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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54강. 언약대로 일하시는 하나님 (롬 9:1-9)

by coroa 2021. 7. 20.

 

 

 

54강. 언약대로 일하시는 하나님 (롬 9:1-9)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의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동족들이 다 예수를 믿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폐하여 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혈통으로 일하시지 않고 창세전 언약으로 일을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서 구원 얻는 자와 버림당하는 자들을 일어나게 하신 것은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바울의 민족주의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바울의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민족을 넘어서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합니다.

성경을 우리 입장에서 해석하지 말고 창세전 언약으로 해석하라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럼 모든 성경의 해석은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요즈음 마치 성경을 문자적(원어) 해석이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성경 해석에 대하여 잠시 언급하고 갑시다.

알다시피 성경은 문자입니다.

문자 속에 뜻(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얻어야 하는 것은 문자 속에 담겨 있는 뜻(내용)입니다.

문자는 뜻(생명)을 담는 그릇과 같아요.

그 뜻을 영(靈)이라고 합니다.

영을 다른 말로 생명이라고도 합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을 보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 속에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생명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습니다.

 

이걸 성경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문자와 같아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생명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는 육(肉)이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 영(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靈)이고 육(肉)은 무익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성경을 문자적 의미로 풀이하면 죽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문자 자체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라고 경고 하였던 것입니다.

억지로 풀다가 망한 자들이 많다고 증거해 주고 있어요.

 

억지로 푼다는 것은 인간 입장에서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해석방법으로 성경을 이해하였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억지로 풀다가 망한 자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에도 성경 해석을 잘못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원어를 분해하여서 해석하는 것을 파자 한다고 합니다.

파자란? 문자를 사전적 의미로 분석한다는 말입니다.

문자 속의 여러 가지 내용을 찾아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위험한가 하면 본질을 곡해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문자는 생명을 다 담아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듭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제가 누구에게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그 내용 중에 야! 그 사람 “손 좀 봐 주어라!” 라고 하였다고 합시다.

 

“손 좀 봐 주라” 는 말을 글로 써서 보냈어요.

문자적으로 보면 “손을 봐 주라” 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 마음이 성령의 감동이라고 합시다.

 

그럼 제가 손 좀 봐 주라는 말은 그 놈을 혼 좀 내주라는 말입니다.

제 마음이 성령이라고 한다면 제 마음으로 그 편지를 읽으면 손 좀 봐주라는 말을 “혼을 좀 내 주라”는 것으로 해석을 해요.

이게 손 좀 봐 주라는 본 뜻입니다.

 

그런데 문자로 이해하면 전혀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글자 그대로 손을 봐 주는 것이 되어요.

이걸 파자 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손을 사전적 의미로 분석하게 되어요.

 

그럼 “손”을 사전적 의미로 분석하게 되고,

또 “봐 주라”는 말을 사전적 의미로 분석하게 되어요.

“손”을 사전적 의미로 파자하면 손에는 여러 가지 손이 있다!

조막 손도 있고! 큰 손도 있다!

부드러운 손도 있고! 거친 손도 있다!

흰 손도 있고! 검은 손도 있다! 는 식으로 파자해요.

 

또한 “봐 주라”는 것을 사전적 의미로 파자 하면 봐 준다는 말은 손을 세밀히 관찰한다는 뜻으로 손금도 보고 손톱도 보고 혈색도 보고,,,,하는 식으로 보게 되어요.

그럼 이 편지를 들고 와서 그 사람의 손을 요리조리 관찰하면서 답을 하기를,,,

 

제가 그 사람의 손을 봤는데 그 손은 흰 손이고 길고 참 부드럽습디다!

손금도 좋고!

참 잘 생겼습니다! 라고 했어요.

“손 좀 봐 주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이것 밖에 안 나와요.

 

그러나 편지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그게 아니에요.

손 좀 봐 주라는 말은 혼 좀 내 주라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을 한다고 하면서 손금을 봐 준다고 하면 이건 편지의 내용을 완전히 곡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원어 해석을 명가의 보도를 휘두르듯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어는 그냥 참고만 할 뿐이지 그걸 절대적이라고 하면 안 되어요.

성경의 참 뜻을 곡해하게 된단 말입니다.

원어 속에서는 하나님의 참 마음을 읽어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참 마음은 성령이 깨닫게 해 주세요.

 

그래서 베드로는 억지로 성경을 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벧후 1:20-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망한 자들이 누구인가요?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만이 성경을 해석하는 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들은 철저하게 조상의 유전으로 유대교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했어요.

그런데 예수를 죽였어요.

 

억지로 푼다는 말은 자기 생각으로 푼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성경을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 안목은 유전과 교육으로 만들어져요.

 

신학교에 가면 이 유전을 가르쳐요.

