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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64강. 목자와 양 (요 10:1-10)

by coroa 2021. 9. 2.

 

 

64강. 목자와 양 (요 10:1-10)

-.정낙원 목사

 

 

 

지난시간 예수님은 인자로서 심판하시는 분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심판이란? 갈라내는 것입니다.

기존에 살고 있던 곳에서 빼내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예수님도 율법 아래서 났습니다.

예수님이 율법 아래서 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쉽게 말합니다.

자기 백성들이 지금 율법 안에 가두어져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 아래서 나서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이를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구원이란? 전에 소속되어 있던 곳에선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종말이란? 그 세계에서 심판을 당하여 죽임 당한 것입니다.

이걸 물고기 집는 것으로 비유했어요.

물고기가 물에서 건져지는 것은 죽음인데 예수님은 이를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알다시피 물고기는 물에서 나오는 순간 죽어버립니다.

 

고기가 어부의 손에 잡힌다는 것은 죽는 겁니다.

사람에게 양식이 되어서 먹힘 당하는 거예요.

어부가 고기를 잡는 것은 어항에 넣어서 키우기 위함이 아니고 회를 쳐서 먹기 위해서예요.

그러니 어부가 고기를 잡는 것은 고기를 위해서 잡는 것이 아니고 어부를 위해서 잡아요.

 

구원이 뭐냐?

예수님에게 먹힘 당하는 겁니다.

먹힘 당한다는 것은 예수 안으로 귀속된다는 뜻입니다.

이건 자아(自我)가 해체당하는 겁니다.

“난 없습니다” 라고 하여야 구원이 된 사람입니다.

 

죄는 “나 있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죄인은 항상 나를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사고의 중심에 나를 두고 있어요.

 

나를 위한 신!

나를 위한 종교!

나를 위한 직장!

나를 위한 조직!

나를 위한 국가!

나를 위한 교회뿐이에요.

 

이런 자아 중심의 사람을 죽이고 예수 중심의 인간으로 만드는게 구원입니다.

 이걸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에요. 

이렇게 되면 신앙의 싸움이 자기 부인으로 늘 나타나야겠지요.

성령의 소욕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고 육신의 소욕은 자기를 시인하라고 합니다.

마귀는 넌 참으로 괜찮은 인간이다! 라고 하고, 성령은 넌 죽은 자! 라고 합니다.

 

그럼 죄는 어떤 식으로 역사를 하겠습니까?

자기를 챙기는 쪽으로 역사 하겠지요.

자기를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라고 하겠지요.

 

그래요.

죄는 항상 자아 확장을 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도 나를 위한 예수님이 되고 내 꼬붕이 되고 말아요.

결국 나를 위하여 예수님을 이용하고 잡아먹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으면 내가 예수님에게 잡아 먹혀요.

내가 어부에게 잡힌 물고기처럼 예수님의 양식이 되어 버려요.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우리는 예수님을 먹고 살고 예수님은 우리를 먹어요.

 

이를 수가성 여인을 통해서 잘 말씀해 주셨어요.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을 만나서 이야기 할 때 제자들이 동네에 가서 빵을 사 옵니다.

돌아와서 예수님께 빵을 잡수시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미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누가 점심을 대접했는가! 의아해 했어요.

이에 예수님이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수가성 여인을 먹은 겁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을 구원한 것이 곧 양식이었던 겁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을 어디서 구원했나요?

율법이에요.

 

여인이 예수님에게 남쪽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릴까요?

아니면 북쪽 그리심산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까요? 라고 물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지요.

이건 율법적 예배는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이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때가 온다고 합니다.

 

이제 메시야가 왔으니 곧 성령이 와서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 진리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에요.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제 짐승의 피를 드리는 시대는 지났다는 겁니다.

 

짐승의 피는 옛 언약식 예배이고 새 언약식 예배는 예수님의 피로 드리는 것이란 말입니다.

날과 달과 장소를 고집하는 율법신앙은 폐하여 졌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오시면 율법에서 예수 안으로 해방시켜요.

이를 구원이라고 합니다.

 

비유적으로 물을 율법이라고 합시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자기 백성들이 율법이라는 물속에서 놀고 있었어요.

율법이라는 물은 사람을 죽이는 물이에요.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반드시 다 죽게 돼 있어요.

그럼에도 자기들이 죽음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이라는 물 속에서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율법이라는 죽음의 항아리에서 건져 내어서 은혜라는 생명 항아리에 옮겨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옮겨져 격리되는 것을 일컬어 심판이라 하고, 구원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인데 성경은 이걸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해요.

율법 쪽에서 보면 죽었고 예수님 쪽에서 보면 살았어요.

서로가 서로를 보면 죽은 것으로 보여요.

