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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51강. 조상의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창 27:41-28:9)

by coroa 2021. 6. 23.

 

 

[51강. 조상의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창 27:41-28:9)]

-.정낙원 목사

 

오늘은 교회력에 따라서 추수감사절로 드립니다.

추수란? 농사를 다 짓고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속에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절기를 지킴이란 의미가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절기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절기는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는 더 이상 절기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력을 통하여서 지키는 절기들 속에는 복음적인 요소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절기를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의 명분론에 매이지 말고 절기가 담고 있는 복음적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키는 것도 유익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력에 따라서 지키는 추수 감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수감사절이 담고 있는 의미를 복음적으로 이해하는 기회로 삼으면 됩니다.

명분론에 빠져서 신앙생활의 모든 형식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어리석음입니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형식도 귀한 것입니다.

복음을 잘못 이해하는 자들은 명분론에 빠져 교회에 모이는 것도 폐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는 악한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이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추수한 이야기를 살펴보고 갑시다.

예수님은 추수꾼입니다.

무엇을 추수하느냐 하면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뽑아내는 추수를 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육체로 오셔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의와 생명으로 빼내시는 추수를 하였고,

현재는, 성령으로 오셔서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주는 추수를 하고 있습니다.

장차는, 재림하셔서 이 세상으로부터 천국으로 옮겨주는 추수를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서 구원 하십니다.

이걸 추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추수입니다.



어떻게 추수를 하는지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로 가십니다.

왜 가셨나요?

자기 백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구냐? 수가성 여자입니다.

남편을 여섯이나 두고 살았던 여자입니다.

그런 여자가 정오에 들에 있는 우물가로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 우물은 야곱의 우물입니다.



예수님이 여자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제자들은 동네로 가서 음식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예수님에게 내어 놓으면서 잡수시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나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고 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이 수군거리면서 “누가 예수님에게 양식을 가져다주었는가?” 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먹을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예수님은 수가성 여자를 구원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먹을 양식은 다른 것이 아니고 저 수가성 여인과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라 밭에 곡식들이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곡식이 희어졌다는 것은 다 익었다는 말입니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추수하러 오셨습니다.

자기백성들을 이 땅에서 구원하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 성경적인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심은 것을 제자들로 하여금 추수하라고 하셨습니다.



추수란? 곡식을 밭에서 뽑아내서 다른 곡간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의와 생명으로 옮겨 주러 오셨습니다.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을 추수하는 내용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야곱이 집을 떠나 자기 아내를 얻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야곱이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서 자기 아내로 삼았듯이 예수님이 지금 그 야곱의 우물가에서 수가성 여인을 만나서 구원을 하고 계십니다.



영적으로 야곱이 아내를 얻은 것이나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을 구원한 것이나 동일합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남편으로 교회를 신부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야곱이 장자권의 축복을 받고 어머니의 고향에서 아내를 맞이하는 것 속에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속사가 담겨져 있음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 나자 에서가 분노하여서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에서는 자기가 받아야 하는 장자의 축복을 야곱이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고 분노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네 이놈 아버지가 죽기만 해봐라 내가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모습을 리브가가 보았습니다.

리브가가 그것을 알고 야곱에게 자신의 고향인 하란으로 가서 에서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거하라고 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은 에서의 분노로 도망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실상은 리브가와 이삭은 에서가 이방인인 헷 족속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 때문에 속이 상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와 이삭은 언약 가문의 실질적 장자가 된 야곱은 이방 여자와 혼인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어머니의 고향 친척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리브가의 고향인 하란으로 가서 외삼촌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야곱은 아내를 찾으러 집을 떠나 온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아버지 집을 떠나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신부감을 구하고 하늘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의 신부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고 하니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들입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신부를 얻고 귀향하는 것이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자기 신부들을 구원하여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나 동일합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신부를 얻고자 20년 동안 종살이 하였듯이,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자기 신부인 성도들을 구원하고자 아버지의 명을 받드는 종으로 살다가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충실하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종으로 충성하다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온 세상의 영적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12 아들을 낳고 귀향을 한 것처럼,

예수님도 이 땅에 흩어져 있던 자기 백성들을 다 구원해 가지고 하늘나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야곱이 이방 여인을 아내로 얻지 않고 어미의 고향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구원해 가신 것과 같습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리브가의 고향의 여자와 같은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에서가 헷 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을 싫어하는 것은 그 여자는 비언약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이삭의 가문은 언약의 가문입니다.

그럼 이삭의 가문을 이어갈 장자는 당연히 비언약에 속한 이방여인과 결혼을 하면 안 됩니다.

이건 언약을 훼손하는 타락의 행위입니다.



이건 노아 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자기 아내로 맞이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보시고 죄악이 관영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었으면 하나님께서 사람 지음을 한탄하셨다고 하면서 홍수로 쓸어버리겠다고 하셨겠습니까?



이삭이 지금 에서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을 보고서 노아 시대 하나님이 한탄한 것과 같은 탄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서는 언약 가문의 후손으로서 하지 말아야 하는 짓을 하였습니다.

