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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성경강해)59강. 남은 자 (롬 9:25-29)

by coroa 2021. 8. 30.

 

 

59강. 남은 자 (롬 9:25-29)

-.정낙원 목사

 

 

 

 

바울은 하나님을 토기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그릇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두 가지 그릇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 하실 때 두 부류의 인간을 창조 하셨다는 말입니다.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입니다.

이를 예수 안에서 구원 얻을 자와 유기 될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왜? 두 부류의 인간을 창조 하셨을까요?

 

이는 인간이 창조가 된 원인을 추적하면 알 수가 있습니다.

창조란? 원인에 의한 결과라는 말입니다.

어떤 원인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이 창조입니다.

 

피조물이 만들어지는 창조에 원인이 뭔고 하니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피조물의 창조를 일으키는 원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창세전 언약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기 백성이 있습니다.

자기 백성이라 함은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자기 백성은 천국으로 보내고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지옥으로 보내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이 시나리오에 의하여 창조 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야곱과 에서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 받을 자와 미움 받을 자로 작정이 되어서 태어납니다.

모든 인간들도 야곱과 에서처럼 긍휼의 그릇이든지 아니면 진노의 그릇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을 만들듯이 만들어졌습니다.

 

귀함과 천함이란? 서로 상대적인 것입니다.

귀함은 천함을 통해서 드러나고 천함은 귀함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구함이 없는 천함도 없고 천함이 없는 귀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둘은 서로를 드러내 주는 거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속에는 이러한 복과 저주라는 상대적 속성이 있습니다.

 

법과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복이라는 은혜의 속성으로 다가가면 그 사람은 복에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법이라는 저주의 속성으로 다가가면 그 사람은 저주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과 저주라는 이질적 요소가 담긴 두 세계가 태초에 천지(天地)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천지(天地)라는 두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전혀 다른 두 세계입니다.

이것은 마치 빛과 어둠처럼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천지(天地)란? 우리가 말하는 일반론적인 하늘과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늘과 땅 이야기를 단순하게 하늘과 땅 이야기로 말하고 있지 않아요.

하늘과 땅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중심 사상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 구원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천지 창조도 이와 같은 사고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천지 창조 속에서 구속사적 의미로 읽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속사적인 의미로 보면 하늘은 천국을 상징하고 땅은 지옥을 상징해요.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으면 당연히 그 나라 백성도 있습니다.

두 백성은 달라요.

누군 천국가고 누군 지옥으로 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이건 차별입니다.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유기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다 같이 구원을 받고 유기를 당하려면 다 같이 유기를 당하여야 공평해요.

우리 피조물 입장에서 그렇단 말입니다.

 

다 함께 천국에 가거나 다 함께 지옥에 가거나 하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보내고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불공평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 입장에서의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예수님을 “만유의 주(主)”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히 1:2절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모든 세계를 창조 하셨다고 하지요.

상속자란? 아버지로부터 유업을 물려받은 주인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상속이 뭔가요?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에요.

예수님이 아버지 대신 심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 5:22-23=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 세상을 주(主)가 되어서 다스리라고 위임을 하였어요.

주(主)란? 심판하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고 합니다.

 

그 아들을 영접하라고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진노를 퍼 붓겠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예수님이 아버지를 대신하는 심판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무엇으로 심판을 하시는가요?

십자가로 하세요.

자신의 죽음을 가지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의 죄로 인한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을 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저주 하십니다.

이게 구원과 저주의 룰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 좌우에 달린 강도들을 통해서 이걸 보여 주셨어요.

두 강도는 두 부류의 사람을 대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을 받을 사람과 저주를 받을 사람의 대표에요.

 

둘 다 외적으로는 동일한 강도에요.

그런데 한 강도는 예수님에 의해서 천국으로 갔고 한 강도는 예수님에 의해서 지옥을 갔어요.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너는 천국으로 가고 너는 지옥으로 가라고 두 사람을 심판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을 받은 자나 저주를 받은 자 모두에게 예수님은 주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빌 2:6-11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 모두가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곧 아버지의 뜻이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속에는 구원과 저주가 있어요.

즉 예수 안에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천국의 주인이기도 하고 지옥의 주인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서 천국에 갈 자도 창조하시고 지옥으로 갈 자도 창조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보내서 심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이에게는 구원의 주가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저주의 주가 되어요.

