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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76강. 한 알의 밀알되어 죽으신 예수님 (요 12:20-26)

by coroa 2021. 10. 30.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76강. 한 알의 밀알되어 죽으신 예수님 (요 12:20-26)

-.정낙원 목사

 

요 12:20-26=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다스려 가십니다.

언약의 중심 내용은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살려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엔 “정한 때와 기한”이 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도 시나리오대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하려고 오셨으니 자기 백성이 구원 받는 것도 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 또한 정한 때까지 율법이라는 후견인(後見人) 아래 두었다고 합니다.

때가 되면 율법 아래서 끄집어내십니다.

구원이란? 율법 아래서 빼내심을 입는 겁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셨어요.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것도 아브라함과 언약 한 때가 차서 되었어요.

이걸 우리 개인에게 적용하면 한 사람이 복음을 깨닫게 되는 것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 율법 아래 있다가 부르심을 입는 때가 정해져 있어요.

어떤 사람은 일찍 부르심을 입고 어떤 사람은 늦게 부르심을 입습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이전엔 율법 아래 있었어요.

바울이 약 30세 정도에 다메섹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렇다면 바울은 30년 동안 율법 아래 있었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바울을 다메섹에서 만나 주시지 않았으면 바울은 평생 율법 지킴을 신앙이라고 믿는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를 핍박하다가 지옥으로 갔을 겁니다.

그런데 다행히 예수님이 바울을 율법 아래서 불러내 주셨어요.

이는 모두가 하나님이 정한 때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일어나요.

저도 수십 년 동안 율법 아래 있었어요.

그러다가 십여 년 전에 복음을 받았어요.

이 모두가 하나님이 정한 때가 되었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다가 복음 안으로 빼내 주신 겁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아직 복음을 모른다고 조롱하면 안 됩니다.

언제 부르심을 입을지 모르잖아요.

택한 백성이라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복음을 깨닫고 믿도록 해 주세요.

우리도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되어서 부르심을 입은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20년 전에 재림을 했거나 제가 죽었으면 저는 지옥에 갔어요.

왜냐하면! 전 그 땐 복음을 몰랐거든요.

그 땐 율법 아래 가두어져 있어서 내 의(義)가 충만 했어요.

당시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는 신자로 취급하지 않았어요.

다메섹 이전의 사울처럼 철저히 율법주의로 살았거든요.

 

그런데 다행스럽게 예수님이 그 때 재림하시지 않았어요.

저 또한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20년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고 제가 죽지 않고 지금껏 살고 있는 것은 저는 예수를 믿고 천국가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인 겁니다.

 

그러니 율법 아래서 불러내서 복음을 믿게 해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복음을 믿게 해 주셔서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복음을 깨닫고 증거하는 것은 제가 똑똑해서도 아니고!

신학교를 나오고 목사가 되어서도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셔서 에요.

 

성도들의 신앙은 모두가 하나님이 정한 때에 따라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지금 누가 복음 모른다고 정죄할 수 없어요.

정죄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에요.

그 사람이 택한 백성인지 아닌지 우리는 판단 할 수가 없어요.

택한 백성이면 반드시 복음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 판단하지 말고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오늘이라도 알게 하실지 아니면 1년 후가 되든지 10년 후가 되든지 기다리자고요.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해서 간섭하시니까요.

그러므로 당신은 왜? 복음을 모르느냐! 라고 하지 말고 나에게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정한 때에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안다면 남을 비판하고 정죄치 못해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 전까지만 해도 정죄하는 그 사람들처럼 율법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복음을 안다는 것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기 보단 감사해야 합니다.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예수 믿음을 자기 실력으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는 아는데 너는 왜? 모르느냐 라고 우쭐거리면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복음을 지식으로 아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배워서 깨달은 지식이기 때문에 난 아는데 넌 왜? 모르느냐는 식으로 말하는 겁니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듯이 복음도 계속해서 들으면 지식으로 알게 되어요.

자신은 믿지 않지만 믿는 척 할 수가 있어요.

