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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56강. 하나님 맘대로 이루어진 구원 (롬 9:10-18)

by coroa 2021. 8. 8.

 

 

56강. 하나님 맘대로 이루어진 구원 (롬 9:10-18)

-.정낙원 목사

 

 

 

죄인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뿐입니다.

즉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 주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성도의 신앙생활은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으로 되어지는것입니다.

마치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바라보는 개처럼 주인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얄팍한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빚지고는 못사는 것이 죄인의 고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용서 받고 살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자 합니다.

 

마귀는 늘 우리에게 다가와서 달콤하게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떳떳해 지라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떳떳해 지라고 합니다.

마치 탕자 비유의 맏아들처럼 아버지 명을 어기지 않음으로서 말이에요.



맏아들이 열심히 일을 한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에요.

귀한 것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몸에서 토해진 것을 버리지 않아요.

그걸 의로 삼고 힘으로 삼아요.

그래서 자기가 행한 것을 앞세우고 아버지가 하는 일에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의(義) 쌓기에 분주합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거 기쁘게 할 것인가를 궁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은혜로 나아가지 않고 법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요.  

신앙의 본질을 놓치게 만들어요.

신앙의 본질은 은혜에요.

법이 아니에요.

 

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법으로 나오는 자는 죽이고, 은혜로 나오는 자는 살려요.

법은 우리 행위로 나오는 것이고, 은혜는 예수 믿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법은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들고 나오는 것이고, 은혜는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나오는 것입니다.

 

좋은 것 하고 옳은 것은 다릅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의(義)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의(義)란? 옳은 것을 말해요.

신앙은 하나님이 옳다고 제시한 정답을 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신 정답이 있어요.

그것이 뭔고 하니, 예수그리스도의 의에요.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은 예수님의 피 뿐입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분이 누구신가요?

예수님입니다.

아래서 난 자들은 다 죄인이고 하늘로서 난 자는 의인이에요.

 

알다시피 인간은 아래서 낳고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났어요.

하늘로서 난 예수는 죄가 없는 의인이고, 아래서 난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들은 그 자체가 그른 자들인 것입니다.

 

그른 자들에게 나오는 모든 것은 그른 것이에요.

그른 자들 안에서 옳음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죄가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서 그름에서 옳음을 찾고자 한단 말입니다.

자기 행함에서 의로운 것이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가 나에게서도 하나님의 옳음이 있다고 착각을 하게 만들어요.

 

어떻게 착각케 하는가 하면!

좋은 것으로 옳음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요.

좋은 것과 옳은 것은 달라요.

 

이건 정답(正答)과 오답(誤答)의 문제에요.

좋은 것은 정답이 아니에요.

정답은 오직 문제가 요구하는 답을 내어 놓아야만 합니다.

 

신앙의 정답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는 틀렸고 예수님만 옳은 분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말씀이에요.

 

나도 옳고 예수도 옳고는 없어요.

내가 옳으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요.

내가 틀렸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너는 틀린 자이므로 예수를 붙잡으라는 말이에요.

 

그러므로 신앙의 정답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정답을 흐리게 만들어요.

어떻게 흐리게 하는가 하면 좋은 것으로 흐리게 해요.

 

굉장히 중요한 말이니 잘 이해하세요.

 

성화주의자들과 논쟁을 하면 반드시 그들은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뭐가 잘못 되었느냐 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신앙의 옳음은 아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옳음이 되려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그것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義)가 되어야 해요.

의(義)가 되어야 옳음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행함에서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이처럼 의인에게서는 의(義)가 나오고, 죄인에게서는 죄가 나옵니다.

우린 죄인입니다.  

죄인인 우리에게서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義)가 나올 수가 없어요.

이건 우리가 예수 믿어도 마찬가지에요.

예수 믿는다고 우리 몸이 천사처럼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성도가 천사처럼 변하여야 한다고 해서 엄청 다툰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천사는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천사는 우리와 같은 죄 아래서 난 육신이라는 몸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육신이라는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 몸은 흙에서 났어요.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육신이라는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죄를 안 지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죄를 짓기 때문에 늘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도 의(義)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좋은 것이지 의(義)가 아니에요.

