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93강. 참 포도나무가 맺는 과실 (요 15:1-11)

by coroa 2021. 12. 28.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93강. 참 포도나무가 맺는 과실 (요 15:1-11)

-.정낙원 목사

 

요 15:1-1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果實)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고,

우리 성도는 그 “가지”이고,

하나님은 참 포도나무 농사를 짓는 “농부” 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가지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거기서 소출된 것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결실한 열매입니다.

열매는 나무의 속성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속에는 예수님의 것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으로 성도들 안에 오셨습니다.

오신 이유는 자기 피로 구원한 자기 백성들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성도 속에서 예수님이 맺으시는 과실에 대하여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어떤 과실을 어떻게 맺으시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분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은 참 포도나무가 맺는 과실이라는 것입니다.

가지가 맺는 것이 아니고 나무가 맺는 것입니다.

이걸 꼭 반드시 기억하세요.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과실이란? “카르포스” 라고 하는데, 이를 다른 본문에서는 “결실”이라고도 하고, “소출”이라고도 하고, “열매”라고도 하면서 혼용으로 사용합니다.

결실이나 소출이나 열매란 말은 모두가 나무가 생산해낸 “결과물”이란 말입니다.

이는 나무가 열심히 일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열매가 가지에 열리지만 가지가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니고 나무가 맺게 한 것입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으면 나무가 저절로 가지에게 열매를 맺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나무가 맺는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서 포도 열매가 맺힙니다.

사과나무에선 사과가 열립니다.

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이건 하나님이 창조하신 변할 수 없는 생명의 법칙입니다.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나무입니다.

그럼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사람들에게선 예수라는 열매가 맺힙니다.

열매 속에는 나무의 속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사람에게서는 예수님의 속성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속성을 일컬어 마음이고 성품이고 삶입니다. 



삶이란?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의 성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이건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억지로 노력할 이유도 없고 애쓸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열매 속에는 그 나무의 본성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와 열매는 분리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의인화(擬人化) 하여 사람이라고 한다면 열매는 그 사람의 삶이 됩니다.

삶 속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져 있고 그 사람의 성품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나무와 열매의 변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시편 1편을 보면 복 있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시 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복 있는 사람이란? 복을 이미 받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복 받을 사람이 아니고,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이란? 이미 복 안에 들어 와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다른 말로 복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내가 너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상급이란? 복을 말입니다.

복을 의인화 하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했으니 하나님 자체가 복입니다.

복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에 복인 것입니다.

 

그럼 예수라는 복 나무에 붙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시편 기자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복이라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성도라고 합니다.

 

시편 1편으로만 살펴봅니다.

 

첫째로, 복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꾀란? 히브리어로 “에~짜” 라고 하는데, 이는 “모략” 이나 “뜻” 또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다는 것은 악인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악인이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악인의 삶이란?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누구 마음으로 살까요?

바로 예수님 마음으로 삽니다.

이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 있는 자는 예수의 나무에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예수 피만 믿으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악인의 꾀를 쫓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복 안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복이라는 예수의 나무에서 붙어 있지 않는 자들입니다.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어디에 붙어 있나요?

마귀라는 나무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네 인생은 너의 것이니 네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은 마귀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 복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성도는 누구의 마음으로 살까요?

바로 복 되신 예수님 마음으로 삽니다.

바울은 너희 안에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그 예수의 마음이란? 자기를 비워 종이 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죽기까지 아버지 뜻에 복종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한마디로 하면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자기 백성을 살려내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십자가 라는 잔(殘)을 마시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뜻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복종을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어찌 될까요?

예수님처럼 우리 뜻을 포기하고 예수님 마음으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뜻을 포기하고 십자가에 죽었듯이 성도도 자기 뜻을 부인하는 식으로 살아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일컬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쫓는다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에 모습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성도에게서는 이러한 마음과 삶들이 나옵니다.

온전하냐! 아니냐! 라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이런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를 말하는 것입니다.

긍휼이나 용서나 사랑은 자기를 부인하면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죄인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게선 긍휼이니 용서니 사랑이라는 마음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나온다고 한다면 그건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복의 나무에 붙어 있는 성도는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자 합니다.

 

둘째로, 복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죄인의 길은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고 했으니 그럼 하나님의 법을 좇아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복의 나무에 붙어 있는 성도는 예수님아 가신 길을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본 삼아서 쫓아가는 자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자신을 대속물로 드리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의 삶을 일컬어 산 제사로 드려지는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제물이란? 죄인을 위하여 죽임 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자기가 부인되어지는 것이고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는 일입니다.

 

어떻게 세상에 살면서 세상 것을 죽인단 말입니까?

이는 우리 본성과 반(反)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성도에겐 이러한 일들이 툭툭 나옵니다.

얼마큼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이 나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로, 복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오만하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가볍게 여긴다는 것은 비웃고 조롱한다는 말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요! 라는 팻말을 세워 놓았다고 합시다.

그럼 잔디밭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그 말을 무겁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잔디밭에 들어가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고 한다면 이건 그 명령을 가볍게 여기고 비웃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 속에는 갖가지 명령들이 있습니다.

그럼 성도는 그 말씀을 무겁게 받습니다.

이건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대하느냐, 어떻게 받느냐의 문제입니다.

 

구약에 보면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가벼이 여기고 성전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훔쳐 먹고 그랬어요.

성경은 이들을 일컬어 불량자라고 합니다.

불량자란? 벨리알 이라는 말인데 이는 마귀 자식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불량자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낳은 자식을 “이가봇” 이라고 합니다.

이가봇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말은 저주 받은 자란 말입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자란 말입니다.

 

결국 엘리 제사장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조롱한 자들의 자식들은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다.

마귀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경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습니다.

이가봇 교인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쉽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우린 자식입니다.

아버지가 언제 화가 나는 줄 아세요.

자식이 말을 안 들을 때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의 말을 안 듣는 것은 아버지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우습게 여기기 때문에 부모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말을 무겁게 여길 땐 그 말대로 살지를 못한다고 하여도 탓하지 않아요.

 

부모가 조용히 해!

그러면 그 순간만큼이라도 조용히 하면 됩니다.

잠시 후에 또 떠들겠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조용히 해! 그러는데도 계속하여 떠든다면 이건 혼내야 합니다.

떠든다는 그 행위 때문이 아니고 부모의 말을 듣고자 하지 않는 그 악함 때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내지를 못해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명령합니다.

말씀대로 살아내지를 못하기 때문에 말씀을 더 무겁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너무도 무겁다는 것을 알아야 아버지의 용서하심에 감사가 깊어져요.

 

위에 언급이 된 말씀 중에 세 가지 동사(動詞)가 있습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 라고 하는 “쫓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 라고 하는 “서다!”

“오만한 자의 자라에 앉지 않는다” 라고 하는 “앉다!” 라는 말입니다.

 

동사란? 그 말씀을 적극적으로 행한다는 말입니다.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순종하고자 하는 성질을 말합니다.


어떻게 순종하고자 합니까?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쪽으로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복 받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반대로 복을 받지 않은 사람은 이러한 것을 하고자 하겠제요.

 

위 세 가지는 모두가 부정적이고 금지하는 것들입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한마디로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끈 떨어진 연처럼 말씀에서 벗어나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자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자들을 일컬어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합니다.

“겨”가 무엇입니까?

알맹이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잎만 무성하다는 말입니다.

머리로만 예수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유다서에선 이런 자들을 일컬어 “물 없는 구름”이라고 했습니다.

“열매 없는 가을 나무”라고 했습니다.

“물 없는 구름”이나 “열매 없는 가을나무”란 사기란 말입니다.

거짓이란 말입니다.

 

구름엔 반드시 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을엔 나무에 반드시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없어요.

그러니 거짓이고 사기인 겁니다.

 

그래서 유다는 이런 자들을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이라고 했습니다.

유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바람에 나는 겨”인 겁니다.

 

그래서 복 있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고 합니다.

 

묵상한다는 말은 되새김질을 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에 붙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되새김질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말씀을 무겁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무겁게 여기니 말씀에 붙잡혀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복이라는 나무인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성도인가?

바로 하나님 말씀을 무겁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이건 우리가 말씀을 온전히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아버지 뜻에 복종했지요.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건 여러분들이 누구를 사랑해 보면 알아요.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말을 귀 담아 듣고 싶어져요.

그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 싶어진다니까요.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을 안 듣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 속에는 반드시 순종이 들어가 있어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가볍게 듣지 않고 무겁게 듣는 겁니다.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사람은 예수님 말씀을 진중하게 듣게 되어 있어요.

순종하고자 하는 성질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시절을 쫓아서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이 그 행사가 형통한다고 합니다.

 

형통이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간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과실을 많이 맺는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시편 1편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과 같은 내용인 것입니다.

주둥이로 예수 믿는다고 하지 말고 삶으로 보이란 말입니다.

삶으로 신앙을 보이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야고보서에서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과실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런데 과실을 어떻게 맺는가 하면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라고 합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 라는 말은 시편 1편에서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것” 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는다는 것은 때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토해낸다는 말입니다.

시절이란? 인생의 때를 말합니다.

 

구원을 생명으로 말하는 것은 생명은 자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람이란? 변화 된다는 말입니다.

성숙되어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변화니 성숙이란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일에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구원을 3 시제로 말합니다.