구원 받을 자들에게는 예수가 메시야이지만 저주 받을 자에게는 예수는 저승사자인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일을 하실까요?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 하면 좋잖아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왜? 인간들에게 불의하다는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차별을 하십니까?

 

이는 차별을 통해서 진의(眞意)를 드러내고자 하심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가짜를 통해서 진짜를 드러내고자 하신다는 말입니다.

역(逆)으로 말하면 진짜를 드러내고자 가짜를 만든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걸 천지 창조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하니 잘 이해하세요.

창조란 말은 원인에 의한 결과라고 했지요.

창조가 있기 전에 원인이 있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되면 나타난 창조보다 숨겨진 원인이 먼저가 되겠지요.

 

원인은 숨겨져 있어요.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이 원인이 진짜에요.

 

숨겨져 있는 진짜인 원인을 드러내고자 창조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창조는 원인을 드러내고자 만들어진 것이 됩니다.

그럼 창조 된 세상은 원형이 아니고 가짜가 되겠지요.

왜냐하면! 원형은 보이지 않고 숨겨져 있는 원인 속에 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자 보세요.

하나님 나라가 있어요.

보이지 않아요.

하나님 나라를 일컬어 영의 나라라고 합니다.

 

영은 영으로 드러낼 수가 없어요.

영(靈)은 영의 반대인 육(肉)으로만 드러나요.

그래서 하나님은 영을 드러내기 위해서 영의 반대인 육을 만드신 것입니다.

 

영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에요.

영원을 무한이라고 합니다.

무한(無限)을 무한으로 드러내려면 무한의 반대인 유한(有限)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라는 영원한 무한의 나라의 반대인 육이라는 유한의 역사의 나라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역사라고 합니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한 나라에요.

그런데 이 육이라는 유한의 역사가 어디서 나왔다고 했나요?

영을 드러내기 위하여 무한이라는 하늘나라로부터 나왔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보이는 이 역사는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진짜를 보여주기 위하여 잠시 동안 존재하는 가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이 역사 속에 있는 것들은 전부가 가짜로서 허상이고 사라질 것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지나가는 한 경점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묵시라고 합니다.

묵시는 그냥 묵시라고 하면 몰라요.

묵시의 반대 되는 것이 있어야 묵시를 드러낼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묵시의 반대 되는 것이 역사에요.

 

이건 마치 흰색을 흰색으로 드러내 주기 위하여 검은 색을 바탕으로 까는 것과 같아요.

원래 검은 색은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흰색을 드러내려고 하다 보니 잠시 필요해서 검은 색을 바탕에 깐 것뿐입니다.

검은 색이 없으면 흰색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지 못하니 없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입니다.

 

묵시라는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에요.

분명히 존재하는데 드러낼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 여기 있다고 알리려고 묵시와 상대적인 세상을 창조 하신 것입니다.

즉 묵시라는 흰색을 드러내고자 역사라는 검은 색을 만드신 것입니다.

흰색을 드러내 주면 검은 색은 자기 용도를 다 하였기 때문에 철거가 되어요.

 

이 역사가 그러해요.

자기 본분을 다하면 철거가 되어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철거가 될 세상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 1:10-12=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 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철거 될 세상을 만들었어요.

철거 당할 역사 속에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이 역사 속에서 할 일을 다 하면 이 역사와 함께 철거가 되어요.

 

우리가 역사 속으로 올 때는 묵시 속에 있는 나를 설명하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묵시 속에 있는 나는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나에요.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가서 자신을 보았지요.

 

삼층천에 있는 바울이 원래 묵시 속의 바울이에요.

그런데 역사 속에 또 바울이 있어요.

역사 속에 있는 바울은 묵시 속에 있는 바울을 드러내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있는 바울을 가지고 하실 일을 다 하시면 역사에서 철거 하세요.

 

모든 성도가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역사 속에서는 잃어버려진 나로 보내심을 입은 것입니다.

잃어버려져 있다가 예수로 하여금 되찾음이라는 구원을 받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과 잃어버림은 짝이에요.

 

창조주와 피조물도 짝이에요.

 

피조물이 없으면 창조주를 몰라요.

창조주가 창조주 되려면 반드시 그 창조주에 의해서 창조가 된 피조물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피조물에 의해서 창조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를 드러내 주는 파트너인 셈입니다.

 

창조주는 피조물을 통해서 계시가 되어요.

그래서 성경은 피조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광이란? 받은 것을 드러내는 것을 말해요.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창조주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 안에는 창조주의 영광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즉 창조주를 아는 촉(생명)이 있단 말입니다.

