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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88강. 왜? 아버지를 만나려고 하는데! (요 14:7-15)

by coroa 2021. 11. 28.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88강. 왜? 아버지를 만나려고 하는데! (요 14:7-15)

-.정낙원 목사

 

요 14:7-15=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오늘 본문을 보면 빌립이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에게 하나님을 좀 보여 달라고 합니다.

만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좀 알고 싶다는 뜻입니다.

빌립의 질문 속에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습니다.

 

빌립의 이러한 질문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만나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하나님을 보면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는 하나님은 인간이 보아도 믿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아버지를 보지 못하여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애당초 인간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말씀하는 하나님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라고 하는 말은 인간들 세상에 계시하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서 계시하신 그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낮아지고 종처럼 섬기는 그런 하나님은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영웅처럼 힘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보고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를 통해서 아버지를 보지 못하면 아버지를 보아도 못 믿는다고 합니다.

이는 아버지는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하나님도 몰라요.

예수님을 안 믿으면 하나님도 못 믿어요.

왜냐하면 예수님 속에 하나님의 비밀이 다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과 상종하지 않아요.

오직 예수님하고만 상종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전면에 내세우시고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뒤에 숨어 계세요.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예수님을 앞세우고 일하시는 것은 죄인은 하나님을 만나면 즉사하기 때문입니다.

죄인과 하나님의 만남은 곧 무엇과 같은가 하면 어둠이 빛과 만나는 것과 같아요.

어둠은 빛을 만나면 사라져 죽습니다.

 

깜깜한 방안에 전기 수위치를 올리면 전구에 빛이 들어옴과 동시에 그 칠흙 같던 어둠이 순식간에 다 사라지고 없지요.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세요.

그리고 죄인은 어둠입니다.

어둠인 죄인이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죽어 버립니다.

그러니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숨어 계시고 나타나지 않는 것이 죄인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숨기시고 그 대신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이 어디 이걸 아나요.

제자들도 예수님하고 동거동락하면서도 몰라요.

그러니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겁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만났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이 범죄하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요.

이는 아담에게 사랑을 베푼 겁니다.

왜냐하면! 빛이신 하나님이 어둠인 아담을 만나면 아담이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겁니다.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것은 난 죄인들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숨어 버린 겁니다.

그리곤 에덴동산에 문을 굳게 걸어 잠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죄인들 특유의 죄에 근성들이 터져 나옵니다.



죄가 뭡니까?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거잖아요.

죄가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면 기를 쓰고 하려고 역사합니다.

그러니 숨어 계신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설쳐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종교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지성이면 감천 한다는 사상을 낳은 겁니다.

열심히 찾고 또 찾으면 만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열심히 치성을 드리라고 합니다.

모든 종교에 인간의 열심을 강조하는 것은 모두가 이 죄성이 바탕에 깔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흔히들 하나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를 하라고 하잖아요.

우수겟 소리로 한국교회 교인들이 하도 하나님 보좌를 흔들어서 하나님이 머리가 흔들려서 맨 날 두통약을 잡수시고 있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불철주야 잠을 자지도 않고 하나님 보좌를 흔들잖아요.

 

여기서도 주여!

저기서도 주여!

새벽부터 밤 잠 자지 않고 산에서도 흔들고 들에서도 흔들잖아요.

밥 굶어 가면서 흔들고 있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사십일 금식하면서 흔들어 제낍니다.

하도 흔들어서 하나님이 정신이 없어서 이젠 못 나온답니다.

 

예수님 가지고는 안 되겠대요.

예수님은 약하답니다.

하나님이라야 한답니다.

하나님은 더 능력이 쎈 분이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숨어 계신 하나님을 더 만나고 싶고 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숨었는지!

왜? 죄인을 안 만나 주시는지는 그 마음도 모른 채 말입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을 안 만나 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이유를 모르고 오직 자기고집만 내 세웁니다.

기어코 만나겠답니다.

그래서 빌립도 하나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 라고 떼를 쓰고 있는 겁니다.

 

사람을 호기심으로 자극하는 것이 관음증입니다.

관음증이란? 감추어진 것은 보고 싶어 하는 본성입니다.

별 것 아닌데도 감추고 나면 호기심이 생겨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여도 기어코 찾아서 보잖아요.



인간은 무엇이든지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만져야 직성이 풀려요.

그래서 역사 이래로 인간들은 끊임없이 신을 찾고 또 찾았어요.

신도 자기가 다 해부해서 이해되어야 직성이 풀려요.

 

얼마나 신을 찾고 또 찾았으면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아직까지 찾지 못한 신을 위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는 것 아닙니까?

이처럼 인간들은 신에 대한 집착이 대단합니다.

기어코 자신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하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막연한 신은 싫어요.

자기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신은 불안해요.

예측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보여야 예측할 수 있거든요.

예측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들이 신을 조종하겠다는 겁니다.

 

관심법으로 신의 마음을 꿰뚫어서 미리 예측하여 자기 필요에 따라서 섬기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신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고 싶어해요.

복 받을 짓을 하면 복을 줄 수밖에 없는 그런 신을 원해요.

그러려면 신을 자기가 보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숨어 계신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섬기는 겁니다.

자기가 보고 듣고 만져야 안심이 되니까요.

이것이 신을 형상화 하여서 섬기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얼굴 없는 미녀” 라는 말 들어 보셨지요.

얼굴이 없는데 어찌 미녀인줄 압니까?

이는 자기 마음에 그 여자는 아마도 아름다울 것이라는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워야 자기가 기분이 좋거든요.

미운 여자는 싫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얼굴 없는 미녀라고 명명하는 겁니다.

자기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이란 이처럼 무엇이든지 자기가 좋은 대로 상상합니다.

하나님조차도 자기가 좋은 대로 상상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으로 각인 되어 있습니다.

오죽 했으면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이라는 노래를 다 부르겠어요.

난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

나에게 복을 주는 하나님!

나를 구원시켜주는 하나님!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해 주는 하나님!

우리 교회를 부흥시켜주는 하나님!

우리 집단을 지켜주는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나 에요.

온통 나 뿐이에요.

내가 신이고!

내가 주인이고!

내가 왕이에요.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내 기준으로 심판해 버립니다.

이게 죄인의 속성입니다.

 

죄가 뭐냐!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중심으로 창조가 된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도 나를 인정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 자기 정당성을 확인 받고 싶어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요.

늘 우리가 하나님 만나 주세요! 라고 기도하잖아요.

지금도 수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금식하며 기도원이나 산에서 밤이슬 맞아가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자기가 아쉽지 않으면 찾지 않습니다.

신이든 친구이든 이웃이든 찾을 땐 다 자기의 유익과 필요에 의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찾고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토록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까?

이는 하나님이 자기 소원을 들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복을 받거나 능력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라는 복이란? 세상에서 잘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잘되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육신이 평안하고!

가정에 화평이 넘치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의 앞부분에서 언급하는 복들입니다.

한마디로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아 창대케 되는 그런 복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러러봄을 받고 그들 위에서 군림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큰 교회를 하고자 하는 것도 다 이러한 신이 되고자 하는 영웅심 때문입니다.

교인들도 큰 교회를 선호하는 것도 그 곳에서 보호받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목사들이 하나님께 주여 내게 능력을 주옵소서! 라고 금식하면서 교회에서 철야를 하고 또는 밤 이슬 맞아 가면서 산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능력을 받고자 합니까?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싶은 겁니다.

영웅이 되어서 가는 곳마다 호산나 찬송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도 예외일수 없습니다.

새로운 교인이 오면 기분이 좋고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가면 섭섭해 합니다.

어디에서 설교를 해도 사람이 많이 모이면 기분이 좋고 없으면 실망이 됩니다.

말이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 영광을 위하여 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자기 이름을 내고 싶고 자기 영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으면 세상에서 강한 자가 되고 잘난 자로 으뜸이 되어 왕처럼 대접을 받게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게 얼마나 인본주의 사고인줄 아세요.

악마가 주는 속임수인줄 아십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고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 왜? 악마적인가를 예수님을 통해서 보면 대번에 드러납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들은 모두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주리실 때 마귀가 예수님에게 찾아와 주겠다고 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달콤하게 속삭입니다.

야! 너 하나님 아들이라면서!

하나님 아들이 그렇게 굶어서야 되겠느냐!

그럼 하나님 망신시키는 거야!

그러니 여기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서 네 능력을 보이라고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아들답다는 겁니다.

성전에서 뛰어 내려도 다치지 않는 슈퍼맨으로 이름을 날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게 절만 하면 내가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다 주겠다고 합니다.

 

마귀의 이 말을 어느 누가 거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도 거절 못하겠어요.

내일 모래 산수갑산 가더라도 준다고 하면 덥석 받겠어요.

교인들이 매 주일 벌떼처럼 구름 떼처럼 몰려든다고 한다면 이걸 누가 싫다고 하겠습니까?

교회 부흥 되는 것이 목사들의 로망이잖아요.



저도 수십만 명이 운집한 곳에서 설교하고 싶어요.

