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86강. 예수님이 마련한 처소 (요 14:1-3)

by coroa 2021. 11. 26.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86강. 예수님이 마련한 처소 (요 14:1-3)

-.정낙원 목사

 

요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나아와 묻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이 되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 라고 되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마다 성경을 보는 안목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눈으로 읽으면 모든 말씀을 자기가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읽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 말씀을 자기는 지킬 수 없다는 눈으로 읽으면 하나님 말씀 앞에 두 손을 들고 주여 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율법사는 말씀을 지켜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물으면 예수님께서 할 답이 없어요.

본인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영생을 얻겠다고 하는데서야 어찌 말리겠습니까?

말리면 야속하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율법사는 구약 교회를 상징합니다.

구약 교회는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이 말을 역(逆)으로 이해하면 구약 교회는 영생 밖에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사와 같이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나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영생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고 마귀 자식이라고 한 겁니다.

아브라함 후손이었다고 한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이라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묻지 않았아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이미 영생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영생을 얻은 것은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일체의 노력을 하지 않았어요.

그냥 하나님이 주신 영생을 받았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약에 예수님 앞에 나왔다고 한다면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도리어 주님 영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라고 물은 율법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 질문 속에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맞아요.

그러나 신앙은 아브라함의 신앙이 아닌 겁니다.

그러니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일지라도 영적으로는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씨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오직 약속으로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고 했습니다.

혈통으로 난 자는 표면적 유대인라고 하고 약속으로 난 자를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표면적이란? 육을 말하고!

이면적이란? 영을 말합니다.

 

그러니 율법사와 같이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표면적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영적 이스라엘인 겁니다.

 

누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아브라함처럼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지 않아요.



구원이든!

은혜든!

복이든!



구원을 자기 조건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선택으로 주어진 구원을 감사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 어떤 것도 자기 행위로 따내고자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고 살아갑니다.

 

왜? 설교 초두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지금도 예수님 앞에 나아온 율법사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것을 얻어 내고자 합니다.

이런 사고가 교회 안에서 인간의 열심을 바탕으로 하는 신앙생활로 자리 잡고 있는 겁니다.

 

이 시대는 갖가지 비결이라는 이름의 신앙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구원 받는 비결!

믿음 받는 비결!

축복 받는 비결!

은혜 받는 비결!

은사 받는 비결!

 

구원이나 은혜나 축복이나 은사나 하는 것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입으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너는 성도라는 증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군대에 입대를 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고 입고 신어야 할 것들을 다 공짜로 주는 것과 같아요.

군에 입대를 하면 겉옷은 물론이고 모자에서부터 속옷과 양말과 신발과 장갑까지 다 주어요.

군인으로서 지녀야 할 것들은 국가에서 다 준비해요.

군인은 그냥 몸만 가면 되어요.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야 할 집까지 다 주어요.

 

우리 성도의 구원이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자기백성으로 선택을 하면 하늘에 신령한 것들을 다 공짜로 주십니다.

달라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알아서 다 주세요.

그래서 성도가 받은 모든 것을 은혜이고 은사라고 하는 겁니다.

은혜나 은사란 말은 하나님이 거저 주는 선물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하늘에 속한 것들을 자기가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천국에 가서 살아야 할 집을 자기가 준비한대요.

이 얼마나 웃기는 짬짜면 입니까?

 

짬뽕과 짜장면은 하나로 섞이면 못 먹어요.

이 맛도 아니고 저 맛도 아니라서 갖다 버려야 해요.

이 시대 교인들의 신앙이 섞인 짬짜면처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에요.

이걸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차든지 아니면 더웁든지 하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미지근해서 입에서 토하여 내치고 싶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짬짜면처럼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마치 예수님 앞에 나온 율법사들처럼 성경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지키고자 해요.

그러니 열심히 충성하고 헌금해서 천국에 맨션을 준비한다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뭔가 하면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내용입니다.

이걸 육에 속한 목사들이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서 천국에 맨션을 지어야 한다고 헌금을 하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목사들이 교인들의 돈을 뜯어내기 위하여 사기를 치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부흥사들은 물론 목사들까지도 이 본문을 가지고 천국에 맨션을 준비하라는 설교를 참 많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목사들이 헌신 예배와 같은 곳에 부름을 받고 설교를 할 때에는 오늘 본문을 단골 메뉴로 정해서 이 땅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해서 천국에 집을 준비하여야 한다고 하고 있어요.