율법이라는 동네에 사는 유대인들은 소경 보고 넌 망했다고 하는데,

예수 안에 있는 소경은 유대인들보고 너희가 죽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은 분명히 율법 아래 태어났어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 까지만 해도 율법 아래서 살았어요.

유대인들과 형님 동생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와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눈을 뜨게 했다는 것은 다른 세상으로 불러냈다는 말입니다.

어둠이라는 동네에서 빛의 동네로 불러낸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공격을 합니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하는 예수는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소경이었던 자에게 예수와 결별하라고 합니다.

예수의 제자로 살면 이단이니 모세의 제자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러자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이 싫다고 합니다.

난 지금까지 모세의 제자로 소경으로 살다가 이제 예수를 통해서 눈을 떴는데,

내가 왜? 다시 모세의 제자가 되어 소경으로 살아야 하느냐? 라고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눈을 뜬 자에게 그럽니다.

야! 이 친구야!

예수는 이단이야!

 

모세의 정통신앙을 부정하는 이단이란 말이야!

우리 유대교에서 이단이라고 정죄 받았단 말이야!

그러니 저 이단 예수를 따라다니지 말고 이리와!

그럽니다.

 

그러자 눈을 뜬 사람이 싫어!

너희들이 이단이야!

너희들이야말로 예수를 심판하는 인자로 몰라보니 이단이고 소경이라고 합니다.

 

이런 광경을 보고 계시던 예수님이 그래 네 말이 맞다.

저 놈들이 소경이다.

저 놈들은 자기들이 눈을 뜬 자라고 하는데 내가 인자인 걸 모르니 소경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자를 죄인이라고 하고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를 의인이라고 심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이게 지금까지 요한복음 9장 내용입니다.

9장의 결론이 뭐냐 하면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소경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는 자를 빼내시는 구원을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10장이 이어집니다.

10장은 9장의 연장선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10장은 너무도 잘 아는 목자와 양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자기 양들을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핵심이 기존의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자기 양을 찾아내는 겁니다.

뭔가 섬뜩한 생각이 들지요.

 

우리 생각에는 “양 우리” 안에 있는 양은 다 구원 받은 목자의 양이라고 생각하는데 본 비유에서는 아니라고 합니다.

양의 우리 안에 구원 받은 자기 양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상식으로 생각하면 안 되어요.

언뜻 보면 상식적인 것 같은데 상식으로 해석하면 다 틀려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인간의 상식은 죄로 인하여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비유가 어려운 겁니다.

 

오늘 본문이 쉬운 것 같지만 실상은 굉장히 어려워요.

왜냐하면! 우리의 선입견을 다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선입견을 깨트리면서 일을 하시기 때문이에요.

 

이걸 이해하려면 세 가지를 먼저 이해하여야 합니다.

 

첫째로는, “양의 우리”이고,

둘째로는,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월담하는 강도와 절도”가 있고,

셋째로는, “예수님을 양의 문”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께서 지금 이 목자와 양의 비유를 9장의 연장선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면서부터 율법 아래서 소경으로 살던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하는 말씀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비유 자체가 소경처럼 율법이라는 곳에서 빼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겁니다.

이를 바탕으로 살펴보아야 비유의 핵심을 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럼 먼저 “양의 우리” 부터 살펴봅시다.

 

이를 알려면 먼저 이스라엘이 양치는 모습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목축업을 하면서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가 양을 기릅니다.

 

알다시피 양은 꼴을 먹고 삽니다.

꼴은 집에 있지 않고 산과 들에 있어요.

그래서 목자들이 철따라 꼴을 찾아서 집을 떠나 돌아다니면서 몇 개월씩 양을 방목을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각각의 양떼를 이끌고 먼 길을 떠나서 야영을 하게 되어요.

길게는 봄에 집을 나서면 가을에나 돌아옵니다.

그러니 일 년 중 절반 이상 집 떠나 생활하게 됩니다.

 

목자들은 각자의 양들을 낮에는 넓은 들판에서 방목을 하다가 밤이 되면 사방에 흩어져 있는 양들을 한 우리 속에 모읍니다.

들에 있는 우리는 돌담을 쌓아서 양이 담을 타 넘고 도망하지 못하게 가시나무와 같은 것으로 돌담 위에 울타리를 칩니다.

이는 양을 막는 것도 있지만 이리가 들어오는 것도 막기 위함입니다.

 

들판에 있는 양의 우리는 공동 우리에요.

온 동네 모든 양들이 다 들어가 있어요.

낮에는 각각의 양들을 목자들이 몰고 나가서 각자 꼴을 먹이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와서 공동 우리 속에 가둡니다.

