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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57강. 야곱의 귀향과 라반의 드라빔 (창 31:1-55)

by coroa 2021. 7. 11.

 

 

 

57강. 야곱의 귀향과 라반의 드라빔 (창 31:1-55)

-.정낙원 목사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상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들을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난 육적 이스라엘로 나타났고,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영적 이스라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약이 진짜이고 구약은 가짜에요.

구약의 육적 이스라엘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교회를 예표하고 있어요.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 신약의 교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구원 이야기는 신약의 교회인 성도들이 구원 받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영은 신약이고, 육은 구약이에요.

영은 은혜이고, 육은 율법이에요.

새 언약은 영이고 옛 언약은 육이에요.



히브리서 10장에서 하나님께서 첫째 것을 폐한 것은 둘째 것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것은 구약이고 율법이고,

둘째 것은 신약이고 은혜입니다.

구약은 신약으로 완성이 되고 율법은 은혜 안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을 읽을 때 이중 계시로 보아야 합니다.

육적인 사건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영적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모든 이야기들은 일차적으로는 문자적인 해석을 하고 이차적으로는 영적인 해석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 이야기를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 두 가지 의미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야곱을 우리의 신앙 이야기로 보시고,

이차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야곱의 본질적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에요.

설교를 들을 때에 지금 어디에 포커스를 두고 있는지 잘 감지하시기를 원합니다.



지난 시간에 야곱의 점박이 양을 치는 것은 영적인 것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점박이 양들은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데리고 갈 자기 백성들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살펴보는 야곱이 귀향하는 모습 속에도 영적인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야곱이 하란으로 간 것은 겉으로는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서 도망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도망간 것이 아니에요.

야곱이 장자권의 축복을 받고난 후 에서가 죽이려고 한 건 맞아요.

그렇게 하니까 어미 입장에서는 에서가 야곱에게 무슨 일을 저지를까 봐서 야곱을 지키고자 자기 친정으로 보낸 것은 맞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고 그 이면에는 다른 뜻이 있어요.

그 이면에는 이삭과 리브가는 야곱을 장가를 보내기 위하여 보냈습니다.

에서가 가나안의 이방 여인인 헷 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니까 못 마땅하게 여겼어요.

왜냐하면 이삭의 가문은 언약의 가문인데 그 언약의 가문이 비 언약에 속한 이방 여자를 에서가 받아들이니까 부모가 심히 근심이 되는 것이에요.



에서는 자기 정욕을 위하여 아내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와 상의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이게 육에 속한 자들이 모습이에요.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에는 아들의 아내감은 부모가 정해요.

아들은 자기가 신부를 고를 권한이 없어요.

아버지가 정해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해요.



이스라엘은 언약의 후손이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펼쳐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풍습 속에는 창세전 언약의 모습이 깔려져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아버지가 어린 양의 아내를 생명책에 녹명을 해 놓았어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신부들을 찾아서 천국으로 데리고 오라고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만 구원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그 의미에요.



이삭은 언약 가문이에요.

그럼 이삭의 가문을 이어갈 장자는 아버지가 정해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에서는 명분상 장자임에도 부모의 허락 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자기 맘대로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이건 장자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삭 가문을 이어갈 장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장자의 축복을 할 때 야곱을 이삭의 장자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이삭과 리브가에게 야곱의 신부는 이곳 가나안 여자에게서 얻지 말고 리브가의 고향에 가서 그 친족들 중에서 맞이하라고 보낸 것입니다.

집에서 쫓겨나자 하나님이 야곱의 보호자가 되어서 나타납니다.

야곱의 육적 아비인 이삭은 사라지고 하나님이 친히 아버지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고향으로 간다고 하면서 어디로 행하는가 하면 벧엘로 향하는 것입니다.



벧엘이 어떤 곳인가요?

하나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 있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야곱은 하나님 집에서 살아갈 가족들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머니 고향인 밧단아람에 가서 외삼촌인 라반의 집에서 종살이를 한 것은 그냥 종살이 한 것이 아니고 아내를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오셔서 자기 신부들을 구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에요.

유대인은 라반의 집과 같아요.

유대인들이 누구인가요?

언약의 후손입니다.



언약은 어디에서 유래가 되었나요?

창세전 언약입니다.

유대인은 창세전 언약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예수님도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어요.

이렇게 되면 언약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조상들이 사는 하란과 같은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창세전 언약 안에서 생겨난 언약의 가족들인 유대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어요.

자기 백성이 유대인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유대인은 혈통으로 난 육적 유대인을 말하지 않고 성령으로 거듭난 영적 유대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표면적 유대인이고 신약의 성도가 이면적 유대인이에요.

물론 구약의 표면적 유대인 속에도 영적 유대인들이 있어요.

이들이 바로 예수님이 오셔서 찾아냄을 당한 12제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12제자는 구약의 12지파를 상징해요.

예수님이 육적 유대인들 속에서 12제자를 찾아낸 것은 육적 유대인들 속에서 영적 유대인들을 찾아낸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12제자들 속에 구약의 영적 유대인들이 다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으로 거듭난 12제자로 신약 교회가 시작이 되었으니까 12제자 속에는 신약의 성령으로 거듭난 영적 유대인이 다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에요.

이삭에게는 아브라함 언약이 담겨져 있어요.

