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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63강. 인자(人子)의 심판 (요 9:35-41)

by coroa 2021. 8. 28.

 

 

63강. 인자(人子)의 심판 (요 9:35-41)

-.정낙원 목사

 

 

 

자기 주제를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고,

자기 주제를 아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최고의 겸손이란? 자신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걸 안다면 감사함으로 살 수가 있을 겁니다.

 

초반부터 조금 도발적인 질문을 하겠습니다.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이 과연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믿는다면 왜? 무엇을 위하여? 예수를 믿을까요?

 

한번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따라 왔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군중들에게 말씀 하시기를 돌아가라고 합니다.

돌아가라는 말은 너희는 날 못 믿는다는 말입니다.

괜히 어쭙잖게 믿는다고 하다가 중간에 실망하게 되니 애당초 돌아가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충격적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모도 잃고, 자식도 잃고, 재산도 잃고, 종국엔 자기 목숨까지 잃어버리는 일이라고 합니다.

 

아니 어느 누가 집안도 망하고 자기도 망하는 일을 자초하겠습니까?

그러니 섣불리 예수 믿겠다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이건 인간은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 군중들에게 하신 말씀이 곧 지금 우리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들에게 그럽니다.

너희들 날 믿지 마라!

날 믿다간 인생 거덜 난다!

날 믿다가 인생 거덜 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생각 잘 해보라고 합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돌아가야겠습니까?

그래도 예수를 따라야겠습니까?

 

이유 없는 친절이 없다고 하듯이 인간이 신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도 다 꼼수가 있어서입니다.

자진해서 예수를 믿겠다고 한다면 다 그만한 속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싫어하는 죄인입니다.

 

그런 죄인이 하나님을 사랑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맞습니다.

이건 이상한 겁니다.

 

뭔가 다른 속셈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수많은 무리들에게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고마워하지 않고 제발 예수를 믿으려고 하지 말라고 했어요.

 

사람이 신을 찾는 것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다 자기가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불행하고자 신을 찾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온 집안이 거덜난다는 그 예수님을 어찌 좋아하겠습니까?

 

죄인이 예수님을 좋아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섣불리 대답하지 말고 깊이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기 몸뚱아리를 챙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나오면서부터 우앙! 하고 우는 것도 난 살아야 돼!

날 좀 행복하게 해 주란 말이야! 라고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자에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라!

목숨 바쳐 하나님을 사랑해라!

이건 불가능해요.

인간은 남을 사랑할 만큼 괜찮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짐승인 죄인에게는 자기 밥그릇에 손을 대면 부모형제라 할지라도 미워요.

그게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말이에요.

가인을 보세요.

자기기 제사를 안 받았다고 아벨을 돌로 ㅊ쳐 죽이잖아요.

왜 나를 무시하느냐 입니다.

날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이라도 용서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죄인을 짐승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사람은 등 따습고 배 부르면 자기 이미지 관리하기 위해서 남을 배려하는 척 해요.

그래서 연말연시가 되면 불우이웃을 돕는답시고 경로당이나 고아원에 라면 몇 박스 사들고 가서 사람들 불러 놓고 사진 찍는 겁니다.

고아원 아이들도 하도 많이 당해 보아서 이젠 누가 오면 야! 빨리 사진 찍고 보내자고 한대요.

남의 도움으로 사는 아이들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왠지 씁쓸하지 않나요.

 

죄인에겐 나 이외엔 신이 없어요.

내가 곧 신이에요.

내게 잘 해주는 사람은 축복을 하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에겐 저주를 퍼붓습니다.

누구든지 날 건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도 나에게 행복을 주어야 믿습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믿는다는 타이틀을 걸어 놓고 다 예수를 이용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걸 아시기 때문에 자진해서 예수 믿겠다고 하는 자들에게 돌아가라고 하신 겁니다.

그래도 꾸역꾸역 믿겠다고 하니 충격적으로 자기를 믿으면 망하니 빨리 돌아가라고 한 겁니다.

인생 거덜 나니 가라고 했어요. 

그러니 어느 인간이 이런 예수를 믿겠습니까?

제 정신 가진 인간이라면 당연히 예수를 욕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부모도 잃고, 자식도 잃고, 전토도 잃고, 자가 목숨 잃어요.

예수님이 자신을 믿겠다고 따라오는 자들에게 그랬잖아요.

인간 적으로 보면 당연히 예수 안 믿을래 하고 돌아서야 죄인답습니다.

 

왜? 설교 초반부터 이런 부정적인 말을 하는지 아세요.

나로서는 불가능한 것을 말해야 내가 지금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린 당연히 예수 믿는 줄 알아요.

그러니 예수 믿는다는 것에 감동이 되지 않고 감사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불가능한 것을 지금 우린 가능으로 살고 있어요.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그 예수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믿고 있어요.

얼마나 감사 한 일입니까?

사람들이 그토록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는 그 예수님을 믿고 있어요.

뭘 아시기나 하고 예수를 믿으세요.

얼마나 큰 복을 받고 있는지 좀 놀라세요.

 

하나님 말씀이라고 해서 주제파악도 못하고 다짜고짜 지키겠다고 예! 하면 안 되어요.

그건 순종도 아니고 충성도 아니에요.

순종과 충성은 그 일을 감당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에요.

 

아빠가! 어린 아이보고 돈 벌어오라고 해서 아이가 예! 하고 껌 팔러 가면 안 돼요.

아빠! 난 못하겠는데요.

난 아직 돈 벌 재주가 없어요.

그래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다고 아빠가! 아~ 이 자식 이거 아주 나쁜 놈이네! 라고 하지 않아요.

도리어 아빠 말에 순종한답시고 공부하는 것을 제쳐놓고 껌 팔러 나가면 혼을 냅니다.

 

그러니 성경이 아무리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한다고 해서 예! 믿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해도 예!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내가 그 말씀을 지켜 낼 수 있는 인간인가 먼저 헤아려 보는게 지혜로움입니다.

괜히 지키지도 못할 것을 지킨다고 설레발 떤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아요.

 

예수님은 자신을 욕하고 돌아선다고 해서 그 사람을 나무라지 않아요.

예수를 욕하고 돌아서는 사람이야말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에요.

저 놈! 자기 주제를 제대로 파악한 놈일세!

그런단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고 할 때 불타는 충성심으로 예수님이 죽지 않게 막아 준다고 했어요.

자기가 대신 싸워서 보호해 준다고 헸어요.

이건 베드로의 본심이었어요. 

아니 주님이 죽겠다고 하는데 누가 그래 잘 죽으세요! 라고 하겠어요.

이건 인간의 의리상 그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진심으로 막아 준다고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아서라 말아라!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한다고 하십니다.

이건 예수님이 비꼬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베드로의 충성심이 약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가 부인하고 저주해도 십자가를 질 때 도망쳐도 섭섭해 하지 않았어요.

그게 인간들의 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겁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풀리지 않으면 팔자소관이라는 말을 합니다.

팔자소관이란? 쉬운 말로 신으로부터 운명을 타고난다는 말입니다.

신으로부터 운명을 타고 난다고 하면 이미 결정 되었다는 말입니다.

참 복음적인 이야기이지요.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린 토기(土器)에요.

하나님이 어떤 이는 간장 담는 그릇,

어떤 이는 밥그릇,

어떤 이는 국그릇으로 만들었어요.

 

간장 그릇이 중간에 변해서 밥그릇이 되지 않아요.

깨어져 용도가 폐기 뙬 때까지 주인은 간장그릇으로 사용해요.

만든 대로 살다가 용도가 다 되면 폐기처분 당하는 것이 그릇이에요.

이런 그릇이 인간이에요.

 

이렇게 정해진 것을 성경에선 분복이라고 합니다.

너나 나나 다 분복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팔자소관대로 산다는 말이 맞지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너희는 머리털 하나라도 검게나 희게 할 수가 없다고 하셨지요.

이는 우리 팔자를 우리가 고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고쳐보겠다고 합니다.

 

마귀는 고쳐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용하다는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 팔자를 고쳐 보겠다고 굿을 합니다.

이런 사상이 이젠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수 믿고 팔자를 고쳐 보라고 합니다.

교회 안이든 교회 밖이든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팔자를 고치고자 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예수 믿어서 부자 되라고 합니다.

부자가 된다고 팔자가 고쳐진 건가요.

팔자를 고친다는 것은 지옥 갈 사람이 천당에 가는 겁니다.

그럼 지옥 갈 사람이 부자 되면 천국 가는 팔자가 고쳐진 건가요.

아니에요.

부자로 지옥에 가요.

그러니 팔자는 그대로인 겁니다.

