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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 63강. 영문 밖에서 기다리는 예수님 (히 13:8-15)

by coroa 2021. 8. 20.

 

 

63강. 영문 밖에서 기다리는 예수님 (히 13:8-15)

-.정낙원 목사

 

 

 

세상 교육은 인간의 인성을 개발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인성(人性)개발이란? 인간의 본연의 품성을 되찾자는 겁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인간은 본디 착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학자들은 인간을 두 가지 극단으로 분류합니다.

인간의 품성을 학문적으로는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로 구분을 합니다.

성선설은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것이고, 성악설은 악하게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학설(學說) 중에 어느 것이 인간들이 좋아 할까요?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여기에 동의하기 싫어해요.

 

그러니 성악설은 성경이 증거하지만, 인간은 성선설은 주장합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은 인간을 무가치하게 보는데, 인간들은 인간을 귀하게 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부정하지만, 인간은 인간을 긍정해요.

그래야 인간의 존재에 가능성과 발전에 의미를 둘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에선 성선설을 주장해요.

인간이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래도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선한 양심이 있다는 겁니다.

 

그 선한 양심을 잘 개발하고 훈련하면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마치 거울이 깨어져서 얼굴이 일그러지게 보이지만 그 일그러진 형상을 복원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선 인간의 성품을 개발하는데 주안점을 두는 겁니다.

천주교 교리처럼 성선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인간은 원래 선한 자로 태어나는데 환경에 의하여 악해진다고 해요.

그래서 좋은 환경을 만들자고 합니다.

 

사람들은 교육으로 얼마든지 착해 질 수 있다고 믿어요.

인간도 교화하면 얼마든지 착한 사람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능성을 열어 두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선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교육을 통하여서 선한 인간을 만들자고 하는 겁니다.

 

초등학교에 가면 급훈이 있지요.

 

“착한 사람이 되자”

“바른 사람이 되자”

“정직한 사람이 되자”

“바르게 살자”

 

대 부분의 교훈들이 이런 내용을 담고 있잖아요.

초등학교에 이런 내용을 교훈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는 보통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악하게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원래 착한 사람이었는데 세상이 악하게 만들었다고 하잖아요.

 

그럼 세상 풍상(風霜)을 겪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 “바른 사람이 되라” “착한 사람이 되라” 고 하는 것은 모순처럼 들리지 않나요.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이념으로 교육을 한다는 것은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착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갓난아이의 발달성향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생후 6개월이 되면 거짓말을 하기 시작 한다고 합니다.

인간 속에 잠재 되어 있던 것들이 이때부터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본질적으로 거짓은 안고 태어난다는 거예요.

그게 생후 6개월 정도가 되면 타인이 감지 할 수 있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있어 거짓말이란? 생존 본능에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살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울기 싫어도 엄마에게 젖을 얻어먹어야 하기 때문에 운다는 겁니다.

이는 곧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선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죽음 아래서 태어나요.

그래서 본능적으로 살고자 합니다.

살기 위해선 남에 것을 빼앗아야 해요.

그게 거짓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죄인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어요.

 

거짓말이란? 남을 속인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아니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선 부득불 남에게 손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일종의 자기 보호 본능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 인간의 실상을 말해 주셨어요.

 

살인하지 말라고 하고!

남에 아내나 종이나 재물을 탐내지 말라고 하고!

이웃에게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고 하고!

남의 것을 도적질해서 빼앗지 말라고 합니다.

 

십계명은 인간의 본성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런 것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너희 인간이 이런 자라는 말입니다.

십계명은 인간의 실존을 말해주려고 주신 거에요.

죄인은 이런 짓을 할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봅시다.

 

창 8:20-22=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홍수로 온 세상을 멸하시고 노아의 식구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해서라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것은 악하게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악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악한 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것은 인간 자체가 악하게 태어나는데 그 인간들에게 뭘 바라겠느냐 에요.

내가 너희를 갈궈서 뭘 하겠느냐 입니다.

악한 놈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너희는 상대할 가치가 없는 쓰레기란 말입니다.

 

이건 인간을 아주 무시하는 말이에요.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을 심판하지 않고 두고 보는 것은 정결한 제물의 피 흘림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너희들이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정결한 제물의 희생 때문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잘나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 때문에 죽은 의로운 제물 때문이라는 것을 알라고 하십니다.

 

신약 적으로 해석하면 의로운 제물을 의인화(擬人化) 하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만이 죄 없는 의로운 분이세요.

그런 죄 없는 분이 죽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흠향하시고 땅을 저주하지 않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니 온 세상은 예수님의 피의 효능 때문에 유지되고 있어요.

 

그렇다면 인간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바탕엔 예수님의 피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이 세상이 유지되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이걸 알면 신자이고 모르면 불신자에요.

 

신자가 누구냐?

예수님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아는 자에요.

불신자는 누구냐?

예수님 덕으로 산다는 것을 모르는 자에요.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너희들이 어떻게 살았느냐를 묻지 않고 내 아들 예수의 죽음을 아느냐 라고 묻고 계세요.

예수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아는 자는 성령을 받은 자이고 모르는 자는 성령을 받지 못한 자에요.

 

마귀는 인간이 죄인인줄 모르게 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잊게 만들었어요.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치 않는 겁니다.

인간이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르게 만든 겁니다.

 

죄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으로 나타나요.

잘 사느냐 못사느냐 상관없이 산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피 공로에요.

하나님은 악인(惡人)이나 선인(善人)이나 햇빛과 비를 골고루 주세요.

그럼 악인이나 선인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걸 감추어버렸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만들었어요.

 

다시 말합니다.

성경은 인간은 나면서부터 악하다고 해요.

원래 악한 자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후천적(後天的)으로 악해지는 것이 아니고, 선천적(先天的)으로 죄인으로 출생을 하기 때문에 악한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출생 자체가 악하게 태어나기 때문에 착하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교육이 부족해서 악해지는 것이 아니고 악하기 때문에 교육으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의지와 각오가 약해서가 아니라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마귀에게 속아서 이 사실을 몰라요.

마귀가 인간의 마음을 가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을 감추어 버렸어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교육으로서라도 착한 인간을 만들어 보라고 미혹하는 겁니다.

여기에 미혹당한 인간들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고 착한 사람이 되라고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세상에선 착하게 산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추앙을 하여서 사람들에게 닮으라고 본(本)을 삼습니다.

성인(聖人)이란? 인간이 아니고 신(神)이란 말입니다.

 

세상 종교는 이런 바탕에서 출발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지향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인간의 변화와 선행(善行)을 가르침의 근본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善)은 선(善)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선(善)은 따로 있어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선(善)입니다.

선(善)을 다른 말로 의(義)라고 합니다.

 

성경의 증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의(義)는 인간의 행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함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것만 받으세요.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죄가 없는 세상 바깥에서 오신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의(義)가 없어서입니다.

의(義)란? 하나님 앞에 옳음이에요.

하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니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심판당하지 않고 살자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義)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 의(義)를 인간이 만들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의(義)를 만들고자 했어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수치를 가리고자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일이었어요.