 

저도 예전에 복음을 몰랐을 땐 부흥회를 엄청 많이 참석을 했는데 그 때에 오늘 본문 이야기를 수 없이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경산에 있는 청천 기도원에서 대구 00교회 김00 목사님이 부흥회를 하면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천국엔 맨션이 많다고 하면서 천국에 보석으로 된 맨션을 지으려면 헌금 많이 하여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면서 말을 한 것이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기도원에 올라가는 길을 포장을 하여야 하니 헌금 많이 하고 가라는 소리가 쟁쟁해요.

 

특히 고린도전서 3장을 인용해서 장차 불에 타는 집과 불에 타지 않는 집을 공력시험을 한다고 하면서 오늘 본문과 같이 연계하여 인용을 합니다.

충성하지 않으면 불 가운데 구원을 얻는 것과 같이 부끄러운 구원이 있다고 하면서 천국에서 개털 모자를 쓰지 않으려면 이 땅에서 열심히 하라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그럼 교인들은 목사의 말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없는 살림에 헌금을 한다고 하면서 충성경쟁을 벌립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고 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간증을 시킵니다.

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의 간증의 레퍼토리가 대동소이해요.

모두 마귀가 짝퉁 천국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천국에 가니 이 세상처럼 크고 작은 집들이 있다고 합니다.

천국에 가보니 예수님이 목수가 되셔서 성도들이 집을 짓고 있더랍니다.

근데 집마다 문패가 달려 있다고 해요.

 

과거 현00 권사라는 분은 천국에 가 보았는데 조00목사의 문패가 안 보여서 예수님에게 여쭈어 보았답니다.

예수님! 조00목사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하는 유명한 목사인데 어째서 그 사람 집은 없습니까? 라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난 그 목사를 모른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조00목사에게 말해 주었더니 그 때부터 선교 사업을 한다고 복지 타운도 짓고 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천국에 집을 지어주는가 보아요.

사실이 맞는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지만 한 동안 이 이야기는 부흥사들의 입에서 정설처럼 전해져서 교인들의 충성과 헌금을 뜯어내는데 단골 메뉴로 많은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말입니다.

저도 어느 부흥회에서 이 말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어떤 집은 보석으로 지어졌고!

어떤 집은 초가집이라고 합니다.

어떤 집은 다 완성을 하였고!

어떤 집은 짓다가 중단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에게 왜? 중단을 하였느냐고 물으니 이 땅에서 재료를 공급하지 않아서 중단하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 재료란 다름 아닌 헌금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사들은 천국에서 개털 모자 쓰고 거지같이 살지 않으려면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을 많아 하여야 한다고 공갈을 치는 겁니다.

이에 무지한 교인들은 천국에서 개털 모자 쓰지 않으려고 죽도록 충성하고 헌금을 합니다.

그럼 교회는 교인들이 천국에 맨션을 지을 거라고 낸 헌금으로 부동산 구입에 열중입니다.

 

교회를 더 크게 짓고!

교육관을 짓고!

비젼 센터를 짓고!

수양관을 사들이고!

주차장을 넓히고!

학교를 설립하고!

병원을 개원하고!

공원묘지를 구입하는 일에 사용을 합니다.

 

과거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재림을 한다고 하면서 교인들에게 헌금을 하라고 하여서 그 헌금으로 부동산을 사고 빌딩을 구입하는 일들을 하던 이00 일당들과 동일합니다.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들이나 오십 보 백 보 거기서 거기입니다.

결국 성경을 안전인수식으로 해석을 해서 교인들의 주머니를 강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를 일컬어 강도들이 모인 소굴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인간들의 역사는 늘 돌고 돌아 반복하여 일어납니다.

그래서 지금도 교회가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도 과거 복음을 몰랐을 땐 이런 설교를 듣고 아멘을 하고 충성을 했었습니다.

세상의 상식으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니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설교를 들으면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여야겠다고 각오를 다지고 충성을 하였더랬습니다.

 

모르면 속습니다.

눈 빤히 뜨고 코 베어가는 세상이 바로 교회 안 입니다.

복음을 모르면 눈 빤히 뜨고 돈을 강탈당하고 맙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목사들의 말이라고 하면 앞 뒤 따지지 않고 아무 말이나 덥석 물어요.

그리곤 성경과 전혀 다른 신앙생활을 하면서 본인은 엄청 믿음이 좋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제발 목사의 말을 듣지 말고 성경을 상고하라고 하여도 말은 안 들어요.