의(義)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만 있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의(義)가 아니란 말은 정답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좋음은 될 수가 있어도 옳음은 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신앙의 포카스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두어야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에 두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의(義)가 된다고 하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면 되니까요.

알다시피 예수는 자기에게는 의(義)가 없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죄인들이 믿어요.

나에게는 의(義)가 없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믿는단 말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이 이 말을 이해를 못해요.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건 성도의 신앙의 속성이에요.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은 성도의 신앙에 지향성이지 본질은 아니에요.

신앙의 본질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성도로서 가져야 할 마음에 자세이지 그 자체가 의(義)가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의(義)가 되지 않기 때문에 신앙의 본질로 붙잡고 있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義)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주어져요.

그것도 공짜로,,,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을 믿음에 두어야지 말씀 지킴에 두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옳음은 아니에요.

 

옳음은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나아가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들고 나가지 않아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의(義)는 예수의 피를 내어 놓는 것이어야지 말씀대로 살았다는 자기 행함을 내어 놓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는 안 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내 독자적으로 의로워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씀을 지켜서 독자적으로 의로워 질 수가 있다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 질 수 있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창세전에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을 준 적이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것으로 언약을 하셨어요.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좋은 것일 수는 있어도 옳은 의(義)가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제시한 구원의 길을 주 예수를 믿음으로서 주신 것은 예수님에게서만 하나님의 의(義)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옳은 자로 보세요.

그래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군중들에게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합니다.

이는 자기 가능성을 전부 버리라는 말입니다.

나는 안 된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싸움은 늘 믿음에 싸움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무엇을 할까요? 가 아니라!

무엇을 믿을까요? 로 우리의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항상 무엇을 믿을까? 는 가리고!

무엇을 할까요? 에 우리의 관심사를 고정시키고자 해요.

신앙의 본질을 놓치게 한단 말입니다.

어떻게 본질을 놓치게 하는가 하면 좋은 것으로 정답을 가리게 하는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게 에덴동산에서 뱀이 여자를 미혹할 때 사용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어요.

영생하는 자가 되려면 생명과를 먹어야 해요.

 

생명과를 먹지 않은 상태에서 그 어떤 것을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틀린 것이 되어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옳은 것은 생명과를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뱀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아요.

알다시피 뱀은 마귀를 상징합니다.

인간은 육이고 마귀는 영이에요.

육은 영을 이기지 못해요.

 

그래서 성경은 뱀을 일컬어 하나님이 지으신 것 중에서 뱀이 가장 간교하다고 말합니다.

간교하다는 말은 지혜롭다고 말이에요.

간교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룸” 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원래 교활이나 간교 등의 의미가 아니에요.

 

이 말은 “지혜롭다” 혹은 “슬기롭다” 라는 의미에요.

70인 역인 헬라어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아룸”을 “프로모니스”라고 쓰고 있어요.

그런데 이 “프로모니스”를 슬기롭다고 해요.

좋은 의미로 사용해요.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지혜로운 자를 간교하다고 말하지는 않잖아요.

뱀이 만약에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마도 간교하더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입견에 뱀이 나쁘다고 생각해서 뱀에게는 간교하다고 쓰는 것입니다.

 

여기서 뱀이 가장 지혜롭다는 말은 곧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 있다는 말입니다.

뱀은 인간이 영생하는 길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뱀은 사단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알다시피 사단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자에요.

사단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진리를 흐리게 하는 일이에요.

생명을 가리게 하는 일을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뱀은 선악과를 가지고 여자의 시선을 생명과에서 떼어 놓는 일을 한 것입니다.

여자의 시선이 생명과로부터 멀어지면 사단의 궤계는 성공한 것입니다.

여자의 시선이 선악과에 매여 있는 한 생명과 와는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뱀은 여자의 시선을 선악과에 잡아 두는데 성공합니다.

여자가 선악과를 보는 순간 그 화려함에 빠져 들고 맙니다.

선악과가 생명과를 가리고 만 것입니다. 

여자의 시선이 선악과에 고정되자 뱀은 배시시 웃습니다.



이제부터 여자는 선악의 싸움을 하게 합니다.

