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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87강. 예수님이 죽음으로 열어 놓은 길 (요 14:1-6)

by coroa 2021. 11. 2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87강. 예수님이 죽음으로 열어 놓은 길 (요 14:1-6)

-.정낙원 목사

 

요 14:1-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리곤 천사들로 하여금 문을 굳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이는 죄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인은 천국에 올 꿈도 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문은 인간이 열고 싶다고 해서 열려지는 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어야지만 열립니다.

 

그런데 인간이 누구입니까?

죄인이잖아요.

죄인이란? 청개구리같이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은 기어코 하고자 하는 자들 아닙니까.



그래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천국을 침노하려고 해 왔습니다.

어떻게 침노하는가 하면 인간의 의(義)로 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바벨탑 쌓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간들은 자기들이 아는 천국관이 있어요.

인간들이 알고 있는 천국은 착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라고 생각을 해요.

착하게 살면 천국의 문이 열린다고 믿어요.

이게 죄인들의 천국 관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가 죽으면 그 사람의 살아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가지고 판단하잖아요.

착하게 살았으면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하고 악하게 살았으면 지옥에 갔다고 합니다.

철저히 인간의 행위로 판단하는 겁니다.



이런 판단은 선악의 법에서 나온 판단입니다.

선악의 법으로 판단하는 하나님은 상선벌악하는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천국은 착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심겨진 자들만이 들어갈 수가 있는 곳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것은 창세전입니다.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되었습니다.

우리 행함과 상관없이 이미 정해졌어요.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행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들이 착하게 살아서 가는 곳이라고 한다면 천국에 가고 안 가고는 인간들이 결정할 수가 있어져요.

천국에 가고 싶으면 착하게 살면 되니까요.

이러면 하나님은 천국의 주인이면서도 객처럼 인간들의 결정하는대로 구경만하는 구경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또 남아요.

착한 기준이 무엇이냐 입니다.

어느 정도를 착함이라고 하여야 하는지,

또한 얼마만큼 착해야 한다는 커트라인이 있어야 하잖아요.



100% 착해야 하느냐!

아니면 50%만 착해도 되느냐!

그럼 천국에 가서도 100% 착한 사람과 50% 착한 사람 간에는 차등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상선벌악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한다면 공평하지요.

 

이러한 논리를 근거로 해서 천국에 가는 기준이 정하여 졌다고 한다면 천국은 이 세상과 같이 차별이 생기게 됩니다.

착함의 경중에 따라서 차별이 생기고 서열이 정해지게 된단 말입니다.

이러면 천국은 그냥 이 세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밖에 안 되어요.

 

사극(史劇)을 보면 이런 사상이 잘 나타나 있어요.

임금과 신하라는 신분에 차이가 저승에서도 그대로 나타남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신하가 임금에게 불충을 저지르면 전하(殿下) 신(臣)이 저승에서 이 불충을 갚겠나이다! 라고 하잖아요.



이러면 저승은 이생의 연장선상에 있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이생에서도 임금과 신하의 신분이 저승에서도 그대로 유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드라마에 그대로 녹아져 나온다는 것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사후세계(死後世界)에 대한 세계관을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이 세상과 달라요.

이생의 연장선에 있지 않고 단절된 세계에요.

거지 나사로는 평안하게 안식을 누리고 부자는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죽고 난 후에 부자와 거지는 신분이 역전이 되었잖아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보아도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절이 된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천국은 인간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인간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여야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기준에 맞아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봅니다.

죄인으로 본다 함은 인간에게선 착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삶에선 하나님이 인정하는 선(善)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착함 속에는 하나님이 정한 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이 사실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이방 사람들과 똑 같은 천국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였어요.

그래서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만 천국에 가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세리와 창기들을 지옥에 간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을 지킨 의로 천국에 간다고 자랑하던 바리새인들은 지옥으로 가라고 하고 인간의 의라곤 하나도 없는 세리와 창기들을 천국에 가라고 하셨어요.

이것은 천국은 인간의 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이 예수님께서 부르심으로 가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나 부르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부르시잖아요.

그러니까 천국은 하나님이 정한 자들만 들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찾아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고자 오신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지요.

이건 예수님만이 옳음이라는 뜻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길과 진리와 생명은 틀렸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길은 길이 아니고!

인간들이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고!

인간의 생명은 생명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건 인간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이야기이므로 인간들 입장에선 엄청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조상대대로 내려온 전통을 다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항변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것을 예수 자기가 뭔데 아니라고 하느냐!

예수 네가 뭔데!

조상대대로 지켜온 기준을 무시하느냐 입니다.

 

예수님의 말대로 예수님이 맞으면 인간은 다 틀린 것이 되어요.

그럼 가만히 둘 수가 없지요.

예수가 틀려야지 인간 모두가 틀리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이런 뒤틀린 구조가 빗어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 겁니다.

십자가는 양화가 악화에게 구축당한 사건이에요.

진리가 비진리로부터 죽임당하는 사건이에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진짜 예수를 만난 성도들이 예수를 만나 본적이 없는 가짜들에게 핍박을 받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옛 말에 서울 가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이 싸우면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는 말과 같아요.

가 본 사람은 구태여 안 가본 사람과 싸울 이유가 없어요.

아무리 말해줘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진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신 성도들은 싸우지 않아요.

싸워서 이긴들 무엇하겠어요.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예수를 아느냐 하면 모르긴 매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짜 성도들은 예수님을 만난 자기 증거가 있기 때문에 묵묵히 모함하면 모함 당하고 욕을 하면 욕을 듣고 매를 때리면 매를 맞고 사는 겁니다.

이게 양들이에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진리와 비진리를 역전시켜 놓았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은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허상이기 때문에 실상에 속한 사람들은 허상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고 항상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이단으로 정죄당하고 버림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애당초 이 세상에 이단으로 오셨어요.

죄인들이 사는 곳에 의인으로 오셨으니 이단일 수밖에 없어요.



이건 마치 외눈박이들이 사는 동네에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온 것과 같아요.

외눈박이들은 자신들이 정상이라고 믿고 살아 왔어요.

왜냐하면! 사방팔방을 둘러보아도 다 외눈박이들만 살고 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두 눈 가진 사람이 찾아 온 겁니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비정상이고 내가 정상이거든 그러는 겁니다.

아니 구태여 말을 하지 않아도 두 눈으로 서 있음 자체가 외눈박이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아무리 두 눈 가진 사람이 정상이라 할지라도 죽여야 해요.

