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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59강. 아들이 받는 징계 (히 12:4-13)

by coroa 2021. 7. 26.

 

 

59강. 아들이 받는 징계 (히 12:4-13)

-.정낙원 목사

 

 

 

에덴동산엔 두 과실이 있습니다.

생명과는 먹으면 영생을 하고 선악과는 먹으면 죽습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고,

죽음이란? 하나님과 격리되는 것입니다.

 

두 과실 속에는 “두 생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생명과는 “하늘에 생명”이고, 선악과는 “땅에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생명과를 먹으면 “천국”에 가고 선악과를 먹으면 “지옥”에 갑니다.

 

이 두 과실을 “두 법”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생명과 속에는 “생명의 법”이 담겨져 있고, 선악과 속에는 “죽음의 법”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악과를 먹은 인간 속엔 죽음의 법이 담겨져 있다는 말이 됩니다.

맞습니다.

 

성경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을 죽은 자로 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죽은 자의 조상이 되었어요.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죽은 자로 태어납니다.

 

죽은 자에게선 생명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인간의 그 어떤 착함도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죽는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은 생명과에서 나오는 것만 선(善)으로 여깁니다.

하나님 앞에선 선악과에서 나오는 것은 무조건 악(惡)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인 인간이 내어 놓는 그 모든 것은 죽음이고 하나님 앞에선 죄가 되겠지요.

인간들이 착함이라고 말하는 선(善)도 죄이고, 나쁨이라는 악(惡)도 죄가 되겠지요.

그래서 인간은 착하게 살아도 지옥에 가고, 악하게 살아도 지옥에 가요.

 

정리해서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분이고 인간은 죽은 자에요.

하나님이 보시기엔 죽은 자인 인간이 내어 놓는 모든 것은 죄에요.

그러므로 죽은 자가 내어 놓는 것을 붙잡으면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아요.

 

자 이걸 신앙에 적용해 봅시다.

인간은 죽은 자로 태어납니다.

그 속에 죽은 자의 법이 있어요.

 

죽은 자의 법으로서 하나님을 해석 하겠지요.

하나님도 죽은 자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죄도, 의도, 생명도, 죽음도 죽은 자의 관점에서 이해 할 것입니다.

 

인간이 죄라고 정의하는 것도 죄이고!

인간이 의라고 정의하는 것도 죄이고!

그럼 인간이 생명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선 죽음이 되는 겁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가 선악의 법(法) 아래서 태어납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가 죄가 주는 정보로 이해를 합니다.

죄가 주는 정보로 이해하니 틀린 것이 되겠지요.

 

세상엔 신자와 불신자가 섞여 살고 있어요.

우리는 누가 신자이고 누가 불신자인줄 몰라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선택하면 신자이고 선택하지 않으면 불신자에요.

선택 당하고 보니 아~ 나는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예정이 되었구나! 를 알게 됩니다.

 

조금 전에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가 죄 아래서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럼 신자나 불신자 모두 동일한 사고를 가지고 있겠지요.

예수님에게 선택 당하기 전까지는 신자나 불신자나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불신자 속에서 신자를 찾아냅니다.

신자는 예수님에 의하여 선택을 입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이렇게 구분된 사람을 예수님은 “너희”와 “저희”로 구분했어요.

 

예수님에게 선택 당한 자는 “너희”이고, 선택을 입지 못한 사람은 “저희”입니다.

“너희”는 “저희”에게서 나오라고 했어요.

“저희”에게서 나왔으니 “너희”가 되는 겁니다.

 

이를 일컬어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냄을 당하였다 할지라고 육신은 여전히 어둠에 사고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해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제일 먼저 무슨 일부터 하겠습니까?

어둠에 정보를 빼내고 빛의 정보를 입력시키는 일을 하시겠지요.

성령이 어둠에 정보로 알고 있던 것이 모두 다 죄이고 틀렸다는 것을 알려 주세요.

그리곤 이제부터 모든 것을 빛이 주는 정보로 이해하도록 합니다.

 

전엔 인간의 관점에서 판단하였는데 이젠 하나님의 입장에서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럼 인간 입장에선 하나님 입장으로 말하는 것이 틀린 것으로 들리겠지요.

빛이 말하는 것을 어둠 입장에서 들으면 전혀 다른 말로 들리겠지요.

 

빛이 들어오면 어둠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들이 모두가 죄라고 지적을 해 댑니다.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신앙도 가짜고!

너희들이 알고 있는 믿음도 가짜라고 지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을 보면 성령이 오시면 무슨 일을 한다고 하셨습니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한다고 하셨지요.

 

책망이 뭡니까?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잖아요.

가짜라고 고발하는 거잖아요.

 

성령이 오셔서 기존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죄관과 의관과 심판관을 새롭게 정의해 주어요.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는 기존에 자기가 알고 있던 죄관과 의관과 심판관이 틀렸음을 알겠지요.

성령이 알게 해 주신 것으로 판단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판단을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수용을 할까요?

아니지요.

배척하겠지요.

너 왜?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데 하고 반발을 할 것 아닙니까?

왜냐하면! 지금까지 인간들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충돌이 생기겠지요.

세상은 성령 받은 사람이 내어 놓는 것을 받지 못하겠지요.

자신들이 전통적으로 알아 왔던 것과 다르니까요.

서로 다르니 서로가 이단이라고 싸우겠지요.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리새인들과 한 식구로 살면서 일맥상통했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엔 바리새인과 통했나요?

안 통했나요?

안 통했지요.

서로 이단이라고 싸웠잖아요.

서로 자기 해석이 맞다고 싸웠어요.

 

성령을 받고 보니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성경을 해석해 온 것이 틀린 것으로 드러났어요.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해석이 죽은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들이 해석하는 그 해석은 틀린 해석이라고 하자!

넌 뭐냐! 라고 하면서 죽여 버린 겁니다.

 

지금도 동일해요.

성령이 알게 해 주신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전통신앙에 어긋난다고 죽여요.

즉 이단이라고 하여 교단에서 제명하고 쫓아내요.

 

이 시대 교회에서 정통신앙이 뭐냐 하면!

“예수 믿기 + 말씀대로 살기 = 온전한 신앙” 이라는 것이에요.

이걸 성화주의라고 해요.

예수만 믿어선 안 되고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열면 이런 신앙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해요.

 

그럼 성령이 알게 해준 죄관과 의관과 심판관은 어떤 것일까요?

그건 성령이 어떻게 오셨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성령이 왜? 왔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이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다른 보혜사가 바로 성령이세요.

성령을 누가 보내준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 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까?

이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한 겁니다.

 

그럼 예수님이 무슨 일을 했나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잖아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아버지께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을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찾아내서 영생을 주시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럼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죄에서 건져내어 영생을 주십니까?

그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서 죄에서 건져내었어요.

자기 백성들이 죽어야 할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해서 죽어 주셨어요.

 

성령이 이 사실을 성도에게 고지(告知)해 주세요.

야~ 정낙원이 너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

네 죄는 예수님이 대신 다 담당했다!

예수님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의와 생명의 법으로 해방시켰다고 알려 줍니다.

 

그러니 넌 예수 안에서 산 자라고 알려 주세요.

