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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강해)53강. 하나님의 낯선 사랑 (롬 8:32-39)

by coroa 2021. 7. 16.

 

 

 

53강. 하나님의 낯선 사랑 (롬 8:32-39)

-.정낙원 목사

 

구원에는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으로서의 살아남이 있습니다.

이는 곧 옛 것은 버리고 새 것으로 채움을 입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를 바울은 겉 사람은 후패하고 속 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했습니다.

 

겉 사람은 땅에 속한 자로서 땅을 지향하고 살아갑니다.

반면에 속 사람은 하늘로서 난 자로서 하늘을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면 자연히 땅에 것은 버리고 하늘에 것을 좇아가는 형식으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구원을 기존으로부터 떠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 자체가 땅에서 하늘로 빼내심을 입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땅에서 났습니다.

땅이 고향입니다.

 

고향은 나를 존재케 하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근거를 끊어버리는 일을 단행하십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구원을 출애굽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다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땅을 근거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땅을 떠나라는 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육적으로 보면 이건 저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해괴하고 낯선 사랑이고 낯선 하나님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 해괴하고 낯선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들이 어떻게 반응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면 불순종으로 반응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형식을 담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하나님의 낯선 사랑에 대하여 상고해 볼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은 우리의 소원을 빼앗아가는 사랑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란? 사랑을 주는 자가 사랑을 받는 자를 잠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반대입니다.

사랑을 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를 잠식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가 나에게 잘 해 주어야 사랑한다고 말을 합니다.

나에게 잘 해 주지 않을 때는 미워합니다.

이건 인간의 본성이고 본능적인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자기 말도 안 듣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도 해 주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자를 사랑합니다.  

나에게 유익을 주면 사랑이고, 나에게 해를 주면 미움입니다.

결국 사랑과 미움은 내 유익으로 결정을 합니다.

이게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사랑하는 분이 사랑하는 자를 삼켜버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예수님의 인생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건 우리의 유익이 아니고 하나님의 유익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우리를 삼켜서 유익이 될는지 모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의 인생이 차압을 당하는 것이므로 아프고 싫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입장에서 이해하면 큰 코 다칩니다.

실망하고 시험 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과는 정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 인생은 종을 치게 됩니다.

 

믿음에 조상인 아브람을 보세요.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간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본토친척 아비 집에서 뽑혀짐을 당하는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사랑했다고 할 수는 있어도 아브람 입장에서는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고 도리어 해를 입은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브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미움을 입은 셈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난 후로는 고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건 인간 입장에서는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아브람을 본토친척 아비 집에 거하게 하면서 복을 주었다고 한다면 아브람 입장에서는 사랑 일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비가 된 본토친척 아비 집에서 뽑아서 아무 것도 없는 낯선 곳에 이주시키고 사랑한다고 하면 이건 사랑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뽑힘 당한다는 것은 아브람의 힘에 근원을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부모는 의지하는 힘입니다.

그럼 부모라는 힘의 근원에서 뽑혀짐을 당한다는 것은 저주이지 복일 순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는 낯설고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는 “여호와께서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타난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에서는 형통하였고 야곱은 고난 당하였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본다면 이건 틀린 말입니다.


야곱은 미움 받음 모습으로 나타났고 에서가 사랑 받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 입장에서 보면 따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나를 사랑했습니까?

무슨 이런 개 같은 사랑이 다 있습니까? 라고 항의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문을 닫으면서 하나님께서 결론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힘주어 말씀 하신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 진의(眞意)를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하나님 말씀이니 예~ 하고 따르지 말고!

도대체 하나님이 말씀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에서와 같은 형통한 삶을 원합니다.

야곱과 같은 고난의 인생은 살기 싫어합니다.

육신의 편안함을 원하지 육신의 고달픔을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고달프게 하시고서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단 말입니다.

 

차라리 사랑하지 않으면 좋아요.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고선 고달프게 하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제발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말고 날 좀 가만히 내 버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 날 세상에서 좀 편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반대로 세상에서 뽑아내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늘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린 늘 죄인으로 고발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바람과 반대되는 것으로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고 도리어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이 고발당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미리 말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 날 좀 사랑해 주세요! 라고도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아픔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기도를 하나 안하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스케줄대로 우리 인생을 간섭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 자체가 고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심히 자기 백성들의 인생을 하나 둘씩 차압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분이 어찌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우리는 육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한다고 하면 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셨으니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겠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날마다 죽임 당하는 도살할 양처럼 두신다고 합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따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은 우리에게 저주이지 사랑 일순 없습니다.

우리는 등 따습고 배 부름을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저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것을 주시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땅에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사고를 바꿔주는 일을 하십니다.

이게 하나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줄 자가 누가 있으며!

고기를 달라하면 전갈을 줄 자가 어디 있겠느냐!

육신에 부모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아버지가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어디에 것을 줄까요?

당연히 하늘에 것을 주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더 좋은 것이란?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늘에 것은 땅에서는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땅에서는 땅에 필요한 것을 주어야 좋은 선물이 됩니다.

 

우린 떡으로 삽니다.

땅에 양식은 떡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양식을 주십니다.

하늘에 양식은 말씀입니다.

 

떡을 바라는 자에게 말씀을 주면 화를 냅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년 동안의 삶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고 애굽의 양식으로 살았습니다.

애굽의 양식은 떡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광야로 빼내십니다.

그리고는 애굽에서 먹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줍니다.

하늘에 만나를 주십니다.

이건 애굽에는 없는 처음 보는 양식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애굽에 것을 달라고 데모를 합니다.