이게 바로 에서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에서는 스스로 나는 비 언약 백성입니다 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에서의 행동을 보면 이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것으로 나타났고,

둘째는, 이방 여자와 결혼 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셋째는, 들 사람이 되어서 칼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과 리브가는 장자의 복을 받은 야곱에게 너는 이 땅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지 말고 어머니의 고향인 조상의 땅에 가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합니다



조상의 땅이란? 아브라함이 있던 곳입니다.

리브가와 이삭은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구체적으로 야곱의 아내가 될 사람의 가문을 지목해 주었습니다.

밧단아람에 가면 브두엘의 소생인 라반이 있는데 그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생명책을 주면서 이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만 찾아서 구원을 해 내신 것입니다.

야곱은 장차 오실 메시아인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예표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자기 신부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신부가 될 사람은 이미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사람은 다 예수를 믿더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사람만 빋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은 아버지가 며느리 감을 미리 정해 놓습니다.

아들이 아내를 아버지가 정해 놓았어요.

이건 창세전 언약과 같아요.



아들은 아버지가 정해준 여자를 찾아가서 값을 주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렇게 구원을 하신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도 그렇게 결혼을 시켰고,

이삭도 야곱을 그렇게 결혼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을 그렇게 신부를 찾으러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 속에는 성도의 구원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만 받아요.

오직 창세전에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사람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만 예수가 믿어지도록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만이 믿습니다.

구원은 내가 받고 싶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니에요.

또한 받고 싶지 않다고 해서 받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십니다.



구원 받기로 작정 된 사람은 하나님이 예수를 믿도록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기어코 예수를 믿게 하십니다.

반대로 구원 받기로 작정 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가 믿어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 와서도 예수를 믿지 않아요.



이건 마치 출애굽 한 백성들 중에 섞여 있는 고라 일당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에서의 계통인 고라 일당처럼 육에 속한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선물이고 구원은 은혜에요.

그래서 구원은 우리의 행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사람만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을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창세전에 기록한 어린양의 생명책을 들고 오셨어요.

책에 녹명된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찾아가서 구원을 해내십니다.

자기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잃은 양 비유에서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가듯이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 갑니다.

양은 목자의 것이었어요.

그런데 잠시 잃어버려진 모습으로 있는 겁니다.

이에 목자가 자기 것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기어코 찾아서 어깨에 둘러메고 집으로 가서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 왔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이게 탕자 비유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창세전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로서 예수님의 것이었어요.

원래 예수의 것이었는데 잠시 이 세상에 버려진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 버려진 잃은 양들을 찾아서 하늘나라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에요.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이 아니에요.

오직 예수님의 열심과 노력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자랑 할 수가 없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아는 성도는 죽도록 충성하게 되어 있어요.

목숨 바쳐서 믿음을 지켜내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삶을 통하여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할 일들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또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 속에는 메시야의 그림도 있고, 성도의 그림도 동시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성경을 볼 때 이중 계시로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언약을 이루어가는 주체자로 보았을 때에는 메시아적 기능을 하는 예수님을 상징해요.

하지만 야곱이 언약을 받은 자 입장으로 본다면 구원을 받은 성도의 입장에 되는 것입니다.



야곱 속에 두 가지 영적 계시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그래요.

모세도 그렇고 다윗도 그래요.

구약의 지도자들 속에는 모두가 이중계시가 담겨져 있어요.



일차적(一次的)으로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 조상의 땅으로 아내를 맞이하러 가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자기 신부를 찾으러 온 것과 같다는 것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이차적(二次的)으로 야곱을 가지고 우리의 이야기로 적용해야 합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자마자 돌아오는 것이 집에서 쫓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죄 아래서 태어난 우리가 있습니다.

이 때는 우리는 마귀 아래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심을 입었습니다.

이게 일차적인 구원입니다.

이것은 육체로 오신 예수님이 하셨어요.

이제 이차적인 구원을 받아야 해요.

이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둘이란 말이 아니고 구원의 이러한 모습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로부터 빼내 주시는 구원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하셨습니다.

율법으로부터 빼내시는 구원은 성령으로 오셔서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율법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율법이 우리의 아비 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서 종살이 하였어요.

그런데 때가 되어서 은혜 아래로 빼내심을 입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서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집에서 쫓겨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로부터 빼내심을 입으면 소속이 바뀝니다.

땅에서 하늘로 바뀝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바뀌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소속이 바뀌면 반드시 기존의 집으로부터 쫓겨남을 당하게 됩니다.



이걸 베드로전서에서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고 하였습니다.

건축자들로부터 버려진 돌의 1호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오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율법으로 신앙의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희년인 은혜의 해를 선포합니다.

이는 율법에서 자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은혜를 전하자 율법주의자들이 자기들 신앙과 다르다는 의미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게 건축자들로부터 버려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나요?

이는 자기들 신앙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집을 짓고 있는데 예수님이 은혜를 말한단 말이에요.