 

“구원을 받았다!” 라는 과거 시제로 말하고!

“구원을 이루라!” 는 현재 시제로 말하고!

“구원을 이룰 것이다!” 라는 미래 시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출생하여 자라가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은 태어남은 말합니다.

이건 단회적입니다.

한 번 구원을 받으면 끝이에요.

또 다시 구원을 받는 것이 없어요.

 

한번 구원 받으면 중간에 탈락하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행실로 인하여 구원이 중간에 짤려 나가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는 이제부터 부모의 보호아래서 자라야 합니다.

어떻게 자라갑니까?

엄마가 주는 양식으로 엄마가 가르치는 교훈으로 자라갑니다.

 

성도들도 부모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는 것을 자라간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서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복종하는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구원을 이루라는 현재 시제로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구원의 완성에 자리인 천국이 주어집니다.

이걸 구원을 이룰 것이라고 미래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바울이 하였어요.

 

바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빌 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은 내가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뒤에 것은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붙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중간에 잘릴까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불안해서 하는 말도 아닙니다.

 

신앙이란? 생명이고 생명은 늘 현재성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바울 신학의 백미인 “이미와 아직” 이라고 합니다.

이는 구원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더러 이루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렇게 이루어 가실 것이란 말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린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끌려 갈 뿐입니다.

주께서 시작하셨으니 주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의 자람을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내가 어린 아이일 때는 어린 아이 생각을 하고, 어린 아이 행동을 하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 일을 버렸노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와 어른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은혜를 아는 차이성을 두고 어린 아이와 어른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좀 더 많이, 좀 더 깊이, 좀 더 넓게, 좀 더 길게, 좀 더 높게 알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일을 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 때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법으로 살아요.

어린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행함이 타율에서 자율로 바뀌어 간다는 뜻입니다.

타율은 법이고 강제적이지만, 자율은 은혜이고 자발적이에요.

어린 아이 때는 부모에 의하여 강제적이다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자발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법으로 산다는 것은 의무적이고 타자에 의해서 간섭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은혜로 산다는 것은 구원하심이 너무도 감사해서 자율로 살아가게 되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성도는 율법으로 살 때가 있고 율법을 초월하여 살 때가 있는 것입니다.

때론 율법에 갇히기도 하고 때론 율법을 뛰어 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천국의 서기관들처럼 옛 것과 새 것을 적절하게 사용하듯이 어른은 율법과 은혜를 자유자제로 사용한단 말입니다.

이걸 진리 안에서 자유라고 합니다.

 

우린 모두가 율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하나님이 정한 때까지 율법 아래 가두어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꺼내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어린 아이를 율법 아래 있을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초등학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에서 꺼내 줄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역사적으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때입니다.

십자가에서 율법을 요구를 이루시고 완성하신 때입니다.

이제 이 사실이 믿어지도록 성령을 보내서 믿게 하십니다.

이 때 율법으로부터 벗어날 때입니다.

 

우리 개인에게는 예수님을 믿게 되는 부르심을 입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죄 아래서 건져 주시고 율법 아래서 꺼내 주십니다.

어디로 꺼내 주시는가 하면 은혜 아래로 꺼내 주십니다.

이걸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옮겨 주셨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아담이라는 나무에서 싹둑 잘라서 예수라는 나무에 접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이젠 아담이 내 주인이 아니고 예수가 내 주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이 때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우린 아담 안에 있을 땐 아담의 과실을 맺었습니다.

이름하여 죄의 열매들입니다.

죄가 열심히 일해서 만들어 낸 결과물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의 과실을 맺습니다.

이름하여 의에 열매들입니다.

예수님이 열심히 일해서 만들어 낸 결과물입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땐 율법의 열매를 맺었어요.

율법의 열매란? 정죄와 심판과 잘라내는 것입니다.

죽이는 것이에요.

 

은혜 아래 있으면 은혜의 열매를 맺습니다.

은혜의 열매란? 용서와 긍휼로 이해하고 참아주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디에 속하였느냐에 따라서 그 나무의 속성을 가진 열매를 맺게 되어 있어요.

어느 나무에 붙어 있느냐에 따라서 결실이 달라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법으로 사는 자는 아담 안에 있는 자이고, 은혜로 사는 자는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 속에서 법이 나오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고, 은혜가 나오면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건 속일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아담 안에 있을 땐 아담의 방식으로 살고, 예수 안에서는 예수님의 방식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땐 법으로 살고, 은혜 아래 있으면 은혜로 산다는 말입니다.

우린 모두가 율법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은혜 아래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그때마다의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며칠 전에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인순이가 “서른 즈음에” 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가사 내용에 복음 적인 것이 있어서 인용을 해 봅니다.

 

-------------------------------

또 하루가 멀어져 간다 내뿜는 담배 연기처럼

작기 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우고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여기서 인순이가 노래 중간에 자기 인생을 나레이션으로 독백하고 있습니다.

 

내 나이 서른 즈음엔 황금기였지 거침없어서

내 나이 마흔 즈음엔 불 같은 사랑을 했지

그리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딸 아이를 선물로 받았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빛나던 때였어

내 나이 오십 즈음엔 난 달리고 있어 목적지도 모른채

하늘 한번 올려 보지 못한채

어디서 멈추어야 할지도 모르는채 난 달리고 있어 습관처럼

이젠 난 조금 있음 다른 나이 즈음을 경험하겠지

그 땐 난 어떤 모습일까?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또 하루가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노래 내용이 인생은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겁니다.

매일 이별하고 매일 새로운 인생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론가 떠밀려 가고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해서 떠나 온 것도 아니고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무언가에 떠밀려 왔고 떠밀려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순이의 고백처럼 각각의 나이 즈음엔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이 즈음엔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인생이 전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결국 지금 안다고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뜻입니다.

인생을 다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생은 살아 갈수록 깊이가 다릅니다.



어린 아이 때 아는 깊이가 있고!

청소년기 때에 아는 깊이가 있고!

청년 때에 아는 깊이가 있고!

장년이 되어서 아는 깊이가 있고!

노인이 되어서 아는 깊이가 있습니다.

이는 그 때 그때 인생살이의 깊이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생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려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떠합니까?

성경에서 우리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귀 기우려봅시다.

우리 인생도 떠밀려 왔고 떠밀려 가는 인생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나게 하신 그 분의 손길에 이끌려 가고 있습니다.

 

우린 원래 없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등 떠밀려서 이 세상에 왔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우리의 뜻이 아니고 우리를 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를 소개하기를 여호와가 일을 행하고 그 일을 성취한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봅시다.

예레미야 33장입니다.

 

렘 33:2절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일을 계획하는 것도 여호와이고,

그 일을 행하는 것도 여호와이고,

성취하는 것도 여호와라고 합니다.

시작에서 끝까지 여호와가 다 하십니다.

 

우린 마치 엄마가 다 해주는 갓난아이와 같이 예수님이 알아서 다 해 줍니다.

옷 입는 것에서부터 머리 손질하는 것까지 엄마가 다 해 줍니다.

그리곤 엄마는 아이를 등에 업습니다.

아이는 엄마가 가는 곳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따라다닙니다.

 

성도의 인생이 그러합니다.

예수님 등에 업혀서 가는 인생입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예수님의 계획표대로 끌려 다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등에 업혀서 예수님의 인생에 동참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는 일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가 역사 속에서 일을 하십니다.

여기서 역사란? 세상 역사를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들의 인생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듯이 우리도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뭔가 일을 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무슨 일을 할까요?

이는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알면 알 수가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니다.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순전히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없습니다.

온통 예수님 인생뿐입니다.

그래서 만물은 예수 안에서 존재한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창세전에 언약을 맺습니다.

무슨 언약인가 하면 아들을 만유의 주가 되게 하는 언약입니다.

주란? 주인이란 말입니다.

왕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면 우린 종입니다.

예수님이 왕이면 우린 그 신하입니다.

주인이나 왕이란 말은 주권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종이나 신하란 말은 주인을 위해, 왕을 위해 존재하는 자란 뜻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입니다.

 

우린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주인으로서 우리의 왕으로서 창세전 언약을 성취하는 일을 하십니다.

 

창세전 언약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왜? 구원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려서 하나님 아들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은 자를 살리는가 하면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고 살려 내십니다.

이걸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 죽으시고 하늘에 별과 같은 자기백성들이 살아났습니다.

 

구원이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구원의 목적을 달성하는 일까지입니다.

이걸 예전에 조각가가 불에 타던 나무를 끄집어내어서 조각품을 만드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불에서 건짐 받는 것도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되어진 것이거니와 조각품을 만들어 가는 것도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져 갑니다.

 

이를 아들에 형상으로 지어져 간다고 합니다.

누가 지어 가는가 하면 조각가 되신 하나님이 지어가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 일을 성취하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목적이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을 봅니다.

 

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미리 정하셨다고 합니다.

왜? 아들에 형상을 본받게 하는가 하면 그 아들을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그 아들이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맏이가 되려면 그 뒤에 따라 나오는 자들도 예수님과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같으려면 예수 안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한 형제가 되고 형제 중에 맏이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전 언약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죽었던 자기 백성들을 살려 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떻게 생산이 되는가 하면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생산이 됩니다.