 

복음을 양식으로 먹는 사람은 복음에 합당한 모습들이 나타나요.

아~ 이런 죄인이 용서 받았구나!

죄 용서 받은 자로서의 감사와 긍휼이 나타나요.

 

그러나 지식으로 아는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고 거드름을 피워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에게 선생이 되어서 가르치려고 하고 잘난 척을 해요.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어요.

 

진짜 복음을 안다면 비판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이 일어나야 해요.

자신이 복음을 아는 것에 감사가 나와야 해요.

복음 아는 것을 절대로 자랑거리로 삼지 않아요.

이게 부르심을 입고 용서받은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사도바울이 구원을 받고 나니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는 것이 깨달아진 겁니다.

복음에 대해서 악행하고 포행자(暴行者)였던 자신이 용서를 받고 보니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비판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참아주고 이해하고 다가갔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저 사람에게도 임하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다가 갔어요.

그 심정이 유대인에겐 유대인처럼 대하고 이방인에겐 이방인처럼 대하였던 겁니다.

난 너희와 상종하지 않아! 라고 하지 않고 사랑으로 다가갔어요.

 

그러니 우리도 누구를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앉고 일어섬을 주님께 맡기고 기다리자고요.

이미 우린 복음을 받았잖아요.

그러니 여유롭고 관대해 지세요.

가진 자 답게 좀 풍성해 지세요.

 

복음이 주는 넉넉함과 감사와 기쁨을 누리세요.

누가 이단이라고 해도 그냥 씩 웃고!

그래 나는 당신이 보기엔 이단이 맞다!

당신도 나처럼 이단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세요.

 

우리가 설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은 반드시 찾아낸다는 것을 믿으세요.

하나님께서 포도원 품꾼을 부르듯이 어떤 사람은 아침에 포도원으로 들어가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점심때 들어가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저녁때 들어가라고 합니다.

 

일꾼을 부르는 것은 주인이 정해요.

주인이 아침 일찍 부른 사람은 일찍부터 복음을 알고!

점심때 부른 사람은 저 처럼 수십 년 율법 아래 있다가 빼내심을 입고!

저녁 때 부른 사람은 늙어 죽기 전에 빼내심을 입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불러 주신 주인을 찬양해야지 부르심을 입은 자신을 자랑하면 안 되어요.

아침이든 점심때든 저녁때든 불러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감사하는 것이지 자기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복음 안다고 잘난 척 까불면 안 되어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구원한다는 말은 살려낸다는 말입니다.

살려 낸다함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하나님과 함께 하려면 인간도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죽은 자와는 함께 하지 못해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 낸 것은 아담이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은 영생의 세계에요.

죽은 자는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쫓아 낸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이 사는 이 세상을 장망성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자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을 보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 밖은 죽음이란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명은 예수님뿐이에요.

예수님 이외는 생명이 없어요.

다 죽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것을 일컬어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어떻게 주는가 하면 자신의 생명을 버림으로서 주십니다.

생명이 사망에 먹힘 당하여 주어서 죽은 자를 살려내는 방식으로 주어져요.

 

예수님이 짐승의 밥통에 나신 것도 다 계시사적인 의미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양식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날 먹으라는 겁니다.

날 먹고 생명을 얻으라는 말이에요.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 살려 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는다고 하십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는 것은 많은 열매를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농부가 밀알을 심는 것은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한 알 심어서 한 알 얻으려면 심지 않아요.

한 알 속엔 엄청난 열매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심는 겁니다.

농부는 한 알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열매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한 알을 죽이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예수님 속에 수많은 열매를 끄집어내시려고 예수님을 심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는 것은 곧 생명을 심는 것과 같아요.

생명을 심었으니 수많은 생명들이 열매로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심었으면 죽음이 나올 텐데 생명을 심었기 때문에 생명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세요.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은 수많은 성도들이 살아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안 죽었으면 혼자였을 텐데 죽었기 때문에 수많은 성도들이 살아난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님이 만약 안 죽었다면 우리의 구원도 없는 겁니다.