 

그리곤 밤에 이리가 와서 양을 헤치지 못하도록 목자들끼리 순번을 정하여서 문지기로 세워서 지키게 하지요.

아침이 되면 목자가 문으로 들어가 자기 양들을 불러내면 자기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자기 양들만 목자를 따라 나서게 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이 주는 의미를 소경의 구원과 연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스라엘엔 두 가지 “양의 우리” 가 있어요.

하나는 집에 있고, 하나는 들판에 있습니다.

들판에 있는 우리는 임시적인 우리에요.

조금 전에 말한 겨울이 오기 전까지 방목을 하면서 사용하는 우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비유하는 우리는 들판에 있는 임시적인 우리를 말합니다.

 

들판에 있는 임시 우리에는 집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온 동네 양들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 공동 우리 속에는 여러 집에 양들이 같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밤에는 니 것 내 것 구분하지 않아요.

그러나 낮이 되면 목자들이 자기 양을 공동우리에서 빼내서 어디론가 데리고 갑니다.

목자가 봐둔 초장으로 데리고 가든지 아니면 쉴만한 물가로 가든지 그도 아니면 집으로 데리고 가든지 해요.

 

오늘 본문의 비유에 핵심은 목자가 섞여 있는 우리에서 자기 양을 찾아 간다는 겁니다.

공동 우리 속에 있는 자기 양들을 빼내서 찾아가는 이야기에요.

구원론 적으로 말하면 공동 우리 속에 있던 것을 자기 우리에 두려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구원으로 말해 봅시다.

 

예수님이 목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양들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자기 양들이 임시 우리에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양들을 데리고 갈 우리는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영원한 우리에요.

 

이걸 이 세상과 천국으로 표현해 봅시다.

이 세상 교회는 임시 우리에요.

예수님의 목자가 되셔서 세상교회에 있는 자기 양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겁니다.

 

자 이걸 다시 이스라엘로 축소해서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목자로 파송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지요.

예수님이 12제자들을 어디로 파송하느냐 하면 이스라엘로 파송하셨어요.

이스라엘 속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보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임시 우리가 되겠지요.

12제자들이 찾아야 할 양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임시 우리 안에 있어요.

그 속에서 예수님의 양들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속에 또 이스라엘이 있는 셈이지요.

맞아요.

양들 속에 또 다른 양들이 있어요.

 

바울은 이를 “표면적 유대인” 과 “이면적 유대인” 이라고 했어요.

 

표면적 유대인은 유대민족이라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양이에요.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은 양이에요.

이들은 율법 안에 있어요.

 

그러나 이면적 유대인은 이스라엘이라는 공동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의 양입니다.

이면적 유대인은 혈통으로 난 자가 아니고 언약으로 난 자들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두 계통이 있어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있는데 이는 육과 영이에요.

이스마엘은 육으로 낳은 자이고 이삭은 약속으로 낳은 자에요.

 

이런 구도는 이스라엘 내내 있어 왔어요.

예수님 당시에도 있어요.

지금 교회 안에도 있어요.

 

겉보기엔 다 이스라엘 족속(신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혈통(육)적 이스라엘과 언약(영)적 이스라엘로 달라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언약적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난 자들을 찾아내기 위함이에요.

 

이걸 유대인과 소경으로 아주 쉽게 설명할게요.

예수님께서 소경을 어디서 빼냈는가요?

율법주의이지요.

 

그럼 율법주의는 들판에 있는 임시 우리가 되겠지요.

모든 이스라엘은 율법이라는 우리 속에서 살아요.

모든 양들이 다 함께 율법 아래 섞여 있어요.

이제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는 자기 양들을 찾아내십니다.

 

소경은 나면서부터 율법이라는 우리 속에서 살았어요.

예수라는 참 목자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소경이 살고 있는 율법이라는 우리는 어둠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율법이라는 우리 속에 들어가서 자기 양을 불려냅니다.

소경이었던 자를 눈을 뜨게 해 주었어요.

이는 어둠이라는 우리에서 불러내 빛이라는 우리 속으로 불러들인 것과 같아요.

율법 안은 어둠이고 예수 안은 빛이에요.

 

아까 소경과 유대인이 누구의 제자냐 라고 다투었다고 하였지요.

모세의 제자냐! 예수의 제자냐!

모세의 제자는 율법이라는 우리 속에서 살고, 예수님의 제자는 은혜라는 우리 속에 살아요.

모세는 어둠이고, 예수님은 빛이에요.

 

“은혜”라는 우리를 다른 말로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예수 안” 또는 “은혜 안” 또 다른 말로 “성령 안”이라고도 하는 우리에 있어요.

다 같은 뜻이니 헷갈리지 말고 잘 이해하세요.

 

예수님께서 16절을 보면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있다고 하지요.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 ‘우리’란? 유대인들을 말해요.

