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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60강. 신앙의 싸움 (히 12:14-17)

by coroa 2021. 7. 27.

 

 

60강. 신앙의 싸움 (히 12:14-17)

-.정낙원 목사

 

 

 

사람은 눈만 뜨면 어떻게 살까! 를 고민합니다.

온통 자기 생존을 위한 관심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궁리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에 의(義)를 구하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좀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내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생겨났는지!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이 도대체 왜? 나를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나는 왜?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지! 라고 고민하는 사람은 없어요.

전부 자기 존재를 위하여 살고 있어요.

그래서 죄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죄인은 오로지 자기만 생각해요.

모든 일을 자기중심으로 이해하고 판단해요.

늘 상대방을 자기 입장에서 판단하지 한 번도 자신을 상대방 입장에서 헤아리지 않아요.

그러니 입만 열면 상대방 때문에 힘들다고 불평하는 겁니다.

아내는 남편 때문에 힘들고 남편은 아내 때문에 힘들다고 해요.

 

어휴~ 내가 어쩌다 당신을 만나서 이 고생 하느냐 라고 투덜거립니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서 호강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또 이 사람이 나 때문에 고생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온통 자기만 손해 본다고 생각하고 불평해요.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판단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신자들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기 보단 불평이 나와요.

온통 왜? 왜? 왜? 뿐이에요.

왜? 날 힘들게 합니까? 라고 원망하잖아요.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다는 말도 천국이 좋아서가 아니라 현실의 아픔을 피하고 싶은 도피성 원망이에요.

 

살기 좋아 보세요.

오래도록 살고 싶어하지 천국 가고 싶다고 말하지 않아요.

어려우니 그 어려움을 천국 가는 것으로 회피하고 싶은 겁니다.

 

저 역시도 주님 언제 오십니까!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을 잘합니다.

이는 주님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램보다 사는게 힘들어서 하는 말이에요.

교묘하게 신앙을 핑계 삼아 현실을 도피하고자 포장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악질적입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를 포장하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다 아세요.

우리 속을 훤히 아세요.

하나님이 그럽니다.

어이구~ 이 등신아~ 내가 니 속을 모를 줄 아느냐!

그래서 안 데리고 가시는 겁니다.

더 살게 만들어서 만물의 찌끼같이 만들어 가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리 너는 예수를 위하여 존재하는 자 라고 가르쳐 주어도 안 되어요.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는 어떻게 살까!

고민해요.

그래서 죄인은 정답을 알려주어도 정답대로 살지 못하는 중풍병자라고 하는 겁니다.

죄인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말을 들어 먹지 않아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늘 우리 마음 먹은 대로 나타나지 않고 그와 정 반대로 어그러지고 죄가 들추어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어떻게 살까! 는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만!

내가 왜? 살지! 라는 것은 나는 왜? 생겨났을까? 나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일까? 라는 관계론으로 접근하게 되는 겁니다.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지! 라고 묻는 것은 나의 근원을 질문하는 거에요.

 

성경을 덮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자기 존재론으로 접근하지만!

성경을 펴면 너는 왜? 살고 있는지 아느냐? 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 살고 있는지를 알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회엔 살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는 내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알기 위해서 나와야 합니다.

예수는 내가 세상을 사는데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믿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면 행복 할까 생각하지 말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를 존재케 하고 나로 살게 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나는 지금 예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고 있나를 생각해 보아야 해요.

 

에릭프롬이라는 분이 소유냐! 존재냐! 라는 말을 했어요.

이 분은 인간을 두 부류의 성향을 말하고 있어요

소유양식으로 사는 자와, 존재양식으로 사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쉬운 말로 소유양식으로 사는 사람은 이기주의로 살고, 존재양식으로 사는 사람은 이타주의로 산다는 겁니다.

이런 양식의 바탕엔 인간의 존재론을 근거하고 있어요.

 

성경은 인간을 이렇게 접근하는 것을 죄라고 규정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인간의 존재론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존재론으로 출발하는 모든 것은 죄라고 해요.

죄가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하게 만든 겁니다.

죄인의 사고는 내가 있고 하나님도 있고!

내가 있고 교회도 있고!

내가 있고 이웃도 있어요.

 

죄인의 특징이 오직 나 에요.

나 뿐이에요.

내가 있고 예수님도 있어요.

그러나 성경을 펴면 너는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너는 너를 위한 인생이 아니란 말입니다.

너는 너를 챙기면 안 된다고 합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창세전 언약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습니다.

내가 있기 전에 언약이 먼저 있었어요.

나는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예수님이 언약의 실체잖아요.

그럼 우린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단 말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여야 합니다.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중요해요.

 

그러니 내가 소유양식으로 살든지 존재양식으로 살든지 예수가 빠져 있기 때문에 둘 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존재를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인간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의 존재를 바탕으로 나아오는 것을 전부 죄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 한마디 하고 갑시다.

우린 원래 없었던 자였지요.

우리가 있기 전에 언약이 먼저 있었지요.

 

원래 없었다는 것은 무(無)란 말입니다.

무(無)에서 유(有)가 나왔지요.

무(無)란 “없음”이고, 유(有)란 “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없던 것을 있게 만든 겁니다.

