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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레위기 강해

♣(성경강해)49강. 초막절과 어린 양의 혼인잔치 (레 23:33-44)

by coroa 2021. 12. 22.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49강. 초막절과 어린 양의 혼인잔치 (레 23:33-44)

-.정낙원 목사

 

레 23:33-44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3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35. 첫 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36. 칠 일 동안에 너희는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요 제 팔 일에도 너희에게 성회가 될 것이며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37.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삼고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전제를 각각 그 날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지니 38.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 예물 외에, 너희의 모든 낙헌 예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 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 월 십오일부터 칠 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40.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 너희는 매년에 칠 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 월에 이를 지킬지니라 42.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44. 모세가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역사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역사 속의 시간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도 시작과 끝이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영원 속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가지고 영원에 속한 것들을 펼쳐 보이기 위함입니다.

역사 속에서 펼치고자 하는 것은 영원에 속한 창세전 언약입니다.

그 창세전 언약을 예수그리스도가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는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들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 속에서 펼치실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가지고 샘플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일컬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이를 계시 민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삶 속에는 예수그리스도가 하실 일들이 가득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이나 성막이나 그 외 모든 것들이 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라고 하였습니다.

7대 절기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7대 절기를 가지고 이렇게 구원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7달로 사는 민족입니다.

실제로는 12달을 살지만 7달이 되면 모든 일을 마치고 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7로 살아가는 민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초막절은 7대 절기 중에서 맨 마지막 절기입니다.

7대 절기는 정월의 유월절로 시작하여서 무교절 초실절을 지나 칠칠절 그리고 넉 달 농사 기간이 지난 후 7월의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로 끝이 납니다.

 

7대 절기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서 하시는 구속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 초막절도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보여주는 절기인 것입니다.

초막절은 7대 절기 중에서 맨 마지막 절기입니다.

그럼 초막절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 중에서도 맨 마지막 부분을 말해주고 있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구속사의 맨 마지막은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빼내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한 후에 천년동안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이러 할 때 창세전 언약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창세전 언약이 완성되는 이야기입니다.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성도의 구원이 초막절을 끝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에 일어나는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맨 마지막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에 최종 지점은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하고 아버지 집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으로 마감을 합니다.

그럼 맨 마지막 절기인 초막절도 어린 양의 혼인잔치의 성격을 담고 있음이 됩니다.

그것이 장막에 거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을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로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도들은 그 신부입니다.

 

초막절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장가보내는 날입니다.

이를 어린 양의 혼인잔치라고 합니다.

초막절은 하와가 아담으로부터 나왔다가 다시 아담 안으로 들어가는 날입니다.

이를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고 합니다.

 

성경이 천국을 아들의 나라라고 하는 것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나라를 맡기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은 이 세상에 보내서 창세전에 아버지께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해 둔 아들의 신부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일을 아들이 역사 속에서 다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역사의 마지막 날에 그 아들의 혼인잔치를 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써 내려간 창세전 언약이라는 대하(大河) 드라마가 아들의 혼인잔치라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실감하려면 이스라엘의 혼인풍습을 살펴보면 됩니다.

 

이스라엘의 혼인 풍습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의 신부를 미리 점지해 둡니다.

그러다가 때가 차면 아들에게 결혼 지참금을 주어서 신부가 살고 있는 집으로 보내서 값을 주고 사게 합니다.

 

그리곤 신랑은 가지고 간 빙폐물들을 신부에게 주고서는 언제쯤 다시 데리러 온다는 약속을 하고 다시 올 때까지 신부 단장을 잘하고 기다리라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걸 약혼이라고 합니다.

 

신부는 신랑이 준 빙폐물로 몸을 단장하고 ‘나는 임자 있는 몸’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신랑이 다시 데리러 올 때까지 조신하게 정절을 지키면서 다시 온다는 신랑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때가 되면 신랑이 다시 와서 신부를 신랑의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가면 아버지는 7일간 성대하게 혼인 잔치를 벌입니다.

혼인 잔치가 끝이 나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집안을 맡깁니다.

그럼 신랑과 신부는 한 몸이 되어서 아버지의 집을 유업으로 받아서 세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성도 간의 구원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 한 자들을 녹명 해 놓았습니다.

이들이 아들의 신부들입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어서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다 구원을 해서 하나님 나라로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에게 자기 피를 속전으로 주고서 자기 신부들을 값을 주고 삽니다.

그리고는 신부들에게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아버지 집으로 데리고 가서 영원토록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서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신부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임자 있는 몸으로 믿음의 정절을 지키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정한 때가 되면 예수님이 다시 와서 세상에 있는 자기 신부들을 데리고 아버지 집으로 갑니다.

그럼 아버지께서 아들의 혼인 잔치를 합니다.