예수 안에서 산다 함은 나는 죽은 자란 말입니다.

이게 믿음으로 사는 거예요.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판단을 해요.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이 다 틀렸다고 고발을 하세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면 의인이고, 모르면 죄인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합니다.

 

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럼 죄를 알아야겠지요.

어떤 죄와 싸워야 할까요?

 

인간들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죄 인가요?

아니면 성령이 알게 해 주시는 죄 인가요?

당연히 성령이 알게 해 주는 죄이겠지요.

그럼 인간이 알고 있는 죄와 성령이 알게 해 주시는 죄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죄와 싸울 것이 아닙니까?

 

자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책망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럼 죄가 두 가지로 나누이겠지요.

성령이 오시기 전에 알고 있던 죄와,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에 아는 죄가 다르겠지요.

 

그럼 제일 먼저 어디서 전쟁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 안에서 충돌이 일어나겠지요.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죄관과 부딪칠 것이 아닙니까?

그럼 우리 안은 전쟁터가 되겠지요.

 

적(敵)이 외부에 있습니까?

내부에 있습니까?

내부에 있지요.

적(敵)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 자신이에요.

 

이게 아주 중요해요.

우린 지금까지 남과 싸웠어요.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는데도 다른 사람과 싸웠어요.

그러니 헛 싸움만 하고 있는 겁니다.

마귀가 웃어요.

 

다시 말합니다.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구원 받았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구원 받기 전에 알던 죄와 구원 받고 난 후에 죄가 다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구원 받기 전이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란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밖을 율법 아래 있을 때라고 했어요.

율법이 특심할 때 자기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고 했어요.

 

율법이 뭔가요?

인간의 행위로 판단하는 거잖아요.

율법이 판단하는 것이 곧 이방인이 판단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는 성령을 받기 전엔 우리의 행위로 죄를 판단했어요.

인간들 세상에서 통용되는 착함과 악함을 기준으로 죄다 아니다 판단했어요.

성령 받기 전에는 착하게 살면 의롭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반듯하게 살았으면 착하다고 생각했고 나쁘게 살았으면 악하다고 생각했어요.

성령 받기 전엔 착함과 악함을 내 행위로 판단했어요.

 

이걸 율법 아래 있다고 해요.

율법대로 살았으면 착하고 못 살았으면 악하다고 생각했어요.

말씀대로 살면 의롭고 못살면 죄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율법 아래선 자신의 행위를 바탕으로 하나님께 나아왔어요.

착하게 살았으면 하나님 나 이쁘니 복 주세요!

악하게 살았으면 하나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 할게요! 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린 율법 아래 있을 땐 자나 깨나 자기 행동 뜯어 고치는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니 인간의 착함과 악함으로 죄를 기준하던 것이 곧 죄로 드러나게 되었어요.

내가 착하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 로 묻지 않는 겁니다.

오직 하나 너~ 예수님 십자가 의미를 알어! 라고 물어요.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새로운 죄관을 주셨어요.

 

성령은 인간의 착함과 악함으로 죄를 규정하지 않아요.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우리의 행함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신 후로는 어떻게 살았느냐를 묻지 않고 예수를 믿느냐고 물어요.

 

죄가 “행함에서” ~ “믿음으로” 바뀐 거지요.

행함 의지하면 죄이고!

믿음 붙잡으면 의에요.

교회 안에 두 부류가 있어요.

행함을 의지하고 나아오는 자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가 있어요.

 

성령이 오셔서 인간을 둘로 나누어 버렸어요.

예수 안과 아담 안으로 나누었어요.

성령이 오시기 전엔 모든 인간들은 한 아담 안에 있었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기로 작정 된 자들을 아담 안에서 빼내서 예수 안으로 옮겨주었어요.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영역에 이동이 일어난 겁니다.

 

이젠 어떻게 살았느냐를 묻지 않고 어느 영역에 있느냐고 물어요.

영역에 따라서 죄인과 의인으로 나누어져요.

아담 안에 있으면 목사도 지옥으로 가는 죄인이고!

예수 안에 있으면 창기나 술주정뱅이도 천국으로 가요.

 

인간적으로 보면 악당이 천국에 가 있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한 사람이 지옥에 가 있을 수 있겠지요.

왜냐하면! 천당과 지옥은 사람이 착하냐 악하냐로 판단하지 않고 어느 영역에 속하였느냐 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은 무조건 구원이고!예수 밖은 무조건 저주에요.

이게 성령이 오셔서 세상에 알려준 죄관이에요.

하나님은 이 죄관으로 심판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신앙의 싸움은 어떻게 살까요? 에서 누굴 믿을까요? 로 바뀌겠지요.

어떻게 살까요? 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고!

누굴 믿을까요? 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이 나를 바라보느냐!

예수를 바라보느냐! 로 압축이 되지요.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하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성령이 성도에게 너~ 왜?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 라고 책망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너~ 왜? 예수 안 믿는데! 라고 책망을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수 안 믿는다고 책망 하겠지요.

너~ 왜?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안 믿는데! 라고 책망을 해요.

 

그럼 성령 받은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세요! 라고 할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라고 할까요?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라고 하겠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와 의와 심판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한마디로 예수 믿는 사람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믿는 겁니다.

 

중요한 말이니 잘 들으세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 믿으면 사람이 바뀐다고 생각해요.

성화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다른 삶을 요구하는 겁니다.

변화된 삶을 요구해요.

변화란 고작해서 육을 뜯어 고치는 겁니다.

 

술 먹던 사람은 술 끊고!

사기 치던 사람은 사기 안치고!

교회에 충성하지 않던 사람은 충성하고!

주일날 놀러 다니던 사람은 주일 성수하고!

좌우지간 착한 사람이 되라고 해요.

 

오죽했으면 교회에서 아버지 학교니 순결 지키기 운동을 하겠어요.

왜? 이런 일을 합니까?

한마디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이건 마치 호박에다 줄을 긋고 수박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아요.

본질은 아담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껍데기만 예수로 포장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 예수 믿는다고 해요.

이 얼마나 웃기는 코메디입니까?

그런데 이런 웃지 못 할 코메디를 이 시대 많은 교회에서는 좋은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교인들마다 누가 누가 잘하나 경쟁하고 있어요.

목사들이 경쟁을 시켜요.

교인들끼리 경쟁을 시켜 놓고 돈만 챙기는 겁니다.

 

완전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뙤국놈이 챙기는 것과 같아요.

성화를 가르치면 제일 득 보는 것이 목사에요.

그러니 목사들이 성화를 가르치는 겁니다.

성화주의는 인간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어요.

그러니 맨 날 자기 꼬라지 살핀다고 분주한 겁니다.

 

말씀대로 살았냐! 못 살았냐!

목사에게 순종 했냐! 안했냐!

착하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

결국 자기 행함으로 죄다 아니다 판단하는 겁니다.

 

그러니 조석지변으로 변하는 자기 행함으로 인하여 일희일비하는 롤로코스트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면 기분이 좋은데 그렇지 못하면 마음이 천근만근이 되잖아요.

 

그래서 전 성화주의자들을 예수를 안 믿는 자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를 안 믿고 자기 자신을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은 다 엿 바꿔 먹고 자기가 뭘 하겠다고 나대는 것입니다.