 

수치를 가린다는 말은 곧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 질 수 있도록 의를 만드는 일이에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기 전만 하여도 벌거벗음이 수치란 것을 몰랐어요.

마치 갓난아이가 발가벗고 다녀도 수치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갓난아이의 특징은 수치를 몰라요.

마치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 아담과 하와 같아요.

 

벌거벗음이 수치로 여겨질 때는 자아(自我)에 대하여 눈이 떠질 때에요.

자아(自我)란? 스스로를 알았다는 말입니다.

갓난아이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사람이에요.

그런데 자아에 대하여 눈이 떠지면서 남자와 여자로 구분을 해 버립니다.

자아에 대하여 눈을 뜨면서 남자와 여자는 성적(性的)으로 종류가 다름을 알게 된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어요.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했어요.

선악과를 먹기 전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았고 또한 하나님과 인간도 구분하지 않았어요.

서로 교제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어요.

 

이건 마치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하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는 그런 상태를 말해요.

이를 평화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이 이런 곳이에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고 남자와 여자가 다름을 알았고 또한 인간과 하나님이 다름을 알았어요.

함께 할 수가 없어졌어요.

뭔가 서먹 서먹하고 거북스러운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너는 자아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내가 만든 그대로 살면 된다는 뜻이에요.

너에 대해서 눈을 가지면 나와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뱀에 꾐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고 맙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 자아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자아가 보이기 시작하니 아담과 하와가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겁니다.

남자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어! 너와 나는 다르네!

난 수컷이고!

넌 암컷이네!

서로 다른 종류로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엔 그냥 동일한 사람이었는데!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 남자와 여자로 서로 다르게 보인 겁니다.

그리고 벌거벗음이 수치로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서로 다른 종류라고 생각이 되어지면 발가벗음이 수치로 다가와요.

그럼 가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달리 보이기 시작하였다는 겁니다.

인간이야 어차피 한 몸에서 나왔고 또한 본질적으로 흙이니 남자나 여자나 하나 될 수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은 창조주와 피조물이에요.

부모와 자식과 같아요.

 

부모와 자식 간에 수치가 없어요.

그런데 이런 수치 모름이 자식이 철이 들면서 생기게 됩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부모와 자신이 타자로 여겨지게 된다는 겁니다.

부모가 타자로 느껴지면 그 때부터 눈치를 보게 되어요.

자신의 행함을 근거로 눈치를 보아요.

백점 맞으면 당당해지고 빵점 맞으면 기가 죽어요.

 

지금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모습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수치스럽다고 숨어 버린 겁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부터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야! 이거 내 꼬라지가 이래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겠나!

그러니 치마를 만들어 입고 하나님 면전에서 숨어 버린 것입니다.

 

본인이 벌거벗음이 수치로 보이기 시작하면 도리 없이 가려야 합니다.

발가벗음이 수치로 여겨지고 하나님 앞에 두렵다는 생각이 들면 숨어야 합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하나님을 보는 다른 눈이 생긴 겁니다.

발가벗은 자를 혼내는 하나님으로 보이기 시작 한 겁니다.

하나님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자신이 달라진 겁니다.

 

이건 마치 탕자 비유에서 탕자와 같아요.

아버지는 아들이 재산을 말아 먹어도 아들로 대우하세요.

아버지에겐 타락해도 아들이고 타락 안 해도 아들이에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재산으로 붙었다 갈라지는 관계가 아니에요.

그래서 아버지는 탕자를 여전히 아들로 대우하시는 겁니다.

아버지는 넌 분명히 내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탕자에게 가락지를 끼워주었어요.

 

그런데 탕자는 재산을 말아 먹은 것을 수치로 여겨서 스스로를 종으로 여깁니다.

난 아들이 아니고 종입니다 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아니라고 해도 본인이 그럴 수 없대요.

이게 죄에요.

자기 꼬라지로 아들이 되었다 종이 되었다 하는게 죄의 산물이에요.

 

죄가 양심을 장악하고 있으니 자기 양심이 도무지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양심이 재산을 말아 먹었다는 것이 죄라고 규정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종으로 처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진 아들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래요.

 

이제 집에서 살면서 깨달아 가겠지요.

아! 우리 아버지는 한 번도 나를 종으로 대하지 않았구나!

내가 탕자라 하여도 아들로 대우하셨구나!내 스스로가 종으로 처신 했구나!

내가 그동안 내 꼬라지로 인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모욕하고 살았구나!

이 깨달음이 들 때 비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본연에 관계로 회복이 되어집니다.

 

탕자가 재산을 말아 먹은 것은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과 같아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였듯이, 탕자도 재산을 말아 먹고 보니 수치란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 앞에 당당히 나서지 못하고 숨어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네 이놈!

그러지 않았어요.

그냥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두렵게 느껴져서 숨어 버린 겁니다.

자신들의 벌거벗은 꼬라지로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설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이게 바로 죄가 몰고 온 공포에요.

 

그래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겁니다.

수치로 여겨지는 것을 안 가리면 본인이 불안해서 못 살아요.

그러므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요.

 

이걸 이 시대 신앙으로 비유하면 이래요.

 

쉬운 예로 든다면 한국교회에선 흔히들 술과 담배를 안 먹는 것을 신앙으로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교회 오라고 하면 술이나 담배를 끊고 오겠다고 합니다.

교인들도 술이나 담배를 피우면 하나님 앞에 죄 지었다고 생각하곤 교회에 안 와요.

윤리 도덕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면 부끄러워서 교회에 안 오잖아요.

이는 본인이 비윤리적인 삶과 술을 먹고 담배 피우는 것을 죄라고 규정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술을 먹고 안 먹고를 가지고 죄다 아니다 따지지 않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죄라고 여겨요.

죄라고 여겨지면 이런 일을 하면 하나님 앞에 떳떳해 질 수가 없어요.

그러니 교회에 안 오고 숨어 버리는 겁니다.

나중에 술 담배를 끊고 떳떳해지면 나오겠다는 겁니다.

스스로가 술 담배를 피우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하나님을 아주 편협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허허하면서 이런 고얀 것들이라고 헛기침을 하고 있어요.

 

이런 사고방식은 아담과 하와가 치마 만들어 입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치마를 입었든 안 입었든 상관치 않아요.

치마를 입으면 의롭고 안 입으면 악하다고 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치마를 입고 안 입고를 가지고 죄다 아니다 라고 하는 그 사고를 죄라고 해요.

치마를 입고 안 입고를 죄다 아니다 라고 하는 그 사고가 바로 선악과가 준 사고에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이유는 단 하나에요.

그걸 먹으면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갖게 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벌거벗음을 수치로 보지 않는데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음을 수치로 보고 있잖아요.

눈이 달라졌어요.

눈이 달라지니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는데 아담과 하와는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죄에요.

 

본인이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어요.

아무리 하나님이 야! 벌거벗은 그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하여도 못 나와요.

아닙니다!

가리고 나가겠습니다! 라고 해요.

 

예를 들어서 제가 만약 어떤 분에게 술 먹어도 교회 오세요!

그러면 아닙니다!

술 끊고 오겠습니다!

아니 괜찮다니까요!

아니요!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술 끊으면 오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그래요.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든 안 살든 그걸로 죄다 아니다 하지 않아요.