뱀은 여자로 하여금 선악과를 가지고 선이냐 악이냐 싸우게 만들었어요.  

여기에 걸려들면 일평생 헛 싸움만 하게 되어요.

왜냐하면! 선악과 속에서는 하나님의 의(생명)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생명)는 오직 생명과 속에서만 나와요.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율법과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나타나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는 선악과이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생명과에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와 예수 믿기로 나누이게 됩니다.  

마귀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로를 가지고 예수 믿기를 가려버립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에는 내 의(義)가 쌓이지만,

예수 믿기는 내 의(義)는 차압당하고 예수님의 의(義)만 쌓여요.

 

하나님은 인간의 의(義)를 원치 않고 예수님의 의(義)를 원해요.

우리 의(義)는 죄인의 의(義)이기 때문에 틀린 것이고,

예수님의 의(義)는 의인의 의(義)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그것이 의(義)가 된다고 미혹해요.

그래서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면 항상 자기 가능성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은 들고 나오게 된단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과 옳은 것을 구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좋은 것은 될 수가 있으나 옳음은 아니에요.

옳음은 오직 예수님의 피 안에만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의 초점을 맞추면 안 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맞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서 자기 죄를 고발당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좋은 것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옳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예수 믿기로 나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는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하지요.

이는 제사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제사 속에 담겨져 있는 애통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제사를 왜? 지냅니까?

죄 때문에 지내잖아요.

그럼 제사를 지낼 때 어떤 마음으로 지내야 합니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지내야 하겠지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제사 지낸 것을 의(義)로 들고 나왔어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비유한 것을 들어 보세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지킴을 근거로 나오잖아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기도한 것으로 나왔어요.

상한 마음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어요.

 

상한 마음이 없는 제사는 틀린 것이에요.

제사 자체는 좋은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제사 속에 당연히 담겨져 있어야 하는 긍휼의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차라리 제사 안 지냄만 못해요.

바리새인들은 제사 지냈다는 것 때문에 망하고 만 것입니다.

결국 제사가 긍휼을 가리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열심은 좋은 것이에요.

그러나 그 열심이 옳음의 자리를 차지 할 때는 악(惡)이 되고 말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이야기를 해 주고 있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는 말씀이에요.

인간의 의를 기각하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꿈을 먹고 삽니다.

꿈이 없으면 살아갈 의욕을 상실해요.

그 꿈이란? 모든 사람들이 대동소이해요.

 

자기 이름을 내는 것입니다.

유명해지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영웅주의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떨치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으면 성공 하였다고 합니다.

 

이걸 네피림 사상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네피림 사상이 있어요.

영웅이 되고자 하는 본성이 자리 잡고 있단 말입니다.

 

인간은 자존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러한 본성이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행사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자존감을 갖게 되어요.

한마디로 뿌듯함을 느껴요.

 

자존감을 다른 말로 보람을 느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피곤해 하면서도 봉사 활동을 하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서 내가 누구를 도왔다는 보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자신이 하는 봉사 활동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몸이 피곤한데도 봉사 활동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그 일을 통해서 보람을 느낀다고 해요.

비록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이 뿌듯하다는 겁니다.

하고 나면 자신이 대견스럽다고 해요.

 

이걸 역(逆)으로 말해 보세요.

인간은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일은 하기 싫어한다는 말이 됩니다.

만약에 봉사를 해도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면 봉사 활동을 할까요?

안 해요.

 

왜? 안 합니까?

자기 뿌듯함이 없는데 왜? 합니까?

자신의 가치를 챙기지 못하는데 왜? 합니까?

그래서 인간들은 가치 없는 일을 하지 않아요.

 

인간은 무엇을 하여도 거기에 대한 댓가를 찾게 되어 있어요.

자기 사랑입니다.

이건 본능이에요.

인간들의 이러한 자기 사랑은 자기를 존재케 하는 근원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펴면 이걸 죄라고 합니다.

 

아니~ 내가 수고하여서 내 영광을 챙기겠다는 것이 뭐가 잘못 되었나요?

내 열심과 내 충성으로 내 의(義)를 챙기겠다는 것이 왜? 죄가 되나요?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착하게 살아서 내 보람을 찾는다고 하는데 이게 왜? 죄가 되느냐 에요.