 

팔자는 내가 고칠 수 있는게 아니에요.

이미 야곱과 에서처럼 태어나기도 전에 각자 가야할 길이 타고났어요.

성도가 예수를 믿고 팔자가 고쳐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은 이미 예수 믿게 되어 있어서 믿는 것뿐입니다.

 

다만 사람들 보기엔 자기가 예수 믿어서 팔자를 고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서 인간들이 바라는 만큼의 팔자가 고쳐진다면야 문제가 없어요.

자기가 꿈꾸는 행복!

자기가 바라는 삶이 살아지면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성경을 펴면 성도가 되어서 자기 뜻대로 살아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어요.

하나같이 자기 원함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질질 끌려 다녔어요.

하나님이 정해 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임 당했어요.

마치 드라마에서 탤런트가 각본 따라 연기하듯이 움직여요.

 

이렇게 살다가 사람들의 인생 유전이 히브리서 11장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인물들이 구름같이 둘러 쌓인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해요.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자기 뜻대로 산 사람이 없어요.

믿음이 개 목걸이처럼 그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구요.

 

그러니 하나님께 붙잡혀서 자기가 바라는 대로의 팔자를 고친 것이 아니라 더 꼬여 버렸어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그랬고 신약의 성도가 그래요.

이게 성경 속에 나온 인간들 이야기에요.

 

이건 어디까지나 만약이에요.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다.

누가 예수를 믿어서 팔자가 고쳐진다고 해도 인간이 과연 예수를 믿을 수 있느냐 입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또한 누가 믿으라고 권유한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속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속된 말로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자유의지를 말하는 사람은 뭔가 오해하고 있어요.

인간은 스스로 좋은 길을 선택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론 자체가 죄로 인하여 틀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겐 좁은 길로 가면 영생을 받는다 해도 좁을 길을 갈수가 없어요.

인간의 본능이 좁을 길을 싫어하고 넓은 길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넓은 길로 가면 멸망을 받는다고 해도 그 길을 가는 겁니다.

굳이 자유의지가 있다고 한다면 죄 짓고 지옥으로 가는 자유의지가 있어요.

그게 죄인 속에 내장 되어져 있는 죄성이라는 칩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믿고 싶을 땐 믿고 내가 믿기 싫을 땐 안 믿겠다고 해요.

뭐든지 내가 결정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요?  

성경은 도리어 믿음은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도록 해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요 6:43-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한 번은 예수님이 자신은 하늘로서 온 산 떡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마시면 그 속에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저 양반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어떻게 자기 살과 피를 준다고 한단 말이야!.

우리가 무슨 식인종인가!

그러면서 하나 둘 다 예수님 곁에서 떠나갑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러십니다.

그래 너희들이 떠나 가는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는 누가 믿느냐!

아버지께서 믿게 해 주는 사람만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도록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는 사람은 반드시 믿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 믿을 사람은 자기 앞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아쉬운 게 하나도 없어요.

 

어차피 아버지가 알아서 구원 받을 놈은 단 한 놈도 빠트리지 않고 다 예수를 믿도록 조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석이 쓱 지나가면 쇠붙이가 척척 달라붙듯이 아버지가 이끌고 오면 예수님에게 척척 달라붙어요.

예수님은 이런 사람만 구원을 시켜요.

 

그러니 내가 예수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싫다고 안 믿는다고 해도 안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그릇인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하나님께서 야! 정낙원이 너 예수 믿어!

그러면 난 꼼짝없이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어떤 사람에겐 너 예수 믿지 마! 그러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지금 제가(우리)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에요.

 

이처럼 내가 예수를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또 내가 예수 믿기 싫다고 해서 안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제발 믿음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예수가 믿어지십니까?

 

그건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고 사세요.

어쩌자고 내가 야곱처럼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는 팔자로 태어났는가!

이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를 믿도록 하신 겁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요.

 

이처럼 예수를 믿는 것은 자기 안에 자기도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야만 믿을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은 거부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를 믿도록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깨달아져야 범사가 감사가 되어져요.

 

그럼 인간은 왜? 예수 믿을 수 없는지 살펴봅시다.

인간은 왜?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일까요?

이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 속에 인간들의 본성과 역설적인 것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없고 싫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인간이란? 예수를 믿어서 자기 삶에 도움이 되고 행복을 주는 것이라면 믿지 말라고 하여도 믿겠다고 나설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를 믿어서 손해를 본다고 하면 믿으라고 끌어 당겨도 밀치고 달아납니다.

이유는 인간은 자기 사랑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에요.

이처럼 인간의 본성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받아들이고 손해가 된다고 여겨지면 미련 없이 배척을 하게 되어 있어요.

 

마치 사람들은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먹고자 하는 것과 같아요.

남자들에겐 정력에 좋다고 하면 뱀도 잡아먹고 사슴피도 마시고 곰쓸개도 먹습니다.

만약 바퀴벌레가 정력에 좋다고 하면 씨가 마를 겁니다.

굼벵이도 잡아먹는 사람이 뭔들 못 잡아먹겠어요.

아마도 밥 먹다가도 바퀴가 지나가면 얼른 잡아서 먹을 거예요.

그랬으면 교회에 돌아다니는 바퀴가 한 마리도 없을 것 아닙니까?

 

여자들에겐 예뻐진다고 하면 무슨 짓이든 다 합니다.

멀쩡한 뼈도 예뻐진다고 하면 사정없이 깎아 내잖아요.

태반 주사도 맞는 걸 보면 아마도 송장 섞는 물이 젊어지고 예뻐진다고 하면 마실 겁니다.



남자는 힘을 위해 살고,

여자는 예뻐지기 위해 삽니다.

남자는 강하면 기분 좋고,

여자는 예쁘면 기분 좋아요.



그게 세상에서 힘이 되고 행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기 몸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면 부모도 자식도 전토도 자기 목숨까지 잃어버린다고 하는데 어찌 믿겠습니까?

 

그래서 전 예수 믿는 것도 다 팔자라고 이처럼 길게 말하는 있는 겁니다.

좀 감격하라고!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놀라라고!

행복해 하고 살라고 말이에요.

이 사실 하나만 믿어진다면 마음이 넉넉하게 살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예수 믿는 것이 다 팔자라는 말이 사람을 엄청 기분 나쁘게 해요.

어떤 사람에겐 엄청난 축복의 말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겐 엄청 기분 나쁜 말이에요.

 

야곱과 에서를 비유하면 야곱은 예수를 안 믿고 싶어도 예수를 믿을 팔자로 태어났고,

에서는 예수를 믿고 싶어도 못 믿을 팔자로 태어났어요.

야곱은 축복이지만 에서는 저주에요.

 

에서 입장에선 반발하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왜? 내 의지대로 할 수가 없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시다바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의 결정도 존중해 달라고 따질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늘 에서 같이 하나님께 반발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에서의 계보를 쭉 타고 올라가면 가인이 나옵니다.

가인은 최초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발을 한 사람입니다.

 

가인은 알다시피 아담의 아들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조했지만 가인은 아담이 낳았어요.

그러니 가인은 최초의 인간인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과 다른 죄 아래서 출생한 인간이에요.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은 죄 아래 팔린 아담의 핏줄이 어떻게 하나님께 반발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로 작정한 사람을 공격함으로서 하나님의 처사에 분노를 표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면 다냐?

왜? 내 정성을 무시하느냐!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겁니다.

 

이 죄성이 인류 역사 속에서 그대로 나타나요.

신약 시대엔 스데반 집사에게 그대로 나타납니다.

12제자와 바울에게 나타났었고,

이 시대 예수쟁이들에게 나타납니다.



예수쟁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하는 성도를 말합니다.

아벨처럼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죽임 당한 자들이 피가 온 땅에서 소리치고 있어요. 

하나님도 참으로 야속하십니다.



가인의 제사도 좀 받아 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가인과 아벨 둘 다에게 얘들아 고맙다!

너희들이 제사상을 차린다고 고생 많았다고 하면서 제사를 받아 잡수셨으면 얼마나 인자하고 자비롭습니까?



정성껏 준비한 가인의 입장도 좀 헤아려 주어야지요.

그래야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닉 네임에 걸 맞지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몰인정하게 가인의 제사상엔 수저하나 가지 않고 확 밀쳐 버립니다.

아벨이 차린 제사상만 안고 잡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가인이 원망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인이 뿔따구가 난 겁니다.

그 뿔따구가 동생 아벨을 죽인 겁니다.

 

우린 모두가 가인이에요.

가인이 한 행동에 동정이 가는 겁니다.

우리도 이런 일을 당하면 하나님의 처사가 틀렸다고 하나님께 항의하잖아요.

