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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56강. 고향으로 데리고 갈 양들 (창 30:25-43)

by coroa 2021. 7. 9.

 

 

 

56강. 고향으로 데리고 갈 양들 (창 30:25-43)

-.정낙원 목사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입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나요?

이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시려고 오셨습니다.

구원을 구약에서는 출애굽으로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이 이 세상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이미 그 전에 야곱이 하란에 가서 아내와 아들들과 함께 양떼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야곱에 양떼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귀환하는 것이나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천국으로 귀향하는 것이나 영적인 의미는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들은 모두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음이 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내용은 야곱이 양을 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하는 일 속에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예표적으로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단순하게 야곱이 양을 쳤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로 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에 인간의 상식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진의를 놓치게 됩니다.



성경의 중심 사상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서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 하셨는가?

내가 구원 받은 자리에 하나님이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걸 놓쳐버리면 성경을 가지고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먹고 잘 살아 갈 것인가로 나아가게 된단 말이죠.

애석하게도 요즘에는 성경이 인간들의 삶에 유익을 주는 지침서가 되어 버렸어요.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니에요.

야곱이 라반에게 사기를 쳐서 거부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흔히 오늘 본문을 설교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그렇게 접근을 합니다

그 동안 야곱에 라반에게 사기를 당하고 살았었는데 하나님이 그걸 갚아 주어서 거부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결국 야곱의 양치는 이야기는 기복 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에요.



오늘 본문은 야곱이 복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지난 시간 야곱의 두 아내를 두 언약과 두 교회로 보았습니다.

레아는 언니로서 옛 언약을 말하고,

라헬은 동생으로서 새 언약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면 레아는 구약 교회를 말하고, 라헬은 신약 교회를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레아는 육을 상징하고, 라헬은 영을 상징해요.

그러므로 레아의 자식들은 육으로 낳아진 자로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의미하고,

라헬의 자식은 성령으로 낳아진 자로서 은혜 아래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야곱이 레아를 낳은 자식들은 육으로 낳아진 자들을 말하고,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낳은 요셉은 성령으로 낳아진 자들을 말해요.



오늘 이야기도 그 연장선상에 있어요.

합환채를 먹고 낳은 요셉을 다른 각도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낳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지요.

그래서 요셉을 낳고 난 후 야곱은 고향으로 데리고 갈 양 떼를 치기 시작 한 것입니다.



그것이 세 가지 나무 가지를 벗겨서 먹인 물을 양에게 먹여서 점박이를 만드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으로 낳아진 레아의 후손과 합환채를 먹고 낳은 라헬의 후손을 라반의 양 떼와 야곱의 양 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을 예수님으로 보았을 때에 예수님이 양떼를 친다면 그건 구원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럼 야곱이 양의 새끼를 낳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백성을 낳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두 아내를 통해서 자식들을 낳는 이야기를 야곱이 라반의 양떼 속에서 자기 양들을 낳는 것으로 보충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본문이 이해가 쉬워요.



25-26절을 보세요.



창 30:25-26절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26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야곱이 요셉을 낳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요.

야곱은 라반에게 자신이 14년 동안 종살이 하고 얻은 두 아내와 그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하늘 고향으로 가는 것과 같아요.



요셉을 어떻게 낳았나요?

합환채를 먹고 낳았어요.

합환채는 성령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데리고 갈 양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이에요.

이들은 요셉과 같은 자들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요셉처럼 합환채로 낳아진 자들이에요.

합환채를 먹고 낳은 요셉 이야기를 점박이 양을 낳는 것으로 다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낳자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 동안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셉을 낳고 나니까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출생과 야곱의 귀향은 하나로 연결이 된 사건인 것입니다.



야곱은 14년 동안 아내를 얻고자 라반에게 종노릇했어요.

이제 계약이 종료가 되었어요.

계약이 끝이 나고 막상 고향에 가려고 하니까 빈손인 것입니다.

아내와 자식들 뿐이고 자기 재산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외삼촌 라반과 다시 재 계약을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재산을 얻는 계약입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네가 재산을 얻고자 하려면 다시 6년을 봉사하라고 합니다.

6년 동안 네 재산을 일구라고 합니다.

이러면 야곱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하란에서의 1기 인생은 아내를 얻기 위한 종살이 한 인생이었어요.

그러나 야곱의 2기 인생은 고향에 가지고 갈 재산을 얻고자 일하는 인생인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2기 인생을 산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 이야기로 해 봅시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의 1기 인생과 2기 인생이 있습니다.

1기 인생은 육체로 오셔서 종으로서 십자가에 죽은 인생이고,

2기 인생은 성령으로 자기 백성 속에 오셔서 아들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구원이란? 두 가지가 있어요.



구원이 둘이란 말이 아니고 구원의 과정을 말해요.

이건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처음 창조는 천지를 갈라내는 창조이고,

두 번째 창조는 천지에 채우는 창조에요.

이걸 천지와 만물을 이룬다고 합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에요.

죄와 사망에서 건져지는 구원이 있고,

의와 생명으로 살아가는 구원이 있어요.

이건 우리가 엄마 뱃속에서 낳아지는 것과 낳아진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있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낳았어요.

그리고 성령으로 오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두 구분이 있어요.

율법아래서 종노릇 할 때가 있고,

은혜 아래서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 있어요.



야곱의 인생을 예수님의 사건으로 접목을 시켜보세요.

야곱이 요셉을 낳기 전까지는 종살이를 했어요.

요셉을 낳고 나서 종에서 벗어나 자유자로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계실 때는 종으로 사셨어요.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는 자기 백성을 낳은 게 없어요.

