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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성경강해)61강.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그리스도 (롬 10:1-4)

by coroa 2021. 9. 7.

 

 

61강.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그리스도 (롬 10:1-4)

-.정낙원 목사

 

 

 

롬 10:1-10=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성도를 일컬어 언약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이는 창세전 언약으로 생겨난 자란 뜻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글자 그대로 창세 전에 만들어진 언약입니다.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맺은 언약이란 말입니다.

왜? 이 말을 강조하는가 하면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맺은 언약이라고 한다면 피조물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은 언약을 지킬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생기기 전에 맺은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전 언약은 피조물과의 언약이 아니고 창조주와의 언약인 것입니다.

 

창조주가 누구신가요?

하나님이에요.

성부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세요.

 

그러니까 창세전 언약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간에 맺은 언약인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언약을 집행하시는 분이므로 실질적으로 언약을 맺은 주체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인 것입니다.

 

언약이 되려면 반드시 언약을 지킬 주체가 있어야 하겠지요.

언약을 지킬 주체가 누구인가요?

그야 당연히 언약을 맺으신 분입니다.

 

그럼 언약을 누가 누구랑 맺었나요?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했어요.

 

그래서 창세전 언약을 아들에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 안에서 만물이 나왔어요.

그래서 성경은 만물이 아들이신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그가 창조가 하였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만물 속에 포함이 된 우리는 언약을 지킬 대상이 아니고 아들이 지킨 언약의 혜택을 누릴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거저 주시는 것을 말해요.

선물이에요.

과거에 임금이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면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라고 하지요.

 

구원이 뭔 줄 아세요.

하나님으로부터 성은을 입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탁 깨 보면 그 속에 긍휼과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덮어주심이 있어요.

한마디로 불쌍히 여김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우리 스스로 구원 될 수가 없고 의로워 질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속에는 인간이 하여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대신에 하나님이 성도에게 하시는 모든 일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벌리는 모든 일은 은혜에요.

은혜 아닌 것은 단 하나도 없어요.

 

사는 것도 은혜이고 죽는 것도 은혜에요.

흥하는 것도 은혜이고 망하는 것도 은혜에요.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흥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을 봅시다.

 

삼상 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죽이고 살리고!

내리고 올리고!

가난케 부하게!

낮추고 높이고 하시지요.

 

모두가 극과 극이지요.

요즘 한창 유행하는 말처럼 오빠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누가 하신다고요?

하나님이 하세요.

 

누구에게 하시는가요?

자기 백성들에게 하세요.

 

제발 이러한 말씀들을 흘러 듣지 마세요.

우리는 고약해서 하나님 말씀조차도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만 편집을 해서 들어요.

그래서 복 받는다는 말을 하면 좋아라 하고 저주 받는다고 하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이걸 귀가 할례 받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여러분 귀도 할례 받아야 해요.

거듭나야 한단 말입니다.

 

거듭남이란 하늘로부터 나는 것을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귀도 하늘에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린 모두 땅에 귀만 가지고 있어요.

 

성령이 임하면 귀가 할례를 받게 되어요.

그럼 하늘에 소리가 들려지기 시작을 합니다.

성경이 하늘에 이야기로 들려지고 보여져요.

 

하늘에 소리로 들려지면 사무엘이 말하는 흥하고 망하는 소리도 다 복으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 들려지게 된단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환경이나 조건이나 상관치 않고 범사가 감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도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찬송과 기도를 하지요.

감옥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요.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감옥 속에서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였어요.

 

아니~ 온 몸은 매를 맞아서 피 투성인데 어떻게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이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아요.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 상식에 반하는 일을 했단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나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과 실라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사모하여야 하는 것은 은혜가 모든 사건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는 눈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의 눈이 열리면 시편 23편의 목자와 양의 이야기가 더 없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복음으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을 보고 갑시다.

 

시 23:1-6=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건성 건성으로 보지 마시고 잘 음미하면서 보세요.

여호와가 나의 목자에요.

누가 목자라구요?

하나님이!

 

우리가 부르는 그 하나님이 목자시라구요.

그런데 그 목자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한다고 합니까?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한다고 하지요.

푸른 초장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극과 극인 환경이에요.

