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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성경강해)64강. 영혼의 인도자 (히 13:16-19)

by coroa 2021. 8. 27.

 

 

 

64강. 영혼의 인도자 (히 13:16-19)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선 영문(營門) 밖에서 기다린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영문 밖이란? 문자적으로는 예루살렘 성(城) 밖 또는 이스라엘 진(陣) 밖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진 안은 축복의 장소이지만 진 밖은 저주가 내리는 곳이에요.

성(城) 밖은 저주 받은 곳입니다.

그래서 저주 받음을 상징하는 문둥병자들을 성 밖으로 또는 진 밖으로 추방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영문 밖이란 공동묘지와 같아요.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저주 받아 쫓겨난 자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영문 밖으로 버림당하였어요.

예수님이 진 밖으로 내침을 당하였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로부터 저주를 받고 끊어지고 죽임 당하였다는 뜻입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영문 밖에서 죽였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원수의 나라란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죽인 이스라엘은 곧 마귀의 나라 라는 것으로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자연히 영문 바깥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예수님이 버려진 영문 밖은 세상 밖에 나라를 상징하잖아요.

세상 나라와 반대가 되는 나라는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니 세상 밖을 뜻하는 영문 밖이 하늘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성도들에게 예수가 버려진 영문 밖으로 나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가라는 말은 곧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라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너희들도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하라는 말입니다.

버림당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로부터 버림당한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도에게 예수님이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것은 성도 역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란 뜻입니다.

즉 성도의 소속은 이 세상 밖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빛이고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빛이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세상 밖으로 쫓아냈어요.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둠이고 죽은 곳이란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계신 영문 밖이 빛이고 생명의 세계가 됩니다.

육적(肉的)으로 보면 영문 밖은 저주 받은 죽음의 세계인데,

영적(靈的)으로 보면 영문 밖은 축복을 받은 영생의 세계인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그래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보기엔 아주 역설적이에요.

인간적으로 보면 분명히 저주 받은 것인데 하나님 쪽에서 보면 복이란 말입니다.

이 안목이 없으면 실족하게 되어요.

 

이처럼 영문 밖을 영적으로 보는 것과 육적으로 보는 것은 서로 역설적이에요.

이 세상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에서 죽음이에요.

예수님은 죽었잖아요.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영생입니다.

 

육적으로는 예루살렘 성(城) 밖은 저주이고 성(城) 안은 축복이에요.

하지만 영적으로는 영문 안은 지옥이고, 영문 밖이 천국이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육적으로 보면 지옥에 갔는데 영적으로 보면 천국에 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문 밖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천국에서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영문 밖이 곧 천국이고 구원의 장소란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것은 천국으로 가자는 말과 같아요.

마귀가 다스리는 죽은 세상에서 떠나 예수님이 계신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문 밖으로 나아가되 그 능욕을 지고 나아가자고 합니다.

 

그 능욕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말합니다.

직역하면 예수님처럼 세상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당하고 죽으란 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하란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들으면 저주의 소리에요.

 

예수님이 유대인으로부터 버림당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에요.

그들과 다른 말을 하고 다른 가치관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법이 지배하는 곳에 은혜를 몰고 왔어요.

 

은혜란 법과 반대에요.

은혜는 공짜이고 법은 댓가에요.

이를 구원 이야기로 말한다면 유대인은 댓가로 주어지는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은 공짜로 주는 천국관을 말씀하셨어요.

그러니 사사건건 부딪치게 되는 겁니다.

 

이걸 세상관에 적용해 봅시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세상 나라에 관심을 가졌어요.

예수님과 유대인은 생각하는 나라가 달랐어요.

유대인은 땅에 속한 나라를 위해 살았고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위해 살았어요.

 

유대인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살까 고민했어요.

어떻게 하면 육신이 편하게 살아갈까를 고민했어요.

유대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했어요.

하지만 예수님의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했어요.

결국 육(肉)이냐! 영(靈)이냐! 차이입니다.

 

영문 밖은 세상과 격리된 곳이잖아요.

그렇다면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것은 세상 것 다 버리라는 말입니다.

미련두지 말라는 겁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 받을 때 하나님은 롯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한 것처럼 세상을 보지 말라는 겁니다.

 

이는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죽이라는 말과도 같은 뜻이에요.

갈라디아서 5장에선 성도는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라고 하잖아요.

이는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즉 성도는 하늘에 가치관으로 사는 자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이 세상은 물질적 가치 기준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가치관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쫓아갑니다.

사도요한은 이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어요.

이런 것들은 인간이 핑생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들이에요.

모든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것들을 붙잡으려고 일생을 경주하고 있어요.

 

이건 육신의 본능이에요.

육신은 본능적으로 자기 존재를 보존하고 확장해 가고자 해요.

이걸 다른 말로 자기 흔적 남기기 또는 자기 세계관을 넓혀 간다고 해요.

그러므로 인간들은 눈만 뜨면 자기 역사를 써내려 가는 존재들이에요.

난 이런 사람이다! 라는 것을 시루떡처럼 한 켜 두 켜 쌓아간단 말입니다.

 

마치 탕자 비유에서의 맏아들처럼 아버지의 명(命)을 하나라도 어김없이 지켜왔다는 자기 공로가 담긴 이력서(履歷書)를 써 간다는 말입니다.

난 이렇게 살았습니다!

난 이런 일을 했습니다!

난 아버지의 명을 하나도 어김없이 지켜왔다는 자기 의(義)를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흔적을 남긴다는 말이나 자기 이력서를 쓴다는 것은 자기 의(義) 쌓기인 겁니다.

 

인간이란? 자랑스러운 것은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고 수치스러운 일은 감추고자 합니다.

남들 앞에 괜찮은 인간으로 남기고자 하는 겁니다.

이게 교인들의 신앙으로 말하면 성화입니다.

성화는 자기 의(義) 쌓기에요.

 

우리 자신의 신앙 이력서를 보세요.

뭘 적고 있나요?

유년주일학교 시절에 성경 암송대회나 퀴즈대회에 나가서 상 받은 것부터 시작해서!

학생회장이나 청년회장이나 여전도회 회장이라는 직함에서!

전도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헌금한 것과 같은 업적에다!

권사다 장로다 라는 직분까지 내 세우고 있잖아요.

심지어 난 40일 금식기도 몇 번 했다는 것까지 명함에 적어 놓은 목사도 있어요.

 

다 자랑하고픈 것들뿐이에요.

수치스러운 것은 다 빼 버렸어요.

열심과 충성은 흐리지 않게 밝히 적어 놓으면서도 부끄러운 것들은 다 지워버렸어요.

이는 우리 안에 세상 가치관으로 가득 차 있다는 반증이에요.

 

아무리 복음 복음하여도 우리들의 본성은 세상 가치를 버릴 수가 없어요.

이건 버려지지 않아요.

그러니 난 내 것을 포기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세요.

 

복음을 아는 것하고 복음으로 사는 것은 엄청나게 달라요.

머리로 아는 것하고 손발이 움직이는 것하고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오늘 본문에서처럼 우리더러 영문 밖으로 나아가라고 해도 우리가 자발적으로 예수님이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위하여 인도자를 두신 겁니다.

 

우린 예루살렘 성(城) 안에서 남에게 인정받고 안락하게 살고 싶어 하지 예수님처럼 영문 밖에서 버려지는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아요.

세상에서 떵떵 거리고 살고 싶지 고난 받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머리는 영문 밖에 있는데 몸뚱이는 예루살렘 성(城) 안에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항상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예수님의 정신과 반(反)하는 삶을 산다고 늘 고발해요.

그러니 십자가 이야기가 싫은 겁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담스러워요.

우리 삶을 늘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의 내 근거를 없애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린 쌓고자 하는데 십자가는 허물어요.

 

십자가는 내 공로를 인정해 주지 않아요.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해요.

그러니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인간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데 부정당하니 화가 나는 겁니다.

특히 자기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십자가 복음을 그렇게 듣기 싫어해요.

십자가를 말하면 본능적으로 인상을 써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바리새인은 그 당시 잘난 사람들이에요.

자신들이 살아온 일들이 너무도 자랑스럽고 자기 이력서가 화려해요.

반면에 세리와 창기들은 못난 사람들이에요.

자기 삶이 창피해서 자기 이력서에 쓸 것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의 행함이라는 이력서를 찢어버렸어요.

율법을 지키고 살아온 자랑스러운 신앙을 십자가에서 도말했어요.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하겠습니까?

당연히 지기 이력서가 화려한 바리새인들이 거부하겠지요.

 

율법을 지키며 산 자신들과 죄만 짓고 산 세리와 창기가 같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열심히 성화한 인간은 버려두고 세리와 창기를 천국으로 데리고 간다면 얼마나 열통 터지겠어요.

그럼 지금까지 밤잠 안 자고 지켜온 신앙은 뭐가 되겠어요.

십년 쌓은 공든 탑이 일순간에 무너져 버리잖아요.

이건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를 죽인 겁니다.

 

반대로 개판으로 살다가 천국으로 가게 된 세리와 창기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게 원 은혜이냐!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디 있겠느냐! 라고 하지 않겠어요.

예수님 최고라고!

예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지 않겠느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를 극구 반대하고 죽여야만 했는지 이해가 되겠지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너무 잘나서 예수를 죽였어요.

자신들의 잘남을 계속해서 남기고 싶은데 예수님이 인정해 주지 않으니 화가 난 겁니다.

자기 잘남이 남아 있어야 세상에서 잘난 자로 대접을 받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바리새인이나 세리와 창기들을 동등하게 취급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잘남을 부정한 것은 그들의 밥그릇을 깬 것과 같아요.

