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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60강. 예수를 만난 자의 특징 (요 9:8-23)

by coroa 2021. 8. 9.

 

 

60강. 예수를 만난 자의 특징 (요 9:8-23)

-.정낙원 목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일컬어 빛이 어두움에 비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빛과 어두움은 서로가 하나 될 수 없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생명도 다를 뿐더러 가치관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달라요.

빛과 어둠은 서로 간에 차별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취었다는 것은 곧 어둠의 자기 부정을 요구받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두움의 입장에선 빛이 왔다는 것은 소멸을 의미합니다.

어둠으로서는 엄청난 혼란이 일어난 겁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이런 낯선 경험을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뜨고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낯선 세계를 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낯이 익은 것을 좋아 해요.

자기가 늘 경험하고 산 것이 편안하고 좋아요.

낯이 익은 것을 좋아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 낯선 세계는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예수님은 소경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고자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고 계신 것과 같아요.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닌 전혀 다른 하나님이 스스로를 나타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어둠에 속한 자들에겐 상상치도 못하는 전혀 낯선 하나님을 증거하니 반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서 빛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는 어둠을 죽음이라는 것을 전제로 말하는 겁니다.

그럼 빛이 어둠에 비췄다는 것은 죽음의 세계에 생명이 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은 죽음이라는 세계에 속한 자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낯선 하늘에 생명입니다.

 

유대인들에겐 예수님은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들이 낯설 수밖에 없어요.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유대인들 입장에선 처음 접하는 생소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해 봅시다.

빛을 영이고, 생명이고, 천국이고, 은혜라고 합시다.

그러면 어둠은 빛의 상대적 개념이니까 육이고, 죽음이고, 지옥이고, 율법이라 할 수 있지요.

알다시피 유대인들 신앙은 율법 신앙이에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으니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은 빛의 반대에 속하였으니 어둠이 되는 것이지요.

그럼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율법 신앙은 어둠이란 말이고 죽음이란 말이고 지옥이란 말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신앙은 빛이고, 생명이고, 천국입니다.

 

빛과 어둠은 상대적 차이성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 빛은 하늘에 영역이고, 어둠은 땅에 영역이에요.

빛은 창조의 영역이고, 어둠은 피조물의 영역이에요.

빛은 생명을 공급해 주는 영역이고, 땅은 받는 영역이에요.

 

이걸 신앙의 모습으로 봅시다.

유대인은 땅에서 낳고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지요.

그럼 유대인의 신앙은 땅 차원이고 예수님은 하늘 차원이지요.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율법도 땅처럼 하늘에서 주는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정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으로 독자적으로 살려고 하면 안 되고 하늘에서 살려주는 힘으로 산다고 나와야 올바른 율법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여 도와주세요! 해야 한단 말입니다.

좀 어렵지요.

 

율법이 뭡니까?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심판을 알리는 기능을 한다고 하였지요.

그러니 그 누구도 율법 앞에서 난 죽었구나! 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율법을 바로 지킨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율법으로 열심히 해서 잘 살겠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건 율법을 주신 의도에서 벗어난 반칙이에요.

율법은 잘난 사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하는 겁니다.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넌 죄인이고 죽을 놈이란 뜻입니다.

 

그럼 율법 앞에서 난 저주 받아야 할 놈이라는 것을 알고 주여 살려 주세요! 라고 해야 한단 말입니다.

땅처럼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 누려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독자적인 생명을 만들었어요.

하늘에 도움 없이도 의를 만들겠다고 한 겁니다.

 

하늘에 도움 없이 의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저주 받은 어둠의 발상이에요.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지금 이걸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너희들 백날 율법 붙들고 있어봐라 거기선 생명이 안 나오고 죽음만 나온다고 알려 주는 거예요.

 

그럼에도 유대인은 이걸 몰라요.

율법에서 생명이 나온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건 너희들이 성경을 오해하여서 라고 합니다.

 

자 다시 말합니다.

열심히 해야 삽니다! 라고 하는 동네에, 예수님이 공짜로 사세요! 라고 왔어요.

너희들 율법으로 열심히 살려고 하지 말고 내가 주는 생명으로 사세요! 그런단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앞에서 일하려고 하지 말고 공짜로 주는 것을 받으세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자 유대인이 싫어!

우린 네가 주는 생명이 필요 없어!

우리 것이 있는데 왜? 네 걸 받니!

그런단 말입니다.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주장이 영 안 맞지요.