무얼 위해 만들었습니까?

언약을 위해서지요.

 

그럼 무(無)에서 나온 나에게 무얼 담고자 하겠습니까?

언약을 담고자 하겠지요.

언약의 실체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럼 우리에게 뭐가 담겨져 있어야 합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 담겨져 있어야 하겠지요.

한마디로 나는 예수님 때문에 삽니다! 라는 것만 담겨져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한 것은 예수님을 담고자 함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겁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의 형상에 본체라고 하지요.

결국 예수님을 담기 위해서 아담을 창조한 겁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어요.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어요.

그래서 아담이 생산하는 자식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죄인인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인간들은 아담의 것을 담기 시작합니다.

인간들이 담고 있는 것은 전부 죄의 산물이에요.

죄의 산물은 자기 존재 쌓아가기로 나타납니다.

다른 말로 자아 확장을 꿈꾼단 말입니다.

자기 세계를 넓혀가고자 한단 말이에요.

 

그러므로 죄인들은 눈만 뜨면 자기 존재 쌓기를 하는 겁니다.

난 이렇게 살았고! 저렇게 살았고!

이런 일을 했고! 저런 일을 했고! 하는 겁니다.

마치 마트에서 물건을 사면 마일리지가 쌓이듯이 하나씩 행할 때마다 자기 의(義)가 쌓여져 가는 겁니다.

마일리지가 쌓일수록 죄가 덖지 덖지 쌓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인간이 담고 있는 것을 빼내는 일을 하십니다.

다른 말로 유(有)에서 무(無)를 만드는 작업을 하신단 말입니다.

원래 없던 자리로 만든단 말입니다.

 

야곱의 얍복강 사건이 바로 이를 증거해 주고 있어요.

야곱은 거부(巨富)가 되어서 귀향합니다.

그런데 그 부(富)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 모두 사기 쳐서 얻은 거예요.

다른 말로 죄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얍복강에서 기다린 겁니다.

사기 쳐서 얻은 것을 몽땅 빼앗아 버립니다.

그리곤 빈털터리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합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갈 땐 집에서 쫓겨날 때 그 모습으로 올라갔어요.

하나님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서 시청각교제로 보여준 겁니다.

이 야곱이 바로 이스라엘이 되잖아요

그럼 이스라엘은 일평생 빼앗기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 증거가 가나안에서 쫓겨나 남의 나라 종으로 살게 만든 겁니다.

종은 자기 것이 없어요.

종 되게 하여서 원래의 자리인 없음 곧 무(無)에 자리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모으는 삶을 살았어요.

가옥에 가옥을 더하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고 살았어요.

꼭 한국교회 같이 살았어요.

한국교회의 특징이 뭡니까?

오로지 부흥 부흥이잖아요.

그래서 교회마다 교회 더 크게 짓는 시합을 하잖아요.

 

이스라엘이나 한국교회나 똑 같아요.

온통 모으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에서 쫓아내서 너희는 이 땅에 분깃이 없는 자라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원래 없는 자리로 돌아가게 만든 겁니다.

 

예레미야가 이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래 나그네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누가 이 말을 믿겠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채워주는 분이 아니고 빼앗아 가는 분이에요.

유(有)에서 유(有)로 팽창시키지 않고 유(有)를 무(無)로 만든단 말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예루살렘 교회가 급성장하지요.

하루에 삼천 명씩 등록을 했어요.

그러자 일곱집사를 세우고 모으기 시작한 겁니다.

유(有)에서 유(有)로 나아가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흩어버리기 시작합니다.

즉 유(有)에서 무(無)로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그게 큰 핍박을 당하게 하여서 흩어버린 겁니다.

유(有)에서 무(無)로 만들어 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래서 신약의 초대교회 성도들을 전부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나그네와 외국인은 쌓은 게 없어요.

빈 몸이에요.

 

죄는 항상 자기 존재를 확장하고자 하는 식으로 나타나요.

나 있음에서 나 있음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자기 존재론으로 나아오는 것은 전부가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화주의자들처럼 고상한척 하나님! 내가 어떻게 사는게 좋을까요? 라고 묻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성화주의는 자기 의(義)를 마일리지 쌓듯이 쌓아가고 있어요.

 

이건 마치 바퀴벌레가 주인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주인에게 영광이 됩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질문에 주인은 바퀴벌레야 제발 좀 꺼져 줄래!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줄래!

바퀴의 존재 자체가 주인에겐 화가 되는 겁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선 바퀴 같은 존재에요.

아무리 그럴싸한 명분으로 나아와도 죄에요.

왜냐하면!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하면 하나님은 이용대상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살기 위해서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판 사람이야기가 나옵니다.

 

에서에게 있어 사는 것 이상 진리는 없습니다.

장자권을 팥죽에 팔았다는 것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내가 살고 나야 장자도 있는 것이지 죽고 나면 장자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사고에요.

 

아주 인간다운 생각입니다.

세상에서는 강한 자가 살아 남는 것이 아니고, 살아 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합니다.

그만큼 죽음 앞에선 강함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황우 장사라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먹고 사는 “밥” 인 겁니다.