도리어 욕을 해요.

 

작년에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서울의 00의 교회는 수천억을 들여서 교회를 짓는다고 헌금을 했는데 짓고도 남을 돈이 들어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권사님은 전 재산 수십억을 헌금 했다가 자식들이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글쎄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훈련을 시킨 적이 없는데 그 교회 목사는 어디서 이런 제자훈련을 수입을 해 왔는지 모르겠어요?

 

왜? 전 재산을 교회에 헌금 하겠습니까?

이는 다 천국에 상급을 바래서입니다.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 일한 만큼 상급이 있다고 가르치잖아요.

이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세상에서 부자로 산 사람은 헌금을 많이 하니 천국에서도 많은 상을 받아서 부자로 살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의 삶이 천국에 그대로 이어진 대 물림 현상이 일어나고 말아요.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면 천국에 가도 거지 신세를 면치 못해요.

헌금 한 것이 없는데 예수님이 집 지을 공사 대금이 없어서 집을 짓지 못하였을 것 아닙니까?

간증하는 사람들이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가난한 사람들은 천국에서도 터만 닦아 놓고 거적대기 깔고 살아야 할 겁니다.

 

과연 이런 천국이 있을까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거지로 살았지만 천국에선 주님의 품에서 살고 있어요.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 같이 이 세상에서 거지 같이 살았어요.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도를 만물의 찌끼같이 세상의 구경거리로 두었다고 했어요.

그럼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12 제자들은 천국에서 개털 모자를 쓰고 있겠네요.

하지만 성경의 증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그럼에도 이 시대 교회 안에서는 이와 정 반대로 말하고 있어요.

목사들이 천국 상급이라는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서 교인들의 주머니를 강탈하고 있어요.

여기에 미혹 당하니 전 재산을 교회 짓는데 헌금을 하는 겁니다.

 

천국에서 개털 모자 쓰지 않고 보석으로 지은 맨션에서 살고 싶어서입니다.

이 땅에서도 잘 살고 천국에서도 잘 살아야 하잖아요.

그러니 수십억을 선뜻 교회 건물 짓는데 내어 놓는 겁니다.

대단한 믿음이에요?

 

모르면 속아요.

제일 무서운 곳이 종교에요.

특히 교회에요.

신의 계시를 운운하면서 공갈을 치면 꼼짝없이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지옥으로 간다고 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누가 어떤 말을 하여도 베뢰아 교인들과 같이 성경을 상고하여야 합니다.

사람의 유전이나 교회의 전통에 속지 말고 눈 부릅뜨고 성경을 보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어느 거짓선지자에게 속을지 몰라요.

그만큼 교회 안에 영적 도적들이 많이 들끓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명하다는 목사의 말을 듣지 마세요.

어느 시대고 유명한 자들이 거짓 선지자 노릇을 했어요.

대 부분의 사기꾼들은 다 유명하다고 하는 놈들이에요.

 

고린도교회 안에서처럼 거짓 선지자들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서 교인들의 돈을 갈취하고 상좌에 앉아서 군림하고 하나님처럼 행세하고 있어요.

초대교회에도 이런 자들이 교회 안에서 들끓었는데 지금이야 오죽 하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은 24장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미리 말씀해 주신 겁니다.

지금이 그러한 때에요.

 

교회마다 강도들이 우글거려요.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교인들의 주머니를 노리고 있어요.

그러니 십자가의 도(道)로 무장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모르면 인간의 행위로 자기가 처소를 준비한다고 하게 되어요.

 

인간은 어느 시대고 자기 힘을 믿고 살아갑니다.

자기 힘으로 천국에 맨션도 짓고!

자기 힘으로 천국에 상급도 따 내려고 하고!

자기 힘으로 은사도 얻어 내고!

자기 힘으로 구원도 받고자 합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이 세상을 짐승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이는 이 세상의 성격이 짐승과 같다는 말입니다.

짐승의 나라는 약육강식이라는 힘의 논리로 다스려집니다.

이 세상은 힘이 있으면 살고 힘이 없으면 죽어요.

 

짐승의 세계에선 스스로 힘을 갖지 않으면 죽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힘을 갖고자 합니다.

그 힘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해요.

이는 힘이 곧 자기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러한 힘의 논리로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베드로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른 것은 배와 그물 대신에 예수를 택한 것이에요.

고기를 잡아서 먹고 살던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먹고 살고자 배와 그물을 버린 것입니다.

