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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62강. 누구를 믿을 것인가 (요 9:24-34)

by coroa 2021. 8. 23.

 

 

62강. 누구를 믿을 것인가 (요 9:24-34)

-.정낙원 목사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이 세상엔 영적으로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자와 마귀에게 속한 자가 있어요.

 

그런데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대적으로서 전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선 한 집안 식구끼리도 이런 양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비와 아들이 어미와 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대적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인류역사가 시작이 되면서 두 부류의 사람이 항상 충돌을 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가인과 아벨이 싸웠고,

이삭과 이스마엘이 싸웠고,

야곱과 에서가 싸웠고,

요셉과 다른 형제들이 싸웠고,

다윗과 사울이 싸웠고,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이 싸웠고,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싸웠습니다.

지금은 십자가 피를 중심으로 갈리워져 싸웁니다.

 

재미있는 것은 전부가 혈통 적으로는 한 형제란 겁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의 싸움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수님에게 속한 교회가 있고 마귀에게 속한 교회가 있어요.

물론 성도 역시 그러합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이 항상 핍박을 당하는 쪽이었다는 겁니다.

이긴 자가 아니라 진 자들이에요.

유명하게 성공하여 이름을 떨친 자가 아니라 이름 없이 사라졌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세상이 박수를 쳐 줄 줄 알지만 실제론 그 반대에요.

세상이 미워해요.

복음 전하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 아니고 이단이라고 해요.

이는 이 세상의 본질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악에게 속하여 있음을 고발해 주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아도 이를 잘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은혜를 입어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자와 그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눈을 뜬 사람은 예수님 편이고 유대인은 마귀 편인 겁니다.

 

인간들은 선악의 법 아래서 출생을 합니다.

그러니 선악의 법 안에서 알고 있는 신관(神觀)이 있어요.

선악의 법으로 본 신관은 착한 자에겐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겐 벌을 주는 상선벌악하는 하나님이에요.

 

인간 쪽에서 복을 불러 오든지 화를 불러 온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상 줄자에게 상을 주고 벌 줄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

간의 행함을 근거로 화를 주거나 복을 준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조건에 따라서 움직이는 신관입니다.

 

이게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어요.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땅에서도 풀린다 합니다.

성경을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인용하면서 교인들에게 착하게 살 것을 강요합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하면 복 받는다고 가르쳐요.

 

그러니 교인들도 자신의 행함에 결과로 복을 받든지 징벌을 당하든지 한다고 믿어요.

행여 주일날 교회에 안 오고 등산이라도 가면 마음이 늘 불안해합니다.

그러다가 하산 길에 발이라도 삐끗하면 내 그럴 줄 알았다고 교회 안 가고 등산을 와서 하나님이 징계를 했다고 생각하여 마치 액땜이라고 당한 듯이 스스로 위안을 삼아요.

 

목사들은 이런 사례를 모집하여서 예화를 들어가면서 신앙생활 잘하라고 공갈을 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예를 들어서 말하면 교인들은 성경이 그렇게 나와 있으니 꼼짝을 못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틀림이 없거든요.

 

특히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보세요.

전부 복과 저주는 우리 행함의 결과물로 주어진다고 하고 있잖아요.

말씀에 순종하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지만 말씀에 불순종하면 들어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는다고 하잖아요.

 

목사들은 난 성경대로 가르친다고 하면서 큰 소리로 나는 참된 종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그 속에 진리가 없는 사람은 꼼짝없이 당하게 되어 있어요.

성경을 열면 한 두 군데도 아니고 한 장 걸러서 이런 말들이 있으니 반박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교인들은 온탕과 냉탕으로 왔다 갔다 하듯이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화를 당한다고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유대인들 사회에서도 이런 사고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유대인들에겐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지킴을 근거로 축복과 저주가 주어진다고 믿고 있어요.

이처럼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율법신앙도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런 체계에 붕괴가 일어나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몰고 온 축복과 저주는 인간의 행함에 따라 복과 저주가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몰고 온 신앙관에는 인간의 행함이 배제가 되었어요.

이렇게 되면 인간 행함을 근거로 하고 있는 유대인의 율법 신앙의 근간이 흔들리게 생겼어요.

그대로 두다가는 유대인들의 신앙에 근본이 흔들려요.

그러니 반발 할 수밖에 없지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세상은 신앙의 지진이 일어났어요.