야곱 속에도 마찬가지에요.

그럼 야곱이 밧단아람에 가서 아내를 얻고 양을 치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 속에 담겨진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려고 간 것입니다.

아브람의 언약은 어디서 나왔는가요?

창세전 언약에서 나왔어요.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자기백성들을 찾아가지고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자기백성들을 찾아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모습을 야곱을 통하여 미리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야곱이 20년 동안 종살이하면서 두 아내를 얻고 점박이 양 떼를 얻는 것은 전부 예수님의 구속사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가 양 떼를 얻은 것은 하나님께서 라반에게서 양떼를 빼앗아서 자기에게 주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6-13절을 보세요.



6-13=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7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8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9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으니라 10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었더라 11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3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라반이 야곱에게 열 번이나 품삯을 변역하니까,

하나님이 라반의 손에 있는 양 떼들을 빼앗아서 야곱에게 주었다고 하지요.

이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 아래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기 백성들을 전쟁을 하고서 찾아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점박이 양을 낳은 것은 자기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점박이 양들은 신약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을 상징해요.

야곱이 점박이 양들을 어떻게 낳았는가요?

하나님이 점박이 양들을 낳는 방법을 알려주시지요.

양들이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세 가지 나뭇가지의 껍질을 벗겨서 얼룩거리는 물을 먹이게 하지요.

얼룩 거리는 물을 마시고 난 양들이 낳은 양들이 점박이 양들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보는 거예요.

야곱이 재주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생명을 낳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야곱은 점박이 양들을 낳게 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꿈에서 시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선 시간에 세 가지 나뭇가지를 벗겨서 먹인 물로 아롱진 점박이 양들을 낳는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발가벗김 당하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건으로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점박이 양 떼를 친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어서 십자가에서 자기백성들을 낳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야곱이 자기가 원해서 하란으로 간 것도 아니고, 원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에요.

가는 것도 하나님이 하셨고, 돌아가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점박이 양들을 낳으니까 “이제 때가 되었으니 벧엘로 돌아가라” 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고향은 벧엘이니까 벧엘로 돌아가라고 하잖아요.



야곱이 요셉을 낳고 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왜 벧엘로 돌아가라고 합니까?

벧엘이 바로 하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 열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가 바로 야곱의 고향인 것입니다.

그 하늘나라가 벧엘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20년 전에 벧엘에서 나타났던 하나님이 지금 또 나타나신 거예요.



야곱은 벧엘에서 약속을 받았고,

그 약속의 장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지금 아브라함 언약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에요.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이 가나안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어요.

그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 후손이 이방에서 종살이하다가 나오게 되는데,

나올 때에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고 하였어요.



알다시피 종살이 하는 것은 재물을 얻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에는 종살이 하는 자들이 재물을 얻고 돌아온다고 되어 있어요.

그것도 큰 재물을 얻어서 나온다고 하였어요.



이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할 일들이에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종의 모습으로 사셨어요.

그런데 하늘로 돌아가실 때에는 자기 백성들을 다 구원을 해서 데리고 가셨어요.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사셨는데 하늘나라로 가실 때에는 빈손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라는 큰 재물을 챙겨서 가게 하셨어요.



야곱도 마찬가지예요.

20년 동안 종살이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종살이를 한 것이 아니라 고향으로 데리고 갈 재산을 불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갈 때 12 아들과 점박이 양들을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야곱의 하란을 떠나는 것은 출애굽과 같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빈손으로 나왔나요?

아니에요.

하나님이 재물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나가게 하셨어요.

이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 한 것이 아니라 고향으로 가지고 갈 재물을 얻는 일을 한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을 떠나는 것 속에는 두 가지 그림이 담겨져 있어요.

첫 번째 그림으로는 약 400년 후에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는 그림이고,

두 번째 그림으로는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출세상 하는 그림인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양떼를 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아롱진 양들은 자기가 낳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낳게 해주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신앙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가지고서 야곱을 이끌고 다녀요.

야곱은 자기 인생을 산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언약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이삭이 야곱이 집을 떠날 때 알려 주었어요.



창세기 28장을 봅시다.



28:1-4=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가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2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3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4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삭이 야곱에게 아브라함 언약을 말해줍니다.

내가 너를 하란으로 보내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아브라함에게 하신 복이 네게 주어질 것이라고 알려주었어요.

그리고 야곱은 집을 떠나 벧엘 광야로 나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한 돌을 취하여 베게하고 잡니다.

그러자 돌 위에 사닥다리가 하나가 세워지고 그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야곱은 이 약속을 품고 하란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하란에 가서 얻은 모든 것들은 벧엘 언약을 근거로 주어진 것입니다.



벧엘 언약이 뭔가요?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잔 곳에 사닥다리가 세워지고 그곳을 통하여 하늘의 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나라로 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늘로 가는 문을 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의 길은 언약의 후손이 죽어야 열려요.

하늘 문은 언약 후손의 희생으로 열리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언약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이 하늘의 길을 열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야곱의 사닥다리인 것입니다.



이건 홍해 사건과 같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에 바다 속에 길이 하나 열리지요.

우리 눈에는 그냥 바다로 보여요.

그런데 믿음의 눈으로 보면 바다 속에 길이 하나 있었어요.