혼인 잔치가 끝나면 아버지는 집안의 모든 일을 아들에게 맡겨서 다스리게 합니다.

그럼 아들은 신부와 함께 영원히 아버지 집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이 야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은 최고의 축제의 절기인 것입니다.

모든 드라마의 끝이 해피엔딩으로 마감을 하듯이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펼치신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가 천년왕국에서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본능 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담아 놓았습니다.

 

그것이 죽어서 좋은 곳에 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본능적 소원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성도들에게는 실제로 주어지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본능에 반하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들에게는 천년왕국에서 어린 양의 신부로 왕 노릇하게 해 주시지만 그 반대로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거나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지옥의 환란으로 갚으십니다.

 

천년왕국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이는 예수 때문에 고난당한 자들에게 안식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십자가를 지나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No cross, no crown”

 

고난 후에 영광이 주어지고,

지옥을 지나온 자에게 천국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고난당한 자들에게 예수와 함께 영광 받는 것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 들어가서 천년동안 왕 노릇을 하는 곳이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는 족히 비교 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역사 속에서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가 누려야 할 영광을 위한 것이므로 잘 이겨내라고 응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빼냅니다.

그리고는 하늘에 있는 한 성(城, 나라)을 보게 하십니다.

 

히 11:8-16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여준 그 성(城, 나라)이 바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그 하늘에 있는 성(城, 나라)을 바라보고서는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이는 아브라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받음 모든 성도들도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증거를 신약의 성도들에게 주신 것인 신약의 성도들도 구약의 성도들과 같은 길을 가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을 그림자라고 하고 신약을 실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신약의 성도들을 흩어진 12 지파라고 하고 베드로는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히 11:1-3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이 증거라고 합니다.

이는 믿음이 장차 주어지는 실상을 보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오니까 하늘에 약속된 것들이 실상으로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믿음의 시조인 아벨로부터 시작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구약의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믿음으로 살았다고 증거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도 그 선배들과 동일한 믿음 안에 있으니까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습니다.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원본이고 이 세상은 복사본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 필요가 다하면 끝이 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태초에 멸망할 것들을 창조 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 1:10-12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피조에 속한 모든 것들은 그 용도가 다하면 다 폐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땅도 하늘도 옷처럼 낡아지고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용도가 다하면 폐기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마치 아파트 모델하우스와 같은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도 원본이 있고 복사본이 있습니다.

원본의 인생은 하늘에 감추어져 있고,

복사본의 인생은 이 세상에 펼쳐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은 모두가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에 있는 원본인 자신들을 보았습니다.

천국에서 자신들의 원본 인생을 보고 나니까 이 세상에 있는 복사본의 인생은 버려져야 할 허상임을 안 것입니다.

 

복사본의 인생은 씨앗처럼 버려져야 할 것임을 안 것입니다.

버려짐은 곧 그 속에 감추어진 새로운 생명을 끄집어내기 위함인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을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고,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된 것으로 살고, 죽을 것으로 심고 죽지 아니할 것으로 살아나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죽는 것이 아니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복사본은 원본을 보여주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원본은 영원한 것이고 복사본은 유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사본인 이 세상을 가지고 원본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성도의 인생은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가는 도화지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가지고 창세전에 언약하신 그 내용들을 그려 가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창세전 언약이 담고 있는 내용들을 다 그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화가가 되셔서 그림을 그리시는 것입니다.

그림이 다 그려지면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 할 때 구원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서 죽고 다시 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인데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

 

히 9:27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렇게 되면 죽는 것이 끝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죽고 난 후의 심판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는 이생을 위하여 살았고,

나사로는 이생에서 내생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각자의 가치관으로 이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지혜로움이란? 이생에서 내생을 준비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가 죽고 난 후에 일어난 심판은 이 세상에서 결정이 된 것입니다.

그럼 이 세상에서의 삶은 내생을 준비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유한한 것이지만 죽음 이후의 내생은 영원한 것입니다.

 

내생은 이생에서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준비하는 것입니다.

 

만물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존재하다가,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가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고 합니다.

이를 그리스도가 만물 안에 있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로 충만케 채우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을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구원은 마치 씨앗이 자라면서 껍데기 속에 알맹이로 충실하게 채워가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미미하지만 자라가면서 풍성한 열매로 채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의 구원을 농사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농사는 봄에 씨를 뿌림으로 시작해서 가을에 추수하여 곡간에 들이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를 7대 절기를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유월절로 시작해서 초막절로 끝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씨를 뿌려서 초막절에 곡간에 들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초막절 지킴 속에 담겨진 육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살펴봅시다.

 

초막절은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후에 광야에서 장막을 짓고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장막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을 추수를 마치고 곡식들을 곡간에 들이고 지킨다고 하여서 ‘수장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육적인 의미에서는 과거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성도의 구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7대 절기를 육적으로 문자적인 의미로도 살펴보아야 하고,

예수그리스도와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야기인 영적인 의미로도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7대 절기는 7일 창조와 같습니다.