 

성화와 성화주의는 달라요.

 

이걸 잘 구분하세요.

성화라는 말은 성경에 없는 말이니 쓰고 싶지 않아요.

성화라는 말 대신 그냥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 되어요.

믿음으로 사는 것을 굳이 성화라고 한다면 반대하지 않아요.

 

그러나 성화주의는 반대에요.

주의(主義)란? 고정된 틀이에요.

일종의 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성화주의가 되면 법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반드시 성화를 하여야 신앙 있음으로 인정을 받아요.

 

법이 되면 법을 지킨 자는 의롭다고 하고, 법을 어긴 자는 불의하다고 판단하게 되어요.

성화주의가 되면 성화하여야만 된다는 법이 생기게 되어요.

법이 되면 그 법에 기준을 맞추는 신앙의 틀이 형성이 되어요.

이 틀 속에 들어오면 믿음이 있다고 하고 벗어나면 믿음이 없다고 해 버린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의 행함을 근본으로 하는 율법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 되어요.

결국 십자가를 폐하는 것이 되고 만단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성화를 말하는 사람들이 이 성화주의에 빠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화주의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전 성도가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아요.

성도에겐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지향성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 뜻대로 살았다는 것을 신앙으로 들고 나아오는 것은 반대해요.

신앙이란? 하나님 뜻대로 산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이에요.

예수를 믿는 믿음이 형성 되려면 나는 항상 죄인이라는 사실을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해요.

그러니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알아가는 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해요.

제가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 뜻대로 살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에요.

내가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더 알게 되는 겁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죄의 깊이를 더 많이 알아가고 예수님의 대속에 은혜에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래서 죄인이구나!

결국 내가 믿을 것은 예수님뿐이구나! 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인도하세요.

 

성도가 토해 내는 것은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입니다! 가 나와야 해요.

내 것이 아니라 예수님 것이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하신 것을 내어 놓아야 하는데 성화주의자들은 예수님 것을 내어놓지 않고 자기 것을 내어 놓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랑스럽지 않고 자기가 행한 행함이 자랑스러운 겁니다.

그러니 예수를 안 믿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으니 십자가만을 말하면 짜증을 내는 겁니다.

 

여러분 “십자가 만” 이라는 말과, “십자가 도” 라는 말을 구분하세요.

“만” 과 “도” 글자 하나 차이지만 이게 엄청 중요해요.

글자 하나 차이지만 그 의미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완료”와 “미완료”의 차이에요.

 

“십자가 만”은 종결(終結)을 뜻하고,

“십자가 도”는 진행(進行)을 뜻해요.

 

“십자가 만” 은 십자가로 만족하는 것이고,

“십자가 도”는 십자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만”은 오직 하나 십자가뿐이라는 뜻이고,

“십자가 도” 라는 말은 여럿 중에 하나란 의미에요.

 

“십자가 도” 라고 하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가지고 뭔가 하고자 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가지고 뭔가 얻어내야 할 노림수가 있어요.

그 노림수가 바로 교회 만들기이고 자기 거룩하기에요.

목사들은 목사의 말에 순종하고 교회에 충성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주의자들은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성화주의를 외치는 목사들 치고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 목사가 없어요.

모두가 십자가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에 멈추지 않고 넘어가는 겁니다.

예수를 바라봅시다! 가 아니고 예수를 본 받읍시다! 가 되어요.

 

예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라고 하지 않고!

성도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라고 말해요.

이게 성화주의거든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누려야 하는데 누리지 않고 뭔가 자꾸만 행하여야 하는 것으로 끌고 가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이 완료가 아니고 미완료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안식의 세계에요.

예수 안에선 내가 하든 안하든 개의치 않고 이미 예수님이 완성시키신 구원을 누리는 곳이에요.

 

그럼에도 성화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안식이 안 되고 불안 한 겁니다.

이 불안함을 해소키 위해서 뭔가 꼼지락 거리는 겁니다.

이름하여 성화 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설치는 겁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요.

율법에 요구를 다 이루셨다구요.

율법에 요구를 완성 했다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어요.

완벽해요.

 

그러니 예수 안에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것이 없어요.

성령이 알아서 간섭을 해 가세요.

이건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요.

 

십자가 안에선 목사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틀을 만들어 줄 필요가 없어요.

성령이 각자 알아서 간섭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안 믿어지면 목사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관리를 하게 되어요.

그 속에 성령이 없는 교인들은 목사가 이렇게 지시 해 주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자꾸만 어떻게 살까요? 라고 묻는 겁니다.

 

이는 모두가 자기가 뭔가 하여야 한다는 것을 신앙으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겐 아무리 예수님이 다 하셨습니다! 라고 하여도 안 믿어요.

그러니 뭔가 알려 달라고 하는 겁니다.

 

어제 어떤 집사님과 대화를 했어요.

침례교에 다니는 집사님이에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 교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자기 교회 목사님을 그렇게 자랑해요.

말끝마다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 그래요.

 

참고로 그 교회 주보에 이런 게 써져 있어요.

우리 교회는 건전한 침례 교단으로서 유명한 김장환 목사님과 김충기 목사님과 오관석 목사님과 윤석전 목사님과 장경동 목사님이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면 그 목사의 본질을 알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 동네에 도너츠 가게를 하시는 분이 그 교회에 다녔어요.

그 분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젠 자기 교회에 안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말에 순종하지도 않고 주일성수도 하지 않고 목사님 설교를 비평하고 하니 목사님이 다른 교회에 가라고 했대요.

아마도 헌금도 제대로 하지 않았나 보아요.

한마디로 열심히 하는 사람은 교회에 남고 농땡이 치는 사람은 가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 하시는 집사님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분은 교회 일에 대단히 열심으로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학교 교무실에 심방 가서 축복 기도 해주고 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 교회에서 하는 일과 교인들이 하는 열심들을 자랑하는 겁니다.

입만 열면 뭘 했고! 뭘 했고! 를 자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신앙은 내가 한 일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자랑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 내가 기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 기뻐야 합니다.

우린 예수님의 증인이지 자기 증인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엔 예수님 공로로 나아가는 것이지 내 공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열심과 충성은 육신의 환경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붙잡으면 안 되어요.

 

신앙생활이란? 나는 부인이 되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자랑거리로 두어야 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랑되어지지 않는 신앙은 다 가짜입니다! 라고 하니 순식간에 얼굴색이 벌겋게 싹 바뀌는 겁니다.

순간적으로 대화가 단절 되고 분위기가 “싸아~ 얼음 땡” 으로 바뀌었어요.

 

이런 분들이 전형적인 성화주의자들이에요.

성화주의자들의 특징은 자기 행함에 태클을 걸면 화를 내요.

왜? 성도의 행함을 무시하느냐 라고 따져요.

 

제가 성도의 행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의(義)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들은 그렇게 듣지 않아요.

성화를 의(義)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함을 의(義)가 아니라고 말하면 신경질을 내는 겁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예수 믿으면 인간이 바뀐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인간의 감정은 수시로 바뀌어요.