인간적으로 보면 푸른 초장이 복의 자리라고 한다면 사망의 음참한 골짜기는 저주의 자리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복의 자리와 저주의 자리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길로 인도한다고 하나요?



“자기 이름을 위해서” 라고 합니다.

 

3절을 보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義)에 길로 인도한다”고 하지요.

 

무슨 길이라고요?

“의(義)에 길”이에요.

 

이걸 놓치지 마세요.

“의에 길!”

하나님의 의 안으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이 의가 신약으로 오면 예수 안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의가 나옵니다.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 믿는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의에 길로 인도한다는 것은 예수 안으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 꼬라지 보지 말고 예수 믿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린 죄인이에요.

죄인은 생래적으로 의에 길을 갈 수 없는 자들이에요.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인간은 누가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인간은 자기를 믿지 남을 믿지 않아요.

믿을 수가 없어요.

인간의 의식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믿던 자리에서 예수의 행위를 믿는 자리로 인도하세요.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의 자리에서 의에 자리로 나아가도록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이 간섭이 우리에겐 엄청난 아픔으로 다가와요.

왜냐하면! 우리 것(의)을 빼앗아가는 형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간섭이 때로는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가는 것으로 나타나요.

 

포로 잡혀 간다는 것은 모든 것을 빼앗긴다는 말입니다.

내가 의지 하던 것을 의지 할 수 없게 하신단 말입니다.

우린 우리가 의지하던 것을 빼앗기면 죽는 줄 알아요.

그래서 우리는 포로 잡혀 가는 것을 저주이고 재앙이라고 생각하지 복이고 평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예레미야를 통하여서 알려 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렘 29장 11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그러나 그 누구도 예레미야의 위로를 위로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모두가 하나님을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왜곡된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가 애굽에서 알아진 하나님 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애굽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이해하고 섬기게 된 것입니다.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깨트려 주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하나님을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왜곡으로 각인이 된 어그러진 하나님 상을 바로 잡아 주는 일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맨 날 징계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언약 속에 담겨져 있어요.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언약으로 맺어졌다는 것은 언약으로 다스려진다는 말입니다.

언약 속에는 축복과 저주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축복과 저주로 간섭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란? 하나님 백성에서 잘라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건 부모가 잘못한 아들에게 가하는 징계를 말합니다.

 

언약 자체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언약이기 때문에 행위로 인하여 잘라내는 것은 없습니다.

행위로 인하여 잘라진다고 하면 그건 은혜가 아니라 법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법으로 대하시지 않고 은혜로 대하세요.

은혜를 다른 말로 사랑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33-39=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느 놈이 내 아들을 송사해!

그 놈이 누구냐!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하잖아요.

 

이건 하나님조차도 끊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끊어 내면 하나님은 식언(食言)하는 분이 되고 말아요.

거짓말 하시는 분이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들겨 패는 수는 있어도 잘라내는 것은 없어요.

이건 마치 내 자식이 속을 썩여도 호적에서 빼 낼 수 없는 것과 같아요.

부모와 자식은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의 관계이지 잘잘못으로 잘라내는 법적 관계가 아니에요.

징계는 가해도 잘라 낼 수가 없는 것이 사랑의 관계에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에요.

은혜의 관계로 있어요.

성도의 구원이 취소 될 수 없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계속하여 잘못을 덮어주는 것으로 다가 오기 때문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배도와 징계와 회개와 축복들이 반복 되는 것은 인간의 불가능성과 하나님의 은혜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것과 여기에 부응치 못하고 늘 반역하는 인간의 악함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백성 챙기기에 놀라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여야 해요.

하나님의 은혜에 압도당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은혜가 너무도 커서 우린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 할 수 밖에 없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보내셨습니다.

이는 달음질 잘하고 있는 자를 걸려 넘어뜨리려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두면 지옥으로 골인하니까 넘어뜨린 것입니다.

넘어지게 한 것이 사랑이에요.

 

하지만 달음질을 열심히 하는 자 입장에서는 사랑이 아니고 저주로 보여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방해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도움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항상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찌 될까요?

감사하겠지요.

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날 넘어지게 해 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구나!

이런 은혜가 어디에 있느냐! 라고 감사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보내신 것은 지금 자기 백성들이 잘못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막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과는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서 걸려 넘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딱지놀이를 참 잘했어요.

