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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62강. 용서받은 자의 삶 (히 13:1-6)

by coroa 2021. 8. 5.

 

 

62강. 용서받은 자의 삶 (히 13:1-6)

-.정낙원 목사

 

 

 

얼마 전 뉴스에 보니 국민소득이 2만 불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국민들의 생활 지수가 높아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 지수는 낮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살기는 좋아졌는데 행복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생활 지수란? 살아가는 환경을 말합니다.

생활 지수가 높다는 것은 생활하기가 편리하고 환경이 좋아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생활 지수가 높다고 하여서 행복 지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생활 지수가 높지만 행복 지수가 낮다는 것은 생활은 편하지만 행복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생활의 환경은 돈만 있으면 좋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돈으로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돈으로 행복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면 부자들은 다 행복해야 해요.

 

그런데 자살은 부자들이 더 많이 해요.

얼마 전에도 한국 최고의 재벌 가(家)에 있는 한 사람이 자살을 했잖아요.

이는 곧 돈이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행복하십니까? 라고 물으면 사람마다 대답이 달라요.

빈부와 귀천과 상관없이 대답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살림살이는 돈만 있으면 나아집니다.

그러나 행복은 돈이 있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란? 마음에 만족함입니다.

마음에 쉼을 얻는 것이에요.

사람은 마음에 쉼을 얻지 못하면 불안하고 불행하다고 느껴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준다고 했습니다.

내 멍에를 매면 마음에 쉼을 얻는다고 했어요.

 

무얼 쉬게 해 준다고 했나요?

마음입니다!

마음!

 

결국 쉼이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선 마음에 쉼을 누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휴식(休息)이니!

안식(安息)이니! 하는 말은 모두가 편안하게 숨 쉬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아기가 엄마 젖을 먹으면서 평온해 하는 상태를 안식이라고 합니다.

 

참 재미있지 않나요.

숨을 편하게 쉬는 것이 안식이라고 하는 것 말이에요.

삶에 쫓기고 사는 게 바쁘면 숨 쉬는 것도 힘들어요.

사람이 뭔가에 쫓기면 마음이 불안하고 호흡이 바빠집니다.

가슴이 쿵쾅 거리면서 맥박이 빨라지잖아요.

 

사람의 숨 소리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쉬는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어요.

그만큼 숨은 마음의 상태를 대변해 주고 있어요.

그러니 쫓기는 사람은 마음에 쉼을 누리지 못하는 겁니다.

 

죄인은 마음에 쉼을 얻을 수가 없어요.

성경은 죄인의 머리 위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죄인은 본능적으로 뭔가 불안하고 근심 걱정이 끊이질 않아 마음에 쉼이 없는 겁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도록 했습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 자체가 땀 흘리는 수고인 겁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삶엔 숨을 편하게 쉴 안식이 없습니다.

자기 생명을 자기가 지켜야 하니 쉴 틈이 없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에겐 삶 자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고 안식이 없는 겁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자기백성들에게 안식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편하게 숨 쉴 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죄인에게 예수님이 쉼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마음에 쉼을 주신다고 합니다.

 

마음에 쉼은 어떻게 주어지나요?

예수님이 지신 멍에로 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지신 멍에는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결국 죄인에게 있어서의 쉼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왜? 마음에 쉼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나요?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물질주의(物質主義)에 사로잡힌 인간을 죽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서도 죽이지만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못 박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옛 사람을 죽이는 곳입니다.

죄도 죽이고 육신에 대한 탐욕도 죽입니다.

불안케 하는 것을 죽임으로서 안식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어요.

잠을 다른 말로 안식이라고 해요.

이는 편안하게 호흡을 하면서 쉬는 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성도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십자가가 고통이 아니라 안식하게 해 주는 곳입니다.

 

성도가 쉼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안에 탐심이 가득하니 불행한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냥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살았으면 행복했을 겁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 버렸습니다.

피조물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창조주 위치에까지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냥 하나님같이 안 되어도 피조물로 살았으면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피조물로서 만족치 못한 그 탐욕이 결국엔 죄인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고 만 것입니다.

쉼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에게 탐욕이 없었다면 세상엔 전쟁도 없고 범죄도 없고 빈부(貧富)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평화롭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정과 욕심인 탐욕 덩어리를 십자가에서 죽여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탐욕으로 가득 찬 죄인을 죽여서 쉼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면 쉼을 얻는다고 했어요.

 

그런데 어디 인간이 그런가요.

그건 어디까지나 성경 속의 이야기입니다.

성경 밖에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현실 속에선 정 반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몰라서 못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육신은 그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못 지키는 겁니다.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안 됩니다.

뻔히 알면서도 못하고 있어요.

 

이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그 짓을 하고 있어요.

마치 불나방처럼 자기가 죽는 줄 알면서도 불만 보면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머리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하지만 육신은 그와 반(反)하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이게 죄인의 한계에요.

 

그래서 우린 말씀 앞에 서면 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단으로부터 수많은 참소를 당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면 잠시라도 살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에요.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라고 할 수 밖에 없어요.

 

우린 하나님 말씀을 달달 외우면서도 그와 반(反)하는 모습으로 십자가를 이용해서 정과 욕심을 더 채우고자 하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이 주신다는 쉼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겁니다.

교회에 가면 세상 욕심을 다 묻고 와야 하는데 도리어 없던 세상 짐을 더 지고 와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은 삼십 세겔을 받았지요.

그런데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 돈을 제사장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이 그 돈은 죄인의 돈이므로 성전고에 두지 못한다고 하면서 “아겔다마” 라는 “피 밭” 을 하나 샀어요.

그리곤 거기다가 “나그네들의 묘지”를 삼습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이야기에요.

예수님은 자기 몸값으로 나그네들의 무덤을 마련해 놓고 가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구약의 믿음에 조상인 아브라함이 자기 후손들이 묻힐 막벨라 굴이라는 무덤 하나를 사 놓고 간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이 땅에 나그네들의 무덤인 교회 하나 세워 놓고 가셨어요.

 

예수의 핏값으로 세워진 교회가 뭐냐 하면 나그네들의 묘지에요.

나그네가 누군가요?

우리 성도들이에요.

 

그럼 성도는 교회에 와서 세상의 정과 욕심이라는 무거운 짐들을 다 묻어야 해요.

옛 사람을 장사하여야 해요.

 

무덤은 쉬는 곳입니다.

교회는 세상 근심걱정 다 내려놓고 쉬는 곳이어야 해요.

교회 문밖을 나갈 땐 나그네로 나가야 해요.

 

그런데 이 시대 교회들은 교인들에게 짐을 한 보따리씩 짊어지고 나가게 해요.

세상에 정과 욕심을 부추겨요.

세상에서 부자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합니다.

성공하고 출세하여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세상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개 발에 땀나듯이 뛰고 또 뛰는 겁니다.

