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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51강. 누가 감히 송사한단 말이냐! (롬 8:29-34)

by coroa 2021. 6. 25.

 

 

[51강. 누가 감히 송사한단 말이냐! (롬 8:29-34)]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한 목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들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들에 형상을 본받을 자들은 “미리 정하셨다”고 합니다.

 

“미리 정하셨다” 함은 이미 결정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누가 결정 했나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셨어요.

우리는 창세전에 이러한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을 입은 자로서 이 세상에 보내심을 입었어요.

성도에게 이러한 말씀이 너무도 감사하게 들려요.

그래서 창세전 언약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들에겐 무진장 기분 나쁘게 들려져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 받아야 할 자들을 일방적으로 미리 정하여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당하면 화가 나요.

그래서 무슨 일을 해도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이라도 놓고 나도 도왔다고 행세를 하여야 직성이 풀려요.

이러한 것은 모두가 무슨 일을 해도 자기 의를 남기고자 하는 죄성 때문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우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하나님이 틈을 주지 않았어요.

그러니 기쁘지 않고 기분 나쁜 것입니다.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했다고 하면 심드렁 해하는 것입니다.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하지요.

 

여기서 이렇게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요?

우리더러 이렇게 하라고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고 하지요.

 

그러니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이걸 언제 작정을 하셨는가 하면 창세전에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했어요.  

그래서 성경은 구원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으로 따 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자를 미리 정하여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미리 정한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해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한마디 한마디를 잘 음미해 보세요.

그럼 엄청 은혜가 되어요.

성경을 보면서 이러한 말씀들이 복음으로 들려져야 해요.

 

미리 정하셨다고 하지요.

누가 미리 정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부르신다고 합니다.

누가 누구를 부르나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의롭다 하신답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들입니다.

 

의롭다 하신다는 말은 실제로는 의롭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의롭다 하심 속에는 우리의 부정과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나의 못남과 하나님의 긍휼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죄인을 의롭다 하여 주시는 것이니까 긍휼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죄인을 죄인이라 하여야 하는데 죄인을 의인이라 한단 말입니다.

의롭다하는 것은 의를 입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자가 아니고 의(義)를 입어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들이에요.

 

이걸 잊지 마세요.

누구 의를 입었나요?

예수님에 의에요.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을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 의를 누구에게 입혀 주느냐?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만 입혀 주세요.

그러니 세상에는 예수의 의를 입을 자와 입지 못할 두 부류의 인간들이 있는 겁니다.

 

우린 내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줄을 몰라요.

그건 생명책에 녹명을 하신 분만 알아요.

그러니까 구원을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하신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녹명을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다 찾아내세요.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을 예수님이 목자와 양으로 비유 하시면서 목자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른다고 했어요.

그러니 창세전에 미리 정하신 자들은 죄와 사망 가운데서 반드시 불러내시고 이렇게 불러낸 자들을 의로 옷을 입혀 주어서 영화롭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리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과정 속에는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어요.

우린 그냥 컨베어 벨트에 올려진 물건처럼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현대 자동차에 가면 자동차를 만들 때 이런 식으로 만들어요.

컨베어 벨트에 올려놓고 공정(工程)에 따라서 만들어져 가요.

처음엔 그냥 껍데기 하나만 달랑 올려져 있는데 흘러가면서 완성품으로 만들어져요.

우리의 구원이 이런 프로세스를 거치면서 주어져요.

 

하나님이 죄인을 간섭하여서 의인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 속에는 전부 하나님의 공로만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벗길 것은 벗겨내고 입힐 것은 입혀 주세요.

제할 것은 제하고 새길 것은 새겨 넣으세요.

하나님 보시기에 좋도록 말입니다.

 

오죽 못났으면 의롭다고 여겨 주시겠습니까?

잘났으면 여겨 주실 필요가 없어요.

못났기 때문에 여기심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의롭다 여겨 주시는 자들을 영화롭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영화롭게 해 주신다는 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처음 목적한 그 자리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원 앞에서 늘 고마워하고 감사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능력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면 반드시 그 말씀이 함유(含有)하고 있는 것들이 실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야! 정낙원이 내가 너를 구원해 줄게!

그러면 그것으로 종결이에요.

왜냐하면! 반드시 그렇게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을 씨앗으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씨앗을 약속이라고 합니다.

약속 속에 실상이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 때는 먼저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약속을 받으면 실상을 받은 것이나 동일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약속이란?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사라에게 약속이라는 말씀이 씨처럼 주어지니까 이상하게 그 말씀이라는 씨가 사라 뱃속에서 점점 자라서 말씀이 함유하고 있는 아들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삭이라는 아들이에요.

그래서 이삭을 그냥 아들이라 하지 않고 “약속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라는 아들을 역(逆) 추적해 들어가 보세요.

그럼 약속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만들어 낸 결과물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와 같아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미리 아신 자들을 정하십니다.

정하셨다는 것은 약속이에요.

 

우린 아담 안에서 태어납니다.

죄 아래서 출생을 해요.

그러나 우리는 약속을 품고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품고 온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불러내십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서 생명으로 불러내세요.

율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빼내세요.

 

이렇게 은혜 아래로 부르신 자들을 예수님의 의를 입혀 주어서 의롭다고 하세요.

꼬라지는 죄 아래서 난 아담의 몸을 입고 있어도 예수의 의를 입고 있어요.

그리곤 나중에 처음 계획하였던 그 자리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처음 목적한 그 자리가 어디인가요?아들에 자리입니다.

아들이 되는 것에서부터 아들에 자리에 앉기까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이게 예수 안에서 이루어져요.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예수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일컬어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고 시작과 끝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린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이 되어질 뿐입니다.

구원 속에는 인간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전적인 하나님의 일하심만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심을 신학적 용어로 예정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정론은 인간들 입장에서 엄청 기분이 나빠요.

왜냐하면! 인간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뭔가 한 것이 있어야 체면이 서는데 ,

구원 속에는 우리가 보탤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창세전 언약을 말하면 기분나빠하는 것입니다.

이는 죄인은 무슨 일을 해도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죄성 때문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주체 챙기기라고 합니다.

주체(主體) 챙기기란? 자기가 주인 노릇 하겠다는 말입니다.

모든 일을 자기가 하겠다고 해요.

이는 모두가 자기 영광을 챙기고 싶어하는 죄성 때문이에요.

 

우리는 내가 나의 주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도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행사 하여야 좋은 겁니다.

 

인간들은 눈만 뜨면 자가 흔적을 남기고자 해요.