그럼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란? 이방인 중에서 구원 얻을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유대인 중에서도 자기 양을 찾아내고 이방인 중에서도 자기 양을 찾아내서 예수 안에서 하나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들도 인도하여서 지금 율법이라는 ‘우리’에서 끄집어 낸 양들과 함께 은혜라는 한 ‘우리’에 두어서 한 무리가 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양들이 있는 ‘우리’는 예수님의 ‘우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중요하니 다시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우리’는 따로 있어요.

지금 양들이 있는 ‘우리’는 잠시 맡겨 둔 ‘우리’에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보호받던 ‘우리’에요.

 

이제 예수님이 왔으니 그 ‘우리’ 안에 있으면 안 되어요.

그래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이러면 현재 양들이 있는 ‘우리’가 어딘 줄 알겠지요.

율법입니다.

 

소경이 어디에 있었나요?

율법이잖아요.

예수님이 율법이라는 ‘우리’ 안에 있는 소경을 은혜라는 ‘우리’ 안으로 불러낸 것입니다.

 

이걸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은 유업을 이을 아들을 잠시 초등학문인 율법 아래 맡겨 두었다가 때가 차매 예수님을 율법 아래 나게 하셔서 그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끄집어냈다고 했어요.

 

갈 4:1-5=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위에 말씀을 지금 식으로 설명할게요.

어떤 부잣집에 아들이 있어요.

큰 재벌 집 아들이에요.

그런데 회장님이 회사를 이어받을 아들을 회사에 말단 직원으로 채용하여서 근무하게 하셨어요.

장차 오너가 될 사람이 지금은 종업원에게 잔소리 듣고 시달리고 있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성도를 어렸을 동안에 종처럼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잠시 두었다고 합니다.

분명히 아들임에도 잠시 종처럼 살고 있는 겁니다.

아들을 맡아 있는 후견인과 청지기를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율법이에요.

 

하나님의 아들도 처음엔 모두가 율법 아래서 태어나요.

율법이 잠시 아들을 맡아서 기르는 겁니다.

그러니 아들은 잠시 율법 아래서 죽음에 종노릇 하며 살아요.

 

이건 마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한 것과 같아요.

그러다가 때가 차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빼내게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모세를 보내서 빼내게 하셨고 신약의 성도는 예수님을 보내서 빼내게 하셨어요.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성도 역시 하나님이 정한 시기까지 종살이 하고 있었던 겁니다.

종살이 하던 것을 빼냈어요.

어디로 빼냈는가요?

법이 지배하는 ‘우리’에서 은혜와 사랑이 지배하는 ‘우리’로 빼냈어요.

 

지금 양들이 있는 ‘우리’는 잠시 보관하는 ‘우리’에요.

갈라디아서의 말대로라면 율법이라는 청지기 아래 잠시 보관한 겁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마련한 ‘우리’로 옮기는 겁니다.

 

“우리”를 “처소”라고 합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처소’라고 했어요.

그럼 예수님이 마련한 처소가 있겠지요.

그게 어디인가요.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에서 처소(處所)를 예비하러 간다고 합니다.

처소가 예비 되면 다시 와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면 성령을 보혜사로 보내 주신다고 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준비하러 간다는 처소는 성령님입니다.

처소(處所)를 다른 말로 “양의 우리”에요.

성령은 양의 우리와 같이 예수님과 성도가 함께 사는 집이에요.

그래서 '거하는 처소'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를 일컬어 성령이 거하는 전(殿)이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요.

성령이 오시면 성도와 예수님은 한 집(우리)에서 살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성도를 보호하려고 마련한 우리에요.

 

성령이 오시면 성도를 어디서 끄집어내는가요?

로마서에서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합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보세요.

두 법이 있지요.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이 있지요.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하지요.

 

죄와 사망의 법은 율법이에요.

그러니 율법이라는 우리에서 예수 안이라는 우리로 빼냈는데 이 예수 안이 곧 성령이에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어디 안에 있어요?

예수 안에 있지요.

 

그러니 예수 안이나 성령 안이나 동일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처소를 성령이라고 하셨으니 우리를 성령이라고 합시다.

그럼 “율법이라는 우리”의 상대적 의미로 “성령의 우리” 가 되겠지요.

 

이걸 지금 식으로 말합니다.

“우리”를 “교회”라고 합시다.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양들이 있겠지요.

율법 아래 있는 사람과 예수 아래 있는 성도가 있겠지요.

예수 아래를 은혜 아래, 또는 언약 아래, 또는 성령 아래라고도 합니다.

 

그럼 “법 안”에서 “은혜 안” 으로 빼내는 것이 되겠지요.