애굽은 세상이고, 광야는 하늘이에요.

애굽은 땅이고, 광야는 하늘인 겁니다.

그런데 모세의 지팡이가 바다에 던져지니까 땅에서 하늘을 연결하는 길이 하나 열리는 것입니다.

마치 벧엘의 사닥다리와 같은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에 마른 땅에서 올라 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른 땅에서 올라 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다 속에 길을 하나 예비를 해놨다는 것을 말해요.

홍해 바다가 갈라진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어서 하늘로 가는 길을 여신 것과 같아요.

예수님의 몸이 쪼개지니까 하늘로 가는 길이 하나 생기더란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말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누구든지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 속에 길이 하나 있다니까요?

예수님이 죽으니까 길이 하나 쫙 열리는 거예요.

그 길은 이 땅에서 천국 가는 길이에요.

하나님께서 야곱의 사건을 가지고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들을 미리 보여주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야곱의 사건을 구속사 적으로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냥 한 인간의 얍삽한 사기 사건으로 보지 마시고,,

그러면 예수님이 사기 치는 분이 되어 버린다는 말이죠.



야곱은 충실하게 종살이했어요.

사기는 도리어 라반이 쳤어요.

그래서 성경은 라반이 열 번이나 약속을 어겼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두를 다 기억하고 계셨어요.

하나님은 야곱이 당하는 일을 다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야곱은 그 동안 사기 당한 줄을 알았는데 하나님이 한 방에 다 갚아 주시더란 말이지요.

이게 성도의 구원이에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자면 많은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욕도 먹고 조롱도 당하고 때로는 신앙생활 때문에 물질적으로도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항상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세요.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참 야속하게 느껴져요.

하나님이 몰라주는 것 같잖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은 한시도 우리에게서 눈을 뗀 적이 없어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지켜보세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도를 시험하는 놈은 마귀이지만 마귀도 독자적으로 일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을 해요.



욥기서를 보세요.

하나님이 마귀에게 욥을 시험할 때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지를 지침서까지 내려주세요.

마귀는 하나님이 내려준 지침서대로 해요.

제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장 쉽게 이해하려면 드라마를 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는 스스로 움직이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어요.

다 각본에 의하여 감독의 허락 하에서 연기를 펼쳐요.

대사 하나까지, 표정 하나까지,

만나고 헤어짐조차도 각본에 의해서 감독의 지시에 따라서 행하여져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 창세전 언약이라는 대하 드라마를 찍고 있어요.

여기에 의로운 역을 맡은 사람도 있고 악한 역을 맡은 사람도 있어요.

예수님에게 속한 자도 있고, 마귀에게 속한 자도 있어요.

이 모두가 하나님이 그렇게 구조를 배치해 둔 것입니다.



아브라함 집안을 보세요.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잖아요.

에서와 야곱이 있잖아요.

요셉과 그 형제들이 있잖아요.

육으로 난 자와 약속으로 난 자간에 투쟁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걸 알려 주고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성경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지금 우리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다루어 간다는 것을 말씀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어가는 것을 구약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어요.

봐라 이놈들아! 내가 내 백성들을 어떻게 다뤄가는지를,,

어떻게 지키고,

어떻게 구원을 해 내는지를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등 따시고 배부른 삶만 살았나요?

아니에요.

배부른 날도 있었지만 엄청난 고난을 당하기도 했어요.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눈은 늘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어도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냅니다.

선지자들을 보낸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들 속에 함께 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한다고 하면 늘 좋은 일들만 생길 것으로 생각을 해요.

그러나 아니에요.

그 반대의 일들이 훨씬 많아요.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기 때문에 우리가 엄청난 일들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기적이 무언지 아세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욕을 먹고 하는 일들이 잘 안 풀리면 한강 다리에 올라가서 벌써 뛰어내려 죽어야 할 터인데 우린 여전히 인생이 내 맘대로 잘 안 풀리지만 이렇게 살고 있어요.



흔히들 교회 다니면 떡이 나오느냐 돈이 나오느냐고 비아냥거리지만,,

우리는 그 비아냥거림을 당하면서도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고 있어요.

이건 우리 실력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모를 참고,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참고,

조롱을 참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못 참는다니까.

사람이 자존심 죽이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돼요.



우리는 원수를 때려죽이는 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게 아니에요.

날 미워하는 사람을 같이 미워하고 욕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가 없어요.

그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성도만이 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지금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물론 미미하고 온전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우린 벌써 교회 다니는 것을 다 때려 치웠어야 해요.

에이~ 더러워서 예수 인 믿는다고 했어야 했어요.

그럼에도 지금 우리가 교회에 와 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게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함께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실력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기적의 산물들이예요.

내가 여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고 말씀을 듣고 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니까요.



제발 기적을 큰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사소한 것 속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손길을 보세요.

그게 보여야 범사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제가 영화 본 것이 기억이 나는데

제목이 “브루스 올 마이티” 인가 그럴 거에요.

짐 캐리와 모건 프리먼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짐 캐리가 사사건건 일이 자기 뜻대로 안 풀리자 신에게 화풀이 하는 것입니다.

신이 있으면 왜 이 땅을 이렇게 불합리하게 다스립니까? 라고 하나님에게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모건 프리먼)이 그 모습을 보고서 짐 캐리를 불러서 네가 며칠 동안 신 노릇하라고 신의 능력을 위임해 줍니다.