사사건건 반대지요.

유대인이 우(右)하면 예수님은 좌(左)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암튼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유대인들의 율법신앙에 붕괴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죽도록 충성해야 면류관을 얻습니다! 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공짜로 준다고 합니다.

유대인은 열심히 율법 지켜서 천당에 갑시다!

그러는데 예수님은 내가 공짜로 넣어 줄께! 라고 하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인간의 열심과 충성으로 지켜온 율법 종교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아요.

율법을 지키면 의로워진다는 사상이 일순간에 무너지게 되었단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진리는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 진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의는 예수님이 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의를 받아들이면 유대인의 신앙에 근본이 뿌리째 뽑히고 말게 되지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전한 율법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참 진리라고 가르쳐 왔었어요.

그래서 온 백성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것이라고 가르쳐 왔어요.

모든 백성들도 그렇게 믿어 왔구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자기들의 진리체계 안에서 안심 푹 놓고 살았어요.

모두 천국에 안방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꿈에라도 자신들이 지옥에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러한 가르침이 허구였음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율법 신앙은 어둠이고, 율법 신앙으로는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이건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말이에요.

 

이런 사태를 알려주고자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는 다름 아닌 유대인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러는 겁니다.

너희가 바로 여기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과 같이 하나님께 대하여 소경이라고 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자들은 자기가 소경인줄 몰라요.

눈을 떠 한 번도 떠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경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는 지금까지 어두움 속에서도 잘 살았어요.

 

이와 같이 유대인들도 태어나면서부터 율법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율법 지킴으로 의를 만들어간다는 사상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었습니다.

마치 소경이 어두움 속에 일평생 불편함 없이 살아 온 것과 같아요.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세상 사람들도 천국과 지옥이 있는 줄도 모르면서 그냥 세상에서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 없어도 잘 살아요.

예수 없이도 세상 살아가는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요.

 

이 모두가 마귀가 사람들 마음을 혼미케 하여서 그래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마귀가 혼미케 한 마음에 안개를 걷어 내고 계신 겁니다.

물론 자기 백성들에게만 그리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마음에 안개를 걷어내고 계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의 눈을 뜨게 하자,

지금까지 어두움만 알고 살아왔던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에 사람들도 경악을 하게 됩니다.

소경은 그냥 타고난 운명이라 믿고 그렇게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은 겁니다.

평생 소경으로만 산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게 해 주었어요.

속된 말로 예수님이 팔자를 바꿔 놓은 것입니다.

 

이걸 유대인들의 신앙적인 관점으로 이해해 봅시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조상 대대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다고 믿어왔습니다.

나면서부터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은 율법 지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신다고 합니다.

생명은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진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겐 이런 구원관은 없어요.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살아온 유대인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이 얻어진다는 것은 소경이 눈을 뜬 것과 같은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의 진리관에 의하면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서는 안 되어요.

율법 신앙을 그대로 고수하려면 예수님이 있으면 안 돼요.

유대인들은 소경이 눈을 뜨게 하거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거나,

귀신이 쫓겨나는 것과 같은 초월적인 기적들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어왔습니다.

 

이 같은 기적을 일으키는 자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을 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과 예수님의 사이는 갈등관계에 있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예수님이 초월적인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이 입증이 되는 셈이니 반가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의 눈을 뜨게 해 버렸어요.

이러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 입증된 셈입니다.

이걸 그대로 인정하면 자신들은 졸지에 틀린 집단이 되고 말아요.

 

예수님이 하나님께 속한 자로 입증이 되면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율법신앙을 공격한 것이 옳다는 것이 되어 버리잖아요.

그러니 유대인들로서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실을 막아야만 합니다.

막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이 옳은 것이 되고 자신들의 말은 틀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냥 두어서는 안 되지요.

 

그냥 두면 예수님은 진리가 되고 유대인은 비진리가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입장에선 소경이 눈을 뜬 사실을 부정하고 싶고 감추고 싶은 겁니다.

궁여지책으로 찾아낸 것이 우기는 것입니다.

너 원래부터 소경 아니었잖아!

너 눈뜨게 해 준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소경이 예수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가 눈을 뜨게 해 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남아서 내가 뜨게 해 주었다!

그러면 문재는 간단한데 예수님이 그 자리를 피했어요.

그러니 눈을 뜬 소경과 군중들만 남아서 맞다 아니다 논쟁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자 유대인들이 로마 군사들을 매수하여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감추고자 한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진리보다 자신들의 조직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에요.

