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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59강. 인생을 바꿔치기 하시는 하나님 (창 32:22-32)

by coroa 2021. 7. 22.

 

59강. 인생을 바꿔치기 하시는 하나님 (창 32:22-32)

-.정낙원 목사

 

신자는 하나님을 늘 사랑하고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천국 보다 이 세상을 더 사랑하고 삽니다.

마음이야 하루 종일 주님만 생각하고 천국만 생각하고 살아가고 싶지요.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것을 어찌합니까?



설교를 들을 때는 아~ 이제부터 내 인생을 주님께 맡기고 살아야겠구나! 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교회 문을 열고 나가면 내가 주인이에요.

물론 간헐적으로는 주님을 생각하기도 해요.

하지만 주님을 생각하는 것보다 잊고 살 때가 더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죄가 우리를 주관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아담은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자기가 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죄가 종에서 왕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우리는 내가 왕이에요.

그래서 죄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살고자 합니다.

눈만 뜨면 지금의 나 보다 더 나은 나로 만들려고 합니다.

지금은 내가 이렇지만 앞으로는 성공해서 잘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 살아갑니다.



어렸을 때 책상에 “난 장차 이런 사람이 될 거야” 라고 했잖아요.

아이들은 대통령이나 이순신 장군이나 아니면 성공한 사람들을 롤 모델로 하여서 닮고자 합니다.

부모들도 위인전을 읽게 해서 꿈을 키워줍니다.

우리는 그 자리를 쫓아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 안에 내가 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지금의 나 보다 성공한 나를 키우고 있어요.

지금의 “나” 말고 장차의 또 다른 “나” 가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나는 나를 왕의 자리에 앉히고자 해요.

우리는 내 속에 내가 설정해 놓은 영웅인 나를 위하여 일평생을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영웅호걸이 되는 나를 위하여서 말이에요.



우리는 나를 영웅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도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을 찾는 것은 다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내 시작은 미약하였으니 나중은 창대 하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이 말씀은 대다수의 교인들 집집마다 부적처럼 액자로 걸려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네 나중은 창대 하리라” 라는 말씀을 복음으로 품고 살아가고 있어요.



예를 들어서 직장 생활한다고 합시다.

직장에 처음 들어갈 때는 말단 직원으로 들어갑니다.

말단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빨리 승진을 해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불철주야 장차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나는 위하여 열과 성을 다해서 뛰는 것입니다.



말단 직원으로서의 “내”가 있고,

승진해서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내”가 있어요.

이처럼 모든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나를 위하여 일평생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아래서 난 인간의 버릴 수 없는 속성입니다.



옛말에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낮은 자는 높아지고 싶고,

높아지면 왕 노릇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되면 그걸로 만족하는가요?

아니에요.



죄인은 만족함이 없어요.

죄는 결핍을 몰고 왔어요.

결핍을 해소하지 않으면 불행해요.

불행을 해소하고자 채우고 또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채울 수가 없어요.



사극을 보면 왕들이 어떻게 하든지 영토를 넓히려고 하지요.

자기 나라에 만족하는 왕이 없어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큰 나라의 왕이 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서로가 더 큰 땅을 차지하라는 땅 따먹기 전쟁을 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상대적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탐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남을 의식하고 살아가요.

어리석게도 인간들은 스스로를 평가하지 않고 타자를 통해서 나를 평가해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를 할까!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를 하느냐를 가지고 희비하고 있어요.

나는 타자를 통해서 내가 결정이 되어요.

내가 만난 사람이 나보다 낮으면 행복하고 나보다 높으면 불행해요.



목사인 나도 내가 바라는 내가 있어요.

복음을 전하면서도 복음을 전하고 난 후에 나타나는 반응을 바라는 내가 있어요.

복음만 전하면 되잖아요.

그 후는 생각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게 안 된다니까요.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내가 복음을 전하고 난 후에 바라는 것이 있어요.

내가 바라는 것이 돌아오면 기분이 좋고 안 돌아오면 섭섭해요.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있듯이,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서 복음 전하고 싶어요.

교회 부흥을 싫어하는 목사는 단 한사람도 없어요.

복음을 아나 모르나 동일해요.

복음 알아도 욕심이 있고, 복음 몰라도 욕심이 있어요.

그러니 복음을 전하면서도 항상 내가 복음 핑계대고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내 안에 있는 나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뭐냐?

예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로 만족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내 인생이라는 것이 없어요.

예수 안에서는 내 기쁨 내 슬픔이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운명은 예수님과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나를 챙겨요.

내 안에 있는 내 꿈은 죽을 때까지 꺾이지 않아요.

죽은 듯 싶다가도 환경만 조성이 되면 탐욕이 두더지 머리 내밀듯이 쑥 내밀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 꿈을 깨트리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대신 깨트려주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야곱의 얍복강 사건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얍복강 사건은 성도에게 일어나는 사건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실 때는 정한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속에는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어요.

이사야 43장을 보면 야곱아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면서 내가 너를 조성한다고 합니다.

조성이란 마치 화단을 꾸미듯이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으로 만들어 간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야곱의 얍복강 사건이 왜 일어났나요?

하나님이 바라는 야곱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은 야곱이 바라는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바라는 야곱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조성이에요.



여기에 필연적으로 씨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의 얍복강 사건은 야곱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동일하게 일어나는 사건인 것입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 날까지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고집을 이길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우리를 앉히고 마십니다.