 

7일 창조는 첫째 날부터 시작하여서 엿새 동안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난 후에 일곱째 날에 안식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이 7대 절기에서는 유월절로 시작을 해서 맨 마지막 절기인 초막절에 광야에 나가서 7일 동안 장막에 거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장차 예수그리스도께서 재림을 하여서 성도들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천년 동안 왕 노릇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를 천년왕국이라고 합니다.

천년왕국은 창조 7일 중에서 일곱째 날 안식일과 같은 곳입니다.

 

천국과 천년왕국은 영적인 의미에서는 같지만 실제적으로는 다릅니다.

 

천년왕국은 천국을 예표하는 것이지 실제 천국은 아닙니다.

천년왕국은 역사에 속하였지만,

천국은 역사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역사 바깥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예표하는 곳이지 실제 천국은 아닌 것입니다.

 

이건 마치 창조 7일 중에서 일곱째 날인 안식일과 같습니다.

일곱째 날인 안식일은 창조 7일 속에 포함이 된 날입니다.

창조 7일은 역사에 속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인 안식일도 역사 속에 존재하는 날인 것입니다.

 

하지만 일곱째 날이 다른 날과 다른 것은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저녁에서 아침이라는 구조로 흘러가지만 일곱째 날 안식일은 저녁에서 아침의 흐름이 없는 곳입니다.

일곱째 날이 동일한 역사에 속하였지만 역사와 다른 것은 장차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가 창조 7일과 같은 패러다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창조 7일의 일곱째 날 안식일은 천국을 예표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 안식일은 시간의 흐름이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일곱째 날 안식일이나 천년왕국은 역사에 속하였지만 피조 세계 밖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곳이기 때문에 역사에 속하였지만 역사와 다른 세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 바깥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인 천국은 원본이고,

역사 속에 있는 천년왕국은 영원한 천국을 예표하는 것으로서 원본이 아니고 복사본인 것입니다.

복사본은 원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복사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장차 원본에서 행하여야 하는 것들을 미리 맛보는 예표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 안식일과 천년왕국은 역사이면서 역사 바깥에 있는 곳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온 세상을 축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의 구조를 보면 에덴에서 강이 발원을 하여서 동산을 적시고 네 근원으로 갈라져 감을 보게 됩니다.

 

창 2:10절.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가만히 보면 구조가 에덴과 동산과 네 근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에덴은 생명수 강의 발원지로서 동산 위에 위치해 있고,

동산은 네 근원으로 물을 흘러 보내고 있으므로 동산은 네 근원 위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위치상으로 보면 에덴이 맨 위에 있고 중간에 동산이 있고 맨 아래가 네 근원입니다.

네 근원은 동서남북 사방을 말하는데 이는 에덴동산 바깥 이 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 나라인 천국과 새 하늘과 새 땅인 천년왕국과 이 세상의 위치와도 같습니다.

 

천국은 에덴처럼 맨 위에 있고,

천년왕국은 동산처럼 중간에 있고,

이 세상은 동산 밖 세상처럼 맨 아래에 위치해 있습니다.

 

구원이 세상에서 동산으로 동산에서 에덴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주어집니다.

세상에서 천년왕국으로 천년왕국에서 천국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주어집니다.

이를 성막으로 비유하면 뜰에서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나아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신분론적으로는 종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신부로 나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구원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생명은 에덴에서 동산으로 동산에서 사방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성막에서는 생명이 뜰에서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에덴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상징하고,

동산은 아담이 살아가는 곳을 상징하고,

동산 바깥은 범죄 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곳을 상징합니다.

 

이 모습을 그대로 본 따서 만든 곳이 성막입니다.

성막의 구조를 보면 지성소와 성소와 뜰로 되어 있습니다.

 

뜰은 동산 바깥세상을 상징하고,

성소는 동산을 상징하고,

지성소는 에덴을 상징합니다.

 

에덴과 동산은 분명하게 다른 곳이지만 하나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지성소와 성소도 분명히 다른 곳인데도 하나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통틀어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지성소와 성소도 마찬가지로 성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집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과 동산 그리고 지성소와 성소는 엄밀하게 따지면 다른 곳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로 말하는 것은 천년왕국과 천국처럼 실제로는 다르지만 영적으로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년왕국과 천국은 엄연히 다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원본이고 천년왕국은 복사본이기 때문입니다.

원본과 복사본은 영적인 의미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에 그 내용은 하나와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 과정을 보면 세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애굽에서 광야로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것으로 주어집니다.

 

애굽은 이 세상을 말하고,

광야는 천년왕국(교회)을 말하고,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이를 에덴동산으로 말하면,



가나안은 에덴이고,


광야는 동산이고,

애굽은 세상인 것입니다.