성령으로 오시고 난 후에 자기 백성들은 낳았어요.

이게 야곱이 합환채로 요셉을 낳고 난 후에 자기 양 떼를 낳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낳고 난 후에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제 2의 인생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요셉의 출생이 야곱의 2기 인생을 시작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야곱의 약전 속에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요셉을 야곱에 약전에 기록하는 것은 야곱과 요셉은 같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옛 사람이라고 한다면 요셉은 새 사람인 겁니다.

야곱이 육체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요셉은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과 같은 것입니다.



야곱이 낳은 자식들을 요셉이 다 살려내지요.

이것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자기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 놓고는,

성령으로 오셔서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과 같아요.

육체로 오셔서 하신 일을 성령으로 오셔서 마무리를 하시듯이,

야곱이 하는 일을 요셉이 마무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낳고 난 후 야곱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으로는 얍복강 사건 이후에 야곱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요셉이 전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셉이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까지 야곱 속에 두 인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걸 야곱의 인생으로 보면 14년 종살이와 6년 양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4년 종살이는 야곱 인생이고, 6년 일하는 것은 요셉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양을 치는 것은 장차 요셉이 하는 일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이 라반하고 계약을 맺습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이제부터 내가 내 재산을 불리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라반이 어떻게 불릴 건데! 라고 합니다.

이에 야곱은 외삼촌의 양 떼들 중에서 “점박이들은 내 것으로 합시다” 라고 합니다.

그러자 라반이 오~케이 그럼 그렇게 계약하자고 합니다.



그리고는 라반은 자기 양 떼들 중에서 점박이들을 전부 골라내서 자기 아들들에게 맡기고는 야곱에는 흰 양들만 줍니다.

이것은 라반은 야곱에게 한 마리의 양도 주지 않겠다는 심산인 것입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한 마리의 점박이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흰 양과 염소를 주고서는 이들이 자기 아들들에게 맡긴 점박이들과 교미하지 못하게 하려고 사흘 길 광야로 나가게 하여서 치라고 합니다.

야곱은 흰 양들을 데리고 사흘 길 광야로 나가서 6년 동안 양을 치기 시작합니다.

6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수많은 점박이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이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6년이라는 기간은 창세기 1장에서의 6일 창조의 기간과 같은 의미에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이 세상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세요.

천지창조 6일은 야곱이 광야에서 6년 동안 양치는 것과 같아요.



잠간 6일 창조를 구원이야기로 살펴보고 갑시다.



6일 창조를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첫째 부분은 갈라내는 일을 합니다.

둘째 부분은 갈라낸 곳에 채우는 일을 합니다.

이렇게 갈라내고 채우는 것을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면 7일 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6일까지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라고 하고,

그런데 7일째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된다는 말은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역사에 속한 날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역사 속에서 펼쳐진다는 뜻입니다.



6일이라는 역사 속에서 구원이 이루어진 사람은 저녁과 아침이 없는 역사 바깥의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이 일곱째 날인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안식하는 천국이에요.

천국은 안식하는 곳이므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은 이 세상 바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바깥 나라는 창조주가 사는 완성의 나라로서 안식의 세계에요.

이를 제 7일 안식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 7일을 여호와의 안식일이므로 지키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므로 그 날은 여호와의 날로 기념하여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여호와께서 다 이루신 것이에요.

그래서 구원은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기념하라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백성은 안식일에 성전에 모여서 여호와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성전에 모인다는 것은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고 하늘에 속하였습니다 라는 것을 신앙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이렇게 모이는 것은 단순하게 일요일은 쉬는 날이니까 모인다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을 신앙 고백하는 것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안식일이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역사에 속한 한 날로 모이는 것이 아니에요.

신앙고백의 날이에요.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에요.

우리는 주일을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모이는 것입니다.



주일이란? 주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날을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언제 부활 하셨나요?

안식 후 첫 날이지요.



안식 후 첫 날이란? 7일 안식일 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일이라고 하는 주의 날은 여덟째 날인 것입니다.

여덟째 날은 7일을 넘어서 있는 날이에요.

이 세상은 7이라는 싸이클로 돌아가요.



창세기의 7일 창조는 이 역사에 속한 것이에요.

7일 안식일도 역사에 속하였어요.

영적인 의미로 제 7일 안식일이 저녁이나 아침이 없는 이 세상 바깥을 의미하지만 이 날 역시 묵시를 예표하는 날이지 묵시가 아니고 역사에 속한 날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 역사의 시간은 7이라는 싸이클로 순환을 하는 것입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한 주간 단위로 순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8일은 역사 바깥에 있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8일을 큰 안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이 역사 바깥에 날을 몰고 오셨어요.

그것이 안식 후 첫날인 여덟째 날이에요.



예수님이 안식 후 첫 날에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은 이 세상 바깥에 계신 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이 역사 바깥의 날을 상징하는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날은 기념하여서 안식 후 첫 날을 주의 날로 새로운 안식일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7대 절기를 보면 이 부분이 잘 나타나 있어요.

이스라엘은 일 년을 7대 절기로 말해주고 있어요.

7대 절기는 유월절로 시작하여서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로 끝이 나요.



7대 절기는 예수님의 일생을 담고 있어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은 사흘 연달아 있어요.

유월절은 1월 14일이고, 무교절은 15일이고, 초실절은 16일이에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을 봄 절기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육체적 사역을 말해주고 있어요.



유월절은 십자가에 죽으심이고,

무교절은 무덤에 계신 것이고,

초실절은 부활 하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기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 죄 값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어요.

이게 봄절기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초실절 후 50일째가 되는 날을 칠칠절, 또는 오순절, 이라고 합니다.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를 성령 강림절로 나타났습니다.



