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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89강.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시리라 (요 14:16-24)

by coroa 2021. 11. 29.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89강.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시리라 (요 14:16-24)

-.정낙원 목사

 

요 14:16-24=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에서는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하시고!

성령을 받게 되면 성도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서 성령에 대하여 상고할 것입니다.

성령의 다양한 면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하니까 조급하게 성령은 이렇다 라는 식으로 정답을 맞추는 것처럼 너무 단편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자 제자들이 근심에 휩싸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근심하지 마라!

내가 가는 것은 너희와 함께 살 처소(處所)를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와 영원토록 함께 거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선 예수님이 가시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합니다.

또 다른 보혜사란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이 오시면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성령이 오시는데 그 속에 예수님이 계신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홀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아버지를 품고 오신답니다.

그리고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곧 우리 안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가 함께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육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성령 안에서 가능해 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성령이 처소가 되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가 함께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마련하신다는 처소는 성령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고 예수님과 우리 성도가 하나가 되어서 성령 안에 거(居)하게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거(居)한다는 말은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이걸 한 몸이라고 합니다.

마치 한 집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사는 것과 같습니다.

집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온 가족이 오순도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이 마치 집과 같은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것을 바탕에 두고 오늘 본문을 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오심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성령이 안 오시면 우리는 예수님과 따로 따로입니다.

하나님과도 따로 따로입니다.

예수님과 따로 따로면 예수님의 대속 사역이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는 예수고 나는 나입니다.

 

한 마디로 너는 너고 나는 나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으심!

예수님의 십자가에 사건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고 마는 겁니다.

 

그럼 우린 우리 죄값으로 지옥에 가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여도 예수님과 내가 따로 따로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가면 예수님과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성령님을 보낸다고 하십니다.

 

성령이라는 집 안에서 예수와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들어 주신답니다.

이 모두는 예수님과 우리를 연합 시켜서 하나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하신 일이 나의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셔서 성령을 보내 주신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 아버지께로 승귀하시고 난 후에 오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가시지 않으면 안 오세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그 보혜사를 보내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는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계시지 않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늘로 가시는 것이 우리에겐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육체로만 계신다면 인간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여도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우리는 따로 따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우리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하신 일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우리는 예수님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여도 우리에겐 안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셔야지만 믿어집니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라도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우린 예수와 상관없는 자로 살다가 지옥에 가요.

아무리 예수 믿고 싶어도 안 믿어지는데 어찌합니까.

이는 인간의 믿음이란? 자기가 경험한 인식론을 믿음으로 내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이 믿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믿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내 주신다는 성령은 오직 자기 백성들 속에만 오십니다.

그러니 자기 백성은 반드시 예수를 믿게 되어 있고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아무리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교회는 다닐 수가 있어도 예수는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는 인간의 의지나 각오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자기백성들에게 믿어지게 하시고 자신의 일로 적용을 시킵니다.

성령은 예수님과 성도를 한 몸으로 만들어 주세요.

이걸 성령 안에서 예수와 성도가 함께 거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보혜사가 오면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영원토록 함께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혜사란 돕고 지키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왜? 자기백성들을 돕는 분으로 보내실까요?

이는 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은 주님께서 돕고 지키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이기지 못하고 사단의 참소로부터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백성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려고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면 오실 또 다른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라서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은 저를 받지도 못할 뿐더러 알아보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진리의 영이란? 거룩한 분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죄인은 가까이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알 수가 없습니다.

죄인은 성령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죄 문제가 해결 되지 않은 자는 성령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죄사함을 받은 성도에게만 주어집니다.

 

이걸 지난 시간에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이 베푸실 성령 세례를 성막의 뜰과 성소를 통하여서 살펴보았습니다.

 

성막의 뜰은 옛 사람이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막의 뜰에서 제물이 죽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성막의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제물의 태워짐과 같습니다.

 

성막의 뜰은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형벌이 집행되는 장소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쏟아 부을 진노를 예수님에게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이걸 이사야 53장에서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어요.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이걸 히브리서에선 예수의 피로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육체로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아버지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마련해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성막의 뜰에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 주심으로 우리 죄가 사해졌습니다.

이제 성소에 들어갈 길이 생긴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으로 성도들을 성소 안으로 들여보내신 것입니다.

이걸 히브리서에선 우리가 예수의 피로 아버지께 나아갈 담력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담력이란? 배짱이란 말입니다.

뻔뻔스러움입니다.

믿음이란? 뻔뻔스러움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 믿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죄인이지만 예수의 피를 앞세우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뜰은 옛 사람의 영역이고 성소는 새 사람의 영역입니다.

 

뜰은 이 세상을 말하고 성소는 천국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뜰과 성소 안은 전혀 다른 곳입니다.

영역이 달라요.

 

뜰은 어둠이지만 성소 안은 빛이에요.

성소 안에는 일곱 촛대가 항상 불을 밝혀서 환하게 하고 있어요.

거긴 어둠이 없어요.

그러나 뜰엔 빛이 없어요.

죽음이란 말입니다.

 

구원이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을 저녁에서 아침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녁이란? 어둠이고 죽음을 상징해요.

그리고 아침이란? 빛이고 생명을 상징해요.

