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창세기 강해

♣58강. 야곱과 얍복강 그리고 이스라엘 (창 32:1-32)

by coroa 2021. 7. 15.

 

 

 

58강. 야곱과 얍복강 그리고 이스라엘 (창 32:1-32)

-.정낙원 목사

 

야곱은 계시사적 의미로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자기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구약 마당에서는 야곱을 통하여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장자권의 축복을 받고난 후에 어머니의 고향에 가서 아내를 맞이하고 12아들을 낳아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 집에서 광야로 쫓겨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벧엘 광야에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동행 하겠다” 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야곱이 하는 모든 일들 속에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이 담겨져 있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야곱은 하란에 있는 외삼촌을 만납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종살이를 하면서 아내와 12 아들을 얻습니다.

이것이 신약에 오면 예수님이 12 제자를 구원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야곱의 12 아들이 신약에서는 12 제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은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야곱에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같은 일이 예표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얍복강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의 얍복강 사건은 야곱이 죽는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천사를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천사들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만나기 전에 매우 두려워하였습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몹시 두려워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예요.

에서가 두려운 겁니다.

야곱에게 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겁니다.

두려운 존재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두려움을 이기도록 돕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가면서 강을 하나 건너지요.

강을 건너는 것은 영적으로 죽음을 상징해요.

이게 신약에서는 세례로 나타납니다.

세례는 죽음을 상징하고 죽음은 강을 건너는 것과 같아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죽임 당하지요.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가 부러뜨리고 새 이름을 주시잖아요.

새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한 사람이고 이스라엘은 민족이고 나라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야곱을 죽이고 그 속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야곱이 죽음으로 이스라엘의 낳은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죽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낳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야곱이 얍복강에서 죽임당하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생겨난 것이나 예수님이 죽어서 신약 교회가 생겨난 것이나 동일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에 볼 것 같으면 하늘 예루살렘 성에는 구약의 12지파 이름과 신약의 12사도들의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야곱에게서 12지파가 생겨난 것이나,

예수님에게서 12 사도들이 생겨난 것이나 그 영적 의미와 배경은 동일한 것입니다.



야곱은 옛 사람을 상징해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새 사람이에요.

새 이름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옛 사람은 죄인이고, 새 사람은 의인이에요.




그러니까 옛 사람인 죄인으로서의 야곱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어요.

죄인이 하나님을 보면 죽어요.

의인이라야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고 죽지 않아요.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옛 사람 야곱을 죽이고, 새 사람 이스라엘로 살려내고서는 만나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았다고 하여서 그곳 이름을 ‘브니엘’ 이라고 합니다.



30절을 보세요.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야곱이 어떤 고백을 하나요?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고도 죽지 않고 살았다고 하지요.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는 뜻이 함축이 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야곱으로 하나님을 만난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로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로 살려내신 것은 만남을 갖고자 함입니다.

이게 비밀이에요.



신약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곳이 어디인가요?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도 육체를 십자가에 죽이시고 난 후 부활 한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가셨어요.

이렇게 되면 야곱의 얍복강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옛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난 후에 만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성령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에 우리 안으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 안에 성전이 이루어져요.



예수님이 성전이지요.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가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성령이 거하는 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거하는 전이라는 말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줄 아세요.

죄 아래서는 종이었는데 예수 안에서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들만 만나주고 종은 만나 주지 않아요.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는 우리는 종이었어요.

율법아래서 종노릇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겁니다.

종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오셔서 아들로 살려내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육체로 계실 때는 종으로 일을 하셨어요.

십자가에서 종으로 살던 육체를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신 것입니다.

부활 하시고 난 후에 자기 백성들에게 아들에 영인 성령을 보내주셨어요.



이걸 그대로 성도에게 적용하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자기 백성들을 안고 죽으셨어요.

그리고 살아날 때 함께 살아났어요.

그래서 성령을 자기 백성들에게만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 아들 만들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종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고 하지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종이 아니고 아들이에요.

이제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아들이라야 아버지를 만날 수가 있어요.



예수님 때문에 아버지와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걸 화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나아가는 길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이 낸 길을 통하여서 나아오는 자들만 만나 주세요.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두 가지 담을 헐어버렸어요.

위로는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어 버리셨고,

아래로는 사람 사이에 가로 막힌 담을 헐어 버리셨어요.

이게 교회에요.

교회는 차별이 없어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나,

많이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차별이 없어요.

왜냐하면 모두가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암튼 야곱은 얍복강에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죄인인 야곱은 죽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복이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예수님을 예표하지만 우리도 예표하고 있어요.

야곱 속에는 이중 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럼 야곱의 인생이 우리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사건을 우리에게 적용해봅시다.

야곱이 얍복강 사건이 일어났으면 우리에게도 얍복강 사건이 일어나겠지요.

얍복강 사건은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곳이 어디인가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예수님과 연합이 되었다고 하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우리도 죽었어요.

예수님이 부활 하실 때 우리도 부활 하였어요.

이 사실을 물 세례와 성령 세례로 알려주었습니다.



물 세례는 죽이는 것이고,

성령 세례는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이 되었다는 것을 신앙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신앙고백이에요.



세례 속에 우리의 신앙이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세례는 나는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난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를 알고 받아야지 세례의 의미를 모르고 받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이 되었어요.



예수님과 연합이 된 사람은 예수님이 당하셨던 것을 그대로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예수를 통해서 인생이 바꿔치기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인생을 바꿔치기 당한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에서 우리 인생이 바꿔치기 당한 것입니다.