자기 몸에 컨디션에 따라서 팔색조로 변해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몸에서 나온 것을 의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늘 변함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옮겨졌다고 해서 인간 자체가 바뀐게 아니에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아담 안에 있던 인간이나 예수 안에 있는 인간이나 동일해요.

내가 달라졌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우린 달라지지 않아요.

다만 변한 척 할 뿐이에요.

 

육신이라는 본질을 변하지 않아요.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속성이 안 변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신은 아담 안이든 예수 안이든 달라지지 않아요.

육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자기 육신의 조건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해요.

그러므로 인간의 행함은 믿을 것이 못 되어요.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 자기의 변화됨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으면 실족하게 되어요.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싸움이지 내가 얼마나 변했느냐의 싸움이 아니에요.

자기 안에 선이 없음을 알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종교이지 신앙이 아니에요.

종교와 신앙의 차이는 종교는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신앙은 믿는 도리를 붙잡는 거예요.

 

하나님은 죄를 예수 안이냐! 아담 안이냐! 로 판단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죄는 어느 영역에 있느냐? 라는 것으로 판단이 되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내가 변했느냐? 안 변했느냐? 라는 인간의 조건과는 상관이 없어요.

 

믿음이란? 믿는 대상인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지 예수 믿는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행함에선 의(義)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조건을 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이 묻는 레퍼토리가 구원 이후엔 어떻게 살까요? 에요.

어떻게 살까요? 라는 질문은 눈길이 자기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는 겁니다.

방법만 알려주면 하겠다고 해요.

 

방법을 알려 준다고 해서 될 것 같은 가요?

아니에요.

죄인은 정답을 알려 주어도 정답대로 살 수가 없는 자에요.

 

이런 사람에게 여기에 이렇게 사세요! 저렇게 사세요! 라고 하면 안 되어요.

내가 뭔가 하여야 한다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라고 말해주어야 해요.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해야 해요.

 

그러면 꼭 대꾸하는 말이 그럼 성도가 자기마음대로 살아도 된단 말입니까? 라고 신경질을 내요.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성령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간섭할 성령이 안 계시니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냐고 조소하는 겁니다.

성령이 안 계시니 예수를 안 믿고 자기가 뭔가 해야 하지 않느냐! 라고 질문을 하는 겁니다.

신앙의 싸움은 항상 무엇을 믿느냐로 나타나지 무엇을 했느냐 로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데 마귀는 항상 싸움의 본질을 놓치게 만들어요.

무엇을 믿을 것인가 에서 눈을 떼게 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에 눈길을 고정시키게 해요.

여기에 걸려들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는 사라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로 전락하게 되어요.

 

결국 육을 치장하다가 볼 일을 다 보는 겁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 수치를 가리겠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미를 만들어 입는 것과 같아요.

 

자기가 아무리 좋은 무화과나무 치마를 해 입어도 수치는 가려지지 않아요.

수치는 하나님이 가려 주세요.

흠 없는 제물이 죽어서 가려주어요.

그런데 마귀는 우리보고 수치를 가리라고 해요.

그래서 행함을 포기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너희는 죄를 못 이긴다는 거예요.

죽음에서 못 빠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빼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너희들이 뭔가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가능성을 무(無)로 돌려요.

넌 죽은 놈인데 뭘 하고자 하느냐 라고 해요.

그런데 인간이 어디 이걸 인정하는가요.

안 해요.

산 자라고 여겨요.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만있어 보세요.

제가 할게요! 라고 설친단 말입니다.

꼭 어린아이들이 엄마가 밀가루 반죽을 하면 자기도 거들겠다고 덤비는 것과 같아요.

그럼 엄마는 제발 나가 놀라고 하잖아요.

그래도 안 나가고 깐족거리다가 한 대 얻어터지고 으앙~ 엄마 미워! 한단 말입니다.

 

얻어터지면 다시는 안 할 것 같지요.

아니에요.

얻어터질 때 그 때 뿐이에요.

지나고 나면 또 설쳐대요.

죄 라는 놈은 집요하게 나타나요.

마치 문방구 앞에 두더지 마냥 두들겨 패면 들어갔다가 다시 기어 나오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길을 돌려주는 일을 하세요.

내가 뭘 하지! 라는 것에서 예수님이 다 했지!

도대체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지! 라는 것에 관심을 두게 만들어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징계에요.

 

징계(懲戒)란? 하나님이 간섭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간섭해서 눈길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돌려주세요.

징계는 육(肉)에서 영(靈)으로 관심사를 전환시켜주는 겁니다.

나에게서 예수에게로 눈길을 돌려주는 겁니다.

 

성화주의는 육에서 육으로 변화를 모색하지만, 하나님은 육에서 영으로 전환시켜요.

성화주의는 나에게서 나를 바라보게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서 예수님을 보라보게 하세요.

성화주의는 내가 무슨 일을 하지! 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이 다 했잖아! 라고 하세요.

하나님이 징계로 너~ 왜?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널 바라보느냐고 책망하는 겁니다.

이걸 육(肉)에서 영(靈)으로 관심사를 돌려준다고 해요.

 

신앙생활은 전쟁과 같습니다.

무슨 전쟁인가 하면 영적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이란? 마귀의 궤계와 싸운다는 말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합니다.

군사란? 적과 싸우는 자에요.

그런데 누구랑 싸우는가 하면 자기 자신과 싸워요.

내가 하나님의 원수에요.

이게 참 어려워요.

 

전 과거에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이 따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목사님들이 상투적으로 마귀와 싸우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디 마귀가 보이는가요.

안 보여요.

 

마귀가 어떻게 역사하는지 막연했어요.

그러니 추상이고 관념으로 흐르는 겁니다.

기껏해야 자기 행실 뜯어 고치는 수준으로 그치는 겁니다.

 

마귀의 역사를 모르니 적을 항상 외부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든 아내든 누가 신앙생활을 방해하면 마귀라고 몰아붙였어요.

여기서 신앙생활이란? 교회생활 충실하게 하는 거예요.

말씀대로 못 살게 하는 것이 마귀의 일이라고 여겼어요.

 

그러니 열심으로 충성하는 것이야 말로 마귀의 궤계를 이기는 것이라고 믿고 열심을 내었어요.

자기 열심이라는 행함으로 십자가를 가리는 것이 마귀가 노리는 노림수인줄도 모르고 우리는 꺼꾸러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 마귀 좋은 일만 한 겁니다.

내가 뭔가 하여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은 것이 마귀의 술책인줄 모르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저 눈만 뜨면 충성! 충성 했어요.

 

그 땐 내 열심으로 의(義)를 만들고자 한 것이 마귀인줄 꿈에도 몰랐어요.

그런데 복음을 깨닫고 보니 내가 바로 마귀란 걸 알았어요.

마귀가 나를 주장하고 있음을 알았어요.

 

내 행위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안 겁니다.

내 행위에 의미를 두는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내 행위에 의미를 두는 내가 곧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이 깨달아 진 겁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와는 전쟁을 벌리시는 분이세요.

누구랑 전쟁을 벌리는가 하면 이스라엘과 벌리십니다.

얍복 강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기다리지요.

 

하나님이 왜? 야곱을 기다렸습니까?

야곱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야곱이 바로 하나님의 적이란 말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적이란 말입니다.