즉 정통 신앙과 전통 신앙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눈을 주어요.

그래서 교단마다 신학교마다 성경 해석법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들마다 성경을 보는 눈이 다른 것입니다.

 

신학(神學)이란? 학문이에요.

학문은 갖가지 이론을 동원하여서 분석해요.

그래서 합리적인 사고를 도출해 냅니다.

이렇게 합리적으로 도출된 것을 교리화 해요.

 

교리(敎理)가 되면 이것이 곧 성경을 해석하는 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으로 나타나면 “나는 이렇게 본다” 라는 하나의 관(觀)을 가지게 되어요.

관(觀)이란?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해석하는 틀을 말해요.

 

그래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면 자기가 배운 신학이라는 틀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히 교단의 목사들마다 성경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단마다 성경 해석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목사들마다 자기 교단의 신학교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안경을 하나씩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 안경으로 보아요.

그리고는 자기들하고 다른 해석을 하게 되면 틀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단마다 성경 해석이 달라서 강단 교류도 금지하고 있어요.

지금은 교단의 경계가 많이 무너져서 느슨해 졌지만 여전히 남아 있어요.

장로교단은 장로교 목사만 강단에 세워요.

타 교단 출신의 목사들과의 강단 교류를 금한 것은 타 교단의 성경 해석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초대교회 때도 있었어요.

역사는 늘 반복해요.

그러므로 지금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의 초림 시절에 유대교의 여러 종파들과 같아요.

그 때에도 교단이 있었어요.

바리새파니 사두개파니 엣세나파니 열심당이니 쿰란 공동체니 하는 분파들이 있었어요.

 

분파(分派)가 형성 되었다는 말은 성경을 해석하는 틀이 달랐다는 말입니다.

각 자가 성경을 해석하는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파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자기들이 보는 성경 해석이 맞고 다른 교파는 틀렸다고 했어요.

 

예수님의 초림은 재림의 모형입니다.

그럼 이 시대 영적 상황도 초림 때 상황과 동일해요.

초림 당시에도 원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율법학자들과 서기관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전통과 정통적으로 구약 성경을 해석 했어요.

이걸 유전(遺傳)이라고 합니다.

조상으로부터 전수 받아온 것으로 성경을 해석 했어요.

그 유전으로 예수를 연구하고 분석해 보니 예수는 이단인 겁니다.

그래서 원어를 근거해서 예수는 이단이라고 정죄하고서 죽였어요.

 

예수님이 이들을 보고 뭐라고 하였나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였지요.

그러면서 “너희가 조상의 유전으로 하나님을 섬기니 헛되이 섬긴다” 고 하였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성경을 자기고서도 예수를 몰라요.

모든 성경은 예수를 말하고 있음에도 정작 그 성경으로 예수를 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소경인 것입니다.

 

소경도 하나의 성경을 보는 관이에요.

성경에서 예수를 보지 못할 뿐이에요.

그러니 성경으로 예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서 복을 받고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관(觀)이 있어요.

그래서 그 눈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어요.

그럼 성경이 자기 식으로 해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선악과 사상이에요.

 

원어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이 범주에 속하였어요.

그래서 흔히들 나는 전통신앙으로 정통적으로 해석을 하였다고 합니다.

전통이나 정통이 바로 신학으로 생겨난 것이에요.

결국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 성경을 억지로 푸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나요?

 

이는 성경을 누가 기록하였느냐를 보면 알아요.

성경을 누가 기록하였나요?

성령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어요.

그런데 문자(文字)로 기록했어요.



문자란? 말을 형상으로 베껴 놓은 것이에요.  

원래 말은 형상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형상화 하였어요.

이걸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우상성이란? 신을 형상화 한 것을 말해요.

인간들이 생각에 가두어서 고정화 하여서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문자도 우상이에요.

왜? 그런가요?

말을 형상화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상이 되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을 문자라는 형상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 하였다는 말은 성경을 성령이 문자에서 본래의 말씀으로 전환시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성경을 이해하게 되면 그 성경은 글이 아니고 생명으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변화를 일으키고 거듭나게 하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생명이에요.

창조의 능력이에요.

 

하나님이 말씀 하시매 그 말씀이 담고 있는 내용물이 가현(假現)적으로 나타났어요.

하나님이 말씀 하시자 말씀이 담고 있는 내용이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곧 말씀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떨어지자 피조물이 실제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말씀이에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에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읽혀지자 그 내용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가 믿어지고!

천국이 믿어지고!

영생이 믿어진단 말입니다.

믿어지니까 실제 삶 속에서 그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예수는 가짜에요.

죽은 믿음이에요.

살아 계신 예수를 품고 사는 성도는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합니다.

 

말씀은 생명이라서 가둘 수가 없어요.

가두어지면 생명이 아니에요.