한 주간 세상에서 뛴다고 파김치가 되어서 교회에 왔는데 또 다른 짐을 지워주고 있어요.

그러니 마음이 쉼을 얻지 못하고 성공하여야 한다는 탐심으로 인하여 지옥인 겁니다.

 

어제 기독교 TV를 보니 서울에 있는 명0교회 새벽집회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목사가 자랑스럽게 새벽 집회에 5만 8천명이 출석 했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입추의 여지없이 교회당을 가득 메웠어요.

목사 왈!

열심히 해서 복 받으라고 합니다.

 

이들이 왜? 그 새벽에 나왔을까요?

예수를 사랑해서일까요?

아니면 복 받기 위해서일까요?

그 목사의 설교에 해답이 나와 있어요.

결국 세상에서 성공하는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정과 욕심을 죽이라고 하는데 그 목사는 세상 탐욕을 부추기고 있어요.

그것도 눈 뜨자 말자 말이에요.

그러니 그 새벽에 수만 명이 나오는 겁니다.

 

마음에 쉼을 얻고자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돌아갈 땐 마음은 나도 세상에서 성공할 꺼야! 라는 탐심은 안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 목사는 그것을 자랑하고 있고 교인들은 그 말에 아멘하고 있어요.

가히 부창부수(夫唱婦隨)이고,

유유상종(類類相從)이 아닐 수가 없어요.

 

성경은 인간을 비유하기를 다고! 다고 하는 “거머리” 라고 했습니다.

이는 만족하지 못하는 탐욕 덩어리란 말입니다.

그래서 거머리라고 하는 겁니다.

 

거머리란? 남에게 달라붙어서 피를 빨아 먹고 사는 놈입니다.

그런데 이 놈은 자기 배가 터져 죽어가면서도 남의 피를 빨아 먹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남에게 떨어지지 않고 남을 귀찮게 하는 사람을 거머리 같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에게서 남을 돕는 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자일수록 더 무서워요.

부자는 모으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모으고 또 모으는 겁니다.

 

흔히 그러잖아요.

9000원 가진 놈이 1000원 가진 놈의 1000원을 빼앗아서 만원을 채운다고 하잖아요.

더 가진 놈이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고 없는 놈 것 빼앗아서 자기 아구를 채워요.

대(大) 기업이 중소(中小)기업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고 빼앗아가요.

 

그러니 이 세상에 빈부(貧富)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모두가 먹고 살만큼 공평하게 주었어요.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 빈부(貧富)를 만들어버렸어요.

 

과거 저희 교회 건물 주인과 그 아들 며느리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탐욕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것 같아서 비유를 듭니다.

주인 영감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요.

 

아주 부농(富農)이에요.

그 아들은 고등학교 교사에요.

장남이라서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아서 아파트도 몇 채가 되고 건물도 가지고 있는 부자에요.

며느리가 스스로 부자라고 자랑을 해요.

 

저희 교회가 세(貰) 들어 있는 건물의 명의가 어르신 앞으로 되어 있어 임대 계약을 그 어른과 맺고 월세(月貰)도 그 분 통장으로 입금을 했어요.

그런데 그 어르신이 연세가 높아서 교회 건물을 그 아들의 아들인 손자에게 상속을 했어요.

아마도 명절 때 노인네가 손자가 귀엽다고 교회 건물을 주겠다고 이야기 한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죽을 때까지 용돈이 필요하니 교회에서 나오는 임대료는 당신께서 사용하시겠다고 어르신의 통장에 그대로 입금을 해 달라고 했대요.

아들과 며느리에게도 그렇게 말을 했다는 겁니다.

 

어느 날 며느리가 찾아 온 겁니다.

시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이 건물을 주었기 때문에 권리 행사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저에게 시아버지 통장으로 가는 월세를 자기에게 넣어 달라고 합니다.

어차피 자기 아들 것이니 이젠 월세도 자기가 챙기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르신에게 전화를 드려보고 어르신이 그러라고 하면 그러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며느리가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시아버지가 알면 안 되니 그냥 모르게 하라는 겁니다.

제가 그래도 어른에겐 알려야 한다고 했어요.

 

교회 건물이 2층짜리 건물인데 1층의 세(貰)는 벌써 자기가 챙기고 있는 겁니다.

아마 1층에 계신 분은 순순히 응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전 어르신에게 물어 보고 한다고 하니 짜증을 내는 겁니다.

 

며느리가 가고 나서 제가 어른에게 전화를 했더니 1층 집세도 자기 몰래 며느리가 받아 챙긴다고 역정을 내시더라고요.

그래 그 년이 교회 세(貰)도 자기에게 달라고 하더냐! 라고 격노하시면서 며느리 욕을 바가지 바가지로 하시더라고요.

 

그 여시 같은 년이 그래 요리조리 다 빼가고 그것까지 빼갈려고 한다면서 한숨을 쉬세요.

속이 엄청 상하셨던 모양에요.

그러면서 목사님은 그 년에게 주지 말고 자기에게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겁니다.

저는 그럼 그러겠다고 했지요.

 

그러자 얼마 지나서 며느리가 또 온 겁니다.

그래서 제가 시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고 했어요.

시아버지는 절대로 며느리에게 주지 말라고 하더라고 말했어요.

제가 은근히 며느리가 하는 짓이 밉고 부아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르신 말씀을 빌려서 교회 세(貰)는 장날에 한 번씩 읍내 나오시면 친구 분들과 다방에서 커피 마시는 값이라고 하더라고 했어요.

 

그러자 며느리가 영감쟁이가 다 늙어서 커피는 무슨 커피를 마시느냐면서 영감탱이가 돈 쓸데가 어디에 있다고 집세를 챙기느냐고 욕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자기는 요즘 골프장에 다니느라 돈이 쪼들린대요.

돈 쓸데가 많다는 겁니다.

 

아니 자기는 골프 치러 다녀야 하므로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노인네에게는 돈 쓸데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그 꼴난 집세를 빼앗아 가느냔 말입니까?

집세라야 30만원인데!

 

끝내 제가 응하지 않으니 건물을 비워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전 아직까지 계약 기간이 남아 있으니 그렇게 못 하겠다고 했지요.

몇 개월 지나서 와서 하는 말이 건물을 허물고 고층으로 새로 지어서 임대를 놓겠다고 비워달라고 하는 겁니다.

 

어른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전화를 했더니 목사님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면서 며느리 뜻대로 하게 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차피 건물이 낡아서 교회를 옮기려고 하였는데 잘 되었다 싶어서 이사를 했어요.

 

나중에 고등학교 교사인 아들이 왔길래 제가 그랬지요.

당신은 자식이니 아버지의 마음을 좀 헤아리라는 의미에서 어르신 말씀을 드렸어요.

어른에게 전화를 드렸더니 며느리를 그렇게 말을 하더라고 하니 자기도 죽겠다고 합니다.