땅에 양식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땅에 것을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땅에 백성이 아니고 하늘나라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애굽과 광야는 다른 세계입니다.

애굽을 땅이라고 한다면 광야는 하늘입니다.

애굽은 땅에서 난 것을 양식으로 사는 곳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하늘에 것을 양식으로 삼고 살아가는 곳입니다.

 

애굽과 광야는 살아가는 존재 양식이 다릅니다.

 

애굽에서는 땅을 지향하고 살았지만 광야에서는 하늘을 지향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늘을 지향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산다는 말입니다.

존재 의미가 애굽에서는 내가 사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광야에서는 언약을 위하여 사는 것이 살아가는 목적이에요.

 

이처럼 애굽과 광야는 산다는 의미가 완전히 다릅니다.

이걸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떡을 안 먹는다는 말이 아니고 사는 의미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하늘에 양식을 주신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늘에서 만나를 주십니다.

만나는 하늘에 양식을 상징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만나를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묻습니다.

“만나”라는 말의 뜻이 “이것이 무엇이냐?” 입니다.

참 재미있지요.

 

이게 인간의 수준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었는데 우리는 하찮게 생각합니다.

뭐 이딴 것을 주고 그러느냐! 고 화를 내요.

 

우리는 돈을 원하는데 하나님은 영생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누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달라고 했습니까? 라고 따집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달라고 하였지 언제 돈도 밥도 안 되는 구원을 시켜 달라고 했느냐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셨는데 기뻐하지 않고 시큰둥해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고 해야 좋아하지,

예수님의 피 이야기를 하면 좋아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하늘에 양식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이것이 무엇이냐?

뭐 이런 것을 주고 그럽니까?

이걸 어떻게 먹고 산단 말입니까? 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라는 말 속에 이러한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누가 이런 것을 달라고 했습니까?

떡을 주세요.

우리에겐 떡이 필요하지 만나는 필요 없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합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립니다.

어떻게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하면서 먹으라고 한단 말이냐!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그러면서 다 떠나가 버립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알아보지 못하기는 매 마찬가지입니다.

만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나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나 동일해요.

모두가 자기들이 바라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평생 떡을 먹고 살던 사람에게 만나를 주면서 양식이라고 하고!

예수를 산 떡이라고 한다면 그걸 양식으로 먹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없어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에겐 늘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존재양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존재 양식이 다릅니다.

창조주는 생명을 주는 양식으로 살고, 피조물은 생명을 받는 양식으로 삽니다.

 

하늘은 창조주의 영역이고 땅은 피조물의 영역입니다.

이를 하늘과 땅으로 비유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땅은 인간을 상징합니다.  

모든 생명은 하늘에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늘은 생명을 주는 곳으로 말하고 있으며 땅은 하늘이 주는 생명을 받는 곳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계는 땅은 하늘에 것을 받고 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함입니다.

이걸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세요.

하나님이 말씀 하시매 창조가 됩니다.

피조물의 창조가 말씀으로 됩니다.  

이는 피조물은 말씀에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에 연결이 되어 있다 함은 순종 관계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살았다 라고 하며,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죽었다고 합니다.

 

결국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과 어떤 관계 안에 있느냐로 산 자와 죽은 자로 판단이 되ㄴ느 것입니다.

말씀에 연결 되어 있으면 산 자이고!

말씀과 떨어져 있으면 죽은 자입니다.

즉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살았고 불순종하는 자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떻게 오셨는가 하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 보이는 나라가 나온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나라를 묵시라고 하고 보이는 나라를 역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 보이는 나라가 나왔습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이 나온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님 나라가 실상이고 이 세상은 그림자가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사진과 같습니다.

이건 마치 보이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보여주는 형상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주는 사진과 같은 셈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하고 아버지의 형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지 말고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알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속에 아버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으로 인정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통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원리를 이 세상에 모형적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습니다.

이 땅에도 아버지와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설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희 아비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땅에 있는 아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는 아버지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워보면 부모와 자식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항상 좋은 것으로 주시고자 합니다.

그러나 자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좋아하는 것과 자식이 좋아하는 것이 다릅니다.

부모는 살 궁리를 하게 하지만 자식들을 죽을 궁리만 합니다.

속된 말로 자식들은 꾀를 써도 죽을 꾀만 씁니다.

  

그런데 어느 부모라 할지라도 죽을 꾀를 쓰는 자식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요구를 빼앗아 갑니다.

자식의 요구를 빼앗아 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자식치고 부모의 이러한 간섭을 사랑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부모에 대하여 원망하고 미워합니다.

 

이게 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하는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자식을 양육 하였거늘 짐승만도 못하다고 탄식을 하시는 것입니다.

짐승은 자기에게 밥을 주는 주인의 은혜를 아는데 이 놈에 새끼들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자식이듯이 하나님 또한 자기 백성들을 버리지 못합니다.

두들겨 패는 한이 있어도 버리진 않습니다.

왜? 그럽니까?

그 속에 자기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언약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천륜(天倫)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 땅의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끊어질 수 없는 관계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부모와 자식은 사랑의 관계 안에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란? 그 어떤 것으로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는 두 민족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언약 백성과 비 언약 백성이 있습니다.

언약 백성은 사랑의 관계로 있고, 비 언약 백성은 법적 관계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 백성은 사랑으로 대하시고, 비 언약 백성은 법으로 대하십니다.

 

하나님은 법 아래 있는 자와 은혜 아래 있는 자로 구분을 합니다.