성령이 오신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 받은 자들에게 하늘에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 문제를 해결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제는 죄와 상관없는 자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걸 농사의 비유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라간다고 합니다.

여름절기라고 해요.



칠칠절이 지나고 넉 달 후가 되면 가을 절기가 옵니다.

가을절기에는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습니다.

가을절기는 예수님이 재림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초막절을 끝으로 모든 절기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긴 안식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막절을 7일 동안 지키고 난 후에 8일을 큰 안식일로 지켜요.



큰 안식일이란? 7일 안식일과 다른 안식일이란 뜻이에요.

제 7일 안식일은 역사에 속한 안식일을 상징하지만,

8일 큰 안식일은 역사 바깥에 있는 안식하는 날을 말해요.

이게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에 부활 하신 날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막절이 지난 후 8일 큰 안식일은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날로서 이 세상 바깥에 있는 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8일 큰 안식일은 역사에 없는 날이에요.

묵시의 날이에요.



우리가 주일날 교회로 모이는 것은 여덟째 날로 모이는 것입니다.

비록 역사의 일곱째 날로 모이지만 영적으로는 여덟째 날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모여야 해요.

그래서 성도들이 주일날 교회로 모이는 것은 성도들의 소속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신앙 고백적 차원으로 모이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은 안다면 주일날 교회로 모이는 것이 엄청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습성을 본받지 말고 그 날이 가까이 올수록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신 줄 아세요.

주의 날에 교회로 모이는 것 속에 여덟째 날의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목사가 “주일 날 빠지지 마세요” 라고 소리칠 문제가 아니에요.

거듭나지 않으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주일 속에 담긴 여덟째 날의 영적 비밀을 알면 안 모일 수가 없어요.

더욱 더 모이기를 힘써야 해요.



교회는 시간이 나면 오는 곳이 아니에요.

시간을 내서 와야 해요.

주일 속에 담긴 여덟째 날의 의미를 모르니까 주일에 교회에 오지 않고 놀러 다니는 것입니다.

단순 논리로 말하자만 교회 오기가 싫다는 말은 하늘 백성이 아니란 뜻입니다.

하늘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 오기가 싫은 것입니다.



교회는 하늘나라 소속이에요.

그래서 하늘로서 난 자들은 교회로 모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건 강요사항이 아니고 자발적인 것이에요.

교회는 성도들에게 날마다 정체성을 알려 주어야 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후에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올라오게 합니다.

시내산 꼭대기는 다른 세계를 말해요.

하나님 세계를 말해요.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었어요.



율법은 하나님의 편지에요.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율법을 보면서 자신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과 광야는 다른 세계에요.

애굽은 낮과 밤이 있었지만 광야는 낮과 밤이 없어요.

물리적인 낮과 밤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영적으로 밤이 없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빛 안에 거한다고 하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을 어둠에 거한다고 합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동행하는 곳이에요.

그러므로 광야는 저녁이 되매 아침이 되는 구조로 다스려지는 6일에 속한 곳이 아니고 저녁과 아침이 없는 일곱째 날로 다스려지는 곳인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일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고 매일 하늘에서 만나를 주심으로서 하나님이 거저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곳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건 안식의 세계란 뜻입니다.

이 안식의 세계가 지금은 교회로 나타난 것입니다.



교회는 광야와 같아요.

교회는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는 곳이에요.

이렇게 하늘에 만나를 먹고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하늘나라 고향으로 데려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사흘 길 광야에 나가서 6년 동안 고향으로 데리고 갈 점박이 양을 만드는 것은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백성을 낳고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야곱이 양들을 데리고 라반의 집에서 사흘 길을 떠나지요.



사흘이란?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 하신 날로서 죽음 너머 있는 날이에요.

사흘 길 광야는 세상을 상징하는 라반의 집과 격리가 되는 곳이에요.

이렇게 되면 라반의 집은 세속이 되어버리고 야곱이 양 떼를 몰고 나간 사흘 길 광야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로가 왜 그러냐고 묻습니다.

이에 모세는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흘 길을 가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애굽에서 떨어진 사흘 길 광야는 하나님이 계신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사흘은 이 세상과 격리되는 세계 곧 다른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나도 밤낮 사흘 밤낮 물고기 뱃속에서 있다가 나오지요.

물고기 뱃속은 무덤과 같아요.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고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시다가 부활하시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하는 것을 요나의 표적으로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사흘이라는 의미는 역사 바깥을 이야기해요.



야곱은 지금 양떼들을 데리고 역사 바깥으로 나간 거예요.

교회가 바로 역사 바깥 사흘 길에 있는 동네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흘 길 광야에 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데리고 갈 점박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야곱이 점박이를 어떻게 만드는가요?

여기에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이 비밀을 살펴봅시다.



야곱이 점박이 양을 어떻게 생산을 하느냐 하면 버드나무, 신풍나무, 살구나무 껍질을 벗긴 물을 먹임으로서 해요.

야곱은 양들이 물을 먹을 때 버드나무, 신풍나무, 살구나무 껍질을 벗겨서 물에 어른거리게 해서 먹게 하였어요.

그런데 그 어른거리는 물을 마시고 난 양들이 점박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영적인 비밀이에요.



세 나무는 예수님의 일하심을 상징해요.

세 가지 나무를 의인화 하여서 보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나와요.




신풍나무는 “아르몬”이라고 하는데,

이는 “발가벗긴다”는 의미에요.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사건을 말해요.



살구나무는 “샤케드” 라고 하는데,

이는 “잠에서 깨어난다” 는 뜻이에요.

이것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상징해요.