이는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신앙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3년 동안 버렸던 배와 그물을 다시 찾아서 고기를 잡은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라는 그늘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떠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떠나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아요.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죽지 않도록 자신이 보호해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찌 하든지 예수님의 죽음을 막고자 했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좇아 떠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떠난다고 하니 제자들은 불안해했습니다.

서로 근심 어린 눈으로 안절부절 못했어요.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의 심정을 잘 아시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떠나는 것은 너희들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근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는 민심이 수상합니다.

 

민심은 들 불 같아서 언제 어디로 번질지 모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잦은 충돌로 인하여 민심이 이상하게 반(反) 예수의 정서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의 핍박이 점차적으로 노골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가 됩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되면 제자들 입장에선 근심 걱정이 생기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민심도 흉흉한데 예수님께서 자꾸만 어디로 떠난다고 하니 제자들 입장에선 여간 불안 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버팀목이 되어 지켜주어서 그럭저럭 지내 왔는데 예수님의 떠난다는 말씀이 여간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불안하고 근심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자신의 떠남이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제자들은 알 턱이 없습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에겐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은 망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죽음 이후에 좋은 세상이 있다고 하여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합니다.

 

제자들의 심정이 곧 우리의 심정과 같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도 두려워하던 제자들처럼 두려워하기는 매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을 이야기 하여도 그렇게 썩 와 닿지가 않잖아요.

세상 사는게 더 귀하지 천국이 소중하지 않잖아요.

 

그러니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신앙은 뒷전으로 밀리게 되는 겁니다.

예수를 믿어도 마음에 근심은 여전히 남아 있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오늘 본문 말씀이 곧 우리에게 하는 말씀인 겁니다.

 

주님이 저에게 그럽니다.

야! 정낙원이!

너! 왜? 그렇게 근심을 하는데!

 

모르겠습니다.

근심이 되는데 어찌합니까!

어디 근심이 떠나라고 해서 떠나갑니까!

부르지도 않는데 마음속에 떡하니 차지하고 나가지 있으니 문제이지요.

가라고 하여도 가지 않고 버티고 있잖아요.

 

그러자 주님이 그럽니다.

날 믿어라!

내가 널 위해 처소를 예비해 놓을게!

 

그 처소가 제가 세상사는 것하고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당장 사는게 문제인데!

몸은 늙고 병들어 가고!

돈은 없고!

그렇다고 교회에 교인들이 많습니까!

먹고 살 일이 암담한데 어찌 근심이 되지 않는단 말입니까!

주님이야 하늘에 계시니 문제가 안 되지만 저는 땅에서 살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야! 그렇지 않아!

내가 너를 위하여 준비한 처소는 세상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해!

이 처소만 있으면 근심 걱정이 없어!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무리 주님이 근심하지 말라고 하여도 이 세상에서 몸뚱아리를 보듬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우이독경(牛耳讀經)입니다.

 

그런데 이 선문답과 같은 이야기가 성경에선 복음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마련한다는 처소가 무엇이길래 복음이냐 입니다.

예수님이 마련한 처소가 어떤 것이기에 마음에 근심이 사라진단 말인가요?

처소만 예비 되면 과연 염려 근심이 사라질까요?

 

오늘 공부는 어쩌면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이 믿어지면 말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기도합니다.

 

사람에게 염려와 근심이 언제 찾아 왔습니까?

범죄 이후에 찾아 왔어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숨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죄가 두려움을 몰고 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은 두려워 떠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좇아버립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한 것은 좋은데 이젠 죽음이라는 것이 두려움을 몰고 따라다닙니다.

죽음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니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죄가 죽음도 몰고 왔고!

죄가 하나님 집에서 쫓겨나게 하였고!

죄가 염려와 근심과 수고와 슬픔을 몰고 왔습니다.

죄가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 갔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쉼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지극정성으로 하나님께 제사도 드려 보았습니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도 해 보았습니다.

종교를 만들어 자기 몸을 치면서 금욕과 고행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죽음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마음속에서부터 일어나는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을 해소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인간은 일평생 두려워하면서 생로병사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는다는 것을 운명으로 맞이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산다는 것 자체가 수고와 슬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죄와 사망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시달리던 수고하고 슬픈 인생을 쉬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음에 쉼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무엇인데 그 멍에를 메고 배우면 마음에 쉼을 얻는다고 할까요?

예수님의 멍에란? 다름 아닌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십자가라는 멍에를 지고 오셨습니다.

죽임 당하시기로 작정을 하시고 오셨어요.