다른 말로 “옛 언약” 에서 “새 언약” 으로 빼내는 것이지요.

옛 언약은 율법이고 새 언약은 은혜에요.

여기까지 이해가 되시지요.

 

그럼 이제부터 양의 우리에 문(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10장에서 가장 난해한 대목이 이 문(門)이에요.

아니 목사님! 예수님을 양의 문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뭐가 어렵습니까? 라고 말하면 안 되어요.

 

본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문(門)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상황과 달라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 문(門)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목자와 양을 비유하면서 모두 다 당시 목자들이 양을 치는 내용으로 했어요.

그런데 이 문(門) 이야기는 생소해요.

 

본문을 봅시다.

 

요 10:1-1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門)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 ~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자 보세요.

양의 목자는 우리의 문(門)으로 들어가고 강도와 절도는 담을 넘어 들어간다고 하지요.

삯꾼을 강도와 절도로 묘사합니다.

삯꾼이지만 양의 목자에요.

그런데 아무도 문(門)을 통하지 않고 담을 넘어서 양을 끄집어내는 목자는 없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비유가 이상한 거지요.

유대인들이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은 양과 목자의 비유를 하면서 예수님이 집어넣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집어넣는다는 점입니다.

 

강도 이야기는 당시 상황과 맞지 않아요.

월담해서 자기 양을 데리고 가는 목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당당하게 문으로 가서 문지기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하고 자기 양들을 데리고 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왜? 불필요한 상황을 설정하여서 말씀하시고 계실까요?

이게 걸림돌이에요.

일부러 걸림돌을 두신 것입니다.

넘어지라고!

상식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알다시피 문(門)이란? 양이나 목자가 우리를 드나드는 유일한 통로에요.

다른 통로가 없어요.

 

자 중요하니 잘 들으세요.

예수님이 지금 이 비유를 율법 아래 있던 소경을 구원하는 사건의 연장선에서 말씀하고 있어요.

율법이라는 우리 속에 있는 양을 은혜라는 ‘우리’ 속으로 빼내 오는 것으로 말하고 있잖아요.

 

이스라엘은 언약 민족이에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났어요.

아브라함 언약이 먼저이고 율법이 나중이에요.

이스라엘이냐 아니냐는 언약으로 판단하지 율법으로 판단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어야 진짜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은 애초부터 율법으로 이스라엘이냐 아니냐로 구분하지 않았어요.

아브라함이 선택된 것은 율법과 상관없이 되었어요.

율법과 상관없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후손에게 율법을 주었어요.

율법을 준 것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율법으로 그들의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애굽 백성과 똑 같이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예요.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율법을 붙잡으면 안 되고 아브라함 언약을 붙잡아야 해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아야 한단 말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산다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

그렇지 않고 자신들이 율법을 지켜서 산다고 하면 그는 아브라함 언약을 모르는 자로서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이스라엘이라고 한다면 율법을 붙잡으면 안 되고 아브라함 언약을 붙잡고 살아야 진짜 이스라엘인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붙잡지 않고 율법을 붙잡으면 마귀 자녀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 지킴을 자랑하는 유대인에게 너희 애비는 마귀라고 한 겁니다.

너희가 혈통을 앞세우고 오는 것을 보니 언약 백성이 아니라고 한 겁니다.

진짜 아브라함 후손이면 혈통이나 율법 지킴을 내세우지 않고 아브라함 언약을 앞세우고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육적 조건을 앞세우고 나와요.

혈통을 앞세우고!

인간의 행함을 앞세운단 말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리와 전통과 유전을 자랑해요.

 

목자나 양도 마찬가지에요.

아브라함 언약으로 나아오는 자가 참 목자이고, 율법을 앞세우고 나오는 자는 강도에요.

참 목자는 양들의 행함으로 판단하지 않아요.

 

그러나 강도 같은 목자는 인간의 행함으로 판단해요.

율법지킴이라는 인간의 행함으로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므로 문으로 드나드는 것이 아니고 담을 넘어 드나드는 것과 같이 불법이고 반칙이에요.

 

지금 예수님 앞에서 눈을 뜬 소경을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문으로 오지 않은 강도들인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놈들을 목자로 보내지 않았어요.

아브라함 언약으로 오지 않고 아브라함 혈통으로 온 자들이에요.

 

하나님이 보낸 목자는 율법으로 오지 않고 언약으로 와요.

지금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언약으로 오셨어요.

그러니 예수보다 앞서 와서 목자 노릇을 한 자들은 다 강도이고 절도인 겁니다.

강도이고 절도인 근거가 율법을 붙잡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만이 참 목자인 겁니다.

그 누구도 참 목자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예수님 이외에 참 목자를 보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 보다 먼저 온 자들은 전부 강도요 절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목자들이 난 목자가 아니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참 목자입니다 라고 말해주어야 해요.

