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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55강.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 (롬 9:6-13)

by coroa 2021. 8. 1.

 

 

55강.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 (롬 9:6-13)

-.정낙원 목사

 

 

 

우리는 모든 인간은 다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육신의 자녀가 있고 약속의 자녀가 있다고 합니다.

  

그럼 육신의 자녀는 누구이고 약속의 자녀는 어떤 자들인지를 알아야겠지요.

내가 육신의 자녀인지 아니면 약속의 자녀인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오늘은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 받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집안 속에 두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에 육신의 자녀가 있고 약속의 자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집안에는 사랑을 입은 자녀가 있고 미움을 입은 자녀가 있습니다.

왜? 한 집안에 서로 다른 자녀를 두셨을까요?

이는 이 둘을 통하여서 이야기 해 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서 창세전 언약을 구현해 내시고 계십니다.

그럼 한 집안에 서로 다른 두 형제를 통해서도 창세전 언약을 보여 주시고 있음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집안에 서로 다른 두 형제를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로 구분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을 다르게 대우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천국으로 가게 하시고 하나는 지옥으로 가게 하십니다.

 

이것을 모티브로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천지(天地)란? 하늘과 땅을 말하는데 이는 곧 천국과 지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는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이게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입니다.

 

창 1: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神)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혼돈된 곳에서 빛과 어둠으로 갈라내는 일을 하십니다.

빛과 어둠을 갈라낸다는 말은 곧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를 갈라낸다는 말입니다.

빛에 속한 자는 천국으로 데리고 가고, 어둠에 속한 자는 지옥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습을 이스라엘 속에 그대로 배치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도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빛에 속한 자는 “약속의 자녀” 라고 하고 어둠에 속한 자는 “육신의 자녀” 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바울은 이스라엘 속에 참 이스라엘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집안은 온 세상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온 세상이 아브라함 집안을 통해서 샘플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집안을 확대하면 온 세상이 되고,

온 세상을 축소하면 아브라함 집안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확대하면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신약으로 오면 교회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집안 이야기나 이스라엘 민족 이야기나 세상 이야기나 교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은 그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다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은 약속의 자녀와 선택을 입지 못하고 유기 된 육신의 자녀가 있습니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선택과 유기를 인간의 조건으로 정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하셨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아직 태어나기 전에 말이에요.

창세전에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이건 영화 시나리오를 쓸 때 나쁜 악당과 선한 주인공으로 분류한 것과 같아요.  

영화에 캐스팅 된 배우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감독이 설정해 준 역할을 하면 됩니다.



영화 감독은 배우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영화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 주고자 합니다.  

배우가 영화의 내용을 숙지하고 자신이 어떤 연기를 하여야 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지!

그렇지 않고 자기 외모에만 신경을 쓰면 그 사람은 그 영화에서 하차시켜요.

감독은 다른 배우를 섭외해서 그 역할을 맡깁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와 같아요.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이라는 영화를 찍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했어요.

하나는 예수 안에 거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예수 바깥에 거하게 하세요.

이 배역은 하나님이 정하셨어요.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하는가요?

야곱과 에서가 아직 나기도 전에 운명이 결정 되었어요.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이 되어서 태어났고,

에서는 미움 받기로 작정이 되고 태어났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각자 운명대로 간섭을 하세요.

야곱은 사랑 받는 것으로 간섭을 하시고,

에서는 미움 받는 것으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사랑과 미움은 정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야곱은 고난당하는 모습으로 간섭을 당하고,

에서는 승승장구하는 모습으로 간섭을 당합니다.

 

야곱은 지옥 같이 살았고,

에서는 천국 같이 살았어요.

세상적으로 보면 역설적으로 나타납니다.

야곱은 미움 받는 모습으로 나타났고,

에서가 사랑 받는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야곱과 에서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야곱과 에서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그 사람의 잘잘못으로 인하여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하여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인간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항변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이러한 처사에 동의 할 수 없다고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자기가 왜? 만들어 졌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하나는 귀히 쓰는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히 쓰는 그릇으로 만들었어요.

토기는 여기에 항의하면 안 되어요.

그런 놈은 깨트려야 해요.

 

그런데 이러한 짓을 우리 인간들이 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기를 들어요.

왜? 우리를 무시하느냐고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죄가 그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기를 들도록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의 상식으로 접근하면 시험에 들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으로 일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에 방법으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방법이란? 이미 예정하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예정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대로 끌고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정 된 대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상(賞) 받을 자와 벌(罰) 받을 자는 이미 정해졌어요.

우리가 잘하면 상(賞)을 받고,

우리가 잘못하면 벌(罰)을 받는 것이 없어요.

상벌(賞罰)은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인간들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상식에 반(反)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상식은 인과율로 따지기 떄문에 상(賞) 받을 짓을 한 자에게는 상(賞)을 주고,

벌(罰) 받을 짓을 한 자에게는 벌(罰)을 주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착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에 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상식은 철저하게 자기의 행함에 결과로 주어진다는 것으로 입력이 되어 있어요.

이는 인간은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행위의 결과로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간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착함과 악함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예정하심으로 판단 하십니다.

 

여기에 인간들이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하나님을 버리고 새로운 신(神)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인간들의 상식에 맞는 신(神)을 만들었어요.

이게 종교에요.