 

아침은 빛의 나라인 묵시세계를 말하고 저녁은 죄악의 세상인 역사를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역사에서 묵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성막에선 역사라는 뜰에서 묵시라는 성소 안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에게 적용하면 육에서 영으로 나아간다고 하는 겁니다.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합니다.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누구로 말미암는가 하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뜰은 죄로 인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곳이라고 한다면!

성소 안에는 아버지와 한 밥상에 앉아 밥을 먹고 안식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뜰은 이 세상을 말하고 성소 안은 천국을 상징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죽으심은 뜰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한다면 성소 안은 예수님이 하늘로 승귀하시고 난 후 성령의 오심으로 일어나는 사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을 성소 안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 안에 진리의 빛이 비추어져요.

 

성령의 오심으로 우리에게 성소 안에서의 아버지와 교제하는 삶이 주어집니다.

성막의 뜰에는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 곳이지만!

성소 안은 향단에서 피워지는 향 냄새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피를 뿌리는 일이지만 성령으로의 오심은 우리 안에 예수의 성품들을 채우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죄인의 죽음이지만 성령으로서 오심은 의인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시면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성도의 삶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곧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은 벗어버리고 의와 거룩과 평강으로의 부르심을 입은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당연하고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성도 안에는 성소 안에 풍기는 향처럼 예수님의 마음이 향기를 토하여 내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성소 안은 천국이라고 했으니 천국백성으로서의 삶에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성도는 천국 백성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보혜사가 오시면 우리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어떤 변화인가요?

하나님 말씀을 지키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이건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죄인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죄인의 본성과 반대되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안에 오실 성령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러한 일들을 행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미리 예언을 하였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이 된 바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을 봅시다.

 

겔 36:26-31=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 ~ 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장차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주신다고 합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둔다!

새 마음을 너희 안에 주신다! 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심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냥 성도 안에 훅~ 하고 뚫고 들어오시겠다는 뜻입니다.

 

새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이라는 육신의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없던 새 사람인 부드러운 마음을 준다고 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우리더러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심어 주신답니다.

또한 굳은 마음을 우리더러 제하라는 말이 아니고 성령이 제하여 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게 하고 규례를 지키게 하실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뜻대로 살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건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들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이 일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제하는 것들이 있겠지요.

그게 무엇인고 하니 과거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던 죄 아래서 행하던 일들이 싫어지고!

죄를 가증이 여기게 되어 멀리 하고자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죄를 미워하고 과거 옛 사람의 습성들을 멀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건 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말하고 삶에 지향성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바울은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노력해서 되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모두가 성령이 오시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이 자기의 소원을 우리 안에 두시고 행하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을 봅시다.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보세요.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있다고 하지요.

누구인가요?

하나님이시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세요.

 

에스겔 식으로 말하면 성령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소원을 두고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소원을 두고 그 소원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소원을 심는 분도 하나님이고!

그 소원을 이루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우린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 당신의 소원이라는 예수라는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서 예수라는 열매를 얻어내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내가 너를 복에 조상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홀로 이루어 가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신답니다.

우린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것을 우리 입장에선 그리 좋아 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뜻대로 인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뜻과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 안에서는 죄가 터져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 될 때마다 아픔과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길을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라고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정과 욕심을 못 박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난입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인도하는가 하면 극과 극의 환경으로 인도 하신다고 합니다.

푸른 초장으로 인도 하다가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하세요.

죽였다 살렸다 하는 식으로 인도 하신단 말입니다.

이를 전도서 7장 14절에선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로 인도하신다고 했어요.

 

우린 맨 날 쉴만한 물가에서 수영하고 피서를 즐기고 고기 잡아 먹고 놀고 싶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인도하지 않고 사망이 넘나드는 음침한 골짜기와 푸른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마치 열탕에 집어넣었다가 냉탕에 집어넣었다가 담금질을 하신답니다.

한마디로 롤러코스트의 인생이 전개 된답니다.

 

이걸 바울은 고난 속에서 위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위로가 있기 때문에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눈물을 닦아준다고 합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눈물을 흘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나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걸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혜사가 오셔서 우리를 지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혜사가 오신다는 말은 육적으로 보면 우리에겐 그리 썩 좋은 일만은 아니지요.

 

말이 우리를 돕는 분이지 실제로는 우리를 괴롭히는 분이세요.

우리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시니 우리에겐 없느니만 못한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지켜내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서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 세상에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이란 고난이란 말입니다.

 

로마서 8장을 보세요.

 

롬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보세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리요! 라고 합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지요.

 

전제를 하나님 사랑으로 깔아 놓고 시작합니다.

그리고선 상상치도 못할 반전(反轉)을 주십니다.

사랑을 말해 놓고선 우리에게 무엇이 닥칩니까?

 

환란이 닥치고!

곤고가 닥치고!

핍박이 닥치고!

기근이 닥치고!

적신이 닥치고!

위험이 닥치고!

칼이 닥쳐서 우리를 종일토록 죽임당하기 위한 양처럼 만든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이 모든 일들이 닥친다 하여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고 합니다.

 

아니 싹 죽여 놓고선 넉넉히 이기게 한 대요.

무슨 이런 고약한 사랑이 있습니까?

우린 이런 사랑을 바라지 않아요.