모든 것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갈라지게 되었어요.

기존에 인간이 알고 있던 진리관에서부터 죄관이나 심판관에서 일대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어요.

특히 유대인들의 율법 신앙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진리관에 있어서는 엄청난 혼돈 상태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이 멀쩡히 성전이 있는데 저건 가짜라고 허물라고 하고 자기가 성전이라고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데 내가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제사를 잘 지내고 있는데 이젠 제사 지내지 말고 날 믿으라고 합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겁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예수를 죽이지 않으면 자기들이 죽게 생겼어요.

그러니 예수뿐만 아니라 예수에게 속한 자들 까지도 죽여야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은 인간 개인에게도 동일해요.

예수님이 우리들 인생에 개입하면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생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살아가는 의미도 달라지고 목적도 달라져요.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를 모를 때가 좋아요.

예수를 알면 그만큼 삶이 헝클어지게 되어요.

세상 사람들과 어울렁 더울렁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져요.

지금까지 언니 동생하고 형님 동생 하던 것도 가치관의 변화로 척을 지게 된단 말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의 편과 마귀의 편으로 나누어져서 원수가 된단 말입니다.

 

우리도 율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자연적으로 율법적 사고가 자리 잡고 있어요.

율법적 사고는 상선벌악하는 사고에요.

물론 이방인에겐 율법이 없어요.

하지만 양심에 법이 곧 율법적 기능을 하고 있어요.

그 양심이 선악과에서 나온 거니까 율법이나 다름없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선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화를 당한다고 태어나면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윤리와 도덕이 다 이런 사고를 바탕에 깔고 있어요.

그러니 굳이 유대인들이 아니더라도 그 근본 바탕엔 다 율법적 사고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런 사고가 악임이 드러납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선악 체계와 하나님이 말하는 선악 체계가 다르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그러니 자연히 인간 세상의 죄와 하나님 세계에서의 죄에 개념이 다른 겁니다.

 

이건 마치 바퀴벌레 세계에서의 선악 개념과 인간들 세상에서의 선악 개념이 다름과 같아요.

인간은 바퀴벌레들 세계에서 통용되는 선악은 인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은 바퀴벌레 자체를 악한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바퀴벌레가 인간들에게 자신들이 선악체계를 인정해 달라고 하면 인간은 묵살해 버립니다.

하지만 바퀴벌레 세계에선 나름대로의 선악 체계가 있어요.

그래서 그들도 그들의 선악체계로 바퀴벌레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인간들 세계와 하나님 세계가 그래요.

하나님 앞에선 인간은 바퀴벌레에요.

그러니 인간들의 가치를 인정해 달라고 할 수가 없어요.

 

우리 착함을 인정해 주세요!

그러면 안 된단 말입니다.

난 착하게 살았단 말입니다!

그러면 안 되어요.

 

하지만 인간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아요.

자기 의가 묵사발 나는데 어찌 동의가 된단 말입니까.

동의가 아니라 도리어 화를 내요.

 

엊그제 수원에서 목사님 세미나를 인도하고 난 후 식사를 하면서 논쟁이 있었어요.

제가 인간에겐 의가 없습니다! 라고 하자 몇 몇 목사님들이 반발하는 겁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인간의 행함을 들고 나오는 것은 죄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성화주의를 표방하는 목사님이 비유적으로 어떻게 살인마 신창원이하고 한경직 목사가 같을 수 있느냐! 라고 하는 겁니다.

신창원이가 한 행위하고 한경직 목사가 한 행위가 같을 수 있느냐 그런 말이에요.

그러면서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은 본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 곁에 계신 복음을 아시는 목사님이 한마디로 일갈했어요.

하나님 앞에선 신창원이나 한경직이나 바퀴벌레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행위를 가지고 선이다 악이다 판단하는 것이 죄입니다! 라고 했어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러자 반대하는 목사님은 동의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살인마하고 성자와 같이 산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느냐 에요.

글쎄요.

한경직 목사가 성자인지???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어떤 바퀴벌레가 신창원이처럼 다른 바퀴벌레를 열 마리를 죽였어요.

그런데 다른 바퀴벌레는 한경직 목사처럼 가난한 바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어요.

이를 두고 바퀴벌레들이 누가 착하고 누가 악하냐고 논쟁을 합니다.