 

세상 종교는 인간들의 상식을 바탕으로 교리(敎理)가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인간들이 만든 모든 종교의 바탕은 착한 자는 상을 주고 악한 자는 벌을 주는 상선벌악(賞善罰惡) 하는 신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행한 대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인과응보(因果應報)적인 신앙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행한 대로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복(福)과 화(禍)를 내 쪽에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종교에서는 복(福) 받을 짓을 하라고 하고, 벌(罰) 받을 짓은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목사들이 복 받을 짓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지금은 교회와 세상의 경계가 무너졌어요.

교회나 세상이나 가치관이 동일해요.

이걸 두고서 두 물이 합하였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타락입니다.

 

이렇게 두 물이 합하여 생성된 땅을 진펄과 개펄이라고 합니다.

에스겔 47장 11절을 보면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생명이 살 수가 없는 소금 땅이 된다고 했어요.

진펄과 개펄은 썩고 더러운 여러 흙이 섞여 물과 혼합된 상태의 흙을 말해요

물도 아니고 흙도 아니에요.

 

이 시대 교회가 진펄과 개펄이 되었어요.

하나님의 말씀과 뱀의 말이 혼합이 되어 증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로 무장된 목사들의 입에서 하늘에 말과 땅에 말이 섞여서 사람을 죽이는 쑥물이 되어 홍수가 되어서 범람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흘러넘치는 말은 홍수처럼 많은데 정작 마실 수 있는 생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목사나 중이나 같아요.

교회가 절간이 되었어요.

다 같은 인간의 상식으로 이야기 하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인간들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사느냐에 만 관심이 있어요.

그러니까 절간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교회 안에서도 이야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절간에서는 착하게 살아서 복 받으라고 하고!

교회에서는 열심히 해서 축복 받으라고 하고 있잖아요.

착하게 살라는 말이나 열심히 하라는 말은 동일해요.

초록은 동색이에요.

 

복이란? 댓가 없이 공짜로 거저 주어지는 은혜인데도 목사들이 강단에서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해서 복을 받으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이건 뱀에 말이에요.

그럼에도 교인들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복 받기 위해 충성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행위종교에요.

 

결국 교회가 아니고 절간이란 말입니다.

성도가 아니고 보살이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종말의 교회들을 귀신의 처소라고 합니다.

각종 개구리 영들이 모인 곳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펴면 이렇게 인간의 조건으로 상벌(賞罰)이 주어지는 행위 신앙을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을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들여보내지 않아요.

오로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하십니다.

이는 인간을 철저하게 배제 시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인간들이 동의 할 수 없다고 항변을 합니다.

왜? 인간을 무시하느냐!

하나님이면 다 냐고 따집니다.

하나님이면 다 냐고 따지는 것 속에는 우리의 주권도 좀 인정해 달라는 것이 깔려 있어요.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고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더러 동의해 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나는 이렇게 일을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성경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지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사랑 받을 짓을 해서 사랑 받는 것이 아니에요.

반면에 에서가 미움 받을 짓을 해서 미움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어요.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 마음입니다.

 

야곱이 잘나서 사랑 받고 에서가 못나서 미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과 에서는 단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창세전 언약을 펼쳐 가는데 도구로 사용이 되어지고 있는 것 뿐이에요.   

야곱과 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야곱 입장에서는 쌍수(雙手)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에서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이러한 일하심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불신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해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일을 하시는가 하면 우리의 구원을 우리의 자랑거리로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구원이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서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구원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어진 것이라는 것을 남기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내 영광을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영광만 남기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옳음만 남기겠다는 말입니다.

 

죄가 뭐냐?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는 다는 것은 곧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주인과 종과 같습니다.

종은 주인의 지시에 따라 사는 자에요.

그러므로 종과 같은 피조물은 자아(自我)가 있으면 안 되어요.

그럼 자아 중심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종이 자기 생각을 갖게 되면 매사에 하나님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철저하게 창조주 중심으로 세상을 다스려 가는데 반하여 피조물은 피조물 중심의 세상을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피조물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렵고 순응하기 힘든 것이 있어요.

이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살아가는 존재 양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고 말해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선악을 아는 일을 금하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선악과 속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은 오직 창조주만이 행사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창조주가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되어요.

 

그렇지 않고 피조물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심판하게 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지 않고 피조물이 보기에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요.

이건 창조 목적에 위배되어요.

왜냐하면! 창조주의 필요에 의하여 피조물이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선악을 판다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뱀의 미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맙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심판하는 눈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자기 입장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심판하기에 이릅니다.

이 모두가 죄가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기 생각을 안겨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 마음대로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야곱은 천국으로 보내고 에서는 지옥으로 보내면 왜? 공평하지 않게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 하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에서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

에서는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고 항변합니다.

 

결국 나는 옳고 하나님이 틀린 것이 되게 됩니다.

이게 죄인들의 세계입니다.

죄인들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은 불의(不義) 하신 분이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인간의 눈에는 불공평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왜? 라고 단서를 달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에덴동산을 떠나온 죄인들은 세상을 인간들의 상식에 맞는 나라를 건설하기에 이릅니다.

 

자연히 신(神)도 인간들이 납득 할 수 있는 상식의 신(神)을 만들어 버립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에 의하여서 상선벌악(賞善罰惡) 하시고 인과응보(因果應報) 하시는 하나님으로 둔갑 시켜 놓은 것입니다.

 

인간이 복 받을 짓을 하면 복을 주고 벌 받을 짓을 하면 벌을 주는 신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신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우상의 하나님을 단호하게 깨트려 버리는 말씀이에요.

 

그럼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일을 하시고 인간들을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르다는 말은 성질이 전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이질적(異質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靈)이고 우리는 육(肉)입니다.

영(靈)은 형이상학(形而上學)에 속한 것이고, 육(肉)은 형이하학(形而下學)에 속하였습니다.