말씀은 하늘에 속한 것으로서 살아 움직이며 창조하는 일을 해요.

그러나 문자는 땅에 속한 것으로서 움직이지 않고 죽은 것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하늘의 말씀을 성경이라는 땅에 문자 속에 담아 놓았어요.

 

이렇게 되면 생명이 문자에 가두어진 것이 됩니다.

이 일을 누가 했는가 하면 성령이 하셨어요.

문자 속에 가두어진 말씀은 죽은 것이에요.

이제 이 말씀이 살아나려면 성령이 개입을 하셔야 합니다.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다고 하지요.

성령이 말씀을 문자에 가두어 두었어요.

문자에 가두어진 생명을 끄집어내려면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해요.

왜냐하면! 생명이신 말씀을 문자에 가두신 분이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문자 속에 가두어진 생명이신 말씀을 끄집어내도록 하셨어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성경을 문자로 보지 않고 문자 속에 있는 그 내용을 생명으로 끄집어내서 삶으로 실제화하여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문자 속에 가두어진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이 되어 질 때 살아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흥행 하였던 “전우치” 라는 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전우치는 하늘에 영물이에요.

그런데 그림 속에 가두어져 있어요.  

이 놈을 끄집어내려면 어떤 주문을 외워야 합니다.

그래서 도사(道士)들이 수리~수리~마수리~ 하면서 주문을 외웁니다.

그러자 그림 속에 있던 전우치가 살아서 그림 바깥으로 걸어 나와서 움직이면서 인간 세상에서 갖가지 사건들을 일으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성경 속의 예수님과 오버랩을 시켜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전우치처럼 성경이라는 문자 속에 가두어져 있어요.

그런데 성령이 예수님을 성경 속에서 끄집어내십니다.

성령이 문자 속에 가두어진 예수를 끄집어내서 실제 우리 삶 속에서 생명으로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읽으면 그 속에 있는 예수님이 실제 저벅 저벅 걸어 나와서 우리 삶 속에서 어떤 사건들을 일으켜요.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풀어내세요.

 

그럼 우리 몸은 예수님이 그려 내는 그림들이 사건으로 그려집니다.

이러한 사건으로 그려지는 삶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주체가 되어서 우리의 삶을 간섭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가요.

 

다시 말합니다.

성경도 문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생명이 책 속에 가두어져 있어요.

그 생명을 끄집어내는 것이 성령의 감동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경을 볼 때 성령의 감동으로 보게 하였어요.

그래서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에게는 성경이라는 문자를 볼 때 성령의 감동으로 그 속에서 생명을 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게 하세요.

 

그럼 아까 예를 들었듯이 “손 좀 봐 주라”는 문자 속에서 성령의 감동이 일어나면 실제로 혼 내는 사건을 일으키게 된단 말입니다.

이걸 성경을 영으로 읽는다고 합니다.

이럴 때 성경은 그냥 글이 아니고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에요.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모든 성경이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문자 속에 있던 예수님이 살아서 성도 안에서 생명으로 나타나게 된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갖고 있는 속성들이 우리의 삶으로 표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성경의 이야기가 삶 속에서 경험이 되어져요.

이럴 때 사도들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초에 있던 말씀을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바가 된다고 하게 된단 말입니다.

 

요한일서 1장을 봅시다.

 

요일 1:1-7=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 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 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태초에 있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았다고 하지요.

그리고 손으로 만진바 된다고 합니다.

이건 경험이 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사도요한은 자기가 경험한 그 예수를 증거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증거하는 이유는 이 편지를 읽는 너희도 우리처럼 예수와 실제적인 사귐을 갖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 예수를 실제적인 사귐을 갖는가 하면 그가 하신 일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세요.

이렇게 예수님이 하신 일을 사실로 믿고 사는 것을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의 이야기가 2천 년 전에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현재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살게 되어요.

이러한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성경 구절 몇 개 외워서 지식으로 주저리 주저리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가 내 피가 되고 살이 되어야 해요.

예수 믿음이 내 삶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내는 삶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아! 저 사람은 예수를 믿는구나! 라고 하게 되어요.



손발이 움직이지 않고 입으로만 믿는 것은 지식이지 생명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식으로 예수를 아는 자는 말만 뻔지르르 하고 삶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중풍병자처럼 말만 하고 손발이 움직이지 않아요.

이런 것을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고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안에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해요.

예수를 믿는다고 해요.

그러면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없어요.

성령을 받고 살아갔던 믿음에 사람들의 삶이 없어요.

이건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막말로 이단도 확신이 있어요.

모든 종교는 다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절간에 다니는 불자들에게 물어 보세요.

그들도 극락에 간다고 해요.

 

그러니 인간의 확신은 믿을 것이 못 되어요.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표현되어지게 되어 있어요.