 

자기들끼리 논쟁이 끝나지 않고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이 되자 급기야 어떤 바퀴벌레가 인간에게 나아와 인간님! 인간님! 이 둘 중에 어느 바퀴벌레가 착합니까? 라고 물었어요.

인간님 왈! 물으러 온 바퀴벌레까지 몽땅 에프킬라로 죽였어요.

그러자 숨어 있던 바퀴벌레들이 이건 인간의 횡포라고 하면서 데모를 합니다.

이에 인간님이 데모하는 놈들까지 모조리 에프킬라를 뿌려서 다 죽였습니다.

 

인간이 불의합니까?

불의하다고 하는 그 놈이 악한 겁니다.

바퀴벌레에게 있어 죄란? 인간 입장에서 선과 악을 바라보지 않고 바퀴벌레 입장에서 판단하는 겁니다.

 

바퀴벌레에겐 인간이 바라는 의가 없어요.

바퀴벌레가 새벽기도 하고 인간님에게 충성하고 봉사 한다고 해서 의롭게 보지 않아요.

바퀴벌레가 인간 앞에서 자기의 행함을 선이다 악이다 구분하는 것이 죄이고 어리석음이에요.

바퀴벌레는 인간에게 나는 백해무익한 놈입니다.

난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너 참 착하다 그러지 않아요.

살려주면 감사하고 안 살려주어도 할 말이 없어요.

그게 바퀴벌레다움이에요.

 

그래서 제가 율법에 흠이 없이 살았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대로 산 성자인줄 알았는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자기는 성자가 아니라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바로 만난 사람은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아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의미를 두고 산다고 했어요. 

식사 시간 내내 서로의 뜻을 굽히지 않고 논쟁을 하였어요.

한쪽은 인간에겐 의가 없다는 취지이고 다른 한 쪽에선 그래도 신앙적으로 살면 의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신앙적 삶을 의로 여기지 않아요.

하나님은 오로지 예수님의 피만 의로 여겨요.

그러니 한경직 목사의 삶을 들고 나오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 분의 삶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의 삶이 하나님 앞에선 의가 아니란 말입니다.

 

한경직 목사의 삶을 의라고 하면 하나님 앞에선 죄가 되어요.

바리새인들이 한경직 목사님처럼 살았어요.

그런데 그들은 그 삶을 의로 인정해 달라고 하다가 지옥에 갔어요.

복음을 아는 목사라고 한다면 오로지 예수님의 피만 의입니다 라고 하아여 한단 말입니다.

끝내 얼굴 붉히고 헤어졌어요.

 

이건 서로의 노선이 달라서 그래요.

한 쪽은 예수님 노선에서 죄를 바라보는데 다른 한 쪽은 인간 노선에서 죄를 바라보는 겁니다.

이 둘은 접점이 없어요.

계속 평행선이에요.

 

한쪽은 인간도 인정해 달라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인간은 수에 칠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존귀하다고 여기는 입장에선 화가 나지요.

왜? 인간의 착함을 의로 인정해 주지 않느냐!

그럼 우리의 열심과 충성과 봉사는 다 헛 것이란 말인가!

그럼 누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충성하겠느냐! 라는 거예요.

 

헛 것이 아니라 의가 아니라는 겁니다.

의와 헛 것은 질문 자체가 달라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행함을 의로 여기는 것을 공격하는 겁니다.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을 나무라지 않아요.

저도 성도들에게 봉사하라고 해요.

그러나 종교적인 행함을 앞세우고 나오지 말란 말이에요.

그걸 신앙적 의라고 하나님 앞에 들고 나오지 말란 말입니다.

 

성도라고 한다면 항상 예수님의 공로를 앞세우고 나와야 해요.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지 우리의 신앙적 행함이 아니에요.

제가 한경직 목사의 삶이 의롭다 하고 그를 본받자고 하니 공격을 하는 겁니다.

그건 의로운 일도 아니고 본받을 일도 아니에요.

 

이 둘 사이엔 관심사가 전혀 달라요.

한 쪽은 오직 예수님이고 한 쪽은 인간도 있다는 겁니다.

이게 결국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이에요.

 

오늘 본문도 이런 바탕에서 일어나는 논쟁이에요.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에 의하여서 눈을 뜬 사람과 유대인들 간에 논쟁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나면서 소경 되었던 청년이 눈을 떴어요.

 

유대인들이 눈을 뜬 사람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눈을 뜬 사람이 무슨 말이냐?