버드나무는 “아라바”라고 하는데,

이는 “영생” “번영”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부활 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영생을 주시고 예수의 생명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게 하는 것과 같아요.



이 세 나무를 의인화하면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양이 물 먹는 것은 성도가 말씀 듣는 것과 같아요.

야곱이 양떼들이 물을 먹을 때에 예수님이야기를 해주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야곱은 양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들려준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들은 양들이 점박이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벧전 1장 23절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는 성도가 거듭난 것이 말씀으로 되었다고 하지요.

어떤 말씀인가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에요.

성도는 이삭처럼 약속으로 낳아진 자들이에요.



그 약속이란? 바로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의 말씀이에요.

새 언약으로 거듭난 성도가 바로 야곱의 세 가지 나무껍질이 벗겨진 물을 먹고 낳아진 점박이 양들인 것입니다.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야곱이 아무 양이나 점박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실한 양만 골라서 만들어요.

“실하다” 라는 말은 “카솨르” 라고 하는데, 이는 “묶여 있는 자” 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묶여 있다는 것은 약속의 후손이라는 말입니다.

약속(約束)이라는 말이 바로 묶여 있다는 뜻이거든요.



우리가 어디에 묶여 있나요?

창세전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에 보면 성도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 있어요.

녹명이 되었다는 말은 약속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나 구원하지 않아요.

창세전에 약속 된 자들만 구원해요.

이걸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어지게 함으로서 구원을 해 내신다는 뜻입니다.



새 언약은 아무나 믿어지지 않아요.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믿어져요.

그래서 하나님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믿어지는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구원을 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창세전 언약에 녹명된 자들에게 단풍나무 버드나무 살구나무 껍질을 벗긴 물을 먹이는 것입니다.

이를 이 시대에 적용할 것 같으면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듣게 하세요.

복음을 듣는 성도들은 성령의 인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을 봅시다.



롬 10:16-17=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된다고 하지요.

그런데 복음을 다 순종한다고 하나요?

아니지요.



복음은 다 듣는 게 아니라고 하지요.

그래서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어요.



그 복음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는 아무나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왜 안 믿어지는가 하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말 같지 않은 이야기이에요.

이걸 바울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한다고 합니다.

그 전도의 미련한 일이 무엇인고 하니,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낸다는 것입니다.



이걸 누구만 믿느냐 자기 백성들만 믿어요.

그러니까 자기 백성들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발가벗김 당하고 우리가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을 아멘으로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멘” 도 우리 실력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신 일이에요.

이렇게 성령께서 하신 일을 믿는 것을 인을 쳤다고 합니다.



성령이 인 친다는 것은 성령으로 낳아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을 야곱은 양들에게 세 가지 나무껍질을 벗긴 물을 먹임으로서 점박이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장차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을 예표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합환채를 먹고 낳아졌지요.

이걸 양들에게는 나무껍질이 벗겨진 물을 먹게 하여서 점박이를 생산해 내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합환채로 요셉이 낳아진 것이나 세 가지 나무껍질을 벗긴 물을 먹고 점박이가 된 것이나 동일한 의미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럼 종말에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을 치는지 살펴봅시다.



요한계시록 7장을 봅시다.



계 7:1-8=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5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 스블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자 보세요.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장차 일어날 사건들을 보여주십니다.

장차 이 땅에 큰 바람이 불게 됩니다.

이 바람은 환란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엄청난 환란의 오기 전에 먼저 자기 종들에게 인치는 작업을 하세요.

이건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온 애굽에 장자들이 죽어지는 재앙이 닥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어린 양으로 인을 친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인을 친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시를 해 두는 것입니다.

표시를 해 두고서는 죽음을 집행하는 천사들에게 명령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표시가 된 사람은 건들지 말고 어린 양의 피로 표시 되지 않은 자는 진멸하라고 하십니다.

이에 천사들이 나가서 어린 양의 피가 없는 자들은 다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에 애굽의 장자가 죽는 재앙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각 지파 속에서 12000명씩 인을 치지요.

이것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속에 구원 받을 자들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 집안에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고,

야곱의 아들 중에서 야곱과 에서가 있고,

야곱의 집안에서도 육으로 낳아진 자들이 있고 영으로 낧아진 자들이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속에서도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 속에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은 라반의 양이고, 이면적 유대인은 야곱의 실한 양들이에요.

야곱은 실한 양들에게만 세 가지 나무껍질이 벗겨진 물을 먹였어요.

이것은 마치 각 지파 속에서 12000명 씩 인을 친 것과 같아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인을 친다는 이야기는 아무에게나 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만 인을 친다는 것이에요.

이들이 바로 야곱의 실한 양들인 거예요.



양(羊)은 일 년에 두 번 새끼를 낳는데 “봄”에 낳는 양과, “가을”에 낳는 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봄에 태어나는 양은 쇠약하고 피곤하고 가을에 태어나는 양은 실하고 튼튼해요.

이게 또 비밀이에요.



봄에 태어나는 양은 먼저 태어나는 것으로 언약으로 말하면 옛 언약 안에서 난 자들을 말해요.

이것은 레아의 후손과 같아요.

옛 언약인 율법 신앙은 피곤하고 쇠약해요.

이건 구약의 육적 이스라엘을 상징해요.



가을에 태어나는 양은 나중에 태어나는 것으로서 언약으로 말하면 새 언약 안에서 난 자들을 말해요.

이것은 라헬의 후손과 같아요.

새 언약인 은혜 신앙은 생동감이 넘치고 살아서 펄펄 뛰어요.

이것은 신약의 성령으로 거듭난 영적 이스라엘을 말해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약 교회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건져 내지요.