자기 마누라를 못 이기겠대요.

아마도 남자가 여자에게 잡혀서 쥐락펴락 당하는 모양이에요.

 

이게 인간이에요.

하나를 주면 둘을 달라고 하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 많은 재산을 물려주었는데도 고마워하지 않고 노인네 용돈까지 강탈해서 자기 즐기는데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에요.

 

한마디로 남의 입에 떡도 빼내 먹는 것이 인간입니다.

물에 빠진 놈 건져 주면 보따리 내어 놓으라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래서 옛말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고 한 모양입니다.

이는 곧 인간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라는 말입니다.

 

어디 비단 그 며느리만 그러겠어요.

우리 모두가 그런 자들이에요.

우리도 돈 앞에 서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 거기서 거기에요.

탐욕을 부리긴 매 일반이에요.

 

만원을 탐내든 십억을 탐내든 하나님 앞에선 다 탐심을 가진 도적놈이에요.

어린아이 똥이나 어른 똥이나 냄새나긴 마찬가지인 것처럼 탐심은 크고 작음에 차별이 없어요.

그러니 인간은 누가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전혀 역설적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손님 대접을 잘하고!

형제를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있는 바를 족한 줄 알고 돈을 사랑하지 말며!

음행하지 말고 깨끗하게 살라고 합니다.

 

이 모두가 우리 본성과 반(反)하는 것을 명령하고 있어요.

이건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을 지키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탐심이 가득한 죄인이 어떻게 돈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바를 족한 줄 알고 살아요.

이건 불가능해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단순히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라는 삶에 이야기가 아니에요.

 

성도는 박애주의(博愛主義)자가 아니에요.

휴머니스트가 아니에요.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근검절약하고 반듯하게 살아가는 자가 아니에요

 

오늘 본문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당시엔 형제를 사랑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이란? 복음 증거자들을 영접하는 일이에요.

마태복음 25장에서 말하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처럼 지극히 작은 형제에게 한 것이라는 말은 그 당시 복음 증거하는 형제들을 말해요.

 

그러니 가난한 이웃을 도우라는 소리로 들으면 안 되어요.

노숙자들에게 밥 퍼주는 사랑을 하라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 구원 이야기에요.

 

그래서 본문에서도 나그네 대접을 구약에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소돔 고모라의 롯의 이야기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에선 롯을 지목해서 말하고 있진 않아요.

하지만 부지중에 천사를 영접한 사람이 롯이라서 말하는 겁니다.

 

롯이 부지중에 천사를 영접해서 구원을 받았잖아요.

그럼 손님 대접을 하라는 말은 아무나 대접하라는 말이 아님을 알 수가 있어요.

즉 구원의 문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그냥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인간들 사랑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니 손님을 대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모두가 복음 안으로 밀어 넣는 말씀들이에요.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말씀들이에요.

우리 한계를 깨닫게 하고 왜?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복음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본성과 반(反)하는 것들로 명령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의 한계를 알기 위해서 명령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명령이 얼마나 우리의 본성과 반(反)하는 것인지 깨달아야 해요.

그리하여 왜? 모든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우리 인간은 어떻게 받고!

어떤 결과를 낳고!

무엇을 바라보게 하는지 살펴봅시다.

어떻게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하는지 추적해 봅시다.

 

먼저 우리 가능성으로부터 출발을 해서 불가능성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헷갈리지 말고 무엇을 도출하기 위하여 말씀을 전개해 가는지 끝까지 놓치지 말고 따라 오세요.

먼저 인간들이 착각하는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흔히 성화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가능하다고 한 그 가능성을 어떤 식으로 불가능한가로 드러나게 하시는 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럼 새겨들으면서 따라 오세요.

 

사도바울이 그러지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사 죽기까지 복종을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는 말입니다.

“품는다” 는 말은 닭이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서 품은 것과 같은 말이에요.

“품으라” 는 말은 생각이란 말과 같아요.

이는 이미 그 안에 그 마음에 심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들 속에는 예수님의 마음이 새겨져 있어요.

 

이건 마치 여자의 자궁 속에 아이가 잉태 한 것과 같아요.

 

아이가 여자의 자궁 속에 착상하면 여자의 몸은 이 아이에게 맞추어져가요.

아이가 먹고 싶은 것을 찾게 되는데 이를 “입덧” 이라고 합니다.

아이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여자는 아이에게 잠식당해가요.

모든 에너지를 아이에게 쏟아요.

몸이 자연적으로 그렇게 반응을 해요.

 

아이가 편한 옷을 입고!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먹고!

아이가 좋아하는 행동을 하게 되어요.

이걸 “해산의 수고” 라고 합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여자들은 “해산의 수고” 로 구원을 얻는다고!

이건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고 구원해 준다는 말이 아니에요.

 

성도의 구원이란? 여자가 아이를 잉태하고 해산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를 품게 되면 반드시 여자가 해산하는 것과 같은 수고가 따르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삶과 행동이 자기 안에 있는 아이에게 맞추어져 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여자는 독자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가 없어요.

반드시 남편이 씨를 심어 주어야 해요.

예수님이 남편이 되어서 자기 백성들에게 씨를 심어 주셨어요.

 

예수님으로부터 씨를 받은 성도는 반드시 몸에 변화가 일어나요.

마음과 행실이 변해요.

마치 여자가 임신하면 몸이 변하듯이 성도에게 예수의 생명이 들어오면 변하게 되어 있어요.

 

이를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고 하는 겁니다.

이 예수의 마음이 품어지면 해산의 수고가 따라와요.

이 해산의 수고를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자신을 비우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한다고 했어요.

바울은 지금 자기 안에 예수님이 품어졌기 때문에 자기 몸을 쳐서 복종을 시킨다고 합니다.

즉 육신의 소욕과 전쟁을 하는 겁니다.

 

예수가 그 안에 심겨진 사람은 예수가 조정을 해요.

그래서 안하던 짓을 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부분적이고 일시적이지만 본성과 다른 행동을 해요.

안하던 짓이 뭔가 하면 육신의 소욕과 다른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해요.

 

성령의 열매는 예수님의 성품이에요.

그러니 성도에겐 예수님의 성품이 나오는 겁니다.

가치관이 바뀌고 삶에 지향이 달라져요.

 

이런 것이 없으면 그 속에 예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있으면 단발 적이긴 하지만 반드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온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향성(指向性)을 말하는 겁니다.

육신의 본성과 다른 본성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본성과 자꾸만 트러블이 생기는 겁니다.

 

이는 곧 우리 안에 두 법이 있다는 증거에요.

하나님이 옛 사람 속에 새 사람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본성과 반하는 말씀들을 주어서 두 법이 충돌하게 하세요.

두 법이 충돌을 하여야 죄가 드러나요.

죄를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두 법을 우리 안에 심어 놓은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육신의 소욕과 반(反)하는 일들을 일으켜요.