동무들과 놀이를 하면 항상 땄어요.

그래서 딱지놀이에 정신이 팔려서 해 지는 줄도 모르고 놀았습니다.

동무들로부터 따 놓은 딱지를 집에다 모아 놓고 자랑스러워하고 흐뭇해했습니다.

쌓아 놓은 딱지가 나의 영광이고 면류관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모아 두었던 딱지를 몽땅 불쏘시개로 태워 버렸어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맨날 헛짓을 하고 있으니 참다가 참다가 더는 못 참겠다고 하셨는지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고 자랑스러워하던 것을 다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이게 부모님의 아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잘못된 열심은 많으면 많을수록 손해가 큽니다.

반대로 적으면 적을수록 이익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빨리 부정당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손해가 적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문제라고 한다면 문제의 심각성은 더합니다.

자기 딴에는 하나님께 열심을 하였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그 열심을 인하여 피해를 입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자식들이 그릇된 길을 간다고 하면 어떤 심정입니까?

엉뚱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속이 뒤집히지 않겠어요.

그 일을 당장 때려치우게 할 것이 아닙니까?

 

이사야 1장을 봅시다.

 

사 1:1-15=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 ~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의 신앙상태를 말합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한마디로 꼴불견이라고 합니다.

눈 뜨고 못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실을 모릅니다.

지극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의 잘못을 고발토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절기 때마다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싫다고 합니다.

이제 그런 걸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언제 그런 걸 원했느냐?

이제 다시는 그 딴 것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건 다 헛된 제물이라고 합니다.

 

헛되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는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자기 열심으로 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딴에는 밥상을 정성껏 차렸다고 하는데 정작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으로 가득 차려놓은 것입니다.

 

이러면 이스라엘은 돌아 버립니다.

아니~ 율법에 보면 제사 지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자기들은 율법대로 착착 제사를 드렸어요.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누가 이런 제사를 드리라고 했느냐 라고 역정을 내고 있습니다.

이를 어찌 이해하여야 합니까?

이스라엘도 이러한 말을 들으면 꼭지가 돌아버려요.

하라고 해서 기껏 했는데,,

이건 아니잖아! 라고 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이런 걸 일컬어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해석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놓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해석하는 것이 달랐어요.

그러니 하고도 욕을 먹는 것입니다.

 

이러면 아니함만 못해요.

지금 예수님 앞에 유대인들이 그러해요.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시온에 가치는 반석으로 예수님을 보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나 예수님 초림 때나 그 영적 의미는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그럼 지금도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로마서를 읽고 있어요.

그럼 지금도 이사야 시대나 예수님 시대나 그 영적인 의미는 같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걸려 넘어져야 해요.

그래서 잘못된 열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일컬어 하나님에 대하여서 소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경이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소경이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이것 참 야단났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봅니다.

 

요 9:3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고 본다고 하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보지 못한다고 하면 죄가 없으려니와 너희가 본다고 하니 죄가 그저 있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안다고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감추시고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모릅니다! 라고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디 인간들이 모른다고 하나요?

다 안다고 해요.

밖에 나가서 물어 보세요.

 

다 하나님을 알아요.

자기들이 아는 하나님이 있어요.

이들이 안다고 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죄로 알아진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생각 할 때 소경이라고 하면 아무 것도 못 본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소경은 소경으로서 보는 눈이 있어요.

그들은 그들이 인지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요.

그래서 소경들도 살아가는 것입니다.

 

눈이란? 사물을 보고 인지하는 기관이에요.

흔히들 마음에 눈이라고 하잖아요.

이는 마음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소경인 인간들이 하나님을 인지하면 어찌 될까요?

소경으로 알아진 하나님이겠지요.

그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되겠지요.

자기들 마음대로 고안해낸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을 다른 신이라고 합니다.

우상이라고 해요.

우상이란? 인간들 입장에서 생각하는 신을 말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우상의 하나님을 섬겨요.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자기들 식으로 하나님을 섬겼어요.

 

그런데 이 자기들 방식의 섬김이 곧 진짜 하나님을 죽이는 우(愚)를 범하게 됩니다.

예수를 죽이게 되었단 말입니다.