 

왜? 죽임당하시기로 작정하고 오셨는가 하면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목숨을 대신 주시고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시기 위함입니다.

이걸 대속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 대신에 죄 값을 치루었다고 합니다.

이걸 믿으라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신 겁니다.

내가 너희들 때문에 대신 죽었다는 이 사실을 믿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마음에 쉼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아요.

이건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믿어져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러한 사실이 믿어지게 하시려고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처소란? 함께 살아갈 집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집을 말해요.

이는 죄인과 하나님이 만날 수 있는 장소를 말합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난 후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제 그 만남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화목이 이루어진다 함은 곧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가시겠다고 하는 겁니다. 

처소가 예비 되면 예수님이 다시 와서 제자들을 그리로 영접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처소는 우리가 마련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마련해 주세요.

예수님이 마련해준 처소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어요. 

어떻게 처소를 마련하는가 하면 자신의 죽음으로 마련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죽음과 처소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예수님의 죽으심과 처소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죽음과 처소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왜? 예수님이 죽어야지만 처소가 예비 될까요?

이걸 살펴봅시다.

 

이를 알려면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인간들이 처소를 상실하게 된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처소가 어떤 식으로 주어지는지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원래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살았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 집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 집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살았어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나자 갑자기 자신들의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여지기 시작하였어요.

발가벗음이 수치로 여겨지자 하나님이 두려워졌어요.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한 것입니다.

이건 예전에 없던 것이었어요.

죄가 몰고 온 겁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없애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수치를 가렸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두려움은 치마로 수치를 가린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아요.

이는 인간이 두려움을 해소 시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로 수치를 가리고서도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어 버린 겁니다.

 

이에 하나님이 아담을 찾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수치라고 알려 주었느냐고 채근합니다.

하나님은 벌거벗음을 수치로 보지 않는데 아담과 하와는 수치로 보인 겁니다.

이는 선악과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갖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두려운 하나님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렵게 보이면 숨을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두려우면 그 때부터 자기 방식으로 그 두려움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그게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아요.

 

두려움을 없애려면 두려움을 몰고 온 선악과를 뽑아 내야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 속엔 이미 선악과가 독처럼 온 몸 구석구석에 퍼져 있습니다.

이 사망이라는 독은 몸이 죽어야지만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엄습하는 두려움은 죽음으로서만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이 사실을 예표적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려고 흠 없는 제물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흠 없는 제물을 죽여 가죽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수치를 가리려고 만들어 입은 치마를 벗겨 버리고 가죽 옷을 입혀서 수치를 가려 주십니다.

그러자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이는 죄의 두려움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만 없애진다는 뜻입니다.

무화과나무로 만든 치마가 인간의 행위라고 한다면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입혀진 가죽 옷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죄사함을 역(逆)으로 추적해 들어가면 인간의 죄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죽임 당한 제물은 곧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기죽 옷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씨눈과 같은 예표적인 사건이에요.

인간의 죄는 흠 없는 제물이 대신 죽어주심으로서만 가려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누군가가 우리 대신 죽어줌으로서 죄인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죽 옷 사건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과 같은 것입니다.

신약적인 해석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인간의 죄는 이러한 방식으로 처리한다는 것을 아담과 하와에게 알려준 겁니다.

그리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가죽 옷을 입혀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십니다.

쫓아내면서 뱀의 머리를 깨트리실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뱀의 머리를 깨트린다는 것은 죄를 없애준다는 말입니다.

 

죄의 수치를 흠 없는 제물의 죽음으로 가죽 옷으로 가려 주었으니 장차에도 죄를 없애줄 여자의 후손은 가죽 옷의 실체로서 오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죽 옷 속에는 이러한 비밀들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그럼 아담의 후손들은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줄 흠 없는 제물로 오실 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인간이 두려움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하여 대신 죽어주실 분을 기다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오셔서 자기 대신 죽어 주어야 죄로 인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 날수가 있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선 약속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암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입혀준 가죽 옷을 입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것은 이는 죄인은 하나님과 함께 같은 집에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죄인과 하나님은 서로 하나 될 수가 없는 전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생하시고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된 죄인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같이 살 수가 없어요.

거룩과 죄는 함께 할 수가 없어요.

이건 빛과 어둠처럼 서로 밀어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죽음은 하나 될 수가 없어요.

빛과 어둠도 하나 될 수가 없어요.

죄와 거룩도 하나 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죄인은 하나님 집에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함께 살면 죄인은 죽임을 당합니다.

