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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92강. 참 포도나무와 가지 (요한복음 15:1-11)

by coroa 2021. 12. 1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요 15:1-1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92강. 참 포도나무와 가지 (요한복음 15:1-11)

-.정낙원 목사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을 일컬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합니다.

이제도 계시고 라는 말은 현재를 말하고,

전에도 계시고 라는 말은 과거를 말하고,

장차 오실이라는 말은 미래를 말합니다.

 

그럼 예수님은 항상 계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항상 계시는 분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죽을 수 없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하나님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주와 그리스도란? 구원자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 예수가 바로 구원자란 말입니다.

구원자를 히브리말로 메시야이고 헬라어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어요.

그러나 다 메시야가 아니에요.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만이 메시야인 겁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이 지금 죽었던 예수를 부활하심으로서 이 사실을 입증해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는 역사 속에 육체로 오신 이름입니다.

묵시 속에선 예수라는 이름이 없어요.

거긴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이를 잘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신 하나님이 또 다른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누구이고 그냥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말씀이신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말하고 그냥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말합니다.

 

묵시 속에선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계시던 분이 역사 속으로 오시면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걸 주의 이름으로 보내심을 입은 여호와의 사자라고 합니다. 

사자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뭔가 하실 일이 있어서 보내심을 입은 겁니다.



무슨 일을 할 것인지는 이름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묵시 안은 완료된 세계이므로 이름이 필요가 없어요.

이름은 미 완료된 세계에서만 필요합니다.



이름이란? 그 이름이 함유한 일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루어야 할 일이 있다 함은 미 완료란 말입니다.

묵시는 완료 세계이고 역사는 미완료 세계입니다.

그래서 묵시에선 이름이 없었는데 역사로 오시면서 이름을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도 천국에 가면 이름이 없어요.

그냥 어린 양의 신부로 있어요.

아담과 하와를 보면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나왔어요.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의 이름을 따라가요.

 

그래서 천국에 간 성도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만 적혀 있어요.

이는 어린 양 안에서 완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은 성도는 어린양 안에서 존재하는 자란 말입니다.

천국은 어린 양과 한 몸으로 사는 곳입니다.

 

예수라는 이름도 미완료 세계인 역사라는 이 세상에서만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묵시 안에서는 그냥 말씀이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으로 이름 없는 무명으로 있다가 역사로 들어오면서 해야 하고 이루어야 할 일이 있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유명으로 오신 겁니다.

 

아버지가 말씀이신 하나님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의 운명은 그 이름 속에 종속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름이 안고 있는 내용을 이루기 위해서 사십니다.

 

이제 말씀이신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함유하고 있는 일을 하도록 갇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뭡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렇게 죄에서 구원하는 분을 구원자 곧 메시야라고 합니다.

메시야를 번역하면 그리스도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를 통하여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의 길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하나의 수순이었던 셈입니다.

인간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부활케 하심으로서 봐라! 이 분이 바로 죄와 사망권세를 이긴 그리스도이시다!

너희가 이단이라고 죽인 이 예수가 바로 너희를 너희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 곧 그리스도 라고 만천하에 공포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서 이 사실이 세상에 알리워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이심이 확증 되었다고 증거 합니다.

세상 사람들아!

이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다고 약속하신 그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에게 세상을 심판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이제 예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이건 마치 구약 시대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복에 민족과 저주의 민족으로 나누신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복과 저주의 시금석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보낸 한(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로 판단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한(그) 사람이란 하나님이 지목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입고 하나님이 지목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바로 예수라고 합니다.

예수가 바로 아브라함과 같은 복에 조상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면 복을 받고 영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가 이제 복과 저주의 기호가 되었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이 세상에 던져준 구원 방법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 방법에 동의하는 자는 구원받고 동의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역사 속의 시나리오에 따라 그리스도가 되는 수순을 밟고자 십자가에 죽으려고 합니다.

묵시라는 전에도 계신 하나님이 이제라는 역사 속에 오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는 길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이 죽음에 뛰어 드는 것은 죽음 속에 갇힌 자기 백성들을 구출하기 위함입니다.

그냥 낚시하듯이 건져 올리는 것이 아니고 친히 죽음 속으로 들어가서 바위처럼 단단하던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고 그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빼내십니다.

이는 자기 백성들 속에 자신의 공로를 담아 놓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천국에서 어린 양만 찬미합니다.

 

이제 자기 백성들을 사망으로부터 빼내려고 십자가에 죽으러갑니다.

이걸 여자가 아이를 낳는 해산의 고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고자 잠시 죽는 고통을 맛보지만 아이를 낳고 나면 그 기쁨으로 충만케 되는 것처럼 예수님이 죽었다가 성령으로 다시 오시면 그 기쁨으로 충만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니고 다시 살기 위해서 죽음에 갇힌 육신이라는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육신이라는 허물을 벗어버리고 나면 죽음과 상관없는 모습으로 다시 오겠다고 합니다.

 

죽음을 이긴 자로서 너희 안에 오시겠다고 합니다.

이제 성령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죽음을 이긴 그리스도로서 오십니다.

어떻게 오시느냐 육체를 벗어난 영으로 오십니다.

성령으로 오셔서 이제 자기백성들의 육체 속에 거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셔서 자기백성들의 육체 속에 거하시는 이유는 자기 백성들도 자신이 걸었던 그 수순의 길을 걷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역사라는 육신 속에 갇힌 옛 사람을 십자가에 내어주고 묵시 속에서 살아가는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십자가는 육에서 영으로 나아가는 통과 의례인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서 성도는 역사에서 묵시로 옮겨졌습니다.

몸은 비록 옛 사람 그대로이지만 그 안에 내장된 프로그램은 묵시의 것입니다.

내장된 묵시라는 프로그램이 묵시적 존재로 살아가도록 간섭 하십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너희는 이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과 성도가 하나 되게 된다고 말씀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과 하나 됨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 하나 됨의 삶을 오늘 본문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성도가 한 몸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왜?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라고 하는지를 알아봅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특히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성화를 하여야 한다는 인간의 행함을 주장 합니다.

이는 오늘 본문 속에 하나님은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라 낸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합니다.

알미니안주의 자들처럼 본문을 문자적으로 보면 구원을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구원은 미완료가 됩니다.

언제 잘려 나갈지 모르게 때문입니다.

잘 믿다가 아차~ 하면 잘려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신앙생활이 불안합니다.

구원을 내가 지켜야하니 얼마나 불안 합니까?

 

그리고 문제점은 그럼 얼마나 잘 해야 잘리지 않느냐 입니다.

흔한 말로 구원의 커트라인이 몇 점이냐 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행위를 저울에 달아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식으로 천국에 가면 구원의 차별이 생깁니다.