 

이를 성막으로 비유하면,

 

가나안은 지성소이고,

광야는 성소이고,

애굽은 뜰인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의 삼직으로 살펴보면,,

 

가나안은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곳이고,

광야는 예수님의 제사장으로 다스리는 곳이고,

애굽은 예수님이 선지자로 죽임을 당하는 곳입니다.

 

이를 7대 절기로 말하면,

 

가나안은 가을 절기이고,

광야는 여름 절기이고,

애굽은 봄 절기와도 같습니다.

 

7대 절기를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계시하는 절기였고,

무교절은 예수님의 무덤에 계신 것을 계시하신 절기였으며,

초실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계시하는 절기였습니다.

 

여기까지는 봄에 지켜지는 절기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셔서 자기 몸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실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봄 절기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초실절 후 50일 째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오순절이라고도 하는 맥추절을 지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50일 만에 이루어진 성령강림을 계시하는 절기입니다.

성령강림 후 넉 달 동안 농사를 짓습니다.

이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온 세계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찾는 구원의 농사 기간입니다.

 

넉 달 농사가 지나면 가을 절기가 시작됩니다.

가을 절기는 추수하는 절기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담고 있습니다.

가을 절기의 시작은 나팔절로 시작이 됩니다.

 

나팔절은 예수님께서 장차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소리 가운데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계시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자기 백성들을 몽땅 데리고 아버지께 데리고 가서 보고를 합니다.

그것이 속죄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구원을 해서 아버지에게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럼 아버지는 수고하였다고 하면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벌려 주십니다.

그것이 초막절 7일 동안 잔치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럼 초막절을 어떻게 지냈는지를 살펴봅시다.

 

속죄일이 끝나면 초막절 모드로 전환이 됩니다.

백성들은 광야로 나가서 종려나무 가지와 버드나무 가지를 가지고 초막을 짓습니다.

초막절이 되면 제사장은 나팔을 불고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수확한 각종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 제사를 드렸습니다.

 

초막절 제사는 절기 중에서도 가장 많은 제물을 바쳤습니다.

7일 동안 매일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이는 마치 천국에서 구원 받은 24 장로가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벗어서 던지면서 그 은혜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구원이 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가면 성도가 얻은 모든 영광을 다 하나님께 돌려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막절 제사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7일 동안 광야에 나아가서 지냈습니다.

 

레 23:40-43절.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 너희는 매년에 칠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월에 이를 지킬지니라 42.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이 되면 광야로 나갑니다.

이는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를 기념케 하기 위함입니다.

광야는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의미합니다.

천년왕국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초막절은 천년왕국을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여서 광야로 나아 온 것은 성도가 이 세상을 떠나 천년왕국에 들어온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초막절을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적 사건으로서는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사십년 광야 생활을 추억하는 것이지만,

미래적 사건으로서는 장차 도래할 천년왕국을 미리 앞당겨서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초막절의 육적 의미는 출애굽 후 광야 40년을 기념하는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천년왕국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한 후 광야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으면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이를 기념케 하시려고 초막절이 되면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7일 동안 거하게 한 것입니다.

 

43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초막 속에 7일 동안 거하면서 부모는 자식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하여 광야를 어떻게 지나게 해 오셨는지를 가르쳤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혼자서 광야를 지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해 오셨음을 기억케 하고 그 때를 추억하면서 기념케 하고자 함입니다.

 

광야를 40년 동안 지나오면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더위를 피하게 해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를 피하게 해 주신 것을 초막에 거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7은 창조의 수로로 완전수를 상징하므로 광야에서의 7일간 초막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심을 상징화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장차 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계 21:3-4절.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4.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신앙생활이란? 미래를 현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래에 주어질 것을 미리 맛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것을 감사하고 장차 누릴 것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날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이미 받았으면서 현재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받을 것입니다.

구원은 날마다 살아가는 생명과 같습니다.

성도의 구원은 생명과 같이 날마다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살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죽은 것을 생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날마다 이루어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살면서 초막절을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7일 동안 거하게 하신 것은 과거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살았던 것을 현재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애굽과 광야를 비교하면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고 광야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서 시내산에 당도한 것도 동일한 의미입니다.

시내산은 하나님의 산입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의 다른 이름인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애굽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산으로 데리고 와서 하나님께 경배케 하라고 하였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천국에서 행하는 일들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이 애굽에 있는 백성들을 이 산으로 데리고 와서 하나님께 경배케 하신 것은 호렙산이 바로 천국을 예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출애굽 한 백성들이 시내산에 당도하여서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은 장차 성도들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서 살아갈 것을 예표하고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시내산으로 인도하고서는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합니다.

 

이렇게 되면 애굽과 광야 그리고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여정이 됩니다.