사람이 많이 모여 보세요.

기분이 붕붕 뜹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고 바라는 것들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이러한 것들을 위하여 서로 붙잡고자 경주하고 있습니다.

아귀다툼 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경쟁했어요.

그런데 이런 것을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와 주겠다고 합니다.

 

이처럼 땅에서 잘 되게 해 준다는 것은 마귀적인 것입니다.



왜? 땅에서 잘 되게 하는 것이 마귀적인지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범죄하자 땅을 저주 해 버립니다.

그리곤 뱀에게 종신토록 흙만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건 뱀에게 땅을 내 준 것입니다.



땅은 마귀가 살아갈 터전입니다.

땅은 마귀의 구역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와서 이 세상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넘겨준 것이므로 자기가 원하는 자들에게 준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마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래서 마귀는 땅에 것으로 인간을 붙잡아 두고자 합니다.

땅을 떠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야 죄인들에게 왕 노릇하지요.



마귀는 우리의 주소지를 땅에 두라고 합니다.

땅에 자기 이름을 새기고 영원히 남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마귀의 달콤한 말에 미혹당해서 사울 왕처럼 자기 전적비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든지 교회에서든지 조직에서든지 왕 노릇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나 이만큼 교회 부흥 시켰다!

나 이만큼 책을 냈다!

나 이만큼 복음 전했다!

나 이만큼 강의하러 다닌다!

나 이만큼 복음 안다!



복음으로 자기가 부인 되어져야 하는데도 우리는 도리어 복음으로 힘을 키우고 있어요.

복음으로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 것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웃기는가 하면 복음 안다는 것을 행위로 붙잡고 있어요.

그러니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짓을 서슴치 않는 겁니다.

복음을 알면 그 복음으로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린 그러지 않아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 들 위에 자랑하고 선생 노릇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누가 복음을 모르면 에구구~ 복음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하면서 혀를 차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복음 정신과 반하는 짓들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나 복음 안다 그래요.

이건 아는 게 아니에요.

모르는 겁니다.

복음이 담고 있는 의미를 모르니까 나 복음 안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올바로 알면 나 복음 안다고 자랑질하지 못해요.

그럼에도 우리는 자랑하고 있어요.

 

우리는 날마다 자기 이력서에 칸들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복음 안다는 것도 채우고 있는 겁니다.

이는 전부 마귀에게 미혹당하여서 농락당하고 있는 겁니다.

마귀가 갖고 노는 겁니다.



마귀가 야!~ 복음으로 자랑질 해서 복음을 가리라고 하고 있는데도 우린 그 마귀의 술수를 몰라요.

죄인이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영웅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자기 치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십자가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으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추앙받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너를 복에 조상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드디어 가나안 땅에 입성을 합니다.

야! 이제부터 고생 끝 행복 시작인줄 알았습니다.

“축! 환영 아브람의 가나안 입성을 축하합니다!” 라고 플랜카드라도 붙여 놓은 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준다고 해서 따라 갔는데 막상 가나안에 들어가자 하나님은 이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땅 뙤기 한 평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들판에 텐트를 치고 살았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찾아와서 아들을 준다고 하여도 짜증을 냈습니다.

그만 됐습니다!

하나님 볼 일이나 보이소! 라고 냉소적으로 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자식이 바로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하나님에게도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부모친척은 물론이거니와 친구나 이웃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세상에서 자기 소유로 남긴 것은 막벨라 굴인데 이는 자기가 죽어서 묻힐 무덤 하나만 달랑 남기고 갔습니다.

 

세상 말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고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땅에서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 길로 인도받게 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천사들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원수들이 진을 치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을 옳게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망했습니다.

 

12제자들도 망했고!

스데반도 망했고!

바울도 망했고!

초대교회 성도들도 망했습니다.

그 길에 지금 우리가 들어서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걸 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를 어찌하여야 합니까?

울어야 합니까?

웃어야 합니까?



세상에서 버려짐을 당하는 것을 복이라고 하는 이 역설을 어찌 이해를 하여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으니 믿음을 주어서 이해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안 믿고자 하니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기어이 믿어지게 하고야 마는 이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땅에서 빼내시고자 하신단 말입니다.

그만큼 이 세상이 허구이고 망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을 떠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통하는 능력을 주지 않습니다.

땅에 복을 주지 않습니다.

도리어 빼앗아 가십니다.

이러한 것들이 성도가 하늘나라를 가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오자 하루치씩만 만나를 줍니다.

왜? 하루치씩만 줍니까?

쌓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쌓으면 가나안을 안 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가는 길은 앃아서는 절대로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쌓지 못하도록 하루치씩만 주는 겁니다.

 

광야는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에 것들은 잠시 후에 철거되고 불타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세상에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복은 하늘에 신령한 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능력은 땅을 떠나게 하는 능력입니다.

육신을 죽이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복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신 분이 누구신줄 아십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 자체입니다.

복 덩어리 입니다.

능력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을 받으시고 능력을 받으신 분의 원본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버려짐을 당하고 죽임 당했습니다.

조롱당하고 욕을 먹고 거지같이 살았습니다.

집 한 칸 없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시면서 살았습니다.

 

가정에 화목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형제들로부터 미쳤다고 따돌림 당하였습니다.

이웃으로부터 민족으로부터 반역자라고 정죄당하여 죽었습니다.

따르던 제자들도 저주하고 다 도망을 갔습니다.

예수님을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완전히 실패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이게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복 받은 자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 자의 모습입니다.

 

이걸 어찌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설마 이런 복을 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주여! 내가 조롱당하고 욕을 먹고 거지같이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나요?

없습니다.

 

저도 이런 기도를 안 합니다.

도리어 반대입니다.

복음 전했으니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지 않게 해 달라고 합니다.

교회 부흥시켜 달라고 합니다.

물론 대 놓고 이런 것을 달라고 기도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심정적으로는 이런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요.

늘 품고 있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도 마음은 반 복음적인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성경과 반대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내 생각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이율배반적입니까?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에게 속하여 복음을 전하면 핍박을 당한다고 하는데도,

우리는 그와 정 반대로 나 복음 전했으니 핍박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바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복음 때문에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는 구조 속으로 인도하는데도,

막상 이런 일이 닥치면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라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인정하기가 싫습니다.

왜냐하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른 엉터리입니까?

 

우리는 누가 나를 욕을 하려고 마음만 먹어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손 좀 봐 주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하는 위대한 종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종 다운 폼이 나잖아요.

 심정적으로 그렇다니까요.

 

겉으론 안 그런 척 하지만 누가 날 괴롭게 하면 내 안에 이러한 마음이 들끓어요.

이건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 내가 막을 수가 없어요.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나를 욕하는 자를 축복하는 것은 성경의 이야기이지 실상에선 우린 이와 정 반대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복음을 알고 복음대로 산다고 하여도 여전히 우리 안에서 마귀적인 영웅심이 발호를 하여 스스로를 하나님이 되고자 합니다.

제자들처럼 주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한다니까요.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서로 경쟁하고 다투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린 우리 자신을 신이 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항상 나를 신의 자리에 앉으라고 역사를 합니다.

하나님이 되라고 합니다.

심판주가 되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해도 자기 팬 관리를 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을 자신을 추종케 만듭니다.

나는 항상 선생이 되어 가르치고자 합니다.

항상 으뜸이 되어 대접을 받고자 합니다.

 

십자가 도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임에도 우린 십자가 도를 말하면서도 그에 반(反)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린 엉터리이고 말씀과 어긋나게 살고 있는 악당들입니다.



죄인의 본성은 무슨 일을 해도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지경을 넓히고!

자기 세계를 확장하려고 합니다.

 

우리 힘으로 안 되니 신을 찾는 것입니다.

신이 되고자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겁니다.

만나서 신의 능력을 받고 싶은 겁니다.

신의 능력을 받아서 교주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다 교주 노릇하고 싶어해요.

 

저도 과거엔 한 번 외치면 삼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울산을 내 구역으로 주시고!

한국을 내 교구로 주시고!

세계를 내 사역지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하루에 12시간씩 말입니다.

밤 이슬 맞아 가면서 한 달씩 금식하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난 후 이러한 사고가 바로 마귀적인 사고란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사고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게 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사고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죽을 지경인 겁니다.



말씀을 대할 때마다 전혀 말씀대로 살고 싶어하지 않는 내 안에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 상한 심령이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이 저절로 터져 나온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주는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리어 이스라엘의 힘을 빼앗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에브라임의 병거와 마병을 부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에브라임이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병거와 마병이란? 세상 힘을 말합니다.

 

에브라임은 곧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힘을 빼앗기 위해 찾아오신 겁니다.

세상나라에서 빼내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린 몰라요.

 

어렸을 때 물고기 잡던 생각이 납니다.

전 어릴 때 바닷가에서 자라서 물길 질을 잘합니다.

삼지창을 만들어서 고기를 잡으려고 바다 속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다른 고기들은 다 도망을 가는데 강원도 말로 꺽지(우럭)라는 놈이 삼지창 앞에서 입을 쩍 벌립니다.