법 아래 있는 자는 무조건 저주이고, 은혜 아래 있는 자는 무조건 사랑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은 언약 백성은 사랑하기로 작정을 했고, 비 언약 백성은 저주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러니 자기 백성들은 그 어떤 짓을 해도 사랑으로 대하시고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저주로 대하십니다.

여기서 저주란? 천국에서 제외 당함을 말합니다.

이건 인간 입장에서 보면 불합리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횡포라고 할 수가 있어요.

 

맞아요.

인간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횡포에요.

하나님 일방적이잖아요.

인간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펴면 인간이 인간 입장을 내 세우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가 하는 일에 토를 다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피조물은 그냥 창조주가 쓰는 도구에요.

이렇게 사용하든 저렇게 사용하든 사용되어지는 도구일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피조물의 창조 자체가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위에 말씀은 에베소서 1장과 창세기 1장과 같이 성경을 해석하는 키에요.

그렇게 중요한 말씀이에요.

특히 골로새서 1장의 말씀은 내가 누구인지 우리의 정체성을 알게 해 주는 말씀이에요.

만물의 창조 목적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 속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만물을 나로 보세요.

나를 “그가 창조 했다”고 합니다.

왜? 창조 했느냐 하면 “그를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를 그의 것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주인이 “그”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의 종”이에요.

“그”가 하시고자 하는 일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도구란 말입니다.

 

만물을 일컬어 이 세상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역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역사를 히스토리라고 합니다.

 

히스토리(History)란? “그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여기서 “그”란 역사를 만드신 주인을 말해요.

왜? 역사를 히스토리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존재 목적이 그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 자체가 예수님에 의하여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이라는 세상 역사를 누가 만들었나요?

예수님이 만드셨어요.

왜? 만들었나요?

예수님을 위해서에요.

 

예수님이 만물이라는 이 세상을 가지고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무슨 일을 합니까?

창세전에 계획된 일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라는 이 세상은 예수님이 창세전에 계획을 한 그림을 그리는 도화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그림을 그리는가요?

이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하신 언약을 그려 나가시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벌써 창세전에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로 나누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구원 받을 자와 구원 받지 못할 자로 예정이 되어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야곱과 에서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야곱의 계통과 에서의 계통이 있습니다.

야곱의 계통에 속한 자는 은혜로 대하시고, 에서의 계통에 속한 자들은 법으로 대하십니다.

 

이건 우리가 따질 것이 못 됩니다.

토기장이가 자기 필요에 따라서 그릇을 만들듯이 하나님도 자기의 필요에 의하여 사람들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창조를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반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불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받아들이고, 불신자는 안 받아 들입니다.

 

신자는 창세전 언약을 말하고 예정을 말하면 감사하고 기뻐하지만 불신자는 화를 냅니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느냐고 성질을 냅니다.

왜? 그런가요.

불신자는 자기의 존재로부터 자기 인생을 해석을 하니까 하나님의 일방적인 처사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하나님의 시다바리로 살아야 하느냐 라고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자기의 존재를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창세전 언약으로부터 출발을 합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라는 것을 압니다.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내가 창조가 되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처사에 순종으로 화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만물이고,

만물을 역사라고 한다면 내가 곧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라는 역사는 곧 나를 만드신 분인 그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그 안에서 섰다고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만물 자체가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가 되었단 말입니다.  

이걸 안다면 나는 왜? 이렇습니까! 라고 따질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입장을 피력할 수가 없습니다.



우린 내 입장을 내 세울 처지가 아니에요.

그냥 예! 하고 순종만 하면 되어요.

창조주에게 따지는 것이 죄에요.

 

죄가 뭐냐?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피조물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는 일에 사용되는 도구에요.

도구는 주인의 사용에 토를 달 수가 없어요.

토를 단다는 것은 죄에요.

 

왜? 토를 답니까?

자기 생각을 거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도 자기 식으로 이해를 하는 겁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도 자기 식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도 자기 식으로 이해하여서 좋다 나쁘다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죄가 내 생각을 가지게 하였고!

내 생각을 갖게 되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이나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자기 생각으로 해석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은 것이 아니에요.

믿었는데 자기 식으로 믿은 겁니다.

그래서 사사건건 하나님과 충돌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이사야 1장을 통해서 살펴봅시다.

 

사 1:10-14=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소돔 고모라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들이 소돔 고모라 백성이라서가 아니라 소돔 고모라 백성들과 같은 짓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잊고 자기 몸의 쾌락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돔 고모라 백성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자기들을 구원 하려고 보낸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을 상관하고자 한 자들입니다.

상관한다는 말은 성 적(性的) 유희를 즐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쾌락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했단 말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를 소돔과 고모라에 보낸 것은 구원코자 보냈습니다.

그런데 소돔 고모라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고자 오신 사자(使者)를 자기 육신의 쾌락을 좇는데 이용하고자 하였어요.  

이건 문자적으로 성 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영적인 의미가 있어요.



성경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이 간음이에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우상 숭배를 간음으로 묘사하였고!

신약에서는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정의하신 것입니다.

 

탐심이란? 하나님을 자기 유익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것을 말해요.

이를 한 마디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전부 이 세상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였어요.  

이러면 우린 모두가 간음하는 자들이에요.



우리는 간음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은 세상 것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자 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돔 고모라 백성들이 여호와의 사자를 상관하고자 한 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를 이용하여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달라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빼 내고자 오셨는데 우리는 예수를 이용하여서 세상에 착 달라붙어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소돔 고모라 백성들이에요.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소돔 고모라 백성과 똑 같은 놈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지금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불리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가옥에 가옥을 더하고 전토에 전토를 더한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 시대 교회들이 부흥 부흥하면서 교회를 늘려 가는 것과 같아요.