네 안에 예수가 있다고 알려 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것을 토해내라고 해요.

 

주께서 이런 것들을 행하게 하세요.

예수가 네 안에서 행하게 한 것이 있지 않느냐!

그걸 내어 놓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간섭하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것들이 나타나요.

 

이걸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이라고 해요.

다른 말로 은혜라고도 합니다.

성도는 이러한 것을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물론 늘 그렇지는 않아요.

또 다시 말합니다.

완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오늘 본문을 행함 차원으로 이해하면 안 되어요.

우리 행함이 아니고 주의 행함이에요.

이걸 야고보서에선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을 한다고 했어요.

즉 믿음이 행함을 토해내게 한다는 말입니다.

 

신약의 서신서들이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는 것도 주께서 그렇게 간섭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의 본성과 다른 것들이 툭툭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예수 믿으면 평소에 안하던 짓들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저 사람이 예수 믿더니 사람이 변했다고들 합니다.

물론 그 안에 예수가 있는 사람은 그 일이 자기가 한 일이 아니란 것을 잘 알아요.

자기가 변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알아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옛날 행사머리를 그대로 하는 사람은 그건 가짜에요.

그 속에 예수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인 겁니다.

예수님이 그대로 살지 않게 간섭을 하세요.

예수님이 그 속에 있으면 육신의 소욕이 죄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피하고자 해요.

옛날엔 육신이 끄는 대로 끌려갔는데 이젠 제어하는 것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으면 옛날에 그 좋던 것들이 싫어져요.

세상에서 즐기면서 살던 것들이 그냥 싫어져요.

그래서 안 하는 겁니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예전과는 달라요.

예전처럼 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변한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실제는 변한 것이 아니고 그냥 싫어서 안하는 것뿐이에요.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러지요.

누가 법대로 송사를 하니까!

야! 그걸 은혜로 풀어야지 어떻게 법으로 세상 법정에 까지 끌고 가느냐!

그거 그냥 손해보고 말지!

 

그리고 누가 욕하면 욕 좀 먹어라!

뭐 어떠냐! 에요.

이걸 관용이라고 해요.

 

바울은 너희들은 이미 천국에 들어온 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뭘 세상 것에 그리 연연하느냐!

좀 관대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까짓것 손해보고 말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 것을 초월하게 한단 말입니다.

이건 그 속에 하늘에 것이 커 보이면 세상 것은 세피하게 보여져요.

 

은혜 받아 보세요.

그럼 관대해져요.

교회에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도가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요.

 

다윗의 고백을 들어 봅시다.

역대기 상 29장입니다.

 

대상 29:13-19=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16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17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18 우리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주의 백성의 심중에 영원히 두어 생각하게 하시고 그 마음을 예비하여 주께로 돌아오게 하옵시며 19 또 내 아들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사 주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시고 내가 위하여 예비한 것으로 전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했어요.

그래서 백성들에게 성전에 필요한 물품들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분에 넘치도록 흔쾌히 응하는 겁니다.

 

다윗은 이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찬양을 했어요.

우리가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힘과 마음이 생겼느냐 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드릴 힘과 마음이 생긴 겁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신 힘이고,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예물을 드리는 백성들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고 오는 세대 속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으로 생겨날 주의 백성들 마음 속에 이런 힘과 마음을 영원히 두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곧 예수님의 기도이기도 해요.

 

그러므로 성도의 마음 속에서도 헌신이 나오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행하게 하는 힘을 주시고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형제도 사랑하고,

손님도 대접하고,

약한 사람도 돌보고,

정욕대로 살지 않고,

있는 바를 족한 줄 알고 만족하게 되어요.

물론 잠시잠깐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혜를 받으라고 하는 겁니다.

알다시피 은혜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은혜를 받으라고 합니다.

받으라는 말은 꼭 우리더러 은혜를 따 내라는 말로 들리지요.

 

이는 우리더러 은혜를 따 내라는 말이 아니고 사모(思慕)하라는 말이에요.

사모(思慕)한다는 말은 사랑을 맛본 사람이 그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을 말해요.

마치 아가(雅歌)서에 보면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은 그 맛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가 있어요.

이미 맛 본 사람은 그 맛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맛을 아는 사람은 그 은혜를 사모하게 되어 있어요.

구하게 되어 있어요.

기도하게 된단 말입니다.

기도는 간절함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요.

 

바울이 그 극심한 환란 속에서도 사랑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은혜가 우리 마음을 주장하여야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각양의 모습들이 나와요.

 

그러니 은혜를 맛 본 사람은 그 은혜를 위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부드러워져요.

말씀이 비처럼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땅으로 말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라고 말해요.

 

신명기 32장입니다.

 

신 32:1-2=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찌어다 2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땅은 내 입의 말씀을 들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리는 비라고 합니다.

마치 사랑은 비를 타고 온다고 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말씀을 타고 오는 겁니다.

 

말씀에 풍성함을 얻으면 마음이 부요해지고 쉼을 얻고 관대함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듣는 성도가 은혜를 많이 토하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깨달음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어요.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에요.

 

우린 이미 다 받았음에도 모르고 살고 있어요.

모르니 신앙이 가난한 겁니다.

마음에 쉼을 누리지 못하고 쫓기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게 해 주세요.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에요.

복이 있다는 말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하나님께 영생의 복을 받은 사람은 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거나 기도하다가 보면 깨달아져요.

야! 내가 엄청난 것을 받았구나!

이런 놀라운 일이 있나!

 

이럴 땐 감사가 되어요.

그래서 주의 은혜를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곁에 있는 사람이 유익을 얻어요.

 

실제로 여러분들이 사는게 바쁘다는 핑계로 말씀 듣는 일을 게을리 하고 멀리 해 보세요.

금새 심령이 강퍅해 집니다.

세상살이에 바쁘고 집안에 문제가 터져서 살다가 보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있어요.

그럼 불평이 나오고 삶이 짜증이 나는 겁니다.

 

원래 본성이 터져 나와요.

옛 사람의 본성은 없어지지 않아요.

이 놈이 언제 또 툭하고 튀어 나올지 몰라요.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요.

주의 은혜가 나를 주장하면 그 순간은 천사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원래 악마로 돌아가요.

우리 몸은 천사와 악마로 수시로 변해요.

 

성도는 이 사실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변했다고 하지 않아요.

자신이 변하지 않은 것을 알기 때문에 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는 겁니다.

주께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이를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용서 받음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그 사람의 행함으로 판단을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게 무지하게 어려워요.

인간의 행함과 하나님의 행함을 분별하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겁니다.

 

성도의 몸은 누가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그림이 달라져요.

 

원래 우리 몸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어요.

이건 마치 가나안에 장대한 거인 족이 자리 잡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그 땅에 하나님 백성이 들어갑니다.

 

가나안 땅 이야기는 성도 이야기에요.