이게 종말에도 그대로 나타나요.

각 지파 속에서 12000명을 인을 치듯이 종말에도 수많은 교회 안에서 또 골라내서 인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왔다고 해서 다 신자가 아니란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이걸 말해주고 있어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세요.



교회 안에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도 있고,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고,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자들이 있어요.

자칭 신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밭에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것으로 말씀 하셨어요.

종들이 와서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고자 하니까 주인이 그냥 두라고 하지요.

괜히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이 상할 수가 있으니까 추수 때까지 가만 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밭은 교회에요.

지금 교회 안에 곡식과 가리지가 있어요.

추수 때는 환란 때인데 이 환란이 닥치기 전에 하나님이 종들을 보내서 자기 백성들의 이마에 인을 친다고 합니다.

이들이 바로 각 지파 속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에요.

실한 양들이에요.



실한 양의 반대는 약한 양이에요.

약한 양들은 “약하다” 는 의미는 “아타프” 라고 하는데,

이것은 “피곤하다” “영양실조에 걸렸다” “정신이 혼미하다” 라는 뜻이에요.



율법아래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피곤해요.

마치 영양실조 걸린 사람처럼 힘이 없어요.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니까 피골이 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어요.



교회 안에 두 부류가 있어요.

신앙생활을 법으로 하는 사람과 은혜로 하는 사람이 있어요.

두 사이에는 극명하게 차이가 나요.

법으로 하는 사람은 항상 부정적이고 불평해요.

하지만 은혜로 하는 사람은 긍정적이고 늘 감사해요.



실한 놈과 약한 놈의 차이는 뭔가요?

실한 놈은 잘 먹고, 약한 놈은 안 먹어요.

실한 놈은 건강하고 소화력이 좋아서 말씀에 은혜를 받아요.

말씀으로 힘을 얻으니까 긍정적이 되고 삶 속에서 은혜와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한 놈은 말씀을 받아먹을 힘이 없어요.

밥상을 차려 놓아도 밥을 먹을 힘이 없어서 깨작거리는 것입니다.

소화 시킬 능력이 없으니까 먹어도 잘 체하고 무기력하고 까칠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매사에 불평불만이고 사소한 일에도 시험이 들고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부정적이고 게으름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정직해요.

먹은 대로 반응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은 더욱 더 건강해지고 약한 사람은 점점 약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동일해요.

은혜 받는 사람은 계속 은혜 받는 자리로 나아가고 넘어지는 사람은 계속 시험 드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엄마가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먹이듯이 야곱도 좋은 것으로 양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실한 양들은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니까 야곱은 그들에게 나무껍질을 벗긴 다른 물을 먹이는 것입니다.



나무가 껍질이 벗겨진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옷을 벗긴 것과 같아요.

우리는 예수님이 벗어준 그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옷이에요.

예수님이 피로 맺은 새 언약이라는 옷을 입은 자들을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하늘나라 고향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약한 양들이 먹을 때는 나뭇가지가 벗긴 물을 안주어요.

약한 양들에게는 그냥 물을 먹여요.

이 놈들은 나뭇가지가 벗겨진 물을 못 먹어요.

시험에 들어요.



이건 육에 속한 자들은 십자가 복음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가지고 인간들 이야기로 풀어주어야 좋아라 해요.

그러니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인 성경이 그들에게는 윤리 도덕 책이 되고 만 것입니다.

또한 복을 따내는 주술책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실한 양과 약한 양은 먹을 물이 달라요.

말씀을 깨닫는 것이 달라요.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서 실한 양들은 영적으로 하늘 이야기로 듣고 약한 양들은 육적으로 세상 이야기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성도와 구원 받지 못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가 달라요.

육적 신자에게는 일반 은총을 주지만, 영적 성도에게는 특별 은총을 주어요.

육적 신자에게는 땅에 것을 주지만, 영적 성도에게는 하늘에 것을 주어요.



이것을 야곱 식으로 말한다면 레아에게서 낳은 자식들에게 입혀주는 옷이 다르고,

라헬에게서 낳은 자식에게 입혀주는 옷이 다르다고 할 수 있어요.

야곱은 레아에게 낳은 자식들에게는 평범한 옷을 입혀 주었고,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에게는 특별하게 채색 옷을 입혀주었어요.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혀준다는 것은 너는 다른 아이라는 뜻이에요.

넌 다른 종자란 뜻입니다.

왜 다른가요?

레아의 후손들은 육으로 낳은 자이고 라헬의 후손은 합환채를 먹고 영으로 낳았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낳은 자에게는 특별한 은혜가 있어요.

그것이 채색 옷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채색 옷을 입었다는 것은 얼룩박이 점박이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 고향으로 데리고 갈 양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철저하게 양을 구별하여서 물을 먹었어요.

고향으로 데리고 갈 실한 양들에게는 얼룩 거리는 물을 먹였고,

약한 라반의 양들에게는 그냥 물을 먹였어요.

실한 양들이 먹은 나뭇가지가 벗겨진 얼룩거리는 물은 예수님의 피가 뚝뚝 흘리는 십자가 복음을 상징해요.

피 복음은 아무나 듣지 못해요.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들을 수가 있어요.



두 가지 물은 두 언약을 상징해요.

라반의 약한 양들이 먹는 그냥 물은 육에 속한 자들이 먹는 물로서 율법을 상징해요.

그러나 야곱의 실한 양들이 먹는 물은 영에 속한 자들이 먹는 은혜를 상징해요.

율법 안에는 생명이 없어요.

생명은 은혜 안에 있어요.

은혜를 받아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요.