높은 점수를 받은 자들과 낮은 점수를 받은 자들 간에 상하(上下) 서열이 정해집니다.

점수가 높은 사람은 넓은 평수에 살고 점수가 낮은 자들은 초가집에 살 것입니다.

 

실제 이런 이야기들을 목사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 따위로 신앙생활 하면 천국에 가서 개털모자 쓴다고 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건 아닌 것 같지요.

맞아요.

이런 구원은 없습니다.

이런 천국도 없구요.

 

그러므로 우린 늘 성경을 상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성과 상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알미니안주의와 반대로 성도의 행함을 무가치한 것으로 가르치는 자들이 있어요.

 

이런 가르침을 받으면 신앙이 이론으로 흘러요.

머리로는 십자가 도를 아는데 살아가는 삶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어요.

신앙생활이 이원론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단편적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나,

성도의 삶을 무시하고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사는 자들이나 그릇되기는 동일해요.

열심히 하지 않으면 구원이 잘린다고 하는 자들이나,

이렇게 살으나 저렇게 살으나 죄인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나 성경을 오해하기는 똑 같아요.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예수님을 몰라서 그래요.

예수님의 현재성을 몰라서 그럽니다.

십자가 자신 예수님은 아는데 우리 안에 와 계신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예수님을 묵시와 역사라는 관점에서 해석을 하면 전에도 계신 예수님은 창세전에 묵시 안에서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제도 계신 예수님은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리고 장차 오실 예수님은 역사에 계시다가 죽고 부활하여 하늘나라로 승천하셨다가 다시 역사 속으로 오시는 심판주 되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이건 이스라엘의 절기를 통하여서 잘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절기와 월삭이나 먹고 마시는 것은 다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절기 속에 그리스도가 하실 일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절기를 세 구분으로 나눕니다.



씨를 뿌리는 봄 절기가 있고,

농사를 짓는 여름절기가 있고,

추수하는 가을절기가 있어요.

  

봄 절기는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을 말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육체로 이루신 사역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무덤 속에 계심과 부활하심의 초림 사역을 말해요.

이는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요.

 

여름 절기는 오순절과 넉달 농사 기간을 말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성령으로서의 사역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현재 사역을 말합니다.

이는 씨가 발아하여 열매를 맺어가는 것과 같아요.

 

가을 절기는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을 말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재림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미래 사역을 말합니다.

이는 열매가 익어 추수해서 곡간에 들이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예수님을 지칭할 때 전에도 계시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말씀을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으로 적용하여 해석해 봅시다.



전에도 계신 예수님은 누구시며?

이제도 계신 예수님은 누구시며?

장차 오실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현재 시점에서 전에 계신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지요.

 

그럼 이제도 계신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지요.

 

장차 오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세상을 심판하려고 오실 재림하는 예수님입니다.

 

절기는 또한 예수님의 세 가지 사역을 말하기도 합니다.

 

봄 절기는 죄를 고발하다가 죽임당하는 선지자적인 사역을 말하고!

여름 절기는 성령으로 오셔서 성도를 돌보시는 제사장적 사역을 말하고!

가을 절기는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심판하시는 왕으로서의 사역을 말합니다.



복음 속에는 이 세 가지가 다 들어가 있어요.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다를 믿어야 온전하게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도 믿고!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게 하는 것도 믿고!

장차 천국에서 영원토록 사는 것도 밈ㄷ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도 간과해서는 안 되어요.

어느 하나에 치우쳐서도 안 되구요.

 

십자가 십자가 해서도 안 되고!

성령 성령 해서도 안 되고!

재림 재림 해서도 안 되어요.

다 믿어야 하고 다 증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복음을 각 사람에게 은사로 주어서 증거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증거하는데 탁월하고!

어떤 사람은 성도의 삶을 증거하는데 출중하며!

어떤 사람은 재림에 관하여 밝은 분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나와 다르다고 무시하거나 나만 다 안다고 하면서 남을 폄훼해서도 안 됩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 귀를 닫으면 안 되어요.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전에도 계시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친히 그러셨지요.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며!

시작과 끝이고!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걸 달리 말하면 나는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다는 말입니다.

항상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럼 십자가 지신 예수님도 말해야 하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도 말해야 하고!

장차 오실 예수님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도 간과해서는 안 되어요.

 

성도는 묵시와 역사를 오늘로 현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로서의 예수님의 책망을 들어야 하고!

제사장으로서의 성령에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고!

왕으로서의 예수님에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묵시를 현재로 살고 현재를 묵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날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안에는 항상 오늘만 있어요.

이게 영생입니다.

 

신앙생활이 뭡니까?

오늘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항상 현재에요.

현재 하나님과 동행하여야 합니다.

 

현재 동행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요?

우리 안에 와 계신 예수님입니다.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잖아요.

 

신앙을 일컬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은 죄사함을 얻게 하는 믿음을 주셨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천국에 소망을 주시고!

장차 오실 예수님과는 천국에서 부부가 되어 실제로 사랑을 하게 됩니다.

 

이건 역사 속에서는 순차적으로 일어나지만 묵시 안에선 동시에 일어납니다.

묵시적으로는 우린 천국을 맛보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아직 들어가지 못하였어요.

역사적으로 들어가는 천국은 우리가 죽거나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이루어집니다.

우린 그 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성경이 구원의 시제를 과거 현재 미래로 말하는 것도 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린 구원을 받았지만, 현재 이루어가고 있고, 장차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항상 구원은 완료이지만 현재 진행형으로 있는 것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이를 알고 뒤에 것은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어요.

우리도 이 경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다시 오늘 본문을 우리가 열심히 하여야 짤리지 않는다는 것과 다 끝났으니 내 마음대로 살거야 하는 것의 그릇된 해석을 더 살펴봅니다.

먼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짤린다는 알미니안주의의 잘못된 해석입니다.

 

구원이란? 건져냄을 받는 것입니다.

건져냄을 받는다는 것은 외부의 힘으로 건져진다는 말입니다.

외부의 힘에 의하여 건짐을 받기 때문에 내 의지나 노력하고는 무관하지요.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우리 바깥에 계신 구원자가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속엔 철저하게 예수님의 일하심에 흔적만 오롯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걸 예수님의 의라고 하고 또는 은혜라고 합니다.

구원이 은혜로 남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다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작과 끝이라고 하고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죄인의 몸을 가지고 있어요.

죄인의 몸으로 예수를 믿고 있어요.

왜? 죄인의 몸으로 예수를 믿게 하는지 아세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면서 왜? 몸뚱이는 헌 피조물의 몸뚱이 그대로 놔 둡니까?

 

이는 구원의 목적이 아들에 영광을 찬미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예수님의 피 뿌림에 흔적들을 두기 위함입니다.