 

가나안 땅이 바로 성도의 마음이에요.

우리 마음엔 가나안 7 족속이 거인처럼 살고 있어요.

옛 사람은 거인 족이에요.

여기에 하나님이 새 사람을 심어 놓았어요.

 

옛 사람과 새 사람을 언약이라고 봅시다.

옛 언약이 거인처럼 지배하는 곳에 새 언약을 심어 놓은 겁니다.

이 둘은 서로 우리 몸을 놓고 싸워요.

성도의 몸은 전쟁터에요.

 

이걸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싸움이라고 했어요.

히브리서에선 이 싸움을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싸움이라고 했구요.

육신의 소욕이 이기면 우리 몸은 자기를 위하여 살고, 성령의 소욕이 이기면 하나님 은혜를 토하여내면서 살게 되어요.

 

예수님이 옛 사람이라는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는 성도 안에 들어오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주둔하고 계시다는 것을 표현을 해 냅니다.

과거 “파리의 연인” 이라는 드라마에서 이동건이가 김정은이에게 “이 속에 너 있다” 라고 한 것과 같아요.

 

지금 예수님이 그러는 겁니다.

야! 정낙원이 “네 속에 나 있다”

그러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성도가 육신의 소욕대로 살면 마음이 불편한 겁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말했듯이 그래 소송에서 이겨서 마음이 편하냐고 묻는 것과 같아요.

그래 형제를 세상 법정에 가두고 나니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느냐고 힐난하는 겁니다.

어이구~ 이 가련한 사람아!

네 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느냐!

그러니 차라리 손해보고 말지!

이 사람아!

 

갈라디아서에서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살펴보세요.

육신의 소욕은 전부 자기를 위한 것이에요.

그러나 성령의 소욕은 전부 남을 위한 겁니다.

결국 성령의 열매는 남에 유익을 위하여 참아주고 손해보고 덮어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게 십자가 정신의 삶이에요.

그게 곧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삶이에요.

이런 마음이 우리 속에 있어요.

 

에베소서 4-5장을 봅시다.

 

엡 4:32-5: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해 보라는 겁니다.

성령이 너 용서 받았잖아!

너 용서 받은 거 있잖아!

그거 보여 보라고 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용서 속에는 받은 것을 도로 토해내는 용서도 들어가 있어요.

하나님의 용서가 살아서 우리 안을 헤집고 다녀요.

그러면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하세요.

육신의 소욕과 전혀 다른 성령의 소욕들을 보여주라고 해요.

 

원래 나에게 없던 것들인데 간헐적으로 툭툭 터져 나와요.

즉 용서받았으니 남을 용서하고 관대하게 사랑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더러 용서를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고 용서받은 사람이니 받은 용서를 보이라는 겁니다.

 

성도의 삶이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표현해 내는 삶이에요.

사람의 행동은 그 내면에 있는 것을 그려내는 그림이에요.

은혜를 담고 있으면 은혜가 나오고, 법을 담고 있으면 법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를 두고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했어요.

열매란? 나타난 그림입니다.

은혜를 그려내는 것을 보니 어~ 저 놈 속에 은혜가 있네!

법을 그려내면~ 아! 저 놈은 은혜 받지 못했구나!

 

또 다시 말합니다.

이건 온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넌 지금 예수님의 다스림 속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사람은 마음에 쌓인 악(惡)으로 악을 내고, 쌓인 선(善)에서 선을 내요.

이걸 향기라고도 하고 빛이라고도 해요.

향기나 빛은 가둘 수가 없어요.

그냥 흘러 나와요.

 

빛을 말 속에 감추지 말고 등경 위에 두라는 말은 받은 구원의 은혜를 드러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나게 하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품고 사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은혜를 풍겨내게 되는 것입니다.

 

향기는 선한 자나 악한 자에게나 동일하게 풍겨요.

향기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은혜 받은 사람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은혜를 풍겨내요.

 

시편 18편을 봅시다.

 

시 18:24-2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25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6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27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28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보세요.

여호와께서 내 의(義)를 따라 갚으신다고 하지요.

자비한 자에게는 자비하심을 나타내고 사특한 자에겐 거스리심을 보인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시고 내 흑암을 밝히신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여호와께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게 하신다는 말씀이에요.

주께서 그 안에서 여호와로부터 자비함을 받은 자에겐 자비를 토해내게 하시고 자비함을 받지 못한 자에겐 사특함을 드러내게 하신다는 말이에요.

사특함이란? 주의 일에 거스르심이에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말했지요.

사람에게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지요.

사람에게 거치는 자란 사람을 시험 들게 한다는 말입니다.

염소 마냥 들이 받아요.

 

왜? 거치는 자가 됩니까?

그 속에 주님의 자비하심이 없기 때문이에요.

결국 주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랑을 토해내지 못하는 겁니다.

 

지난번에 전 TV를 보다가 깜짝 놀랐어요.

어떤 소가 새끼를 낳았어요.

그런데 그 송아지가 죽고 만 겁니다.

 

그 이유가 쇼킹해요.

 

송아지를 낳은 소가 자기가 어미 소로부터 출생을 할 때 자기 어미가 자기를 낳다가 심한 산고로 인하여 죽었어요.

그래서 자기만 살고 어미는 죽은 겁니다.

 

그런데 송아지는 태어나면 어미 소가 혀로 새끼의 온 몸을 맛사지를 해 주어야 한 대요.

즉 엄마의 사랑을 쏟아 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미 소가 죽었으니 그 새끼는 어미로부터 혀로 맛사지를 받지 못하고 자란 겁니다.

사람들이 대신 어미의 혀처럼 새끼를 맛사지 해서 키운 겁니다.

 

그런데 이 소가 장성해서 이제 새끼를 낳게 된 겁니다.

자신이 어미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낳은 새끼에게 혀로 맛사지를 해 주어야 하는데 하지를 않은 겁니다.

그래서 새끼가 죽었어요.

 

왜? 어미가 자기 새끼에게 혀로 맛사지를 해 주지 않은 줄 아세요.

이는 자신이 어미로부터 혀로 맛사지를 받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한마디로 어미로부터 받은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새끼를 낳았음에도 사랑해 주지 않은 겁니다.

 

소 이야기를 가지고 에베소서를 봅시다.

 

엡 4:32-5: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하지요.

왜? 그러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였기 때문에 하라는 겁니다.

이건 우리 행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을 요구하는 겁니다.

 

너 내게 사랑 받았잖아!

내게 사랑 받았으니 그 사랑을 내어 놓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어요.

옷처럼 입고 있다구요.

 

요한계시록 19장에 어린양의 신부에게 흰 옷을 입혀주었어요.

 

계 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 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자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혀줍니다.

그런데 그 옷을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자 보세요.

흰 옷을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행실을 하나님이 입혀 주셨어요.

신부가 만든 행실(옷)이 아니고 하나님이 입혀준 행실(옷)이에요.