그래서 제가 구원을 받으면 우리 인생은 땡 하고 종 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신 것입니다.

구원을 해 놓고는 구원을 하신 목적을 위하여 간섭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내가 있어요.

난 너를 이렇게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8-3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정하셨고,

정한 그를 부르시고,

부르신 그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지요.



시작과 끝을 하나님이 다 하신다고 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고 합니까?



29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고 합니다.

미리 정하셨다는 말은 이렇게 하려고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목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구원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마치 토기장이가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본받게 한다는 말은 만들어 간다는 뜻입니다.

이걸 조성이라고 해요.



조성이란? 간섭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조각가가 통나무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 가듯이 하나님이 죄인을 가지고 그 아들의 형상으로 빚어가는 것입니다.

잘려나가고 깎이고 패이고 다듬어지겠지요.



이게 얼마나 아프겠어요.

우리 인생은 종친 겁니다.

아 옛날이여 해도 소용이 없어요.

하나님은 중간에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족할 때까지 만들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도장을 파는 장인이 도장이 움직이지 않게 고정을 시켜 놓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 가면서 이름을 새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원의 순서를 보세요.

미리 정하시고,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미리 정하신 것은 조각가가 조각할 나무를 찜해 놓는 것과 같습니다.

찜한 것을 “미리 정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찜한 나무를 베어서 집으로 가지고 옵니다.

이걸 “의롭다 하시고” 라고 합니다.

집에 가지고 온 나무를 멋지게 작품을 만듭니다.

이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받고도 자기 인생을 확장시키고자 해요.

보다 나은 나를 만들고자 해요.

보다 나은 나란? 기껏해야 세상에서 인정받는 나에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나에요.



우리는 돈 많고 인품 좋은 나를 만들고 싶어 해요.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듣는 나를 만들고 싶어 해요.

사람들로부터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겁니다.

큰 소리치고 떵떵거리고 싶은 겁니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척 알아봐 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형상에 관심이 없어요.

우리는 우리의 형상에 관심이 있어요.

내 속에서 내가 드러나고 싶어 하지 하나님의 아들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아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원을 했는데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이루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가만 둘 수가 없지요.

간섭을 하여야지요.



내가 꿈꾸는 나를 박살을 내고 하나님이 바라는 사람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바꿔치기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인생이 바꿔치기 당하는 사건을 말해주고 있어요.

하나님이 자기 꿈을 이루고자 하는 야곱을 죽이고,

자기 꿈을 부수고자 싸우는 이스라엘로 만들어 버렸어요.



야곱과 이스라엘은 상반된 사람이에요.

야곱은 자기 안에 있는 꿈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고,

이스라엘은 자기 안에 있는 꿈을 깨트리는 사람이에요.

야곱은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자였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기 이름을 제거하는 사람이에요.



야곱과 이스라엘은 정 반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야곱은 옛 사람이고 이스라엘을 새 사람이에요.

옛 사람과 새 사람은 살아가는 의미가 달라요.

지향하는 바도 다르고 가치관도 달라요.

그러니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운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 힘든 것은 우리 안에 두 사람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바라는 나를 내 안에 심어 놓았어요.

그런데 우리 안에는 나를 위한 내가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라는 나와 내가 바라는 내가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내가 이기면 내가 바라는 나는 기가 죽고 내가 바라는 내가 이기면 하나님이 바라는 내가 탄식을 해요.

그러니 편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우리가 죽어야 끝이 나요.

그래서 신자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서의 삶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나로 살 때는 나 혼자였으니까 문제가 없었는데,

구원을 받고 난 후로부터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또 다른 나를 심어 놓아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쉬운 말로 성령이 오기 전에는 내 맘대로 살아도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성령이 오고 난 후로는 복잡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남을 죽이라고 칼을 주신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나를 죽이라고 칼을 주신 것입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야곱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고 지명하여 불렀어요.

야곱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 찜 당한 겁니다.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1-3=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야곱아 내가 너를 창조 하였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너를 조성할 것이라고 합니다.



조성이란? 작품을 만들어 간다는 뜻입니다.

어떤 작품인가 하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가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아가는 과정이 죽을 일입니다.



물에다 집어넣고 씻기고,

불에다 집어넣어서 태우는 것입니다.

물에다 집어넣고 불에다 집어넣어서 불순물을 제거하여서 광을 내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만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창세전에 하나님에게 저당이 잡혔어요.

야곱은 그 동안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얍복강에서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을 차압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욕심이 많은 자에요.

얼마나 욕심이 많았는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자기가 먼저 나가려고 먼저 나가는 형의 발꿈치를 붙잡은 자에요.

내가 일등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야곱이에요.



야곱은 출세지향주의 사람이에요.

어떻게 하든지 성공해야 한다는 사람입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것이 야곱의 좌우명이에요.



야곱의 이름이 야곱의 본성을 잘 증명해 주고 있어요.

야곱이라는 이름이 약탈자에요.

이름값을 하고자 하나님하고 씨름을 해서 이기려고 하였어요.



야곱이 바로 우리에요.

우리가 야곱이에요.

야곱을 야곱으로 보지 마시고 나 라고 보세요.



여러분은,

머리가 되고 싶나요?

꼬리가 되고 싶나요?

우리는 모두가 머리가 되고 싶어 해요.



꼬리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데 야곱을 엄마 뱃속에서 꼬리로 태어났어요.

야곱은 분한 거에요.