율법과 은혜는 상극이에요.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이 은혜를 전하는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이걸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건축자들의 버린 1호 돌이 되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하늘나라 성전을 짓는데 모퉁이 돌로 세웠어요.

모퉁이 돌이란? 머릿돌이기도 하고 기준의 돌이에요.



학교 운동장에 학생들이 쭉 서서 있는데 기준이 있습니다.

기준을 중심으로 해서 종대와 횡대로 서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같은 자들을 가지고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도 예수님처럼 버림당하게 되겠지요.

그럼 하나님이 그들을 가지고 예수님 옆에 벽돌로 쌓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을 봅시다.



엡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고 하지요.

사도와 선지자들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와 선지자들을 예수그리스도의 모퉁이 돌에 붙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으로 세워진 성도들도 사도들과 선지자들처럼 예수를 증거하다가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전이란? 죄인이 흠 없는 제물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율법으로 세워진 성막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율법 아래서 드려지는 것은 모형이에요.

율법은 예수그리스도를 겨냥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성막에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를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어요.

예수님이 짐승처럼 죽어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라는 희생 제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단번에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1-10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하지요.

그림자란? 원형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죄를 없애주는 것이 아니고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제사를 받지 않아요.

사람의 제사를 받아요.

이게 창세전에 언약한 것이에요.



창세전에 예수의 피로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주신다고 언약을 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쓰인 대로 한 몸이 왔습니다” 라고 합니다.

두루마리 책이란 창세전 언약을 말합니다.



첫 것을 폐함을 둘째 것을 세우고자 함이라고 하지요.

첫 것은 율법에 속한 짐승의 제사에요.

둘째 것은 은혜에 속한 예수님의 제사에요.

그래서 짐승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옛 언약이라고 하고,

예수님의 몸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 언약으로 구원을 하세요.

새 언약에 속한 자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세요.

이건 첫 번째 돌 판이 깨어지고, 두 번째 돌 판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께서 자기 몸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셨는데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가지고 하나님이 거하는 하늘 성전의 모퉁이 돌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제 수많은 성전의 벽돌들이 나타납니다.

이들이 바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성전으로 지어질 하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버림이 있어요.



첫째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짐이고,

둘째는 율법으로부터의 버려짐입니다.



먼저 세상으로부터 버려짐을 살펴봅시다.

이 세상의 주인은 뱀의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은 뱀에게 이 땅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뱀은 이 땅에 속한 자들을 이 땅에 것으로 붙잡아 두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 하늘에 속한 자들이 나타나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럼 떡으로 사는 자들이 싫어해요.

쉬운 말로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고 사는 자들에게 이 세상은 잠시 후에 멸망당할 것이라고 하면 재수 없다고 하면서 핍박을 해요.

그래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과 하나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돌림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따돌림을 당하더라도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를 말해주어야 합니다.

사람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럼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당한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자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세상의 가치로 살지 않고 하늘에 가치로 사는 자들이 모인 곳이에요.

물질적 가치로 살지 않고 언약의 가치로 사는 자들이 모인 것이 교회에요.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곳이 아니에요.

세상과 다름을 보여주는 곳이에요.

교회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는 다릅니다.



선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가진 선악의 기준이 있고,

교회가 가진 선악의 기준이 있습니다.

이 둘은 안 맞아요.



세상은 인간들에게 유익을 주느냐 안 주느냐의 가치 기준으로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만,

교회는 언약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분합니다.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 로 구분을 해요.

인간의 행함의 법이 아니고 믿음의 법으로 판단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에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하듯이, 이 세상에서 살려면 이 세상이 정한 선악의 법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이 세상의 법은 무시하고 내 맘대로 살아야지 하는 것은 아니에요.



신자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어요.

세상에 속하여 있으면서도 하늘의 가치로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성도의 정체성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가 오해 받지 않기 위하여 세상에서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가 아닙니다.

의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세상의 선을 따르되 그것이 하나님 앞에는 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선인 예수의 선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주 앞에 나올 때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주 앞에 옵니다” 라고 하여야 합니다.

늘 예수님의 피 공로를 앞세우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행함으로 인하여 정죄당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막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막 살면 하나님이 욕을 먹어요.

예수가 욕을 먹어요.

예수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착하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야곱을 자기 조상의 땅으로 가서 신부를 찾도록 합니다.

조상의 땅이 어디인가 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곳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자기 아내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듯이 불러내러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빼내 오듯이 야곱은 자기 아내를 거기서 빼내오려고 가는 것입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너의 근원을 찾아가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의 근원이 바로 아브라함이라는 것입니다.

이삭의 집안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집안이에요.

이삭은 지금 야곱에게 그 언약의 출처를 찾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밖에 없는 것은 창세전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구현된 곳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존재케 하는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어머니와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 것처럼 물과 피를 쏟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에 본토친척 아비 집에서 빼 내시지요.

빼내심을 입었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태어난 곳에서 빼냄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부터 빼내신 것입니다.

이 법칙을 야곱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야곱이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는 것은 본토친척 아비 집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장자의 복을 받자마자 야곱을 아버지 집에서 빼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삭의 집은 야곱의 떠나야 할 본토 친척 아비 집이 되는 겁니다.