하나님의 뜻보다도 유대교가 살아남는 것이 먼저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한 일을 막아야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이 이 시대의 모습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시대 많은 교권주의 목사들은 교회라는 조직이 우선이지 복음이 우선이 아니에요.

복음도 교회를 유지보존해 줄 때 필요하지 교회를 해치는 것이라면 버려야할 대상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행함을 부정하고 오직 십자가 피로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겁니다.

이단이라고 하면서 교단에서 축출하는 거예요.



이건 마치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눈을 뜬 소경을 없애고자 하는 것과 똑 같아요.

이 사람이 있는 한 예수님은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눈뜬 소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거자로 서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여간 껄끄러운 존재가 아니에요.

그래서 부모를 동원해서 예수가 눈을 뜨게 해 준 것이 아니라고 말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겁니다.

 

유대인 입장에선 예수만 없애서 될 일이 아니고 예수로부터 눈을 뜬 소경도 없애야 합니다.

예수야 자리를 피해서 없으니 그렇다 치지만 예수로부터 눈을 뜬 놈이 버젓이 살아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잖아요.

그래야 완전 범죄가 되지요.

 

그런데 어쩝니까?

눈을 뜬 소경이 자신이 경험된 사실을 그대로 말하고 있으니,,,,

협박에 넘어가 아니라고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 유대인들 입장에선 눈에 가시 같지요.

 

이런 모습을 하나님은 지금도 그대로 현실 속에 배치 해 놓았어요.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피를 전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으면 좋겠는데,

미련하게도 십자가 피만이 구원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성화주의자들 입장에선 눈에 가시 같은 존재들이에요.

모두가 다 행함을 말하는데 눈치 없이 예수의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교권 주의자들 입장에서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자들은 골칫덩어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하는 겁니다.

이단이라고 교계에서 퇴출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마치 누구라도 예수를 믿으면 유대교로부터 출교 당하듯이 말이에요.

소경의 부모도 출회를 당할까봐서 예수를 모르겠다고 하잖아요.

 

소경은 눈을 뜨자 당장 사람들로부터 심한 저항을 받게 됩니다.

눈을 뜬 소경으로서는 전혀 뜻밖의 일이에요.

사람들이 축하하고 박수를 쳐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을 하고 있어요.

정황으로 보면 사람들이 가자미눈으로 눈을 뜬 소경을 이단이라고 째려보고 있어요.

 

나쁜 놈,

조직의 배신자!

지금식으로 말하면 교회 분열주의자라고 한단 말입니다.

한국교회를 허무는 자라고 돌을 던지고 있는 겁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움을 주던 자들이 일순간에 돌을 던지고 있어요.

심지어 부모까지도 달가워하지 않아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상식적으로 말하면 잔치를 벌려주어야 하는데 도리어 핍박하고 있으니!

이건 이 사건의 배후에 뭔가 보이지 않는 두 세력 간에 투쟁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가 있습니다.

눈을 뜬 소경과 그를 핍박하는 사람들 간에 뭔가 이상 기류가 흐르고 있어요.

그렇지 않고서는 핍박할 이유가 없지요.

 

지금 영적 전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냐! 마귀냐!

율법이냐! 은혜냐!

행함이냐! 믿음이냐!

옛 언약이냐! 새 언약이냐! 싸우는 겁니다.

 

아까 예수님을 빛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을 핍박하는 세력은 어둠에 속한 자라는 것이 드러나지요.

예수님께 속한 소경을 핍박하는 자들도 어둠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빛을 싫어하듯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싫어함으로서 스스로 어둠에 속해있음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싫어하는 것은 그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예수를 싫어하는 것도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자들도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셨어요.

 

요 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세상이 예수를 미워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악하다고 증거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악하다는 것은 부정하는 겁니다.

넌 틀렸다는 말이에요. 

누가 이런 말을 수용하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향하여 당신 신앙이 틀렸습니다! 라고 하면 가만있겠습니까?

인간은 자기를 부정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본능적으로 반발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요 난 틀렸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사실이 이러함에도 예수님이 세상을 악하다고 한 것은 선전포고를 한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내 말을 수용하든지 아니든지 하라는 겁니다.

수용하는 자는 살고,

수용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냥 일방적인 통고에요.

인간들 의사는 필요가 없어요.

받아들이면 살고 안 받아 들이면 죽는 것입니다.

 

마 10:34-35=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보세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싸움을 붙이러 오셨다고 하잖아요.