한 마디로 너희는 예수 때문에 산다는 것을 늘 우리 몸에 흔적으로 남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사함의 피입니다.

죄 사함은 죄를 지어야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면 죄 사함이 필요가 없어요.

죄사함은 반드시 죄인에게만 허용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의 몸으로 예수를 믿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는 예수 때문에 사는 자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온전코자 하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나는 온전 할 수가 없구나 를 알게 됩니다.

나는 예수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마땅히 잘려 나가야 함에도 잘려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포도나무 비유에서 뿌리가 가지를 보존한다고 합니다.

가지를 지키는 것은 뿌리이지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구원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지켜 주시기 때문에 성도의 구원은 짤리지도 않고 짤릴 수도 없는 불변한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알미니안주의는 비성경적인 겁니다.

 

신앙을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을 삶으로 풀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십자가 도를 염불 외우듯이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도로 사는 것입니다.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음에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피 뿌리심을 얻은 구원의 은혜가 너무도 크기에 그 은혜에 감사하여 참아주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섬기고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피 믿으면 되었잖아가 아니에요.

 

예수의 피 안에는 엄청난 것이 담겨져 있어요.

옛 사람의 죽음도 있지만 새 사람의 삶도 있어요.

죄사함의 은혜도 있지만 예수와 함께 사는 것도 있어요.

 

예수와 함께 라는 것은 한 몸이란 말입니다.

전에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이 이제 어디에 와 계십니까?

우리 안에 와 계시지요.

예수님은 우리 안에 와 계시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몸을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몸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종이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없어요.

주인이 종 마음대로 살도록 내 버려두지 않아요.

 

종이 자기 마음대로 살면 주인이 간섭하세요.

이걸 징계라고 합니다.

성도는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비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어느 한 부분을 가지고 해석하지도 말고 통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단편적으로 보면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여 주객을 전도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모두가 성경을 자기 틀에 맞추어서 편집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하는 자기 교리를 만들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성경을 더하거나 빼 버리는 것입니다.

더하는 것은 자기만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함이고 빼는 것은 자기가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합리화를 시키기 위해서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지 못하니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들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표적이란? 싸인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말해주고자 일으킨 예표적인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I am) ~  이다”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건 모세가 하나님에게 하나님 이름이 뭡니까? 라고 물을 때 “I am who I am” “나는 나다” 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나는 ~ 이다”라는 말은 내가 곧 “그” 라는 말입니다.

“나는 ~  이다” 라는 말은 하나님은 고정된 이름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 속에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는 누구다” 라고 말씀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이 “나는 태양이다”

“나는 꽃이다”

“나는 바람이다” 라고 하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태양을 움직이는 분도 예수님이고 바람을 움직이는 분도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가서를 보세요.

예수님을 만물을 가지고 은유적으로 표현하잖아요.

이는 만물 속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고정된 이름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니 “나는 ~  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도 되고, “너의 하나님”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갑돌이의 하나님이 되기도 하고, 갑순이의 하나님이 되기도 한단 말입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에게 주관으로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부릅니다.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라는 주체는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우리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안에서는 나의 주님은 사라지고 우리의 주님이 됩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I am) ~  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에고 에이미” 라고 합니다.

“에고 에이미”란? “나는 누구다” 라는 말입니다.

 

“나는 빛이다!”

“나는 길이다!”

“나는 진리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산 떡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예수님께서 “나는 ~  이다” 라고 하시는 말씀은 내가 그 본질이란 말입니다.

다른 말로 원형이고 진짜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는 ~ 이다” 라고 하시는 말씀 속에는 기존에 것을 부정하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는 빛이다” 라는 말씀은 나만 빛이고 다른 것은 빛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는 길이다” 라는 말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는 진리다” 라는 말씀은 나만 진리이고 다른 것은 진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나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나만 생명이고 다른 것은 생명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라는 말씀은 나만 목자이고 다른 놈은 목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나는 무엇이다” 라고 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것은 전부 가짜란 말입니다.

인간들이 기존에 알고 있는 것들은 허상이란 말입니다.

그 허상을 통해서 알려주는 실상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나는 무엇이다” 라고 하면 기존에 것들은 사라져야 합니다.

이건 마치 태양 빛이 비취면 가로등 불 빛은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해가 뜨면 달과 별들이 햇빛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을 21장 23절을 보면 천국에는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빛입니다.

 

요즘 “나는 가수다” 라는 말을 많은 부분에 패러디 하는데 기업들이 자기회사 제품을 홍보하는데 사용하고 있어요.

어떻게 하는가 하면 “나만 카레다” 로 해요.

“나만 카레다” 라는 말은 다른 카레는 카레가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에고 에이미” 라고 하시는 것은 내가 진짜라는 것입니다.



나만 빛이다!

나만 생명이다!

나만 진리다!

나만 목자다!

나만 문이다!

나만 포도나무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가짜를 만드셨습니다.



가짜 빛을 주셨고!

가짜 생명을 주셨고!

가짜 진리를 주셨고!

가짜 목자를 주셨고!

가짜 포도나무를 주셨습니다.

 

역사 속에 있는 것들은 다 가짜입니다.

진짜는 묵시에 있습니다.

바울은 삼층천에서 묵시 속에 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역사에 있는 바울은 묵시 속에 있는 바울의 아바타입니다.

 

모든 성도가 이러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일컬어 묵시적 존재라고 합니다.

성경은 성도를 일컬어 창세전에 존재한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을 말할 때 창세전에 이미 구원했다고 합니다.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지명하여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나는 내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묵시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묵시 속에 있는 내가 진짜이고 엄마 뱃속에서 역사로 나온 나는 묵시 속에 있는 나의 분신(페르소나)인 겁니다.

 

예수님도 그러합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창세전에 계신 분입니다.

묵시에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묵시에 계신 분이 역사에 오신 겁니다.

 

역사 속에서 뭔가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일이 끝나면 다시 묵시에 있던 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니 역사에 계신 예수님은 잠시 살다가 철거(죽음)가 될 분이시고 묵시 속에 계신 주님이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죽으러 오셨어요.

반드시 죽어야 해요.

그래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고 변화하는 겁니다.

새로운 세계로의 이동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봅시다.

 

요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내가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합니다.

이는 살기 위해서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이지요.

 

우리는 마귀가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예수는 피조물이 죽일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죽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준 것은 이 세상에 목숨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진짜는 하늘에 있어요.

그래서 진짜를 얻기 위해서 가짜를 버린다고 하는 겁니다.

버릴 목숨은 역사에 속한 목숨이고 얻을 목숨은 묵시에 속한 목숨입니다.

 

예수님은 이 계명으로 오셨어요.

계명이란? 반드시 그렇게 되고야 마는 법칙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더라고 하지요.

사람은 죽어야 머리가 떨어져요.