이는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자 하는 죄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능으로 하나님을 믿어요.

 

그래서 구원도 내가 주체가 되어서 이루고자 합니다.

내가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라고 하면 짜증을 내요.

일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좋아 해야 하는데 도리어 그 반대에요.

왜? 날 무시하는데 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정(豫定)론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저도 한 때는 예정론을 싫어했어요.

그 때가 언제 인가 하면 율법 아래서 열심이 특심하였을 때였어요.

내 열심이 특심할 때 예정론을 인정하면 내가 한 것이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일들이 의 없음으로 부정당하니까 싫은 겁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고 보니 예정론처럼 큰 위로가 되는 말씀도 없어요.

쉼을 주는 말씀이 없어요.

창세전 언약이야 말로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믿어지니까 그동안 율법아래서 수고한 무거운 짐들이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 동안 율법 아래서 내가 나를 지킨다고 무던히 애를 썼거든요.

율법 아래서는 모든 것을 내가 주체가 되어서 지켰어요.

구원도 내가 지켜야 했고, 말씀도 내가 지켜야 했고, 신앙도 내가 지켜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내 열심에 따라서 희비(喜悲)가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맨 날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머리털 하나도 검게나 희게 하지 못할 피조물 주제에 자기를 지키고자 하였으니 얼마나 웃기는 일이고 힘든 일이었겠어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란? 창조주 앞에서는 모든 것을 공급 받아야 하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창조주로부터 받아야지만 살 수가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처럼 피조물은 창조주가 주는 것을 받는 위치에 있는 존재들이지 자기가 생명을 만들어 내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생명도 받았고 받은 생명을 현재로 사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그냥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으면 되어요.

이길 인정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이에요.

 

생명(生命)이라는 말씀 자체가 하나님께서 살으라고 명령을 하신 것을 말하고 있어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살라고 명령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붙잡혀 있단 말입니다.

결국 말씀이 우리의 생명줄인 것입니다.

 

신앙(信仰)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거에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옳습니다! 라고 예만 하면 되어요.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해 주신다고 하는 것을 믿으란 말입니다.

우리는 실제로는 의롭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다.

 

그럼 우리 꼬라지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되어요.

그런데 죄가 자꾸만 내 꼬라지를 살피게 한단 말입니다.

내 꼬라지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단 말이에요.

믿음 없이 내 꼬라지를 보게 되면 낙망하게 되어요.

 

이를 아시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자기 꼬라지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게 한단 말이에요.

 

성령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믿어지게 해 주시면 담대함이 생겨요.

자기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되어요.

그러 할 때 자기로부터 자유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러한 자유를 빼앗고자 합니다.

어떤 식으로 빼앗는가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자기 꼬라지를 보게 하여서 상실케 해요.

여기에 미혹당하면 스스로를 법에 가두게 됩니다.

법에 가두어진다는 말은 자꾸만 자기 행위로 자기를 판단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법은 우리 행위를 가지고 판단해요.

그럼 우리는 송사 당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는 죄의 몸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누가 감히 성도를 송사 하느냐 라고 하지요.

 

송사(訟事)란? 판단 한다는 말입니다.

누가 송사하는가요?

마귀에요.

그럼 마귀가 무엇을 근거로 판단합니까?우리 행실을 가지고 판단해요.

마귀가 율법을 가지고 우리 행위를 판단 한단 말입니다.

 

우리 행위로 판단 받으면 우리는 정죄 당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몸뚱이는 죄를 생산하는 공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 마귀의 송사로 인한 정죄함을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가지고 이겨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33-34=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라고 하지요.

직역하면 어떤 놈이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판단한단 말이냐!

내가 의롭다고 하는데 어떤 놈이 아니라고 해!

그 놈이 나 보다 높으냐! 이 말입니다.

 

옳고 그름을 심판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판단이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고 틀리다고 하면 틀린 것이에요.

하나님이 누구를 옳다고 합니까?

미리 정하신 자들이에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예수 안에서 부르신 자들이 있어요.

부르신 자들이란 선택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선택이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건입니다.

여기에 왜? 라고 하면 안 되어요.

 

피조물은 창조주가 하신 일에 왜? 라고 하면 안 되어요.

왜? 라고 하는 것은 죄에요.

하나님이 하는 일에 왜? 라고 토를 단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에 비추어서 합당치 않기 때문에 왜? 라고 토를 달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있다는 것은 곧 자기 법을 가지고 있는 주인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종이지 주인이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그러므로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에요.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토를 달 입장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죄가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토를 달게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딴 식으로 일을 합니까? 라고 따진단 말이에요.

예정론으로 말해서 처음부터 천국 갈 놈과 지옥 갈 놈으로 정해 놓으면 우린 뭡니까?

우린 시다바리 입니까? 라고 항의를 한단 말입니다.

이게 죄에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지요.

왜? 먹지 말라고 했는가요?

이는 피조물이 선악과를 먹으면 자기 생각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에요.

죄가 자기 생각을 갖게 만든 것입니다.

 

선악과란? 선과 악을 판단하는 법이에요.

선과 악을 판단하는 법은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셔야 할 고유권한이에요.

피조물이 선악을 판단하는 법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계를 자기 식으로 판단을 해 버려요.

 

알다시피 창조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창조가 되었습니다.

피조물이 좋다 나쁘다 판단 할 것이 못 되어요.

왜냐하면! 모두가 하나님이 필요에 의해서 창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로 창조가 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게 되면 자기중심으로 피조물들을 판단하게 되어요.

피조물 중에서는 우리 인간들 입장에선 해로운 것들이 많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독 버섯이 있다고 합시다.

독 버섯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에요.

 

그건 우리의 먹거리로 만든 것이 아니에요.

창조 세계에 필요하기 때문에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걸 따 먹고 죽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인간들은 하나님께 왜? 이런 것을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건 인간들이 먹으라고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따져요.

원인을 하나님에게 돌린다구요.

이게 모두가 선악과가 가져다 준 죄 때문이에요.

 

선악과가 이와 같아요.

그건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므로 인간이 먹어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 먹으면 죽으니까 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그 속에 법이 있어서 판단하는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인간이 판단하는 것을 가지면 하나님 앞에 죽임 당해요.

그건 하나님 행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 한 분이어야지 피조물이 판단하는 권세를 가지게 되면 하나님과 충돌하게 되어요.

그래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아담을 위해서에요.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게 되면 사사건건 창조주가 하는 일에 반기를 들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창조주가 하는 일이 못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는 창조주가 보시기에 좋도록 피조물을 다스려 가세요.

