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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57강. 토기장이와 그릇 (롬 9:18-24)

by coroa 2021. 8. 12.

 

 

57강. 토기장이와 그릇 (롬 9:18-24)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인간이 다투는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의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시길래 인간들이 동의 할 수 없다고 할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에게는 긍휼을 베풀고 바로는 강퍅케 하였다고 합니다.

구원하심이 원하는 자로도 말미안지 않고 달음박질하는 자로도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자로 말미암는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마음대로 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소리칩니다.

아니~ 내가 벌 받을 짓을 해서 벌을 받아야지, 벌 받을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벌을 준다고 한다면 그건 하나님의 횡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들 눈에는 합당치 않게 보입니다.

그래서 왜? 그 따위로 일을 하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하여도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 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응수하시기를 토기장이와 그릇으로 비유하면서 입을 닫으라고 합니다.

토기장이가 자기 필요에 의해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릇이 어찌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 있느냐?

어떻게 지음을 받은 것이 자기를 지은 자에게 따질 수 있느냐? 라고 합니다.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토를 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인간들이 말을 듣는가요?

예! 하고 알아듣는 인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하나님같이 선악을 판단하는 자기 생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행복하게 살고 싶지요.

그럼 묻습니다.

언제 행복하다고 느낍니까?

여러분 뜻대로 될 때이지요.

 

내 뜻대로 되면 행복하다고 느끼고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느끼잖아요.

그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 불행은 곧 내 뜻대로 되느냐 아니냐 로 결정이 되는 것이지요.

그럼 묻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생각이 없고 우리의 뜻이 없다고 한다면 어찌 될까요?

내 뜻이 없고 내 생각이 없으면 불행함을 못 느끼겠지요.

내 뜻이 없으니까 이렇든 저렇든 감사하고 살게 아닙니까?

 

그럼 우리를 불행케 하는 원인이 뭡니까?

환경입니까?

우리 생각입니까?

우리의 생각이겠지요.

 

다툼이 왜? 일어납니까?

서로의 의견이 충돌을 해서이잖아요.

서로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서로의 생각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생각을 주장하여서 그 주장이 신청되지 않으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나쁘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왜? 불만입니까?

자기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 같으면 이렇게 일을 할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뿔따구가 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가 바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화를 내요.

인간들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반대급부를 바라게 되어 있어요.

신앙생활을 해도 거기에 대한 보상을 바란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바라던 것이 안돌아 오면 화를 냅니다.

 

부부간에 살아도 상대방에게 자기 이미지를 투영시켜 놓고 살아갑니다.

서로가 바라는 것이 있단 말입니다.

그 바라던 것이 이루어질 때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반대로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예를 들어서 아침에 출근 하는 남편에게 아내가 술 잡숫지 말고 일찍 들어오세요! 라고 합니다.

이는 남편에게 자기 이미지를 투영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자기가 심어 놓은 대로 일찍 들어와야 해요.

그렇지 않고 술 먹고 늦게 들어오면 화가 납니다.

 

왜? 화가 납니까?

자기가 바라던 것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건 남편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인간들의 사귐에는 각자의 이미지를 상대방에게 투영시켜 놓고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의 신앙에도 그대로 녹아져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있어요.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은 거기에 맞는 반응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아이러니 하게도 사람이 자기 생각을 갖게 되면 행복한 것이 아니고 불행해요.

왜냐하면! 우리 인생이 우리가 마음 먹은대로 우리의 생각대로 살아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도록 내 버려두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우리 뜻과 생각을 날마다 꺾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위하여 우리를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날마다 내 생각과 내 뜻이 부정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좇아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고 하시지요.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날마다 죽임 당하는 사건 속으로 밀려들기 때문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간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사람이 불행해 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 생각을 갖기 시작을 하면서부터입니다.

자기 생각을 갖는다는 말은 자기도 판단하는 권세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허락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늘 하나님과 충돌하게 되겠지요.

우리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부딪치게 되면 우리의 판단은 죄로 드러나게 되어요.

 

우리 생각이 틀렸다고 부정당하면 기분이 어떤가요?

속상하지요.

자기 생각이 틀렸다고 부정당하여서 기분 좋아할 인간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이의 설교를 들어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해요.

그래서 자기가 바라던 것을 설교하지 않으면 틀렸다고 단죄해 버립니다.

