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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성경강해)60강. 내 백성을 걸려 넘어지게 하라 (롬 9:27-33)

by coroa 2021. 8. 25.

 

 

60강. 내 백성을 걸려 넘어지게 하라 (롬 9:27-33)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우리는 남은 자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남은 자란?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약속의 자녀를 말합니다.

남은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자들입니다.

스스로 남은 것이 아니고 남겨짐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들이 엘리야 시대의 남은 7천명의 모습들처럼 드러난 모습으로 있지 않고 숨겨진 모습으로 있습니다.

세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힘 없는 모습으로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 세상에서 인간의 이성이나 상식에 반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남겨 두셨으면 엄청난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에요.

지극히 미미하고 초라해요.

 

그러니까 인간적 가치로 생각하여서 남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남겨 주셨다고 하니까 엄청 대단한 인물들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 영웅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힘 있는 하나님입니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엄청난 능력으로 일을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엄처난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열왕기상 19장을 봅시다.

 

왕상 19:10-18=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5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잘 보세요.

엘리야가 온 이스라엘은 다 여호와를 떠났고 자기만 남았다고 하지요.

이에 하나님이 응답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엘리야 앞에 나타나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나타나신다고 하니까 엄청난 능력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이 엘리야 앞을 지나가십니다.

 

산을 부수고 바위를 가르는 폭풍이 일어나는데 엘리야는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 줄 알았는데 폭풍 가운데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왜? 없지!

고개를 갸우뚱 하는데 지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옳커니 지진 가운데 계시겠구나! 생각하고 보았는데 그 지진 속에서도 하나님은 없는 겁니다.

지진 후에 불이 나오는데 그 불 속에서도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세미한 소리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미하게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감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을 한다는 뜻이에요.

인간들의 생각을 비켜가는 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스스로 말하기를 온 이스라엘이 다 바알을 쫓고 자기만 남았다고 생각했어요.

이 때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7천 명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폭풍처럼 지진처럼 불처럼 능력 있는 자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세미한 소리처럼 남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초라하겠어요.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자들이 어떤 모습들이었는가요?

다 비실비실 하는 자들이에요.

영웅이 없어요.

세상적으로는 볼품이 없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볼품없는 자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힘을 악으로 고발키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남겨 두어서 일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겨자씨처럼 지극히 미미하고 가루 서 말 속에 있는 누룩처럼 보이지 않게 있어요.

 

이걸 성경에서는 고아와 과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힘 없는 자들을 상징하는 자들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무시당하고 버려지는 카드로 활용을 하세요.

이는 세상의 악을 고발하는데 미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네피림이라는 거인 숭배 사상으로 돌아가요.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영웅이 되고자 일생을 분주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버려지고 죽어지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아요.

하나님을 믿어도 세상에서 성공하여 영웅이 되고자 믿지 예수님처럼 버려지고 죽어지기 위하여 믿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남겨둔 자들은 하나같이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세상을 떠나는 모습으로 간섭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영웅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구경거리로 만드세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사도인 우리를 만물의 찌끼와 구경거리로 두었다고 하잖아요.

그러므로 남은 자인 성도들은 세상 가치와는 꺼꾸러 사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남겨 두지 않았으면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처럼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소돔 고모라 백성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유황불 심판을 받은 자들입니다.

즉 지옥에 불벼락을 맞은 자들입니다.

 

알다시피 소돔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했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소돔 고모라를 멸망 한다는 소식을 알려 줍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그 곳에는 자기 조카 롯이 살고 있다고 하면서 멸망을 철회 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 중에 의로운 자도 있는데 그럼 그 의인도 함께 심판 하느냐고 하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의 가정과 식솔들을 살리고자 함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의인이라고 생각을 하였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그 성에 의인 50명을 찾으면 멸망치 않겠다고 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흥정을 합니다.

만약에 50명이 없고 5명이 부족해서 45명이면 어찌 할 겁니까!

 

40명이면 어찌 할거냐!

30명이면 어찌 할거냐!

20명이면 어찌 할거냐!

10명이면 어찌 할거냐! 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최소한도 롯의 가정만 보도라도 의인 열 명 정도는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50명에서 10명까지 흥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래 의인 10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는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불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롯을 빼내옵니다.

롯은 아무 것도 가져 나오지 못하고 몸뚱이 하나만 달랑 나왔어요.

 

얼마나 초라합니까?

이걸 성경에서는 불 가운데서 구원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게 남은 자에요.

우리의 모습이에요.

 

이사야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소돔 고모라 백성이라고 했어요.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과 같다는 말입니다.

마땅히 지옥으로 갈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긍휼로 남겨 둔 자들이 있어요.

이들이 엘리야가 말하는 숨겨진 7천 명들인 것입니다.

7천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완전수에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이룬 숫자에요.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만 구원하면 되어요.

자기 백성만 구원하면 그것이 온전이고 완전인 것입니다.

그 숫자를 7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7천 명 속에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이방인 중에 남은 자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방인 중에서 구원을 얻은 자들이 남겨진 자들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 남은 자들입니다.

 

저는 남은 자를 보면 올림픽 선수들이 생각이 나요.