평화롭던 가정이 예수 때문에 불화하게 생겼어요.

 

흔히들 사람들은 예수님을 일컬어 평화라고 하는데 정작 예수님 자신은 스스로를 증거하기를 세상에 전쟁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를 평화 하는 자라고 하는 것은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를 평화케 하시는 분이라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가 신앙생활에 당황을 일으킵니다.

성도들은 흔히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실제 신앙으로 살아가면 고통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니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빛을 보고 놀랐지만 소경도 눈을 뜨고 전혀 새로운 환경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함으로 자신들의 진리관이 무너졌기 때문에 화가 나고 예수가 미운 것이고 눈을 뜬 소경은 눈을 뜨게 된 것으로 당하는 핍박 때문에 놀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과 다른 것과 충돌하게 되면 당황하게 되어 있어요.

 

지금 예수님께서 유대사회에 일으키는 사건은 구약시대 광야에서 일으킨 사건과 동일해요.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아주 낯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광야는 애굽과 전혀 다른 환경이기도 하지만 하나님도 애굽에서의 하나님과 전혀 달랐어요.

자기들을 대하는 것이 달랐단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와서 당황한 것은 애굽에서 알았던 하나님과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알았던 하나님은 애굽 백성들에겐 갖가지 재앙으로 심판을 하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자비를 베풀었던 하나님이에요.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하나님으로 알았어요.

자기들을 지켜주는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광야에 나와서 만나 본 하나님은 자기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이셨어요.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은 자기 말 안 들으면 죽이는 하나님이었어요.

그러니 경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겁니다.

 

떡을 달라고 한다고 죽이고,

물을 달라고 한다고 죽이고,

고기를 달라고 한다고 죽이고,

가는 길이 험하다고 투정해도 죽입니다.

 

뭐 이런 하나님이 다 있나요.

이런 하나님일 것 같았으면 안 따라 왔어요.

한마디로 속았다고 생각합니다.

오죽했으면 노골적으로 괜히 따라 나왔다고 했겠습니까?

 

얼마나 싫었으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데모를 했겠어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원망과 불평을 토해내는 생활이었어요.

무슨 순종이 있고 하나님을 위함이 있어요.

없어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은 성도들의 모습이에요.

광야는 인간의 죄가 터져 나오는 곳이에요.

아니 죄를 토해내게 하시는 곳이에요.

마라의 쓴물처럼 속에 있는 것을 다 토악질하게 한단 말입니다.

자기 안에 또 다른 자기를 발견하는 곳이 광야에요.

 

자기 안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싫어하는 괴물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광야로 몰고 온 겁니다.

그래서 봐라 이놈들아!

너희가 이런 괴물이라고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은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것을 고발해 주는 역사입니다.

 

애굽이 왜? 저주 받아야 하는지 광야에 나와서 알려 주는 겁니다.

애굽에서의 가치관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존재의 목적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사는 목적이 달라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왜? 선택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는 겁니다.

애굽에선 나를 위한 하나님이지만 광야에선 하나님의 약속을 위하여 내가 존재하는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출애굽 하였다는 것은 언약을 위하여 불러냈다는 말입니다.

언약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애굽에선 내가 나의 주인이지만 광야에선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세요.

애굽에선 자기를 위하여 살았지만 광야에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자는 다 죽어 장사되는 곳이 광야에요.

 

그래서 상징적으로 출애굽한 1세대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 광야에서 죽은 겁니다.

가나안은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2세대가 들어가요.

1세대는 옛사람을 말하고, 2세대는 새사람을 말해요.

광야는 애굽에서 태어난 옛사람은 죽어 장사가 되는 곳입니다.

애굽에 “내” 가 아닌 광야에서의 “나”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곳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입니다.

예수 안이란? 구약에선 아브라함 언약 안을 말합니다.

아브라함 언약 안에는 자기라는 것은 없어요.

오로지 하나님 밖에 없어요.

 

애굽에서는 자기라는 주체로 살았어요.

그러나 광야엔 자기라는 주체가 없어요.

자기라는 주체로 살던 애굽에 사람은 홍해에서 죽었어요.

그러니 광야에 있는 나는 애굽에 내가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인 겁니다.

 

이게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낸 원리입니다.

원리(原理)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불러냈다는 말이에요.

 

중요한 말이니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에요.

하나님을 위해서 불렀단 말입니다.

 

이걸 우리 구원에 적용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시고 천국 백성 삼아 준 것은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서 입니다.