 

이는 마치 철새들이 수천km 거리를 비행하면서 자기의 도래지를 찾아 가는 것은 “지자기(地磁氣)”를 감지하고 인식하고 추적하여서 따라가는 본성이 있는 것과 같아요.

철새들은 지자기를 감지하는 촉에 의해서 자기가 왔던 곳을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로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자각(自覺)하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아! 나는 하나님(예수님)으로부터 나온 자이고!

하나님(예수님)에 의해서 살고 있으며!

하나님(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구나! 를 아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이걸 바울은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했어요.

주가 우리를 존재케 하는 근원이에요.

우리가 있기 전에 주가 계셨어요.

 

이를 알면 하나님 앞에 겸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내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진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가 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려 주시려고 우리의 삶에 개입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그 동안 죄로 인하여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고 살았어요.

창조의 근본을 모르고 살았어요.

 

내가 어디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았어요.

그냥 짐승처럼 육신의 본능대로 살았어요.

이걸 어둠이라고 하고 죄인의 삶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주인으로 찾아 오셔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야! 정낙원이 너의 인생은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나를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저는 하나님에게 그럽니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

하나님이 왜? 이러십니까?

우린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우리 인생을 집달리 하십니다.

하나 둘씩 차압해 가시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살던 인생을 예수님의 것으로 압수해 가세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말씀 하실 때에 강한 자가 먼저 주인을 결박하고 난 후 세간살이를 늑탈해 가신다는 것으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늑탈해 간다는 말은 강제로 집행하신다는 말이에요.

 

구원이란? 하나님의 강제 집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것으로 살아지지가 않고 주의 것으로 살아짐으로 간섭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인생 쫑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것으로 말씀해 주셨어요.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지요.

 

고기는 바다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해요.

어부에 손에 걸리면 그것으로 고기는 바다에서의 인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들에게 회 거리가 되어서 먹힘을 당하거나 매운탕 거리로 먹힘 당하는 것만 남았어요.

 

우리의 신앙이 그러해요.

예수를 몰랐을 때가 훨씬 편해요.

천국과 지옥을 모르는 사람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어요.

그러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당신들 이러다 지옥 간다고 하면 웃어요.

보무도 당당하게 까짓거 지옥 가지 뭐!

그런다니까요.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는데 어찌 하나님을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달라요.

하나님을 두려워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은 없어! 라고 하여도 안 되어요.

어찌 마음에 믿어지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귀에 들리는데 없다고 합니까.

 

차라리 안 믿어지고 안 보이고 안 들리면 좋겠어요.

그럼 내 맘대로 살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믿어지니까 내 맘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살면 무언가 찜찜하단 말입니다.

 

이거 이러다 된통 혼나지 그래요.

그러다가 진짜로 된 통 혼나는 사건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 그럴 줄 알았다고 하면서 도리어 시원함을 얻어요.

 

신앙생활이란? 마치 까다로운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과 같이 귀찮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시어머니는 실제로 까다롭고 고약한 분이 아닌데 며느리들은 시댁(媤宅)에 시(媤) 자만 들어가는 사람들은 다 고약하고 까다로운 존재들이라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시어머니처럼 우리 삶에 늘 간섭을 하세요.

에~헴! 하면서 나 여기 있다고 헛기침을 해 댄단 말입니다.

시어머니가 존재 한다는 것만으로 우린 늘 비상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아! 이를 어찌 하나요!

뉘라서 이 사랑을 알까요?

 

여러분!

죄인에게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얼마나 큰 축복인 줄 아세요.

이는 지옥으로 갈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지옥 속에 있는 자들을 반드시 건져 내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포로에서 돌아오는 남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지옥 같은 곳에서 남겨진 자들이에요.

불타는 구덩이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이라구요.

그러니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신앙이란? 감사할 일을 더 많이 더 깊이 깨달아가는 것이에요.

마치 어린아이가 자라가면서 부모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신앙을 생명의 자람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봅시다.

 

고전 13:8-13=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이 뭐냐?

하나 되는 거에요.

한 몸으로 사는 거에요.

 

한 몸으로 살기 위하여 점점 더 깊이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가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을 더 많이 알게 하려고 믿음도 주셨고 소망도 주셨어요.

믿음과 소망이 사랑을 낳게 하는 것입니다.