 

이걸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죽는 것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밀알이 죽으면 그 밀알과 동일한 속성을 가진 밀알들을 생산해 냅니다.

그러니 한 알의 밀알이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수많은 밀알 같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생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과실이라고 합니다.

 

한 줄기에서 나온 밀알은 모두가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맏아들을 구약에선 초태생 또는 맏물이라고 하는데 이는 십일조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맏아들이라 함은 둘째 셋째,,,,,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서열이나 차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첫 열매가 있으면 그 이외 다른 열매들도 줄줄이 딸려 나온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아들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 참 아들을 죽이고서 그 자리에서 성도를 살린 것은 성도를 예수님처럼 만들겠다는 말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을 봅니다.

 

고후 5:15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보세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하지요.

그리곤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우리를 우리 마음대로 살라고 하지 않고 예수를 대신하여 살도록 하셨다고 하잖아요.

 

이렇게 되면 성도는 세상에 예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 아들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아들에 영을 보내 주신 겁니다.

아들에 영을 받은 자들 속에는 예수님이 오셨어요.

왜? 성도들 안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는 성도를 예수님을 대신하여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산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예수님 같은 대우도 받게 되지만 예수님 같은 삶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사람으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요한복음 15장에서 하나님은 성도 안에 성령이 오셔서 행하게 하시는 일을 포도나무 농사 이야기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이 성도 안에서 행하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성도 안에 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성도들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삶을 그려내는 도화지에요.

예수님께서 성도 안에서 일을 해 내는데 그 일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성령의 열매란? 성령이 맺으신 과실이란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맺은 열매란 뜻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과실 맺는 이야기를 하지요.

농부가 과목을 돌보는 것은 과실을 얻기 위함입니다.

아버지는 농부이시고, 예수님은 나무이고, 우리는 그 가지라고 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은 단 하나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선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 하셨습니다.

잎만 무성하다는 것은 아는 것은 많은데 삶이 없다는 말입니다.

과목은 과실을 맺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로 오신 것도 열매를 얻고자 함입니다.

 

들 포도인 우리들을 참 포도나무에게 접을 붙인 것도 참 포도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들 포도를 얻고자 했다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접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들 포도나무를 참 포도나무에 접을 붙였다는 것은 참 포도를 얻고자 함이지 들 포도를 얻고자 함이 아닙니다.

 

이걸 다른 말로 우리 마음대로 살게 하려면 우리를 구원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마귀 아래 두고서 니 마음대로 살으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마귀 아래서 빼냈어요.

 

마귀 아래서는 우리는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예수 안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예수 안으로 옮겨 준 것은 우리 마음대로 살지 말고 예수님 마음으로 살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살라고 했다면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살게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주인으로 오신 것입니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 죽이고 성령으로 새 사람으로 살려낸 것은 더 이상 옛 사람으로 살지 말고 새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구습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그러니 땅에 지체를 죽이고 하늘에 사람으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바뀌면 다 바뀌어요.

하나님이 대접하는 것이 달라요.

옛 사람은 율법으로 대하였지만 새 사람은 은혜로 대하세요.

이게 엄청난 겁니다.

 

법적 관계가 아니고 사랑의 관계에요.

이젠 법으로 잘려 나갈 수 없게 되었단 말입니다.

우리가 잘못해도 잘려 나가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제 새 사람으로 간섭하십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옛날처럼 살면 징계를 가합니다.

몸뚱이는 옛날 사람인데 간섭은 새 사람으로 하세요.

 

그러면 우리 몸은 날마다 죽임 당하는 겁니다.

우리는 죄 짓는데 익숙해 있어요.

그런데 이젠 왜? 죄 짓느냐고 닦달을 한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차라리 구원하지 말지 왜? 구원 했느냐고 난리를 칩니다.

 

이건 구약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고 광야로 갖다 놓으니 나타난 반응과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기뻐한 것이 아니고 왜? 애굽에서 가만두지 않고 빼냈느냐고 난리를 쳤어요.

한마디로 자식들이 부모가 간섭하면 왜? 날 낳아서 귀찮게 하느냐고 지랄을 떠는 것과 같아요.

우리 몸뚱이는 애굽이 좋고 광야가 싫어요.

그러니 광야에선 터져 나오는 것이 나 가나안 안 갈래! 라고 반항하는 죄인 겁니다.

 

예수를 모르고 살던 예전에는 내가 나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고 사는 신앙생활이 훨씬 고단한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가지고 죄를 끄집어냄과 동시에 예수님의 삶을 살도록 하세요.

두 가지를 표현을 해 낸다니까요.

한 쪽에선 죄가 터져 나오고 한 쪽에선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삶을 살아내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린 죽어나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므로 내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니까 우린 죽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인생으로 살아가는 삶을 일컬어 오늘 본문에선 과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성취해 내신 과실이에요.

 

농부는 가지가 과실을 맺는 것을 보면 흐뭇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닦달해서 공부 잘하면 흐믓해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과실을 맺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과실을 우리더러 맺어서 제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과실을 맺는 자가 제자란 말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맺는 것을 보니 내 제자가 맞구나! 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맺는 것을 보니 너희 안에 예수가 있구나!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올바로 접붙임 당하였으면 반드시 과실을 맺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 안에서 맺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실을 많이 맺게 되면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케 된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예수님의 기쁨을 우리 안에 충만케 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과실을 맺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5절에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거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고 했습니다.

7절에서도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된다” 고 합니다.

 

과실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 거하면 저절로 맺힙니다.

“거한다”는 말은 “동거한다”는 말입니다.

“함께 산다”는 말입니다.

 

또한 거한다는 말은 있는 “그 자리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머물게 한 그 자리가 있습니다.

옮겨 놓으신 자리기 있어요.

 

하나님께서 옮겨 준 그 자리가 어딘가 하면 바로 “예수님 안”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겨주셨고!

신약의 성도는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구원이란? 자리가 옮겨지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옮겨진 것을 말합니다.

우린 원래 아담 안에서 태어납니다.

 

아담 안에 있을 땐 우린 아담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아담의 삶을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예수 안에 옮겨지고 보니 예수님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조롱당하고!

예수님처럼 버림당하고!

예수님처럼 죽임 당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예수님처럼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예수님처럼 아버지 뜻에 복종하게 하세요.

이게 예수님이 맺게 하는 과실이에요.

사도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다 이런 삶을 살았고 이런 길을 걸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옮겨 주십니다.

예수 안으로 옮겨진 사람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걸 “접붙임”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 됨” 또는 “연합”이라고 합니다.

 

우린 들 포도나무입니다.

예수님만 참 포도나무입니다.

농부 되신 하나님이 창세전에 영생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기 백성들을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하셨습니다.

 

그럼 나무이신 예수님이 가지를 보존시킵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에 진액들을 들 포도 가지인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그럼 들 포도 가지에서 참 포도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금방은 아니더라도 서서히 맺히게 됩니다.

 

과목을 접붙임 하는 농부들의 말을 빌리면 접붙임을 하면 그 해 바로 좋은 과실을 맺히는 것이 아니고 3년에서 5년 후부터 열린다고 합니다.

들 포도의 성질을 참 포도나무가 3년에서 5년 동안 서서히 자기 진액을 공급해서 밀어냅니다.

그래서 5년 후가 되면 참 포도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상품 가치가 되는 괴실은 5년 후에나 열린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구약에 말씀 하셨습니다.



레위기 19장을 봅니다.

 

레 19:23-25=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24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25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찌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과목을 심거든 3년 동안은 열매를 맺더라도 먹어선 안 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3년이 안 된 열매는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4년이 되면 거룩해지고,

5년이 지난 후에 맺는 열매는 할례를 받은 것이니 먹으라고 합니다.

 

참으로 해괴합니다.

열매도 할례 받은 열매가 있다고 하잖아요.

알다시피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것이지 과실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과실에게 어떻게 할례를 행합니까?

이건 하나님께서 과실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의인화(擬人化) 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심겨진 나무의 열매를 가지고 할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과 연결하여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누가 심어 놓았습니까?

하나님이지요.

가나안 땅에 과목을 심은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예수 안으로 집어넣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예수에게 접을 붙이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지난 시간 애굽에 있는 포도나무를 가나안에 심은 것으로 살펴보았지요.

 

시 80:8절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이걸 새 언약으로 보면 애굽에서 가져온 나무는 자기 백성들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백성인 우리를 예수 안으로 옮겨 준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접을 붙인 셈입니다.

 

그런데 3년 동안은 할례 받지 못한 열매라고 합니다.

그리고 5년 된 과실이라야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걸 예수님이 하신 일로 적용해 봅시다.

 

이건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전 이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니 옳으냐 그르냐는 따지지 마시고 여러분의 마음에 동의 되지 않으면 그냥 흘러 보내시기 바랍니다.

 

열매를 할례로 이야기 하니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할례 받은 열매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가지고 예수님 이야기를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육체로 계시면서 메시야로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제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건 마치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심은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이 때는 아직까지 성령이 오시지 않은 때입니다.

그러니 거듭나지 않은 때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때란 말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할례를 상징합니다.

 

언제 거듭납니까?

성령이 오셔야 거듭이 납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육체로 계신 예수님을 3년 동안 졸졸 따라 다닐 때에 맺는 열매들은 거듭나지 않은 옛 사람이 맺은 열매들입니다.