짐 캐리가 좋아라 하고 신의 능력을 가지고 자기 욕망대로 다스리는 겁니다.

그동안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합니다.

그러자 자기는 좋은데 남이 피해를 당하고 이 세상이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개판이 되어 버린 겁니다.

짐 캐리가 수습을 하려고 하여도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겁니다.

짐 캐리가 손을 들고 하나님에게 나는 도저히 신 노릇 못하겠다고 하면서 신의 능력을 반납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는 너희들에게 서로 사랑하면 살라고 하였는데 너희들이 서로 욕심을 부린다고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기적이라고 합니다.



기적이란? 큰 것이 아니고 사소한 것에 있다고 합니다.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품어주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라고 합니다.

내가 인간들에게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기적을 다 주었는데 인간들이 전부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그 기적을 안 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악해진다고 알려 줍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려 가는 것이 그래요.

아주 사소한 것까지 다 간섭을 하세요.

앉고 일어서고 눕고 자고 우리의 생각까지 다 감찰하시고 숨 쉬는 것까지 다 간섭을 하세요.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기적이에요.

아침에 눈뜨는 것도 은혜이고 기적이에요.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것도 은혜이고 기적이에요.

아이가 학교에 갔다가 무사히 잘 돌아오는 것도 은혜이고 기적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불가사의한 일을 겪어야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을 감사치 못하는 것입니다.



야곱을 보세요.

야곱은 20년 동안 종살이 할 때는 하나님이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도 야곱을 눈에서 떼어본 적이 없어요.

야곱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찰하였어요.

라반이 야곱에게 사기 친 것을 다 알고 있었어요.



야곱이 요셉을 낳자 하나님이 라반이 그 동안 사기 친 것을 다 갚아준 것입니다.

야곱이 고향에 돌아 갈 때는 하나님이 이자까지 다 쳐서 주었어요.

그래서 야곱이 거부가 되어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를 보세요.

하나님이 애굽 사람들에게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동안 착취한 것을 다 갚아주라고 하여서 백성들마다 손에 은금보화들은 바리바리 싸들고 나오게 하잖아요.



야곱은 20년 동안 헛 산 것인 줄 알았는데,,

헛 산 것이 아니고 돌아 갈 때는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다 찾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래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야곱과 같아요.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인생을 차압했어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옛 사람의 것을 빼앗기는 인생을 살게 하세요.

야곱의 20년 종살이 하는 것과 같은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만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야곱처럼 간섭을 해 가세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였지만 나올 때에는 성막을 지을 많은 재물들을 가지고 다 나가게 하셨어요.

이건 고진감래(苦盡甘來) 한다는 식의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것이 아니에요.

출애굽 한 백성들은 은금보화로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았어요.

모두 광야에서 성막을 짓는데 사용하였어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비록 이 땅에서는 아픔을 겪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우린 모두가 하늘 예루살렘 성의 보석들이 되어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체가 보석이에요.



신앙생활은 이 땅에서 하늘에 보석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체가 재물이고 보석인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 자체가 상급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였지요.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충성하면 천국에 가서 상급을 받는다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급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보석이에요.



성도를 일컬어 질그릇 속에 보화를 담고 있다고 하지요.

예수님이 보화에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예수라는 보화를 담고 있는 우리 역시 보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 갈 때는 모두가 보석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구원 받은 성도들을 하늘 예루살렘 성의 12가지 보석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데리고 가는 점박이 양들이 바로 보석이에요.

야곱이 점박이 양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가는데 라헬이 아주 의미심장한 일을 합니다.

그것은 아버지 라반의 드라빔을 훔쳐가는 것입니다.



이게 엄청난 비밀이에요.

드라빔이란? 수호신과 같은 것이에요.

가정을 지켜주는 신이에요.

아버지가 섬기는 신이에요.



그러니까 라헬이 아버지의 신을 도둑질 해 가는 것입니다.

라반이 이를 눈치 채고 자기 자식들을 데리고 쫓아갑니다.

쫓아가는 이유는 자기가 점을 치는데 사용하던 드라빔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풍습으로는 드라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집안의 모든 재산권을 행사 할 수가 있었어요.

드라빔을 가진 사람이 집안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가정은 국가와 같아요.



옛날 사극을 보면 왕권 다툼을 할 때 옥쇄를 가진 자가 왕이 되어요.

옥쇄는 왕을 상징해요.

그래서 왕자들끼리 서로 옥쇄를 차지하고자 싸우는 것입니다.



드라빔이 옥쇄와 같아요.

드라빔을 가진 사람이 그 집안의 주인이에요.

라반이 집안의 모든 사람의 주인이었어요.

그런데 라헬이 아비의 드라빔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라헬은 드라빔의 비밀을 알아요.

누구든지 아버지의 드라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버지 집의 모든 식솔들과 재산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가지고 와서 재산권을 행사하면 꼼짝없이 주어야 해요.



라헬은 야곱의 아내이지요.

야곱이 라헬을 7년 봉사하고 값을 주고 샀어요.

그러므로 라헬은 야곱의 것이에요.



이렇게 되면 라헬이 거지고 있는 모든 것은 남편인 야곱의 것이 되어요.