그런데 성화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죄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할 도리 밖에 없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본인 마음이 안 편해요.

본인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라도 성화 하여야 해요.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불안해서 못 견뎌요.

그래서 그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제가 예전에 법 아래 있을 땐 차만 타면 기도했어요.

기도하지 않으면 불안해요.

어쩌다 정신없이 차를 운전하다가 출발 할 때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 길가에 세워서 기도하고 갔어요.

그렇지 않으면 가는 내내 찜찜해요.

야! 이거 사고 나지 않을까 염려가 쌓여요.

당시엔 그게 신앙이었어요.

 

하나님은 내가 기도 한들 안한들 늘 함께 하는데 나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내 행동으로 제약을 한 겁니다.

결국 하나님을 내 안에 가두어 두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게 모두가 선악과의 영향이에요.

선악과가 하나님은 법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죄에요.

 

자기 안에 하나님이 법으로 자리 잡으면 그 법에 따라 처신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두려워서 못 살아요.

내가 하루 성경 석장을 읽고 기도를 30분 이상하고 일일일선(一日一善)하면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법을 가지고 있으면 그 법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편해요.

 

곁에서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도 안 들어요.

왜냐하면! 본인의 마음이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면 죄라는 법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법에 속한 사람은 그 법을 지켜야 안심이 되어요.

법을 어기면 불안해요.

그러니 그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자 경주하는 겁니다.

그 옆에서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여도 소귀에 경 읽기처럼 안 들려요.

 

지금 아담과 하와가 그런 꼴을 당한 겁니다.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엔 발가벗음이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전혀 두렵거나 수치스럽다고 여기지 않았어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 갑자기 자신들의 벗음이 수치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그 수치를 가리고자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겁니다.

 

도무지 발가벗고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겁니다.

발가벗음이 하나님 앞에 두려워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해소하려고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겁니다.

 

아담과 하와의 행동을 보시곤 하나님이 묻습니다.

누가 너의 벌거벗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즉 누가 벌거벗음이 수치라고 알려 주었느냐!

내가 그토록 따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그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

 

그러자 아담이 여자 때문에 따 먹었다고 하고!

하와는 뱀 때문에 따 먹었다고 합니다.

누구 때문이라는 핑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이미 벌거벗음이 수치로 자기들 안에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벌거벗음이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느껴지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와 살 수가 없어요.

그건 서로에게 고통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냈어요.

하나님이 눈치 보는 놈을 눈치 보지 말라고 분가(分家)시킨 겁니다.

이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지금도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자들은 본성적으로 발가벗음을 수치로 여겨요.

그러므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하는 겁니다.

수치를 안 가리고서는 스스로가 불안해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만 뜨면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하는 겁니다.

 

과거 법 아래 있을 때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않고 등산을 가면 불안하잖아요.

왜냐하면! 주일 지킴이 선이고 어기는 것은 죄라고 자기 안에 법을 세워 놓았기 때문입니다.

죄 지으면 벌 받는다는 법칙도 마음에 새겨졌어요.

그러니 등산하는 내내 불안 불안 한 겁니다.

 

그러다가 발이라도 삐끗하여서 다치면 내 그럴 줄 알았다고 합니다.

비로서 주일을 어김에 대한 징계를 받고 액땜을 하였다고 시원해 하잖아요.

이게 모두가 스스로 자기 행함을 선과 악으로 규정을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걸 죄라고 해요.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죄다 아니다 라고 판단하는 것을 악이라고 해요.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수치란 그들의 벌거벗음이 아닙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발가벗고 살았어요.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았어요.

 

하나님이 발가벗음을 수치로 보지 않았어요.

만약에 발가벗음이 수치라고 여겼으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옷을 해 입혔어요.

옷을 안 입힌 것은 발가벗음이 수치가 아니기 때문에 안 해 입힌 겁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렇게 여겼으니 선악과를 따 먹기 전까지는 발가벗고 살았지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서 달라졌어요.

선악과를 따 먹고 아담과 하와는 발가벗음을 수치로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보니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겁니다.

자꾸만 하나님 앞에 숨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누가 너의 벗음을 수치로 알게 하였느냐고 따지는 겁니다.

발가벗음을 수치로 보게 한 그 놈이 누구냐!

그 놈을 찾아내고자 하십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 속엔 하나님 말고 다른 놈이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선악과를 타고 다른 놈이 아담 속에 들어온 겁니다.

그 놈이 바로 마귀입니다.

마귀가 하나님과 다른 눈을 아담과 하와에게 심어 준 겁니다.

 

이걸 신약에서 인간을 죽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로 역(逆)으로 추적해 들어가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으니 선악과나 마귀나 죄나 다 동의어(同義語)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선악과를 가지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離間)질하는 그 마귀를 색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뱀이 그 간계(奸計)로 하와를 미혹케 하여서 그 마음을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케 하였다고 했어요.

지금도 사단이 뱀처럼 교회 안에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으로 이간질을 한다고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은 선악과와 같아요.

여기에 걸려들면 자기의 벌거벗음이 수치로 보여요.

자기 꼬라지로 죄다 아니다 판단하게 되어요.

 

그러니 맨 날 자기 꼬라지 뜯어 고친다고 야단인 겁니다.

자기 행함을 갈고 닦는 겁니다.

이러면 신앙생활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라는 말에는 신경을 두지 않아요.

그러니 자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평생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다고 허송세월을 보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날이 서늘할 때에 아담과 하와를 찾았지요.

날이 서늘하다는 것은 저녁이란 말입니다.

종말이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하루 종일 즉 온 일생을 수치를 가린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 만드는 일만 하다가 허송세월을 다 보냈다는 말이 됩니다.

 

이걸 신약의 신앙으로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너희는 원래 죄인이니까 너희들 꼬라지 보지 말고 예수 믿으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뱀이 간계로 아담과 하와를 미혹케 하여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자기 수치를 가리는 일생을 살게 하였듯이 지금도 마귀가 다른 복음으로 성화하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수치를 가리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 교인들이 일평생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으니 그를 믿으라고 하여도 안 믿어요.

 

아니 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화하여서 나아가겠습니다! 라고 한다구요.

하나님이 얘들아! 죄인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은 수치가 아니란다! 라고 하여도 막무가내에요.

이건 마치 부모님 아래서 열심히 공부하여야 할 놈이 껌 팔아서 학비 번다고 가출하여 지하철에서 껌 팔고 있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

죄인이 죄 짓는 것은 자연스러운 거예요.

이걸 수치로 여기지 마세요.

야! 이거 엄청 조심스러운데!

무슨 뜻인지 잘 새겨들으세요.

 

죄인이 죄 짓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살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죄인에겐 죄 아닌 삶이 없어요.

죄인의 삶 자체가 다 죄에요.

 

이건 마치 칡넝쿨이 오른 쪽으로 구부러져도 구부러진 거고 왼쪽으로 구부러져도 구부러진 것과 같아요.

칡넝쿨은 이리 구부러지든지 저리 구부러지든지 구부러지는 것이 본성이에요.

 

죄인은 잠을 자도 죄인이고 싸 돌아다녀도 죄인이에요.