예수 믿는데 조금이라도 일신상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나님 왜 그러느냐고 따지잖아요.

내가 뭘 잘못 했느냐 라고 굶어 가면서 잠도 자지 않고 따지잖아요.

 

그러니 우린 가인처럼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자들이에요.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을 죽인 겁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나 같으면 내 자식들이 밥상을 차려주면 입맛에 안 맞더라도 다 맛있다고 할 것입니다.

어느 자식 기분 나쁘지 않도록 말이에요.

인간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이 우리처럼 인정머리가 없어서 그렇게 하였을까요?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서 하시는 일을 보여주시고자 함입니다.

성경을 보면 창세기 1장에서부터 하나님은 뭔가 갈라내는 일들을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빛과 어둠을 갈라내고,

하늘과 땅을 갈라내고,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을 갈라내고,

가인과 아벨을 갈라내고,

이삭과 이스마엘을 갈라내고,

야곱과 에서를 갈라내고,

요셉과 형제들을 갈라내고,

유대인과 12제자를 갈라내고,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로 갈라내고,

새 언약 안에 있는 교회와 옛 언약 아래 있는 교회로 갈라내고,

예수님의 피가 뿌려진 성도와 예수님의 피가 없는 교인으로 갈라내고 있어요.

 

하나님은 갈라내는 게 취미인가 봐요.

그래요.

하나님은 갈라내는 것이 일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의 취미를 모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기를 들게 됩니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듯이 예수님도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갈라내는 일을 하십니다.

유대인들 속에서 12 제자를 뽑아냈어요.

표면적 유대인 속에서 이면적 유대인을 갈라내는 일을 하신 겁니다.

천국의 비밀을 말 하시면서도 제자들에게는 허락하고 바리새인들에겐 비밀로 했어요.

너희에겐 허락하였으니 저희에겐 허락되지 않았다고 구분하셨어요.

 

이렇게 너희와 저희로 구분하는 것을 일컬어 심판이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 세상을 둘로 보시고 계신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인류가 하나라고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모두 하나 되자고 하지만 예수님은 믿겠다고 내미는 손도 뿌리치고 넌 나하고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내서 자기 백성과 아닌 자들을 갈라내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고 자기 백성들만 골라서 저희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지 않고 인정머리 없이 갈라내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열면 모두가 심판하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심판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남을 당한 눈을 뜬 소경을 예수님께서 찾아와서 믿음을 확인하는 내용입니다.

 

35-39절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37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소경이었던 자가 눈을 뜨고 나자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경은 예수 때문에 눈을 뜨곤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났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찾아 갔어요.

 

찾아 가서 하는 말이 뜬금없이 “네가 인자를 믿느냐” 라고 합니다.

이 말 속에는 네가 나 때문에 쫓겨났는데도 그래도 예수를 믿을 수 있겠느냐! 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이는 인자가 하는 일 속에 이런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눈을 뜬 소경이 그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나는 믿겠다고 고백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가 바로 유대인들이 그렇게 미워하고 핍박하는 예수인데도 그래도 믿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소경이었던 사람이 그래도 주님이 나에게 베푼 은혜가 이렇게 있는데 내가 어찌 주님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며 난 못 떠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소경이었던 자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소경이었던 자에게 “네가 인자(人子)를 믿느냐” 라고 묻는 물음입니다.

소경이었던 자가 “인자가 누구냐” 라고 물으니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인자가 누구시기에 자꾸만 인자 이야기를 합니까?

 

소경이었던 자의 고백을 듣고는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심판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심판이 묘합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는 심판이라고 합니다.

즉 내가 인자인걸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갈라내겠다고 하십니다.

 

심판이란? 갈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백성과 땅에 백성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갈라지는 것을 성도 입장에선 구원을 받았다고 하고, 불신자 입장에선 멸망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일으키는 성도의 구원은 반드시 심판이라는 모습을 바탕에 깔고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고 하지요.

어부란 물고기를 잡는 사람이에요.

알다시피 물고기를 잡는 것은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겁니다.

물고기가 바닷물에서 건져지면 죽어요.

물고기가 바닷물에서 건짐 받아 죽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고기 입장에선 죽음인데 구원이라고 한다니까요.

별 희한한 구원도 다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젠 물고기를 잡지 말고 사람을 잡으라고 합니다.

그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말도 사람을 물고기처럼 잘 살고 있는 세상(바닷물)에서 건져내서 죽이란 말입니다.

마치 소경을 유대인들 세계에서 뽑아 낸 것과 같아요.

12제자나 바울을 들어서 말한다면 유대교라는 율법신앙 아래서 빼낸 겁니다.

우리에게 말하면 자칭 정통교회라는 곳에서 빼낸 겁니다.

 

이 시대 교회들이 유대교와 똑 같아요.

유대인들이 하던 신앙생활을 그대로 하고 있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잖아요.

이건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유대교나 이 시대 교회나 그 근본은 같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교와 같은 사상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빼내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서 이런 교회를 일컬어 음녀라고 해요.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기존의 틀에서 빼내는 것을 성경은 구원이라고 해요.

 

그럼 구원이 뭐냐!

기존의 세상에서 뽑혀 나와서 죽는 거예요.

이쪽 편에 있다가 뽑혀서 저쪽 편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소경이 눈을 뜨고 유대인에게서 뽑혀 나온 것과 같아요.

그러니 유대인 쪽에서는 쫓겨남을 당한 것이고, 예수님 쪽에선 영접함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소경이 그러합니다.

소경은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유대인들과 같은 편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남을 당하게 되었어요.

이처럼 소경이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나는 것을 일컬어 심판이라고도 하고 종말이라고 합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유대인과 한 통속이었어요.

율법 아래서 잘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에게 은혜를 입게 됩니다.

은혜를 입고 보니 그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하던 세상을 보게 되었어요.

 

이걸 신앙으로 말해 봅시다.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엔 율법 신앙생활을 했어요.

행하면 복을 받고 안 행하면 저주 받는 것입니다.

이건 조상대대로 내려온 신앙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다 이게 정통이고 옳은 신앙이라고 믿고 살았어요.

 

율법신앙이란? 한마디로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입니다.

율법신앙의 근본은 인간이 뭘 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고 안 살면 저주를 받아요.

이 시대 대부분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기존에 신앙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일을 하십니다.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했어요.

안식일에 눈을 뜨게 했다는 것은 율법에서 해방시킨 것과 같아요.

이렇게 되면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소경이란 말이 됩니다.

지금 예수님이 유대인을 일컬어 소경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보아도 알 수가 있어요.

 

율법 아래서 소경이었던 자가 예수님을 통하여서 눈을 뜨고 보니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고보니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저주인지 알게 되었어요.

기존에 복이라고 여기던 것은 저주이고 저주라고 여기던 것이 복이란 것을 알게 되었어요.

유대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예수가 정통이고 정통이라고 하는 유대인이 이단인걸 알았어요.

 

그런데 어찌 유대인들 속으로 들어가겠어요.

유대인에게 돌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에요.

이젠 목숨 걸고 안 돌아가도록 지켜야 할 일입니다.

 

이건 종이 자유자가 된 것과 같아요.

다시 종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아니 살 수가 없어요.

한 번 맛본 자유는 빼앗길 수가 없지요.

 

이걸 진리 안에서 자유한다고 합니다.

빛에 속한 자는 다시는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이 자유를 빼앗기지 말라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십자가에서 다 훌훌 벗어버리게 해 주셨어요.

의문에 쓴 증서를 다 도말시켜 버렸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율법이라는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 할 때 너희 앞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왜? 율법에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느냐고 책망을 했어요.

 

지금 소경이 그러해요.

율법에서 해방되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다시 율법으로 짐을 지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말고 율법 지키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단호하게 싫다고 합니다.

난 예수를 부정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그럼 꺼져! 그러는 거예요.

너 같은 이단은 유대인으로부터 축출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 때문에 유대교라는 조직에서 제명당하고 만 겁니다.

 

이런 신앙의 맥은 그대로 지금도 유지되어요.

성도는 예수를 믿음과 동시에 기존으로부터는 쫓겨남을 당하는 종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기존 교회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제가 아는 목사님 이야기에요.

이 분은 그 이름도 거룩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교회에 협동 목사로 계셨어요.

그런데 이 목사님이 복음을 알게 된 겁니다.

예수의 피만 구원의 능력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세상에 담임 목사도 모르는 복음을 알게 되었다구요.

 

그래서 저랑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받은 은혜도 나눌 겸 매월 한 번씩 모여서 십자가에 관한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담임 목사에게 복음을 듣게 할 마음으로 우리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케 하셨어요.