 

우린 여기서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우리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이스라엘을 도와주는 분으로 알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곧 나 이니까 우리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는 분으로 알고 있잖아요.

그 누구도 이스라엘이나 내 자신이 하나님의 적임을 생각하지 않아요.

 

이스라엘이란? 신(神)과 싸우는 자란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神)이란? 십계명에서 말하는 다른 신(神)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있는 다른 신(神)과 싸우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 다른 신(神)을 뽑아내기 위해서 출애굽을 시킨 겁니다.

애굽에서 알던 하나님과 광야에 나타난 하나님과 얼마나 다른지 알려주는 겁니다.

너희들이 얼마나 다른 신(神)을 섬기고 살았는지 아느냐 라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다른 신(神)이란? 자기를 위한 신(神)이에요.

자기를 도와주는 신(神) 말이에요.

죄인은 자기 존재를 위해서 신(神)을 찾아요.

 

죄란 항상 자기 존재를 근거로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눈만 뜨면 자기 존재를 지켜줄 신(神)을 찾는 겁니다.

죄인에겐 자신 이외엔 없어요.

 

내가 곧 신(神)이요.

나 이외엔 신(神)이 없어요.

내가 있고 신(神)도 있어요.

 

이런 사고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은 인간의 시다바리에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꼬붕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런 신관을 빼내는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성도의 모형이에요.

그럼 우리 안에 다른 신(神)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적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공격받아야 할 적이라는 것을 몰라요.

 

하나님은 죄와 싸우시는 분이에요.

그런데 누구랑 싸웁니까?

이스라엘과 싸우잖아요.

우리와 싸워요.

 

그럼 이스라엘이 죄인이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죄인이란 말이에요.

이스라엘이 곧 우리 자신을 예표 하니 우리가 죄인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니까 하나님께 나와 복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소원을 들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자신은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할 자가 도리어 복을 달라고 하고 있어요.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실존을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넌 복 받을 자가 아니라 저주 받을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세요.

이런 간섭을 받으면 우린 화들짝 놀라요.

지금까지 알아왔던 하나님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감추어요.

죄인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겨요.

그래서 인간이 뭔가 하여야 한다고 미혹하는 겁니다.

마귀에게 미혹 당한 사람의 특징이 자기 부정이 안 되어요.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죄인임을 알려주세요.

나에겐 의(義)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세요.

의(義)는 오직 예수님에게 있다고 하세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자기에겐 의가 없음을 알고 자기 부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에게선 선(善)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어요.

자기에게 의(義)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義)를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의로워진다고 믿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어요.

아~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죄이구나! 를 아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이 죄인이라고 알려주면 기뻐하지 않고 짜증을 내요.

이건 복음을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그 누구라도 예외 없어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가 하는 것은 다 옳은 줄 알아요.

자신에겐 관대해요.

동일한 잘못을 저질러도 남에겐 냉정하지만 자신에겐 관대해요.

 

목사들이 이 함정에 잘 빠져요.

자신이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자신이 괜찮은 인간인줄 알아요.

교인들보다 더 악하면서 말이에요.

악하다는 말은 남을 속인다는 말이에요.

 

속으로는 온갖 시기와 질투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교만이 가득하면서 겉으론 아닌 척 해요.

솔직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다 초월한 척 위선을 떠는 겁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속는 겁니다.

 

그것도 복음 핑계 대면서 말이에요.

무슨 이런 경우가 있나요.

복음을 알면 더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지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말로는 우리 모두 죄인이고 쓰레기입니다.

우리 모두가 쓰레기입니다! 라고 하면서도 자신은 그래도 덜 쓰레기라고 생각해요.

쓰레기 중에서 고급 쓰레기와 저급 쓰레기로 나누어요.

자신은 복음 전하기 때문에 고급 쓰레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의 허물을 말하면 수용하지 않고 온갖 논리로 피해나가요.

자기 정당성을 주장해요.

안 그런 척 위선을 떨어요.

남보다 나은 인간으로!

괜찮은 인간으로 두고자 한단 말입니다.

 

목사 스스로가 교인과 목사를 차별을 두고 있어요.

말은 아니라고 하여도 실제론 그렇게 하고 있어요.

이게 가르치는 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에요.

 

항상 자신은 치외법권(治外法權)에 두고서 말하게 된단 말입니다.

난 너희들과 달라!

저도 그런다구요.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입니까?

 

바울이 왜? 자신을 쳐서 복종 시키는 줄 아세요.

바울 속에서도 끊임없이 반(反) 복음적인 것들이 솟아나기 때문이에요.

육신은 아무리 복음을 안다고 하여도 십자가 정신과 반(反)하는 것들이 툭 툭 터져 나와요.

 

신앙생활은 이런 것을 없애고 빼내는 것이 아니에요.

죄와 싸우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난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목사는 교인들보다 말씀을 더 가까이 하니 자신이 정말 쓰레기라는 것을 깊이깊이 알아가야지요.

 

그래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이 터져 나와야 해요.

교인들보다 더 나쁜 인간입니다!

세상에 이런 죄인이 용서받고 삽니다! 라고 해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받고 있음에 감사가 넘쳐 나와야 해요.

나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삽니다! 라고 증거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교인들 앞에서 자신이 괜찮은 인간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신앙이에요.

 

바울이 자기 몸을 쳐서 복종 시킨다는 말은 개과천선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자기 죄를 깊이 알고 자기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싸움을 한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여야 한다는 자신과 싸웠어요.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복음 전하는 자신을 긍정하고자 하는 죄성들이 늘 나타나기 때문에 자신은 날마다 죽노라고 쳐서 복종케 한 것입니다.

 

바울이 온전하게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바울이나 우리나 동일해요.

우리 안에 죄성이 툭툭 터져 나온다면 바울에게도 동일하게 터져 나왔어요.

 

바울은 고급 쓰레기이고 우리는 저급 쓰레기가 아니에요.

다 동일한 쓰레기에요.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는 탄식이 나온다면 우리에게도 나와요.

 

제 안에서도 복음 전한다는 것을 의(義)로 붙잡고자 하는 요소들이 솟아나요.

난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너희들과 다르다고 자기 의(義)에 사로잡힌단 말입니다.

꼭 쓰레기 중에서도 자신은 고급 쓰레기로 분류시키고자 한단 말이에요.

아주 고약하지요.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고백이 뭡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고 하지요.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자기가 부정한 자라는 것을 안 겁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게 하나님을 바로 만난 사람들의 고백이에요.

은혜 받은 자들의 증거에요.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합니까?

죄와 싸우라고 하지요.

그런데 정작 우린 싸워야 할 죄를 몰라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안다고 하여도 추상적이에요.

상투적으로만 예~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해요.

 

진정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고백이 나와야 해요.

화로다 난 망했구나!

아~ 나는 살 가치가 없는 놈이구나!

내가 살고자 하는 것 자체가 내 주제를 모르고 있구나!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린 이런 고백이 나오지 않고 살아가는 환경에 대한 불평만 쏟아내고 있어요.

눈만 뜨면 불평해요.

감사는커녕 탐심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원망해요.

그러니 자기가 죄인이라는 말은 립 서비스에 불과한 것입니다.

