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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85강. 베드로의 착각 (요 13:36-38)

by coroa 2021. 11. 24.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85강. 베드로의 착각 (요 13:36-38)

-.정낙원 목사

 

요 13:36-38=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사람은 착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는 자기 주제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죽은 자로 봅니다.

그러나 인간은 난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라고 합니다.

 

이게 착각이에요.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하면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한다고 나섭니다.

이게 자기 가능성입니다.

인간은 잠시라도 자기 가능성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이건 죽을 때까지 안 되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 옳음을 정당성으로 가지고 구원을 받고자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

그래도 난 착하게 살았으니 천당에 간다고 합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모두가 상대적으로 자신은 덜 악한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변에 사람들과 비교하면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기 몸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든지 자기중심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고 살고자 합니다.

이러한 본능이 누군가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간섭하면 반발하고 적개심을 품게 됩니다.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외부로부터 간섭 받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부모가 간섭하면 울어 버려요.

울음으로서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왜? 날 간섭하느냐! 라고 하면서 자기 주권을 사수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는 하늘 위에서나 하늘 아래서나 자기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나 이외 다른 신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날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죄가 독자적으로 살도록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왕(하나님, 신)이 되었어요.

죄가 모든 인간을 왕(신, 神)으로 만들어 놓았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에 대한 가치를 부여합니다.

타인과 비교하여서 자신이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상대적 비교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자신이 잘하고!

믿음도 더 좋고!

복음도 자신이 더 많이 알고!

인간성도 자신이 낫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분이 웃으십니다.

어이구~ 저 꼴통들!

자기 주제도 모른 체 잘난 척 날뛰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을 일컬어 목이 곧다고 하고 교만하다고 하는 겁니다.

 

모세는 성령의 감동으로 인간의 본질을 알려 줍니다.

너희 인간은 흙이라고 합니다.

그 흙으로 사는 인생도 기껏해야 칠 팔십년이라고 합니다.

그 칠 팔십년 사는 것도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어떤 자인지 아는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가 자신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가 가려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이 깨닫게 해주셔야지 만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자기 본질을 알고 나면 화들짝 놀랍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 보니까 자기는 불타 버릴 쓰레기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왜? 불 가운데로 강림 하십니까?

이는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쓰레기로 보아요.

그럼에도 죄인들은 이런 사실을 몰라요.

자기 주제도 모른 채 하나님을 돕겠다고 합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자신이 쓰레기인줄 알았어요.

자기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배설물임을 알았어요.

배설물이란? 무가치 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의인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자신은 의인이 아니라 저주 받아야 할 죄인중에도 괴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의라고 생각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토해내었습니다.  

율법 아래선 분명히 존귀한 것임에도 예수 안에서 보니 한낱 쓰레기라는 것을 안 겁니다.



베냐민 지파로서 왕 족이라는 자신의 “가문”도 배설물이고!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는 자신의 “학벌”도 쓰레기이고!

바리새인으로서의 종교적인 “열심과 충성”도 죽은 몸짓이었고!

하나님께 대한 열정도 다 하나님 앞에 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돕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보니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마귀 일을 한 것임을 안 겁니다.

자신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해가 됨을 알았어요.

이게 하나님을 바로 만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엘리야처럼 자신의 열심과 특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설치는 군상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엘리야처럼 왜? 내 특심을 몰라주느냐고 아우성입니다.

 

저도 과거에 울산 복음화를 한다고 “주여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밤이슬 맞아 가면서 산 기도를 엄청 많이 했어요.

교인들을 구름떼 같이 벌떼 같이 보내달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가관이었어요.

 

다행히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을 해 주지 않았기 망정이지 응답이라도 해 주었으면 지금은 거짓 선지자로서 거짓 신자들을 추수하는 추수 꾼으로 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 기도를 안 들어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전 하나님이 제가 다른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 기도한 것을 안 들어준 것을 너무도 감사해요.

 

우린 우리의 기도를 안 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한 기도대로 우리 인생이 펼쳐졌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여잡고 있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을 겁니다.

사단의 종노릇하고 있을 거에요.

 

우린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설쳐 댔습니까?

열심과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동분서주했잖아요.

새벽부터 밤 잠 안자고 철야하면서 주의 일꾼이 되겠다고 기도했잖아요.

하나님은 왜? 내 정성을 안 들어주느냐고 원망을 했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열정이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란 것을 몰랐어요.

우린 호세아 시대처럼 열심히 많을수록 하나님의 노를 더 쌓게 되는 일을 한 것입니다.

 

호세아 10장을 봅시다.

 

호 10:1-2=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2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보세요.

이스라엘은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고 주상을 아름답게 한다고 하지요.

한마디로 열심을 낼수록 우상숭배만 더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인간들 열심만 들고 나온 겁니다.

그러니 제사보다 긍휼을 배우라고 소리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제단을 무너뜨리고 그 주상을 깨트리는 일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시대 버전으로 하면 교회가 부흥 할수록 타락하고 교인들의 열심이 특심할수록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과 충성이라는 종교적인 업적과 성과들을 허무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고 계신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열심으로 맺은 열매가 많을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괜찮은 인간으로 만들지 않고 못난 인간임을 폭로시킵니다.

죄인임을 깊이 알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얼굴을 못 들도록 만들고 할 말이 없게 유구무언(有口無言)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은 왜? 인간의 열심과 정성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죄가 되는지를 살펴볼까 합니다.

 

옛말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주제를 모르면 무식하게 용감해 집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꼬라지를 아는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기 이전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고 하니 베드로가 같이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만찬을 하시고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아니 가기를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저는 주님이 어디로 가든지 가겠습니다.

자신은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니다!

내가 가는 길엔 너희들이 따라 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넌 날 위해 목숨을 버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모든 제자들이 고백이기도 하고 또한 우리 모든 성도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모든 성도들을 대표로해서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누가복음 22장에서 더 소상하게 나와 있으니 누가복음을 참고해 봅시다.

 

눅 22:31-34=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이제 유월절이 되면 예수님은 작정대로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하나님이 사단에게 예수를 죽이는 일을 벌리도록 허락을 하십니다.

그러자 마귀가 가룟 유다로부터 시작해서 대 제사장과 로마 총독과 군병들을 충동질하기 시작을 합니다.

온 백성들의 마음도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한 거대한 물결이 온 세상에 출렁 거리기 시작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제자들에게 이제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알립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니 제자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 서로 의기투합해서 예수님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데도 같이 가겠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보호해 준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일사각오를 다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제자들)의 진심 어린 충정도 모르고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너희가 날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희는 나를 부인하고 저주 할 것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장담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너희가 지금 어느 권세아래 있는 줄 모른다는 겁니다.

너희는 사단의 권세 아래 있다고 합니다.

사단이 지금 널 밀까부리듯이 갖고 논다고 합니다.