자기 생각이 진리라고 믿고 있어요.

이게 교만이고 어리석음입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까요?

이는 모두가 선악과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모두가 신처럼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 조차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고 있어요.

심지어 신도 판단해요.

이는 모두가 그 안에 선악의 법이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옳다고 하면 옳은 것으로 알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하면 그른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살고 있지를 않습니다.

 

내 인생을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내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기준으로 구분해서 판단을 합니다.

 

육신적으로 좋은 일들이 일어나면 그나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으로 순응을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삶이 고달프고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면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따집니다.

마치 욥처럼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러한 일들을 당하여야 하는지 항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이 평안 할 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닥치자 따지기 시작합니다.

평안 할 때도 하나님을 경외 하였으면 고난이 닥쳐도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경외치 않고 따지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 조건에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자기 조건과 상관없이 여일(如一)하게 경외하여야 해요.

욥처럼 자기 좋을 땐 경외하고 어려우면 원망하고 따지는 것은 경외가 아니에요.

그건 거래에요.

 

사무엘상 2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인간들을 어떻게 다스리는지가 나와요.

 

삼상 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세요.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케도 하세요.

 

이걸 한 마디로 여호와께서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장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길 인정한다고 하면 우리가 나쁜 일을 당하여도 따질 수 없어요.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러지 않고 욥처럼 좋을 땐 잠잠하다가도 어려우면 따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따집니까?자기가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이해하니까 이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아담이 범죄하자 자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자기에게 좋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죄의 성향이에요.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하였지요.

무슨 눈이 밝아졌는가요?

선악을 판단하는 눈입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창조주가 보시기에 좋았더라! 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판단하는 선악과를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런데 뱀의 꾐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판단하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갖게 되자 이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 세계는 인간의 생각대로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피조물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가 된 것이 아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선악과를 먹고 심판의 자리에 앉은 인간들은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판단하고 반기(反旗)를 들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자기 생각을 개진한단 말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 이야기에요.

구원은 하나님 맘대로 라고 했습니다.

내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버려 둘 자는 버려두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린 그 일을 힐문(詰問)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건 하나님의 횡포라고 하면서 따지고 있습니다.

 

이러면 졸지에 하나님이 틀린 분이 되고 말아요.

반대로 인간이 옳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두고 적반하장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건 아닌 것 같지요.

맞아요.

이건 아니에요.

하나님이 옳고 우린 틀린 자에요.

 

하나님 맘대로 라는 말은 우리의 뜻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너희는 말 할 자격이 아니란 뜻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하는 일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존재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안 되어요.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내게 내가 바라던 그림들이 그려지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따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이 자기 주권이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주권이 박탈당한 다는 것은 무시당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어느 인간이 여기에 아멘이라고 할 수가 있나요?

없습니다.

 

인간들은 저 마다 자기의 존재에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자존감으로 살아요.

그런데 성경을 열면 이를 완전히 부정해 버립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이 나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강퍅케 할 자는 강퍅케 하신다고 합니다.

이건 일방적이에요.

어떤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자 인간들이 반발을 합니다.

그건 너무 심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독선이 아닙니까?

그럼 우린 뭐냐고 따집니다.


이에 바울이 일갈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너희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 주제에 어떻게 지으신 토기장이에게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할 수 있느냐!

그건 자기 주제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주둥이 닫으라는 말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말이 한 마디도 틀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흔쾌히 동의하기가 싫습니다.

뭔가 불만스러워요.

하나님이면 다냐? 라면서 따지게 된단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따지는 바탕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면 창세기의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기를 들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알 수가 있어 집니다.

 

처음 창조가 된 아담에게는 자기생각이 없었어요.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자기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처음 아담이 발가벗고 살 때는 수치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도 발가벗음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어요.

그래서 발가벗고도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달라집니다.

아담은 자신들의 발가벗음이 수치로 여겨지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인간들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데 인간들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을 하기 시작을 하였어요.

 

그래서 치마를 해 입은 것입니다.

이건 순전히 인간들 생각이에요.

결국 자기들 생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기 시작 한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죄란? 하나님과 다른 눈과 다른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생각과 다른 눈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과 다른 판단을 하게 되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하나님은 발가벗음을 수치라 하지 않는데도 아담은 스스로가 수치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발가벗음이 수치라는 생각이 들면 가려야 합니다.