자기가 머리가 되고 싶었는데 하나님 때문에 꼬리가 된 것입니다.

야곱은 이걸 못 참겠다는 거예요



야곱은 형님 발목이라도 잡고 일등하고 싶어 했는데,

하나님이 일등으로 나가지를 못하게 해서 차자로 태어났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비록 차자로 태어났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장자가 되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호시탐탐 장자권을 노렸어요.

어떻게 하면 형님의 장자권을 빼앗을 수 있을까만 궁리하고 살았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든지 잘되고 싶어 하잖아요?

성공하려고 몸부림치잖아요?

얼마 후면 명절인데,

명절이 되면 전부 고향에 가잖아요.



자동차 영업 사원이 그러는데 명절 전에 차가 제일 많이 팔린다고 해요.

새 차 출고가 제일 많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좋은 차 타고 고향에 가고 싶은 것입니다.



남자들에게는 차가 신분이에요.

남자들의 세계는 차로 그 사람의 격이 매겨져요.

그래서 셋방살이를 해도 빚을 내서라도 좋은 차를 타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향에 좋은 차 타고 가서 나 이런 사람이라고 이름한번 내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로 판단하기 때문에 고향 사람들도 차를 보고 야 저 놈이 성공했네! 라고 해요.



좋은 차 타보세요.

자기 눈에 온통 차만 보여요.

자기보다 낮은 차를 보면 어깨가 으쓱합니다.

부모님도 자식이 좋은 차 타고 오면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 아들 성공했다고 자랑하잖아요?

이게 인간이에요.



아이고 목사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는 예수 믿잖아요.

목사님 나는 은혜를 받았잖아요.

나는 그래도 복음을 알고 그러는데 그러지 않아요.

그런 사람 있나요?

없어요.



야곱은 꿈을 이루고자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돌아 온 것을 정반대입니다.

복은 고사하고 저주가 돌아온 겁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고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외삼촌 집에서 종살이 하면서 악착같이 일해서 거부가 됩니다.

거부가 되어서 당당하게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나 이렇게 성공 했습니다! 라고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얍복강에서 20년 동안 쌓아온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치기해 버리십니다.

20년 동안 쌓아온 공든 탑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려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뜻대로 두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로마서에 뭐라고 했나요?

미리 정하신 자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잖아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하신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싶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형상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담의 아들인 탐욕자 야곱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탐욕의 아들로 귀향하는 야곱을 얍복강에서 죽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탐욕자로서 고향으로 돌아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쌓아온 모든 것을 강 건너에 보내게 합니다.



야곱 홀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시비를 겁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하면서도 끝까지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축복을 해 달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이골을 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이름을 바꿔 주십니다.

넌 이제부터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고 하십니다.



야곱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사는 자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제부터 야곱을 미리 정하신 뜻대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만들어 가시겠다는 뜻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은 장인이 정교하게 작품을 만들어 간다는 뜻입니다.

톱으로 켜고, 대패로 깎고, 끌로 파내고, 사포로 문질러서 거친 부분을 부드럽게 만들어 가듯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도 많은 공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창세기 1장의 창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담의 속성은 빼내지고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변하고 삶에 지향성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길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우리가 걸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출애굽은 시작일 뿐이에요.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한 자들은 광야에서 가나안에서 살아가는 자로 훈련을 받게 됩니다.

어떤 훈련인가 하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는 광야는 얍복강과 같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출애굽 한 1세대들이 다 죽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는 애굽에서 난 자들은 다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자들이 들어가는 것은 옛 사람 야곱이 얍복강에서 죽어지고 새 사람 이스라엘이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제목이 바꿔치기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바꿔치기 하실 때는 고난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들은 변화를 싫어해요.

바꿔치기 당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바꿔치기 당하지 않고서는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우리의 인생을 바꿔치기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꿈을 펼쳐 보이고 싶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꿈을 거두어가십니다.

야곱으로는 하나님 집에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는 것은 분깃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육적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집에서 쫓겨난 야곱을 벧엘 광야에서 하늘에 하나님으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약속을 하십니다.

네가 가는 곳에 내가 항상 함께 갈 것이고 내가 너를 지켜주고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야곱이 약속한 그 자리가 벧엘입니다.

벧엘은 ‘하늘의 문’이고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20년 동안 뺑뺑이 돌리고서는 원래 약속한 그 자리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돌아 올 때는 야곱의 모든 꿈이 다 깨어지고 난 후입니다.

하나님은 20년 동안 야곱의 탐욕을 깨트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20년 후 야곱은 빈털터리로 지팡이 하나 의지하고 벧엘로 돌아갑니다.



지팡이는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태어난 증거물입니다.

다시 벧엘로 돌아 올 때는 야곱으로 돌아 온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결국 야곱의 20년은 바꿔치기 당하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에요.

우린 모두가 세상 것을 움켜잡고자 예수를 따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 것을 버리고 십자가 하나만 의지하게 만드십니다.

땅에 사람을 죽이고 하늘에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세요.

20년 전 인생과 지금의 인생을 비교해 보세요.

20 년 전에 내가 꿈꾸던 인생으로 지금 서 있는가요?아니지요.



여러분들은 맞을런지 모르지만 저는 아니에요.

지금의 정낙원이는 처음 목양교회를 시작 할 때의 정낙원이가 아니에요.

교회를 처음 시작 할 때 정낙원이는 세계 최고의 교회를 세우는 정낙원이었어요.