 

우리 스스로 이 명제에 대하여 답을 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답을 알려 드리고 이야기 합시다.

왜? 내가 착하게 산 것으로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이 죄가 되느냐 하면 창세전 언약에 보면 착하게 사는 자를 구원한다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에는 예수 믿는 자를 구원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착하게 산 것이 뭐가 잘못입니까? 라고 따지는 사람들은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여서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돌아가신 친척이 있습니다.

이 분이 살아 계실 때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착하게 살면 되었지 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느냐고 역정을 내세요.  

예수쟁이들은 예수 믿고 천국에 간다고 하는데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요.

세상에서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어요.

 

인간들은 천국은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을 해요.

이게 죄가 주는 착각이에요.

죄인들은 인과응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어요.

  

인과응보(因果應報)란? 행한 대로 받는다는 사상입니다.  

이게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론이에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결과를 가지고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간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누가 착하게 살다가 죽으면 그 사람은 천국에 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착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에요.

악당들이 가요.

아~! 이것도 폭탄 발언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천국에는 예수 믿는 자들이 가는 곳이란 말입니다.

 

예수는 누가 믿는가요?

자기가 죄인인줄을 아는 자들이 믿어요.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믿지 않아요.

그래서 천국에는 악당들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상식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세상은 상식으로 삽니다.

그런데 신앙은 상식으로 하면 망해요.  

그 이유는 인간의 상식은 죄인의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와 있는 사건들을 가지고 “나는 이렇게 생각 한다” 라는 식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하나님 안목(眼目)으로 보셔야 해요.

 

하나님의 안목은 성령이 주세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눈(眼)을 주셨어요.

성령이 오시면 이 눈이 떠져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지요.

이건 새로운 눈을 받게 되었다는 말이에요.

그동안 바울은 율법 지킴이라는 눈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했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야 하는 믿음에 눈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눈을 뜨고 난 후에는 예전에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들이 틀렸다고 하는 일과 싸움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 동족들에게 너희가 옳다고 하는 그 율법 지킴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건 좋은 것이지 옳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옳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있다고 합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새로운 눈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바울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일곱 영이라고 합니다.

일곱이란? 하늘에 숫자인 3과 땅에 숫자인 4를 합한 수에요.

하늘은 묵시이고 땅은 역사에요.

 

땅은 묵시를 드러내고자 창조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하늘이 땅에다가 하늘에 일을 펼치세요.

이게 7일 창조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는 창조의 수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7일 창조니!

7일 안식일이니!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도는 것이나!

 

아시아의 일곱 교회나!

일곱 인이나!

일곱 대접이나!

일곱 나팔이나!

 

성경 속에는 수 없이 일곱이라는 말이 많이 나와요.

이는 곧 성경은 묵시에 속한 하늘나라 이야기들을 인간들 세상에서 펼쳐 보이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묵시에 속한 일을 역사 속에서 풀어내는 일을 누가 하는가 하면 성령이 하세요.

그래서 성령을 일곱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곱 영이신 성령이 세상으로 올 때는 일곱 눈(眼)으로 오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니이다” 라고 하지요.

이건 이 땅은 아버지의 뜻을 보여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이 일을 누가 하시는가 하면 성령이 하세요.

 

땅을 광의적으로는 온 세상을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자신이에요.

성도가 땅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세요.

우리를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게 하신단 말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중에 있지요.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신(神)이 운행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신(神)이 바로 성령(聖靈)이에요.

 

이 성령이 창조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일컬어 창조의 숫자인 일곱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은 창조의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창조란? 창세전 언약을 성취하는 것을 말해요.

 

역사는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는 곳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창세전 언약을 성령이 이루어 가세요.

중요한 것은 이 성령이 이 세상으로 오실 때에는 일곱 눈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을 봅시다.

 

계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하나님의 일곱 영이 있지요.

그런데 이 일곱 영에게는 일곱 눈이 있어요.

하나님이 이 일곱 눈을 온 땅에 보내시지요.

 

일곱 눈이 누구에게 왔는가 하면 성도들에게 왔어요.