이를 증거 하라고 목자로 세운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목자 노릇을 한 겁니다.

양들을 잡아먹고 있었어요.

그러니 문으로 드나들지 않고 월담하는 강도들인 겁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오신 참 목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조건으로 따지지 않았어요.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로 판단하지 않았어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따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예수님만이 양이 드나드는 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문(門)이란? 언약을 말하는 겁니다.

언약은 구원의 문이에요.

참 목자는 언약으로 구원하고 참 양은 언약으로 구원 받아요.

언약에 따라 일하는 사람이 참 목자이고 언약에 따라 일하지 않는 사람은 담을 타 넘고 다니는 강도고 도적놈이에요.

 

예수님이 언약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을 양의 문(門)이라고 하는 겁니다.

양들은 예수님을 통하여서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얻는 겁니다.

조금 어렵긴 하여도 이해가 되시지요.

전 그렇게 본단 말입니다.

 

지금도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으로 사람들을 다스리면 강도이고 절도에요.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며 성화를 가르치는 목사는 바리새인 계열의 강도들이에요.

반대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구원이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예수님 계열이에요.

 

지금도 소경과 바리새인이 있어요.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고 하고!

소경과 같은 사람은 아니야! 예수님이 피로서만 구원이 된다고 해요.

 

그럼 목자가 우리 속에서 자기 양을 어떻게 찾아내는지 살펴봅시다.

 

3-5=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목자가 공동 우리에서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해 낸다고 하지요.

그러면 자기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라 온다고 합니다.

이건 목자와 양에게는 둘만이 아는 어떤 것이 내장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자동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겁니다.

 

이걸 세상말로 핏줄은 서로 당긴다고 합니다.

본능적으로 서로 끌어당겨요.

본능은 타고나는 겁니다.

타고 난다는 것은 속된 말로 이미 전생에 붙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나 양이 서로를 알아보는 겁니다.

목자도 자기 양에 이름만 부르고 양도 목자로부터 받은 이름이 있기 때문에 목자가 낙원아! 라고 부르면 제가 예! 하고 따라 나서는 겁니다.

내가 너에게 죄사함을 주려고 십자가에 죽었다 그러면 예! 하고 믿어요.

 

아까 참 목자는 언약으로 왔다고 하였지요.

참 목자는 양들에게 언약을 말하면 양들은 그 언약을 알아들어요. 

그럼 참 목자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언약이 뭡니까?

자기 피로 세운 새 언약이지요.

그래서 참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는 겁니다.

 

양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요.

예수님이 자기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늘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와요.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안 믿었어요.

율법으론 의가 없다고 해도 안 믿어요.

끝까지 자기 행함을 포기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이 안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러지요.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은 자에겐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멸망을 받을 자에겐 미련한 것이라고 했지요.

이는 십자가 도를 던져보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어떤 사람에겐 구원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어떤 사람에겐 조롱거리로 들린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자기 백성들을 찾아냅니다.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구원의 도가 미련하다는 겁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은 이렇게 미련한 십자가 도를 구원의 능력으로 받아 들여져요.

 

전도는 사람을 많이 포섭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로 난 자와 아닌 자를 갈라내는 겁니다.

어떻게 갈라내느냐 하면 십자가 도로 갈라내요.

 

구원은 공짜로 주어진다!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다!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모두 예수님이 다 하셨다! 라고 하면 두 반응이 나타나요.

 

어떤 사람은 아멘! 할렐루야! 고맙습니다! 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럼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이냐! 라고 화를 내요.

왜? 인간을 배제시키느냐 고 짜증을 내요.

 

복음을 다 좋아하지 않아요.

세리나 창기 같은 죄인이나 좋아하지!

바리새인들과 같이 죽도록 충성한 사람들은 화를 내요.

자기가 죄인인줄 알아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쁜 소식으로 들려요.

 

그러니 율법아래서 신앙 생활하는 유대인들에겐 예수님은 낯선 분이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다고 하는 말은 아무나 듣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의 양들만 듣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도는 예수님의 백성들만 알아먹도록 되어 있는 비밀이에요.

복음을 방언이라고 하는 것은 그 동네 사람만 알아먹기 때문입니다.

각 지역별로 사투리가 있지요.

사투리를 쓰는 것은 그 지역 사람만 들으라는 말입니다.

말소리를 들으면 아! 저 사람이 전라도 사람인지 경상도 사람인지 알아요.

그만큼 말이란 그 사람의 소속을 담아내는 그릇과 같아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경험한 것을 말할게요.

제가 과거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조금 생활한 적이 있어요.

거긴 알다시피 회교국이라 남녀가 부동(不同)해요.