그땐 제가 기도한 것이 무엇인줄 아세요.



울산은 구역으로 주시고, 한국을 교구로 주시고, 세계를 교회로 달라고 했어요.

한번 외치면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했어요.

성도들을 구름떼같이 벌떼 같이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밤이슬 맞아 가면서 산 기도를 다녔어요.

그런데 내가 바라던 대로 되었는가요?

아니에요.

꿈은 고사하고 정반대로 서 있어요.



지금 나는 창세전 언약 하나 붙잡고 살아가는 힘없는 노인이 되어가고 있어요.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로 서 있어요.

왜 그럴까요?

이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간섭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꿈을 차압해 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바꿔치기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꿈을 빼앗아 가시고 창세전 언약을 주셨어요.

큰 교회와 창세전 언약을 맞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받고 보니 이건 세계 최고의 교회보다 더 큰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계 최고의 교회 대신 세계만방에 창세전 언약을 전하는 목사로 세워 주셨어요.

이런 횡재가 어디에 있나요.



만약에 내 인생을 바꿔치기 해 주시지 않았으면 난 지금도 산 이슬 맞아가면서 세계 최고의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겁니다.

그럼 다른 복음 전하는 삯꾼 노릇하고 있을 겁니다.

세상의 부와 사치와 연락에 빠져서 교인들 비위나 맞추는 거짓 선지자 노릇하고 있겠지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래서 저는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셨으면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자기 영광에 취하여서 교인들에게는 세상의 떡을 주는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거짓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도 만나면 목사님 교회 부흥 많이 되었지요?

그렇게 복음 전하는데 성도들이 많을 것 아닙니까?

그 분들의 상식은 교회가 반드시 부흥을 하여야 해요.

그래야 하나님이 살아계신 겁니다.

과연 그러한가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면 우리 꿈을 이루어 줄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얍복강 이전의 야곱의 생각이에요.

우리는 이러한 야곱의 사고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입술로는 복음 복음 하면서도 창대한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가진 야곱의 꿈들을 버리라고 하지는 않겠어요.

이건 제가 버리라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버리라고 해서 여러분들이 버릴 사람도 아니고, 또한 버려지지도 않아요.

하나님이 간섭을 해 주셔야 해요.



목사가 아무리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못 박으라고 해도 그건 소귀에 경 읽기에요.

순순히 말해서 들을 인간은 없어요.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어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안 되어요.



우린 말씀 앞에 중풍병자들이에요.

머리로는 하나님도 까무러칠 정도로 멋지게 순종하고 싶은데 몸뚱이는 안 되어요.

이게 우리의 한계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상의하지 않고 하나님 맘대로 강제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강제로 야곱의 허리를 분질러서 병신을 만들어서 지팡이 하나 의지하고 살게 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간섭하고 끌고 가는 것입니다.



얍복강 이후에 야곱이 순순히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얍복강을 지나서도 야곱은 야곱의 꿈을 저버리지 않았어요.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세겜에 머물러 살고자 하였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자식들이 세겜 사람들의 원한을 사게 만들어서 야반도주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야곱에 벧엘로 쫓겨 가다시피 올라갔어요.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린 순순히 응하는 자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강제로 집행을 하시는 것입니다.



고물상에 가면 고물을 집어내는 집게 크레인이 있지요

문어발같이 생긴 차 있잖아요.

집게가 고물을 콱 집어서 옮기지요.

우리 인생이 그래요.



우리는 고물들이에요

이 고물들을 하늘에서 웬 손이 나타나서 콱 움켜잡고 옮겨가요.

하나님이 낚아채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움켜잡으면 그 어떤 것으로도 떨어지지 않아요.

그 누구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낼 자가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는데 우리가 곱게 따라가는가요?

아니면 맨 날 반항하면서 따라가는가요?

맨 날 반항하면서 따라가지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가면서 박수치면서 따라갔을까요?

원망하면서 따라갔을까요?

원망하며 따라갔지요.



나 애굽으로 돌아갈래 하였어요.

하나님이 그래 너희들 마음대로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하던가요?

아니지요.

이 놈들이 무슨 말을 하느냐 라고 하면서 몽둥이를 들고서 후려 패잖아요.

불 뱀을 보내서 물게 만들고는 놋 뱀을 만들어서 살려주잖아요.



광야에서 애굽으로는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 갈 수가 없어요.

애굽에서 광야로 나오는 것도 우리 마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듯이,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도 우리 맘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 값 때문에 돌려보내지 않고 끝까지 갈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어코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가세요.

이게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한 신자의 운명입니다.

이 운명을 우리가 바꿀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바꿔주지 않아요.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들은 왜 돌아가고자 합니까?

자기 맘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살게 해 주지 않으니까 싫은 겁니다.

하나님은 왜 출애굽을 하자마자 십계명을 주셨을까요?



십계명의 첫 계명이 뭔가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지요.

이 말은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다른 신 섬기듯이 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신이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에요.

이를 우상이라고 합니다.



애굽의 신은 인간을 위한 신이에요.

마귀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고 도리어 우리의 소원을 빼앗아가는 분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우리를 도구로 사용을 하세요.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마귀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할 것 같으면 아스팔트길로 인도 했을 겁니다.

양식도 하늘에 양식을 주지 않고 땅에 양식을 주었을 것입니다.

인간들 입맛에 딱 맞는 것으로 주었을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주겠다고 하는 것들을 보세요.