구원이 뭔가요?

흙에서 난 사람은 죽고,

성령으로 하늘에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난 사람이 예수 안에서 난 사람으로 바꿔치기 당하는 것입니다.



왜 바꿔치기 당하는가요?

이는 하늘에 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하늘에 복은 흙으로 난 땅 사람은 받을 수가 없어요.

땅 사람은 하늘에 복을 감당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땅 사람과 하늘에 사람은 존재 양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땅 사람과 하늘에 사람은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땅 사람에게 하늘에 복을 담을 수가 없어요.

이건 마치 옛날 컴퓨터에 이 시대 프로그램을 설치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아요.

새 프로그램을 설치하려면 새로운 컴퓨터로 바꿔야 해요.



이걸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땅에서 난 우리 옛 사람은 옛날 컴퓨터와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고물 같은 땅 사람을 죽이고 난 후 하늘에 새 사람으로 살려 내시고 하늘에 복을 담아주시는 것입니다.



땅 사람과 하늘에 사람은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요.

땅은 받는 구조이고, 하늘은 주는 구조에요.

땅 사람은 움켜쥐는 방식으로 살고, 하늘 사람은 주는 방식으로 살아요.

그래서 땅에서는 많이 소유하는 것을 복 된 삶이라고 하고, 하늘에서는 많이 베푸는 것을 복된 삶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세요.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주는 분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주는 것으로 사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예수님이 아담의 형상으로 난 자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난 하늘에 사람으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도록 간섭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안에서 율법 아래서 움켜잡고 살던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난 후에는 움켜잡은 손을 펴서 내어 놓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듭난 성도에게 하늘에 복을 주세요.

하늘의 복을 받게 되면 하늘의 삶의 방식으로 바뀌게 되어요.

하늘의 방식이 주는 방식인데 이게 창조 세계의 방식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지요?

그리곤 복을 주시지요.

어떤 복인가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복입니다.

이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온 세상에 남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 구석 구석 골고루 편만하게 펼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온 세상에 남기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게 자기 몸을 버려서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만드셨어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어요.

이 땅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을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으로 저주의 대상이지 복 받을 대상이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저주받은 자들을 복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복의 사람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의 본체시라고 하지요.

이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진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만이 진짜 사람이에요.

죄인인 우리는 원래 창조된 모습으로서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죄인은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죄인을 짐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짐승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짐승이 사람이 되려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새롭게 창조가 되어야 해요.

이 일을 위하여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짐승을 사람으로 만들려고 오신 것입니다.

어떻게 짐승을 사람으로 만드냐 하면 예수님이 짐승에게 먹혀주심으로 하세요.

그래서 예수님이 짐승의 구유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짐승의 밥으로 주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살지요.

밥을 안 먹으면 죽습니다.

이러면 사람이 밥으로 인하여 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밥을 먹는 것은 밥 힘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내가 사는 것입니까?

밥이 나를 살게 하는 것입니까?밥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이지요.

내가 밥을 먹은 것 같은데 실상은 밥이 우리를 먹은 것입니다.

밥이 우리 몸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우리 밥으로 주셨어요.

예수를 먹은 짐승들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짐승이 예수를 먹은 것 같은데 실상은 예수가 짐승을 먹은 것입니다.

예수가 그 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짐승에게 먹힘 당함으로서 짐승을 예수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하늘로서 온 산 떡이라고 하면서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그 속에 생명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걸 사망이 생명을 삼켰다고 합니다.



생명은 죽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생명이 사망에게 먹힘 당한 것입니다.

사망이 생명을 먹은 줄 알았는데 실상은 생명이 사망을 삼킨 것입니다.

생명이 사망을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짐승이 예수라는 양식을 먹게 되면 예수님은 영생하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예수님을 삼킨 자들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삼켜요.

그런데 역전이 일어나요.

예수가 우리를 삼키는 일을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창조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죽였어요.

그런데 그 예수가 우리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삼켜버리면 우리가 예수로 바꿔져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는 일을 하신단 말이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는 일을 하는데 그것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걸 두 세례로 말하는 것입니다.

물 세례는 옛 사람의 죽음이고,

성령 세례는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두 세례 모두 예수님과 연합이 되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지어서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걸 대표원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방법 그대로 의인을 만드세요.

의인이신 예수님 한 분 속에서 수많은 의인들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나심으로서 자기 백성들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믿어지게 하십니다.

성령이 오면 이게 믿어져요.

그래서 성도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을 두 세례를 말하잖아요.

물 세례는 죄인을 죽이는 세례이고,

성령 세례는 의인으로 살려내는 세례이잖아요.

그래서 구원이 물 세례와 성령 세례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물 세례는 예수님이 육체로 담당하셨고,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에 성령으로 오셔서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먼저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려내는 일을 하세요.

이게 하나님이 얍복강에서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로 살려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그러니까 야곱은 얍복강에서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다 받은 것입니다.

야곱은 물세례로 죽임 당하고, 성령 세례로 이스라엘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곤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걸 언약적으로 말하면 옛 언약은 야곱이고, 새 언약은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종의 언약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새 언약은 아들의 언약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육적 이스라엘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 있던 구약 이스라엘을 끄집어내어서 거룩한 성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마테복음 27장을 봅시다.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지지요.

이건 하늘로 가는 길이 하나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려서 많은 사람이 살아나지요.

예수님이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으로 들어갔어요.

거룩한 성은 천국을 말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은 구약의 성도들이에요.