여자들은 얼굴을 타인에게 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차도르를 쓰고 지냅니다.

 

외국인인 우리들은 여자 얼굴한번 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에요.

 

그리고 현장이 인가(人家)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서 여자를 보기란 더더욱 힘이 들어요.

그래서 일요일이 되면 차를 타고 시내로 구경을 나갑니다.

한번은 시내에 나가서 백화점에 쇼핑을 하는데 동양 여인을 만난 겁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수컷들의 본능이 발작한 겁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풍습 상 낯선 여자에게는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만약 여자가 신고하면 큰일이 납니다.

남녀가 유별나다고 출국하기 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을 받아요.

하지만 막상 동양여인을 만나니 본능이 먼저 발동을 하여서 말을 걸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 여인이 한국 여자인지 일본 여자인지 중국 여자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당시 상황으로 한국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어요.

일본 여자나 중국 여자 정도라고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말을 붙이고 싶어서 시도를 했지요.

 

그래서 한국말로 “아가씨” 라고 불렀더니 뒤로 돌아보더라고요.

얼마나 반갑던지요.

이국땅에서 동족을 만나보세요.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확 쏟아져요.

 

그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30년 전 이야기인데도 지금도 생생해요.

사우디에서 한국말을 하면 한국 사람만 들어요.

전부 ‘움살라 발라’ 하는데 “어이 아가씨” 라고 하니 생소한 방언이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복음적인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지요.

그래요.

지금도 새 언약을 말하면 알아듣는 사람이 있어요.

십자가 도를 말하면 자기 양들은 알아듣고 다 따라 나와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십자가를 말하면 예수님의 양은 다 들어요.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 만이 믿을 수가 있어요.

역설적으로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자는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해요.

 

어떤 이는 예수 믿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어떤 사건에 휘말려 믿게 되고 어떤 이는 모태로부터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종국엔 믿지 않아요.

이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셨느냐 안 하셨느냐의 차이에요.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온다고 하셨어요.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44-45=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은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면 그 안에 영생이 있다고 합니다.

언뜻 들으면 우리가 결정 할 수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모순적으로 들려요.

아무라도 내게 올수 없다고 합니다.

아무나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셔야지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다 내게로 온다고 했어요.

언제 우리가 아버지께 듣고 배웠습니까?

이는 언약 안에서 낳아졌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그 속에 흐르기 때문에 언약이 믿어지는 겁니다.

 

복음을 깨닫는 데에는 인간의 지혜나 지식은 소용이 없어요.

오직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세상 지식과 상관없이 다 믿어집니다.

예수 믿는데 인간의 조건은 전혀 지장 받지 않아요.

 

한번은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순회하시다가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라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했어요.

이에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을 받은 자로구나 이를 알게 한 것은 네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이런 신앙고백을 하는 자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언제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이는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복음을 알아듣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라의 본 자손인 유대인들도 알아듣지 못한 것을 이방인인 우리가 알아듣고 있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은 혈통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어지는 겁니다.

 

양들의 특징은 목자의 음성은 듣는데 타인의 음성은 도망친다는 겁니다.

여기서 타인이란? 바리새인을 말해요.

즉 율법 신앙을 말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을 담 넘어 다니는 강도라고 했고 도적이라고 했어요.

강도나 도적은 양들을 사랑하지 않아요.

이들에겐 양들은 자기 배를 채우는 먹잇감이에요.

 

그래서 목자라 하지 않고 삯꾼이라고 하는 겁니다.

삯꾼이란? 양을 이용하는 자입니다.

양을 사랑하지 않고 좋아해요.

 

사랑하는 것하고 좋아하는 것은 달라요.

고양이는 쥐를 좋아하지 사랑하지 않아요.

라이크(Like)와, 러브(Love)는 달라요.

러브(Love)는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 것이고, 라이크(Like)는 자기 유익을 구해요.

 

술꾼들이 술집 아가씨를 좋아하지 사랑하지를 않습니다.

이는 술집 아가씨 역시 동일해요.

서로가 서로의 이익에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만나는 겁니다.

술꾼을 쾌락을 위해서 아가씨가 필요하고, 아가씨는 돈을 위해서 술꾼이 필요해요.

 

이건 마치 이 시대 거짓 양과 삯꾼 목사와 같아요.

거짓 양들은 예수를 좋아해요.

예수를 통하여서 얻어내야 할 것이 많아요.

자식 좋은 대학에 보내야하고, 사업도 성공하여야 하고, 남편 승진도 시켜야 하고, 교회 부흥도 시켜야 해요.

 

이런 것을 얻어 내자면 신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기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무당 목사가 필요한 겁니다.

이런 모습은 이미 사사시대에 보여 주었어요.