하나님이 하늘나라 백성들에게 일곱 영이신 일곱 눈을 보내 주셨어요.

왜? 일곱 눈을 보내 주셨나요?

 

이는 땅에서 하늘나라를 보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서 하늘나라 이야기로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늘나라는 창조의 세계에요.

그러므로 성도는 창조의 세계에서 오신 일곱 영이신 성령을 받으면 일곱 눈을 갖게 되어요.

 

일곱 눈이란? 하나님의 창조에 일을 보게 하는 눈이에요.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게 되어요.

창세전 언약으로 내 인생을 보게 되어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벌리는 창조의 일이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창조를 말할 때 섞여 있는 것을 갈라내고 채우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만든 행위를 말해요.

원인에 의한 결과를 창조라고 해요.

이건 마치 설계도를 가지고 물건을 만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창조라는 말의 뜻이 무엇 무엇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어떤 근거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는 말입니다.

그 근거가 되는 원인이 바로 창세전 언약이에요.

 

우리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창조가 되었어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도 창세전 언약 때문이에요.

성경에서 일어나는 사건도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예수 안에서 구원을 하신다고 했어요.

예수 안에 있는 자를 천국으로 보낸다고 했어요.

착하게 살면 천국에 보내 준다고 하지 않고 예수 안에 있는 자를 천국에 보낸다고 했어요.

그러니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으로 판단하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식으로 살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상식으로 예수 믿으면 지옥에 가요.

여기서 말하는 상식이란? 죄인들의 상식을 말해요.

 

죄인들이 알고 있는 상식의 하나님은 상선벌악하고 인과응보 하는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은 착하게 사는 자는 천국에 보내고 악하게 사는 자는 지옥에 보낸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친척과 같이 예수 믿을 필요가 없고 착하게 살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열면 이러한 것을 여지없이 죄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비 언약적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다스려요.

 

이는 이 세상의 창조 자체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구원이 결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떻게 판단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정한 기준으로 판단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정한 기준이 뭔가요?

창세전 언약이에요.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만물을 창조 했어요.

 

그래서 만물은 철저히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다스리세요.

만물 속에 있는 것들도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판단하세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선택(選擇)과 유기(遺棄)가 있어요.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4-7=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들이 있다고 하지요.

이는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너희와 저희라고 해요.

너희는 자기 백성이고 저희는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에요.

 

이건 이미 창세전에 예정이 되었어요.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작정이 되었어요.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확정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정된 시나리오를 가지고 일을 하십니다.

이걸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고 하고 또는 절대 주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는 것은 절대로 바뀌지 않아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식언치 않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식언(食言)이란? 거짓말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식언치 않는다고 하였으니 하나님은 말씀 하신 것은 거짓말 하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걸 언약이라고 해요.

 

언약(言約)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뜻을 말씀에 묶어 놓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합니다.

이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하신 약속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스스로에게 말씀으로 묶어 놓았어요.

야곱이 사랑 받을 짓을 해서 사랑 받는 것이 아니고! 또한 에서가 미움 받을 짓을 해서 미움 받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렇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錄名)을 했어요.

예수 안에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을 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가 믿어지도록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믿어지도록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우린 창세전에 예정된 그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대로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 바탕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걸 부정하면 인간의 가능성으로 나아오게 되어요.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착하게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해요.

이게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의 사고에요.

 

예수 바깥에 있는 자들의 사고에요.

그러니까 예수 바깥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강퍅이라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는 구원 받을 자와 구원 받지 못할 자가 있어요.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유기하는 것은 하나님 마음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여기에 따를 뿐이에요.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은 하나님이 책임지고 구원해 주세요.

 

성령이 오시면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을 구분해서 대우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이 일하심을 알게 하시려고 일곱 눈이신 성령을 보내 주신 겁니다.

 

성도는 일곱 눈을 받은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하늘에 뜻이 어떻게 땅에서 이루어져 가는지를 알아요.

예수그리스도가 창세전 언약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므로 하늘에 눈인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성경의 이야기들을 창세전 언약을 모티브로 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일어섬과 넘어짐을 창세전 언약에 의한 선택과 유기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의 지혜로 이해 할 수 없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십자가는 비밀이에요.