예수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가 품고 있는 것들이 그의 삶으로 증거가 되어져요.

이걸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했어요.

그러니 아무리 입으로 나는 복음을 알고 확신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다 가짜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로 예수를 믿지 말고 삶으로 보여 보세요.

이건 억지로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 안에 예수가 살아서 움직이는 성도는 반드시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교회가 귀신의 처소가 되었다고 하지요.

 

이는 종말 시대에 교회 안에 귀신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가득히 모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쟁이들이 개구리처럼 개골~개골~ 소리만 요란하지 예수쟁이로서의 삶이라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이 시대 예수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공해가 되었어요.

그러니 하나님의 이름이 교회를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도 이런 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듯이 지금도 동일해요.

그래서 성경은 늘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 속에 있는 내용을 믿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그 사귐이 뭐라고 했나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요?

자기 피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걸 그리스도의 사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그냥 예수라 하지 않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라는 이름은 많았어요.

마치 한국에 순자 영자처럼 많았어요.

그러나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단 한 분 뿐이에요.

 

그리스도란? 메시야 라는 말입니다.

메시야란? 구원주이고, 주이고, 왕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의 구원주이고, 나의 왕이고, 나의 주인이란 말이에요.

한마디로 나사렛 촌놈인 그 예수가 나의 왕이고 내 주인이고 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신 분이란 말입니다.

 

이건 인간적으로 믿을 수가 없어요.

성령이 임해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제자들도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자 이 사실들이 믿어지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 사실을 증거하기 시작을 합니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보세요.

오순절 날에 성령이 사도들에게 임합니다.

그러자 사도들이 천하만국에서 올라온 경건한 유대인들에 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주(主)이시고,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신 메시야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너희 왕을 죽인 원수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말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사역을 위임을 받은 자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하라고 사명(使命)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럼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주의 사자(使者)라고 해요.

사자(使者)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자란 말입니다.

그럼 사자(使者)는 곧 하나님을 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이러한 사명을 맡긴 사자(使者)들에게 기름을 부었어요.

기름을 부었다는 말은 성별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별하여서 기름을 부은 자들을 구약에 보면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있었어요.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에게 통합 되어 나타나요.

 

예수님이 탄생 할 때 동방 박사들이 세 가지 예물을 드리지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어요.

이는 예수가 이 예물의 주인공이란 말입니다.

 

황금은 왕을 상징하고!

유향은 제사장을 상징하고!

몰약은 선지자를 상징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왕이고 제사장이고 선지자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사역을 다 하셨어요.

지금도 하고 계시구요.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낸 사자(使者)에요.

하나님은 요단강에서 이 사실을 천명해 주었어요.

보라! 이 예수가 바로 내가 보낸 사자라고 성령으로 기름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에요.

그러니까 구약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는 모두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왕”은 우리를 책임지고 주관하시고 다스리는 분이고!

“제사장”은 우리 죄를 위하여 희생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는 분이고!

“선지자”는 우리 죄를 고발하다가 죽임당하는 분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분임을 고백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해되시나요.

 

쉬운 말로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를 담는 그릇인 셈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는 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들이 유대인이었고 바리새인들이었어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일컬어 보라! 너희 왕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이 일제히 소리칩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 우리의 왕은 가이사이다!

우리는 저런 놈을 왕으로 둔 적이 없다고 합니다.

저런 놈은 십자가에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십자가에 죽였어요.

이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성령께서 너희가 너희 왕을 죽인 자들이라고 고발을 합니다.

너희가 너희 왕이 아니라고 죽인 그 예수가 바로 너희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통곡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어찌할꼬!

우리가 우리 왕을 죽인 원수들이구나!

이는 곧 우리가 예수의 껍데기만 보았지 예수 속에 있는 내용을 보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왜? 이러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이는 어느 시대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지금도 성경을 껍데기만 보는 사람과 성경 속에 담겨진 그 내용을 보는 사람이 있겠지요.

머리로 믿는 사람과 마음으로 믿는 사람이 있어요.

 

성경을 껍데기만 보는 사람은 문자풀이를 하여서 교훈만 얻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보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로 보아요.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내용으로 살아요.

 

그럼 오늘 본문도 두 가지 해석을 할 수가 있겠지요.

겉으로 나타난 문자적인 것과 감추어진 예수그리스도 이야기가 있겠지요.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 이 두 가지를 다 이해를 하여야해요.

 

그래서 제가 성경을 볼 때는 항상 일차적으로는 문자적 해석을 하고 교훈을 얻고,

거기에 머물지 말고 그 다음에 영적 해석을 하여 생명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문자적 해석으로 교훈을 얻고 영적 해석으로 생명을 얻어야 해요.