율법 아래 있는 자와 은혜 아래 있는 성도는 달라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달라요.

은혜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하늘에 신령한 것을 주시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땅에 것을 주어요.

그래서 은혜 받은 성도는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아가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땅에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양은 1년에 두 번 새기를 는다고 하였잖아요.

봄에 낳는 양이 있고, 가을에 낳는 양이 있다고 하였지요.

봄에 낳은 양은 비실비실하고 약해요.

반면에 가을에 낳는 양은 강하고 토실토실해요.



이것은 두 백성을 보여주고 있어요.

봄에 낳은 양은 처음 것으로 구약 이스라엘을 말하고,

가을에 낳은 양은 나중 것으로 신약 이스라엘을 상징해요.

구약은 육적 이스라엘이고, 신약은 영적 이스라엘이에요.



성경은 항상 처음 나온 것은 타락으로 나타나는 것은 처음 것은 나중 것을 보여주기 위한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것은 그림자로서 나중에 오는 실상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것은 다 타락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형제들과 요셉,

레아와 라헬,

브닌나와 한나,

사울 왕과 다윗 왕,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의 이스라엘,

옛 언약과 새 언약,



처음 것은 다 타락하지요.

이는 처음 것은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혈통으로 낳아진 자들이고,

신약 이스라엘은 성령으로 낳아진 자들이에요.

구약 이스라엘에게는 땅에 속한 육적 복을 주었고,

신약의 이스라엘에게는 하늘에 신령한 영적 복을 주었어요.



육적 신자와 영적 신자가 구하는 것이 달라요.

먹는 물이 달라요.

육적 신자는 인간의 가치를 긍정해 주는 교훈 설교를 좋아하고,

영적 신자는 죄를 고발하고 예수를 바라보게 하는 설교를 좋아해요.



야곱이 실한 양들에게 먹이는 나무껍질이 벗겨진 물은 성령이 증거하는 십자가 복음을 상징해요.

성령은 자기 종들에게 십자가의 복음만 듣게 하세요.

지금도 하나님은 야곱과 같이 자기 양들을 치고 있어요.



창세로부터 생명책에 이름이 녹명된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라는 물을 먹여주세요.

반면에 생명책에 녹명이 되지 않는 자들에게는 윤리도덕적인 말을 주어요.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는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서도 다른 해석을 하게 되어 있어요.

똑같이 설교를 들어도 어떤 이들은 윤리 도덕적으로 듣고 어떤 이들은 영적으로 들어요.



오늘도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사람들에게는 야곱이 점박이 양을 낳는 일을 예수님이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을 인치는 것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녹명 되지 않은 사람은 야곱이 사기 쳐서 거부되었다는 일반적인 이야기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모든게 상징이에요.

누구를 말하는 상징인가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상징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구약의 모든 것을 예수그리스도로 해석을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모두가 예수님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야곱이 고향으로 데리고 갈 점박이 양을 치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백성들을 성령으로 인을 쳐서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구원하는데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구원을 합니다.

그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 자기백성들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다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무의 껍질이 벗겨지듯이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리셨어요.

야곱이 지금 점박이 양을 낳기 위하여 나무껍질을 벗기는 거잖아요.

이 나무 껍질 벗기는 사건을 신약의 사건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야곱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적인 것으로 보여주었어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을 보니까 야곱이 세 가지 나무를 벗긴 물로 점박이 양을 낳게 하는 일이 영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백성들을 구원하는 사건을 담아놓은 것이더란 말이지요.



지금 우리는 그 예표적인 사건을 예수님의 사건으로 재해석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점박이로 생산된 양들을 고향으로 데려가요.

우리가 돌아갈 고향이 어디인가요?

하늘나라이지요?

천국이지요?



천국은 누가 들어가나요?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가요.

그럼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구원을 받게 되어 있나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되어 있잖아요.



그럼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사람들은 어떤 말씀을 듣겠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말씀을 듣겠지요.

그 말씀을 듣는 자들만 천국으로 갈 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 되었으나 저희에게는 감추어져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 이야기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야곱은 점박이 양들에게 너는 내 것이라는 도장을 찍어 놓는 것입니다.

이걸 인을 친다고 합니다.

인을 치는 것은 자기 소유라는 표시에요.



요한계시록 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큰 환란이 닥치기 전에는 먼저 144000명에게 인을 치고는 이들은 자기 소유이니까 해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야곱은 점박이 양들은 자기 것이라고 소유권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야곱은 라반의 수많은 양떼를 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양들 속에서 자기 것을 선별해 내는 거예요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실한 양들이에요.



실한다는 의미가 언약에 묶여져 있는 자들이라고 했지요.

야곱의 눈에는 실한 양들이 자기하고 묶여져 있는 양이라는 것을 알고 인을 친 것입니다.

영적인 말이니까 잘 이해하세요.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도 모두 율법이라는 라반의 양떼 속에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이라는 라반의 양떼 속에 있는 자기 양들에게 성령으로 인을 치신 것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백성들만 찾아가서 새 언약을 주세요.

자기 백성들은 십자가 복음을 듣고 성령의 인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것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침 받은 자들에게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 땅에서 예수님의 운명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점박이 양들이 야곱을 따라 고향으로 가듯이 성령으로 인침 받은 성도들도 이 세상을 떠나는 자세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나그네 인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요 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너희들이 나 때문에 고난 받을 거라고 말씀 하시지요.

왜 고난당한다고 합니까?

세상에서 너희들이 내 것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 세상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선택을 당한 것이 고난당하는 이유가 되나요?

이는 이 세상이 예수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둠이고 예수님은 빛이에요.

빛과 어둠은 상극이에요.