무슨 비밀인가 하면 구원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비밀이라 함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 받는 자와 버려지는 자들이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선택당하는 자와 유기당하는 자들이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선택을 입은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원의 능력으로 받아들이고!

유기 된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하는 것을 미련한 것이라고 하여서 배척을 해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는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선택을 입은 자와 유기 된 자들을 갈라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는 자기 백성들이 구원받는 이야기를 할 때는 반드시 버려지는 자들과 한 셋트가 되어서 이야기가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가 있는가 하면 예수 믿지 않는 자가 있어요.

이는 서로를 드러내 주고 있어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받고 어떤 사람은 받지 않아요.

왜? 믿는 사람이 있고 안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는 각자 선택과 유기 된 자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해도 안 받아 들인다고 해서 섭섭해 하고 안타까워 할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다르게 대우하고 계신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둘 다 똑 같아야 할 이유가 없어요.

한 사람은 믿어지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안 믿어지기 때문에 안 믿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에겐 믿어지도록 일을 하시고, 유기 당한 자에게는 안 믿어지도록 간섭을 하세요.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변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을 보면 쯧~ 쯧~ 쯧~ 혀를 차지 말고!

나도 저 사람들처럼 안 믿어져야 정상인데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믿어지는 은혜를 주셨구나! 라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복음 아는 것을 자랑하여서는 안 되어요.

복음은 자랑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감사하라고 주신 것이에요.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어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영생하고자 하는 본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본성이 영생불사(永生不死)를 추구하게 합니다.

인간들이 종교를 만든 것도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입니다.

종교를 통해서 영생하고자 합니다.

 

내가 영생하고 싶은데 내 독자적인 힘으로는 불가능하니까 종교(신)의 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만든 모든 종교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는 신(神)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고 이용 대상이에요.

 

철저히 자기 필요에 의하여 신을 찾아요.

결국 신앙의 주체를 인간이 갖고 있는 것입니다.

신(神)을 선택해도 내가 하고 신(神)을 찾아가도 내가 찾아가요.

신(神)은 고정 되어 있어요.

이걸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앙의 주체를 인간에게 두고 있어요.

 

세상 종교는 인간의 행함을 신앙의 근본에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 영생을 따 낼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어요.

당신도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가능성을 제시해 줍니다.

이걸 다른 말로 당신도 의로워 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종교인들은 천국과 지옥은 내가 이생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로 결정이 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이성에 딱 들어맞아요.

왜냐하면! 죄인은 무슨 일을 해도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행사하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펴면 이러한 것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는 “원하는 자로도 말미암지 않고 달음박질하는 자로도 말미암지 않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는 긍휼히 여기고 강퍅케 할 자를 강팍케 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가능성은 원천 봉쇄를 하고 있는 말씀이에요.

한마디로 말해서 누구 맘대로 천국에 오느냐 입니다.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 맘대로 하신다고 합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건 인간의 주체를 완전히 묵사발 내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냥 내가 사용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야곱과 에서를 동원하고 모세와 바로를 가지고 말해줍니다.

 

그럼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살펴봅시다.

 

야곱이 누구인가요?

어미 태로부터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되어서 태어난 자입니다.

야곱은 어미가 잉태하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된 자로 태어났습니다.

 

이건 이미 확정된 것이에요.

완료이고 완성 된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작정 했다는 것은 곧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역사에서 창세전으로 역순(逆順)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미 확정된 사건을 역사 속에는 미완료의 모습으로 풀어 놓으셨어요.

역사는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고자 한시적으로 둔 곳이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있는 미완료의 세계에요.

 

그래서 성도의 구원은 역사 속에서는 이루어 가는 미완료의 모습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전 언약에서 보면 완료이고 완성이고 확정된 것이에요.

하지만 시작과 끝이 있는 흐르는 역사 속에서 구원을 펼쳐 보이기 때문에 미완료의 형식을 띠고 주어진 것일 뿐입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세요.

그래야 성화주의자들에게 속지 않아요.

흔히 성화주의자들이 그럽니다.

 

그 따위로 해서 구원을 받겠느냐고!

분명히 말합니다.

야곱처럼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된 자들은 그 따위와 상관없이 구원이 주어져요.