다행히 예수님이 죽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겁니다.

 

암튼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심도 다 “정한 때” 가 있습니다.

그 때에 맞추어서 죽었어요.

 

이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정한 때에 따라서 일을 하셨어요.

예수님이 죽는 때가 정해져 있다함은 곧 성도가 구원 받는 때도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각 사람마다 부르심을 입을 때가 정해져 있어요.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는 것도 하나님의 정한 때와 기한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복음을 말해도 귓전으로 듣고 콧방귀를 뀝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그냥 자나가는 말로 복음을 전했는데 대뜸 알아먹어요.

이를 두고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이 복음을 듣게 하는 정한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목자가 되셔서 양을 찾아낸다고 하지요.

어떻게 찾아내는가 하면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는 식으로 찾아냅니다.

 

목자가 앞서서 자기 양들을 부르면 자기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므로 따른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목자와 양은 본능적으로 서로 끌어당긴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핏줄은 서로 당긴다는 말과 같아요.

그래서 목자가 앞서서 가면 양들은 그 목자 뒤를 졸졸 따라간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우리” 에 들지 않은 양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 우리”란? 목자의 죽음으로 생겨날 새로운 이스라엘을 말해요.

새로운 이스라엘은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생겨납니다.

 

이게 엄청나게 중요해요.

이런 사건은 이미 출애굽 때 보여 주셨어요.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것은 성도가 구원받는 것과 같아요.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성도에 표상이에요.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이 어떻게 출애굽을 하였는지를 보면 신약에 성도들이 어떤 식으로 구원이 주어지는지를 알 수가 있어요.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하나의 예표적인 사건이에요.

 

그렇다면 구약 이스라엘은 어떻게 출애굽 하였습니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서 했지요.

하나님께서 애굽에 장자를 죽일 때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죽음으로 살아났어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에 장자가 죽는 일을 알려 줍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에겐 죽음에서 살아날 길을 알려 주었어요.

중요한 것은 죽음에서 살아나는 길이 아주 이상하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상한가 하면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해서 어린 양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장자 대신 어린 양이 죽는 겁니다.

어린 양을 의인화 하여서 보세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희생시킨다는 말이 됩니다.

 

장자란? 하나님의 것인데 이는 곧 구원받을 모든 성도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럼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누군가가 대신 죽었다는 말이 됩니다.

성경은 우리 대신 죽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우린 예수님의 대신 죽어주심 때문에 살고 있는 겁니다.

 

암튼 구약 출애굽 때 하나님은 누가 대신 죽었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어린 양의 피를 대문에 바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해서 어린 양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집은 장자가 죽은 것으로 여기고 죽음에 천사가 넘어 갔어요.

 

모세가 이러한 사실을 온 이스라엘에게 공표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 졌어요.

애굽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이 모세의 말을 듣고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어요.

그러자 죽음을 집행하는 천사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간 것입니다.

장자가 죽는 재앙으로부터 벗어났어요.

 

반면에 이스라엘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농담으로 듣고 피를 바르지 않았어요.

이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을 믿은 겁니다.

그런데 장자가 죽었어요.

이스라엘인이라도 어린 양의 피가 없으면 죽었고, 애굽인이라 할지라도 어린 양의 피만 바르면 살았어요.

 

죽음을 집행하는 천사는 혈통을 보지 않고 피를 보고 심판을 했어요.

피가 있으면 넘어 갔고!

피가 없으면 죽였어요.

 

천사는 인간을 보지 않았어요.

오직 어린 양의 피만 보았어요.

이는 곧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조건은 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오로지 어린 양의 피만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고 어린 양의 죽음 안에서 생겨난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광야에서는 애굽인이냐! 이스라엘인이냐! 라는 의미는 사라졌어요.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겐 애굽인이다! 이스라엘인이다! 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어린양의 죽음으로 생겨난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 나온 민족은 더 이상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혈통적 의미는 사라졌어요.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민족이 된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 안에서는 혈통적 의미는 없어요.