반대로 이러한 것들이 안 닥치는 사랑을 원해요.

 

이건 마치 은혜를 주시고는 원수를 붙여주는 것과 같아요.

우린 은혜를 받으면 복이 오기를 바래요.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곤 돌맹이가 날아오도록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역설적이기 때문에 은혜를 주신 겁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리 은혜라는 주사를 맞혀 놓고 고난이라는 아픔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서 우리가 원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들어 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육을 죽이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육인 우리에겐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고 저주입니다.

육에겐 육이 필요한 사랑을 주어야지 고맙다고 하지 영에게 필요한 사랑을 주면 이게 뭐냐? 라고 갖다 버립니다.

 

이건 마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이라는 죽음의 땅에서 건져내서 광야에서 하늘에 양식인 만나를 부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보고 반응이 싸늘합니다.

 

백성들은 만나를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라는 말은 “뭐 이딴 걸! 주고 그래” 이 말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 딴거 말고!

우리가 익히 먹던 그 애굽에 음식을 달라고 합니다.

우리 입맛에 착 맞는 음식을 달라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지게 작대기를 들고 패기 시작합니다.

이 놈에 새끼들이 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먹을 일이지 말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백성들도 한 성깔 합니다.

죽여라 죽여!

우린 가나안으로 안 가고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그래!

그렇다면 죽여주지!

그러면서 불 뱀을 보내서 다 물어 죽게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하나님 우리가 잘못했으니 살려 주세요!

그럽니다.

이에 하나님이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게 하곤 누구든지 그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는 자는 다 살아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 놋 뱀이 바로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내가 자기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놈이 나 대신 예수가 죽었다는 것을 믿습니까?

못 믿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서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면 나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믿어집니다.

그리곤 내가 바로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도록 하신 답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눈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게 하십니다.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이 믿어지게 하십니다.

이걸 하시려고 성령이라는 보혜사가 오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너무 감상주의로 접근하지 마세요.

신앙생활은 죄인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영웅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미약해져 가는 것입니다.

내 힘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빼앗김 당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게 복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마치 우리의 인생들처럼 늙어갈수록 기력이 쇠잔해져 가듯이 예수를 깊이 알아 갈수록 육이라는 기력이 쇠잔해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걸 내가 약할 때가 가장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의 고백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마음에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것이고 만물의 찌기로 전락하는 일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전 바울의 이 고백을 절실히 느낍니다.

성령이 제 안에서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그 수욕과 같은 것들을 당하게 하시면서!

그래 예수 믿는 맛이 어떤가!

맛 좀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서의 말씀처럼 넉넉히 이겨지더라는 것입니다.

난 죽는 줄 알았는데!

허~허~ 하고 이겨지더라니 까요.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긴다는 말씀이 거짓말이 아닌 겁니다.

바울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더라고요.

 

결국 성령이 우리 안에 아버지의 소원을 두시고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이 죽어가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이 알지 못하여 그러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는 그 예수의 마음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몸은 하나님께서 자기 소원을 이루어 가시는데 도구로 사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걸 우리 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고 했어요.

하나님은 우리 몸에 성령을 보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을 하십니다.

이 모두가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이 된 한 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몸을 가지고 세상의 악을 고발하는 미끼로 사용하고 계신 겁니다.

 

이러한 일은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자기의 소원을 두고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이 되어지니 우리가 감당 할 수 없는 사건들이 자꾸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 동안 마귀에게 예! 예~ 하면서 종노릇 하던 것을 이젠 하지 말라고 태클을 걸어 주세요.

마귀가 장악하여 온갖 죄악을 일삼던 죄인에게 성령을 보내서 죄인으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툭툭 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자칭 성령 받은 사람들이 많아요.

정말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럼 그 사람은 성령이 하시는 일들이 그 몸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보낸 성령을 받은 사람인 겁니다.

성령이 죽은 분이 아니잖아요.

살아서 우리 안에서 뭔가 하신단 말입니다.

 

에스겔이 그랬잖아요.

성령이 오면 이런 현상들이 일어난다고 했잖아요.

예수님도 그랬잖아요.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이런 일들을 일으킨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에게는 반드시 이러한 성령의 일하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노력하고 훈련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자연 발생적으로 나타납니다.

제 말이 아니고 에스겔의 예언이고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그럼 에스겔이 예언한 성령을 받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나요?

성령이 오시면 뭔가 제하시는 것이 있고 심어주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뽑아내는 것이 있고 새기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옛 사람의 것을 제하시고 새 사람의 것을 심어주세요.

 

보세요.

새 영이 임하면 첫째로 굳은 마음을 제한다고 하지요.

굳은 마음이란? 옛 사람의 마음이에요.

죄인의 마음이에요.

아담 안에서 태어난 선악의 법에 사로잡힌 내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하지요.

부드러운 마음이란? 예수님의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성령이 임하면 새로운 마음이 생겨요.

새로운 피조물인 새 사람은 이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가요.

 

에스겔의 말대로라면 성령을 받은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변합니까?

아담의 마음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변하지요.

이런 마음이 생긴단 말입니다.

이 마음은 우리에게 없던 마음이에요.