왜? 그런가 하면 이들은 뽑히고 뽑히고 또 뽑힌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올림픽 대표가 되는 과정이 꼭 남은 자를 남겨두는 것과 같아요.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올림픽에서는 영웅을 남겨 두지만 하나님은 못난 놈들을 남겨 두어요.

 

국가 대표를 선발할 때 어떻게 하나요?

먼저 군(郡) 대표를 선발하지요.

그리고는 시(市) 대표를 뽑습니다.

이들 중에서 또 도(道) 대표를 뽑습니다.

 

이들을 다시 전국 대표를 뽑습니다.

전국 대표 중에서 또 다시 올림픽 대표를 뽑습니다.

올림픽에 나가면 온 세계에서 각 국가의 대표들로 뽑힌 자들이 시합을 하고 거기서 금메달 수여자 한 명을 뽑습니다.

 

그러니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것은 온 세계에서 뽑힌 자란 말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자는 자기 실력으로 딴 것이므로 자기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실력을 은혜로 바꾸어서 적용해 보세요.

 

온 세상에 수많은 민족과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은혜로 선택을 합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또 은혜로 남겨진 자들을 두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식이 있었지만 그 중에 약속의 자녀는 오직 이삭 하나뿐이에요.

그 이삭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라고 했어요.

결국 예수그리스도가 남은 자인 것입니다.

 

온 세계의 사람들을 가지고 보면 이스라엘은 분명히 남은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 속에서 또 뽑아내십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또 이스라엘을 뽑아내십니다.

그렇게 해서 맨 마지막으로 남겨진 자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오셨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다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중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남겨진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그 순종이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예수님 혼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예수 이외 그 누구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마지막 남은 자이신 예수 안에서 한 민족을 끄집어내십니다.

이들을 가지고 아들의 나라를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간 백성들은 모두가 예수 안에서 나온 남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예수의 공로만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의 공로를 예수의 의라고 합니다.

이 의를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으로 난 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난 의가 인간들이 의지하는 행위에서 난 의를 고발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이라고 합니다.

 

거치는 반석이란? 넘어지게 하는 돌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돌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시온에 있는 자들을 넘어뜨리러 오셨다는 말입니다.

 

시온이란? 예루살렘을 말해요.

예루살렘은 또 이스라엘을 지칭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자기 백성들을 넘어뜨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왜? 자기 백성들을 넘어지게 하는가요?

이는 틀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까?

율법 지킴이라는 자기 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지킴이라는 의가 있기 때문에 예수가 주겠다고 하는 그 의에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어요.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어요.

 

알다시피 하나님은 예수님을 자기 백성들을 구원코자 보내셨습니다.

구원은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들이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고 있어요.

 

너희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율법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놈들이 율법을 지킨 것으로 의인 행세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알아야 예수를 영접하든지 할 터인데!

이 놈들이 의인이라고 하니까 가만 둘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죄인 만드는 일을 하신 겁니다.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인으로 드러내느냐 하면 예수를 죽임으로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원래 죄인인데 예수까지 죽였으니 특정 범죄 가중처벌법으로 처벌을 받아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AD 70년에 디도 장군을 보내서 예루살렘을 초토화 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던 자들은 온 세상에 흩어버렸어요.

본토친척 아비 집에서 쫓아내어서 고아와 과부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들이 흩어진 이스라엘 디아스포라에요.

 

영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에겐 예루살렘이 남편과 같고 부모와 같은 곳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쫓겨납니다.

이는 고아와 과부가 된 것입니다.

이게 과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던 것을 다시 반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나중에 포로로 잡혀가서 하나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회개를 해요.

그럼 하나님께서 용서하셔서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돌아 올 때 그냥 돌아오지 않고 뭘 하나 뒤집어쓰고 와요.

그게 뭔고 하니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뒤집어쓰고 용서 받은 자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넘어 졌다가 다시 일으켜 세움을 입을 때는 그들 위에 은혜로 가득해요.

법으로 살다가 짤려 나갔다가 은혜의 사람으로 세움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넘어지게 하는 것은 은혜로 세우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세요.

 

오늘 본문에서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였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율법의 행위를 붙잡고 있는 자들을 넘어뜨리고는 믿음으로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법에 있는 자를 죽이고 은혜의 사람으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움을 입은 자들에게는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만 오롯이 남게 되어요.

그래서 창세전 언약대로 은혜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이 참으로 독특하지요.

잘난 자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못난 자를 만들어서 구원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긍휼을 입히기 위함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입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김을 입는 자들에게는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세리와 창기들입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죄인들을 총칭해요.

의인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그와 정 반대인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의 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스스로 생각을 해도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등장하는 자들이 누구인가요?

바로 잘난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잘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기를 “주여 우리는 저기 있는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했어요.

나는 의인이라 기고만장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로 가득했어요.

자기들만이 천국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자신들만이 천국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어디서 생겼나요?율법 지킴이라는 행위에서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맨 날 죄 아래 뒹굴고 있는 세리와 창기들과 비교하면서 자신들은 너무도 차원이 다른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죄를 먹고 마시고 있는데 자기들은 거룩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세리와 창기들을 이방인 취급을 하면서 상종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합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라고 하십니다.

저주를 끌어 붓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그렇게 죄인이라고 비웃던 세리와 창기들은 천국에 가고 너희들은 그 나라에서 쫓겨난다고 합니다.