전부 인간들이 바라는 것들이잖아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빼앗아가요.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하나님이 자기들 뜻대로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면 광야로 따라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보았던 하나님은 자기들을 괴롭히던 바로 왕을 작살을 내는 분이었어요.

애굽은 열 가지 재앙으로 고통당하는데 이스라엘이 사는 동네는 평안한 겁니다.

이걸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자기편일줄 알았어요.



자기들을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 주신다고 믿은 겁니다.

그런데 광야에 나와 보니까 영 다른 하나님인 것입니다.

자기들을 도와주기는커녕 달달 볶는 것입니다.

소원을 들어주기는커녕 도리어 소원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완전히 속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속은 것이 아니고 백성들이 착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자들은 저렇게 죽인다는 것을 시범케이스로 보여주었어요.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태어난 애굽 사람이에요.

그럼 자기들도 애굽 사람들처럼 멸망을 당해야 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애굽 사람들을 혼내는 것을 보고,

야아~ 우리도 애굽 사람들처럼 살아가면 혼이 나겠구나를 생각했어야 했어요.

그런데 그걸 모른 겁니다.

모르고 광야로 따라 나온 겁니다.



애굽에서 보여준 것은 미끼였어요.

광야로 빼내기 위한 미끼였어요.

하나님은 광야에서 애굽에 근성으로 살고자 하는 자들을 철저하게 죽이는 일을 하셨어요.

그래서 출애굽 한 1 세대들이 광야에서 다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만나를 주시곤 죽이고,

메추라기를 주시곤 죽이고,

생수를 주시곤 죽이고,

이래서 죽이고 저래서 죽이신 것입니다.



사람이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힌 것이 있어야 안심을 해요.

뭔가 나아진다는 희망이 있어야 숨도 편히 쉬어요.

그런데 광야는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손에 잡히는 것도 없고 앞으로 잘된다는 희망도 없어요.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어요.

또한 광야에서 주신 음식들은 애굽의 음식과는 비교도 안돼요.



애굽에서는 비록 종살이를 하였지만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살았어요.

그런데 광야에서는 맨 날 만나에요.

그것도 애굽에서는 구경도 해 보지 못한 생소한 낯선 음식이에요.



음식은 태어나서 처음 길들여진 엄마가 해준 음식이 최고에요.

엄마가 해준 음식은 애굽 음식이에요.

애굽의 음식 맛이 입에 베여 있어요.

그런데 광야에서 주는 음식은 전혀 다른 낯선 음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 음식을 달라고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입맛에 맞지 않은 음식을 줘 보세요.

짜증이 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애굽과 전혀 낯선 환경에 집어넣고는 입맛에 맞지도 않은 음식을 주고 맨 날 들들 볶잖아요.

그러니 아우성을 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불평하도록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간섭을 당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죄가 토설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시면서 우리 안에 품고 있는 탐욕이라는 죄의 똥물들을 다 토해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코스를 보세요.



홍해 바다를 건너오니까 마라의 쓴 물 사건을 겪게 하지요.

마라의 쓴물을 먹여서 애굽의 것을 다 토하여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광야 길이 애굽의 사고들을 다 토해내게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강원도 강릉지방에서 행하여지는 후리라는 멸치잡이가 있어요.

멸치를 어떻게 잡는가 하면 멸치 떼가 있으면 그 주의를 그물로 큰 원으로 둘러쳐서 바닷가에서 양쪽에서 그물을 끌어당겨서 잡는 방법입니다.

그물이 조여오기 전에는 멸치는 자신들이 그물에 가두어진 줄을 몰라요.

자유롭게 놀아요.

그러다가 그물이 점점 좁혀 오면서 행동반경이 점점 좁아지는 것입니다.

결국 끝에는 몽땅 붙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멸치잡이 하듯이 몰아가고 있어요.

하나님의 손길이 점점 좁혀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우리 계획한대로 안 살아지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야금 야금 차압해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것을 다 빼내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충만하게 자라가게 한다고 합니다.



야곱의 인생이 곧 우리의 인생이에요.

야곱이 바로 우리입니다.

야곱은 처음엔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자기 인생을 확장시키고자 하였어요.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셨을 때만 하여도 야곱은 자기 식으로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이해한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을 하면 자기 인생에 탄탄대로가 열릴 줄 알았어요.

드디어 세상의 장자들처럼 큰 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어요.

그런데 돌아 온 것은 그 반대였어요.

하나님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태클을 거는 것입니다.

우리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야곱을 간섭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야곱처럼 간섭해 가십니다.

그럼 우리의 인생도 창대 하는 것이 아니라 후패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걸어간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이 길을 피해 갈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그 길로 인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어찌 보면 우리의 생각들이 날마다 기각당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생래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야곱과 같은 사고를 가지고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장미빛 인생을 꿈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죄 아래서 알아진 하나님이에요.

이는 가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를 들고 마중을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옛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얍복강과 같아요.

십자가를 통해서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바꿔치기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삶을 날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 뽑혀져 나가는 것입니다.

고난과 징계를 통해서 육신의 소욕들이 죽여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줄 부모가 어디에 있고,

고기를 달라고 하면 전갈을 줄 부모가 어디에 있겠느냐?

하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구하면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좋은 것이 무엇이냐?

성령입니다.

성령이 어떤 분인가요?