왜냐하면! 야곱의 구원은 그 따위와 상관없이 창세전 언약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창세전 언약이 심겨진 성도는 그 따위와 상관없이 넉넉히 구원을 받아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야곱의 구원을 보세요.

어디 야곱이 구원 받을 짓을 했나요?

아니에요.

 

야곱은 자기 꾀로 살았어요.

야곱은 언약으로 살지 않았어요.

언약이 야곱을 간섭하는 식으로 살아감을 당했어요.

 

하나님은 야곱을 언약으로 간섭을 하셨어요.

그래서 야곱은 늘 자기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원함으로 살지 못하였어요.

사사건건 하나님으로부터 간섭 당하면서 살았어요.

 

이를 야곱은 험악한 세월이라고 합니다.

왜? 자기 인생을 험악하다고 합니까?

이는 자기 원대로 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야곱은 자기 원대로 살지 못하였나요?

이는 자기 안에 창세전 언약이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에는 역사에 뿌리 내리고 사는 것이 없어요.

역사를 떠나 묵시로 가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야곱은 늘 떠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는 창세전 언약이 자기 백성들을 잠시 역사라는 곳에 보내서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고 묵시라는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야곱의 후손들에게 보여 주셨어요.

야곱에 후손이 누구인가요?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에게도 언약이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도 아비 야곱과 같이 자신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에 의하여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된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잘 나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고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애굽으로 가서 하나님이 정한 때까지 종 노릇하다가 때가 되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죽음이 재앙으로부터 살아나고 출애굽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곧 우리가 이루어가는 구원의 모습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다루어 가세요.

그래서 우리도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속성이 있어요.

 

이 둘은 서로를 드러내주는 역할을 해요.

하나님은 사랑이에요.

그런데 사랑은 미움이 없으면 드러낼 수가 없어요.

 

사랑을 드러내고자 미움을 동원하여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사람이에요.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는지를 아는가요?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지 못한 자들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곁에 미움 받은 자들을 그림자처럼 붙여 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짝이에요.

모세와 바로도 짝이에요.

그래서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긍휼이 여기고, 바로는 강퍅케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르게 대우하셨다는 말입니다.

다르게 대하신다는 것을 누구에게 알려 주고자 하는 가요?

자기 백성들이에요.

 

그러니 야곱은 에서를 통해서 야!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대접을 받고 있구나! 를 알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와 다른 자들을 우리 주변에 배치해 두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강퍅한 자에요.

강퍅한 자들 중에서 은혜를 입은 자들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어요.

 

모세나 바로나 다르지 않아요.

둘 다 한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긍휼을 입혀 주었어요.

 

모세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바로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지 못하였을 뿐이에요.

에이~ 바로 이 나쁜 놈!

그러면 안 되어요.

 

어떤 사람이 강퍅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 강퍅한 자입니다.

자기가 죄인인줄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강퍅한 사람이에요.

 

이걸 역(逆)으로 말하면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긍휼을 입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보니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복 받은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시편 1편을 봅시다.

 

시 1:1-6=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복 있는 사람이란? 복 안에 있는 사람이란 뜻이에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복을 받았기 때문에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요?

주야(晝夜)로 율법을 묵상한다고 하지요.

이는 언약을 기억하고 산다는 말입니다.

내가 사는 바탕은 언약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절을 좇아서 과실을 맺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구원에 흔들림이 없이 감사하고 산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창세전 언약에 바탕을 두고 사니까 불안하거나 두려움이 없지요.

그러니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늘 푸르른 것입니다.

늘 기쁨을 잃지 않고 감사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에 근거하지 않는 자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요.

늘 자기 행동으로 인하여 미친년 널뛰듯이 해요.

조석(朝夕)으로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악인이에요.

 

악인이 누구인가 하면 자기 행위로 구원의 근거를 삼고 있는 자에요.

오만한 자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하면 인간의 행위로 의롭다고 하면서 의인이라 행세하는 자들의 자리에요.

오만한 자는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에요.