이러면 애굽에서 바라보았을 때 광야에서의 초막생활은 천년왕국을 상징하고,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은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상징하게 됩니다.

 

초막절에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7일 동안 살아가는 것은 1차적으로는 천년왕국을 상징하고 2차적으로는 천국을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7일 동안 초막에 거하면서 과거적으로는 출애굽 후 광야에서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것이 되고 미래적으로는 장차 들어갈 천국을 에표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가 엿새 동안 세상에 살다가 일곱 째 날인 주일에 교회로 나아오는 것은 천년왕국을 선취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것은 장차 천국에서 행하는 것들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년왕국의 모형이면서 천국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인 의미에서는 천년왕국에서 살아가는 것을 예표하지만 묵시적인 의미에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육적 이스라엘은 초막절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영적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들은 교회에서 초막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 세상에 있다가 일곱째 날에 교회로 나온 것은 7대 절기 중에서 7번째 절기인 초막절을 지키기 위하여 광야로 나간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미래를 현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 나라가 성도 안에 임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천국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년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의 모형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초막 속에서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거하면서 보호해 주십니다.

 

요 14:1-3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자 불안해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것은 너희들과 함께 살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게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승천하신 것은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 준다고 합니다.

그 보혜사가 성령입니다.

 

요 14:16-20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께서 준비하는 처소란 바로 성령의 오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 안에 거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처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성도 안에 지어진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성도 안에 천년왕국이 임한 것입니다.

이를 근거로 무천년주의에서는 천년왕국은 영적인 것이지 실제적인 아니라고 합니다.

신약의 전 기간이 천년왕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실제적으로는 틀린 말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인 천년왕국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또한 천년왕국이 끝이 난 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인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도 실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후에 주어지는 천년왕국과 천국은 성령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얼굴과 얼굴을 맞보면서 살아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실제적인 것이면 천년왕국도 실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7대 절기가 실제적인 것이라면 초막절도 실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일어나는 것도 영적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기 전에는 영적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이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를 영적으로 맛을 보게 되는 경험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장차 주어지는 천년왕국은 현재 성령 안에서 천년왕국을 누리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도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도 없습니다.

과거 구원이 주어진 자들은 현재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현재 구원을 누린 자들이라야 장차 주어지는 구원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성령 안에서 실제로 구원을 누리는 성도는 초막절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오심도 실제이고 천년왕국도 실제입니다.

약속이 실제이듯이 유업도 실제로 받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의 오심을 처소라고 하였습니다.

처소란 집입니다.

초막절 식으로 말하면 장막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장막이 성도 안에 지어진 것입니다.

 

옛 언약에서는 가나안 땅에서 초막절을 지냈지만,

새 언약에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천년왕국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땅에서 지냈지만 신약에서는 성령 안에서 지내는 것입니다.

 

땅에서 성령으로 바뀐 것입니다.

새 언약에서는 땅을 주시지 않고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 하에서는 초막절을 구약식으로 광야에 나가서 지내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땅 차원의 초막절을 지낸다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구약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천년왕국을 맛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새 언약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므로 이미 천국에 가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지금은 비록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만 성령 안에서 위로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성도들의 눈물을 다 씻기시며 다시는 사망이나 아픈 것이나 고통이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초막절에 초막을 짓는 나무는 종려나무와 버드나무 가지로 지었습니다.

 

종려나무는 은혜와 평화를 상징하고,

버드나무는 생명과 번성을 상징합니다.

이는 초막절은 천년왕국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천년왕국은 은혜와 평화의 나라이고,

사망이 없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사망이나 아픈 곳이 없는 곳입니다.

 

이를 이사야에서는 천국을 상징하는 천년왕국에서 태어나는 자들은 죽음이 없고 생명나무의 수한처럼 영원히 산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 65:20-23절.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이사야 65장은 천년왕국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곳은 어린아이도 죽지 않고 노인도 죽지 않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에서 태어나는 자들은 재난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나무의 수한같이 산다고 합니다.

 

이는 사망이나 아픈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를 초막절에 광야에서 평화와 번성을 상징하는 종려나무와 버드나무로 지은 초막에 거하는 것으로 상징화 하여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종려나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 하실 때 백성들이 흔들던 나무입니다.

그래서 종려나무는 왕의 나무 또는 메시야의 나무라고도 합니다.

또한 종려나무는 평화를 상징하기 때문에 천국의 나무라고도 합니다.

