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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59강. 소경과 실로암 (요 9:1-7)

by coroa 2021. 8. 7.

 

 

59강. 소경과 실로암 (요 9:1-7)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쳐주는 내용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길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정황상으로 보면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찾아 간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은 누구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율법을 근거해서 아마도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식이 그 죗값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출애굽기 20장 5절을 보면 누군가 하나님께 범죄하면 그 저주가 후손의 삼, 사대까지 이른다고 하였어요.

이에 제자들이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이 혹시 조상이 죄를 지어서 그런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소경을 통해서 뭔가 나타내고자 하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소경을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소경을 가지고 뭔가 일을 하시고자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소경을 가지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시청각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은 예수님이 창조 하셨고,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만물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창조가 된 것입니다.

만물의 존재 목적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경도 만물 속에 포함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소경을 가지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소경이란? 앞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만물과 함께 살고 있지만 만물을 볼 수가 없어요.

심지어 자기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모를뿐더러 자기를 낳아준 분도 몰라요.

소경은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만물에 속하였으면서도 만물을 볼 수 없는 것이 소경입니다.

외부에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알려 주어야지만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들이 그래요.

자기가 누군지 몰라요.

내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고 있어요. 

이처럼 소경은 실체가 분명히 앞에 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자기가 손으로 만지고 있으면서도 몰라요.

 

요한복음 1장 4절에 보면 예수님을 생명의 빛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빛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고 합니다.

성경은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소경이라고 합니다.

 

빛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췬다는 말은 예수님이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걸 몰라요.

이렇게 되면 세상은 죽음이라는 말이 되지요.

 

그러니 예수님이 죽은 세상에 온 것입니다.

무엇하러 오셨을까요?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지요.

 

이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난 살았잖아! 라고 하는 생명은 죽은 생명이 되지요.

우리 인간들은 살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실상은 죽은 생명입니다.

이건 마치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죽은 것과 같아요.

 

아담에게 찾아온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이처럼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은 죽은 자가 되어서 세상에 죽은 자들을 쏟아낸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은 자로서 태어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돌보고 계십니다.

아담의 범죄로 죽은 자이지만 그 죽은 자의 생명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분을 몰라요.

자기를 낳아주고 기르시는 하나님을 몰라보는 겁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을 모르는 겁니다.

자기를 낳아주고 생명을 주시는 분을 모르는 겁니다.

예수님을 몰라보는 거예요.

 

세상은 죄를 나쁜 짓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을 몰라보는 것을 말해요.

이처럼 세상이 말하는 죄와 성경이 말하는 죄가 다릅니다.

당연히 세상이 말하는 죄인과, 성경이 말하는 죄인도 다르지요.

 

죄에 반대말이 뭔가요?

의지요.

그럼 죄인에 반대가 의인이 되겠지요. 

성경이 말하는 죄인과 의인이 다르다고 했지요.

그럼 어떻게 다른가요.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기준해서 다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니까

예수님을 알면 의인이고, 예수님을 모르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은 예수가 누구냐?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세상에 알려주는 겁니다.

교인들도 교회에 오는 목적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기 위해서 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시고 그가 하신 일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이 시대 교인들이 예수님을 몰라요.

예수님을 모르니 자연히 죄를 모르는 겁니다.

죄를 모르니 당연히 죄인도 몰라요. 

기껏 안다고 하는 것이 세상 기준의 죄와 죄인을 알고 있어요.

교인뿐만 아니라 목사들도 죄가 뭔지를 몰라요.

죄를 말하나 성경이 말하는 죄가 아니고 죄인이라고 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죄인이 아니에요.

 

기독교 방송에서 하는 설교들을 들어보세요.

죄를 전부 인간들의 행동을 근거로 한 것들을 말하고 있어요.

세상 적으로 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요. 

이건 하나님이 말하는 죄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증거에요.

죄에 대하여 소경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죄를 말하면서도 기껏 한다는 소리가 세상 ㅈ죄관이에요.



사기 치지 말고,

도적질 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싸우지 말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들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성경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하라! 와, 하지 말라! 라는 명령문들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하나라도 어긴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도 기가 죽잖아요.

목사들이 이런 것으로 닦달하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마치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모습과 같아요.

유대인들의 죄관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 로 판단했어요.

그러니 바리새인들과 같이 말씀대로 산 자들은 큰 소리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한 세리와 창기 같은 자들은 음메 기죽어 하면서 오금을 못 펴고 살았단 말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고 추상같이 소리치면 앞으로 이런 짓을 안 하겠다고 회개한다고 하면서 각오를 하고 다짐을 하곤 했어요.

물론 작심삼일이지만 말이에요.

 

반면에 이런 짓을 안 하고 산 사람들은 의기양양하지요.

자기가 무슨 의인이라도 되는 냥 목에 힘을 주고 있어요.

나쁜 짓 한 사람들을 보면서 쯧쯧 혀를 차면서 불쌍하다는 식으로 아직도 그렇게 신앙이 어려서 어떻게 하느냐? 라고 핀잔하며 시건 방을 떨어요.