선행을 하여도 죄인의 몸으로 행한 행함이고 악행을 하여도 죄인의 몸으로 행한 행함이에요.

그러니 이렇게 살아도 죄이고 저렇게 살아도 죄가 되는 겁니다.

도적질해도 죄이고 도적질 안 해도 죄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도적질은 죄이고 도적질 안 한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해요.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은 무화과나무로 수치를 가려도 죄인이고 안 가려도 죄인이에요.

이미 죄가 그를 감싸고 있어요.

아담과 하와는 선악의 냄새가 풍기는 죄라는 항아리에 빠져 있는 겁니다.

거기선 옷을 입어도 냄새나고 안 입어도 냄새가 나요.

그런데 인간들은 옷을 입고 있으면 냄새가 안 나는 줄 알아요.

 

여러분 화장실에 가서 똥을 눠 보세요.

화장실 안에선 그 냄새에 배여서 몰라요.

나와 보세요.

그 냄새 그대로 달고 나와요.

그럼 온 거실에 똥냄새가 나요.

아이가 아빠 똥 냄새나 그러잖아요.

 

이런 우숫개 소리가 있어요.

어떤 동네에 똥개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어떤 놈이 똥개를 잡아 가는지 불침번을 섰어요.

그런데 어느 날 어떤 거지가 지나가니 그 거지 뒤로 똥개들이 졸졸 따라가는 겁니다.

파수꾼이 멀리서 보니 거지가 똥개를 물리적으로 납치해 가는 것도 아니니까 그려러니 했어요.

그런데 거지를 따라간 똥개들이 안 돌아 오는 겁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 거지가 또 나타난 겁니다.

어김없이 또 똥개들이 졸졸 그 거지 뒤를 따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서 파수꾼이 그 거지를 붙잡았는데 세상에 가까이 가니 그 거지 몸에서 똥냄새가 진동을 하는 겁니다.

걸을 때마다 똥 냄새를 풍겨 내는 겁니다.

똥개들이 그 똥 냄새를 맡고 따라간 겁니다.

 

지금 우리 인간들이 그래요.

우리가 죄 덩어리에요.

그러니 죄가 툭툭 터져 나오는 겁니다.

이걸 죄 아래 갇혔다고 합니다.

우린 풀썩 거리면 죄가 터져 나와요.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이걸 인정하는 것이 신앙이에요.

맞습니다!

나에겐 의가 없습니다!

내 행한 것 다 죄 뿐입니다!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행함에서 조금 괜찮다 싶은 것을 의로 들고 나와요.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헌금하는 종교적인 행함을 신앙으로 들고 나온단 말입니다.

이건 의롭지요 라고 해요.

이런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이건 하나님 앞에 의가 안 된다는 말이에요.

하나님 앞에 의는 오직 예수님뿐이에요.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 한 것은 구원 받음에 감사하여서 한 것입니다.

고마우니 한 거에요.

고마워서 한 것은 그냥 감사를 표한 겁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것은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에요.

그냥 고마워서 한 겁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충성하고 어떤 사람은 안 해요.

어떤 사람은 옥합을 깨트리고 어떤 사람은 안 깨트려요.

옥합을 깨트린 사람은 많이 탕감 받음을 깨달았기에 옥합을 깬 것이고 옥합을 안 깨트린 사람은 탕감 받음이 없거나 못 깨닫기 때문에 안 깨는 겁니다.

 

교회에 와서 성도를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기쁜 사람은 열심히 오고 안 기쁜 사람은 안와요.

이건 깨달음의 문제이지 열심의 문제가 아니에요.

마리아는 옥합을 깬 것을 의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예수님이 고마워서 했어요.

 

이러면 꼭 묻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목사님 옥합을 안 깨도 되겠네요!

교회 갈 필요가 없네요!

교회가도 죄고 안 가도 죄인데 뭣 하러 갑니까!

 

그럼 전 그럽니다.

니 마음대로 하세요.

본인이 교회 안 가도 된다고 하는데서야 누가 말립니까!

가기 싫으면 가지 마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덮치면 교회에 모이고 싶어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나니 너무도 기뻐서 날마다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고 섬겼어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모였어요.

이게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이에요.

얼마나 좋았으면 날마다 모였겠어요.

 

그렇다고 이걸 이 시대 교인들에게 날마다 모이세요!

그러면 법이 되어요.

법은 강제적이기 때문에 신앙이 아니에요.

그러니 각자 믿어지는 대로 사세요!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어요.

 

자기 안에 왜? 교회에 충성하고 감사를 하고 형제를 사랑하는지 모르면서 하면 아나니아 삽비라가 되어요.

아나니아 삽비라는 은혜 받은 성도들이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치니 흉내를 낸 겁니다.

재산 팔아서 바치면 믿음 있다고 인정해 주는 줄 알고 바친 거에요.

착각한 겁니다.

 

그러나 재산 팔아서 바친 성도들은 누구에게 인정받고자 바친 것이 아니에요.

성령이 임하고 나니 이 세상 가치관에서 하늘에 가치관으로 바꿔 버린 겁니다.

그러니 가난한 형제를 위하여 재산을 바친 겁니다.

그게 기쁨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아나니아 삽비라는 이 믿음도 없으면서 흉내를 내니 성령을 속였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흉내 내면 죽어요.

그러니 흉내 내려고 하지 마세요.

믿음 없으면 없는 대로 사세요.

괜히 믿음 있는 척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하다가 시험에 들어요.

 

교회 오기 싫으면 오지 마시고 교회 오고 싶을 때 오세요.

괜히 목사 눈치 보고 오기 싫은 것을 오면 그것이 힘으로 작동해서 위선을 떨게 되어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믿음을 받으면 저절로 사랑이 되어요.

 

주님 사랑하는 것을 법으로 만들지 마세요.

그건 사랑이 아니고 억지에요.

억지 뒤엔 분노가 생겨요.

 

그러니 절대로 억지로 예수 믿으려고 하지 마세요.

억지로 충성 하려고도 하지 마세요.

억지로 하면 누가 안 알아주면 화가 나요.

그러니 억지로 하지 마세요.

 

조금 전에 바울은 사단이 뱀처럼 하와를 미혹케 한 것처럼 다른 복음으로 미혹한다고 했지요.

하와가 뱀에게 들은 말은 다른 복음이에요.

아담과 하와가 뱀에 말을 듣고 난후 선악과를 따 먹고 발가벗은 수치를 가리는 삶을 살았잖아요.

그런 지금도 사단이 준 다른 복음을 들으면 자기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다른 복음이 뭔지 드러납니다.

 

다른 복음이란? 자기가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 겁니다.

내가 전도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내가 봉사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기뻐하시겠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아담이 치마를 만들어 입듯이 자기가 뭘 하면 괜찮겠지 하는 그 사고가 사단이 미혹한 다른 복음이에요.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것이 다른 복음이에요.

행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행함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겁니다.

 

바울처럼 지금까지 한 일을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달려가는 겁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인하여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어요.

그러면서도 열심과 충성을 다해서 성도를 섬기고 복음을 전했어요.