그래서 이 옷을 입은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식으로 말하면 너 용서 받았잖아!

너 사랑 받았잖아!

너 은혜 받았잖아!

그러니 그 행실(옷)을 보이라는 겁니다.

니꺼 말고 하나님 것을 달래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 가운데 행하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행하는 행함은 주께 받은 사랑이 토하여 내는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행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이 함께 일을 하는 행함이라고 해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했는가 하면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고 합니다.

너희도 사랑 가운데 행하라고 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너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 성도가 행하는 사랑의 근거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두고 있어요.

그러므로 성도가 행하는 사랑 속엔 자기 부인과 희생이 담겨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에요.

 

이건 예수님이 우리에게 준 것을 회수해 가신다는 말이에요.

내가 너희를 사랑했잖아!

그걸 예수님의 형제에게 내어 놓으라는 겁니다.

이건 강세형이에요.

 

왜? 받아먹고 안 내어 놓느냐!

야~ 이 도적놈아!

왜? 내 사랑은 홀라당 받아먹곤 입을 싹 닦느냐! 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널 위해 내 몸을 제물로 드린 것은 너도 제물 만들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세요.

 

요한복음 20장입니다.

 

요 20:19-23=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부활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명을 줍니다.

어떤 사명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사명을 그대로에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합니다.

 

이는 아버지가 자기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키 위하여 예수님을 이 세상에 향기로운 제물로 보내신 것과 같이 보낸다는 겁니다.

이는 한마디로 예수님처럼 죽으러 보낸다는 말이에요.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을 대신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어요.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해지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게 된다고 합니다.

얼핏 들으면 제자들이 속죄권이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게 아니에요.

 

성령께서 증거하는 죄사함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주어지는 죄사함이에요.

그러니 성령이 제자들을 예수의 증인으로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한 겁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예수의 증거를 받을 수 없어요.

도리어 죽여요.

그럼 예수를 증거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가 자신을 보낸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낸다고 하는 겁니다.

결국 예수를 증거하다가 죽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빚진 자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다 도망을 쳤어요.

배신자들이에요.

 

그런 배신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그리곤 용서하셨어요.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에 빚을 졌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빚을 예수님의 형제들에게 갚으라고 합니다.

우리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성령을 주어서 보내는 겁니다.

내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세상에 와서 너희들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였듯이 나도 너희를 성령으로 세상에 보낸다고 합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진 사랑의 빚을 예수님의 형제들에게 갚아야 해요.

어떻게 갚느냐 하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져 주는 형식으로 갚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강한 자란? 사랑을 많이 받은 자란 말입니다.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을 간 놈들을 용서 해 주었으니 이것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잔멸하던 사울을 찾아가 용서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준 것만큼 더 큰 은혜와 용서가 어디에 있겠어요?

 

바울은 엄청난 은혜를 받은 겁니다.

그래서 자신은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준 용서를 하나 하나 다 회수해 가는 겁니다.

 

어떻게 회수합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용서 해 준 것처럼 용서를 토해내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형제에게 한 것을 예수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우리 인간이 또 만만치 않아요.

이제부터 반전(反轉)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야 한다는 가능성을 어떻게 불가능성으로 나타나는지를 추적합니다.

즉 하나님 명령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을 탐사해 보자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입니다.

 

아까 말했지요.

우리는 태생이 마귀아래서 태어난 도적놈이에요.

우리 육신 안엔 가나안 7족속이 있어요.

아주 강한 옛 사람이라는 거인 족이에요.

하나님께 진 빚을 갚으려고 하면 옛 사람이라는 놈이 가만있지 않아요.

 

그래서 괴로운 겁니다.

사도바울도 이 놈 때문에 탄식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인간의 육신이 연약하여서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대신 하셨다고 합니다.

이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새 언약을 심어 주셨어요.

 

새 언약이란? 예수님이 책임져주는 겁니다.

책임을 져 주신다는 말은 온전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가 구원을 받고 온전해 진다고 하면 예수님이 책임져 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구원을 받아도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책임을 져 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구원을 하셨어요.

죄인인줄 알고 구원 했다는 말입니다.

죄인인줄 알았다는 말은 이미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는 인간임을 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책임져 주는 새 언약을 성도들 속에 심어 준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않고 돕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히 13:5-6=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인간을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고, 도우십니까?

이건 예수님과 맺은 새 언약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용서해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죄인이에요.

죄를 이기지 못해요.

속 사람이 옛 사람을 이기지 못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용서가 필요한 겁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공의에 하나님이세요.

그 누구라도 법을 어기면 징벌을 받아야 해요.

마귀는 법으로 인간들을 참소해요.

우리도 마귀의 참소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스가랴서에 보면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불려 나오지요.

그리곤 그 곁에 마귀가 서서 여호수아를 참소하잖아요.

이때 하나님이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줍니다.

여호수아의 죄과를 다 용서해 주잖아요.

 

구원이 뭡니까?

용서잖아요.

누구에게 용서가 필요합니까?

잘못한 사람에게 필요하지요.

용서는 죄인에게 필요해요.

 

자신이 잘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자라야 용서를 알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가지고 자꾸만 자기 백성들의 죄를 고발을 하는 겁니다.

고발하는 이유는 용서를 알게 하기 위함이에요.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 모든 말씀은 용서 받음을 알게 하는 거울과 같은 겁니다.

내 꼬라지가 이렇구나! 를 알게 만들어요.

이런 인간이 용서받고 있구나! 를 알게 하여요.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해 주셨어요.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무조건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겐 조건을 따지지 않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왜! 조건을 따지지 않는가요?

그것은 죄인들에게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하심에는 죄인에겐 무조건 용서 이외의 다른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용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자기백성들 대신 피 흘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세운 약속을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이란 말이에요.

누가 지킬 약속인가 하면 예수님이 지킬 약속이에요.

그러니 성도의 구원은 예수님이 이루어 내는 겁니다.

우린 거기에 일체 도움을 준 것이 없어요.

그냥 구경만 하면 되어요.

 

여러분 믿음이 뭔 줄 아세요.

하나님이 하신 일을 구경하는 겁니다.

이게 이해가 되어야 신앙생활이 가벼워져요.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는 것은 구원의 모형이에요.

성경은 애굽을 죄악된 세상을 말해요.

바로는 마귀의 상징이에요.

 

그러므로 출애굽 한다는 것은 마귀의 권세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을 말해요.

이스라엘이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빼내오게 하셨어요.

이건 예수님이 성도를 구원하는 것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홍해 바다를 건너지요.

바울은 홍해바다를 건넌 것을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어땠습니까?

 

백성들이 뒤 쫓아 오는 바로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모세를 원망했잖아요.

애굽에 묘지가 없어서 이리로 불러내서 몽땅 죽이려고 하느냐 라면서 모세에게 돌을 던지고 데모를 했어요.