그래야 외눈박이들이 정상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정한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가 와서 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건 용납 할 수가 없어요.

용납하면 자기들이 몽땅 이단이 되잖아요.

그러니 없애야지요.

 

예수님이 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고 하는 말씀은 인간들이 정해 놓은 기준은 틀린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는 말씀이에요.

그 전제를 부정하기 위해서 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길이란? 천국 가는 길을 말해요.

구원의 길을 말합니다.

인간들이 정한 천국 가는 기준은 어떤 건가요?

그게 인간들이 만든 종교에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인간들이 만든 종교를 보면 인간들의 구원관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에 의하여,

인간으로 말미암고,

인간에게로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종교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인간들의 필요에 의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욕구가 충족되도록 설계가 되어져 있어요.

그러므로 모든 종교의 교리들은 인간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고로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교리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만들어 낸 모든 종교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의 길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상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 신앙의 근간은 인간의 선행과 열심과 정성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행이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한 마디로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러한 이방사상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진리처럼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많은 전도지에 사용되어지는 사 영리 전도방법입니다.

사 영리 전도법을 보면 예수를 믿는 것의 주체를 인간에게 두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라!

마음 문을 열고 예수를 받아들이라! 라는 식으로 인간의 의지적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러한 논리를 근거로 삼는 것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이나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말씀이에요.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영접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했으니 예수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는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먹고 마신다고 했으니까 마음 문을 열고 예수를 영접하라고 합니다.

봐라! 예수님이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시니 마음 문을 열으라는 겁니다.

내가 마음을 열면 예수님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림을 하나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천국과 지옥을 그려 놓고 그 가운데 큰 절벽으로 된 구렁이 있는데 십자가를 다리로 그려놓은 것을 많이 보았을 겁니다.

누구든지 천국 가고 싶은 사람은 이 다리를 통해서 갈 수가 있다고 하잖아요.

 

당신도 예수를 믿어서 이 다리를 건너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겁니다.

마치 당신이 천국을 가지 못하는 이유는 이 다리를 건너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를 영접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영접 기도를 하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서 기도하면 이젠 예수를 영접했으니 천국에 가게 되었다고 하잖아요.

 

이렇게 되면 천국은 인간이 결단만 하면 갈수가 있어집니다.

성령이 오실 필요도 없어요.

예수 믿을 이유도 없어요.

내 의지만 강하면 되니까요.

그럼 천국은 은혜의 나라가 아니고 의지의 한국인들이 가는 나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 영리적인 구원 방법은 이 세상에 모든 종교의 공통된 아이디어에요.

세상 종교는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다 거기서 거기에요.

그 내용들이 같기 때문에 종교간 대화가 되고 연합이 되고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 중심의 구원관이기 때문에 종교간 상통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으로 가르침을 받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구원 받는 방법이 있는 줄 알아요.

 

인간은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나요.

선악의 법이란 이미 선과 악이 고정화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정한 기준 속에 들어오면 혜택을 입고 벗어나면 징벌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인간들은 무슨 일이든지 방법론을 만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비결!

믿음이 좋아지는 비결!

은혜 받는 비결!

축복 받는 비결!

구원 받는 비결을 만드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끊임없이 구원 얻는 방법론을 모색해 왔어요.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았어요.

어떻게 하면 에덴동산으로 다시 들어 갈수가 있을까 궁리했어요.

마귀가 그렇게 미혹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온 어떤 율법사와 같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방법만 알려주면 자신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는 방법론을 묻는다는 것은 법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율법을 어김없이 다 지켰는데도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예수님에게 나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 얻을 길을 제시한 적이 없어요.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을 오해하여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마치 내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사 영리와 같은 방법으로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그 말이 아니에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해 준다는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 믿고 안 믿고 결정할 사항이 아니에요.

이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겐 예수님을 믿게 해주어서 구원해 낸다는 말입니다.

인간 쪽에서 뭔가 액션을 취하라는 것이 아니고 구원 문제는 인간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일은 예수님이 하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를 믿는 믿음을 주어서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더러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으라는 말이 아닌 겁니다.

구원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받아요.

 

언뜻 들으면 말장난 같지만 전혀 달라요.

“믿어서”는 내 의지에 속한 것이지만,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죽은 자로 취급합니다.

잃어버린 양으로 말하고 있어요.

반면에 예수님은 산 자로 말하고 목자로 말해요.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靈)이 되어서 죽은 자를 살려내고 예수님이 목자가 되셔서 잃은 양을 찾아내세요.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냥 죽은 대로 가만히 있으면 되어요.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들처럼 가만히 해골로 있으면 되어요.

가만히 있으면 예수님이 살려내요.



이걸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신다고 합니다.

잃어버려진 대로 살고 있으면 목자가 알아서 찾아내요.

이렇게 살려주는 영으로부터 살아나고 목자로부터 찾아짐을 당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목자로부터 찾아지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거저 주어지는 것을 말해요.

구원을 은혜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이고 선물인 겁니다.

 

예수님은 은혜로 일하세요.

그러므로 성도들의 구원의 끝에는 예수님의 공로만 오롯이 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것이 섞여 있으면 은혜가 훼손되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의 싸움은 하나님의 은혜가 훼손당하지 않게 하는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에 인간의 것이 섞이지 않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뭔가 섞고자 한다는 것은 자기가 산 자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함에 뭔가 의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자라고 하는데 인간들은 자기들이 죽은 자인 줄 몰라요.

잃어버려진 자인 줄 몰라요.

산 자인 줄 알아요.

 

그러니까 인간들 쪽에서 방법론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시킨다고 하니 인간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자기들 입장에서 해석해서 자! 여러분~ 우리 예수 믿어서 구원 받읍시다! 그러고 있어요.

이건 우리 더러 예수 믿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린 믿고자 노력 할 필요도 없어요.

예수는 우리가 노력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어떤 이들은 복음을 알면 구원을 받는 줄 알아요.

십자가 피를 알면 구원을 받는 줄 알아요.

아니에요.

 

복음을 알고 십자가 피를 안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에요.

안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아는 것은 자꾸만 들으면 알아져요.

그러나 그 아는 것이 마음으로 믿어져서 신앙으로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불가능해요.

그건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귀신도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 줄 알아요.

하지만 믿지 못해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달라요.

아는 것은 지식이고 믿는 것은 생명이고 능력이에요.

 

인간은 위장하고 속이고 감추는데 명수에요.

믿음 없어도 믿음 있는 척 해요.