“장자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밥” 입니다.

다른 말로 “돈” 입니다.

돈!

 

그런데 이런 사고로 살았던 에서를 일컬어 망령된 자라고 합니다.

망령(妄靈)이란?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비유에서 일평생 돈만 모으고 산 부자를 어리석은 부자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살지 못한 것은 전부 어리석다고 합니다.

에서에 대하여는 잠시 후에 더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 본문을 추적해 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려워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첫째는,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둘째는,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셋째는, 밥을 위해서 장자 권을 팔아먹는 망령된 짓을 할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아들의 징계에 이어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에 유념해 보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 우린 징계에 대하여 상고해 보았습니다.

징계란? 하나님의 자기 백성 챙기기입니다.

간섭하심입니다.

 

거룩이 비거룩을 간섭하면 반드시 비거룩이 죄라고 지적하면서 다가오기 때문에 징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을 챙기니까 징계가 수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징계를 아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은 간섭하는 거예요.

많이 사랑할수록 간섭이 심해요.

부부간에 티격 태격 하는 것도 다 사랑이에요.

요즘 회자되는 말 중에 부부간에 어디서 자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만큼 무관심하다는 말입니다.

관심이 없으니 어디서 자는지 모르는 겁니다.

 

이걸 성경 식으로 말하면 유기라고 합니다.

유기란? 무 간섭을 말해요.

니 마음대로 살아라! 라고 내버려 두는 겁니다.

무관심이에요.

무관심은 사랑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나 너 관심 없어!

살든지 죽든지 맘대로 하라는 겁니다.

죄인을 간섭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가요.

 

그러나 사랑은 사사건건 간섭해요.

부모가 자식을 간섭하잖아요.

그런데 이 간섭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자식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다 지긋 지긋하다고 합니다.

 

제발 날 좀 내버려달라고 합니다.

그럼 그래 하고 내 버려두는 부모 또한 한 사람도 없어요.

이 놈에 새끼가 하면서 더 닦달하잖아요.

이게 부모의 자식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독한 사랑을 출애굽기에선 질투라고 했어요.

질투는 사랑의 뒷면이에요.

사랑과 질투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아요.

한 셋트에요.

 

그런데 징계하는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어그러진 길에서 돌이키게 한다고 하지요.

영적인 의미에서 어그러진 길이란? 하나님의 의(義)와 거룩에서 벗어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엇길 가고자 하는 거예요.

다른말로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되려면 하나님의 의(義)와 거룩이 있어야 해요.

이는 의(義)와 거룩을 우리더러 만들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마련해준 의(義)와 거룩 안에 머물러 있으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죄의 몸으로 살아가요.

죄의 몸은 하나님의 의(義)와 거룩을 불편해 해요.

죄의 몸은 죄를 좋아하지 하나님의 의(義)와 거룩을 싫어해요.

그래서 우린 틈만 나면 하나님의 의(義)와 거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럼 너 왜? 또 하나님의 의(義)와 거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데 라고 징계가 따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義)와 거룩으로부터 벗어나면 징계가 따르니 두려워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義)와 거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지를 오늘 본문에선 세 가지 두려워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義)와 거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현상을 말해주고 있어요.

이런 일들이 나타나면 두려워하라는 겁니다.

 

그럼 그 모습들을 하나 하나 살펴봅시다.

 

첫째는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라는 것부터 탐사해 봅시다.

 

이 말씀을 하기 이전에 먼저 하시는 당부가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거룩함과 화평함을 쫓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히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직역을 하면 거룩함과 화평함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에겐 하나님이 주신 거룩과 화평이 있어요.

그 안에 머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과 화평함은 어디서 주어졌나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이지요.

화평(和平)이란? 차별 없이 하나 되는 겁니다.

예수 안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지요.

그러니 화평이 되는 겁니다.

 

화평(和平)은 서로 동등 할 때 이루어져요.

너와 내가 다르다고 생각되면 그 다름으로 차별이 생겨요.

그럼 차별이 곧 힘으로 작용합니다.

나음과 못함이 힘으로 구별이 되어 차등이 생기고 우열이 정해져요.

그럼 화평이 사라지고 상하(上下)라는 위계질서(位階秩序)가 생겨요.

위계질서가 생기면 평화는 깨어지고 긴장 관계가 형성이 되어요.

이건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비빔밥을 만들어 버린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하나 되게 만들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상하(上下)도 우열(優劣)도 없는 겁니다.

예수 안엔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없어요.

십자가 안엔 너도 나도 모두가 예수님의 피로 의로워졌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선 화평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피로서 화평된 모습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만이 만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머물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부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고 예수님의 피 안에서 대하라는 말입니다.

 

상대를 예수님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예수님으로 보여요.

상대방도 예수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서로가 서로를 예수님 대하듯이 대하게 됩니다.

이럴 때 인간의 외모와 상관없이 하나가 되고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 정신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서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할 자들이 있는지 두려워하라고 하는 겁니다.

어디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라고요?

하나님의 은혜에요.

은혜!

 

은혜란? 거저주심이에요.

은혜 속엔 차별이 없어요.

모두가 공짜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반대말은 내 노력이에요.