그럼 형이상학에 속한 영(靈)이신 하나님을 형이하학에 속한 육(肉)인 인간들이 어떻게 이해를 하겠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를 어떻게 이해한단 말입니까?

이는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설령 이해한다고 하여도 고작 하여서 자기 수준으로만 이해합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피조물 수준으로만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은 육인 인간들에게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형이하학에서 형이상학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어요.

 

창조주와 피조물은 달라요.

이건 마치 빛과 어둠처럼 근본이 달라요.

창조주와 피조물은 서로 근본이 다르므로 살아가는 원리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 입장에서는 근본이 다른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당연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라고 왈가왈부 할 수가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일이에요.

우리 입장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구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두가 하나님이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필요해서 일으킨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게 유익된 일에는 감사하는데 해가 되는 일이 일어나면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였다는 것을 인정 한다면 나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높이든지 낮추든지 할 말이 없어야 해요.

왜냐하면!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렇게 살지 않고 있어요.

내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죄가 우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발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6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만물의 창조 된 배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물 속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 우리의 창조 목적을 알려주고 있는 말씀이에요.

 

만물이 그에게 창조가 되었다고 하지요.

여기서 그란? 예수님을 말해요.

왜? 창조 했는가 하면 그를 위해서에요.

즉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 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만물은 누구 중심으로 다스려져 가는가 하면 예수님 중심으로 다스려져 가요.

만물 속에 내가 있다고 했으니 우리의 인생살이도 예수님 중심으로 다스려져 가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의 인생이 우리 뜻대로 안 살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뜻대로 안 살아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우리의 인생을 논해요.

조금 만 어려워도 하나님에게 왜? 날 괴롭히느냐고 따지고 있어요.

무슨 일이든지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이 옳으니 그르니 판단하고 있단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나는 옳고 하나님이 틀린 것으로 결론을 내 버립니다.

 

이 세상에는 “예! 제가 잘못 했습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라고 하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모두가 난 잘못이 없다고 해요.

다 남에 잘못이라고 합니다.

 

마치 교도소에 수감이 된 죄수들이 이구동성으로 나는 억울하다고 하고, 나는 죄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결국 죄인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 나는 억울하다고 따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녹음해서 한 번 들어보세요.

하나님은 왜? 그딴 식으로 일을 합니까? 라고 따지잖아요.

전부 자기 입장에서 이해하잖아요.

그리고는 하나님을 야속하다고 해요.

 

이에 바울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불의(不義)하냐?

그럴 순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으신 분을 원망 할 수가 있느냐 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복음을 증거하는데 어떤 사람이 이단이라고 시비를 건다고 합시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에게 따집니다.

하나님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하면 지켜주어야지 왜? 욕을 먹게 합니까! 라고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하나님 편에 서서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야~ 이놈아! 네가 그렇게 말 하는 것은 곧 “너는 옳고 하나님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냐” 라고 일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욥과 그 친구들이 욥에게 일어난 사건을 가지고 갑론을박(甲論乙駁) 하고 있을 때 엘리후가 나타나서 양쪽 다 묵사발을 내고 있는 것과 같아요.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 이러쿵 저러쿵 한다고 입을 닫게 만든 것과 같아요.

바울이 지금 제 입과 우리 모두의 입을 닫게 만들고 있어요.

 

우리가 왜? 우리의 주장을 합니까?

이는 다 죄 때문이에요.

죄가 자기 생각을 갖게 하고 자기주장을 하도록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의 할 수 없다고 반기를 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께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따지게 하고 있어요.

 

그래서 바울이 야! 임마! 넌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야!

피조물 주제에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주둥이 닫고 그냥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 보라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둥이를 닫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이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된다는 말씀을 흘러 듣지 마세요.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우리 전후를 둘러 진치고 안수하고 계심을 농담으로 듣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에요.

 

창조 하셨다 함은 우리를 계속하여서 간섭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고 간섭 하듯이 하세요.

그냥 창조만 하고서 니 마음대로 살으라고 하시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부모처럼 우리를 창조 하셨기 때문에 일일이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것으로 인도하세요.

 

그것이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일 수도 있고 푸른 초장일 수도 있어요.

그것이 때로는 죽이는 일이기도 하시고 살리는 일이기도 하세요.

그것이 때로는 병들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세요.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세요.

선(善)을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낸 목적을 충실히 다 드러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을 우리 입장에서 이해하지 말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동족들이 넘어지는 것도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다 필요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대로 다루고 계심을 알았어요.

 

언약 속에는 두 민족이 있어요.

육신으로 난 자와 약속으로 난 자가 있어요.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 중에서 진짜 이스라엘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육신으로 난 이스라엘과 약속으로 난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 “육신으로 난 자”들과 “약속으로 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한 혈통이므로 다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약속)로 난 자들이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난 자들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약속으로 난 자들은 지옥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천국 가기로 작정을 하고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천국 가기로 작정 된 자는 반드시 천국으로 가게 하세요.

그래야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했듯이 천국과 지옥을 만드셨어요.

 

천국과 지옥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어요.

천국과 지옥을 만들었다는 말은 곧 그 나라 백성들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천국 백성은 약속으로 낳아지고 지옥 백성은 육신으로 낳아져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서 육신으로 난 자와 약속으로 난 자를 분리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주세요.

 

심판주란? 갈라내는 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천국과 지옥의 주인이 되어서 갈라내세요.