생명을 얻는다 함은 이 말씀이 담고 있는 내용이 내 것이 되어서 삶 속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그 내용을 믿어지게 하고 살게 하세요.

 

그럼 오늘 본문을 먼저 문자적인 해석을 하여서 교훈을 얻어 봅시다.

 

오늘 본문을 표피적으로 보면 복음으로 인하여 아파하는 바울의 애끓는 심정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골수 유대인이었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어요.

 

바리새인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주의자들이에요.

그리고 예수를 죽인 자들입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율법신앙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유대교로부터 출교 당하였어요.

바울은 인간적으로 보면 자신을 이단이라고 하여서 좇아낸 그들이 미워요.

 

하지만 자신이 성령으로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입고 보니 율법에 가두어져 있는 자기 동족들이 너무도 불쌍한 것입니다.

왜? 불쌍한고 하니 자기 형제들이 보물 지도를 가지고서도 보물을 만나지 못하고 도리어 보물을 발로 차 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차라니 내가 지옥 가고 말테니!

우리 동족들을 좀 구원해 주세요 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들을 보니 마치 아파서 죽어가는 자식을 곁에서 보고 있는 부모의 심정과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건 생명을 가진 자만이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에요.  

바울의 이 마음은 우리가 자식을 키워보면서 느끼는 마음입니다.

부모들은 아픈 자식을 보고 있자면 차라리 내가 아프고 말지,,,라고 탄식하게 되잖아요.

바울이 지금 그런 심정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차라리 나를 아프게 하소서! 라고 기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모두가 자식의 아픔 앞에서 이러한 통절한 아픔들을 감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겐 누가 시키거나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고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마음이에요.

자기 배가 아파서 낳은 자식 앞에서 어미는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쏟아냅니다.

자기 살점을 뜯어 먹여서라도 살리고자 하는 것이 어미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모의 심정을 바울이 지금 토설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찾아오심으로 인하여 구원의 은혜를 입고 보니까.

구원이란 엄청난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고 보니 자기 동족들이 불쌍한 것입니다.

 

예전에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에 보면 어떤 사람들은 배가 침몰하는데 거기서 구명보트를 타고 살아나는 행운을 얻습니다.

그런데 침몰하는 배 위에 자기 가족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배와 함께 가라앉는 가족을 보면서 혼자 사는 것이 미안하여 차라리 내가 그 배에 있고 가족이 구명보트에 올랐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절규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게 구원 얻은 자들이 마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물론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구원 받은 그 뒤편에는 버림당한 자가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그들을 향하여 긍휼의 마음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 아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복음을 몰랐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게 되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복음 아는데 너는 모르지 하면서 무시하면 안 되어요.

그건 은혜를 모르는 것이에요.

긍휼의 마음이 일어나야 해요.

그래야 그 사람이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성도인 것입니다.

 

예를 듭니다.

두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어갑니다.

마침 그리로 지나가는 배가 이들을 발견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배는 단 한 사람만이 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이 물에 빠진 한 사람의 손만 낚아채고 배에 태웁니다.

배에 타지 못한 사람은 물에서 죽어갑니다.

그 사람도 다른 배가 와서 구해주면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럼 구조 당한 사람은 어찌 해야 할까요?

나 구원 받았다!

자랑해야 할까요?

아니면 지나가는 배에게 저 사람도 좀 살려 주세요! 라고 해야 할까요?

당연히 살려 주세요 라고 하겠지요.

 

이게 누구의 기도입니까?

성경에 보면 이런 기도를 하신 분이 있어요.

누구인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히 7:24-25=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33-34=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은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세요.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로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보존하고 있어요.

이는 구원을 받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은 우리 스스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고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어요.

마음을 품으란 말은 이미 마음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주어진 것을 품으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주신 분이 그 마음으로 살도록 간섭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요?

자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오신 마음입니다.

이는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 육신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고 피조물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계셨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몸이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었어요.

이건 자기 비움이에요.

이게 그리스도의 마음이에요.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구석 구석에 배여 있어요.

마치 양념 불고기에 양념이 배어 있듯이 말이에요.

성경 어디를 펴도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들이 절절히 묻어 나와요.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을 보면서 마땅히 버려야 함에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보듬고 가시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마음을 알 때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안에 이러한 마음이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이건 우리더러 이런 마음을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러한 마음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고 부모는 많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스승은 바글 바글 많지만 부모는 적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를 지식으로 아는 자들은 수두룩한데 실제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자는 적다는 말이에요.

 

스승은 가르치는 자이고 부모는 낳고 키우는 자에요.

스승은 가르치고 삯을 챙겨가지만 부모는 자기 피와 살을 주고 키워가요.

스승은 아픔이 없지만 부모는 아픔이 있어요.

스승은 아이와 타자이지만 부모는 아이와 한 몸이에요.