 

이건 마치 요한복음 10장에서 말하는 새로운 우리 안에 들게 되는 양과 같아요.

요한복음 10장에서 말하는 우리 안에 드는 양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생겨난 양들이에요.

이 우리 안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어요.

모두가 목자의 죽음으로 찾아냄을 당한 양들이에요.

 

예수님이 만든 우리 속에는 혈통적 조건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혈통적 조건을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오로지 예수의 피로 살아난 양들만 모인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진 우리 속에는 이방인 중에서도 구원 받을 자들이 있어요.

이는 곧 예수님의 양은 유대인에게만 있지 않고 온 세상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고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하나님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죽음으로 민족과 혈통을 초월한 새로운 이스라엘이 만들어진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 안에서 새로운 민족을 만들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에 초점은 십자가의 죽음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월드컵 경기장에 보면 수많은 카메라가 골문을 향해 맞추어져 있지요.

이는 축구의 승패는 골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성도의 구원에 적용한다면 성도의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있어요.

그래서 모든 성경의 포카스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오른 본문에서 유의하여 보아야 할 내용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유월절 명절에 이방인들이 예수님에게 면회를 신청하는 내용이고!

그러자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한 알의 말일이 되어서 죽으면 많은 열매들이 맺힐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고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될 것이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유월절이 되면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죽을 시간이 가까워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미 보여 주셨던 출애굽 사건을 만들어 가십니다.

어린 양의 죽음 안에서 애굽인과 이스라엘이라는 차별이 무너진 민족을 만듭니다.

즉 어린 양의 죽음 안에서 어린 양의 피로 사는 새로운 민족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가 되어서 죽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 안에서 애굽인이다! 이스라엘인이다! 라는 것이 철폐가 되었듯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도 허물어지게 됩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오늘 본문에서 이방인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으로 나타난 겁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의 차별 없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알리고자 예수님이 죽어야 할 유월절에 맞추어서 이방인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해 달라는 내용이 나오지요.

 

헬라인이란? 이방인에요.

이방인이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것은 이방인의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방인을 만나 준 것은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암튼 헬라인이 빌립에게 예수님을 좀 만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건 유대인의 정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헬라인도 이런 유대인들의 정서를 잘 알기 때문에 직접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을 찾아가서 청을 넣은 겁니다.

 

빌립이 가만히 보니 이건 자기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닌 듯 싶었던지 안드레에게 의논하고 함께 예수님에게 기별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 그럼 이제 내가 영광 받을 때가 되었구나! 라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한 사람이 죽어서 흩어져 있는 자기 백성을 모을 때가 가까이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리고 미워하는 자는 영생할 것이라고 합니다.

 

빌립이나 안드레는 의아한 겁니다.

아니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하고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이방인과의 만남과 예수님의 죽음이 무슨 연관이 있느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방인들이 자신을 찾아 온 것을 기뻐하시고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가까웠다고 했을까요?

인자가 영광 받는다는 말은 십자가에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영광을 받는다는 말은 자신의 임무를 완성한다는 말입니다.

마치 올림픽에 나간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 영광을 받잖아요.

본인도 영광이지만 국가도 영광이에요.

이는 올림픽을 나간 목적을 달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 이루시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다고 하지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이 땅에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러 왔습니다.

어떻게 구하는가 하면 자신의 죽음으로 구합니다.

자기 백성들의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는 것으로 구원해 냅니다.

자기 피로 죄사함을 얻게 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올림픽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이제 됐어! 다 끝났어! 라고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겁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죄사함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담을 헐어 버렸다고!

 

엡 2:12-18=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막혀 있던 담을 허셨습니다.

첫째로는 죄인과 하나님 간에 가로막힌 담을 허셨고!

둘째로는 이방인과 유대인간에 막힌 담을 헐었습니다.

 

인간의 조건으로 담으로 가로막혀 있던 것이 무너진 겁니다.

이젠 너와 나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우리 입니다.

이젠 이방인과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의 피 안에 있으면 모두가 동등합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너나 나나 소용없고 오직 예수님의 것으로 있을 뿐입니다.