이는 하나님께 한 행동이에요.

 

이 때 모세가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가만히 구경만 하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홍해바다를 갈라서 건너게 했어요.

하나님이 멀쩡한 바다를 둘로 갈라서 길을 내 주었어요.

바다를 가르고 보니 그 속에 길이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가른 길을 따라서 죽음에 바다를 건넌 겁니다.

 

바다가 둘로 갈라졌다는 것은 찢어졌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바다를 확 찢게 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안전하게 건너게 하신 겁니다.

누가 바다를 찢었습니까?

모세에요.

모세는 예수님의 표상이에요.

그럼 예수님이 바다를 찢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약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모세에게 속하여 건넜다고 하는 겁니다.

모세에게 속하였다는 말은 모세가 안고 건넜다는 말이에요.

이스라엘은 모세 품에 안겨서 건넌 겁니다.

 

이 홍해 사건을 신약에선 세례라고 해요.

세례란 예수님과의 연합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 품에 안긴다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우리도 함께 세례를 받은 것이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나자 하늘이 열리지요.

성경에 보면 하늘이 열린다는 말이 종종 나와요.

이는 하늘이 찢어 졌다는 말입니다.

 

하늘이 찢어진 것은 마치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둘로 찢어지듯이 찢어진 겁니다.

 

히브리서에선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해요.

왜? 예수님의 죽음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으로 말씀하는지 아세요.

성소의 휘장이란?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은 담이에요.

성소는 인간들 세상이라고 한다면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말해요.

 

성막에서 하나님은 어디서 만나는가 하면 지성소에서만 만났어요.

하나님이 지성소에만 계세요.

그러므로 성막에서의 지성소는 천국을 상징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과 이 세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휘장이에요.

이 휘장은 죄로 가려진 담이에요.

이 담을 누군가가 허물어 주어야 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담을 허물었어요.

자기 몸으로 말이에요.

자신의 죽음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신 겁니다.

우린 예수님이 열어 놓은 새롭고 산 길을 따라 천국에 가는 겁니다.

왜? 새롭고 산 길이라고 합니까?

새로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을 갈라내지요.

이 때 궁창을 중간에 두고 윗물과 아랫물을 분리시킵니다.

그러니 윗물과 아랫물은 궁창이라는 담을 두고 있는 겁니다.

궁창 아래는 세상이고 궁창 위는 천국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자 하늘이 열리지요.

세례란 죽음을 말해요.

이 죽음은 십자가에서 일어났어요.

그러니 세례는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상징이고 있는 겁니다.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린 것이나 십자가에 죽어서 새롭고 산 길을 만든 것이나 동일해요.

 

여기서 하늘이란? 2층천을 말해요.

즉 궁창이란 말입니다.

성경은 궁창 너머 하늘은 삼층천으로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눈으로 보는 하늘을 “첫째 하늘” 이에요.

흔히 대기권을 말해요.

그리고 대기권 밖을 “둘째 하늘” 이라고 합니다.

흔히 우주(宇宙)라고 해요.

 

그리고 바울이 갔던 “셋째 하늘” 우주 밖을 말해요.

바울이 말한 삼층천 이에요.

그래서 “삼층천”을 천국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첫째 하늘과 셋째 하늘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 궁창이라는 둘째 하늘이에요.

둘째 하늘이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자 열린 겁니다.

확 찢어진 겁니다.

세례는 곧 죽음이라고 했으니 예수님께서 자기 몸으로 하늘 문(門)을 여신 겁니다.

 

이걸 십자가로 막힌 담을 허셨다고 해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성소와 지성소가 하나가 된 겁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후 꼭꼭 잠겨 있던 에덴의 문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활짝 열린 겁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의 홍해 사건으로 이해해 봅시다.

홍해를 가로 두고 애굽과 광야가 있어요.

애굽은 세상이고 광야는 천국을 상징해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난 곳이 어디입니까?

호렙산이지요.

호렙산 가시떨기 나무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서 모세에게 지시를 합니다.

네가 저 애굽에 가서 내 백성을 끄집어내서 이 산에서 나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라고 합니다.

 

호렙산은 알다시피 시내산을 말해요.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서 시내산에 당도하여 거기서 율법을 받잖아요.

그러니 시내산은 곧 천국의 모형인 겁니다.

 

물론 가나안도 천국의 모형이에요.

여기서 가나안은 광야에서 태어난 자식들에게 천국의 모형이에요.

그러니 광야는 출애굽 한 2세들에겐 애굽과 같은 곳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열 번이나 시험을 했다고 하는 겁니다.

누가 열 번을 시험했나요?

애굽에 바로 왕이지요.

그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열 번을 시험했다는 것은 곧 애굽의 바로와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출애굽 1 세대는 다 광야에서 죽고 2 세대가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이제 지도자도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바뀝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이 놈들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지요.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출애굽 한 1 세대들과 똑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요.

뭔가요?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이잖아요.

그러니 요단강이나 홍해는 같은 의미인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나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을 구경만 했어요.

 

다시 말합니다.

신앙은 구경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구경하고 박수치는 겁니다.

박수치는 것을 찬양이라고 해요.

 

쉽게 말하면 예수님하고 마귀하고 싸우는 겁니다.

우린 관중들이에요.

예수님이 이기자 야호!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겼다는 이 기쁨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모세가 홍해바다를 가를 때 그러잖아요.

너희는 가만히 있어 여호와가 어떻게 하는지 구경만 하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는지 보라는 겁니다.

 

애굽에 군대는 홍해바다에서 몰살당했는데 자신들은 살았어요.

그러니 홍해바닷가에서 미리암이 소고 치면서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 최고 하면서 춤추고 장구치고 기뻐하잖아요.

 

신앙생활은 이 기쁨으로 사는 겁니다.

알면 감사가 나오고 모르면 원망과 불평이 나와요.

그러니 신앙생활은 이 환호성을 얼마나 간직하고 사느냐의 싸움이에요.

 

우린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만 하면 되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데 우리는 도와준 것이 없어요.

다 도망갔어요.

12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 다 도망갔잖아요.

우린 12 제자들 속에 포함되어 있어요.

 

우린 도망을 갔지만 예수님 홀로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다 담당하신 겁니다.

예수님 홀로 다 이루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엔 예수님 홀로 다 이루신 흔적만 남아 있어야 하는 겁니다.

 

여기에 뭘 섞으면 이단이에요.

더하거나 빼면 안 되어요.

순수하게 예수님 공로만 남겨야 해요.

예수님 공로만 남기는 것은 곧 구경하는 겁니다.

 

제발 좀 구경하세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 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켰는지 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지 알란 말입니다.

왜? 그 공로를 꼴란 우리 행함으로 희석시키고자 하느냔 말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갈라디아서에서 자신을 위시하여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에 뭘 섞고자 하는 놈은 저주를 받으라고 한 겁니다.