이삭은 야곱이 버려야 하는 옛 아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이삭이라는 아비 집을 떠나 광야에 나오니까 하나님이 참 아버지로 찾아 오셔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장자로서의 복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나서 이제는 자기 가정을 꾸려야 합니다.

야곱이 꾸려야 하는 가정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세워지는 가정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조상의 땅으로 가서 아내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왜 조상의 땅으로 가는가요?

조상이란? 자기를 존재케 하는 근원입니다.

조상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라는 것은 부부란 한 몸에서 나온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상의 땅에서 삼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혼 속에는 구원이 담겨져 있어요.

구원이 뭐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결혼이에요.



결혼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최초의 구원 사건을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여 주셨어요.

아담과 하와가 결혼하는 것은 구원을 예표 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구원 받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과 혼인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은 자기 근원 찾아가는 것이에요.

자기가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최초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아담만 만들었어요.

아담 속에서 하와를 빼냅니다.

그리곤 아담 안에서 나온 하와를 하나님이 아담에게 데리고 갑니다.

이 때 아담이 하와를 보고서 “이는 내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라고 합니다.



이 말은 너는 내 몸에서 나온 자라는 뜻입니다.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게 결혼입니다.



아담은 예수를 예표합니다.

하와는 성도를 예표하구요.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성도를 끄집어냈어요.

그리곤 하나님이 성도를 예수님 앞으로 끌고 갑니다.

그럼 예수님은 성도를 자기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이게 구원이고 결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주로 인하고 주께로 돌아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을 우리라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았어요.

그리고 예수에게로 돌아가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몸에서 나온 자들을 찾으러 오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에게서 나온 자들은 예수님 앞으로 이끌고 가세요.

그럼 예수님은 이들은 “내 살 중에 살이요 내 뼈 중에 뼈” 라고 하면서 끌어당깁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구원이 뭐냐? 자기가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건 스스로 돌아 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예수에게로 인도하고 예수님이 끌어당겨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는데,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내게로 이끌어 주는 자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요 6:37-39=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하는 것도 예수 안에서 나온 자이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이구요.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은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기 인생이 없어요.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인생만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차압을 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의 모임으로 두셨어요.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도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자들이 모여서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이웃 사랑이에요.



그래서 교회의 머리를 예수님이라고 하고 성도들을 지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모이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면 안돼요

진짜 구원을 받은 성도는 교회를 귀히 여겨요.



교회는 시집과 같아요.

여자가 시집을 가면 남편의 집에서 살아갑니다.

호적도 바뀌어요.

남편의 호적에 등재가 됩니다.



성(姓)도 바뀌어요.

이제는 누구의 아내로 바뀝니다.

이는 남편의 것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를 값을 주고 사오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종속 된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의 아이들을 낳고,

남편의 집을 안주인이 되어서 든든하게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운명을 같이해요.



그리고 아내는 남편과 영광을 함께해요.

그래서 부부는 한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남편의 집인 교회를 잘 섬겨야 해요.

예수님은 이 땅에 자기 피 값으로 교회를 세워 놓으셨어요.

그리고 그 교회에 자기 피로 산 성도들을 이끌어 두셨습니다.



그럼 성도들은 예수님의 신부로서 예수님의 피로 세운 교회를 잘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면서 교회 생활을 경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것은 복음에 합당한 모습이 아니에요.



이것은 마치 엘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의 단을 다 허물어 버린 것과 같아요.

그래서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무너진 열 두 단을 먼저 수축하고 그 위에 제물을 바쳐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 초림 때도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온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무너진 단들을 세우기 위함이에요.

또한 종말에도 두 증인들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일어나는 것도 무너진 신앙의 단들을 수축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습성을 본받지 말라고 하였어요.

또한 서로 열심히 섬기고 사랑하라고 하였어요.

교회는 성도가 쉼을 누려야 하는 안식처이기도 하지만 성도가 섬겨야 하는 일터이기도 합니다.

올바른 복음은 교회를 섬기게 해요.



복음을 올바르게 듣고 믿음에 합한 자들은 교회 생활을 충실히 하게 되어 있어요.

반드시,,

반면에 복음을 사유하고 지식으로 아는 자들은 복음을 말하면서도 반 복음적인 일들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에 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시집을 왔으면 이젠 죽도록 시집을 일으켜 세워가야지 빈둥거리고 놀면 안 되지요.

값을 주고 사 올 때는 빈둥거리고 놀라고 사오지 않았어요.

집안을 일으켜 세우라고 사 왔어요.



시집이 내 집이라고 여기는 아내는 죽도록 일을 하지만,

시집이 내 집이 아니라고 여기는 아내는 집안을 망하도록 방치해 둘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여자 하나 잘 들어오면 가문이 일어나고,

여자 하나 잘못 들어오면 가문이 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불러들인 것은 교회를 잘 세워 가라는 뜻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세요.

나는 지금 신랑의 집인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자인가요?

아니면 무너뜨리는 자인가요?