이건 하나님의 원수 된 자가 용서 받았음에 대한 감사였어요.

감사가 너무도 크니까 자원해서 했어요.

 

하지만 그 일을 신앙이라 붙잡지 않았어요.

자신이 붙잡을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었어요.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는 그 은혜에 대한 감사였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은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하나 위에 있는 것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합니다.

 

성도가 경계하여야 할 것은 자기 의(義) 쌓기에요.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겁니다.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자기 수치를 가리는 일과 같아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수치가 옷으로 가린다고 해서 가려지지 않아요.

불순종의 수치는 피 뿌림으로만 가려져요.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했어요.

다시 말해서 죄의 수치는 피 흘림으로만 가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짐승을 대신 죽이고 그 희생의 가죽 옷을 입혀준 겁니다.

이는 수치는 하나님이 가려준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수치를 어떻게 가려주는가 하면 죄인을 대신하여 흠 없는 제물이 대신 죽어 줌으로서 가려주세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면서 너 대신 누군가가 죽었다고 하십니다.

성경은 이 야기기를 하고 있어요.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거든요.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는 것이 창세전 언약이에요.

그 언약을 최초로 보여준 것이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준 가죽옷 사건입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초지일관하게 죄인 대신 희생당한 제물의 “피”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피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은 은혜로 굳게 하는 것이 아름답지 식물로 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규정에 매여 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함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율법적 규례에요.

그러므로 본문을 직역하면 율법신앙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수 없다는 뜻이에요.

이는 곧 인간의 율법 지킴이라는 행함으로는 하나님 앞에 수치를 가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행한 자” 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모두가 과거 시제입니다.

 

예전에 그랬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누가 그랬나요.

구약 이스라엘입니다.

구약의 율법 신앙을 말하는 겁니다.

구약에 이런 일을 하다가 망한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것과 같아요.

왜냐하면! 죄인이 율법은 지키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받아요.

안 지키면 마음이 불안해요.

그러니 눈만 뜨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제단 위에 있는 제물은 율법으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자들은 먹을 권한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새 언약이라는 제단 위에는 예수의 피라는 제물이 있는데 이 예수의 피는 옛 언약이라는 율법 신앙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새 포도주는 헌 부대가 담아내지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헌 부대는 “법” 을 담는 그릇이고, 새 부대는 “은혜” 를 담는 그릇입니다.

이처럼 새 언약과 옛 언약은 구조(構造)가 달라요.

 

새 언약은 은혜이고, 옛 언약은 법입니다.

법과 은혜는 근본이 달라요.

이는 빛과 어둠처럼 성질이 달라요.

 

새 언약은 옛 사람이 감당하지 못해요.

새 언약은 새 사람만이 감당 할 수가 있어요.

새 언약을 담아내려면 새 사람이 필요해요.

 

그런데 이 새 사람은 인간이 만들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세요.

결국 새 언약을 담당 할 수 있는 새 사람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창조하는가 하면 예수 안에 집어넣고 창조를 하세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였다 살려내는 방식으로 하세요.

 

마치 아담 한 사람 속에 옛 사람이라는 온 인류를 집어넣었듯이 예수님 속에 새 사람이라는 새 민족을 집어넣은 겁니다.

옛 사람이 아담 안에서 나왔듯이 새 사람은 예수 안에 나와요.

옛 사람이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모두가 죄인이 되었듯이, 새 사람은 예수님 한 분의 순종하심으로 의인이 되었어요.

 

옛 사람은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아담 한 사람의 행위가 전이(轉移) 되었듯이,

새 사람도 우리의 행실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행위가 전이(轉移)가 되어요.

옛 사람은 내가 죄를 안 지어도 아담의 죄를 그대로 물려받아서 죄인이 되었듯이,

새 사람도 나는 죄인인데 예수님의 의를 그대로 물려받아서 의인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그러니 나와 상관없이 아담이냐! 예수냐! 의 조건으로 인간의 운명이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새 언약은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만 상대를 하세요.

예수님하고 상대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위로 판단하신다는 말입니다.

새 언약에선 나는 없는 자에요.

그러니 우리 몸에서 나오는 행함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옛 언약에선 내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있는데, 새 언약에선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없어요.

그건 하나님이 계약을 예수님하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 하에선 오로지 예수님뿐이에요.

그러니 새 언약 하에선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자들은 계약에도 없는 헛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보훈에서 자기 행함을 근거로 나아오는 자들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러니 자기 행함으로 나아온 자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들을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신앙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는데 예수님이 난 모른다고 하니 환장하는 겁니다.

그제야 마귀의 종들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울고 불고 이빨을 뿌드득 뿌드득 가는 겁니다.

 

새 언약 하에선 인간의 행함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어요.

그건 계약에 없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이라는 계약서엔 오직 예수님 피 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행함을 보지 않고 예수 피를 믿는 믿음을 보시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만 물어요.

 

“너희들 내 아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아느냐!”

“내 아들이 너희들 죄를 대신 담당 했다는 것을 아느냐!”

“너 때문에 내 아들이 죽은 걸 아느냐!”

“너희들이 지켜야할 말씀을 내 아들이 다 지킨 것을 아느냐!”

하나님은 오로지 “내 아들” “내 아들” 하세요.

 

이게 새로운 제단에 올려져 있는 제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처사를 자기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 받아 들일수가 있어요.

맞아! 난 죄인이라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내가 이런 악당이니까 예수님이 죽으셨어!

하나님이 내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어!

이런 황감할 때가 있나!

그러니 하나님의 처사가 감사할 뿐인 겁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살아서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뿔따구가 나요.

“그럼 난 뭡니까”

“난 시다바리입니까”

“나도 좀 인정해 주세요”

내가 지금까지 한 일도 좀 가치 있게 봐 달라는 겁니다.

 

자기가 한 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해요.

자신이 한 일이 부정당하면 자기가 부정당하는 겁니다.

그러니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이런 불 용납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사건을 발생 시킨 겁니다.

 

그 누구라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는 거에요.

하나님도 예외 일 수 없어요.

결국 자신과 하나님을 등등한 위치에 두고 있는 셈이 되고 만 겁니다.

이게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이 같이 된다고 한 죄에요.

 

죄가 뭐냐!

하나님이 하는 일이 못 마땅해 하는 겁니다.

마치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처럼 아버지 명을 어김없이 지켜온 순종이 아버지가 탕자를 용서해 주는 것이 부당하다는 식으로 보여지고 급기야 아버지에게 항거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명을 어김없이 지키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신앙)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 눈만 뜨면 아버지 명을 어김없이 지키는 삶을 살았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 아들로서 산 것이 아니고 종으로서 산 것입니다.

종으로 살다가 보니 염소 한 마리도 잡아먹지 못하고 산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재산을 말아 먹은 탕자에게 소를 잡아 잔치를 벌려주니 뚜껑이 열린 겁니다.

맏 아들은 여태껏 소는 고사하고 염소 한 마리도 잡아먹지 못하고 살았어요.

그래서 탕자를 위하여 소를 잡고 잔치를 벌리는 아버지의 처사를 용납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따집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말씀이 압권입니다.

얘야! 이 염소가 전부 네 것이지 않느냐!