그러나 예수님은 머리를 숙이자 죽음이 찾아 왔어요.

이건 죽음을 불러들인 겁니다.

 

요한복음 19장입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보세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머리를 숙이지요.

그러자 영혼이 떠나갑니다.

 

이건 심심해서 쓴 것이 아니에요.

이 말씀 하나 속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담겨져 있어요.

예수님은 죄와 사망도 다스리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제 다 이루었으니 죽음을 오라고 하는 겁니다.

야! 이제 끝났다!

죽음아 와라!

와서 나를 좀 쉬게 해 주라!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예수라는 이름이 함유하고 있는 일들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겁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값을 다 청산했으니 다 이루신 것이지요.

 

예수님이 죽음을 불러들이는 것은 예수님이 죽음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피조물의 주님으로서 죽고 사는 것을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권세라고 합니다.

권세란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뭘 다스립니까?

죽음도 다스리고 생명도 다스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죽일 권세도 있고 살릴 권세도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는 “내가 하나님이다”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죽음도 다스리고 생명도 다스리는 것입니다.

 

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이는 예수님이 곧 “나는 ~ ~ 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명이고!

나는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버린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이걸 그대로 적용받아요.

우리가 얻을 목숨은 따로 있어요.

바울은 이걸 보고 살았어요.

삼층천에 있는 목숨을 얻기 위하여 땅에 있는 목숨 버리는 것을 아깝거나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땅에 있는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장막이 온다고 했어요.

그러니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빨리 맞이하여야 할 소망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바울을 찾아와서 선생님 내가 환상을 보았는데 선생님이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잡혀서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올라가지 마세요! 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아니다!

나는 올라가 죽어야 된다고 하면서 올라갑니다.

 

이는 바울은 삼층천에 있는 목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목숨을 얻고자 이 세상의 목숨을 연연치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도 이 목숨을 보았고 사도요한도 밧모섬에서 이 목숨을 보았어요.

그러니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두를 성령이 보게 해 주셨어요.

성령을 받은 성도는 다 이것을 보아요.

지금도 보아요.

믿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사람 아닌 것처럼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하늘나라가 있어요.

하늘나라가 실상이고 이 세상은 허상입니다.

역사는 나중에 다 철거가 됩니다.

우리의 이 몸뚱이도 다 철거가 되어요.

 

우린 가짜 속에 살고 있어요.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진짜인 하늘에 있습니다.

우린 묵시에 있다가 역사로 나와서 다시 묵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묵시라는 집을 떠나와서 역사라는 동네를 여행하다가 묵시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선 성도들을 일컬어 하늘에 있는 본향을 찾아 가는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이걸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고,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주님 품으로 돌아갑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다가 주님 품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묵시 속에 있는 내가 진짜이고, 역사 속에 있는 나는 가짜입니다.

 

이건 다른 말로 나는 가짜이고 예수 안에 있는 내가 진짜란 말입니다.

그래서 묵시에서 오신 예수님이 내가 진짜 라고  “나는(I am) ~  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너의 주인이다” 라는 말과 같아요.

 

예수님의 오심은 주인이 오신 겁니다.

만물이 주께로부터 나왔잖아요.

그러니 주님이 원본이고 만물은 가짜인 겁니다.

 

 “나는(I am) ~  이다” 라는 말은 내가 주인이다 라는 말과 같아요.

 

이걸 주종 관계로 말합니다.

예수님이 주인이고 우리는 종입니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주체이고, 피조물인 우리는 객체입니다.

주체를 주인이라고 하고 객체를 종이라고 합니다.

이게 창조의 원리이고 피조물에겐 순리인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창조의 원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역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가짜를 진짜로 둔갑을 시켜 놓았어요.

허상을 실상으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래서 죄 아래 있는 자들은 허상을 실상으로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짜를 진짜인줄 알고 붙잡고 살고 있습니다.

이걸 창세기 1장 2절에선 혼돈과 공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걸 바로잡아 주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냈어요.

예수님이 바로 잡습니다.

가짜에서 진짜로 바뀝니다.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갑니다.

 

이게 창조에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창조는 무얼 만든다는 의미보다 바로 잡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찾아오면 인생의 가치관이 바뀌고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는 겁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눈에 비늘이 떨어지는 것도 다 이런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 눈에 비늘로 가려 놓았는데 예수님이 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이건 바울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지요.

찾아 와서 내가 하나님이라고 하잖아요.

이건 아브람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은 가짜란 말입니다.

 

아브람은 아담 안에서 태어났어요.

아담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아는 하나님이 있어요.

아담 안에서 아는 하나님은 가짜에요.

그런데 어느 날 진짜 하나님이 찾아 와서 야! 네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이고 내가 진짜라고 합니다.

이게 빛과 어둠이 갈라지는 창조인 겁니다.

 

그럼 아브람은 혼란이 오겠지요.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을 다 부정하여야 하잖아요.

여기서 죄가 터져 나와요.

인간들이 반발한단 말입니다.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고 배척해요.

왜냐하면! 낯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낯선 것을 싫어해요.

그래서 낯선 것을 죽여 버립니다.

이게 십자가에요.

지금도 자기하고 다른 말을 하면 이단이라고 해요.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겪은 것을 그대로 아브라함 후손인 이스라엘도 겪게 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재현이 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십계명을 줍니다.

그러면서 나 이외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내가 참 하나님이다 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과 똑 같아요.

야~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이고 내가 진짜 하나님이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서 하나님을 알았어요.

 

애굽은 역사 세계를 상징해요.

애굽에서 안 하나님은 가짜에요.

죄가 심어준 정보로 알아진 가짜 하나님이에요.

이름하여 다른 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서 출애굽을 시키고 제일 먼저 너희들이 지금까지 알고 섬기던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라고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잘못 알았던 하나님을 바로잡아 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를 하고 계신 겁니다.

 

구약에선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알려 주셨지만 지금은 예수님이 오셔서 알려주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알려줍니다.

모세가 알려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었듯이 예수님이 알려주신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원리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만이 하나님의 일이고 다 가짜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I am) ~  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이란? 역사에서 묵시로 나오는 것입니다.

언약으로 보면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애굽은 역사를 상징하고 광야는 묵시를 상징해요.

애굽은 옛 언약을 상징하고 광야는 새 언약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선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로 나아간 것도 역사에서 묵시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로 나아가잖아요.

거기서 역사에 속한 옛 사람이 죽은 물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마치 홍수 속에 잠겨 죽는 것과 같아요.

홍해 바다에서 죽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광야에 나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것은 역사에 속한 예수님이 묵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기 전을 사생애라고 하고 세례를 받고 난 후를 공생애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런 뜻에서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난 후부터 “나는(I am) ~ ~ 이다” 라는 삶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이 갈라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참과 거짓이 구분이 되어집니다.