가리지 않으면 본인이 찜찜하고 불안해요.

자기가 괜찮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불편해요.

결국 아담은 자기들이 불편하기 때문에 치마로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이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난 후에 부모 눈치를 살피는 것과 같아요.

부모님은 괜찮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아이는 부모 눈치를 살살 살핍니다.

이는 자기 안에서 부모의 용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분명히 용서 했어요.

그러나 아이는 스스로가 용서가 되지 않아요.

그래서 스스로 용서가 되는 일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지금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치마를 만들어 입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발가벗음을 수치로 여기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서는 선악과를 먹은 것이 잘못이지 발가벗은 것이 잘못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아담은 치마를 만들어 입으면 수치가 가려진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러면 가려야지 어쩔 도리가 없어요.

안 가리면 스스로가 용납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안에 선악의 법이 작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법으로는 살 수가 없어요.

은혜로만 살 수가 있어요.

 

선악과는 인간에게 법을 준 것입니다.

은혜로 살아야 할 자가 법에 가두어지게 되면 끊임없이 그 법이 요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안에 법이 괴롭힙니다.

 

법이 너 발가벗고 살면 되느냐!

얼른 치마를 해 입고 수치를 가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담은 자기 안에 법에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치마를 만들어 입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이 묻는 겁니다.

야! 너희들 꼬라지가 왜 이런데!

왜? 치마를 입고 있느냐! 라고 묻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수치라고 하더냐!

어느 놈이 그러더냐!

그 놈이 누구냐! 라고 추궁을 합니다.

 

결국 선악과가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게 만든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갖게 만든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갖게 되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좋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것이 오늘 본문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평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왜? 하나님 맘대로 누구는 긍휼히 여기고 누구는 강퍅케 하십니까? 라고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이 토기장이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께 따지는 것이 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토기장이란? 그릇을 만드시는 분이에요.

그릇은 토기장이의 필요에 의하여 만듭니다.

토기장이 입장에서는 용도에 합당하게 만들고 사용하기 때문에 다 귀한 그릇입니다.

 

토기장이에겐 그릇에 귀천이 없어요.

다만 용도를 그렇게 정하고 만들어서 사용 하는 것뿐입니다.

둘 다 귀하게 사용하세요.

 

귀하게 쓰는 그릇도 토기장이의 손때가 묻어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토기장이의 손때가 묻어 있어요.

모두 다 토기장이의 숨결이 들어 있어요.

그러니 둘 다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릇 입장에서 보게 되면 달라져요.

그릇 입장에서 보면 자기하고 다르게 사용되어지는 것을 차별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으로 구분하고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부당하다고 따지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합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다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신자는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고 불신자는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토기장이가 되셔서 모든 인간들을 두 부류로 사용하십니다.

야곱처럼 사랑받는 자로 사용하는 자가 있고 에서처럼 미움 받는 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세처럼 긍휼을 보여주는 그릇으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고 바로처럼 강퍅의 그릇으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용하시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차별이 아니에요.

그냥 쓰시기에 합당하게 사용할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여기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왜? 나는 천한 그릇으로 만들었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귀한 그릇은 안 따지는데 구원 받지 못한 천한 그릇들이 따져요.

이는 귀한 그릇들 속에는 “순종의 영”이 역사를 하고,

천한 그릇들 속에는 “불순종의 영”이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아멘으로 화답을 하는데 불신자들은 아니라고 덤비는 것입니다.

 

어제 밤에 TV에서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예전에 본 영화이지만 다시 보았습니다.

거기에 보면 신애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신애(信愛)란? 믿음과 사랑이란 말이에요.

왜? 하필 주인공 이름을 기독교 식 이름인 신애라고 할까요?

이는 감독이 기독교의 이기주의를 꼬집기 위하여 만든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신애라는 여자가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나자 그 보상금으로 아들 하나를 데리고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남들에게 기가 죽기 싫어서 돈이 많은 것처럼 행세를 합니다.

여기 저기 땅을 살 것처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돈 많은 여자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이 돈을 갈취할 목적으로 그 아들을 유괴합니다.

그리곤 돈을 요구합니다.

신애는 범인이 요구하는 돈을 줄 수가 없어요.

그러자 유괴범이 아이를 죽여 버립니다.