날 눈 뜨게 해 준 분은 예수님인데!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그럼 너는 예수의 제자냐!

우리가 보니 예수는 죄인인데!

그래도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이냐! 라고 몰아 부칩니다.

 

이에 눈을 뜬 사람이 무슨 소리냐!

창세로부터 나면서부터 소경인 자를 눈 뜨게 해 준 사건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이런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해 준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 맞다는 증거라는 거예요.

그러니 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모세의 제자냐 예수의 제자냐 라는 제자 싸움으로 비화되었어요.

그러면서 모세의 제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의 제자는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으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유대인의 논리대로라면 모세의 제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눈을 뜬 사람의 논리는 하나님께로 난 자는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믿을래!

예수님 믿을래! 에요.

 

결국 예수님이냐!

하나님이냐! 에요.

이건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싸우는 것과 같아요.

 

인간들이 돌리는 영광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분쟁이 생기게 되었어요.

세상 말로 아버지와 아들 간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단 말입니다.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면 예수가 섭섭해 할 것이고,

예수님에게 영광 돌리면 아버지가 섭섭하게 생겼어요.

참으로 고약하게 된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겁니까?

예수님에게 영광 돌릴 것입니까?

거기다가 성령님은 어떻게 할 겁니까?

큰일이잖아요.

어느 한 쪽은 기분 나빠서 삐치게 생겼어요.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주여! 삼창해서 성부 성자 성령께 영광 돌리자고 합니까?

실제 한국교회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잖아요.

그래서 성령님도 대접하자는 의미에서 성령님 안녕하세요! 라고 하잖아요.

참으로 웃지 못 할 희귀한 현상입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것이 뭡니까?

율법이잖아요.

율법은 모세로부터 주어졌어요.

 

알다시피 모세는 하나님과 독대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유대인들에겐 인간들 중에선 모세보다 유능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요.

유대인들에겐 모세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존재에요.

모세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과 같다고 믿고 있어요.

 

그런 모세가 율법을 주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스스로 거룩하고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의 평소 신앙관이에요.

이건 립 서비스가 아니에요.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 영광이 전부입니다.

 

아니 생각해 보세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잖아요.

이 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 누구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어요.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 앞에 하나님의 대리자로 서 있어요.

하나님을 대신해서 앞으로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가르쳤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 속에 수많은 선지자들이 일어났어도 다 모세의 글을 가지고 말했어요.

모세가 준 율법을 가지고 율법에 충실하라고 가르쳤어요.

모두 다 모세 보다 한 수 아래에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모세의 제자라는 것을 엄청난 영광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율법 신앙 아래선 누구든지 모세의 영광에 도전하면 응징대상이에요. 

그만큼 유대인들에겐 모세는 절대적이었어요.

누구라도 모세의 말씀에 도전하면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라고 여겼어요.

그런 사상이 결국엔 율법에 도전하는 자는 죄인이라는 것으로 규정해 버린 겁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이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으니 유대인들 눈에는 예수님은 귀신들린 죄인이지요.

그런데 그 죄인이라고 여기는 예수님에게 고침 받은 소경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보낸 분이라고 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모세보다 뛰어난 분이라고 하고 있어요.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자는 정말 예수라는 분이 죄인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죄인의 기도나 죄인이 하는 일을 도와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껏 그 어느 위대한 선지자나 제사장도 못했던 나면서부터 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을 봐서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일이 틀림이 없다는 겁니다.

 

이런 예수를 안 믿는다는 것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도리어 유대인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으니까 예수를 몰라본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진짜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보낸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이 졸지에 죄인이 된 셈입니다.

여러분 소경이었던 사람의 신앙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나요.

어떻게 이런 담대함이 생겼을까요.

이는 예수를 만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금도 그래요.

예수를 만난 사람은 오직 예수님 피만 증거할 수밖에 없어요.

예수의 피가 생명이고 능력임을 아는 성도는 유대교라는 큰 교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의 회유나 협박에 굴하지 않아요.

누가 무슨 말을 하여도 나를 구원케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만을 증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 다시 오늘 본문의 논쟁을 살펴봅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모세의 제자냐!

예수의 제자냐! 라는 것이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느냐의 싸움으로 비화되었어요.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

예수를 믿어야 하느냐! 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영적인 맥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어요.

그러니 이 싸움은 교회 안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겠지요.