이 바울의 심정을 아시겠어요.

 

우리 안에 이 바울의 심정이 담겨 있어야 해요.

머리가 아니고 가슴 속 깊이 아로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받은 성도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라는 말은 우린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두 분이서 세운 언약이에요.

이건 하나님은 예수님 하고만 상대하겠다는 뜻이에요.

인간하고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은 우리의 행함과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구원이 우리의 행함과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의 행함으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되는 일도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 우리의 행함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피로 했으니까요.

그럼 성도는 예수님 피만 있으면 되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이 예수님의 피를 놓칠 까봐서 고맙게도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의 피를 믿어지게 하는 법을 불도장을 찍듯이 확 찍어 놓았어요.

이걸 성령의 인침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도장을 찍어 놓은 겁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예수의 피가 믿어지게 한단 말입니다.

 

이게 새 언약이에요.

이 새 언약이 뭔가 하면 무조건 용서하는 은혜 언약인 겁니다.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이걸 사랑이라고 하고 은혜라고 합니다.

 

사랑이나 은혜는 덮어주고 용서하는 것이에요.

모자라기 때문에 덮어주고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탕자에요.

 

탕자 이야기를 이 시대 며느리 버전으로 해 봅시다.

어느 집에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살림살이라곤 해 본적이 없는 아가씨가 며느리로 들어온 겁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살림살이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 안 들지만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이니 사랑으로 덮어주는 겁니다.

 

그럼 며느리는 비록 살림살이를 못하더라도 이런 못난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살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행함을 근거로 사랑을 받아 보겠다고 하면 그건 오산이에요.

왜냐하면! 시어머니는 살림살이 못하는 것을 이미 알고 받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살림살이를 하지 못하는 줄 알고 며느리로 받아 준 것은 앞으로 살림살이 잘해서 점수 따라는 말이 아니에요.

사랑으로 받아 준 것이에요.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사랑을 알아야 해요.

 

살림살이를 못하는데도 받아 준 것은 일을 잘하고 못하고의 법적인 관계가 아니고 사랑의 관계로 받아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사랑의 관계로 살아야 해요.

 

사랑의 관계로 살아야 두려움이 없어요.

사랑의 관계를 저버리고 법적인 관계로 살면 그 집에서 살 수가 없어요.

법이 되면 살림살이 못하는 것이 두려움으로 엄습해요.

며느리가 시어머니 눈치나 살살 보고 산다고 하면 이건 두 사람 모두에게 지옥이에요.

 

그렇다고 시어머니가 다 용서 해 준다고 해서 며느리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되어요.

용서해 준다는 것은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시어머니의 사랑을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살림살이로 따지진 않아요.

하지만 시어머니의 사랑을 훼손하면 안 되어요.

 

그러므로 며느리는 더 조심스럽게 행동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시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고 그 집안에서 사는 비결이에요.

그렇다고 매사에 시어머니를 두려워하고 눈치보고 살란 말은 아니에요.

살림살이가 서툰 것하고 자기 마음대로 개판으로 하는 것하곤 달라요.

모자라고 서툰 것은 용서해도 개판으로 사는 것은 용서의 대상이 아니에요.

 

용서란?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 때 필요한 겁니다.

살림살이를 개판으로 하는 것은 용서를 모르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사랑을 아는 자는 개판으로 살 수가 없어요.

늘 겸손한 자세로 사는 것이 자신은 시어머니로부터 사랑받고 산다는 것을 아는 것이에요.

 

아이들이 설거지를 하다가 보면 그릇을 깨트려요.

설거지 하다가 보면 그럴 수 있어요.

엄마도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이해를 한다고 해서 그릇을 일부러 깨트린다고 하면 그건 혼이 나야지요.

 

설거지하기 싫다고 그릇을 다 깬다면 그건 집에서 살 자격이 없어요.

설거지를 일로 보기 때문에 설거지를 시킨다고 그릇을 깨트려 버리는 겁니다.

그건 사랑의 관계로 있지 않고 법적인 관계로 있기 때문이에요.

이런 놈이라면 집에서 내어 쫓아야지요.

 

가족은 사랑의 관계로 맺어졌어요.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살림살이로 책을 잡지 않아요.

어차피 사랑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방탕과 방임하면 안 되어요.

방탕과 방임은 용서를 욕되게 하는 일이에요.

 

우리도 며느리처럼 시어머니의 사랑과 용서로 덮음 받고 살고 있어요.

죄인이 하나님의 성품대로 산다는 것을 서툴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자신의 행동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이유가 없어요.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심을 몸에 담고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용서를 알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마치 윤리 강령과 같은 말씀을 하시고서는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고, 도와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실패해도 용서해 준다는 말이에요.

 

어차피 불가능성을 알고 명령을 한 일이기 때문에 실패해도 책하지 않아요.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고 도와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 말씀은 항상 인간의 가능성을 불가능성으로 확인시켜 준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해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행하라고 명령하는 겁니다.

모든 말씀이 그래요.

 

그러니 오늘 말씀의 전개를 잘 이해하세요.

앞에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고 하시고선 뒤에선 내가 도와줄게! 라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이게 복음을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음행하는 자들이고!

우린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고!

우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에요.

우린 주의 명령대로 살지 못하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들이에요.

 

그럼에도 짤리지 않는 것은 주께서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고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담대해져요.

성경은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담대함이란? 뻔뻔스러움 입니다.

그래요.

뻔뻔함을 버리지 마세요.

뻔뻔함을 사랑의 관계 안에서만 나타납니다.

 

본문 끝 부분을 잊지 마세요.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라는 말은 “누가 감히 나를 송사하리요” 라는 뜻이에요.

이는 내가 잘못해도 용서해 준다는 것을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큰소리치는 겁니다.

“누가 감히 나를 송사 하리요” 라고 큰 소리 치는 것은 “나는 사랑의 법 안에 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누가 감히 나를 송사하리요” 라는 고백은 담대함이고 뻔뻔함이고 믿음입니다.

날 송사하지 말라는 것은 나는 앞부분에서 말하는 명령대로 살지 못하였다는 말이에요.

 

주님의 용서하심이 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를 묻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큰소리치는 바탕엔 새 언약이 깔려 있어요.

새 언약이 바로 내 꼬라지가 이래도 주께서 지켜주신다고 하는 언약인 것입니다.

그러니 날 송사하지 말라고 큰소리치는 겁니다.

 

새 언약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언약이에요.

그러니 그 어떤 말씀 앞에서도 기죽지 마세요.

성도는 그 어떤 말씀으로도 정죄당하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대신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 아들을 보내서 사랑을 확증해 주셨어요.

우리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주께서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고” “도우시므로” 우리의 구원은 결코 실패 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서 안심하고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실패 할 수밖에 없는 죄인을 사랑으로 용서하고 덮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용서 받고 사는 바탕엔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다는 것을 기억케 하시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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