어떻게 갈라내는가 하면 예수 안에 있는 자와 예수 바깥에 있는 자로 갈라내십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를 약속으로 난 자라고 하고, 예수 바깥에 있는 자들을 육신으로 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걸 창세전 언약에서는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만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세요.

 

천국에는 약속으로 난 자들 만이 가요.

이 약속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셨어요.

그러므로 약속으로 난 자들은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구원을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이걸 구약 시대 아브라함 집안을 통해서 보여 주셨어요.

이제부터 아브라함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어 가시는지를 살펴봅시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후손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대표적으로 이스마엘과 이삭이라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두 여자를 통해서 낳았어요.

 

그런데 한 여자는 육신의 자녀를 낳았고 다른 한 여자는 약속의 자녀를 낳았어요.

결국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는 어미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지금부터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이라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어미는 하갈이고, 이삭의 어미는 사라입니다.

하갈은 첩(妾)이고, 사라는 정실부인(正室夫人)이에요.

아브라함은 첩(妾)에게서는 이스마엘이라는 종을 낳았고,

정실부인(正室夫人)에게서는 이삭이라는 약속의 자녀를 낳았어요.

 

첩(妾)이란? 바깥 부인이란 말이고!

정실부인(正室夫人)이란? 안(安) 부인이란 말이에요.

이걸 예수 안과 예수 바깥으로 이해해 보세요.

 

그럼 하갈이라는 첩(妾)에서 낳은 이스마엘은 예수 바깥에서 낳아진 자들이란 말이 되겠지요.

반면에 사라 라는 정실부인(正室夫人)에게서 낳은 이삭은 예수 안에서 낳아진 자란 말이 되지요.

하나님은 지금 하갈과 사라를 가지고 예수 안에 있는 자와 예수 바깥에 있는 자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창세전 언약을 보는 것 같지요.

맞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집안을 통해서 창세전 언약은 이런 것이라고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두 아들의 아비입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이스마엘이나 이삭은 다 같은 아들이에요.

그런데 달리 대하세요.

 

첩(妾)에게서 낳은 아들은 종으로 대하시고!

정실부인(正室夫人)에게서 낳은 자식은 아들로 대하세요.

첩(妾)에 자식은 나중에 쫓아내고, 정실부인(正室夫人)의 자식에게는 유업을 줍니다.

그러니까 한 아버지라 할지라도 어머니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으로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우리 인간들로 이해해 보세요.

한 아버지 아래서 태어난 다 같은 인간인데 어머니가 누구냐에 따라서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으로 갈라져요.

 

하나님은 아버지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에게는 두 아내가 있어요.

여기서 아내란 후손을 낳는 자라는 뜻에서 아내라고 합니다.

 

그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과 예수의 후손 둘로 구분을 합니다.

아담과 예수는 두 조상이기도 해요.

그래서 아담을 첫 아담이라고 하고 예수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합니다.

 

첫 아담에게서는 종이 생산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에게는 아들이 생산 되었어요.

이걸 아브라함 집안으로 적용하면 첫 아담은 종을 생산하였으니 하갈과 같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생산하였으니 사라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인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집안 이야기로 하면 두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첫 아담은 하갈로서 종을 낳은 어미이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는 사라로서 아들을 낳은 어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예수는 후손을 낳는다는 의미에서는 둘 다 어머니와 같은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하세요.

 

예수님이 어머니란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어머니처럼 낳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괜히 잘못 이해하여서 안상홍 증인회처럼 어머니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지 마시고,,,,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조심스러워서,,,

그러니 영적으로 잘 이해하세요.

 

다시 말합니다.

종과 아들은 어머니로 결정이 되어요.

어머니가 첩(妾)이면 종이고,

어머니가 정실부인(正室夫人)이면 아들인 것입니다.

 

첩(妾)이란 말은 종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종에게서는 종이 나오는 것입니다.

정실부인(正室夫人)은 단 하나이지만 첩(妾)은 수 없이 많아요.

 

이건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지요.

조선 시대 양반 집에서 흔히 보던 그림이잖아요.

큰 대감 집에는 정실부인(正室夫人)과 첩(妾)이 있어요.

 

가문을 잇는 자식은 정실부인에게서 난 아들이에요.

첩에 자식은 호적에 오르지 못해요.

왜냐하면! 첩에 자식은 종이기 때문이에요.

 

종이란? 법적 관계로 낳아진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첩은 법적 관계의 부인이 아니에요.

그래서 첩이나 첩이 낳은 자식들은 호적에 올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호적엔 오직 정실부인만 올라가요.

그러므로 정실부인으로부터 낳아진 아들만 아들로서 호적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법적 효력이 없으면 아들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법적 관계가 아닌 첩에게서 낳아진 종은 아비의 유업을 물려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비의 유업은 오직 법적 관계 안에 있는 정실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에게만 돌아가요.

 

이걸 성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 관계 안에서 낳아진 자들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창세전 언약이라는 법적 관계 안에서 낳아진 아들들이 누구인가요?

예수 안에서 낳아진 자들이에요.

 

이는 창세전 언약을 보면 나와 있어요.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4-5=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잘 보세요.

창세전이 나오지요.

창세전이란?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을 하셨어요.

어떤 언약인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는다는 언약입니다.

이는 예수 안에서 죄인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구원을 말해요.

 

그러니까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낳아진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고 하였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지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어머니와 같아지지요.

 

맞아요.

예수님은 우리를 낳아준 어머니와 같아요.

어머니가 물과 피를 쏟고 자식을 낳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고 우리를 낳았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씨를 받아서 자식을 물과 피를 쏟아서 낳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언약으로 인하여 자신의 피를 쏟고 언약의 후손을 구원하는 것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잘 이해하세요.