 

전 이러한 말씀 앞에 서면 제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화가 생각나요.

아버님이 어머니에게 임자! 그러면 어머니가 아버님의 마음을 척 알아보시고 어떤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님이 임자! 그러면 물을 떠다 주시고!

임자! 그러면 재떨이를 갖다 드리고!

임자! 그러면 등도 긁어 주시는 겁니다.

 

이건 그만큼 안다는 말입니다.

살을 부대끼며 살면서 서로가 서로를 깊이 아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는 많은 말이 필요가 없어요.

 

서로의 숨소리만 들어도!

말 소리만 들어도!

행동을 보아도 그 사람의 감정을 읽어낼 수가 있어요.

이게 사귐이고 사랑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와 이런 사랑의 사귐을 원하세요.

우리가 비 소리 바람 소리만 들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천둥소리 번개 소리를 들어도 하나님의 감정을 읽어내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기를 바라세요.

 

그래서 징조를 보고 때를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만물은 모두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고 있어요.

성도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해요.

천지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은 기침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우리라! 고 하시잖아요.

좀 들으라는 겁니다.

알라는 겁니다.

 

눈이 있으면 좀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희가 어떻게 나의 간섭함을 통해서 남은 자가 되었는지 알라는 것입니다.

 

남은 자들이 있다는 말은 버려진 자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남은 자와 버려진 자는 달라요.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 주고 있어요.

 

남은 자는 버려진 자를 통해서 남겨진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 나 남았다 를 자랑 할 것이 아니라 어째서 나를 남겨 두셨습니까! 라고 물어야지요.

감사하여야지요.

그게 남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이에요.

그래서 버려지는 자들 속에서 남겨 두신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은 달라요.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은 하늘과 땅만큼 달라요.

남은 자와 버려진 자는 축복과 저주로서 극과 극으로 달라요.

 

그런데 세상에는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다른 자들이 서로 섞여서 살고 있습니다.

마치 양과 염소처럼 살고 있어요.

양과 염소는 낮에는 함께 풀을 뜯고 있어요.

그러다가 저녁 때가 되면 목자에 의해서 갈라짐을 당합니다.

 

성경은 저녁을 종말이라고 합니다.

아침이 ‘역사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저녁은 ‘역사의 끝’을 말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고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고 ‘시작과 끝’이라고 합니다.

이는 일을 시작 할 때가 있으면 그 일을 끝 낼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때가 종말이에요.

시작은 종말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이 창조를 앞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인 말이지요.

아니 어떻게 창조가 되지 않았는데 종말이 앞 설 수가 있는가요?

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 어찌 폐기되는 것이 있단 말입니까?

 

다시 히브리서 1장을 봅니다.

 

히 1:10-12=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태초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하늘은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11) 그것들은 없어질지라도, 주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그것들은 다 옷처럼 낡을 것이요, 12)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두루마기처럼 말아 치우실 것이며, 그것들이 다 옷처럼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같으시고, 주님의 세월은 끝남이 없을 것입니다.”(새 번역)

 

주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멸망하시로 작정을 하고 창조를 하십니다.

그러니 종말이 창조를 앞서고 있는 것이 맞지요.

 

왜? 멸망 할 것을 창조하십니까?

이는 영존(永存)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창조를 한 것이에요.

영존하는 분이 누구인가요?

주님이세요.

 

그러니 우리는 멸망할 세상에 와서 멸망치 않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배우고 가는 것입니다.

죽을 목숨을 통해서 영생하는 목숨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가는 거에요.

하나님이 영생을 알려주시려고 죽음에 던져 놓은 것입니다.

천국을 알려주려고 지옥에 던져 놓은 것입니다.

 

이 땅이 지옥이에요.

우린 여기서 천국을 알고 가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한 말씀이 시편에 기록이 된 말씀이에요.

시편을 보면 더 자세히 알 수가 있어요.

 

시편 102편을 봅시다.

 

시 102:25-28= “그 옛날 주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놓으시며, 하늘을 손수 지으셨습니다. 26) 하늘과 땅은 모두 사라지더라도, 주님만은 그대로 계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옷처럼 낡겠지만, 주님은 옷을 갈아입듯이 그것들을 바꾸실 것이니, 그것들은 다만, 지나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27) 주님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주님의 햇수에는 끝이 없습니다. 28) 주님의 종들의 자녀는 평안하게 살 것이며, 그 자손도 주님 앞에 굳건하게 서 있을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히브리서에 빠져 있는 말씀이 나와요.