노력을 다른 말로 행함이라고 합니다.

행함을 바탕으로 한 신앙을 일컬어 율법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시대 말로 성화주의라고 해요.

 

히브리서 주제가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 하셨다는 거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 하셨다는 말은 십자가가 인간의 행함을 몽땅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행함을 십자가가 몽땅 다 용광로처럼 녹여 버렸어요.

이걸 탕감이라고도 하고 또는 도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 안에서 인간의 행함은 설 자리가 없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예수 믿는 것이라고 하지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대신 다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따져야 할 것을 예수님에게 따지셨다는 뜻입니다.

이걸 대신 담당했다!

또는 대신 짊어졌다! 라고 합니다.

그러니 믿음 안에선 우리의 행함으로 따짐 받을 일이 없어요.

 

그런데 마귀라는 놈은 이 사실을 자꾸만 가리는 일을 해요.

우리 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린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셨다는 것을 잊게 만들어요.

그러면 내가 담당하여야 하는 것으로 남아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안 보이면 그 땐 하나님 말씀과 내가 맞닥뜨려요.

 

하나님 말씀이 너 왜? 말씀대로 안 살아라! 라고 채근해요.

하나님 말씀을 지킬 주체를 자기에게 두게 되어요.

그러면 신앙이 갑자기 수고해야하는 짐이 되어버립니다.

야~ 이거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어떻게 말씀대로 살지! 라고 두려워져요.

 

불신앙이란? 자신을 바라보는 거예요.

자기가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거예요.

정확히 말해서 자신이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이라고 붙잡는 겁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 믿는 것을 책망하는 겁니다.

히브리서를 쓰게 된 배경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는데 율법을 지키고자 하느냐? 라는 의미가 바탕에 깔려 있어요.

 

그래서 경고하는 겁니다.

너희들 하나님 은혜에 거하지 않으면 혼 난다고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손을 봐 줄 테니 각오 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고스란히 담고 사는 겁니다.

그리하여 내가 사는 바탕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풀풀 흘러 나와야 해요.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가 나와야 해요.

한마디로 예수님이 자랑되어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고 사는 겁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세요.

여호와는 망하게도 하시고 흥하게도 하세요.

여호와는 아프게도 하시고 고치기도 하세요.

여호와는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세요.

 

이를 한 마디로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말입니다.

이걸 인정하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그렇다면 성도는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럼 범사가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왜? 범사가 감사가 됩니까?

이는 성도는 이미 예수 안에서 천국 백성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삼층 천에서 자신은 이미 천국에 가 있음을 알았어요.

지금 땅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바타(가짜)에요.

진짜는 천국에 있어요.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에 장막을 덧입는다고 하지요.

장막이란? 몸을 말해요.

육신의 장막은 눈물과 고통과 아픔과 죽음이 있어요.

그러나 하늘에 장막은 눈물도 고통도 아픔도 죽음도 없어요.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에 장막을 주어요.

그러니 성도에겐 죽음이 최고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빨리 죽여 달라고 했어요.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어요.

 

죽음이란? 눈물 골짜기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죽음은 문(門)이에요.

눈물 없는 곳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문(門)입니다.

죽음이라는 문(門)을 지나면 눈물이나, 고통이나, 아픈 것이나, 사망이나, 곡하는 것이 없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이름 하여 천국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곳입니다.

 

천국엔 왜? 눈물이나 고통이나 아픔이 없나요.

거긴 내 힘으로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 때문에 내가 눈물 흘릴 일이 없고, 고통당할 일도 없고, 아파할 일이 없는 겁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들은 사는게 힘들지 않아요.

어린 아이들은 부모만 있으면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부모가 지켜 줄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왜? 힘들어 합니까?

그건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의와 거룩을 만들고자 하니 지치고 힘이 드는 겁니다.

 

그러나 천국은 의와 거룩을 공짜로 주어요.

내가 만들지 않고 예수님이 주어요.

예수님이 다 알아서 하세요.

우린 그져 가만히 있으면 되어요.

그러니 감사가 나오지요.

 

이 세상엔 두 부류가 있어요.

법 아래 있는 사람과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이걸 다른 말로 아담 안에 있는 사람과 예수 안에 있는 사람으로 나눕니다.

 

아담 안은 법이 지배하고!

예수 안은 은혜가 지배해요.

아담 안은 자기 힘으로 사는 곳이고!예수 안은 예수의 힘으로 사는 곳이에요.

아담 안은 내 노력으로 사는 곳이니 눈물과 고통과 아픔이 있지만!

예수 안은 모든 것을 공짜로 얻어 먹고 살기 때문에 쉼이 있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라고 하는 겁니다.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은혜로 굳게 하라는 말입니다.

자기 꼬라지 보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쓴 뿌리가 나서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하여 더러움을 입는다고 하지요.

여기서 쓴 뿌리란? 은혜를 벗어난 율법신앙을 말해요.

율법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신앙은 죄인의 행함을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모세에게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를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원주민을 쫓아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원주민들이 눈에 가시가 되어서 옆구리를 찌르고 괴롭히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했어요.