 

아브라함 집안 이야기는 창세전 언약을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했지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두 언약이 나와요.

무슨 말인가 하면 창세전 언약 안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펴면 두 언약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옛 언약과 새 언약이에요.

 

옛 언약은 종이 되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아들이 되는 언약이에요.

이러면 아브라함의 두 아내 중에서도 종을 낳은 하갈은 옛 언약이 되고, 아들을 낳은 사라는 새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이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내를 두 언약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22-31=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종에게서 낳았고,

다른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낳았다고 합니다.

 

종은 첩을 말하고,

자유 하는 여자는 정실부인을 말해요.

 

종이 누구인가요?

애굽 여자 하갈입니다.

하갈이 낳은 아들은 종이에요.

 

왜? 이스마엘이 종인가요?

이는 종이 낳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어머니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자유 하는 여자는 누구인가요?

사라에요.

사라는 자유자에요.

 

자유 하는 여자란? 법적인 아내로서 정실부인이란 말입니다.

정실부인이 낳은 자식은 법적 효력을 가진 자식이에요.

정실부인의 자식에게만 아비의 유업이 주어져요.

 

바울은 이 두 여자는 두 언약이라고 합니다.

 

두 언약이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말합니다.

옛 언약은 율법을 말하고!

새 언약은 은혜를 말합니다.

 

하갈을 땅 예루살렘으로서 시내산 언약이라고 합니다.

시내 산 언약이란? 율법을 말해요.

그러니까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다 종인 것입니다.

 

반면에 사라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하늘 예루살렘은 은혜를 말해요.

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맺은 새 언약이에요.

그러니까 새 언약으로 낳아진 자들이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신분은 우리를 낳아준 어머니가 누구냐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옛 언약이 어머니냐!

아니면 새 언약이라는 은혜가 어머니냐!

 

옛 언약 안에 있으면 종이고!

새 언약 안에 있으면 아들이에요.

이처럼 우리는 어머니가 누구냐로 운명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부계(父系) 중심의 사회가 아니고 모계(母系) 중심의 사회인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계보(系譜)가 부계(父系) 중심으로서 이어져 갑니다.

 

세상 나라들은 아버지의 성(姓)을 자식이 받아요.

아버지가 정(鄭)씨이면 아들도 정(鄭)씨에요.

세상 나라들은 이 원리로 다스려져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달라요.

이스라엘은 모계(母系) 중심으로 이어져가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성(姓)이 없어요.

성(姓)이 없다는 말은 아비가 없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을 통해서 뭔가를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함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계시(啓示)사적인 민족이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민족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 세상에다가 하나님을 알리는 일을 하세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세상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서의 삶을 적용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가족 중심이 부계(父系) 중심으로 형성이 되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모계(母系) 중심으로 이루어져요.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이방인이고 어머니가 히브리인이면 그 자녀는 히브리인으로 간주해요.

반대로 아버지가 히브리인이고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그 자식은 이방인으로 간주해요.

 

여기에 영적 비밀이 숨겨 있어요.

하나님께서 예수를 중심으로 세상 역사를 다스려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하니 잘 이해하세요.

 

“아브람”과 “아브라함”에 대하여 알아야 해요.

 

“아브람”은 아담의 후손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후손이에요.

 

그러므로 아브람이 낳은 자식은 육신의 자녀로서 종이 되고,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은 약속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낳은 자식은 육신의 자녀이고!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은 약속의 자녀에요.

 

그럼 이스마엘과 이삭의 출생 배경을 살펴봅시다.

이스마엘은 “아브람”으로 있을 때 하갈을 통해서 낳았어요.

아브람은 아담 안에서 낳아진 자에요.

 

그러니까 아브람이 이스마엘은 낳았다는 것은 아담 안에서 낳은 자식이란 말이에요.

이건 육적 자식이에요.

아브람의 힘으로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자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찾아오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 가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살펴봅시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을 합니다.

무슨 약속인가 하면 자식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약속을 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자식은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금방 자식을 주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기다려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급한 나머지 사라의 몸종인 애굽 여자 하갈을 통해서 후손을 생산합니다.

그가 바로 이스마엘이에요.

 

그러자 하나님이 나타나서 아브람을 책망을 하면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전능한 하나님이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난 것은 너는 나를 믿지 않은 자라는 책망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름을 바꾸라고 합니다.

“아브람”에서 ~ “아브라함”으로 바꿔 줍니다.

아브람의 아내도 “사래”에서 ~ “사라”로 바꿔줍니다.

이름을 바꿔 주었다는 말은 다시 태어난 인간이란 말입니다.

 

이름은 아버지가 태어나는 아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육신의 아버지인 데라에게서 받은 이름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하라고 합니다.

할례란? 남자의 생식기 표피를 자르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남자를 죽인다는 말입니다.

너는 이제 씨를 퍼트릴 수 없는 자란 뜻입니다.

쉬운 말로 고자(孤子)에요.

 

아브라함은 이제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어떤 자로 태어났는가 하면 자기 씨를 줄 수 없는 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제부터 태어나는 자식은 자기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 자식이에요.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생산 되는 자식은 하나님이 낳은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개명을 한 것처럼 사래에서 사라로 개명(改名)이 된 여자에게서 낳은 자만이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개명(改名)을 하고 낳은 자식이 바로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은 자에요.

할례란? 남자로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고 난 후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어요.

이는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낳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아브라함이 아버지가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인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람이 낳았어요.

이스마엘의 아버지는 아브람이에요.