예수가 와서 참 하나님을 알려 주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가 알려준 하나님은 틀린 하나님이고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오셨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므로 알 필요가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러면서 참 하나님을 알려 주려고 오신 예수를 이단이라고 하여서 십자가에 죽여 버렸습니다.

 

오호 통재라!

이를 어찌하여야 하오리까!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무지함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의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가 나옵니다.

 

의란?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인간들도 자기들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서로 자기 의가 맞다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는 서로 용남 할 수가 없어요.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달라도 너무 달라요.

 

하나님의 의는 하늘에 의고,

인간의 의는 땅에 의에요.

 

하늘과 땅은 천국과 지옥처럼 달라요.

천국과 지옥은 서로 용납이 안 되어요.

상대를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마치 빛과 어둠과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자기 것이 옳다고 할 것이 아닙니까?

내가 옳든지!

하나님이 옳든지!

 

내가 옳으면 하나님이 틀린 분이고!

하나님이 옳으면 내가 틀린 것이 되잖아요.

그럼 묻습니다.

 

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까?

최종적인 판단을 누가 내리느냐 입니다.

그 판단 내리시는 분이 바라는 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습니다.

 

성경을 펴면 하나님을 일컬어 심판주라고 합니다.

모든 만물이 선악 간에 자기 행위로 하나님 앞에 판단을 받게 됩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의로운 부활로 나아오고!

악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여기서 선과 악이란? 하나님이 판단하는 선과 악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를 선하다고 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를 악하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로 판단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에게 통고하신 하나님의 심판 기준입니다.

성경은 이 하나님의 심판 기준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의 앞에 자기 의를 철회하는 일들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 부인이라고 해요.

이건 우리더러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부인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늘 자기 부인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인간이란? 호흡이 있고 눈만 뜨면 자기 의를 쌓아가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자기 부인을 할 수 없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가 부인이 되는 자리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알게 하세요.

 

우리는 우리 의를 포기하지 못해요.

본능적으로 챙겨요.

자기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죄성이에요.

그럼 하나님은 따라 다니면서 허물고 깨트리세요.

 

그럼 우리는 가만 있지 않고 반발합니다.

가인처럼 왜? 내 제사를 거부합니까? 라고,,,

그래서 급기야는 하나님을 죽이는데 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그럽니다.

천국에는 자기가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아는 자가 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면 너는 날 죽일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폭로시켜요.

 

우린 하나님을 안 죽이고자 해요.

사랑하고자 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냐!

너는 나를 사랑할 할 수가 없어!

너는 나를 미워하고 죽이는 자야! 라고 합니다.

 

신앙의 싸움은 의 싸움입니다.

누구 의를 가지고 있느냐 입니다.

앞서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의 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의만 고집하는지 알아야 하겠지요.

 

그럼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만 고집하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를 말합니다.

반면에 자기 의란? 인간에게서 나온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도 의가 있고 인간도 의가 있습니다.

 

의란? 옳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되겠지요?

하나님이 옳으냐?

인간이 옳으냐?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하는 자는 지옥에서 살아요.

하나님 나라에 살려면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의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반면에 인간나라에서 살려면 인간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되어요.

 

요즈음 검찰총장의 혼외 자식 논란이 모든 매스컴의 헤드라인의 단골 뉴스가 되었어요.

결국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의 권좌에서 낙마하고 말았습니다.

왜? 낙마 했나요?

이는 인간들이 옳다고 하는 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검찰총장이 되기 위하여 청문회를 할 때는 야당 의원들이 당신은 어떻게 까면 깔수록 미담만 나오느냐고 칭찬 일색이었어요.

아마도 대한민국 청문회 제도가 생긴 이래로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세계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일들을 우리 야당 의원들이 했어요.

참 대단하신 분들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까도 까도 미담만 나온다던 그 분이 두 집 살림을 했다는 것이 보도가 되었어요.

내연녀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게 맞는지 안 맞는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현재 나타난 정황상으로 그 분은 더 이상 공직에 머물러 있을 자격이 못 된다고 하여서 사표를 내고 대통령은 이를 수리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그럽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고위공직자가 되려면 어려서부터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착하게 살도록 훈육하여야 할 것입니다.

최소한도 대한민국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려면 말입니다.

 

왜? 대한민국에서 성공하려면 착하게 살아야 합니까?

그 착함이 곧 의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옳음이기 때문이에요.