 

민 33:55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그 땅 거민을 몰아내라는 말은 이는 이방인의 습성을 본받지 못하게 하려는 겁니다.

그들이 삶에 방식이나 그들의 신관을 본받지 말라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이방인은 죽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도 죽은 신입니다.

죽은 신을 섬기면 죽어요.

지옥에 가요.

 

그러니 가나안 원주민들의 모습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의 신앙을 본받으면 하나님이 노를 발해요.

그러면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말은 눈에 가시가 된다는 말입니다.

눈에 가시가 된다는 말은 자꾸만 눈에 어른거리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일컬어 색욕(色慾)이라고 해요.

 

색욕(色慾)이란? 눈에 보이는 탐욕이란 말이에요.

 

죄는 항상 보는 것으로부터 기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보는 순간 빠져들어 갔어요.

선악과를 보는 순간 그들의 눈에 가시처럼 콱 박혀서 찔렀어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서 자꾸만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어요.

눈에 어른거리는 겁니다.

눈으로 본 것이 머릿속에 각인이 되면 눈을 감아도 어른 거려요.

 

그래서 죄는 보는 것으로부터 역사하는 겁니다.

사회 현상론적으로도 영상매체가 발달할수록 범죄는 더욱 늘어나게 되어 있어요.

이 시대는 눈을 자극하는 것들로 포위되어 있어요.

영화나 TV를 비롯하여서 길거리를 보아도 온통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들뿐이에요.

여자들의 옷차림에서부터 귀에 들리는 말까지 전부 자극하는 것들입니다.

 

이 시대 성범죄가 극성하는 것은 시각적으로 미혹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섹시코드란 미명하에 벗기 경쟁이잖아요.

여자들이 길거리를 거의 반라에 가까운 옷을 입고 다니는데 어찌 성충동이 일어나지 않겠어요.

성충동은 본능적인 겁니다.

이건 시청각으로 일어나요.

눈에 야시시한 모습이 가시처럼 박히면 온 몸을 찔러요.

 

여자들이 반라에 가까운 벗은 몸으로 다니는 것은 마치 사자 앞에서 노는 노루새끼 같아요.

수컷들의 성욕을 발동시키는 행위에요.

언제 잡혀 먹힐 줄 몰라요.

그건 원인제공을 하는 것이고 날 잡아 먹으세요!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발람이 모압 왕 발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발람의 입을 막아서 이스라엘을 저주치 못하게 하고 도리어 축복을 하게 합니다.

그러자 발락이 당신이 저주하지 못하겠거든 이스라엘이 죄 짓게 하는 방법을 좀 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여자들이 훌러덩 벗고 춤을 추게 만듭니다.

성적 충동심을 유발시키라고 합니다.

 

그래서 발락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무희들을 총 동원하여서 술과 고기를 준비하고 진탕 먹고 마시면서 춤을 추게 하면서 자신들이 섬기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여인들의 매력에 빠져들어서 그들과 행음을 하고 그들이 섬기는 신까지 섬기는 지경에 이릅니다.

 

마귀는 인간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너무도 잘 알아요.

그래서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미혹하는 겁니다.

손에 잡히고 손으로 만진바 된 것으로 미혹해요.

보이는 세상 것으로 미혹해요.

 

이걸 오늘 본문에선 눈에 가시라고 하는 겁니다.

 

우상이란? 보이는 신이에요.

인간은 보이는 신을 원해요.

손에 잡히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껴야 만족을 해요.

 

그래서 마귀는 항상 보이는 것으로 미혹을 합니다.

자기가 경험된 것을 붙잡도록 해요.

이것이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발전을 하게 만든 겁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신앙은 믿는 신앙이 아니고 행하는 신앙인 겁니다.

이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나타나요.

 

흔히들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게 뭐가 잘못입니까? 라고 항변을 합니다.

그러면서 힐난하는 투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이 신앙이란 말입니까? 라고 해요.

이게 왜? 악인가 하면 신앙의 근거를 자기 행함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에요.

 

설교 초두에 자기 존재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죄라고 하였지요.

맞아요.

죄란? 나 있음으로 출발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자신들이 말씀대로 산 것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놓치고 하나님 말씀을 대한 겁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몰랐던 겁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다면 자기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석하게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율법을 지키고 있으니 모른 겁니다.

차라리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면 좋았어요.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니 죄인이라는 유(有)에다가 자꾸만 죄인이 발생하는 것을 쌓은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망했어요.

율법을 지키다 보니 자기가 의롭다고 여긴 겁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니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게 된 겁니다.

자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의(義)가 되는 줄 알았어요.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해요.

우린 모두가 죄인이에요.

 

여러분 바리새인을 나무라면 안 되어요.

우리도 바리새인이에요.

바리새인과 같은 기질들이 있어요.

그러니 바리새인은 우리의 반면교사인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은 부패한 자에요.

썩은 송장이에요.

송장이 착하게 산들 그게 무슨 의(義)가 되겠어요.

송장에게 화장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나요.

송장들의 행함에게서 무슨 의(義)가 나오고 거룩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행함을 의지하고 나아오는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염(殮)을 합니다.

이 때 송장에게 화장품으로 곱게 화장(化粧)을 해요.