이 멍청한 놈이 삼지창이 먹을 것인 줄 알고 입에 넣으려고 해요.

 

지금 우리가 바로 이 멍청한 꺽지 같은 죽을 짓을 하고 있어요.

저주의 냄새가 풀풀 나는 세상에 입을 크게 벌리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는 그럽니다.

입을 크게 벌려라 내가 채우리라는 성경 구절을 부적처럼 교인들에게 가르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듯이 무엇을 말하기 위하여 이러한 말을 하는지 생각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죽일 말씀인지 살릴 말씀인지 천지 분간을 못합니다.

자기 식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리곤 부적처럼 사용합니다.

성경 말씀이니 무조건 좋은 말씀이겠지 라고 도둑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 왜곡되고 뒤틀려진 다름을 알려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도무지 하나님과 소통 할 수 없는 죄라는 가로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셔서 우리들의 왜곡된 신관을 바로잡게 해 주십니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서로 극과 극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흥왕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망하게 하고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죄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형벌입니다.

성경에서는 죄인의 특징을 한마디로 탐욕덩어리라고 합니다.

탐욕이란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무저갱 같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인간은 늘 목마르고 늘 부족함으로 불행해 합니다.

 

탐욕으로 가득찬 인간은 소유가 더할수록 고민도 더해집니다.

만족한 것이 아니라 목마릅니다.

탐욕이라는 놈은 이상하게 눈사람처럼 굴리면 굴릴수록 커져만 갑니다.

마치 소금물처럼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더 유발시킵니다.

결국 자신이 키운 그 탐욕에 깔려 죽어갑니다.

 

부자가 자살을 하지 가난한 사람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결국 자기를 망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부자가 되고 싶어 하고 영웅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의 탐욕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십니다.

어떻게 벗겨 주시는가 하면 탐욕에 사로잡힌 옛 사람을 십자가에 죽여서 벗겨주십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합니다.

 

하나님은 정과 욕심이 버려지는 죽임 당함 속에 평안을 담아 놓았습니다.

이름하여 십자가 안에서의 평안입니다.

죽음 안에 쉼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쉼을 주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매게 함으로서 벗겨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란?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서 쉼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죽여서 쉼을 주시겠답니다.

 

결국 세상에서 살고자 수고하고 무거워하는 탐욕으로 가득찬 죄인이라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죽임으로서 세상에서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아주 역설적입니다.

뉘라서 이 역설의 의미를 알까요?

하나님은 항상 이런 역설로 자기백성들을 다스려 왔습니다.

이 역설 속에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운명을 담아 놓으신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세상 것을 주는 식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고 빼앗아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세상이 싫어지도록 간섭합니다.

우리 스스로 탐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발호하여 나를 괴롭히는 탐심이라는 이 형벌을 벗겨주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탐 하는 것을 빼앗아 감으로서 벗겨주십니다.

 

성도는 세상살이가 지긋지긋해야 합니다.

세상이 꼴도 보기 싫어야 합니다.

그래서 빨리 세상을 떠났으면 하여야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 종살이 하면서 고역으로 인하여 주여 살려 주세요! 라고 부르짖는 것 같이 성도들도 주여 빨리 내 생명을 취하고 세상에서 제대 시켜주세요! 라고 하여야 합니다.

세상이 살기 좋으면 안 되어요.

그건 저주에요.

 

목사도 하기 싫어야 해요.

목사 노릇하기 좋다고 하는 것은 뭔가 수상해요.

대접받고 살만 하니까 그런 겁니다.

바울처럼 우겨쌈을 당하고 꺼꾸러뜨림을 당하고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욕을 먹고 한다면 누가 목사 노릇을 하고 싶겠습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건 못할 짓이에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에게 등 떠밀려서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탕자처럼 파산을 하였습니다.

회생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돈을 준다는 것은 부채만 더 가중시키는 것입니다.

주면 줄수록 그 사람은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이런 사람에겐 안 도와주는 것이 사랑이고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에겐 야속하겠지만 말이에요.

놀음판에서 돈을 잃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 준다는 것은 그 수렁으로 더 밀어 넣는 것입니다.

가진 돈을 빨리 탈탈 털게 하여서 돌려보내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배려이고 사랑입니다.

 

예전에 신00씨가 필리핀에서 도박을 하는데 여자 친구가 수천만 원을 가져다주었다고 합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고 죽이는 겁니다.

도박에서 도무지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는 것은 더 도박을 하고 그 수렁에서 나오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신00이는 결국 그 돈 마져 다 탕진을 하였습니다.

그 만큼 신00이는 부채가 더해진 것입니다.

 

진짜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도박에서 발을 빼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자면 돈 줄을 끊어야지요.

돈을 달라고 하여도 주지 말고 욕을 하여야지요.

적극적으로 그가 가진 모든 돈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이 바로 탕자이고 신00입니다.

세상이라는 도박판에 빠져 있습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있습니다.

인생살이가 이상하게도 소유가 더하면 더할수록 편해지는 것이 아니고 수고와 무거운 부채만 가중됩니다.

 

전도서 기자가 그럽니다.



노동자는 잠을 달게 자지만 부자는 그 부(富)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느 것이 복입니까?

잠을 잘 자는 것이 복입니까?

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하는 것이 복입니까?

 

세상을 알면 알수록 세상에 노예가 됩니다.

돈을 알면 알수록 돈에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돈이 있는 곳에 악이 활개를 칩니다.

원수들이 들끓습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이 이런 부채를 경감시켜주시려고 하나 둘 야금 야금 빼앗아 갑니다.

 

마치 야곱이 자기방식으로서의 성공신화를 써서 금의환향하는 것을 하나님이 얍복강에서 씨름하여 그 동안 쌓은 것을 허무는 작업을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에게 얻어맞고 난 후 20년 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그 모습으로 되 돌아간 것입니다.

결국 야곱은 20년 동안 헛 고생만 한 것입니다.

손에 하나도 잡지 못한 안개 같은 인생을 산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인생은 안개 같은 것이란 것을 가르치려고 20년 동안 가만 두신 겁니다.

야곱이 이제 성공 했어! 라고 의기앙양 하여 귀향을 할 때 하나님이 놀부처럼 나타나서 야곱의 인생을 헝클어 버립니다.

지금까지 쌓았던 것을 허무는 인생으로 바꿔버립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다스려가는 방식입니다.

 

야곱은 결국 죄인의 인생이란? 험악한 세월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험악한 세월이란?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바로 왕에게 가서 인생 별거 아니다!

세상 영광이란 잠간 피다가 사라질 들에 꽃과 같은 것이라고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과 같은 인생을 성경에선 복 받은 인생이라고 합니다.



죄인의 인생이란? 결국 전부 버려지고 빼앗기고 삭제당하는 인생인 겁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꿈을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아 가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야곱과 같은 방법으로 동일하게 다스려 가십니다.

 

과거에 신학교 총장을 지낸 신00 목사님이 세미나 강의 중에 감명 깊게 한 이야기가 생각나서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자신은 신학을 알려고 철학을 12년 동안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철학이 도리어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데 걸림돌이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젠 12년 동안 그 배웠던 철학을 빼내는 일을 하시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철학의 허구성을 알리려고 철학을 하였는데 도리어 철학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방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성경을 철학으로 해석하더라는 겁니다.

복음이 사변화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철학을 빼내는 싸움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참석하신 목사님들에게 철학을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면 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그만큼 그 앎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 그 말을 참으로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제 신앙으로 적용해 보았습니다.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내 이력서를 채워가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쌓았던 그 세월만큼이나 채웠던 이력서를 지워가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릇된 사상을 버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서 팔자를 고치려고 하는 것이 죄인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인생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악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놓치기 때문에 눈만 뜨면 자아 확장을 꿈꾸고자 하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만나서 말이에요.

얼마나 웃깁니까?

 

우리가 그러고 있어요.

자기가 저주 받은 죄인인줄 모르고 능력 받아 하나님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설쳐 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어찌 되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럼 왜?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면 안 되는지를 알아봅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왜? 죄인을 만나 주지 않는지에 대하여서도 살펴보기로 합시다.

죄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지도 살펴봅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하고 문을 걸어 잠가 버립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은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담을 에덴에서 추방을 했을까요?

선악과를 따 먹었더라도 그냥 용서하고 함께 살면 안 됩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용서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었다고 매정하게 집에서 쫓아내고 저주를 하시느냐 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본다면 하나님과 아담은 부모와 자식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잖아요.

그러니 부모이지요.

어느 부모가 자식이 잘못하였다고 해서 저주 하느냔 말입니다.

인간들의 측은지심이라는 인정으로 본다면 그럴 수가 없어요.

아무리 미물 같은 짐승이라고 하여도 자기 새끼를 죽이고 저주하는 그런 부모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미물들도 하지 않는 그런 일을 하셨어요?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자 에덴에서 쫓아내고 문을 걸어 잠그고 천사들로 하여금 행여 들어 올까봐 불철주야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아니 아무리 자식이 잘못 했다고 하여도 어떻게 집에 못 들어오게 합니까?