 

죄를 모르니 맨 날 헛 싸움을 하는 겁니다.

기껏 싸운다는 것이 엉뚱한 놈을 붙잡고 씨름하는 겁니다.

너~ 복음 알어! 몰라! 하면서 말이에요.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는데 남과 싸우고 있어요.

 

마치 복음을 아는 것이 자기 실력인냥 유세떨면서 복음을 안다는 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있어요.

자신이 복음에 녹아져서 바울처럼 내가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데!

우린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을 깔보고 우습게 여기고 있어요.

이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짓입니까.

 

이런 것을 두고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워져 사람에게 밟힌다고 하는 겁니다.

소금은 녹아져야 맛을 내지요.

복음이 자신 안에서 소금처럼 녹아져야 해요.

그런데 우린 복음에 절여지지 않고 녹지 않은 소금처럼 통째로 굴러다녀요.

 

복음에 절여지면 감사가 나오고 긍휼이 나와요.

자기 자랑거리가 나오지 않아요.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도 못해요.

 

그럼에도 우리는 복음으로 인한 감사와 기쁨과 찬송 보단 남과 비교하여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어요.

자신과 다르면 사정없이 칼로 무 자르듯이 잘라서 내치잖아요.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것이 없어요.

살벌해요.

 

그러니 복음 따로 내 삶 따로 인 겁니다.

말은 현란한데 그 현란한 말로 남에게 유익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어요.

복음이 자기 안에서 녹아져서 맛을 내지 못하니 남에게 상처만 주게 되는 겁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독한 말만 하잖아요.

 

분명히 말하지만 복음을 아는 게 신앙생활이 아니고 복음으로 사는 게 신앙생활이에요.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고 모든 이에게 복음에 빚진 자로서 감사하며 사는 것이에요.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행위를 가지고 시비 걸면 안 되어요.

도리어 우리는 타인의 죄를 보고 동질(同質)성을 느껴야 해요.

맞아!

나도 저런 인간이야!

내 속에도 저런 죄성이 자리 잡고 있어!

이게 깨달아지면 비판과 정죄가 나오지 않고 긍휼이 나와요.

 

그럼에도 우린 복음을 안다는 것이 남을 판단하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되어 버렸어요.

복음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 시켜야 하는데 자신은 시퍼렇게 살아서 돌아다니면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면서 죽이고 있어요.

말 한마디를 해도 가시가 돋아서 남을 쿡쿡 찔러 대는 겁니다.

 

복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기 보단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소일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은 자로서의 긍휼에 마음이 없어요.

이는 모두가 복음이 주는 그 기쁨과 감사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왜? 이런가 하면 복음이 지식으로 있어서 그래요.

 

지식은 복음이 주는 기쁨에 누림이 없어요.

복음이 심령골수를 난도질해서 마치 삼겹살에 양념이 배이듯이 자기 안에 예수님 피로 용서 받은 은혜가 배여서 용서 받은 자로서의 감사와 기쁨이 흘러야 하는데 지식으로만 알고 있으니 용서받은 은혜라는 양념이 배이지 않고 법이 난무하는 겁니다.

그러니 고약하고 융통성 없는 사감(舍監) 선생님처럼 차갑고 정나미가 떨어지는 겁니다.

신앙이 가난한 겁니다.

 

우린 처음부터 복음을 아는 자가 아니었어요.

우린 모두가 율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법아래서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옴으로서 복음을 알게 되었어요.

 

남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요.

그러니 내가 복음을 안다는 것을 우리의 자랑일 수가 없는 겁니다.

복음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을 가지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남을 비판하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긍휼의 마음이 나와야 해요.

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전에는 저랬었는데!

저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복음을 깨닫게 되겠지 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한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깨달아진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아는 것으로 남을 깔보고 업신여기는데 휘두를 수가 없는 겁니다.

 

복음은 내 것이 아니에요.

내 노력으로 얻어낸 내 것이면 남을 비판하고 정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나도 복음을 하나님이 은혜로 주어서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셨어요.

그러니 난 복음을 아는데 넌 왜? 모르느냐고 남을 판단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린 눈만 뜨면 엉뚱한 싸움을 하고 있어요.

누구 씹을 것이 없나 두리번 거린다구요.

걸리기만 해 봐라!

자기가 심판자가 되어서 난도질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깨닫게 해 준 것은 남에게 우쭐하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 용서받고 사는 그 은혜를 찬미케 하려고 주셨어요.

제발 남을 판단하는 몫은 하나님께 맡겨두시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사세요.

하나님께서 긍휼을 입은 자답게 감사하며 사시라구요.

다른 사람이 복음을 깨닫고 못 깨닫고는 하나님께 맡겨 두시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세요.

제발 너나 잘하세요.

 

우리는 죄의 종으로 출생을 해요.

죄의 종으로 출생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징벌 대상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에서 죄를 제거하는 일들을 하시는 겁니다.

 

죄가 어떻게 역사를 하는가 하면 자아중심으로 역사해요.

모든 것을 자기존재 중심으로 이해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내가 아니고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이해를 해요.

성경은 이걸 우상성이라고 하거든요.

 

하나님은 이 우상성을 깨트리는 일을 하세요.

이게 안 깨트려지면 하나님을 자기 존재를 위하여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을 위해서 구원을 했는데 자기를 위한 구원으로 이용하는 겁니다.

 

자기 존재중심으로 신앙을 접근하면 자기 육신을 위하여 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죄는 항상 인간의 몸을 볼모로 역사하는 겁니다.

죄가 주장하면 일평생 몸 뚱아리 끌어안고 살아가게 되어요.

 

이렇게 육신을 끌어안고 사는 것을 육(肉)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靈)이요 육(肉)은 무익하다고 하셨지요.

그럼 무엇이 영(靈)이고 무엇이 육(肉)인지 알아야겠지요.

 

쉽게 말할게요.

 

영(靈)은 하나님 나라이고! 육(肉)은 인간 나라에요.

영(靈)은 예수님이고! 육(肉)은 나에요.

영(靈)은 영생에 관한 것이고! 육(肉)은 자기 육신 끌어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에 나라와 그에 의(義)를 구하라고 하셨지요.

그에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예수님에 나라에요.

 

이 말은 성도가 가야할 나라가 따로 있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니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하나님 나라에도 관심이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인간들 생각 속엔 없는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얘들아~ 하나님 나라가 있거든!

너희들 그 나라에 대해서 신경 써라!

이 땅에서 아무리 잘살아도 그 나라에 대하여 모르면 말짱 도루묵이라고 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靈)이요 육(肉)은 무익하다는 것은 생명은 영(靈)에게서 나오지 육(肉)에게선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예수님에게서 나오지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너희가 육신을 아무리 잘 관리한다고 하여도 예수를 모르면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면 세상에서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했지요.

왜? 어리석은 부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의(義)에 대하여 몰랐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부자는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앞날을 위하여 저축하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것입니까.

그런데 세상 나라만 알고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데 무슨 소용이 있느냐에요.

하나님 의(義)가 없는데 아무리 지혜로우면 뭣 하느냐 에요.

인간이 죽는데 재물을 아무리 많이 쌓아 놓은들 무슨 소용이냐 에요.