그런데 라헬이 아버지의 드라빔을 가지고 있어요.

그럼 라반의 가족이 야곱의 가족으로 편입이 되는 것입니다.



라헬이 자기 아버지 라반의 드라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라헬이 자기 친정 식구들을 몽땅 야곱의 집안에 연합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라헬이 친정 식구들을 전부 야곱의 고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엄청 나지요.

감격스럽지 않나요?



감격스러우니까 다시 말합니다.

라헬은 누구의 아내입니까?

야곱의 아내이지요.

야곱이 7년 종살이라는 값을 주고 라헬을 샀어요.



라헬은 야곱의 소유에요.

야곱은 자기 식솔들과 양떼들을 데리고 귀향하는 것은 자기 소유를 데리고 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라헬이 자기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쳐가고 있어요.

친정집 식구들을 자기 신랑의 재산이 되게 한단 말이에요.

이러면 라반의 식솔들은 라헬 때문에 야곱의 가문에 입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하나님께서 야곱을 하란으로 보내지요.

하란이 어떤 곳인가요?

어머니 리브가의 조상들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야곱은 지금 어머니의 가족들을 야곱의 고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하란 땅에 보내신 것은 어머니 리브가의 가족들을 벧엘로 데리고 오고자 함이었던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을 찾아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모형하고 있어요.

그럼 야곱이 하란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예표하고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하란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요?

야곱이 누구를 고향으로 데리고 옵니까?

리브가의 가족들이죠.



이걸 언약으로 이해해 보세요.

누가 구원을 받나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나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오셨어요.

이삭이 야곱을 조상의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보냈지요.



이걸 언약적으로 이해하면 조상의 가족들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에요.

그래서 야곱은 라반의 집에 우거하다가 때가 차매 그 식솔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라반의 식구들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란 사람 모두를 데리고 오지 않았어요.

오직 라반의 식구들만 데리고 왔어요.

그것이 드라빔을 가지고 오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드라빔을 가진 자가 그 집안을 대표하는 자에요.

라반의 드라빔을 누가 가졌나요?

라헬입니다.

라헬은 신랑인 야곱을 따라 야곱의 고향으로 가는데 자기 친정 식구들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로 돌아간다고 하였지요.

벧엘이 어떤 곳인가요?

하나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 있는 곳이에요.

야곱이 벧엘로 돌아가는 것은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라헬은 야곱이 벧엘로 돌아가는 비밀을 알았어요.

그래서 라헬이 친정 식구들을 자기 소유로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드라빔을 가지고 오는 것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라반과 그 아들들은 이걸 몰라요.

그들은 오로지 드라빔만 찾고자 하였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들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떠나고 난 후에 드라빔이 없어진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니 찾아 나선 겁니다.



찾아 간 곳이 어디인가요?

야곱이 있는 곳이에요.

결국 라반의 가족들이 야곱과 연합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라반의 가족들을 야곱에게로 이끌었나요?

드라빔입니다.



드라빔이 라반의 가족에게는 생명줄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 식으로 이해해 봅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낸 것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이 녹명된 자들을 데리고 오라고 보낸 것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언약의 후손들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교회에 있어요.

교회가 조상의 가족들이 있는 곳이에요.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 구약교회를 구원하셨어요.

구약 교회 안에 조상의 가족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12제자로 대표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12제자는 12지파를 상징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12제자를 천국으로 데리고 갔어요.

12제자가 라반의 가족과 같은 것입니다.



이삭이 야곱을 누구에게 보냈나요?

리브가의 조상이 있는 곳으로 보냈잖아요.

리브가는 야곱을 낳아준 어미에요.

야곱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 식구들을 데리러 간 것입니다.



야곱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했지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은 창세전 언약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오도록 해준 것이 창세전 언약이에요.



그러니까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낳아준 어미와 같은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없었으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 나라에서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계셨어요.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세요.



요 1: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어요.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어요.

그런데 이 말씀도 하나님이세요.



그럼 두 하나님이 계신 것이 되지요.

이 사실을 알려주는 분이 성령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태초에 하나님과 말씀과 성령이 함께 계신 겁니다.

이걸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합니다.



태초가 어떤 곳이냐 하면 하나님이 사는 나라에요.

이걸 창세전이라고 해요.

그런데 성령이 알려주시기를 창세전에 하나님이 언약을 세우셨어요.

어떤 언약인가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언약이에요.



이 언약을 어디에서 펼치는가 하면 이 세상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만물이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아야 할 자기 백성들을 보내두셨어요.

자기 백성들은 이 사실을 몰라요.



마치 라반처럼 자기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인지를 모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없었으면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계셨어요.



창세전 언약 때문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보내심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러면 창세전 언약이 예수님을 낳아준 어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전 언약에 보면 예수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형제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 세상에 있어요.



마치 리브가의 형제들이 하란에 살고 있는 것과 같아요.

리브가의 형제들이 누구인가 하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우리들이에요.

예수님이 이 세상 오셔서 자기 형제들을 찾아내어서 하늘나라 고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이게 야곱이 라반의 식구들을 고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다 마귀에게 잡혀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어서 생명책을 내어 놓고 이 사람들은 내 것이니까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마귀가 꼼짝없이 내어주고 말았어요.