한마디로 분리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누가 거짓을 만들어 놓았습니까?죄이지요.

죄가 거짓 하나님을 심어 놓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죄를 없애는 일을 하십니다.

죄가 왜곡된 하나님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야 할 인간들을 하나님처럼 살게 만들어 놓았어요.

자기가 자기 주인으로 살고 있어요.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죄가 주객을 전도 시켜 놓은 겁니다.

종이 주인 행세를 하게 만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주인이라고 합니다.

어그러진 것을 돌려놓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내가 “참 포도나무” 라고 하지요.

 

여기서 “참” 을 중요하게 보셔야 합니다.

“참”의 반대는 “거짓” 입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라고 하면 너희는 가짜란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참과 거짓의 싸움이에요.

나는 거짓이고 예수님만 참이라고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다 가짜이고 예수님이 하신 일만 참이라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항상 나를 긍정하게 하고 성령은 항상 나를 부정하게 하십니다.

마귀는 나를 포도나무라고 하고 성령은 아니야 넌 가짜이고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참 포도나무를 원하지 가짜 포도나무를 원하지 않아요.

 

마귀는 내가 있고 예수도 있다고 말하고 성령은 아니냐 예수가 있고 내가 있어! 라고 합니다.

마귀는 내 존재로부터 출발해서 예수를 보게하고 성령은 예수로부터 출발해서 나를 보게 합니다.

마귀는 주객을 전도시키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하는 일엔 항상 내가 주체로 있는 것입니다.

내가 곧 신이에요.

이게 죄에요.

 

마귀를 일컬어 거짓의 아비라고 하지요.

우린 마귀 아래서 태어났어요.

아비가 거짓이면 자식도 거짓입니다.

그럼 마귀 아래서 난 자들은 모두가 거짓이란 말입니다.

 

인간 자체가 거짓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이 참 인줄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 마귀가 거짓의 눈을 씌워 놓았기 때문입니다.

마귀 아래서 난 죄인들도 당연히 마귀가 알려 준 것이 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자 마귀가 알려 준 것은 가짜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성도들은 새로운 눈이 떠진 겁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온 겁니다.

가짜에서 참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처음 창조된 세상이 혼돈 속에 있습니다.

그 혼돈 속에 빛과 어둠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혼돈 속에 있던 빛과 어둠을 분리해 내십니다.

빛을 낮이라 하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습니다.

 

그리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타락에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저녁은 어두움이라고 하고 아침은 빛이라고 했습니다.

어두움은 죽음이고 빛은 생명입니다.

 

어두움은 타락이고 빛은 회복을 말합니다.

어두움은 가짜이고 빛은 참이란 뜻입니다.

저녁은 가짜이고 아침은 진짜란 말입니다.

 

그러니 창조의 흐름이 가짜에서 진짜로 나아가지요.

가짜가 먼저이고 진짜가 나중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선 항상 먼저 나온 자는 가짜이고 나중에 나온 자들이 진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육이 먼저이고 영이 나중이에요.

묵시가 먼저이고 역사가 나중입니다.

 

아담이 먼저이고 예수님이 나중입니다.

가인이 먼저이고 아벨이 나중입니다.

이스마엘이 먼저이고 이삭이 나중입니다.

에서가 먼저이고 야곱이 나중입니다.

레아가 먼저이고 라헬이 나중입니다.

사울 왕이 먼저이고 다윗 왕이 나중입니다.

육적 이스라엘이 먼저이고 영적 이스라엘이 나중입니다.

 

이걸 우리 개인에게 적용하면 땅에서 난 자가 먼저이고 하늘로서 난 자가 나중이에요.

옛 사람이 먼저이고 새 사람이 나중입니다.

아브람이 먼저이고 아브라함이 나중입니다.

야곱이 먼저이고 이스라엘이 나중입니다.

 

언약도 동일합니다.

옛 언약이 먼저이고 새 언약이 나중입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것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선악과이고 새 언약은 생명과입니다.

 

첫 아담은 산 영이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십니다.

산 영은 죽은 것을 말하고 살려주는 영은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죽은 세상에 산 자로 오신 겁니다.

 

예수님을 인자라고 하지요.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인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만 사람이란 말입니다.

예수님만 하나님 형상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곧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의 원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같은 사람을 창조하셨어요.

그런데 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마귀의 형상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아담이 낳은 자식은 모두가 짝퉁 인간들인 겁니다.

가짜란 말입니다.

진짜 사람은 예수님뿐이에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진짜 사람은 이렇다”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만 사람이고 나머진 모두가 가짜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나만 카레다” 라는 식으로 “나는(I am) ~ 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진짜가 가짜들에게 오신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냥 포도나무가 아니고 “참” 포도나무에요.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은 결국 이스라엘은 가짜 포도나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짜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내가 “참 포도나무”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말씀하시고 계실까요?

이는 포도나무의 특징을 가지고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알다시피 포도나무는 관상수가 아니고 유실수에요.

 

포도나무는 눈으로 보기 좋으라고 심는 나무가 아닙니다.

또한 가구를 만들 목재로 사용하려고 심은 나무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땔감으로 사용하고자 심은 나무도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오직 열매를 얻기 위하여 재배하는 나무입니다.

 

유실수는 눈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고 먹고 배부름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과입니다.

예수는 눈으로 감상하는 분이 아니고 먹고 배부름을 얻어야 할 분입니다.

도를 깨우치는 것은 예수를 감상하는 것이고 사는 것은 예수를 먹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절간에서처럼 도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 도를 염불처럼 외우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이 열매에요.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농부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포도나무를 재배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도나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열매를 삶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 삼은 것은 그들을 통하여서 얻어낼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삶이 있어요.

그건 바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 마음으로 살지 못했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이 바라는 열매를 얻지 못해서 찍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스라엘로부터 하나님이 바라는 열매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참 포도나무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럼 포도나무에 의미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에스겔 15장입니다.

 

겔 15:2-5=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3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4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5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묻습니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건 열매를 맺기 때문이 아니냐! 라고 합니다.

 

나무의 가치성은 무슨 용도로 사용 할 것이냐 로 판단을 합니다.

눈으로 보기 위한 것이라면 관상수가 좋은 나무입니다.

하지만 열매를 얻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유실수가 좋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유실수란 말입니다.

열매를 삶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바라는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언약 백성으로서 삶이 없다고 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종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할 땐 다른 나무보다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모든 민족을 나무로 묘사합니다.

그리곤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다른 민족들을 삼림 중 여러 나무라고 하여 열매의 가치를 빼면 포도나무 보단 쓸 만한 나무들이란 말입니다.

 

나무의 가치성으로 따진다면 포도나무는 무가치한 나무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땔감으로도 사용할 가치가 없어요.