그러나 피조물은 자기중심으로 창조주가 하시는 일을 판단해요.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좋다고 하고 불이익이 되면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 사상이 신앙으로 나타나면 자기 의(義)를 붙잡는 것으로 나타나요.

 

자기가 행한 것은 선(善)으로 여기게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을 따로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얘들아! 내가 바라는 선은 여기에 있단다! 라고 하면,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은 아닌데요! 우리 선은 이것인데요! 라고 항변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게 바리새인들에게 나타났어요.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율법으로 인간의 죄를 고발하려고 주었어요.

목적이 다른데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을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임으로 하나님 뜻을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지켜야 하는 것으로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그게 아니라고 알려 줍니다.

 

그런데도 우깁니다.

자기들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이러면 방법이 없어요.

깨트려야지!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선악의 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법이 있으면 법으로 살고 은혜가 있으면 은혜로 살아요.

법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도 법으로 해석해요.

법이 하나님 말씀은 내가 지켜야 하는 것으로 해석을 하게 한단 말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면 지켜야 해요.

안 지키면 자기 안에 법이 그걸 용납을 못하기 때문에 본인이 괴로워요.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을 지킬 때가 가장 행복해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것을 좋은 신앙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과 다르게 율법을 해석하고 있단 말이에요.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법 해석으로는 이단에 해당이 되어요.

그래서 예수를 죽인 겁니다.

 

이 모두가 선악과가 몰고 온 현상입니다.

이처럼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자기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가 아담에게 독자적인 눈을 가지게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자신들의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여지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발가벗음을 수치로 본다고 생각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본인들이 수치라고 여겨지면 방법이 없어요.

가려야지요.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서 가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기들 생각이에요.

 

하나님은 발가벗음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어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발가벗고 있는 것이 수치라고 하였다면 하나님이 옷을 해 입혔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해 입히지 않고 발가벗은 그대로 살게 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한 모습 그대로일 때 기뻐하세요.

하나님이 창조한 것을 훼손 할 때 화를 내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발가벗은 자들이 옷을 해 입고 오자 화를 내신 것입니다.

어떤 놈이 내가 만든 작품에 손상을 입혔느냐고 역정을 내신 것입니다.

이러면 죄가 어떤 것인지 알겠지요.

 

죄란? 하나님이 하신 일에 인간의 것을 섞어서 본질을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하나님이 하신 일에 인간의 것을 섞으라고 미혹을 해요.

하나님의 의(義)에 인간의 의로 덧칠을 하게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미혹당한 자들은 포도주에 물을 섞듯이 예수님이 하신 일에다 자꾸만 인간의 행위를 섞는 것입니다.

율법적 행위에 의롭다는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게 죄에요.

 

암튼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아담의 눈에는 자신들이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여지기 시작을 합니다.

자기 생각에 발가벗음이 수치라고 여겨지면 가려야지 그냥 둘 수가 없어요.

그냥 두면 본인들이 불편해요.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은 것입니다.

그리곤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이에 하나님이 그럽니다.

아니~ 너희들 모양이 왜? 그 모양이냐!

누가 너의 발가벗음을 수치라고 하더냐!

그 놈이 어떤 놈이냐!

너희들~ 내가 먹지 말라고 한 그 선악과를 먹었느냐!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그걸 먹게 되면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피조물이 창조주와 다른 눈을 가지고 다른 생각을 갖게 되면 함께 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창조주가 살아가는 방식과 피조물이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면 충돌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하나님의 세계에서 추방을 한 것입니다.

그냥 두면 사사건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 바깥세상에서 자기 방식으로 왕 노릇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선악의 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담의 세상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세요.

하나님의 방식과 아담의 방식은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충돌을 하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나타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은 자기들 방식으로서의 하나님 섬김이었어요.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법은 예수를 죽이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겼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것을 죄라고 고발을 합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아담처럼 선악과로 인한 하나님과의 다른 눈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알려 줍니다.

얘들아!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너희들이 긍휼을 받기를 바라셔!

그러니까 제사 지내려고 하지 말고 긍휼을 구해! 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넌 뭐냐!왜? 우리 방식을 무너뜨리려고 해!

너 이단이지! 라고 하면서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란? 자기 생각으로 나아오는 것이에요.

죄가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곡해 하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명령조차도 자기 방식으로 해석을 해 버려요.

 

쉬운 예를 듭니다.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 합니다.

이건 구원의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예수 안에서 구원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걸 방법론으로 해석해요.

그래서 여러분~ 구원 받고 싶으면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럼 아담의 후손들은 자기가 예수를 믿겠다고 덤빕니다.

예! 저는 예수 믿고 천당에 갈래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게 선악과를 먹은 아담들이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는 모습이에요.

이처럼 인간들은 하나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 식으로 해석을 해 버려요.

죄인인 아담 식으로 해석하면 결국 모든 해석이 죄가 되어요.

왜? 그런가요?

이는 죄의 정보로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주는 정보로 해석하면 자기 주체 챙기기로 해석하여야 하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 말씀을 자기 행함으로 끌어당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행함으로 끌어당기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했으니까!

그래 내가 믿어야지 하면서 예! 제가 예수 믿겠습니다! 라고 나온단 말입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우리 예수 믿고 구원 받읍시다! 라고 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게 이 시대 교인들이 전도하는 모습이잖아요.

죄인은 이렇게 밖에 해석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죄가 자기 주체로부터 출발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행위로 끌어당겨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유대인들의 성경 해석법이었어요.

유대인들이 이런 해석법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어요.

그러니 이러한 해석법은 반드시 예수를 죽이게 되어 있어요.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다고 하지요.

이건 성경 해석을 성령께서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아담의 해석과 다르게 하세요.

 

어떻게 다른가 하면 아담은 성경 해석을 자기 가능성으로부터 출발을 하는데 반하여 성령은 인간의 불가능성을 고발하고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출발하게 하세요.

그러니까 아담은 말씀을 지킬 주체를 자기가 행사하는데 성령은 말씀을 지킬 주체는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말씀은 우리더러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의 행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을 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 하면 예수를 믿게 해서 하시겠다는 말씀이에요.

 

우리더러 예수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은 예수가 믿어지게 하여서 구원을 하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에요.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는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고 도리어 우리를 죄인으로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지 않았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예수를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의 말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어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가 믿어지는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믿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선물이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라는 선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 믿음을 자기 행위로 붙잡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봅시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있어요.

복음이 뭔가요?