그래서 죽인 겁니다.

 

예수는 누가 죽이는가 하면 신앙생활 잘 한 사람들이 죽여요.

여기서 말하는 신앙생활이란? 자기 열심과 충성이 신앙이라고 믿는 것을 말해요.

바리새인들처럼 율법 지킴을 의롭다고 하는 것을 말해요.

바리새인들은 신앙생활을 너무도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율법을 너무도 잘 지키니까요.

 

그러니 자기가 엄청 자랑스러운 겁니다.

너무 잘났어요.

자기 의(義)가 너무도 많았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준다는 의(義)를 거부한 겁니다.

그건 저기 세리나 창기들에게나 주라고 비아냥거렸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탕자 비유에서의 맏아들과 같아요.

아버지 명을 충실하게 지켰어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매일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충성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열심히 교회를 개혁하고, 성화했어요.

 

바리새인들은 진짜 거룩하게 살고자 노력했어요.

쇼를 한게 아니고 진짜로 진심으로 그랬다니까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뜻대로 살았어요.

그런데 그게 예수님에게 거부당하자 눈이 뒤집힌 겁니다.

설렁 설렁 대충 대충 했으면 거부당해도 열 받지 않아요.

하지만 너무도 진심으로 지극정성으로 했기 때문에 거부당하니 울화가 치민 겁니다.

 

지옥에 간 자들이 왜 이를 뿌득 뿌득 갈까요?

이는 원통하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원통하지 않으면 이빨을 갈지 않아요.

이빨을 간다는 것은 분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신앙이 부정당하니 얼마나 분하겠어요.

 

바리새인들처럼 남들 놀러 다닐 때 충성했고!

남들 오락 즐길 때 성화 했다고요.

그런데 그것이 거부당했어요.

그러니 얼마나 화딱지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씩씩 거리면서 이빨을 뿌드득 뿌드득 가는 겁니다.

 

반면에 세리와 창기들은 저절로 흥얼 흥을 거려요.

저절로 노래가 나와요.

어린 양에게 감사가 나와요.

세상에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자들을 천당으로 불러 주셨으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겠어요.

그러니 자진해서 어린 양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찬양하는 겁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탕자와 같아요.

아버지 명을 지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버지 속만 뒤집어 놓고 살았어요.

이들은 하나님 말씀과는 무관하게 살았어요.

 

양심도 없어요.

뻔뻔스러워요.

그냥 죄를 먹고 마시면서 살았어요.

자기 의(義)라곤 약에 쓰려고 눈을 부릅뜨고 찾아도 없어요.

 

그래서 스스로도 우리 같은 놈들은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한다고 했어요.

지옥에 보내도 할 말이 없어요.

당연하니까요.

아버지 속만 썩인 죄인이 무슨 말을 하겠어요.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친구하고 노는 겁니다.

그것도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하나님이라고 하면 깜빡 넘어가는 바리새인들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구동성으로 세상 말세야! 말세! 라고 했을 겁니다.

어떻게 입술로 하나님을 운운하는 사람이 죄인 중에서도 최고로 더러운 죄인들과 친구야 하면서 놀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입니까?

 

그런데 거기다가 예수님은 한 술 더 뜹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지옥에 가고 세리와 창기들이 천당에 간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본 자손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고 세리와 창기들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점입가경입니다.

이건 말로 할 수 없어요.

죽일 수밖에!

 

그래서 이런 놈은 유대민족과는 영원히 격리 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십자가에 죽인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분개하는 그 적개심을 느낌을 좀 느끼세요.

지금부터 중요한 말을 합니다.

무진장 중요한 말이에요.

 

바리새인을 타인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바로 내가 바리새인이에요.

내가 예수를 죽인 바리새인이라는 것이 느껴지셔야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다가오면 우리 공로를 부정하면서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고 예수님은 인간의 공로를 인정한 적이 없어요.

반대로 어느 때이고 인간들은 자기 공로를 앞세우지 아니한 적이 없어요.

 

우린 항상 자기 공로를 앞세우고 나아와요.

그러니 예수님과 우리는 늘 싸우는 겁니다.

예수님은 허물고 우리는 쌓고 그러면서 우리 죄가 고발당해집니다.

이게 성도의 일생이에요.

 

그러므로 우린 필연적으로 예수님과 원수로 만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인 되게 하세요.

죄인 되게 한다는 말은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넌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죄인으로 까발려 놓고 용서해 주시는 방법으로 일을 하세요.

이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남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리새인과 동일하다는 것은 금방 드러나요.

우리들도 우리 공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교회 안 나오잖아요.

 

툭 하면 나 교회 안가!

나 예수 안 믿을래! 라고 하잖아요.

예수 안 믿겠다고 교회 안 오는 것이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일이나 그 맥은 동일해요.

그러니 내가 곧 내가 예수를 죽인 바리새인인 겁니다.

 

이 사실에 공감(共感)이 되어야 해요.

내가 예수를 죽인 바리새인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으면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아요.

다메섹에서 예수님은 바울에게 넌 나를 죽인 놈이라고 알려 주셨어요.

이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방식이에요.

 

사울아! 너 참 잘한다고 찾아오지 않고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라고 하면서 찾아오세요.

넌 나의 원수라고 하면서 찾아오신단 말입니다.

이 원리를 잊지 마세요.

 

이 말을 또 오해하지 마세요.

예수를 죽이라는 말이 아니고 나는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죄와 싸우되 죄를 이길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야 해요.

그래야 내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셨구나를 알게 된단 말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아야 예수님이 내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심이 복음으로 다가와요.

 

그런데도 꼭 말 귀를 못 알아먹고 그래 난 죄인이다 어쩔래! 라고 하면서 난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올까봐서 염려스러워요.

실제로 이런 인간들이 있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

일 못하는 사람이 연장 나무란다고 하듯이 항상 말귀를 못 알아먹고는 설교를 탓해요.

잘 새겨들으세요.

 

다시 설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죄인이 사랑합니다! 라는 식으로 다가갈 수가 없는 분이에요.

거룩과 비거룩이 어찌 반갑다 친구야! 라는 형식으로 만난단 말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은 네 이 놈 하면서 서로 죽이고자 만나야 정상이에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났으니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해야 정상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자신의 신앙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예수님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안 만났으니 우리의 신앙이 부정당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내 충성과 내 봉사가 부정당하지 않으니 아직까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겁니다.

아직 십자가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복음다운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신앙이 괜찮은 줄 아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말만 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죽도록 충성한 신앙이 부정당해 보세요.

 

성화한 것이 부정당하고!

개혁한 것이 부정당하고!

복음 전한 것이 부정당하고!

하나님 명을 어기지 않고 살아온 것이 부정당하고!

목사 노릇한 것이 부정당하고!

집사 장로 권사 노릇한 것이 부정당해 보세요.

 

수십 년 예수 믿은 것이 부정당해 보세요.

예수가 좋아 보일 리가 없어요.

죽이고 싶도록 미워져요.

그래야 죄인다운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예수와 상관없는 자가 되고 말아요.

탕자 비유의 맏아들처럼 난 아버지 명을 하나도 어기지 않은 효자가 된단 말입니다.

효자가 되면 큰일 나요.

그럼 아버지에게 덤벼요.

그것도 아버지 명을 어김없이 다 지켰다는 것을 앞세우면서 말이에요.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아버지에게 따진단 말입니다.

 

제발 의인인척 하지 마세요.

그럼 이빨 가는 날이 와요.

내가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 때 비로서 십자가가 복음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복음으로 다가오게 되어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공로를 인정해 주셨으면 죽이지 않았어요.

자신들의 신앙 이력서를 찢어버리니까 화가 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 온 것이 뭐가 잘못이냐 라고 했어요.

끝까지 자기가 한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겁니다.

 

꼭 이 시대 개혁주의 성화주의자들과 같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의를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이란 없다고 하면 왜? 우리의 순수한 신앙을 폄훼하고 왜곡하느냐고 화를 내잖아요.



자신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데!

왜? 정 목사 당신은 인간의 행함을 무시하느냐! 라고 화를 내요.

이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고 하면 짜증을 내는 이유가 왜? 자신들의 순진무구한 주님에 대한 사랑을 모독하느냐 라는 겁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부정당하니 화가 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개혁이나 성화를 말하는 것은 의롭게 되고자 함이 아니라고들 해요.

신자로서 마땅히 살아갈 책임이라고 합니다.

구원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한다고 해요.



그런데 이게 허구이고 위선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피를 갖다 대면 금방 들통이 나요.  

예수님의 피만 의(義)가 됩니다!

예수님의 피 이외는 의가 없습니다! 라고 하면 그럼 신자가 개판으로 살아도 된단 말인가 라면서 덤벼요.

아니 제가 언제 신자가 개판으로 살아도 된다고 했나요.

전 다만 신자가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상관없이 예수님 피로서만 의롭게 됩니다! 라고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피만 의(義)가 되니 다른 것은 들고 나오지 말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인간의 행함을 무시하는게 아니고 인간의 행함엔 의(義)가 없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지켜도 의(義)가 없다고 말하고 있어요.

의(義)는 오직 예수님 피에서만 나와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의 의(義)이지 인간의 의(義)가 아니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만 정답(正答)을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

아니~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럼 맞습니다.

예수님 피 이외엔 의가 없습니다!

인간의 행함엔 의가 없습니다! 라고 반응을 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잖아요.

인간의 행함에 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간의 행함을 부정한다고 해서 화를 낼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화를 내요.