 

바리새인들이 그랬어요.

자신의 반듯한 삶으로 남들을 우습게보고 기고만장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놈들을 독사새끼라고 저주 하셨어요.

 

독사새끼란? 마귀 새끼란 말입니다.

저주 받은 지옥에 갈 놈이란 말입니다. 

누가 마귀새끼냐?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행함을 가지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자에요.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두는 자가 마귀새끼에요.

마귀 아래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잘난 것이 있으면 기세가 등등하고, 못난 짓을 하면 기가 죽어요.

뱀에 후손들은 일평생 눈을 자기에게서 떼지 못하고 있어요. 

이처럼 죄인들의 특징이 바로 자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사는 겁니다.

 

지난번 정00 국무총리 청문회 할 때 이야기입니다.

야당 의원들이 위장전입을 지적하고, 탈세를 지적하고, 논문 위조를 지적하고 좌우지간 현미경을 가지고 들여다보듯이 정00씨의 살아온 삶을 추적하여 비리를 죄라고 추궁하는 겁니다.

 

너무 혹독하게 추궁당하여서 그런지 집에 가서 온 가족들과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지 못했다고 회개 했다고 합니다.

앞으론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고 자녀들에게 당부하였다고 해요.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분이 세상의 죄관을 하나님의 죄관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선 이런 것들을 죄라고 해요.

이는 세상은 선악의 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구분을 합니다.

 

추궁하는 국회의원이나 추궁당하는 국무총리나 다 세상적 죄관으로 죄를 접근하고 있어요.

국가의 지도자를 검증하는 자리이니 그럴 수밖에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이런 세상적인 죄관으로 나와선 안 된다는 겁니다.

 

앞으로 이런 짓을 하지 않아서 하나님 앞에 죄짓지 말자! 라고 하면 안 되어요.

그러면 이런 짓을 안 하면 죄인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기준에서 청렴하고 깨끗하게 살면 자기가 죄인이 아닌 줄 안단 말입니다.

 

실제로 위장전입 안하고, 탈세 안하고, 논문 위조 안한 사람들은 저 나쁜 인간 그러는 겁니다.

저도 탈세 한 적 없고, 위장전입 한 적 없고, 논문 위조 한 적 없어요.

아니 이런 것하고 살아야 할 형편이 안 되어서 못한 것뿐입니다.

 

그럼 난 정00씨보다 나은 사람인가요?

하나님 앞에서 가서 난 정00씨 같지 않다고 자랑 할 수가 있나요?

없어요.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바퀴벌레로 보기 때문입니다.

바퀴벌레가 자기 행동에서 잘남과 못남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는 소경이에요.

 

이게 하나님 앞에서 소경이고 죄에요.

자기 행함으로 죄다 아니다 판단하는 그 사고가 소경이고 죄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시지요.

 

앞으로 국가에 고위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말하는 이런 죄를 짓지 마세요.

자식을 대통령 만들고, 국무총리 만들고, 장관이라도 만들고 고위 공무원이라도 만들고 싶으면 세상이 말하는 죄를 짓지 말고 살라고 가르치세요.

나중에 청문회 때 자격 미달로 낙마해요.

 

하지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죄니 아니니 가르치지는 마세요.

세상이 말하는 이런 죄관으로 하나님을 운운하지 말란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예수를 모르는게 죄에요.

 

그러니 그냥 하나님 앞에서 넌 바퀴벌레라고 알려 주란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바퀴벌레라는 것을 알면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아요.

자신이 바퀴벌레 같은 죄인인줄 모르니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겁니다.

자신이 바퀴벌레인줄 알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하는 죄가 뭐냐?

예수 안 믿는 거예요.

성경을 펴면 예수님을 모르는게 죄라고 합니다.

 

교회가 이걸 몰라요.

교인들이 예수님을 몰라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몰라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를 모르니 신앙생활을 나쁜 짓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육신의 본능대로 세상에서 나쁜 짓하고 악하게 살란 말이 아니에요.

죄인에게서 나오는 행동을 가지고 착함과 악함을 구분한다는 것이 나쁜 겁니다.

 

죄인이 누구입니까?

선악과를 먹은 자이지요.

선악과란? 글자 그대로 선(善)과 악(惡)이 있는 겁니다.

 

그럼 선악과를 먹은 인간 속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겠지요.

인간들은 무슨 일이든지 선악의 법으로 선이다 악이다 구분해요.

너 선하게 살았어! 악하게 살았어!

 

오늘 나는 선하게 살았나? 악하게 살았나?

오죽 하면 교회 주보에 교인들에게 하루에 선한 일 세 가지씩 하라고 광고를 하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과에서 나오는 것 자체를 악이라 규정해요.

사람이 죽는 것은 선을 행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생명과를 먹지 못해서 에요.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생명과를 못 먹어서 에요.

예수를 안 믿어서 에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겨 난 것은 생명과를 먹지 않아서 에요.