예수님이 하신 일이에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대신 죽어 주셨잖아요.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셔서 자기 백성들이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이잖아요.

 

신앙이란?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들의 의식 구조는 자기 죄는 자기가 해결을 하여야 죄사함을 받는다는 해석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죄는 내가 해결하여야지 누가 대신 해결해 준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개운치가 않고 찜찜해요.

 

인간들은 자기에게서 경험이 된 것을 믿어요.

그러니 인간들이 말하는 믿음은 엄밀히 말해서 믿음이 아니고 자기 경험인 것입니다.

누가 내 대신 죄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예수님께서 하신 사건을 근거로 하세요.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셨어요.

예수 안에서 죄사함이 주어지고 천국에 갈 의(義)가 있다는 것을 믿어지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어떻게 믿어지게 하는가 하면 믿음을 주어서 믿어지게 하세요.

 

잘 보세요.

“믿음으로 ~ 믿음에” 이른다고 하지요.

두 믿음이 나오지요.

 

앞에서 말하는 “믿음으로”는 과정이고, 뒤에서 말하는 “믿음에”는 결과에요.

그러니까 앞에 나오는 “믿음으로”가 과정을 일으켜서 나중에 나오는 “믿음에” 라는 결과물을 도출해 내는 것입니다.

 

무슨 결과물인가 하면 예수를 믿는 결과물이에요.

이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결과물을 도출해 내는 데에는 우리의 실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앞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라는 과정에 의하여서 만들어 낸 것이 되겠지요.

 

그럼 내가 예수 믿은 겁니까?아니면 믿음으로가 믿게 한 것입니까?

믿음으로가 믿게 하였지요.

그럼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믿음으로가 일으킨 사건이지요.

 

그럼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자랑 할 수가 있나요?

없어요.

도리어 감사하여야 합니다.

나에게 믿음으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올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에요.

 

중요한 이야기이니까 다시 설명합니다.

앞에 나오는 “믿음으로”는 하나님이 자기백성들에게 주신 선물로서의 믿음이에요.

그리고 나중에 나오는 “믿음에”는 앞에서 말한 믿음으로가 일을 한 결과물로 나타나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걸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얻는다고 합니다.

마음으로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가능해요.

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에요.

이 믿음이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게 하세요.

그러니 우리가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을 한 것은 “믿음으로”가 일으킨 사건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 것은 내 고백이 아니고 믿음이 고백케 한 것이에요.

이 믿음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서 믿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그럼 하나님께서 왜? 믿음을 선물로 주었는가요?

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 하고자 예수라는 아들을 보냈는데 그 아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주셨어요.

 

하나님이 예수라는 아들을 보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하고 똑 같아요.

아무리 봐도 하나님 아들 같아 보이지 않아요.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빌리면 그는 연한 순 같이 아주 볼품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예수를 보고 야! 니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이라고 조롱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상식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면 우리와 다른 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마에서 레이저 광선이 나온다거나!

입에서 불이 나온다거나!

좌우지간 인간들에게 없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예수를 보니 그런게 전혀 없는 겁니다.

촌 사람이고 목수의 아들인 거에요.

그래서 아무도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고 따르고 있어요.

누군가 하면 제자들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면서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자 따르던 무리들이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라고 하면서 다 떠나갑니다.

 

이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도 갈래!

그러자 제자들이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하면서 안 떠나요.

 

어째서 떠나는 자가 있고 남는 자가 있나요?

이는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는 예수가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지게 하는 믿음을 선물로 주었기 때문이고 떠난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선물로 주시지 않아서에요.

그러니 제자들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 “믿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앞에 있는 믿음으로가 기관차처럼 예수를 믿도록 이끌어 준 겁니다.

그러자 그 “믿음으로”가 우리 마음속에서 예수가 믿어지게 하여서 예! 예수 당신은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라고 입으로 시인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이 우리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믿게 해 주어서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을 자랑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감사하는 것이지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원리를 모든 신앙에 적용하여야 합니다.

 

이걸 복음 아는 것으로 적용해 봅시다.

복음은 하늘에 속한 이야기에요.

하늘에 속한 것은 땅에 있는 자들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알아듣게 해 주어야지만 가능해요.

 

그럼 우리가 복음 아는 것이 우리 실력이 아니겠지요.

하나님께서 알려 주어서 깨달아진 것이잖아요.

그럼 복음 아는 것을 자랑 할 수가 있나요?

없겠지요.

자랑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하여야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요?

자랑하고 있지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잘난 척 하면서 교만을 떨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있잖아요.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 쪽에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배워서 알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랑하는 겁니다.

 

이건 신앙이 아니에요.

종교 생활하는 것이에요.

이 시대 복음 안다고 꼴값 떠는 인간들이 너무도 많아요.

 

마치 자기들만 복음 아는 것처럼 주접을 떨고 있잖아요.

이런 놈들은 전부 지식으로 아는 자들이에요.

지식은 반드시 자기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그 아는 것으로 으뜸이 되고 싶어하고 남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지 우리가 깨달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깨달아지게 하여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 개달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깨닫게 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은사로 복음을 받은 성도들에게서는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들이에요.

이런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안다고 하는 복음은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지식은 믿음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들은 그게 믿음인줄 착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복음을 가지고 반 복음적인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것인데 그들은 복음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게 죄인 줄 몰라요.

이는 모두가 뱀의 미혹에 결려 들어서 양심에 화인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 복음하면서 긍휼이 나오지 않고 남을 폄훼하는 악독을 품어 내는 것입니다.

 

항상 어느 시대고 자칭 믿음 좋다고 하는 자들이 예수의 원수 노릇을 했어요.

복음으로 복음을 가리는 짓을 했어요.

복음을 자랑한다는 것은 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법은 반드시 자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법을 지킨 자와 법을 어긴 자간에 차등(次等)이 생기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복음을 법으로 가지고 있는 자들은 복음 안다는 것으로 모르는 사람들과 차별성을 두어서 자기는 마치 다 아는 자처럼 남을 무시하고 교만을 떠는 것입니다.

긍휼이 나오지 않고 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무슨 말을 하느냐를 보지 말고 그나 무슨 짓을 하느냐를 보세요.

그럼 분별이 되어요.

 

복음을 은사로 받은 성도들은 절대로 복음 아는 것으로 남을 정죄 하거나 판단하지 않아요.

혼자 다 아는 척 자랑하지 않아요.

도리어 그 복음으로 남을 섬기고 봉사해요.

감사하면서 살아요.