이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에요.

완전히 전세가 역전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행위와 노력으로 남은 자들이 되고자 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을 남은 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째 이런 일이 일어 날 수가 있습니까?

 

왜?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십니까?

이는 잘난 자기 백성들을 넘어뜨리기 위함입니다.

이 잘난 놈들을 넘어뜨리지 않으면 자기 잘난 것으로 천국을 침노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이 천국에 오면 천국은 완전히 인간들의 행위로 인하여 등급과 서열이 정해지는 조폭 집단이 되어요.

자기들의 의로 서열을 정해서 넘어 원, 넘버 투, 넘버 쓰리,,,,

계급을 만들어요.

인간의 행위로 등급을 나누어 버려요.

그러면 자기들은 최 상위 계층이 되고 세리와 창기들은 맨 밑바닥에 앉게 된단 말입니다.

 

그럼 천국은 은혜의 나라가 아니고 법에 나라가 되고 맙니다.

아들에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 영광만 드러나게 됩니다.

이럴 순 없습니다.

이런 천국은 없잖아요.

이건 세상이지 천국이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이 이런 천국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천국을 가겠다고 하는 그 의를 확 뭉개 버려야지요.

그들이 자랑하는 신앙을 허물어 버려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서 이 놈들을 확 넘어뜨린 것입니다.

넘어뜨려서 낙오자로 만드는 일을 벌리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철저히 바리새인들의 의를 묵사발 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일부러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이 신봉하는 율법에 반하는 일들을 골라서 하십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고 성전을 쓸어버리고 율법을 폐하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잘난 바리새인들과 놀지 않고 못난 세리와 창기들과 노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바리새인들의 노를 격발시키는 행위에요.

화를 돋우는 일이란 말입니다.

그러자 잘난 바리새인들이 뿔따구가 나서 예수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자기들을 인정해 주지 않느냐 에요.

 

예수님은 왜? 못난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렸습니까?

예수님이 술집 여인들을 구원하려고 오셨나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모두 술집 작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술집 여인이 또 다른 행위가 됩니다.

이건 아닌 것 같지요.

맞아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린 것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는 세리와 창기들은 가지고 그 당시 잘난 자들인 바리새인들을 고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 의가 아무도 없는 자들을 가지고 자기 의로 가득 찬 자들을 넘어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인간의 의로 가득 찬 자들을 상징합니다.

잘난 자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잘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적으로 말하면 인본주의 율법주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들과 정 반대의 사람들인 잘남이라고는 개뿔도 없는 세리와 창기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의 없음”을 대표하는 자들이고,

바리새인은 “의 있음”을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의 있음”을 대표하는 자들을 거부하시고,

“의 없음”을 대표하는 자들을 구원한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심입니다.

인간의 의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죄가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죄란? 인간의 의를 의지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 자체가 은혜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에는 인간의 의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어요.

하나님은 어느 때나 은혜의 원리로 자기 백성들을 창조 해 내셨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서는 의를 좇아간 유대인들은 의에 이르지 못하고 의를 좇지 아니하던 이방인들이 의를 얻은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킨 자들은 구원을 얻지 못하고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었다는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율법을 어기고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율법 지킴과 상관없이 은혜로 구원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의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는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의인이다 죄인이다 판단하는 기준이 있어요.

그 의가 어떤 의인가요?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의라고 해요.

 

이건 하나님은 예수님만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만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 아버지 뜻에 온전하게 복종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이에요.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의를 쫓는 것이라고 해요.

 

예수님만 옳고 우린 다 틀렸습니다.

예수님만 천국에 가고 우린 다 지옥에 가야 합니다.

이걸 인정하십니까?

동의가 되는가요?

 

여기에 동의가 되는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 난 성도이고,

여기에 동의 되지 않는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종교인들입니다.

성도와 종교인은 달라요.

 

성도는 예수의 것으로 사는 자이고!

종교인은 자기 것으로 사는 자들이에요.

즉 성도는 믿음으로 살고, 종교인은 자기 행위로 살아요.

 

성도는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감사하며 살아요.

그러나 종교인들은 자기 행위에 따라서 천당에 갔다 지옥에 갔다 해요.

자기 마음에 괜찮다고 생각되는 착한 일을 했다 싶으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가도,

자기 행위가 악하고 나쁜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지옥 맨 밑바닥에 가서 앉아요.

그 안에 법이 그렇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종교인들은 예수를 안 믿고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어요.

여러분도 지금 자기 행위에 따라 신앙의 춤을 추면 종교인입니다.

그럼 내가 바로 예수님에 의해서 넘어져야 할 유대인들인 것입니다.

 

죄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성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해요.

인간의 잘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서 인간의 잘남을 꺾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잘남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걸 꺾지 않으면 그걸 의지하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은 인간의 잘남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시온이란? 자기 백성들을 상징하는 말이라고 했지요.

 

여기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어요.

왜? 비밀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걸 우리가 오해하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이 말씀 앞에 서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거치는 반석으로 보냈으니 나는 안 넘어져야지 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나는 똑바로 하여서 안 넘어져야지 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우린 다 그렇게 생각해요.

본능적으로 난 잘해서 안 넘어져야지.