그러니까 구약의 이스라엘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구약도 복음이고, 신약도 복음이에요.

율법도 복음이고, 은혜도 복음이에요.

구약과 율법은 죄인을 죽이는 복음이고,

신약과 은혜는 의인으로 살려내는 복음이에요.



하나님은 먼저 죽이는 복음을 주세요.

그게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옛 사람에게 율법을 주었어요.

율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살리는 복음을 주면 안 되어요.

그러면 죄인의 세계가 확장이 되어져요.

하나님은 죄인의 세계가 확장 되는 것을 원치 않아요.

그래서 죄인에게는 죽이는 율법이라는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에게 복을 주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우리 육신에게 복을 달라고 합니다.

육신은 땅의 것을 추구해요.

땅에서 승승장구하고 싶어 해요.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고자 해요.



성도는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가 땅에 정착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게는 땅에 것을 주지 않아요.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세요.

하늘의 신령한 복은 영적인 것입니다.

구원이고 영생이고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같은 것들입니다.



하늘에 신령한 복을 받은 성도는 물질적 가치로 살지 않고 영적 가치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에 것을 주고자 하심입니다.

하늘에 복을 주고자 함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예외 없이 하늘에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은 자연히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되어 있어요.

영적 가치를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무엇이냐?

어떤 가치로 사느냐?

어디를 지향하고 사느냐?

그 삶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불신자는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이 아니에요.

교회 안에도 불신자가 많아요.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들이 땅에 것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땅에 붙잡아 두는 일을 합니다.

그게 666 짐승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싸움이 아니에요.

이건 정체성의 문제에요.

떡에 가치로 사는 사람은 받게 되어 있고,

하늘에 가치로 사는 사람은 받지 않아요.



받지 않으면 매매를 못해요.

결국 고난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하늘에 생명을 가진 자들은 고난당하여도 받지 않아요.

실제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어요.



받지 마세요, 받지 마세요, 한다고 해서 안 받는 것이 아니에요.

땅에 속한 사람은 받을 수밖에 없어요.

땅이 근본인 사람은 땅이 전부에요.

그러니 땅에 속한 자는 다 짐승표를 받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근본인 성도에게는 이 세상은 지나가는 정거장이에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와 행인들입니다.

외국인이고 나그네이고 행인이기 때문에 조금 불편하게 사는 것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성령이 하늘에 대한 소망을 주기 때문에 이겨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로서 난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어요.

성령이 그 속에 천국을 몰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보면 믿음 소망 사랑이 있습니다.

성령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몰고 왔어요.

그래서 성령이 임한 성도는 믿음으로 살고 소망으로 살고 사랑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믿음이 생겨요.

그 믿음이 천국을 소망하게 해요.

그리고 소망을 가진 자는 주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나라 백성들에게는 하늘나라 택배를 하나씩 보내 주셨어요.

성령이 택배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택배 속에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어요.

그래서 성도는 믿고 소망하고 사랑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조금 불편하다고 하여도 믿음으로 이겨내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택배를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1서 4장 18을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하였어요.

이 사랑은 성령이 몰고 온 사랑이에요.

성령이 몰고 온 사랑은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예수님의 사랑이에요.

이 사랑이 있는 성도는 두려움이 없어요.



성령이 예수를 앞세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들이잖아요.

그러니 그 속에 아들의 영인 성령이 임한 성도는 하나님 앞에 아들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남의 집 자식하고, 내 자식의 차이가 뭔가요?

관계성이에요.

사랑이라는 관계성이에요.

이건 본능 속에 자리 잡고 있어요.



자식하고 엄마는 탯줄이 연결이 되어 있어요.

뱃속에서는 탯줄로 연결이 되었지만,

뱃속에서 나와서는 사랑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요.

엄마는 자식에게 젓을 먹이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먹이는 것입니다.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란 자식은 사랑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은 잘못해도 자기 엄마에게는 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바지에 똥을 싸고도 당당하게 나 똥 쌌으니 바지 벗겨줘 그런단 말입니다.



이걸 똥 싼 놈이 성낸다고 하잖아요.

이건 자식에게 하는 말이에요.

남의 자식은 그러지 못해요.



남의 자식은 법으로 다가와요.

법은 자기 꼬라지를 내세워요.

그러므로 남의 자식은 바지에 똥을 싸면 자기가 냇물에 가서 씻어서 입고는 아닌 것처럼 행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는 하나님을 눈치를 보았어요.

그 땐 우리 행위로 나아 왔어요.

잘난 일이라도 하면 보무도 당당하게 나오는데,

행여 한 주간 살면서 개판이라도 쳤으면 교회 나오기가 부담스러워요.

그래서 법 아래 있는 자들은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교회를 안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내 자식이 있고 남의 자식이 있어요.

내 자식은 은혜 아래 있는 자이고,

남의 자식은 율법 아래 있는 자에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내 자식이고,

예수 밖에 있는 자는 남의 자식이에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아버지 앞에 나아갈 때 예수를 앞세우고 나아가요.

“아버지의 맏아들 예수로소이다” 라고 나아가요.

마치 야곱이 에서의 옷을 입고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라고 나아간 것처럼 말이에요.

이게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는 담대함인 것입니다.

이 담대함은 믿음을 받으면 생겨요.



그래서 믿음을 받은 자는 자기 꼬라지로 희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꼬라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까 숨을까 하지 않아요.

내 꼬라지가 비록 야곱 같지만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예수님의 옷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치보고 나오는 자를 싫어하세요.