그것도 경비원을 시켜서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라고 합니까?

이런 하나님은 우리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열면 이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하나님이 이런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과연 우리가 사랑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상대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사랑법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 계산된 사랑법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는 철저히 응징하는 사랑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부모 자식이라도 일가친척 형제나 이웃이나 친구라 할지라도 자기를 귀찮게 하고 힘들게 하면 미워하고 죽이고 싶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잘못하였다고 저주하고 집에서 쫓아내는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힘이 너무도 커서 내가 이기지 못하여 혹시라도 미움을 받으면 내게 화가 될까봐서 사랑하는 척 할 뿐입니다.

 

마치 조폭들이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형님이라고 하면서 굴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폭 세계는 언제든지 자기에게 힘이 있으면 반기를 들고 철저하게 응징을 가합니다.

인간들도 자기에게 힘이 있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을 땐 다 얻어 낼 것이 있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다 계산된 자기 유익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뭔가 도움을 입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탐심입니다.

이걸 성경은 우상이라고 합니다.

 

지난번에 교회에 바퀴벌레가 보여서 소독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동안 바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또 바퀴가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소독을 했습니다.



저는 바퀴가 교회에 서식하지 못하도록 소독을 하고 눈에 보이는 족족 바퀴를 죽입니다.

교회에 바퀴벌레가 살지 못하게 하려고 저와 바퀴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바퀴와 함께 할 수 없듯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과 동거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거룩과 비거룩의 차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은 바퀴벌레와 같습니다.

철저하게 사라져야 할 대상입니다.

눈에 보여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하나님 눈에 얼씬 거리면 죽임 당합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으시고 문을 걸어 잠그고 얼씬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퀴 같은 인간들이 이걸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만나서 자기들 소원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죄인들의 소원을 들어 준다면 죄인이 번창하게 됩니다.

 

가만 두면 바퀴벌레처럼 온 집을 엎드러지게 합니다.

이걸 어찌 허락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선 죄인은 진멸 대상인데 어찌 죄인의 소원을 들어주겠어요.

도리어 죄인의 소원을 빼앗아 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소원을 일절 들어주지 않기 위해서 추방을 해 버린 겁니다.

아담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 사랑을 몰라요.

도리어 야속하게 느껴져요.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로 인하여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거룩과 부정이 공존하면 부정이 죽습니다.

 

거룩을 빛이라고 하고 부정을 어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고 인간은 어둠입니다.

빛과 어둠은 공존 할 수가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빛이 어둠과 분리하는 것이 빛으로서의 사랑이고 어둠에 대한 배려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이고 인간은 죽은 자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산 자는 산 자들과 살아야 하고, 죽은 자는 죽은 자들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끼리 살라고 아담을 산 자들이 사는 에덴동산에서 죽은 자들이 사는 세상으로 추방을 하신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 턱이 없습니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왜? 쫓아냈는지는 모르고 그져 쫓겨낫다는 것으로만 하나님께 너무 합니다! 라고 합니다.

너무하다고 하면서도 틈만 나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밤새워 기도하면서 만나 달라고 합니다.

 

인간의 소원대로 하나님이 만나주면 자신이 죽는다는 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찾고자 하면 하나님은 더 꽁꽁 숨어 버립니다.

행여 그림자라도 보이면 찾김 당할까봐서 술래처럼 숨어버리십니다.

죄인에게 숨어 계신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곤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가짜라는 것을 고발하려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아주 비천하게 짐승의 밥통에 태어났습니다.

이는 인간들이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없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알아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는 자는 하나님께로 난 자이고 모르는 자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내가 곧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릅니다.

왜? 모를까요?

 

하나님은 의인에게만 나타나십니다.

의인하고만 상종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안다고 하는 하나님은 다 가짜 하나님입니다.

그럼 진짜 하나님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진짜 하나님은 누구에게 나타나실까요?

 

그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아버지를 알았을 것이고 또 아버지를 보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빌립이 예수님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빌립에게 아버지는 나를 통하여서만 볼 수가 있다고 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래도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라고 하는 데에도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 상(像)이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하고 다르다는 말입니다.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그 물음 속에는 자기가 만약 아버지라고 한다면 아들을 이런 식으로 세상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나 같으면 내 아들을 이렇게 대접 받게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겁니다.

좀 알아보아야 겠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과 동거동락(同居同樂)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는 수많은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릅니다.

이로보건데 기적을 맛보았다고 하여도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동거동락을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알 수가 있는 것도 아니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 곁에 있어도 우린 모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도 몰라보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우리도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모릅니다.

 

그럼 예수님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연구해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실 때만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와서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소 이야기를 하고 성령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면 성령이 와서 그가 나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면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또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만물을 예수 안에서 창조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창조를 했습니다.

그럼 만물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창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또한 예수를 통하여서 만물을 만나십니다.

 

이게 하나님과 만물이 만날 수 있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이 법칙을 고수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버지 이름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계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서 하나님으로 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을 보는 눈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상실하고 죄인의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예수를 보내서 하나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해 주신 겁니다.

이 눈은 성령이 오시면 떠집니다.

눈이 떠지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보여요.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셔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 믿어집니다.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세요.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자기백성을 위하여 죽어야 하는 모습으로 일하시는 그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믿음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주셔야지만 예수 안에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있어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믿음을 받은 자는 더 이상 믿음을 위하여 애쓰거나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믿어지는 것으로 삽니다.

 

그런데 마귀는 교회 안에 거짓 믿음을 심어 놓았습니다.

마귀가 심어 놓은 거짓 믿음은 자기가 보고 만진 것을 믿게 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우상의 믿음이에요.

우상의 믿음이란 하나님을 형상화 하여 믿는 것입니다.

 

형상화 한 하나님이란? 자기가 만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믿는 믿음을 이미 고착화 해 놓았습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믿겠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자기가 정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은 자기 생각으로 알아진 인식론(認識論)입니다.

자기가 이것이 옳다고 인식된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말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자기가 보고 만져서 이해되어지고 얻어진 자기 이해의 인식인 것입니다.

 

인식은 믿음이 아닙니다.

인식론이란? 쉽게 말해서 자기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이성적으로 이해 된 것을 믿는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쉬운 말로 합니다.

흔히들 하나님에 대하여도 여러분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지요.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는 식으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 상을 끄집어내라고 합니다.

 

특히 목사들이 교인들에 충성과 열심과 한금을 끄집어 낼 때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같으면 이런 봉사를 받겠으며 이런 열심을 받겠으며 이런 헌금을 받겠느냐고 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정성으로 최상에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독려하잖아요.

이건 모두가 사람들 속에 각인 되어진 그 우상의 하나님 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식하게 만든 것입니다.

 

여기에 미혹당하면 그래 맞아!

내가 만약 하나님이라고 하여도 그럴거야! 라고 긍정을 하고 춤을 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멋지게 마귀는 성공한 겁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바로 마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자기 이성으로 이해되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신이라야 합니다.

내 이성으로 믿어지는 신을 신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자되는 말이 “신 다움” 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신이라면 “신 다워야” 한다는 겁니다.

“신 다움”이란? 자기들이 고착화 해 놓은 신관이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에겐 각자 “난 신을 이렇게 생각한다!” 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틀)에 맞아야 신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신 다움”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하나님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정한 하나님다움이 있습니다.

제자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빌립이 그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여도 못 믿겠으니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그대로 우리들 신앙 안에 녹아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러지요.

목사가 목사다워야지!

이 이야기는 목사다움이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자신들이 정한 목사다움에서 벗어나면 목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면 목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탄핵합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이 정한 복음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에 합당하여야 복음으로 인정하겠다고 합니다.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비 복음으로 간주하여 이단이라고 서슴치 않고 정죄해 버립니다.



모든 인간은 각자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곧 하나님인 겁니다.

하나님처럼 심판하는 일을 서슴없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준을 다른 말로 관(觀, 눈)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무엇이든지 자기만의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관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관으로 판단을 합니다.



설교도 그 관으로 판단하고!

교회도 그 관으로 판단하고!

믿음도 그 관으로 판단합니다.

이 관은 사람들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수 만큼이나 하나님이 다르고 예수도 다르고 진리도 다릅니다.

 

유대인들도 이런 “하나님 다움” 이라는 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시야 다움”이라는 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다움” 이라는 관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정한 “메시야 다움”에 맞지 않습니다.

미흡했습니다.

자기들이 정한 “메시야 다움” 으로는 아무리 예수를 분석하고 따져 보아도 메시야로서의 자격 미달이고 함량미달 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메시야 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를 가만 두면 혹세무민(惑世誣民)하여 백성들을 혼란에 몰아넣을 수 있으니 하나님을 참람 되게 하는 자라는 죄목을 씌워서 죽여 버렸습니다.

이런 메시야이즘은 제자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유대인들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주의 우편에 앉혀 달라고 하지요.