이런 분들은 복음을 법으로 토해내지 않고 사랑으로 토해내요.

지식은 교만케 하고 은사는 사랑으로 덕으로 나타나요.

그러니 누가 복음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아니므로 잘 분별 하세요.

 

다시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우리 행위가 아니라는 것에 대하여 더 살펴봅시다.

 

구원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요?

죄인에게 주어지지요.

그리고 구원이 예수 안에서 주어진다고 하였으니 죄인과 예수는 한 셋트가 되어야겠지요.

 

죄인이 있는 곳에 예수가 오셨고!

죄인은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에 둘이 한 셋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가 없으면 구원도 없다는 말이 되어요.

 

맞아요.

예수가 없으면 구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구원이 주어지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바탕에서 출발을 해요.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이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하세요.

 

그러니 구원 속에는 우리의 조건이나 공로는 들어갈 틈이 없어요.

오직 예수님의 공로뿐이에요.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이 예수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은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를 가지고 하세요.

 

그러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는 말씀은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라는 말이에요.

“믿으라” 는 말 자체가 믿어야 하는 분을 보라는 것입니다.

믿으라는 말 속에는 우리의 행위가 없어요.

 

믿음의 반대말은 행위에요.

그러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는 말은 니 꼬라지를 보지 말고 예수만 보라는 말이에요.

우리의 행위에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님의 행위에서 나오지 우리 행위에서 나오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자기 공로로 구원을 하셨고!

지금도 구원을 하시고 계시며!

장차 구원을 하실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구원을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 3 시제(時制)로 말하고 있어요.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시고는 과거(過去)이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은 현재(現在)이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미래(未來)에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은 어느 시대고 계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은 어느 시대나 일을 하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예수님이 지금도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제 하신 일을 믿고!

현재 하시고 있는 것을 믿으며!

장차 다 이루실 것을 믿으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인고 하니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법에서 빼내는 일입니다.

이걸 지금 우리 안에서 하신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 안에서 죄에서 구원하고 법으로부터 빼내는 일을 하세요.

 

어제 육체로 오셨던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을 일으키셨고!

현재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어제 육체로 오셔서 일으키신 십자가 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이라는 것으로 믿어지게 하시는 일을 하시고 계시며!

장차 오실 예수님은 이렇게 예수를 믿는 자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고자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항상 어제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으로 계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신 일에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일이란? 예수님이 하신 사건이에요.

그럼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벌린 사건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증거가 있어야 해요.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이 내게 무슨 일을 하셨지! 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예수를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불신앙이란?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자기 조건이나 자기 행위로 믿음의 여부를 판단하는 사람은 불신자에요.

그러나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는 그 약속을 믿음으로 사는 자는 신자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진 것이 아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어요.

그러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義)는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의(義)를 주셨어요.

그래서 자기 백성들은 예수의 의(義)를 공짜로 얻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인정하고 사는 것을 예수를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참고적으로 말할게요.

여러분들이 신앙을 판단 할 때 항상 마귀 입장에서 판단해 보세요.

내가 만약에 마귀라고 하고 성도를 미혹한다고 하면 어떤 식으로 할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럼 우리의 신앙이 쉽게 분별이 될 것입니다.

 

마귀가 어떻게 역사 할까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식으로 역사를 하겠지요.

어떻게 거역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천국가게 하는 방식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할 것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천국에 누가 갑니까?

오늘 본문에서 증거 하듯이 “미리 아신 자”들이 갑니다.

 

“미리 아신 자”란? 창세전에 선택을 입은 자들이란 말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럼 누가 구원을 받느냐 하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받아요.

 

하나님은 창세전에 구원 받을 자들의 이름을 이미 정해 놓았어요.

그리고 그들을 생명책에 기록을 해 놓았어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생명책을 넘겨주었어요.

그리곤 아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여기 적혀 있는 자들을 하나라도 빠뜨리지 말고 다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미리 정해 놓은 자들을 찾으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는 누가 녹명(錄名)을 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시지요.

 

하나님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하실 때 우리가 녹명시켜 달라고 했나요?

아니지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했어요.

우린 그 때 없었어요.

 

이렇게 되면 구원이 우리의 조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요.

구원도 우리 행위와 상관이 없고 취소도 우리 행위와 상관이 없겠지요.

다른 말로 우리의 행위로 짤려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여야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다는 조건이 없었잖아요.

그렇다고 한다면 구원이 인간의 어떠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요.

예를 들어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거나 또는 나쁘게 살면 잘린다거나 하는 것이 없겠지요.

 

야곱과 에서를 보세요.

이들이 태어나서 어떤 삶을 사느냐와 상관이 없이 이미 엄마 뱃속에 잉태하기 전에 운명이 결정이 났었잖아요.

 

로마서 9장을 봅시다.

 

롬 9:10-13=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 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잘 보세요.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善)이나 악(惡)을 행하지 아니 한 때에 택하심으로 되었다고 하지요.

택하심으로 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한다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의 행위와 상관없이 사랑하고 미워하였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란? 행위와 상관없이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란 말이에요.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조건과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세리와 창기들 같은 죄인들이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우편 강도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자기 조건에서 찾은 자들이 있었지요.

그들이 누구인가요?

이름하여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 지킴이라는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 백성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독사 새끼라고 하였어요.

 

이렇게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신자다 아니다 를 판단하는 사실 하나로서 그들의 신앙이 은혜에 속한 것이 아니고 행위에 속한 것임을 증명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이 시대 마귀가 어떤 식으로 일을 할까요?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의(義)를 붙잡도록 역사를 하겠지요.

인간의 행위를 의(義)라고 가르치겠지요.

 

그럼 이 시대 바리새인들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있어요.

 

그 당시 누가 신앙 있다고 큰 소리 쳤나요?

바리새인들이었나요?

세리와 창기들이었나요?

당연히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의(義)가 많은 사람들이 믿음 있는 것으로 행세를 하고, 반대로 세리와 창기들처럼 자기 의(義)가 없어서 예수님의 의(義)를 구하는 사람들은 믿음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의(義)는 인간의 상식과 역설적으로 나타났어요.

 

신앙은 의(義) 싸움이에요.

율법으로 난 의(義)냐!

아니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난 의(義)냐!

누구 의(義)를 가지고 있느냐 에요.

 

천국에 가는 의(義)는 우리가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천국에는 우리 의(義)는 통용되지 않아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천국은 인간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나라에서는 인간의 의(義)가 필요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 의(義)가 필요해요.

하나님 의(義)는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아요.