여러분들 자식이 눈치 보면 좋나요? 나쁘나요?

나쁘지요.

자식들이 언제 눈치를 봅니까?

잘못했을 때이지요.



자식들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고 엄마에게 먼저 말해요.

그럼 엄마가 나무라지만 그걸 덮고자 합니다.

엄마가 먼저 나무라고서는 아버지 곁에서는 변호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만 저만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그래서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어준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엄마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예수님이 변호해 주세요.

예수님이 우리를 감싸고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게 하신단 말입니다.



이게 야곱이 장자의 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야곱인 줄 알아요.

그래서 이 놈이 음성은 야곱의 음성인데,

옷은 에서의 옷을 입고 있네,

이삭은 에서의 옷의 향취를 맡고서 축복을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그렇게 대하세요.

이 놈이 죄인인데,

그런데 예수의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신 것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었듯이 말이에요.

우리는 예수라는 가죽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예수라는 가죽 옷을 보고서 축복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눈에는 우리가 보이지 않고 우리가 입고 있는 예수님의 옷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포옥 감싸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일컬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지 않고 나를 감싸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세요.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하늘의 시온 산에 144000명의 구원 받은 무리들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 전부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은 어린 양이 그들을 감싸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독자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앞세우고 나아가요.

그래서 옷을 벗겨보면 야곱이 맞는데 겉은 예수님의 옷을 입고 있어서 예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얍복강에서 옛 사람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로 살려 내셨습니다.

야곱은 이미 죽었고 이스라엘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은 새 사람인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는 일을 하십니다.



야곱이 죽고 새 사람 이스라엘로 나타난 자가 바로 합환채를 먹고 태어난 요셉이에요.

그래서 요셉을 야곱의 약전에 올려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태어난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것과 같아요.

그래서 성령을 상징하는 합환채를 먹고서 난 요셉을 야곱의 약전(이력서)에 기록하여서 야곱의 2기 인생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37장 2절을 봅시다.



창 37:11-1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2 야곱의 약전이 이러 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야곱이 가나안 땅 아비의 집에 우거하고 있지요.

이것은 얍복강을 건너와서 고향에 온 것입니다.

고향에 돌아온 야곱은 옛 사람 야곱이 아니라 새 사람 이스라엘이에요.

야곱은 지금 죽었다 살아난 이스라엘로 아버지 집에 우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야곱의 약전은 이러하니라” 하고는 야곱 이야기를 하지 않고 요셉이 17세 소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로 살아가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인생이 없어요.

아버지 인생을 살았어요.

그래서 요셉의 일생을 꿈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꿈은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요셉이 야곱의 아들들을 기근으로부터 살려내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통하여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아들들을 기근으로부터 살려냅니다.

그러자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주라고 고백합니다.



주(主)란? ‘우두머리’ 라는 뜻입니다.

우두머리는 아비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게 주(主)라고 고백하는 것은 ‘당신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입니다’ 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책임지는 자에요.

구원하는 자에요.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요셉의 해골을 앞세우고 나오는 것입니다.

요셉의 해골이 출애굽 하는 백성들 앞에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은 요셉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다는 뜻입니다.



애굽은 죄의 나라에요.

애굽은 죽음을 상징해요.

죽음에서 어떻게 나옵니까?요셉의 죽음으로 나오지요.

요셉의 해골을 앞세우고 나온다는 것은 요셉의 죽음으로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 무덤 속에 들어가서 사망에 가두어진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을 끄집어내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놀랍지요.



하나님은 야곱과 요셉을 가지고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과 같고,

요셉은 부활하여서 무덤 속에 있던 이스라엘을 빼내오는 예수님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 속에 이스라엘을 포함시켜 놓았어요.



야곱은 예수님과 같고,

이스라엘은 우리 성도들과 같아요.

우리가 이스라엘이에요.

이러면 야곱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야곱과 같은 일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과 요셉은 예수님을 예표하지만 또한 우리 성도들을 예표해요.

이중 게시가 담겨져 있어요.

잘 보세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죽고 이스라엘이 되잖아요?

그리고 37장에서는 요셉의 약전에 요셉을 끼워 넣지요?

이렇게 되면 요셉도 야곱의 운명 속에 동참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도 야곱과 같은 일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과 요셉의 인생을 비교해 보세요.

똑 같아요.

그리고 야곱과 요셉의 인생을 예수님과 우리 인생으로 비교해 보세요.

이것도 똑 같아요.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 난 후 집에서 쫓겨나서 하란에 가서 아내를 데리고 고향으로 옵니다.

고향으로 오다가 얍복강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죽임당한 모습으로 아내를 고향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요셉도 아비의 사랑인 채색옷을 입고 꿈을 꾸자 집에서 쫓겨나 애굽으로 갑니다.

그리곤 해골이 되어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옵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에게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하늘 집에서 이 세상으로 쫓겨납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에 온 것은 자기 신부들을 천국에 데리고 가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가요?

십자가에 죽음으로 구원하시지요.

이건 야곱이 하란에서 아내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는 것과 같아요.

또한 요셉의 해골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서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야곱의 이야기나 요셉의 이야기나 예수님 이야기나 다 같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성경은 다 같은 이야기에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구약은 그림자라고 하고 신약은 실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예표이고 신약은 실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곧 우리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모든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이고 또한 우리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야곱의 얍복강 사건은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얍복강 사건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옛 사람 야곱이 죽고 새 사람 이스라엘로 살아났나요.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여서 야곱이 하나님을 이기지요.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가 부러뜨린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그러잖아요.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놓을 수가 없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부러뜨린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야곱에게 져주었다는 뜻이에요.