얼굴에 분도 칠하고, 눈썹도 그리고, 입술에 립스틱도 바르면서 색조 화장을 해요.

그리곤 관속에 누입니다.

 

마지막 입관을 할 때 가족들을 불러 놓고 마지막 얼굴을 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랑했던 사람도 관속에 누어있는 송장에게 아름답다고 입 맞추는 사람은 없어요.

살아생전엔 껴안고 사랑한다고 하던 사람도 죽으면 보기 싫어져요.

하나님 앞에 죄인이 바로 그래요.

 

그러니 인간의 행함을 의지하고 나아오는 자는 하나님 앞에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들! 내 앞에 너희들의 행함 들고 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겁니다.

예수의 피 들고 나아오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의 피 없으면 날 만날 생각을 하지 말란 뜻입니다.

 

교회 안에 두 가지 유형의 신앙이 있어요.

 

자기 행함을 들고 나아오는 신앙과 예수님 피를 들고 나오는 신앙이 있어요.

조금 전에 가나안 원주민을 본받지 말라고 했지요.

그들이 신앙을 본받지 말라고 했지요.

 

이방인의 신앙은 행함 신앙이에요.

열심히 말씀을 지켜서 자기 노력으로 구원받고자 해요.

복(福)도 자기 노력으로 따 내고자 해요.

지성이면 감천하는 신앙이에요.

신을 섬기는 주체를 자기가 행사하는 겁니다.

 

지성이면 복을 따 낸다는 겁니다.

그래서 열심히 빌고 빌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식으로 말하면 충성하고 봉사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축복 받는 다는 거예요.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고 합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만 흠향하세요.

인간의 것은 받지 않아요.

예수님의 것으로 나아오는 자만 받아요.

 

신자는 자기에겐 의(義)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에요.

그렇기 때문에 늘 항상 여일(如一)하게 예수님의 공로만 앞세우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가요.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 안에서 삽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런 고백은 곧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속하신 은혜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나는 날마다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산다고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바탕에 예수님의 희생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 를 신앙의 근거로 붙잡지 않고 예수님 피를 붙잡고 살아가요.

 

신자는 난 죽었고 예수 안에서 삽니다! 라고 하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 의로 삽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난 자들만 토해 낼 수 있는 고백이에요.

 

그러나 불신자는 난 예수 안에서 살기 때문에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나아옵니다! 라고 말해요.

예수 안에서 살았다고 한다면 예수의 공로로 나아와야 하는데 자기공로로 나아오고 있어요.

이건 어불성설이에요.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이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나요.

신자에겐 늘 예수님의 행함이 나아오고!

불신자에겐 늘 자기의 행함이 나와요.

 

신자는 예수님이 지킨 것으로 나아오고!

불신자는 자기가 지킨 것으로 나아와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음미하고 또 음미하면서 잘 정리하세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죄인이야! 라고 하니!

바리새인들은 우린 율법을 지켰으니 의인이잖아! 라고 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에라이~ 이 독사 새끼들아! 지옥에나 가라고 그랬어요.

지옥엔 누가 가는가 하면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요.

바리새인들은 율법대로 살다가 보니 자기가 죄인인줄 모른 겁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선 율법대로 사는 것이 망령된 더러운 것이 되고 만 겁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 하여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더러움을 입는 것이에요.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 한다고 하는 겁니다.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안다면 자기가 행함 것을 앞세우지 못해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에게 율법지킴이라는 쓴 뿌리가 나서 예수님의 의(義)로 거룩함을 입었다는 사실을 가리는 더러운 짓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된다고 한 겁니다.

 

수 23:13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삿 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올무란? 덫이에요.

한번 빠지면 나오지 못해요.

행함은 마약과 같아요.

왜냐하면! 행함이 나를 의롭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행함을 붙잡으면 자신이 죄인인줄 몰라요.

자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이 자랑스럽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쁘지 않아요.

 

성도에게 자랑스러움은 예수님의 십자가여야지 자기 행함이면 안 되어요.

말씀대로 산 자신이 괜찮아 보이면 안 돼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미워져야지 괜찮아 보이면 큰일 납니다.

그건 영적 나르시즘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너무도 괜찮아 보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주신다는 의(義)를 거절한 겁니다.

자기들도 의가 있는데 뭐가 부족해서 예수님의 의를 받느냐 라고 했어요.

예수여! 당신이 주겠다는 의는 저기 세리와 창기들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주라고 비아냥 거렸어요.

 

바리새인들이 말대로 예수님이 자신의 의를 세리와 창기들과 이방인에게 주었어요.

그래서 지금 세리와 창기들은 천국에 가 있고 바리새인들은 지옥에 가 있는 겁니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지옥에서도 내 의가 크냐! 네 의가 크냐! 서로 싸우고 있을 겁니다.

왜? 나같이 잘난 사람을 천국에 안 보내고 저 더러운 세리와 창기들을 천국에 넣어 주느냐고 하나님께 항의하면서 이빨을 뿌드득 뿌드득 갈고 있을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기 있을까 두려워하라는 말씀을 살펴봅시다.

 

세상은 짐승의 나라에요.

짐승의 나라란 힘의 법칙으로 다스려진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이 있어야 해요.