이건 우리가 노력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시면 생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변한다는 말은 백 프로 온전하게 바뀐다는 말이 아니고 예전에 없던 예수님의 마음이 생긴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우리 안에 마귀의 마음만 있었는데 성령이 오시면 예수의 마음이 생겨요.

이는 성령이 예수님의 마음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성령이 심어준 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겁니다.

 

아담의 굳은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죄의 마음이지요.

죄를 즐기는 마음이지요.

육체의 소욕대로 사는 마음이지요.

자기만 아는 마음입니다.

 

그럼 부드러운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아담의 마음과 반대 되는 마음이겠지요.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겠지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죄를 미워하고 싫어해요.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않으려고 해요.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자 하는 죄성을 거부하는 마음이 생긴단 말입니다.

이건 온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향을 말해요.

왠지 예전과 다른 마음이 생긴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사람이 변한다고 하는 겁니다.

은혜 받아 보세요.

옛날 같이 살기 싫어요.

과거처럼 육체의 정욕을 쫓아가던 것이 싫어져요.

이건 온전이니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향성을 말한다고 했어요.

 

이처럼 성령이 임하면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전에 즐기던 것들이 싫어져요.

삶 속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음도 변하고 삶도 변해요.

너그러워지고 온순해지잖아요.

이건 내가 온순해져야지 해서 온순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 때 온순해지고 겸손해져요.

죄의 깊이를 알아 갈수록 말 수가 적어져요.

그래서 나대지 않고 겸손해지는 겁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알면 잠시 착한 사람이 된다니까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면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내가 그 사람보다 더 악한 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 충만을 받고 하나님 은혜를 받으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 충만을 입고 하나님 은혜를 받으면 내가 제일 악한 자라는 것이 느껴져요.

 

전 저보다 더 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제일 악한 자라는 것으로 느껴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구요.

그러니 누구를 정죄하지 못하겠어요.

 

도리어 누가 범죄하면 그게 내 모습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불쌍한 생각이 들어요.

이처럼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간섭하시면 자기가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겸손해지고 온유해지고 자비로워지는 것입니다.

착해서가 아니라 할 말이 없기 때문에 남에겐 착한 척 해 보이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았어요.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게 되니 자연적으로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걸 갈고 닦은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하니 자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사람이 변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변한다는 것은 온전해 진다는 말이 아니고 사람의 가치관이 달라진단 말입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살아가는 자세가 달라지고!

삶에 지향성이 바뀐단 말입니다.

 

늘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아담의 몸을 입고 사는 한은 온전하게는 안 되어요.

지나고 나면 여전히 또 다시 아담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야 그 사람이 성령을 받은 성도에요.

성령을 받으면 이런 성향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는 성령이 그렇게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그랬잖아요.

 

이러한 성향이 없으면 그건 성령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가짜에요.

그러니 아무리 입으로 예수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고 성령을 말해도 에스겔이 말한 새 영을 받은 자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건 자칭 성령 받은 자이지 예수님의 보낸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닌 겁니다.

그러니 나 성령 받았다고 큰소리치고 우길 일이 아니에요.

 

지금 예수님은 뜬금없이 성령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성경에 예언된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겁니다.

이제 자신이 십자가에 죽고 나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미리 말하였던 그 예언이 이제 성취가 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성령의 오심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성령의 오심이 성취가 언제 되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에 성령이 오셔야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가 가까이 오자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에 죽으면 약속하신 그 성령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근심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성령이 오시면 너희 안에 거하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에스겔의 구조와 같아요.

 

에스겔 36장에서 새 영을 주신다고 약속하지요.

새 영이 임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37장부터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죽었던 사람들이 에스겔 37장처럼 해골이 살아납니다.

그리곤 살아난 해골들과 영원한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거할 영원한 성소가 되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40장부터는 성령에 의해서 성전이 지어집니다.

성전이 다 지어지면 그 속에 하나님이 거하는데 이를 두고 “여호와 삼마” 라고 합니다.

 

이걸 그대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내가 죽으면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이 되어 살아나고!

성령이 임하면 너희 안에 처소가 지어지고!

처소가 지어지면 아버지와 내가 너희 안에서 거하는 “여호와 삼마”가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과 동일한 것입니다.

 

“여호와 삼마”란? 여호와가 그 안에 거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가 어떻게 우리 안으로 들어오십니까?

성령으로 오십니다.

 

아까 에스겔 선지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새 영을 우리 마음에 심어 준다고 했지요.

심어 준다는 것은 그냥 우리 속으로 뚫고 들어오신다는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듯이 성령이 우리 마음을 쑥~ 뚫고 들어오세요.

 

이걸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보여 주셨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인 곳에 벽을 뚫고 쑤욱~ 들어오시지요.

이건 바로 성령이 우리들의 마음에 벽을 뚫고 들어오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내가 가서 성령을 보내 줄 텐데!

그러면 그 성령이 지금 나처럼 너희 마음에 벽을 뚫고 쑥~ 들어오실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를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우린 가만히 있는데 성령이 독자적으로 우리와 상의하지도 않고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처리하세요.

그래서 은혜인 겁니다.

 

은혜란? 우리가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을 말해요.

감당도 못하고 취소도 하지 못해요.

우리 의지로 오라고 할 수도 없고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어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은혜인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께서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셨어요.