하지만 이삭은 할례 받은 아브라함이 낳았어요.

그러므로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아진 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지 아브라함이 아닌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아들로 자랐지만 영적으로는 이삭은 하나님이 아버지에요.

이렇게 되면 이삭에게는 세상적으로 말하면 아버지가 없으니까 성(姓)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적으로 아버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람이라는 부계(父系) 중심의 육신으로 자식을 낳은 세상 사람을 상징하고!

이삭은 할례로 죽은 아버지로부터 태어났으니 육신적으로는 아버지가 없으므로 모계(母系) 중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으로 낳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시 설명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낳았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모두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두 민족이 있어요.

하나님의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 있어요.

모두가 다 하나님이 창조한 자들이지만 그 중에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들이 있단 말입니다.

 

이걸 아브라함의 두 아들로 묘사하면 육신의 자녀가 있고 약속의 자녀가 있단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역순(逆順)으로 읽어내면 하나님도 아브라함처럼 두 씨를 퍼트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곧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시청각 교제로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啓示)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처럼 두 씨를 이 땅에 퍼트립니다.

하나는 육신적 방법으로 퍼트리고!

다른 하나는 약속이라는 방법으로 퍼트리십니다.

 

육신적 방법으로 퍼트린 자식은 아담의 후손이고!

약속의 방법으로 퍼트린 자식은 예수그리스도의 후손입니다.

예수를 일컬어 약속의 후손이라고 하지요.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로 낳아진 자들은 모두가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은 아담 안에 있는 자와 예수 안에 있는 자로 분류해요.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육신의 자녀라고 하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약속의 자녀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담을 첫 아담이라고 하고, 예수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인간은 첫 아담에 속한 자와 마지막 아담에게 속한 자로 분류가 되겠지요.

 

첫 아담은 흙에서 난 아담이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온 아담이에요.

그러니까 첫 아담에게 속한 자는 다 땅에 속한 자로 육신의 자녀가 되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다 하늘에 속한 자로서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는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로서 나누어지게 되겠지요.

 

흙에서 난 아담의 계보와!

하늘로서 난 예수의 계보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계보를 육(肉)이라 하고!

예수의 계보를 영(靈)이라고 합니다.

 

아담이 낳은 자는 육신으로 난 자들이고!

예수님이 낳은 자는 약속으로 난 자들입니다.

 

이 구조를 구약에서 아브라함 집안을 통해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내가 있습니다.

하갈과 사라가 있어요.

아브라함은 두 여자를 통해서 아들을 낳습니다.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고!

사라를 통해서는 이삭을 낳습니다.

 

하갈에게는 아브람이라는 육적인 혈통의 자식을 낳습니다.

그러나 사라에게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라는 개명(改名)을 당하고 난 후에 하나님의 약속으로 자식을 낳습니다.

 

아브람은 “옛 사람”이고, 아브라함은 “새 사람”이에요.

이러면 이스마엘은 아브람이라는 “옛 사람”으로서 아담 안에서 난 자식이 되고!

이삭은 아브라함이라는 “새 사람”으로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난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개명(改名)이 되었다는 말은 아담 안에서 난 아브람은 죽었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난 아브라함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첫 아담을 상징하고!

아브라함은 마지막 아담인 예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이해가 안 되면 앞에서 다시 되돌리기 해 보세요.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소리를 해요.

저는 설교를 가능하면 가장 쉽게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유치할 정도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문자를 사전적 의미로 푸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생명에 일들을 문자로 기록을 해 놓은 것일 뿐이에요.

생명은 문자가 아니고 생명이에요.

그러므로 생명은 사전적 의미로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이건 사실로 경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경험된 생명으로만 이해가 되어요.

성령이 문자 속에 생명을 실상으로 경험게 해 주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는 성령의 감동을 주어서 성경이 생명이야기로 들려지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생명의 이야기로 들려져요.

경험하게 되어요.

그럼 하나님의 일하심을 실제로 보여지고 느껴지고 만져져요.

 

사도요한은 태초에 있는 말씀을 우리는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진바 되었다고 하지요.

이건 사실이에요.

지금도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읽는 성도는 성경 속에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저께 병원에 갔습니다.

환자들이 많이 밀려서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옆 자리에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그분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어요.

두 분이 하는 대화가 다윗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마도 목사님인 것 같아요.

그러니 목사님이 성경적 지식을 사모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교과서에 나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나는 이렇게 성경적으로 많이 안다는 식으로 사모님에게 은근히 자랑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윗 이야기는 옛날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냥 책 속에 있는 이야기처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저떻고 하는 식으로 남에 이야기 하듯이 하는 거에요.

이건 성경을 책으로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책으로 읽으면 역사 교과서가 되어요.

그럼 성경 이야기가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로 전락해요.

아주 오래된 옛날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남의 이야기 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이건 아니에요.

성경은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해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다윗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여야 한단 말입니다.

 

이럴 때 성경은 옛날 역사가 아니라 지금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야곱이 장자권의 축복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는 벧엘 광야에서 노숙을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찾아옵니다.

 

그러자 야곱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던 분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은 과거 조상들의 하나님이 아니고 현재 자기와 동행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과 같이 분명하게 하나님이 찾아온 경험을 가진 성도는 성경 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고 현재의 하나님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란? 자기 안에서 살아서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는 타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하나님으로 섬겨요.

이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이처럼 성령은 성경 속에 가두어진 하나님을 지금 나의 현실 속으로 끄집어 내 주세요.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 속의 이야기가 지금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게 되면 성경은 그냥 책이 아니고 생명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애석하게도 이 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옛날 역사로 읽고 있어요.