우리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고 오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우리 옛 사람을 죽이는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탐욕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우리 뜻대로 안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지 않으면 우린 하나님이 싫어하는 짓만 해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꾸는 꿈이란? 이 세상에서 영웅호걸이 되어서 자기 이름을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세계가 확장 되는 것을 원치 않아요.

그러므로 세상에서 성공 하고자 하는 꿈은 하나님 앞에서는 불경이고 참람이에요.



우리가 꾸는 꿈은 하나님 앞에서 개 꿈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개 꿈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 강아지처럼 땅의 것만 붙잡으려고 해요.

우리는 스스로 땅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가시와 담으로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 올 때 하늘에서 사닥다리를 타고 오시지요.

이것은 하늘로 데려 가시겠다는 뜻입니다.

땅에서 뽑아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 뿌리는 내리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세요.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이 야속하겠어요.

우리 앞에 야속한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하나님은 인간적으로 보면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에요.

인간적으로는 만나기 싫은 분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초대 하지도 않았는데 찾아 오셔서 우리와 상의 하지도 않고 우리 인생을 맘대로 간섭을 하신단 말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당한 것을 생각해 보세요.

야곱의 꿈을 한 순간에 깡그리 깨트려버리잖아요.

얼마나 밉고 야속하고 황당하겠어요.

여러분 앞에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성공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고향에 가는 길입니다.



부모 형제들에게 나 이렇게 성공했습니다 라고 자랑하고 싶어요.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가는데 하나님이 내 차 앞으로 확 달려들어서 충돌하여서 교통사고를 일으켜서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니게 만들고 다 빼앗아 가신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랬다고 생각 해 보세요.

그럼 하나님을 죽이고 싶지 않겠어요.

원망하고 또 원망하지 않겠어요.



야곱이 지금 이런 일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불구자로 만들어 버렸잖아요.

이 얼마나 통곡하고 원통할 일입니까?



신앙생활을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마세요.

신앙생활은 사건의 연속이에요.

사건이 하나 지나가면 또 와요.



그래서 시편 기자는 눈물 골짜기를 통행하는 것이고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싫다고 해서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에요.

피해 가는 길도 아니구요.

필수 코스에요.

하나님이 이러한 코스로 인도 하세요.



이사야의 고백처럼 야곱아 내가 너를 창조하고 지명하고 부르셨다고 하면서 물 가운데도 집어넣고 불 가운데도 들어가게 하신다고 하잖아요.

물과 불로 조성을 한다고 합니다.



조성이란? 만들어 간다는 뜻입니다.

누구로 만들어 가느냐 하면 하나님의 장자로 만들어 가세요.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장자들처럼 높아져서 섬김 받고자 하는 자를 죽이고 예수님처럼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서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형 에서를 이기게 해 달라고 하나님과 씨름 하였어요.

자기를 형 에서보다 강한 자로 만들어 주어서 형이 자기에게 무릎을 꿇게 해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을 자기 힘을 의지하지 못하는 불구자로 만들어서 형 에서에게 무릎을 꿇고 주라고 고백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주가 되고 싶은 자를 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만들고자 하신 야곱의 인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이 땅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서 대접받는 자가 아니라 낮은 자가 되어서 섬기는 자에요.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주가 되고 싶어 하는 야곱을 죽이고 종이 되어 섬기는 이스라엘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인생을 바꿔치기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야곱은 나중에 이게 복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낮은 자가 되어서 섬기는 것이 저주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게 복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강함이 아니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강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죽기 전에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적을 시키고는 하나님 앞에서 진짜 장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라는 것을 장자와 차자에게 손을 어긋맞기고 축복하는 것으로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장자를 차자로 만들고 차자를 장자로 만드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 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지팡이를 의지하고 두 아들을 역설적으로 축복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팡이를 의지하고 장자와 차자를 뒤 바뀌는 축복을 하면서 내가 만난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인생이 바꿔치기 당하고 난 후에 형님을 만나게 됩니다.

형님 앞에 무릎을 꿇고 형님을 주라고 하면서,

형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얍복강을 자나오면서 형을 이기는 것은 섬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야곱이 얍복강 사건은 십자가 사건과 같아요.

십자가라는 얍복강을 지나고 보니까 섬김 받는 자가 높은 자가 아니고 섬기는 자가 높은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섬기는 자로 형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라고 한 것입니다.

속된 말로 자존심을 버리고 나니까 무릎을 꿇는 게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자존심을 버리니까 천국인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나 죽었습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인간의 불행은 무릎을 안 꿇으려고 하는 데서부터 와요.

남 보다 잘난 자가 되고 싶은데서 불행은 시작이 되어요.



남 보다 더 가져야 하고,

남 보다 더 높아져야 하고,

남 보다 더 나아야 해요.

차도 남 보다 더 좋은 차를 타야하고,

아파트도 남 보다 더 넓은 평수에 살아야 하고,

옷도 남 보다 더 비싼 옷을 입어야 하고,

가방도 남 보다 더 좋은 명품을 들어야 하고,

얼굴도 남 보다 더 예뻐야 해요.



특히 여자들을 모든 게 비교 대상이에요.

남편도 비교 대상이고,

자식도 비교 대상이고,

심지어 자기 얼굴이나 몸매도 비교 대상이에요.



이 시대 여자들은 성형에 중독이 되었어요.

왜 성형을 합니까?

예뻐지고 싶어서입니다.

충분히 예쁜데 본인은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몸에 칼을 대는 것입니다.