대한민국에서 출세하려면 이 옳음이 있어야 해요.

옳음은 곧 힘이에요.

 

자 이것을 그대로 하나님 나라에 적용해 봅시다.

인간 나라에서 살려면 인간의 의가 있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려면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어디에 있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가 어떤 것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인간의 의는 율법 지킴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롬 10:1-10=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지금 바울이 지기 동족들에게 안타까움으로 말합니다.

왜? 안타까워하나요?

자기 의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냥 복종치 않는 것이 아니고 힘써 복종치 않는다고 합니다.

힘써 복종치 않는다는 말은 극렬하게 반항하는 것을 말해요.

마치 가인이 자기 제사가 거부당하자 안색이 변하고 분이 가득하여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과 같아요.

가인이 분에 가득하여 아벨을 죽인 것은 곧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 동족들이 가인처럼 분이 가득하여서 힘써 하나님을 죽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죽이고 있나요?

자기 의가 부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지키고자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뭔데!

왜? 나를 틀렸다고 하느냐!

왜?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느냐!

 

사람은 기분 나쁘면 참지 못해요.

기분 나쁘게 하는 자는 응징하여야 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면 살인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린 이 사실을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처절하게 깨달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율법에 특심 할 때 내가 죄인인줄 몰랐어요.

내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꼈어요.

자랑스러웠어요.

남보다 특별한 열심을 갖고 있었으니까 내 신앙이 최고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복음을 깨닫고 난 뒤에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세상에 나 같이 악한 자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참 나쁘다!

이런 못난 인간이 살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겁니다.

 

더군다나 이런 인간이 목사 노릇을 하고 있어요.

거기다가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 더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이건 어떻게 설명이 안 되어요.

 

제가 복음을 전하면서 깜짝 깜짝 놀라요.

하나님 저 이래도 되는 건가요.

제 안에서는 늘 상한 심령이 일어나요.

그래서 하나님께 늘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기적 중에 이런 기적은 없을 겁니다.

이렇게 무능하고 못난 자가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은 제 머리로는 이해 불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아내에게 곧 잘 그럽니다.

여보! 하나님은 복음 하나 밖에 모르시는 분인 것 같아!

그래서 하나님이 참 두려워!

 

제가 아는 하나님은 복음 밖에 모르시는 분이에요.

복음 가지고 장난치면 화를 내세요.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이건 공포심으로 겁을 내는 두려움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야! 정낙원이! 잘 들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복음 하나 증거하기 때문이야!

이거 잊지 마!

그러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않고 복음 하나만 전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잘하고 못하고는 차치 하더라도 올바로 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저는 그런 마음으로 증거해요.

이 복음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칠 것 같은 겁니다.

 

이건 저주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담아 내지 못하는 아픔에서 오는 것입니다.

무엇과 같은고 하니 태권도 6개월 때는 두려움이 없이 잘난 척 하다가 고수가 되어가면서 점점 더 무게감을 느끼는 것과 같아요.

 

옛날에는 하나님이 가볍게 느꼈었는데 이젠 무거워요.

무거워도 너무 무거워요.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땐 열심이 있었으니까 하나님이 두렵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어요.

그런데 복음에 깊이를 알아 갈수록 하나님이 두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율법 아래서 안 하나님과 은혜 안에서 안 하나님은 그렇게 달라요.

 

하나님은 율법 지킴이라는 제사를 원하지 않아요.

도리어 율법 지킴이라는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와 예수를 믿는 의 둘 다 옳다고 하면 참 좋겠는데!

하나님은 이 두 의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에 의만 허용해요.

 

그래서 저는 신앙이란? 열심의 문제가 아니고 옳음의 문제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율법의 열심이 특심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 흠 없음이 예수그리스도 인들을 죽이는 일에 힘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흠이 있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흠 없음이 도리어 예수쟁이들을 죽이는 우(愚)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의 의를 거부합니까?

이는 인간은 죄 아래서 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서는 죄가 나오고!

의인에게서는 의가 나와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와요.

이게 진리에요.

이와 같이 죄인에게는 죄가 나오고 의인에게는 의가 나와요.

 

그럼 의인이 누구인가 물어야지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이 누구냐를 알아야겠지요.