서로 하나 될 수가 없어요.

본능적으로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세상이 예수에 속한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하고 그 형제들하고 싸우지요.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잖아요.

왜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합니까?

이는 요셉이 자기들하고 다른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에요.



다른 옷이란? 점박이 양들처럼 몸에 점이 박혀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점박이 양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세상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것이에요.

그래서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점박이들을 누가 미워하나요?

세상에 속한 자들이 미워해요.

세상은 자기하고 다른 놈은 가만 두지 않아요.

그 놈하고 있으면 불편하거든요.

그래서 내어 쫓든지 죽이든지 하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도 두 양들이 있어요.

라반의 양과 야곱의 양이 있어요.

라반의 양들은 점이 없고 야곱의 양은 성령으로 인침 받은 점박이에요.

성령으로 인침 받은 성도들은 육에 속한 라반의 양들인 교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아요.



라반의 양떼는 점이 없고,

야곱의 양떼는 점이 있지요.

그럼 점 없는 양들이 점 있는 양들을 공격을 하겠지요.

그래서 야곱이 밤중에 점박이들을 라반의 양떼에서 분리하여 고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끄집어냄을 당하는 것이에요.



어둠에서 끄집어냄을 당하고,

율법에서 끄집어냄을 당하고,

라반의 양떼에서 끄집어냄을 당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요.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데 자기 집에서 심판을 하세요.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일어나는데 늙은 자로부터 일어난다고 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점박이 양들과 점 없는 양들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육적 성도가 있고 영적 성도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곡식과 가라지를 분리하고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듯이 갈라내는 것입니다.

영적 성도는 새 언약으로 살고, 육적 성도는 옛 언약으로 살아요.



새 언약은 은혜이고, 옛 언약은 법이에요.

은혜는 덮어주고, 법은 죽여요.

영적 성도는 말씀을 영적으로 듣고, 육적 성도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들어요.

영적으로 이해하는 사람하고 문자적으로 말씀을 듣는 자들하고는 분명하게 차이가 있어요.



영적으로 듣는 사람은 은혜로 듣고, 문자적으로 듣는 사람은 법으로 들어요.

그래서 문자적으로 듣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듣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다는 그 말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핍박을 받는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말하는 세상은 율법 아래 있는 유대교를 말해요.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빼내니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저 놈들은 우리하고 다르다고 하면서 발끈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 손에 죽었나요?

율법주의자들에게 죽었어요?

예수님의 운명이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이가 되어요.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유대교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율법주의자들에게 공격당해요.

율법주의자들이 교회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있겠어요?

육적 모습으로 나타나있겠지요.

그것이 성경을 이해해도 인간의 상식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는 자들 앞에서 그것은 그런 뜻이 아니고 이러한 뜻이라고 하면 너 왜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는데 라고 하면서 이단이라고 해요.



두 가지 성경해석이 있어요.



육맥과 영맥이 있어요.

육맥은 그림자이고 영맥은 실상이에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오지요.



율법은 하나님 말씀이에요.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왔어요.

하나님이 오신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실상이고, 율법은 그림자에요.



그러니까 그림자인 율법을 통해서 실상인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속에는 영생이 없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 속에 있어요.



하나님은 원본이고, 율법은 복사본이에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복사본을 주신 겁니다.

복사본은 원본을 찍어서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사본 속에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원본에 있어요.

그 원본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복사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을 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앞으로 인도하는 길라잡이인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야 해요.

왜냐하면 예수가 원본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이잖아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지요.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요.

이 세상은 그림자이고 하나님 나라가 실상이에요.



이 세상에 나온 우리는 복사본이고 원본은 하늘에 있어요.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이 땅에 육신이라는 복사본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원본인 영생의 몸인 장막을 덧입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림자는 그림자 일 뿐이지 실상은 아니에요.

성경이야기는 문자로 나타났지만 모두 그림자인거예요.

실상이 있다니까요.

실상이 예수님이에요.



예수가 실상이라는 것을 누가 아느냐?

자기 백성들만 알아요.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백성들만 알아요.

어떻게 아느냐?

성령으로 알아요.



그래서 성령은 자기백성들에게 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영생을 주는 구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을 예수님 이야기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지요.

성령의 감동으로 썼는데 인간의 언어로 썼어요.

인간의 언어 속에 성령의 감동이 담겨있어요.



성령의 감동으로 쓸 것 같으면 어디 이야기를 씁니까?

이 세상이야기를 씁니까?

하늘이야기를 씁니까?

하늘이야기를 세상 언어로 쓰는 것이지요.



그럼 성령이 우리에게 올 것 같으면 성령이 인간의 언어로 된 문자에게서 하늘이야기를 꺼내서 해석하게 해 주시겠지요.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모든 성경을 하늘 이야기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늘이 바로 예수에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오심을 하늘나라가 왔다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걸 천국이 침노하여 왔다고 해요.



모든 성경은 누구 이야기입니까?

예수님 이야기지요.

예수님 이야기일 것 같으면 구약의 야곱의 이야기도 누구의 이야기로 풀어야 합니까?

당연히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구약 성경을 예수님 이야기로 풀면 성경을 상식으로 푸는 육에 속한 자들로부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어요.

상식적으로 보세요.



야곱이 나뭇가지를 꺾어서 물 먹이는 것이 왜 십자가 이야기고 양들이 점박이가 된 것이 어떻게 성령의 인침 이야기가 되는가요?

문자적으로 보면 그냥 나무이야기에요.

문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걸 과학적으로 접근을 해서 양들이 임신을 할 때 얼룩거리는 물을 마시면 돌연변이 현상을 일으켜서 점박이를 생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유추하는 것입니다.