그리곤 유괴범은 붙잡혀서 감옥에 가서 삽니다.

 

아들을 잃고 난 신애는 절망을 하다가 교회에서 걸어 놓은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한다는 플랜카드를 보고서는 교회로 찾아 갑니다.

한 동안 상처를 치료하는 듯 했어요.

그러다가 목사님이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설교를 듣고는 유괴범을 용서하기 위하여 감옥으로 면회를 갑니다.

 

면회를 가서 유괴범에게 이제 당신을 용서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유괴범이 자신은 감옥에서 예수를 믿고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합니다.

신애는 이 말을 듣고 그만 실신을 합니다.

 

용서는 자기가 해 주어야지 어떻게 하나님이 할 수가 있느냐 에요.

그래서 신애는 하나님이 하는 일이 부당하다고 하면서 그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을 품고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피해자인 자기가 용서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용서 할 수가 있느냐 입니다.

용서를 해도 피해자인 자기가 해야지!

어떻게 피해자도 아닌 하나님이 용서 할 수가 있느냐 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게 복수를 합니다.

어떻게 복수 하는가 하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식으로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부흥 집회를 하고 기도하는데 “거짓말이야” 라는 노래를 틀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을 타락하게 하는 것으로 복수합니다.

그리하여서 믿음이 좋은 장로님을 유혹해서 간음을 행합니다.

간음을 하면서 두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에게 똑똑히 보고 있느냐면서 봐! 보고 있어! 라고 하면서 신실한 사람을 간음케 함으로서 하나님께 복수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신은 유괴범을 용서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용서 할 수가 없다는 뜻으로 죄를 지으면서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으로 오버랩을 하여 보았습니다.

우리도 신애처럼 살고 있어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원망하잖아요.

그리하여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복수하잖아요.

 

지금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는 하나님에게 따지는 자들이 그러해요.

당신이 뭔데!

우리 인간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 할 수가 있느냐! 라고 따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판단을 한다고 하면 수긍을 하겠어요.

잘못하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인간들의 사고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들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내 잘못과 상관없이 왜? 미움 받아야 하고 내 뜻과 상관없이 강퍅한 자가 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따지는 것입니까?

이는 모두가 언약으로 자기 존재를 이해하지 않고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나 라는 존재로부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니까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나는 미움 받은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맞아요.

에서는 미움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에서는 미움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움 받을 자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건 토기장이가 오줌을 담으려고 요강 그릇을 만든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창세전 언약을 펼쳐 보이는 데에는 두 그릇이 필요해요.

사랑을 받은 자와 미움을 받을 자가 필요해요.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이 필요해요.

 

그래서 사랑 받을 그릇과 미움 받을 그릇을 만들었어요.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을 만든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어요.

마치 토기장의 필요에 의해서 그릇이 만들어진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토기장이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릇이라는 것을 안다고 한다면,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나는 왜? 이런 그릇으로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가 없어요.

왜? 나를 이렇게 사용을 하느냐고 따질 문제가 아니에요.

그건 토기장이 앞에서 죄가 되어요.

 

그런데 지금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정하는 유대인들이 그러고 있어요.

하나님 마음대로 행하는 그런 구원을 인정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야! 임마! 어떻게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으신 분에게 따질 수 있느냐!

그건 항명이고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릇은 원래 없었어요.

그런데 토기장이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약에 토기장이의 필요가 없었다면 그릇은 생겨나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그릇으로 생겨 난 것 자체가 은혜인 것입니다.

원래 없어야 하는 것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인 겁니다.

 

천국 백성은 이걸 알아요.

내 존재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가 된 것을 알아요.

그래서 성도는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옥 백성은 생겨난 것 자체를 은혜로 여기지 않아요.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천히 쓰는 그릇이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자기 존재로부터 자기 인생을 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생각에 불합리하다고 여기니까 억울하다고 따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틀렸다고 따지는 것입니다.

불평한다는 것은 공격성 질문을 말해요.

 

말이 좋아 질문이지 이건 하나님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 따위로 일하지 마세요!” 라고 훈계하는 것입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으신 분에게 어떻게 일을 그렇게 처리 할 수 있느냐 라고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시건방지지요.

이게 죄에요.

죄가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부정하는 것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신앙을 순종이라고 하고 불신앙을 불순종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습니까?