그런단 말입니다.

이게 잘못이란 말입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이 지금 시온에 거하는 자들을 넘어지게 하려고 예수님을 보냈어요.

시온을 이 시대로 말하면 교회에요.

하나님이 교회 안에 있는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고 예수를 보냈어요.

 

왜? 넘어지게 하나요?

이는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왜? 넘어뜨렸다가 일으켜 세웁니까?

 

은혜를 입혀주기 위함입니다.

잘난 척 하는 자를 넘어지게 하여서 자기가 못난 놈인 줄을 알게 만들어요.

그냥 놔 두면 계속해서 잘난 척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넘어지게 해서 못난 놈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못난 놈으로 만든 다기 보다는 너는 못난 놈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린 잘난 놈들이 아니에요.

못난 자들이에요.

죄인이란 말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말씀 몇 자락 지켰다고 잘난 척 하고 있어요.

복음 좀 안다고 꼴값을 떨고 있단 말입니다.

교회 일 좀 한다고 믿음 있는 척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우리가 그러지 말아야지 한다고 해서 안 나타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건 자연 발생적으로 나타나요.

왜냐하면! 우리 몸뚱이는 자기가 한 일을 귀신같이 기억을 해요.

그래서 자신이 한 일에 가치를 챙기는 쪽으로 움직여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봉사하고 충성해도 은근히 남이 알아주기를 기대한단 말입니다.

누가 알아주면 겸손한 척!

아니~ 이 일 어디 제가 했나요!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라고 겸양을 떨어요.

으이구! 이 웬수가!

 

하지만 안 알아주어 보세요.

은근히 알아주기를 바라게 되어요.

안 알아주면 자기 입으로 떠 벌리잖아요.

이게 인간이에요.

 

저 역시 그래요.

복음 전하고도 누가 알아주면 기분이 좋고 안 알아주면 섭섭해요.

본능적으로 섭섭해진다니까요?

 

그럼 성령이 그래요.

야! 임마!

너 왜? 섭섭해 하는데!

너 설교는 니 재주로 하니!

아니잖아!

다 내 은혜로 하고 있잖아!

그런데 왜? 남들이 반응하지 않으면 섭섭한 마음을 갖느냐!

이 놈이 참 나쁜 놈이네! 라고 해요.

 

맞아요.

전 참으로 나쁜 놈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내 영광을 챙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죄인 줄 알지만 내 육신은 본능적으로 그 죄를 짓는 쪽으로 움직여요.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내 영광을 챙기는 쪽으로 도적질 하고 있는 악당인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짓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과 비례하여서 죄라는 그림자도 길게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마치 떡이 고물 판에서 구를 때마다 떡 고물이 붙듯이 우리도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을 행하면 행할수록 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내 본 모습이고 내 실존이에요.

 

자 보세요.

제가 설교를 안 하면 이런 마음이 들까요?

안 들까요?

안 들어요.

그럼 나는 내가 나쁜 놈인 줄을 몰라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을 깨달아지는 은사를 주어서 설교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그 설교 한 것을 가지고 내 안에 죄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숨겨져 있는 자기 행함을 의지하고자 하는 그 죄를 끄집어내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나는 복음 전했다는 것을 의로 여기고자 하는 내 죄가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결국 설교를 하고 그 설교를 통해서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설교를 통해서 넘어지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래서 저는 설교를 하면서 은혜를 받고, 그 설교 했다는 것을 자기 의를 삼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으로 고발당하면서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일석이조에요.

이걸 도랑치고 가제 잡는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이고 큰 은혜인가요.

저는 너무도 큰 은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이스라엘에겐 은혜 아닌 것이 없어요.

다 하나님의 은혜에요.

 

유대인들이 율법을 열심히 지킨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리고 그 율법 지킨 것으로 꼴값 떨다가 예수에게 걸려서 넘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러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겐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어요.

꼴값 떠는 것도 은혜이고!

그 꼴값 떠는 것으로 넘어지는 것도 은혜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자기가 한 것을 꼴값으로 남으면 안 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백성에겐 그 꼴값으로 죄를 고발하고야 말아요.

만약에 꼴값으로 넘어지지 않고 계속하여 치달으면 그건 버린 새끼에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반드시 자기가 붙잡은 행위로 인하여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이 누구를 넘어뜨리고 있나요?

자기 백성들이에요.

자기 백성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서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저 놈들이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면서 천국에 가면 전부 완장 차고 다녀요.

그럼 천국이 진짜 깡패 집단이 되어요.

잘난 놈 못난 놈으로 구분이 되어서 애굽이 되고 만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완장을 전부 빼앗아 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들 보다 더 악한 자들을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세리와 창기들 보다 더 악한 자들이 되게 하시는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게 함으로서 세리와 창기들보다 더 악당인 자들로 드러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가장 잘 났다고 자랑하던 놈들은 가장 못난 놈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령을 보내서 너희가 예수를 죽인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어찌할꼬! 가슴을 치면서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한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세리와 창기들 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자각케 하는 것입니다.

뭔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솔직히 우리 스스로를 생각해 보세요.

복음 안다고 얼마나 잘난 척 하고 있습니까?

누가 복음을 모르면 깔보고 우습게 여기잖아요.