예수를 못 만나도 만난 척 해요.

가짜들의 특징은 항상 가짜를 감추기 위해서 진짜처럼 행동해요.

즉 믿음 없으면서도 믿음이 최고인척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혼자 복음을 다 아는 척 예수를 혼자 믿는 척 하게 하는 겁니다.

이러한 것이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마귀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그 어리석음을 드러나게 하시려고 이런 일들을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짜들이 있는 곳엔 항상 다툼과 정죄와 심판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없음으로 마음에 쉼을 얻지 못하므로 나타나는 현상들이에요.

진짜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넉넉해요.

여유롭다니까요.



이걸 저는 노름판에 장땡이로 표현을 합니다.

자신이 가진 패가 장땡이면 곁에서 아무리 호들갑을 떨고 으름장을 놓아도 요동치 않아요.

이게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의 능력이에요.

그러니 믿음이 있는 척 복음을 아는 척 나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자꾸만 하려고 해요.

믿고자 하고!

알고자 하고!

하지만 바울은 이런 사람들은 항상 진리에 지식을 배우나 마침내 이르지 못한다고 했어요.

이건 배워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항상 가짜들에게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겨요.



노력해서 알라고 하고!

열심히 해서 득도하라고 해요.

열심히 해서 믿음이 생긴다고 한다면 그건 은혜가 아니고 노력의 산물이에요.

믿음이 은혜인 것은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그냥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오면 그냥 믿어져요.

열심히 안 해도 믿어져요.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믿어진다니까요.

어허~ 참!

그냥 믿어지는 사람은 감사하며 살아요.

아주 자연스럽게 여유롭고 넉넉하게 살아요.

 

구원이란? 외부에서 건져 낸다는 말입니다.

외부의 힘에 의하여 건짐 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누군가가 건져주어서 나오게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낸다는 것은 인간은 독자적으로 구원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백성들이 범죄하면 누군가가 나서서 건져내는 사건들을 반복하여서 역사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를 보세요.

범죄하니 하나님이 사사들을 보내서 빼내 오게 하잖아요.

이게 신약에 오면 그 실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만개하여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사처럼 보내서 자기백성들을 원수의 압제에서 빼내오게 하셨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냥 건져내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예수님의 죽음으로 건져낸다는 겁니다.

건져 냄을 당한 자에게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인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창세전에 그렇게 정해져 있어요.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인간은 인간을 위하여 창조가 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주(主)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예수님이 주인 노릇하려고 창조 했어요.

그럼 우리는 예수님이 주인 노릇을 하도록 가만히 있으면 되어요. 

예수님이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세요.

속된 말로 우린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이 하는 일을 보고 박수를 치는 것이에요.

우린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예수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셔서 혜택을 입는 것입니다.

이렇게 혜택을 입은 것을 일컬어 전리품이라고 해요.

성도는 예수님이 마귀와 싸워서 얻은 전리품들이에요.

이게 구원이에요.

 

‘왁스’ 라는 가수가 부른 ‘화장을 고치고’ 라는 노랫말을 보면 복음적인 노랫말이 있어요.

난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고 받기만 했을 뿐인데

그래서 미안하다고 합니다.

 

맞아요.

구원은 미안한 겁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미안했으면 천국에서 세세토록 어린양에게 찬양을 하겠어요.



찬양이란? 그 공로를 기리는 것이에요.

어린 양에게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라고 그 넋을 기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이걸 참지 못해요.

예수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것을 못 보아요.



예수님이 죽일 자는 죽이고 살릴 자는 살려내세요.

그런데 그 안에 예수가 없는 자들은 자기가 죽일 자와 살릴 자를 구분해요.

이 사람은 복음을 알고 저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나서서 심판하는 겁니다.

성경은 이걸 악이라고 합니다.

 

어느 시대고 하나님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여호와가 어떻게 하는지 구경하라고 합니다.

구경하고 박수만 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린 박수치지 않고 자기가 하고자 하잖아요.

내가 복음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를 심판하겠다고 하잖아요.

자기가 천당 갈 사람 지옥 갈 사람을 분리하고 있잖아요.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짓입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면 주님이 다 알아서 하는데 우린 그걸 못 참아요.

이건 예수가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결국 자기 영웅 만들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우린 움직일 때마다 죽음의 냄새가 쏟아져 나오고 죄가 풀썩 풀썩 터져 나오는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서 뭔가 자꾸만 사건을 벌려요.

어떤 사건을 벌리는가 하면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내고 그 죄인을 예수님의 피 뿌리심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으로 나타나게 하신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입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입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입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었어요.

 

왜?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일을 하시는가 하면 이 땅에 그리스도의 흔적만 남기기 위함이에요.

예수님께서 시작과 끝이 되셔서 다 하신 것으로 남기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나는 저주 받아야 할 자인데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고 있다는 고백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하고, 주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인생에 개입을 하셔서 이러한 사실을 늘 자각하게 만들어요.

그러므로 성령이 있는 성도는 늘 자기 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 산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이 아니고 실제에요.

실제이기 때문에 긍휼을 받은 자로서 남을 긍휼이 여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 자이기 때문에 용서를 토해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긍휼을 받은 사람은 긍휼의 냄새를 풍기고 살며 심판을 받은 사람은 심판의 냄새를 풍기고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보지 말고 무슨 냄새를 풍기는지를 보세요.

풍기는 냄새가 곧 그 사람의 본질이에요.

 

다시 오늘 본문을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이 말씀은 역설적인 겁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들은 틀렸다는 말이에요.

 

이는 하나님이 말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으니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선 예수님의 것만이 옳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이외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이 세상에 던져준 메시지에요.

 

하나님께서 난 예수의 것만 받겠다고 합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인간들의 반발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럼 우린 뭐냐!

우린 시다바리란 말이냐! 라고 항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결정에 반발한다는 것은 자기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이 있고!

자기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왜? 자기 생각을 가져야 하느냐?

넌 내 뜻만 따르면 돼!

내가 하는 일에 네 생각을 개입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해요.

성경이 신앙을 순종으로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을 개입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는 일에 토를 달거나 아니라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가인과 아벨의 제사로 비유하면 잘 나타납니다.

가인을 일컬어 악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그럼 악에 속한 자들의 모습이 가인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됩니다.

 

가인은 어떻게 자신이 악에 속하였음을 드러냈는가요?

이는 하나님의 결정에 반발하는 모습으로 드러냈어요.

