으로 대하였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법으로 대하는 그것이 곧 동해복수법에 의하여 부메랑이 되어서 스스로를 옥에 가두는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은혜 받은 자에게서는 은혜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용서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용서해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해 주셨습니다.

이건 마치 첫 번째 돌 판에 의하면 모든 백성들이 다 죽어야 하는데 모세가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이끌어 내어서 살려주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해 주신 것처럼 너희도 용서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해복수법에 의하면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용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이웃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용서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우리 몸에 새기는 일을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도 바울의 몸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용서해 주신 것을 그려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럼 성도들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통해서 하나님 용서를 토하여 내도록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물러 있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살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하는 자를 모든 백성들이 안수를 한 후에 진 밖으로 끌고 가서 돌로 치라고 한 후 동해복수법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보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용서 받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광야에 나와서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후손에게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 언약 아래서 옛 언약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은혜 아래서 율법으로 살면 죄가 됩니다.

 

광야에서 최초로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인 어머니와 애굽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순수 혈통이 아닌 자가 출애굽을 한 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이건 마치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과도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방인 구원을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가 접붙임 당한 것으로 말해주었습니다.

 

이방인이 구원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엄위(법)에 거하지 말고 인자(은혜)에 거하라고 합니다.

만약에 인자에 거하지 않고 엄위에 거하면 잘려나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내용과 같은 의미입니다.

모세는 지금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고 법으로 살면 그 법에 의하여 너희들 자신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를 알려 주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으로 은혜 아래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짐승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언약공동체에서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모르면 동해복수법에 의하여 저주를 받게 됩니다.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자입니다.

동해복수법 작용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동해복수법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이 있습니다.

긍휼의 그릇은 은혜로 대하시고, 진노의 그릇은 법으로 대하십니다.

신자는 긍휼의 그릇으로 은혜로 대하시고, 불신자는 진노의 그릇으로 법으로 대하십니다.

 

교회 안에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옛 언약에 속한 자와,

새 언약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옛 언약에 속한 자는 법 아래 있고,

새 언약에 속한 자는 은혜 아래 있습니다.

 

각자 속성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옛 언약 아래 있는 사람은 법으로 살아가고,

새 언약 아래 있는 사람은 은혜로 살아갑니다.

 

양과 염소는 기질 자체가 다릅니다.

양은 양의 기질로 살아가고 염소는 염소의 기질로 살아갑니다.

어릴 때는 모르지만 자라가면서 그 속성들이 완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속성은 본능에 속한 것으로서 자연스럽게 그 일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양이 염소가 될 수가 없고, 염소가 양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양은 싸움을 싫어하고,

염소를 싸움을 좋아합니다.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매사에 싸움을 하고자 하고,

싸움을 싫어하는 사람은 싸움을 걸어와도 피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대적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서 너희가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가 있으냐고 하시면서 사람은 쌓은 악에서 악을 내고, 쌓은 선에서 선을 내게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 12:33-37절.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눅 6:43-45절.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나무와 열매는 하나입니다.

사람도 나무처럼 마찬가지입니다.

 

그 속에 법이 자리 잡고 있으면 법을 토하여내고,

그 속에 은혜가 자리 잡고 있으면 은혜를 토하여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뱉어내는 것이 그 사람의 속성인 것입니다.

 

신앙은 강요할 수가 없는 것이 본성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좋은 사람은 예수를 믿을 것이고,

예수가 싫은 사람은 예수를 멀리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보니까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사람이고,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을 보니까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사람인 것입니다.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보니까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이고,

법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니까 법 아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은혜가 좋으니까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고,

법이 좋으니까 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유유상종이라 각자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귐을 가질 사람과 멀리 할 사람들을 이름을 거명하면서 지목하였던 것입니다.

 

나의 이름은 어디에 기록이 되어 있는가요?

바울이 사귐을 가질 사람의 편에 기록이 되어 있는가요?

아니면 이러한 사람은 사귀지 말라는 편에 이름이 기록이 되어 있는가요?

 

예수그리스도의 편에 서 있는가요?

적그리스도의 편에 서 있는가요?

 

스스로를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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