교인들은 믿음을 빙자해서 부자 되고 싶어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전부 마음에도 없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 유익을 얻고자 함이에요.

예배 안 드리면 혼 날까봐서 액땜 방지용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러한 마음으로 신을 찾아요.

이게 우상성이에요.

이건 예수 믿는다고 사라지지 않아요.

육신을 가지고 사는 한 이 우상성은 버려지지 않아요.

 

그래서 우린 늘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조차도 자기 식으로 해석을 한단 말입니다.

구원조차도 자기를 위한 것으로 악용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그럽니다.

야! 그 따위 생각이라면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라!

내가 너희들 대하는 것이 심히 고통스러우니까!

다시는 너희들 얼굴 안 보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러지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셨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는 있지만 정작 하나님 마음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어디 유대인들에게만 하는 말씀인가요?

지금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이에요.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신앙생활하고 있잖아요.

 

복음을 빙자해서 자기 사욕을 좇고 있고,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고 살잖아요.

신앙을 자기 유익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잖아요.

 

우리는 언약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내 행복이 중요하고 내 편안함이 중요해요.

그러니까 교회에 와 주는 것이고 예배를 드려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거지에게 밥 한 주먹 주듯이 하나님을 섬겨 주고 있잖아요.

예수도 복음도 전부 나를 위한 수단이 되고 말았잖아요.

 

이사야의 책망을 나에게 하는 것으로 들려야 합니다.

이런 말씀 앞에 마음이 찔림을 당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해요.

우리도 우리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있으며 우리도 우리 맘대로 하나님 뜻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생각은 땅이에요.

이 둘은 하나 될 수가 없어요.  

기차 레일처럼 평행선을 이루고 가요.

이건 좁혀지지 않아요.

그대로 죽을 때까지 가요.

 

그럼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주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두들겨 패고 징계는 할지라도 잘라 내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택하였기 떄문에 긍휼을 베풀어서 용서하고 사랑해 주는 수밖에 없어요.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걸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마땅히 잘라내고 저주해야 함에도 이방인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하고 징계는 당하게 하지만 결국에는 그들을 용서와 사랑으로 고토로 불러들이고 구원을 하신단 말입니다.

우리 같으면 말 안 들으면 갖다 버리면 되는데 그러지 않고 버렸다가 다시 찾아오세요.

 

왜? 그런가 하면 언약으로 맺어진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사랑하기 때문에 두들겨 패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성도들의 모형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시청각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구약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입니다.

신약의 성도들도 새 언약으로 생겨난 자들입니다.

그래서 언약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지요.

이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에 사람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다스려져 가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예수님의 새 언약을 모형(模型)하고 있어요.

아브라함 언약을 잘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새 언약이 그 속에 씨눈처럼 담겨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가지고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 해 내는 새 언약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 이스라엘은 곧 우리들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 이야기가 구약 이스라엘 속에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지금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구원해 가고 있는지를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일컬어 “기능적 이스라엘” 이라고 합니다.

 

기능적 이스라엘이란? 시청각 교재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속에도 두 민족이 있어요.

육으로 난 자와 영으로 난 자들이 있어요.

이걸 사도 바울은 표면적 이스라엘과 이면적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육적 이스라엘을 시청각 교재로 사용하고 계세요.

그렇다고 육적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구원은 예수님이 세운 새 언약으로만 주어져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에게만 주어져요.

 

육적 이스라엘 속에서도 예수 믿는 자들이 있어요.

이들이 이면적 이스라엘이에요.

우리도 이면적 이스라엘이구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로는 구약의 아브라함 언약에서 예수님의 새 언약으로 나오는 것이 출애굽이 되어요.

즉 구약 신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출애굽이란 뜻입니다.

 

구약 신앙이 뭔가요?

율법이에요.

율법에서 빼내심을 입는 것이 출애굽이에요.

 

율법을 옛 언약이라고 하지요.

옛 언약이란? 새 언약을 전제로 하는 언약입니다.

새 언약을 주신다는 의미에서 옛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새 언약이 주어지면 더 이상 옛 언약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어요.

그건 저주에요.

영적으로 구원이란? 옛 언약 안에서 새 언약 안으로 빼내심을 입는 것이 됩니다.

 

새 언약이 뭔가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구약은 아브라함 안에 있었지만 신약에는 아브라함 안에서 예수 안으로 나와야 합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옛 언약 안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새 언약 안으로 불러들이십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12 제자들입니다.

12 제자들은 모두가 옛 언약 안에 있다가 새 언약 안으로 빼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건 마치 구약의 12 지파가 출애굽을 한 것과 같아요.

구약의 12 지파가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서 성막 중심으로 살지요.

이는 신약의 12 제자가 율법에서 빼내심을 입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사는 것과 같아요.

 

구약의 아브라함은 신약의 예수님을 상징해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아브라함 언약은 옛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혈통적인 아브라함 언약 안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어요.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는 아브라함을 붙잡고 있으면 예수님을 가리는 것이 되어요.

왜냐하면! 아브라함 언약은 예수님의 새 언약을 보여주는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에서는 육적 이스라엘이 나왔지만, 예수님의 새 언약에서는 영적 이스라엘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영적 이스라엘이 받는 것이지 육적 이스라엘이 받는 것이 아니에요.

육적 이스라엘은 예표에요.

실상이 아니고 모형이란 말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모형이고 예수님의 새 언약이 실상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는 아브라함 언약을 붙잡고 있으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그러잖아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하지 말라!

하나님은 여기 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 후손을 만들 수가 있다고 하잖아요.

이게 엄청 중요해요.