그들보다 내가 우월하고 낫다고 생각하잖아요.

 

복음 안다는 것을 감사하나요?

아니면 자랑하나요?

자랑하지요.

자랑한다는 것 자체가 믿음에 거하지 않고 행위에 거하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내가 안다고 생각하니까 자랑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공부해서 깨달았으면 자랑할 수가 있지만,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에 남 앞에서 자랑 할 수가 없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에 의하여 걸려서 넘어져야 해요.

그래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갈 데 없습니다! 라고 하여야 해요.

 

날마다 주의 은혜를 사모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잠시라도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게 신앙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착각하기를 나는 안 넘어 질거야! 라고 하고 있어요.

아니에요.

안 넘어지는 게 신앙이 아니고 넘어지는 게 신앙이에요.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 있음을 추인 받고자 하지 말고 죄가 고발당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신앙생활이란? 잘난 자로 세워져 가는 것이 아니에요.

날마다 못난 자라는 것을 심도 있게 깨달아 가는 것이에요.

그리하여 주의 은혜 아래 거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푹 찌르면 은혜가 폴~폴~ 나와야 해요.

그런데 마귀는 항상 잘난 자가 되어서 은혜가 필요 없는 자가 되라고 미혹해요.

이 미혹에 걸려들면 안 넘어지려고 해요.

 

야곱처럼 하나님과 샅바 싸움을 하면서 안 지려고 한단 말입니다.

우린 이 싸움에서 허리가 분질러져야 해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이 드러나야 한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의 자리에 앉아서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은혜라는 것을 알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을 인용한 이사야서를 보세요.

이사야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봅시다.

 

이사야 8장과 28장을 봅시다.

 

사 8:14-15절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사 28:1-16=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2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의 창일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 에브라임의 취한 자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4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 영화의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5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6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신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 마는 7 이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8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9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10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하는구나 하는도다 11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12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13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 14 이러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이 백성을 치리하는 너희 경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15 너희 말이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 피난처를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먼저 8장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자기 백성들이 피할 곳으로 보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고 함정과 올무가 되어서 넘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들이 넘어뜨리는 돌처럼 유대인들의 율법 신앙과 부딪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영화로운 관(冠)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웠다고 하지요.

이는 예루살렘 성을 말해요.

예루살렘은 해발 800m 위에 있어요.

그런데 쇠잔해 가는 꽃 같다고 합니다.

곧 망하게 생겼단 말입니다.

 

주께서 강한 바람처럼 임하여서 그들이 자랑하던 면류관을 땅 바닥에 던져 버린다고 합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율법 신앙을 박살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겨우 건짐 받은 남은 자들에게 영화로운 관을 씌워준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빼내심을 입은 성도들을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이스라엘이 선민 사상에 취하여서 술 취한 자들처럼 주절거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걸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께 바쳐질 제사상에 인간들의 자랑거리들인 열심과 충성이라는 온갖 율법 지킴의 행위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상을 걷어차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 다시 가져 오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 일을 하셨어요.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건 처음 듣는 말이에요.

그래서 생소한 방언을 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소한 방언이란? 처음 듣는 말이란 말입니다.

율법 지킴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곳에서 생소한 방언이란 어떤 말인가요?

 

이는 율법 지킴의 반대말입니다.

행위의 반대말은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생소한 방언이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전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고 알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서 그게 아니고 나를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시온에 거하는 자들이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너 이단이지!

그러면서 예수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이단이라고 죽인 그 예수를 부활시켜서 그 예수를 기초석으로 하여서 새로운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무슨 집인가요?

율법 지킴이라는 인간의 행위에 의지하는 집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음으로 짓는 집을 짓겠다는 것입니다.

 

법에 집을 허물로 은혜의 집을 지은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에 집을 허물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이고 천국이에요.

 

오늘 본문을 표피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이스라엘이 행위에 의지하다가 아주 망한 것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이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여서 지옥을 갔다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망한다는 말을 양극단의 이분법으로 말하면 지옥으로 갔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행위 구원이 되고 행위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성경이 일관성 있게 말하는 취지와 달라요.

 

성경은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이 주어진다고 했어요.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은 곧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의 구원도 지켜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행위 때문에 지옥에 갔다고 한다면 이건 은혜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말아요.

만약에 이스라엘이 행위에 의지해서 지옥으로 갔다고 하는 극단적 해석을 하게 되면 성경 전체가 말하는 구원이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은혜로 주어지는 것과는 상충되게 됩니다.

 

은혜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은 행위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선택이 된 유대인들이 설령 율법지킴이라는 행위에 의지 하였다고 하여서 지옥으로 보낸다고 하면 처음부터 은혜로 선택이 된 것이 아닌 것이 되어요.

 

은혜로 선택을 입었으면 절대로 잘려 나가서는 안 되어요.

그래야 은혜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 주신다고 했어요.

 

야곱아!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너는 내 것이라고 했으면 야곱이 무슨 짓을 하여도 하나님의 것으로 붙잡아두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은 이미 창조시에 정해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야곱과 에서를 가지고 변증하고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태어나기도 전이 이미 사랑 받을 자와 미움 받을 자로 정해진 가운데서 출생을 하였어요.