28절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나오지요.

 

주님의 자녀들도 주님처럼 영존하는 자로서 영원이 굳건히 선다고 하지요.

이 주님의 자녀들이 누구 안에 있나요?

주님 안에 있어요.

그러니 주님만 영원하시면 그 안에 속한 주님의 백성들도 영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성도를 일컬어 주의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몸이에요.

이걸 연합이라고 합니다.

 

연합이란? 본드로 붙여 놓았다는 뜻이에요.

이걸 뜯으면 둘 다 상함을 입어요.

그러니 뜯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뜯겨져 나오면 주님도 뜯겨져 나와요.

그러니까 우리는 뜯겨져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있는 자는 절대로 떨어져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붙여 놓았나요?

주님이 붙여 놓았어요.

우리가 떨어져 나가겠다고 하여도 주님이 허락하지 않아요.

 

왜? 그런가요?

주님이 상함을 입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원함으로도 주어진 것이 아니었듯이, 또한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원함으로 취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을 하지 않아요.

이걸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고 합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해요.

 

구원이란? 우리보다 강하신 분이 우리를 폭 감싸고 있는 상태를 말해요.

 

우리를 폭 감싸고 계신 분이 바로 영생하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영생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영생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해요.

어떻게 죽는가 하면 이 세상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방식으로 죽임 당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실상이 아니고 허상이에요.

실상은 묵시에요.

역사가 묵시에서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허상인 역사에서 실상인 묵시로 빨리 빠져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허상에서 실상으로 빠져 나가는가 하면 주의 손에 의하여서 허상에서 종말을 고하는 죽음을 당함으로 빠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니다.

빛과 어둠이 섞여 있어요.

빛과 어둠을 의인화(擬人化) 하여서 보면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어디에 섞여 있나요.

창조(피조물) 속에 섞여 있어요.

역사 속에 섞여 있어요.

 

빛과 어둠이 섞여 있으니 흑암과 혼돈과 공허에요.

여기에 하나님의 신(神)이 운행을 합니다.

이는 빛과 어둠을 갈라내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곳에 말씀이 침투해 들어옵니다.

이제 하나님이 팔을 걷어 부치고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갈라내시는 일을 합니다.

이게 창세기의 창조이야기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두 속성(續成)이 있다고 했지요.

 

공의와 사랑입니다.

다른 말로 법과 은혜에요.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 두 가지 속성으로 다스린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으로 대하는 자가 있고 은혜로 대하는 자가 있어요.

법으로 대하는 자는 공의에 의하여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반대로 은혜로 대하는 자는 사랑에 의해서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긍휼의 그릇이고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릇에 의해서 긍휼과 진노가 담겨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긍휼을 담을 그릇과 진노를 담을 그릇으로 만들었어요.

그리곤 각각의 그 그릇에 합당한 것을 일방적으로 담으세요.

 

이걸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각각의 그릇의 용도대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갈 자는 천국으로 보내고 지옥으로 갈 자는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창세전 언약이 완성이 되어요.

즉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시에 두 그릇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하신 역사 속에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오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아버지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그 뜻이 무엇인가요?

 

요한복음 6장을 봅시다.

 

요 6:37-40=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40) 또한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릴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자신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합니다.

이는 아버지가 시키는 일만 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예수에게 무슨 일을 시키는가 하면 아버지가 주시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실 자들은 예수님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선택하세요.

아버지가 선택을 한 자들을 아버지가 예수에게로 이끌고 옵니다.

예수님은 아무나 살리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살리라고 한 자들만 살려요.

즉 아버지께서 구원하라고 하신 자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벌써 하나님이 편파적으로 일을 하심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로 이끄는 자가 있다고 하잖아요.

아버지께서 모든 인간들을 다 예수에게로 이끄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예수에게로 이끌어 주세요.

 

녹명(錄名) 되지 않는 자들은 예수를 못 믿게 하세요.

쉬운 말로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구원 받기 싫어도 받아야 하고!

반대로 생명책에 녹명이 되지 않는 자들은 구원 받고 싶어도 받을 수가 없어요.

 

구원을 받고 안 받고는 인간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오직 구원을 하시는 하나님만이 결정을 하세요.

인간들은 그 결정에 순응할 뿐이에요.

여기에 반발하는 자들이 지옥에 갈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멸망 속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남겨진 자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남은 자”가 아니고 “남겨진 자”들이에요.