가인이 하나님의 결정에 반발한다는 것은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결정에 반발을 한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는 것을 인정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가인은 하나님의 일하심은 자기 안에 가두고 있음이 됩니다.

가인은 자기 생각에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어요. 자기가 정성껏 제사상을 차려 놓으면 하나님이 고만다 하고 잡수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가인은 온갖정성을 다 들여서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받지 않은 것입니다.

이건 가인의 생각과 다른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자기가 생각하던 대로 일하시지 않자 분노하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드린 아벨을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독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독자적인 선악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독자적인 선악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독자적인 심판권을 행사한다는 말입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되면 가인은 자기 세계에서 왕 노릇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에 들지 않으면 하나님도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이런 가인의 세계관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인간들은 각자 생각하는 신이 있어요.

예측 가능한 신을 두고 있어요.

내 생각엔 내가 이렇게 하면 신은 이렇게 응답을 해 주실거야! 라는 틀이 있어요.

이 틀에서 벗어나면 어! 이게 아닌데 하면서 반항하다가 종국엔 신을 바꿔버립니다.

부처 믿다가 예수로 갈아타고 예수 믿다가 부처로 갈아타잖아요.

 

이걸 성경은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 상이 있습니다.

난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한다! 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늘 판단하고 심판하면서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에 맞아 떨어지면 하나님의 일로 간주하고 자기 생각과 다르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냥 인정하지 못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반발하고 대적하고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인류 역사 속에서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지금도 나타나고 있어요.

그 모습들이 자기가 아는 신앙이 아니면 전부 아니라고 배척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내가 아는 예수!

내가 아는 복음!

내가 아는 십자가!

내가 아는 은혜가 아니고 다르면 전부 이단이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 저 사람이 말하는 것은 나하고 다른데!

저거 이단 아니냐!

결국 이단으로 만들고야 말아요.

 

이러한 것이 누구에게 나타납니까?

가인처럼 자기 생각으로 열심과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드린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복음을 가장 잘 안다고 하고 가장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 자들을 다 이단이라고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제가 은혜를 입고 보니 다 안다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다 안다고 생각하면 일단 귀를 닫아 버려요.

이미 자기가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안 들어요.



이는 하나님의 계시를 자기 안에 가두고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 밖에서 일어나는 계시는 전부 가짜이고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계시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남이 깨달은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자기가 깨달은 것만 진리이고 복음이라고 주장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게 교주에요.

교주가 다른게 아니에요.

자기만 맞다고 하는 자가 교주에요.

나 아니면 복음 전하는 사람 없다고 하면 그는 교주에요.

어느 집단이든지 따르는 무리들은 항상 있어요.

그러니 다 안다고 하는 자들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 위에서 교주 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르는 무리들 위에서 영광을 받으면서 하나님 행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만 다 안다고 하면 그때부터 모든 것은 판단의 대상이 되어요.

판단한다는 것은 왕 노릇한다는 겁니다.

자기 세계관이 있기 때문에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다 정죄하고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면 알수록 입이 닫아져야 하는데 열리잖아요..

몰랐을 땐 정죄하고 했는데 알면 알수록 할 말이 사라져야 정상이에요.

곡식이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복음을 알면 자기 죄가 고발당하고 할 말을 잃고 유구무언이 되어가야 정상이에요.



복음의 광채를 받으면 받을수록 내 안에 죄들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남의 신앙에 간섭할 여유가 없어요.

누굴 판단하고 할 겨를이 없어요.

입이 저절로 닫히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복음을 알수록 두려움이 더 가중되어 다가오는 것입니다.

경건한 두려움이 엄습해요.

이걸 바울은 내가 이 복음 전하고 버림 당할까 두렵다고 한 것입니다.

복음을 깊이 알아갈수록 내 허물들이 드러나고 이젠 주여 내가 지금까지 판단한 모든 것을 취소해 주세요! 라고 한다니까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너무도 뼈저리게 느끼게 되거든요.

 

그러니 내가 지금 누굴 판단하고 비판 할 게제가 아니에요.

내 몸에 온통 똥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이 보이는데 어찌 겨 묻은 것을 나무랄 수가 있습니까.

없어요.

내 코가 석자인데 누가 누굴 판단 한단 말입니까.

달리 겸손해 지는 것이 아니고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겸손 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서면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주의 인자를 쫓아 내 죄과를 말갛게 사하소서!



다윗의 기도가 저절로 나와요.

옛날엔 이런 기도를 만들어서 했는데 이젠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겁니다.

이젠 하나님 말씀이 무거워요.

너무 무거워서 감당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껴요.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나요.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요.

죄는 항상 자기가 신이 되고자 역사해요.

자기가 신이 되고자 한다는 말은 자기만의 길, 자기만의 진리, 자기만의 생명을 가지고자 한단 말입니다.

 

인간들은 날마다 자기를 신의 자리에 앉혀요.

사울 왕처럼 자기 전적비를 세우는 일을 해요.

사울 왕은 하나님의 전쟁에 투입이 된 사람이에요.

그럼 전쟁에서 이겨도 자기가 이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신 것이에요.

 

그럼 자기 전적비를 세울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자기 전적비를 세워요.

이는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야 하는 곳에 자기 이름을 내는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이에 성령은 날마다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이 죄라고 책망하는 겁니다.

 

죄란? 특정한 것이 아니에요.

인간들은 죄를 특정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죄와 하나님이 말하는 죄는 다릅니다.



죄란? 피조물이 독자적인 눈을 가진 것을 말해요.

죄가 하나님의 눈으로 보지 않고 자기 눈으로 보게 만들었어요. 

자기가 독자적인 판단을 한다는 것은 왕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판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인간을 왕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지요.

맞아요.

뱀은 틀린 말을 하지 않았어요.

 

뱀의 말대로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왕이 된 겁니다.

그 왕 됨의 증거가 자기 눈으로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도 스스로 판단하고 심판하기에 이른 겁니다.

그게 자신의 발가벗음을 수치라고 여겨서 하나님 앞에서 숨어 버리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신앙을 순종으로 말하는 것은 독자적인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순종이란? 내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을 말해요.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하라는 겁니다.

 

죄는 항상 하나님과 원수 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불순종이란? 독자적으로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겁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 왕이 그랬어요.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아말렉에게 속한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했어요.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그 짐승들까지 진멸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다는 명분으로 좋은 짐승들을 남겨두었어요.

이건 사울의 독자적 생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봅시다.