스승은 지식으로 가르치지만 부모는 가슴으로 보듬어 안아요.

 

바울이 이러한 말을 지금 식으로 직역하면 복음 안다고 잘난 척 선생 노릇하는 자들은 일만 스승처럼 많은데 정작 복음으로 사는 자는 적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성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이 따뜻함으로 묻어나지 않고 차갑고 까칠해져 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

복음이 담고 있는 내용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요.

복음을 아는 비중이나 그 복음으로 사는 비중은 무게가 동일해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은 아는 것이고, 능력은 사는 것이에요.

이 둘이 동일한 중수로 함께 할 때 온전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합하여 온전한 신앙이 된다고 하였어요.

 

지금까지 오늘 본문을 문자적 의미로 살펴보았습니다.

문자적인 의미로는 먼저 복음을 받은 자들이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일어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안 되어요.

바울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내야 합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바울의 이 고백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상고해 봅시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고 난 후 자기 동족들에 대한 아픈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자기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임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의 버려짐 속에서 창세전 언약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의 혈통이나 조건을 초월하여 창세전에 언약한대로 예정과 선택과 부르심으로 하신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 진 것 같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6-8=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겉 보기에는 이스라엘이 망한 것 같지만 실상은 망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 속에 또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도 육으로 난 자와 약속으로 난 자가 있음을 본 것입니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그들 속에도 두 부류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하나님은 인간의 혈통으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선택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속에서도 육으로 난 자는 다 떨어져 나가지만 약속으로 난 자들은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안타까워하면서도 또한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안심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고래심줄 보다 더 질긴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이는 성도의 구원은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지킬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누구라도 그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안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이 약속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구원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분에 의하여 주어집니다.

그래서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이런 구원을 받은 자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구원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구원을 끊고자 하는 세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또 역설로 말하면 구원에서 끊어지는 자들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누군가가 구원을 끊어 보아야 그 구원이 하나님께로 난 구원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구원인지 알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물에 던져 보아야 수영하는 자와 수영하지 못하는 자를 구별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물 속에서 살아나지만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자는 물에 빠져 죽어요.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끊어지지 않는 자와 구원에서 끊어지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육에 속한 자이고,

누가 영에 속한 자인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8장에서 성도의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9장에서는 버림당한 자기 동족을 향한 아픔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차라리 지옥에 가더라도 자기 동족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아니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고서는 자기 동족의 구원을 위하여 아파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뭔가 모순처럼 들리지 않나요?

앞에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고서는 구원을 염려하고 있잖아요.

 

구원은 창세전에 이미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바울이 염려 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구원도 아닐뿐더러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잘못으로 인하여 잘려 나갈 구원도 아니잖아요.

 

바울은 지금 8장과 9장을 하나의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8장의 내용이 뭔가요?

성도의 구원은 창세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가요?

창세전 언약으로 구원이 주어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큰 덩치로 보면 마치 버려지고 끊어진 자들로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유대인들의 버려짐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잘려 나간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잘려 나간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어요.

그 속에서 다시 찾기 위하여 버려진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걸 로마서 11장에서 잘려나간 감람나무 가지 비유로 했어요.

하나님께서 완악한 이스라엘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이방인을 접 붙였어요.

그러다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완악한 이방인을 잘라내고 잘려 나간 이스라엘을 다시 접붙이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다시 접붙임 당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영구히 잘려 나가 것이 아니라 은혜로 택하심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잠시 버려진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게 버려짐 속에 구원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자신의 죽음을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그 영화로움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영화로움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육신으로의 살으심은 곧 저주가 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창세전에 가졌던 그 영화로움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은 저주에요.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주인 셈이지요.

 

이제 그 저주를 끝내고 원래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그 영화로운 시절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라고 하니 생경하지요.

편의상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뭔가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잖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도 구원을 받은 것이 됩니다.

 

히브리서 5장을 봅니다.

 

히 5:5-10=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육체로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아버지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구원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아들이시라도 십자가에 죽는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은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根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근원이란? 근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가지고 성도를 구원하는 하나의 근거를 마련한 것입니다.  

이제 그 근거를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이는 곧 성도들의 구원은 예수님과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과정인가요?  

이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영화롭게 살던 분이 죄의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와서 죽임을 당하시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그 영화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늘나라로 돌아오는 아들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럼 우리 성도들의 구원도 동일한 과정을 밟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간과치 마세요.

 

그러므로 구원은 기존의 세계로부터 버림당하는 것으로부터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아브라함 식으로 말하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으로 말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이란? 내가 살던 기존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부터 떠나라고 합니다.

강제로 뽑아 버리십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기존의 세계로부터 버림을 당한 것이 됩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구원을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에게 적용을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목자가 되셔서 자기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양을 찾아서 어디로 데리고 갑니까?