그 의인이 누구인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왜? 예수님만이 의인입니까?

이는 예수님은 아담의 혈통으로 나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에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육신을 입고 있지만 죄가 없는 분이에요.

 

히 4장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께서 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나요?

이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기 위함입니다.

체휼이란? 우리가 느끼고 겪어야 할 아픔을 다 겪으셔서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걸 의인이 죄인의 아픔에 동참하였다고 합니다.

 

왜? 동참하였는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 내기 위함입니다.

자신이 자기 백성들인 우리 대신 모든 아픔을 직접 다 겪으시고 우리를 그 아픔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걸 대속이라고 합니다.

대속이란? 내 대신 다른 사람이 값을 치루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치루어야 할 값을 대신 다 치루신 겁니다.

 

어떻게 값을 치루었나요?

자신의 죽음으로 치루었어요.

우린 죄 아래서 난 자들입니다.

죄 아래서 난 자들은 죽음이라는 값을 치루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삯이란? 값이에요.

죄의 값이 죽음이에요.

그런데 그 죽음을 예수님이 우리 대신 치룬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믿으라고 합니다.

이것을 믿는 믿음을 그리스도의 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는 예수를 믿는 믿음이에요.

믿음이란? 항상 인간의 의를 부정하게 되어 있어요.

 

아담은 죄인이에요.

죄인인 아담 안에서 나온 모든 것들은 죄에요.

예수님은 의인입니다.

이렇게 되면 의인이신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의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시작부터 끝까지 이 예수라는 의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어요.

왜? 예수 이야기를 합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에 의를 나누어주기 위함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는 자들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옳다고 합니까?

예수님입니다.

 

왜? 예수님만 옳다고 합니까?

이는 예수님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가진 그 예수를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뭘 잘못 했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잘못 알았다고 하지요.

저희가 열심은 있으나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의를 좇아가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가리는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잘못된 열심히 결국 잘못된 신앙을 낳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신앙은 열심의 문제가 아니고 옳음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보다 앎이에요.

지금 이 이야기를 누가 하나요?

 

사도 바울이에요.

바울이 이러한 일을 겪은 장본인이에요.

겪어본 자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에 의를 힘써 지키다가 하나님과 원수 노릇하다가 걸려 넘어졌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들의 아픔을 너무도 잘 알아요.

그렇게 때문에 동족을 위하여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하나 될 때만 가능해요.

그 사람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올 때 비로서 기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누가 기도해 준다고 할 때 그걸 믿지 마세요.

특히 기도 많이 한다고 하면서 은근히 자기 능력 있는 것을 자랑하는 작자들이 기도해 준다고 하는 말은 절대로 믿지 마세요.

그런 자들은 여러분들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빼앗고자 하는 자들이에요.

 

한 성령 안에 있는 성도라고 한다면 같은 아픔에 동참하는 마음을 주세요.

이런 마음이 드는 사람은 떠 벌리고 기도한다고 하지 않아요.

조용히 마음의 골방에서 아무도 모르게 기도해요.

 

지금 우리 안에 마음에 골방에 누가 계시는가 하면 예수님이 계세요.

성령님이 계세요.

그래서 성경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그것을 구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기도하는 것은 곧 예수님이 하시는 기도에요.

 

우리가 마땅히 구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는 하늘에 있는 것들이에요.

창세전에 감추었던 하나님의 비밀들인 것입니다.

 

이름 하여 복음이에요.

복음이 깨달아지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깨달아지면 역사를 초월하게 됩니다.

 

이것을 바다를 걷는다고 합니다.

바다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 볼 때 바다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지 않고 바람과 바다를 볼 때는 즉시로 빠져 들어요.

그 때 주님께서 손을 내 밀고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세상이라는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걸 동행이라고 합니다.

동행이란?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의 삶에 간섭하신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에녹에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니까!

 

목사들이 이걸 근거로 여러분 에녹에 하나님과 동행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어 졌듯이 여러분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사십시오! 라고 하는데 이건 성경을 표피적으로 보는 것이에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니까 우리 쪽에서 뭔가를 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동행 할 수가 없어요.

에녹도 죄인이에요.

그러니까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처럼 은혜를 입혀 주었듯이 에녹에게 은혜를 주어서 함께 하였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봅시다.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11장의 주어(主語)는 믿음이에요.