그 비유를 어떤 집에 힘이 쎈 사람이 들어와서 그 집 주인을 결박하고 세간들을 다 가져간다고 하셨어요.

버릴 것은 버리게 하고 채울 것은 채우는 것입니다.

성령이 옛 것은 제하고 새것은 채우는 일을 하세요.

 

여기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처절한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오심은 곧 우리 안에 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마귀가 장악하던 우리 마음에 마귀를 멸하는 성령이 오셨으니 우리 안에서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싸우는 전쟁터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전쟁 통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을 하였어요.

우리 안에서도 이런 탄식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가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보혜사는 우리 안에 거한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 몸은 하나님이 거하고 예수님이 거하는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성령이 거하는 전(殿)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는 곳입니다.

의로운 제물의 희생으로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예수라는 희생 제물의 제사를 통하여서 우리와 화목하십니다.

 

그럼 하나님은 화목된 우리를 화목의 사신으로 세상에 보냅니다.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십니다.

 

고린도후서를 봅시다.

 

고후 5:17-19=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이 되었으니,

너희도 너희 지신을 죽임으로서 이웃과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려고 은혜를 주신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은 왜? 구원했는지 똑바로 알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성전을 삼고 계신지 제대로 알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은혜를 재대로 받은 사람의 모습이 어떤지 아세요.

바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은 자의 모습을 표본으로 제시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을 봅시다.

 

고후 6:1-13=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어떻습니까?

바울이 그러지요.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으려고

환란을 당하고 매를 맞고!

갇히고!

수고하고 자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순결한 마음과 거짓 없는 지식으로 인내하고 누가 우리를 욕하고 핍박해도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대하였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아도 한결같이 성도들을 대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 교인들이여 우리의 이러한 넓은 마음을 헤아리고 너희들도 서로 이해하고 참아주고 용서하면서 서로 서로 마음을 좀 넓히라고 합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은 것입니다.

 

이 시대 어떤 이들처럼 내 꼴리는 대로 막 살아도 되는 그런 은혜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내 꼴리는 대로 막 살아도 되는 그런 은혜를 준 적이 없어요.

그런 생각과 마음은 마귀가 준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비워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 인간들에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런 예수의 마음을 성령을 보내서 심어 주시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전에 없는 마음이 나와요.

이건 우리가 훈련하고 연습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에요.

자연적으로 나와요.

 

마치 에스겔 47장에서처럼 성령이 지은 성전 문지방에서 생수가 쫄쫄쫄 흘러 나와서 온 사방을 적시면서 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내듯이!

이제는 성령에 의해서 성도 안에 지어진 성전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와서 성도가 가는 곳마다 예수의 냄새를 풍기게 하십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생산 할 수도 없거니와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신 겁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두고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관계가 사랑이에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도 사랑의 관계 안에 있어요.

 

옛 계명도 사랑하는 것이고 새 계명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옛 계명 아래선 내가 사랑하려고 했는데 새 계명 아래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랑하게 해 주세요.

사랑하는 주체가 나에게서 예수님으로 바뀐 겁니다.

이게 옛 계명과 새 계명의 차이에요.

 

사랑이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이타적인 겁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식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쏟아 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창조주의 사랑도 피조물을 돌보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도록 창조가 되었어요.

 

그런데 죄가 이 사랑의 관계를 깨트려버렸어요.

죄가 이타를 이기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래서 죄인은 남을 사랑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죄인은 무엇을 하여도 자기 밖에 몰라요.

 

예수님이 이런 이기주의로 사는 죄인을 십자가에 죽인 겁니다.

이기주의인 죄인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서로 사랑하는 이타주의 사람으로 만드신 겁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라고 하지요.

몸에 지체는 지체를 위하여 살지 않고 몸을 위하여 희생하는 겁니다.

몸에 유익을 위하여 지체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체가 몸에 유익을 위하여 사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이 사랑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어요.

이 사랑은 우리에게 없어요.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이 사랑을 우리 가운데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성도가 뱉어내는 사랑은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에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가 행할 수 없는 사랑을 토하여 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을 보면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 몸을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희생 제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 희생제물의 삶을 우리 힘으로 살수 없기 때문에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해 놓고선 바로 이어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주어서 교회 안에서 서로 봉사케 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몸이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제물로 사용되었어요.

이건 바울만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가 동일하게 사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제물로 삼으려고 우리 안에 성령을 주신 겁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봅시다.

 

요 20:19-23=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곤 제자들에게 나타납니다.

문이 닫혀 있는데 예수님이 벽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그리고선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는 이제 성령이 숨처럼 제자들 속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왜? 성령을 주십니까?

이는 아버지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셨듯이 이제 예수님도 자기 제자들을 제물로 보내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증거하다가 죽으라고 보낸다는 말입니다.

이 예수의 증인을 우리 힘으로 살아내지를 못하므로 성령을 주셔서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에서 성령이 오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며칠 후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면서 그대로 제자들에게 성취가 됩니다.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삶에 길로 접어듭니다.

 

이건 스스로 원하는 일이 아니라 성령이 그 안에서 강권하여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처럼 살다가 제물처럼 죽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을 산 제사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먼저 우리 안에서 산 제사가 이루어집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죄를 싫어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둥지를 트십니다.