 

쉬운 말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진(寫眞)과 같아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사진이 필요해요.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나면 사진은 용도를 다 합니다.



사진은 실물을 알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물이 오면 사진은 뒤로 사라져야 합니다.

이때부터는 사진 붙잡고 있으면 안 되고 예수님 하고 살아야 해요.

그렇지 않고 계속하여서 사진만 붙잡고 있으면 사진이 실물을 가리는 것이 되고 말아요.

 

이렇게 되면 사진을 찢어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진을 두면 진짜를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율법은 개혁 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온전한 것을 오면 사라질 것이라고 했어요.

 

바울이 그러지요.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몽학선생이란?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길잡이란 말입니다.

즉 사진과 같단 말이에요.

사진을 통해서 진짜를 만났으면 이젠 사진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되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실상이신 예수님이 오셨는데 아브라함 언약만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혈통적 이스라엘을 고집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은 영적으로 생겨나요.

이건 아브라함의 실상이신 예수님이 만들어 내세요.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혈통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육적인 아브라함의 혈통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새 언약을 보여주는 사진과 같아요.

예수님이 새 언약을 세웠으면 이젠 아브라함 언약을 버리고 예수님의 새 언약을 붙잡아야 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옛 언약을 붙잡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야! 내가 왔잖아!

내가 진짜 아브라함이야!

아브라함은 나를 증거하였어!

 

그러자 유대인들이 발끈 하면서 너는 뭐냐!

니가 뭔데!

우리 조상 아브라함을 모독해!

그러면서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사진이 실제를 죽여 버린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진이 실제를 가리는 미혹의 수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실제를 가리는 사진을 철거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율법 신앙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 속에서 사진 신앙을 버리는 일을 하게 하세요.

율법이라는 사진을 허상이라고 고발한단 말입니다.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물은 허상이고 진짜 제물은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이젠 율법에 의(義) 말고 율법 외에 다른 의인 예수님의 의(義)를 붙잡으라고 합니다.

옛 언약에서 새 언약을 믿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럼 사진과 같은 아브라함 언약이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창세기 15장입니다.

 

창 15:13-21=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람을 찾아옵니다.

여기가 어디인가 하면 가나안 땅이에요.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을 합니다.

무슨 약속인가 하면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때는 아브람에게는 단 한 명의 자식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약속이 참으로 요상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서 후손들을 주는데 그 후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어 살다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방의 객이 되어 고생을 하다가 돌아온다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말과 같아요.

저주 받았다가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아브람 언약 속에는 그 후손들이 이미 이방나라에서 고난을 받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애굽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애굽을 세상이라고 한다면 가나안은 하늘나라를 상징해요.

그럼 아브람과 가나안에서 언약을 하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하신 창세전 언약과 같은 의미를 띠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죄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아브람 언약은 이방나라에서 고난을 받다가 돌아오는 언약입니다.

그러니 그 성격은 동일한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과 아브람 언약을 도식으로 보면 이러합니다.

 

창세전 언약은 <하늘나라 - 세상 나라 죄에서 구원 - 하늘나라>

아브람 언약은 <가나안 - 이방 나라 고난 속에서 구원 - 가나안>

 

둘 다 언약을 체결한 장소에서 버림받다가 다시 언약을 체결한 곳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지요.

하나님의 언약은 버려졌다가 되찾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되찾아 오는 과정에서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어떤 댓가를 주고 찾아옵니다.

어떤 댓가인가 하면 흠 없는 제물이 값으로 지불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값 주고 샀다고 합니다.

성도의 구원은 값 주고 산 것이에요.

예수라는 값을 주고 사온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모티브로 주어진 것이에요.

이것이 예수님의 새 언약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람 언약은 장차 주어질 예수님의 새 언약을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전 언약이든 아브람 언약이든 새 언약이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십니다.

이는 언약의 주체가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구약에서 아브람 언약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다스려 가는 것으로 보여 주었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후손들을 아브람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다루어 가셨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이스라엘은 원래 없었던 민족이에요.

아브람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이에요.

언약이 먼저이고 민족이 나중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민족의 생존이 우선이 아니고 언약이 먼저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똑 같아요.

이걸 놓치지 마세요.  

이걸 놓치게 되면 자기 입장에서 자기 인생을 이해하게 되어요.

그럼 자기 생각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날 이렇게 괴롭히느냐고 하면서 불평하게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괴롭힌 적이 없어요.

다만 하나님이 정한 언약대로 다루고 계실 뿐입니다.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정하신 언약대로 물에도 집어넣고 불에도 집어넣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코스대로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에게는 고난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가 아니고 언약이 먼저에요.

우리는 언약 때문에 생겨난 자들이에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든지 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진다는 것은 자기 입장에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토기이고 하나님은 토기를 만드신 토기장이에요.

토기장이가 어떤 그릇을 만들든지 토기는 할 말이 없어요.

원래 없는 것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가 힘든 것은 이러한 언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모르니까 자기 인생을 챙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잉여품이에요.

 

잉여품이란? 없던 것은 받은 것이란 말입니다.

우린 티끌이에요.

먼지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지를 가지고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왜? 만들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약속하신 것을 이루기 위해서에요.

우리는 약속 때문에 생겨난 제품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시든지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어떤 그릇으로 사용하시든지 그냥 사용 당하기만 하면 되어요.

 

그런데 죄가 여기에 반발을 하도록 역사한단 말입니다.

왜? 하나님 마음대로 하느냐고 따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소리치는 겁니다.  

야! 임마!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떻게 자기를 만든 자에게 따질 수가 있느냐!