우리 필요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신앙 속에는 우리의 소원이 담길 공간이 없다는 뜻이지요.

도리어 우리 것을 뽑아내는 일을 하여야겠지요.

사실이 이러함에도 우리는 신앙생활을 우리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고 있어요.

 

자 봅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것을 담고자 애굽에서 불러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출애굽 시킨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에 나와서 자기 소원을 이루고자 했어요.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죽이고 그 속에 하나님의 소원을 담고자 하는데, 인간은 하나님 소원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소원만 이루어 달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지요.

자기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애굽에 사람으로서 징벌 대상이에요.

이런 놈을 가나안(천국)에 데리고 들어가면 맨 날 다고 다고 데모만 한단 말입니다.

왜? 우리 소원을 안 들어주느냐고 한단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자기 소원을 들어준다고 믿고 있어요.

지금도 교회에서 목사들이 그러잖아요.

소원을 말해봐! 하잖아요.

소원을 들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잖아요.

 

이게 애굽에 사람이에요.

하나님께 진멸 당할 옛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광야에서 애굽에서 태어난 옛사람은 죽이고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시키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떡으로 사는 인간은 죽이고 말씀으로 사는 인간으로 바꿔치기 하신단 말입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이유도 이와 같아요.

 

물론 광야에서 태어난 인간도 애굽에서 태어난 인간과 동일해요.

똑같은 죄인의 심성을 가지고 있어요.

가나안 땅에서도 애굽에 사고로 살면 죽음을 면치 못해요.

그러니 어느 땅에 있느냐가 중요치 않고 어떤 사고방식으로 사느냐가 중요해요.

 

신약적 의미에서 애굽에서 태어난 사람을 옛 사람이라고 한다면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을 새 사람이에요.

의미가 그렇다는 겁니다.

 

광야는 떡으로 살고자 하면 다 죽어요.

말씀을 달라고 해야 해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 난 죽어도 괜찮으니 이 놈을 삶아 먹든지 구워 먹든지 튀겨 먹든지 하나님 뜻대로 하세요 그렇게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애굽에서 태어난 인간에겐 불가능해요.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겐 소귀에 경(經) 읽기에요.

옆으로 기어 다니는 본성을 가진 놈에게 앞으로 가 그러는 것과 같아요.

본성이 옆으로 기어 다니는 놈에게 앞으로 가라고 하면 소리칠 땐 가만있다고도 잠잠하면 속으로 별 미친놈 다 보겠네!

그러면서 옆으로 기어간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전한 인간을 바라지 않아요.

아니 죄 아래서 출생한 자에게 의롭게 살으라는 말은 불가능한 말이에요.

안 된단 말입니다.



우리 죄인들이 그래요.

죄 안 짓고 싶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어요.

하지만 그게 안 되어요.

뻔히 알면서도 안 된단 말입니다.

 

마치 아담이 하나님께서 너 선악과 먹으면 죽는다 그래도 그게 안 되어요.

흙으로 난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님 뜻에 순종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어요.

흔히들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서 죄를 지었다고 하는데 저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알고도 따 먹었다는 것을 보면 애시당초 아담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안 되게 되어 있다고 보고 싶어요.

그러니 먹으면 죽는다는 말을 듣고도 먹고 죽어버렸잖아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흙에서 난 인간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뱀이 여자를 꼬시고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계셨던 겁니다.

무소부재하시고 인간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우리 생각을 통촉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아담과 하와가 뱀의 수작에 걸려들어서 놀아나는 에덴동산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을 몰랐을리 없어요.

 

다 아시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인간이 범죄하는 것을 막지 않은 것은 흙으로 난 몸이 하늘로부터 오는 몸으로 한번은 거듭남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보니 예수님이 오셔서 거듭나게 하시더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 창조가 된 인간도 예수님에 의하여 한 번은 거듭남이 필요한 존재로 창조가 되었단 말이 됩니다.

 

만물이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고 했지요.

만물은 예수님이 뭔가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만물은 예수님의 시다바리에요.

쉽게 말해서 장난감이란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굉장히 기분 나쁘지요.

기분이 나쁘다는 것은 자기가 주인이란 말이에요.

즉 자아가 살아 있으니 그런 반응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름하여 죄에요.

죄가 반발하게 하는 겁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내가 니 시다바리가 하면서 하나님에게 바락바락 덤벼든단 말입니다.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서 평생 동안 자기가 주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자기의 주인 자리를 내어 놓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순종한다는 것을 불가능해요.