그런데 그 교회 담임 목사가 제가 인간의 행함엔 의가 없다고 하는 말에 뚜껑이 열린 겁니다.

정통 신앙에 어긋난다는 거예요.

 

모든 것을 예수님이 다 하셨다고 한다면 누가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충성하겠느냐! 라고 하면서 정통교리에 어긋나는 이설(異說)이라고 하면서 이단(異端)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사상을 가르치는 목사와 교제하는 협동 목사님을 교회에 시무하게 해선 안 된다고 하면서 이단이라고 그 교회에서 쫓아냈어요.

그 협동목사님은 예수님 피를 안다는 것 때문에 완전히 소경 꼴이 나고 만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 교회 담임 목사와 그 협동 목사님은 예수님의 피를 중심에 두고 심판이 이루어진 겁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해요.

협동 목사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몰랐으면 담임 복사와 친구야! 반갑다 하고 잘 지낼 텐데!

재수 없게? 예수의 피를 알아서 교회에서 쫓겨난 겁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씁쓸한 인생이지요.

 

이러한 것은 모두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기존의 교단에서 당하는 아픔들입니다.

십자가 도를 모르는 교회는 모두가 유대교에요.

성경을 영으로 읽지 못하고 문자로 읽어서 가르쳐요.

그러니 상식적인 설교가 난무하는 겁니다.

 

목사가 목사를 비판한다는 것은 돌 맞는 일입니다.

하지만 말을 하여야겠네요.

이 시대 목사들의 설교를 모니터해 보세요.

모두가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설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 방송에 나와서 설교 하시는 목사들을 보면 대다수가 문자적으로 성경 풀이를 해요.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보세요.

성경이 그러하다고 하면 그런 줄 아세요.

 

예수님도 성경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사십시오!

죽도록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세요! 라고 사자후를 토합니다.

 

성경에 적힌 그대로 말하는데 뉘라서 아니라고 토를 달겠어요.

그러면 믿음 없는 마귀라고 몰아칠 텐데!

그러니 목사가 시키는 대로 죽도록 충성하는 겁니다.

최선을 다해서 몸을 바치는 거라고 하잖아요.

 

오늘 어떤 분이 상담 전화를 했어요.

교회 다닌 지 6개월 되었데요. 

개척교회에 다니는데 어느 날 목사님이 제자 반에 등록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분은 예수님의 제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데!

자기 같이 초보자를 제자 반에 올라오라고 하니 감사하기도 하고 황송하더래요.

그런데 어느 날 목사가 성전을 건축하여야 한다면서 집을 팔아 바치라고 하더랍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기 것을 몽땅 예수님께 바쳐야 한다고 공갈을 친 것 같아요.

 

이 분이 몇 날을 고민을 하였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목사님은 주의 종인데 하나님 말로 들어야 한다고 제자 반에서 배웠는지를 몰라도 집은 팔아서 바치지는 못하여도 뭔가 성의는 보여야 하겠기에 동생에게 3천만 원을 빌려 달라고 했답니다.

 

동생이 준다고 해서 목사님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대요.

그런데 동생이 언니가 돈을 빌려달라고 하니 어디에 쓰는지 용도를 물어서 교회 헌금 한다고 했더니 못 주겠다고 하면서 난리가 났답니다.

이에 이 분이 목사님에게 못하겠다고 하니 아마도 온갖 욕을 다하면서 믿음 없다고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자 반에서 공부한 다른 분들에게도 다 이런 식으로 했다는 것을 알았대요.

이걸 어찌 하여야 하는지 상담을 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에게 그 놈은 목사가 아니고 사기꾼이니 그 교회에서 나오라고 했어요.

선뜻 제 말에 동의를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을 보니 목사 말 안 들으면 저주 받는다는 말들을 한 모양 같아요.

 

이런 분들은 아직 자기 안에 빛이 없기 때문에 목사의 말이 두려운 겁니다.

가짜 목사들은 하나같이 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풀이해서 들이미니까 성경의 진의를 모르면 당하지요.

거짓 목사들은 복음을 모르니 모두가 교회 충성하고 목사 말 잘 들으라고 가르치잖아요.

복음을 모르면 꼼짝 없이 속게 되어 있어요.

 

설교는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고 불가능성을 말하는 겁니다.

죄인의 실존은 이렇다고 말해주어야 해요.

죄인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미워하고 죽일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해요.

그럼에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시켜 우리를 용서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하고 감사케 하여야 합니다.

 

신앙이란? 우리가 뭘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요.

우린 저주 받은 자인데 그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셔서 용서 받고 살아요.

그러니 인간은 죄인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라고 말해주어야 한다구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이 되었다고 알려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 방송에 나오는 목사들 대부분은 정 반대로 말하고 있어요.

할 수 있다! 해 보자! 라고 합니다.

성경이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치잖아요.

문자적으로 보면 하나도 틀리지 않아요.

이런 설교를 들으면 교인들은 꼼짝 못해요.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어찌 반박하겠어요.

그러니 그대로 따르는 겁니다.

이걸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해요.

둘 다 지옥이라는 불구덩이에 빠져요.

 

예수님이 그럽니다.

살리는 것은 영(내용)이고, 육(문자)은 무익한 것이라고 합니다.

내 말이 영이요 곧 생명이라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지 않아요.

날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고 죄가 사해지지 않아요.

오직 예수의 피로서만 죄사함이 있어요.

 

사도 바울이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던 때를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고 했어요.

그리스도 밖이란? 예수를 몰랐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모르니 당연히 저주 아래 있었지요.

 

바울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이 살았어요.

율법에 특심했어요.

그런데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 고백하기를 그 때는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어둠에 있었다고 했어요.

 

율법대로 살면 영생이 주어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잘못이었다는 것입니다.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보니 영생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어요.

소경이 눈을 뜬 거지요.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 눈에 율법이라는 비늘이 떨어지고 보니 구원이 달리 보이는 겁니다.

구원은 내가 달려가서 얻어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찾아와서 주시는 것이란 걸 알았어요.,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난 가만 있는데!

하나님께서 택배요! 하고 주더라는 겁니다.

자기는 받을 준비도 안 했는데 그냥 툭 던져 주더라는 거예요.

 

그러니 자기가 열심히 좇아가던 유대인들이 신봉하던 율법신앙이 가짜란 것이 보여진 겁니다.

이젠 적극적으로 유대인들 신앙은 가짜라고 일러주어야지요.

그러자 조금 전에 알던 친구들이 그럽니다.

너 왜? 그러는데!

뭘 잘못 먹었나!

 

그러자 바울이 그럽니다.

나 예수 만났어!

예수가 날 찾아왔어!

우리가 율법으로 이단이라고 정죄하여서 십자가에 죽인 그 예수를 만났다고!

그 분이 부활해서 날 찾아 와서 내가 너희들이 기다린 메시야라고 했다니까!

하나님이 그 예수가 메시야 라고 했단 말이야!

 

그러자 전에 동료였던 바리새인들이 너 미쳤냐!

그 예수는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정통 신앙을 부정한 이단이야!

그래서 너도 예수가 이단이라고 생각해서 예수쟁이들을 죽이고자 잡으러 다녔잖아!

너 지난번에 스데반도 그래서 죽인 거잖아!

그런데 지금 와서 예수가 맞다고 하면 어찌 되느냐!

야! 임마! 정신 차려!

제발 정신 차리라고 이 친구야!

 

바리새인인 동료들이 너 참 안 됐다고 하면서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며 소리치고 있어요.

어쩌다 저 지경이 되었나!

참으로 사람 팔자 알 수 없다더니 저 똑똑한 놈이 저렇게 한방에 갈 줄이야 누가 알았나!

자기들 끼로 온갖 말을 다 해 댑니다.

 

하지만 조롱을 무릅쓰고 바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아니라고 합니다.

결국 바울은 유대교로부터 이단이라고 정죄당하고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기에 이릅니다.

교회에서 쫓겨난 협동목사님이 지금 바울 짝이 난 겁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에요.

전에 율법 아래서 알던 목사들은 절 보고 어쩌다 그렇게 이단에 빠졌느냐고 측은해 해요.

예수님에게 붙잡힌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두가 다 이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어요.

 

참으로 감사할 일이지요.

하나님의 일하심이 한 치도 어그러지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으니까요.

무섭지요.

무서움이 아니고 감사할 일이에요.

 

예수님은 소경을 가지고 유대인을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내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소경이었던 자를 탄핵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소경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우리가 왜? 소경이냐고 발끈하여 화를 내고 있습니다.

 

40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지금 예수님께서 심판하는 기준은 예수님을 모르면 소경이라는 겁니다.