 

저는 어렸을 때 땔감으로 산에 나무를 하러 많이 다녔습니다.

땔감으로 사용할 나무는 속이 단단한 것들로 합니다.

그래야 오래 타거든요.

속이 단단하지 않으면 낙엽처럼 금방 타 버려요.

 

넝쿨 식물을 땔감으로 해 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칡넝쿨 같아요.

그래서 포도나무는 화목으로도 사용하지 않아요.

열매를 맺지 않으면 잘라서 덤불처럼 모아서 그냥 밭에서 불을 지르고 맙니다.

 

그런데 더욱 참담 한 것은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인데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아니 열매도 못 맺는데 거기다가 불에 타다가 말았어요.

온전해도 쓸까 말까하는 하는데 불에 타다가 만 것을 누가 쓰겠습니까?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를 탐내는 사람은 없어요.

그걸 어디가 쓰겠어요.

타다가 만 포도나무는 쓰레기에요.

 

인간으로 따지면 다른 민족들은 건장하고 힘이 있는데 이스라엘은 중풍병자 같아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포도나무처럼 불이 나면 속절없이 타 버리고 말 그런 나무란 말입니다.

포도나무는 넝쿨이기 때문에 불이 붙으면 종이처럼 그냥 확 살라지고 말 그런 나무입니다.

숯불도 남기지 못하고 재로 변해요.

 

지금 에스겔이 그럽니다.

이스라엘은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이는 다른 민족보다 못하단 말입니다.

그냥 이름 없이 사라질 민족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볼품없는 민족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어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민족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단 말입니다.

세상에~

 

신명기 7장을 봅니다.

 

신 7:7-8=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보세요.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보다 가장 작은 민족이라고 합니다.

약육강식이라는 힘의 원리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작다는 것은 무가치 하다는 말입니다.

이는 열등하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선 작은 자를 종이라고 합니다.

가장 작다는 것은 남의 나라에 종노릇이나 하는 민족이란 말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백성이 애굽에 종노릇했어요.

로마 식민지 생활을 했어요.

이게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와 같은 겁니다.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는 저주 받은 자의 상징입니다.

죄인의 상징입니다.

우리의 모습이에요.

 

고린도전서 1장을 봅시다.

 

고전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것들을 택했다고 합니다.

약한 것들을 택했다고 합니다.

멸시 받는 것들을 택했다고 합니다.

우리들 모습이 하나님 앞에 이렇다는 말입니다.

자랑 할 것이 아무도 없는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와 같은 자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가장 작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했어요.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자들을 선택했단 말입니다.

마치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와 같은 자들을 선택을 했어요.

 

스가랴에 3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이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곧 우리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불에 그슬린 나무들입니다.

불에 타다가 만 포도나무에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자란 말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세리와 창기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모습이 세리와 창기에요.

그러니 꼴값 떨지 말란 말입니다.

자기 주제도 모른 채 복음 안다고 꼴값을 떨어요.

그러니 얼마나 목불인견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내가 보여요.

내 꼬라지가 보입니다.

내가 바로 가장 악한 자이고 인간쓰레기라는 것이 보여져요.

그래서 은혜 받은 성도는 입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추하고 더러운 인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정죄하지 못하는 겁니다.

내 눈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 남의 눈에 티를 보고 나무란단 말입니까?

그럴 순 없어요.

우린 타다가 만 포도나무들입니다.

 

하나님은 왜? 가장 못난 자들을 선택했을까요?

이는 그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 놓고자 함입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더 선하고 더 훌륭한 자들이 아님에도 선택이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성도이고 교회입니다.

그럼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가는 바탕엔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걸 한 몸으로 서로 사랑하고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게 이스라엘에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이 열매를 얻고자 하나님이 애굽에서 한 포도나무를 가져다가 가나안에 심었습니다.

 

시 80: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가나안에 심어 놓았습니다.

가나안 땅이란 애굽을 반대하는 땅을 말합니다.

속성이 다른 땅입니다.

 

애굽은 인간의 힘으로 사는 땅이라고 한다면 가나안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땅입니다.

애굽에서는 내 힘이 통용이 되었지만 가나안에선 인간의 힘은 일절 통용되지 않아요.

쓸모가 없어요.

왜냐하면! 가나안은 인간의 노력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농사를 지어주는 땅입니다.

그러니 가나안에서는 하나님이 살게 해 주시겠지 라는 믿음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마치 부자 부모님 아래 사는 어린 아이가 먹고 사는 걱정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에요.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가나안에 심겨진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심겨진 나무입니다.

긍휼과 용서하심으로 심겨진 나무에요.

이걸 극상품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사 5:1-2=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극상품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생산하는 품종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이라는 밭에 가나안 7족속이라는 거친 돌들을 쫓아내고 이스라엘이라는 씨를 파종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 속에서 애굽 나라에선 볼 수가 없는 은혜와 긍휼이라는 열매가 맺히기를 바라셨습니다.

 

힘에 논리가 아닌 은혜와 사랑의 법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서로 참아주고 돌아보며,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인애와 공평이 강물처럼 흐르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강포와 악독이라는 들 포도를 맺고 말았습니다.

 

들 포도란? 애굽 백성들의 삶을 말합니다.

애굽에 삶은 한마디로 탐욕의 삶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들 포도를 맺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토해내지 않고 마귀적인 탐욕을 토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배만 불리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 봅시다.

 

사 5:7-8=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8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바라셨던 것이 있습니다.

공평과 정의였습니다.

그런데 맺은 것은 포학과 탐욕이었습니다.

남에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는 악당 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꼭 이 시대 우리들 같고 교회들 같아요.

 

가나안 땅은 공평한 땅입니다.

모두가 동일한 분량으로 분배를 받고 나누어 가진 땅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공짜로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땅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토지를 사고 파는 것을 금지했어요.

설령 사고 팔았다 할지라도 희년이 되면 다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희년 제도를 준 것은 욕심 부리지 말고 서로 돌아보고 사랑하면서 하나 되어 살라는 겁니다.

물론 희년의 의미는 예수님이 종에서 해방시켜주는 의미가 있지만 표피적으로 나타나는 의미는 모아도 자기 것이 되지 않고 결국엔 돌려주어야 하니 탐욕을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을 때의 정신으로 산다면 탐욕을 부릴 이유가 없습니다.

서로 공평하게 살면 됩니다.

어차피 공짜로 사는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애굽과 다른 모습으로서의 삶을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담고 있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포하고 악독이 가득한 애굽 땅에서 빼내서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심은 겁니다.

 

가나안에선 이스라엘이 자기들 노력으로 농사를 짓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알아서 비를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해 주셨습니다.