순종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애굽에서 보여 주었잖아요.

 

하나님은 애굽에 장자를 죽이면서 애굽은 진멸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어요.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도 장소만 애굽에서 광야로 옮겨진 것뿐이지 그 속은 전부 애굽 것으로 가득차 있어요.

 

그렇다면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진멸 대상이긴 동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대신 어린양을 죽였어요.

이스라엘은 어린 양 때문에 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도 어린 양의 희생을 보시고 이스라엘을 살려주시는 겁니다.

 

애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의 희생으로 맺었어요.

창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언약의 모습이 나옵니다.

한 번 봅시다.

 

창 15:1-20=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옵니다.

이 때는 아직 아브람이라는 옛 사람으로 있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합니다.

 

이 때 아브람에겐 아들이 없었어요.

아브람은 자기가 자식을 생산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종들 중에서 말을 잘 듣는 엘리에셀을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면서 네 후손들이 하늘에 별과 같이 많아 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이들이 살아갈 땅도 주시겠다고 합니다.

 

이에 아브람이 이걸 어떻게 믿겠느냐 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제물을 반으로 쪼개 놓으라고 합니다.

그리곤 하나님이 그 쪼갠 재물 사이로 지나갔어요.

이는 하나님이 죽음을 걸고 역속을 하신 겁니다.

그러니 아브람과 한 언약 속에는 하나님 자신의 죽음이 담보가 되어 있어요.

 

아브람 속에 장차 생겨날 이스라엘이 들어 있지요.

그럼 장차 생겨날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죽음 안에서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그 일이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이스라엘이 살아난 모습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러니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죽음을 근거로 나온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속엔 항상 하나님의 죽음이 담겨져 있어요.

하나님은 이 흔적을 남기는 일을 하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광야 길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반드시 하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드러냅니까?

인간의 본성과 부딪치는 사건 속으로 밀어 넣고 드러내세요.

애굽적 사고에 젖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하나님께서 왜? 그 험한 광야 길로 인도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겁니다.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개 고생을 시키느냐 불만이 터지는 겁니다.

아니 그냥 애굽에서 살도록 내비 두지 왜? 광야로 불러내서 이런 고난을 주느냐에요.

그래서 광야 생활에 갈등과 불만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오로지 자기 생각만 하는 겁니다.

왜? 나를 달달 볶느냐!

하나님이 뭔데! 우릴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라고 악악대는 겁니다.

이게 지금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에요.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들이 싸우는 역사라고 볼 수가 있어요.

인간은 이런 종자이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역사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서도 애굽에서 알았던 하나님 관을 버리지 못하였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잘못된 신관을 고쳐주는 일을 하신 겁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신관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봅시다.

 

열왕기상 18:21-24=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어요.

이는 잘못된 신관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에요.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누가 진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내기하였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똑똑히 보라고 대결을 한 겁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인간의 편을 들어주는 신이고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는 신이에요.

우상은 인간을 위한 신이에요.

온 이스라엘이 바알을 따른 것은 자기를 위한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밖에 몰라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싫은 겁니다.

바알이 좋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의 제단에 불을 내려서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림으로서 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처럼 다 태워버리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 준 겁니다.

엘리야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부른 것은 언약의 하나님을 부른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제단에 모든 것을 다 불사른 겁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은 언약을 위하여 존재하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자리에 예수님을 앉히세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하신단 말입니다.

우리 몸에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기 위해서 성령은 우리 안에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세요.

그러니 성도의 일생은 죄가 고발되어지는 일생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살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단 말입니다.

이러한 사건이 복음을 통해서 지금도 발생되어집니다.

 

암튼 유대인과 소경은 충돌이 일어났어요.

서로가 원하지 않는 충돌입니다.

그 충돌의 중심엔 예수님이 있습니다.

이 충돌이 급기야 안식일 논쟁으로까지 이어지고 종국엔 율법과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지금도 교회의 유전으로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에게 십자가 도를 말하면 혼란을 겪습니다.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신앙은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돌리는 거예요.

인간 쪽에서 뭔가 부지런히 하여야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배워 왔어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대로 사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한 것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복음은 우리가 뭘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하셨다는 것을 믿는 거예요.

우리 행함을 보지 않고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붙잡는 겁니다.

복음 속엔 우리 것이 담길 자리가 없어요.

온통 예수님 것만 담겨 있어요.