이거 아주 시건방진 놈이네!

 

신앙생활이란? 이런 시건방이 점점 사라져가는 싸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할 말이 없어지는 거에요.

욥처럼 자기 인생이 억울하다고 따지다가 한 방 얻어터지고 할 말이 없습니다 하고 자기 주둥이를 닫는 것이에요.

 

사도 바울이 그랬잖아요.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세요.

죽여도 은혜이고 살려도 은혜입니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했어요.

 

죄인 중에 괴수를 사도로 삼아 주었으면 할 말이 없어야지요.

삶아 먹든지 볶아 먹든지 알아서 하세요!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거니까!

하나님 맘대로 하세요!

난 포기 하겠습니다! 라고 항복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이게 우리 인생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순순히 응하는가요?

아니에요.

우린 끝까지 자기 인생을 챙기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러면 말로 안 되어요.

두들겨 패야지!

그래서 갖가지 사건 속으로 집어넣고 뺑뺑이를 돌리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 집어넣고 입에서 단 내가 날 정도로 돌려야 할 말이 사라져요.

욥처럼 말입니다.

 

감사는 고난을 당해보아야 나와요.

고난을 당한 자가 감사 할 수가 있지 고난을 당해 보지 않은 자는 감사 하지를 못해요.

고난과 감사는 한 셋트로 일해요.

마치 율법과 은혜가 한 셋트로 일을 하듯이 말이에요.

 

고난은 감사를 알게 하는 촉매에요.

고난을 당해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감사하는 나라에요.

천국에서 감사케 하려고 먼저 지옥에 던져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고난을 지나서 가는 곳이에요.

 

고난을 모르는 자는 천국을 몰라요.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에요.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복음에 귀함을 몰라요.

관념적으로만 알아요.

 

종 노릇을 해 보아야 해방이 주는 기쁨을 알아요.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율법 아래서 종 노릇을 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건성 건성으로 신앙생활 하다가 복음을 지식으로 알았기 때문에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게으르고 아무 것도 안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말씀 속에 생명이 담겨져 있어요.

마치 씨앗 속에 나무와 열매가 숨겨져 있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말씀을 받으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역사를 해요.

그럼 우리의 삶이 말씀이 함유하고 있는 현상으로 나타나요.

이걸 말씀이 육신화 된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행함이라고 합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이 저에게 야! 정낙원이 이웃을 사랑해! 라고 하였다고 합시다.

그럼 저는 앵무새처럼 예! 이웃을 사랑할게요! 라고 말만 하면 안 되어요.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행동을 하여야 해요.

그게 말씀이 생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삶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자 보세요.

말씀이 생명이지요.

이는 말씀 속에 생명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말씀은 생명을 담고 있는 그릇이 되어요.

도구란? 말입니다.



이걸 로고스라고 합니다.  

말씀을 “로고스”라고 하고 그 속에 있는 생명을 “레마”라고 해요.

말씀을 받으면 생명으로 나타나야 해요.

그래야 말씀을 바로 받은 것이에요.

 

그렇지 않고 말씀이 말씀으로 나오면 그건 사기에요.

그건 로고스에서 로고스로 나아가는 것이에요.

로고스에서 레마로 나아와야 한단 말입니다.

말씀이 삶으로 나타나야 한단 말입니다.

그게 생명이에요.

 

예수님이 말씀입니다.

예수님 속에 하나님 생명이 있어요.

그 생명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예수님은 그냥 말만 하지 않고 말씀이 담고 있는 생명으로 사셨어요.

죄인을 긍휼이 여기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사셨어요.

이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형이상학적인 아버지의 사랑을 형이하학적인 삶으로 풀어 내셨어요.

말씀을 생명으로 표현을 하셨단 말입니다.

 

말씀은 하늘나라에 있는 형이상학적인 것이에요.

그런데 형이하학인 세상에 왔어요.

왜? 형이상학에 속한 분이 형이하학으로 오셨는가 하면 이는 세상이 알아 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오셨어요.

이게 말씀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쉽게 설명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렸습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씨를 얻고자 함이 아니고 열매를 얻고자 함입니다.

씨를 얻고자 한다면 씨를 뿌릴 필요가 없어요.

열매를 얻고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씨를 뿌렸는데 씨 그대로 있으면 안 되어요.

그건 죽은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 것은 씨를 얻고자 함이 아니고 열매를 얻고자 함이에요.  

그럼 씨는 씨로 있으면 안 되고 자기가 죽어서 씨 속에 들어 있는 열매를 토해내어야 합니다.

이럴 때 생명이 살아 있다고 합니다.

씨가 그대로 있으면 죽은 것이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를 믿는 삶이 나와야 해요.

예수가 함유하고 있는 것들이 삶 속에서 사건으로 현상으로 나타나오게 된단 말입니다.

주둥이로 사랑한다는 말만 하지 말고 실제로 몸으로 사랑을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이건 행위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성화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냥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삶이에요.

 

주둥이로만 사랑하면 아픔이 없어요.

그러나 실제로 몸으로 사랑하면 내가 부인되어지는 아픔이 있어요.

이걸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을 받으면 복음 속에 담겨져 있는 생명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주둥이로만 복음이 나오면 그것은 사기 치는 것이 되어요.

 

야고보서를 보세요.

 

어떤 사람이 헐벗고 굶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야! 이 사람아! 이 추운 날씨에 그렇게 헐벗고 다니느냐!

옷을 재대로 챙겨 입고 다녀야지!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말로 할 것이 아니라 옷을 입혀 주라는 겁니다.