애굽에선 자기 노력으로 농사를 지었지만 가나안에선 파종을 하면 하나님이 때를 따라서 비를 주셔서 싹을 내고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가나안에선 탐욕을 부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로 사는 땅에서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욕심으로 땅을 차지하는 애굽에서 살던 일들이 발생하고 만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이 이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도 애굽에 열매를 맺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은혜로 심었는데 맺힌 것은 압제와 강포라는 애굽에 들 포도인 겁니다.

 

예레미야의 책망을 봅시다.

 

렘 2: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방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셔서 약속의 땅에 심으신 것은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열매가 무엇으로 나온 것입니까?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삶이 나온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가옥에 가옥을 더하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면서 욕심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입니다.

언약으로 생겨났다 함은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자기 생존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비 언약의 땅인 애굽에서 빼내서 약속의 땅에 심어 놓은 겁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을 믿고 사는 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선 인간의 노력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한 겁니다.

너희 힘으로 목숨을 지키려고 살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목숨을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가나안에선 애굽에서처럼 자기가 생명을 지키는 방식으로 살지 말라고 합니다.

그게 탐심을 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도 애굽에 방식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 모으고 또 모으고 한 겁니다.

이게 바로 들 포도 입니다.

그래서 찍어 버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왜? 이스라엘은 들 포도를 맺느냐 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들 포도를 맺었어요.

왜? 그럴까요?

 

이걸 예수님의 말씀으로 답을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7장입니다.

 

마 7:16-20=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예수님은 아주 간단한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합니다.

포도 열매를 맺으면 포도나무이고 무화과 열매를 맺으면 무화과나무입니다.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없고 무화과가 포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이게 창조의 원리이고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생명의 순리입니다.

 

이 원리와 순리로 본다면 이스라엘이 들 포도를 맺은 것은 그들이 들 포도나무이기 때문입니다.

들 포도를 애굽에 삶이라고 했습니다.

삶이 열매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애굽에 삶을 살았다는 것은 애굽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애굽 사람들의 삶을 산 것입니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죄인은 아무리 갈고 닦아도 죄인을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죄인에게 아무리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고 훈련을 시키고 각오를 다지고 다짐을 하여도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죄인에게선 의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13장을 봅시다.

 

렘 13:23 "구스 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 진데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하나님이 묻습니다.

흑인이 그 피부색을 바꿀 수 있겠느냐?

표범의 얼룩반점을 바꿀 수가 있겠느냐?

이것이 가능하다면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 인 짓고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가능한 말입니까?

아니지요.

불가능하지요.

흑인이 검은 피부는 그 어떤 것으로도 희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이 죄 안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 죄인에게서 선한 열매가 나온다는 것입니까?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절대로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를 안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너희는 태생적으로 선을 행할 수 없는 악한 종자라는 것입니다.

악한 종자이면 마땅히 죽어야지요.

저주 받아야지요.

그런데 저주 받지 않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애굽 사람은 다 같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난 자들을 가나안에 심었습니다.

애굽에서 난 자를 가나안에 심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애굽 사람입니다.

그러니 애굽에 삶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와 자비를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순종이 될 것 같으면 용서가 필요 없어요.

순종이 안 되기 때문에 용서와 자비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심은 것은 다른 의미가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극상품 포도나무가 아니라 들 포도나무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이 따라 다닌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중요한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은혜와 상충하는 율법이라는 법을 주었습니다.

은혜는 살리는 것이고 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모순처럼 보어지요.

이 모순이 복음이에요.

복음은 모순으로 주어져요.

그러나 모순이 아니고 하나에요.

이 비밀을 아셔야 합니다.

 

법이란? 옳고 그름을 따져서 죽이는 것입니다.

잘못된 사람을 죽이고자 법이 동원이 되는 것입니다.

법은 죄인이게 주어진 것입니다.

의인에겐 법이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법은 옳은 자를 위하여 있지 않고 그른 자를 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너희는 죄인이란 말입니다.

너희는 틀린 자란 말입니다.

틀린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잘못한 자이기 때문에 은혜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은혜로 선택했다는 말은 잘못을 책잡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왜? 은혜로 선택을 입은 자들에게 법을 주셨을까요?

이는 법으로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법은 죄를 까발리고, 은혜는 죄를 덮습니다.

모순처럼 보이지요.

법과 은혜는 본질이 다릅니다.

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법과 은혜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마치 빛과 어둠처럼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법이 동원된 것입니다.

법을 통하여서 은혜를 알게 되고 은혜를 통해서 법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된 민족에게 법을 준 것은 은혜를 드러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법을 가지고 너희가 어떤 은혜를 입고 사는지 알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너희들은 법 대로 하면 다 죽어야 할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살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법이 은혜를 드러내 주고 있으니 법도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바울은 알고 율법도 거룩하며 신령한 것이라고 한 겁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과 복음은 모순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 아래 있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오직 이스라엘만 이방인들에겐 없는 율법을 주셨어요.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기 얼굴을 볼 수 있는 거울을 받았으니 얼마나 큰 영광이에요.

 

율법을 주어서 그들이 애굽 사람과 하나도 다르지 않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럼에도 애굽인들처럼 저주 받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아브라함 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아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법이 추상같을수록 은혜는 더욱 더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걸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법을 통하여서 은혜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 은혜가 삶으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바란 좋은 포도열매란? 자신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으로 살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 앎이 서로가 서로에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산다는 것을 고백하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 사랑이 나타나지 않고 자기 탐욕으로 이웃을 압제하고 해치는 포악을 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는 간 곳이 없고 율법을 지켰다는 법만 난무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율법의 판단만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킨 자와 지키지 못한 자 간에 차별과 우열과 서열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들 포도인 겁니다.

 

결국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도 인간은 변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이걸 하나님이 남편이 되어 그들의 손을 잡고 애굽에서 나와 곁에서 도와주었지만 끝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인간의 실상을 폭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보아라!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어도 그 은혜를 감당하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죄인에게 은혜를 주어도 죄인은 악을 토해낼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죄인은 정답을 알려 주어도 그 정답대로 살 수 없는 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시험한 겁니다.

이걸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온 인류를 테스트 한 겁니다.

인간이 이런 자라는 것을 고발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실패 하였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럼 인간에겐 하나님이 바라신 참 포도가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전 살 수가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스라엘은 이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참 포도나무로 오신 것입니다.

너희가 포도나무가 아니라 내가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내가 바로 극상품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포도나무를 의인화 하면 너희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만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농부라고 합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농부가 되셔서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을 가지고 농사를 짓겠다고 합니다.

 

어떤 농사를 짓는가 하면 들 포도나무를 참 포도나무에 접 붙이는 일을 하십니다.

아담 안에서 난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예수 안에서 난 새 사람으로 창조하십니다.

이걸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돌 감람나무를 참 감람나무에게 접을 붙이는 것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니 인자에 거하고 엄위에 거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자는 은혜이고 엄위는 법이에요.