천국이 만약에 인간의 나라이면 인간들이 요구하는 의(義)가 필요합니다.

인간들이 요구하는 의(義)는 인간의 착한 행실들이에요.

그럼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지킴으로 얻어진 의(義)를 자랑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천국에서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義)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義)는 예수님 안에만 있어요.

 

그러므로 천국에는 누가 가느냐 하면 예수님의 의(義)를 가진 성도들만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義)는 인간 쪽에서 생산 할 수가 없어요.

이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에게 공짜로 주어져요.

성령이 오시면 이 사실이 믿어져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자기 안에 예수님의 의(義)가 있다는 것이 믿어져요.

그래서 그 예수의 의(義)로 사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예수의 의(義)를 내어 놓아요.

 

예수의 의(義)를 가진 성도는 자기 행위로 인하여 믿음이 있네 없네 라고 흔들리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신 그 믿음으로 산단 말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이 있다고 하지요.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아들에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선택을 입은 자들이에요.

그래서 아들에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미리 정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지요.

또한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들을 잘 음미해 보세요.

 

미리 정하신 것은 언제 입니까?

과거(過去)이지요.

 

그리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은 언제입니까?

현재(現在)이지요.

 

그리고 영화롭게 하셨다고 하는데 영화로움은 언제 주어지는 것입니까?

미래(未來)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영화롭게 되는 것은 분명히 미래에 일어날 사건인데 바울은 영화롭게 하셨다! 라고 과거 시제로 말하고 있어요.

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이미 완료가 된 과거 시제로 이야기 할까요.

이는 구원이란? 이미 창세전에 예정이 된 묵시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는 완료의 세계에요.

 

그런데 묵시에서 완료가 된 것이 역사에 오면 미완료로 나타나요.

왜? 그런가 하면 역사 자체가 시작과 끝이 있는 미완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묵시에 속한 일들을 드러내려고 잠시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역사 속에는 과거(過去)와 현재(現在)와 미래(未來)로 흘러가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표현을 그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이는 역사는 미완료의 세계로서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에요.

흐른다는 말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흐름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3 시제(時制)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구원을 이루라고 하고!

구원을 이룰 것이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전에 구원을 받았어요.

그리고 현재 받고 있어요.

또한 장차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한 사건 속에 가두어서 말해요.

구원을 3 시제로 말한다고 해서 불완전한 것이 아니에요.

미완료가 아니고 완료 된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구원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의 사건 속에 가두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미리 정한 자들을 현재 속에서 구원 하시고 현재 속에서 구원이 된 자들을 장차에 구원을 주시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이미 창세전에 완료가 된 것입니다.

완료(完了)가 된 것을 미완료(未完了)의 세계인 역사 속에서 주어진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는 구원이 이루어가는 형식을 띄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이게 이해되지 않으면 성화주의자들의 농간에 넘어지게 되어요.

성화주의자들은 구원을 역사적으로 미완료로 이해하기 때문에 자꾸만 우리가 이루어가야 하는 것으로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따위로 믿어서 구원을 받겠느냐고 공갈을 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그 따위로 해서 얻어지는 구원은 없어요.

구원은 그 따위와 상관없이 이미 창세전에 완료된 것이에요.

그러므로 그 따위와 상관없이 우리의 구원은 부족하거나 미흡함이 없이 완료된 것이고 완전하고 흔들릴 수가 없이 완벽하며 안전한 것입니다.

성화주의자들처럼 그 따위로 하면 짤리는 구원은 없으니 안심하고 사세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완료된 구원으로 살아요.

 

창세전에 구원을 받은 성도는 역사 속에서도 완료된 구원관으로 살아요.

왜? 그런가 하면 구원이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받은 것은 곧 완성품을 받은 것과 같아요.

우리의 행함과 상관이 없기 때문에 완료와 완성된 것으로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가진 성도는 현재 속에서 완성된 미래로 살아요.

 

이게 참 어려운 말인데!

쉽게 설명할게요.

 

보이는 이 역사는 어디서 나왔나요?

보이지 않는 묵시로부터 나왔지요.

묵시는 완성의 세계에요.

그래서 천국을 안식하는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식이란? 모든 일을 마치고 쉬는 것을 말해요.

일을 마쳤다는 말은 완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 끝이 났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는 미완성의 세계에요.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은 미완료란 말입니다.

미완료는 쉼이 없어요.

안식 할 수가 없어요.

아직까지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전 이야기를 역사 속에 풀어 놓았어요.

 

창세전 이야기란? 묵시로서 완성된 것이에요.

완성된 것을 미완성인 역사 속에 풀어 놓았어요.

이렇게 되면 완성된 것을 소유한 성도들은 미완성인 역사 속에서 구원을 어떻게 이해를 할까요?

완성 된 것으로 이해하여야겠지요.

 

그런데 마귀가 자꾸만 우리 안에서 장난을 쳐요.

어떻게 장난을 치는가 하면 묵시를 역사로 읽어내게 한단 말이에요.

즉 완료이고 완성품으로 주어진 구원을 미완료로 불완전한 것으로 이해하게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야! 이거 이러다가 짤리는 것 아니야! 라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육신이 역사에 속하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잘 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넘어지면 구원을 즐거움을 상실해요.

 

그럼 하나님이 두고 보실 수가 없잖아요.

자기 백성들이 마귀에게 농락당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성령을 보내서 도우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 들을 도우시고 계시는 거에요.

 

이러한 일을 다윗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시편 51편을 봅시다.

 

시 51:1-19=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죄가 발각 당하고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고 난 후 자신의 심경을 토설하는 내용이에요.

다윗은 범죄하고 두려움에 떨었어요.

 

죄가 계속하여서 자기 안에서 참소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죄를 고발하고 그 죄를 어떻게 처리 하셨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다윗은 자기 죄 때문에 죄가 없는 우리야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우리야는 다윗의 죄 때문에 대신 죽은 희생제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우리야의 죽음을 주께서 뼈를 겪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주께서 꺾으신 뼈로 나를 즐겁게 해 달라” 고 하잖아요.

이는 하나님이 다윗의 죄 때문에 죄 없는 우리야를 죽였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자기가 비록 죄를 지어 죽어야 할 놈이지만 우리야의 죽음을 보아서라도 용서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논리는 이러해요.

다윗이 우리야를 자기 죄를 감추고자 죽었잖아요.

그러니 우리야는 다윗의 죄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罰)한다면 우리야의 죽음은 개 죽음이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야의 죽음을 봐서라도 자기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놈입니까?