얼핏 생각하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말과,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말은 논쟁거리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 부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신앙에 본질로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옳은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옳은 것입니까?

이제 그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봅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예수님은 아들이고 하나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가 섬김을 받고 영광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서열 개념으로 이해를 하니 이런 사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받아야 된다고 믿고 있어요.

이건 율법 아래선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 소경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살아온 유대인들 입장에선 용인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하든지 소경의 신관이 틀렸다는 것을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군중들이 소경의 말을 따르게 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분열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하든지 막아야지요. 

그런데 눈을 뜬 소경이 자신의 주장을 굽힐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소경과 유대인들의 논쟁은 단순히 그들만의 논쟁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할 논쟁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 성도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지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지를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그게 그것이 아니냐? 라고 합니다.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합니다.

 

좀 난해한 질문을 하나 해 볼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습니까?

누구를 믿어야 할까요?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럽니다.

아버지가 높으니 자기는 높으신 아버지를 믿는다고 해요.

그러나 성경의 증거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 아버지를 믿으라고 하지 않아요.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아요.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지 않아요.

죄인은 예수님이 구원 하세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구원자란 말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이라고 하면 그것도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구원 사역을 말하면 예수님이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이는 예수님이 구속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죄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시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 하셨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창조된 인간들과 함께 교제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인간들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어요.

인간들을 추방하신 이유는 하나님은 죄인들과 상종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종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에요.

 

이는 거룩과 비 거룩이 함께 할 수 없는 특성 때문입니다.

거룩과 비 거룩은 본성적으로 하나 될 수가 없는 밀어내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는 특성과도 같아요.

 

거룩과 비 거룩은 서로에게 손상을 입히게 됩니다.

마치 빛이 어두움을 비추면 어두움이 빛 때문에 손상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은 빛과 함께 하면 죽어요.

 

이처럼 죄인이 만약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거나 보게 되면 그는 죽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죄인에게 숨어 계신 것이 사랑인 겁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안 만나 주는 것이 죄인에겐 은혜에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하자 대뜸 찾아온 것이 뭡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잖아요.

죄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해요.

 

죄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아담이 본능적으로 숨어버린 겁니다.

두려움을 안고 하나님을 만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건 고문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것이 사랑인 겁니다.

물론 인간 입장에선 저주에요.

하지만 죄인으로서 살 수 있게 하신 조치가 거룩한 세계에서 추방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곳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죄인이면서도 죽지 않고 이나마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숨어 주신 것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을 안 만나 주시는 것이 복 인줄 알아야 해요.

 

이런 사랑이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보여 주셨어요.

 

출 19:21-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22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23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산 사면에 지경을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 2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돌파하고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25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그들에게 고하니라”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시내산까지 인도했습니다.

그리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올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까지 오면서 하나님의 능력들을 경험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자기들 편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시내산에 당도하고 보니 하나님이 시내산 위에 강림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러 오지 못하도록 합니다.

절대로 오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어요.

이는 죄인이 하나님을 보게 되면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알려 주라고 합니다.

 

이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죄인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의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죄인이 얼씬거리면 하나님께서 돌격하여 진멸 시키겠다고 합니다.

 

이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상치 못했어요.

애굽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간들인지라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를 아시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러 오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경고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모세를 세워서 말하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듣고 백성들이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이 두려워서 모세를 중보자가 되어 달라고 합니다.

 

출 20:18-21=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19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21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죄인을 돌격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직접적인 대면을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중간에 하나님이 세운 종을 통하여서만 만나 주시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려면 반드시 중보자를 통하여서만 가능합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나아가는 길이 차단되었어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중보자로 세우신 것은 죄인을 만날 수 있는 통로로 사용하시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중보자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않고 중보자를 통해서 만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란 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직접 영광돌리고자 하는 것이 불경이 되어요.

 

이렇게 되면 눈을 뜬 소경의 말이 맞지요.

유대인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잖아요.

이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가르쳐준 것과 다르지요.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께 바로 나아가지 말고 중보자를 통해서 나아가라고 했어요.

다른 말로 하나님께 직접 영광 돌리려고 하지 말라고 하였어요.

 

이렇게 되면 지금 유대인은 모세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있는 겁니다.

모세가 그러잖아요.

중보자를 제치고 하나님을 바로 만나고자 하는 것은 범죄라고 했잖아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범죄치 않게 하려고 중보자를 통해서 나아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죄가 뭐냐?