 

그래서 넌 날 배신하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넘어지고 난 후에 내가 일으켜 세워주면 그 때 사람들에게 야! 신앙은 장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힘으로 에수를 믿을수 없다는 말을 해 주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인간의 실존을 알려주고 또한 너희는 사단의 권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각오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붙잡아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로보건데 우린 예수조차도 우리 마음대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인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린 그 어느 것 하나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실존입니다.

물론 인간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우린 머리털 하나 검거나 희게 할 수가 없어요.

이는 우리 인생사를 우리가 좌지우지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시 139:1-5=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여호와는 우리를 감찰하신다고 합니다.

손바닥에 놓고 다 보고 계십니다.

감찰 하신다는 말은 늘 보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보고 계시고!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의 마음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시며!

내가 지금 어디에 눕고 있으며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훤히 다 보고 계시고!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원망하는지 불평하는지 감사하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시고 우리의 언행심사를 다 알고 계세요.

그래서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신 겁니다.

 

마치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자식들을 훤히 꿰고 있듯이 말이에요.

부모는 자식이 이 놈이 거짓말을 하는지 다 아는 것과 같아요.

우린 여호와의 눈길을 피할 수가 없어요.

별 나라에 도망을 가도 거기서 끌어내리시고!

바닷 속에 숨을지라도 거기서 불러내세요.

 

지금 예수님이 베드로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어요.

그래서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네 정성은 고맙지만 받을 순 없구나!

오늘 밤에 넌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물론 베드로는 아니라고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였지만 말이에요.

베드로의 장담대로 우리의 믿음을 우리가 지킬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럼 우린 전부 순교해서 천국 맨 앞자리에 앉아 일을 것입니다.

천국에 맨 앞자리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암튼 우리도 베드로처럼 신앙을 장담하고 있어요.

그래서 눈만 뜨면 각오를 다지곤 하잖아요.

그러나 단 한 번도 각오를 다지고 작심을 하여도 그 각오와 작심대로 살아오지를 못했어요.

이게 우리의 한계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자기 주제도 모른 채 착각하고 있어요.

 

우리를 둘러싼 마귀의 세력이 우리보다 강해요.

그러니 장담하면 안 되어요.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담을 믿지도 않을뿐더러 베드로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여도 섭섭해 하지 않은 겁니다.

이미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체질을 아신다는 이것이 우리에겐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구원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이 그래서 복음인 겁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우린 이런 면죄부를 받았어요.

이걸 얼마나 깨닫느냐에 따라서 감사의 농도와 깊이가 달라집니다.

 

베드로의 장담을 통하여서 우리 인간들의 죄를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어떻게 미혹하고 죄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서 나타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힘이 예수님의 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는 길을 자신도 따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지금은 따라 올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까지 되어 있었어요.

진심이에요.

 

베드로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예수님을 따를 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각오를 다지고 장담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매정하게 거부합니다.

넌 아직 너를 몰라서 그런다는 거에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육에 한계를 알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 가능성으로 접근해요.

그래서 뭐든지 시켜만 주시면 다 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이게 죄에요.

 

죄는 교만으로 나타나요.

성경에서 죄인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날 뛴다는 말입니다.

이걸 교만이라고 해요.  

하나님은 인간의 주제를 알게 하시려고 인간이 감당 할 수 없는 것을 주십니다.

이게 율법이에요.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것은 죄인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신들은 선민이라는 겁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못 섬겨도 자신들은 섬길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고 알려 주시려고 시내 산에서 율법을 준 겁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어겼어요.

하나님께 너희는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이 어디 말을 들어 쳐 먹는가요?

그래서 하나님이 두들겨 패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죄란? 항상 자기 가능성을 앞세우고 나아와요.

이걸 자기 의라고 합니다.

베드로도 지금 자기 가능성으로 나아오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게요! 라고 나아오는 겁니다.

베드로는 지금 자기 자신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넌 믿을 자가 아니야!

넌 안 돼!

내가 널 지켜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을 잘 믿을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목사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가르쳐요.

교인들에게 마음을 단단히 하고!

각오를 굳게 하고!

결단을 하라고 하잖아요.

다 열심이 부족하고 의지가 약해서 그렇다고 하잖아요.

이게 마귀 소리인줄 몰라요.

 

예수님의 증거는 믿음이란? 인간들이 마음먹는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지만 믿음을 지켜내는 것도 우리 뜻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가 요만큼이라도 믿는 것은 다 예수님의 기도 덕분이에요.

예수님의 공로가 아닌 것이 없어요.

다 예수님 공로에요.



사도요한의 증거를 들어봅시다.

 

요한 일서 2장입니다.

 

요일 2:1-5=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사도요한이 말합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에게 바람은 너희가 죄 안 짓고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너희는 죄를 안 지을 수가 없단다!

이는 너희가 죄를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 앞에서 변호를 하신다고 합니다.

어떻게 변호하는가 하면 자기 자신이 화목제물이 되어서 변호 한다고 합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이걸 계명이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 너희들은 이 계명 즉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맺은 새 언약을 기억하고 있으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이 계명을 아는 자는 예수와 사귐이 있는 자이고 이 계명을 모르면 자는 그 속에 진리가 없는 자로 간주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도는 죄를 안 짖는 자가 아니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자임을 알고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살고 있음을 아는 자인 겁니다.



성도란?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에요.

자기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에요.

 

그러므로 자신은 예수의 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성도에요.

이걸 알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믿게 하려고 믿음을 주셨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는 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았어요.

그러니 믿음은 하나님 것이에요.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믿음의 주인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을 준 성도는 하나님이 그 믿음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베드로의 믿음이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계신 겁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믿는 것도 예수님이 대언자가 되셔서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우리 믿음을 자랑할 것이 아니고 주님께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자기가 지켜 내려고 합니다.

이건 기독교가 아니고 불교에요.

자기가 지키는 것은 불교이고 자기는 못 지키고 예수님이 지켜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에요.

 

흔히들 씨 뿌리는 비유를 가지고 각오를 다지고 결단을 요구합니다.

길가 밭이 되지 말고!

돌짝 밭이 되지 말고!

가시 밭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맺는 좋은 밭이 되라고 합니다.

 

밭을 마음으로 비유하잖아요.

새를 쫓아내고!

가시를 뽑아내고!

돌을 파 내라고 하잖아요.

 

새는 사단이고!

가시는 나쁜 습성이고!

돌은 고집이라는 식으로 말하잖아요.

기도하고 성령 충만 받아서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서 좋은 밭이 되라고 하잖아요.

 

그럼 교인들은 좋은 밭이 되겠다고 합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열심히 오르면 반드시 오른다고 하면서 경주하잖아요.

과연 그러할까요. 

 

인간 자체가 사단이고!

인간 자체가 악이 가득한 죄 보따리이고!

인간 자체가 목이 곧은 자인데 어찌 이런 것을 뽑아내고 없앤단 말입니까?

이건 불가능해요.

 

그러니 씨 뿌리는 비유는 우리더러 개과천선(改過遷善)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더러 좋은 밭이 되라는 것이 아니에요.