하나님은 생명과를 먹지 않은 것을 죄라고 해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선 인간이 선이라고 하는 것도 악이고 악이라고 하는 것도 악이에요.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선이다 악이다 구분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를 죄인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선하게 살고 악하게 살지 마세요! 라고 하면 안 되어요.

선하게 살든지 악하게 살든지 우린 죄인입니다! 라고 해 주어야 해요.

그래야 인간자체에 기대를 걸지 않게 되어요. 

왜? 이런 말을 한번만 하면 될 것을 자꾸 반복하는가 하면 아무리 말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은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인간이 하는 일에 의미를 두는 것이 죄란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 의미를 두고 사는 겁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죄란 무엇이냐? 예수를 모르는 겁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안 믿는 겁니다.

예수는 죄인만 믿어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잖아요.

그럼 예수는 누가 믿느냐 하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만 믿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를 못 믿는 것도 자기 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소경인 겁니다.

 

예수님이 이걸 알려 주려고 오셨어요.

소경을 붙잡고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너희는 죄인이다 라고 말해 줘도 몰라요.

그러면서 날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들의 죄를 지고 죽어야 한다고 해도 안 믿었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아무리 보아도 자기들 눈에는 자기들과 똑 같아요.

예수님 주변에 후광이라도 비취면 믿겠는데 전혀 그런 것이 없어요.

도리어 촌놈 중에 촌놈이에요.

흠모할 만 한 것이 없어요.

 

그런데 자꾸만 너희는 죄 아래서 죽는다!

자기 말을 안 들으면 죽는다! 고 재수 없는 말을 하는 겁니다.

내 말을 들으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 라고 한단 말이에요.

아브라함보다 자기가 먼저 있었다고 하고 아브라함도 자기로 인해 구원 받았다고 해요.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에요.

지극히 이성적이고 문자적으로 성경을 보는 유대인들이 이걸 어떻게 믿어요.

유대인들도 믿고 싶어요. 

그러나 믿어지지가 않는 걸 어찌합니까?



소경이 스스로 눈을 뜰수가 없듯이 믿음도 스스로 만들 수가 없어요.

그러니 답답한 겁니다.

유대인과 예수님은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답답하다고 가슴을 치고 있어요.

유대인은 예수를 보고 어이구! 답답하다! 답답해!

예수님은 유대인을 보고 소경들이라고 하고 있어요.

 

예수님과 유대인의 논쟁은 접점이 없어요.

이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하였기 때문이에요.

마치 금성 여자 화성 남자 같아요.

 

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일에는 무지한 소경이라는 것을 나면서부터 된 소경을 가지고 알려 주고 계신 겁니다.

너희가 왜? 날 몰라보느냐 하면 나면서부터 소경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은 빛에 대하여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빛을 한 번도 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 적이 있어야 불편하든지 말든지 하지요.

 

이건 마치 불신자들이 하나님(예수님)을 몰라도 전혀 불편함이 없이 사는 것과 같아요.

예수 몰라도 잘 살아요.

예수의 필요성도 몰라요.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면 내가 왜? 예수 믿어야 하는데! 그런단 말입니다.

 

하지만 눈을 떠 본 사람은 잠시라도 눈을 감으면 답답해서 못 살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는 성도는 예수 없이는 못살아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속에 의미를 아는 성도는 잠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나오는 용서의 능력을 받지 않고서는 못 살아요.

 

마치 드랴큐라가 피를 먹지 않으면 살수 없듯이 성도들은 십자가 피의 능력 없이는 못 살아요.

예수님의 피가 주는 죄사함의 능력으로 살아요.

 

앞서 잠간 언급 하였지만 다시 봅시다.

제자들이 소경을 보고 하는 말이 예수님 저 사람이 혹시 자기 죄 때문에 소경이 된 것입니까?

아니면 부모 죄 때문에 소경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까? 라고 물었잖아요.

 

제자들의 이런 질문 속에는 자신들은 죄가 없다는 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어요.

예수님이 만약 제자들의 물음대로 부모나 그 사람의 죄 문제라고 하면 눈을 뜨고 있는 자신들은 죄가 없는 줄 알게 됩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인간의 외모로 죄냐! 아니냐! 라는 것으로 접근하는 자체가 자신들도 죄를 모르긴 동일한 소경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소경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바로 소경이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예수님을 모르니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심으로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 소경을 통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 소경을 통해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내가 꼭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4절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보세요.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왜? 이 세상에 보내셨는지를 가르쳐 주어야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개역성경을 보면 조금 모호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라는 말씀이 틀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역본을 가지고 “우리가” 아니고 “내가” 라고 합니다.

 

킹제임스 역본에는 원문을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라고 하여,

 “내가 한다” 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즉 제자들이 할 일(you must)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할 일(I must)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전 “내가” 라는 단수보다는 “우리” 라는 복수가 맞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분명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맞아요.

하지만 십자가 사건 후 예수님이 하나님께 가시고 난 후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고 나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제자들이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는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맞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보내심을 입었기 때문에 동일한 의미라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오늘 본문을 현재 시제로 보면 예수님을 말합니다.