화를 낸다는 것은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성화는 의로운 신앙이 아닙니다! 라고 하면 역정을 내고 이단이라고 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구원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지 않았어요.

율법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책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이방인처럼 여겼어요.

 

결국 “율법지킴 = 하나님 백성” 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이 공식으로 판단하고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이게 틀렸어요.

이건 유대인들이 오해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지킴과 전혀 상관없는 세리와 창기들을 천국으로 보낸 겁니다.

천국에 가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 백성 삼았다는 말입니다.

율법과 전혀 상관없이 살았던 세리와 창기들이 천국에 갔다는 것은 곧 율법 지킴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율법지킴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을 천국에 들여보낸 것은 율법 속엔 천국에 들어갈 요소가 없다는 뜻이기도 해요.

 

율법지킴이 곧 인간의 행함 신앙이니 천국은 인간의 행함과는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외에 다른 의(義)라고 말하는 겁니다.

율법 외란? 율법 말고 다른 것이란 말이에요.

율법 외에 다른 것 의가 바로 예수님 피로 주어지는 의에요.

 

천국은 예수님 의(義)로 가요.

우리 의(義)가 아니고 예수님 의(義)에요.

예수님 의(義)는 그냥 주어지는 공짜지요.

공짜를 은혜라고 해요.

 

은혜란? 행함과 상관없다는 말이에요.

하나님 백성 되는 것엔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어요.

그래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은혜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너 내 백성 해 그랬어요.

이걸 은혜라고 해요.

 

그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브라함과 같은 은혜에 속한 자가 되지요.

아니 조상은 은혜 속에서 사는데 그 후손은 행함 속에서 살면 안 되지요.

그건 조상이 다르거나 후손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 애비는 마귀라고 한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있지 않고 율법 지킴을 붙잡고 있었어요.

율법지킴을 붙잡고 있다는 것은 우린 아브라함 후손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은 너희 애비는 마귀라고 하시곤 너희는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고 세리와 창기들이 들어간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리새인과 같은 사고를 이 시대 교회 안에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성화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어요.

이들은 개혁하고 성화해서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아요.

다만 신자답게 살자고 해요.

신자다움을 성화에 두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성화하지 않는 사람을 신자로 취급하지 않는 겁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성화주의로 살았어요.

하나님 백성으로서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어요.

율법을 지키고 사는 것이 의롭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율법대로 살지 않는 인간은 전부 믿음 없는 자라고 했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자기가 지금까지 신봉하던 신앙이 예수님의 원수임을 알았어요.

하나님의 의(義)는 오직 예수님 피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이젠 반대로 율법대로 사는 것을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 바로 이단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대로 사는 것을 의롭다고 하던 자들의 손에서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젠 적극적으로 율법대로 사는 것이 의롭다고 하는 자들과 싸우게 되는 겁니다.

바울은 마치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과 싸우는 것과 같아요.

 

저도 과거에 율법아래서 성화주의로 살 땐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은 이단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만났어요.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나대던 내가 이단인 겁니다.

그래서 이젠 꺼꾸러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두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하고 있어요.

 

바울처럼 완전히 역전이 된 겁니다.

바울이 개혁주의 성화주의로 있을 땐 예수를 죽였는데!

반대로 개혁주의 성화주의는 이단이라고 하다가 죽임을 당했어요.

아주 극과 극이지요.

 

예수님 당시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나 쿰란 공동체나 엣세나파나 열심당이나 모두가 이 시대 식으로 말하면 개혁주의 성화주의자들과 같아요.

모두가 인간의 행함을 긍정해서 하나님 백성답게 잘 살자고 했어요.

모두가 거룩한 삶을 강조했어요.

 

그들은 조상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것은 율법을 해이하게 지켜서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해방하고 난 다음 무너진 율법을 다시 일으켜 세웠어요.

이제 다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그런 수모를 당하지 말자고 소리 높였어요.

과거 보다 더 엄격하게 율법을 확대 해석하여 지켰어요.

그래서 백성들을 철저하게 율법을 가르쳤어요.

 

꼭 이 시대 교회와 같아요.

교회가 너무도 타락하였다는 겁니다.

교인들이 너무도 세속화 되었다는 거에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한다고 해요.

 

그래서 교회는 개혁을 하여야 한다고 하고!

교인들은 성화 하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겁니다.

제자훈련이니, 영성 훈련이니,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니, 청교도 신앙이니 하면서 말이에요.

 

이름만 달랐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나 쿰란 공동체나 엣세나파나 열심당이나 뭐가 다른가요.

똑 같아요.

바리새인들이 율법지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감추어 버렸듯이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예수님의 피를 가리는 것이나 동일해요.

 

다르다면 이름만 다를 뿐이에요.

그 속에 흐르는 영적 맥(脈)은 동일해요.

이는 그 때 인간이나 지금 인간이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해요.

인간은 항상 자기 의(義)를 버리지 못해요.

 

2천 년 전 마귀나 지금 마귀나 똑 같아요.

마귀가 같은 의(義)를 붙잡게 만들어요.

마귀는 어느 시대이고 항상 인간의 의(義)로 하나님의 의(義)를 거부하게 했어요.

예수님 당시에 인간의 의(義)는 율법 신앙에서 나왔어요.

지금은 개혁주의 성화주의에서 나와요.

 

저는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나무라지 않아요.

적극적으로 권유해요.

다만 개혁이나 성화를 의롭다고 하기 때문에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것에선 하나님의 의(義)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義)가 나오지 않으니 그것 붙잡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뿐이에요.

 

개혁을 하든 성화를 하든 하세요.

교회가 남에게 욕먹지 않으면 좋지요.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착하게 살면 좋지요.

하지만 성화해서 착하게 산 것이 의(義)가 된다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의(義) 싸움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착하게 사는 것을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건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다만 본질이 아니니까 교인들에게 개혁이나 성화가 신앙생활이라고 가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말하지 말란 말입니다.

 

신앙(信仰)이란 말이 뭡니까?

믿고 따르는 것을 말해요.

하나님께서 믿으라고 한 것이 있잖아요.

그게 주 예수에요.

 

주 예수를 믿으라고 했잖아요.

그럼 주 예수의 무엇을 믿으라고 합니까?십자가에 피 흘리심이에요.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에요.

 

이게 새 언약이잖아요.

새 언약은 곧 창세전 언약이에요.

그래서 새 언약을 믿으라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피로서만 거룩하고 흠이 없어진다는 것을 믿고 사는 거에요.

그럼 성화를 하든 개혁을 하든 난 예수님 피로서만 의로워집니다! 라고 하면서 살면 되어요.

 

성령의 관심사는 성도를 개과천선 시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데 있어요.

성도를 예수님의 피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토설케 만들어요.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깊이 알아가게 만들어요.

죄를 알아가게 하는 것에는 틀이 없어요.

 

때로는 개혁이나 성화를 하게 하여서 야! 내가 예수님 피보다 내 행함을 더 의지하고 사는구나! 를 깨닫게 하셔서 죄를 고발 하실 수도 있어요.

아니면 반대로 반(反)개혁이나 반(反)성화로 나아가게 만들어서 죄를 깨닫게 하실 수도 있어요.

이 사람에겐 이렇게 간섭하시고 저 사람에겐 저렇게 간섭하세요.

각 사람마다 다 다르게 간섭하세요.

 

그렇기 때문에 제 이야기는 신앙생활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의 고정된 틀을 만들어 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틀이 만들어지면 그게 기준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기준은 곧 법이 되고, 법은 고정화가 되고, 고정화는 곧 우상이 되고 말아요.

 

예를 들어서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를 하고, 하루에 성경 3장을 보아야 합니다! 라고 틀을 제시하면 그 기준에 들어간 사람은 신앙 있음이 되어버리고 그 기준에 미달한 사람은 신앙 없음이 되어 버려요.

 

도적질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살인하지 마세요! 라고 계명을 가르치면 이 계명을 지킨 사람은 신앙 있음이 되어버리고 계명을 어긴 사람은 신앙 없음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계명 지킴으로 의(義)다 불의(不義)다 로 판단해요.

 

이렇게 되면 계명 지킨 것을 붙잡게 됩니다.

그런데 계명 지킴엔 하나님의 의(義)가 없어요.

하나님의 의(義)가 되지 않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헛 싸움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계명 지킴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으면 예수의 피는 안 보이고 계명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만 남아요.

이게 마귀의 미혹인 겁니다.

 

성도의 모든 시선을 예수님 피를 바라보게 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계명이 예수를 가리고 말아요.

이런 것을 제사로 긍휼을 가린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이는 제사를 지내지 말란 말이 아니고 그 제사를 왜? 지내야 하는지 알라는 말이에요.

제사 지냄이 본질이 아니고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이 본질이에요.

 

제사를 지내라는 것은 내 죄는 내가 해결 할 수가 없고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사해지는구나! 를 깨달으라는 말이에요.

이렇게 못난 죄인이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용서 받고 사는구나! 를 알라는 말입니다.

이걸 알 때 비로서 제사 지낸 것으로 나아오지 않고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로 나아오게 된단 말입니다.

 

이 시대 버전으로 말하면 자신이 성화한 것으로 나아오지 말고 주여 내 죄를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사함을 받았습니다! 라고 나아오란 말입니다.

행함은 제사와 같아요.

그러므로 그 어떤 행함의 끝에는 반드시 이런 행함도 하나님 앞에선 의(義)가 되지 않고 오직 예수님 피로서만 의롭게 됩니다! 라는 고백이 묻어 나와야 해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십시오! 라는 틀을 만들어 주면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눈에 지켜야 할 것이 들어오면 그것을 붙잡게 되어 있어요.