야곱이 복 받을 짓을 해서 복을 받은 것도 아니고,

에서가 미움 받을 짓을 해서 미움을 받은 것이 아니에요.

 

다만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으로 대하였고 에서는 미움으로 대한 것 뿐입니다.

야곱은 에서를 통해서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자신이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알게 하시려고 야곱보다 훨씬 멋지고 잘난 에서를 야곱 곁에 둔 것입니다.

 

봐라!

네가 에서보다 나은 게 있느냐?

없지 않느냐!

그럼에도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통해서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사는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고 긍휼히 여겨주심 때문이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이게 야곱의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 야곱아!

네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인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연장 선상에서 오늘 본문도 이해하여야 해요.

봐라!

이스라엘이 행위에 의지하다가 지옥에 갔잖아!

그러면 안 된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지옥에 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다스려가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들을 행위로 판단치 않고 은혜로 대하여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기 때문에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서 행위를 의지하는 자를 넘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넘어지게 하시는 것은 잘라내고자 함이 아니고 일으켜 세우고자 하심이에요.

이 비밀을 아셔야 해요.

 

성경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역사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의 싸움을 이야기하고자 함이에요.

이건 마치 부모가 자식과 싸우는 것과 같아요.

부모가 자식에게 행하는 모든 것은 사랑이에요.

 

죽이고자 함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호되게 몰아치고 징계하는 것은 그 징계를 통해서 부모의 마음을 좀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에 대한 애끓는 사랑의 절규가 자식과 싸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모든 것은 다 사랑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죽여도 사랑이고 살려도 사랑이에요.

포로로 잡혀가게 하여도 사랑이에요.

이걸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유업을 이을 아들을 잠시 종으로 두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5=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잘 보세요.

아들을 종으로 두셨다고 하지요.

분명히 유업을 이어갈 아들이에요.

그런데 잠시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종으로 두었어요.

 

초등 학문이란 율법을 말해요.

그러니까 은혜 아래 살아야 할 놈을 잠시 율법 아래 맡겨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은혜로 대하신다는 것이 어떤 것인 줄 알게 하기 위해서 은혜와 상충 되는 율법 아래 가두어 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은혜의 귀중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보내서 빼내십니다.

빼내심을 입고 난 후로는 종으로 살지 말고 아들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무슨 문제인가 하면 율법 아래서 태어난 우리 몸뚱이에요.

우리 몸뚱이는 율법 아래서 태어 낳기 때문에 틈만 나면 율법의 종노릇 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잘 보세요.

분명히 유업을 이을 아들이에요.

그런데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율법이라는 청지기 아래 두었어요.

율법이 종처럼 부리는 것입니다.

우린 그 율법 아래서 종처럼 시달렸어요.

그러다가 은혜 아래로 빼내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수십 년 시달렸어요.

그러다가 때가 되어서 빼내심을 입게 된 것입니다.

빼내심을 입고 나니 은혜가 너무도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귀한 것임을 알게 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던 세월들이 결코 헛된 세월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게 하시려고 법아래 가두어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법을 가지고 은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를 가지고 복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유업을 달라고 하자 아버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선뜻 주신 것은 이 자식이 아버지 집의 귀함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귀함을 모르면 아버지와 살아도 감사치 못하고 내내 툴툴 거려요.

 

그래서 아버지는 아버지 집의 귀함을 알게 하시려고 집을 나가겠다고 하는 자식을 붙잡지 않은 것입니다.

아비 집의 귀함은 아비 집을 떠나보아야 알 수가 있어요.

아비 집에서는 아비 집의 소중함을 알 수가 없어요.

탕자는 아버지 집을 떠나서 이걸 깨닫게 되었어요.

 

복은 저주를 통해서 복으로 드러나요.

그래서 아버지는 저주의 세상으로 아들을 보내서 아버지 집이 엄청 복된 집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그러해요.

묵시에 속한 자들을 세상이라는 지옥으로 보내서 천국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아들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이라는 지옥으로 잠시 보냈어요.

그러다가 때가 되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천국으로 불러 올라 가십니다.

 

어차피 천국에서 살 자를 왜? 지옥인 세상에 보냈는가요?

이는 지옥에서 천국이 어떤 곳인 줄을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성도는 지옥에서 천국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집을 떠나 세상에서 거지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 집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집인가를 알게 되는 것과 같아요.

 

그럼 성경 속에 분명히 이스라엘 속에 저주 받은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어떻게 설명을 하여야 하는지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속에 분명히 저주 받은 자들이 있어요.

지옥에 간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애초부터 지옥 가기로 작정이 된 자들이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 또 다른 이스라엘을 두셨어요.

이걸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이스라엘의 망함을 보고서 가슴이 아팠어요.


오늘 본문 앞부분에 있는 로마서 9장 1절부터 봅시다.

 

롬 9:1-8=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2 (1절과 같음)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바울이 육적으로 보니까 이스라엘이 다 망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이 아픈 겁니다.

모든 것을 다 받았는데 넘어져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을 하시는데 언약에 보면 두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상세한 건 로마서 54강 “언약대로 일하시는 하나님” 편을 참고 하세요.)

 

성경은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 모두를 통상적으로 이스라엘이라고 해요.