마치 어둠이 빛에 의하여 죽임 당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집인 에덴동산에서 쫓아 내셨습니다.

 

죄인이 에덴동산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오직 하나 뿐입니다.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영생하는 자가 되어야지만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영생하는 자가 되려면 영생하는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영생하는 생명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건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서 자기백성들에게 영생을 주시도록 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영생은 죄인의 몸에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의 몸은 이미 죽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담으려면 죄를 담고 있는 몸을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표로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표가 되어서 우리를 대신하여서 죄의 몸을 멸하는 일을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대표로 십자가에서 죄인의 몸을 죽이시고 죄와 상관없는 몸으로 부활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예수님이 대표로 하신 겁니다.

우린 여전히 죄의 몸 그대로입니다.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럼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하신 겁니다.



다른 보혜사란? 성령님이에요.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과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세요.

예수님이 하신 일이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이건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죄 문제에 대하여 더 살펴보기로 합시다.

 

아까 죄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고 했지요.

죄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려면 죄 문제가 선행적으로 해결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죄 문제를 죄인이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면 당장이라도 해결하고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죄는 죄인이 해결 할 수가 없어요.

죄는 죄 없는 분이 해결해 주어야지만 합니다.

죄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 주는 방식으로만 사해져요.

피해를 입은 쪽에서 용서를 해 주어야지 용서가 되는 것이지 피해를 입힌 쪽에서 나 용사 했어! 그러면 안 되어요.

그런 용서는 없어요.

 

하나님은 피해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안식을 깨트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안식이란? 모든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하시고 난 후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곤 일곱 째 날에 쉬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된 세상을 인간에게 맡기고 안식하셨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고 말았어요.

마귀가 인간들을 미혹해서 죽음으로 떨어지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건 마치 아버지가 집에서 쉬는데 조폭들이 아들을 두들겨 패서 거반 죽게 만든 것과 같아요.

아버지는 상처 난 아들을 고치려고 병원에 뛰어 다닌다고 쉬지 못하는 것과 같아요.

 

지금 이 세상이 그러해요.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들을 죽여 놓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하지 못하시고 죽은 자식들을 살리는 일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를 말씀해 주셨어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가 일하시매 아들도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요 5:1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 5: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한다고 했어요.

그럼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시는가 보니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대신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합니다.

오셔서 자기백성들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라고 쉬었지만 예수님은 쉴 수가 없어요.

어떻게 38 년 된 병자를 두고서 안식을 하겠습니까?

38년 된 병자는 자기백성들을 상징해요.

그래서 안식일임에도 38년 된 병자를 병에서 놓임 받게 하여 안식을 주시려고 아버지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처럼 예수님도 살려내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죄인에겐 안식이 없어요.

죄에서 놓임을 받아야 안식이 되어요.

38년 된 병자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죄인들은 안식을 주어도 안식할 수가 없는 처지에요.

 

진정한 안식이 되려면 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일을 하시려고 오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다 하시고 나면 나라를 아버지께 바치게 됩니다.

 

고전 15:24절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예수님이 죄 문제를 다 해결하셔야 비로서 아버지께서 죄로 인하여 깨어진 안식을 다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나라를 만들어서 아버지께 바친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가 안식을 하실 수 있도록 죄로 인하여 죽은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는 아직도 엿새 중인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살아나야 일곱째 날 안식일이 되어요.

그래야 모든 일을 마친 일곱째 날이 되고 하나님이 비로서 안식을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엿새가 차기까지 예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지금은 영적으로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다 구원해야 일곱째 날이 됩니다.

그 때가 되면 예수님이 재림을 하십니다. 

그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다 사라져요.



죄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 주는 방식으로만 사해진다고 했습니다.

가해자가 아무리 용서 해달라고 하여도 안 되어요.

용서는 피해자만이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용서를 해 주실 때만이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죄 문제는 인간 쪽에서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해결해 주셔야지만 합니다.

 

죄인이 죄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죄는 죄가 없는 분이 해결해 주어야지만 합니다.

이건 마치 새 차를 교통사고 내 놓고 중고차로 변상을 해 주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중고차로서는 새 차를 변상 할 수가 없어요.

새 차는 오직 새 차로서만 변상이 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죄 없는 자를 죽여 놓았으니 죄 없는 자로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죄 없는 자를 죄인은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죄 없는 자는 반드시 죄 없는 분의 생명을 줌으로서만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죄 없는 분만이 죄인에게 생명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의 죄 문제는 오직 죄가 없는 분이 해결해 주어야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죄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어요.