순종 속에는 자기 생각이 없어요.

그러나 불순종에는 자기 생각이 있어요.

 

피조물이 자기 생각으로 살면 사사건건 하나님이 하는 일에 반기(反旗)를 들어요.

이게 죄에요.

성도는 이 죄와 일평생 싸우게 되어 있어요.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욥처럼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욥처럼 하나님께 따집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언약을 가지고 책망을 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모두가 다 창세전 언약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럼 우린 욥처럼 주둥이를 닫게 되어요.

할 말이 없어지게 된단 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년 생활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자기 안에 죄가 고발당하는 삶을 살게 되었어요.

고발당할 때마다 순순하게 있는 것이 아니고 반발을 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한마디로 하나님께 열 번이나 거역한 삶이라고 합니다.

왜? 거역을 합니까?

이는 자기들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 뜻이 있어서 광야 길을 걷게 하셨어요.

광야 길을 걷게 하면서 뭔가 하실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 몸뚱이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들 입장이라야 고작해서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등 따습고 배부른 것을 삶에 의미를 두는 것은 짐승이에요.

짐승은 먹고 사는 것이 전부에요.

먹고 사는 것이 짐승에게 삶에 의미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택하신 목적이 있어요.

즉 구원 하신 목적이 있단 말입니다.

짐승처럼 밥이나 먹고 잠을 자라고 구원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짐승처럼 먹고 자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요?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애굽에서는 짐승처럼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것으로 만족했어요.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달라요.

출애굽 자체가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한 것이므로 출애굽한 백성들에겐 아브라함 언약을 위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내 맘대로 살라고 구원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구원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이루어졌어요.

 

이는 우리의 삶이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해요.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생활을 충실히 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막 살고 싶어도 막 살 수가 없어요.

내 맘대로 살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내 버려두지 않아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이유도 우리의 삶을 예수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삶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에요.

교회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은혜와 사랑으로 서로 섬기고 봉사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게 되었어요.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모두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교회로 모여서 서로 받은 은혜로 섬기고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미하였던 것입니다.

이게 천국 생활이에요.

 

구약이든 신약이든 구원의 목적은 동일해요.

그래서 모세가 광야에 나온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를 광야로 빼낸 것은 사람이 왜? 사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기기 위함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8장을 봅시다.

 

신 8:1-3=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우리의 구원과 같아요.

신약의 성도들이 구원 이야기를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길은 곧 신약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같은 것입니다.

그럼 신앙생활에 무엇과 싸우는지 알 수가 있어집니다.

 

지금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갈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유언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반드시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번성하고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는 너희가 잘나서가 아니라 언약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을 인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가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왜? 여기로 인도하고 살게 하셨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 길을 인도하신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란? 하나님 뜻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언약을 위하여)으로 산다는 말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먹고사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사는 것이 목적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언약을 위해서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존재가 먼저가 아니고 언약이 먼저인 것입니다.

이는 언약을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되어요.

그럼 주객이 전도가 되어요.

 

지금 모세가 이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언약을 잊고 너희가 먹고 사는 데에만 정신을 팔게 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가만 두지 않고 다 쫓아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애굽에서 흠 없는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건져내어서 광야 사십년 동안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서 먹게 한 것은 사람이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잊게 되면 하나님에게 따지게 되어요.

자기 몸뚱이를 챙기게 되어요.

그럼 몸뚱이 중심으로 좋으니 나쁘니 판단하게 됩니다.

이러면 애굽에서처럼 짐승의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것임을 모르면 우리 몸뚱이를 챙기게 되어 있어요.

세상 사람들처럼 먹고 사는 일에만 관심을 갖게 된단 말입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라는 먹고 사는 일에 관심을 두도록 미혹을 합니다.

여기에 미혹당하면 늘 자기주장만 하게 되어요.

 

교회에 와서도 자기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시험에 들어요.

괜히 혼자 생각으로 삐져서 교회에 오네 마네 하면서 자기만 옳고 남은 다 틀렸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충만을 입고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광야 교회라고 했어요.

그럼 지금 우리가 광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한 사고로 살고 있어요.

오십보백보에요.

거기서 거기에요.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나 가나안에서나 자기 몸뚱이 중심으로 살았어요.

짐승 같은 육신의 본능에 이끌린 삶을 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자연히 환경으로 인하여 불평불만 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왜? 불평합니까?