예수를 알면 눈뜬 자이고 모르면 소경이라는 거예요.

율법대로 살고 안 살고가 중요치 않고 너 예수를 아느냐 에요.

너 예수의 피 알어! 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알아먹을 턱이 없지요.

 

예수님의 말씀에 뜻을 모르니 유대인들은 우린 소경이 아니라고 바락바락 덤빕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분들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기 이 예수가 우리더러 소경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앞이 안 보입니까?

다 보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이 예수가 우리보고 소경이라고 해요.

이건 미친놈입니다.

이런 미친놈을 우리 사회에 두어서 되겠습니까?

죽여야지요.

 

그러자 예수님이 한 술 더 뜹니다.

 

4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그래 너희들이 나를 본다고 하니 그게 소경이란 증거라고 합니다.

아니 보는데 어찌 소경이라고 하느냐 에요.

못 보는 놈이 소경이지!

어째서 보는 우리가 소경이냐! 라고 따집니다.

유대인으로서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이건 마치 이 시대 가짜 목사들과 교인들이 예수를 안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면 난 아는데요! 라고 하는 게 문제인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도 모르면서 십자가를 안다고 한단 말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교회 부흥을 말하고!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세상에서 잘 살아야지 한단 말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상급을 받자고 한단 말이에요.

아까 상담한 그 분의 교회 목사같이 제자 훈련한다고 하면서 성전 짓겠다고 집 팔아서 헌금하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건 십자가를 모르는 거예요.

십자가는 넌 꺼져!

예수님이 다 할 테니 넌 가만히 있어! 그러잖아요.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내가 뭘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 하신 것을 알고 박수치고 감사하는 겁니다.

 

이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놈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해요.

안 죽었기 때문에 자꾸만 자기가 뭘 하겠다고 성화한다고 나대는 겁니다.

자기가 안 죽었으니 자기 꼬라지를 살피게 되는 것이에요.

죽은 놈은 자기 꼬라지 살피지 않아요.

 

그냥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감사하게 받아먹고 살아요.

이 시대 교인들은 유대인들하고 똑 같아요.

그러자 예수님은 이걸 죄 문제로 끌고 가 버립니다.

 

이제 인자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제일 어려운 내용이니 잘 들으세요.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소경은 눈을 떴느냐! 안 떴느냐! 로 말하지 않고,

예수를 아느냐! 모르느냐! 로 판단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심판주로 알아보는 것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인자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이 인자를 모른다고 하였으면 죄가 없을 터인데 인자를 안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인자에 대하여 모른다고 하였으면 희망이 있는데 안다고 하니 가망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소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인자에 대하여 안다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내가 인자라는 것을 안다면서 어떻게 나를 거부하느냐 에요.

그런데 반면에 소경이었던 자는 인자를 몰랐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인자를 알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인자로 오셔서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 알게 되었단 말입니다.

인자가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 줄 몰랐던 소경은 예수를 만남으로 알게 되었어요.

 

그럼 인자가 무얼 하시는 분인지 알아봅시다.

 

인자란? 문자적으로 보면 “사람의 아들” 이에요.

“죄가 없는 오리지널 사람” 이란 말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가 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을 말해요.

 

그러니 인자는 죄인과 다른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사람은 없어요.

죄인만 있어요.

죄인은 사람의 아들이 아니고 그냥 죄인이에요.

이걸 흙이라고 해요.

하지만 죄인들이 자기가 죽은 송장인줄도 모르고 사람인줄 알고 있어요.

 

하나님은 죄인은 수에 칠 가치가 없다고 했어요.

하나님은 죽은 놈은 상종하지 않아요.

산 자만 상대해요.

산 자만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엔 전부 아담의 새끼들이니 다 죽은 자들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 예수님을 원래 인간의 모습인 인자로 보내 주신 겁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했어요.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 되었지요.

하나님 형상이 상실 되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지금 우리는 원래 사람이 아니고 죄인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인자로 곧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셨어요.

예수님을 보내시고 이게 바로 하나님이 바라는 사람이다! 라고 알려 주신 겁니다.

예수님과 한번 비교해 보라는 겁니다.

너희가 진짜 사람인가?

아니지 않느냐 에요.

 

이렇게 되면 진짜 사람인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은 전부 가짜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인자로 오심으로서 이 세상 인간은 가짜라고 심판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자칭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꼴값을 떨던 인간들은 전부가 가짜라는 것이 들통이 났어요.

인간이 아니고 바퀴벌레에요.

만물에 영장이 아니고 짐승이에요.

 

이걸 인간들이 받아들이겠어요.

턱도 없지요.

그래서 진짜 사람인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래야 가짜들이 진짜 행세하고 살 것 아닙니까?

 

이게 그대로 신앙 속에서도 나타나요.

진짜 예수 믿는 성도가 가짜 교인들에게 죽어요.

좌우지간 세상엔 하늘로서 오는 진짜는 다 죽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로 난 진짜들은 하나 같이 다 죽임을 당해요.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차 하나님은 짐승들과 함께 인간들을 몽땅 불태워 죽이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이 인자로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인 겁니다.

구약이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표적으로 보여 주셨어요.

그럼 구약에 인자가 어떤 분인지 살펴봅시다.

먼저 에스겔 선지자가 본 인자를 봅시다.

 

겔 2:3-5=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4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5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찌니라”

 

겔 3:10-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11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

 

에스겔 선지자를 인자라고 합니다.

에스겔을 인자라 함은 이스라엘은 가짜란 말이에요.

너희는 가짜라는 것을 바탕에 깔고서 에스겔을 인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에스겔이 죄가 없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에요.

다만 장차 인자가 하여야 할 역할을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에스겔이 바라본 이스라엘은 바알 신을 섬기고 있었어요.

성전에 우상이 가득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성전은 무너뜨리고 성신으로 새로운 성전을 짓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려고 에스겔을 인자로 보내신 것이에요.



그러니까 에스겔은 심판하는 선지자로의 인자인 것입니다. 

인자로서의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심판해 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에스겔 37장의 해골 골짜기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다 죽은 해골이라는 겁니다.

 

이 때 성신이 나타나서 죽은 해골을 다 살려 냅니다.

성신으로 살아난 해골들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어서 새 언약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성신이 새로운 성전을 짓습니다.

 

성신이 지은 성전을 일컬어 “여호와 삼마” 라고 합니다.

여호와 삼마란?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신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은 성신이 지은 성전에만 거하시는 겁니다.

(성전에 대하여서는 요한복음 25강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참고하세요.)

 

이는 장차 성령으로 오신 인자가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고 새 언약 안에서 성도들 안에 성전을 지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에스겔을 인자라고 하는 것은 기존에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선지자로서의 인자입니다.

이는 곧 육적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리곤 영적 이스라엘을 성신으로 만드는 분이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성령으로 지금 인자로 오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죽은 해골과 같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신으로 여호와 삼마 라는 성전을 지어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전을 지어요.

 

지금 예수님이 에스겔의 해골 골짜기에 서 계신 겁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해골인줄 몰라요.

그래서 소경이라는 겁니다.

지금도 자기 주제를 모르면 소경입니다.

 

이번엔 다니엘에게 나타난 인자를 살펴봅시다.

 

단 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의 본 인자는 하늘에서 오시는 분입니다.

세상을 끝장내는 인자에요.

 

다니엘 7장은 인류의 흥망성쇠를 말하고 있어요.

다니엘이 환상을 보았어요.

환상을 보니 하늘에서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부는 겁니다.

그런데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오는 겁니다.

 

첫째 놈은 사자 같고,

둘째 놈은 곰 같고,

셋째 놈은 표범과 같고,

넷째 놈은 머리에 열 뿔이 달린 아주 괴상한 놈이에요.

 

그런데 그 짐승은 장차 세상에 일어날 큰 나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큰 제국들이라는 거에요.

환상으로 계시를 받는 기점으로 해서 앞으로 세상에 일어날 제국들을 짐승으로 보여주셨어요.

 

다니엘서 2장에선 이런 제국을 금 신상으로 보여 주셨어요.



머리는 정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철이고 그 발은 철하고 진흙하고 섞어 있는 겁니다.

 

다니엘서 2장과 7장은 동일한 내용이에요.

그렇다면 머리는 정금과 같은 사자 같은 나라는 ‘바벨론’을 말하고,

가슴과 팔이 은인 곰 같은 나라는 ‘메데 바사’를 말하고,

배와 넓적다리 같은 놋은 표범 같은 나라는 ‘헬라’를 말하고,

종아리와 다리가 철과 흙인 머리에 열 뿔 달린 괴물 같은 나라는 ‘로마’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이 멸망 받을 짐승의 나라들이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혀요.