인조인간을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얼굴에 칼을 한번 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눈을 하고 나면 코를 해야 하고,

코를 하고 나면 입술을 해야 하고,

입술을 하고 나면 얼굴 돌려 깎기를 해야 하고,

얼굴 돌려 깎기를 하고 나면 가슴 확대하고,

가슴 확대를 하고 나면 주름살 제거하고,

주름살 제거하고 나면 지방 제거 수술을 하고,

지방 제거하고 나면 멀쩡한 이빨 다 뽑고 임플란트를 하고,

끝이 없어요.



좌우지간 지랄을 하고 있어요.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없이 서로 앞 다투어 지랄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선풍기 아줌마 알지요.

옛날에 선풍기 아줌마라는 이름으로 TV에 나왔잖아요?

그 사람의 원래 모습을 보았는데 엄청 예뻤어요.

처녀 때 얼굴이 얼마나 예쁜 줄 몰라요.

그런데 만족하지 못하고 얼굴에 손을 대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자기가 자기 얼굴에 주사하기 시작하였어요.

그것도 콩기름으로 말이에요.

세상에,

결국 얼굴이 흉물이 되어서 흘러내리기 시작을 한 겁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탐욕에 쫓기면 자족하지를 못해요.

자족하지 못하면 열등감에 사로잡혀요.

열등감에 사로잡히면 경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걸 경쟁하다가 보니까 쫓기게 되는 것입니다.



쫓기면 우울해지고, 그러다가 약물 중독에 빠지고 급기야는 폐인이 되는 것입니다.

지옥이 달리 지옥이 아니에요.

만족하지 못하면 지옥이에요.

지옥을 무저갱이라고 하지요.

무저갱은 밑 빠진 독과 같아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지옥이에요.



탐심이 가득한 인간은 항상 결핍을 느껴요.

결핍을 채우면 또 다른 결핍이 찾아 와요.

그러니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인간은 잘 살수록 행복 지수가 낮아요.



실제로 유엔에서 인간들이 삶의 질에 대하여 연구한 보고서를 보면 미개한 나라 사람일수록 행복 지수가 높고 문명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행복 지수가 낮다는 통계가 나와 있어요.

부자 나라는 삶에 질은 좋을 수가 있어요.

편리한 것하고 행복한 것은 달라요.

물질문명은 편리함을 줄 수는 있어도 행복은 줄 수가 없어요.

행복은 마음의 평안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물질에 행복이 있다고 미혹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저주를 하였지요.

흙이란? 이 세상을 말해요.

이 세상의 것을 통칭하여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한마디로 하면 출세하고 성공하여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말하면 돈(떡)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을 찾아 와서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는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므로 누구든지 자기에게 절을 하는 자에게 주겠다고 하면서 예수님에게도 절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응수하여서 돌려보낸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너무도 잘 알아요.

그래서 마귀는 인간들이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미혹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라고 해서 이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여서 이것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이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얍복강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얍복강은 십자가에요.

십자가 안에서 나를 보면 만족이 되는데 십자가 밖에서 나를 보면 만족이 안 되어요.

십자가 안이라는 것은 뭐냐? 나 죽었다는 것이거든요.



사도 바울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다 빼앗겼어요.

그 좋은 바리새인의 지위를 다 빼앗겨버렸어요

빼앗겼는데 행복한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세상의 좋은 스펙이 행복한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한 다는 것이 참 행복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을 보세요.



내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이고,

내가 우겨쌈을 당한 것 같으나 우겨쌈을 당하지 아니하고,

내가 모든 것을 빼앗긴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이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욕을 해도 축복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기 때문에 관용이 나오고 관대함이 나오고 용서가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관용이나 관대함이니 용서는 가진 자만이 할 수가 있어요.



결핍을 느끼는 자에게는 관대함이나 관용이나 용서가 나오지 않아요.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은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해요.

진짜는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십자가 안은 천국인데 십자가 밖은 지옥인 것입니다.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은 항상 불행해요.

만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로또복권 10억을 당첨 되었다고 합시다.

그럼 그 순간은 엄청 기뻐요.

그런데 지난 주 상금이 30억이에요.

이걸 아는 순간 속이 상해요.



지난 번 보다 작기 때문입니다.

30억 되면 만족할 것 같은가요?

아니에요.

더 큰 액수를 쳐다보아요.



100억을 줘 보세요.

만족하는가?

아니에요.

100억 주면 500억 달라고 해요.

이게 인간의 욕망이에요.



이게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에요.

물질의 가치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물질의 가치 속에는 행복이 없어요.

행복은 십자가 안에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질을 주지 않고 십자가를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물질의 가치로 사는 자를 죽이는 곳이에요.

세상 가치가 죽어야 세상으로부터 자유 할 수가 있어요.

돈에 대하여 죽어야 돈을 이길 수가 있어요.

제자들은 돈에 대하여 죽었어요.

세상에 대하여 죽었어요.

예수님이 죽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아도 감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자는 자존심이 없어요.

자존심이 없으니까 경쟁할 이유가 없지요.

경쟁할 이유가 없으니 자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자 눈에 비늘이 떨어졌어요.

새로운 세계가 보이는 것입니다.

삼층천을 본 것입니다.

그곳은 물질의 가치로 사는 곳이 아니고 말씀의 가치로 사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도 난 다 가졌다고 하면서 자랑하고 감사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죽었다 살아난 겁니다.