결국 야곱은 하나님의 죽으심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새 사람으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으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이기고 살아난 야곱의 2기 인생을 요셉으로 살게 하지요.

요셉은 야곱의 새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새 사람인 야곱을 상징하는 요셉을 이번에는 거꾸로 형제들에게 죽임 당하는 구조 속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을 이기고 살아난 야곱을 이제는 반대로 죽임당하는 구조 속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이게 새 사람이 살아가는 신앙생활이에요.



잘 보세요.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살아났습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죽음으로 살아난 새 사람을 예수의 죽음의 구조 속에 밀어 넣으세요.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은 예수로 살아난 성도들을 이제는 죽임 당하는 구조 속으로 집어넣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옛 사람이 날마다 죽임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임당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어요.

예수님의 죽음에 넘겨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세요.



요 20:19-23=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을 하십니다.

부활 하신 후 첫 날 저녁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갑니다.

찾아가서 하늘에 평강을 주시고는 사명을 주십니다.

하늘에 평강을 주었다는 것은 하늘에 복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들을 보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방식 그대로 제자들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여서 세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무엇을 하셨나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일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죄를 사하셨나요?

자신의 죽음으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죄를 사해 주는 일을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가 죽임 당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면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피로 증거가 되어 왔습니다.

그 처음이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전한 제자들이고,

그 다음은 복음 전하다가 수없이 죽어간 믿음에 성도들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거하다가 죽임 당한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에게 자신들의 원수들을 갚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저 아래에 너희들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종들이 죽임을 당하여서 그 수가 차야 된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로 살아난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야곱을 죽여서 이스라엘로 고향으로 데리고 가셨듯이,

성도들을 죽여서 세상으로부터 죽임 당하게 하여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겠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은 일컬어 도살당할 양이라고 하였어요.



우린 모두가 예수님 때문에 죽임 당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인생을 날마다 죽임당하는 것으로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이 날마다 죽임 당하게 되어요.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한번으로 족해요.

우리가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것은 한번으로 족해요.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게 아니에요.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는 단회적으로 나왔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아요.



이제부터 자라감이 있습니다.

부모가 지향하는 자리로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그 삶이 아이의 주권이 부모에게 차압당하는 고난인 것입니다.

부모는 부모가 바라는 곳까지 아이를 간섭합니다.



이건 성도의 구원과 같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새 사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단회적이에요.

새 사람으로 살아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과정이 있어요.

그것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땅에 사람이 죽고 하늘에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움켜잡는 땅 사람의 인생에서 내어 주는 하늘 사람의 인생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율법 아래서 움켜잡고 손을 오그라뜨리고 산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나누어주고 베푸는 손을 펴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데리고 가시고 그 자리에 성도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간섭을 하세요.

하나님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까지 간섭하세요.

이것이 죽임 당하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자기가 부인 되어지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순교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내 것이 자꾸만 빼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새 사람인 야곱을 어떻게 다스려 가는지를 살펴봅시다.

얍복강 이후의 야곱의 삶은 우리 성도가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야하는 모습입니다.

거듭난 성도의 삶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형 에서가 군사 400명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에게 에서를 이기게 해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위골시킴으로서 야곱의 의지를 꺾어 버린 것입니다.

힘을 주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힘을 빼앗아가 버린 것입니다.



이건 야곱이 의도한 것과 달라요.

야곱은 형을 이기고자 하였는데,

하나님은 형에게 무릎을 꿇게 하셨어요.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 주란?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라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섬김을 받고자 하였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섬김 받고자 하는 것은 옛 사람이에요.

새 사람은 섬기는 자에요.

야곱이 에서를 보고 ‘주여’ 라고 하지요.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는 형을 이기고 자기가 주가 되고 싶어 하였는데,

얍복강에서 새 사람이 되고 난 후에는 에서에게 무릎을 꿇고 내 주여 라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모습은 곧 예수님의 모습이에요.

예수님은 주이시면서 섬기는 자로 사셨습니다.

세상 나라의 주는 섬김을 받는 자이지만, 하늘나라의 주는 섬기는 자에요.



옛 사람은 땅의 원리로 살지만,

새 사람은 하늘의 원리로 살아요.

하늘은 주는 원리로 살고, 땅은 받는 원리로 살아요.

그러므로 하늘에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사람은 움켜잡았던 손을 펴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움켜잡고 살았잖아요.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움켜잡았던 것을 내어 놓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내 배를 채우고자 남의 입에 들어가는 떡을 빼앗았는데,

성령으로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고 나니까 내 입에 들어가던 떡을 빼내서 남의 입에 넣어 주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땅 사람이 하늘 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아이로 살았지만,

은혜 아래서는 어른으로 살게 되어요.

아이는 받는 자이지만, 어른은 베푸는 자에요.



어른은 주(主)이고, 아이는 종이에요.

그런데 삶은 정반대에요.

어른은 섬기고 아이는 받아요.

주가 종을 섬긴단 말입니다.

이게 하늘나라 삶의 원칙이에요.

새로운 피조물이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늘나라 법칙으로 이 땅에서는 섬기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에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험하기 전에는 내가 잘난 자로 섬김 받는 자로 살아가고 싶었어요.

상좌에 앉고 으뜸이 되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난 후 사고가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작동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처럼 에서를 주라고 고백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증거가 뭡니까?