 

이렇게 되면 열심히 한 것이 부정당하니 기분 나쁜 겁니다.

그럼 난 뭐냐?

난 뭐냐? 라고 항변하는 것은 왜? 날 무시하느냐 에요.

나도 좀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죄인은 자아 확장을 위해서 사는 자에요.

무슨 일이든지 자기입지를 튼튼히 하고자 해요.

자기 성(城)을 구축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런 것을 깡그리 부정해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죄로 규정하기 때문에 불쾌한 겁니다.

넌 죽어야 할 자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여러분들도 사람들에게 무시당해 보세요.

본능적으로 화가 나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자 앙앙거리고 우는 겁니다.

내가 있다는 거예요.

아이들은 울음으로서 자기 존재를 알리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신앙을 부정해 버립니다.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산 것을 악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미운 겁니다.

 

예수만 미운게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뜬 소경도 미운 겁니다.

예수도 싫고 예수를 통해서 눈을 뜬 소경도 싫은 것입니다.

예수와 연관된 자들은 다 싫어요.

그래서 예수에게 속한 자들을 유대인들 속에서 뽑아내고 버리는 일을 단행하는 겁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고 했어요.

 

그럼 지금도 유대인들과 같은 자들이 있고 예수님의 은혜로 눈을 뜬 소경과 같은 자들이 있어요.

신앙적으로 말하면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자이고 눈을 뜬 소경은 은혜 아래 있는 자이지요. 

지금도 유대인들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은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 싫은 것입니다.

싫어하는 이유는 은혜가 자기의 율법지킴을 무가치하게 만들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왜? 인간의 열심을 폄훼 하느냐고 화를 냅니다.

 

알미니안 인본주의 성화주의자들이 화를 내는게 그거잖아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게 뭐가 잘못 되었느냐 라고 하잖아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걸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그걸 신앙이라고 하기 때문에 나무라는 겁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는 겁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나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지 궁구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왜? 죄인인줄 알아야지요.

왜? 내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셔야만 하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야!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용서받고 긍휼을 입고 사는구나를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성화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잘난 척 한단 말입니다.

자기 죄를 인하여 애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애통해 하잖아요.

예수님의 피가 고마운게 아니고 자기 착함이 자랑스러운 겁니다.

 

성화주의자들 말을 들어보세요.

맨 날 이렇게 사세요.

저렇게 사세요.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하잖아요.

어디에 예수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라고 합니까?

온통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고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지!

 

한마디로 예수 이야기 하지 말고 자기들 이야기 하자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라는 삶에 중심에 예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두고 싶다는 겁니다.

아니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왜? 예수님 십자가 피를 말하면 짜증을 냅니까?

 

이 사람들을 보면 마치 사도행전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제자들에게 제발 예수 이야기 하지 말라고 두들겨 패고 옥에 가두고 한 사람들과 같아요.

이건 예수가 싫다는 겁니다.

나도 좀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왜? 나를 무시하느냐 에요.

 

믿음의 끝에는 예수그리스도가 있지만, 종교의 끝에는 자기가 있어요.

믿음을 가진 자는 항상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자랑하지만,

종교인들은 자기가 행한 일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면 쫓겨나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천국 혼인잔치에서 쫓겨나는 것은 예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복이란? 예수님에 의(義)에요.

예수를 믿는 믿음이란 말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에게 예수를 믿게 하는 대신 자기의 종교적 업적을 입고 나가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미혹 당한 자들은 항상 종교적인 일을 신앙생활이라고 가르칩니다.

 

죄란? 예수가 자랑되어질 자리에 인간의 업적이 자랑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자기 행함을 붙잡게 하지만 은혜는 예수를 붙잡게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신앙을 행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증거하면 싫어하는 것입니다.

율법신자에겐 은혜로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밉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가 남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면 본능적으로 화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어 하고 인간은 자기가 행한 일을 남기고 싶어 해요.

 

하나님이 하신 일이란? 예수를 보내서 죄 사함과 의로움을 남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것을 최고의 일로 평가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아버지가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어쨌든 눈을 뜬 소경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에겐 분명한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어두움에 살았지만 이제는 밝음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성도가 예수를 믿음으로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화 된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옛날 죄의 종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순간 예수를 만나서 덜렁 새사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소경이었던 자가 눈을 뜨고 와서 예수를 증거하니 유대인들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느냐고 소동인 것입니다.

 

소경은 눈을 뜨고 나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은 예수라고 증거하고 있어요.