제자들도 다 자기 나름대로의 꼼수를 가지고 예수를 따라 다닌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자신들이 그려 놓은 “메시야 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자신은 아버지와 함께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빌립이 못 믿겠다고 하면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안다면 구태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못 믿겠으니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야~ 이놈들아! 내가 행하는 일을 그렇게 보고도 못 믿겠느냐고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 많은 기적을 행하였는데 그 기적을 보고도 못 믿겠느냐!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안 믿어지는 것은 매 일반입니다.

인간은 안 믿어지면 믿어지는 것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신앙 구석구석에 녹아져서 우리 모습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이러한 신앙이 어떻게 우리에게서 나타나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바울은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쫓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귀를 즐겁게 해 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합니다.

귀를 즐겁게 해 준다 함은 자기편을 들어주고 자기가 이해되는 말을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바라는 말을 하고 자기 소욕을 채워주는 목사를 따른다는 말입니다.

 

설교를 들어도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듣습니다.

죄인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하는 것을 긍정해 주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자기 생각에 반(反)하는 말을 들으면 죄가 발각당하니 싫은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은혜 받았다고 하는 말은 자기생각에 맞아 떨어지는 말을 들었다는 뜻입니다.

이걸 자기 귀를 즐겁게 해주는 사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 생각에 벗어난 설교를 들으면 다 이단이라고 해요.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처럼 심판을 행사하고자 하는 선악의 법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자기 사욕의 우상성을 바탕으로 한 자기만의 진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함정입니다.

나는 복음을 다 안다고 하면서 더 이상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해요.

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기 생각에 가두어 놓고 고정된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의 말에 귀를 닫아 버리는 겁니다.

 

제일 무서운 것이 남의 말에 귀를 닫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걸 시편기자는 귀머거리 독사가 귀에 착 달라붙어서 진리를 듣지 못하게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자기가 아는 진리만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확정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아예 듣고자 하지 않으려는 배타성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곤 남을 판단하는 심판자 노릇을 하는 겁니다.

 

물론 복음 속엔 배타성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깨닫는 것은 지극히 부분적인 것으로서 한계가 있어요.

온전한 것이 아니에요.

온전한 것이 아니란 말은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니고 지극히 부분적이고 단편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깨닫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읽어내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다 허락하지도 않았어요.

다 알면 자기가 신 노릇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이비 교주들이 이런 짓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도 이런 짓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도 부분적으로 쬐끔 아는 것으로도 교주 노릇하고자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에게도 한 부분만 알게 해 주시지 다 알게 해 주시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다 아는 척 하지 말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읽어내는 것은 각자마다 분량이 달라요.

각지 받는 은혜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하는 선생이에요.

주일학생에게도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은혜를 볼 것이 있어요.

그러니 어리다고 무시하면 안 되어요.

그 아이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어른은 어린 아이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는 교인들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조건으로 판단하니 그런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로 취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사랑하는 것에는 사람의 외모나 조건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는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집사나 목사나 차이가 없어요.

많이 배우나 못 배우나 차이가 없어요.

차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깨닫느냐의 차이 뿐입니다.

이걸 많이 탕감 받았느냐 적게 탕감 받았느냐 입니다.

많이 탕감 받은 자임을 알면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것을 알면 적게 사랑할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에요.

믿음은 은사에요.

은사는 각양 달라요.

믿음은 동일한 것이지만 그 믿음을 표현해 내는 것은 각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우리는 각자가 받은 은혜만큼만 알아요.

하나님이 주신 것만큼 알아요.

 

사도들이 성경을 썼지요.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이나 여고보나 유다나 야고보나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그 감동하심으로 성경을 썼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사도들이 각각 쓴 서신서들을 홀로 딱 떼서 보면 다 달라요.

만약 쪽 복음으로 사도들이 쓴 각각의 성경을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서 읽게 하면 다 다른 말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읽은 것으로만 그 내용을 알 수밖에 없잖아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야고보서는 야고보가 썼고, 로마서는 바울이 썼어요.

로마서는 믿음을 말하고, 야고보서는 행함을 말합니다.

야고보서와 로마서는 단편적으로 보면 극단이에요.

내용이 서로 상충합니다.



왜? 한 성령으로 기록한 성경이 이렇게 다른가요?

이는 복음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은혜의 풍성함 때문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생명이 담고 있는 그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인간의 지혜로는 다 담아 낼 수 없을 정도로 무궁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행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에게서만 나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구원의 길이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로서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는 율법 외에 다른 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야고보서는 믿음이란? 예수님의 생명인데 그 생명이 어떤 식으로 성도 안에서 역사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을 예수님의 생명에 활동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가 성도 안에서 살아서 일을 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고 가짜라고 하는 겁니다.

그건 그 안에 예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서로 짝이 되어 믿음을 완벽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을 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완벽합니까!

어느 하나가 없어서는 안 될 성경인 겁니다.

성령이 완벽하게 기록을 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십자가 도를 아는 것하고 십자가 도로 사는 것하고 같아요.

십자가 피도 필요하지만 그 피를 마시고 살아가는 삶도 있다는 것입니다.

둘 중 하나가 빠져도 안 되어요.

둘 다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피를 마신 사도들이 십자가 도를 전하면서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자로서의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자신의 원함과 상관없이 주께서 그렇게 살도록 이끄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그러했어요.

구약 시대도 그러했고

초대교회도 그러했고

중세시대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해요.

 

모두가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십자가 도를 말하면서도 이렇게 살으라 저렇게 살으라고 성도로서 마땅히 살아가야 할 행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행함이 아니라 믿음을 받은 자들에게선 이러한 행함들이 나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 속에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살아가야할 삶도 들어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는 아담의 생명으로 살지만 예수 안에서는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요.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죄사함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죄사함 받은 자로서의 삶도 들어 있어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도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능력이에요.



능력이란? 살아서 역사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활동이고 힘이란 말입니다.

그냥 나미아불타불관세음보살이라는 식으로 주문이나 외는 그런 주술이 아니에요.

나 십자가 안다 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안다는 것으로 살아가야하는 삶이 포함되어 있어요.

 

성령이 그렇게 살아가도록 몰아가요.

우리가 원치 않아도 주께서 그렇게 간섭하세요.

그래서 신앙생활이 고난인 겁니다.

살았다는 것이 뭔가요?

움직이는 겁니다.

 

기쁘면 기쁨을 표현하고 슬프면 슬픔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난 이런 용서를 받았다!

난 이런 긍휼을 입었다!

난 이런 은혜를 받았다!

나에겐 이런 생명이 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삶으로 표현해 내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애굽에서의 삶과 가나안에서의 삶이 달라요.

가나안에선 애굽에 방식으로 살면 쫓겨납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에선 애굽에 습성과 싸우는 모습으로서의 삶을 주문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하고 선한 싸움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삶과 예수 믿고 난 후의 삶이 달라요.

반드시 달라야만 합니다.

가치관이 다르고 지향성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라고 성령을 보내 주신 겁니다.

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까?

이는 옛 사람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우리 안에 보내 주신 겁니다.

온전하고 완벽하라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다른 인간이란 말입니다.

다른 인간으로서의 삶에 방향성을 말하는 겁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가치성과 지향성을 말해요.

이게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일어나는 싸움인 겁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싸우게 합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워요.

이걸 가나안 전쟁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로마서 7장에서 탄식했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왜? 고난입니까?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고난인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니 고난 인 것입니다.

내 옛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니 고난인 겁니다.

죄인이 죄 짓는 것은 너무도 달콤한 것입니다.

그런데 죄 짓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죄의 사욕을 본 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 짜증이 나는 겁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에게 술 먹지 말라고 하면 미칩니다.

도박 좋아하는 사람에게 도박 못하게 하면 죽을 지경입니다.

게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게임 못하게 하면 미쳐버립니다.

남 욕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욕하지 말라고 하면 환장합니다.

그래서 고난인 겁니다.

 우리 육신은 죄 짓지 말라고 하면 반발을 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성도가 옛 사람의 몸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고통이고 고난인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사도들이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죄인이 즐기는 것들을 금지하면 미치고 팔딱 뛰어요.

한 가지 예를 들어서 교회가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교회 가라고 해보세요.

대번에 성질을 냅니다.



내가 교회인데 왜? 자꾸만 교회에 가라고 하느냐 라고 짜증을 내요.

이건 그 속에 복음을 빙자하여 자기 일신상의 편안함을 유희하려고 교회 가기 싫어하는 죄성을 고발당하기 때문에 화딱지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 행위주의자이지 라고 뱀처럼 확 무는 겁니다.

 

왜? 무는가 하면 아까 말했듯이 자기 안에 자기가 만든 교회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관으로 모든 교회를 판단하는 겁니다.

그러니 갈 교회가 없다고 교만을 떠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가 아니라고 비판하고 욕을 하는 그 교회도 하나님이 살아서 다스리고 있어요.



고린도 교회를보세요.

그게 어디 교회인가?

그런데 그 교회에 바울이 편지를 보냈어요.

교회엔 천사가 모인 곳이 아니고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니 온전하지가 않아요.

그래도 피로 값주고 산 교회들입니다.