 

삼상 15:22-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는 말은 한마디로 인간의 생각을 개입시키지 말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데에는 항상 인간의 죄를 고발하기 위해선 인간의 상식을 비껴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생각이 죄라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죄가 어떤 식으로 인간에게 나타나는지 아담을 통하여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기 전과 먹고 난 후에 인식의 변화가 나타났어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발가벗은 몸으로 하나님과 살았어요.

그 땐 하나님 앞에서 발가벗음을 수치나 부끄러움이나 두려움도 없었어요.

하나님도 아담과 하와의 발가벗음을 책하지 않았어요.

 

발가벗었다는 것은 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흠이 없기 때문에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걸 거룩이라고 합니다.



거룩이란? 하나님 앞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을 말해요.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 있는 것이 거룩이고 흠 없음이에요.

에덴동산에선 자신을 감추거나 포장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자기 몸을 가리는 행위를 하게 된 겁니다.



죄란? 하나님이 창조한 그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에요.

원형 그대로 두지 않고 뭔가 자기가 보태고 가꾸고자 해요.

이는 독자적인 눈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 두지 않고 자기가 고치고 다듬고 포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의 발가벗은 몸을 치마로 가린 것은 자기들의 독자적인 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눈을 가지게 되자 자기들 생각으로 판단하게 되고 결국엔 자기들 식으로 수치를 가리는 행위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걸 스스로 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눈에 이상이 온 겁니다.

자신들의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치마를 만들어 입게 된 것입니다.

자기 눈에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이기 시작하면 가리지 않고는 본인이 괴로워서 못 견뎌요.

가리지 말라고 하여도 본인이 수치스럽기 때문에 가리고야 마는 것입니다.

 

제가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율법적 신앙 아래선 주일날 돈을 쓰는 것은 죄악으로 여겼어요.

심지어 오락을 금해야 한다고 하여서 TV 시청도 하지 않았어요.

이건 마치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주일날 뜻하지 않게 손님이 찾아오면 대접을 해야 하잖아요.

그럼 부득불 시장을 가거나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게 되면 그게 그렇게 찜찜해요.  

이 때는 곁에서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하여도 내가 용납이 안 되어요.

이게 내 안에 독자적인 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겁니다.



그 법을 깨면 스스로 괴로워요.

그래서 지키는 것입니다.

지켜야 안심이 되거든요.

결국 자기 행위로 안식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에요.

발가벗음이 수치라고 여겨지면 하나님이 아무리 괜찮다고 하여도 본인이 괜찮지가 않아요.

그러니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리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하나님 앞에 나아온 아담과 하와는 원래의 인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발가벗겨 놓았는데 아담과 하와는 치마를 만들어 입고 나타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야~ 너 왜? 치마를 입었는데!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담이 수치스럽고 두려워서 그랬다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누가 너의 발가벗었음을 수치라고 하던데!

넌 왜? 발가벗음을 수치로 여기는데! 라고 했어요.

넌 아침까지는 안 그랬잖아!

아침에도 발가벗고 나 하고 아침 먹었잖아!

그땐 발가벗고도 수치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왜? 지금은 발가벗음이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느냐!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넌 왜? 나와 다른 눈을 가졌느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죄가 인간에게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갖게 하고 만 겁니다.

하나님이 보는 발가벗음의 아름다움이 이젠 아름다움으로 보이지 않고 수치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이 이젠 거룩으로 보이지 않고 흠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고서는 살수가 없어요.

그럼 사사건건 부딪쳐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에 자기 생각으로 태클을 걸게 된단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지 않고 자기들 보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고 말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부득불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진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하기에 이른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쫓겨나서 만든 이 세상은 하나님이 바라는 세상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바라는 세상은 일체의 인간의 흔적이 담겨져 있지 않는 세상이에요.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이 세상을 자기들이 보기에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 되어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다스려가는 세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하나님과 원수의 나라인 것입니다.

당연히 멸망을 받아야지요.

 

이처럼 죄가 인간들 스스로 이건 죄다 아니다 라는 판단을 갖게 만든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자기들이 정한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기에 이른 겁니다.

죄가 아담이 벗은 것을 죄라고 자각하게 한 겁니다.

하나님은 전혀 상관치 않는데 인간 스스로가 이건 죄입니다! 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죄가 자기 몸을 가리는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겁니다.

무엇으로 가리느냐면 자기 행위로 가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 행위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겁니다.

죄가 발가벗음을 수치라고 고발하기 때문에 가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수치를 가리면 죄가 아닌 줄 알고 있는 겁니다.

 

죄는 인간들의 행위로 가린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아요.

가려도 죄인 그대로에요.

하나님은 인간 자체가 죄 덩어리라고 합니다.

인간에게서 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자체가 죄에요.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요.

이걸 죄악 중에 출생 하였다고 합니다.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다 죄에요.

죄 아닌 것이 없어요.

 

그럼에도 인간들은 인간들 속에 죄 아닌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의와 불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착함과 악함이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들 행위를 법으로 구분해 놓은 겁니다.



이렇게 하면,

선(善)이라고 하고,

의(義)라고 하고,

착함이라고 인정하고, 



저렇게 하면,

악(惡)이라고 하고,

불의(不義)라고 하고,

악함이라고 인정하자고 정해 놓은 겁니다.

 

교회 생활을 예를 들어서 주일 지키면 선이고, 안 지키면 악이고, 십일조 하면 의이고, 안 하면 불의이고, 술 먹고 사기치고 바람피우면 악함이고, 이런 짓을 안 하면 착함이라고 규정해 놓은 겁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이 규정을 안 어기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인간들의 윤리와 도덕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의 선은 하나님 앞에 의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규정대로 산 사람은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규정대로 살지 못한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게 되면 일평생 교회가 정한 규범을 어기지 않으려고 싸워요.

결국 인간의 행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의 법 아래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일을 벌리시는 겁니다.

인간의 죄관을 뜯어고치는 일을 벌리십니다.

여기에 동원된 사람이 다윗이에요.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죄를 완전 범죄로 꾸미려고 밧세바의 남편인 충신 우리야를 죽였어요.

우리야는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 참예한 장수에요.

그런데 다윗의 간음 사건을 숨기려고 하는 제물로서 죽임을 당했어요.

고작해서 다윗이 바람피운 것을 감추려고 충신을 죽였어요.



그 충신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런 충신을 우리가 죽였어요.

우리 죄 때문에 말이에요.

 

우리야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에요.

헷 족속이에요.

이방인이에요.

이스라엘 밖에서 온 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전쟁에 참예하여 다윗의 간음 사건으로 인하여 죽임 당하였어요.