그러니 할례 받지 못한 과실과 같습니다.

 

할례 받은 열매는 오순절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에 맺히게 됩니다.

그러니 5년 째 맺히는 과실을 할례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를 거듭남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거듭납니다.

그럼 할례 받은 과실을 상징하는 5년이란 의미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 50일 만에 오시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령이 오시고 난 후로부터 맺혀지는 과실은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맺게 하는 과실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맺게 하는 과실입니다.

그러니 할례 받은 거룩한 과실이 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맺는 과실이 아니고 거듭난 새 사람이 맺는 과실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맺게 하셨느냐 입니다.

예수님이 성도 가운데 오셔서 과실을 맺게 합니다.

이럴 때 농부가 기뻐합니다.

 

야! 드디어 참 포도 열매를 맺는구나!

농부는 그 동안 나무를 돌 본 보람을 느낍니다.

이걸 아버지가 영광을 받는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말씀들을 하시는 것은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오시면 그 성령이 하실 일에 대하여 말씀 하시면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건 우리 더러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시면 자기 백성은 자동적으로 이러한 법칙 안으로 밀려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땅에 사람이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공급 됩니다.

그럼 예수님의 생명이 서서히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삶으로 점진적으로 가시화되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삶이 조금씩 간헐적이지만 살아집니다.

 

꼭 열매가 맺히는 것과 같아요.

열매가 처음부터 주먹만 한 것이 맺히지 않아요.

처음엔 갓난아이들 젓꼭지 같이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을 해요.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커 갑니다.

모든 생명의 자람이 이러해요.

 

앞서 말했듯이 접붙임을 하면 금방 좋은 열매를 맺지 않아요.

몇 년간은 들 포도와 참 포도의 성질을 가진 열매를 맺습니다.

이건 우리의 모습을 말하기도 합니다.

 

우린 예수를 믿어도 금방 변하지 않아요.

아니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은 평생 변하지 않습니다.

변한 것 같다가도 또 그 자리입니다.

나무는 변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변했다 안 변했다 그래요.

 

지킬박사와 하이드에요.

낮에는 자비로운 의사이지만 밤만 되면 흡혈귀가 되어요.

은혜 받을 땐 천사 같다가도 어느 새 악마로 변해요.

이게 육신의 한계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거듭남이란?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가 되었고, 되어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새 사람은 우리 육신이 죽고 하늘에 몸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장차 하늘에 몸을 덧 입는 새로운 창조의 모습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몸을 덧 입으면 그 땐 예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한 자가 됩니다.

그러나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한 우린 온전하거나 거룩해 질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할례 받은 과실과 같은 몸은 부활의 몸이라야 합니다.

 

지금은 성령이 보증으로 와 계십니다.

장차 주어질 온전한 몸을 입기 위한 보증금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와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온전치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너희는 온전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걸 새 사람으로 자라간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란다는 개념은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향성을 말합니다.

너희는 예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점진적으로 깊이 깨닫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를 믿어 갈수록 가치관이 점점 변하고 삶이 점점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화되는 것이 아니고 거룩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징징거리면서 가나안으로 향하여 한 걸음 두 걸음 가듯이 우리도 새 사람의 장성한 분량을 향하여 미아리 고개 넘어가듯이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끌려가면서 예전에 없던 삶들이 툭툭 터져 나온단 말입니다.

아담 안에서는 도무지 맺을 수 없는 것들이 맺혀요.

 

아담 안에 있던 자에게서 예수의 마음이 나오고 예수의 삶이 나온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만들어 낸 기적입니다.

성도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나온다는 것은 죽은 자에게서 생명이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마치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난 것과 같아요.

 

이걸 창조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산 자로 살려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인 우리 안에 오셔서 예수님의 생명을 집어넣어서 살려 놓은 것입니다.

 

무엇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 냈나요?

 

바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은 살아서 역사합니다.

말씀이 떨어지면 반드시 그 말씀이 담고 있는 내용들을 이루어 내십니다.

 

쉬운 말로 아버지께서 우리더러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린 그 말씀에 순종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십니다.

 

이렇게 되면 우린 그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고 예수님이 안에서 이루심으로 나타납니다.

우린 죄인이면서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님이 순종하신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의 의로 산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 순종하는 자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왜? 죄인이며!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지만 했고!

왜? 예수님을 믿음으로서만 의가 주어지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가지고 우리 죄를 고발하고 또한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말씀대로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이렇게 살으라 저렇게 살으라고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이 성도 안에서 달음질을 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그 말씀으로 두 가지 사건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는 우리 죄를 고발하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우리 주인으로서 그 말씀에 순종케 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어떤 집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 날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싫다고 하다가 나중에 후회하고 돌아갑니다.

 

우리가 그래요.

말씀이 떨어지면 반발합니다.

그럼 죄가 폭로되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말씀을 이루어내세요.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을 이루어 낸 것을 과실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를 보세요.

하나님 말씀이 떨어집니다.

그러자 싫어요.

나 안할래요.

반항합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불이 붙는 것 같아서 가만있지 못하겠는 겁니다.

그러니 얻어맞을 줄 알면서도 다시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잖아요.

이 때 예레미야 고백이 압권입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강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권유에 넘어 갔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럽니다.

원수가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원수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그럽니다.

그럼 우린 싫어요.

죽여도 시원치 않는데 무슨 기도를 하란 말입니까?

그리곤 삐집니다.

 

퉁퉁거리면서 한참 지나고 나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자꾸만 너 그러면 안 된다 그래요.

주님이 너 그러면 안 된다 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마음이 찜찜해 져요.

그 말씀이 귀에 웅웅 거려요.

웅웅거리면서 살살 꼬드겨요.

이걸 주의 권유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럼 마지못해 요나처럼 알았어요.

그러곤 건성 건성으로 합니다.

이걸 주께서 나를 이기었다고 합니다.

주의 권유에 넘어 갔다고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저에게 너 누구를 용서하라고 한다면 반드시 그 일을 이루어 내고야 마세요.

이것이 1년이 걸릴지,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아니면 죽기 전에 하게 할지는 몰라요.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 말씀에 순종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에 주님 품으로 가셨어요.

제가 그 장로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장로님은 간암으로 병상에 누워서 금방 숨이 끊어질 것 같은데 저에게 누구누구를 불러 달라고 하더라고요.

임종을 맞이하기 전에 당신하고 원수진 사람들을 다 병상으로 불러서 화해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불려온 성도들과 찬송을 부르는데 다 화해하시고 숨을 거두셨어요.

아마도 예수님께서 주님 품에 안기기 전에 마음에 짐을 다 털어버리도록 하신 것 같아요.

전 그 때 아! 주께서는 자기 백성들에 마음속에 미움을 없애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어요.

 

바울도 그랬잖아요.

죽기 전에 마가를 불러 달라고 했어요.

마가가 누구입니까?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가고자 함께 동행 하던 바나나의 조카입니다.

 

그런데 마가가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서 포기해 버립니다.

이 때 바울이 화가 나서 바나바와 대판 싸웠어요.

바나바는 바울을 안디옥 교회에 데리고 온 사람이에요.

아주 막역한 동역자란 말입니다.

이런 사이가 마가 때문에 사이가 벌어져 싸우고 결국 각자 갈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마가를 엄청 미워했어요.

아마도 그 미움을 죽기 직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바울이 임종을 앞두고 갑자기 마가가 생각이 나는 겁니다.

화해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마가를 부른 겁니다.

과거 마가를 미워했던 것을 풀기 위함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마가를 용서하고 오라고 하신 것 같아요.

그러니 죽기 전에 미움을 다 털어 버리고 용서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두 모습을 보면 주님은 결국 바울이나 장로님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루시고 만 것입니다.

바울이나 장로님이 미워하고 싸운 사람들과 화해한 것은 그들의 실력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들 안에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바울이나 장로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두고 화목을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맺은 화목의 열매에요.

 

여러분도 미워하는 자들이 많지요.

저도 있어요.

하나님은 반드시 그 미움을 다 풀어 버리게 하실 겁니다.

미움을 가지고는 천국 못가요.

그러니 이 땅에서 다 풀게 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우린 알량한 그 자존심으로 버티고 있지만 결국엔 바울처럼 화해하고 말 겁니다.

 

미리 미리 풀고 사세요.

그럼 마음도 쉼을 얻잖아요.

미움과 분노는 품고 있는 한 손해입니다.

그러니 빨리 푸세요.

그런데도 우린 그러고 싶지 않지요.

아직 자존심이 살아 있어서 그래요.

주님이 그 자존심을 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린 주님을 못 이겨요.

기어코 밀린 방학숙제 시키듯이 다 하게 하세요.

그러니 얼마나 쪽 팔립니까.

화끈하게 용서 해 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럼 폼 나고 생색이라도 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안 되어요.

 

우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 본능적으로 싫다고 반발을 한다니까요.

이러면 우리는 말씀을 거역하는 죄가 폭로당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우리의 죄를 다 끄집어내놓고 우릴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해 놓습니다.

 

넌 이런 놈인데 예수님 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이 본전을 다 챙겨 놓고선 이제 슬슬 우리 몸을 가지고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몸은 말씀으로 죄가 고발당하고 예수님은 우리 몸으로 하나님 말씀을 이루어서 예수님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도랑치고 가제 잡는 격입니다.