 

재물이 죄사함을 주지 못해요.

죄는 돈으로 씻어내지 못해요.

돈으로 영생을 살수가 없어요.

돈으로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재물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헛 짓이란 말입니다.

어리석다는 겁니다.

그러니 먼저 죽음에 문제를 해결하라는 거예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의(義)를 구하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 왜? 죽습니까?

죄 때문이잖아요.

죄의 삯으로 죽음이 왔잖아요.

 

그럼 인간에게 있어 제일 급선무가 뭡니까?

죄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지요.

먹고 사는 문제보다 죄 문제가 더 시급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먹고 사는 일이 급하지 죄 문제는 급하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아니 죄 문제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아요.

관심도 없어요.

 

그러니 교회에 와서도 세상 것을 구하는 겁니다.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도 세상에서 살아갈 궁리를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복 받고 잘살까!

목사들은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교회 부흥시킬까 고민해요.

입술로는 천국을 말해도 관심은 교회 잘 되기에요.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세상에서 행복하고자 하는 겁니다.

 

성경의 증거는 죄 문제를 해결하면 거지로 살아도 천국에 가니 성공한 인생이라고 해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한 것은 심심해서 한 말이 아니에요.

봐라! 너희들 보기엔 부자가 성공한 인생 같지만 실상은 실패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지옥에 가면 이 땅에서 재벌로 살아도 실패한 인생이란 겁니다.

 

그러니 먹고 사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죄 문제가 바로 영(靈)에 관한 일이에요.

생명에 관한 일이에요.

그럼에도 인간들은 영(靈)에 대하여 관심이 없어요.

영(靈)을 몰라요.

 

예수님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은 제자들에겐 생소한 말이에요.

제자들에겐 자기들 나라가 있어요.

세상에서 살아갈 자기 인생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건 땅에 나라란 겁니다.

육신에 일이란 겁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은 다 육(肉)에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라고 하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 일을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땅에 일을 생각하지 말고 하늘에 일을 생각하라고 징계하는 겁니다.

죄인들은 자기만 알지 하나님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나 여기 있다고 간섭하세요.

그 간섭이 육(肉)을 치는 방식으로 나타나요.

 

이걸 징계(懲戒)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합니까?

참 아들에겐 징계가 있다고 하지요.

 

징계가 없으면 아들이 아니래요.

아들에겐 반드시 징계가 있다고 합니다.

징계를 통하여서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한다고 하지요.

 

알다시피 우린 죄인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엇길로 나가고자 해요.

이때 징계가 바른 길로 방향을 설정하게 만들어요.

 

우린 죄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징계를 당하게 되어 있어요.

징계 없는 아들은 없어요.

징계 없는 성도는 없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징계를 당해요.

 

인간은 자기 육신만 알아요.

그래서 자고나면 육신 챙기기에 급급해요.

신앙생활도 육신 챙기기로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시비를 거는 겁니다.

시비를 걸어서 방향성을 바꿔 주는 겁니다.

너~ 왜? 또 땅에 일을 생각하는데!

땅을 바라보던 눈을 하늘로 바라보게 하세요.

하늘에 것을 구하여야 할 놈이 땅에 것을 구하니 땅에 것을 빼앗아가는 일을 단행하시는 겁니다.

 

이건 마치 자식이 공부는 안하고 게임만 하고 있으면 게임기를 박살을 내 버리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미리 아세요.

알아서 챙겨 주세요.

그럼에도 우리는 탐욕에 사로잡혀서 하루하루를 만족하지 못하고 백년을 걱정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쌓은 것을 빼앗아서 하루치만 주세요.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늘 하나님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공격을 받으면서 산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의 아비가 누굽니까?

야곱이지요.

 

그럼 야곱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다루어 가시는지 살펴봅시다.

야곱의 일생을 한마디로 하면 징계의 일생이에요.

 

징계란? 하나님이 간섭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간섭하면 어떨까요?

아파요.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하지요.

이건 하나님은 원망하는 말이에요.

하나님 때문에 고생을 죽싸게 했다는 말이에요.

자기 뜻대로 살지 못했다는 불평이에요.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으면 행복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호시탐탐 형의 장자권을 빼앗으려고 했어요.

결국 장자권을 빼앗는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돌아 온 것은 자기가 생각한 것과 정 반대 현상이 돌아 왔어요.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이건 야곱이 예상치 못한 일이에요.

 

부모형제를 떠난다는 것은 죽음이에요.

야곱은 살고자 장자 권을 빼앗았는데 하나님은 죽이는 길로 몰고 간 겁니다.

이게 징계에요.

 

야곱은 참 아들이기 때문에 간섭하는 겁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세상에 퍼질러 살도록 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 합니까?

 

구약에 장자 권은 신약에 구원과 같아요.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은 세상에서 호적을 파 버려요.

세상에 정착하지 못하게 하세요.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죽인다구요.

육은 무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세요.

 

그럼에도 우리는 야곱처럼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 사고를 바꿔 주는 일을 하세요.

이 사고가 바뀌지 않으면 하나님을 자꾸만 이용하고자 해요.

우리 스스로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해 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처럼 우리가 의지할 근본을 잘라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아비 집으로부터 쫓겨나게 만든 것입니다.

야곱은 장자 권을 받고 터를 잡고 살던 정든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 겁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비빌 언덕을 허물어 버린 겁니다.

이 얼마나 고약합니까?

 

집에서 쫓겨난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갑니다.

꿈에 사닥다리로 찾아옵니다.

그리곤 언제 어디서든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오는 겁니다.

이는 사다리 타고 하늘로 올라오라는 말이에요.

네가 살 곳은 땅이 아니고 하늘이란 것을 알려 준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땅에서 뽑아내서 하늘로 올려 주겠다는 말입니다.

 

물론 야곱이 이 사실을 알 턱이 없지요.

야곱은 자기 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아~ 하나님이 이제부터 복을 주시겠구나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라반의 집에 가서도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특유의 간교함으로 자기 야망을 이루어 갑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부(巨富)가 되는데 성공을 합니다.

이제 보란 듯이 고향으로 돌아 갈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곤 금의환향(錦衣還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얍복 강에서 야곱의 꿈을 산산이 부셔 버립니다.

세상에 것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징벌 대상임을 깨닫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힘으로 삼지 않고 세상 것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결국 빈털터리로 과거 집에서 쫓겨 날 때 하나님이 찾아 왔던 그 곳 벧엘로 올라가게 됩니다.

돌아 돌아 그 자리에 온 거에요.

육적으론 평생 헛 고생만 한 거에요.

그러나 그 헛 고생 같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알아갔어요.

그래서 죽을 때 지팡이를 의지하고 장자와 차자가 어긋맞기는 축복을 하게 된 겁니다.


죄란? 자기가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겁니다.

자기 생명을 자기가 지키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인간들은 물질이 생명을 지켜 준다고 믿어요.

그래서 물질을 모으고자 하는 겁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재물을 모은 것도 다 재물이 자기 생명을 지켜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두 주인을 하나님과 재물이라고 했어요.