 

유대인도 예수님 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이방인도 예수님 피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목사도 예수님 피로 나아가고!

집사님도 예수님 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예수 안에선 유대인도 이방인도 차별이 없고 목사도 집사도 차별이 없습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이 찾아오심을 듣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한 것도 자신의 죽음으로 인종 차별이라는 가로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걸 히브리서에선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라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죄인과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려고 죽으신 겁니다.

이를 일컬어 화목제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로 죄인을 만나 주십니다.

이를 예수 안에서 만나 준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의 인간은 예수님 안에 있느냐?

예수 밖에 있느냐!

둘로 구분이 됩니다.

 

전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도로 나누어졌지만

이젠 예수님 안이냐! 밖이냐! 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예수가 기준입니다.

 

이를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라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 이 세상은 두 구조(構造)로 나누이게 됩니다.

인간의 혈통이나 조건으로 나누지 않고 예수님 편이냐! 아니냐! 로 나누어집니다.

 

이는 곧 창세기 3장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나누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둘만 있어요.

천국백성과 지옥백성 두 부류만 존재해요.

이 두 부류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나누어져요.

 

수많은 교단에 속한 교인들이 있어도 결국엔 예수님 십자가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구분이 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알면 신자이고 모르면 불신자에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십자가를 알면 교회이고, 모르면 절간이에요.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졌어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는 말은 사도들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의 신앙고백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란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죄사함이나 구원에 있어서는 인간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을 믿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이 종결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어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은 변하지 않아요.

 

신앙생활이란? 이런 사실을 믿고 사는 것이에요.

그럼에도 믿음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뭔가 하여야 하는 것으로 붙잡고 있어요.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겁니다.

 

그냥 믿음으로 살면 되는데!

이게 안 믿어지니 그래도 신자답게 뭔가 하여야 하지 않느냐! 라는 식으로 자기 행동에 변화를 모색하는 겁니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정형화 되어 있지 않아요.

그럼에도 목사나 교인들은 정형화 하고자 해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라고 표준을 만든단 말입니다.

 

그냥 범사에 믿음으로 살면 되는데 말이죠.

믿음을 안 받았으니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라고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틀을 만들어 달라고 해요.

이건 믿음을 안 받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받으면 믿음으로 사세요! 라고 하면 그 말뜻을 알아요.

누구에게 물을 필요가 없어요.

성령이 그때 그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삶을 어떤 정형화된 틀에 가두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죄 용서 받았음에 감사하며 사는 겁니다.

 

열심히 직장 생활하면서도 믿음으로 감사하고!

열심히 돈 벌면서도 믿음으로 감사하고!

열심히 놀면서도 믿음으로 감사하고!

열심히 교회 다니면서도 믿음으로 감사하고!

자신의 삶이 어떠함과 상관없이 믿음으로 감사하고 살면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밥숟가락만 빼면 교회 가서 어깨 띠를 두르고 전도지 나누어 주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이런 것 하고 안하고와 상관없이 주의 은혜에 감사하면 되어요.

때론 열심히 충성 봉사하기도 하고 때론 안하기도 해요.

 

성도 안엔 성령이 계세요.

성령이 때를 따라 간섭하세요.

그럼 성령이 간섭하는 대로 살면 되어요.

성령은 항상 예수 안에서 살게 하세요.

 

제발 내가 뭘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내가 뭘 하나 안 하나 상관치 않고 예수님으로 영광을 받아요.

오로지 예수님 십자가 피로만 영광을 받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에 하나님의 의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우리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으로 영광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은혜 받은 자는 가만있지 않아요.

은혜가 그 속에서 뭔가 하게 하세요.

 

죄인에게 의미를 두는 것이 죄에요.

제발 자기 꼬라지로 희비하지 마세요.

자기 행위를 신앙으로 붙잡고 있지 마세요.

 

마귀라는 놈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게 해요.

예수님 보지 말고 자기 행실을 보게 만들어요.