그러니 성경은 남의 이야기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아니고 다윗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에요.

 

다윗의 하나님을 아무리 알고 있으면 뭣합니까?

나의 하나님이어야 해요.

다윗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때 다윗은 곧 나의 자화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묵시에 속하였어요.

우리는 역사에 속하였어요.

역사와 묵시는 건너 갈 수가 없어요.

 

묵시와 역사는 차원이 다른 세계에요.

묵시는 창조주가 사는 하나님의 세계이고, 역사는 피조물이 사는 인간들 세계에요.

그러니 역사에서는 묵시를 이해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묵시적 사건으로 깨닫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서 묵시에 속한 일들을 드러내는 것을 깨달아지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지고 묵시적 사건으로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성령의 감동으로 읽어낸다고 합니다.

이러면 아브라함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의 일들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으로 들려지게 되어요.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하신다고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무슨 일을 알려 주시는가 하면 창세전 언약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창세전 언약을 모티브로 하고 일어나는 일들인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두 민족이 나와요.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 나옵니다.

자기 백성은 예수님이 구원을 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세요.

그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은 아들이 있고 구원을 받지 못한 아들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 집에 종에 아들이 있고 유업을 이을 아들이 있는 것과 같아요.

모든 백성들은 광의적으로는 다 하나님 백성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둘로 나누세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자기 백성이라고 하고!

예수 바깥에 있는 자는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라고 해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너희”라 하고, 예수 바깥에 있는 자는 “저희”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와 저희로 나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약속의 자녀라고 하고!

예수 바깥에 있는 자들은 육신의 자녀라고 해요.

 

육신의 자녀이든 약속의 자녀이든 둘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들이에요.

이것은 마치 육신으로 난 이스마엘이나 약속으로 난 이삭이나 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육신의 자녀가 살 곳과 약속의 자녀가 살 곳을 따로 준비해 두셨어요.

육신의 자녀는 지옥에 살도록 했고!

약속의 자녀는 천국에 살도록 했어요.

 

예수님께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를 하셨지요.

이 둘은 이 땅에서 하나는 거지로 살고 하나는 부자로 살았어요.

그러다가 둘 다 죽어서 아브라함 품으로 갔어요.

그런데 거지로 살던 나사로는 쉼을 얻고 있는데 부자는 고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나사로는 천국에 있고 부자는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이므로 천국과 지옥이라 말하지 않고 아브라함 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야지 길이 열리게 되어요.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라 하지 않고 아브라함 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모두가 죽으면 열조(烈祖)로 돌아가요.

이스라엘의 열조가 누구인가요?아브라함이에요.

 

그래서 부자도 아브라함 품으로 갔고 나사로도 아브라함 품으로 간 것입니다.

구약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므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지 않아요.

모두가 아브라함이라는 열조 안에 있어요.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셔서 갈라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 안에 있는 자들 중에서 육신으로 난 자들과 약속으로 난 자들로 갈라내요.

육신으로 난 자들은 그들이 살 곳인 지옥으로 보내고!

약속으로 난 자들은 그들이 살 곳인 천국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부자가 아브라함을 보고 뭐라고 하던가요?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라고 하지요.

여기서 아버지 아브라함이란? 하나님을 상징해요.

그러니까 지옥에 간 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천국에 간 자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두 아들을 각기 다르게 대하세요.

누가 낳은 자식이냐에 따라서 하나는 천국으로 보내고 하나는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옛 언약 안에서 낳아진 자들은 종으로서 지옥으로 보내고!

새 언약 안에서 낳아진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국으로 보내요.

 

쉬운 말로 어떤 대감이 정실부인의 낳은 자식에게는 대궐과 같은 집을 물려주고!

첩이 낳은 자식에게는 초가집을 물려준 것과 같아요.

 

아브라함에게 두 부인이 있었지요.

하갈과 사라입니다.

그러니까 하갈의 자식도 죽어서 아브라함 품으로 갔고, 사라의 자식도 아브라함 품으로 갔어요.

이들은 모두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아브라함 품에서 대기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셨어요.

예수님이 무덤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정실부인인 사라의 자식과 첩인 하갈의 자식을 갈라내는 것입니다.

 

하갈에게서 난 자들은 육신으로 난 자들로서 땅에 속하여서 지옥으로 보내고!

사라에게서 난 자들은 약속으로 난 자들로서 하늘에 속하여서 천국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결국 어머니가 누구이냐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고 만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예수 안에 있는 자와 예수 바깥에 있는 자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육신으로 난 이스마엘은 예수 바깥에 있는 자가 되고!

약속으로 난 이삭은 예수 안에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천국으로 보내고!

예수 바깥에 있는 자들은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아브라함 품에 있던 자들을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를 갈라내신 것입니다.

이걸 옥(獄)에 영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해요.

 

마태복음 27장을 봅시다.

 

마 27:50-53=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자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는 사건들이 일어나지요.

이건 사망 권세가 깨트려진 것이에요.

예수님이 사망을 붙잡고 있는 마귀의 머리통을 깨트린 것입니다.

 

그러자 사망에 붙잡혀 있던 구약의 약속의 자녀들이 다 살아난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살아난 자들이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지요.

이건 예수님이 구약의 아브라함 품에 있던 자들을 갈라내신 것이에요.

 

예수님이 오시자 두 민족이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약속으로 난 자들은 사망에 가두어질 수가 없으니까 예수님이 다 살려내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자 자던 자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으로 들어간 것은 구약에 약속으로 난 자들이 천국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즉 이삭처럼 언약에 자손들이 천국으로 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천국에 문을 활짝 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열조인 아브라함 품으로 가지 않고 예수님 품이신 천국으로 바로 가는 것입니다.