 

굶으면 밥을 먹여야지 입으로만 밥 먹고 다니라고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밥을 사 먹이는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고!

주둥이로만 밥 먹고 다니라고 하면 그건 귀신의 믿음이고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옷을 입고 다녀라!

밥 먹고 다녀라 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 말씀으로 뱉어지는 것이고!

옷을 입혀주고 밥을 먹이는 것은 말씀이 생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도 이렇게 말로만 예수를 믿는 자들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야고보 사도가 입으로만 믿지 말고 믿는 바를 삶으로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거짓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지요.

이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살아 있는 믿음 속에는 믿음이 함유하고 있는 것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행함이라고 해요.

이게 없으면 가짜에요.

스스로 속고 있는 겁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어요.

그러니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복음에 반(反)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마귀에게 속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행함이 없는 것은 그 믿음 자체가 죽은 믿음이고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귀신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복음을 죽은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복음 속에 담겨져 있는 예수님의 생명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의 행함으로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산 나무에 꽃이 피고 죽은 나무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말과 같아요.

꽃이 핀 걸 보니 살았구나!

꽃이 피지 않는 것을 보니 죽었구나! 그 말이에요.

 

그 속에 예수가 있으면 예수의 삶이 나오고 그 속에 예수가 없으면 예수의 삶이 나오지 않아요.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거에요.

그러니 나 믿음 있다고 말하지 말고 믿음으로 사세요.

나 복음 안다 하지 말고 복음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을 보여 보란 말입니다.

 

나는 포도나무다 라고 하지 말고 포도를 보이세요.

포도는 보이지 않고 맨날 입으로만 나는 포도나무다 그러지 말고!

열매로 나무를 알아요.

 

복음은 논리가 아니에요.

생명이에요.

그러니 복음으로 사세요.

알아먹지도 못하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시부렁거리지 말고!

뭐가 그리 복잡하고 어렵나요.

 

아무리 유식한척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해도 그 안에 빛이 있는 사람은 안 속아요.

그게 로고스인지 레마 인지 알아요.

로고스 가지고 레마 인척 사기 치지 마세요.

로고스를 먹으니 그렇게 사납고 맛대가리가 없는 것입니다.

 

행함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에요.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서 자연발생적으로 나오는 것이에요.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스스로 사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산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강요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냥 말씀만 던져 놓으면 그 말씀이 그 사람 속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피어나게 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어떤 사건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든지!

교회에 봉사하든지!

섬기고 봉사하고 나누고 베푸는 모습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나타날 때 신앙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일컬어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합니다.

여자가 남자의 씨를 받으면 온 몸이 남자가 준 씨앗이 자기 안에서 자라가게 하는 것으로 시스템이 바뀌어져요.

여자의 몸은 씨를 생명으로 토해내는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씨가 여자를 주장하게 되어요.

그러니 여자는 자기 삶을 살지 못하고 씨가 주장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해산의 수고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 말씀이라는 씨가 우리 안에 심겨집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어요.  

그럼 우리의 인생은 예수님의 인생으로 시스템이 바뀌어져요.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주장하게 되어 있어요.

그럼 우리 몸은 예수님이 그려내고자 하는 삶들이 현상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행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가 그 안에 거하는 성도의 인생은 후패해져 가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차압당하고 예수의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우리에겐 엄청난 고난이에요.

 

우리는 우리 인생을 살고 싶은데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 인생으로 살고자 하는 것을 죄라고 고발하고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집어넣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싫은 겁니다.

아파요.

 

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픔이 여자가 해산하는 아픔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건 해산을 하면 구원이 주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구원이란 마치 여자가 잉태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처럼 구원 속에도 예수의 삶으로 살아내는 아픔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진짜 복음을 받은 성도들은 더 열심을 내고 더 섬기고 더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나타나지 않는 자들은 죽음 믿음이고 다 가짜들이에요.

그가 안다고 하는 복음은 죽은 복음이고 그가 가진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에요.

죽었기 때문에 생명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말할게요.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가?

계시다면 그 예수가 나를 어떻게 간섭을 해 가실까?

복음을 빙자하여 내 맘대로 살도록 내 버려두실까?

아니면 나를 예수님의 삶으로 이끌고 가실까?

아무 것도 안하는 식으로 방치할까 아니면 어떤 일을 하게 하실까?

스스로 진단해 보세요.

 

바울의 말처럼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 스스로 확증해 보세요.

죽은 예수이면 여러분 맘대로 살도록 내 버려두실 것이고!

산 예수라고 한다면 여러분 맘대로 막 살도록 내 버려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말씀은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피로 값 주고 산 자들을 예수님의 역사로 써 가신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모두가 이러한 그리스도 때문에 나타나는 것들이에요.

우리가 미워서 두들겨 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려가고자 우리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 고난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그랬어요.

고난당함이 내게 유익이라고 했잖아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잖아요.

 

감사케 하려고 고난 속으로 집어넣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은 역설로 주어져요.

이 역설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비밀(秘密)을 아셔야 해요.

 

오늘 본문이 뭔가요?

하나님 사랑이잖아요.

그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걸 사랑으로 받지 않고 저주로 받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과거에 호세아 선지자가 그랬어요.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어요.

하나님을 몰라서 망한다는 겁니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는 우리는 찢으시고 싸매는 분이라고 하잖아요.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의 귀함을 알게 하시려고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 가게 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역설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아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맨 날 원망하게 되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대하시는데 우린 맨 날 왜? 나만 가지고 들들 볶느냐고 지랄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사랑하는데 말이죠.

 

이스라엘은 자기들 인생이 없어요.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도구로 사용 당하였어요.