그럼 그걸 신앙으로 믿게 됩니다.

결국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라고 정해준 기준이 예수의 피를 가리는 악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이게 마귀가 에덴동산에서부터 노리던 노림수에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사세요! 라고 하면 안 되고 예수를 믿으세요! 라고 해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세요! 라고 하면 인간의 육신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붙잡으려고 덤벼요.

이러면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도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를 믿으세요! 라고 하면 하나님께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의 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만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먹어요.

주여 내가 믿나이다! 가 나와요.

하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믿습니까! 라고 방법론을 알려 달라고 해요.

어떻게 믿습니까! 라는 방법론을 알려달라는 것은 자신이 해 보겠다는 겁니다.

 

이게 육에 속한 사람들이 말씀 앞에 나타내는 반응이에요.

그러니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받으면 자기가 자꾸만 지켜야 한다고 덤비는 겁니다.

꼭 행함으로 끌고 가요.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받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성경을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설쳐 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아담 안에 있는 자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걸러내기 위해서라도 예수의 피만 증거하여야 하는 겁니다.

누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인지를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예수의 피만 증거하여야 하는 겁니다.

 

지금도 마귀는 인간의 시선을 예수님의 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가리는 일을 해요.

왜냐하면! 마귀는 죄사함이 예수의 피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때문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님의 피로 주어진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아요.

 

에덴동산에서 뱀이 어떤 식으로 생명과를 가렸는지를 보면 마귀의 술책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시선을 선악과에 묶어두게 하였어요.

그래서 생명과 이야기를 하지 않고 선악과 이야기로 관심을 빼앗은 겁니다.

선악과를 보는 순간 생명과는 감추어져 버려요.

결국 선악과를 보게 함으로서 생명과를 가린 겁니다.

 

마치 이 시대 마귀가 성화로 예수의 피를 가리는 것과 같아요.

그럼 게임은 끝난 겁니다.

눈 앞에 선악과가 보이기 시작하면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는 그리 중요치 않아요.

선악과가 보이면 필연코 먹게 되어 있어요.

육신은 보이는 것을 붙잡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보이는 것을 위하야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천국이 보이면 천국을 위해서 살고 세상이 보이면 세상을 위해 살아요.

바울은 삼층천을 보았기 때문에 삼층천을 향하여 쫓아갔어요.

천국이 안 보이는 사람에게 아무리 천국을 위해 살으라고 하여도 소귀에 경 읽기가 되어요.

그러니 무엇을 보느냐가 그렇게 중요해요.

 

아담과 하와가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그들 눈에는 선악과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는 죽는 겁니다.

생명과는 사는 겁니다.

 

이걸 언약으로 비유해 보세요.

옛 언약을 붙잡으면 죽고!

새 언약을 붙잡으면 살아요.

 

이걸 다시 이 시대 신앙으로 비유해 봅시다.

예수의 피를 붙잡으면 살고!

성화 붙잡으면 죽어요.

이러면 신앙의 싸움이 아주 간단하고 명료해 지지요.

 

영생이 생명과 속에만 있듯이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님의 피에 만 있어요.

죄사함은 예수님의 피로서만 주어져요.

그래서 마귀는 성화로 예수의 피를 가리는 일을 하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눈을 예수님의 피 이외의 것으로 돌리는 일을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을 교회 개혁이나 성화로 돌려 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눈만 뜨면 교회 개혁이 보이고 성화가 보여요.

 

이게 선악과에요.

성화를 아무리 많이 해도 그 속에 의(義)가 없어요.

개혁을 아무리 잘해도 그 속에 생명이 없어요.

이런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괜찮아요.

 

그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성화주의자들은 이런 것을 해야 한다고 해요.

안 하면 믿음 없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성화주의가 이단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저는 개혁이나 성화를 나무라고 싶지 않아요.

날마다 변화하고 달라져야지요.

구습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지요.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하세요.

 

하지만 개혁주의(改革主義)나 성화주의(聖化主義)라고 하는 “주의”는 이단이에요.

 

주의(主義)란 말을 유념하세요.

주의(主義)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주의(主義)란? 임금 주(主)에다 옳은 의(義)를 써요

직역하면 임금님이 인정하는 옳은 일이란 말이에요.

 

신앙을 개혁주의 신앙이니 성화주의 신앙이 되면 그것이 옳은 신앙이 되어 버려요.

옳은 신앙이 되면 이걸 반드시 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자리매김 하여요.

결국 개혁주의 신앙이나 성화주의 신앙이 신앙의 주체로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주어지는 의(義)를 붙잡지 않고 개혁주의 성화주의가 주는 의(義)를 붙잡게 되어요.

 

이게 아주 아주 무서운 미혹인 거에요.

그냥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성질이 아니에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아주 중요한 이야기에요.

 

이 시대에 개혁주의나 성화주의가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결국 에덴동산에서 벌어진 일들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에요.

예수의 피가 생명과라면 개혁주의와 성화주의 신앙이 선악과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개혁주의나 성화주의가 예수의 피를 대신하는 신앙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니 이런 것을 안 하면 믿음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걸 비 신앙이라고 지적을 하니 난리를 치잖아요.

이는 곧 그들은 개혁주의와 성화주의 신앙을 의로운 것으로 붙잡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그러니 의(義)가 없다고 하니 화를 내는 겁니다.

 

이 시대 개혁주의나 성화주의는 선악과와 같아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요.

인간을 긍정하고 자랑해 주는데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그 속엔 생명이 없어요.

선악과처럼 먹으면 죽어요.

붙잡으면 죽어요.

 

주의(主義)란? 이념(理念)이란 말과 같아요.

이념(理念)은 내 생각을 장악하고 나를 다스리는 신앙이에요.

북한이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이 되었지요.

그들에겐 김일성 주체사상이 곧 신앙이에요.

그래서 밥 한 그릇을 먹어도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북한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거대한 종교집단이에요.

 

이런 짓을 지금 교회가 하고 있어요.

개혁주의 신앙이니 성화주의 신앙이니 하면서 교인들을 주의(主義)에 물들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주의(主義)에 빠진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입만 열면 아름다운 교회 만들기와 난 이런 사람이다! 라고 자기들이 한 일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보세요.

설교를 잘 들어보세요.

그들 입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귀담아 들어보세요.

 

예수의 피를 자랑하는지!

아니면 자기들이 한 일을 자랑하는지!

한결같이 자기들이 한 일을 신앙생활이라고 자랑하고 있어요.

분명하게 말하지만 누구든지 예수의 피를 자랑하지 않는 자는 다 이단이에요.

 

욥과 욥의 친구들이 여기에 걸려들었던 겁니다.

욥과 그 친구들은 인간의 행함으로 잘났니! 못났니! 싸웠어요.

욥의 고난을 인간의 행함 차원에서 접근하고 이해를 했어요.

욥에 친구들은 욥이 고난당한 것은 욥이 알지 못하는 죄를 지어서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자신도 모르지만 벌 받을 짓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에게 하나님께 회개하라고 했어요.

 

그러자 욥은 난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건 욥도 그 친구들의 사고와 동일한 선악과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행함을 돌아보면서 난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결국 욥과 그의 친구들 모두가 인간의 행함에서 선과 악을 찾고자 했어요.

이게 선악의 구조에서 바라보는 죄관이에요.

 

욥이 고난당한 것은 욥에게 원인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알다시피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었어요.

하나님은 욥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담아 놓으신 겁니다.

그러니 욥의 고난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일어난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친구와 욥이 고난을 욥에게서 원인을 찾고자 한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엘리후가 나타나서 용과 그 친구들 양쪽 다 묵사발을 만들어 버립니다.

 

욥기 35장을 봅시다.

 

욥 35:1-8=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2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3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4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5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6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욥과 그 친구들은 마치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과 같이 인간의 행함에 의(義)가 있네! 없네! 따지는 것과 같아요.

그러자 엘리후가 나타나 인간의 행함에선 하나님의 의(義)가 나올 수 없다고 일갈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잘나고 못남엔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즉 성화를 하든 안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죄인이 성화한다고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죄인은 죄를 지어도 죄인이고 성화해도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엘리후가 죄인의 행동거지 가지고 죄다 아니다 를 따지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선 쓰잘데기 없는 짓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사람이 바퀴벌레의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과 같아요.

바퀴벌레가 남의 밥을 빼앗아 먹었든지 아니면 자기 밥을 남에게 주었든지 인간은 신경 쓰지 않아요.

바퀴벌레 세계에선 착한 일이고 악한 일일 수 있어요.

 

하지만 인간들에겐 바퀴벌레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죄에요.

바퀴벌레가 못된 행실을 뜯어고쳐서 성화가 되었든지 바퀴벌레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잘못된 것을 개혁을 하였든지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아요.

그건 어디까지나 바퀴벌레 세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욥과 그 친구들에게 그러고 있어요.

야! 이 죄인들아! 너희들이 백날 개혁이다! 성화다! 라고 하면서 너희들 행동가지고 죄다 아니다 따져 보아야 그건 바퀴벌레와 같은 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죄인의 몸짓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신앙이라고 붙잡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것만 받아요.

하나님은 예수님 피만 받아요.

예수님 피만 받겠다고 새 언약을 맺었어요.

누구든지 예수의 피만 믿으면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신다고 했어요.

누구든지 예수의 피만 믿으면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이게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안 믿어지기 때문에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믿게 한 겁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게 믿어져요.

아버지와 아들이 피로 맺은 새 언약이 믿어져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에요.

성령이 오면 인간의 행함 차원이 아닌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죄관과 의관을 말해주어요.