 

우리야는 곧 예수님을 상징해요.

예수님은 인간 입장에선 이방인이에요.

세상 밖 외부에서 오신 분입니다.

오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 투입이 되어서 우리의 죄 때문에 희생제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하늘나라 라는 이방에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이 벌리시는 인간들이 죄와 싸우는 전쟁에 투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벌리는 전쟁은 죄와 싸우는 전쟁이에요.

그 전쟁에 참예하다가 하나님의 백성들에 죄 때문에 죽임 당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은 다윗과 같이 자기백성들이 벌린 간음 사건으로 인하여 우리야처럼 희생당하신 겁니다.

 

우린 다윗이에요.

완전 범죄를 꿈꾸는 그런 악당이라구요.

예수를 죽음에 내 몬 장본인이라구요.

우리는 눈만 뜨면 나 살기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다윗이 충신인 우리야를 죽였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충신인 예수님을 죽이고 있어요.

 

우리야는 예수님의 모형으로 사용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족보에 보면 솔로몬의 아비를 다윗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낳은 자식이라고 등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솔로몬은 우리야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우리야가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간 것은 곧 우리야는 예수님의 모형으로 존재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야는 예수님처럼 인간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죽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를 어떤 식으로 고발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이고 난 후 죄가 감추어졌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자기 마음은 왠지 개운치가 않는 겁니다.

선악의 법이 간음과 살인을 죄라고 지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선악의 법이 다윗에게 너는 간음한 놈이고 살인 한 놈이라고 늘 추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괴로운 거예요.

 

그래서 시편 32편을 보면 자기가 죄를 토설치 않고 있을 때 종일 신음하였다고 합니다.

뼈가 녹아내리는 것과 같고 진액이 말라서 여름 가물에 마름 같다고 했어요.

너무 괴로운 겁니다.

하나님이 네 이놈 그러는 것 같으니 미치겠는 겁니다.

 

자 보세요.

다윗이 간음치 않고 우리야를 죽이지 않았을 땐 괴로워했겠어요?

안했겠어요?

안했겠지요.

 

다윗은 지금 자기 몸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어요.

지금 간음하고 살인하고 나서 괴로워하잖아요.

결국 자기 몸에 일어난 현상으로 신음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다윗의 죄관은 자기 행위로 인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로 인하여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그런 죄관과 그런 의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간음치 않고 살인치 않았을 땐 하나님 앞에서도 뻔뻔스럽게 죄인 아닌 척 태평하게 희희낙락하면서 살던 자가 간음하고 살인한 일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죄관을 수정시켜줄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했어요.

그래야 간음하고 살인하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여도 자신은 죄인이며 이런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어요.

 

다윗은 간음이나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가 죄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간음하고 난 후 죄에 대하여 탄식하였어요.

이런 죄관이 바로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 인간들이 알고 있는 죄관이에요.

인간들은 인간들의 행위에서 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행위에서 죄다 아니다 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런 죄관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죄관이었다고 한다면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이기 전에 못 하도록 말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이 범죄하고 난 후 나단 선지자를 보낼 정도로 다윗을 감찰하였다면 그럴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일컬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어요.

그럼 다윗의 간음과 살인이 죄라고 한다면 진즉에 말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죄를 지을 때는 모른 척 하다가 죄를 짓고 나자 추궁을 하잖아요.

이는 다윗의 죄에 대한 인식론을 바꿔주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요.

우리도 우리 행위로 죄다 아니다 판단하고 있어요.

그래서 자기가 착하게 살았다고 하면 죄 안 짓고 살았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러면 자신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처럼 자기 마음에 합한 자들에겐 우리 자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건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범죄하게 하여서 우리 자체가 죄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만드세요.

이럴 때 비로서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범사가 감사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보아야 남을 판단하지 못해요.

자신이 더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일 무서운 사람이 자기 행실이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마치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과 같아요.

그 속에 아버지로부터 용서받음이 없기 때문에 동생의 잘못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안 나오는 겁니다.

 

성경은 이걸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악당이냐!

죄 안 지었다고 하는 놈들이에요.

자기 자체가 죄덩어리 라는 것을 모르니 착하게 산 것을 의라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암튼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에요.

다윗이 괜찮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셔서 그래요.

우리는 착각하기를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니 다윗이 착하거나 괜찮은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이건 뭐와 같은가 하면 여러분이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과 같아요.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그를 예쁘게 보아서에요.

내 눈에 예쁜 것이지 다른 사람의 눈에 예쁜 것이 아니에요.

예쁜 것은 각자의 기준이에요.

그런데 이를 모르고 스스로를 난 예쁜 사람이야 라고 하면 남들이 흉을 봐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예쁜 구석이 있어서 예뻐한 것이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예쁘게 봐 주신 겁니다.

그러니 다윗이 스스로 난 예뻐 그러면 안 된 다구요.

 

사무엘의 증거를 보면 다윗은 볼품이 없어요.

사무엘의 눈에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이 출중했어요.

그래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자 했어요. 

그럴 때 하나님이 나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본다고 하면서 다윗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선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놓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가장 미천한 자를 기름 부어 왕을 삼은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 주제를 모르고 의로운 자로 남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넌 의로운 자가 아니라 아주 볼품없는 놈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간음 사건이 터지고 살인 사건이 터지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이 갈 데까지 가도록 가만히 둔 것입니다.

다윗이 죄를 범할 때는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막상 범죄하고 난 후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죄를 폭로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다윗의 죄관을 바로 잡아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음하고 살인한 것으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간음하고 살인 한 것이 죄가 아니고 너 자체가 죄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너의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너 자체가 죄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네 행위에서 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너 자체가 죄라는 나무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죄의 나무에선 죄라는 열매가 열려요.

그러므로 네가 하는 모든 짓이 죄라는 것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간음을 했든 하지 않았든 너라는 인간은 본질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려 주신 겁니다.

 

시편 51편이 그 내용입니다.

 

시 51:1-19=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죄가 자기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아! 내가 죄악 중에 출생을 했구나!

나 자체가 죄이구나!

이걸 죄악이 나를 이기었다!

또는 죄악이 나를 삼키었다고 합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통해서 새로운 죄관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마치 성령의 역할을 한 겁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책망한다고 했잖아요.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기존의 죄관을 죄라고 책망하고 있는 겁니다.