결국 예수님만 승리자가 되고 우린 야곱처럼 패잔병이 되는 겁니다.

우린 예수님의 전리품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야곱을 보세요.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맞짱뜨잖아요.

씨름 할 땐 이긴 것 같지요.

그러나 실상은 졌어요.

허리가 분질러지고 지팡이를 의지하는 병신이 되고 말잖아요.

맞짱 안 떴으면 병신이 안 되었을 것 아닙니까?

병신이 되었다는 것은 패잔병이란 말입니다.

죄인으로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지팡이를 의지하고 천국에 들어갔어요.

그 지팡이는 하나님께 덤비다가 얻어맞은 흔적입니다.

지금 아마도 야곱은 천국에서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있을 겁니다.

언중유골(言中有骨)이니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우린 야곱입니다.

말을 안 들어요.

하지만 말을 듣고야 맙니다.

예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어 내고야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에 순종케 하는 일을 하게 하시려고 우리 안에 와 계신 겁니다.

마치 인형 속에 손이 움직이듯이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건 우리의 움직임이 아니고 예수님의 움직임입니다.

 

이걸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맺게 되는 과실이라고 합니다.

과실이란 나무가 이루어낸 결과물이란 뜻입니다.

나무가 열심히 생산해낸 끝물입니다.

가지가 아니고 나무가 생산해 낸 것입니다.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라고 했습니다.

그럼 과실은 예수님이 생산 해 낸 결과물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낸 것들입니다.

우린 가지처럼 있는데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맺은 열매는 옛 사람의 소욕은 십자가에 죽이시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맺는 열매란?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삶을 다른 말로 행함이라고도 합니다. 



그럼 열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열매라는 말이 참 의미가 깊습니다.

열매를 문자적으로 보면 “더울” 열(熱)에 “중매” 매(媒)자를 씁니다.

직역하면 누군가가 열심히 중매 했다는 말입니다.

의역하면 온 몸이 열심히 움직여서 맺어준 결과물이란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보면 하나같이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책망하는 내용이 뭔가 하면 바로 성도의 행위입니다.

 

2장 5절 처음 행위를 가지라!

2장 6절 행위를 미워한다!

2장 19절 네 나중 행위가 처음보다 많도다

2장 22절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란에 던지리라!

2장 23절 네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3장 2절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도다!

3장 8절 네가 작은 능력으로 내 말을 지킨 네 행위를 아노니

3장 15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차갑던지 더웁든지 하라!

 

행위를 “에르곤” 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에르곤”을 성경 전체에 걸쳐서 다양한 것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는 너희의 “착한 행실”이라고 하고,

마가복음 13장 34절에서는 종들이 맡아서 일하는 “시무”라고도 하고,

요한복음 5장 3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소행”이라고도 하고,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각각 행한 “공력”이라고도 하고,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는 “믿음의 역사”라고도 사용했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말하면 성도의 삶을 말합니다.

이건 관념이 아니고 실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인 행위가 책망을 받는다는 것은 곧 성도들이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른 이원론으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머리로 아는 것과 그 아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신앙이 관념화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행위라는 삶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준엄하게 책망을 하시곤 어김없이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합니다.

 

열심이 뭡니까?

열심을 원문에 “제엘로오” 라고 하는데 이를 어원적으로 보면 사모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사모함이란? “불 같은 마음”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마음이 따뜻하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뜨겁다”는 말입니다.

 

뜨겁다는 것은 살아 움직인단 말입니다.

머리에 있지 않고 손과 발로 행동을 한다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은 차갑고 살아 있는 사람은 뜨거워요.

산 사람은 따뜻해요.

생명은 따뜻해요.

 

모든 인간은 뱀의 후손으로서 죽은 자입니다.

죄인들은 다 죽은 자에요.

그래서 차가워요.

마음이 싸늘합니다.

 

죽은 세상에 산 자이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흑암에 빛이 비추었다고 합니다.

흑암이란? 생명이 죽었고 싸늘한 얼음이란 말입니다.

빛이란? 살았고 따뜻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차갑고 싸늘한 동네에 마음이 따뜻한 분이 오셨어요.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우리도 그래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마다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이게 산 자에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죽은 우리 마음에 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차갑고 싸늘한 우리 마음에 뜨거운 기운을 불어 넣어 주신 것입니다.

 

마치 엘리사가 죽은 아이에게 포개어져서 입과 입을 마주대고, 눈과 눈을 마주대고, 손과 손을 마주잡고 자신의 따뜻한 기운을 죽은 아이에게 다운로드해 주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차가운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뜨거운 마음을 다운로드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생명을 받은 성도는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싸늘한 마음들을 녹이는 것입니다.

이걸 산 나무로서 열매를 맺어가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따뜻해 져요.

이 따뜻함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자기를 비우고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는 그 사랑을 타인에게로 쏟아내는 것입니다.

이게 열매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뜨거운 마음을 토해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품으란 말은 이미 주어졌으니 부화 시키란 말입니다.

삶으로 보이란 말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고 받은 것을 보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에 예수님의 뜨거운 마음을 심어 놓고 삶으로 토해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은혜 받아 보세요.

그럼 은혜 받은 모습이 삶으로 나타나잖아요.

 

열매가 뭐라고 했나요?

온 몸이 불이 나도록 움직여서 얻어낸 결과물이라고 했지요.

우리 안에서 살아서 불이 나게 움직이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바울은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 하신 이가 끝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줄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불이 나게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이걸 나무가 가지에게 진액을 공급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열매를 삶이라고 했으니 성도는 예수님의 삶을 살아내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그 안에서 살도록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불이 나게 움직이면 그 성도의 삶이 어떻겠어요.

자기가 점점 부인이 되겠지요.

자기가 부인된 그 자리에 예수님이 드러나겠지요.

이걸 착한 행실이고 주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열매가 뭡니까?

나무가 뱉어낸 결과물이지요.

나무를 믿음이라고 합시다.

그럼 믿음이 토해낸 결과물이 있겠지요.

성경에선 이 결과물을 행함이라고 합니다.

 

열매는 누가 맺습니까?

나무가 맺지요.

나무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럼 이제 예수님이 왜? 우리 가운데 오신지 알겠습니까?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누구 열매입니까?

예수님 열매에요.

예수님 열매가 뭐라고 했나요?

사랑이라고 했지요.

 

그럼 사랑은 어떻게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자기 몸을 불 태워서 남을 살리는 식으로 나타난다고 했지요.

이걸 제물이라고 합니다.

이런 삶을 거룩한 산 제사라고 하고 이렇게 드려지는 몸을 산 제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우리 안에 오신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드려졌잖아요.

그리곤 자기 백성들 안에 오셨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성도도 예수님처럼 산 제물로 드려지는 삶으로 초대받게 됩니다.

이걸 “화목케 하는 사신”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봅시다.

 

고후 5:17-20=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누구인가 하면 “화목케 하는 직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화목케 하는 사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화목 제물이 되어서 죄인과 하나님을 화목 시키고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편견의 담을 헐어 화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안고 사는 성도는 “화목의 사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화목의 사신이 되었습니까?

자신의 죽음으로 하셨지요.

그럼 화목케 하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어야 하겠지요.

죽는다는 것은 자기를 비운다는 말입니다.

화목은 반드시 자기 부인이라는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예수님을 대신하는 자로 있습니다.

세상은 성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처럼 죽임당하는 길로 인도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안 죽으니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날마다 정과 욕심이 죽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죽임 당하고,

욕심이 죽임 당하고,

성질머리가 죽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죄인이 화목 되었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화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이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시키고 내가 예수님처럼 죽임 당함으로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목케 하는 것입니다.

 

이걸 가장 먼저 내 가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예수로 화목이 이루어지게 하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 예수로 화목이 이루어지게 하고!

형제와 형제 사이에 예수로 화목이 이루어지게 하고!

교회와 이웃과 이웃 사이에 예수로 화목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죽임으로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늘 십자가 정신을 삶으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남이 살아나는 식으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린 늘 부인되어지고 낮아지고 죽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몸을 토양으로 하여서 예수님이 맺고자 하는 열매를 맺으세요.

그러니 예수님이 열매를 맺으면 맺을수록 우리 몸은 거름더미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나를 영웅 만드는 것이 아니고 종을 만들어 버립니다.

누가 그럽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과실이 맺혀진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맺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맺은 과실이 바로 사랑입니다.

 

지난 시간에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고 했지요.

이 사랑이 이웃에게도 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신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얼마큼 했느냐의 양적인 문제도 아니고!

어떻게 했느냐의 질적인 문제도 아니에요.

이러한 경향성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전에 없던 것들이 생긴단 말입니다.

원래 우리에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자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이러한 것들을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계명이란?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지고야마는 법이에요.

이건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법은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마는 원칙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보면 성령의 열매가 나오지요.

이러한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합니다.

금지할 법이 없다는 말은 반드시 이러한 것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는다고 하는 겁니다.

절로란 말은 저절로 또는 자연히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이웃을 사랑해야지가 아니에요.

우리 노력으로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에요.

저절로 그런 마음이 들어요.

 

잘해주고 싶고!

보살피고 싶고!

관심 가져주고 싶어져요.

 

여러분 사랑해 보았잖아요.