종려나무는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로 환영한 것은 평화의 왕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도들을 대표로 하여서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종려나무 가지로 예수님을 환영케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막절에 종려나무로 지은 초막은 평화로운 천국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초막절에 광야에서 7일간 초막에 거하면서 축제로 즐거워하는 것은 장차 천년왕국에서 벌어지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은 어둠이 없는 천국을 상징하는 물 잔치 불 잔치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초막절에는 낮에는 물 잔치를 벌리고 밤에는 불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는 육적으로는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행진 할 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출 13:20-22절.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 하니라”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불은 성령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광야 길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셨다는 것은 곧 성도를 말씀과 성령으로 보호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므로 낮에는 예수그리스도가 보호하시고 밤에는 성령이 보호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있을 때는 낮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였던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나와 함께 있을 때는 아직까지 낮이니까 어둠에 다니지 않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밤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가더라도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보혜사가 오셔서 제자들을 진리가운데 거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예수가 떠난 밤이라 하여도 성령께서 지켜주시므로 밤이 아니라 낮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낮에 물 잔치를 한 것은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의미하고,

밤에 불 잔치를 하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하심을 의미합니다.

이러므로 이스라엘은 역사라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말씀과 성령의 보호하심 속에서 낮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빛에 속한 민족이고 이방인은 어둠에 속한 민족입니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고 광야는 천국을 상징합니다.

애굽은 어두움의 나라이지만 광야는 빛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밤에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어둠 속에서 빛의 나라로 존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밤이지만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셨기 때문에 실제로는 낮으로 산 것입니다.

이는 광야가 천년왕국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에 광야에서 7일 동안 거할 때는 어둠이 없도록 밤에도 불 잔치를 벌린 것입니다.

초막 주변에 불 기둥을 세워서 어둠이 없도록 한 것입니다.

 

이 모습은 에덴동산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에덴동산 바깥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로 하여금 화염검으로 생명나무 길을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화염검이란? 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을 불로 둘러서 진을 치게 한 것입니다.

어둠이 얼씬 거리자 못하게 한 것입니다.

 

초막절에는 낮에는 초막 주변에 고랑을 파고서 물을 부어서 초막이 물 가운데 잠겨 있는 모습을 띠게 하였습니다.

이는 광야는 에덴의 동산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을 일컬어 물댄 동산이라고 하는 것은 에덴의 동산은 에덴에서 발원하여서 흘러내리는 생명수 강으로 온 사방을 둘러서 흘렀기 때문입니다.

 

이를 초막절에는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이 되면 기드론 시내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의 제단에 흥건히 부었습니다.

그럼 그 물이 성전 밖으로 흘러나와서 사방으로 흘러갑니다.

이것은 에덴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수 강이 동산을 적시고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생명수 강이 온 사방으로 흘러넘치는 나라입니다.

이를 광야의 초막 주변에 고랑을 파고 물이 초막 주변을 흘러넘치게 하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된 곳입니다.

이를 물의 흘러넘침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물의 넘침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한 곳입니다.

천년왕국에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제단

 

광야의 초막 주변에 고랑을 파서 물이 흘러넘치게 한 것은 마치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과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리는 내기를 할 때 엘리야의 제단 주변에 물을 부은 것과도 같습니다.

엘리야는 제단에 물을 붓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이는 언약을 근거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제단의 곡식과 물까지 다 태웠습니다.

엘리야는 언약의 하나님을 부른 것입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언약의 하나님을 알린 것입니다.

이는 이방 신을 버리고 여호와의 언약 안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사역하던 시대는 아합 왕 시절로 가장 타락한 시대입니다.

엘리야의 고백을 들어 보면 온 이스라엘이 다 바알과 아세라를 따르고 자기만 남았다고 하소연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남겨둔 7천명이 있었지만 엘리야의 눈에는 그들은 보이지 않고 자신만 남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만큼 온 세상이 이방신을 쫓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타락한 왕이 아합 왕입니다.

아합 왕은 시돈의 왕인 엣 바알의 딸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하였습니다.

이 때 이세벨이 자기가 섬기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이스라엘에 데리고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바알을 하나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바알을 하나님으로 둔갑을 시킨 것입니다.

속은 바알인데 겉은 하나님으로 포장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이 쉽게 바알을 섬긴 것은 이는 바알과 아세라가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풍요와 다산을 주기 때문입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세상에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쉽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상은 항상 인간들에게 먹고 배부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쫓은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 할 때도 세상 것으로 하였습니다.

 

눅 4:3-7절.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는 당당하게 자기에게 절만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에게 절만 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세상 것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를 일컬어 이 세상 신이라고 하는 이유도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흙은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이 살아가는 땅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주 받은 그 땅을 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마귀에 예수님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은 흙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떡으로 살아가는 흙에 속한 자들은 뱀의 유혹을 거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흙의 기운이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요일 2:15-16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모두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즉 하늘의 생명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십일을 주리신 예수님이 세상의 떡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택한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신 것입니다.

 

신약에서의 타락은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는 자를 간음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약 4:4절.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마귀는 항상 땅에 것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마귀의 미혹에 넘어간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결실치 못하는 밭으로 말해주었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사람들을 땅에 것으로 미혹을 합니다.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면 떡 주는 예수를 쫓게 되어 있습니다.