마치 인간의 행함에 의로움이 있는 것처럼 미혹을 해요.

내가 뭔가 하지 않으면 죄라고 여기게 해요.

자기 행함을 근거로 죄다 아니다 라고 미혹을 해요.

 

그래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은 너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 라는 식으로 말하는 겁니다.

너~ 그러고도 신자라고 할 수 있느냐!

신자가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자꾸만 나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요.

 

여기에 걸려들면 내가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데!

다시 정신을 차리자!

자기 변화를 모색하게 되는 겁니다.

 

이러면 자기 변화에 따라서 희비하게 되어요.

이건 신앙이 아니고 종교 생활하는 겁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는다고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의 눈을 선악과에 붙잡아 두고서 미혹했어요.

선악과로 생명과로부터 눈을 떼게 만들었어요.

생명과에서 눈을 떼면 선악과를 먹으나 안 먹으나 이미 게임을 끝났어요.

 

죄란?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니고 생명과를 먹지 않은 겁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생명과를 먹지 않아서 에요.

신약 식으로 말하면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 믿어서 가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살인해도 천당에 가요.

반대로 예수 안 믿으면 살인 안 해도 지옥에 가요.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늘 기억하고 살으라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죽게 된 것은 영생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선악과를 먹어서 그래요.

 

이걸 신약식으로 말해 봅시다.

신약에서 영생은 예수를 믿으면 주어집니다.

그럼 예수 믿는 것이 생명과를 먹는 것이 되겠지요.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어떤 행실을 하여도 구원을 받아요.

왜냐하면!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선 믿음이 생명과에요.

믿음 이외는 선악과에요.

믿음 이외란? 행함입니다.

그럼 행함이 선악과가 되겠지요.

행함 붙잡으면 죽어요.

 

그럼 예수를 믿는 성도는 이미 영생하는 자이지요.

영생하는 자에겐 인간의 행함으로 정죄 당함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겐 그 어떤 인간의 행함도 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착하게 살아도 의가 되지 않고 악하게 살아도 죄가 되지 않아요.

하나님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성도는 이미 영생하는 자입니다.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영생하는 자가 되었으면 선악과는 더 이상 죄가 되지 않아요.

생명과를 먹으면 선악과로 판단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선악과는 죄가 아닌 것과 같아요.

 

이걸 이 시대로 적용하면 죄란? 예수 안 믿는 겁니다.

하나님은 네가 선하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 를 묻지 않아요.

너~ 예수 믿느냐! 라고 물어요.

예수 믿으면 강도도 천국 가고!

예수 안 믿으면 천사처럼 살아도 지옥가요.

 

하나님은 죄를 예수 믿느냐! 안 믿느냐! 로 판단해요.

마치 에덴동선에서 생명과를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 로 판단 한 것과 같아요.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인간의 행실은 죽은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의 행실로 죄다 아니다 판단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독자적으로 보지 않고 예수 안에서 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와 함께 죽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의 죽음이에요.

죄의 삯은 사망이에요.

죄인은 죽음으로 죄값을 치루는 겁니다.

 

죽은 자에겐 더 이상 죄를 묻지 않아요.

죽은 자는 더 이상 율법에 추궁당하지 않아요.

너~ 하나님 뜻대로 살았어! 못 살았어! 라고 추궁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네 안에 어떤 생명을 갖고 있느냐! 고 물어요.

네 안에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느냐!

아담의 생명을 가지고 있느냐! 물어요.

 

하나님은 아담과 예수님을 대표로 취급하세요.

 

롬 5:12-19=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한 사람 아담이 범죄해서 온 인류가 죄인이 되었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는 겁니다.

인간이 죄인이 되어서 죽는 것은 모두가 죄인인 죽은 조상을 두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담처럼 보내셨어요.

예수님이 대표가 되어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일을 처리하셨어요.

예수님의 죽음은 곧 자기 백성 모두가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죽으셨어요.

그러니 자기 백성 모두가 예수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처럼 죽은 것은 자기 백성들을 죽이고 살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은 밀알처럼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죽음인 것입니다.