스스로를 돌아 보세요.



교회의 모임을 귀히 여겨야 해요.

세상에서 성도가 쉴 수 있고 위로 받을 수 있는 곳이 교회뿐이에요.

그러므로 교회에 열심히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 교회이고 우리들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모여서 서로 사랑하며 서로 섬기면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로마서 12장을 보세요.

1장에서 11장까지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교리를 말하고는,

12장부터는 그 교리를 온전히 아는 자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충성된 일꾼으로 섬기게 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야곱의 아내를 어떻게 구하는지 알아봅시다.



이삭이 야곱의 아내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밧단아람에 있는 브두엘의 아들인 라반의 딸 중에 네 아내가 있다고 합니다.

이에 야곱은 이삭의 명대로 라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밧단아람은 “높은 곳에 있는 땅”이라는 뜻이고,

브두엘은 “하나님의 집” 이고,

라반은 “흰 빛”이라는 뜻입니다.



종합하여 보면 하늘에 속한 집에서 살아가는 빛에 거하는 자가 야곱의 신부라는 것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하늘에 속한 교회 안에 있는 빛의 아들들이 예수님의 신부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예수를 상징하고 라헬은 성도를 상징해요.



라헬은 “암 양”이라는 뜻입니다.

“암 양”을 아내라고 한다면 “암 양”의 신랑은 “숫 양”이 되겠지요.

“숫 양”은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한 이삭 대신에 바쳐진 제물이에요.

“숫 양”은 예수님을 상징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신부들을 “암 양” 즉 라헬로 말하는 것입니다.

“암 양”은 “숫 양”의 희생으로 살아난 자들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의 죽음으로 살아난 자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살아난 자들이 라헬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헬을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는 종살이를 한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자기 몸을 버려서 우리를 구원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신부들을 데리러왔습니다.

그 신부들은 아버지께서 이미 창세전에 점지를 해놓았어요.

그리곤 하나님이 예수님 앞으로 끌어다 주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예수를 영접하게 한다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아담 속에서 나왔던 하와를 아담 앞으로 끌고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신부는 첫 눈에 알아보고 서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이걸 한 눈에 뿅 간다고 하는 겁니다.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서로가 낯설지가 않아요.

익숙해요.

이게 사랑이에요.



사랑은 운명적인 것이에요.

그냥 만나서 차 마시고 밥 먹는 그런 사랑 말고,,,

피를 나눈 목숨 같은 사랑 말이에요.

우리가 누구를 사랑 한다는 것은 억지로 되지 않아요.

본능적으로 일어나야 해요.



본능적으로 솟아나는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쫓아가게 되어있어요.

이상하게 끌려가요.

강력한 힘에 이끌리게 되어 있어요.

이 때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그 사람을 향하여 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워요.

보고 싶어요.



목소리만 들어도 행복하고 숨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올라요.

삶에 모든 초점이 그 사람에게로 향하고 있어요.

이런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천상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그 어떤 환경에서도 예수를 따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자기 신부들을 찾으러 보냈어요.

그런데 정작 신부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의 신부들에게 예수를 사랑하는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나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연합이라고 합니다.

예수와 성도는 하나로 연합이 되었어요.

한 몸이에요.

이걸 전쟁용어로 동맹이라고 합니다.



동맹이란? 하나란 뜻입니다.

어느 한 쪽이 공격을 받으면 자동으로 개입을 하여서 지켜내는 것입니다.

한미 동맹이 이와 같아요.

한국이 공격을 받으면 미국은 자동으로 개입을 해서 싸워요.



성도의 구원이 이와 같아요.

예수님과 한 몸으로 연합이 된 동맹 관계에요.

성도는 이 땅에 예수님의 몸으로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의 구원을 끝까지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공격당하는 것을 예수님이 공격당하는 것으로

 간주해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스데반을 죽인 사울에게 나타나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예수의 것으로 존재하고 있어요.

꼬라지가 이래도 우리가 예수님 것이라니까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아났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고 피로 값 주고 산 성도들의 구원을 끝까지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한 나라들은 다 사라졌어요.

애굽에서부터 시작해서 블레셋이나 앗수르나 메데 바사 그리고 헬라와 로마까지 다 사라졌어요.

한 때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은 기세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씨를 말릴 작정으로 핍박을 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다 역사 속에서 사라졌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인동초처럼 끝까지 살아남았어요.



신약에서의 기독교 역사도 마찬가지에요.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하여서 중세 암흑기로부터 해서 지금까지 사단은 수많은 이단들을 일으켜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하였지만 교회는 버젓이 살아남아서 지금 이렇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어요.

이 모두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불 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지켜왔고,

지금도 지키고 계시며,

앞으로도 지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살아남아서 주를 영접할 성도들이 있어요.

그러니 지금 우리가 복음 전하다가 죽는다고 하여도 복음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후대들이 우리들처럼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주가 오실 때까지 말이에요.



한 사람은 가고 다른 한 사람은 또 오고 하면서 복음은 끝 날까지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 땅에 증거자로 남겨 두셨어요.