이 때 갑자기 하늘에서 뜨인 돌이 하나가 나타나서 신상의 발을 쳐서 박살을 내요.

완전히 망하게 한단 말입니다.

그리곤 그 뜨인 돌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요.



그 뜨인 돌을 일컬어 인자라고 합니다.

인자가 만든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인자라고 하셨으니 예수님이 구원한 백성은 영원히 천국에서 산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이 본 그대로 세상 역사 속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어요.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억압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셨어요.

로마는 세상에 속한 나라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세상에 속한 자들은 몽땅 저주하시고 하늘에 속한 성도들을 새로 만드신 겁니다.

예수님이 만든 나라가 바로 천국이에요.

이걸 에스겔 식으로 말하면 여호와 삼마가 되는 겁니다.

 

자! 지금 예수님이 인자로 오셨어요.

뜨인 돌로 오셨다고요.

뭘 하려고 오셨습니까?

육적 이스라엘을 끝장내기 위해서입니다.

로마를 끝장내고자 오셨어요.



초림 때는 영적으로 끝장을 내신 것입니다.

이제 재림 때는 와ㅑㄴ전히 끝장이 날 것입니다. 

세상 끝 날에 이르러 인자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인자가 구름타고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인자의 나라를 만드실 것입니다.



구름타고 온다는 것은 묵시가 역사를 침범한다는 뜻입니다.

하늘이 땅을 삼킨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영이 육을 집어 삼킨다는 말이에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육에 세상은 종말을 맞이한 겁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종말을 맞이했어요.

장차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역사 세계는 종말을 맞이할 겁니다.

베드로는 이를 두고 장차 이 세상은 불태워버린다고 했어요.

 

예수님은 이처럼 세상을 끝장내려고 오시는 분이에요.

역사에 찾아오면 역사가 끝장나고 사람에게 찾아 가면 사람이 끝장나요.

예수님이 사람을 찾아가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는 끝이 나요.

이걸 개인 종말이라고 해요.

 

베드로가 예수 만나기 전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를 가지고 살펴봅시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을 육이라고 하고 만난 후를 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을 역사적 존재라고 하고 예수님을 만난 후를 묵시적 존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고기 잡던 베드로를 찾아가니 베드로는 그 시간 부로 개인 베드로서의 삶은 끝났어요.

마치 고기를 물에서 끄집어내는 것과 같아요.

이제부터 베드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못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었어요.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살던 베드로는 역사에 속한 베드로에요.

 

그런 베드로에게 묵시에서 오신 예수님이 다가가서 불러냅니다.

이는 곧 묵시가 역사를 침범한 사건입니다.

그러니 역사 속에 있던 베드로는 종말을 맞이하고 만 겁니다.

이건 모든 성도들도 동일해요.

 

예수님에게 사로잡힌 베드로는 역사에 속한 베드로가 아니고 묵시에 속한 베드로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인자가 되셔서 베드로에게 덮친 겁니다.

아까 인자는 심판하는 분이라고 했잖아요.

속된 말로 인자가 베드로를 잡아먹은 겁니다.

 

다른 말로 묵시가 역사를 침범한 것입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듯이 묵시가 역사를 점령한 겁니다.

이제 베드로는 묵시적 존재인 겁니다.

꼬라지는 그래도 묵시에 속한 자에요.

 

침범이란? 역사가 끝났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역사적 의미는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라는 역사 속에 묵시가 마치 가루 서 말 속에 넣어진 적은 누룩처럼 활동하고 있어요.

 

누룩처럼 활동하는 복음을 눈으로는 알 수가 없어요.

마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지금도 성도들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몰라요.

성도 속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 턱이 없지요.

 

역사는 묵시도 역사로 이해하고자 해요.

다른 말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도 육으로 이해하고자 해요.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을 자꾸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확인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한 번 보여 봐!

복 받은 증거를 대 봐!

그러면 믿어 줄께!

 

이게 교인들에겐 하나님께 축복 받은 증거를 대 보라고 해요.

돈 많이 번 것을 하나님이 축복한 것이라고 만지고 싶은 겁니다.

병 고침 받고 기적을 맛본 것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 잘되고 사업 잘되고 가정에 행복하면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믿어요.

 

이건 마치 엘리야처럼 불 가운데 일하는 하나님,

폭풍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 중에 계세요.

이는 육이 감지 할 수 없도록 일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것과 반대 현상이 나타나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믿어요.

사람들은 영웅을 원하지 십자가에 힘없이 죽은 예수를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교인들도 교회가 부흥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회이고 부흥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없는 교회라고 하잖아요.

이게 모두가 역사에 속하여 있다는 증거에요.

육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기 때문이에요.

 

이런 사람들에겐 예수님의 십자가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만 보여요.

복음 전한다는 교회가 어째 그리 부흥이 안 되느냐! 라고 조롱합니다.

이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 안 된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이걸 지금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성도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즉 육에 영이 뒤집어 씌운 사람이란 말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 믿고 성령이 임함으로서 육적 존재가 영적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묵시(영)적 존재라고 말하는 겁니다.

 

묵시(영)적 존재는 역사에 지배받지 않아요.

다른 말로 육적으로 하는 율법적인 신앙에 저촉 받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율법적인 것으로 정죄당하지 않지요.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와 말할 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때가 온다고 하셨지요.

사마리아 여자는 율법적으로 예배하고자 했어요.

율법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조금 있으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때가 온다고 하셨어요.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면 성령이 오신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율법적 신앙은 폐하여진다는 말이에요.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던 시대는 끝났다는 말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필요가 없는 성전을 세워요.

그게 성도들 안에 세워지는 겁니다.

이걸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는 성령이 거하는 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의 전이 세워진 성도는 육적 성전이 필요가 없지요.

육적 성전이 필요 없다는 말은 곧 율법식 신앙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날을 지키고 달을 지키고 먹고 마시고 하는 것에 매이지 않아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라는 장소에 매일 필요도 없고 주일성수하여야 한다는 날에도 매이지 않고 율법이 금하는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겁니다.

 

이젠 뭘 하는 신앙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용서받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어요.

어디서든지 어떤 장소에든지 예수님 피 때문에 산다는 것을 감사하고 사는게 영적으로 하는 신앙생활이에요.

 

이런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자유함이 이젠 자기 육신대로 살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의 종으로 살게 해요.

그러니 자발적으로 교회에 모이기도 하고 일요일이나 수요일이나 금요일이나 가리지 않고 성경 공부하는 날이면 모이게 되고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게 만들어요.

 

성령이 오시면 율법에서 해방되어요.

그러니 율법 식으로 날과 달과 절기와 장소에 매일 필요가 없는 겁니다.

건물이라는 성전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젠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게 되어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신앙생활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이젠 하늘에 사람이에요.

그러니 세상방식으로 예수 믿으면 안 되어요.

 

성도를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지요.

새로운 피조물이란? 영적 존재란 말입니다.

성령에 다스림을 받는 존재란 말입니다.

 

영적 존재는 영적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영적 신앙생활이란 육적 신앙의 반대말이지요.

그럼 육적 신앙이 뭔지 알면 됩니다.

 

육적 신앙은 율법신앙이에요.

율법 신앙은 내가 이루고 지키는 신앙이에요.

모든 하나님의 명령을 내가 수행하여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 신앙생활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영적 신앙생활은 육에 반대라고 했으니 내가 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 되겠지요.

맞아요.

영적 신앙생활은 내가 하는 것이 없고 예수님이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대신 해 주신 것으로 살아요.

이걸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믿음으로 산다고 해요.

성령에 감동으로 산다고 해요.

 

성도는 예수 안에서 사는 자이잖아요.

그럼 성도 안엔 예수님이 계시겠지요.

자기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안다면 누구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겠지요.

예수님이 그 때 그때 감동하실 것이잖아요.

 

야고보서에선 예수님이 감동케 하셔서 토해내는 행함을 믿음과 함께 하는 행함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때로는 감동케 해서 헌금도 하게하고, 봉사도 하게하고, 형제도 사랑하게 하고, 사업이 망했는데도 기뻐지게 하고, 자식이 죽었는데도 감사하게 하고, 교인들이 떠나가는데도 무덤덤하게 하고,,,,

 

좌우지간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을 툭툭 벌리세요.

인간적으로 보면 방방 뛸 일인데도 괜찮아유! 모든 게 주님의 은혜인데유! 한단 말이에요.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덤덤해요.

항상 그렇단 말이 아니고 주의 은혜가 간섭하면 그런 일들이 예기치 않게 툭툭 터져 나온단 말입니다.