섬기는 것입니다.

은혜 받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도 항상 목을 세우고 상좌에 앉으려고 해요.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달라져요.

말석에 앉고자 하고 섬기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의 생명을 토하여 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얍복강 이후에 나타난 모습이에요.



이게 우리 스스로 자발적으로 안 된다니까.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날마다 우리를 깨뜨리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육신의 소욕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내가 주가 되어서 대장 노릇하고 싶어 해요.



그러나 성령의 소욕은 예수님같이 종으로 살게 간섭을 하세요.

성령은 내 욕심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아 가요.

내 뜻을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각을 시켜요.

이게 옛 사람이 죽는 십자가 사건이에요.



사도바울이 그러잖아요.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못 박는다고,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내 자존심이 깨어지고 내 탐욕이 빼앗기게 되어 있어요.

이게 아픈 겁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섬기는 자들이 아니고 섬김 받고자 하는 자들이에요.



우리는 다 야곱같이 으뜸 되고 싶어 해요.

우린 탐욕의 사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탐욕의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탐욕의 사람을 죽이고 비우는 사람으로 만들어요.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해요.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내가 죽은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모습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오래하면 비우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보면 섬기는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께서 열심히 간섭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을 보면 아이들과 청년들과 아비가 나옵니다.

이건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말하고 있어요.

우리의 신앙은 아이로부터 출발하여서 청년을 거치고 아비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아이들 때에는 받기만 했어요.

모든 것이 수동적이었어요.

곁에서 간섭을 해 주어야 했어요.

교회에 오는 것도 옆에서 끌어 주어야 오고,

봉사를 해도 목사가 시켜야지만 했어요.



그러다가 조금 은혜를 받으면 신앙이 능동적이 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해 갑니다.

이 때는 열심과 정성을 신앙의 최고의 가치로 두어요.

이럴 때는 열심 없고 정성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믿음 없다고 비판하고 정죄해요.

자기 신앙이 최고인줄 알고 나 댑니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어 갑니다.

아비가 됩니다.

아비가 되면 일선에서 후퇴하고 뒤에서 말없이 돕는 일을 해요.

손을 펴고 섬기게 되어요.



청년 때는 뭐든지 흑백논리로 칼을 휘두르고 싸웠어요.

모든 일을 이분법적으로 접근해서 내가 하는 일에 방해를 하면 다 믿음 없는 자이고 마귀라고 싸웠어요.

이 때가 가장 위험할 때에요.

일도 가장 많이 하고 상처도 가장 많이 받을 때입니다.

그러다가 지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을 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진이 빠지면 어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신앙을 접근하는 안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온전한 신앙은 일의 문제도 아니고, 열심의 문제도 아니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범사에 감사하고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낮은 자리에 앉고 목소리는 줄이고 지갑은 열게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면 싸우려 하지 않아요.

어떻게든 이해하고 보듬고 함께 가고자 해요.

청년 때에는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다 잘라내고자 하였는데,

어른이 되고 나면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참아주고 화해하고 붙이려고 해요.



청년 때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잘라내고 죽이는 일을 했지만,

어른이 되면 신앙을 붙이고 살리는 것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비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가세요.

지금 우리가 요만큼이라도 남을 이해하고 참아 주고 봉사하고 섬기는 것도 주께서 이 자리까지 끌고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바리새인들은 청년과 같고 예수님은 아비와 같아요.

바리새인들은 열심과 충성으로 잘라내고 죽이는 일을 하였어요.

자기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믿음 없다고 정죄하고 비판하고 심판했어요.

이게 율법 아래 있는 모습이에요.



청년의 때가 율법 아래 있는 때에요.

그래서 열심은 많으나 덕이 없는 것입니다.

충성은 있는데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지식은 많은데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했어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경쟁상대로 여기지 않았어요.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경쟁상대로 여겼어요.



경쟁상대로 보이면 죽여야 해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틈만 나면 예수를 넘어뜨리고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았어요.

예수님 앞에서는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창기 모두가 긍휼의 대상이에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지옥에 갈 놈 들이다 독사의 새끼라고 한 것은 그들이 행사하는 율법 신앙에 대하여 말한 것이지 그 사람들을 저주 한 것이 아니에요.

율법으로 상좌에 앉고 대접을 받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신앙을 저주한 것이에요.

그 신앙을 옳음이라고 하는 사상을 가진 자들을 저주 한 것입니다.



이들도 구원을 받아야 할 자들이에요.

결국 바리새인들도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는 어른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어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바울이에요.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어요.

율법으로 특심한 자였습니다.

그 열심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고 다닌 자였습니다.



알다시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독사의 새끼들이고 지옥으로 가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 속에 바울도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비가 되어서 바리새인 중에서도 특급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을 너는 예수쟁이들을 죽인 독사 새끼라고 잘라내서 지옥으로 보내지 않고 도리어 구원을 해서 어른의 자리에 앉히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사울이었던 바울은 다메섹에서 죽임을 당하였어요.

율법으로 상좌에 앉아서 남을 죽이던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이 죽고,

지극히 작은 자라는 바울로 살아난 것입니다.

다메섹이 바울에게는 얍복강이었던 것입니다.



얍복강을 거치게 되면 청년에서 어른이 되어요.

신앙의 패러다임이 법에서 은혜로 바뀌어요.

살아가는 자세가 바뀌게 되어요.