중보자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중보자 없는 세상 종교는 모두가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는 중보자가 없어요.

모두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라고 해요.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통하여서 나아오라는 말은 중보자의 의(義)로 나아오란 말입니다.

인간의 의로 나오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의는 죄인에 의에요.

 

아까 죄인은 바퀴벌레라고 했지요.

그러니 인간의 아무리 고상하고 거룩한 것이라 하여도 바퀴벌레의 고상함이고 거룩함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바퀴벌레의 의로 나오지 말고 중보자의 의로 나아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중보자 없이 나아가라고 해요.

자기 의로 나아가라고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도 흡족해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모세를 세워서 말씀하게 하는 것을 일컬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세운 중보자의 말을 듣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번개와 우뢰와 나팔 소리 가운데 강림하시는 이유는 죄인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은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모세와 같은 중보자를 세워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지도 않을뿐더러 만날 수도 없어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보고 기겁을 했어요.

 

사 6:1-7=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으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뵈었어요.

부정한 자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죽게 되었다고 경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사야의 이 고백은 곧 모든 인간들이 해야 하는 고백이에요.

죄인 주제에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어요.

 

실제로 이러한 상징적인 사건이 사무엘 선지자 시대에 있었습니다.

 

삼상 6:19-21=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21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사자들을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가로되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가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모르고 호기심에 법궤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오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이 임재하심의 상징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궤는 아무나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항상 뚜껑을 덮어놓도록 하였어요.

 

법궤를 들여다 본 것은 곧 하나님을 본 것과 같아요.

그래서 법궤 속을 들여다 본 벧세메스 사람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죄인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법궤 속엔 이스라엘의 죄가 담겨져 있어요.

법궤 속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범죄한 세 가지 증거물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그 증거물들을 궤 뚜껑으로 덮어 놓았어요.

뚜껑을 일컬어 시은좌라고 합니다.

 

시은좌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이는 죽을 죄인을 하나님의 은혜가 덮어주어서 살려주시고 있다는 뜻입니다.

속죄일이 되면 짐승의 피를 시은좌에 뿌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세요.

 

뚜껑이 곧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해 주는 중보자와 같아요.

그러니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 안을 들여다 본 것은 죄인이 중보자 없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것과 같아요.

그러니 즉사한 겁니다.

 

이런 영적인 맥은 지금도 계속 됩니다.

중보자 없이 하나님을 대면하고자 하는 자들은 다 죽임을 당합니다.

물론 벧세메스 사람들처럼 즉사하진 않아요.

그러나 영적 의미에선 즉사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하나님 대신 중보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케 하셨던 것입니다.

인간들 입장에선 하나님이 세운 중보자가 곧 하나님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누가 하나님이 세운 중보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운 중보자를 알고 그 중보자를 영접하고 그의 말을 듣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고, 중보자에게 영광 돌리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모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들의 말을 들어야 했어요.

만약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의 말을 거역하면 곧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당했어요.

선지자들은 모두가 장차 진짜 중보자로 오실 메시야를 표상하는 인물들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지요.

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맥을 따라서 오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복의 조상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함으로서 이제부터 하나님의 복은 아브라함을 통하여서 주어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함으로서 이젠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길이 차단되었어요.

이제부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서만 만날 수가 있어진 겁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 하나님도 축복하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한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말을 듣는 다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의 말을 들으면 하나님이 축복을 하십니까?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세운 중보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아브라함을 언급한 것은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같은 복에 조상이란 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복을 받고 거부하면 저주를 받는 겁니다.

이제 복을 받고 저주를 받는 것은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법칙을 만들어 놓았어요.

 

이게 새 언약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중보자로 세운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을 맞추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 2:12=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아들에게 입 맞추라는 것은 아들을 중보자로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거역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길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으라고 하고 있어요.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 곧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에요.

 

요 5:23=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아들을 공경치 않는 자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시겠다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만 만날 수가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아들을 통하여서 아버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들로만 보지 말고 아들을 앞세워서 일하시는 아버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빌립이 예수님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라고 책망을 했지요.

이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통하여서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고 하셨어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어요.

이처럼 성경은 초지일관 아들을 믿으라고 말해 주고 있어요.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해요.

 

그런데 마귀는 이 사실을 인간들이 알지 않기를 원해요.