유대인들 입장에선 자기들의 꿈을 산산조각 깨트려 버린 예수가 정말 밉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지금 소경 되었다가 눈을 뜬 자가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큰 의미에서 지금식으로 말하면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방황하던 사람이 어느 날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술을 같이 먹던 친구가 어느 날 예수 믿고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술주정뱅이가 지금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천지가 개벽 할 일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를 믿는 자를 보면 바보 같은 자라고 놀리면서 혀를 차던 내가 지금 교회에 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겠습니까?

비록 소경이 눈을 뜬 것 같은 기적은 맛보지 않았지만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에 앉아서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스스로가 생각을 해도 희한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충격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루아침에 저렇게 변할 수가 있느냐 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제까지만 해도 성화를 부르짖고 열심과 충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가르치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는 의가 없다고 한단 말입니다.

성화는 없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토록 예수를 핍박하던 바울이 어느 순간 예수를 증거 하는 자가 되었어요.

바울의 친구들과 동족들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입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변해도 저렇게 변하느냐고 당황을 합니다.

이러한 당황함이 점차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미움으로 변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소극적으로 배척하다가도 점차적으로 상종하지 않게 되고 결국에는 죽여야 할 자로 지목하여 핍박을 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남으로 옛날의 친구들과 원수가 되고 만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고 싶어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바울을 선택한 것입니다.

바울 입장에서도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율법신앙이야말로 진짜라고 거품을 물면서 증거하던 자가 하루아침에 율법은 저주받을 것이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으니 스스로도 황당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이처럼 사람을 당황케 하는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복음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되는 아픔이고 당황스러움 입니다.

 

이런 충격을 안고 살아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리고 이런 충격 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자기를 핍박하는 친구들을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몰랐을 땐 그랬는데 예수를 만나고 나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비록 친구들이 핍박을 한다고 하여도 그들에게 적개심을 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진리를 아는 자만이 당하는 아픔이고 고난입니다.

천국백성 된 자만이 당하는 아픔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핍박하는 원수라 할지라도 그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아버지여 저들이 알지 못하여 그러니 자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천국백성에게만 나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고난인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를 알게 되면 고난이 동반하여 찾아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소경도 예수를 통해서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부모가 외면을 하여도 미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만난 증거자들이 살아가야 할 자세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새 사람이 된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새로운 일을 증거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보내지신 분이십니다.

나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은 예수님이라고 증거하며 살아가라고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증거하는 자는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닙니다.

 

눈을 뜬 소경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어요.

예수를 자랑하였어요.

이것이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눈을 뜬 소경은 누가 뭐라고 겁박을 해도 자기에게 일어난 사실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 사실을 증거하다가 핍박을 당한다 하여도 말입니다.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온갖 겁박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를 증거 했어요.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무서워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자들이 성령의 오심으로 겁이 사라져 버렸어요.  

그러니 대 제사장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를 증거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성령이 임하고 나서는 그 어떤 회유와 협박에도 넘어지지 않고 예수를 증거 하였어요.

마치 소경이 유대인의 겁박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증거하였듯이 말이에요.

 

오히려 예수 때문에 능욕 받는 일을 합당하게 여겼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진짜 구원받은 성도가 맞다면 되어진 사실을 은폐하기보다 사실을 증거하다가 핍박받는 것을 더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그 어떠한 위협과 고난 속에서도 예수를 증거하며 사는 것을 성령을 따라 산다고 해요.

 

눈을 뜬 소경은 예수를 증거하는 일을 하였듯이 성도에게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일으켜 주신 구원의 사건을 증거하는 일이 남아 있어요.

십자가 도라는 복음을 듣게 해 주셨다면 그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그런 삶이 살아지게 되어 있어요.

 

성령께서 그렇게 몰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전도란? 자기에게 일어나 사건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증거가 없는 자는 전도할 수가 없어요.

증인은 본 사실을 증거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예수를 증거하는 증인이 된다고 한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증거하다가 불이익을 당한다 할지라도 증거하는 일을 포기 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 하여도 평생을 예수님만 자랑하며 사는 자가 진정한 성도이고 성령을 받은 자이고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에게 받은 증거를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는 그 증거를 증거하시기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린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는 다름 아닌 내가 지금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증거를 하다가 어떤 고난이나 핍박이 온다고 하여도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뜬 소경처럼 나를 눈뜨게 해 주신 분은 예수님이라고 분명하게 증거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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