 

사람들은 세상에서 힘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약육강식의 법으로 다스려져 가는 세상에선 힘이 곧 자기의 생명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힘을 가지려고 합니다.

 

사람은 눈만 뜨면 힘을 쫓아가요.

세상의 힘이란? 곧 돈입니다.

재물이고 권력이고 명예에요.

 

에서는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 살아간 자의 표상입니다.

에서는 세상을 사는데 장자라는 명분보다 팥죽이 더 유익하다고 여겼어요.

그렇기 때문에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버리고 팥죽을 얻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장자의 명분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사람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챙기고 필요치 않는 것은 버립니다.

에서는 팥죽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장자권을 버리고 팥죽을 산 겁니다.

하지만 야곱은 장자권이 필요했어요.

그러니 팥죽을 버리고 장자권을 산 겁니다.

 

그런데 본문은 에서의 이러한 행동을 망령된 것이라고 하며, 음행하는 자라고 하고 있어요.

성경은 실패한 삶을 산 사람을 에서를 대표로 들어 말해주고 있습니다.

팥죽을 위해 산 것이 망령된 삶이였고, 음행하는 삶이였고, 더러운 삶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야곱과 같이 장자권을 얻기 위해 사는 삶은 거룩한 삶이라고 합니다.

 

성경적 더러움이다,

망령된 것이다,

음행한다는 것은 육신의 위해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왜? 팥죽을 주고 장자권을 샀으며!

에서는 왜? 장자권을 팥죽에 팔았을까요?

이는 야곱은 장자권의 비밀을 알았고 에서는 몰랐다는 말입니다.

 

팥죽이란? 이 시대로 말하면 돈입니다.

돈이 곧 밥이고 팥죽입니다.

야곱이 돈을 버리고 장자의 명분을 얻고자한 것은 장자의 명분 속에 비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돈보다 장자의 명분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팥죽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럼 장자의 비밀을 살펴봅시다.

 

장자란? 첫 열매에요.

첫 열매는 하나님 것이에요.

아브라함은 첫 열매에요.

그럼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보면 장자권의 의미를 알 수가 있을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축복을 하셨는지 창세기 12장을 봅시다.

 

창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너를 축복하면 내가 그를 축복하고 누구든지 너를 자주하면 내가 그를 저주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세상에 복과 저주의 통로로 세워 놓은 겁니다.

 

이제 아브라함 때문에 복을 받는 사람이 일어나고 저주 받는 사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서 복을 받는 사람과 저주 받는 사람으로 나누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구약 시대에 예수님의 모형으로 세움을 입은 겁니다.

 

이게 장자에요.

장자란? 하나님께 복이 임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복 받는 길을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으로 고정해 놓았어요.

아브라함을 축복한다는 말은, 아브라함을 영접한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맥(脈)이 이스라엘에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장자라고 합니다.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예요.

세상나라들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복을 받기도 하고 저주를 받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심판을 몰고 다니는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의 근거로 사용하고 계신 겁니다.

 

복과 저주는 인간이 어떻게 살았느냐 로 결정되지 않아요.

오로지 하나님께서 선택한 장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되어요.

예수님께서 이 맥(脈)을 따라서 오셨어요.

 

그래서 신약에선 예수님을 하나님의 장자라고 합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하지요.

맏아들이란? 장자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자로 이 세상에 오셨어요.

이는 곧 예수님이 복의 통로란 말입니다.

신약에서 복이란? 구원이에요.

이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영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구약에서의 복은 세상 적인 겁니다.

물질적인 것이에요.

그러나 신약에 오면 영적인 것으로 바뀌어요.

신약에서 육적인 것은 가짜로 나타나요.

그러므로 신약에서도 구약식 축복관을 가지고 있으면 망하는 겁니다.

신약에선 복이 믿음으로 나타나요.

 

언약이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바뀌듯이 복도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바뀌어요.

땅에 것에서 하늘에 것으로 바뀌어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바뀌어요.

행함에서 믿음으로 바뀌어요.

신약에선 바뀐 것을 붙잡아야 해요.

 

구약의 장자권은 신약에서는 구원권으로 바뀌었어요.

그러니 야곱은 구원을 위하여 세상 것을 버렸고 에서는 세상 것을 위하여 구원을 버린 것입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다는 것은 장자권 속에 담긴 비밀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손에 쥐어 줘도 엿 바꿔 먹어 버린 겁니다.

 

에서는 자기 생존을 위해서 믿음을 팔아먹은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내가 살아야 예수도 믿는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도 내가 살아가야 하는데 이용대상인 겁니다.

 

내가 사는 일보다 예수 믿는 것이 더 중요해요.

그런데 누가 이런 말을 듣겠어요.

돈 없으면 죽는 줄 알아도 예수 안 믿으면 죽는 줄 몰라요.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취미생활로 두고 돈 버는 일을 주업으로 두고 사는 겁니다.

교회는 시간 나면 나와도 되지만 직장은 몸 아파도 나가야 하잖아요.

자신을 살게 하는 것은 돈이지 예수가 아니에요.