사랑이 뭔 줄 아세요.

관심이에요.

 

밥은 먹었는지!

잠을 제대로 자는지!

어디 아프지는 않는지!

일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누군가를 사랑하면 이상하게 그 사람에게 관심을 쏟게 됩니다.

 

잘해주고 싶고!

보살펴 주고 싶고!

아껴주고 싶어져요.

이건 사랑하면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 모두가 사랑 속에 이러한 것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마음을 일컬어 “흥분”이라고 합니다.

흥분이란? 일어나서 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주께서 흥분을 일으킵니다.

마음에 흥분이 일어나면 그 흥분이 잔잔한 호숫가에 돌맹이 하나를 던지면 여울이 일어나서 온 호수로 그 여울이 퍼져나가듯이 우리 몸 전체로 퍼져 나갑니다.

 

여러분 호숫가에 여울이 어떻게 퍼져 나가던가요?

하나가 아니고 파도처럼 계속하여 파동을 일으키면서 퍼져 나가지요.

그리하여 종국엔 온 호수 전체를 여울지게 하잖아요.

이게 하나님께서 일으키는 흥분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흥분을 일으키면 그 뜨거움이 머리에서부터 손과 발로 내려가서 움직입니다.

사랑해야지가 아니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흥분이 일어나면 관념에서 행동으로 바뀝니다.

이걸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뜨거운 마음이 맺은 과실이라고 해서 열매에요.

 

이러한 일이 구약에 보면 나옵니다.

학개 1장을 봅시다.

 

학 1:14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으니”

 

하나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마음과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짓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지요.

흥분이란 말이 뜨겁다는 말이에요.

마음이 살아서 쿵쾅 쿵쾅 손과 발로 달음박질 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잖아요.

마치 엠마로로 내려가던 제자의 마음을 뜨겁게 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하신 것과 같아요.

 

성전을 누가 짓는가 하면 하나님이 지어요.

어떻게 짓습니까?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 시켜서 짓게 합니다.

마치 호수처럼 잔잔한 마음에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돌을 던지자 그 속에서 흥분이 여울처럼 일어나서 죽었던 백성들이 살아나서 고토로 돌아가 무너진 성전을 수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펴시고,

땅에 터를 세우시고,

사람의 마음에 심령을 지으신 여호와가 지금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을 흥분시키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어서 마음이 뜨거워지게 하여서 갖가지 말씀들을 이루어가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은 열심이 생기고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에이구~ 뭘 흥분해 보았어야지 알지!

은혜를 받아 보았어야 알지!

예수를 먹어 보았어야지 맛을 알지!

경험되어지지 않는 예수는 가짜에요.

 

백날 입으로 예수가 어떻고 십자가가 어떻고 따박 따박 논문을 써도 손과 발이 움직이지 않는데 무슨 의미가 있어요.

마음은 싸늘한 냉골인데!

거기서 무슨 용서가 나오고, 사랑이 나오고, 충성과 봉사가 나오겠어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잘난 척하면서 남을 깔보고 비판과 정죄와 강포로 죽이는 일만 하잖아요.

관념 속에 있는 예수를 백날 믿어 본들 뭣합니까?

 

죽은 예수를 믿지 말고 산 예수를 믿으세요.

이런 경험들을 해 보신 분들을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겁니다.

좀 해 보세요.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될 거에요.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도 주여 감사합니다가 나온다니까요.

허~ 허!

 

은혜 받아보세요.

안 하던 짓을 한다니까요.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자 백성들 마음이 흥분됩니다.

그러니 날마다 모이고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치고 찬송하고 기도하였던 겁니다.

 

교회는 아무나 다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마음을 흥분 시킨 사람들만이 다닐 수가 있어요.

헌금도, 봉사도, 구제도, 사랑도, 섬김도, 하나님이 마음을 흥분을 시켜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되는 겁니다.

 

이걸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어요.

우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송장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이러한 일들을 행하게 하신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덩어리에요.

사랑 자체에요.

그 사랑 덩어리가 우리 가운데 오셨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신단 말입니다.

성도를 섬기고 교회에 충성하게 만든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낮아지게 하고!

섬기게 하고!

봉사하게 하세요.

그럼 우리 몸은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 본성과 반하는 일을 하라고 하니 죽을 지경인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날마다 죽임당하는 순교에요.

우리 힘으로 안 되니 은혜를 주어서 순교하게 하십니다.

 

순교란 내가 죽고 남을 살린단 말입니다.

예수 믿게 전에는 속을 썩이던 남편이 그렇게 꼴보기 싫었는데 내가 은혜를 받고 보니 남편이 불쌍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 받은 사랑을 남편에게 쏟는 겁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밉던 사람이 주의 사랑이 임하면 이상하게 불쌍해져요.

그래서 잘 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순교에요.

 

그럼 남편이 그러지요.

당신 많이 변했네!

그럼 그 때 그러세요.

그건 내가 변한 게 아니고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그런 거라고 하세요.

 

예수님이 내 안에서 당신을 사랑하라고 해서 한다고 하세요.

그럼 남편은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겁니다.

이럴 때 “화목의 사신”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인형과 같아요.

인형극을 보면 겉으로는 인형이 움직이지만 실상은 인형 속에서 손이 움직이는 거잖아요.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 몸을 인형처럼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열심으로 맺어지는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그냥 은혜로 받으세요.

살아 있는 사람은 뜨겁고, 죽은 사람은 차갑다고 했지요.

열기는 하늘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고, 냉기는 땅으로 가라앉는 성질이 있습니다.

뜨거움은 하늘로 올라가고, 차가움은 바닥으로 가라앉아요.

 

이 세상엔 땅에 생명으로 사는 자와, 하늘에 생명으로 사는 자 두 부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뱀의 후손과 예수님의 후손입니다.

뱀의 후손은 땅에서 낫고, 예수님의 후손은 하늘로부터 났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하늘에 생명이고, 뱀의 생명은 땅에 생명입니다.

 

하늘에 생명은 하늘로 올라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땅에 생명은 땅으로 기어들어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예수가 있는 성도는 하늘로 지향하고,

그 안에 뱀이 있는 사람은 땅을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천국으로 올라가고, 뱀의 생명은 지옥으로 내려갑니다.

 

성경에 보면 내려간다는 말과 올라간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건 모두가 생명의 속성에 따른 지향성을 말합니다.

내려가는 것은 타락을 말하고,

올라간다는 것은 회복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있습니다.

내려간다는 것은 타락을 말하고 죽었다는 말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그들과 동행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을 자세히 풀어 줍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갑자기 뜨거워집니다.

마음이 뜨거워지자 더 이상 내려가는 발걸음을 돌이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이는 죽었던 자가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풀어 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쑥~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땅으로 내려가던 삶이 하늘로 올라가는 삶으로 바뀝니다.

삶에 지향성이 달라집니다.

방향이 땅에서 하늘로 바뀐 겁니다.

삶에 가치관이 하늘을 지향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레위기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먹을 짐승과 먹지 못할 짐승을 구분시켜 주셨습니다.

이를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으로 표현하였어요.

땅에서 뛰는 짐승은 먹되 땅에서 기어 다니는 짐승은 먹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쉬운 말로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은 먹지 말고, 하늘로 올라가는 짐승은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의 상징성이에요.

땅에서 뛴다는 것은 하늘에 기운으로 하늘을 지향하고 사는 것이고, 땅에 기어 다닌다는 것은 땅에 기운으로 땅을 지향하고 산다는 말입니다.

 

짐승은 우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잡수실 음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잡수실 성도는 하늘에 기운을 받고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하늘에 생명으로 사는 자란 말입니다.

 

하늘에선 “생명의 기운”이 주어지지만, 땅에서는 “저주의 기운”이 주어집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지요.

그리곤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합니다.

이는 죄인은 저주의 기운으로 살다가 지옥으로 가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는 땅에서 나는 음식을 먹었어요.

애굽은 저주 받은 곳을 상징합니다.

애굽은 뱀에 후손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애굽에는 하나님의 저주가 퍼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광야로 빼냅니다.

광야에 나오니 하늘에서 양식이 내려오지요.

이는 광야는 곧 하늘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애굽에 상대적인 의미로 광야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광야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광야에서는 광야의 삶이 따로 있어요.

광야의 삶이란? 애굽에 삶을 비워내는 삶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옛 사람이 죽는다고 하고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합니다.

날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인되어지고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을 열매라고 합니다.

나무나 열매는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라고 하였습니다.

바울도 그들의 행실을 보고 판단하라고 했어요.

그러니 예수라는 나무는 예수님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능력이란? 살아 움직이는 삶입니다.

신앙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가짜에요.

삶이란? 완전하게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지의 가치관을 말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의 지향성을 말해요.

 

아까 레위기에서 땅에서 뛰는 짐승은 정한 것이니 먹으라고 했지요.

땅에서 사는 것은 땅을 벗어 날 수가 없어요.

그러니 뛰어도 다시 땅으로 접지합니다.

접지하여도 다시 또 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육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육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 없단 말입니다.

버릴 수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 예수 믿는다고 해서 완벽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온전치 못한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 믿고도 죄 지을 수밖에 없어요.

죄지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믿음을 준 것입니다.

그러니 죄 짓더라도 예수 안에서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고 살면 됩니다.