그런데 이게 믿음이에요.

내가 다윗이고 우리야를 예수님이라고 대입해서 보세요.

그럼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은 것이 되지요.

 

그럼 우리도 다윗처럼 내 죄 때문에 죽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아서라도 용서해 주세요! 라고 하여야 합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지금 나는 죄 없이 희생당한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이고 신앙이에요.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 안에 죄 지었다는 두려움으로 가득했어요.

이 두려움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다윗의 행위를 가지고 두려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법을 가지고 다윗의 행실을 참소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보니 괜히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자기는 원래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 겁니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여서 죄인이 아니고 그런 짓을 안해도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모친이 죄악 중에서 잉태 하였고 자신은 죄 아래서 태어난 태생적인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인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믿음인가요!

 

그리고 다윗은 자기 안에 마귀가 자기 행위를 가지고 송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합니다.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달라고 합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는 것은 곧 역설적으로 마귀가 다윗에게 야! 임마! 지금 너 그 따위로 해서 구원에서 짤린다고 송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마귀의 송사를 막을 수 있는 성령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신이 마귀의 참소를 막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짤릴 구원을 주신 적이 없어요.

완전한 구원을 주었어요.

그런데 마귀가 우리의 행실을 근거로 구원을 미완료로 만든단 말입니다.

여기에 걸려들면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되어요.

다윗이 지금 여기에 걸려 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다윗이 죄를 지을 수 없는 한계성을 이야기 해 줍니다.

너는 지금까지 너의 행실을 근거로 한 죄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너는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나 안 하나 죄인이라는 겁니다.

이건 다윗의 죄관을 송두리째 바꿔주는 사건이에요.

 

다윗은 지금까지 자기 행실에서 죄다 아니다를 따지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범죄하지 않았을 때는 두려워하지 않다가도 범죄하고 나자 두려움이 엄습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다윗 안에서 선악의 법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하나님은 지금 그 법을 깨트리는 일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그 법을 누가 깨트려 주시는가 하면 성령이 깨트려 주세요.

그래서 다윗은 그 성신(聖神)을 자기 안에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자기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참소하는 마귀의 송사를 우리야의 대신 죽으심을 근거로 막아 달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오늘 본문 이야기와 같아요.

아주 놀랍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떤 놈이 너희를 송사하느냐 라고 하지요.

 

이는 마귀가 자꾸만 우리 몸을 근거로 장난을 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마귀의 농간에 넘어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마귀가 그 무슨 이야기를 하여도 속지 말라는 겁니다.

 

마귀의 미혹에 넘어지면 묵시적 구원을 역사적으로 이해를 해요.

그럼 하나님이 창세전에 이미 완성된 구원을 주었어도 미완성으로 이해하게 되어요.

완료된 구원을 미완료로 이해하게 된단 말입니다.

자기 행위로 말이에요.

쉬운 말로 어떤 잘못된 일을 하게 되면 나 이러다가 짤리는 것이 아닌가? 라고 고민하게 된단 말이에요.

 

우리가 이런 딜레마에 언제 빠집니까?

자기 행실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 때 빠지잖아요.

이는 마귀가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 안에 심어 놓은 법이 있어요.

 

우린 법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행실을 하게 되면 우리 안에 정한 법이 있는데 그 법에 충족하게 살지 못할 때 우리는 여지없이 마귀의 참소를 받게 되어 있어요.

우리 양심이 우리를 참소한단 말입니다.

 

쉬운 말로 성도가 어떤 나쁜 짓을 했다고 합시다.

그럼 마귀가 야! 너~ 그러고도 성도라고 할 수가 있느냐! 라고 참소 할 것이 아닙니까?

마귀가 “너 그러고도 성도라 할 수가 있느냐?” 라는 말 속에는 이미 성도다움을 정형화 된 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에요.

결국 성도다움을 어떤 행위 차원으로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육의 한계에요.

 

이 때 성령이 야 임마! 너 왜? 예수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안 보고 자꾸만 네 꼬라지를 보는데! 라고 뒤통수를 때려요.

십자가가 네 눈 앞에 밝히 보이지 않느냐! 라고 책망을 해요.

그럼 그래 맞아!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이지!

내 구원은 이미 예수 안에서 완성이 된 것이지! 라고 하면서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묵시로 읽어내게 하세요.

묵시란? 완성이라고 했어요.

 

마귀는 우리의 시선을 역사에 붙잡아 두고자 하는데 성령은 우리를 묵시로 끌고 가요.

그래서 성령이 우리의 꼬라지와 상관없이 우리의 구원을 예수 안에서 이미 완성된 것으로 믿어지게 하여서 믿음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자기 꼬라지와 상관없이 구원을 장차 이루는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이 완성이 된 자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역사에서 묵시로 산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믿음으로 산다고 해요.

또 다른 말로는 영으로 산다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연약함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왜? 성령이 우리 안에서 도우시는가 하면 우리 몸은 역사에 속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역사로 읽어내고자 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하나님의 일을 역사로 읽지 말고 묵시로 읽으라고 도우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움으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묵시적인 관점으로 이해하고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아담에게 주신 돕는 배필 이야기를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2장을 봅시다.

 

창 2:18-23=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아담은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예수님을 표상(表象)하고도 있지만 우리 인간을 대표(代表)하고 있기도 해요.

그러니 아담을 이해 할 때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인간들로 이해합니다.

그럼 아담이 누구인가 하면 우리들이 되겠지요.

그럼 우리 이야기로 풀어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고 하십니다.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는 말은 곧 흙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은 영생하는 자가 아니고 영생하여야 하는 자로서 지음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아담 속에 영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도울 자를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갓 지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이 짐승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그 짐승들을 아담 앞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러자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아담은 짐승과 다른 존재란 말입니다.

아담이 짐승들의 속성들을 알기 때문에 이름을 지어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짐승 속에서 돕는 배필을 찾지 못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20절에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라는 말은 “아담이 짐승 속에서 돕는 배필을 찾지 못하였으므로” 라는 말과 같아요.

그러니까 짐승 속에는 아담을 영생으로 나아가게 하는 돕는 배필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번에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는 아담 속에서 여자를 빼냅니다.

그리고는 앞서서 짐승을 만들고 아담 앞으로 데리고 왔듯이 이번에는 여자를 아담 앞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담의 반응이 종전에 짐승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릅니다.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아담을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선악과를 먹게 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럼 묻습니다.

여자가 아담을 도운 겁니까?

아니지요.