 

십자가란 자기 죽음을 전제로 믿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십자가를 믿을 수가 있어집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안다면 마땅히 저주 받아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겠지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참으로 인간들이 듣기에 가당치 않는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예수를 아무리 잘 믿어도 자기 생명을 미워할 자는 없습니다.

 

누가 자기를 미워해 보세요.

그럼 속상하고 싫잖아요.

우린 사랑받기를 원해요.

그래서 교회에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이라는 노래를 예배 때마다 부르잖아요.

맞아요.

 

우린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사랑받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이에요.

인간의 본성은 사랑받기를 원해요.

입술로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육신은 사랑받고자 해요.

 

그러니 우리는 말과 행동이 다른 겁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면 저주 받아야 한다고 해야 맞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린 사랑해 달라고 상반되게 요구해요.

 

그럼 오늘 본문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부담이 되는 말씀이 되는가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니요.

예수님께서 왜?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고 할까요?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숨은 죽은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은 목숨으로 영생하고 싶어 해요.

죄를 이기지 못하는 목숨으로 영생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런 목숨으로 천당에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천국에 가도 죽음에 쫓기잖아요.

그러면 천국에 있어도 마음은 지옥일 텐데 말이죠.

 

천국과 지옥은 어떤 환경이냐가 아니라 어떤 생명으로 사느냐에 따라서 달라져요.

영생하는 목숨으로 살면 감옥도 천국이 되지만!

죄로 인하여 죽음에 종노릇 하는 목숨으로 예수님과 함께 같이 있다 하여도 지옥이에요.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배에 물이 들어오니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가 깨어지든지 말든지 물이 들어오든지 말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쿨쿨 잠을 주무십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은 아주 극과 극의 모습을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영생의 생명으로 살았고!

제자들은 죽을 목숨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도 환경에 따라서 희비하였어요.

이게 아담 안에서 죽은 목숨으로 사는 인간들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 완전히 달라집니다.

죽이겠다고 핍박을 받아도 감옥에 갇혀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핍박 받는 것을 합당하게 여겼어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왜? 그런가요?

뭐가 달라진 겁니까?

이는 배타고 두려워하던 때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중간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었어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성령 강림이 있었어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성령강림이 제자들을 완전히 바꿔 놓은 겁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전에는 예수님과 함께 다녀도 죽음에 쫓기는 목숨으로 살았지만!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엔 죽음을 이기는 영생의 목숨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받으니 육신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달라지게 된 정점(頂點)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목숨을 죽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생하는 생명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제가 복음을 알기 전과 후의 차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땐 속으론 늘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었던 것입니다.

내 행위로 두려움을 이기려고 했어요.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난 후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어요.

누가 나를 어떻게 판단하든 신경 쓰지 않아요.

내 자신으로부터 해방 되었어요.

내 자신이 율법적 요구로부터 자유케 되니 행함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내 행함과 상관없이 복음이 주는 기쁨으로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어요.

지금 살고 있는 나는 예수 안에서 나에요.

그러니 사나 죽으나 이미 영생 안에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겁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살아가는 것이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생명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생을 주셨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간섭을 하실 때에 한해서이지만 말이에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목숨을 자신이 대신 짊어지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속엔 자기백성 모두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백성이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인간의 혈통족인 차별이 없는 민족입니다.

성령으로 생겨날 하늘에 민족입니다.

성령으로 생겨날 민족은 영생하는 민족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민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민족이에요.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목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심으로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생의 목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믿어져야 성령을 받은 성도에요.

 

성령으로 거듭난 영생하는 목숨을 받은 성도는 세상이 감당치 못해요.

세상의 판단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 안에 영생이 있는 성도는 죽음의 세력이 공갈을 치거나 협박을 하여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이런 죽음의 세력을 이길 영생의 목숨을 주기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온 세계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52절을 봅시다.

 

요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보세요.

그 민족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요.