그러라고 믿음을 주신 겁니다.

 

믿음으로 살라는 말은 우리 육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을 주었어요.

그러니 죄 지었다고 퍼질러 앉아 있지 말고 툭툭 털고 일어나세요.

 

자식을 키우다 보면 아이들이 곧잘 넘어집니다.

넘어지기 때문에 아이에요.

그럼 얼른 일어나야지요.

일어나서 툭툭 털고 엄마 따라 가면 됩니다.

 

그런데 일어나지 않고 징징거리고 있으면 엄마 속이 터집니다.

그럼 넘어진 죄에다가 일어나지 않는 죄까지 가중처벌을 하잖아요.

넘어진 놈이 일어나서 툭툭 털고 오면 잘 했다고 짜장면 사주잖아요.

 

어떤 사람들을 보면 죄 지었다고 교회에 안 와요.

아주 웃겨요.

그럴수록 나와야지요.

뻔뻔스럽게 말이에요.

믿음은 어디다가 엿 바꿔 먹었습니까?

우리가 죄를 못 이기니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법적 관계에 있지 않고 사랑의 관계로 있어요.

그래서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단의 참소를 이기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해요.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과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을 말이에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예수님의 피는 죄사함을 주는 능력이 되지만,

예수 피 믿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면 예수의 피는 색욕거리가 되어요.

 

성령은 육신의 소욕과 싸웁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반드시 죄와 싸우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본성과 아담의 본성은 극과 극입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밀어내게 되는 싸움이 있게 되는 겁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죄와 싸우지 않아요.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죄와 싸워요.

이방인의 특징을 뭐라고 합니까?

죄에 대하여 감각이 없는 자에요.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엡 4:17-20=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방인같이 행하지 말라고 하지요.

이방인의 특징이 뭡니까?

저희는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하지요.

그리고 죄에 대한 감각이 없다고 하지요.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 있으니 죄에 대하여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없으니 자신을 방임하고 방탕에 내어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방임하고 방탕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방임이니 방탕이란 말은 마음을 놓아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겁니다.

이를 본능적으로 산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마음대로 산다는 말이에요.

 

성경에선 이렇게 본능적으로 사는 것을 짐승이라고 합니다.

짐승이니까 하나님이 니들 마음대로 살으라고 유기시킨 겁니다.

그래서 방임하고 방탕하게 사는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은 은혜가 붙잡고 있어요.

말씀이라는 생명줄에 매여 있어요.

그래서 막 살수가 없고!

꼴리는 대로 살수가 없어요.

 

요즈음에 복음 복음하면서 꼴리는 대로 산다는 자들이 많잖아요.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예수 피만 믿으면 된다고 하잖아요.

막 산다!

내 마음대로 살거야!

꼴리는 대로 산다는 것이 바로 방임이고 방탕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믿는 예수는 관념이에요.

관념은 철학이지 신앙이 아니에요.

그건 지식으로 아는 거예요.

 

그러니 신앙이 생활이라는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신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가짜란 말이에요.

 

죄인은 자기 살이 썩어 들어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모르는 문둥병자와 같이 죄에 대한 아픔을 몰라요.

이방인들이 죄에 대하여 그러합니다.

이방인들은 문둥병자처럼 죄에 대한 감각이 없으니 죄에 대한 아픔이나 미움이나 싫어함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에 대하여 감각이 없는 자는 신자가 아니고 이방인이라고 했어요.

 

신자란?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어요.

죄를 안 짖는다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지어도 이건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죄에 대하여 아파하는 마음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이게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나중엔 안하고자 하게 되어요.

죄를 먹고 마시다가도 어느 순간 에이~ 싫어! 그런단 말입니다.

 

죄를 지어 보세요.

그럼 주님이 속에서 그럽니다.

재미있냐!

그렇게 좋으냐!

언제까지 그럴 건데!

자꾸만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요.

그러다 보면 나중에 에이! 더러워서 안 해! 그런다구요.

죄 짓는 것이 싫어져요.

재미가 없으니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또 그러지만!

그럼 또 주님이 그래요.

육신을 벗어나기까지는 늘 이러한 일들이 일어 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 겁니다.

죄가 너무도 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늘 죄와 싸우는 자입니다.

죄를 안 짖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를 지어도 죄를 이기지 못하는 애통함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 뿌리심에 은혜에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늘 이 싸움을 합니다.

신앙생활은 관념이 아니고 실제이고 삶이에요.

삶이기 때문에 아픈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 고난이라고 하는 겁니다.

 

생명이란? 늘 죽음에 세력과 싸우는 것입니다.

죽음의 세력과 싸우는 것이 생명의 능력이에요.

원리적으로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살지만 육신으로서는 구습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선한 싸움이라고 합니다.

 

성도의 삶은 이방인과 구별되게 되어 있어요.

마치 물과 기름처럼 분리 되게 되어 있어요.

가치관이 다르고 지향성이 다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구별이 되고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일컬어 거룩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갔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그들과 같으면 같은 신앙이고 다르면 다른 신앙인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의 살과 피를 마신 성도는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밀어 넣어요.

성령이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성경을 보시고 사람의 말을 듣지 마세요.

저를 위시하여서 그 어느 누구의 말도 믿어선 안 되어요.

예수님도 사람의 미혹을 받지 말라고 했어요.

 

사람의 미혹이란? 공교하게 지은 말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걸 포도주에 뱀의 독을 섞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성령이 없는 사람은 다 넘어가게 되어 있어요.

왜? 넘어가는가 하면 자신의 방탕한 삶을 합리화 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왜? 이단의 말에 넘어가는 줄 아세요.

 

자기 안에 예수님을 만난 증거가 없기 때문이에요.

용서 받고 사랑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예수님의 증거가 없으면 사람의 증거를 찾게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한단 말입니다.

 

인간은 늘 자기 생각이 옳고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 인정함을 받고자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으려고 해요.

자기가 부정당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자기 생각에 맞는 설교자를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게으른 사람은 게으름을 합리화 시켜 주는 사람의 말을 쫓아가고, 열심 있는 사람은 열심을 가르치는 사람을 쫓아갑니다.

쉬운 말로 성화주의자들은 성화론을 가르쳐야 복음이라고 하고,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복음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른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피만 믿으면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말을 복음이라고 믿어요.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그동안 율법에 눌려서 못 살았는데 누가 꼴리는 대로 살아도 된다!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니 이게 왠 복음이냐고 하면서 덥석 무는 겁니다.

 

교회 가기 싫고

봉사하기 싫고!

헌금하기 싫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누가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고,

막 살아도 된다고 하면 야호~ 하고 이젠 자유다 하고선 아무 것도 안하고 노는 겁니다.

 

인간은 생래적으로 마치 편식하는 아이들처럼 자기 구미에 맞는 말씀을 골라서 머리에 쌓아갑니다.

부담스럽고 자기를 부정하는 듣기 싫은 말은 다 빼고 자기 귀에 달콤한 말을 복음으로 들어요.

자기 삶을 합리화 해 주고 자기를 인정해 주는 듣기 좋은 말만 듣습니다.

그 누가 어떤 설교를 하여도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편집해서 들어요.

 

달콤한 말이란? 자기 생각을 긍정해 주는 말입니다.

이름하여 선악과입니다.

선악과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지만 먹으면 죽어요.

그 속에 죽이는 독이 있습니다.

죽이는 독은 마약처럼 달콤한 독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아프고 써요.

듣기 싫어요.

죄를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책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이 불량 식품을 좋아하듯이 자기를 긍정해주는 말을 좋아합니다.

막 살아도 전혀 부담감이 없는 자신을 합리화 해 주는 그런 말을 좋아해요.

결국 그 독에 중독이 되어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보다도 더 타락하고 더 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뱀의 독에 취하여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자기 신앙을 인정해 주고!

자기를 알아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생각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서 조직을 만들고 그런 말을 진리처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은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의 말이 아니고 성경입니다.

성경 속에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누구의 말이라 하더라도 우린 먼저 성경이 그러한가! 상고하여야 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의 설교라 할지라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설교가 과연 성경적인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성경과 다른 말을 하면 그 말이 아무리 그럴싸하고 논리적으로 말한다 하여도 그것은 그럴 듯하게 지어낸 공교한 말이므로 그 말을 증거로 붙잡으면 안 됩니다.

 

어떤 자들은 성도의 삶이 없다고 합니다.

이건 예수님이 현재 성도 안에서 일하고 계시는 역사성을 부정하는 이단이에요.

성경은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고 했어요.

더해도 이단이고 빼도 이단입니다.

 

성경엔 분명히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있어요.

그러므로 어떤 논리를 펴더라도 성도의 삶이 없다고 하는 것은 비 성경적이고 이단인 겁니다.

왜? 성도의 삶이 없다고 할까요?

그래야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이 합리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성도의 삶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말 자체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자란 말입니다.

성도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에요.

예수 안에서 존재합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서 살아 계세요.

예수님이 성도 안에 살아 계신다 함은 성도의 삶을 간섭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성도의 삶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 안에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성도의 삶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생을 경험하지 않은 젊은이와 같은 아마추어적인 사고에요.

젊은이들의 특징은 자기 기준에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살아온 세월이 짧기 때문에 판단하는 폭도 그만큼 좁습니다.