 

나단의 책망을 듣고 다윗은 죄관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간음한 것은 죄가 토해내는 한 부분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 몸에서 죄다 아니다 구분 한 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렇게 되어야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이럴 때 산다는 것 자체가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삶에 그대로 적용하세요.

 

우린 죄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어요.

무엇이 죄입니까? 라고 물으면 안 되어요.

죄인에게서 무엇이 죄입니까? 라는 말은 죄 아닌 것도 있다는 말이 되어요.

그러나 죄인에겐 죄 아닌 것이 없어요.

다 죄에요.

그러므로 인간에게선 의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죄와 죄들은 달라요.

이걸 병으로 비유합시다.



죄는 감기이고!

죄들이란 감기 걸리면 나타나는 현상들과 같아요.



감기가 콧물을 나게도 하고,

목을 아프게도 하고,

두통을 일으키게도 하고,

뼈마디가 쑤시고 으슬으슬 춥게도 해요.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의사들은 감기라고 진단을 해요. 

그럼 의사는 그 증상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그 증상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인 감기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현상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원인을 고치는 겁니다.

우리가 몸으로 행하는 것은 죄들이에요.

 

죄는 우리 몸 자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의 몸을 멸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 아래서 난 몸을 바꿔치기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몸으로 한번 죄가 얼마나 집요한지 알아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미워져야 해요.

야! 나 같은 인간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선 악이라는 것을 절감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몸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너무도 절감하였기 때문에 몸에 구속을 기다린다고 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언제쯤 나를 육신의 장막에서 거두시고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을 덧입게 해 주실 것입니까 라고 읍소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우리에게 다가오면 아픔으로 나타나요.

우린 죄를 숨기고자 해요.

그럼 하나님은 그 죄를 드러나게 만들어서 우리 본래의 자리인 죄인의 자리에 앉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몸을 타깃으로 삼아서 죽이는 일을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암튼 우린 죄인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의 증상들은 다양하게 나타나요.

하나님은 이런 증상들을 율법으로 알려 준겁니다.

 

십계명을 보세요.

죄가 들어오고 나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을 싫어하는 증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또한 인간관계에서는 이웃을 해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살인으로 나타나고,

도적질로 나타나고,

거짓 증거로 나타나고,

간음으로 나타나고,

부모 거역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모든 죄는 항상 자기 몸뚱아리 살리기 위하여 남을 해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하나님도 자기 몸뚱아리를 위하여 믿고 이웃도 자기 몸뚱아리를 위하여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가 중요하지 않아요.

내 몸이 중요해요.

 

예수는 내 몸을 위한 이용 대상일 뿐이에요.

이건 버리려고 하지 마세요.

이건 우리 몸뚱아리가 살아 있는 한 버려지지 않아요.

 

하지만 버리려고 싸우세요.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아무리 싸워도 우린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싸우세요.

지독하게 싸우는 것만큼 죄의 지독함도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 몸을 치면서 넌 죄인이라는 사실을 까발리는 일을 벌이시는 겁니다.

 

너는 너 몸 밖에 모르는 놈이라고 죄를 까발리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죄인에겐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모두가 내 몸뚱아리를 살게 하는 이용대상일 뿐이에요

신자는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어떤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더 절감하고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에겐 의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 안에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피뿌림이 자기에게 일어난 것을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우린 나아지지 않아요.

예수 아무리 잘 믿어도 안 되어요.

한 가지 나아진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욱더 심도있게 절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악 중에 출생을 했다는 것은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에게선 죄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짓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됩니다.

상한 심령이란 절망을 말해요.

아! 난 가망성이 없구나!

아! 나는 소망이 없구나!

나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하는 자이구나! 를 깨닫게 되니 상한 심령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를 못 이기니 절망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말씀 앞에 서면 절망하여야 해요.

하나님 말씀은 너무도 세미하여서 의인이라야만 지킬 수가 있어요.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어요.

 

의인은 오직 예수님뿐이에요.

그러므로 모든 말씀은 예수님이 지키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의 끝에 가면 예수님 홀로 남아야 해요.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이 남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어질 때 나를 보지 않고 주 예수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산다고 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은 다윗의 실존을 알려주려고 다윗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려고 밧세바를 미끼로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상황을 만드신 거예요.

다윗이 덥석 물 수밖에 없는 미끼를 던진 겁니다.

 

만약에 밧세바가 늙은 할머니였으면 다윗이 성욕이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이를 아시고 가장 아름다운 싱싱하고 젊은 여인을 아주 선정적으로 목욕을 하게 만든 겁니다.

안 물고는 배길 수 없도록 말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보는 순간 한 눈에 뽕 갔어요.

얼마나 예뻤으면 첩이지만 그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해 주었겠어요.

밧세바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해 주었다는 것은 다윗은 밧세바에게 푹 빠져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식으로 자기 백성들이 죄를 들추어내고 계세요.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유혹해요.

인간이 거부 할 수 없는 것으로 유혹해요.

안 물 수 없는 것으로 미끼로 사용하세요.

기어코 넌 죄인이라는 사실을 폭로시켜요.

 

우린 매일 같이 이런 미끼를 물고 있어요.

죄는 항상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다가와요.

선악과는 우리가 반드시 따 먹도록 되어 있어요.

따 먹을 수밖에 없어요.

죄는 육신에 쾌락을 주거든요.

자기 육신을 이길 장사는 없어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죄 짓고 사는 일이에요.

죄가 얼마나 달콤한데 이기겠어요.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도 죄를 즐기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쾌락을 싫어하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결국 인간은 자기 몸뚱아리 끌어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인 겁니다.

그러니 난 죄 안 지을 거야! 라고 하지 마세요.

아직 그 기회가 안 닥쳤을 뿐이에요.

 

스스로 의인인체 한다면 그 사람이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이 죽기 전에 그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실 것입니다.

기어코 죄인의 자리에 앉게 만들어서 예수의 피를 뿌려서 구원을 해 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징계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고 계시는 겁니다.

 

우린 복음을 좋아하지 않아요.

다만 복음을 이용할 뿐이에요.

그러니 복음을 빙자하여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잖아요.

어디 한번 복음에 사로잡혀서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고 산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우리 몸이 그걸 원치 않아요.

인간은 자기 몸 밖에 몰라요.

자기 육신의 쾌락을 위해서 하나님도 이용하고 남편도 이용하고 아내도 이용하고 친구도 이용하고 이웃도 이용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죄의 깊이를 알아가는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숨겨진 죄가 발각 될수록 우린 할 말을 잃어가게 되어요.