어느 교회든지 그 안에는 염소도 있고 양도 있어요.

곡식도 있고 가라지도 있어요.

 

그 교회가 진짜이든 가짜이든 판단은 주께 맡기고 어디든지 가리지 말고 내가 받은 은혜로 감사하고 섬기면 되어요.

왜냐하면! 구원이란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주님이 알아서 만나게 해 주세요.

그 만남을 위해서 집에서 빈둥거리고 놀지 말고 교회에 가서 성도들과 부딪치면서 내 안에 죄가 고발당하란 말입니다.

 

성도를 섬기면서 자존심 상해보고 예수님의 피를 한번 실제적으로 마셔 보란 말입니다.

속된 말로 인간 같지 않는 것들을 한 번 섬겨 보란 말입니다.

그래 복음 모른다고 무시하던 그런 사람들을 한번 섬겨 보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보란 말입니다.

자기를 비워 죄인들이 종이 되어 섬기신 그 예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도 복음 모르는 그런 사람을 한번 섬겨 보란 말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십자가가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느껴지고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해요.

죄인이 죄 짓고 사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몸으로 자기 쾌락을 즐겨요.

그건 자기 종이지 예수의 종이 아니에요.

자기 몸을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싸움이 없는 겁니다.

싸움이 없는데 무슨 고난이 있겠어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데 뭐가 고난입니까?

 

복음을 단편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성도의 삶을 이야기하면 신경질을 내요.

그건 성령이 알아서 간섭 할 것인데 왜? 행함을 강조하느냐!

오직 십자가만 전하면 되지 않느냐 라고 합니다.

인간이 하는 것은 모두가 죄이기 때문에 십자가만 바라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 이 말에 동의 할 수가 없어요.

사도들도 과연 이렇게 말을 하였느냐 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들은 도리어 이런 사고와 싸웠음을 보게 됩니다.

사도들이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성경에 이렇게 살으라 저렇게 살으라고 한 줄 아세요.

그들이 행위주의자들이라서 행함을 말한 줄 아세요.

 

십자가 도 속에는 옛 사람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의 생명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야 할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죽은 것이 아니라 성도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구습을 좇아가면 옛 사람의 행실들을 죄라고 고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입으라는 말은 주께서 입혀 주겠다는 말입니다.

새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간섭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성도에겐 버릴 것이 있고 취할 것이 있어요.

예수의 피를 내 죄를 씻겨주는 것으로 도용하지 마세요.

우리 꼴리는 대로 살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 않았어요.

 

“행위”와 “행함”은 달라요.

 

행위는 내가 하는 것이고 행함은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행위는 내 힘으로 하는 것이고 행함은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행위의 끝에는 내 자랑이 남지만 행함의 끝에는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는 고백이 남게 되어요.

행위는 종교생활이지만 행함은 신앙생활입니다.

전 지금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행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발 좀 구분하세요.

 

성도는 예수 안에서 산 자에요.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있는 자는 필연적으로 예수의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야고보서에선 믿음과 행함이라고 했어요.

전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받은 자들에게서는 반드시 믿음이 발생시킨 행함이 나오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일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걸 행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런 것이 복음 속에 담겨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이란? 성도의 삶 전체를 말하는 것이지 십자가 도를 아는 것으로만 두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바울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 온전하라고 했어요.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너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하잖아요.

어떻게 항하라고 합니까?

서로 사랑가운데 용납하라고 하잖아요.

왜? 사랑으로 용납하라고 합니까?

이는 너나 나나 모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은 자이고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엡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엡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 안에 각 사람마다 각자에게 분량에 따라 은사를 주셨으니 각자 받은 은사로 섬기라고 하잖아요.

예수를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서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의 궤술과 사람의 간사한 유혹이란 귀에 듣기 좋은 말을 듣지 말라는 겁니다.

그건 뱀의 독과 같아서 사람을 감각 없게 만들어요.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막살아도 된다!

꼴리는 대로 살아도 된다는 식의 말을 자꾸 들으면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요.

 

엡 4:17-23=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바울은 교회 안에 영지주의자들의 말을 따르는 자들에게 경고합니다.

너희가 신자 아니냐?

그런데 왜 이방인처럼 사느냐?

그건 옛날에 살던 방식이고 이젠 예수쟁이답게 살아야 하지 않느냐?

그런데도 너희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방인처럼 방탕과 방종하고 잇으니 이를 어찌 예수 믿는 자라고 할 수가 있느냐?



어떤 놈이 이런 말을 가르치더냐?

그런 말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놈은 지금 뱁의 독을 먹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뱀의 독처럼 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서 급기야는 자신의 몸을 이방인들처럼 방탕과 방임에 내어두게 되므로 조심하라고 하잖아요.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그렇게 배우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이 죄 짓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젠 새 사람이 되었으니 유혹에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잖아요.

제 이야기가 아니고 바울의 말이에요. 

 

새 사람의 삶이 어떤 건가요.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겁니다.

왜? 용서하라고 합니까?

이는 우리가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엡 4:25-32=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용서를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받은 용서가 있으니 그 용서를 토해 내라는 겁니다.

성령이 토하여 내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용서하고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자기 백성을 위한 용서이고 섬김이고 봉사인 것입니다.

그러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게 새 사람으로서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도를 우리 몸에 실제로 그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전이란? 날마다 제물의 희생하고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제사를 예수님께서 우리 몸을 성전 삼아서 당신의 희생 제사를 그려내시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십자가 도에 의미를 깨닫는 것이라고 한다면 믿는 것은 그 깨달아진 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과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도를 지식으로 알고 있으면 변론을 좋아하고 심판자 노릇을 하게 되어요.

바울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디모데 전서 1장입니다.

 

딤전 1:3-7=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 동행하다가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장로들을 불러서 눈물로 부탁하던 교회 아닙니까.

내가 떠나면 흉악한 이리가 들어와서 성도들을 미혹하고 믿음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고 제발 그들의 말에 현혹당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 있으라고 당부한 곳입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바울의 예언대로 거짓 종들이 출몰해서 성도들을 다른 교훈으로 어그러진 길로 인도하는 겁니다.

신화와 족보란? 한마디로 어떤 유명한 선생의 말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칼빈주의니 알미니안주의니 개혁주의니 하는 사상을 말해요.

주의(主義)란? 그 사람의 말을 진리로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의(主義)가 결국엔 자기들의 교리만 맞다고 교회 안에 파당을 짓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단 변론만 야기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잘남을 드러나게 하려고 하니 전부가 율법의 선생이 되어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선생이 된다는 것은 남에 신앙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자기가 배운 것으로 남을 정죄하는 것을 말해요.

십자가 도 안에서 자기가 정죄당하여야 함에도 도리어 남을 정죄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한마디로 자기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이걸 일컬어 성경은 소경이 선생 노릇한다고 하는 겁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바로 잡으라고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겁니다.

누가 너의 연소함을 가지고 업신여기면 기 죽지 말고 내가 가르친 복음으로 그들을 꾸짖고 책망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을 간과하는 것은 모두가 십자가를 단편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라는 복음 속에 담긴 예수의 생명이라는 풍성함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도 속에는 옛 사람의 죽음도 있지만 새 사람으로서의 살아남도 있습니다.

새 사람으로서의 살아남이 있다 함은 새 사람으로서의 삶도 있다는 말입니다.

살아 있기에 삶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단편적으로 보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인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간과해 버립니다.

예수가 자기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무시해 버립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란 성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산 자에게서 나오는 당연한 몸부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철없는 사람들은 이걸 행위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행위로 보니까 막 살아도 되고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십자가 정신인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오지 않고 도리어 반(反) 십자가 정신인 강포와 악독과 정죄와 심판만 난무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자기가 아는 지식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고 있는 겁니다.

신화와 족보에 착념한다는 것은 요즘말로 자기들 신학만 옳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 신학으로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보세요.

서로 자기 교리가 맞다고 하고 상대를 이단이라고 하잖아요.

개혁주의와 십자가주의를 보세요.

서로 이단이라고 하잖아요.

 

세상에 모든 신학은 다 틀렸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신학은 온전한 것이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칼빈주의가 그렇고!

알미니안주의가 그렇고!

개혁주의가 그렇고!

일명 십자가만 증거한다고 하는 십자가 신학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동일해요.

다 자기들 것만 맞다고 합니다.

자기하고 다르면 다 이단이래요.

자기들 사상을 따르지 않으면 다 복음 모르는 자라고 심판해 버려요.

 

세상 모든 신학이 다 틀렸다고 한다면 자기들의 신학도 오류가 있고 틀린 것이라고 하여야지요.

내가 아는 것도 오류가 있을 수 있구나! 라고 하여야지요.

그럼 자기가 아는 것으로 남을 장죄하거나 심판 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라고 자기 의견을 제시하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아요.

내 신학은 맞고 남은 다 틀렸다고 하고 있어요.

그래서 자기 신학으로 모두 정죄하는 겁니다.