현재 시제로 예수님으로 해석해 봅시다.

 

앞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소경은 하나님(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이라고 했지요.

인간은 범죄 함으로부터 왜곡된 하나님 상(像)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선악의 법으로 바라본 상선벌악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왜곡된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본인들은 그 하나님이 잘못된 하나님인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곧 마귀라고 하였지요.

너희가 마귀를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하여 소경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하나님나라의 말을 하여도 못 알아먹고 도리어 하나님이 보내서 온 자기를 귀신들렸다고 하면서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우기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실존을 알려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고치시고 계신 것입니다.

중간에 소경이 된 자가 아니고 날 때부터 소경이라는 것에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중간에 후천적으로 소경이 되었으면 빛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빛에 대한 지식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날 때부터 선천척으로 소경으로 난 자는 애초 빛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올바른 빛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 생각 안에서의 빛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선천적으로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빛에 의미는 소경의 정보로 얻은 빛이에요.

그러니 빛이라는 말을 한다고 하여도 소경이 말하는 빛과 눈을 뜬 사람이 말하는 빛은 달라요.

 

지금 예수님 앞에 불려 나온 소경은 빛을 전혀 보지 못한 소경입니다.

빛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요.

빛에 대해서 안다고 하여도 사람들에게 들어서 안 빛이에요.

그러나 그가 안다고 한 그 빛도 눈뜬 사람들이 말하는 빛과 달라요..

진짜 빛과는 다른 빛을 가지고 빛을 안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을 하나님이라고 해 보세요.

 

그럼 죄인들이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소경과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그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인간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에덴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가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숨어 버린 겁니다.

에덴동산을 쫓겨난 아담이 죄 아래서 자식을 낳습니다.

낳아진 자식들은 모두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모두가 죄가 주는 정보로 하나님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죄인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어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소경이에요.

 

다만 조상들에게 들어서 자신들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하나님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말해도 모두가 다 달라요.

마치 소경이 알고 있는 빛처럼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불려 나온 소경은 곧 모든 유대인(인간)을 상징하고 있어요.

유대인들은 조상들에게 들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보니 다 엉터리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가 조상의 유전으로 하나님을 섬기니 헛되이 섬긴다고 하셨어요.

 

마 15:8-9=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입술로는 존경하나 마음은 멀다고 했어요.

사람의 계명이란? 조상들이 가르쳐준 유전이에요.

마치 이 시대 교회들이 자랑하는 교리와 전통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그 교리와 전통이 틀렸어요. 

틀렸다는 증거가 교단마다 교리가 다르다는 겁니다.



감리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다르고,

장로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다르고,

침례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다르고,

순복음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달라요.

 

각각의 교단마다 교리가 틀리다는 말은 인간의 이성으로 만들었다는 말이에요.

어느 교단의 교리가 맞느냐?

없어요.

어느 교단도 완전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이렇게 되면 과거엔 유대인들이 조상들이 가르쳐준 하나님이 가짜 이였듯이 지금은 교단에서 가르쳐준 하나님이 가짜란 말입니다.

 

암튼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가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어요.

가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은 소경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와서 참 하나님을 알려주고 있다고 합니다.

내가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 눈을 뜨게 해 주어 보게 하듯이 너희 눈도 뜨게 하여서 참 하나님을 알려주시겠다는 겁니다.

 

내가 그 일을 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 영적 눈을 뜨게 해 주러왔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면서 된 죄인들의 영적 눈을 뜨게 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 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가 해야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내가 해야 한다" 고 I must 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 스스로가 눈을 뜨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뜨게 해 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경의 눈에 침으로 흙을 이겨서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실로암이란? “보내심을 받은 자” 란 뜻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실로암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눈을 뜨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실로암 이라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한 것입니다.

소경이 스스로 실로암 못을 찾아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보냈습니다.

아무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면 눈이 떠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예수님이 보내서 간 자라야 눈이 떠지게 됩니다.

 

이건 마치 구약의 엘리사 시절에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려서 엘리사가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을 하면 나을 것이라고 보냄을 받은 것과 같아요.

모든 문둥병자가 요단강에서 목욕한다고 낫는 것이 아니에요.

오직 엘리사의 보냄을 받은 나아만 만 되는 겁니다.

요단강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보냄을 받는 것이 능력인 겁니다.

 

이를 성도의 구원으로 말하면 자기가 구원받고 싶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구원시켜 주어야 구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찾아가서 해 주세요.

우리의 원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원함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을 선물이라고 하고 은혜라고 하는 거예요.

은혜니 선물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누구든지 구원해 주시면 꼼짝없기 구원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주신 구원은 취소되지 않아요.

확정적이에요.

완성 즉 이미 완료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난 싫어요! 한다고 해서 취소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행동과 상관없이 유지되어요.

 

예수님은 아무나 구원시키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와 약속한 자만 구원 시켜요.

창세전에 이미 구원받기로 아버지와 아들 간에 약속을 하셨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서 창세전에 예정한 자를 구원하라고 하신 겁니다.