우린 모두가 오만한 자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 주신 일곱 영이신 성령이 주신 일곱 눈을 받고 보니 내가 가련하고 가난하고 발가벗은 죄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거기다가 이러한 천둥벌거숭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된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찬미가 나오는 것입니다.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강퍅한 삶이란? 은혜를 모르는 것이에요.

바로는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보았어요.

그럼에도 하나님을 대적했어요.

 

신앙생활이란? 큰 일을 하고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하루 하루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바로처럼 강퍅하게 살아요.

 

우린 다 바로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이 임합니다.

긍휼이 임하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아! 내가 창세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기로 작정이 된 자이구나!

그래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꼭 어떤 사람들이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긍휼을 입을 수 있느냐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방법이 없어요.

 

예수님 앞에 어떤 청년이 찾아옵니다.

그리곤 묻습니다.

선생이여!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말은 영생을 어떤 조건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모르겠으니 예수님에게 알려 달라고 합니다.

방법만 알려 주면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법 아래 있는 자들의 발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합니다.

나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강퍅케 할 자를 강팍케 하신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조건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다고 합니다.

 

어떤 근거로 하십니까?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긍휼히 여겨서 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는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녹명하지 않았어요.

그냥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어요.

정하신 그대로를 역사 속에 보내서 때가 되어서 각 사람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적용을 하시는가요?

이는 창세전 언약대로 적용하세요.

창세전 언약에 그 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주신다고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전에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된 자들에게 예수의 피를 뿌리는 일을 하십니다.

 

이를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 때 보여 주셨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린 양의 피를 바르라고 알려 주었어요.

그럼 내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가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들을 죽일 때에 죽음의 사자가 애굽 사람들의 집에만 찾아 간 것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사람들 집집마다 다 찾아갔어요.

 

그런데 어린 양의 피가 발려져 있는 집은 넘어 갔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그 피를 보고 그냥 넘어 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만 피를 바르라고 알려 주셨는가요?

이는 창세전에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살아난 이스라엘은 애굽에 장자들이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고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우쭐해야 합니까?

아니지요.

 

자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별 다른 은혜를 입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지요.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지요.

그리하여 그 은혜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자기들도 마땅히 애굽에 장자들이 죽을 때 같이 죽었어야 했어요.

그런데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났어요.

이 모두가 하나님이 애굽 사람과 다르게 대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자들은 이제부터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어린 양의 그 피를 찬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지요.

자신의 인생은 덤으로 산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지요.

어떤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감사하여야 하겠지요.

 

아니 애굽에 장자들이 다 죽어 나가 자빠질 때 살려 주셨잖아요.

그럼 앞으로도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살려 주시겠지요.

그런 믿음으로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살지 않았어요.

출애굽을 하고 나자 광야에서 사사건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평했어요.

자기들 입장에서만 판단했어요.

 

바로처럼 강퍅하게 살았어요.

그래서 성경은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을 바로처럼 하나님을 열 번이나 배반했다고 합니다.

그럼 바로처럼 죽여야 하잖아요.

 

바로는 강퍅하다고 죽였잖아요.

그런데 왜? 이스라엘은 안 죽입니까?

이건 차별이에요.

 

죽이려면 둘 다 죽여야 해요.

그래야 공평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공평치 않게 대하십니다.

애굽에 바로와 이스라엘을 차별하여 대하십니다.

 

왜? 그런가요?

이스라엘은 창세전에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잘나서가 아니라 언약이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우리가 이스라엘이에요.

날마다 법대로 하면 열두 토막 더 내서 죽여야 해요.

그런데 버젓이 살고 있어요.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나요?

아니에요.

우린 그들보다 더 악당들이에요.

 

그들은 양심이라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양심도 없어요.

뻔뻔스러워요.

 

그러면서 천국에 간다고 큰 소리쳐요.

맞아요.

큰 소리 치세요.

 

무슨 근거로!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큰 소리 치세요.

이 못난 죄인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도 크나이다!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이 믿음을 버리지 마세요.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세요.

또한 이 믿음으로 사단의 참소도 이겨 내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넉넉히 이겨 내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웬 은혜입니까! 웬 사랑입니까!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입었음을 알았습니다. 그 큰 은혜에 감사케 하옵소서. 내가 낙심 될 때마다 창세전 언약이 기억나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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