율법으로 정죄하고 죽이는 자에서 은혜로 이해하고 살리는 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 안에서 예수님처럼 아비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모두가 얍복강을 경험하게 되어 있어요.

관념적 십자가가 어느 날 실제로 다가 올 때가 있어요.

지식으로 알던 복음이 생명으로 들려질 때가 있습니다.

그럼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는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얍복강 사건을 경험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는 반드시 신앙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시퍼렇게 살아서 찬바람이 쌩쌩 불면서 정죄하던 사람이 어느 날 이해하고 참아주고 온화한 사람으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예전에는 복음을 지식으로 알고 교만하여서 교회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가 되었는데,

이제는 복음을 덕으로 사랑으로 토해내어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신앙의 큰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을 경험한 것입니다.



은혜 받아 보세요.

사람이 변해요.

신앙이 변하게 되어 있어요.

주께서 그렇게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얍복강 사건은 야곱이 원하여 일어난 사건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낮추는 일들을 하세요.

나를 죽이는 일을 하세요.

세상 가치로 살아가는 옛 사람을 죽이세요.



사람이 언제 평안을 얻느냐 하면 내가 죽을 때입니다.

자존심이 죽을 때 행복해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절대로 행복하지 않아요.

내가 살아 있으면 자꾸만 나를 살리는 일을 하니까 쫓기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타자와 나를 비교하게 되어요.

타자와 비교하니 불행한 겁니다.

지옥이 뭐냐?

늘 상대와 나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곤 결핍을 느끼고 비관하고 자학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가졌는데 나는 왜 못 가졌는가?

그럼 슬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은 항상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가는 것입니다.

세속적 가치관으로 살면 나보다 못한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고 마음이 천국인데,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상하고 마음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 우리에게 종으로 섬긴 것이 아니에요.

아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섬길 수가 있었어요.

아비의 마음을 가진 자들은 교회 안에서 종의 자세로 살아요.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빌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바울이 교회 안에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으로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하지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말을 하고서는 뭐라고 하나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셔서 자기를 쳐서 복종하기를 죽기까지 복종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자기를 죽기까지 복종하는 쪽으로 나가가게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께서 살려가지고 지극히 높은 자리에 세워가지고 모든 만유를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해서 주라고 고백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땅에서 종으로 섬기니까 천국에서 왕의 자리에 앉혀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잔치 집에 가면 말석에 앉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인이 말석에 앉은 사람을 상좌에 앉게 해 준다고 합니다.

말석에 앉은 그 자리는 종의 자리에요.

그런데 잔치집 주인은 그 사람은 종이 아니고 상전이라고 하면서 얼른 모셔다가 주인의 자리에 앉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주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종의 모습으로 사셨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너는 종이 아니고 “만유의 주” 라고 하면서 왕의 자리에 앉힌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 안에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지요.

품으라는 말은 와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 마음을 삶으로 부화를 시켜야 해요.

마치 암탉이 알을 품어서 병아리를 생산해 내듯이 말이에요.



하나님은 성도에게 예수의 마음을 주셨어요.

얍복강에서 야곱에게 이 마음을 주셨어요.

그러니까 야곱이 실제로는 에서의 주 인데도 도리어 에서에게 무릎을 꿇고 섬기더란 말입니다.

야곱 속에 품고 있던 예수의 마음이 에서에게 무릎을 꿇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하면, 행함은 예수님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이 예수의 삶을 살게 하듯이 믿음이 행함을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는 이 땅에 예수로 두셨어요.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통해서 예수를 발견하게 되어요.

그래서 성도를 예수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쟁이를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예수님처럼 종의 모습으로 섬기게 되어 있어요.

교회 안에도 은혜 받는 자들이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해요.

은혜 받지 못한 자들은 아무 것도 못해요.

그 속에 예수의 마음을 품지 못한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해요.



교회에 봉사는 아무나 하지 못해요.

연보는 아무나 하지 못해요.

아무나 섬기지 못해요.

은혜를 받아야지만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가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행함은 그 사람의 신앙을 가늠 하는 시금석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고보의 말을 직설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성경적 지식이 출중하고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하여도 신앙의 행함이 없으면 가짜라는 말입니다.

볼품없는 들꽃이라도 생화는 향기를 뿜어내지만, 조화는 아무리 화려해도 향기가 없어요.



예수는 입으로 믿는 것이 아니에요.

몸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입으로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실제이기 때문에 실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의 몸은 구원 받은 자의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건 자연스러운 겁니다.



아무리 복음을 알아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지식으로 남아서 말쟁이가 되어요.

교회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가 되어요.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까지 얍복강을 건너지 않은 자들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얍복강을 건너는 사건을 일으켜요.

이게 없는 사람은 가짜에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이 얍복강을 건너는 사건을 일으켜요.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일컬어 “히브리인”이라고 하지요.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은 “강을 건너온 자들” 이라는 뜻이에요.

아브라함이 유브라데 강을 건너서 왔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히브리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강을 건너오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요.

하나님이 만나 주세요.

얍복강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주신 것처럼 말이에요.

죽음의 강을 건너지 않은 자는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아요.



이것을 성막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어요.

성막에는 뜰이 있고 성소가 있습니다.

성소에 하나님이 계세요.

성소는 반드시 뜰의 번제단과 물두멍을 거쳐서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뜰은 옛 사람이 죽은 곳이에요.

번제단에서 옛 사람이 죽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은 물두멍이라는 바다를 건너게 되어요.



물두멍을 바다라고 하는데 이는 얍복강과 같은 것입니다.