 

그래서 하는 말이 돈 없으면 예수도 못 믿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교회에 가보니 절실히 느끼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돈 있는 놈들만 알아주고 돈 없으니 알아주지 않잖아요.

예수 보고 나가면 되는데 예수는 안 보이고 목사만 보이니 돈 벌어서 나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돈 벌어서 나도 잘났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겁니다.

 

이 시대 교회에는 돈과 믿음은 같이 가요.

돈 많이 바치면 믿음도 좋다고 하고 돈 안 바치면 믿음도 없다고 해요.

돈 안 내는데 누가 믿음 좋다고 하겠어요.

돈만 팍팍 내 보세요.

없는 믿음도 금방 생겨나요.

목사가 믿음 좋다고 하면 믿음 좋은 겁니다.

 

그러니 교인들도 돈 벌어서 교회 가겠다고 합니다.

자연히 돈 버는 일이 예수 믿는 일보다 다 중요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전부 에서가 되고 말았어요.

에서처럼 돈을 위해 믿음도 팽개치는 겁니다.

 

에서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일을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보다 못하다고 생각해요.

에서 같은 사상으로 사는 교인들에겐 예수 믿는 일은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형편 따라 시간나면 하는 것쯤으로 생각해요.

그만큼 예수 믿는 일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요.

 

그러니 교회 오는 것은 취미생활 하듯 하는 겁니다.

어느 시대나 에서 같은 사람은 있었어요.

롯의 사위들처럼 농담으로 여겨요.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라고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이들의 사고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은혜 받는 일에 최고의 관심을 쏟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혜로운 삶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이야말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임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것이 아니고, 미련할 정도로 믿음만 지키고 사는 것입니다.

타협한다는 것은 살아남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살고자 하는 자는 죽게 되고 죽고자하는 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날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못 박고 죽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내가 지금 어떤 가치관으로 사느냐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보화로 여기고 사는지 늘 점검하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이냐!

천국을 위해 살아가느냐!

 

야곱처럼 장자의 명분을 위해 팥죽을 버리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에서같이 먹고사는 일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버리는 삶을 살 것인가?

떡이 필요한 세상에서 떡을 포기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도는 죽을 때까지 이러한 세상과 하늘에 가치관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세상을 좇아가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좇아가면 세상에서 멀어집니다.

 

은혜를 얻고자 하면 세상 것을 손해보고, 세상 것을 얻고자하면 은혜를 잃게 됩니다.

성도가 에서와 같은 사고로 살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징계를 가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가는 길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하여서 징계를 가합니다.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간섭이 고통이고 무서움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가 은혜 받는 일을 게을리 하고 세상을 좇아가면 반드시 아픔이 찾아옵니다.

징계한다는 것은 포기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징계가 없다면 그는 사생아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인간들은 목숨이 끊어지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축복으로 여기지만 불신자는 저주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된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시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불신자는 자기 목숨 지키기에 급급합니다.

알다시피 인간의 목숨은 밥으로 지켜집니다.

그러니 불신자는 밥을 목숨처럼 중하게 여기는 겁니다.

밥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 부자냐! 가난하냐! 묻지 않아요.

다만 너 하나님과 생명줄이 연결 되어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생명줄이란 예수님이에요.

 

에서는 생명줄에서 끊어져 있어요.

그러니 밥으로 생명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밥에선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밥은 땅에 것이에요.

생명은 하늘에서 와요.

하늘로부터 주어져요.

 

생명은 우리의 열심과 정성이라는 행함으로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져요.

하나님이 보내신 장자를 통해서 주어진단 말입니다.

장자라는 탯줄을 통해서 공급이 되어요.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시지 않았어요.

오직 예수라는 장자를 통해서 구원을 주세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같이 장자권을 경홀히 여기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망령된 짓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밥이 생명이 아니라 예수가 생명이라고 합니다.

밥에서 생명이 나오지 않고 장자권에서 생명이 나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밥을 위해서 살지 말고 예수를 위해서 살라고 합니다.

 

이는 삶에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밥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의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겁니다.

밥이 생명이 아니고 예수의 의(義)가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님의 피에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밥 보다 중요한 겁니다.

 

에서의 어리석음은 밥이 생명을 지켜 준다고 믿은 겁니다.

지금도 에서와 같은 사람들은 밥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그러므로 에서는 멸망 받을 자들의 표본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묻습니다.

 

교회엔 왜? 나왔습니까?

세상 풍조에 흔들리는 부귀영화를 얻고자 나왔나요?

아니면 죄를 지적하고 예수의 피를 증거하는 선지자를 보려고 나왔나요?

 

왜? 예수를 믿습니까?

왜? 교회에 나옵니까?

무엇을 구하기 위함입니까?

 

밥(돈) 입니까?

의(義) 입니까?

 

내 생명줄은 어디에 매여져 있나요?

밥 인가요?

예수 인가요?

 

부디 우리의 생명줄이 예수님에게 단단히 연결이 되어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예수님에게 주어짐을 알았습니다. 주께서 연결시켜주신 탯줄에 흠이 가지 않고 잘 보존토록 은혜로 지켜 주시옵소서. 팥죽보다 장자권이 더 소중함을 가슴 깊이 새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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