그러니 바울이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말도 무슨 말인지 모를 뿐더러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2장 3장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고 자칭 사도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이들이 있는 곳은 사단의 위(位)가 있는 곳이고 이들을 사단의 회(會)라고 했어요.

자기 신학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마귀라는 겁니다.

그런 집단은 마귀 집단이고 그곳에 있는 자들은 마귀들의 교회란 말입니다.

마귀 집단이기 때문에 마귀처럼 정죄하고 심판하고 죽이는 마귀 짓을 서슴없이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은 용서와 긍휼이지 심판이 아니에요.

바울은 율법 아래 있을 땐 다 잘라내고 심판을 행사하였지만 다메섹에서 예수의 생명을 받고 난 후엔 용서와 긍휼과 사랑으로 대하였어요.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은 우리가 행할 몫이 아니에요.

분별하는 것과 심판을 달라요.

성경은 분별을 하되 심판은 금지하고 있어요.

 

바울은 그 사람이 비록 복음을 모른다고 하여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가갔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였는데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모르는 이방인에게도 다가간 겁니다.



이방인에겐 이방인처럼 대하고!

유대인에겐 유대인처럼 대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겐 율법 아래서 대하였어요.

참고 기다렸어요.

오직 하나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이 시대 우리들처럼 난 복음 안다!

넌 모르지!

그러니 넌 이단이야 꺼져!

그러지 않았어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로 살았어요.



이는 자신이 예수의 생명으로 용서받고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들의 예수 정신으로서의 삶입니다.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에요.

지금도 진정으로 예수의 살과 피를 마신 성도는 바울과 같은 정신으로 살아갑니다.

성령이 그렇게 살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그런데 지식으로 알아진 십자가는 관념화 되어서 삶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도리어 이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을 행위주의자라고 매도하고 비판을 하고 정죄를 하게 됩니다.

이는 자기 안에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서 용서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용서가 안 나온다고 해석 할 수 밖에 없어요.

용서 받은 것이 없으니 죄인 본래의 선악의 법으로 판단하고 정죄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 당신 한번 전해봐라!

내가 검증해 줄게! 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변론을 좋아하고 다툼만 일으키는 자로서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진리를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진리로 사는 것까지입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십자가를 아는 것만이 아니고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까지입니다.

아는 것만 있으면 잎만 무성한 열매 없는 나무가 됩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믿는다는 것은 산다는 뜻입니다.

아는 것은 지식이고 믿는 것은 삶입니다.

옳은 앎은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이 없는 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과 같습니다.

그건 귀신의 믿음이고 죽은 믿음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합니다.

귀신도 예수를 알아요.

하지만 귀신은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예수의 삶을 살아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도 마귀적인 삶이 나오는 겁니다.

마귀는 남을 넘어지게 하고!

일하는 소의 발목에 힘줄을 끊고!

교회에서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가 되어서!

사람을 시험 들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합니다.

 

지금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말을 했어요.

이걸 귀담아 놓으세요.

이건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하는 시금석이에요.

복음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을 분별하는 시금석이에요.

아는 것은 지식이고 관념이고 믿는 것은 생명으로 사는 것이고 실제에요.

관념은 죽은 것이고 생명은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열매로 나무를 알라고 하셨어요.

그만큼 가짜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성도들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그렇게 강조한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을 봅시다.

 

벧후 1:4-15=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12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성도는 신의 성품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신의성품이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겁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죽은 것은 자기백성들을 신의 성품에 참예키 위함이라고 했어요.

마귀의 마음으로 살던 자들을 자기 피로 사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라고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이러한 열매가 없는 자는 소경이라고 했어요.

베드로는 지금 이건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주께서 나에게 지시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당부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린 이런 사도들이 말을 귀 기우리지 않아요.



공교하게 지은 이상한 말에 속아서 사도들이 그토록 금지하는 것들을 마치 반(反) 성경적으로 사는 것이 참된 신앙인 줄 알고 죄를 먹고 마시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알고 사도들은 어느 시대이고 교회 안에는 자칭 유대인이고 자칭 사도라고 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행실을 눈여겨보고 본(本) 받으라고 했어요.

 

여기서 오해 할까봐서 못 하나 쳐 놓고 갑시다.

 

이런 말을 하면 꼭 너는 그렇게 사느냐 라고 딴지를 거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증거하는 저 자신도 개 차반이에요.

저도 이 말씀에 책망 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제가 온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그러하기 때문에 부득불 내 죄가 폭로당하면서도 이 말을 하지 아니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는 것뿐입니다.

 

베드로처럼 이 말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께서 제 속에서 이런 말을 하게 하시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성도의 삶을 말하는 것은 윤리 도덕적으로 온전해지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린 죄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온전하게 살아 내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고자 하는 악당임을 알자는 겁니다.

서로 죄인이니 서로 불쌍히 여기고 살자는 겁니다.

서로 병신끼리 싸우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병신들 육갑한다고 욕을 합니다.

병신이면 서로 보듬고 살아야지 싸우긴 왜? 싸웁니까?

그러니 내가 마치 다 아는 자처럼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십자가에 대하여 비밀한 것을 말하고 천사의 말을 하여도 예수의 사랑이 나오지 않는 자는 바울의 지적대로 예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다고 보여요.

전 그렇게 보아요.

그 안에 예수가 있는 사람은 예수정신의 삶을 토해내고!

그 안에 마귀가 있는 사람은 마귀적인 삶을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귀신의 믿음을 가진 자들은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예수의 삶을 살아내지를 못합니다. 

용서 받은 것이 없고 탕감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용서가 나오지 않고 긍휼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토하여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그 속에 예수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십자가를 논리적으로 말하고 복음에 비밀을 말한다고 하여도 정작 본인은 그 복음을 생명으로 살아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 속에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없으니 예수의 마음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 속에 예수가 있는 자는 반드시 예수의 마음과 예수의 삶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자기 영광을 그려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몸은 도화지와 같아요.

 

이게 또 중요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도 안에 와 계신 것은 성도의 몸으로 예수님을 그려내고자 함입니다.

예수님께 받은 것을 토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선 아들에 영광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바울은 너희 안에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겁니다.

품으라는 말은 이미 예수의 마음이 우리 안에 주어졌으니 암탉이 알을 병아리로 부화시켜 내듯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토하여 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삶으로 꽃 피우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삶으로 풀어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무슨 마음입니까?

자기를 비워 종이 되는 마음입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마음을 품은 성도라고 한다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서로 돌아보고!

서로 감싸주고!

서로 짐을 대신 져 주는 모습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로부터 섬김을 받았고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하고 섬김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온전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런 경향성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간섭을 해 가세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반드시 예수님처럼 용서와 섬김의 삶이 유출되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받은 십자가는 남을 정죄하고 죽이는 십자가가 아니에요.

용서받은 자로서 남을 살리는 십자가이어야 합니다.

성도는 생명을 살리는 자이지 죽이는 자가 아닙니다.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몫이에요.

우린 받은 용서를 토해내고 받은 긍휼을 토하여 내면 됩니다.

행함이란? 우리더러 살으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살아지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삶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삶은 금지 할 수 법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없습니다.

모두가 성령의 삶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반드시 나무가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이걸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가지에 맺혀지는 열매는 모두가 나무가 맺게 한 열매이지 가지가 독자적으로 맺은 것이 아닙니다.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알아요.

그 열매는 자기가 맺은 것이 아니고 나무가 맺게 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요.

자기 안에 예수님이 계신 성도는 자기가 행한 것이 주께서 하게 하신 것을 알아요.

그러니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들이 있다고 합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있는 가지들이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농부가 되셔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모아서 불에 태운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를 아는 자이지 예수와 한 몸으로 연합된 성도가 아닙니다.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농부는 그 말라버린 가지를 불에 태우는 것입니다.

 

가지가 말라버렸다는 것은 심령이 강팍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막에 떨기나무처럼 말라서 심령이 뱀처럼 배배꼬여서 은혜가 나오지 않고 저주와 악독과 심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바로 마귀가 밭에 몰래 뿌려 놓은 가라지로서 자칭 유대인이고 자칭 사도들이에요.

 

신앙생활이란? 십자가를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변하는 것이 아니에요.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서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복음을 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주어진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은 은사입니다.

은사이므로 연구하고 논리를 개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은사가 덮쳐오면 믿어집니다.

논리적으로 말을 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믿어집니다.

믿어지는 것으로 살아갑니다.

 

설교는 논리가 아니에요.

증거에요.

증거가 되려면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찾아와서 만나서 일으킨 사건이 있어야 해요.

자기백성들에겐 반드시 예수님이 찾아가 일으킨 사건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인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몸에 새겨 놓은 흔적들이 있어요.

성도는 자기 안에 일어난 이 사건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나 이런 용서를 받았다!

나 이런 은혜를 입었다!

난 이런 사랑을 입었다!

예수 때문에 일어난 사건을 삶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능력(能力)이란? 삶이란 말입니다.

은사로 알아진 복음을 믿는 자들은 잘난 척 하지 않습니다.

남과 차별성을 두지도 않습니다.