생명책이 드라빔과 같은 겁니다.

야곱이 라반의 드라빔을 가지고 있어요.

이건 야곱이 라반의 가족들의 생명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야곱이 라반에게 가서 드라빔을 내어 놓으면 라반은 꼼짝없이 자신을 포함하여서 자기 집안에 있는 모든 식구들이 야곱의 것으로 귀속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드라빔은 라반에게 있어 생명과 같아요.

그런데 그 드라빔을 지금 누가 가지고 있나요?

라헬이 가지고 있습니다.

라반이 드라빔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자식들을 데리고 쫓아오지요.



쫓아 와서는 야곱에게 드라빔을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난 모르는 일이니 찾아보라고 합니다.

라반이 온 집안을 다 뒤집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라헬이 기거하는 장막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럼 딸이 아버지가 왔으면 얼른 일어나서 반갑게 맞이하고 자리를 내어 주고 앉으라고 하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라헬은 자리에 가만히 앉자서 맞이합니다.

왜냐하면 라헬이 아버지의 드라빔을 자기 안장에 숨기고 앉자 있기 때문입니다.



라헬이 무어라고 합니까?

자기는 지금 경수중이므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월경 중인 여자를 만지는 것은 부정한 일이므로 아버지가 다른 곳은 다 뒤져서 찾아보았지만 라헬이 앉자 있는 안장 속은 살펴보지 못하고 그냥 나가는 것입니다.

라헬은 드라빔을 끝까지 지켜서 종국에는 자기 가족들을 전부 야곱에게 귀속시키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도적질 해 온다고 하지요.

여기서 도적질해 오는 것은 빼앗아 온다는 뜻으로서 나쁜 의미가 아니라 구속사적인 의미로 볼 때에는 좋은 의미에요.



이건 하나님이 우리를 강제로 취하는 것을 말해요.

우리의 구원이 이러한 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말하실 때 강도가 세간을 강탈하는 것으로 표현을 하였어요.



마 12:28-29=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붙잡혀 있는 자기 백성들을 강탈하세요.

사단 입장에서는 도적당하는 것이지만 예수님 입장에서는 찾아오는 것입니다.

내어 놓으라고 하면 순순히 응하지 않으니까 강제로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장차 공중에 재림하실 때에 우리를 하늘로 이끌어 올린다고 합니다.

이끌어 올린다는 것이 강제로 빼앗아 간다는 뜻이에요.

강탈해 가는 것입니다.



라헬이 라반에게 드라빔을 달라고 하면 주었겠어요.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도리어 혼이 났을 겁니다.

그러니까 라헬이 아버지 몰래 가지고 온 것입니다.



라헬은 라반의 드라빔을 강탈해 온 겁니다.

라반에게 있어 드라빔은 라반의 생명과 같으니까

라헬이 라반의 생명을 강제로 벧엘로 강탈해 가는 것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으로서 천국을 예표해요.

그럼 라반이 천국에 가는 것은 자발적으로 간 것이 아니고 야곱에 이끌려서 가게 된 것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강탈되어서 가기 때문에 하나님을 세세토록 영광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진해서 가면 영광 안 돌려요.

자진해서 천국에 갈 인간도 없어요.

인간들이 자진해서 가면 지옥으로 가요.

왜냐하면 천국으로 가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한데, 지옥으로 가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강탈하지 않았으면 구우너을 받을 수가 없어요.



구원은 외부의 힘에 의하여 강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의 폭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면 어찌 될 뻔했나요?

그냥 지옥으로 가야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강제로 끄집어 낸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가요.



천국에 가보니까 놀라는 겁니다.

세상에~ 세상에! 예수님이 나를 강탈 안 했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그 은혜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세토록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은 깨달음에서 나와요.



천국은 우리 독자적으로 가는 곳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강제적으로 데려가세요.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하신다고 말씀 하신 겁니다.

이 말은 우리가 침노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으로 침노해 들어온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안을 뚫고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침노해 오셨어요.

우리가 예수님에게 강탈당한 것입니다.

누구의 것으로 강탈당했나요?

예수의 것으로 강탈당했어요.



나중에 천국에 가서 보니까 입이 쩍 벌어지는 거예요.

이것이 기적이고 축복인 겁니다.

놀랍고, 놀랍고, 또 놀라운 거에요.



그래서 머리에 씌워준 면류관을 벗어서 어린 양에게 던지고는 세세토록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라반이 나중에 천국에 가서 놀랄 거에요.

라헬이 드라빔은 안 훔쳐 갔으면 어떨 뻔 했느냐,,

아마도 라반이 천국에서 라헬에게 엄청 고마워 했을 거에요.



하나님께서 라헬의 드라빔 사건을 가지고 우리의 구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 구원이 이렇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가만두었을 것 같으면 저주받아 마땅했을 텐데,,

예수님을 보내서 오기 싫어하는 놈들을 강탈해서 데려다 놓았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 보니까 우리는 놀라고 또 놀라는 것입니다.



강탈 안 당했으면 어떨 뻔 했느냐?

우리가 기쁨으로 강탈당했나요?

아니면 불평불만하며 당했나요?

여러분들은 지금 신앙생활을 기쁨으로 하고 있나요?

아니면 불평불만하고 원망하면서 하고 있나요?