아버지 것이 네 것이 아니냐!

넌 왜? 내 것 네 것으로 구분하고 살았느냐!

내가 언제 너에게 염소를 잡아먹지 말라고 하더냐!

왜? 친구들하고 잡아먹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맏아들의 잘못은 아버지와 자신을 남남으로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어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건 맏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사랑의 관계로 일하지 않고 법적 관계로 일했다는 말입니다.

사랑 안에 있었으면 염소를 잡아서 친구들 하고도 잔치를 하고 즐겼을 겁니다.

그러나 법적 관계로 있으니 염소를 잡아서 친구들과 잔치를 하면 혼 날까봐서 못했던 겁니다.

 

맏아들의 마음속엔 법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러니 자신의 행함을 근거로 아버지 앞에 나아오는 겁니다.

본인이 아버지는 일하지 않으면 혼을 내는 분이라고 생각하니 아버지 명을 하나라도 어김없이 지키며 종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이건 순전히 맏아들의 생각이었어요.

 

아버진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그러니 내 것이 곧 네 것이 아니냐 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뭘 내 눈치 보고 그러느냐 에요.

그냥 우리 아버지는 친구들과 염소를 잡아서 잔치를 한다고 하여도 이해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어요.

그럼 아버지 눈치를 살피고 살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맏아들은 아버지 눈치만 살피고 살았어요.

그러니 아버지 명이 곧 짐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 명을 어기면 혼이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김없이 지키고 산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게 살았겠어요.

 

우리의 신앙이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야 할 것으로 다가오면 짐이 되어요.

아버지 명을 어기면 아버지가 화를 낼 텐데!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하나님께 죄가 될 텐데!

자기 안에 하나님이 법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죄가 된다고 믿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고 지치겠어요.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그러잖아요.

눈만 뜨면 맏아들처럼 아버지 명을 지킨다고 종처럼 살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으로 안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신앙생활이 감사와 기쁨이 아니고 수고와 탄식으로 점철 되잖아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그랬어요.

전부 율법을 지킨다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짐을 풀어 주셨어요.

이 짐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도말 시켰어요.

 

새 언약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받은 제단은 먹고 마시는 규례로 세워진 제단이 아니에요.

오직 예수의 피로서 세워진 제단이에요.

제단이란 신앙을 말해요.

그러니 신약의 신앙은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행함으로 세워지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음을 믿는 믿음으로 세워졌어요.

 

예수의 피로 세워진 신앙(제단)은 마음에 은혜로 굳게 한 성도만 먹을 수가 있어요.

 

믿음을 받은 성도만 누릴 수가 있어요.

마음에 행함이라는 법이 자리 잡은 사람은 먹을 수가 없어요.

법아래 있으면 십자가가 주는 쉼을 얻을 수가 없어요.

법은 지키지 않으면 늘 따라다니면서 너~ 하나님 말씀을 지켰어! 안 지켰어! 추궁해요.

 

죄인이 법에 추궁 당하게 되면 죽음 밖에 없어요.

죽음이라는 그림자에 늘 쫓기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 믿어도 안식이 없고 수고와 슬픔만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이 사실을 알리려고 속죄일에 대 제사장이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짐승을 잡으면 그 고기는 진(陣) 밖에서 다 불살라 버리고 오직 그 피만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이야기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하고 있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은 버림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영문 밖에서 버림 당한 사건을 구약의 속죄일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속죄 제물을 진(陣) 밖에서 불태우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속죄 제물이란 말입니다.

속죄 제물이 진(陣) 밖에서 불 태워짐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가 사해진 것 같이 예수님이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가 사해 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사함 받은 배경엔 예수님이 진(陣) 밖에서 버려짐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성도의 구원에 근원엔 예수님의 버려지심과 피 흘리심이 있다는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그 예수가 능욕 당한 영문 밖으로 나가자고 합니다.

 

영문 안은 안락한 곳을 말하고 영문 밖이란 고난의 장소를 말해요.

예루살렘 성 안엔 쾌락이 있고,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 언덕엔 고난이 있어요.

영문 밖으로 나가자는 것은 구원을 값싼 감상주의로 접근하지 말란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육신에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이 사실을 잊으면 구원이 자기 육신을 위한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자기 육신을 보존하는데 이용한단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시대나 항상 예수의 피를 사욕(私慾)을 좇는데 이용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무엇을 위한 구원인지를 생각지 않고 자기 육신의 유익을 쫓는데 열중했어요.

 

바울은 이를 일컬어 경건을 자기의 이익의 재료로 삼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자기 배를 위하여 예수를 믿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라고 한 겁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예수님이 마치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창세전 언약에 의한 것이에요.

 

창세전에 아버지와의 약속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심으로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다고 하셨어요.

우리는 그 창세전 언약 때문에 혜택을 입은 겁니다.

혜택을 입었다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의 피를 자기 이익의 재료로 사용할 수가 없어요.

즉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살수 없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죄가 우상숭배로 나타난 것은 인간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라는 겁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자기 삶에 이용하는 것이 우상숭배의 죄라고 한다면, 신약에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자기를 위한 것으로 이용하는 것이 우상숭배와 같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어요.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어요.

예수의 피를 색욕거리로 이용하는 자들이 일어날 것을 예견했어요.

그래서 구원이란?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러잖아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하잖아요.

예루살렘은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을 말하고 영문 밖은 세상에서 버려짐을 말해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밖 골고다에서 버림을 당하셨듯이 우리도 버림을 당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 능욕이란? 세상으로부터 버림 당함이에요.

구원이란? 세상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하는 겁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밖으로 버림 당하는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일컬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했어요.

건축자는 집 짓는 자들이에요.

건축자들이 짓는 집이란? 소극적으로는 유대교를 말하고 광의적으로는 이 세상을 말해요.

 

예수님은 유대교인들에게 걸림돌이에요.

유대교를 세우는데 예수님의 사상은 거치는 돌이에요.

알다시피 유대교는 율법으로 세워졌어요.

인간의 열심과 충성으로 세워졌어요.

열심과 충성의 그 바탕은 법이에요.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법이 율법 신앙의 근본이에요.

 

그래서 유대교에선 인간의 행함을 신앙의 근간에 두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산 사람은 신앙 있음으로 인정받고 불순종한 사람은 신앙 없음으로 치부 당하였어요.

유대교 안에서 신앙 있음이 되려면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서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경쟁하였어요.

왜냐하면! 법엔 상선벌악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지킨 자에겐 복이 주어지고 어긴 자에겐 징벌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안에서 신앙 있음으로 인정받고 살려면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해요.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겐 상석(上席)이 주어졌어요.

상석에 앉으면 섬김 받고 다스리고 누리는 자가 되어요.

반대로 지키지 않은 사람은 말석(末席)에 앉아서 종처럼 수종 드는 자가 되어야 해요.

이처럼 유대교는 철저하게 인간의 행함을 근간으로 세워졌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몰고 온 것은 은혜에요.

은혜란? 거저 주어지는 겁니다.

은혜엔 인간의 행함을 따지지 않아요.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차별이 없어요.

 

예수님이 몰고 온 하늘나라는 인간의 행함을 거부해요.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를 가지고 차별하지 않아요.