예수님을 거치지 말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라고 해요.

마귀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중보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을 만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미혹하는 겁니다.

 

중보자를 제쳐놓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은 마귀의 꾐에 빠져있다는 증거에요.

지금도 마귀의 술수에 빠진 자들은 눈을 뜬 소경 앞에서 말하는 유대인들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낸 중보자를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신앙이에요.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낸 중보자라고 말해 주고 있어요.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한국교회가 대한예수교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를 중보자로 믿는다는 의미에서 예수교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실제로는 예수를 안 믿고 하나님을 믿고 있어요.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순복음 교단 같은 곳에선 하나님의 성회라고 하여 예수를 제쳐놓고 직접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물론 대한예수교라고 하든지 하나님의 성회라고 하든지 용어에 의미는 고사하더라도 믿음에 본질만 예수에게 있으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고 우려하던 현상이 교인들로부터 나타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은 높고 큰 분이고 예수님은 낮고 작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고 해요.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곧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라고 하면 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안다고 하는 것도 지식이지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러니 분명한 신앙고백이 이루어지지 않는 겁니다.

 

인간의 역사는 항상 반복되어 왔듯이 지금도 유대인들처럼 하나님께 열심이 대단한 교인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은 저급한 신앙이고 아버지를 믿는 것은 고급한 신앙으로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럼 지금부터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살펴봅시다.

왜? 모세의 제자가 되어선 안 되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지 알아봅시다.

이는 율법은 모세로부터 주어졌고 은혜와 진리를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일컬어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산 자라 함은 곧 죽은 자도 있다는 겁니다.

그럼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면 누가 산자이고 누가 죽은 자인지 드러납니다.

 

모세는 율법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겁니다.

율법 속엔 생명이 없어요.

오직 정죄와 심판뿐이에요.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해요.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넌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네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었어!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받은 사람은 그 율법으로 생명을 얻고자 하면 안 되어요.

율법의 정답은 난 죄인이고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 보단 율법지킴으로 자기를 치장하였어요.

나 이뻐!

그랬단 말입니다.

나 이 정도면 괜찮지!

그랬어요.

 

그러니 율법을 하나도 안 지킨 것이 되지요.

정답이 아니라 오답을 쓴 겁니다.

율법으로 자기를 치장하는 것은 오답이에요.

 

그럼 예수님이 몰고 온 은혜와 진리는 어떤 것입니까?

은혜란 말은 불쌍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김이 되려면 못난 자가 되어야 해요.

잘난 자에겐 불쌍히 여김이 필요가 없어요.

 

그럼 인간을 불쌍하게 여기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이잖아요.

율법으로 죄가 고발당하여야 자기가 불쌍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은혜는 항상 율법을 앞세워서 일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율법이 넌 불쌍한 놈이야! 라고 고발하면 예! 저는 참으로 불쌍한 놈입니다! 라고 하게 되고,

그러면 은혜가 그래 넌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지! 라고 하면서 용서하고 안아준단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가 죄를 고발해서 죽이면 예수님이 살려낸단 말입니다.

그럼 아까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했잖아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죽은 자를 통하여 영광을 받습니까?

아니면 산 자를 통하여서 영광을 받겠습니까?

당연히 산 자를 통하여서 영광을 받으시지요.

 

그럼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에게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있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에게 있지요.

 

자 봅시다.

소경이 어디 아래서 소경이었습니까?

율법아래서 소경이었지요.

 

그럼 소경으로 있을 때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눈을 떴을 때 영광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눈을 떴을 때이지요.

 

그럼 율법이 눈을 뜨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눈을 뜨게 했습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럼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 있습니까?

모세에게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있지요.

 

그럼 유대인들이 이를 알았다고 한다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으로 누구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까?

예수님에게 돌려야 하지요.

그래야 아버지가 아들을 통하여서 영광을 받잖아요.

 

아버지는 아들을 거쳐서 오는 영광만 받아요.

다른 말로 아들이 주는 영광만 받겠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는 아들 이외는 상대하지 않아요.

 

성도를 만나도 아들 안에서만 만나 주세요.

그러니 영광을 아버지께 바로 가지고 오지 말고 아들에게 주라는 겁니다.

그럼 아들이 아버지께 드려요.

 

기도 할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도 다 이런 의미에요.

아버지는 예수님이 하는 기도를 받겠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신 겁니다.

 

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실까요?