이걸 잊지 마세요.

우리가 알아서 남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겨 두시면 남은 자가 되는 거에요.

 

인간에게는 주권이 없어요.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들 입장에서는 불합리하게 보여요.

왜? 불합리하게 보입니까?

그게 모두 다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 바로 죄에요.

요놈에 죄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기를 든단 말입니다.

지음을 받은 자가 지으신 분에게 항의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 너무 합니다!.

이건 하나님의 횡포입니다!

나는 억울합니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일갈하는 것입니다.

 

야~ 이놈아!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떻게 자기를 지으신 분에게 따질 수가 있느냐!

이 놈이 아주 시건방진 놈이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따지는 그것이 바로 저주 받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언약에 보면 이런 자들이 일어나 주어야 해요.

그래야 하나님의 공의가 집행이 되어요.

즉 지옥으로 보내야 할 자들은 지옥으로 갈 짓을 해 주어야지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심판자로 오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로 인하여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은 예수 때문에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로 인하여 지옥에 갈 자가 생기고 천국에 갈 자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즉 지옥 가기로 작정이 된 자들은 예수님을 대적하여서 지옥으로 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 보면 반드시 반대 하는 자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어요.

참 신기해요.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목사의 설교를 들어도 해석하는 것이 달라요.

반응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달라요.

 

이 모두가 하나님 말씀에 속성이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들을 갈라내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빛에 속한 자들은 말씀을 듣고 빛으로 나아오고, 어둠에 속한 자들은 어둠으로 나아와요.

쉬운 말로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면 빛에 속한 자는 천국 백성 짓을 하고, 어둠에 속한 자는 지옥 백성 짓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천국 백성들은 은혜와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고, 지옥 백성은 정죄와 비판의 자리로 나아가요.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 뱉어 내는 것이 달라요.

마치 양이 물을 먹으면 젖을 내고,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을 내듯이 해요.

 

천국 백성은 은혜와 긍휼로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데, 지옥 백성들은 정죄와 비판과 심판으로 생명을 죽이는 역사를 일으켜요.

스스로 자기의 본질을 드러내요.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그것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복음 안다고 해서 다 복음 아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이스라엘이 아니란 말은 겉으로는 이스라엘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속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이스라엘이 따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육적 이스라엘은 하나의 표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속에 또 이스라엘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나 구원 받았다 라고 하면 안 되어요.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자는 따로 준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육적 이스라엘이 진짜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지구상에 누가 진짜 이스라엘이란 말입니까?

 

그건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수가 비록 바다 모래 같이 많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남은 자인가?

남겨진 자인가?

이건 엄청난 차이입니다.

 

많은 분들이 남은 자에 대한 설교를 하는데 남은 자가 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더러 남은 자가 되라고 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자라고 합니다.

 

로마서 11장을 봅니다.

 

롬 11:1-6=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위 내용은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이 남겨둔 7천 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바알과 아세라의 거짓 선지자들과 갈멜 산에서 누구 신이 참 신인지 내기를 한 사람이잖아요.

당시 모든 백성들이 바알을 여호와로 알고 섬겼어요.

잘못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이 시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섬기는 것과 같아요.

엘리야가 그 시대 상황을 가만히 보니 자기 혼자만 남아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따집니다.

 

하나님 저 혼자만 남아 있습니다.

나만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 시대 버전으로 말하면 나만 복음 압니다! 라고 꼴값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 이 놈 이거 되게 시건방진 놈이네!

야! 이놈아!

내 백성은 내가 남겨두어!

니가 알지 못하는 7천명이 있어!

내가 그들을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남겨 두었다는 말씀에 귀를 기우리세요.

이들이 자기 실력으로 남은 자가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남겨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없는 것처럼 보여요.

 

엘리야의 눈에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힘없이 이름 없이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가루 서말 속에 감추어진 누룩처럼 있어요.

 

진짜 복음 아는 자들은 숨어 있어요.

복음 안다고 나 대는 것들은 짝퉁일 확률이 높아요.

특히나 복음 안다는 것으로 교만하여서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자들은 복음을 불법으로 행사하는 자들이에요.

 

지금 바울이 남은 자 이야기를 왜? 합니까?

유대인들이 잘난 척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뭘 가지고 잘난 척 합니까?

 

자기들이 율법을 지켰다는 그 율법에 의(義) 때문입니다.