자기가 존재하는 의미를 언약에 두지 않고 자기 삶에 두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살지!

하나님께서 나를 왜? 살게 하셨지!

맞아 언약이야!~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살게 하시고 있는 거야!

하나님이 지금 나를 예수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하여서 다스리고 계셔!

그러므로 내 삶이 조금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다 언약을 위한 것이므로 믿음으로 받고 이겨내야지 라고 하면서 살면 인생이 가벼워지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 행복 챙기기에 급급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눈만 뜨면 환경으로 인한 불평과 불만을 토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날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징징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구약 이스라엘처럼 그러고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잘살까 에만 몰두하고 있잖아요.

짐승과 같은 본능에 따라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언약대로 다스리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언약은 생각지 않고 자기 현실의 삶에 문제로 따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따집니까?

 

살기 좋을 때입니까?

살기 어려울 때입니까?

살기 어려울 때에요.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을 빌미로 세상에서의 삶이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등 따습고 배부르기를 바래요.

그러나 이건 언약에 없어요.

 

언약 속에는 도리어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하고 고난당하는 것들이 들어 있어요.

세상을 떠남이 들어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우리를 언약으로 다스리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눈만 뜨면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렇게 달달 볶습니까? 라고 따지는 것입니다.

왜? 나에게 좋은 환경을 안 주느냐고 합니다.

이 모두가 오늘 본문처럼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죄가 어떤 식으로 발호는 하는지 알 수가 있겠지요.

 

죄는 항상 자기중심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이해하게 되면 자기 몸뚱이 챙기는 것으로 귀결이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고발하려고 우리의 원함과는 정 반대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를 편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게 하세요.

그리하여 우리를 죄인의 자리로 앉혀버리는 것입니다.

죄인의 자리에 앉히고서는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과 에서 그리고 모세와 바로를 통해서 내가 지금 어떤 은혜를 입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에서를 통해서 사랑 받기로 선택을 입은 것이 얼마나 크고 감사한 일인가를 알아야 해요.

바로를 통해서 긍휼을 입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당연히 에서처럼 미움을 받아야 해요.

그런데 야곱처럼 사랑을 입고 있어요.

우리도 당연히 바로처럼 강퍅하고 목이 곧은 자들이에요.

그럼에도 모세처럼 긍휼을 입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여야 합니까!

하지만 우리는 감사하지 못하고 있어요.

왜? 그런가요?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해야 돼! 라는 우리 존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하나도 기쁘지 않은 겁니다.

구원이 감사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보다도 돈이 더 좋은 것입니다.

천국보다 이 세상이 더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언약에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까 에만 몰두하고 있어요.

짐승처럼 말입니다.

등 따습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도 안중에 없어요.

기고만장 한단 말입니다.

 

복음 안에는 육체의 소욕을 해결해 주는 것이 없어요.

복음은 죄인은 죄 아래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고발해 주고 있어요.

그런데 그 죄가 우리 육체를 기회로 삼고 발호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알아도 죄가 주장하는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아도 밥 안 먹으면 배가 고파요.

베고프면 짜증이 나요.

배고파 보세요.

하나님도 안 보여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에겐 배가 곧 신(神)인 것입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등 따습고 배부름을 좇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본성은 우리가 제어 하지를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도록 자꾸만 헝클어 버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으로 의지하는 것들을 하나 둘씩 거두어가는 방식으로 간섭을 하세요.

그 힘이 사라져야 비로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그럼 지금부터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두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입니다.

이는 서로를 드러내주는 것으로서 상대적인 그릇입니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는가요?

유대인들이 율법에 의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까,

그게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을 받는다고 자긍했어요.

그리고는 상대적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예수 믿는 자들을 업신여겼어요.

이 모두가 자신들의 율법 지킴이라는 것은 근거로 한 의(義)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야곱과 에서를 예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나기도 전에 선택과 유기를 입었어요.

이걸 사랑과 미움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긍휼히 여길 자는 긍휼히 여기고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토기장이 비유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토기장이 비유는 예레미야가 한 비유에요.

그럼 예레미야는 이 비유를 왜? 했는지를 살펴봅시다.

 

예레미야 18장을 봅시다.