모두가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 없는 아들을 보내서 죄인의 죄 값을 대신 치루는 방식으로 죄인을 용서하는 식으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럴 때 비로서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가해자의 용서 받음의 바탕에 하나님의 은혜성이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가해자인 죄인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피해자인 하나님 쪽에서 모든 것을 다 하셨기 때문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어째서 처소가 마련되는 일인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한다는 말은 죄인과 하나님 간에 화목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죄인은 비거룩합니다.

이 둘이 화목이 되려면 죄 문제가 해결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율법을 통해서 알려 주셨어요.

율법 속에서 죄사함이 이루어지는 것을 담아 놓았어요.

율법 속에서 죄사함은 흠 없는 제물이 죄인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죽임 당함으로서 죄인의 죄가 사해지는 방식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을 통하여서 죄인과 화목을 하셨습니다.

즉 화목 제물을 통하여서 만나 주십니다.

이 화목 제물을 일컬어 새 언약에선 중보자라고 합니다.

 

중보자란? 죄인과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분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중보자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중보자는 하나님 편에서도 흡족하여야 하고 인간 쪽에서도 흡족하여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하려면 화목 제물은 반드시 하나님이면서 인간이라야 합니다.

그러면서 죄가 없어야 합니다.

비록 인간과 같은 몸을 입고 있지만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 없는 하나님과도 만날 수가 있고 죄인과도 만날 수가 있어집니다.

양쪽 다 소통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들 속에선 중보자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중보자가 되려면 인간의 몸을 입고 있으면서도 죄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인간의 몸을 입고 보내신 것입니다.



중보자는 반드시 인간의 몸을 입고 와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혈통으로 오면 중보자가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자궁을 빌려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인간의 혈통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인 성령으로 잉태가 되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셨듯이 성도들도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게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낳아지는 방법입니다.

이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라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믿을 일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있지만 죄가 없습니다.

 

히 4: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하는 중보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서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죄 없는 자기 몸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시고 성도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죄인이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걸 처소를 예비한다고 하신 겁니다.

 

처소란 만남의 장소에요.

최초 만남의 장소가 에덴동산이었어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쫓겨났어요.

이제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심으로서 그것이 회복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그 동안 굳게 닫혀져 있던 에덴동산의 길이 열린 겁니다.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에덴동산은 죄인에겐 감추어진 세계입니다.

그 동안 죄인들은 접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 앞에 가로막혔던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몸으로 길을 여신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몸을 성소의 휘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휘장을 십자가에서 찢으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길이 열린 것입니다.


성막을 보면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은 휘장이 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지성소에서만 만나 주십니다.

그것도 일 년에 단 한 번 대 속죄일이 되면 만나 주세요.

 

이 때 대 제사장은 흠 없는 제물의 피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만나주십니다.

이럴 때 온 이스라엘의 죄가 속함을 받게 됩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대 속죄일에 일어나는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새롭고 산 길이라고 하는 겁니다.

산 길이란 생명의 길이란 말입니다.

이를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우린 예수님의 육체로 낸 길을 따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마치 죄인에게 가죽 옷을 입히려고 자신이 죽어준 희생 제물처럼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고 하지만 이 사실이 믿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어 주셨다는 것이 믿어져야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구조는 남이 한 일을 자기가 한 것처럼 믿기란 불가능 합니다.

인간의 의식구조는 자신과 타인은 엄연히 구별을 합니다.

내가 한 일은 내가 한 일이고, 남이 한 일은 남이 한 일입니다.

나와 남은 타인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인 예수님이 한 일을 내가 한 것으로 믿으라고 하여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입술로는 믿는다고 하는데 마음 속에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아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해서 죽었고 예수님 때문에 자기 죄가 사해졌다는 말은 너무도 믿기 어려운 말입니다.

이게 육의 한계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내 죄를 속하여 주셨다고 하여도 우리 육신은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 일은 인간의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가능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을 자기백성들에게 보내주십니다.

성령이 와서 예수님과 자기백성을 하나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 몸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곧 자신이 한 일처럼 믿어집니다.



성령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나를 위한 일이라는 것으로 믿어지게 해 주세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일이 믿어지게 해 주시는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하신 겁니다.



보혜사란? 돕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예수님이 가셔야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성령님이 오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셔야 성령님이 오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 14:16-20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행 2:33절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예수님이 가시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하지요.