 

아버지가 구원 할 자를 예수 앞으로 인도하세요.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

어 쫓지 아니하리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보세요.

아버지가 구원받을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을 사람들은 아버지께서 예수 앞으로 이끌어 주신다고 하잖아요.

 

이는 마치 예수님이 소경을 실로암 못에 보내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이끌고 온 사람을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보낸 자만 실로암 못에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소경의 눈이 떠지는 것은 소경이 자기 침으로 흙을 이겨서 바른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발라 주셔야만 합니다.

흙에 예수님의 침이 발라져야 해요.

이건 마치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께서 침으로 이긴 흙을 소경의 눈에 바르셨다는 것은 그 소경에게 예수님의 입에 기운이 들어가서 간섭하셨다는 흔적입니다.

 

이렇게 소경의 눈이 뜨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하며 또는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이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는 일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예수님에 의해서만 구원이 되어요.

예수님이 목자처럼 잃은 양을 산울로 다니면서 찾아서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양은 그냥 잃어버려진 채로 살고 있으면 되어요.

 

양은 어리석게도 자기가 잃어버려진 줄도 모르고 그냥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럼 목자가 알아서 찾아서 천국으로 데리고 갑니다.

잃은 양은 한 번도 목자에게 목자님 날 찾아 주세요! 라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자기가 잃어버려진 줄도 모르기 때문이에요.

 

목자가 잃어버려진 것을 알고 산과 들로 미친듯이 가시에 상처를 받아가면서 찾아 나서서 기어코 찾아내는 겁니다.

마치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식음을 전폐하고 찾아다니는 것과 같아요.

 

소경은 눈이 뜨는데 자신이 한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얼떨결에 불려 나와서 뜨게 된 것뿐입니다.

소경은 눈을 뜨게 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뜨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 입장에선 예수님께서 자기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것 밖에 할 말이 없어요.

내가 어떻게 하였더니 눈이 떠졌다고 하면 안 되어요.

 

소경에겐 과거에는 보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본다는 사실만 남아 있어요.

소경은 내가 이렇게 하여서 눈이 떠졌다느니!

혹은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 예수님이 나를 불러 주었다느니! 와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에게서 눈을 뜨게 된 흔적을 찾고자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눈을 뜬소경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해 주셨다는 증거만 가지고 있으면 돼요.

이렇게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신 증거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을 일컬어 빛에 아들들에 삶이라고 합니다.

빛 되신 예수님에 의해서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에 빛의 아들로서 빛의 증거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빛의 아들이라는 말은 빛이 낳아 주셨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거듭난 것은 참 빛 되신 예수님께서 낳아주셔서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빛의 아들입니다.

 

성경에는 빛의 아들들처럼 행하라!

또는 빛의 갑옷을 입자!

또는 착한 행실로 살아라! 라는 말들은 성도의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의 증거를 가지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마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성도를 일컬어 세상의 빛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너희는 빛으로 난 하나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빛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참 빛 되신 예수님이 찾아낸 흔적을 가진 자들이다 라는 말입니다.

 

성도는 태양이 아니고 태양되시는 예수님의 빛을 받은 달이에요.

달은 스스로 빛을 발광(發光)하지 못해요.

달은 발암(發癌)체에요.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겁니다.

 

그러니 빛의 아들이란 말은 너희는 빛이 아니라 빛을 받은 자란 말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자란 말입니다.

자기 생명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란 말입니다.

성도의 생명은 성도 것이 아니고 예수님 것이에요.

 

그러니 빛을 비취라는 것은 세상 속에 참 빛이신 예수의 흔적을 사람들에게 보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너를 빛의 아들로 만들어 주셨는지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난 예수님 때문에 삽니다! 라고 하라는 거예요.

이렇게 사람들에게 예수를 통해서 구원 받았다는 것을 증거하며 사는 것을 착한 행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착한 행실이라고 하니 인간들이 착한 삶으로 생각을 합니다.

성도는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착한 삶을 착한 행실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죄인에겐 착한 삶이란 없어요.

아무리 인간들 보기에 착하게 살았다 하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착한 행실이라는 것은 윤리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구 때문에 구원을 얻게 되었느냐! 라는 증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고 물으면 예수님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면 되어요.

당신은 어떻게 천국을 갑니까? 라고 물으면 예수님 때문이지요! 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죄인인데 어째서 의인이라고 합니까?

그러면 예수님 때문이라고 하면 됩니다.

이것 이상 좋은 신앙은 없어요.

 

그래서 눈을 뜬 소경은 자기 눈을 뜨게 해 준 분은 예수 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8-11=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보세요.

지금 눈을 뜬 소경은 자기가 어떻게 눈을 떴는지 증거하고 있잖아요.

예수님이 자기에게 일으킨 사건으로 남은 흔적을 자랑하고 있잖아요.

예수님이 자기에게 일으킨 사건의 흔적이 자기가 지금 보고 있다는 겁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경이었는데 지금 본다는 겁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이 찾아오시기 전에는 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르고 살았는데,

예수님이 간섭하니 믿어지는 겁니다.