이게 상식이에요.



그런데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야곱의 점박이 양을 성령의 인침으로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이게 말이 안 되지요.

맞아요.

말이 안 되어요.



그래서 예수 이야기를 하는 우리는 이단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냥 이단으로 삽시다.

그 길 밖에 없어요.

아니라고 항변하지도 마세요.



어떤 분들이 저에게 당신은 왜 성경을 그렇게 보는데 라고 해요.

그렇게 보이니까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어쩝니까?

그렇게 보이는데,,

그래서 제가 저는 이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라고 말하는 거에요.

그럼 꼭 지랄을 떠는 인간들이 있어요.

왜 내가 은혜 받는 것까지 당신이 간섭하려고 합니까?

너나 잘하세요.



예수님이 설교를 하니까 누가 태클을 걸던가요?

바리새인들이지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너는 왜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는데 라고 시비를 걸었잖아요.

이게 산상보훈이에요.



산상보훈을 보면 옛 사람에게는 저렇게 말하였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하지요.

이건 예수님이 구약을 재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누구 이야기로 해석하셨는가 하면 예수님 이야기로 해석을 했어요.



다시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요셉의 이야기도 예수님의 이야기에요.



창조 이야기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홍수 이야기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출애굽 이야기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모세 이야기도 예수님 이야기이고,

다윗 이야기도 예수님 이야기에요.



모두가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속사 이야기에요.

그래서 우리는 모든 성경을 예수님의 이야기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사건은 장차 예수그리스도가 자기백성을 구원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예표적인 사건이고 표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표상 속에서 실상을 찾아내야 해요.

성령이 그렇게 해 주세요.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들을 인치는 작업을 하세요.

인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같은 운명 속으로 집어넣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날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리스도의 흔적이 점박이예요.



성령의 인침은 내적 증거이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외적 증거에요.

그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흔적을 새기는 일을 할까요?

안 할까요?

당연히 하겠지요.

그래서 복음을 받으면 반드시 미움이 같이 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으면 그 복음이 반드시 고난을 동원해 와요.



하나님은 복음 속에 고난을 옵션으로 묶어 놓았어요.

그래서 성령으로 인침을 받아서 예수님의 운명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인침 받지 못한 육적 교인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야곱으로부터 채색 옷을 받아 입었지요.

요셉이 자기가 채색 옷을 해 입었나요?

아니에요.

아버지가 해 입혀주었어요?

아버지가 입혀 주니까 채색 옷을 입는 순간 채색 옷을 입지 못한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영적 공식이 하나 있어요.



예수 믿으면 고난 받고,

예수 안 믿으면 고난이 없다 입니다.

그 속에 예수를 품고 있으면 마귀로부터 공격 대상이 되고,

그 속에 예수가 없으면 마귀가 공격하지 않아요.



마귀는 귀신같이 예수를 품은 자들을 알아봐요.

마귀는 복음을 지식으로 아는 자들은 공격하지 않아요.

복음을 생명으로 받은 자들만 공격해요.



마귀는 그 복음이 원본인지 복사본인지 알아요.

복사본을 가진 사람은 가만히 두어요.

왜냐하면 거기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사본 복음을 가진 자들은 마귀하고 한 통속이에요.

그래서 복음 가지고 남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 가지고 깡패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복음 속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복음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처럼 핍박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누가 핍박을 하거들랑 아 내가 받은 복음이 진짜이구나 생각하고 감사하세요.

내가 원본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고마워하세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거들랑 놀라지 말고 아! 올게 왔구나!

당연한 게 왔구나! 생각하세요.



팔복을 보세요.



복을 받았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하고,

복을 받았기 때문에 애통하고,

복을 받았기 때문에 핍박이 일어나는 거예요.

핍박 받아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복을 받았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거예요.

복을 받았기 때문에,,,



왜 복을 받으면 핍박을 받습니까?이는 그 복이 하늘에 것이기 대문입니다.

하늘에 것이니까 땅에 속한 자들이 넌 왜 그걸 받는데 라고 하면서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게 “너 왜 채색옷을 입었는데! 라고 핍박한 것처럼,

육에 속한 자들이 “너 왜 하늘에 복을 받았는데” 라고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 뭐라고 했나요?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하여 창세전에 예정을 했다고 했잖아요?

우리가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았어요.

하늘의 신령한 복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에 예수님의 생명을 심어 놓은 겁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 몸을 토양으로 해서 싹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의 생명이 툭툭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의 생명이 없는 자들이 자기들하고 다르니까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늘의 복을 받은 자들에게는 땅의 복을 주지 않아요.

이건 가난하게 살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복의 개념을 물질적인 개념으로 접근하지 마시란 뜻입니다.

물론 예수 믿고 부자로 살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게 정답은 아니란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의 개념은 예수그리스도의 운명 속에 사는 자체가 복이에요.

그러니 물질적 가치로 인하여 희비하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다시 당부합니다.

예수님의 운명 속에서 살다가 보면 육적 신자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어요.

이단 소리도 들을 수 있어요.

창세전 언약을 알아먹지 못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단이라고 하겠지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마시고,

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이구나!

내가 저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구나!

내가 점박이구나!

채색 옷을 입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고 낙심하지 마시고 감사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야곱이 광야에 나가서 양떼를 치면서 양떼들 속에서 실한 양들에게만 인치는 것이 우리의 구원 이야기로 들려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기백성들만 인 쳐서 영원한 고향인 천국으로 데려간다는 사실을 우리 이야기롣 들려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비록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같이 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인침이 우리 속에 새겨져있다는 이 사실 하나 만으로도 범사 속에서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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