 

이건 마치 아주 깨끗한 시어머니가 더러운 며느리와 사는 것과 같아요.

며느리는 좌불안석이 되고 맙니다.

미칠 지경인 겁니다.

며느리는 깨끗한 시어머니를 볼 때마다 자기의 더러움이 드러나니 미치겠는 겁니다.

시어머니의 성품이 너무도 깨끗하다가 보니 집안에 어지럽혀진 것을 두지 않고 보이는 족족 치우는 겁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더러운 줄 아세요.

더러워도 며느리로 인정하고 사는 것은 아들이 그 여시 같은 여자를 그토록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아들을 위해서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꼴이 그렇다니까요.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서 그렇게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린 성령이 오심과 동시에 옛 사람이 죽어지는 곡(哭) 소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맨 날 옛 사람이 죽어야 하니 아픈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성도는 늘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싸움을 일으켜요.

어떤 싸움을 벌리는가 하면 예수님의 주 되심에 싸움을 벌립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주인이 되게 하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없던 자였어요.

없던 자가 왜? 생겼는가 하면 예수님의 주 되심을 하기 위해서 생겨났어요.

 

자! 이렇게 생각하세요.

우리 인생을 역으로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장차 어디로 갑니까?

천국에 가지요.

천국에 가서 뭘 합니까?

어린 양을 찬미하지요.

 

이걸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무릎을 예수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한다고 했어요.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죄가 없는 곳이지요.

인간이 죄가 없으니까 예수님을 찬미하잖아요.

 

그럼 죄가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인은 예수님을 찬미하지 않고 누굴 찬미합니까?

자기 자신을 찬미해요.

그래서 죄인은 자기가 신인 겁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라고 지음을 받았는데 자기를 찬미하고 있어요.

이게 죄에요.

죄가 주객을 전도시켜 놓은 겁니다.

 

예수님이 이걸 바로 잡으려고 오셨어요.

어떻게 바로 잡는가 하면 하나님을 찬미하지 않고 자기를 찬미하는 죄인을 죽이고 죄와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겁니다.

이걸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했어요.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자기 자신을 찬미하던 죄인이 죽은 겁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찬미하는 인간으로 거듭났어요.

 

하지만 아직 우리 몸뚱이는 여전히 아담의 몸이에요.

이 몸으로는 예수님을 찬미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 몸뚱이는 자기만 알아요.

내가 나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몸에 성령을 보내 주신 겁니다.

성령이 와서 야! 정낙원이!

너 왜? 예수님을 찬미하지 않고 너를 찬미해!

너 왜? 예수를 위해 살지 않고 너를 위해 살어! 라고 고발한단 말입니다.

 

조금 전에 우린 없던 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있어요.

누굴 위해 있습니까?

주를 위해 있지요.

 

이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죄가 비정상을 만들어 놓았어요.

죄가 주를 위해 있지 않고 자기를 위해 있게 한 겁니다.

그러니 죄인들은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해 사는 겁니다.

 

자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우린 원래 “없음”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있음”이 되었어요.

 

그런데 죄가 예수님을 위하여 있음으로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있음으로 살게 하고 말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나 있음”으로 사는 놈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나 있음”을 “나 없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 있음”을 위하여 사는 놈을 십자가에 죽이고, 성령을 보내서 “나 없음”으로 살게 하는 새로운 인간으로 만든 겁니다.

 

로마서 11장을 봅시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잘 보세요.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다고 하지요.

그리고 주로 말미암아 살다가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잖아요.

 

시작도 주님에게서 나왔고!

현재 사는 것도 주님으로 살고!

마지막도 주님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만물 속에는 온통 주님뿐인 겁니다.

이게 피조물이에요.

피조물의 존재 목적이에요.

 

이걸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했어요.

 

만물이 누구 때문에 나왔습니까?

주님 때문이지요.

 

그럼 만물은 주님과 연결이 되어 있어야지만 창조의 목적에 합당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만물 속에서 주가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과 같아요.

 

그런데 죄라는 놈이 만물 속에서 주를 빼내버렸어요.

주를 빼내니 누가 주인인가 하면 자기가 주인이 된 겁니다.

 

주의 자리에 자기가 앉은 겁니다.

이걸 하나님 같이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죄에요.

 

죄인이 누구냐?

스스로 사는 자들이에요.

자기 밖에 몰라요.

내가 내 몸에 주인이에요.

내 몸에 나로 존재케 하는 주라는 주인이 빠지니 나는 나로 존재케 한 주님과 상관없는 내가 된 것입니다.

 

이걸 성경에선 죽음이라고 해요.

주가 없는 목숨은 죽은 목숨인겁니다.

왜냐하면! 주님 때문에 만물이 나왔는데 그 속에 주님이 없으면 껍데기잖아요.



만물의 생명은 주님이세요.

내 주인은 내가 아니고 주님이세요.

그러니 예수와 떨어진 자는 모두가 죽은 자에요.

예수를 주로 모시지 않는 자는 죽은 자에요.

 

요한복음 1장 4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만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반대로 말하면 예수님 밖은 죽음이란 말입니다.

 

죽음이란? “예수 없음”으로 사는 겁니다.