좋은 밭은 이 세상에 없어요.

그 어떤 인간도 좋은 밭이 될 수 없어요.

우린 본질적으로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자에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라고 땅을 저주해 버리지요.

그리곤 근본 된 토지를 갈라고 하시지요.

아담에게 있어 근본 된 토지란 아담 자신이에요.

아담의 근본이 흙이잖아요.

 

하나님은 땅을 저주했어요.

그 땅은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담 자체를 말해요.

아담은 흙에서 나왔어요.

 

그러므로 아담의 근본은 흙인 겁니다.

땅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아담 속에 가시와 엉겅퀴가 있는 겁니다.

죄가 가시와 엉겅퀴가 되어서 아담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나오는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생각과, 각종 더러운 것이라고 했어요.

이런 것이 사람 안에 있다고 했어요.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했어요.

 

인간 속엔 이런 것이 가득 들어 있어요.

죽이는 것들만 가득해요.

그래서 인간은 죽은 것들만 내어 놓는 겁니다.

인간들은 이런 악을 내어 놓으면서 사람을 죽여요.

이런 것이 사단이고 가시이고 돌짝이에요.

 

세상에선 이런 것을 없애라고 교육을 해요.

그러나 이런 것은 교육으로 없애지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감추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서로 사기 치는 겁니다.

 

사람들이 사람을 연구해 보니 선한 면도 있고 악한 면도 있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지킬박사와 하이드” 라는 겁니다.

지킬 박사는 낮에 활동하는 사람으로서 선한 사람인데,

하이드는 밤에 활동하는 사람으로 악한 사람이에요.

둘이 하나에요.

선도 있고 악도 있어요.

성경은 이걸 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선과 악 중에서 선은 장려하고 악은 멀리하라고 교육을 합니다.

교육으로 지킬 박사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사람 속엔 선도 있고 악이 있는데 교육으로 이 악을 없애자는 겁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면 선한 사람이라고 하고 악을 행하면 악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선과 악이 한 세트인지 몰라요.

선이 있는 곳에 악도 함께 있어요

.

강도들이 강도짓을 해서 남에 돈을 빼앗아서 고아원에 돈을 보내는 것도 선과 악이 함께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겁니다.

이런 선과 악은 교육으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죽어야 없어져요.

죄를 없애야 사라져요.

 

그러니 씨 뿌리는 비유를 가지고 인간에게 좋은 밭이 되라고 하는 것은 사기에요.

인간은 좋은 밭이 될 수가 없어요.

예수 믿어도 안 되어요.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안 되어요.

죄 없는 사람이라야 좋은 밭인 겁니다.

 

그럼 좋은 밭이란? 죄 아래서 나지 않은 예수님뿐이에요.

예수님만이 좋은 밭이에요.

이제 예수님이 성도 안에 들어와 계세요.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주인으로 관리하세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좋은 밭은 예수님이 관리하는 밭이 좋은 밭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밭이란 예수님이 농부가 되어서 관리해 주는 밭이에요.

 

이걸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로 말씀 하셨어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입니다.

우린 그 가지입니다.

가지는 나무에서 공급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그 열매는 가지의 것이 아니고 나무가 맺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성령의 열매라고 해요.

 

성령이 우리 육신의 소욕과 싸우면서 툭툭 터져 나오게 하는 열매가 있어요.

이 열매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오는 열매들이에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맺은 것이 아니고 성령이 맺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걸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해요.

하나님이 각양의 모습으로 살게 한단 말입니다.

 

열매를 삶이라고 합시다.

그럼 성도가 토해내는 삶 속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는 것들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성도는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서 살아서 일하시고 계신 예수님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랑되어지지 않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 사실을 알려 주었어요.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하는 능이 있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능력이 있고!

자신을 불사르는데 내어주는 희생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어요.

 

잘 들으세요.

이게 무주 무지하게 중요한 말씀이에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으세요.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하는 능이 있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능력이 있고!

자신을 불사르는데 내어주는 희생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지요.

이 모든 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꽝이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은 사랑이 없이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성령으로서만 이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복음을 말하면 다 주의 종인줄 알잖아요.

이게 무서운 겁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요.

바울이 가만히 보니 고린도교회 안에 엄청난 사람들이 있는 거에요.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을 하고!

크고 비밀한 것을 알고!

모든 지식을 말하고!

산을 옮길 만한 능력을 행하고!

자신을 불사르는데 내어줄 정도로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니 사랑으로 하고 있지 않는 겁니다.

사랑이 없으니 이러한 일로 서로 경쟁하고 잘난 척하고 분쟁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건 지식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이건 아니라는 거에요.

사랑은 덕을 세우지 교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은 덕을 세우고 지식은 교만케 한다고 나무라고 있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주신 귀한 은사를 받아서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연약한 자들을 섬기고 베풀고 안아주고 하여야 하는데 상좌에 앉아서 으뜸 노릇을 하고 사람들에게서나 교회에서 거치는 자로 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망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가짜라고 하는 겁니다.

고린도교회가 많은 책망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께 받은 은사라고 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서로 잘난 척하면서 분쟁을 일으키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심정으로 내가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사랑이 뭡니까?

예수님께서 계명을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했지요.

 

계명이 뭡니까?

새 언약이지요.

새 언약은 예수님이에요.

그럼 사랑을 의인화(擬人化) 하면 예수님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사랑이 없다는 것은 그 속에 예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행한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행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럴 순 없다는 거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나옵니다.

예수님 없이도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마귀도 이런 말을 하고 이런 일들을 행하게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흉내 내는 자에요.

 

그러므로 마귀도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을 하고!

크고 비밀한 것을 알고!

모든 지식을 말하고!

산을 옮길 만한 능력을 행하고!

자신을 불사르는데 내어줄 정도로 희생도 하게 한단 말입니다.

 

발람을 보세요.

거짓 선지자이면서도 이스라엘을 축복했어요.

거짓 선지자 입에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이 나와야지 어떻게 축복하는 것이 나온단 말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마귀도 십자가를 말하고!

믿음을 말하고!

성경을 말하고!

자신을 비우는 삶을 살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어요.

사랑을 예수님이라고 하였으니 예수님이 한 것으로 내어 놓지 못하고 자기가 한 것으로 내어 놓는단 말입니다.

이걸 마태복음 7장에서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을 보면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와서 자기들이 한 일을 쭉 나열하면서 자랑하잖아요.

나는 주의 으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나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나는 주의 이름으로 전도도 하고 구제도 하고 봉사도 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에이~ 이 나쁜 놈들아 지옥으로나 가라고 하셨어요.

 

지금 고린도 교회 안에 이런 자들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서로 자기가 행한 일을 가지고 자랑하는 겁니다.

마귀는 이러한 일들을 자신이 한 것으로 붙잡게 한단 말입니다.

마귀가 한 것이니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실력이라고 자랑 하고 있으니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영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과 대조적인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순절 성령을 받고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이 때 모든 시선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쏠립니다.