자기 행함을 근거로 하고 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자신의 종교적 열심을 근거로 나는 천국에 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종교적 열심을 근거로 구원을 챙기는 것은 스스로 남은 자가 되겠다는 말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남겨 둔 자가 아니지요.

자기가 알아서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아서 남게 된 남은 자들은 나중에 자기가 알아서 다 나가 떨어져요.

유대인들이 그러했어요.

그러니까 스스로 남은 자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남겨 두어서 남은 자가 된 자들인지는 환란 속에 던져보면 알아요.

 

스스로 남은 자들은 다 떨어져 나가요.

그러나 하나님이 남겨 둔 자들은 환란 속에서 걸어 나와요.

하나님이 그 환란 속에서 건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가지고 포로에서 해방이 되어 돌아오는 남은 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초반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유대인들이 넘어져서 하나님 말씀이 다 폐하여 진 것 같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다고 하지요.

즉 하나님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겉보기에는 유대인들이 다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넘어진 것 같지만 그 속에 넘어지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12 제자들처럼 남겨진 자들이에요.

 

그러면서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 중에 참 이스라엘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넘어짐 속에서 걸어 나오는 자들이에요.

 

이사야 10장을 봅시다.

 

사 10:20-23=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몽둥이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범죄하자 앗수르에게 붙여 버렸어요.

이는 사사기의 반복된 현상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주변에 강대국에게 붙여 버리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죽겠다고 회개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서 구원해 주세요.

지금 그런 꼴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사사기에서처럼 늘 보이는 힘을 쫓아갔어요.

앗수르는 강대국입니다.

힘이 있어요.

그러니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힘을 의지하고자 기댄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스라엘은 힘이 없고 앗수르는 강하니까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눈치를 보면서 그 아래 빌 붙어서 살고자 하였단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앗수르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게 만들었어요.

 

쉬운 말로 혹을 떼러 갔다가 혹을 하나 더 붙이고 온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얻어먹고자 갔다가 얻어터지고 온 것입니다.

마치 나오미가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자 모압으로 내려가서 잘 살아 보려고 하다가 모압에서 남편과 아들을 다 잡아 먹고 빈 털털이가 되어서 다시 돌아오는 것과 같아요.

 

이건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 기대어 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이지 세상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도와주는 곳이 아니고 약탈하는 곳이에요.

 

너희 보기에는 세상이 너희에게 도움을 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망하게 하고 삼키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너희가 의지하고 믿던 것으로부터 발등을 찍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징계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을 징계한 앗수르를 내 백성을 두들겨 팼다는 죄목으로 쓸어 버려요.

참 재미있지요.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정 붙이고 살자 하나님이 질투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앗수르 놈들의 마음을 격동 시켜서 이스라엘을 치게 만들었어요.

 

이건 마치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음녀의 심판과 같아요.

 

계 17:15-16=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음녀는 타락한 교회를 말해요.

교회가 세상 권력에 빌붙어 살다가 세상 권력으로부터 버림당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이용해 먹다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의 본질이에요.

 

교회와 세상은 하나 될 수가 없어요.

세상은 역사에 속하였고 교회는 묵시에 속하였어요.

교회는 세상을 고발하는 곳이지 세상 편을 들어주는 곳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 시대 교회를 보세요.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안달을 내고 있어요.

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자 안달을 합니까?

 

이는 세상 권력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군림하고자 함이에요.

세상의 영광이 탐이 나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 시대 세상 권력과 교회는 서로 서로 이용하고 있어요.

정치는 교회를 이용하고 교회는 정치를 이용하여서 세상에 기득권을 챙기는 것입니다.

이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음녀가 무리와 열국과 방언 위에 앉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다고 합니까?

짐승이 음녀를 불사른다고 하지요.

이는 단물만 쏙 빼 먹고 버린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용만 당하는 것입니다.

 

이용당하고 나면 어찌 되나요?

껍데기만 앙상하게 남아요.

교회의 수치만 드러내고 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이 이러한 짓들을 하고 있어요.

 

마치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빌 붙어 살고자 한 것과 같아요.

앗수르는 철저하게 이스라엘을 이용해 먹었어요.

그리곤 망하게 하였어요.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는 자들은 징벌해요.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힘을 의지한 것이나 앗수르가 하나님을 모르고 산 것이나 동일해요.

둘 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 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앗수르를 들어서 쳐 버리고, 자기 힘을 믿고 사는 앗수르는 너희들 왜? 내 백성을 괴롭혔어! 라고 하면서 징치한단 말입니다.