그래서 성도들은 예수를 대신하여서 세상의 악함을 고발하다가 죽임을 당해야 해요.

교회의 타락을 고발하여야 해요.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될 사람은 예수님의 걸어가신 그 길을 걷게 되어 있어요.

이게 증인이에요.

야곱은 예수님의 길을 선취적으로 산 사람입니

다.

그래서 야곱은 장자의 복을 받자마자 형으로부터 죽임당하는 구조 속으로 밀려들어가서 집에서 쫓겨남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만약에 장자의 축복을 받지 않았다면 형으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았어요.

집에서 쫓겨남을 당하지 않았어요.

미움도 안 받고 집에서 쫓겨남도 없었어요.



모두가 그 장자의 축복 때문에 미움을 받고 집에서 쫓겨남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팥죽으로 팔고서는 야곱을 핍박했나요?

안 했어요.

그러나 야곱이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고 나니까 에서가 핍박을 하는 겁니다.

왜, 장자의 명분을 팔았을 때는 집에서 쫓겨나지도 않고 핍박을 받지 않다가,

장자의 축복을 받으니까 미움을 받고 집에서 쫓겨남을 당하게 되는가요?



이건 마치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와 은혜 아래 있을 때와 같아요.

율법 아래 있을 때는 핍박을 받지 않아요.

율법 아래서는 성령이 그 안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교인이라는 명분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핍박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종에서 아들이 되니까 원수들이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마귀도 난리를 치고,

육에 속한 자들도 난리를 치는 겁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핍박하지 않았어요.

율법 아래 있다가 은혜 아래로 옮겨지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미워하고 핍박을 하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church man(교인)은 공격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 속에서 예수쟁이들은 가만두지 않아요.

어떤 면에서 세상이 우리들을 핍박하지 않으면 우리들의 신앙의 정체성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마귀는 예수쟁이들을 귀신같이 알아봐요.

율법 아래 있는 자와 은혜 아래 있는 자를 알아봐요.

율법 아래 있을 때는 같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핍박하지 않고 형제처럼 지내요.

그러다가 은혜를 받아서 종에서 아들이 되면 가만 두지 않아요.



마귀는 자기편을 정확하게 알아봐요.

자기편은 공격하지 않아요.

그러나 상대편은 가만 두지 않아요.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제자들이 핍박받지 않았어요.

성령이 오고 나자 유대인들이 난리가 난 것입니다.

성령이 오자 성령 받은 자와 성령 받지 않은 자로 구분이 되는 겁니다.

이제 너희와 저희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율법 아래서 예수를 건성 건성으로 믿을 때는 핍박이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를 올바로 믿기 시작하면 핍박이 닥쳐요.

예수쟁이 냄새를 풍기면 공공의 적이 되어요.

성령이 오기 전에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관으로 살았어요.

말은 천국이라고 하여도 세상 것을 쫓아갔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자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하던 것들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술 먹던 사람이 술을 안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에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놀던 술 친구들이 싫어해요.

같이 술 먹고 개구신 짓을 하고 살 때는 괜찮았는데,

예수를 올바로 믿기 시작하면서 저 쪽하고 다르게 살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 쪽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만 못난 자들로 드러나니까 재수 없다고 하면서 괴롭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나쁜 짓을 하면 상대방도 자기와 똑같은 공범으로 몰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요.

내가 나쁜 짓을 하면 남도 나쁜 짓을 하여야 마음이 덜 꺼림칙하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같이 술 먹고 놀던 사람이 술도 안 먹고 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럼 졸지에 자기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워하게 되는 겁니다.



회사 다니다 보면 회식 자리가 많잖아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건성 건성하고 교회도 처 삼촌 묘 벌초 하듯이 듬성 듬성으로 다닐 때는 회식 자리에 가서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먹고 마셨어요.

그러다가 은혜를 받아서 술도 끊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 보려고 합니다.



이럴 때 회식 자리에 가면 술 대신 사이다를 마신다고 하면 그러면 꼭 개중에 비아냥거리면서 술 먹으라고 해서 안 먹는다고 하면 술을 머리에 부어버리는 진상들이 있잖아요.

처음엔 회사 분위기 때문에 부득불 참석을 하다가도 막상 회식 자리에 가면 대면대면하고 분위가 어색해지는 것을 자꾸만 겪다가 보면 이젠 안 가게 됩니다.

그럼 그때부터 따돌림 당해요

이게 바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보는 거예요



예수 안 믿는 자들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자기들과 같은 공범 자리로 끌어들이려고 해요

회식 자리 가서 술을 안 먹으면 안 먹는다고 하고,

먹으면 너 교회 집사라고 하면서 술을 마시느냐고 하면서 비아냥거려요.

예수 믿는 사람은 술 자리에 참석하면 이래 저래 욕 얻어먹어요.

안 마신다고 하면 술 맛 떨어진다고 지랄하고, 마시면 마신다고 지랄해요.