하지만 영적으로는 달라요.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 속에 또 이스라엘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육으로 난 자”와 “약속으로 난 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망하는 자들은 육으로 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약속으로 난 자들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다 망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들은 절대로 망할 수가 없어요.

이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간섭을 하세요.

이들이 은혜로 남겨진 남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들은 끝까지 은혜로 대하세요.

지켜 내신단 말입니다.

만약에 약속의 자녀가 믿음에 거하지 않고 행위에 거하면 넘어지게 만들어요.

왜? 넘어지게 만드느냐 하면 행위에 거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서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가 동일하게 복음을 안다고 합시다.

둘 다 복음 아는 것을 가지고 잘난 척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육신의 자녀는 복음 아는 것으로 잘난 척 하면 그냥 내비 둬요.

자기가 하는 짓이 스스로 나는 법 아래 있는 자라는 것을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걸 진노를 쌓는다고 합니다.

이들 안에는 법이 작동을 하기 때문에 복음도 법으로 사용하여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짓거리들을 일삼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자들은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했어요.

 

디모데전서 6장과 1장을 봅시다.

 

딤전 6:3-6=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전 1:4-7=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교만한 자들은 변론과 언쟁을 좋아한다고 하지요.

변론과 언쟁을 하면 투기와 분쟁이 생겨요.

남을 죽이게 된단 말입니다.

이건 마귀가 하는 짓이에요.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은 마음이 부패하여서 진리를 자기를 자랑하는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여서 잘난 척 하고 다툼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왜? 이러한 짓을 하는가 하면 으뜸 되고 싶어서에요.

그래서 이런 자들은 항상 남을 가르치려고 해요.

 

바울은 이러한 자들은 선생 노릇을 하고자 하지만 실상은 자기도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냥 지식적으로 알아진 것을 가지고 앵무새처럼 말쟁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육신의 자녀들이에요.

그러므로 복음을 법으로 사용해서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약속의 자녀가 이러한 짓을 하면 하나님께서 넘어지게 만들어요.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가르쳐 주세요.

그러면 약속의 자녀들은 잘못을 알고 돌이켜요.

 

약속의 자녀는 반드시 책망을 받으면 이게 아니구나 하고 돌이키게 되어 있어요.

이걸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란?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말해요.

 

제가 복음 아는 것으로 나대지 말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돌이킨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처음엔 복음 아는 것으로 잘난 척 했는데 은혜를 받다가 보니까!

아! 이래서는 안 되는구나 를 깨닫고 잘난 척 하는 것에서 돌이키고 복음 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감사하게 된다고 해요.

 

그러면서 남을 정죄하고 비판 하던 것에서 이젠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복음이 깨달아지기를 기도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게 약속의 자녀들의 특징입니다.

똑 같이 같은 짓을 하다가도 약속의 자녀들은 돌이키고 육신의 자녀들을 돌이키지 않고 마귀 짓을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자녀들을 책망을 들으면 화를 내고 반발해요.

이들은 고집을 피우고 말을 안 들어요.

도리어 바락 바락 덤벼요.

그러니 둘이 서로 확연하게 차이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 아래 있는 약속의 자녀들이 복음 아는 것을 가지고 힘으로 행사하여서 법으로 사용하면 반드시 넘어뜨려서 행위를 버리고 믿음을 붙잡게 하세요.

즉 법에 거하지 않고 은혜에 거하게 하신 단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보낸다고 하신 것입니다.

 

시온이 어디라고 했나요?

자기 백성들이 있는 곳이에요.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할 자기 백성들이 지금 행위에 의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행위를 의지하지 못하도록 걷어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약속의 자녀들은 아이쿠! 우리가 잘못했구나 하고 돌이켜요.

은혜 안으로 돌아와요.

행위를 버리고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어요.

 

이 과정 속에서 육신으로 난 자들은 끝까지 고집을 피웁니다.

자기 행위를 놓지 못해요.

도리어 믿음을 붙잡는 자들을 살해하면서 반말을 해요.

 

결국 예수라는 시온에 거치는 반석을 통하여서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자녀들이 남은 자들이고 참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끝까지 은혜로 이스라엘을 지켜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는가요.

 

알다시피 출애굽 한 구약 이스라엘의 1 세대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어요.

그럼 이들은 다 지옥에 간 것인가요?

아니에요.

 

지옥에 간 자도 있고 천국에 간 자도 있어요.

이들 속에도 두 이스라엘이 있어요.

표면적(육적) 이스라엘과 이면적(영적) 이스라엘이 있어요.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죽은 자들은 다 지옥에 갔다.

그러면 안 되어요.

우리는 누가 지옥에 갔고 누가 천국에 갔느냐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해 가시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관심이 없고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갔느냐 라는 심판에만 관심을 갖는단 말입니다.

이 모두가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심판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 습성이 무슨 일이든지 선이냐 악이냐 갈라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들은 이게 죄인 줄 알아요.

그래서 이러한 짓을 안 하고자 하는 식으로 움직여요.

전혀 안 한다는 말이 아니고 지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뭐라고 하던가요?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잖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 갔느냐 라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말고 너 할 일이나 잘 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야기에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어요.

자기 백성을 구원하다가 보니까 자연적으로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새끼만 찾아가면 나머지는 전부 남에 새끼가 되잖아요.