믿음이 누구를 이렇게 저렇게 간섭을 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이야기이든지 그 시작을 “믿음으로” 라고 운을 떼는 것입니다.

 

에녹도 보세요.

“믿음으로” 라고 하지요.

이는 믿음이 에녹을 끌고 다녔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믿음이 에녹으로 하여금 동행케 하였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를 옮기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저께 기독교 TV를 보니까 손00 장로가 신유집회를 하고 있어요.

이 분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여러분 천국을 침노해 갑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으니 우리도 동행합시다!

그러는 것과 같아요.

이것은 믿음을 우리 쪽에서 뭔가 열심히 행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천국은 우리가 침노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천국이 우리를 침노해 와요.

우리가 예수 안으로 침노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우리 안으로 침노해 오세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세요.

이걸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그 분의 설교를 들으면 전부 내 쪽에서 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이건 아니에요.

성경을 곡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분이 아직도 법 아래 가두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법이 있으니 자꾸만 하나님 말씀을 내가 지켜야 하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에녹의 이야기도 행함으로 끌고 가요.

히브리서는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도리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으니 여러분도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식으로 설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간 곳 없고 엉뚱하게 인간의 열심과 충성을 끄집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성경을 억지로 푼다고 하고 사람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린다고 합니다.

이건 미혹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율법의 마침”이라고 하시지요.

 

이 말은 예수님만이 율법을 다 이루신 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어요.

 

율법이 뭐냐?

예수 앞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에요.

예수를 만나게 하는 길잡이에요.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23-26=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夢學)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가두어졌다고 하지요.

언제까지 가두어진다고 합니까?

믿음이 올 때까지라고 합니다.

 

믿음이 오면 율법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하지요.

율법에서 벗어나 누구 안으로 들어갑니까?

예수 안으로 들어가요.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어디로 인도 한다고 합니까?

예수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율법을 따라가면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이 오기 전까지는 율법 아래 매인바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믿음이 오기 전에는 예수가 누구인줄 몰라서 율법에 종노릇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믿음이 오고 나니까 율법으로는 의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의는 예수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를 예수 앞으로 인도하더란 것입니다.

 

진짜 의란? 하나님의 의에요.

이 하나님의 의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란 말입니다.

이제는 율법을 지켜서 의를 만들고자 하는 모든 것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의 마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침이란 “텔로스” 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문제가 끝났음을 의미해요.

종결 되었단 말입니다.

게임오버에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요.

 

쉽게 말해서 주부가 집안 청소를 다 하고 이제 “끝!”

그리고는 커피 한잔 마시면서 쉬는 것과 같아요.

끝났다는 말은 이제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걸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고 안식하신 것과 같아요.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

그것이 곧 마침이에요.

 

예수 믿으면 율법이 요구하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건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과거에는 율법이 우리가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정죄하여서 죽음으로 넘겨주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율법대로 살지 않는다고 하여도 정죄하거나 죽음에 넘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완성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이 더 이상 요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율법이 자기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십자가에서 대신 다 이루셨기 때문에 율법이 더 이상 성도들에게 요구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마침이 된다고 합니까?

믿는 자에게 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는 율법의 마침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사는 자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자에요.



율법의 요구가 뭔가요?

인간을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여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에요.

 

이 사망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셨어요.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더 이상 율법의 요구에 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로 인하여 사망에 넘겨지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 사실을 믿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아들이 너희의 죄를 대신하여서 십자가에 죽은 것을 아느냐!

너희가 내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아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은 이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요.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것을 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의로운 자라고 해요.

내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공한 의로 인하여 의롭다 여기심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율법을 들고 와서 너 지켰어! 안 지켰어! 라고 공갈을 치면 예수님의 피를 내어 놓으세요.

나 대신 예수님이 다 지키셨다고 하라구요.

이게 믿음이에요.

 

주눅 들어서 앞으로 잘할게요.

그러지 말고!

씨익~ 웃으면서 예수님 안으로 숨으세요.

 

사도바울이 그토록 외친 말이 바로 예수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숨으란 말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할 수가 없어요.

모든 정죄는 예수님이 다 담당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치 노아 방주와 같아요.

방주 안에 있는 사람은 바깥에서 어떤 풍랑이 일고 폭우가 뿌려도 안심해요.