다른 말로 “나 있음”으로 사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나 있음”으로 사는 놈들을 죽이는 일을 단행하시는 겁니다.

그리곤 “예수 있음”으로 만들어 버려요.

이게 구원이에요.

 

구원이 뭐냐?

내가 내 주인으로 살다가 예수의 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종으로 돌아가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에요.

그래서 우리 몸에서 죄가 싹 빠져 나가면 우리는 예수의 종으로 만족하며 살게 됩니다.

 

이걸 천국에서 보여주잖아요.

천국에 가면 나는 없고 주 안에서만 나로 존재해요.

이걸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라고 하는 겁니다.

한 성령을 마시고 한 몸이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해바라기처럼 주님이라는 태양을 바라보고 살아요.

 

나도 주님만 바라보고!

너도 주님만 바라보고!

모두가 주님만 바라보니 다툼이 있을 수 없지요.

이걸 평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일을 우리 몸에서 벌리고 계십니다.

이 일을 하게 하시려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겁니다.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 안에서는 넌 죽고 예수만 살어! 라는 작업이 일어나는 겁니다.

넌 꺼져!

예수 나와! 그런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 이걸 호락호락 허락을 하느냐 하면 안 해요.

이 몸이 한 성깔 해요.

그러니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에서는 늘 곡소리가 그치질 않는 겁니다.

이걸 상한 심령이라고 하고 애통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우리 몸은 죄 아래 팔린 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 무엇을 하여도 우리 영광을 챙기고자 합니다.

그럼 성령이 너 왜? 예수님 것 가지고 네 영광을 챙겨!

이 나쁜 놈!

너 죄인이지! 그런단 말입니다.

 

쉽게 말할게요.

제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설교를 합니다.

이 설교는 제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하게 한 것입니다.

저도 이걸 인정해요.

제 머리에서는 이런 설교가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이 설교를 하고 제 영광을 챙기고자 해요.

설교를 하고 반응을 살핍니다.

누가 칭찬 하면 기분이 좋고 시비 걸면 기분이 나빠요.

칭찬 하면 왜? 기분이 좋습니까?

이는 이 설교를 내가 한 것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한 것이라고 한다면 반응을 살필 이유가 없어요.

누가 은혜 받았다고 하여도 그건 하나님이 받을 것이고 누가 시비를 걸어도 그건 하나님이 시비 걸릴 일입니다.

왜냐하면! 난 그냥 설교하는 도구로만 사용이 되었지 실제 설교는 하나님이 하신 것이잖아요.

그런데 나는 설교를 하고 난 후 그 설교를 가지고 내 영광을 챙기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인간은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을 해도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해 놓고도 자기 것으로 챙기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야! 이 놈아! 설교를 하나님이 했지 네가 했느냐!

그런데 왜? 네가 영광을 챙기고자 하느냐!

에이~ 이 도둑놈아! 그런단 말입니다.

 

그럼 전 성령의 책망을 듣고 주여! 제가 도둑놈이군요!

용서 하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소서!

회개하게 되어요.

그럼 성령이 너의 그런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죄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우리 안에서 날마다 우리 죄를 고발해요.

그럼 우리는 예! 저 죄인 맞습니다!

오늘도 주님 영광 도적질한 죄인입니다!

이런 죄인이 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그 아들에 영광을 찬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평생 가요.

오늘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서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꼭 문방구 앞에 두더쥐 게임하는 두더쥐 모양 두들겨 패면 잠시 숨었다가 다시 고개를 쳐들어요.

 

이 몹쓸 놈에 죄는 우리 몸이 죽어야 없어져요.

마치 우리 몸에 암 덩이라는 병이 우리 몸이 죽으면 같이 죽는 것과 같아요.

암은 우리 몸이 살아 있는 한 죽지 않고 함께 살아요.

우리 몸이 죽으면 같이 죽는 겁니다.

 

여러분 귀신들이 예수님에게 몸 좀 달라고 하지요.

귀신은 몸이 없으면 활동을 못해요.

반드시 몸이 있어야 활동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귀신에게 야! 그 아이에게서 나와!

그러니 귀신이 왜? 내 때가 아직 안 되었는데 벌써 나오라고 합니까?

주님 제발!

그럼 저 돼지 몸에라도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귀신은 인간의 몸을 가지고 죄가 어떤 것인지를 현상론적으로 발현시켜요.

죄가 우리 몸을 통해서 드러나요.

그러니 죄인의 몸이 죽으면 죄도 함께 죽는 겁니다.

그럼 몸 없는 귀신은 죽은 것처럼 죄도 몸이 죽으면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의 몸을 멸하려고 오신 겁니다.

성경이 성도의 죽음을 안식으로 말하는 것은 몸이 죽음으로서 죄로 시달리던 것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죄가 “나 있음”으로 살게 하니 얼마나 피곤하게 살았습니까?

“나 있음”으로 살면 항상 내가 나를 관리해야 해요.

내 목숨을 내가 관리하여야 하고!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여야 합니다.

 

이걸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의 종이에요.

그러니 일평생 나는 나를 위해 종처럼 사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사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여 버려요.

“나 있음”으로 사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였어요.

“나 있음”을 지키려고 살던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겁니다.

비로서 “나” 로부터 벗어났어요.