 

구약에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에 보내서 누굴 찾아오라고 했나요?

자기 백성들이에요.

하나님은 애굽 백성에게는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간섭을 하시고 어떻게 구원을 해 내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기 백성과 반대 되는 자들을 투입해서 상대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말하려면 자기 백성 아닌 자가 있어야 하잖아요.

 

이건 마치 명암과 같아요.

빛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둠을 존재케 하는 것과 같아요.

천국을 빛에 나라라고 하지요.

어둠이 없다고 하지요.

 

천국에는 왜? 어둠이 없나요?

거기는 온전하고 완전하고 완료된 완성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이 세상에서만 필요해요.

 

하나님께서 빛에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 어둠에 나라를 잠시 만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빛에 나라가 어떤 곳인지 알게 하시려고 잠시 어둠에 나라에 보내어진 것입니다.

영생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하시려고 잠시 죽음을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 민족이 한 가족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집안에 두 민족이 있어요.

아브라함에게도 이스마엘과 이삭이라는 두 아들을 가지고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가 어떤 자들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요셉과 그 형제들도 마찬가지에요.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도 마찬가지에요.

 

겉으로는 둘 다 한 형제에요.

한 아비에서 나온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영적으로는 하나가 아니고 둘이에요.

 

두 계통이 있어요.

약속의 계통과 육신의 계통이 있어요.

두 계통 속에서 하나님은 창세전에 약속의 자녀만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약속의 후손들에게는 계속하여서 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빼내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빼내심을 입는가 하면 기존의 세계로부터 버림당하는 모습으로 빼내어져요.

 

그래서 성경 속에서 언약의 자손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징벌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징계를 가하여서라도 은혜 아래 거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참 아들은 늘 징계가 따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을 봅시다.

 

히 12:4-10=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잘 보세요.

너희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잖아요.

여기서 죄란? 예수 안 믿는 거에요.

믿음으로 살지 않고 행위로 살고자 하는 것을 말해요.

 

피 흘리기까지 싸우게 하여서 어디로 인도한다고 합니까?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신다고 하지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어디에 있나요?

예수 안에 있어요.

믿음에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아들들을 예수 안으로 거하게 하려고 징계를 가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징계를 가하는가 하면 우리의 본성은 법으로 사는 것이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위를 붙잡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 아래서 출생을 했어요.

그래서 죄의 법으로 사는 것이 편해요.

우리 몸뚱이는 본능적으로 죄의 법으로 살고자 움직여요.

죄의 법은 우리 행위를 근거로 활동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본능대로 살지 못하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도록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이 간섭하심이 징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과 반하는 곳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법 아래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법이 편해요.

 

법이란? 행위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툭 하면 자기 행위를 의지하게 된단 말입니다.

자기 행위에 따라서 춤을 추어요.

 

이 모두가 우리가 은혜의 나라를 유업을 이을 아들임에도 잠시 동안 율법 아래서 종노릇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틈만 나면 몸뚱이가 종처럼 살고자 한단 말입니다.

종은 법으로 살아요.

자기 행위를 근거로 산단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종의 근성이 자리 잡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 종의 근성대로 자기 행위를 의지하게 되면 지게 작대기로 후려 패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놈에 새끼가 왜? 또 은혜로 살지 않고 법으로 사느냐고 득달을 해요.

왜? 믿음으로 살지 않고 행위로 사느냐고 채근하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자기 백성들을 넘어지게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넘어뜨리지 않으면 계속해서 법으로 자기 행위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가만 놔두면 마귀의 법에 걸려들어서 종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얼마나 은혜의 말씀인줄 몰라요.

가만 두면 우리 모두가 소돔 고모라 백성들처럼 망해요.

육신의 자녀들과 같이 망하는 자들이 가는 길인 율법 아래서 종 노릇 하게 된단 말입니다.

자기 행위에 따라서 춤을 추게 된단 말입니다.

 

개그콘서트에 “오빠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것처럼 마귀에게 농락당한단 말입니다.

마귀가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은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날아가면 우리는 우리 행위로 춤을 추게 되어요.

아침에는 천당으로 갔다!

저녁에는 지옥으로 갔다!

신앙이 조석으로 춤추는 롤러코스트를 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걸 두고 보실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것으로부터 빼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거치는 반석이 되어서 넘어뜨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이 넘어지는 것이지 실제로는 믿음으로 살도록 반듯하게 세움을 입는 것입니다.

걸려 넘어져서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곰곰이 곱씹으면서 하나님의 애틋한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이 갈비에 양념이 배듯이 우리 삶 속 구석구석에 배여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라는 그 은혜의 맛이 나오도록 하여야 합니다.

 

좀 나긋나긋하시고!

좀 참아 줄줄 알고!

웃어 줄줄 아는 모습으로 사세요.

그 은혜가 그렇게 해 가실 것입니다.

 

부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안식하면서 행복하고 감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 아래서 마른 막대기처럼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던 자들을 은혜 안으로 불러 주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맛 보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법으로 살던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제부터 은혜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비록 은혜로 사는 것이 서툴지만 어린 아이를 간섭하듯이 간섭해 주셔서 한 걸음 두 걸음 은혜의 바다에 깊이 헤엄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의 맛이 삶 속에서 우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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