야! 당신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능력을 행할 수 있느냐! 라고 따르려고 할 때 베드로와 요한은 이 일을 행하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라고 했어요.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한 것이라고 했어요.

이게 바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들이에요.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행한 능력이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기 때문에 자신들은 빠지고 예수님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사랑으로 행한 것이라고 해요.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선 이런 것과 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런 사랑이 없으면 꽝이고 거짓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왜? 그렇게 은사가 충만한 고린도 교회에 이런 말을 하는지 간과하지 마세요.

고린도 교회 안에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하는 능이 있고!

크고 비밀한 것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능력이 있고!

자신을 불사르는데 내어주는 자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모두가 그것으로 자기 자랑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다 사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말이니 잘 음미하세요.

 

이런 관점으로 목사를 판단하세요.

그럼 거짓 선지자가 누군지 알 수가 있어집니다.

그 어떤 말을 한다 하여도 자기 자랑을 하면 가짜라고 보세요.

 

그 어떤 일의 바탕에 예수님의 주 되심이 드러나지 않으면 사기란 말이에요.

그건 마귀가 행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자들은 가짜라고 하는 겁니다.

그건 자기 지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식은 소유할 수가 있어요.

공부해서 배우면 되니까요.

그러나 복음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이에요.

은사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저 받았기 때문에 거저 주는 것으로 나타나요.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인간의 자질이나 지식을 자랑 할 필요가 없어요.

복음을 전하면서 자랑한다는 것은 지식으로 전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은 그 속에 생명의 역사가 없어요.

본인이 그 복음 속에 함몰당하지 못해요.

소금이 녹아서 맛을 내듯이 복음이 자기 안에서 녹아서 그 복음에 맛을 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복음 안다는 것을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으니 복음에 합당한 맛이 나오지 않고 그와 반대로 복음 안다는 것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겁니다.

 

이런 것을 소금이 맛을 잃었다고 하고 사람에게 밟힌다고 하는 겁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 받은 모습이 나타나야 하는데 괴악한 것이 나타나고 있잖아요.

이게 모두가 지식으로 알아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삶이 반(反) 복음 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지식으로 쌓은 것으로 잘난 척하고 아는 척하는 말쟁이가 되어서 교만한 겁니다.

마귀처럼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고 교회에서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로 주어진 복음은 그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어요.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난 성도들처럼 섬기고 베풀고 나누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높은 자리에 앉지 않고 낮은 자리에 앉아서 종처럼 성도들을 섬기는 겁니다.

은사로 말씀을 듣는 자는 그 속에서 은혜와 주님의 사랑이 나와요.

긍휼이 나오고 용서가 나오고 관용이 나와요.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지식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자기의 똑똑함이나 자기 자랑이에요.

교만해요.

마치 복음을 자신만이 독점적으로 행사 할 수 있다는 식으로 거드름을 피워요.

그래서 자기가 아니면 어디서 이런 복음을 들을 수 있느냐 라는 식으로 복음을 소유화 하여 성도와 자신을 주종(主從) 관계로 맺어두고자 하는 겁니다.

 

자신은 항상 가르치는 자로서 선생 자리에 앉아서 왕 노릇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자기를 추종하는 세력을 두고서 교주 노릇을 하는 겁니다.

어느 시대고 이런 자들은 늘 일어났어요.

이단의 특징이 뭔고 하니 계시가 자기에게만 온다고 미혹하는 겁니다.

자기 혼자만 복음을 안다고 해요.

그래서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제일 무서운 것이 뭔가 하면 편견이에요.

편견이란? 한쪽으로 치우침이에요.

지난 번 신문에 보니 사람의 사고는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돌이키지 못한다는 연구보고서를 발표한 적이 있어요.

 

타블로라는 가수 이야기 있지요.

타블로는 미국의 스텐포드라는 명문 대학교를 졸업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너 같은 딴따라가 어찌 그런 명문 대학을 나올 수 있겠느냐! 라고 하면서 믿지 못하겠다고 시비를 건 겁니다.

 

인터넷에 타블로라는 가수의 학벌을 가짜라고 하면서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한다” 는 뜻에서 앞 글자를 따서 “타진요” 라는 카페를 개설해서 무차별적으로 인신공격을 한 적이 있지요.

여기엔 일명 최고 학부를 졸업한 사람들이 즐비 했어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변호사도 있고, 의사도 있고, 사업하는 분도 있고 나이도 20대에서부터 50대까지 다양해요.

 

타블로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아요.

심지어 타블로가 다녔던 학교에서 한국 경찰에서 신분을 조회한 것에 응해서 타블로는 자기 학교 출신이 맞다고 서류와 사진을 보여주어도 못 믿는 겁니다.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는 겁니다.

 

인정하기 싫다는 말입니다.

이게 편견이에요.

그러니 그 학교에서도 왜? 그런지 의아하다고 하면서 한국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불쾌해 하더라고요.

 

그래서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들이 왜? 그런가 정신 의학적으로 분석을 해 보니 인간의 편견은 한쪽으로 고정화 되면 수정이 안 된다는 겁니다.

마치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재림을 한다고 외치던 사람들이 아직도 자기들끼리 모여서 0시 예배를 드리고 주님 맞을 준비 한다고 믿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난 이렇다! 라고 생각하면 그게 고착화 되어서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편견은 정신병이라는 겁니다.

 

지난번 한00이라는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길게 기르고 다니는 목사가 월북을 하여서 남한 정부를 괴뢰도당이라고 하고 김일성을 찬양하는 짓을 하다가 구속이 되었잖아요.

나이가 그렇게 많아도 어그러진 사고는 변하지 않는 겁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다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남의 말을 안 들어요.

이런 사람은 안 변해요.

자신은 하나님 계시로 그런 짓을 했다는데 누가 말리겠어요.

 

이런 편견이 신앙으로 자리 잡으면 아주 무서워요.

제일 무서운 것이 종교적 편견이에요.

이단이 생기고 교주가 생기는 이유는 모두가 이런 편견 때문이에요.

 

육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가 믿던 것을 수정하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또한 자기 생각을 수정하면 지는 것이고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요.

그래서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는 겁니다.

이건 신앙적으로 말하면 성령 받지 않으면 안 고쳐져요.

성령이 임해야 고쳐져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 이야기를 조금 할게요.



진리는 아니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니 참고만 하세요.

예전에 제가 율법 아래 있을 때 어느 목사님을 통하여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엔 제겐 큰 은혜였어요.

종말론을 하는 분인데 한국교회에서는 대가로 통해요.

지금도 서울에서 큰 교회를 하고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엉터리인데 그 당시엔 저에겐 너무도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제가 그때 굉장히 갈급해 있었거든요.

야! 이렇게 참신하고 복음 적인 분이 있나 싶어서 10여년을 교제를 했어요.

설교를 들으면 너무도 고맙고 감동이 되어서 돈도 보내주고 그랬어요.