 

그러니 성령이 오시면 인도자가 되셔서 영문 안에 가치관이나 신앙관에서 영문 밖 가치관과 신앙관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영문 안 가치관과 신앙관은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것이고!

영문 밖 가치관과 신앙관은 인간의 행함엔 가치를 두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피에게만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영문 밖 신앙생활이란? 새 언약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화를 하든 개혁을 하든 그것에 의미를 두지 말고 난 죄인이고 예수님의 피로서만 용서받고 삽니다! 라고 예수님만 자랑하고 살면 되어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자랑하는 자가 할례 당이라고 했어요.

 

할례 당이란?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란 말입니다.

이는 곧 성령으로 거듭난 자란 말입니다.

그 속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 피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영문 밖에서 피 흘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삶을 나무라지 않았어요.

도리어 제자들에게 그들의 삶을 본받으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들의 삶으로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어요.

천국엔 다른 의(義)로 가는데 그 의(義)는 예수님 피에게서 주어진다고 했어요.

 

성경은 전부 이 예수님의 의(義)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도 그 의(義)를 증거하자구요.

율법 외에 다른 의(義) 말이에요.

 

율법 외에 다른 의(義)가 있다고 하는 것은 곧 인간들은 율법으로도 의(義)를 만들고자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말입니다.

마귀는 율법으로 의(義)를 만들라고 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의(義)는 틀렸고 예수님의 의(義)를 들고 나아오라고 합니다.

 

결국 두 의(義)가 싸우게 되는 겁니다.

마귀는 예수의 의(義)를 밀어내라고 합니다.

예수의 의(義)를 두면 자기 잘남이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흔적이 날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는 일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으면 자기 행함이 퇴색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다가오실 땐 인간의 역사를 지우개로 지우면서 다가와요.

내 행함을 거부하면서 다가와요.

인간의 역사를 다 찢으면서 다가와요.

 

우리의 자랑거리들을 깨트리면서 다가와요.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이 죄라고 하면서 다가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너 자체가 죄 덩어리이고 저주 받아야 할 놈이라고 해요.

 

그러니 하나님을 바로 만난 사람들은 이사야 선지자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처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가 되어요.

바울처럼 “내가 포행자요 예수를 핍박한 자” 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이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모두가 자기가 죄인인줄 알게 된단 말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은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한 일을 이력서에 다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교인들은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한 것들을 마일리지 쌓듯이 쌓아요.

이러한 것으로 힘을 삼아 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성도는 날마다 죽는 자에요.

성도는 역사에 속한 자가 아니고 묵시에 속한 자들이에요.

역사는 오늘 내일이라는 그림자라는 흔적을 달고 다니지만 묵시는 항상 현재라서 흔적이 없어요.

역사적인 신앙은 자기가 한 행함을 이력서에 하나 둘 첨부하게 되어요.

그러나 묵시는 날마다 오늘 뿐이라서 이력서에 첨부 할 것이 없어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 박에 없어요.

 

묵시는 생명의 세계에요.

생명은 항상 현재만 있어요.

어제는 지나가고 죽은 날이에요.

그러므로 묵시에 속한 성도에겐 이력서가 필요치 않은 겁니다.

날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십자가 안에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겐 역사가 없어요.

자기 역사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은 교인은 역사에 속하여서 자기 역사가 따라 다녀요.

자기 흔적을 남긴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 입지를 넓히고 발언권을 키우고 세력을 증식시켜 나아가고자 한단 말입니다.

급기야 교회라는 조직에서의 주류가 되에 주인으로서 행세하게 되어요.

 

요한 3서에 나오는 디오드레베 같이 교회에서 으뜸 되고자 하고 자기 말을 안 듣는 사람들은 염소새끼마냥 목사다 장로다 권사다 라는 권세(뿔)로 교인들을 들이 받아서 내어 쫓거나 자기 수하에 복종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이건 완전히 힘의 논리로 다스려지는 조폭세계에요.

 

세상은 철저히 힘의 논리로 다스려지는 양육강식의 세계에요.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인간은 다 짐승이에요.

짐승의 세계에선 힘이 곧 진리에요.

그래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 힘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은 곧 행함에서 나와요.

남들 노는데 봉사하거나, 남들 교회 안 오는데 자기만 교회 오거나, 남들은 헌금을 안 하는데 자기만 하면 힘이 되어요.

교회에서나 어느 집단에서나 자기가 한 일이 있어 보세요.

그 일을 기화로 발언권을 챙기잖아요.

 

교회 안에선 행함이 없는 사람은 발언권이 없어요.

교회도 잘 안 나오고 헌금도 안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할 자격을 주겠어요.

그래서 교회에서 힘 있는 자가 되려고 행함으로 자기 이력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교회 안에 이러한 것을 죄라고 고발하고 성도들을 예수님이 계신 영문 밖으로 인도하는 자들을 두셨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성도를 영문 밖으로 인도하는 인도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영문 밖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세상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이 죄라고 고발한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것을 붙잡는 것을 죄라고 지적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 안에 참 인도자와 거짓 인도자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참 선지자들은 육신의 소욕을 죄라고 고발해요.

 

인간의 역사를 허물고 자아확장을 허물어요.

자기 세계를 지워버려요.

오로지 예수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가라고 인도해요.

반대로 거짓 선지자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세상 안에 안주하라고 해요.

자기 세계를 넓히라고 하고 자기 이력서를 써 내려 가라고 해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는 세상 안에 있느냐! 세상 밖에 있느냐! 로 차이가 납니다.

참 선지자는 세상 밖으로 인도하고, 거짓 선지자는 세상에서 성공하라고 합니다.

참 선지자는 세상 밖에 것을 주고, 거짓 선지자는 세상 것을 주어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참 선지자가 되어서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예수님이 계신 영문 밖으로 나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영문 밖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았어요.

옷도 다 벗었어요.

세상 것을 다 버렸어요.

 

예수님은 영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엔 관심이 없어요.

예수님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나는 영문 안에 세상 일엔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주인이 아니라 나그네로 살란 말입니다.

 

영문 밖에 나아가야 영문 안에 것들이 안 보여요.

 

영문 안엔 세상이고 영문 밖은 천국이에요.

영문 안은 선악과가 있고 영문 밖에 생명과가 있어요.

영문 안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유혹해요.

 

영문 안에서 아무리 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탐하지 않을거야 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결국 잡히는 건 육신의 소욕인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 안에 영문 밖으로 인도하는 인도자들을 두신 겁니다.

성도 안에 성령을 보내서 영문 밖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인도자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인도자가 되셔서 우리의 시선을 영문 밖으로 인도해요.

 

영문 밖에 누가 있나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예수님이 계신 그 곳이 천국이에요.

 

영문 밖은 세상 것을 다 벗어버리는 곳이에요.

내 잘남도 벗고 못남도 벗어요.

그러니 자랑 할 것도 없고 자책할 것도 없는 겁니다.

 

십자가로 나아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가 자기 사랑을 포기하지 못해요.

스스로 십자가로 나아가지 못해요.

그래서 성령이 보혜사가 되어서 십자가 안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일을 교회에서는 목사들이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위하여 교회 안에 성령의 은사로 세운 목사라는 인도자를 두신 겁니다.

 

이들은 모세처럼 출애굽을 시켜요.

성도들로 하여금 영문 밖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인도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합니다.

즐거움으로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잘 새겨서 들으셔야만 합니다.

 

잘못 들으면 목사의 말에 절대 복종하라는 것으로 들리게 되어요.

아니면 그 반대로 목사 무용론으로 이해 할 수가 있어져요.

이 둘 다 거치는 것들이에요.

목사에게 종노릇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목사를 경시하는 것도 문제에요.

그러니 잘 이해하면서 들으셔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 영혼의 인도자는 오직 예수님뿐이에요.

 

우린 다 양이고 예수님이 목자세요.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양의 큰 목자라고 합니다.

성경은 성도와 예수님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러한 양과 목자의 관계를 교회 안에 목사와 성도로 예표론 적으로 두셨어요.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와 그리스도의 비밀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적 세계의 일을 교회를 통해서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 안에 영적인 일에 모형적인 제도를 두신 겁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예수님의 역할을 보여주는 자들을 세워 두셨는데 이들이 바로 목사에요.

그래서 목사를 은사로 주어진 직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엡 4:7-12=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자기 피로 이 세상에 교회를 세워 주셨어요.

그리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면서 이 세상에 남겨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각 사람에게 선물을 주셨어요.

예수님이 주고 간 선물이 무엇인가 보니 직임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라는 직임을 주셨고!

어떤 사람은 선지자라는 직임을 주셨고!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직임을 주셨고!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라는 직임을 주셨어요.

 

이러한 성령의 선물로 직분자들을 주신 것은 성도로 하여금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이라고 하지요.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말은 주님의 뜻을 이루어간다는 말이에요.

 

개인적인 의미에선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이 교회이지만 하나님의 나라 입장에선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에요.

그곳이 천국이에요.

우리는 여기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성도는 이처럼 예수님의 몸을 위해서 구원이 된 자들입니다.

 

성도의 존재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그리스도의 몸에 종속이 되어요.

이를 지체라고 하는 겁니다.

 

지체의 주인은 몸이에요.

그러므로 지체는 몸이 주장을 해요.

지체를 위한 지체가 아니라 몸을 위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즉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위한 구원이란 말입니다.

 

이걸 놓치면 주객이 전도가 되어요.

내가 교회인데 교회 다닐 필요가 어디 있느냐! 라고 해요.

내가 교회인 것은 맞는데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가 또 있어요.

나는 그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의 지체로서의 교회에요.