그러면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은 더욱 더 빛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 죄가 까발려 질수록 예수님의 공로는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일부러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복음을 잘못 이해하는 어떤 부류들은 우리가 죄를 지을 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더 드러나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어요.

그래서 교회에서 아무것도 안하는 자들이 있어요.

이런 자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해요.

싸우면서 자신의 한계성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자기의 죄가 고발 당하여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살아서 양날 가진 칼이 되어서 우리의 언행심사 모든 것을 죄라고 고발하여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죄인의 모습으로 서게 만들어요.

 

우린 복음 복음 해도 세상 영광 앞엔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안 무너지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흙에서 난 자가 어찌 흙에서 난 것을 거부한단 말입니까?

못해요.

우리의 몸은 세상(흙)에서 나왔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간음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이라고 하여도 우린 세상을 사랑 할 수밖에 없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다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고 마귀적인 것이라고 알려 주어도 우린 버릴 수가 없어요.

 

이건 우리 육신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들이에요.

너무도 달콤하기 때문에 막으면 또 넘어가고 막으면 또 넘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이런 말씀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존재의 한계성을 더 절실하게 깨닫도록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원수들이에요.

그럼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해요.

그럼에도 저주 받지 않고 사는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범죄한 다윗이 마땅히 저주 받아 죽어야 하는데 우리야가 대신 죽어준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처럼 세상과 늘 간음하면서도 저주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우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어요.

 

다윗은 이 죄는 우리가 드리는 제사라는 행위로 해결이 될 문제가 아니고 흠 없는 분의 대신 죽음으로서만 해결이 된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래서 자기 죄 때문에 흠 없는 충신인 우리야의 죽음을 근거로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은 내 대신 주께서 꺾은 뼈가 되게 해 달라고 한 겁니다.

 

이 얼마나 자기 자신의 한계성을 잘 알고 토해내는 고백인가요.

이건 뻔뻔함이 아니고 믿음이에요.

주여!~ 난 죄 안 짖고 살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그 은혜로 나를 덮어주옵소서! 라는 신앙고백인 겁니다.

 

내 죄의 깊이를 아는 것만큼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감사의 농도가 달라져요.

많이 탕감 받은 자라는 것을 알아 가야 합니다.

내가 바로 탕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다윗처럼 주여!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죄악 중에 출생한 이 죄인을 긍휼히 여겨 주소서!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곧 우리가 토하여야 할 고백이에요.

우리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게 예수님이 아버지께 나아가게 해 주신 길인 겁니다.

막힌 담을 헐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넘어 갈 수 없는 죄라는 막힌 담을 예수님이 자기 육체로 허물어 버리신 것입니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자기 육체로 산 길을 열어 놓았다고 합니다.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이런 길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아요.

오직 택함을 입은 성도에게만 주어져요.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기에 죄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이는 은혜를 더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이런 일을 벌리세요.

 

그러므로 주께 사랑을 입은 자들은 날마다 자기 안에 죄가 낱낱이 까발라지는 혜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말이 혜택이지 이건 죽을 맛입니다.

이건 사람을 완전히 묵사발을 내는 일이에요.

쪽 팔리게 하는 일이에요.

 

아니~! 백성들 앞에서 다윗의 죄를 백일하에 다 드러나게 하는 것이 어찌 사랑이란 말입니까?

우리들의 사랑 법은 허물을 덮어주고 감추어주는 것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법은 없는 기어코 죄인의 자리로 끌어 내리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입을수록 인간적 가치성은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갈수록 후패해 지게 되어 있어요.

육신이 후패해져 가는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내가 장대에 높이 달리면 너희를 하늘로 이끌겠다고 했지요.

십자가가 곧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천국의 문은 하늘 쪽에서 열어주지 아니하면 결코 열리지 않아요.

그 누구도 열지 못하였어요.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열어 주셨어요.

그러니 우린 그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아버지께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길이란? 이 쪽과 저 쪽을 연결해 주는 통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과 하늘을 이어 주는 통로에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서만 열려지는 길이란 말입니다.

 

이걸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천국을 애굽과 가나안이라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애굽은 이 세상을 상징하고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애굽과 가나안에 홍해라는 바다가 가로 막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선 바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냥 바라만 보아야 해요.

 

그런데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뒤에는 자기들을 죽이겠다고 애굽에 군대가 쫓아오는 두려움 속에서 바라보아야 해요.

우리도 죽음 앞에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요.

 

이럴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죽음에서 살아날 길을 하나 내어 줍니다.

바다에 길이 하나 떡허니 열린 겁니다.

이제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모세에게 속하여서 이 길을 건넜다고 증거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봅시다.

 

고전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바울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바다 가운데를 지났는데 혼자 지난 것이 아니고 모세에게 속하여 지났다고 합니다.

여기서 속하였다는 것은 품에 안고 건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죽음 속에 모세가 뛰어든 것입니다.

모세가 대신 죽은 겁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죽음으로 홍해 길을 건넌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이 하실 일을 예표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 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럼 홍해 바다 속에 있던 길이 예수님이란 말이 됩니다.

그래요.

홍해바다 길이 예수님입니다.

홍해 바다에 들어 간 것은 죽음을 상징해요.

 

그래서 바울은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홍해바다를 건넌 것은 죽음을 건너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이스라엘은 모세 품에 폭 감싸져서 홍해를 건넜다고 했습니다.

이러면 모세 혼자 죽고 이스라엘은 죽지 않음이 됩니다.

모세는 죽었는데 이스라엘은 살아난 셈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죽음 안에서 살아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신약으로 해석하면 성도가 천국을 가는데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걸 대속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은 인함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그가 죽음으로 우리가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는 말은 너희는 내 죽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께 나아 갈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길이 되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제 우린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진리이고 생명입니다.

 

이는 곧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예수님의 죽음으로만 열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길을 산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이란 말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열어준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길이고, 이 길을 통하여서만 아버지께로 나아 갈 수가 있게 되어 있기 때문에 만고불변의 진리가 되는 것이고, 이 진리 안에서만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길을 하나 만드신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십자가 안으로 초대 합니다.

죽음이라고 들어갔는데 그 곳이 생명의 세계인 겁니다.

 

그 속에 들어가면 예수님이 계세요.

마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이라는 죽음 속에 들어갔더니 그 속에 신(神)의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는 십자가를 죽음으로 보지 않고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저주가 아니라 복이에요.

 

부디 이 영안들이 열리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버지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이 길 따라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열어주신 이 길 이외는 보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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