설교를 듣다가 뭘 좋아한다고 하면 그걸 사서 보내주고 보약도 지어보내기도 하였어요.

그 목사님이 운영하는 선교 단체에 한 동안 선교 헌금도 매달 오십만 원씩 했어요.

그 당시 저희 교회 월세가 20만원 이었으니 저에겐 엄청난 액수였어요.

그럼에도 그 분의 설교가 너무도 은혜가 되어서 한 것입니다.

이 분은 성화를 주장하면서 청교도 신앙을 강조하던 분이었어요.



한마디로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전 그때 개혁주의 성화주의를 신앙으로 믿고 있었어요.

그러니 쉽게 그 목사님의 사상에 동화가 된 겁니다.

아무 의심 없이 믿었어요.

누가 그 목사님을 공격이라도 하면 내가 나서서 변호하곤 했어요.

이 분은 철저하게 개혁주의 교회 관으로 자칭 100점 교인이라는 카드를 만들어서 교인들을 교회 중심으로 붙잡아 두고 열심과 충성과 봉사를 강조하던 분입니다.



그 땐 저도 성화주의에 푹 빠져 있던 터라 이러한 개혁주의 신앙관이 제 마음에 와 닿았던 것입니다.

당시 제가 열심이라고 하면 둘 째 가라고 하면 서러워했을 정도로 한 열심 하던 때였어요.

그런데 그 목사님이 제 마음에 딱 맞는 설교를 하니 단숨에 푹 빠지고 말았던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광(狂) 팬이 된 겁니다.



그러다 보니 그 목사님의 책이라던가!

설교 테이프라든가!

심지어 그 교회 주보에서부터 신문에 난 기사까지 그 목사님의 이름이 있는 것이면 다 귀하게 보여서 다 모으곤 하였던 겁니다.

복음을 세계에서 최고로 잘 아는 줄 알았어요.



그 목사님이 하는 말은 모두가 성령께서 깨닫게 해준 새로운 진리라고 믿었어요.

이 분은 온 세계로 세미나를 다녔거든요.

그러니 그 땐 그냥 그 목사님 이름만 들어도 좋았어요.

저에겐 신앙의 모든 판단 기준이 그 목사님의 성경 해석법이었어요.



누가 그 목사님의 설교를 비판한다거나 안 좋은 말을 하면 제가 본능적으로 화를 내고 반발을 했어요.

그 목사님을 비판하는 자는 죽이고 싶도록 미웠어요.

복음도 모르는 놈이라고 매도하면서 말이에요.

얼마나 그 목사님 설교를 많이 들었던지 나중에 보니 내가 하는 행동이며 말투가 그 목사님처럼 변해 있더라고요.



제 아내가 그러는 겁니다.

당신 말투가 왜 그래!

당신 행동이 왜 그래!

그럼 내가 뭘 어떤데! 라고 하면서 역성을 내곤 했어요.

나도 모르게 닮았던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눈만 뜨면 그 분의 설교 테잎을 늘 듣고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자연히 나와 그 목사님은 하나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이 누군가가 좋다고 느껴지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다 좋게 보여요.

그 목사님에 대한 비판 능력을 상실해요.


이는 이미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목사님을 누가 비판하면 비판하는 그 사람이 복음을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을 했어요.

이걸 편견(偏見)이라고 해요.

  

이단이 왜? 생기느냐 하면 따르는 사람들이 판단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좋아 보이면 흠도 흠으로 보이지 않고 다 이해가 되고 넘어가게 되어요.

남이 그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면 온갖 욕을 하였을 터인데도 그 사람이 하면 뭐 그럴 수 있지 라고 덮어두고 두둔하고 변호하고 싶어져요.

 

속된 말로 남이 하면 불륜인데 그 목사가 하면 로맨스로 포장하게 된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목사님이 비판 받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이 비판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사님을 내가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생긴다구요.

 

이게 복음으로 둔갑하면 감당이 안 되어요.

맹신으로 맹종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다 여기에 걸려든 겁니다.

그러니 비판능력을 상실하여서 그 누구의 말도 듣지를 않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동료나 친구나 다른 목사의 말도 듣지 않아요.

 

이럴 땐 곁에서 아무리 그 목사에 대하여 잘못된 것을 이야기 해 주어도 듣지 않아요.

올바른 말을 해 주어도 비판으로 들리지 올바로 들리지 않아요.

괜히 시기하고 모함한다고 들려져요.

왜냐하면! 난 이미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모두가 복음이다! 라는 편견으로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의 말은 모두가 옳다고 이미 판정을 내리고 듣기 때문에 그 어떤 말을 해도 내 판정은 변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목사님과 내 자신을 하나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을 부정하면 내 신앙과 내 믿음이 부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을 용납 할 수가 없고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어찌하든지 그 목사님이 옳고 자기가 판단한 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겁니다.

이처럼 제일 무서운게 신앙의 편견이에요.

 

사람이 속게 되는 것은 항상 복음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비 복음적일 것 같으면 속을 일도 없어요.

그러므로 거짓은 항상 아름답게 포장을 하고서 나타나는 겁니다.

가장 복음적이라고 하면서 나타나요.

그러니 그 안에 빛이 없는 사람들이 속는 겁니다.

 

지금이니 이렇게 보이지 그 땐 그 목사는 광명의 천사처럼 보였어요.

제 눈에 율법이라는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 속았다는 것이 깨달아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하여 눈이 떠진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흔히들 사기도 당해 보아야 분별력이 생긴다고 하잖아요.

우리는 일평생 살아가면서 이러한 일들을 수없이 많이 겪게 됩니다.

실패만큼 좋은 스승이 없어요.

이단에도 빠져 보아야 이단을 알게 되어요.

사람에게도 많이 속아 보아야 사람을 알게 되어요.

그래야 그 어떤 인간도 신뢰 할 인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대로 우리의 신앙이 어렸을 땐 어린 아이 생각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다가 어른이 되어서야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게 되는 것처럼 이런 목사 저런 목사에게 속아 보아야 목사를 믿지 않게 되어요.

야! 목사도 마귀구나를 알게 된단 말입니다.

 

율법주의에도 속아보고!

개혁주의에도 속아보고!

십자가를 말하는 사람에게도 속아 보아야 목사를 따르지 않게 되어요.

이건 스스로 체득하여야 해요.

스스로 겪어보아야지 남이 겪은 것을 말해 보아야 소용없어요.

이게 우리 인간들의 어리석음이에요.

 

이 세상엔 그 어떤 목사도 복음적인 목사가 없어요.

다만 복음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지고 있을 뿐이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다 그 속에 마귀적인 요소가 담겨져 있단 말입니다.

저에게도 있어요.

복음을 이용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자 하는 죄성이 있단 말입니다.

이린 죄성을 교묘하게 복음으로 둔갑을 시켜서 자기 지위를 지키고자 해요.

 

그러므로 신앙엔 냉정함이 필요해요.

베뢰아 교인들처럼 과연 그러한가?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성경이 과연 그러한가 늘 상고해 보아야 해요.