우리는 원망하면서 신앙생활하고 있는데,

나중에 천국에 가서 보니까 세상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영광을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불평하고 원망했으니까 얼마나 창피하겠어요.

그 창피함이 찬미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면 얼마나 잘하는데?

못해요.

우리는 못한다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우리를 강제로 예수 안으로 편입을 시켜주는 것입니다.

라반을 강제로 야곱의 가족으로 편입시키듯이 말이에요.



오늘 그림을 다시 보세요.

라반이 야곱을 쫓아가지요.

그러자 하나님이 라반에게 나타나서 “야곱에게 손대지 마” 그러는 것입니다.

절대로 야곱을 손대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라반이 야곱에게 와서 하는 말이 내거 너를 죽이고자 쫓아 왔는데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나에게 나타나서 너에게 절대로 손대지 말라고 해서 내가 참는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라반이 너하고 나하고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합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라반과 야곱을 언약을 맺어주는 것입니다.



이에 야곱이 돌기둥을 세우고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라반의 자식들로 하여금 돌무더기를 쌓게 하고는 그곳 이름을 “갈르엣” 이라고 합니다.

“갈르엣”이란? “증거의 무덤”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난 후에 야곱이 자기의 제사에 라반의 식구들을 초청을 합니다.

제사를 마치고 제사의 떡을 함께 먹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룻밤을 자고 라반은 자식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잘보면 라반은 드라빔을 찾으러 왔다가 드라빔은 찾지도 못하고 도리어 야곱과 언약을 맺고 야곱의 제사에 참석하고 그 떡을 먹고 돌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라반의 식구들을 야곱의 제사에 참석케 하여서 야곱이 주는 떡을 먹이고자 하신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신약적인 의미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보세요.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장차 십자가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유월절인 새 언약에 동참케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모아놓고 떡을 주지요.

떡을 먹인다는 것은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족을 식구라고 하지요.



식구란? 같이 밥을 먹는 자들이에요.

성경에서 식구라는 것은 너와 나가 아니고 하나의 개념으로 우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식구를 말할 때에 우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나의 집인데 나의 집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집이라고 합니다.



우리 라는 말은 여럿이면서 하나에요.

이건 한 조상을 둔 자라는 말입니다.

한 조상을 둔 자들을 형제라고 합니다.

형제가 우리에요.



라반과 야곱은 한 조상 아래서 난 가족이에요.

그래서 야곱이 자기의 제사에 라반의 가족을 초대하고 함께 떡을 떼게 된 것입니다.

라반과 그 자식들은 떡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식구를 책임져주는 자는 가장이에요.

가장은 드라빔을 가진 자에요.

드라빔을 가진 자가 대표이고 두령이에요.



라반의 드라빔을 누가 가지고 있나요?

야곱이 가지고 있어요.

라헬이 가져온 것이지만, 라헬은 야곱의 것이니까,

결국 드라빔의 임자는 야곱인 것입니다.

그럼 야곱이 라반의 모든 가족의 책임지게 되는 것입니다.



라반의 식구들은 야곱의 보호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과 라반은 언약을 맺고 야곱의 제사에 참예케 하고 한 떡을 먹게 한 것입니다.

라반과 야곱은 한 떡을 먹음으로 한 식구로 연합이 되었어요.

야곱이 라반의 가족에게 떡을 준 것은 야곱이 라반의 가족들은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주신 떡을 먹음으로 예수님과 연합이 되었어요.

연합 된 자는 그 어떤 경우에서도 찢어 질 수가 없어요.

찢어지면 둘 다 상해요.

그래서 연합을 하신 분이 연합을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떡을 예수님이 주셨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연합시키셨어요.

그러므로 연합을 예수님이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 떡은 내 살이라고 하고 포도주는 내 피라고 하지요.



포도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새 언약의 피라고 하지요.

누구를 위하여 흘린다고 합니까?

너희를 위하여 흘린다고 합니다.

이건 난 안 죽어도 되는데 너희 때문에 죽는다는 말입니다.

왜 내가 너희 때문에 죽는가 하면 너희는 내 가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몸에서 나온 자들을 찾고자 하심입니다.

이것을 창세기에서는 아담 속에서 빠져나갔던 여자를 다시 데려오는 것으로 보여 주었어요.

하와는 아담 속에서 나왔어요.



아담은 자기 속에서 하와가 빠져나갔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두고는 아담은 불완전해요.

허전해서 안식 할 수가 없어요.

허전한 것을 채우기 위하여 반드시 찾아서 한 몸으로 연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빠져나간 하와를 데리고 오자 아담이 얼른 자기 안으로 끌어 당가는 것입니다.



아담이 뭐라고 하던가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합니다.

이는 넌 내꺼야!

너는 원래 내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와에요.

우리는 예수 안에서 나온 자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 온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어미의 조상이 있는 곳으로 자기 아내를 찾아 간 것처럼 말이에요.



이를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목자가 잃은 양을 찾는 비유로 말씀하셨어요.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가지요.

양은 자기가 잃어버려진 것을 몰라요.

다른 말로 자기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라는 것을 몰라요.



구원에는 관심이 없어요.

왜냐하면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자가 찾아 온 겁니다.

찾아와서 가자고 합니다.