즉 재물의 힘으로 사는 자가 있고 하나님을 힘으로 사는 자가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얍복 강에서 야곱을 징계하지 않았으면 야곱은 재물을 의지하고 살았어요.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살았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이 의지할 것을 빼앗는 일을 단행하신 겁니다.

다 빼앗고 네 생명은 네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을 깨닫게 하세요.

 

하나님이 생명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을 자꾸만 빼앗아가는 방식으로 간섭을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 못 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 사십년 동안을 인도하면서 만나를 하루치씩 준 것은 생명은 하나님이 관리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매일 만나를 먹으면서 아~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려주시는 것이구나! 를 알아야 했어요.

 

이 정신이 있어야 가나안에서도 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쌓아 놓아야 안심이 되는 인간이 만나를 하루치 씩 받아먹는 것이 얼마나 조마조마 한줄 아세요.

인간은 자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되고 붙잡고 있어야 안심을 하는 종자들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눈만 뜨면 손에 잡히도록 모으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니 광야나 가나안 땅이나 하나님께서 알아서 살려 주시겠지! 라는 믿음이 없으면 불안해서 살수가 없어요.

혹시라도 내가 잘못을 해서 하나님이 삐져서 만나를 안 주면 굶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불안해요.

하루하루 만나를 먹으면서도 염려와 근심걱정이 떠나질 않았어요.

 

애굽에선 비록 부족하지만 쌀독에 쌀을 받아 놓고 먹었어요.

저축을 해서 그 때 그 때 필요에 따라서 먹고 살았어요.

애굽에선 하나님을 의지 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런데 광야에선 자기 힘으로 어찌하지 못해요.

광야는 자기 노력으로도 살수가 없는 곳이에요.

불안 한 겁니다.

그러니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이게 전부 육신의 소욕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육신의 소욕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는 겁니다.

지적하는 방식이 징계에요.

육신의 소욕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는 식으로 징계하세요.

 

죄는 항상 육신의 소욕을 채워 주겠다고 해요.

땅을 떠나지 못하게 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죄와 싸우라고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 이런 말을 왜? 하는지 알아야합니다.

뜬금없이 하는 말이 아니잖아요.

무슨 이야기 끝에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아야합니다.

 

그럼 앞에 이야기를 보아야겠지요.

앞에서 뭐라고 합니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한 것을 이야기 하였어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무엇을 보여주는 증인들입니까?

믿음으로 살았던 증인들이지요.

왜냐하면! 히브리서 11장이 믿음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믿어야 할 실체로 인도하는 능력이에요.

믿어야 할 실체로 나타난 것이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모습들이에요.

 

산 사람은 그림자가 있듯이 산 믿음도 그림자가 있어요.

그림자란 바로 행함입니다.

믿음이 에너지라고 한다면 행함은 삶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믿음은 전기와 같고 행함은 그 전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가전제품과 같아요.

 

믿음은 붙잡히지 않아요.

믿음은 마치 전기와 같아요.

믿음은 전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요.

전선을 까서 보아도 전기는 보이지 않아요.

그럼에도 전선을 따라서 전류라는 에너지가 흐르고 있어요.

 

믿음도 이와 같아요.

믿음이 전기처럼 성도의 몸에 들어오면 몸이 반응을 해요.

움직이게 된단 말입니다.

 

이걸 야고보서에선 행함이라고 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믿음을 귀신의 믿음이라고 했어요.

이렇게 되면 입으로만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은 가짜란 것이 드러나지요.

히브리서 11장을 믿음 장이라고 하는 것은 입으로만 고난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믿음에 이끌려서 세상에서 버림당하는 모습으로 살아갔어요.

그 누구도 버림당하는 삶을 원해서 산 사람이 없어요.

믿음이 개 목줄처럼 끌고 다닌 겁니다.

 

믿음이 마치 전기처럼 들어오니 세상에서 버림당하는 모습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믿음이 간섭하지 않았으면 그 누구도 버림당하는 삶을 살지 않았어요.

믿음이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쪽으로 끌고 다녔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어요.

예수 믿는 것은 생각으로 믿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는 온 몸과 마음으로 믿는 겁니다.

 

온 몸 속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려져요.

하나님이 그려나가요.

마치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처럼 말이에요.

 

그럼 마귀(죄)는 믿음을 추상으로 남겨두고 몸으로 그려지지 않는 식으로 역사를 하겠지요.

머릿속으로만 예수를 믿게 하겠지요.

죄라는 놈은 십자가를 추상으로 관념으로 이해하라고 해요.

 

추상으로 십자가를 이해하면 십자가 정신으로의 삶이 필요치 않아요.

그냥 머리로만 믿고 몸으로는 몸뚱이 편하고 좋은대로 살면 되니까요.

머리로 믿는 믿음엔 고난도 없고 아픔도 없어요.

애굽을 떠날 필요도 없어요.

 

징계란? 몸이 실제로 당하는 아픔이에요.

징계가 몸으로 실제 느끼는 것이라면 믿음도 몸으로 실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냥 몸엔 아무런 고통도 없이 징계 받으라고 하면 그건 생각이지 실제가 아니지요.

 

이러면 예수도 몸으로 실제로 믿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생각으로 머리로만 믿으면 되니까요.

천당도 몸이 갈 필요가 없어요.

그냥 생각으로만 가면 되어요.

 

히브리서 기자가 왜? 믿음을 말하고!

죄를 말하고!

징계를 말하느냐 하면 믿음이나 죄나 징계는 모두가 몸으로 체득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징계는 몸으로 경험 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국에 모습이 나옵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이 눈물을 닦아 준다고 합니다.

눈물을 닦아 준다는 것은 실제로 눈물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실제에요.

상상으로 죽은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도 실제에요.

가상(假想) 속의 예수가 아니에요.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믿음도 실제 몸으로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성도는 한 묶음이니까요.

하나님은 예수님과 한 묶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당하셨던 아픔들을 성도의 몸에 고스란히 담겨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게 장난이 아니에요.

실제에요.

 

우린 신앙을 생각으로 두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실제로 만들어요.

그게 바로 징계에요.

우린 믿음을 관념으로만 두고 실제화 시키지 않고자 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실제화 시켜요.

신앙의 내용을 우리 삶 속에 실제로 일어나게 한단 말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이야기가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나지 않으면 그는 사생아(私生兒)에요.

사생아(私生兒)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일 무서운 것이 유기에요.

유기란?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죄인에게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다면 그 결과는 저주뿐입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차이는 하나님이 유기하는 것과 간섭하는 것의 차이에요.

이스라엘은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고,

이방인은 사생아(私生兒)이기 때문에 유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아들로 대우하신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히 12:7-8=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사생자들은 믿음으로 살지 않아도 징계를 당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징계 없음이 자랑이 아니라 징계를 당함이 자랑인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을 보세요.

하나님이 달달 볶았어요.

 

이스라엘을 보세요.

하나님이 모든 삶을 다 간섭하셨잖아요.

날과 달과 절기와 먹는 것에서부터 입는 것 마실 것까지 간섭했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간섭하셨듯이 성도를 간섭하세요.

아들이기 때문에 간섭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는 것이 지극히 정상인 겁니다.

 

부디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이 저주스러움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을 알아 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게 하옵소서! 징계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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