이는 우리는 하나님이 바라는 기도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우린 내 뜻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아버지 뜻을 위해서 기도할 수가 없어요.

이게 육의 한계에요.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항상 예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겁니다.

내가 말씀대로 살아서 나아가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이루신 것으로 나아가야 해요.

믿음이란?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 지켜 주심을 믿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음을 앞세우고 나아가는 겁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아들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앞세우고 나아옴을 기뻐하세요.

아들의 희생을 앞세우고 나아오는 것만 받으신단 말입니다.

 

그런데 마귀라는 놈은 아들을 앞세우고 나아가는 것을 믿음 없음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이젠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를 넘어서서 당당해져야 된다고 해요.

예수를 믿지 말고 예수처럼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해요.

듣기는 좋아 보이지만 이 소리가 마귀의 달콤한 미혹이에요.

의외로 이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요.

 

예수를 믿는 것은 저급한 신앙이고 예수처럼 사는 것은 고급한 신앙이라고 해요.

요즈음 이런 사람을 참으로 많이 만나요.

이 사람들은 예수는 죄사함을 위하여 필요하고 이젠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고 해요.

 

내가 예수의 형상을 본받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건 이단이에요.

기독교 안에서 고등 종교로 만들어 놓은 이단이에요.

 

마귀는 이처럼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게 해요.

피를 무가치하게 만들고자 해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너희 눈 앞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화를 발한 것도 다 이런 사상 때문이에요.

 

유대인들이 예수가 필요 없다고 한 것은 자기들이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고 진노하지 않아요.

시편 2편에서 뭐라고 했나요.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진노하겠다고 했지요.

 

하나님은 아들을 만물의 주가 되게 하시려고 만물을 창조했어요.

만물 속에 아들만 드높이고자 창조 했다고요.

그런데 만물에 속한 자가 자기 잘났다고 자랑하면 안 되지요.

예수 없어도 난 잘할 수 있어!

그러면 안 된다고요.

그건 아버지의 뜻이 아니에요.

 

모든 말씀은 아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아들을 드러내는 겁니다.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문자적으로 자구(字句)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유대인들은 율법의 말씀 하나 하나를 지킨다고 난리를 쳤어요.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고자 온 신경을 다 썼어요.

그런 그들을 예수님은 독사새끼라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왜? 말씀대로 사는 자들을 마귀새끼라고 저주를 했을까요?

이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켰다는 것 때문에 예수가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라고 율법을 주었는데 율법을 지켰다는 것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배척하였으니 저주 한 겁니다.

 

이런 짓거리는 마귀가 하는 짓이란 겁니다.

지금도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마귀 짓이에요.

모든 말씀(율법)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성했어요.

그럼 모든 말씀 끝엔 예수님의 피만 남아 있어야 해요.

그래야 말씀대로 사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돌리겠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런 영광을 받지 않아요.

죄인으로서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사세요.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는 것이 최고의 신앙입니다.

말씀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감사하여야 해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어서 멸망당하였고, 이방인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어요.

말씀대로 산 유대인은 저주 받았고 말씀대로 살지 않은 이방인이 구원 받았어요.

이는 하나님께선 인간이 말씀을 지킨 것으로 구원하지 않고 예수를 믿게 함으로서 구원하신다는 뜻이에요.

 

아들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신앙은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들을 아버지처럼 영접하세요.

아들이 말을 아버지의 말로 들으세요.

 

사도바울은 다메섹에서 이 사실을 알았어요.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바울 역시도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예수를 핍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어 다메섹 도상에서 그토록 유대인들이 귀신들린 이단이라고 미워하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기절초풍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입만 열면 하나님 영광, 하나님 영광 하던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아야 할 대상인지를 알고 놀란 것입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바울은 내 하나 지옥가고 자기 동족들은 구원시켜 달라고 했겠습니까?

 

지금도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조롱당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어느 시대이고 미혹을 하였고 죄인들은 어느 시대이고 마귀의 미혹으로부터 벗어 날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는 항상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나는 과연 예수를 믿고 있는지?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눈이 떠졌다면 눈을 뜬 소경처럼 그 어떠한 회유와 핍박 속에서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부디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영안들이 열리시길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道)가 하나님의 능력임을 아는 지혜가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창세 이래로 아버지는 아들 안에 숨어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곧 아버지임을 알게 하옵소서. 성령으로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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