내가 깨달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은사로 받은 자들은 이걸 알기 때문에 복음으로 힘을 삼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식으로 논리적으로 공교하게 연구해서 알아진 복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아는 것을 힘으로 사용합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힘으로 사용해요.

그래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항상 선생 노릇하고자 하는 겁니다.

나 아니면 어디서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느냐!

나 보다 복음을 잘 아는 사람 있으면 나와 봐! 그런단 말입니다.

이건 교만이고 악한 겁니다. 

 

하지만 은사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섬기는 자로 삽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대합니다.

은사로 복음을 받은 사람은 부모와 같이 연약한 성도들을 대합니다.

행여 상처받지 않을까!

행여 시험 들지 않을까!

이해하고 보듬고자 해요.

이게 부모에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은 있으되 아비는 적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스승이 아니고 아비라고 했습니다.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낳았다는 말은 부모 심정으로 대하고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거짓 종들은 성도들 위에서 군림하고 다스렸어요.

심지어 뺨을 치면서 자신들의 말을 따르라고 했어요.

안 따르면 내 쳤어요.

이런 자를 스승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누가 아파하면 같이 아파하고 자기 것을 나누어주고 도리어 섬겼어요.

욕을 하면 축복하고!

누가 넘어지면 아파하고 위로했어요.

이게 부모입니다.

이는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면 이런 마음이 나와요.

 

이런 것이 안 나오는 것은 십자가의 용서를 받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고 연구만 해서 그래요.

그러니 말은 현란하고 논리정연하고 혼자 복음을 다 아는 것 같은데 살아가는 삶 속에선 용서와 긍휼과 자비가 나오지 않고 악독과 강포와 심판과 정죄만 나오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부정적인 말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복음이 지금 내 삶 속에서 무슨 열매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복음 안다는 것으로 선생노릇하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을 행사합니까?

아니면 예수의 마음으로 섬기고 봉사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고 있습니까?

교회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로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나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자로 있습니까?

 

신앙생활이란? 십자가 피로 용서 받은 구원을 삶으로서 그려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셔서 우리의 몸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인생을 그려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이걸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산 제사” 라고 하고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주께서 그렇게 해 나가시기 때문에 산 제사가 되고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산 제사”란? 날마나 자신을 제물로 죽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이 예배를 묻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런 예배가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런 예배를 영적예배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그 영적 예배가 바로 자신을 제물로 바쳐서 드리는 산 제사라고 합니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돌보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율법 외에 다른 의인 믿음을 말하고서는 12장부터는 성령이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셔서 그 믿음을 삶으로 풀어낸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부터는 전부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성도를 섬기는 봉사를 말하고 있어요.

이게 산 제사에요.

영적 예배란 말입니다.

이러한 영적 예배는 오순절 성령 강림과 동시에 일어났어요.

그러니 초대교회 성도들이 재물을 팔아 교회에 바치고 제 것을 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성도를 섬기는데 사용하고 유무상통하였던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제자들이 메뚜기처럼 뜁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칩니다.

그러자 수많은 군중들이 베드로를 쳐다봅니다.

이 때 베드로가 외칩니다.

여러분! 이 일을 행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주 예수입니다.

여러분이 죽인 그 예수님이 지금 살아서 우리 안에서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 일을 행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라는 것을 증거키 위함입니다.

 

우리는 여러분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다고 보지 마십시오.

우리를 따르지 마십시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우리는 다만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몸을 가지고 당신이 살아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알려주신 것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이게 바로 성령을 받은 예수의 증인이고 아들에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 영광을 받으시기 원합니다.

 

믿음은 묵시 안에서는 추상 명사입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는 사역 동사로 쓰여졌습니다.

추상이란? 보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오면 사역 동사가 되어요.

사역 동사란 살아서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믿음을 사역 동사로 기록한 것은 성도 안에서 살아서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종합하면 믿음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믿음은 반드시 가시적으로 어떤 삶에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전기가 살았으면 에어컨을 돌리듯이 믿음이 살았으면 어떤 생명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그 믿음이 일으킨 사건들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믿음이 앉은뱅이를 고치는 가시적인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살아서 베드로를 가지고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걸 예수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이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어지도록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드러내는 의에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은 것과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내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 속에서는 늘 예수님의 모습들이 툭툭 터져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이미 구약의 성도들에게도 일어났어요.

그래서 바울도 구약의 성도들이 토하여 낸 신앙고백들을 자신의 편지에 자주 언급하였던 겁니다.

바울이 잘 사용하는 도살할 양이니!

만물의 찌끼니!

세상의 구경거리니! 라는 말은 모두가 시편 기자가 토하여 낸 고백들입니다.

 

시편 44편을 봅시다.

 

시 44:11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시 44: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시 44:13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시 44:14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시 44:19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시 44: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시 44: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시 44: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시 44:25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시 44:26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시편기자는 지금 하나님에게 원망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왜? 나를 조롱당하게 하고 죽음에 넘기느냐고 탄원합니다.

잘 보시면 이러한 일을 시도한 것이 주라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주께서” 이렇게 하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구조 속으로 밀어 넣고 계신단 말입니다.

 

시편의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이 고백한 내용이고 바울이 고백한 내용입니다.

결국 시편기자는 구약에서 예수님의 운명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주여 깨소서!

일어나소서!

왜? 주무십니까!

이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 라고 외친 그 절규입니다.

 

예수님도 외쳤고!

바울도 외쳤고!

지금 저도 외치고 있어요.

이런 삶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 주여 살려 달라고 외치는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이므로 이 세상에 남은 작은 예수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1-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사명을 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 20:21-23=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파송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자신도 제자들을 보낸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으로 파송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 안에 함께 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이 세상에 어떻게 보냈습니까?

자기백성들을 위하여 죽임 당하도록 보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백성들이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자신은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가 자신을 보낸 것과 같은 모습으로 보내십니다.

예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죽으라고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사함을 언급하고 계신 겁니다.

이는 제자들의 죽음에 죄사함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증거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이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자리로 미끄러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밀려가는가 하면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는 모습으로 밀려갑니다.

스데반이 성령의 충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그러자 돌들이 날아옵니다.

비판과 정죄와 심판이 난무 합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데반을 죽인 바울을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해 내십니다.

 

예수님이 다메섹에서 사울에게 나타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알다시피 사울은 살아서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인 적이 있습니다.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스데반의 죽음을 자기화 시켜서 사울에게 고지합니다.

나를 믿은 자를 핍박한 것이 곧 나를 핍박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알고 바울은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회개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바울을 다시 스데반처럼 사용하십니다.

죽을 자리로 밀어 넣습니다.

 

스데반 속에서 예수님이 터져 나왔듯이 바울 속에서 예수님이 터져 나옵니다.

이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도살할 양처럼 죽임 당하기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양을 이리가운데로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리에게 가서 잡아먹히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그 양의 죽음을 토대로 이리 속에 있는 자기 양들을 찾아내십니다.

이 일을 예수님은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한다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 하실 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왜?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고 합니까?

이는 그들도 구원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잃어버린 양이 이리란 뜻입니다.

왜? 잃어버린 양을 이리라고 합니까?

이는 자기백성들이 지금 마귀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이리 라고 표현한 겁니다.

 

우리도 원래 이리였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어요.

그러니 이리 이지요.

그런데 우리 앞선 성도들의 죽음으로 증거한 그 복음들을 듣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한 믿음에 앞선 선배들은 이리 가운데 보내심을 입은 양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바탕으로 복음이 증거되었고 우린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복음을 받았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는데 예수님의 생명으로 구원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마귀 아래서 이리로 있던 우리가 예수의 생명으로 양이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앞선 믿음에 선진들처럼 양으로 이리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운명을 그대로 뒤집어쓰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성도의 팔자입니다.

성도란? 죽임 당하기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먼저 간 믿음에 선배들이 하나님에게 세상을 심판해 달라고 하자 잠시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너희와 같이 죽임 당하여야 할 동무들의 수가 차기까지 랍니다.

죽어야 할 숫자가 차면 심판하겠다고 하십니다.

 

우린 지금 그 순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가 바로 두 증인들이 죽은 그 자리입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선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 되다고 하신 겁니다.

 

아버지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이제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죽임 당하는 사건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계시된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안에 계신 아버지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아들을 죽이는 하나님입니다.

 

우리 안에 와 계신 하나님도 동일합니다.

우리를 자기백성들을 위하여 미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죽는 그 현장에 또 다른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예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영광이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드러내는가 하면 우리 몸을 가지고 드러내십니다.

바울은 이걸 드러내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고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만물의 찌끼같이 살았습니다.

 

바울이 만신창이가 될 때마다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더욱 더 빛을 발합니다.

그 이유는 바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울에게만 일어날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일어날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일어나는 사건들마다 주께서 일으킨 사건이고 그 사건마다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럽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하였을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성도가 미움을 받을 때마다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만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범사에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늘 우리 소원을 들어주는 가짜 하나님만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음에 감사합니다. 날마다 우리 안에서 고개를 쳐드는 우상성을 깨트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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