 

믿음을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움직인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어떤 반응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이런 반응을 야고보서에선 믿음과 행함이 함께 일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없으면 그 사람 믿음은 가짜에요.

죽은 믿음이고 귀신의 믿음이에요.

그런데 마귀가 이런 행함을 모방하게 해요.

마귀는 모방의 천재에요.

 

귀신이 모방해서 행하게 하는 믿음은 자기가 하는 것이에요.

자기 힘으로 자기 기분 따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귀신이 하는 행함엔 반드시 자기 자랑이 남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일을 한 주체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육적 예배인 겁니다.

그러니 육적 예배(행함)엔 반드시 자기 흔적을 남기게 되는 겁니다.

사울 왕 같이 자기 전적비를 세워요.

 

그러니 모든 성경의 말씀을 행하라고 가르치면 안 되어요.

왜냐하면! 말씀이 스스로 살아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에겐 믿음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믿음 있는 성도에겐 믿음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도록 합니다.

그 속에 예수님의 영이 계신 성도는 외부의 요구에 상관없이 자기 안에 성령의 감동이 일어나면 하게 되어 있어요.

 

영적 예배는 인간이 불가능해요.

못 드려요.

오직 성령만이 드릴수가 있어요.

그런데 성령을 인간이 관리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에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언제 가능하냐 하면 성령이 우발적으로 툭 툭 간섭을 하면 가능해요.

성령이 간섭하면 인간은 불가능성을 깨닫게 되어요.

야! 내가 이래서 죄인이고!

그러니 하나님은 나하고 상대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피만 받으시는구나! 를 알게 되어요.

결국 피 밖에 없구나!

그 피만이 유일한 가능성이구나! 를 알게 된단 말입니다.

 

이상하지요.

성령이 없는 사람은 가능성으로 성경을 보고 성령이 임한 성도는 불가능성으로 성경을 봐요.

그러니 난 성경말씀대로 살 수 있어! 라고 나오는 사람은 육적신자라고 보면 틀림없어요.

성령이 없으니 자기가 어떤 주제인지 모르고 말씀대로 살겠다고 깨춤 추고 날 뛰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여기에 속하였어요.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를 모르니 말씀을 지켜서 거룩해 지겠다고 날 뛰는 겁니다.

 

죄인이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을 사랑해요.

그것도 부모자식 다 버리고 전토까지 잃어가면서 거기다가 자기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이건 안 돼요.

불가능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따라오는 무리들을 향해 야! 제발 돌아가거라! 아서라! 말아라! 했다고요.

 

설교를 들을 때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면 그건 아니다! 라고 들으세요.

인간은 안 됩니다!

하나님이 육신은 죄 아래 가두었고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어요.

그래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린 안 되고 오직 예수님 피 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여야 바른 설교인 겁니다.

 

예수님 이외는 대안이 없습니다! 라고 해 주어야 한다구요.

난 죄인이고 예수님의 대속하심이 아니면 용서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어야 해요.

설교를 들으면서 인간은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존재란 것을 알고 구원하심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만들어야 해요.

 

아까 예수님이 너희는 머리털 하나도 희게나 검게 할 수 없는 자라고! 그랬다고 했잖아요.

이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 주시는 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란 뜻이에요.

그러니 제발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나대지 마세요.

 

넌 죄인이고 넌 죽어야 한다고 말씀을 주셨는데 그 말씀으로 난 잘할 수 있어 그러면 안 되지요.

넌 저주 아래 갇힌 죄인이라는 것을 알라고 말씀을 사약으로 주었는데!

그걸 보약으로 알고 먹어서 점점 더 의인이 되어서 살려고 하면 우짭니까?

 

제발 마르다가 되지 말고 마리아가 되세요.

예수님은 은혜를 주시려고 왔는데 대접하겠다고 받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를 어쩝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마리아는 좋은 것을 택하였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대접하고자 분주하여 예수님의 말씀은 한 마디도 듣지 못한 마리아는 육으로 예수를 영접한 율법에 속한 교인이고 예수님 면전에 앉아서 주는 것 쪽쪽 받아먹은 마리아는 영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을 받은 성도에요.

 

말씀 앞에 종용히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의 처분만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하라고요.

이걸 알아야 주어지는 모든 것이 은혜의 산물이 되는 겁니다.

잘살고 못사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와 닿아요.

내가 이렇게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된다고요.

 

성경의 모든 명령들은 인간의 소속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활동을 해요.

육에 속한 사람은 육으로 받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으로 받아요.

육에 속한 사람은 자기 행함으로 받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예수 믿음으로 받아요.

글이 길어지니 여기까지만 말할게요.

여기까지만 말해도 성령을 받은 성도라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묵시란 다른 말로 영이에요.

예수님이 영이세요.

그런 예수님이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은 육은 끝났다는 말입니다.

이젠 육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대는 종말을 맞이하였다는 뜻입니다.

 

육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율법으로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율법은 역사에 속한 것이에요.

(히브리서 7장 강해가 지금 계속하여서 묵시와 역사를 언급하고 있으니 참고하세요.)

 

그래서 율법으로는 온전케 할 수가 없어요.

율법은 무익한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으로 드려지는 일체의 제사를 폐하셨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율법 신앙은 종말인 겁니다.

심판 당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선 율법신앙은 소경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인자를 안다고 한다면 내가 지금 하는 일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인자를 안다고 하면서도 나를 모른다는 것은 너희가 소경이라는 반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영적 소경입니다” 라고 판단을 내려 주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다니엘이 예언한 인자를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가 만들어낸 인자 관을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려왔던 것입니다.

인자란? 다른 말로 메시야입니다.  

그러니 다니엘이 말씀하는 인자(메시야)는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분이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구원시키러 오시는 분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완전히 헛 다리 짚은 겁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인자는 자신들을 도와주는 분이지 절대로 심판하는 분이 아니에요.

설령 심판을 해도 율법을 모르는 개 같은 이방인들을 심판하지 율법을 잘 지키는 이스라엘은 심판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편을 들어주기는커녕 유대인들을 정죄하고 악하다고 하니 유대인들 입장에선 예수를 인자로 받아 들일수가 없지요.

결국 유대인들의 잘못된 인자관이 하나님이 보낸 예수님을 배척하게 된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지금도 잘못된 예수 관에 빠져 있으면 유대인들과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 시대 많은 교회와 교인들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복을 받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어떤 구원을 주시고, 어떤 복을 주시는 것인가에 대하여는 무지해요.

구약에 복과 신약에 복이 달라요.

구약은 땅에 복이고 신약은 하늘에 복이에요.

그러니 자연히 자기들이 알고 있는 구원과 복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바라는 구원은 유대인들과 같은 구원을 바라고 있어요.

유대인들이 바라는 구원은 로마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복이란? 부국 강성하여 열국 중에서 으뜸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라던 구원과 복을 이 시대적으로 말한다면 어려운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세상에서 성공하여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교회로 적용하면 교회 부흥시켜 주는 것이고,

개인에게 적용하면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주는 것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구원과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도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만약 이런 복을 주시고자 하셨다면 12제자들을 다 세상에 고관대작을 만들어 주었어야 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12 제자들을 전부 비참하게 죽임 당하도록 하셨어요.

그 현장으로 밀어 넣었어요.

 

예수님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셨어요.

죄와 사망의 문제는 인간들이 해결 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했지요.

이걸 놓치지 마세요.

죄에요.

 

죄는 항상 인간의 육신을 볼모로 활동한다는 것도 잊지 마세요.

육신은 항상 좋은 것을 원해요.

육신은 죽어서 가는 천국을 원치 않아요.

지금 이 땅에 천국을 달라고 해요.

이게 유대인들의 구원관이에요.

이건 죄가 주는 구원관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것이 죄라고 알려 주신 겁니다.

예수를 이용해서 잘 살고자 하는 탐욕이 죄라는 것을 고발당하여야 해요.

끊임없이 솟아나는 탐욕이 죄라는 것을 알고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되어야 합니다.

 

알다시피 이 세상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곳입니다.

장차 불에 타 없어질 곳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어요.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자 해요.

 

그러니 교회들이 복음을 핑계 삼아 아름다운 교회를 후손에게 물려주자고 수천억씩 들여서 교회를 짓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오셨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랑하는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 버린다고 했어요.

유대인들은 성전이 불 탈 것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가 없어요.

아니 믿지 않았어요.

어찌 하나님의 성전이 불탄단 말입니까?

그런데 AD 70년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덧놓이지 않고 다 불타버렸어요.

이건 유대인(인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가짜 하나님을 한국교회가 그대로 가르치고 있어요.

예수님은 성전은 불탄다고 짓지 말라고 하는데 한국교회에선 영원히 남게 만들고자 하고 있어요.