풍랑과 폭우는 방주가 다 막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이게 믿어지십니까?믿어지면 믿음을 받은 것이고!

안 믿어지면 믿음을 선물로 안 받은 것이에요.

이게 안 믿어지면 계속해서 자기 쪽에서 뭔가 시도하려고 해요.

 

자기 안에서 밀려오는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반발적으로 더 믿음 있는 척 해요.

뭔가 열심히 하여야 안심이 되는 사람은 문제가 있어요.

사람의 마음은 안 믿어질수록 자기 쪽에서 믿어지도록 노력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보통 보면 안 믿어지는 사람일수록 믿는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이건 안 믿어지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자기 방어기재에요.

이걸 방어기재라고 해요.

 

방어기재란? 자기 안에서 밀려오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하여 몸이 본능적으로 반발하는 것으로 나타내는 현상을 말해요.

그러므로 인간들은 안 믿어질수록 믿는 척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복음 안다고 잘난 척 나대는 사람들은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에요.

그러니까 복음 안에서 자유하며 감사하며 살지 못하고 복음 아는 것으로 잘난 척 하면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귀 짓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는 복음 아는 것으로 나대는 것이 없어요.

복음 안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에 은혜가 주는 자유함이 있어요.

그러므로 복음이 믿어지는 사람들은 그 복음이 주는 그 은혜에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큰 소리 치는 것이 아니에요.

남이 안 알아주어도 되어요.

누가 안 알아주면 어떤가요?예수님이 알아주면 되잖아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유대인들이 다 들고 일어나서 너 이단이지 라고 하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어요.

왜? 그런가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뭐라고 하면 너희들이 나를 이단이라고 하든지 귀신 들린 자라고 하든지 상관치 않아!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와 항상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인정한다는데!

너희들이 틀렸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는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날 좀 인정해 달라고 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복음이 믿어지는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의 긍휼하심에 감사하고 감읍하면서 살아요.

 

신앙생활이란? 서울대에 들어가려는 입시생들처럼 머리 싸매고 성경 공부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적 지식이 많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에요.

제발 착각하지 마세요.

 

옛 날 개그콘서트에서 옥동자가 한 말이 기억나나요.

못생긴 것들이 잘난 척 하기는,,,,

맞아요.

꼭 믿음 없는 것들이 믿음 있는 척 호들 값을 떤단 말입니다.

 

성경 이야기를 하고!

신앙적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에요.

신앙이란? 예수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을 믿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든지 직장에서든지,

교회 안에서든지 교회 바깥에서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사람은 그냥 믿어지는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요.

요란을 떨지 않아요.

요란 떨 필요가 없어요.

 

자기 안에 평안이 있는데 왜? 남에게 나 믿음 있다고 알아달라고 합니까?

열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열심으로 신앙 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믿음 있음을 자꾸만 증명하고자 하는 자는 수상해요.

믿음을 받은 자는 믿음을 증명하고자 하지 않아요.

그걸 남에게 증명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없어요.

 

남에게 증명 받아서 뭘 하려고요.

그건 대장 노릇하고 싶어서 그래요.

남보다 믿음 있는 척 하여서 잘난 척 나대고 싶은 겁니다.

이건 스스로가 믿음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남에게 알려지고 싶어하고 믿음 있는 척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하수와 고수의 차이가 뭔지 아세요.

하수는 항상 자기가 고수인줄 알고 고수는 늘 부족하다고 해요.

그러니까 하수들은 나대기를 잘하고 고수들은 잠잠히 있는 것입니다.

실력이란? 나댄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쌓아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진짜 믿음 있는 자들은 늘 믿음 없다고 해요.

자기 부족함을 알아요.

자기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입을 닫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없다고 겸양 떠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너무도 크고 중한 것임을 알기에 종용히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발 말씀 앞에서 자기 꼬라지를 좀 보세요.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세요.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것으로도 자기 믿음을 증명하고자 하지 마세요.

오직 하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고 사세요.

누가 뭐라고 하든지 흔들리지 말고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다 지켜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된다는 것이 믿어지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 어떤 참소가 일어난다고 하여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에 요구를 다 이루신 것을 내어 놓고 사단의 참소를 막고 넉넉히 이긴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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