마치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눈에 비늘이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 이제부터 예수만 증거하잖아요.

이걸 성경은 빛을 사람들에게 비췬다고 해요.

우린 빛이 아니에요.

 

빛을 받아서 증거하는 증거자에요.

빛이 비춰준 것을 그대로 세상에 드러내 주면 되어요.

자기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비춰준 것을 증거하면 되어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우린 예수가 아니고 예수의 증거자들이에요.

성령은 예수의 증인이 되라고 보내 주신 것이지 우리 더러 예수가 되라고 보내주신 것이 아니에요.

이걸 놓치지 마세요.

난 예수 없어도 살 수 있어! 하지 말고 난 예수님 때문에 삽니다! 라고 증거하세요.

 

예수님이 소경에서 행한 일이 있어요.

그걸 증거하는 것이 빛을 말 속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고 집안사람들이 보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서 이렇게 구원 받았구나!를 증거하는 것이 빛을 등경 위에 두는 겁니다.

 

아! 예수가 저런 분이구나!

아! 예수님이 우릴 이렇게 구원했구나!

아!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우리 죄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죽어 주심으로 사해졌구나!

이걸 사람들 앞에서 비추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성도의 구원을 혼인잔치 집 비유로 했지요.

 

마 22:1-14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라고 하며 천국의 모습을 말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천국에 어떻게 가게 되는지를 설명하면서 천국에는 임금이 불러서 온 자들이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9 그 종들을 보내어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본 비유는 천국은 어떤 자들이 들어갈 수가 있느냐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주인이 준비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다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임금이 종들에게 명하기를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구별치 말고 불러오라고 하였어요.

여기서 말하는 악한 자나 선한 자라는 말은 인간의 행실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행실을 보지 않고 초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임금이 준비해 놓은 예복을 입혀서 들여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복을 입혀서 들여보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악한 삶이나 선한 삶을 따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복을 입고 들어간 사람들은 자기의 선이나 악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혼인잔치에서 오직 임금이 준비해 준 예복만 자랑하여야 합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가지고 있어야 할 증거는 주인이 입혀준 예복뿐입니다.

예복만이 천국에서 쫓겨남을 당하지 않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예복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의 입니다.

천국에 누가 가느냐?

예수를 믿는 자들이 갑니다.

천국은 내가 선하게 살았다 악하게 살았다 라는 것으로 가지 않아요.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자만 천국에 들여보내십니다.

 

예복을 자기가 입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임금이 청해서 오라고 해서 왔고 임금이 준비한 옷을 입으라고 해서 입은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얻은 구원에는 자기가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혼인잔치에 들어간 자는 오직 임금의 은혜에 흔적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임금은 다른 걸 찾지도 바라지도 않아요.

이렇게 임금이 주신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천국의 아들들의 삶이고 빛 된 삶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인 의미로서의 빛 된 삶을 윤리 도덕적인 차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성도가 얻은 구원이 날 때부터 소경 된 자가 눈을 뜬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얼떨결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눈을 뜬 소경처럼 예수님에 의해 지금 눈이 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라고 물으면 예수님 때문이요! 라고 하면 됩니다.

그럼 구원받기 위해 무엇했느냐! 라고 물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구원시켜주셨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죄인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남게 하기 위해서 날 때부터 소경이던 자를 이용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도의 구원을 은혜로만 남기려고 하시느냐 하면 죄라는 놈은 항상 자기라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제일 먼저 한 행동이 스스로 수치를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 입은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만들어 입은 옷을 벗기고 하나님이 만든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죄인이 입은 가죽옷은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죄 없이 죽은 짐승은 곧 하나님 자신의 죽음을 상징해요.

죄인이 입고 있어야 할 옷은 하나님의 희생의 피가 묻어 있는 옷이어야 해요.

아담에게 가죽 옷을 입혀 준 것은 죄인에게 하나님의 자기희생의 흔적을 남기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의로움이란? 하나님이 입혀주신 가죽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이 남겨주신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불 신앙은 하나님의 흔적을 없애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이 입혀준 옷을 벗겨 내고 인간들이 만든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인간들이 만든 옷이란 다름 아닌 인간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항상 인간의 행위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예복을 살펴보았듯이 임금의 옷을 입고 있느냐 아니면 자기 옷을 입고 있느냐 입니다.

임금이 준비한 옷엔 임금의 흔적이 담겨 있고 자기가 만든 옷은 자기 흔적이 담겨 있어요.

 

죄란? 은혜를 거부하고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역사하는 곳에는 항상 인간들의 자랑거리가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은혜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죄인의 행위입니다.

 

바울은 믿음과 행위를 서로 거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를 자기 의를 고집하다가 망했다고 했어요.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입혀주신 가죽 옷을 안 입고 자기가 만든 무화과나무 치마 옷을 입고 있다가 망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자기가 만든 것을 입으라고 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를 자꾸 들고 가도록 유혹을 해요.

자기 업적을 들고 가라고 해요.