성경에서 답을 얻어야지 사람의 말에 답을 얻고자 하면 안 되어요.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모두가 신이 되고자 해요.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교주가 되고자 하는 본성을 타고나요.

그렇기 때문에 목사로서도 추앙받고 대접받고 스승으로 남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누가 저의 말에 공감하고 칭찬이라도 해 주고 따르면 우쭐하고 다 얻은 것 같이 교만해 져요.

이런 연약함을 하나님께서 아시곤 늘 흔들어대고 있으니 감사 한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 별 신앙을 다 겪어보게 하고 산전수전을 다 겪게 한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란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단에도 빠져 보고,

은사주의에도 미쳐도 보고,

율법주의 성화주의에 젖어 보기도 하고,

복음주의도 경험했어요.

 

미친 듯이 전도도 해보고,

열심히 특심할 정도로 교회에 봉사와 충성도 해보고,

밤이슬 맞아 가면서 기도도 해 보고,

귀신도 쫓아내 보고,

병도 고쳐 보았어요.

 

비록 짧게 한 것도 있고 길게 한 것도 있지만 겪어 보고 나니 이젠 조금 알 것 같아요.

야! 영적 세계가 참으로 무서운 곳이구나,

마귀의 궤계가 참으로 교활하고 간교하구나,

교회라는 곳이 무섭고 목사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되구나 를 알게 된 겁니다.

 

지금 여기까지 온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인 겁니다.

그러니 이제 조금 분별이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 안에 들어오고 나니 과거에 행하던 각양의 것들로부터 벗어났어요.

이젠 모든 은사인 실상이신 예수님을 만났잖아요.

그러니 과거 희미하던 것들을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지요.

이제 샛별처럼 떠오르는 확실한 예수님의 피를 맛보고 붙잡았기 때문에 아쉽지 않아요.

 

누가 어떤 말을 하여도 걸러서 듣게 되고 이건 아니다 라는 것이 보여진다구요.

주께서 그렇게 간섭을 해 주세요.

그러니 성도라고 한다면 목사의 설교보다 성경을 참고 하여야 해요.

물론 성경을 보아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경 읽기를 포기하지 마세요.

성경 속에 해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분별의 은사를 구하세요.

사모하세요.

지혜를 달라고 기도 하셔야 합니다.

 

제 개인 생각엔 마귀가 목사를 제일 많이 미혹하고 설교에 제일 많이 역사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두려운 겁니다.

설교 속에 자기 생각이 개입되고 감정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안한다고 하여도 마귀가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자기 생각을 심어 놓아요.

그만큼 말씀을 증거하는 일이 두렵고 떨리는 일이란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이 복음을 증거하고 자신은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하는 심정을 백번 이해가 되어요.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잘못 전할까봐 두려운 겁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주께서 이끄니 그 이끌림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소고삐 끌리듯이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소경이면 어쩝니까.

그럼 소경을 인도자로 세우고 따라가요.

그러나 내가 눈을 뜨면 그 사람이 소경인지 아닌지 분별을 해요.

그러니 여러분이 눈을 떠 소경이 되지 말아야 해요.

분별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이 시대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있어요.

모두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고 있어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모두가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해요.

자기 합리화 한단 말입니다.

말은 유창하게 하고 전개하는 논리는 화려한데 그 속에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가 없어요.

 

성령으로 증거되는 말씀을 들으면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영이 살아나요.

속사람이 강건해져가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아가요.

나에겐 의가 없음을 알아요.

감사가 나오고 긍휼이 나오고 용서가 나오고 사랑이 나와요.

 

예전엔 맞보지 못한 것들이 툭툭 터져 나와요.

안 하던 짓을 해요.

수가성 여인처럼 물동이 내 던지고 춤이 춰진단 말입니다.

이건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런 일들이 나도 모르게 툭툭 터져 나온단 말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예수님을 만난 사람치고 이런 생명의 역사가 없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모두가 극한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였고 세상을 이기는 모습으로 살았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이에요.

예수의 생명이 우리 속에서 살아 역사 한단 말입니다.

 

성도는 구원을 얻기 위해선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어요.

구원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원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있어요.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싸움이 아니에요.

구원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싸움인 겁니다.

자기 안에 죄와 싸우는 겁니다.

 

성도는 의를 만들어 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요.

난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입었다고 증거하여야 할 삶이 있어요.

주님이 그렇게 몰아가세요.

이건 성령 받은 성도는 깨달아지고 느껴져요.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씀을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고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요일 1:1-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보세요.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을 의인화(擬人化) 하여서 귀로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요 사귐을 가진 바라고 하잖아요.

 

신앙생활은 예수님과의 사귐이에요.

십자가를 주문처럼 외우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 안에서 사귐을 갖는 겁니다.

이런 사귐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그러니 그 어떤 목사가 말을 하여도 이런 사귐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건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이지 은사로 주어진 복음이 아니에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처럼 사랑 없이 행한 울리는 꽹과리이에요.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은 예수님이지 목사가 아니에요.

 

그러므로 선한 뜻에서 목사님들을 살펴야 하는 겁니다.

목사님들이 자기 사상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지 잘 분별해 보아야 해요.

수 많은 목사님들이 자기 사상을 입증하려고 하나님 말씀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수단화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 시대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 말씀을 핑계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복음으로 둔갑시켜서 말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어느 특정한 사람의 사상이나 신학으로 성경을 보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자기 사상이나 신학을 변호하려고 성경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교활해요.

바울이 오죽 했으면 거짓 선지자를 광명의 천사라고 했겠어요.

이는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그 어떤 목사의 사상이나 신학도 성경을 넘어설 순 없어요.

그러므로 신학보다 성경을 상고 하여야 해요.

성경을 읽다가 보면 성령께서 깨달음을 주세요.

성경 이외는 모두가 인간의 이야기에요.

그러므로 그 어떤 목사라 할지라도 선한 의미에서 항상 달아보고 의심을 하여야 해요.

그 누구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에요.

자신을 신의 자리에서 내리고자 하지 않아요.

항상 선생의 자리에 머물고자 해요.

이게 죄이고 인간이에요.

 

죄인은 아무리 십자가를 말하고 복음을 말한다고 하여도 궁극적으로는 자기 챙기기에 급급해요.

이건 복음을 알아도 달라지지 않아요.

목사가 복음을 아는 것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것은 따로 따로 놀아요.

그 누구도 복음을 이용하고자 하지 그 복음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고자 하지 않아요.

그만큼 인간은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잠시 육신의 소욕을 이긴 것 같아도 이긴 척 했을 뿐이지 돌아서고 나면 늘 그 자리에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네 인생살이는 늘 자기를 포장하고 사기 치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사기 치고 남에게도 사기 치고 살아요.

속으론 탐욕이 가득하면서도 겉으론 아닌 척 하면서 남을 속이고 산단 말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고 산단 말입니다.

 

난 아닌데요? 라고 하지 마세요.