어디로 가냐고 하니까 목자의 집으로 가자고 합니다.

목자의 집이 천국이에요.

이건 야곱이 라반의 식구들을 자기의 고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과 같아요.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내고서는 누가 기뻐하던가요?

양이 기뻐했나요?

아니지요.

목자가 기뻐했지요.

왜냐하면 원래 자기 양이었으니까요.

자기 것을 다시 찾으니까 기쁜 겁니다.



마치 아담이 하와를 보고 기뻐서 끌어당긴 것과 같아요.

내 것이었는데 잠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기쁨을 맛보는 것이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찾고서 기뻐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예수님의 기쁨을 위하여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이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기쁨과 같아요.

아이를 찾았을 때의 그 기쁨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이 가장 귀한 것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아보세요.

그 기쁨이 엄청 나잖아요.

구원을 제대로 알려면 한번 잃어버렸다가 찾아봐야 해요.



구원은 예수님의 기쁨이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 해 놓고는 고맙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면류관을 씌워주는 겁니다.

면류관을 쓰고 보니까 이건 내가 써야 할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이 써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 돌려주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기쁨에 동참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 전에는 구원이 뭔지도 몰랐는데,,

구원을 받고 보니까 이게 장난이 아닌 겁니다.

엄청 큰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우리를 찾지 않았으면 어찌 할 뻔 했습니까?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구원을 시켜 놓고 너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을 시켜 놓고 광야에서 출애굽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과 같아요.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이걸 배워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 받고자 오는 곳이 아니에요.

구원 받은 자들이 모인 곳이에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고자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구나!

창세전에 계획된 일이구나!

놀랍고 놀라운 사건이구나!

깨달아가는 거예요.



오늘 본문은 반전에 반전이에요.

야곱은 20년 동안 사기 당한 인생을 산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다 갚아 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라반 역시 드라빔을 빼앗긴 줄 알았는데 빼앗긴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도리어 구원의 증거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인생도 동일해요.

비록 겉으로는 빼앗기는 인생인 것 같지만 실상은 모두 얻는 인생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잖아요.

너희들이 보기에는 내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하잖아요.

이건 객기가 아니에요.

사실이에요.



하나님은 육에 것을 빼앗고 영에 것을 주세요.

땅에 것은 차압을 하고 하늘에 것으로 채워 주세요.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손해 보게 하시지 않아요.

상상 할 수 없는 귀한 것으로 채워 주세요.



이런 전설이 있어요.

예수님이 한번은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각자 돌 하나씩 들고 가자고 하였습니다.

크기는 말을 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가지고 가라고 하였어요.



그러자 제자들이 각양의 돌들을 들고 가는 것입니다.

어떤 제자는 손바닥만 한 것을 들고 가고,

어떤 제자는 야구공만한 돌을 들고 갑니다.

대부분 한 손에 들고 갈만한 것들을 들고 갑니다.



도마는 탁구공만한 돌을 들고 갑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큰 돌을 낑낑 거리면서 들고 가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던 도마가 베드로에게 비아냥거리듯이 말을 합니다.



아니~! 형님은 웬 돌을 그렇게 큰 걸 들고 가십니까?

주님이 언제 큰 돌을 가지고 가자고 했나요?

각자 알아서 들고 가자고 하였잖아요.



여기 내 돌을 보세요.

얼마나 가볍고 좋습니까?

형님은 미련해서 탈이야~!

사람이 좀 지혜로워야지 말이야,, 라고 하면서 베드로를 답답하다고 하면서 놀리는 것입니다.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산 정상에 올라갔습니다.



산에 올라가니까 마침 점심때가 되어서 배가 고픈 겁니다.

그런데 도시락이 없는 것입니다.

서로 누가 챙겨 오는 줄 알았는데 한 사람도 챙겨 오지 않은 겁니다.



도마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예수님 도시락이 없어서 어쩌지요.

난 누가 챙겨 온 줄 알았는데 한 사람도 챙겨오지 않았네요.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을 빙 둘러 앉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아 예수님이 뭔가 준비한 것이 있나 보다 하고 웅성거립니다.

예수님이 아까 너희들이 들고 온 돌을 전부 손에 들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축사를 하십니다.

그러자 돌이 빵으로 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각자의 손에 있는 빵을 먹으라고 합니다.



도마의 빵은 탁구공만 해서 먹어도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정도인데,

베드로의 빵은 열 명이 먹어도 남을 만하게 큰 것입니다.

도마는 쫄쫄 굶고 베드로는 포식을 하였어요.

물론 풍자적인 이야기이지만 언중유골이에요.



신앙생활을 셈 하듯이 하지 마세요.

인색함으로 하지 마세요.

신앙은 우리의 머리로 꾀로 하는 게 아니에요.

성도는 산수로 사는 자가 아니고 은혜로 사는 자에요.

산수로 살면 세상에서의 이익은 있겠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한 것입니다.


성경은 주는 자가 복 되다 고 하는 것은 은혜 받은 자만이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은 자는 넉넉해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 넉넉함 들이 많이 묻어 나오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반이 드라빔을 빼앗긴 것은 빼앗긴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구원의 증표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빼앗긴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구원의 증거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차압당하는 인생이 감사이고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손을 움켜잡는 자가 아니라 손을 펴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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