 

렘 18:1-12절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8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베풀어 너희를 치려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 길과 행위를 선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2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된 말이라 우리는 우리의 도모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이 내용은 유다의 멸망을 앞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가 하늘을 찌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를 바벨론에 붙여 징치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이러한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고 악한 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듣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무시하게 되면 먼저 말을 등한시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이 그러해요.

 

이들의 모습은 단면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17장 5-6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렘 17:5-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이들은 여호와를 떠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왜? 떠났는가 하면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여서입니다.

혈육을 권력으로 삼는다는 말은 세상 힘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돈입니다.

속된 말로 등 따습고 배부르기 때문입니다.

아쉬운 것이 없으니 여호와의 말씀을 귓등으로 듣는 것입니다.

자연히 선지자의 경고도 들을 리가 없지요.

그러면서 자신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의 강퍅함을 깨트리기 위하여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에게로 보냅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빗는데 그릇이 자기 뜻대로 빚어지지 않으니까 그 그릇을 깨트려서 다른 그릇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유다 백성들에게 알려주라고 합니다.

내가 지금 토기장이처럼 말 안 듣는 너희들을 잘못된 토기를 깨트려서 다른 그릇으로 만들 듯이 너희를 그렇게 하겠다고 알려 주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대로 말을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회개하기는 커녕 비웃습니다.

한마디로 배에 기름기가 흐르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12절에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된 말이라 우리는 우리의 도모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도모대로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안 무섭다는 말입니다.

 

흔히들 하는 말이 사람이 죽으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어요.

정신이 나간 겁니다.

한마디로 환장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경고도 우습게 여기는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항상 보면 우둔한 자들은 미련한 짓을 해요.

그러지 말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

매를 벌어요.

결국 얻어터지는 것입니다.

 

얻어터지고 나면 나아지는가 하면 그렇지가 않아요.

또 그 짓을 또 해요.

망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망하게 하시지 않아도 스스로 망할 길을 찾아가요.

회개가 안 되어요.

 

그래서 잠언에서는 미련한 자는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어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잠 27:22절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런데 바울이 지금 예레미야의 토기장이 이야기를 가지고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구약의 유다 백성들과 같이 망하는 짓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고집을 피우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로마서를 통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뭔가요?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이야기하잖아요.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준비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라고 합니다.

 

이 의는 인간의 조건이나 행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공짜로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야곱과 에서 그리고 모세와 바로를 가지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사랑 받을 짓을 해서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고!

모세가 긍휼을 입을 짓을 해서 긍휼을 받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반대로 에서가 미움 받을 짓을 해서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고!

또한 바로가 강퍅한 짓을 해서 강퍅케 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린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할 죄인들입니다.

태생적으로 강퍅한 자들이에요.

저주 받아야 할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였어요.

그 긍휼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바로 그 긍휼을 입어서 구원을 입은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을 봅시다.

 

롬 11:32-36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여기에 보면 불 순종과 긍휼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면 기분이 좋습니까?

아니지요.

기분 나빠요.

 

인간은 자기 자존감으로 사는 자들이에요.

자존심이 상하면 기분 나빠해요.

그래서 없어도 있는 척하는 겁니다.

 

몰라도 아는 척 하고!

없어도 있는 척 하고!

못 배워도 배운 척 하고!

가난해도 부자 인척 해요.

 

왜? 그런가요?

남에게 무시당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입는 것이에요.

긍휼은 못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은 자들의 특징이 자기가 형편없는 자라는 것을 알아요.

못된 인간이라는 것을 압니다.

자기에게는 의가 없고 선을 행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아요.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주어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긍휼을 주고 싶어도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면 주어도 몰라요.

긍휼을 주어도 그것이 긍휼인줄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려 주는가 하면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서 하세요.

자기가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졌다는 것을 언제 아는가 하면 말씀 앞에 서 보면 알아요.

자신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아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 뜻대로 살 수 없음을 알고 애통해요.

그리하여 내가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긍휼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죄 아래서 났어요.

죄 아래서 났다 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이 사실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은 이런 것이다 라고 알려 주어서 하세요.

그게 율법이에요.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에요.

율법의 요구대로 살면 누구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가 하면 예수님 같이 되어요.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대로 완전하고도 온전하게 사신 분이에요.

율법의 뜻을 온전히 지켜내신 분이란 말입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지요.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오잖아요.