물두멍을 지나서 성소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소는 옛 사람이 들어 갈 수가 없어요.

새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에요.

하나님은 번제단과 물두멍이라는 바다를 건너온 새 사람만 만나 주십니다.



이 모습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속에도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죽음의 재앙을 만나게 하지요.

이 때 온 세상의 장자가 죽어질 때 이스라엘의 장자는 어린 양의 죽음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어린 양이 죽을 때 이스라엘의 옛 사람도 죽은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자들은 새 사람이에요.

새 사람이 되어서 광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새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지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것은 야곱이 얍복강을 건넌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야곱이 겪은 것을 그 후손들에게 그대로 재현을 시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얍복강으로 나타났지만 그 후손인 이스라엘에게는 홍해로 나타난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오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마중을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애굽은 성막의 뜰과 같고 홍해 건너 광야는 성소와 같은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옛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아요.

만나 주지 않아요.

새 사람하고만 만나 주세요.



우리가 어떻게 새 사람이 되나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너머에서 만나주세요.

십자가 너머는 새로운 세상이에요.

새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너머 온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들이면서 종의 자리에서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삶을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합니다.

이걸 우리가 살아낼 수가 없으니까 성령을 보내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서 광야에 나오면 애굽의 사고가 깨트려지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어요.

마치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고 난 후 에서에게 무릎 꿇고 종으로 섬기는 삶을 살았듯이 자기를 비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으로 끝이 아니에요.

새로운 시작이에요.

새로운 삶의 기다리고 있어요.



거듭난 성도의 새로운 삶을 얍복강을 건넌 후 야곱의 삶 속에 담아 놓은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 지나고 난 후부터 빼앗기는 삶을 살았어요.

그 동안 야곱은 하란에서 모으는 삶을 살았어요.



그런데 20년 동안 얻어온 것들을 얍복강을 건너면서부터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 둘씩 버리는 작업을 하게 하십니다.

나중에 야곱은 벧엘로 올라갈 때에 다 버리고 갑니다.

언약 하나 붙잡고 올라가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모으는 삶을 살았어요.

나를 위하여 살았어요.

그러나 은혜를 받고난 후부터는 모으는 삶이 아니라 자꾸만 버리는 삶을 살게 되고 나를 채우는 삶이 아니라 나를 자꾸만 지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빈손으로 가는 곳이에요.

바리바리 싸들고 가지 않아요.

모은 것을 다 내어 놓고 언약 하나 붙잡고 가요.

야곱이 지팡이 하나만 의지하고 벧엘로 올라가듯이 우리도 언약 하나 붙잡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 세상에서 십자가라는 지팡이 언약 하나만 붙잡고 나머지는 다 버리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힘으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인도하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은 날마다 이 안에서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우는 전쟁이 일어나요.

가나안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옛사람이라는 원주민을 쫓아내는 싸움이에요.



가나안 원주민들을 일컬어 거인 족이라고 하지요.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이 바로 거인 족이에요.

아주 강한 놈이에요.



우리 힘으로는 못 이겨요.

예수님만 이길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군대 장관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인 족이 누구냐?

옛 사람 야곱이에요.

탐욕스런 야곱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날마다 야곱을 죽이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탐욕을 깨부수는 작업을 하세요.

하나님과 많이 부대낌을 당한 사람일수록 비우는 사람이 되어요.

포기하는 사람이 되어 버려요.



예수를 오래 믿으면 바보같이 되어가요.

초대교회에 성령 받은 성도들이 자기 밭을 팔아서 교회에 내어 놓은 사람들처럼 바보가 되어요.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는 남에게 얻어먹고 살았는데

얍복강을 건너고 난 후에는 내가 지갑을 열고 계산하고 비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얍복강 사건은 야곱에게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일어나요.

야곱을 우리 자신으로 보시란 말이에요.

내가 야곱이에요.



하나님께서 왜 야곱을 찾아왔느냐?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을 찾아와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을 죽이고 자기 안에 있는 신과 싸우는 이스라엘이라는 새사람으로 만들어서 언약하신 그 자리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얍복강 사건을 자식들에게 알려주었어요.

야곱이 죽기 전에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을 하지요

요셉이 낳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야곱은 자기 아들을 삼아 버립니다.

야곱이 무슨 근거로 요셉의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습니까?

이는 요셉은 야곱의 약전에 기록한 야곱의 2기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요셉의 아들에게 얍복강 사건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얍복강 사건이 뭔가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장자와 차자에게 손을 어긋 맞춰 축복하는 것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 가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야곱이 지팡이를 의지해서 축복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팡이가 어디서 얻은 지팡이인가요?

얍복강에서 얻은 지팡이에요.

야곱은 얍복강 사건을 자기 아들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얍복강에서 만난 하나님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은 야곱을 간섭하신 하나님이 우리도 간섭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얍복강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 앞에 얍복강과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놀라지 마세요.

그건 반드시 통과 하여야 하는 길이니까요.

천국 가는 길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거들랑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것이니까 염려하지 마시고 하늘을 향하여 크게 숨 한번 내쉬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고 이겨내세요.

잠시잠깐 후면 주님이 오시니까요.

그 때까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잘 견디고 이겨내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위골되는 사건이 우리의 이야기임을 알았습니다. 얍복강 사건은 우리 삶 속에서 늘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오늘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 빼앗기고 버려지는 삶을 산다고 하여도 낙망하거나 실족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한 삶이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증거라는 것을 깨닫고 실패 속에서도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