이런 일을 겪다가 보면 나중에는 술 자리에 안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살아 왔어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로 간택을 입고 난 후로는 그때부터 환란이 와요

첫째로는 육체의 소욕대로 살지 못하게 되니까 자기 안에서 환란이 오는 것입니다.

그동안 살던 대로 살지 못하니 환란인 겁니다.



사람은 본성대로 살아야 편해요.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본성대로 살 수가 없어요.

우리 안에 성령이 시어머니처럼 사사건건 간섭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한단 말입니다.

옛날 방식대로 살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옛날 방식대로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옛날처럼 육체의 소욕대로 살면 마음이 찜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성령이 찜찜하게 하니까 싫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마치 여자가 시집살이 하는 것과 같아요.

여자들은 친정을 떠나서 시집을 오지요

친정에서는 내 맘대로 살았는데 시집을 오면 시집의 가풍을 새로 배워가야 하잖아요.

이게 보통 힘든 게 아니에요.

모든 게 낯설잖아요.



그래서 여자들이 시집살이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집살이 한다는 말은 고문당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시집살이도 남편의 사랑만 있으면 이겨내요.

시집간 여자는 남편 사랑만 있으면 이겨내요.

결국 여자는 남편의 품이 안식처인 겁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편에 따라서 팔자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본래의 자라가 바로 남편의 품인 겁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편의 사랑만 있으면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의 자리는 예수그리스도 품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만물이 주께로부터 말미암고 주께로 인하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고향이 주님인 것입니다.

만물이 곧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예수님 안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만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물이 주께로 나와서 주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우리 인생은 우리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곱도 장자의 축복을 받고는 자기 인생을 차압당하는 구조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구조 속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하는 것도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축출 당하는 구조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늘나라 장자로 살아가는 구조 속으로 떠밀려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집으로부터 떠남을 입게 되었어요.

집을 떠나 나그네로 살게 되었어요.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였어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산에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표현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늘나라 장자는 이 땅에서 버림당하는 식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합니다.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영문 밖에 누가 있는가요?

예수님이 계세요,

그래서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장자에요.

진짜 하나님의 장자가 영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 안에서 난 하늘에 장자들은 당연히 진짜 하나님의 장자가 있는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진해서 영문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고 등 떠밀려서 나가요.

어쩔 수 없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처럼 강제적으로 집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에서가 화를 안냈더라면 야곱은 집을 나가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에게 화를 내게 함으로서 야곱을 집에서 쫓아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서가 화를 내는 것조차도 언약을 위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주변에서 누가 우리를 욕 하고 핍박을 한다면 그것은 우연하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켜서 한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 사람들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으로 도망가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닥쳐야 예수님을 찾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좋은 신앙은 항상 많은 고난을 겪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이 바로 이들이에요.

이들은 곧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야곱을 보세요.

형이 화를 내지 않았으면 절대로 집을 떠나가지 않습니다.

야곱이 어떤 자인가요?

엄마 품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치마폭을 잡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장자의 복을 받고 나니까 형이 무서운 겁니다.



형이 화가 나서 죽이겠다고 하니까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겁이 나서 광야로 도망을 쳤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아 어서 오너라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와서 맞이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까?

이는 야곱이 가야 할 곳이 하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야곱아! 내가 너를 하늘로 데려 가려고 집에서 쫓겨나게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집에서 쫓겨난 것은 축복인 것입니다.

축복이 겉으로는 집에서 쫓겨나는 고난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비밀이에요.



이걸 이 시대 우리 이야기로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들을 야곱처럼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편하면 하나님을 안 찾는데 힘들고 아픈 일들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 품으로 도망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가 벧엘이에요.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광야에 하나님의 집에 있어요.

광야란? 이 세상 바깥이라는 뜻이에요.

천국을 상징해요.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다뤄가는 것은 우리 생각과는 역설적으로 다뤄가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놀라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 잘 살게 해주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게 해 주실 수가 있어요.

그러나 우리 몸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을 감당을 못해요.

몸에 노예가 되어요.



우리 몸은 편한 걸 쫓아가요.

집에서 살고자 하지 광야로 나가고자 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멸망으로 가는 문은 크고 그 길은 넓다고 하고 영생으로 가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하다고 하지요.



사람들이 어느 길로 간다고 합니까?

다 넓고 좋은 길을 가고자 한다고 합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신자라고 다르지 않아요.



이 몸뚱이를 가지고 사는 한 이걸 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득불 우리 인생을 광야로 나아가는 구조 속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등 떠밀려서 광야 같은 인생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 겁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주세요.

애굽에서는 만나 주시지 않아요.

애굽은 율법을 상징하고 광야는 은혜를 상징해요.



율법 아래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은혜 아래서만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은혜를 상징하는 광야로 빼내시고는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 육신의 아버지 집은 율법을 상징해요.



그래서 장자의 복을 받자마자 은혜의 동네인 광야로 몰아내신 것입니다.

이는 율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옮겨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집에서 쫓겨나서 광야에 나오니까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겠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서 지켜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어서 야곱을 아내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물가입니다.