그래서 사도행전 2장 33절에선 예수님이 가셔서 아버지에게 성령을 받아서 제자들에게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그럼 요한복음 14장 20절을 보면 성령이 오시면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고 아들과 성도가 하나 된다고 하지요.

 

그러니 성령이 아버지와 예수님을 예수님과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들어 주시는 겁니다.

쉬운 말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아들과 성도를 한 방에 거하게 만들어 주시는 겁니다.

이걸 성령 안이라고 합니다.

성령 안을 다른 말로 처소라고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성도를 성령이 거하는 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전이란? 집이란 말입니다.

처소란 말이에요.

 

성령이 처소가 되어서 아버지와 만남을 갖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신 거에요.

예수님이 가셔야 성령님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야 아버지와 화목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은 14-16장까지는 성령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는 보혜사이지만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 안에서 믿어지게 해주는 보혜사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해 주고 계신 겁니다.

 

성령님은 예수님 같이 성도를 돕기 위해서 오시는 보혜사입니다.

무엇을 돕는가 하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어지도록 도우십니다.

결과적으로는 제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믿어지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자기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이 믿어지도록 하세요.

예수님의 대속이 믿어져야 예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자기 안에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죄인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피하게 되어 있어요.

양심상 두려워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이 두려워져서 숨게 된 것은 자신들 안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갑자가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두려워진 겁니다.

그러니 숨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인간이 달라진 거에요.

선악과가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이 두렵다는 변화를 불러 온 겁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죄인의 마음에 변화가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 올 수가 없습니다.

이 마음에 변화를 성령이 일으키는 겁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피를 앞 세우고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게 해 주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성도의 마음에 보내주신 겁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이에요.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져요.

성령이 늘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몸을 성령이 거하는 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이란? 집이에요.

오늘 본문식으로 하면 처소란 말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는 처소가 되어주는 겁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요.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만나주시고요.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라는 화목제물을 통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마련한 처소란? 바로 성령님인 겁니다.

예수님이 성령 안에서 자신의 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신 것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씀이 맞지요.

예수님이 제자들 속에 처소를 마련해 주시려고 죽으셔서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 성령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만 보내 주세요.

그러니 처소는 예수님이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처소를 예비하려고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성령이 너희 안에 와서 처소를 마련하고 그러면 너희는 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을 알고 내 안에서 너희는 아버지와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진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처소를 천국에 맨션을 짓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이고 사기 치는 일이란 것을 알 수가 있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맨션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만납니다.

성령은 반드시 예수님의 피를 통하여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처소가 마련 된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서 늘 하나님과 화목해요.

하나님과 화목을 하니 마음에 근심도 사라지고 두려움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 요한은 온전한 사랑이라고 했어요.

 

요일 4: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마귀는 우리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고 합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를 입고 나아가게 합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는 우리의 행실을 말해요.

그러나 성령은 우리 행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나아가게 하십니다.

 

우린 우리 행실을 보면 실족 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 행실은 환경에 따라서 변해요.

몸에 컨디션에 따라서 달라져요.

지금은 믿음 좋은 것 같다가도 내일이면 알 수가 없어요.

내일에 나 예수 안 믿을래 할 수가 있어요.

 

우린 얼마든지 그렇게 하고도 남아요.

마음은 안 그런다고 다짐을 하여도 우리 몸이 그렇게 우리 생각대로 우리가 마음 먹은 대로 따라주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맹세나 각오를 믿지 않는 겁니다.

 

제발 자기를 믿지 마세요.

저도 저 자신을 못 믿어요.

그러므로 성령이 내 안에서 내 꼬라지 보지 말고 예수님의 새 언약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행실을 보면 두려움이 엄습해요.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을 할 때 성령은 바울의 눈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였어요.

 

그러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이를 누가 송사 할 수 있느냐 라고 했어요.

그래서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다고 찬송하고 감사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린 우리의 행실로 인하여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가질 수 있으나 죄로 인하여 낙심하거나 절망할 이유는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서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대신 담당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낙심하고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피이지 우리 행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는 반드시 자신의 그 어떠함에 개의치 않고 예수님의 피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요.

 

이 믿음이 담대함을 줍니다.

이 담대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어요.

그러므로 바울은 이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 담대함을 가지라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 겁니다.

 

제발 자신을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세요.

새 언약을 믿으세요.

이 믿음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요.

 

부디 성령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 하나님과 화목하심으로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믿어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행실로 인하여 낙망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