 

마치 시골 할머니들이 남의 진치 집에 부조금이 없으면 안 가는 것같이 말입니다.

꼭 몇 푼이라도 부조금을 가지고 가야 떳떳하게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잔치 집엔 빈손으로 가면 됩니다.

주인이 수저에서부터 이쑤시개까지 다 준비 해 두었어요.


그러니 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은 아무 것도 준비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준비하고 가면 주인을 욕되게 하는 겁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이 잔치집이에요.

그러니 주인이 차려놓은 것에 자기 것을 보태려고 하지 마세요.

 

죄는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도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공짜를 모르면 구원의 비밀을 모릅니다.

공짜를 모르면 은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 중에도 자신들이 행한 율법 지킴이라는 행위를 철저히 배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 것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율법 지킴을 의라고 여긴 것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의로워지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사상은 곧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자체가 썩었기 때문에 의가 나올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의를 주셔야만 의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주시려고 왔다고 하여도 거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의 근본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한 것이 죄였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죄인이 어떤 자인지를 가르치고자 하셨지 율법을 지켜서 의를 만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율법 속에는 의가 없습니다.

의(義)는 예수님 피 안에만 두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십계명을 잘 지킬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십계명을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인은 평생 십계명 하나 제대로 지킬 능력이 없는 자들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이런 말을 하면 행위 주의자들은 반박을 합니다.

십계명 속에는 지킬 수 있는 계명도 있지 않느냐 라고 말입니다.

이는 십계명의 본질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가지고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속에 죄를 끄집어내고자 십계명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고 알려 주는 겁니다.

 

비록 구원받은 자라 할지라도 십계명은 온전하게 지킬 수가 없습니다.

십계명으로 자신의 죄성이 더욱더 고발될 뿐입니다.  

굳이 구원 이후의 삶이라고 한다면 나는 십계명를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난 이래서 죄인이고!

내가 죄를 이길 수 없으니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서 흘러나오는 용서로 살고 있구나! 를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구원받았다고 하여도 한 발자국도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 날 수가 없어요.

성도가 되었으니 완벽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둠의 생각입니다.

유대인들 스스로가 십계명을 잘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어둠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를 성화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어요.

오늘 이 본문을 가지고 성화주의자들은 어떻게 설교를 하였는가 살펴보았습니다. 

성화주의의 대표적인 박00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 2집 286 페이지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내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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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적셔진 이후에 곧바로 천국으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숙시키는 기간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이후에야 비로서 성숙한다는 것입니다.

그 성숙 부분에 바로 득도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채우고, 내 인생을 그 앞에 헌신하는 득도의 과정 실천의 과정을 말합니다.

이것은 구원을 획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구원을 획득했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 출발되어지는 일들입니다.

우리 인생으로 따지자면 출산되었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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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신앙생활을 득도(得道)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어요.

다른 말로 성화되어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도 율법 이래 있을 땐 이렇게 설교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부분은 동의 할 수가 없어요.

 

성화주의자들은 구원 이후의 삶을 예수 닮는 것이라고 해요.

그래서 성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겁니다.

너 그 따위로 신앙생활 해서 되겠느냐?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술 담배도 끊지 못하고 있느냐?

세월이 얼마인데 아직도 주일성수 하나 제대로 못하느냐?

아직도 그 성질머리 하나 못 고치고 사느냐? 라는 식으로 몰아갑니다.

 

성화주의자들은 십자가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해요.

그러나 성화는 십자가 피를 가리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 피로 성화 합시다! 라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지요.

예수님 피를 믿으세요! 라는 말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로 나아오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 피 앞에서 주님 나 앞으로 잘할게요! 는 성립되지 않아요.

그러나 성화는 앞으로 잘할게요! 가 있어요.

예수님 피가 주는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고 주여 앞으로 잘하게 성령충만 주옵소서가 나와요.

성화합시다! 는 반드시 성령 충만을 강조해요.

왜냐하면! 성화주의자들은 성령으로 예수를 닮자고 하니까요.

그러니 성령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치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피를 가리는 것은 전부 이단이에요.

그리고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두고 인간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자도 이단이에요. 

인간의 열심을 강조하고 마음만 먹으면 예수를 닮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채질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바리새인들의 사상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거룩해 질수 있다고 믿었어요.

실제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독사새끼라고 하면서 지옥에 가라고 저주 했어요.

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해져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저주했을까요.

그건 말씀대로 산 것을 의로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어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고 저주 하시지 않았어요.

다만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니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관심사를 자기에게 묶어 두려고 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린단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죄사함의 능력이고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자기에게 눈을 고정시키는 겁니다.

자기를 예수화 하게 만드는 거예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감추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옳은 삶을 살게 만들어서 감추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 누구는 이렇게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고 간증하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 주변에 성화 된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라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추천해 주세요.

손양원 목사입니까?

주기철 목사입니까?

한경직 목사입니까?

 

그들이 과연 예수 닮은 사람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성화 하여야 합니까?

예수를 얼마나 닮아야 합니까?

어느 정도 닮아야 닮았다고 합니까?