떡 주는 예수가 바로 가짜 하나님인 바알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 사람은 땅의 일을 행하는 자로서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빌 3:18-19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쉽게 받아들인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바알을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여호와라고 부른 것과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정서를 고려하여 알맹이는 바알인데 껍데기는 하나님으로 위장하여 섬기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거짓선지자들이 말하는 바알이 참 하나님인지, 자신이 말하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확인하자고 한 것입니다.

 

왕상 18:21절.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무지한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 줄도 모르고 거짓 선지자들이 바알을 하나님이라고 하니 그가 참 하나님 인줄 알고 섬긴 것입니다.

등 따습고 배 부르게 해 준다고 하니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가짜 하나님을 폭로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벌린 사건이 그 유명한 갈멜산 제단에 불이 내린 사건입니다.

엘리야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내가 섬기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너희들이 섬기는 바알이라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지 확인 하자고 했습니다.

 

왕상 18:24절. “너희는 너희 신의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참 하나님을 확인하는 방법이 제단에 불이 내리는 것으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각각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데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을 불러서 자기 제단에 불이 내려주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알 선지자들은 자기들 방식대로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왕상 18:25-29절.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찌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바알 선지자들은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안 들어 주실 것입니까? 라고 시위하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내 정성을 보시고 내 열심을 보시고 내 능력을 보시고 응답해 달라고 했습니다.

 

한 나절을 그렇게 정성을 쏟고 기도를 하였지만 불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비아냥거리면서 혹시 바알 신이 자거나 마실 나갔는지 모르니 더 크게 부르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알 선지자들이 자기 몸에 피를 내면서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바알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바알이 가짜 하나님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 차례가 되었습니다.

 

왕상 18:30-39절.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번 그리하니 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엘리야는 먼저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무너진 단을 수축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제단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떡을 쫓아가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 버린 것입니다.

 

이를 단이 무너진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단이 무너졌다는 것은 약속을 붙잡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수효대로 열 두 돌을 취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제단을 수축케 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제단은 언약의 제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단 주변에 물이 흐르는 고랑을 파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수축한 제단에 곡식을 놓고 그 위에 기손 시내에 내려가 물을 길어다가 제단 위에 부으라고 했습니다.

제단 주변 고랑으로 물이 흘러넘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곤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의 제단이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다 핥은 것입니다.

엘리야의 제단에 불을 내림으로서 엘리야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갈멜산에서 증거해 주신 하나님은 인간의 것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절기를 통하여서 약속하신 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바알 선지자와 엘리야의 차이는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앞세우고 제사를 지냈지만 바알 선지자들은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기들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나님을 찾았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부른 것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아무리 이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을 받았다 할지라도 긍휼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갈멜산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바알을 섬기라고 하지 않고 바알을 하나님이라고 속여서 섬기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하나님이냐가 중요합니다.

 

이 시대로 말하면 어떤 예수를 믿느냐 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을 보면 다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저마다 예수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고 부릅니다.

자신들도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와 그 복음과 그 성령이 가짜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라는 것은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은 목사님들이 가르치는데 당연히 진짜 인줄 알고 있습니다.

이들이 내어 놓는 신앙을 보면 바알 제사장들과 같은 자기 열심입니다.

지성이면 감천하는 하나님입니다.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름하여 현대판 바알이라는 맘몬(돈) 신인 하나님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기 열심으로 신앙을 가늠하지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왜? 죽으셨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은 왜? 옛 언약을 폐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새 언약을 세웠는지를 모릅니다.

 

새 언약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까 내가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합 왕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땅에 복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믿는 예수는 가짜 예수라는 확실한 증거는 세상에 것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도 동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신앙이 그러하였습니다.

모두가 육적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엘리야의 심정으로 보내서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이 가짜임을 폭로케 하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어느 시대나 동일한 성향으로 일어납니다.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초림 때 유대인들이나 이 시대 교인들이나 영적 성향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엘리야의 심정을 가진 종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앞세우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세우신 새 언약을 앞세우고 백성들에게 나아갑니다.

당신들이 섬기는 예수는 가짜라고 거침없이 고발을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제단을 쌓고 물을 제단 주위로 흥건하게 붓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불렀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제단에 물을 부어서 흘러넘치게 한 것은 마치 초막절에 성전 제단에 물을 부어서 흘러넘치게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성막을 지시 받고 모세가 시키는 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막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광야에서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여 스스로가 애굽 사람과 같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의 법궤 속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증거물들을 담아 놓음으로서 백성들로 하여금 불순종한 사실을 기억케 하셨습니다.