이는 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란 말입니다.

한마디로 까불지 말고 겸손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 안다고 하면서 잘난 척 까불고 있어요.

복음 아는 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법으로 행사하고 있어요.

복음 안다고 까부는 것은 복음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복음으로 섬기고 사랑하고 봉사하지 못하고 아는 척 나댄단 말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는 잘라낸다고 했어요.

아니지요.

애당초 접붙임 당하지 않는 자입니다.

뿌리에서 진액을 공급 받지 못하니 예수의 마음이 나오지 않고 마귀의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런 가지들을 모아서 불에 태운다고 했어요.

 

가지를 포도나무에 접을 붙이신 분은 농부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접을 붙여 놓은 가지는 반드시 뿌리로부터 진액을 공급받게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인자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가 계신 성도는 잘난 척 나대지 않아요.

남을 정죄하거나 판단하고 심판하지 않아요.

 

가지를 지탱하는 것은 나무입니다.

나무가 가지를 보호합니다.

나무가 가지에게 열매를 맺게 합니다.

가지에게 맺혀지는 것마다 나무의 것입니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고 떨어져 있으면 아무리 맺고 싶어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붙어 있으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맺히고 떨어져 있으면 애써도 안 되어요.

 

믿음을 받은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 쉬어요.

반대로 믿음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 안에 성령이 임한 성도는 봉사하고 헌신하고 연보하고 교회 다니는 것이 쉬워요.

전혀 어렵지가 않아요.

 

봉사 하면서 감사하고, 연보하면서 감사하고, 충성하면서 감사해요.

자랑도 하지 않아요.

그냥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해요.

그러니 하라 말라 할 필요가 없어요.

스스로 알아서 다 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성도는 스스로 해요.

하지만 성령이 없는 사람은 중풍병자처럼 머리로는 청산유수인데 손발이 움직이지 않아요.

 

이렇게 되면 열매로 그 가지의 본질을 알 수가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지 아니면 떨어져 있는지 그 삶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붙어 있으면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의 속성이 나올 것이고 떨어져 있으면 마귀의 속성이 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 은혜와 긍휼이 나올 것이고 떨어져 있으면 법과 심판이 나올 것입니다.

결국 열매가 곧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붙어 있는지를 알려 줍니다.

 

삶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 줍니다.

이건 윤리 도덕적으로 온전하게 살아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정신으로 어떤 자세로 사느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에 속하였는지 은혜에 속하였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이 은혜를 모르고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행하면 그 행함이 자기 의가 되어서 사람들을 죽여요.

자기 의로 남을 판단하고 심판해요.

자기 힘으로 하니 그것이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기준이에요.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어요.

항상 으뜸이 되고자 해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 헐뜯고 비방하고 욕을 합니다.

그 사람을 밟고 올라서야 자기가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건 교만입니다.

 

원리적으로 본다면 매사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비방하는 자들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자가 아니에요.

그러니 예수의 마음이 나오지 않고 마귀의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생명이 나오지 않고 죽음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이걸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복음 복음하면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은혜에 거하는 자가 아니라 법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이걸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사람은 남이 잘하면 감사하고 기뻐해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고마워한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힘으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내 쪽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했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가로 판단합니다.

많이 탕감 받은 것을 알면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성도란? 자기에게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선이 나왔다고 하여도 그 선은 자기 것이 아니고 포도나무인 예수그리스도 것입니다.

성도가 내어놓아야 할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사는 것이 참 포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거듭난 사람이라고 하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자기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힘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여도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가지는 뿌리에서 공급되는 진액으로 사는 자이지 가지가 진액을 만들어 사는 자가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힘으로 살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의 은혜를 자랑하게 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사람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그 안에서 예수님의 것을 토하여 내게 하십니다.

이걸 믿음과 행함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은 우리더러 맺으라고 하였다면 새 언약은 예수님이 맺으십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이 열매를 맺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런데도 옛 언약에 속한 구약 이스라엘은 들 포도를 맺었습니다.

가짜 포도나무에게 아무리 좋은 것으로 주어도 들 포도를 맺더라는 것을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시험하신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한 것은 인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어도 인간은 죄를 이기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구약 이스라엘은 예수가 왜? 와야만 하는지 길을 닦아 준 것입니다.

왜? 참 포도나무가 오셔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가 오시지 않으면 모든 인간은 저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희망은 오직 하나 참 포도나무가 오는 것입니다.

이제 정한 때가 되어서 농부 되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보냈습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농부가 되셔서 예수님에게 접을 붙여서 나무를 바꿔주는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들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서 참 포도나무에 접을 붙이십니다.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끝 날까지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바라는 열매를 맺고야 맙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맺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접붙임을 당하면 한 몸이 됩니다.

한 몸이란? 같은 운명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기차 레일과 같습니다.

그 길을 따라간 사람들이 사도이고 초대교회 성도들입니다.

 

우리도 그 레일에 올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우린 그 길로 인도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이 레일을 따라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쓰나미처럼 우리의 삶 속으로 덮쳐오는 것입니다.

이걸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겁니다.

이젠 인간들에게 맡기지 않고 주님이 직접 끌고 가시겠다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이젠 실패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직접 끌고 가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실패 할 수가 없습니다.

 

목자가 양을 치는데 지팡이와 막대기로 합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안위와 징계를 말합니다.

목자가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는 손잡이가 갈고리처럼 동그랗게 구부러져 있습니다.

이 구부러진 부분으로는 안위로 일으켜 세우고 길게 뻗은 것으론 징계로 두들겨 팹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되셔서 때로는 평안도 주시고 때로는 환란도 주십니다.

어그러진 길을 갈 때는 지팡이로 때리고 넘어 졌을 때는 막대기로 일으켜 세웁니다.

모두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포도나무에 접을 붙이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도록 하실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채워주시고 필요치 않는 것들은 제하실 것입니다.

이게 지팡이와 막대기입니다.

 

살아가는데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주께서 일으킨 것입니다.

막대기로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습니까?

주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지팡이로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프게도 하시고 싸매기도 하십니다.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가난케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십니다.

 

때론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라도 인도하시고 때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하십니다.

이 모두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 때문에 농부 되신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이 가신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됩니다.

넘어져도 선이고 일어서도 선입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가 됩니다.

모두가 필요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시고 농부가 되셔서 열심히 지팡이와 막대기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아프면 아프다 하시고!

좋으면 좋다고 하십시오.

모두가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겐 범사에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어려우면 기도하고 기쁘면 찬송하십시오.

기도 속에서 주님 뜻을 깨달으시고 찬송 속에서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부대낌 속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알아 가는 시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린 본질상 들 포도를 맺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접을 붙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보존하고 지키고 붙잡고 계신 분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시기에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안심하고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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