그래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애굽에 종살이를 하게 되었고 또한 자기들 의지와 상관없이 출애굽을 하였고 가나안으로 이끌림을 받고 들어간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이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창세전 언약이 우리를 끌고 다녀요.  

마치 벧세메스로 가는 두 마리 암소 등짝에 법궤가 실려서 자기 죽을 곳으로 끌고 가듯이 우리도 창세전 언약이라는 법궤가 우리 등짝에 올려져서 이랴! 하면서 우리가 죽을 자리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는 줄 알았는데 죽은 것이 아니고 산 것입니다.

죽고 나니 거기가 천국인 것입니다.

우리더러 죽으라고 하면 안 죽으니까 하나님이 강제로 죽게 하는 것입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주고 그 대상을 자기 것으로 삼아버리는 것이에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먼저 남자 것을 여자에게 다 주어요.

그리곤 그 여자를 자기 것으로 삼아 버리잖아요.

그 여자를 소유하잖아요.

이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사랑법이에요.

 

쉽게 말할게요.

사랑이란? 나를 위해서 그 사람을 사오는 거에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은 그 사람을 내 곁에 두고자 함이에요.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돈을 투자하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자기 몸을 주는 겁니다.

 

이게 구약의 결혼 풍습에 잘 나타나 있어요.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은 성도의 구원 이야기가 담겨져 있어요.

이스라엘에게 있어 여자란? 남자의 소유물이에요.

왜? 그런 줄 아세요.

값을 주고 사 왔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결혼 지참금을 주어요.

말이 좋아서 신부이지 실제로는 돈 주고 사온 물건이에요.

사도 바울이 그랬잖아요.

너희는 값을 주고 사온 자들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린 그동안 내 몸을 나를 위하여 사용해 왔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몸을 값을 주고 사오고서는 아들을 위하여 살게 한단 말입니다.

나를 위하여 살면 그건 악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팔려 왔음에도 자기가 주인으로 살고 싶어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니야!

너의 인생은 예수의 것이라고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일평생 가요.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이 싸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이게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년이에요.

구약 이스라엘은 광야에 나와서 이 싸움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자기를 위하여 살았어요.

그런데 광야에 나와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맘대로 갈 수도 없어요.

텐트 치는 장소도 하나님이 정하세요.

그리고 떠나고 정착하는 모든 것도 하나님 맘대로 에요.

 

구름 기둥이 인도 하면 정착하고 싶어도 가야 해요.

반면에 더 가고 싶어도 구름 기둥이 움직이지 않으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기다려야 해요.

이걸 주께서 발걸음을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광야에서는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어요.

먹는 것에서부터 움직이는 것 하나 하나를 다 간섭 받는단 말입니다.

이건 죽을 지경인 겁니다.

그러니 사사건건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엔 에이 씨!

나 가나안 안 갈래!

애굽으로 돌아갈래!

하나님 혼자 가세요! 라고 데모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 놈에 새끼들이 하면서 두들겨 패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불 뱀을 보내서 물어 죽게 합니다.

죽이면 죽였지 애굽으로 돌려보낼 순 없다는 말입니다.

 

돌아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따라 가자니 앞 길이 캄캄 한 겁니다.

그러니 나오느니 한숨이고 원망이고 불평입니다.

이게 성도의 신앙생활이에요.

 

신앙생활이 뭔 줄 아세요.

두들겨 맞으면서 천국 가는 거에요.

이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은 이런 악당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종자가 글러 먹었다는 거에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한 번 약속 하신 것은 끝까지 지켜내신다는 겁니다.

속이 푹푹 썩으면서도 자신이 뱉어낸 약속이기에 끝까지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약속이 담고 있는 사랑이에요.

 

저주란? 내버려두는 것이고

사랑이란? 징벌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 하실 때에도 너희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한다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이방나라들이 나쁜 일을 했을 때 벌을 내리셨는가요?

아니에요.

가만 내버려뒀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언약 바깥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나쁜 짓을 할 때는 여지없이 징계가 주어졌어요.

그것도 이방나라를 들어서 말이에요.

이방나라를 몽둥이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징계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것도 다 언약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 성도가 당하는 징계는 언약이라는 범위 안에서 주어지는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성도가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 받는 것의 모형이에요.

그러니 구약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빼내심을 입고 가나안까지 가는 여정은 곧 성도가 이 세상에서 천국 가는 것의 모형인 것입니다.

 

이러한 그림이 구약 구석 구석에 담겨져 있어요.

출애굽 사건 속에도 담겨져 있고!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하는 것에도 담겨져 있어요.

 

이건 모두가 하나의 그림이에요.

장차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질 구원의 모형적인 것들입니다.

이게 실상으로 나타난 것이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빼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 주시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법 아래서 은혜로 옮겨지는 구원을 우리가 했나요.

아니에요.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해 주신 겁니다.

왜? 간섭을 해 주셨는가요?

이는 우리 독자적으로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간섭당하는 것이에요.

간섭당하지 않는 사랑은 거짓이에요.

그 간섭당하심이 갖가지 고난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픕니까?

아프다고 하세요.

그럼 왜? 아픔을 당하는지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걸 알면 더 이상 아픔이 아픔으로 남지 않아요.

아픔 속에서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더 많이 알아가기를 바라세요.

그래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푸시고 계신 것입니다.  

부디 이 간섭하심이 하나님의 사랑임이 깨달아지는 은혜가 임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눈을 여기고 귀를 여셔서 우리의 발걸음 하나 하나가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안목들이 더 넓어지게 하시고 더 깊어지게 하시고 더 높아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범사가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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