난 아니라고 하는 그 놈은 가짜에요.

우린 모두가 속고 속이면서 저울질하고 사는 야곱이에요.

그러니 그 누구도 믿지 마세요.

 

사람을 의지하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믿으세요.

예수그리스도만 바라보세요.

새 언약만 붙잡으세요.

성도는 결국 하나님의 약속만 붙잡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만이 우리의 의지로 나아오는 것이 죄라고 규명해 줍니다.

지금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러고 있는 겁니다.

야! 이 놈아 웃기지 마라!

넌 나 때문에 네 목숨에 위협을 느끼면 날 저주하고 부인 할 수 밖에 없는 놈이야!

넌 네 주제를 모르고 있어!

그래서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귀적인 생각인 겁니다.

난 할 수 있어! 라는 것이 마귀적인 생각이에요.

난 끝까지 타락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난 끝까지 믿음 지킬 수 있어! 라고 하는 것이 마귀의 수작이에요.

 

우린 우리 믿음을 지켜 낼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 하고 떠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서원이나 각오나 약속이나 장담을 믿지 않는 겁니다.

 

종교생활은 우리의 힘으로 가능하지만, 신앙생활은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해요.

그러므로 우린 늘 주의 은혜와 긍휼을 사모하여야 하는 겁니다.

젖먹이가 어미젖을 사모하듯이 성도는 늘 주의 은혜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그 안에 성령이 계신 성도는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해 가세요.

 

산상보훈을 보면 팔 복(福)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되어 있지요.

 

이걸 인간 입장에서 읽으면 인간이 이렇게 하여서 복을 받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어요

여러분 심령이 가난해 집시다!

애통해 합시다!

온유합시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합시다.

긍휼히 여깁시다!

마음이 청결해 집시다!

화평케 합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서 복을 받읍시다! 라고 해요.

 

그러니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이러한 것은 죄인들 속에는 없어요.

자기 밖에 모르는 죄인이 어떻게 심령이 가난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남을 긍휼이 여기고 온유하고 화평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까!

죄인 속엔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악독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술수들로만 가득해요.

죄인에겐 전부 죽이는 것들만 들어 있어요.

 

그러나 팔 복은 전부 살리는 것들이에요.

전부 생명에 관한 것들이에요.

하나님의 생명 안에만 있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팔 복은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만 있는 것들인 겁니다.

 

그러니 인간 쪽에서 이런 것을 만들어 내고자 하면 안 되어요.

이건 예수 안에 들어가면 자연히 생겨나는 것들이에요.

예수 안에 들어오고 나니 자연히 팔 복의 현상들이 툭툭 터져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팔 복은 성도는 이미 하나님께 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에 신령한 복을 받으니 팔복에 현상이 일어나요.

 

심령이 가난해 지고!

애통이 일어나고!

온유해 지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나타나고!

긍휼이 나오고!

마음이 청결해지고!

화평이 일어나고!

의로 안하여 핍박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주어지는 것들이에요.

성령을 받으면 이런 마음들이 일어나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없는 사람은 성도가 아니에요.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에요.

종교인이에요.

 

그러니 믿음을 만들고 신앙생활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겁니다.

만들어서 나도 예수 믿는 척 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예수 믿는 척 하는 것이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에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예수 믿는 척 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요.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믿음을 만들려고 할 이유가 없지요.

 

이런 성도는 누가 당신 이단이라고 해도 그냥 씨익 웃고 말아요.

그냥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 먹어요.

예전에 싸웠는데 이젠 싸우기 싫어요.

어차피 주님이 판단하실 일이잖아요.

속으로 그래 난 이단이 맞잖아!

그리고 돌아서요.

저 쪽에서 보면 완전히 미친 놈이에요.

맞아요.

예수 안에 있으면 세상의 판단에 희비하지 않아요.

열 받을 이유가 없다니까요.

 

여러분은 강아지들이 여러분들을 보고 저건 인간이 아니고 괴물이야 라고 한다고 해서 그 강아지들을 주리를 틀고 네 이놈하고 강아지 하고는 싸우지 않잖아요.

싸우면 그건 강아지이지 사람이 아니에요.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싸울 이유가 없어요.

성도는 세상 밖에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판단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 누가 이단이라고 하면 이단으로 사세요.

 

신앙생활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인위적인 것이 하나도 없어요.

성령이 성도로 하여금 물 흐르듯이 끌고 다녀요.

때로는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시고 때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하세요.

때론 칭찬을 듣게도 하시고 때론 욕을 먹게도 하세요.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기 때문에 복된 삶인 것입니다.

 

시편 1장 1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라고 하지요.

이 말씀은 이 시대 목사들이 말대로 여호와의 율법을 상고해서 복을 받으란 말이 아니에요.

이 시대 몰지각한 목사들은 이런 말씀으로 인간의 열심과 충성을 끄집어내고자 해요.

산상보훈의 팔 복도 따내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복 받을 짓을 하라고 하잖아요.

 

죄인에겐 복 받을 짓이란 없어요.

죄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썩었어요.

온 몸과 마음이 다 타락했어요.

그러니 인간 속에선 하나님이 바라는 의가 나오지 않아요.

 

복은 의인에게만 주어져요.

하나님은 의인에게 복을 주세요.

의인이란 복 받은 자에요.

그러니 의인은 새삼스럽게 복 받을 짓을 하지 않아요.

의인은 복 안에 있는 자에요.

그러니 복을 달라 말라 할 이유가 없어요.

복 받을 짓을 할 필요도 없구요.

 

그러니 이 시대 복 받을 짓을 하라고 하는 목사들의 가르침이야 말로 바로 베드로와 같은 사고인 겁니다.

자기 쪽에서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전형적인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의 말씀을 보는 관(觀)이에요.

 

예수 밖에서 성경을 보면 전부 자기가 지키고 행하여야 하는 것으로 다가와요.

그러니 자기가 지키겠다고 설치는 겁니다.

복 받겠다고 애쓰는 겁니다.

공짜로 주어지는 복을 따 내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이런 코메디를 지금 수많은 교인들이 하고 있어요.

 

복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따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성도는 복을 이미 받은 자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복을 이미 받은 자로서의 삶이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복을 받고나니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뭘 하겠다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는지 깨닫고 감사하기 위하여 묵상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묵상은 되어지는 것이지 내 노력으로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말씀이 내 입에 가깝고 내 마음에 돌아다녀요.

성령이 그렇게 하게 하세요.

 

이걸 묵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복을 받은 성도는 늘 묵상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말씀이 꿀 송이같이 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말씀을 먹는다고 하는 겁니다.

그냥 말씀이 아니고 양식으로서의 말씀이 되는 것이에요.

 

말씀이 맛이 있어야 해요.

말씀이 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거듭난 성도에요.

말씀이 맛이 없으면 그건 뭔가 큰 병이 들었단 증거에요.

정신을 다른데 두고 있으니 말씀이 맛이 없는 겁니다.