그럼에도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모든 것을 자기 수준에서 판단해 버리는 우를 범해요.

 

20살짜리가 60살을 산 사람의 인생을 알지 못해요.

설령 안다고 하여도 그건 지식이고 관념이에요.

지식이나 관념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실제가 아닙니다.

앎이란? 경험을 해 보아야 알아지는 것입니다.

올바른 앎이 되려면 60세를 경험하고 살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20세 때 옳다고 여기던 일이 60세가 되면 철없음을 알게 됩니다.

오래 산 사람들은 인생살이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요.

산다는 것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판단하고 심판하기보다 이해하고 참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신앙에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우리가 남을 판단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다 담아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정죄하거나 판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세월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신 분일수록 정죄하는 법이 사라지고 이해하는 은혜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조급해요.

생각과 동시에 행동이 나옵니다.

본능적으로 행동해요.

그러나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생각하는 것이 길어져요.

생각이 길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을 산다는 것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20대는 생각과 행동이 같이 간다고 하면!

30대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간이 하루가 걸리고!

40대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열흘이 되고!

50대가 되면 몇 달이 걸려요.

이를테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직장생활을 해 보면 젊은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인내하지 못하고 금방 사표를 냅니다.

그러나 50대가 되어 보세요.

몇 달을 고민하고 몇 년을 고민하다가 60세 정년까지 가는 겁니다.

자신이 사표를 내면 온 가족의 생계가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기에 혼자만의 기분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위해서 수모를 참고 헛 웃음을 팔면서 견디어 내는 겁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그러합니다.

나보다 남을 생각하여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어가 아니라 모든 것이 가(可)하나 모든 것이 유익 된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나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행여 자신의 자유함으로 우상의 제물을 먹다가 아직도 우상에 대하여 살아있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바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서 시험들 것 같으면 자기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게 남을 배려하는 사랑이고 신앙의 깊음입니다.

 

성도는 모든 것을 다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도 정죄당하지 않습니다.

막 살 수 있어요.

꼴리는 대로 살수가 있어요.

하지만 막 살 수가 없어요.

 

성도는 죄다 아니다 법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이것이 덕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 라는 사랑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이것이 죄냐 아니냐 라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이것이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느냐 아니냐 라는 개념으로 접근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내 마음대로 살거야 가 아니고 내 마음대로 살면 안 돼 라고 하는 겁니다.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입니다.

내 양심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함이란 약함을 배려하고 도아줄 때 강함이 됩니다.

강함을 가지고 약함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은 강함이 아니고 악이고 죄입니다.

 

신앙에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도 무거워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막 사세요! 꼴리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진의야 어떻든 연약한 사람들이 오해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러면 안 된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 것을 알아요.

천방지축인줄 알아요.

그렇다고 니 마음 내키는 대로 살으라고 말하지 못해요.

도리어 마음대로 살지 못하도록 금지 시킵니다.

이게 자식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알수록 언행심사가 조심스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깊어질수록 생각하는 것이 많아지고 행동하는 것이 굼떠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여도 기도하면서 숙고하고 또 숙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둑 두는 것과 같아요.

하수들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두어요.

보이는 수가 없으니 수를 읽을 능력이 없어서 그냥 즉흥적으로 두는 겁니다.

그러니 맨 날 만방으로 깨지는 겁니다.

판세를 분석하는 수는 고수가 되어 갈수록 넓게 보이고 밝아지고 많이 읽혀져요.

 

그래서 바둑판에는 고수가 될수록 수많은 수를 생각하고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수들은 바둑에는 한 수 한 수에 따라서 변수가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두지 않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수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경험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돌 하나를 놓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지혜로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 아래서 종노릇해 본 사람과 율법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율법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요.

교회생활을 충실하게 해 본 사람과 대충 대충 건선 건성으로 해 온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는 자세가 달라요.

율법의 정신을 올바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경히 여기지 않아요.

교회의 소중함을 아는 분들은 교회생활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요.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교회 생활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독한 율법 주의자였어요.

그러다가 예수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바울은 은혜 안에 있다고 해서 율법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어요.

율법도 복음으로 믿고 살았어요.

 

율법 아래 있을 땐 법이였지만 은혜 안에 들어와서 보니 법이 아니라 은혜임을 안 겁니다.

그래서 율법도 신령한 것이라고 고백을 한 겁니다.

바울은 복음을 알면서도 율법의 결례를 지켰어요.

이건 법으로 지킨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행한 겁니다.

 

진짜 죄에서 건짐 받고 율법에서 해방이 되어 은혜를 받은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법으로 지키지 않고 사랑으로 행합니다.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신앙생활을 건성으로 하지 않고 진실하게 합니다.

 

은혜 안에 있는 성도는 율법을 법으로 받지 않고 사랑을 받아요.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과 부대껴 오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서른 즈음이란 노래 속에 인순이가 한 고백처럼 30대엔 30대 인생이 있고,

40대인 40대 인생이 있고,

50대엔 50대 인생이 있고,

60대엔 60대 인생이 있어요.

각각의 나이만큼 그 인생을 아는 깊이가 다 달라요.

이건 그만큼 인생살이가 깊고 넓고 복잡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알아 갈수록 깊어요.

그 은혜를 측량 할 수가 없어요.

 

에스겔 47장을 보면 성전에서 물이 나오지요.

그 물이 발목에서부터 온 몸이 잠기도록 채워가잖아요.

처음엔 마음대로 행동을 하다가도 나중엔 물에 자신을 맡기고 떠밀려 가게 됩니다.

이게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에스겔 성전은 성령이 지은 성전이에요.

그 안에 여호와가 계세요.

그래서 성령이 지은 에스겔 성전을 “여호와 삼마”라고 합니다.

여호와 삼마라는 말은 여호와가 그 안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성령이 우리 안에 성전을 짓지요.

그럼 우리 안에 여호와 되신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럼 우리는 “여호와 삼마”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삼마인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옵니다.

 

물의 깊이가 다 다릅니다.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우리의 신앙에 경륜에 따라서 다릅니다.

발목에서부터 온 몸이 잠기는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처음 믿으면 발목에 차인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합니다.

 

처음 은혜를 받으면 주여 세계를 내게 주소서! 라고 합니다.

아골 골짝 어디라도 복음 들고 가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경륜이 깊어지면서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가 되어요.

 

세계는 개뿔!

내 자식 내 집안 하나도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요.

아골 골짝 좋아 하시네!

조금만 어려워도 죽네 사네 하잖아요.

결국 자기 힘으로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주여 긍휼히 여겨 주소서! 라고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여 나는 개입니다! 라고 하게 됩니다.

이게 은혜의 물에 온 몸이 푹 잠긴 성도의 모습입니다.

 

처음 복음을 접하게 되면 젊은이들처럼 법이 앞서서 정의감에 사로잡혀서 데모를 하고 교회 개혁을 외치고 사회정의를 외칩니다.

그러나 신앙의 경륜이 깊어지면서 법은 서서히 사라지고 은혜가 나타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게 됩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기 보다는 주께서 어떻게 그 사람을 간섭하시는지 기다리게 되어요.

 

사람은 받은 은혜만큼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신앙의 경륜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읽어내는 깊이가 달라요.

신앙의 경륜이 깊은 분들은 모든 것이 가(可)하나 모든 것이 유익(有益)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여 내가 옳다고 하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겐 피해를 주지는 않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함이 혹 믿음이 연약한 사람에게 시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를 사용하는 데에도 조심 또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엔 자유마저 포기하고 맙니다.

 

예를들어 장로가 되어서 주일날 교회 오지 않고 놀러 다니면 본인은 괜찮지만 행여 믿음이 약한 성도가 시험 들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다른 날 놀러 가고 주일날에 교회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법으로 구속해 버립니다.

이게 바로 지유에요.

 

진정한 자유는 자기 유익을 구치 않고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그 자유마저 법에 구속시켜 버릴 줄 아는 것입니다.

때로는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자신을 율법 아래 가두는 것이 신앙입니다.

성도는 천국에 서기관처럼 옛 것과 새 것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았어요.

때로는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살았고 때로는 자유한 자로 살았어요.

자기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때론 율법을 지키고 살았단 말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깊어질수록 법과 은혜를 적절하게 운용합니다.

왜냐하면! 은혜 안에 있으면 율법은 법이 아니고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용서하고 참아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자신을 저주하고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가 용서하고 조반을 해 먹이는 그런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마치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어디 몸 상한 데는 없는지 살피고 밥상부터 차려주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참아주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우리 체질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집을 떠난 탕자를 문 열어 놓고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기다려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심판하지 않고 참아 줌이 있고 기다려 줌이 있습니다.

법대로 하지 않고 그 법을 자신에게 들이대고 자신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이게 하나님 사랑입니다.

 

우린 이런 사랑을 받았어요.

그리고 토해 내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토하여 내게 하실 겁니다.

일을 시작 하신 이가 끝날 까지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럼 우리에게서도 아버지처럼 탕자를 용서하는 사랑이라는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맺은 열매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 모두 주께서 우리 안에서 이러한 열매들을 풍성히 맺어 가시길 기도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주님이심에 끝날까지 다 이루실 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주의 손에 이끌려가는 인생이 축복이고 기쁨이고 감사임을 알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 마음을 늘 은혜로 흥분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