그러니 유대교에선 받아들일 수가 없지요.

예수의 사상은 유대교를 건설하는데 방해가 되지요.

유대교에서는 예수의 은혜 사고는 마귀적인 사상이에요.

유대교를 허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세상과 같은 곳이에요.

왜냐하면! 유대교 사상이 인간들의 사상이고 인간들 사상은 온 세상의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에 걸림 돌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도 걸림 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와 세상이 합세하여서 예수를 죽인 겁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와 손을 잡고 예수야! 너는 이스라엘을 건설하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허무는 자이니 꺼져줄래!

그랬다구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 내다 버린 겁니다.

예루살렘 성문 밖은 곧 세상 밖이란 말입니다.

 

바울이 그럽니다.

예수님이 지금 성문 밖에서 기다린대요.

즉 세상 밖에서 기다린대요.

세상 밖은 곧 십자가 안을 말해요.

그러면서 우리더러 예수님이 계신 세상 밖으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안에서 만나는 예수는 가짜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예수님은 세상 밖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진짜 예수는 거치는 돌이라고 여겨서 세상 밖으로 갖다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로 보건데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도 유대인들에게 버림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유대인이란? 인간의 행함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자를 말해요.

인간이 하는 일에 의미를 두는 자들을 말해요.

성화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자들은 모두가 유대인들이에요.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다 유대인이에요.

 

마귀는 항상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겨요.

마귀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공로를 가리는 사명을 받고 일을 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는 일을 합니다.

 

어떻게 예수의 피를 가리는가 하면 인간의 행함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쳐요.

예수님의 피를 인간의 행함과 같은 선상에 두어서 가려요.

갈라디아 교회가 이 사상에 푹 빠졌어요.

<예수 믿기 + 율법 지킴 = 온전한 구원> 이라는 등식을 만들어서 가르쳤어요.

 

예수의 피로서는 마치 온전한 구원이 안 되는 것처럼 생각이 들게 만들어서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온전해져야 하는 식으로 희석을 시켜 버린 겁니다.

포도주에 물을 타 버린 겁니다.

그러니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폭탄주를 마시고 이상한 괴물 신앙이 생겨난 겁니다.

 

바울은 이 사상을 다른 복음이고, 다른 예수이고, 다른 영이라고 했어요.

누구든지 이런 가르침을 받으면 저주를 받으라고 했어요.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심지어 자기 자신이라도 이런 사상을 가르치면 지옥에 간다고 했어요.

 

그런데 초대교회 안에도 바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갈라디안식 신앙이 진리처럼 자리를 잡았어요.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전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몰아서 죽였어요.

마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서 십자가에 죽였듯이 말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진짜 성도는 예수님이 버려진 그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진 밖으로 추방당한 사람이 있어요.

 

바로 문둥병 환자들이에요.

문둥병은 그냥 병이 아니에요.

죄를 상징해요.

그래서 문둥병은 의사가 판정하지 않고 제사장이 판정을 했어요.

 

예수님이 버리진 영문 밖은 문둥병들이 버려졌던 이스라엘의 진 밖을 말해요.

그럼 예수님은 문둥병자란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엔 예수님은 문둥병자였어요.

문둥병은 염병과 같아요.

가까이 두면 그 곁에 있는 것들이 전염이 되어 썩어요.

그래서 격리 시키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고는 유대교 입장에선 염병과 같은 사상이에요.

가만히 두면 전염이 되어 유대교로 퍼져 나가요.

그래서 유대교 제사장들이 예수를 문둥병자라고 판정을 하고 영문 밖으로 격리 시켜 죽여 버린 겁니다.

바울도 예수를 증거하다가 유대인으로부터 염병에 걸린 자라고 하여서 축출 당하였어요.

결국 바울도 예수가 계신 영문 밖으로 버려짐을 당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버려짐을 당할 겁니다.

 

버려짐을 당하지 않으면 가짜에요.

우린 성화주의자들에겐 문둥병자들이에요.

예수의 피에 오염이 된 염병 걸린 자들이에요.

 

예수의 피에 염병 걸린 자들을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두는 성화주의 바탕으로 세워지는 교회 안에 두었다간 온 교회가 전염이 되어요.

열심과 충성을 버리고 예수 믿기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들이 설 자리가 날아가요.

그러니 예수의 피에 염병 걸린 십지가 피를 전하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하여 교단에서 제명하고 쫓아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화주의 제사장(목사)들이 십자가 피만 의롭다고 증거하는 자들은 이단이라고 판정을 하여서 한국 교회 안에서 제명하고 축출 해 내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하면서 교회 밖으로 좇아내는 자들은 스스로를 우리는 유대교인들이라고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유대 땅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면 두 증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곳이 나와요.

 

계 11:1-1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두 증인은 성령을 받은 모든 성도를 말해요.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했지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모두가 증인이에요.

 

누구를 증거하는 증인인가 하면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 증인들이에요.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고 나자 모든 성도가 예수를 증거하지요.

그러다가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하잖아요.

 

이러한 일들이 마흔 두 달 동안 일어나요.

날(日) 수(數) 로는 1260일이고!

년(年) 수(數) 로는 3년 반이고!

년(年) 수를 다른 말로 한 때 두 때 반 때 라고도 합니다.

달(月) 수(數) 로는 42개월이에요.

모두가 동일한 기간이에요.

 

그럼에도 3년 반이다!

마흔 두 달이다!

1260일이다! 라고 기술하는 것은 사역하는 자의 권세에 따라서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으로 말을 할 때는 때와 기한으로 말을 해요.

이는 때와 기한은 창조에 속한 것이에요.

창조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때와 기한을 말 할 때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으로 일을 할 때는 때와 기한으로 일을 하세요.

 

마흔 두 달이란? 태음력(太陰曆)으로 말하는 기간입니다.

달은 어둠을 상징해요.

어둠은 다시 비 진리를 상징하구요.

마귀는 비 진리에 속하였고 어둠이에요.

그래서 마귀의 권세가 득세하는 기간을 말을 할 때는 태음력(太陰曆)을 사용해서 마흔 두 달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1260일은 태양력(太陽曆)을 사용하는 기간입니다.

태양은 빛을 말하고 진리를 상징해요.

성경은 예수님을 빛이라고 하고 진리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의 증인들이 사역을 할 때는 태양력(太陽曆)을 사용하여서 일수(日數)로 말하는 겁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나!

1260일이나!

마흔 두 달이나!

동일한 기간인데 이 기간을 일컬어 70 이레에서 마지막 1 이레의 절반이라고 합니다.

 

1 이레는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시작된 기간인데 1 이레의 전반부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반을 말하고 1 이레의 후반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를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신약의 전 기간은 1 이레 속에 포함이 된 기간인 겁니다.

이건 요한복음 강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70 이레를 참고 하세요.

 

암튼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한다고 하였지요.

왜?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 합니까?

베옷이란? 죽은 자가 입는 옷이에요.

 

이는 곧 두 증인은 세상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세상에서 죽은 자란 말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에요.

그래서 두 증인은 세상에서 죽임 당하여 세상 밖에 있는 자라는 뜻으로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하는 겁니다.