천국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잃어버리기 전에 양은 어디에 있었나요?

천국이에요.

 

그럼 또 묻습니다.

양을 누가 잃어버렸나요?

양의 주인이 잃어버렸어요.

 

양의 주인이 누구인가요?

이건 양을 누가 찾느냐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누가 찾으러 오셨습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되지요.

맞아요.

예수님이 자기 양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찾아내서 원래 있던 곳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데리고 가서 내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고 잔치를 벌리는 것입니다.

누가 기뻐서 잔치를 하나요?

예수님이 기뻐서 잔치를 해요.  

그래서 구원을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한다는 것은 주인을 찬미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구원 받은 성도들이 세세토록 어린 양에게 찬미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가 돌아가는 것 속에 성도의 구원에 모습이 담겨져 있어요.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 가게 됩니다.

어떤 과정입니까?

버려짐의 과정입니다.

 

구원이란? 역설적이게도 기존으로부터 버려짐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구원받은 자들 속에는 이러한 매카니즘(원리)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버려짐으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그 영화로움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도 이러한 예수님의 버려짐으로 얻는 구원에 시나리오를 적용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자기 동족을 위하여 자기가 버림당하여도 좋다고 함으로서 스스로 버림당함 속으로 뛰어드는 내용이 나옵니다.

왜? 뛰어 듭니까?

자신의 버림을 통해서 자기 동족들이 구원을 받았으면 하는 바램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마음이 누구의 마음인가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건 바울을 닮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더러 너희들도 이렇게 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루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루어 가시는 것하고!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요.

우리가 이렇게 하면 우리 의(義)가 자랑 되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면 주의 은혜가 자랑돼요.

 

하지만 우리의 본성은 이와 반대로 살고 싶어 해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다스림을 받게 되는 바탕에는 우리의 불신과 죄가 터져 나오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용서가 깔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못 이해하면 바울의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오해 할 수가 있습니다.

측은지심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본문은 바울의 측은지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양심이 있습니다.

그 양심이 불쌍한 사람을 보면 긍휼한 마음이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울의 마음은 이러한 양심 속에서 본성적으로 일어나는 측은지심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믿지 않는 형제들에 대하여 무관심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린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저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을 보고서는 안타까움에 빠져 있을 수 만은 없습니다.

이는 창세전 언약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초에 구원 받을 자와 버려짐을 당할 자로 창조했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는 이 사실을 명확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과 버려짐은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것이라고 합니다.

8장에서도 이 사실을 말했어요.

 

그러면서 9장에서는 이스라엘 속에서도 두 민족이 있다고 합니다.

표면적 이스라엘과 이면적 이스라엘이 있다고 합니다.

육으로 난 자와 약속으로 난 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야곱과 에서!

바로와 모세!

 

그리고 토기장이의 그릇 만드는 비유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이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즉 구원받을 자와 버려질 자를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 가족 중에서도 일어날 수가 있어요.

우리의 마음은 모든 가족이 다 구원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원함과 다를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 창세전 언약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야곱과 에서처럼 사랑 받고 미움 받는 두 형제를 한 집안에 두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면서 느끼는 마음이에요.

모든 가족들이 다 복음을 알기를 바래요.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럼 바울과 같은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 수가 없어요.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원망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가족 중심으로 혈통적으로 일하시지 않고 우리의 구원이 예수를 중심으로 창세전 언약에 의한 것임을 깨닫도록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으로 보면 한 가족 속에서도 두 부류가 있음을 알게 되어요.

모두가 복음을 들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그렇지 않잖아요.  

그럼 우리는 인간적으로 하나님이 야속해요.

이러면 하나님은 왜? 다 구원하지 않고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느냐고 따지게 된단 말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이 우리 보다 더 나쁜 분이 되고 말아요.

우리는 인정머리가 있는데 하나님은 인정머리가 없는 분이 되고 말잖아요.

우리 같으면 다 구원 할 텐데!

하나님은 선별해서 구원하시잖아요.

 

이러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불의가 되어요.

이게 언약 바깥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 보는 하나님 관이에요.

자기들 눈에는 하나님은 공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같으면 이렇게 일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독일에 철학자 니체가 그랬잖아요.

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하자 하나님은 미쳤다고!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광경을 보고도 침묵하느냐!

그래서 결국에는 신은 죽었다고 항변하다가 자살해서 죽었어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니체보다도 못한 분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열면 니체가 얼마나 교만하고 시건방진 놈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창세전 언약 차원에서 운행하시는데 니체는 고작하여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만 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 이런 말을 하나요?

이는 인간의 존재를 하나님의 언약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존재로부터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닫으면 인간의 존재가 전부에요.

 

그러나 성경을 펴면 인간이 있기 전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 했다고 합니다.