 

이걸 자유라고 합니다.

자유란? “나 있음”에서 “나 없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자유케 해 주신 겁니다.

나로부터 벗어나 이제 창조의 목적대로 예수를 위한 종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종은 자기 생각이 없어요.

종은 자기 인생이 없어요.

종은 자기가 책임질 것이 없어요.

그래서 진정한 자유는 종으로 살 때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죄 없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니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아버지를 위하여 산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죽이라고 하니 예~ 하고 죽었어요.

이게 자유에요.

 

그러니 성도에게 자유란?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라고 자랑하는 것은 나는 자유자다 그런 말이에요.

이게 원래 창조 목적으로 돌아간 겁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십자가 안에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해 준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멍에인 십자가를 메고 배우라고 한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벗겨져요.

자유가 주어져요.

 

다른 말로 내가 죽어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벗겨진단 말입니다.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내가 십자가에 죽을 때 벗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하신 겁니다.

죽어야 쉼을 얻고, 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에요.

 

이 일을 우리가 하지 못하니 성령을 보내서 하게 하신 겁니다.

성령이 야! 네 인생 주님께 맡기라고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 가세요.

성령이 임하면 이상하게 살아가는 것에 배짱이 생겨요.


망하면 망하지!

죽으면 죽지!

욕 먹으면 욕 먹지!

덤덤해 진다니까요.

그러니 성령이 오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성령이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게 하세요.

 

나를 자꾸만 비우게 한단 말입니다.

“나 있음”에서 “나 없음”으로 해 준단 말입니다.

“나 없음”이 될 때 비로서 용서가 나오고 긍휼이 나오고 사랑이 나와요.

 

누가 욕을 해도 허~허! 하게 되어요.

나에 대한 정과 욕심도 사라지지만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도 사라져요.

실패해도 두렵지가 않은 겁니다.

이건 우리 힘으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이 대신 싸워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가나안 원주민과 같은 옛 사람이라는 거인 족이 살고 있어요.

이 놈이 만만치 않아요.

죽은 듯 하다가도 틈만 나면 기어 나와서 우리 안에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각양의 탐심과 같은 나를 이프게 하고 남을 해치는 가시와 엉겅퀴를 낸단 말입니다.

그럼 나도 다치고 곁에 있는 사람도 다쳐요.

 

우리 생각 같아선 성령이 확 이겨주면 안 됩니까?

그러잖아요.

그러나 그러지 않아요.

성령은 우리가 죄를 완전하게 이기게 해 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에요.

 

성령은 우리 몸에서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시려고 오셨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시려고 오셨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이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우리 몸에 남기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옛 사람을 다 몰아내지 않고 가나안 원주민들처럼 조금 남겨둔 겁니다.

이 놈들이 얼마나 강력한가 하면 우리 몸을 장악해 버려요.

우리 몸을 죄의 몸으로 끌고 간단 말입니다.

 

왜? 우리 몸이 조금 남겨둔 원주민에게 질질 끌려가는 줄 아세요.

그건 육신의 쾌락을 주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쾌락은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요.

우리 육신은 죄를 지을 때 가장 행복해요.

 

그래서 죄 짓는 일은 3박 4일 해도 피곤치 않고 죄 짓는 일엔 발걸음이 빠른 겁니다.

은혜로 사는 것은 어려워도 죄 짓는 것은 식은 죽 먹기에요.

성경책 30분 보는 것은 온 몸이 뒤틀면서 보아도 드라마 3 시간 보는 것은 미동도 하지 않고 보잖아요.

너무도 달콤하니 육신이 거부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린 예수를 믿어도 늘 죄를 짓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와 계셔도 우리 몸은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고민하면

성령이 야! 이 놈아!

너의 이러한 죄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

네 육신이 연약하여서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가 너 대신 십자가에 죽었다고 알려 줍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죄 값을 예수님에게 대신 받았다고 알려 줍니다.

 

이게 믿어질 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느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 믿음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 공로로 안심하고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나 있음”에서 “나 없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에요.

“나 없음”으로 끝이 아니고 이젠 적극적으로 “예수 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 있음”을 죽인 것은 “예수 있음”으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 있음”에서 “나 없음”으로 나아가 아무 것도 안하고 있으면 그것도 “나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구원은 없어요.

 

구원이란? 옛 사람의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 있어요.

“나 없음”만 있지 않고 “예수 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나 없음”에서 “예수 있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이란? “나 없음”에서 “예수 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고 예수로 살아간다고 했어요.

십자가 안에선 “나 있음”을 허용하지 않아요.

날마다 정과 욕심을 죽여요.

 

십자가는 “나 있음”을 죽이고 “나 없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 없음”을 만들고 성령은 “예수 있음”으로 만들어요.

성령이 예수 안에 거하게 하세요.

그럴 때 비로서 안식이 주어지고 자유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은 “나 없음”의 세계에요.

그래서 제가 성도의 안식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만 주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십자가 안에서만 쉼을 얻을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십자가 안에서만 “나 없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쉼을 주시려고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부디 성령 안에서 “나 없음” 안에서 “예수 있음”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성령을 보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나는 나를 비울 수 없으니 보혜사가 되시는 성령께서 늘 나 없음의 자리로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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