저는 이런 분들의 삶을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그 어떤 삶도 하나님 앞에 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신앙의 촛점을 흐리게 하기 떄문에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자랑하던 것들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이러한 것을 배설물로 여겼어요.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은 이러한 삶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기치하다는 뜻입니다.

 

제가 성화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구원 이후의 삶을 인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게 바로 신앙의 본질이라고 하니까 이건 아니라는 뜻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방인과 다른 모습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고 이방인보다 낳다는 뜻은 아니에요.

성도에게 있어 구원 이후의 삶은 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죄를 깊이 깨닫는 것에 두어야 해요.

그래서 사나 죽으나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난 죄를 이길 수가 없어서 예수님의 공로만 의지 합니다! 라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뜬 소경이 훌륭하다든지, 대단하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단지 소경에게 예수님이 하신 일만 남겨 놓았을 뿐입니다.

소경은 단지 자신에게는 빛 되신 분이 행하신 일이 담겨져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만 잘 간직하고 살아가면 됩니다.

 

누가 묻거들랑 예수님께서 이렇게 눈을 뜨게 해 주셨다고 증거만 하면 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은 예수라는 것을 자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소경은 자기 힘으로 눈을 뜨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에게는 능력이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아요.

그러므로 자기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노력으로 빛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빛이 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내 쪽에서 어떤 흔적을 남기고자 하지 마세요.

 

죄는 항상 하나님이 하신 것에 대하여 반항을 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 아래 속한 자들은 믿음으로 살라고 하면 그럼 예수 믿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살라는 말이냐? 라고 화를 냅니다.

믿음으로 살면 되는데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믿음을 행위로 구분시켜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믿음으로 사세요! 라고 하면 압니다.

새 언약이 있고 옛 언약이 있지요.

새 언약 아래 있는 사람은 새 언약의 법으로 살고, 옛 언약 아래 있는 사람은 옛 언약 법으로 삽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각자가 속한 언약의 법으로 해석을 합니다.

옛 언약에 속한 사람은 모든 말씀을 자기 몸으로 받습니다.

자기가 지켜 행할 것으로 받아요.

그러나 새 언약 아래 있는 성도는 모든 말씀을 예수님을 거쳐서 받아요.

예수님이 대신 행한 것으로 받아요.

 

그러니 옛 언약 아래 있는 사람은 무슨 말씀이든지 내가 했습니다! 가 나오고,

새 언약 아래 있는 성도는 예수님이 다 하셨습니다! 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를 믿는 것이 새 언약 하에서 믿음이에요.

 

그러니 새 언약 아래 있는 성도는 그 어떤 말씀을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지켜 주신 것으로 대하기 때문에 감사가 나옵니다.

하지만 옛 언약 하에 있는 사람은 아! 이걸 어떻게 지키지! 라고 고민에 빠져요.

그러니 말씀이 꿀송이 같이 달지 않고 쓴 겁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믿음으로 살라고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 라고 물어요.

이런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자꾸 행위차원에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되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믿음을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꾸만 자기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난 죄인이고 그 죄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을 남기는 겁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눈을 뜬 소경이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범사에 눈 뜬 것에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슬플 때도 눈을 뜨고 살고, 기쁠 때도 눈을 뜨고 삽니다.

보지 못한 것과, 보는 것의 차이만 있습니다.

옛날에는 못 보았는데, 이제는 예수 때문에 보고 산다고 자랑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분명히 예수나 누구인지 알고 살아가는 겁니다.

 

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는데 이제는 압니다.

천국을 알았으니 천국을 바라보고 소망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사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이 믿어지기 때문에 자신의 행함과 상관없이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병들어 죽으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죽고 나도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아니 병들어 죽게 되어도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고 영생하는 것임을 아니 세상이나 죽음이 두렵지가 않은 겁니다.

 

예수를 몰랐을 때는 세상에서 망하면 끝인 줄 알고 절망하였는데

이제는 세상에서 망해도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 망한 것으로 울고 불고 하지를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떤 곳인 줄 알고 천국이 어떤 곳인 줄 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는 것으로 사십시오.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으십시오.

신앙생활을 자꾸 정형화하려고 하지 마세요.

산다는 것은 정형화 된 것이 아닙니다.

 

그 때 그 때 상황 속에서 천국백성된 것으로 희노애락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병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도 병은 듭니다.

예수 믿어도 사고 나서 죽을 수 있어요.

 

신앙생활을 잘해도 사업에 실패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병들고 실패하였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왜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저 세상에 속한 자들이에요.

 

소경은 눈뜬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해 했습니다.

이제는 세상을 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비웃더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왜요? 눈을 떴으니까요.

 

우린 소경처럼 눈을 뜨고 구원을 받았어요.

그러니 세상에서 조금 살기 어렵다하여도 낙심하지 마세요.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정거장이에요.

잠시 잠간 후면 주님이 오세요.

주님이 안 오시면 우리가 그리 가면 되잖아요.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며 사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우리를 눈뜨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곧 주님이 오신다는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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