서로가 하나님에게 얻어터질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앗수르는 바벨론에 의하여 초토화되고 말아요.

하나님이 바벨론을 들어서 앗수르를 이스라엘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징벌한 것입니다.

이 때 앗수르는 마치 산불이 나서 온 산을 다 태워버린 것처럼 폐허가 되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 속에 있던 이스라엘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이들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남은 자들이에요.

이렇게 돌아온 남은 자들은 회개를 합니다.

다시는 세상 힘을 의지 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뢰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일들이 그 당시에만 국한 된 일이 아니고 오고 오는 세대 속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기대다가 그 기댄 자로부터 혼쭐이 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이 늘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 세상 힘 의지 하다가 망하고 돌아오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에요.

이들이 남겨진 자들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남겨진 자들이 어떤 모습인줄 아세요.

패잔병 모습이에요.

이걸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을 가지고 말했어요.

 

예레미야 31장을 봅시다.

 

렘 31:7-9=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8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9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예레미야 1장을 보면 예레미야가 사명을 받을 때 북편 땅에서 기우는 끓는 가마를 보지요.

이 가마가 바벨론이에요.

이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하는 데 이는 마치 끓는 가마가 쏟아지는 것 같이 한다는 말입니다.

순식간에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망합니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고토로 불러들입니다.

 

이 모두가 모세 언약에 근거한 일입니다.

모세 언약을 보면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기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국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불러들인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때가 차면 언약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 시켜 줍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 올 때는 성공하고 승리한 자의 모습이 아니라 실패하고 망한 자의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면 너희가 의지하고 믿었던 세상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을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을 세상에서 실패하고 난 후에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이런 일들을 당하잖아요.

등 따습고 배부르면 다 하나님을 떠나잖아요.

세상 일락에 빠져 살잖아요.

 

그러다가 망하고 나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라고 하잖아요.

손 들고 돌아 올 때 다 망하고 나서 오잖아요.

그리고는 아버지 잘못 했습니다 라고 하잖아요.

 

이건 마치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가서 돼지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거지가 되어 봐야 아버지 집이 귀한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아요.

탕자가 아비지 집으로 돌아 올 때 몰골이 어떠했나요.

거지 중에서도 상 거지였어요.

 

지금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그러해요.

상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8-9절을 보세요.

 

8-9=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9 울며 올 것이며”

 

하나님이 땅 끝에서 모아 들이는 자들의 모습이 어떤가요.

소경이고 절뚝발이이고 또한 자기 몸뚱이 하나 가누지 못하고 고통당하는 잉태한 여인과 같다고 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돌아오나요?

웃으며 오나요?

울며 오나요?

울면서 온다고 하지요.

이는 처절하게 자기들의 죄를 고백한다는 말입니다.

 

잘 보세요.

돌아오는 자들 중에 잘난 자들이 없지요.

자기 힘을 의지하는 자들이 없지요.

 

쉬운 말로 잘나고 똑똑한 놈들은 없어요.

이게 하나님으로부터 남겨진 자들이 모습이에요.

이들이 신약으로 오면 성도로 나타나요.

 

고린도전서 1장을 봅시다.

 

고전 1:26-31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야! 너희들 주제를 좀 봐라!

뭐! 잘난 것들이 있느냐!

없지 않느냐!

그러니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였다고 합니다.

미련하고 못 배우고 약한 자들을 택하였다고 합니다.

이건 구약의 남은 자들의 모습이에요.

 

왜? 남은 자들을 이러한 모습으로 이야기 하는 줄 아세요.

신앙생활이란?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남은 자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성이 드리워져 있어야 해요.

자기 잘남이 아니라 못남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남은 자들이 누구를 자랑합니까?

여호와지요.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자신들이 포로에서 돌아오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하지요.

 

그럼 신약의 남은 자들인 성도들은 어떤 고백을 하여야 하나요?

구약의 남은 자들과 동일한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자랑 할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느끼나요?이는 하나님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자랑으로 남기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자랑거리는 다 빼내고 예수님의 자랑만 오롯이 남기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랑을 하려면 예수 안에서 자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남은 자들이 있어요.

누가 남은 자냐?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우리가 남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함에도 은혜로 남겨 주심을 감사합니다. 남은 나를 자랑치 말고 남겨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찬미케 하옵소서. 복음 안다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그 은헤에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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