우물가에 가니까 라헬이 양 떼에 물을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야곱과 라헬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항상 이렇게 간섭을 하세요.

구원자와 구원 받을 자를 만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는 예수님을 영접할 자들을 예수 앞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구약 마당에 많이 있었어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에 앞서 하나님은 두 천사를 롯에게 보내서 빼내 주셨습니다.

구원자와 구원을 받아야 하는 롯을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여리고 성이 멸망 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여리고에 라합이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두 정탐꾼을 보내서 라합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건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둘씩 파송을 하실 때 그들을 영접할 사람들을 준비하여서 서로 만나게 하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느 동네에 가든지 너희를 영접하는 자들의 집에 들어가서 평안을 빌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제자들과 성도들을 만나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하고 고넬료의 만남도 보세요.

에티오피아 내시와 빌립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만남도 마찬가지에요.

복음 전하는 자와 복음 들을 자를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세요.

복음을 들어야 하는 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자들을 보내서 서로 만나게 하여서 복음 안에서 교제하게 하신 것입니다.

최초의 전도는 하나님이 하셨어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서 천국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국 백성들을 예수님 앞으로 이끌고 가서 만나게 하세요.



예수님은 자기 신부를 찾으러 오셨어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보냈다는 아버지가 신부 감들을 준비해 두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준비해 둔 신부들을 찾아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찾아냄을 당하고 나서 깨닫는 거예요.

아하!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셔서 믿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몫이에요.

아들의 신부는 아들이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그렇게 찾아짐을 당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신앙의 조급함은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택한 백성은 반드시 예수님이 찾아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위하여 우리가 노력하거나 애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퍼질러 놀면서 가만있으란 말이 아니고 구원은 우리의 몫이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기적에 속한 것이에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믿어지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렇게 계획을 하셨어요.

그 일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 기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마다 찾아내는 때가 정해져 있어요.



포도원 품꾼처럼 말이에요.

어떤 사람은 일찍 부르심을 입고 어떤 사람은 늦게 부르심을 입어요.

그런데 우리는 조급해요.

복음도 빨리 알고 싶어요.

복음을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복음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해요.



우리가 어렸을 때 그랬잖아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잖아요.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약이 없나?

약 하나만 먹으면 하루아침에 어른이 되었으면 했잖아요.



만약에 그런 약이 있다고 해서 7살짜리가 약을 먹어서 어른이 되었다고 합시다.

덩치는 어른이 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어른은 덩치가 크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어른은 어른의 사고를 가져야 해요.

말을 듣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모든 것이 어른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어른으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속이 어른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시간 속에서 알맹이가 채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자라가면서 몸도 마음도 생각도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복음을 알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때를 따라서 조금씩 깨닫게 해 주세요.

율법 아래 있다가 은혜 아래로 불러내짐을 당하는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아가는 과정이 있어요.



과실이 봄 여름 가을을 거쳐서 제 모습을 드러내듯이 우리의 신앙의 맛도 많은 세월을 통해서 숙성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루아침에 완성 되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20년 동안 뺑뺑이 돌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야곱의 20년 세월은 자기 꾀가 깨어지는 기간이었어요.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져서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가 되었어요.

지팡이를 의지하고 산 것은 자기 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20년 동안 산전수전을 겪게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야곱은 20년이 지나 벧엘로 돌아 와서 그 동안 모아온 모든 것들을 상수리나무 아래 다 묻어 버렸어요.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20년을 돌고 돌아서 헛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자기 꾀를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깨닫는데 20년이 걸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20년 동안 과외를 시킨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을 위하여 사용되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에요.

오랜 시간을 거쳐서 “나의 나 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여 제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은 예수 처음 믿은 사람들이 하는 고백이 아니에요.



진짜 오랜 세월 부딪치고 깎이고 깎이면서 나오는 고백이에요.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낱낱이 고발하는 일을 하세요.

그래서 우리 입을 막아 버리는 겁니다.

유구무언의 자리로 내려가게 하시는 겁니다.



내가 진짜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 때 비로소 범사가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가 되어요.

좋은 신앙은 범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드린다고 기뻐하지 않아요.

우리가 사는 그 자리가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감사하는 것을 원해요.



이걸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한다고 합니다.

이게 야곱처럼 산전수전을 겪고 난 후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전 언약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왜 산전수전을 겪게 합니까?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게 하고자 함입니다.

야곱은 종말에 자기 인생을 회고하면서 하나님께 이끌려서 살아왔다는 것을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 할 때 지팡이를 의지하고 장자와 차자를 손을 어긋 맡겨서 축복 하는 것으로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언약의 후손들은 야곱처럼 간섭하십니다.

그 간섭하심이 때로는 아픔으로 다가와요.

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서 언약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도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 간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신부들이 누구인지를 잘 알아요.

그래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곧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야곱처럼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 앞에 야곱과 같은 인생이 펼쳐진다고 하여서 놀라지 마시고 도리어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미천한 우리를 예수님의 신부로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신부이기 때문에 버림당하는 것이므로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하루 하루 신랑을 사모하고 다시 오심을 소망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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