그 민족이란 유대인 중에 구원 받을 자를 말하고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란 이방인 중에서 구원 얻을 성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속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찾는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시지만 그 속엔 수많은 열매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천국 백성이라는 큰 민족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방인들이 자신을 찾아오자 이젠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찾기 위하여 자신이 죽어야 할 때가 가까움을 알고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드디어 흩어져 있는 자기 백성들을 하나로 모으는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유월절 명절에 이방인들이 찾아 온 것은 예수님에겐 반가운 소식인 겁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면 요한복음 10장에서 말한 유대인이라는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을 다 찾으실 것입니다.

이들도 한 무리가 되어서 예수님이라는 한 목자 아래서 그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한 사상으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 사상이 되면 동일한 말을 하게 됩니다.

 

무슨 말을 할까요?

자신들은 목자의 죽음으로 살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사함 받았다고 말을 할 것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뭡니까?

새 언약이잖아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말이잖아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에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분문에서 예수님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나를 섬기면 아버지도 저를 귀히 여기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한 알의 밀알로 죽었다는 그 죽으심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바탕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받고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은 예수님이 베푸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뭘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 것을 받지 않아요.

예수님 것만 받아요.

예수님의 희생만 받아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섬긴다!

또는 하나님을 섬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앞세우고 나아가는 것이에요.

 

우린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삽니다! 라고 고백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이 섬김이 아니에요.

그건 목사들이 이(利)를 얻으려고 탐심으로 지어낸 말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섬김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겁니다.

내가 드리는 것이 아니고 받는 거예요.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섬김을 받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이건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얻어먹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희생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부모님 덕으로 산다는 것을 알고 부모님께 감사하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겁니다.

부모의 희생을 모르는 자를 일컬어 짐승이라고 해요.

 

피조물은 창조주의 도움을 입고 사는 것이 창조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주는 비를 먹고 햇빛을 받아먹고 사는 것이 창조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마치 새벽에 엄마가 밥을 해 놓으면 쳐 먹고 학교 가는 것이 엄마를 섬기는 겁니다.

엄마가 해 놓은 밥을 안 먹는 것이 엄마를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창조주 앞에 악이란?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자기가 책임지고자 하는 것이 죄에요.

마귀는 항상 자기 생명을 자기가 책임지라고 합니다.

죄사함도 자기가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서 받으라고 합니다.

 

마귀는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가리는 방식으로 다가와요.

독자적으로 의를 만들라고 해요.

 

죄가 뭐냐?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모르는 것이에요.

예수님에게 섬김 받지 않고 자기가 섬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아들이지 종이 아니에요.

아들은 일하는 자가 아니고 부모님의 은혜를 유업으로 받는 자에요.

부모님에 것으로 사는 자가 아들이에요.

 

하지만 종은 자기 힘으로 일하고 자기 수고의 댓가로 사는 자에요.

주인은 종에겐 댓가를 요구해요.

일 한 것으로 주인과 셈을 해요.

주인도 일한 것으로 셈을 해요.

너 일했어! 안했어! 물어요.

일을 했으면 상응한 대접을 하고 안 했으면 징벌해요.

이는 주인과의 계약이 노동으로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에겐 감사가 나오지만 종에겐 감사가 나오지 않아요.

신앙생활은 감사하는 겁니다.

감사치 못하는 것은 마귀신앙이에요.

 

세상엔 두 언약 두 신앙이 있어요.

믿음이냐!

행함이냐!


믿음은 새 언약이고, 행함은 옛 언약이에요.

옛 언약은 법이고, 새 언약은 은혜에요.

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법에 속한 사람을 죽였어요.

그리고 은혜의 사람으로 살려 내었어요.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정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해 주셨잖아요.

죄와 사망은 율법으로 인간의 행함을 추궁합니다.

 

성도는 이런 추궁으로부터 치외법권에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으로 추궁당하는 법에 속한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율법으로 정죄하지 못해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정죄함이 없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한 알의 밀알 되어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얻어진 은혜의 생명으로 결코 정죄 당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어주심이 있기에 우리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생명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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