 

한마디로 성도는 예수님의 부속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성전과 성전을 서로 연결하는 벽돌이라고 해요.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교회이니 난 더 이상 교회 갈 필요가 없어! 라고 하면 자기를 위한 구원이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에요.

 

성경이 성도를 일컬어 거룩한 제사장이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내 개인을 위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존재하는 자라는 말이에요.

천국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받은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 천국을 모형하는 교회를 주신 겁니다.

교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이에요.

둘이든 셋이든 숫자와 상관없이 한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이 모이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이 각 사람에게 은사로 직분을 주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위해 살지 말고 나를 살게 해 주신 분을 위해서 살라고 합니다.

 

고후 6:15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보세요.

예수님이 죽으시고 우리가 살아났다고 합니다.

예수 때문에 산 자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니고 자기를 위해서 죽어 주신 예수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하잖아요.

결국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하려고 죽으신 것이란 말입니다.

 

이를 안다고 하면 난 내 편한 대로 살 거야!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지요.

교회 다닐 필요가 뭐 있어! 그러지 못해요.

도리어 적극적으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게 되어요.

내가 힐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하게 되어요.

 

구원 받은 은혜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성도를 위하여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알고 봉사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라고 성령의 은사를 주셨어요.

그럼 성도는 교회에서 내가 받은 은사로 봉사하면 됩니다.

 

은사로 섬기는 것은 남이 어떻게 하든 상관치 말고 내가 받은 것으로 섬기면 되어요.

남이 하든 안하든 그건 주께 맡기고 내가 받은 은혜를 토해 내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복음을 안다 모른다 따지지 마세요.

그건 우리가 판단 할 몫이 아니에요.

 

내 생각에 저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데 속단하지 마세요.

오늘을 몰라도 내일은 알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우리도 과거엔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다가 지금은 은혜의 종이 되었잖아요.

 

남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에요.

교회 안에 가라지를 둔 것도 하나님이 두셨고 곡식을 둔 것도 하나님이 두셨어요.

양을 둔 것도 하나님이고 염소를 둔 것도 하나님이세요.

다 필요해서 두셨어요.

가리지를 뽑으려고도 하지 말고 염소를 쫓아내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

 

나는 그냥 내가 양이면 양으로서 받은 은사로 봉사하면 되어요.

내가 하는 봉사가 염소가 차지하든지 가라지가 차지하든지 그건 따지지 마세요.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햇빛을 주시고 공기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나는 나를 위하여 구원 받은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이걸 잊으면 내 존재가 우선이고 예수는 나를 존재케 하는 도우미로 전락해요.

이건 아담의 속성이지 예수님의 속성이 아니에요.

 

아담의 속성은 예수를 위하여 구원을 해 주었는데 자신을 위한 구원으로 치부해 버려요.

그러면 복음 핑계대면서 자기 육신 편한 쪽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구원은 없어요.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성도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어요.

은사란?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직분 속에 목사도 있고 장로도 있고 집사도 있습니다.

그럼 모든 직분 자는 교회를 위한 도구에요.

교회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님을 만유의 주(主)가 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셨어요.

이걸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만유가 돌아가도록 하셨어요.

마치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듯이 모든 만물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하셨어요.

 

하나님은 예수를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어요.

만물은 독자적으로 살면 안 됩니다.

그건 창조 목적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구원 받는 것을 거듭난다고 하지요.

거듭난다는 것은 창조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신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안에서 난 자들이에요.

그래서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은 자기를 위한 자아가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란? 자아가 없는 자들의 모임이에요.

성도는 모두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 안에서 생겨난 자들이에요.

그러니 너와 내가 개별자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예수 안에서 우리로서 존재하는 자들만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령을 마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은사들을 언제 주셨는가요?

십자가 이후에 주셨지요.

성령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난 후에 오셨어요.

 

요한복음 14, 15,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시면 다른 보혜사를 보낸다고 했지요.

다른 보혜사란 성령님이세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 후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열흘 후에 약속대로 성령이 오셨어요.

 

이 때 성령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왔어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키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 사건으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만유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어 지신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은 이 세상에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는 일들을 하십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콩 볶듯이 다니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을 세상의 주인자리에 앉히는 겁니다.

이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도 제자들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들이 바로 목사라는 은사를 받은 인도자에요.

이들은 성도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도자에게 순종하라고 하는 겁니다.

 

인도자에게 순종하라는 것은 곧 불순종의 세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순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인도자에게 순종하라고 했다면 마귀는 인도자들의 말을 거역하라고 하겠지요.

왜냐하면! 마귀는 항상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마귀는 항상 교회 안에 거치는 자들을 두어서 인도자에게 대적하도록 했어요.

 

그럼 마귀가 어떻게 교회를 어지럽히는지 살펴봅시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잘 나타나 있어요.

유다서를 보면 출애굽을 하고 난 후 광야에서 멸망당한 사람들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중에 고라 일당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들의 특징을 정의하기를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나서 영원한 저주의 흑암에 가두어진 천사들과 같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 지위(地位)와 처소(處所)를 지키지 않고 떠났다는 것은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날뛰었다는 말입니다.

요즘 설치는 사람들을 보고 “나대지 말라” 고 하고 잘난 척하는 사람을 보면 “너나 잘 하세요” 라고 쓴 소리를 하잖아요.

 

개그콘서트에 보면 ‘선생 김봉투’ 라는 코너에 보면 100원만 아는 바보가 있는데 실상은 엄청 똑똑한 아이에요.

선생님이 엄청 어려운 문제를 내면 척척 알아맞혀요.

그런데 어쭙잖게 잘난 척 하는 아이가 이 아이를 보고 100원만 아는 바보라고 놀려요

이 바보가 잘난 척 하는 아이에게 하는 말이 “나대지 마라” 에요.

이는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지 말란 말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엔 니가 모르는 것이 엄청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다 아는 척하지 말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그래요.

내가 모르는 것이 엄청 많아요.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은사를 다 주시지 않았어요.

모든 은사를 다 받으면 그 사람은 메시야가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직분에 맞는 은사들을 주신 겁니다.

우린 일 부분만 알아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마치 다 받은 자처럼 다 아는 척 나대고 있잖아요.

철딱서니 없이 온 세상 사람들의 믿음을 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고라 일당이 자기 지위를 떠나고 자기 처소를 떠났다는 것은 자기분수를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받은 것 이외에 남의 일에 간섭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준 일이나 잘하면 될 것을 남의 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했다는 겁니다.

 

성경에 이런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마귀가 이러한 모습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면 마귀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마귀는 늘 하나님의 일을 방해 해 왔듯이 교회 안에서도 늘 방해 했어요.

 

그럼 고라 일당이 어떻게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였는지 알아봅시다.

 

민수기 16장입니다.

 

민 16:1-11=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黨)을 짓고 2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 ~ 8 모세가 또 고라에게 이르되 너희 레위 자손들아 들으라 9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10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이 작은 일이 아니어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 11 이를 위하여 너와 너의 무리가 다 모여서 여호와를 거스리는도다 아론은 어떠한 사람이 관대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족장 250명과 당(黨)을 지어서 모세와 아론에게 대적을 합니다.

대적하는 이유는 왜? 너희들이 백성들 중에서 높임을 받느냐 입니다.

너희들이 뭔데! 백성들 중에서 으뜸 노릇을 하느냐!

왜? 너만 가르치려고 하느냐!

 

그래서 모세와 아론을 시기하고 대적하는 겁니다.

자기들도 모세처럼 백성들을 다스리고 싶다는 말입니다.

이걸 으뜸 되기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들 눈에는 모세의 직분이 섬김이 아니고 군림하는 것으로 보였던 겁니다.

그러니 모세의 직분이 탐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레위 인들인데 왜? 모세와 아론 너희 두 형제만 선지자 노릇하고 제사장 노릇하느냐! 라고 데모를 하면서 덤빈 겁니다.

 

그러자 모세가 야! 이 사람들아! 너희들이 맡은 직분이 어떤 것인데 그걸 하찮게 여기느냐!

성막에서 봉사하는 일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귀한 일인데!

그걸 우습게 여기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교인들이 목사 당신이 뭔데!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느냐! 라고 따지는 것과 같아요.

우리도 성령 받았어요.

그러니 우릴 가르치려고 하지마세요.

그러는 것과 같아요.

 

이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선포하는 것으로 받지 않고 가르치는 것으로 받으니 그래요.

설교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목사에게 깨닫게 해 주신 것을 선포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목사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은사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라고 하는데 교인들은 그걸 가르친다고 보아요.

 

가르치고 배운다고 하면 주종(主從) 관계가 형성이 되어요.

그럼 반발을 하게 되어요.

인간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라고 느껴지면 본성적으로 반발을 하게 되어 있어요.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다 왕 노릇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남에게 다스림 받기를 싫어해요.

 

이처럼 모든 인간들은 다 군림하고 가르치려고 하지 가르침 받고자 하지 않아요.

이건 선악과가 가져다준 본성이에요.

이렇게 되면 나도 성령 받았으니 우릴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라고 하게 됩니다.

이건 교만해서 그래요.

 

목사의 설교가 가르침으로 들리면 들을 필요가 없어요.

나도 다 압니다! 라고 한다면 교회 올 필요가 없어요.

교회는 받은 은혜로 봉사하기 위해서 오는 곳이에요.

구원 받았기 때문에 오는 거에요.

이미 구원 받았기에 그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서 형제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모이는 겁니다.

 

교회는 모두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각 사람마다 받은 은사가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느끼게 하는 거울로 있는 것입니다.

 

목사나 성도나 구원을 받은 일엔 차별이 없어요.