 

무당 목사는 가짜 신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가짜 신자는 삯꾼 목사에게 돈을 줍니다.

서로가 서로를 충실히 이용하여 빼내 먹는 것입니다.

서로 손해 볼 것이 없으니까요.

둘 다 똑 같기 때문에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양들은 이런 자들을 따르지 않아요.

도리어 도망을 쳐요.

예수님의 양들은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강요된 신앙생활이 없어요.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해요.

목자와 양 간에 교제는 강요나 억지가 전혀 필요가 없어요.

서로 사랑의 관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복음으로 인하여 서로의 만남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복음 하나만 있으면 교제가 유지 되어요.

하지만 복음엔 관심이 없고 만남에 관심이 있으면 사소한 문제로 틀어져요.

 

사랑으로 나온 자는 계산이 없고, 만남 자체로 행복해 합니다.

여러분들 연애시절 기분 압니까?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람,

그저 함께 있기만 해도 좋은 사람,

헤어지면 또 보고 싶은 사람,

만나면 헤어지기 아쉽고,

헤어지면 또 만나고 싶은 사람 이게 연애이고 연인 사이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이해타산을 하지 않아요.

사랑은 무엇인가 해 주고 싶어지고 주고 또 주고 싶어져요.

 

성도와 예수는 연인사이입니다.

하나님께서 맺어준 연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연인 사이가 아닌 자들은 만나면 계산하기에 분주해요.

나는 이렇게 해 주었는데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느냐 라고 따져요.

 

마치 이 시대 남녀 간에 결혼 풍속도와 같아요.

서로 이해관계로 결혼하였다가 자기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언제 보았느냐는 식으로 이혼하는 세태가 꼭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과 같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한창 시끄러운 골프 황제 타이거우즈 이야기입니다.

13살이나 많은 여인이 타이거 우즈의 딸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말이 어쩌면 이 시대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의도적으로 타이거우즈의 아이를 낳고자 하였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그 아이를 가지고 타이거우즈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평생 돈 걱정 하지 않고 살고 싶어서 타이거우즈 몰래 아이를 낳았다는 겁니다.

 

나중에 그 아이가 장성해서 이 기사를 보겠지요.

그럼 그 아이는 어떨까요.

자신은 엄마가 아빠에게 돈 뜯어내려고 만든 아이라고 할 것 아닙니까.

아빠에게 돈 뜯어내기 위해서 태어난 아이!

이 얼마나 쇼킹한 이야기입니까.

 

이게 남에 일이 아니에요.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 버젓이 이런 일들이 자행되고 있어요.

돈 뜯어내기 위해서 예수를 믿고 있잖아요.

목사도 돈 뜯어내려고 교인들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교인들도 복을 뜯어내려고 목사에게 아양을 떨잖아요.

지금 예수님은 타이거우즈와 같아요.

노리갯감으로 전락하고 종국엔 아이 때문에 전 재산을 빼앗기게 생겼어요.

아주 무섭지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좋아합니까? 사랑합니까?

주를 위해 하는 일이 아깝다고 생각이 듭니까?

부족하다고 생각이 듭니까?

우리는 자기 신앙이 사랑이냐! 계산이냐! 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아까움이 없고, 계산은 아까움이 들어요.

 

주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이 되면 종교 생활하는 것이고,

아깝지 않다고 생각되어지면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고, 계산은 자기를 행복하게 합니다.

내가 내 행복을 위해서 교회를 찾은 것이라면 종교 생활하는 것이고,

주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여서 나온 것이라면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할수록 더 잘해 줄려고 하고,

하고 나서도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남고,

또 해준 것은 금새 잊어버리지만,

계산된 신앙은 너무 한 것같이 아까운 생각이 들고 한 것은 오래도록 기억하게 됩니다.

 

여러분들 마음속에 지금까지 주께 봉사하고 헌금하고 헌신한 것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면 종교 생활한 것이고, 바울처럼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행하여 나아간다면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한다면 무엇이든지 하지 마십시오.

봉사도 하지 말고,

헌금도 하지 마십시오.

금방 후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 23절에선 믿음으로 하지 않은 것은 모두가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린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한 죄인이에요.

우린 하는 짓마다 다 죄에요.

그럼에도 정죄당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감사하며 살고 있어요.

이 이상 더 큰 은혜가 어디 있나요!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어요!

 

이렇게 엄청난 복을 받았음에도 모른다면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린 다 받았어요.

예수의 피를 받았으면 다 받은 겁니다.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어요.

다른 것을 바라는 것은 탐욕입니다.

부디 이 은혜가 깨달아져서 범사에 감사하며 두려움 없이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를 받았으면 다 받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로 가득하게 하여서 세상이 작아 보이게 하옵소서. 예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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