 

세상은 비진리가 난무하는 어둠이에요.

그러나 두 증인은 빛에 속하였고 진리를 전하고 있어요.

어둠 속에서 빛으로 산다는 것은 죽임 당하는 겁니다.

 

두 증인이 예언을 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두 증인을 두 선지자라고 합니다.

선지자란? 그 시대를 부정하는 자들이에요.

이스라엘에게 선지자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현재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부정하는 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그 시대에 속한 기득권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해요.

 

지금 성령을 받은 모든 성도는 두 증인이고 두 선지자에요.

이들이 지금 어디에서 예언을 합니까?

성전에서 하지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에요.

 

교회에 선지자가 출현 했다는 것은 그곳은 교회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선지자들이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하였다고 하는 겁니다.

땅이란? 육이고 세상을 말해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대교 신앙을 말해요.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하다가 죽임을 당하지요.

그런데 두 선지자가 죽임을 당한 곳을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이 죽임 당하신 예루살렘이라도 하지요.

영적으로 하면 다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시대를 초월해서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시대를 초월해서 일어나지만 그 사건의 본질은 다 같다는 말입니다.

 

그럼 조금 전에 두 증인이 예언하는 기간인 1260일은 신약의 전 기간이라고 하였잖아요.

그렇다면 신약의 전 기간 동안 어느 시대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늘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6장에선 하늘에 흰 옷 입은 무리들이 하나님께 빨리 자기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탄원을 하자 아직까지 너희들처럼 예수의 피를 증거하다가 죽임을 당하여야 할 동무들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두 증인처럼 죽어야 할 자들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지금도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자들이 죽을 날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디로 나아가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기다리는 영문 밖으로 나아가라고 했지요.

그럼 히브리서는 히브리서를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는 말이잖아요.

 

오늘 우리가 히브리서를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우리더러 영문 밖으로 나아가라고 하는 겁니다.

야! 정낙원이 너 영문 밖으로 나가!

야! 두 증인들처럼 십자가 피 전하다가 죽으라고 합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요.

교회이지요.

두 증인들이 죽임 당한 곳이 어디인가요?

예루살렘 성이지요.

그럼 이 시대 예루살렘 성이 어디인가요?

유대인들과 같은 사고를 가진 교회에요.

 

유대인들이 사고가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거룩해 지자고 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고를 가르치는 자가 누구입니까?

성화주의자들이에요.

비단 성화주의자들만 아니고 기복신앙으로 땅에 거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에요.

 

사도바울은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자는 모두가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어요.

유대교 사상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어요.

그러니 이 땅에 의미를 두는 모든 자들은 유대인들이에요.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두는 자들도 유대인들이에요.

 

마귀는 하나님으로부터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저주를 받았어요.

마귀는 땅을 떠나지 못해요.

마귀가 가는 곳을 지옥이라고 하지요.

지옥(地獄)이란? 땅에 있는 감옥을 말해요.

이 시대 지옥은 땅에 매여 사는 겁니다.

 

물론 불 못이 있어요.

불 못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고 난 후의 지옥을 말해요.

지금이 이 땅이 지옥인 겁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인간들로 하여금 땅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겁니다.

마귀의 종들은 세상 것으로 교인들을 붙잡아요.

육신에 복을 주겠다고 꼬셔요.

그러니 땅에 거하는 자들은 거짓 종들의 말들을 듣는 겁니다.

 

여기에 성령을 받은 하늘에 속한 자들이 나타나요.

이들의 근거는 하늘이에요.

영구한 도성은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땅을 떠나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영구한 도성은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그럼 땅에 소속이 된 자들이 반발을 해요.

넌 뭐냐!

왜? 이 세상을 부정하느냐고 죽여요.

성도들은 두 증인들처럼 땅에 거하는 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해요.

두 증인들은 죽음으로서 영문 밖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두 증인들을 예수님을 사흘 만에 살려 낸 것처럼 살려내서 천국으로 인도해 가세요.

이 얼마나 황홀한 일입니까!

기쁘지 않으세요!

 

아니! 이런 말을 듣고도 무덤덤하면 도대체 무슨 말을 들어야 좋아 합니까!

기쁘지요.

황홀하지요!

그래요!

복음은 기쁘고 황홀한 거에요!

그러니 고난당하는 감옥에서도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기쁘니까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되는데 얼마나 기쁩니까!

그러니 찬송하라는 거예요.

아니 찬송이 저절로 나와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송 한 것은 누가 시킨 것이 아니에요.

주의 은혜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케 하였다는 것으로 깨달아지니 찬송이 나온 겁니다.

육신은 매를 맞아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 마음속은 천국이었어요.

 

천국은 찬양만 하는 곳이에요.

지금 우리 마음에 찬양이 울려 퍼진다면 천국이 임한 겁니다.

가슴이 쿵쾅거리지 않나요!

 

야! 흥분이 되어서 안 되겠어요.

이 기분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서 오늘은 여기서 끝내야 하겠네요.

찬송하나 하고 마칩시다.

 

~ ♬ ~ ♪ ~ ♬ ~ ♪ ~ ♬ ~ ♪ ~

 

223장입니다.

 

1절)

세상수고 모두 끝나 우리 장막 벗고서 근심걱정 사라진 뒤에

주를 뵙고 성도 함께 면류관을 쓰리라 새 예루살렘에서

 

(후렴)

성도들이 함께 올 때 기뻐 노래하리라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

호산나를 높이 불러 왕의 왕을 맞으리 ~ 새 예루살렘에서

 

2절)

가는 길이 외로와도 주날 붙드시리니 시험환란 근심걱정 없으며

주를 믿고 따라가면 주의 뜻을 알리라 새 예루살렘에서

 

3절)

내가 세상 작별하고 눈물흔적 거둔 뒤 주의 찬란하신 영광비칠 때

나를 구속하신 주를 기쁨으로 뵈오리 새 예루살렘에서

 

4절)

아름다운 그곳에서 구속받은 성도와 사랑하는 주를 만나뵈올 때

주의 영광 노래하며 영원토록 살리라 새 예루살렘에서

 

~ ♬ ~ ♪ ~ ♬ ~ ♪ ~ ♬ ~ ♪ ~

 

시편 기자는 죽은 자는 찬송을 하지 못한다고 했어요.

죽은 자란? 거듭나지 못한 자란 말입니다.

예수와 함께 공동 운명에 속한 것이 기쁘지 않으면 찬송이 안 나와요.

 

우린 예수와 한 몸이에요.

예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고!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고!

예수의 천국이 나의 천국이에요!

 

우린 예수 안에 있어요.

그러니 죽어도 두 증인들처럼 다시 살아나요.

사나 죽으나 차이가 없어요.

 

그러니 예수를 증거하다가 이단이라 욕을 먹고 고난을 당하더라도 감사하세요.

스데반처럼 눈 뜨면 예수님 품일 거니까요.

예수님이 기다리는 영문 밖으로 나가게 되어지는 은혜가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피로 죽음에서 해방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늘에 산 소망을 주셨사오니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날마다 영구한 도성을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마음속에 찬미의 제사가 드려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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