이게 모두가 예수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에요.

그러니 망한 유대인들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말에 속지 마세요.

그 예수가 진정으로 인자 되신 예수인가를 아셔야 해요.

바울은 일찍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 이 있다고 속지 말라고 했어요.

 

고후 11:3-4=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미리 말하였어요.

어디에서 일어나나요.

교회 안에서이지요.

교인들이 다른 예수를 원하기 때문에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들이 창궐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들이 모두가 천사 같다는 것이 문제에요.

 

고후 11:13-15=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보세요.

마귀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성도들을 미혹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교인들이 이러한 거짓 목사들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왜? 좋아합니까?

세상 복을 말하기 때문이에요.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말해주니 좋아하는 것입니다.

 

고후 11:18-20=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결국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유대인들처럼 자기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예수를 믿었던 것을 볼 수가 있지요.

고린도교회 안에 이러한 성도들이 있어서 바울이 경고하였다면 지금도 교회 안에는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같은 신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에 사로잡힌 자는 육체를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육체를 자랑한다는 것은 육적 복을 주겠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살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마귀가 광야에서 주리시던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주겠다는 것들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라던 인자와 지금 이 시대 다른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바라는 인자는 성경이 말하는 인자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 시대 많은 신자들이 믿는 인자는 성경이 말하는 “적그리스도” 입니다.

적그리스도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하는 마귀의 종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귀는 항상 인간의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경과 말씀하시는 인자는 기존의 세력으로부터 쫓겨나게 하는 분이십니다.

유대교에서 입신양명하게 해 주시지 않고 쫓겨나게 하세요.

세상에서 정착하여 잘살게 하는 분이 아니고 세상에서 뽑아내는 분이세요.

세상 것이 쌓이지 않도록 자꾸만 흔들어요.

그러니 육적으로는 죽을 맛인 겁니다.

 

누가 이런 예수를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도 부자 청년과 같이 영생을 얻으러 왔다가 예수가 하는 말에 기겁을 하고 믿음을 져버리고 떠나가는 자들이 부지기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이런 역설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이 원칙은 유대인들에게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우리들에게 똑같이 적용하고 계십니다.

 

이 방법은 시대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식으로 성도를 구원(심판) 하시고 계십니다.

인간의 소망을 깡그리 무너뜨리는 이런 예수를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 정신으로 믿을 수 없으니 성도에게는 성령을 보내 주셔서 믿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율법을 잘 지켰으니 착하다고 하지 않고 너희는 죄인이라고 다가오신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착한 자인 줄 알았는데 예수가 와서 악한 자라고 하니 놀란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다가오실 때에는 우리가 착하게 살았다고 하여서 복을 들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죽어야 할 죄인이 라고 다가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악하다고 정죄하는 것은 그들의 삶이 악해서가 아니고 인자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악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몰라서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맺으신 새 언약을 모르는 자는 악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옛 언약인 율법을 지켜서 의를 만들려고 한 것이 소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화로나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고백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 딴에는 의로운 자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거룩 앞에 서 보니 자기는 망하여야 할 죄인임을 알게 되고 기겁을 하는 것입니다.

 

옳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 본 사람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어 어이구 나는 망했구나! 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누구보다도 자신은 성경에 대로 살았기 때문에 의로운 자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보니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살았던 소경이었음을 깨달았어요.

자기가 알고 있던 인자관은 완전히 엉터리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신관은 신은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분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도 당연히 인간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성경을 주셔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깨닫도록 하십니다.

 

예전에 성경을 모를 때는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잘 살고자 하는 것이 악이라는 것을 이제 성경을 알고 보니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이 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말 뿐이지만!

 

이렇게 자기 안에 죄를 발견하는 것을 일컬어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죄인 됨을 날마다 고발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입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날마다 자기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증거는 예수를 믿으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 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예수를 믿으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살이가 어려워진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예수 믿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건 전혀 제자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에요.

제자들이 예수를 좇는 것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이지 세상에서 고난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천국에서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싸우기도 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가 정권만 잡으면 팔자 고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 실망할 수밖에 없지요.

급기야 예수가 십자가에 힘없이 죽어버리자 다 도망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나서 다시 찾아가서 불러냅니다.

새벽 미명에 고기 잡고 있는 베드로(제자들)에게 찾아가서 너희들 여기서 뭐하는데! 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랐어요.

유령인줄 알았어요.

아니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난단 말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난 유령이 아니라고 확인시켜 주시려고 지금 잡은 고기를 숯불에 구워서 조반을 같이 먹습니다.

야! 이 고기 참 맛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베드로는 기절할 지경입니다.

 

만감이 교차합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한 전력이 있잖아요.

곁에 있는 제자들도 십자가에 죽을 때 도망쳤으니 여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기분 나빠 하는 기색이 없이 고기를 구워서 먹으라고 합니다.

 

그리곤 가자고 합니다.

이젠 물고기 그만 잡고 사람 잡으러 가라고 합니다.

아니 뭐 이런 분이 다 있습니까?

맞아요.

이런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에게 찜 당하면 꼼짝 못해요.

지구 끝까지 찾아가세요.

꼼짝없이 인생이 차압당해요.

이걸 성경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집요함입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진드기 같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옭아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졌기 때문에 성도의 구원이 실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선 믿기 싫어도 믿어야 하는 입장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일컬어 거부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합니다.

이걸 전 거룩한 팔자라고 합니다.

이 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가서 자기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다시 잡혀온 제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버린 몸으로 살아갔어요.

제자들은 예수를 떠나고자 하여도 떠 날수가 없는 팔자들입니다.

 

우리는 눈을 뜨게 된 소경이 예수님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것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게 됨을 살펴보았습니다.

눈을 뜬 소경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예수님에게 붙잡혀서 눈을 뜨게 되었어요.

 

마치 제자들이 자신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예수님에게 붙잡힌 것과 같아요.

지금 소경이었던 자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를 믿는 다는 것 하나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여전히 이 방식을 성도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은혜를 입게 되면 괜히 미움을 받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세상과 예수는 원수지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세상을 악하다고 말하고 세상은 예수를 악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포기할 수 없는 각자의 본성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로 만나면 서로가 틀리다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서 증거하기를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억지로 안 되는 것을 말할 때 속된 말로 귀신에 씌어서 그렇다고들 합니다.

맞습니다.

성도들은 예수에게 붙잡혀서 예수를 믿으면 미움 받고 욕먹는 줄 알면서도 그 믿음을 포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건 내 힘이 아니라 나보다 강한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를 성경은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주인이 되셔서 예수를 믿도록 하시기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당하여도 중간에 포기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라도 빨리 도망하고 싶지만 주인이 시퍼렇게 살아서 지켜보고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어서 복 좀 받아보려고 하는 자들은 중간에 모두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걸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해 주셨어요.

 

마 13:20-23절 “돌밭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길가 밭이나, 가시 밭이나, 돌짝 밭은 스스로 예수를 믿겠다고 나선 자들을 말해요.

이들의 특징은 자기가 믿음을 관리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다가 갖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모두 중간에 포기해 버립니다.

 

왜? 중간에 포기를 할까요?

예수를 믿어서 행복해 질줄 알았는데 오히려 고난을 당하기 때문에 포기를 하는 겁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나게 때문에 중간에 떠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끝까지 결실을 맺는 좋은 밭이 있어요.

밭이 좋아서가 아니라 농부가 관리하기 때문에 좋은 밭인 겁니다.

 

좋은 밭이란? 농부가 관리해 주는 밭을 말해요.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도록 이끌어 주신 자들이에요.

그러니 제자들처럼 도망가도 끝까지 찾아가서 데리고 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믿게 되어 있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엄청난 복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실상에선 복으로 보이지 않고 도리어 저주처럼 보인다는 것이 문제에요.

 

하나님의 복은 역설적이에요.

그러므로 성도들은 땅에서 천국 같은 환경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같은 환경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박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돌을 맞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12제자들이었고, 바울이었고, 스데반 집사였어요.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전하는 성도들입니다.

다 예수 때문에 만들어진 상황입니다.

 

여러분은 인자를 누구라 생각하십니까?

무엇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인자 되신 예수님이 어떻게 간섭하고 계신가요?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자가 간섭하시고 계신단 증거입니다.

그러니 우리 뜻대로 안 살아진다고 낙망하지 말고 도리어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여기서도 예수 저기서도 예수라고 하는데 진정 인자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성도들은 희귀한 때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눈과 귀를 여셔서 인자 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비록 인자로 인하여 세상에서 뽑힘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축복임을 아는 깨닫는 마음과 눈을 열어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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