 

법대로 하면 당장 멸절 당하여야 함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잊게 되는 자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래서 초막절이 되면 광야의 일을 상기 시키면서 우리가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살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다름 아닌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 때문에 광야에서 너희들을 용서해 주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막절 지킴

 

초막절에 제단 위에 물을 붓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제단 위에 물을 부으면서 하나님이여! 우리 행위대로 보지 마시고 주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러한 본질적인 의미를 모른채 초막절을 지냈습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제단에 붓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마치 초막절을 지키는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제단에 물을 붓는 의미도 모르면서 행한 것입니다.

이를 외식이라고 합니다.

이름만 초막절이지 실상은 이방인들의 제사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성전 제단에서 물이 흘러넘치는 그 의미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물 설교를 하셨던 것입니다.

 

요 7:37-38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초막절에 제단에 물을 붓는 것은 곧 내가 아버지에게 가서 너희에게 보내어주는 성령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곧 성전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막절 설교는 에스겔 성전 이야기입니다.

에스겔이 말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 이야기가 바로 내가 너희에게 보내어 줄 성령을 말해주고 있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물이 제단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겔 47:1-12절.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6.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7.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그 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치료케 합니다.

그래서 생명수 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강이 요한계시록 22장을 보면 천국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수 강으로 나타납니다.

 

계 22:1-2절.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천년왕국을 보았습니다.

그곳에 보니까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강이 가는 곳마다 생명나무 과실들을 맺습니다.

 

이 강이 에스겔 47장에서는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는 초막절에 성전 제단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성전에서 나오는 그 물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내주실 성령이라고 하십니다.

 

초막절에 성전의 제단에 물을 붓는 것은 광야에서 반석에서 물을 내어서 마시게 하셨던 것을 기억케 하기 위함입니다.

반석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스라엘도 광야에서 그리스도가 주신 성령의 물을 마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초막절에 성전에서 흘러넘치는 그 물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바로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는 생명수 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에 벌이는 물 잔치는 바로 천년왕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에덴이고,

예수님이 바로 성전이고,

예수님이 바로 어린 양의 보좌인 것입니다.

 

성령이 오실 것은 구약시대부터 이미 약속이 되었던 것입니다.

 

에스겔은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새 영을 성도들 마음속에 부어준다고 하였습니다.

 

겔 36:26-28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새 영이 임하면 굳은 마음들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새 신이 성도들 안에서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새 신이 임하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게 된다고 합니다.

 

에스겔이 말한 새 신이란? 다름 아닌 성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수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행 1:4-5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옛 언약에서는 가나안 땅을 준다고 하셨지만,

새 언약에서는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땅이 성령으로 바뀐 것입니다.

 

신약에 가나안 땅은 성령입니다.

이 성령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새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붙잡도록 인도하십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이 말씀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주체가 인간에게서 예수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성령의 오심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을 하였습니다.

 

렘 31:31-33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때가 이르면 새 언약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법을 기록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법을 이루어가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새 언약을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성령이 임한 성도는 예수님이 지기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을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표현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안에 성전이 세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새 신이신 성령이 성도들 속에 들어온 사람은 성전이 세워진 것입니다.

마음속에서부터 성령이 생수처럼 흘러넘치게 됩니다.

성령이 새 언약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케 하십니다.

성령 안에서 초막절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들 안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새 언약으로 지켜 낼 것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이 되면 초막 근처에 환하게 불을 밝혀 놓았던 것입니다.

초막을 불이 지켜 준다는 것은 성령께서 성도를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빛이 있으므로 낮에 다닌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빛이 있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제자들 속에 진리의 성령이 계시게 될 것을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곤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면 너희 안에 천국이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성령이 초막절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는 예수님을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와 계신 예수님과 성령께서 처소로 마련해준 초막 안에서 신혼의 맛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성취가 되어질 미래적으로 남은 절기이지만 성령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이미 영적으로 성취가 된 절기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절기들은 예수님을 계시하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초림 속에는 이미 재림의 약속이 포함되어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들에게는 모든 절기가 성령 안에서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초막절을 가다릴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이 몰고 온 초막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도들의 심령 제단에 물 잔치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엘리야의 제단에 철철 넘쳐흐르던 물처럼 우리의 심령 속에서 철철 흘러 넘쳐 세상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다 태워내는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고 누리는 것입니다.

누리는 신앙은 기쁨이지 수고가 아닙니다.

성령이 누림을 주십니다.

 

바울은 숱한 고난 속에서도 이 누림 안에 있었기 때문에 기뻐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한 것은 이미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약속을 믿음으로서 천국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부디 성령이 몰고 온 초막절의 즐거움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물 잔치 불 잔치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우리 안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서 모든 것으로부터 치료를 받고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흘러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속에 초막절에 물이 넘치듯이 성령에 충만 함으로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불성곽이 되어서 초막절에 누림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에 모든 불안과 두려움들이 사라지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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