십계명이 율법의 핵(核)이에요.

모든 율법은 여기서 파생되어 나온 것들입니다.

 

십계명이 뭔가요?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둘로 말씀 하셨어요.

제자들이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니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이는 십계명 정신을 둘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뭔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에요.

이게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에요.

 

사랑은 하나가 될 때 가능해요.

어떻게 하나가 됩니까?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요.

 

신앙생활이란?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도 하나가 되고 이웃과도 하나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천국이고 교회에요.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나”로 모이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모이는 것입니다.

내가 우리 안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우리라는 몸에 지체로서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모든 율법을 완성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할 수가 없어요.

예수 안에서만 가능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 되는 삶으로 부르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렇게 살도록 이끄세요.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잘 음미하여 보세요.

 

자기 사랑이 없지요.

모두가 이타(利他)적인 것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잖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구원) 하신 것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창조(구원) 하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요?

정 반대로 살고 있지요.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지 남을 사랑하지 않아요.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이웃도 사랑하지 않아요.

오직 나 밖에 몰라요.

하나님도 나를 위하여 믿고 이웃도 나를 위하여 이용하고 살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십계명 앞에 서면 우리의 잘못된 것을 보아야 합니다.

야! 나는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이 아니구나!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로 살고 있는 악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주어서 너는 불순종하는 자라는 것을 알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불순종하는 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긍휼을 베풀고자 함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지만 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죄인들은 자기가 긍휼을 입어야 살 수 있는 자인 줄을 몰라요.

그럼 알려주어야지요.

 

어떻게 알려 줍니까?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요.

 

우리의 상식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배웠어요.

그래서 순종하고자 합니다.

우린 율법 아래서 이렇게 배웠어요.

 

교회에 처음 오면 듣는 말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말이에요.

악한 사람이 되지 말고 착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시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수십 년 동안 이 싸움을 했어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옳은 신앙이라고 여기고 올인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이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고맙다고 느끼지 못했어요.

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산 것이 더 기쁘고 자랑스러웠어요.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내 안에서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만만하던 것이 이젠 역(逆)으로 하나님 말씀이 부담스러워지는 거에요.

말씀 앞에서 자연히 기(氣)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비로서 “헬프 미 (Help Me)” 하게 되어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내가 열심히 특심할 때는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어요.

그 때는 내가 어떤 일을 하여야 하니까 그 일을 하기 위한 힘을 달라고 하였어요.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신앙인줄 알았으니까요.

 

그러나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니까 일을 하기 위하여 도와달라는 기도가 아니고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주여 힘을 주세요! 가 아니고!

주여 도와주세요! 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이 보여지면 기도가 달라져요.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긍휼을 구하게 되어요.

 

지나고 나니까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내게 긍휼을 주시고자 먼저 불 순종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것으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이라는 귀한 은혜를 주시고자 나를 율법 아래 가두어 두신 것을 알았어요.

그 긍휼이 귀한 은혜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먼저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죄를 가지고 은혜를 드러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탄복을 하는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라” 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결국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이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자랑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로지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것에 감사하는 것 밖에 없어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하나님께서 긍휼 하나 드러내고자 불순종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영생을 알려 주고자 죽음을 동원하고!

천국을 알려주고자 지옥을 동원하고!

긍휼을 드러내고자 강퍅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것은 장차 올 영광을 알려주고자 하심이에요.

영광을 알려주려고 고난을 상대적으로 깔아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고난도 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는 고난이 끝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서 영광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감사가 되려면 자기 부정이 따라야 해요.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복을 받을 자가 아니라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복이 되려면 저주를 알아야 합니다.

우린 구원 받을 자격이 없어요.

말씀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여야 해요.

그럴 때 구원이 은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불행은 자기가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요.

자기가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알면 모든 것이 감사가 되지만!

자기는 복을 받아야 하는 자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원망스러워요.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하여 태어난 자들이 아니에요.

저주 받아야 할 자들이에요.

그런데 긍휼이 임하였어요.

그러나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부디 그 은혜로 인하여 감사하며 사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원래 없던 자들이었는데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태어난 것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산다는 것 자체가 감사케 하옵소서. 우리의 눈을 여시고 마음을 열어서 내가 어떤 사랑을 입고 살고 있으며 어떤 긍휼을 입고 있는지를 알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찬미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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