하지만 받은 은사와 은혜는 달라요.

하나님은 교회 안에 각양의 은사를 주어서 성도들을 배치해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어떤 은사들을 주셨는지 살펴봅시다.

 

고린도전시 12장입니다.

 

고전 12:4-12=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다고 합니다.

또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主)는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역사는 여러 가지나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지체들에게 각양의 은사들을 주셨다고 합니다.

 

직임이란? 직분을 말하고!

역사란? 일을 말해요.

은사란? 선물을 말하는데 여기선 깨닫는 것을 말해요.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다양한 일들을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봉사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어떤 이에겐 이런 은사를 주셨고, 다른 이에겐 저런 은사를 주셨다고 합니다.

어떤 이에게 이런 은사를 주셨다는 말은 모두가 동일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다 다르지만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이에요.

 

결국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주신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지 않는 은사는 다 거짓이에요.

그래서 나를 위한 구원은 없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 잘남을 증명하라고 은사를 준 적이 없어요.

 

그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은사가 어떤 식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지 살펴봅시다.

 

로마서 12장입니다.

 

롬 12:3-8=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바울은 은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로마서는 하나님의 의(義)를 말해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율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피를 말해요.

 

이걸 율법 외에 다른 의(義)라고 합니다.

율법에 의(義)는 옛 사람의 의(義)이고!

율법 외에 다른 의(義)는 새 사람의 의(義)에요.

 

새 사람이란? 십자가 너머에 있는 사람이에요.

영문 밖에 사람이에요.

영문 밖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요.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세계에요.

이름 하여 교회에요.

 

그리스도의 몸은 성령으로 세워져 갑니다.

그래서 영문 밖에 나온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주신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영문 밖에 나온 성도라고 한다면 모두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어요.

안 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것이 있어요.

직분을 주셨어요.

그러니 각자 받은 것 이외 그 이상의 생각은 품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각각 받은 은사가 다르니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어떤 사람은 예언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구제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권위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교회 안에는 다양한 직분을 맡은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사람도 있고!

청소하는 사람도 있고!

밥하는 사람도 있고!

돈 내는 사람도 있고!

심방하는 사람도 있고!

말씀전하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청소하는 것도 은사고!

음식 잘하는 것도 은사고!

남을 위로 잘하는 것도 은사고!

연보 잘 내는 것도 은사고!

말씀 가르치는 것도 은사란 겁니다.

 

그러니 남과 경쟁하고 시기할 것이 없어요.

그런데 고라 일당은 모세와 아론과 자신들의 직임을 은사로 보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모세가 커 보이고 모세가 하는 일이 탐나서 덤비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라 일당의 반역을 자기 지위를 떠나고 자기 처소를 떠났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들 입장으로 생각하였다는 겁니다.

 

인도자에게 순종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세운 질서를 경홀히 여기지 말란 말입니다.

 

난 다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무시하는 것이에요.

교회 안엔 내가 알지 못하는 은혜를 받은 분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형제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은혜에 풍성함 들을 보고 듣고 깨달아야 해요.

새겨서 들으세요.

 

고라 일당은 모세의 직분(職分)을 직위(職位)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직분(職分)이란? 각자가 맡은 일이에요.

공동(共同)의 일을 각자 분담을 해서 나누어서 하는 겁니다.

 

직분이란? 마치 축구 선수들이 골키퍼나 수비수나 공격수와 같은 각각의 위치를 담당하는 포지션이란 말입니다.

이건 팀을 위하여 각자가 맡은 직분(職分)이에요.

직분은 각각의 위치를 맡아서 경기에서 이기고자 하는 팀워크를 이루어야 해요.

그러므로 골키퍼나 수비수나 공격수는 우열(優劣)도 아니고 등급(等級)도 아니에요.

차별이 없어요.

 

그러나 직위(職位)는 높고 낮은 서열(序列)이에요.

높고 낮음이란 등급(等級)이에요.

등급(等級)은 가치가 달라요.

그런데 지금 고라 일당이 모세와 자신들을 등급(等級)으로 나누어서 반역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만 높은 자리 차지하면 우리는 가나안에 안 들어갈래! 라고 데모를 하면서 가나안 가는 행진(行進)을 막고 멈추어 서게 한 것입니다.

마귀하고 싸워야 할 놈들이 자기편하고 싸우고 있어요.

이런 등신들이 어디에 있나요.

 

꼭 우리나라 정치인들 같아요.

이 인간들을 자기들 잇속 챙기면서도 툭하면 국민을 위한다고 하잖아요.

국민들 마음은 국회의원들을 몽땅 멍석에다 돌돌 말아서 한강에 빠뜨리고 싶은데 말이죠.

그런데 지금 고라 일당이 백성을 위한다고 하고 있어요.

 

모세와 아론이 맡은 선지자와 제사장 직은 직분(職分)이지 직위(職位)가 아니에요.

직분엔 우열(優劣)이나 등급(等級)이 없어요.

모세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필요한 직분을 맡은 겁니다.

 

모세가 맡은 직분은 백성을 인도하는 선지자적 직분이고 아론은 제사장 직분이에요.

반면에 고라일당은 레위 인으로서 성막에서 수종들고 섬기는 직분이에요.

이건 높고 낮음이 아니에요.

어느 직분은 귀(貴)하고 어느 직분은 비천(卑賤)하고가 아니에요.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귀한 일을 하는 직분이에요.

그런데 고라일당은 모세와 아론의 직분을 높고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들의 직분은 낮고 천한 것으로 여긴 겁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대적을 한 겁니다.

너만 왜? 영광을 받느냐! 라고 덤빈 겁니다.

 

이건 마치 이 시대 육에 속한 교인들이 목사는 높고 집사는 낮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눈에는 목사라는 직분이 직위로 보이는 겁니다.

목사 또한 성도를 낮게 보아요.

이는 육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 눈에는 장로나 권사나 안수집사나 서리집사가 직위로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너도 나도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겠다고 하는 겁니다.

오죽하면 장로투표나 권사투표에서 떨어지면 교회를 옮겨버리겠어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엔 높고 낮은 서열이 없어요.

누가 귀하고 누가 천하고가 없어요.

 

성막에 보면 갖가지 그릇들이 있습니다.

부젓가락도 있고!

재를 담는 쓰레기통도 있고!

떡상도 있고!

촛대도 있고!

향단도 있어요.

모두가 용도가 달라요.

그런데 전부 정금(正金)으로 만들었어요.

 

전부 정금(正金)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차별(差別)이 없다는 말입니다.

영광이 같다는 말이에요.

쓰레기통은 저급하고 촛대는 고급한 것이 아니에요.

다 하나님의 성막(聖幕)에 사용되어지는 고귀한 그릇들이에요.

 

성막에 있는 그릇들은 단순한 그릇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 성도들 이야기에요.

성막에 다양한 용도의 그릇들이 있다는 것은 교회 안에 다양한 직분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정금처럼 귀해요.

 

어떤 사람은 촛대처럼 복음 증거하는 역할을 맡았고!

어떤 사람은 부젓가락처럼 굳은 일하는 역할을 맡았고!

어떤 사람은 쓰레기통처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봉합하는 역할을 맡았고!

어떤 사람을 떡상처럼 봉사하고 충성하는 역할을 맡은 겁니다.

 

교회 안에도 이처럼 다양하게 사용되는 직분(職分)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각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기름 발림을 받은 종들이에요.

다 정금같이 귀해요.

 

바울이 큰 집에는 여러 가지 그릇이 있다고 하였지요.

 

금 그릇도 있고!

은 그릇도 있고!

놋 그릇도 있고!

목재 그릇도 있어요.

 

다 사용되는 용도가 달라요.

하지만 다 귀히 쓰이는 그릇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은 잘 닦아서 보관해 두고 필요에 따라서 꺼내 쓰는 겁니다.

 

어떤 그릇은 일 년에 한번 사용되는 그릇도 있고!

어떤 그릇은 손님이 오면 사용되는 그릇도 있고!

어떤 그릇은 매일 사용되는 그릇도 있어요.

 

어떤 성도는 성탄절날 일 년에 한번 나오고!

어떤 성도는 한 달에 한번 씩 나오고!

어떤 성도는 매일 나와요.

본인이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교회에 출석하는 숫자로 판단하지 말고 그냥 한 식구로 맞아 주자고요.

아니 본인이 예수를 믿는다는데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잖아요.

 

우수갯 소리로 일 년에 한번 나오면 아! 저분은 제사 지낼 때 쓰는 그릇이구나!

한 달에 한번 나오면 아! 저 분은 손님 접대용 그릇이구나!

매일 나오면 아! 저분은 매일 먹는 밥 그릇이구나! 생각하세요.

 

그릇은 주인이 알아서 사용하니 주인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맡은 일만 충실히 하면 되어요.

그릇이 다른 그릇을 판단하는 것은 악이고 교만이에요.

이 사실을 안다면 남의 직분을 탐낼 이유가 없어요.

유다서의 말대로 자기 지위(地位)와 처소(處所)를 떠날 이유가 없어요.

각자 맡은 일만 하면 되니까요.

 

성도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이에요.

 

어떤 사람은 발이고!

어떤 사람은 손이고!

어떤 사람은 눈이고!

어떤 사람은 입이고!

어떤 사람은 귀에요.

 

모두가 몸을 위하여 움직여요.

몸이 영광 받으면 모두가 영광 받고 몸에 한 부분이 고통당하면 모두가 고통당해요.

몸은 한 덩어리에요.

그러므로 서열이나 등급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서열을 나누고 등급을 매겨요.