도리어 해를 끼친 것이지요.

여자는 아담을 뒤에서 끌어당겨서 넘어지게 한 꼴이 되고 말았어요.

 

알다시피 아담은 영생 하여야 하는 자로서 지음을 받았어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고자 한 것도 아담이 영생으로 나아가는 길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담에게 돕는 배필은 당연하게 영생에 대하여 아는 자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여자는 영생에 대하여 몰라요.

여자는 기껏해야 아담으로부터 들어서 영생에 대하여 알 뿐입니다.

그러면 여자는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없어요.

 

이렇게 이해해 보세요.

돕는 배필이란? 도와주는 자입니다.

 

그럼 아담이 어디로 지향하느냐에 따라서 돕는 배필도 달라지겠지요.

 

만약에 아담이 흙에 머물고 짐승의 세계로 나아간다고 한다면 짐승이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흙의 세계는 흙으로 지음을 받은 짐승들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담이 “네페쉬 하야”인 “생령(生靈)”의 수준에 머물고자 한다면 여자가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아담은 흙에 머물거나 네페쉬 하야인 생령의 수준으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담은 생명과를 먹고 네페쉬 하야인 생령의 수준에서 벗어나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처럼 영생의 세계로 나아갈 자로 지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는 데에는 짐승이나 여자는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없어요.

아담은 짐승을 통하여서는 이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돕는 배필을 주겠다고 하시고서는 짐승을 만들어서 아담 앞으로 데리고 오자 그들 속에서 돕는 배필을 찾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여자를 붙잡고 맙니다.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이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없어요.

여자는 아담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기껏해야 아담의 수준이에요.

 

아담이 아담의 길에 머물고자 한다면 여자가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있어요.

둘은 유유상종(類類相從)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같이 흙에 생명으로 세~세~세 하면서 놀면 되어요.

그런데 그만 우리의 아담은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이함으로서 흙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럼 아담을 진정으로 영생의 세계로 이끌 돕는 배필은 누구인가요?

이는 영생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이에요.

영생의 세계에 계신 하나님만이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준비한 아담의 돕는 배필은 하나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아담을 영생으로 나아가는 사람으로 지었어요.

그럼 아담을 영생하는 자로 도울 수 있는 분은 영생의 세계에 속한 분이라야만 합니다.

영생에 속한 분은 영생하시는 하나님 밖에 없어요.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인가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에요.

이 세 분 중에서 아담을 도울 수 있는 분은 누구인가요?

이는 성도들 속으로 보내심을 입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하셨지요.

보혜사란? 돕는 자에요.

그러니까 돕는 배필이나 보혜사나 같은 말이에요.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에요.

 

그러니 아담에게 주시고자 하신 돕는 배필도 신약 식으로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신약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는 말씀과 같아요.

그러므로 아담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돕는 배필은 곧 성령 하나님이신 겁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영생하여야 하는 자로서 지었지요.

그래서 아담에게 영생하는 길을 알려 줍니다.

어떻게 영생하는가요?

생명과를 먹음으로서 영생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고 알려 주었어요.

생명과 속에 영생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말해요.

 

요한복음 1장 4절을 보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에덴동산에서의 생명과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람은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시는 아버지 앞으로 나아오기를 바랐어요.

그 생명과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에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들기로 작정을 하였어요.

즉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의 생명을 주어서 아들로 만들기로 했어요.

아담도 이러한 창세전 언약을 바탕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예수를 믿고 천국으로 오게 하였단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의(義)로 아버지께 나아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만 자기 의(義)에 사로잡히고만 것입니다.

 

아담이 여자를 보고 한 눈에 빠진 것은 여자는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나 여자는 한 통속이에요.

그러니 아담이 여자에게 빠져 든 것은 자기 자신에게 빠져든 것과 같아요.

즉 자기 의(義)에 취한 것이에요.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의 의(義)를 입고 아버지께 나아가야 함에도 자기 의(義)에 사로잡혀서 예수의 의(義)를 거부하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두 과실이 있어요.

먹으면 죽는 과실과 먹으면 사는 과실이 있어요.

과실을 의(義)라고 생각하세요.

 

붙잡으면 죽을 의(義)는 율법으로 난 의(義)이고,

붙잡으면 사는 의(義)는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의(義)에요.

뱀은 선악과와 같이 먹으면 죽을 의인 율법으로 난 의(義)를 붙잡게 하고,

성령은 돕는 배필로서 먹으면 영생하는 예수님의 의(義)를 붙잡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준비한 돕는 배필은 성령이에요.

그런데 아담이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아하자 하나님은 성령을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자 부득불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냅니다.

그리곤 흙을 먹고 살라고 합니다.

 

아담은 여자로 인하여 흙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아담은 흙에서 유리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흙에서 유리하는 아담들 속에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자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구원을 해 내야 할 자기 백성들이 있단 말입니다.

 

이들을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흙에 매여 사는 자들을 하늘로 끌어 당겨야 한단 말입니다.

흙에 생명으로 사는 자들에게 하늘에 생명을 주어서 하늘로 불러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자기 백성들의 구원자로 보냅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들이 예수가 자신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몰라요.

이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돕는 배필로 보내십니다.

성령이 성도 안에서 예수님 앞으로 인도 하세요.

그리하여 예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여서 영생하는 자로 만들어서 천국으로 이끄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뭐라고 하나요?보혜사라고 하셨지요.

보혜사란 돕는 분이란 말이에요.

그리니까 성령이 우리를 돕는 배필이란 말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 성령이 우리의 돕는 배필이 되어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돕는가요?

그것은 마귀의 참소를 예수의 피로서 이기며 살도록 도우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나를 송사하거든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인데! 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송사 합니까?

마귀가 해요.

마귀가 무엇으로 송사 합니까?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우리 행실을 참소해요.

 

마귀는 하나님 말씀을 들고 와서 야! 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어! 안 살았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가 어떻게 신자라고 할 수가 있느냐고 송사해요.

율법에 의(義)를 붙잡도록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걸려들면 넘어져요.

예수의 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잊고 자기 꼬라지를 살피게 되어요.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러한 마귀의 송사에 넘어지지 않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누가 너를 송사하고 정죄하더라도 예수의 피로 넉넉히 이기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심을 깨닫게 하세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죄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성령께서 마귀의 참소를 막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죄로 인하여 넘어 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들입니다. 사단으로부터 늘 참소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담대 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고 성령이 도우시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믿음이 연약하여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마귀의 그 어떤 송사로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 없이 자유 할수 있게 하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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