 

사람이 병들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입맛이 없어요.

그래서 밥을 먹지 않아요.

밥은 힘이에요.

밥을 먹어야 병을 이길 수 있어요.

그래서 보호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밥을 먹이고자 애를 쓰는 겁니다.

때론 싸우기도 하잖아요.

이게 다 생명은 밥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에요.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서 굳건하게 서 가는 겁니다.

아무리 성도라 할지라도 말씀이라는 양식을 공급 받지 않은 사람은 죽은 겁니다.

말씀이라는 양식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어요.

그러므로 말씀을 많이 먹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예수님의 성품들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말씀을 먹었는데도 죄인 속에 있는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수군수군 거림과 악한 말과 악한 생각들이 억제되지 않고 스스럼 없이 흘러나온다면 그 말씀은 죽은 말씀이거나 아니면 그 사람이 죽은 사람이에요.

죽었기 때문에 죽은 냄새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물론 죄인에겐 이런 것들이 터져 나와요.

 

하지만 성령이 죄의 소욕을 억제하고 성령의 소욕들을 일으키세요.

성도 안에서 죄인으로서는 도무지 뱉어 낼 수 없는 것들을 토해내게 하세요.

성령이 이런 것으로 인하여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게 만들어요.

그래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욱더 깊이 알아가게도 하세요.

 

하나님이 성도 안에서 힘을 공급하기 때문에 사랑이 나오고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금지 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법이란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을 말해요.

그럼 성령이 반드시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한단 말입니다.

이건 속일 수 없어요.

 

복음을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복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이에요.

예수님은 우리가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먹는 양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했어요.

누구든지 내 살고 피를 먹고 마시면 그 속에 영생이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 예수를 진정으로 먹은 사람은 그 속에서 예수의 생명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예수의 생명이 바로 팔 복이고 성령의 열매들인 겁니다.

 

나도 모르게 이러한 것들이 하나라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툭툭 터져 나온다면 감사하세요.

그건 주님이 그 안에서 간섭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니까요.

많으냐 적으냐 양으로 따지지 마세요.

성령의 열매는 은사이기 때문에 양적인 것으로 따지지 않아요.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럼 은사인 거에요.

이런 열매들이 맺히면 주께서 맺게 해 주신 것이란 것을 본인이 알아요.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살펴봅시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죽겠다고 하자 지금은 안 되고 후에는 따라 오게 된다고 하셨을까요.

다시 본문을 봅시다.

 

요 13:36-37=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왜? 지금은 안 되고 나중에 된다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지금은 아직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야 오십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알려 주셨어요.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고 하셨어요.

예수님께서 지금은 안 되고 나중에 된다는 말은 곧 성령이 오셔야 된다는 말인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드로의 순교가 자기 실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주를 따랄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주를 따라가는 것은 성도의 실력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힘을 공급해 주실 때에만 가능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는 것을 막고자 했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는 곳은 끝까지 따라가서 막아 주겠다고 장담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란? 우리의 의지나 각오로 막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죽음은 막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죽음은 죄의 삯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죽음을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에요.

왜냐하면! 죄 아래 가두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문제를 해결해 주셔야지만 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은 안 되고 예수님이 죽고 난 후에 성령이 오시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죄 문제가 해결되고 그러면 성령이 오셔서 죽음을 이기게 해 주는 겁니다.

 

죄인은 독자적으로 죄를 뚫고 나올 수가 없어요.

죄의 권세가 인간의 힘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죽음으로부터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러니 베드로가 죽기까지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만용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은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베드로에게 넌 지금 뭘 모르고 있다는 거에요.

네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죽음 앞에 세워서 자신의 한계를 알게 하신 겁니다.

봐라!

네가 죽음 앞에 서면 네 의지와 각오는 한낮 휴지 조각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선 믿습니다 도 소용없어요.

주여 내가 죽는데도 따라 가겠다는 각오도 소용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둔 것입니다.

 

마 26:69-75=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난 후 통곡을 했어요.

왜? 통곡을 합니까?

이는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기력함에서 통곡이 나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왜? 죽으심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죽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셔야 성령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성령은 부활의 영이에요.

예수님도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을 하셨어요.

이 성령은 예수님이 가셔야 오세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이 유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가시면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성령이 제자들 속에서 부활의 영으로서 역사를 하십니다.

그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예수는 그리스도시라고 담대히 증거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도리어 예수님으로 인한 고난을 합당한 것으로 여기고 기뻐하였어요.

 

행 5:41-42=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성령 받은 자의 특징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육신을 볼모로 역사합니다.

육신은 자기 몸이 죽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안 죽으려고 합니다.

오래 살고자 해요.

이건 육신의 본능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이 본능을 이기게 하세요.

성령이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성도 안에서 일으켜요.

성령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비로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 때 너도 나를 따라 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 육신은 눈만 뜨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찾아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들을 염려하게 되어요.

이 모든 것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에요.,

세상은 이것들로 육신을 볼모로 잡고 성도를 세상에 붙잡아 두고자 해요.

땅에 속한 자는 절대로 이걸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하늘에 영을 부어주셔서 세상을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면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하여 죽게 하세요.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요.

이럴 때 세상이 작아 보이는 겁니다.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가 가야 할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예수님 믿기 전이나, 믿고 난 후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여전히 육신으로 살고 있고!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살고 있어요.

 

성령이 오시지 않았을 땐 세상 가치로 희비 했어요.

그러나 성령이 오시고 난 후 세상 가치관이 죽었기 때문에 세상 가치로 희비하지 않아요.

이상하게 세상이 작아 보인단 말입니다.

세상에서의 실패가 실패로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 세상 것으로 인하여 울고불고 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게 세상이 감당치 못할 성령의 능력인 겁니다.

 

우린 성령의 능력 안에 있어요.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 날까지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마세요.  

우린 이미 이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삼층천에 가 있어요.

바울이 삼층천에 있는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이긴 자로서 넉넉함으로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요한을 통하여서 성도가 가 있는 천국을 보여주셨잖아요.,

요한계시록은 지금 현재 우리 성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우리의 이름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 있어요.

우리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이 적혀 있어요.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이 쓰여 있는 성도는 지금 시온 산에서 어린 양이 어디로 이끌든지 다니고 있어요.

홀로 다니는 것이 아니고 어린 양과 함께 다니고 있어요.

 

이게 지금은 성령 안에서 느껴지게 하는 겁니다.

그 증거가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는 것이 믿어지면 당신은 이미 시온 산에서 있는 이긴 자입니다.

육신의 장막을 벗으면 하늘에 있던 장막이 덧 입혀 질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죽음이란?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것이에요.

성령이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해 주시잖아요.

그럼 감사하고 사세요.

주여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나이까 라고 찬송하시며 사세요.

 

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에요.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이 창세전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속에 확실한 성령의 증거가 불도장처럼 새겨진바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런 큰 은혜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에 은혜가 주의 백성 모두에게 확실한 증거로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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