그러니 자기 처소와 지위를 떠나서 반란을 일으키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직분이 탐나기 시작하면 서로가 경쟁상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저주 받을 자들이 빠지는 함정이에요.

 

마음을 높은데 두지 말라고 하지요.

높은 마음을 품으면 상좌에 앉고 싶어져요.

죄인들이 감사치 못하는 것은 항상 자기는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해서에요.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과분한 은혜로 다가와야 하는데 도리어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고 불평해요.

모세의 말대로 야! 이 사람들아 성막에서 섬기는 일이 얼마나 영광된 일인데 그걸 하찮게 여기느냐 에요.

 

천국은 낮은 자가 누려요.

어린아이 같은 자라야 누림을 얻어요.

십자가 안엔 모두가 어린 아이로 있어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자신이 개라는 것을 알면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좋다고 감사하게 받아요.

 

그래서 성령의 은사로 세움을 입은 목사들은 성도로 하여금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한 덩어리로 보게 만들어요.

목사는 성령의 마음으로 성도들을 영문 밖으로 인도해요.

우리의 눈길을 십자가로 향하게 만들어요.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마음에 쉼을 얻게 됩니다.

 

바울이 너희 안에 예수의 품으라고 하지요.

예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을 했어요.

이는 자신이 왜? 육신의 모양을 입고 와야만 했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구원시켜 주셨는지를 알란 말입니다.

왜? 나 같은 죄인을 예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해 주셨는가요?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라고 했어요.

목사는 이 사실을 끊임없이 말하여야 합니다.

 

목사는 중매쟁이에요.

성도들의 마음을 예수에게로 붙들어 매는 중매쟁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스스로를 중매쟁이라고 했던 겁니다.

바울은 중매쟁이 직분을 맞은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을 봅시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중매쟁이란? 신랑과 신부를 연결시켜주는 자에요.

신랑은 예수이고 신부는 성도에요.

신부는 신랑이 차지하는 것이지 중매쟁이가 차지하면 불법이에요.

 

바울이 중매쟁이라고 하는 말은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을 보면 잘 나타나 있어요.

 

유대인들이 결혼 풍습을 보면 신랑과 신부를 연결하는 메신저가 있어요.

우리나라 중매쟁이와 유대인의 중매쟁이는 달라요.

우리나라에센 중매쟁이가 신랑과 신부를 맺어 주잖아요.

그러나 유대인의 중매쟁이는 메신저 역할을 해요.

이미 정해진 것을 심부름을 하는 겁니다.

 

중매쟁이는 심부름꾼이에요.

철저하게 신랑의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수종을 든 것뿐이에요.

유대인들은 신랑과 신부는 부모의 손에게 결정을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신붓감을 점지해요.

 

신붓감을 점지하고 나서 혼사(婚事) 때가 되면 집에서 제일 똑똑한 종을 신부 집에 결혼 지참금과 예물을 줘서 보냅니다.

이를 쇼시밴이라고 해요.

 

이걸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장가보낼 때 엘리에셀이라는 종을 리브가에게 보내서 이삭에게 인도한 것과 같아요.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을 리브가가 있는 곳으로 보내지요.

이 때 아브라함이 누가 이삭의 신부인지를 알려주어요.

 

하나님이 사자를 앞서 보내서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을 택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너는 가서 우물가에 물 길러 나온 처자들 중에서 하나님이 이삭의 아내로 점지한 여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아브라함의 종은 그 여자에게 신부에게 단장할 신랑의 예물을 주어요.

신부에게 신랑이 준 예물로 단장을 하고 기다려요.

그럼 신랑은 자기가 준 예물로 단장한 여자를 보고 아~ 저 여자가 아버지가 점지한 신부임을 알고 맞아들이는 겁니다.

 

종은 신부에게 신랑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 해 주어요.

신랑의 신상명세부터 식성이라든가 취미라든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호불호(好不好)를 세세하게 알려 주어요.

신부는 종으로부터 신랑에 대해서 정보를 듣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종은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하는 길잡이인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목사를 인도자라고 합니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를 몰라요.

한 번도 만난 적도 없으니 모르지요.

그런데 종이 중매쟁이가 되어서 서로를 연결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너희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던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봅시다.

 

마 10:11-15=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고 있어요.

왜? 파송합니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님의 신부를 찾고자 함이에요.

 

가면 예수를 영접할 합당한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합당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은 제자들을 영접하고 그들의 말을 듣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제자들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해 주는 겁니다.

이게 중매에요.

 

예수님은 자기 신부들에게 자신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종들을 파송합니다.

파송하는 종도 예수님이 보내고 파송된 종들을 만나는 사람도 예수님이 만나게 해 주세요.

마치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처럼 말이에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만나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만남은 지금은 목사들과 성도의 만남이에요.

목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알아들어요.

설교를 하면 어! 하고 자석에 끌리듯이 끌어당겨요.

성령이 서로가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인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선 이렇게 복음을 증거하는 인도자들의 말에 순종하라는 겁니다.

귀하게 여기라는 말이에요.

신랑의 소식을 전해주는데 얼마나 귀합니까.

 

그래서 바울은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를 귀하게 여기고 보호해 주라고 하는 겁니다.

 

딤전 5:17-20=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목사가 참 진리를 전할 때는 교회가 보호해 주어야 해요.

오늘 본문에서처럼 근심하지 않게 잘 대해주라고 하잖아요.

억지로 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하도록 도우라고 하잖아요.

이는 목사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가치는 복음과 연관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복음을 위해서 목사를 교회에 주셨어요.

그러니 복음을 전할 땐 지켜주어야 하는 겁니다.

 

바울이 목사에 대하여 송사하지 말라고 하지요.

목사에게 덤비는 자들을 꾸짖으라고 하지요.

이는 목사를 지키고자 함이 아니고 복음을 지키고자 함이에요.

 

하나님이 모세가 완벽해서 손들어 준 것이 아니에요.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목사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목사들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회계할 자라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목사는 스스로가 알아요.

자신이 하는 일이 성령의 은사로 한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다가 이단 소리를 들어도 하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서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혼을 영문 밖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목사를 존경하고 행여 참소하는 자들이 일어나면 꾸짖으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항상 복음이 증거되지 못하게 하려고 목사를 넘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마치 고라 일당과 같은 자들을 일으켜서 목사를 대적하게 만들어요.

목사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근심하게 한단 말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 일을 경계시키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목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쫓아내야지요.

복음을 전하지 않는 자는 목사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복음을 위해서 교회 안에 목사를 은사로 세웠어요.

그럼 은사로 세움을 입은 목사는 반드시 복음만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이를 역설적으로 말하면 복음을 증거하지 않는 자는 목사가 아니란 말입니다.

은사로 세움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겁니다.

진정으로 은사로 세움을 입은 목사라고 한다면 반드시 복음을 전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은사로 세움을 입은 자에요.

은사 받은 목사는 반드시 복음을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원리에요.

 

이에서 벗어나면 그는 은사로 세워진 목사가 아니고 가짜에요.

양의 탈을 쓴 이리에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양과 목자의 비유를 하시면서 삯꾼은 목자가 아니라고 했어요.

삯꾼은 돈이 목적이에요.

 

은사로 세워진 목사는 복음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지만!

삯을 위하여 목사가 된 자들은 돈과 자기 명예를 위해서 운명을 같이해요.

성령에 은사로 세워진 목사는 복음 따라 움직이지만 삯꾼은 물질 따라 움직여요.

그럼 어떻게 성령의 은사로서 목사직을 감당케 하는 목사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나요.

이건 아주 간단해요.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십자가를 증거키 위하여 보내심을 입었어요.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입은 목사는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거듭난 목사는 목사 본인이 먼저 알아요.

그럼 목사직을 그만 두면 됩니다.

말씀 증거하는 일을 그만 두면 되어요.

복음 잘 전하는 분에게 위임하면 되어요.

거듭난 목사는 목사직보다 복음이 더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복음 아래로 내려놓아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목사직에 연연하지 않아요.

 

목사직을 그만 둔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다만 직분을 그만 둔 것뿐이에요.

한 성령 안에 있는 자라고 한다면 이러한 것은 서로가 느끼고 공유하게 되어요.

이게 성령의 은사로 세움을 입은 성령의 인도자인 겁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 일을 하도록 하게 하여야 해요.

주께서 그를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 하나만 하고 마칠게요.

 

목사란 은사로 주어진 직분이라고 했어요.

은사란 고정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왔다 갔다 해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이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촛대사이로 운행하세요.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세요.

 

이렇게 되면 목사라는 직분은 고정된 것이 아니란 것이 되어요.

성령의 감동을 주실 때만 가르치는 목사직을 감당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성령의 감동하심이 머물러 있기를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로 세움을 입어 성도들을 영문 밖으로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기도 부탁은 저의 부탁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셔야 해요.

모두가 바울처럼 중매쟁이가 되어서 성도들을 영문 밖에 계시는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문 밖으로 인도할 인도자들을 교회 안에 주셨어요.

보이는 인도자는 목사이지만 보이지 않는 인도자는 성령이세요.

성령의 은사로 세우심을 입은 인도자는 성도들을 십자가 안으로 인도케 하세요.

그럼 그러한 인도자를 귀히 여기고 그의 말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귀히 여기세요.

 

베뢰아 교인들처럼 사람의 말로 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서 인도하는 성령의 인도하심도 받아야 하지만 교회 안에 성령의 은사로 세움을 입고 새 언약의 복음을 증거하는 목사님의 말에도 인도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참 인도자를 분별하는 영안이 열리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받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성령의 인도자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성령께서 인도자가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문 밖으로 인도케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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