이해되는가요?

 

다시 본문을 봅시다.

 

롬 9:6-13=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 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낳은 자식들 이야기가 나오고!

이삭과 리브기가 낳은 자식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었어요.

이스마엘은 육신으로 낳은 자이고, 이삭은 약속으로 낳은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보(系譜)는 이삭으로 흘러갑니다.

 

이렇게 되면 육신의 자녀는 하나님 앞에 수(數)에 칠 가치가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수(數)에 칠 가치가 없다는 것은 곧 죽은 자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수(數)가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다고 하여도 하나님은 수(數)에 치지 않아요.

무가치하게 보아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는 오직 하나 이삭처럼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아진 자들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낳은 이삭을 신약의 그리스도라고 했어요.

예수그리스도가 곧 이삭의 실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삭과 리브가가 낳은 자식들 중에서도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있어요.

리브기가 쌍둥이를 낳았어요.

야곱과 에서입니다.

 

이건 곧 교회 안에도 두 부류가 있다는 말입니다.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로 말하면 육적 교회와 영적 교회가 있다는 말입니다.

 

육적 교회는 옛 언약으로 세워지고!

영적 교회는 새 언약으로 세워져요.

 

옛 언약은 인간의 행함을 신앙의 열매로 내어 놓고!

새 언약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신앙의 열매로 내어 놓아요.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으로 난 의(義)와 믿음으로 난 의(義)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왔습니다.

이제 9장 말미와 10장 초반에서 율법으로 난 의(義)와 믿음으로 난 의(義)가 어떻게 다른지를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롬 9:30-10: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義)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義)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義)요” 31 의(義)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 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義)”를 모르고 “자기 의(義)”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義)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두 의(義)가 나오지요.

믿음에서 난 의(義)가 있고!

행위에서 난 의(義)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義)가 있고!

자기 의(義)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보니 이스라엘이 전부 자기 의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행함에서 난 의를 붙잡고 있는 것이에요.

행함에서 난 의는 육신에 의에요.

 

이건 마치 아브람이 자기 힘으로 이스마엘이라는 육신에 속한 자식을 낳은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보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있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는 하나도 없고 전부 자기 행함을 의로 붙잡고 있는 이스마엘 뿐인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종이에요.

유업이 없어요.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율법지킴이라는 행위로 유업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들을 넘어뜨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너희들을 지금 육신으로 난 종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무슨 근거로 그럽니까?

이는 유대인들이 율법 지킴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율법 신앙을 넘어뜨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이스라엘을 넘어뜨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온의 거치는 반석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시온의 거치는 반석이란?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하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넘어뜨리는 것은 일으켜 세우고자 함이에요.

항상 하는 말이지만 언약 백성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복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옛 언약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지만 언약 백성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알려 주시는 일을 벌리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바로 창세전 언약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표상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모형이지 실상이 아니에요.

 

이제 아브라함의 실상으로 예수님이 오셨어요.

예수님이 자기 피로 새 언약을 세웠어요.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달라요.

 

옛 언약은 법이지만!

새 언약은 은혜에요.

 

법은 죽이는 것이지만, 은혜는 살리는 것이에요.

법은 정죄하고 죄인 만드는 일을 하지만, 은혜는 덮어주고 용서하여 의인 만드는 일을 해요.

그러므로 법 아래 있으면 다 죽고 은혜 아래 있으면 다 살아나요.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을 은혜 아래로 불러내어서 다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약속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참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은 창세전에 바로 이 영적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이 영적 이스라엘은 예수가 낳아요.

어떻게 낳는가 하면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낳아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자녀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피로 낳아진 자들인 것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천국을 유업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예수가 자신을 낳아주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했어요.

하늘 예루살렘에 누가 계시나요?

예수님이 계세요.

그럼 하늘 예루살렘은 바로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예루살렘인 율법이라는 옛 언약으로 낳아진 자들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인 은혜라는 새 언약으로 낳아진 자들이에요.

그래서 새 언약으로 낳아진 성도는 은혜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법으로 섬기면 안 되고 은혜로 섬겨야 해요.

 

신앙생활을 억지로 하면 안 되어요.

억지로 하는 것은 법이에요.

신앙생활은 일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는 것이에요.

감사는 은혜를 깨달을 때 나타나요.

 

나는 지금 무엇을 깨닫고 있나요?

나는 지금 신앙생활을 법으로 억지로 하고 있나요?‘

아니면 은혜로 감사하면서 하고 있나요.

 

스스로의 신앙이 스스로의 소속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법으로 억지로 하면 육신의 자녀이고!

은혜로 감사로 하면 약속으로 낳아진 자녀입니다.

이건 입으로 큰 소리 칠 것이 아니고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자기 안에 법이 지배하면 법으로 살고!

자기 안에 은혜가 왕 노릇하면 은혜로 살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새 언약으로 살고, 그리스도가 없으면 옛 언약으로 살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요?

새 언약의 열매를 맺고 있나요?

아니면 옛 언약의 열매를 맺고 있나요?

 

내 신앙생활이 감사로 행하여지는 것인가요?

아니면 법으로 수고로 하는 것인가요?

스스로 확증해 보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예수 안에서 약속의 자녀로 낳아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하여 예수가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하루 하루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주어진 새 언약 안에서 쉼을 누리면서 범사에 감사하며 주의 은혜를 찬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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