야곱의 얍복강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큰 자라는 뜻을 가진 사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에 의하여 죽임 당하고,

작은 자라고 하는 뜻을 가진 바울이라는 사람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로 따지지 않아요.

세상에서 성공하면 천국에 가고 실패하면 지옥에 가지 않아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보세요.

그러니 세상의 평가에 희비 할 필요가 없지요.



탕자 비유를 보세요.

아버지는 아들 자체를 보지 아들이 가진 조건을 보지 않아요.

물질적 가치로 보지 않아요.

성공했든 실패했든 아들이에요.



돈을 다 털어먹고 빈털터리로 왔다고 해도 아들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보았어요.

아버지에게는 아들 그 자체가 기쁨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자기 조건으로 눈치 보는 겁니다.



밥 먹을 때마다 아버지 돈 털어먹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일해서 갚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비록 자식이 부족할지라도 그걸로 주눅 들어 있는 자식은 보고 싶지 않아요.

잘못 했을지라도 아버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당당해 하는 자식을 기뻐해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우린 다 탕자들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자들이에요.

신앙은 우리의 잘못 때문에 눈치보고 궁상떠는 것이 아니에요.

비록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하여야 해요.



우리가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을 알고 예수님이 피를 흘려주셨잖아요.

그러니 죄를 지은 것은 지은 것이고 아버지 앞에 나올 때는 예수 안에서 당당하세요.

죄 지은 것을 잘했다고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내가 살고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야곱이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았듯이 우리도 십자가 의지하고 살아야 해요.

우리는 우리 인생을 책임질만한 인간들이 아니에요.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우리 인생을 내가 책임지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난 후로는 우리 인생을 예수님이 대신 책임져 준다는 것을 알았어요.

예수님이 대신 책임을 져 준다는 말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대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를 대하시니까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구원에서 잘려 나갈 일이 없으니까 이 세상의 조건으로 희비 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거쳐 가는 정거장과 같은 것이니까요.

가장 행복한 인생이 무엇인줄 아세요?

부모에게 인생을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이건 아이들은 몰라요.

인생을 오래 살아온 어른이 되면 알게 됩니다.

인생을 살아보니까 어린 아이 시절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내가 책임질 인생이 없었으니까요.

부모님이 다 알아서 해 주었으니까요.

물론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어린아이 때는 사사건건 부모의 간섭을 받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맘대로 하지 못하니까 빨리 어른이 되어서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막상 어른이 되어 보세요.

모든 것을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해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보세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어깨에 천근만근 무거운 짐으로 짊어져 있는 것입니다.



쉬고 싶어도 맘껏 쉴 수가 없어요.

회사에서 그만 나오세요 라고 할까봐서,,

아파도 회사에서 나오라고 하면 끙끙 거리고 나가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짤리면 처 자식은 누가 부양합니까?

그러니 아파도 불평하면서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가 책임지는 인생인 것입니다.



죄인이 자기 인생을 책임진다고 하면 잠시도 살 수가 없어요.

늘 죄를 짓는데 그 죄책을 어찌 감당을 합니까?

사망이 시속 100km 로 쫓아오는데 어찌 쉼이 있겠어요.



야곱은 자기가 자기를 지키고자 하였어요.

그래서 힘이 필요했던 겁니다.

힘을 모으고 살았어요.

그런데 형 에서가 자기보다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자기보다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운 겁니다.

밥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되고,

잠을 자도 선 잠을 자고,

꿈을 꾸어도 맨 날 쫓겨 다니는 악몽으로 시달리고,

사는 게 지옥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매달린 것입니다.

저쪽 보다 강한 힘을 달라고 하나님과 밤새도록 씨름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기껏해야 이 생각 밖에 할 수가 없어요.



힘에는 힘으로 이긴다,

그러니 힘을 갖자,

더 큰 힘을 갖자

이게 야곱의 인생 목표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이 더 이상 자기 힘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힘을 상징하는 허리를 분질러 버리고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힘을 빼앗기고 보니까 속이 시원한 겁니다.

더 이상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않게 되니까 평안 한 겁니다.



이기려고 하면 맨 날 쫓기는데 지고 사니까 편한 겁니다.

인생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사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힘을 빼앗기고 나니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안은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걸 호세아에서는 아골골짜기에서 소망을 문을 삼는다고 합니다.

지옥인 줄 알았는데 그곳에 천국의 문이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집에서 쫓겨나 광야에 머물 때는 거기가 지옥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곳이 하늘 문이 열리는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이 그러해요.



실패한 자리가 쉼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바꿔치기 하시는 일을 벌리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움켜잡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을 비움으로 쉼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가 받은 축복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실패한다고 낙심하지 말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안목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어 가셨는지를 보시고,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것들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이긴 자들이에요.

성도에게는 실패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천국을 상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받을 것이 아니고 이미 받았어요.

넘어져도 천국이에요.

그러니 안심하고 사세요.

모든 것이 주의 뜻이려니 하고 사세요.



그럼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참 허~ 허~ 하고 이겨 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퇴근 시간이 곧 다가 오니까 일을 벌리려 하지 말고 마무리하면서 사세요.

주님이 곧 오십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자기를 지키고자 힘든 삶을 살았던 야곱의 짐을 얍복강에서 내려 놓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에게 향한 사랑으로 들려지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꿔치기 하시듯이 지금도 우리 인생을 바꿔치기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 인생은 실패될 수 없는 인생임을 알았사오니 이제부터라도 내 인생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감사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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