왜? 창조 했느냐?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창조 했다고 합니다.

 

누가 창조 했느냐?

예수님이 했다고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창조 했느냐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을 인간의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죄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하고 어떤 사람은 버려두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 되심에는 이 두 부류의 인간이 필요해요.

 

야곱을 사랑 한 것도 하나님이고!

에서를 미워한 것도 하나님이에요.

바울을 구원한 것도 하나님이고!

바울의 안타까워하면서 동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을 버려두신 것도 하나님이에요.

 

버려두심을 유기라고 합니다.

그럼 지금 유대인들을 유기 시키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다 필요해서 유기시키셨어요.

그럼 구원 받은 우리는 유기된 자들을 통해서 측은지심이 일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내가 창세전에 이미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된 자라는 것에 감사가 나와야 해요.

 

이스마엘아! 안 됐다!

에서야! 미안하다!

바로야! 정말 미안하구나! 라는 마음 보다,,,

그들을 다루어 가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왜? 저들과 다르지!

나도 저들과 똑 같은 자들인데!

왜? 나에겐 구원이 주어지고 저들에겐 버림이 주어진단 말인가?

이건 뭔가 이상해!

 

신앙은 이 이상해! 를 추적하여 가는 것입니다.

왜? 다른 이들은 지옥에 가는데 나는 어째서 천국에 가는가?

하나님께서 왜? 나를 천국에 보내는 거야?

그 원인과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감사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과 의미를 추적하면 창세전 언약이 나오고!

창세전 언약을 펼치면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 나오고!

자기 백성들은 예수를 믿고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내가 그 자기 백성에 속하여 있습니다.

이게 깨달아지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를 위해서 내가 구원을 받았고!

예수를 위해서 저들은 버림을 당한 것이구나!  

이러면 내가 사는 의미가 달라집니다.

내 존재보다 하나님의 언약에 관심을 갖게 되어요.

그럼 내 존재의 의미가 나를 위한 삶에서 예수를 위한 삶으로 바뀌게 되어요.

 

그리하여 야! 나도 마땅히 저들과 같이 저주 받아야 하는데!

나에게는 어떻게 이런 은혜가 임하였는가!

내가 엄청난 은혜를 입었구나!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영광과 찬양이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하라고 우리 주변이 우리와 다른 자들을 배치해 두셨어요.

 

성도의 구원은 약속에 의한 것입니다.

약속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이 한 약속은 변개치 못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게 하려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성령을 보증으로 받은 성도는 이러한 사실이 믿어집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환란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져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잘나서 믿음을 지켜 낸다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걸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견인이란? 앞에서 끌고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보다 강하신 주께서 기관차처럼 우리를 끌고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에서는 유대인들이 끊어져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 형제들을 보면 예전에 바울의 다메섹 이전에 자기의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선민사상과 율법의 내용들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에 신봉하는 것들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의를 가리고 있어요.

 

그래서 바울은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않는 것은 저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속에는 두 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버려짐의 약속과 취함의 약속이 있습니다.

 

버려지는 것도 언약이고 취함도 언약이에요.

그럼 이러나 저러나 언약만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에 가서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뉘라서 이를 알겠는가 라고 탄복을 하였던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예수님에 의해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로 갈라지는 것으로 되어 있잖아요.

그러자면 버려지는 자도 있어야 하고 취함을 입는 자도 있어야 하잖아요.  

이렇게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 속에서 버려지는 자가 있다고 하여도 슬퍼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창세전 언약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 자체가 두 민족으로 갈라내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서 너희와 저희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상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두 강도가 갈라지는 것으로 나타내 주셨어요.

십자가는 구원 받을 자와 저주 받을 자로 갈라내는 능력이에요.

 

구원받은 자는 저주 받은 자들을 통해서 자신이 받은 구원에 놀라움에 감사하여야 해요.

그러라고 우리 주변에 믿지 않는 자들을 포석해 두신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내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 줄 깨닫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걸 알면 바울처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일어나요.

 

그러니 우리 주변에 믿지 않는 자들을 포석해 둔 것은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드러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정적으로 보지 말고 언약적으로 보세요.

그럼 감사가 되어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는 눈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러 할 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이 깨달음으로 살아 질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깨달음이 내 안에서 생명으로 역사를 하면 관용과 관대함이 나오게 되어요.

그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불쌍한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그들을 왜? 예수 믿지 않느냐!

혹은 왜? 복음을 모르느냐고 타박을 할 것이 아니라!

주여! 종의 눈을 여시고 귀를 열어서 예수가 믿어지고 복음이 들려지게 해 주셨듯이 저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허락해 달라는 바울과 같은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이러한 마음들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구원이 자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감사케 하옵소서! 또한 내가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 깨달아지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합력하여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가는 것임을 알게 하여서 그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 할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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